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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1일 22시 58분 등록
1. 책 내용중에서....

◎ 서론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實體性)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래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근대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 원리가 곤철되는 체계입니다. 근대사회의 사회론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23 ~ 24)


◎ 2장 : 오래된 시(詩)와 언(言)

사실성과 진정성의 문제는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소위 상품미학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CF가 보여주고 약속하는 이미지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광고 카피는 허구입니다. 진정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이버 세계 역시 허상입니다. 가상공간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감수성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는 본질에 있어서 허구입니다.
(p. 52 ~ 53)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란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시인이 연탄이란 하나의 대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연탄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봅니까? 안도현의 시는 이러한 내용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느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p. 65)


땅을 밟고 있는 확실함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삶의 진정성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발이 땅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보행이 불가능한 상티이며 지향해야 할 확실한 방향을 잃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p.67)


無逸

周公曰 嗚呼 君子 所其無逸
先知稼穡之艱難 乃逸 則知小人之依
相小人 厥父母 勤勞稼穡
厥子 乃不知稼穡之艱難 乃逸 乃諺 旣誕
否則 侮厥父母曰 昔之人 無聞知

무일

군자는 무일(無逸-편한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小人之依)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聞知)이 없다고 한다.
(p. 70)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은 생산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 사람의 고뇌와 무관한 소비 행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재조명 되기를 바랍니다.
(p. 76)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물어오기 때문입니다.
(p. 77)


◎ 3장 : 주역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p. 89)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p. 101)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p. 128)


◎ 4장 : 논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영원히 지나가고 다시 오지 않는 과거는 없습니다. 몇천 년의 시간을 건너 뛰어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고분의 주인공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까맣게 잊었던 과거의 아픔 때문에 다시 고통받기도 하고, 반대로 작은 등불처럼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옛 친구를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나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p.147)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대상물과는 달리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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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知)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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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팔기 위해서' 진력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모든 것을 파는 사회이며 팔리지 않는 것은 가차없이 폐기되고 오로지 팔리는 것에만 몰두한느 사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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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는 지인(知人 - 사람을 아는, 이해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칼같이 읽는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無知)한 사회입니다.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사회일 뿐입니다.
(p.174 ~ 175)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고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p.198)


◎ 5장 : 맹자

오늘날 행복의 조건 즉 낙(樂)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독락(獨樂)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 무심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일반적 정서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닮는 것은 피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에 가치를 두려고 하지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개인적 정서의 만족을 낙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p. 219)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p. 232)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식품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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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담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p. 237)

맹자가 사단(四端)의 하니로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치(恥)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0분을 초과하지 않는 일시적 군집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피차 배려하지 않습니다. 소매치기나 폭행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잠시만 지나고 나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p. 239)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p. 242)


◎ 6장 : 노자

가장 중요한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 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p. 301)


◎ 7장 : 장자

(장자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이 장자에게 장례를 후히 치를 것을 권한다)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의 시신을 파먹을까 봐 염려됩니다."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 것이고, 땅 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될 것이다. (장례를 후히 지내는 것은) 한쪽 것을 빼앗아 다른 쪽에다 주어 편을 드는 것일 뿐이다. 인지(人知)라는 불공평한 측도로 사물을 공평하게 하려고 한들 그것은 결코 진정한 공평이 될 수 없는 것이다."
(p. 354)


◎ 8장 : 묵자의 겨애와 번전 평화

전쟁은 수천수만의 사람을 살인하는 행위이며, 수많은 사람의 생업을 빼앗고, 불행의 구렁으로 떨어트리는 최대의 죄악입니다. 단 한 줌의 의로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따라서 비공, 즉 침략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사상이지요. 그런점에서 반전 평화론이야말로 전국시대 최고의 사상이며 최상의 윤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통일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전쟁 방식에 의한 정의의 실현이 공공연히 선언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전쟁을 용인하는 한 그것이 어떠한 논리로 치장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기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쁜 평화가 없듯이 좋은 전쟁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p. 379)

묵자가 반전 평화론을 전개하면서 부딪친 가장 힘든 장애가 당시 만연하고 있던 사회적 관념이었습니다. 부국강병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쟁이라는 패권 시대의 관념이 최대의 장애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쟁이란 국위를 선양하고 백성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전쟁이란 비록 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단히 이루운 것이라는 지배 계층의 사고가 피지배 계층의 의식에까지 깊숙이 침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p. 387)

묵자가 죽은 후에도 200여 년 동안 여전히 세력을 떨쳤지만 그 후 2천 년이라는 긴 망각의 시대를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묵가는 좌파 사상과 좌파 운동이 그 이후 장구한 역사 속에서 겪어 나갈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역사의 초기에 미리 보여주 역설적인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400)


◎ 9 :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순자의 성악설과 함께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가 있습니다. 맹자의 성선설이든 순자의 성악설이든 우리는 본성론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선악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로 자연을 재안하는, 이른바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이 천성과 천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개념인 것과 마찬가지로, 순자의 성악설은 그의 사회론을 전개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 414)


◎ 10장 : 법가와 천하 통일

문제는 세계화 논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실물적 관점이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 투자된 외국 자본은 우리 자본이라는 논리가 그 전형입니다. 그러한 논리라면 해외에 투자된 자본은 우리 자본이 아닌 것이지요.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올지요. 우리 자본이든 외국 자본이든 자본은 결국 우리 편이 아닌 것이지요. 실물적 관점이 중요하다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대부분의 제조업은 해외로 이전되고 제조업의 국내 기반은 공동화 될 것입니다. 국제 금융자본이 국내로 유입된다고 하더라도 이 국제 금융자본이 투기 목적의 단기자본이라면 그것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p. 450 ~ 451)


◎ 11장 : 강의를 마치며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p. 509 ~ 510)



2. 소고

현대 사회와 동양사. 어찌 보면 서로 나란히 나열해 놓기에 어색한 단어들인지도 모른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현대 사회에서 동양고전이 갖는 의의에 대해 얘기한다면 열에 아홉은 초장에 얘기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시할 것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이고....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동양고전이 갖는 의의는 무엇일까에 대해 짧게 나마 생각을 정리해 본다.
책을 읽기 전의 개인적인 생각을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현실의 변화에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과거 유학자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21세기가 시작된 마당에 구한말 근대화를 가로 막았던 유학 사상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었다. 그러한 생각을 바꿔야 할 필요성조차 느낄 이유가 없었다. 과거에나 유효했던 전통일 뿐, 현 사회에서는 오로지 극복 되어야만 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몇년 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출간 됐었다. 당시 책 내용을 대충 살펴보고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했다. 현실에서 이미 낡아 버린 사상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책 내용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저자의 의견에 동의 했었던 사람들의 생각과 내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을 읽고 난 후, 이전의 그러한 태도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한 때(?)나마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밑거름을 제공했던 사상에 대해 오만불손 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분에 넘치는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이 느끼는 소외감, 무력감을 극복하거나 없애기 위한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현 사회의 구성원들이 왜 그리도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지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동양고전 사상을 제시한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상의 혁명'을 주장하는 듯하다.

책을 읽고난 후의 소감을 적다 보니 그 범위가 너무 넓어지는 듯하여 나에게로 국한해서 정리하고자 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동양고전은 예전에나 유효했던, 혹은 남에게 고상하게 보이고 싶어하는 비현실적인 사람들에게나 의미 있는 사상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념이었다. 적어도 그러한 생각을 바꿀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이전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력이 0.5였다면 이제 0.8 정도는 된 것일까? 어쨌든 이전보다 시력이 좀 더 좋아지기는 했을 것이다. 동양고전이라는 새로운 안경을 썼기에.... 앞으로 이 새로운 안경을 내 눈에 잘 맞게 교정하여 이전에 내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언가를 찾았으면 하고 바래본다.


3. 내가 저자였다면....

책을 읽으면서 불편한 마음이 끊이질 않았다. 현 시대를 나름대로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사람에게 이 세상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뭔가 잘못된 것이 없진 않지만, 대충 눈 감아 버리고 지나가도 별탈이 없을 것 같은데, 저자는 시종 일관 그런 불편한 메시지를 전한다.

현실을 직시한 그런 메시지가 거짓이 아니라면 잘못 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시종 일관 비관적이랄까...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싯점에서 그러한 메시지, 더구나 구체적인 대안이 없는 그런 메시지는 상당히 불편하다.
대충 읽어 본 바에 의하면 저자는 '사상의 혁명'을 강조한다. 어느 정도 동의하기는 하지만, 평범한 소시민의 입장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는 일단 그 필요성은 차치해 두고라도 거부감부터 갖게 마련이다. 의견에 공감하면서도 선뜻 행동에 옮기기를 꺼리게 된다. 이러한 행동이 비겁한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동양고전에 대한 강의이지만 주된 내용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을 읽으면서 동양사상이 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면 과연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짧게나마 상상을 해봤다. 다소 비약적인 얘기이고 역사에 대한 단편적인 시각이겠지만 근세에 중국과 조선이 외세(서구세력)의 침략에 무기력하게 당하는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러한 반성이 없이 현 체제를 비판하기에 그 설득력이 다소 떨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아울러 어떤 식으로든 유가 사상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지금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지 언급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물론 그것은 저자의 마음일지 모르지만 '나의 동야고전 독법'이라는 부제를 본다면 그러한 아쉬움이 억지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책에서 언급한 동양 고전은 말이 동양이지 결국은 중국 사상에 관한 이야기다.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강대국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여전히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나는 동양고전에 대해 잘 모른다. 털끝만큼도 모른다. 앞으로 동양고전 사상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기에 아무 말이나 막 지껄여 본다. 종국적으로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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