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뚱냥이
  • 조회 수 1492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17년 6월 5일 01시 08분 등록

11기 연구원 장성한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1. 저자에 대하여

 

2016 1 15일 오후 9 30분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가 서울 목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타계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성공회대학교 후배 동료인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지난 2006년 신 교수의 정년퇴임을 맞아 그의 삶을 회고하며 쓴 글을 '추모의 글'로 싣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신용복 교수와 함께 성공회 학파로 불리는 역사학자 임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 어느새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게 될 정도로 숨가쁘게 달려온 세월, 사색이니 성찰이니 하는 것은 모두 사치스러운 장식물이었는지 모른다. 군사독재 정권이 앞을 내다보고 역할분담을 시켜 놓은 것 이라고나 해둘까? 밖에서 쫓기듯이 바쁘게 사는 동안 바깥사람들이 꿈꾸지 못할 차분한 사색과 깊은 성찰을 바깥사람 몫까지 대신해야 했던 분이 있다. 1988년 세상이 조금 좋아진 뒤, <평화신문>에 그의 사색의 편린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징역은 나오는 맛에 산다는 말을 위로로 건네기에는 너무 긴 20년 세월을 뒤로하고서. 20대의 청년 시절인 1968년 생일에 잡혀간 그는 꼭 20년 세월을 보내고 1988년 생일날 석방됐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또 흘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우리에게 친근한 신영복 교수가 2006년 정년을 맞는다.

→ 20년이란 세월의 징역생활. 나에게 사람으로서 기억이 남아있는 나이가 8살이니 20년을 더한 28살까지의 세월. 초등학교 보내야 하고,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1년간의 재수, 4년간의 대학생활, 그리고 군대를 제대한 28. 결국 내 인생을 다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의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면 개인적으로 나는 자신이 없다.

 

장래 희망은 조선인 총독? 

 

선생님과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나는 동료 교수들과 더불어 조그만 기념 문집을 만들기로 했는데, 거기서 한국 현대사 속에서 선생님의 삶을 정리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자주 뵙는 사이에 정색하고 마주 앉아 인터뷰하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자리를 마련했다. 선생님께서 기억하기 싫어하는 부분도 캐물어야 하는 곤란한 순간도 있었지만, 선생님께서 살아내신 한국 현대사를 가까이서 듣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최근 한명숙 총리의 지명을 계기로 그의 부군인 박성준 교수의 전력을 놓고 말이 많았는데,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 사건에서 박성준 교수의 '상부선'이기도 했다.

 

신영복은 1941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밀양이지만, 출생지는 의령이었다. 아버지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경상북도에서 교사로 근무했는데, 일본인 교장의 조선 학생 차별에 항의하다가 파면됐다. 몇 년 지난 뒤에 같은 경상북도는 안 되고 도를 달리해 경상남도에 정식 '훈도'가 아니라 '촉탁'으로 복직시켜 주더란다. 아버지께서 교사 한 명뿐인 간이학교의 '교장'으로 의령에서 근무하실 때 신영복은 교장 사택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부산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어린 신영복은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밀양 등지의 사택에서 자라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에는 유열, 이극로 등 저명한 한글학자들- 모두 월북했다- 도 드나드셨는데, 어느 분인지 모르지만, 아버지 친구들은 꼬마 신영복에게 장래희망을 물으셨다. 처음에야 이럴 때 아이들은 자기 희망을 솔직하게 얘기하지만, 조금 지나면 어른들이 바라는 '정답'을 말하게 되는 법. 일제 말기의 암울한 시절, 그가 가진 희망은 일본 총독이 되어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일본 총독이 뭐냐고? 조선이 독립되고 일본을 식민지로 삼게 된다면 일본을 다스리는 조선인 총독이 된다는 얘기다. 해직 교사였던 아버지, 그리고 그의 민족주의자 친구들의 장난기 어린 조기 '의식화' 교육을 받으며 신영복은 세상과 만나기 시작했다.

아버지 및 아버지의 친구분들과 시대적 배경이 어린 신영복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겠군

 

다섯 살 꼬마 신영복의 머리에도 해방의 그날은 기억이 또렷하다. 비가 엄청나게 온 그날, 동네 청년들은 어린 신영복을 집에서 조금 떨어진 교장 사택으로 데려가 그곳을 지키게 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 교장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집 안은 책상 서랍도 다 열려 있는 등 급히 떠난 흔적이 역력했다. 동네 청년들이 다섯 살 난 어린 신영복에게 왜 일본인 교장의 텅 빈 사택을 지키게 했는지는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아무튼 그는 적산의 접수와 보호라는 중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전쟁은 그가 열 살 때 터졌다. 그러나 밀양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지 않아 '인공' 치하를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전쟁의 기억은 끔찍했다. 어느 날 서북청년단원들은 좌익으로 몰린 청년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벤 뒤 철사로 귀를 꿰어 영남루 부근의 다리 양쪽으로 가로등마다 묶어 놓았다는 것이다. 20여 개의 머리가 걸려 있다 보니, 여학생들은 겁에 질려 다리를 못 건너고 우는데, 어린 남학생들은 그래도 다리를 건너갔다고 한다. 신영복은 무서움 속에서도 머리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폈다. 실제로 자세히 바라보니, 피가 다 빠져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은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어떻게 10살의 나이에 베어진 머리와 꿰어진 귀를 볼 수 가 있었던 거지?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을 텐데어렸을 때부터 남달랐군.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 

 

신영복이 베어진 머리를 유심히 살핀 까닭은 거기에 누군가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신영복 집에 모였던 수많은 청년들, 그 중에 특히 기억나는 사람이 있었다. 동네 토박이는 아니고, 떠돌이로 다니다 동네로 흘러 들어와 궂은일 해주고 밥 얻어먹던 청년이었다. 토끼도 잘 잡고 팽이도 잘 만들어주던 청년, 그러나 늘 천대받던 그가 기세등등 해진 모습을 보고 세상이 바뀐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이 들어오고 사라졌던 친일파들이 다시 나타난 뒤로, 신영복은 그 청년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앞장서서 친일파 집을 때려부수고, 달아난 친일파가 미군을 앞세워 돌아오면서 사라졌던 청년, 어린 마음에 사라졌던 그가 꼭 거기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너무 어려 해방과 전쟁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기억만큼은 또렷이 그의 잠재의식 속에 각인돼 버렸다.

대한민국 현대사는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청산해야 될 친일파가 보수집단의 중심이 되어 지금까지도 청산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밀양군 교육감이 되신 아버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그는 자형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부산상고로 진학하게 되었다. 시인으로 5·16 군사반란 뒤 교원노조 운동으로 구속된 살뫼 김태홍 선생이 당시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의 권유로 한국은행 면접시험 대신 서울상대에 시험을 쳐 합격한 것이 1959년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지 꼭 1년 만에 4·19가 일어났다. 그것은 엄청난 감동이자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부정선거 다시 해라'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정도에 약간의 민족주의적 감정이 가미된 정도였지만, 세상이 바뀐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큰 감동이었다. 4·19에서 5·16까지 비록 1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푸른 하늘을 보았다는 것은, 그것을 직접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은 지금까지 그를 지탱시켜준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4·19는 그야말로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이었다. 비록 독일어 원어를 교재로 썼지만, <자본론> 강독이 정식 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했고, 학생들은 '공산당 선언' 같은 문건을 번역해서 세미나를 시작했다.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지식 사회에 새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5·16이 왔다. 처음에는 지주 아들 윤보선과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 박정희를 대비시키기도 하고,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이야기하며 기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바 혁명재판소 만들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등을 사형시키는 등 사태 진전을 보니 박정희는 영락없이 "권총 찬 이승만"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배후에는 미국이라는 외세가 있었다. 그 거대한 힘이 4·19를 누르고 있었다. 4·19의 감동 속에 총알은 우리의 이마를 뚫고 지나갔다고 진보적 청년들은 생각했지만, 5·16의 현실 속에서 그들은 다시 깨달았다. 총알은 모자만 뚫고 지나갔다고! 5·16이 무너뜨린 것은 무능한 장면 정권만이 아니었다. 5·16이 진정 짓밟은 것은 4·19 이후 돋아나기 시작한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 각 부문 운동의 새싹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변혁적 운동의 복원이라는 의미의 4·19가 군부세력에 의해 짓밟힌 것이 5·16이었던 것이다. 

 

1·2학년 때까지 가정교사 하느라 학교 공부만 따라가기 바빴던 신영복은 5·16이 일어난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후배들의 세미나 지도를 시작하는 등 학생운동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군사정권이 들어선 현실에서 장기적인 학생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서울 상대에 본격적인 독서 동아리를 만들게 된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이나 '신민주주의론' 같은 논문도 번역해서 대학노트에 베껴 적어 (복사기와 컴퓨터가 없었던 시절!) 돌려 읽고,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도 영문판을 구해 대학노트 4권에 깨알같이 번역해서 돌려 읽곤 했는데, 나중에 통혁당 사건이 터지면서 모두 중앙정보부에 압수됐다.

 

통혁당 간부들은 만난 적도 없었는데 

 

3학년 이후, 거의 매일같이 세미나의 연속이었다. 상대 학생들로 조직된 경우회, CCC란 종교단체 산하의 경제복지회, 정읍 출신들이 모인 동학연구회 등 나중에 통혁당 사건 때 연루된 동아리들 외에도, 고려대·연세대의 학생 동아리 세미나에도 자주 가서 지도했는데, 이런 모임이 예닐곱 개가 되다 보니, 각각이 일주일에 한 번씩만 있어도 매일 불려 다니느라 정신 없는 나날을 보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는 주로 다른 대학이나 연합 동아리 지도에 주력했다. 당시 경제과는 150명이나 되었지만, 대학원에는 지금과 달라서 3명만이 진학했다. 그런데 같이 입학한 동기들 중 1명은 ROTC, 다른 1명은 해군장교로 입대해버려 대학원에는 혼자만 남았다. 경제과 대학원의 한 해 위에는 안병직과 사회학과를 졸업한 신용하가 있어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 뉴라이트의 깃발을 내세운 안병직은 그때는 아주 좌파적인 입장이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숙명여대에 강사로 나가던 시절, 아마 1965 2학기나 1966년 초에 <청맥>이라는 잡지의 예비 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안병직 등 선배들을 따라 나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의 김질락을 만나게 되었다. 김질락은 신영복보다는 67년 선배였다. <청맥>은 통혁당 핵심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인데, 반미적인 논설이 종종 실렸다. 당시 신영복은 대학원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 강사이다 보니 잡지의 필자 풀(Pool) 성격인 새문화연구회에서는 막내인지라, 적극적인 역할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

 

김질락과 그의 후배 이진영 등은 신영복이 학생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접근했고, 어느 날 김질락이 정색하고 혁명을 지지하느냐고 물어왔고, 신영복이 그렇다고 하자 그날부터 김질락, 이진영과는 따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된 모임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이 사형됐으니,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은 살아 있는 사건 관련자 중에서 가장 핵심 인물이 된다. 그런데 나도 이번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알았지만, 신영복은 최고 책임자로 발표된 김종태나 조국해방전선 책임자로 발표된 이문규 등 핵심 간부들은 사건이 날 때까지 만나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이문규야 학생운동 선배라서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지만, 김종태에 대해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영복이 김질락과 만난 횟수는 <청맥> 잡지사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모인 것까지 합쳐 전부 10번 안팎일 것이고, 김질락의 집에서 이진영과 함께 따로 만난 것은 5번 정도라 하니 참으로 비싼 징역을 산 셈이다.

 

자술서 자체가 고문이었다 

 

그런데도 공안당국의 기록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 나온 통혁당 관련 일부 서적에는 신영복이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과 함께 통혁당의 강령을 정하는 등 당의 핵심 성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온다. 신영복은 민족해방전선이 조직한 산하단체라 발표된 경제복지회나 경우회, 동학혁명회 등은 각각 역사가 오랜 자생적인 단체로서 자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을 뿐이고, 김질락 등과의 모임에서 학생운동 동향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야기했을 뿐인데, 사건에 연루돼 고생하게 되었다면서 미안해했다. 중앙정보부가 엄청나게 부풀린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런 측면도 분명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김질락 등이 북에 산하단체라 보고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남과 북 관료집단의 성과주의와 자기 활동을 과장해서 보고한 통혁당 지도부의 합작으로 사건이 확대 됐다고나 할까? 북과의 관련성을 부풀리려는 공안당국이나, 통혁당을 북의 지도성이 관철된 조직으로 그리려는 진보 진영 일각이 각각 다른 입장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통혁당 사건에서 핵심은 북과의 관련 문제이다. 신영복은 통혁당에 대해서는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고 중앙정보부에 가서야 들었다고 했다. 또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조직의 명칭은 명시적으로 합의한 적은 없지만, 분단된 베트남을 보면서 그런 성격의 조직이어야 한다는 논의는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라고 발표된 김질락, 이진영과의 논의 과정에서 이미 남과 북이 질적으로 다른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일국일당주의를 취해 북이 중앙이 되고 남에 지역당을 건설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남쪽에 자생적인 운동의 구심이 서야 한다고 합의했다고 말했다. 김질락이 김종태나 이문규 등과는, 또는 북에 가서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민족해방전선 모임에서는 북의 직·간접적인 지도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의한 바도 없으며, 북과의 관계는 대등한 혁명의 구심 정도로 이야기됐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의 수사는 혹독했다. 이미 김질락이 다 불은 터라, 저들은 신영복이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 현역 장교로 근무하고 있는 신영복이 북에 갔다올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저들은 북에 갔다온 날짜를 대라고 구타와 전기고문을 하여 까무러치기도 했다. 고문도 힘들었지만, 조사 자체가 고문이기도 했다. 청년기의 고민과 방황이 어린 수많은 만남과 토론, 그리고 서로 빌려주고 빌려 보았던 수많은 책들은 몇십 장의 자술서와 몇십 장의 조서와 몇 줄의 법률용어에 의해 온통 조직적인 관계로 규정됐다. 지난 수년간 자신이 행한 활동을 담은 것이건만 수사 기록은 외국어보다도 낯설었다. '이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복잡한 사상과 의식이 규정되고 단죄되는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원숭이 똥구멍' 노래가 생각났다고 한다. 신영복이 수사를 받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도 친구들과 많이 외우며 놀았던 노래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빨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수사기관의 논리학을 지배하는 것은 흑백논리도 삼단논법도 아니었다. 무엇이든 갖다 붙이면 척 붙어버리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수사기관의 연상법 놀이여!

 

사형 구형하면서도 "걱정 하지 말라" 

 

당시 육사교관으로 현역 장교 신분이었던 신영복은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이문규를 구출하러 북이 파견한 공작선의 암호를 해독해 격침시키면서 2명을 생포했는데, 이들도 통혁당 관련자로 사형을 언도하는 등 이 사건의 크기를 부풀리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 보니 직접 북에 내왕한 것은 아니지만,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 격으로 위치지은 신영복에게도 사형을 선고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사 당시에는 주로 불고지죄, 즉 김질락이 북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죄가 중심이었던 것이 기소 단계에서는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가 중심이 되었고, 1심과 2심에서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사형이 선고됐다. 재미있는 것은 최고형이 징역 2년 이상의 유기징역형인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죄로 기소된 사람에게 군사재판에서 기소 죄목이 아닌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적용해 사형을 구형하고 선고했다는 것이다. 형사소송법의 기본원칙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기에 대법원에서는 당연히 파기환송. 군 법무사들이 사형을 구형하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사형을 구형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놀라운 인도주의와 여유!-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다. 파기환송심에서 군검찰은 죄목을 구성죄로 바꾸는 공소장 변경 조치를 취했고. 재판부는 정상을 참작해 최고형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학생 동아리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나쁜 대법원 판례를 남기는 것이 좋지 않다는 변호사의 권유에 따라 상고는 포기했다. 통혁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실제 통혁당은 그가 투옥된 이후에 조직된 것으로 북에서 발표됐다- 김질락 이외에는 통혁당 지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대표적인 통혁당 지도간부로 인식되는 무기수 신영복은 이렇게 탄생했다. 상고포기를 하여 무기징역이 확정된 것은 1970 55일 어린이날이었다. 재판을 죽 지켜본 호송 헌병의 호의로 남산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무기징역의 기나긴 터널로 들어가게 된다. 사형수일 때는 무기만 되어도 원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무기징역은 어떤 의미에서 사형보다 더 암담했다.

 

사형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죽여버리겠다는 법적 결정이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의연해질 수 있을까? 뒤에 민청학련 사건 당시 서울상대생이던 김병곤이 사형을 선고받고 "영광입니다"라고 되받아 전설을 남겼지만, 그 받아침은 진짜로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형을 구형받은 김대중도 선고의 순간에 최대한 의연한 척하려 했지만, 눈은 판결문을 읽는 판사의 입으로 가더란다.

 

무기징역이라 하려면 입이 삐죽 앞으로 나오고, 사형이라 말하려면 입이 옆으로 찢어지는데, 그 짧은 순간에 입이 앞으로 삐죽 튀어나오길 간절히 바라게 되더라는 것이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잊혀지지 않는 명대사 "나 떨고 있니?"처럼, 아무리 사상범이라 한들 죽음 앞에선 떨리기 마련이 아닐까? 20대의 청년 신영복은 1심과 2심인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각각 구형과 선고, 그리고 군법회의의 형 확정 절차인 관할관 확인을 거치며 모두 여섯 번이나 자신의 이름에 사형이라는 무거운 꼬리표가 붙는 것을 들어야 했다.

 

국민학생 친구들을 위해 글을 쓰다 

 

처음에는 사형이 근거 없다고 생각했지만, ', 이 정권은 충분히 사형을 집행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심각하게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실제로 그가 남한산성의 육군교도소에 갇혀 있는 1년 반 동안 일상을 같이 보내던 여섯 명이 차례로 사형 집행을 당했다고 한다. 그들의 죄목은 대개 상관 살인인데, 신영복은 1960년대의 억압적인 병영문화가 낳은 가슴 시린 비극을 연속적으로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던 것이다.

 

사형이 확정되는 순간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너무 짧은 삶으로 끝나고 만다는 애석함과 쓸쓸함이 밀려왔다. 당시의 젊은 언어로는 죽음은 삶의 완성이기에 논리적으로 사형이 삶의 단절로 귀결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 당시 혁명적 의식에 투철했던 청년들의 낭만적인 정서는 척박한 식민지 땅에 태어나 군사정권에 항거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은 식민지 청년들 앞에 놓인 삶의 당연한 한 형태라고 합리화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접견을 마치고 돌아가는 노부모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신영복은 자신의 죽음이 자신에게야 삶의 완성일 수 있지만, 부모님께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상실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죽음이란 것도 결코 한 개인의 죽음일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에는 도대체 어떤 생각이 들까? 신영복은 지금 생각하면 의외지만, 혹시 돈 빌리고 안 갚은 것은 없는지, 약속해놓고 지키지 못한 것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아직 사형수였던 시절에 쓴 글에 '청구회 추억'이란 것이 있다. 감옥에서 휴지에 적어서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헌병의 도움으로 집으로 전해진 이 글은, 신영복이 우연한 기회에 사귀어 지속적으로 만나게 된 당시 국민학생이던 꼬마 친구들을 위해서 쓴 것이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 장충체육관 앞에서 2년 넘게 만나던 꼬마 친구들은 왜 신영복이 갑자기 자기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지 모를 것이 아닌가? 

 

신영복은 사건 당시 현역 육군 중위였기 때문에 그의 사형집행 형식은 교수형이 아니라 총살형이었다. 교수형이 아니라 총살형이란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거리였다. 프랑스혁명의 선봉에 섰다가 옥사한 대수학자 콩도르세는 '찬란한 햇빛 아래 죽는 것'을 그렇게 바랐다지 않는가. 모든 사형수가 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와닿는 신영복의 사색은 총살형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했던 처연한 낭만과 갈라진 현대사의 처절한 아픔이 안겨준 젊은 날의 임사체험(臨死體驗)의 결과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대법원에서 상고 포기로 형이 확정된 뒤 신영복은 1970 9월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안양교도소에서 전향서에 도장을 찍었다. 신영복은 당시에는 전향 문제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육군교도소에서는 전향 문제에 대한 권유도 없었고, 그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다. 당시 안양에는 사상범이라고는 신영복 한 사람뿐이었다. 전향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 선배도 없었다. 교도소 당국은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도 이미 다 전향을 했다며 도장을 찍으라고 했고, 가족들도 통혁당 사건의 다른 관련자들도 전향서에 날인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강력히 권하였다. 그래서 인적사항을 적고, 북한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살아가겠다는 간단한 내용으로 '전향의 변'란을 메우는 것으로 전향서를 작성했다.

 

 <엽서>에는 왜 고친 자국이 없는가 

 

신영복이 전향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뒤, 비전향 장기수들을 보게 되고, 특히 박정희 정권의 강제전향 공작이 본격화될 무렵이었다. 그는 한 사람이 자기의 사상을 끝까지 견지하는 일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으면서, 반성도 하고, 고민도 하고, 자기 합리화도 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이 자신의 사상을 끝까지 견지한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굉장히 쉽고 편의적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그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다고 해도 자신은 결국 전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가 조직성원이었다면 좀더 심각하게 고민했을지 모르나, 그는 조선노동당원도 아니고, 통혁당원도 아니었다. 빈농 출신으로 정치 일꾼이 되어 온몸으로 사회주의 세상의 짜릿함을 맛본 적이 있는 남파 공작원들, 게다가 그들은 북에 가족을 두고 있었다. 

 

신영복이 20년 감옥 생활에서 꼬박 15년을 보낸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것은 1971 2월이었다. 안양과는 달리 대전은 한국의 모스크바라 불릴 만큼 좌익 사상범이 많았다. 그는 이미 전향서를 쓴 상태에서 대전으로 이감왔기 때문에 특별사동에 수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도소 당국은 전향했지만 통혁당 사건 무기수인 신영복을 바로 공장에 출역시키지 않았다. 1년 정도 독방과 혼거를 거듭하면서 관찰한 뒤에야 교도소 당국은 출역을 허락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인쇄본으로 읽을 때는 그런 느낌을 갖기 어렵지만,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그대로 영인한 <엽서>를 보다 보면 고친 자국이 거의 없다는 점에 문뜩 깜짝 놀라게 된다.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도 다 사연이 있었다. 20대 후반의 지식청년 신영복은 감옥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충격적인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그냥 두면 다 잊어버릴 것 같은 이 경험을 어딘가 기록해둬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분단된 조국의 감옥에서 그런 생각을 담아둘 수 있게 유일하게 허용된 공간은 한 달에 한 번 보내는 엽서였다. 밖으로 보낸 엽서가 모여 있으면, 언젠가는 내가 다시 읽어보리라 하는 생각에서 감옥 시절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의 하나로 엽서 쓰기가 시작된 것이다. 주제를 하나 잡으면 한 달 내내 감방 안에서 면벽 명상을 통해 생각을 거듭하고 미리 머릿속에서 교정까지 다 봐두었다가 엽서를 쓰는 날, 머릿속에 완성된 문장 형태로 갖고 있던 것을 토해냈다고 한다. 

 

면벽 명상이나 독서를 하기에는 독방이 좋을 것 같지만, 20년 감옥 생활 중 5년여를 독방에서 보낸 신영복에 따르면 독방의 징역살이가 더 힘들고 때로 정신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혼자 있으면 언어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방을 왔다갔다 하며 혼잣말을 하는데, 그러면 교도관은 통방하는 줄 알고 앉으라고 야단을 친다. 혼자서 이야기하다 보면 종종 이상한 생각에 빠지기도 하는데,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서 후딱 그쳤다가, 다시 혼자서 말을 하기를 반복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사람이란 역시 같이 대화하고 부대끼며 사는 존재였던 것이다.

 

장기수들의 역사와 만나다 

 

신영복이 파기환송 후 다시 재심을 받고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을 때, 친구나 후배들 중에 이미 대전에 와 있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징역살이가 인생에 있어서 조금도 마이너스가 되지 않도록 밤잠 줄여가며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감방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공장에 출역하는 것보다는 오로지 독서에 열중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교도소 재소자란 물론 우리 사회의 하층민이긴 하지만, 룸펜적 성격을 벗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이들과 접촉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영복은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신영복이 보기에도 재소자의 대부분이 룸펜적 성격이 강해서 사회 변혁 의지라든가, 노동계급으로서의 건강한 자부심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들도 역시 민중이었고,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의 억압구조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신영복은 그들 한복판으로 들어가 그들과 맨살을 맞대는 접촉을 하면서 지식청년이었던 자신이 가졌던 관념성에 대해 통절한 반성을 하게 된다.

 

교도소에서 사람을 만나고 같이 지낸다는 것은 바깥의 도시에서 잠깐 악수하고 헤어지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온몸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징역 생활에서 도덕적 가식을 부리거나 무언가를 숨기고 감추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정직한 알몸 그대로가 될 수밖에 없다. 한방에서 대개 몇 년을 같이 보내며 서로의 삶과 살아온 내력을 공유하면서 개인에 대한 이해를 넘어,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인식하게 되는 또 다른 사회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하, 목수가 집을 그릴 때는 지붕부터 그리는 게 아니라 일하는 순서대로 주춧돌부터 그리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은 책이나 교실에서 인식했던 것과는 다른 펄펄 뛰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했다.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학교 사택에서 쭉 자라고, 책을 통해 정서를 키워온 사람으로서, 그런 자신의 인식의 틀이 깨어지는 것은 감옥 초년에 그가 겪은 가장 충격적인 일이었다. 

 

신영복이 육군교도소 시절이나 독방에서만 있은 안양 시절에는 잘 몰랐다가 대전에 와서 새삼 발견한 사실은 교도소에 노인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이었다. 공장에서건 사방에서건 그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신영복은 개인의 성격과 범죄를 연결시켜왔던 그때까지의 단순한 논리를 반성했다. 그들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관해서 이야기 듣노라면 그 혹독한 상황에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사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범죄가 개인의 성향보다는 사회나 시대의 반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영복은 밑바닥 인생들과 맨몸으로 부대낀 오랜 감옥 생활을 통해 지식청년으로서의 관념성을 깨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다. 감옥은 청년 신영복에게 여기에 더해 어떤 새로운 역사의식을 일깨워주었다. 1970년대 초반은 아직 해방으로부터 채 30년이 지나지 않은 시절이었다. 조국이 찢어진 상황에서 전쟁의 격동에 몸을 내던졌던 사람들, 또는 그 격랑에 휘말린 사람들 중에 아직 감옥 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물론 50 60대를 넘긴 노년이었다. 그들 중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부역사건으로 들어온 사람도 있었고 빨치산 출신도 있었다. 빨치산에도 한국전쟁 중에 입산한 '신빨치'만이 아니라 전쟁 발발 이전에 입산했던 '구빨치'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또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 안내원들도 있었다. 신영복은 해방 전후의 분단 현실을 온몸으로 담아내고 있는 분들과 일상을 같이했다. 막연하게 책에서 보았던 한국 근현대사의 사람들을 만나 이들에게서 생생한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노인들로서는 20대의 명석한 신영복에게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신영복은 마치 체험하듯 역사를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생환된 역사'였다. 화석에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듯한 그 느낌!

자신의 불행과 시련을 발판삼아 인간적 성장을 이루는 것! 새로운 나로 살아가는 것!

 

서구 근대를 뛰어넘는 관계론 구상 

 

신영복은 그 시절 한학의 대가인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 선생과 4년간 한방에서 지내는 행운을 얻게 된다. 박치음이 <소쩍새>란 노래를 헌정한 노촌 선생은 참 특이한 분이시다. 명문 연안 이씨 집안의 종손으로 조선 봉건사회에 태어나 일제 식민지 사회를 거쳐 전쟁을 겪으며 월북해, 사회주의 사회를 몸소 겪고 분단의 현실 속에서 남파되고, 일제 때 그를 체포했던 형사가 그를 알아보는 바람에 다시 체포돼 20여 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그리고 고도로 발달한 80년대의 자본주의 사회로 튕겨져나온 분이 이구영 선생이시다. 한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대개 보수적이기 쉽지만 노촌 선생은 드물게도 더불어 고르게 잘사는 대동의 꿈을 간직한 채 사회주의적 사고를 체화하셨고, 또 고전에 대해 진보적 해석을 내리셨다.

 

신영복이 동양 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노촌선생을 만나기 이전부터였다. 60년대 대학 시절의 문화에 대한 반성과도 관련이 깊다.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한국 사회는 근대화 모델을 따라 줄달음쳐 갔다. 해방 이후의 격동과 한국전쟁, 그리고 전쟁 뒤의 부패와 가난을 겪는 동안 한국 사회는 오로지 서구적 문화, 서구적 가치 등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 그쪽에 몰두했지, 우리 것에 자부심을 갖기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자존심이 없는 개인, 자부심이 없는 민족처럼 불행한 인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반성 속에서 신영복은 감옥에 들어가서 동양 고전을 깊이 읽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준거를 동양 고전의 지혜와 가치에서 찾아보려는 생각이었다.

이래서 동양고전 독법강좌와 강의라는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구나

 

그런데 이런 거창한 문제의식 말고도 옥중의 신영복이 동양 고전에 빠져들게 된 데에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아주 까다로운 것이었는데, 징역 초년의 왕성한 지식욕에 하루 한두 권씩 책을 읽을 나이였으니 책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자연히 곁에 두고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점에서 중국 고전이 딱이었다. <노자 도덕경> 같은 책은 5200자에 불과하지만 몇 달을 두고 읽을 수 있지 않는가. 신영복은 동양 고전을 통해 얻은 내용과 징역살이에서 깨달은 내용을 '관계론'이란 개념으로 정리해간다. 서구 사회는 개별적 존재성을 패러다임으로 하는 사회인 반면, 동양이나 근대를 뛰어넘는 사회는 관계론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일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2004년 말에 출간한 <강의>의 핵심적 내용이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다. 곳곳에 들어서는 건물, 특히 민주화운동 관련 기념물은 그가 도맡아 글씨를 쓰고 있다. 어디 기념물뿐이랴. 최근 대박을 터뜨린 소주 '처음처럼'도 그의 글씨다. 얼마 전 어느 서예학회에서 '서예의 실용화'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는 기사를 보고 신영복 선생님 생각이 나서 혼자 웃음지은 적이 있다. 그의 '작품'으로 처음 '전시'된 것은 아마 '동상예방 주의사항'이나 '재소자 준수사항' 같은 소내 게시물들이 아니었을까? 어려서 할아버지께 잠시 배우다가 잊어버렸던 붓글씨를 신영복은 옥중에서 다시 만났고, 감옥에 서도반이 생기면서 만당 성주표(晩堂 成柱杓), 정향 조병호(靜香 趙柄鎬) 선생에게서 체계적인 지도를 받게 된다. 특히 풍양 조씨 노론 대가집 후예인 정향 선생은 추사의 서법을 이은 민형식(閔衡植) 선생이나 한말의 서화 대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오세창(吳世昌) 선생에게 배운 분이었다. 교도소장이 글씨 한 점 얻을 욕심에 서도반이 생긴 뒤 한 번 모신 것인데, 교도소란 살인범·도둑놈이나 가는 곳으로만 알던 정향 선생이 신영복 등 사상범들이 옥중에 있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시며 ", 이분들은 귀양 온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하시고는 7년간 매주 교도소에 오시어 글씨를 지도해주셨다고 한다. 

 

민체, 우리 서예의 중요한 경지 

 

신영복의 한글 글씨는 우리 서예의 발전사에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 이전 한글 글씨는 궁체가 주류를 이루었다. 정적이고 귀족적인 미학을 지닌 궁체는 시조나 별곡, 성경 구절을 쓰면 내용과 형식이 썩 잘 어울리지만, 신경림, 신동엽의 시나 민요, 또는 투쟁 현장의 목소리 같은 것을 쓰면 내용과 형식이 전혀 맞지 않게 된다. 신영복은 그런 내용과 형식 사이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중 어머니께서 보내는 모필 서간체 글씨를 보며 깊이 느낀 바 있어, 어릴 적에 춘향전 필사본 등 어머님이 갖고 계셨던 두루말이 글씨를 생각하면서 한문 서도에서 익힌 필법을 도입해 궁체에 대비되는 민체(民體), 또는 연대체(連帶體), 어깨동무체라 불리는 서체를 창안해 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아내는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신영복은 교도소에서 보낸 20년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종종 표현한다.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키우고, 생생한 역사의식을 길렀으며, 게다가 양화공·봉제공·목공·영선·페인트 등 여러 가지 기술까지 익히고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1988 814일 잡혀간 지 꼭 20 20일만(그러나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음력으로 꼭 20년 만이다. 생일날 잡혀가서 생일날 풀려났다고 한다)에 출옥했다. 

 

그는 20년의 징역살이가 헛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위를 넘어 일종의 성취감을 느낀 부분은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레닌을 포함해 수많은 실천가들이 성공하지 못한 자기 개조를 이뤄냈다는 것!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라며 칭찬하더란다. 신영복은 그렇게 세상과 다시 만났다. 하나의 나무가 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무들이 더불어 숲을 이뤄가는 것이 더 중요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전해주던 그가 지난 (2006) 68일 아쉬운 정년 고별 강연을 했다. 20여 년의 청년기, 20년의 귀양 생활, 그리고 귀양이 풀린 뒤의 해배(解配) 기간이 20년가량이었다. 해배 2기라고 할 수 있는 앞으로의 20, 더불어 숲의 중심에서 신영복은 우리에게 어떤 자유로움을 보여주고 들려줄 것인가? 

 

(이 글은 2006년 발행된 <신영복 함께 읽기> (돌베개 펴냄) 44-66쪽에 실린 글(원제 : 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한다)

 

→ 2016 1월 신영복 선생은 지병인 흑색종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마지막 저서인 [담론]을 남기고. 그는 계몽주의적 글쓰기와 행태를 잘못된 것이라 꼬집는다. 왜냐하면 나이든 세대가 젊은세대에게 멘토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가치기준으로 이끄는 것은 진보를 막는다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한다는 말을 남기신 신영복 선생. 나 역시 이번 달 주제인 철학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선생의 독자임을 말씀드리고 싶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 책을 내면서

 

P6. 우리들이 고전을 읽는 이유가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고전 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5월의 주제인 신화는 우리의 삶의 체험이었다.(그리고 저자들이 그렇게 밝혔다) 고전 역시 말씀 하신대로 과거의 고전이 나에게 많은 깨달음과 지혜를 주기를 믿는다.

 

P7 아무쪼록 그분들의 연학(硏學)에 진경(進境)이 월등(越等)하시길 빌면서 남은 잉크를 말린다.”

 

1. 서론

 

나의 동양고전과의 인연

 

P16. 우리의 의식을 지배했던 것이 근대화와 서구 문화였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만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마저 허락하지 않는 불행한 문화였습니다.

 

P17. 요즈음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을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모교의 도서관을 거의 매일 오고 있다. 마주치고 보고 느끼는 모든 대상이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대학생들이다. 내가 이런 것을 느끼고 평가할 깜냥은 아니지만, 나 역시 이런 부분에 대해 많이 공감한다.

 

국어사전 290

 

P18. 최근에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라는 책을 출간하시기도 하였고, 노촌 선생의 일대기가 KBS <인물현대사>에서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P19.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삶의 정직성을 판별하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노촌 선생님은 참으로 정직한 삶을 사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촌 선생처럼 제국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모두를 겪지는 못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시대의 양을 많이 담고 싶다. 일반 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삶,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갈등과 모순, 반목 등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싶다.

 

P19. 노촌 선생님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 때 노촌 선생님을 검거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는 사실이지요.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일파들이 오히려 반민특위를 역습하여 해체시켰던 해방 정국의 실상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지요.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 되었다는 예!

 

화두와 오래된 미래

 

P21.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P22. 이 시기는 흔히 축의 시대라고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상의 백화제방 시대입니다.

백화제방 : 많은 꽃이 일제히 핌 뜻은 참 좋은 뜻이다. / 온갖 학문이나 예술, 사상 따위가 함께 성()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P23.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갑자기 유시민 작가가 말한 보수는 관성이고 진보는 운동이다 라는 말이 떠오른다.

 

P24.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중략) 어쨌든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P24. 고전 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당면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중략) 과거는 그것이 잘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우리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래를 향해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이지요.

 

천지현황과 I am a dog

 

P26. 나는 여러분이 마음에 드는 고전 구문을 선택하여 암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P27. 미래는 오래된 과거라고 했습니다.

미래는 오래된 과거다과거는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다가올 시간인데, 미래가 과거라니, 무슨 의미일까. 과거를 답습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고

 

P28. 동양사상의 경우 그것의 공간적 존재형식에 주목하는 경우 우리는 대단히 완고한 선입관에 갇히게 될 위험이 큽니다. 동양 사상을 특수한 것, 전근대적인 것, 그리고 때로는 저급한 것으로 규정하는 뿌리깊은 오리엔탈리즘에 갇히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사상과 철학의 시작의 중심이 서양이라는 인식에서 나왔기 때문이겠지.

 

P28.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한 경우보다는 그 형식에 있어서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 지엽적인 부분이 비교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의 파악은 차이나는 것의 비교가 아니고 그냥 온전히 그것을 보는데 있는 것이지. ‘너는 누구랑 다르게 그렇구나, 너는 나랑 생각이 다르구나그냥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 구나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28. 지금 여러분 가운데 두 사람을 일어서게 하고 두 사람의 차이에 주목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본질적인 것이 드러날 것 같습니까? 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한쪽을 부당하게 왜곡하는 것이 아닐 수 없으며, 기껏해야 지엽적인 것이나 표면에 국한된 것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화로 귀착되는 것이지요.

 

P29. 일단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한다는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 근데, 이 말도 위에 말한대로 생각한다면 맞는 생각일까? 진정한 공존은 무엇이다. 라고 정의내리는 것도, 자신의 본질이 발현된 생각 아닐까?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하는 방법을 주장하는 사람이 그것을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서 진정한의 의미는 뭐지? 개인적으로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 같은데?

 

고전 독법의 참여점

 

P30.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이 지난 몇 세기 이래 줄곧 서양문화를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P31. 오늘날은 오히려 반대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과학에 대한 억압이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급속한 발전이 오히려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압도적 우위로 말미암아 진리와 선이라는 서양 문명의 기본 구조가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사회를 구성하는 축이 있을 때 하나가 무너진다면 오히려 문제점을 야기시킨다. 현재 우리사회도 얼마 전 보다 더 위기라고 생각하는 건 좀 오바인가? 뭔가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어 염려가 된다.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P3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함께 사는 삶.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함께 사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혼술에 혼밥에 오히려 이기주의/개인주의의 총합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P34.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P35. 동양 사상이 비종교적이며 현실주의적이라는 점은 베버가 옳게 지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주의를 현세적 향락과 체면의 문화로 규정하고 있는 논리적 무리인 것이지요.

 

P36.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일상이 찌들어 있든, 살만 하든 어쨌든 살아가는 현장 아닌가. 여기와 지금을 생각하지 않고 개인이 바라는 이상향만을 생각한다면 소중한 가치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와 지금을 소중히 했으면 좋겠다.

 

P36.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과 수의 회의문자입니다. 착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길을 걸으며 생각하고 주변의 사물에서 여러가지 의미를 찾는 것이 도를 닦는 것이라도 볼 수 있겠네?^^ 그럼 나는 나만의 도를 닦고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이구나^^ 자기합리화!!

 

P37. 도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서양의 철학과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P37.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P38.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중략)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이 질서입니다.

 

P38. 장이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자력장, 중력장, 전자장과 같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체계이며 질서입니다. 장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서로 조화 통일되어 있습니다.

 

P39. 따라서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생기의 장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생성과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입니다.

꽃을 보면, 봄이 되면 피고 그 피는 시기도 각양각색이며 꽃잎이 지고 녹음이 지며, 낙엽이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다가 다시 꽃을 피운다.

 

P40.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특정 분야의 불균형적인 자기 확대가 곧바로 다른 것과의 생성 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P41.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 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논어]덕불고 필유린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P41. 동양 사상의 핵심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인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중략) 인은 기본적으로 인과 인 즉 이인의 의미입니다. 즉 인간관계입니다.

 

P42. 그런 의미에서 인성이란 개념은 어떤 개체나 존재의 속성으로 환원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여러 개인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P42. 따라서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중략)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는 것을 인이라 합니다.

나에게 적용을 해 보자면 남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함으로 인해 인을 실천하고 그것이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천복을 좇고 실현함으로 인해 달성 할 수 있다는 의미로군

 

P42. 이것은 인성의 고양이 곧 사회성의 고양이라는 의미하고 할 수 있습니다.

 

모순의 조화와 균형

 

P43.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에 대하여 대단히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중용이 그것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의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순 대립의 두 측면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P44. 유가와 도가는 이로써 서로 견제하고, 이로써 중용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동양 사상에 관한 설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상이란 다른 사상과의 모순 관계에 있을 때 비로소 사상으로서의 체계가 완성된다는 원칙론의 확인이기도 합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곳

 

P45.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P47.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 구조는 근본 담론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2. 오래된 시와 언

 

상품미학의 허위의식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으로

 

P53. [시경] 독법은 우리들의 문화적 감성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기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되기 보다는 정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야 함은 물론입니다.

 

P54. 방어의 꼬리가 붉다는 것은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방어는 피로하면 꼬리가 붉어진다고 합니다.

새로운 상식하나 추가!! 겨울방어를 정말 좋아하는데, 방어는 피로하면 꼬리가 붉어지는 구나

회 먹을 때 참고해야 겠다.

 

거짓 없는 생각이 시의 정신이다

 

P56.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P58.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그래 정말로 시를 읽자. 아니다 시를 외우자. 지난 주 어쩌다 어른 강원국 작가가 시를 외우라고 했으니, 나도 이제 시를 외워보자. 인생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해 보면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겠지.

 

사실이란 진실의 조각 그림입니다

 

P61.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경]의 시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왜곡된 사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왜곡된 사실이 대다수 사람들을 믿게 만들고 진실로 둔갑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사실 요즈음 진실이라는 것이 있을까? 기사를 봐도 무엇이 진실인지를 모르겠다.

 

풀은 바람 속에서도 일어섭니다

 

P64.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P64. 시적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자유로운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 사부님의 시 처럼 사는 삶에 대한 나의 해석이 매번 업데이트 되어 간다.

 

P65.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66. 누가 누구를 모방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개인적 세계를 열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자기의 좁은 체험의 세계를 부단히 열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지요.

 

P67. 오늘날 우리의 삶은 땅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지향해야 할 확실한 방향을 잃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록은 무서운 규제 장치입니다

 

P68.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P70. 군자는 무일(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 [서경] 주공-무일편

도서관에서 보면 너무나 안타까운 젊은 영혼들과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을 보면 부모님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를 다시 돌아보기도 한다. 그 친구들도 고전을 읽어야 하는데

 

P71. 나아가 생산노동과 유리된 신세대 문화의 비생산적 정서와 소비주의를 재조명하는 예시문으로 읽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최고의 정치가 주공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P75.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 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지요.

 

P75.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P75.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P76. 물론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과거의 지식이 빨리 폐기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노인들의 위상이 급속히 추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사회가 젊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조로화(早老)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맞는 말이다. 지난 달 대학생 대상 캠프에서 느꼈다. 그 친구들과 10년 남짓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연예인 누구를 얘기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나 역시 그렇게 나이가 많이 먹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오히려 아직 젊다고 생각했는데, 세대 간의 차이가 너무나 가속화 되면서 나 역시 그들에게는 그저 나이든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P77. 나이 든 세대의 경험과 역할이 현생인류의 양적 팽창과 질적 발전을 가져온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할머니 역할은 그 사회적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요.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초사]의 낭만과 자유

현실과 이상의 영원한 갈등

낭만주의와 창조적 공간

 

3. [주역]의 관계론

 

바닷물을 뜨는 그릇

 

P87.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수천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치상 같은 것입니다. 물 긷는 그릇에 비유할 수 있지만 또 안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물과 현상을 그러한 틀을 통해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P90. 점괘와 백성들의 의견과 조정 대신 그리고 임금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를 대동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학의 축제인 대동제가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것이지요. 하나 되자는 것이 대동제의 목적이지요.

대학시절 입으로 대동제 대동제 말만 했는데, 대동제가 주역에서 나온 단어였다니놀랍다.

 

경과 전

 

P92.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중략)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효와 괘

 

P94. 우리는 사회관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인식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관과 인간관 등 우리가 의식하고 있든 의식하지 않고 있든 익숙하게 구사하고 있는 틀이 있습니다.

 

[주역] 읽기의 기초 개념

 

P98. 셋 중에서 언제나 소수가 전체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자 두 사람과 여자 한 사람인 집합에서 결국 여자의 의견이 관철되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위와 응

 

P101. 여러분은 어떤 자리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리인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지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립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조금 작은 듯한 집이 좋다고 하지요.

 

P101. 자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중략)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 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 밖에 없습니다.

 

P102. 자기의 능력과 적성에 아랑곳 없이 너나 할 것 없이 큰 자리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세태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70%의 자리가 득위의 비결입니다.

 

P102.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P102. [주역]에서는 이 가운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중략) 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P105. 위보다 응을 더 상위의 개념으로 치는 것이 [주역]의 사상입니다.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 하지요.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응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장의 개념도 바뀌어서 최근에는 직장 동료들이 좋은 곳을 좋은 직장으로 칩니다. 위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응은 덕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간의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 지천태

P110. 경복궁 교태전은 바로 [주역]의 지천태괘에서 이름을 딴 것입니다. 천지교태입니다. 천과 지가 서로 교통하여 태평하다는 뜻입니다.

 

P110. 혁명은 한 사회의 억압 구조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억압당한 역량을 해방하고 재갈 물린 목소리를 열어줍니다.

→ ‘재갈 물린 목소리를 열어준다참으로 멋진 표현이다.

 

- 천지비

P118. 어느 경우든 불교(不交), 불통이야 말로 정의 실현이나 공동체 건설에 결정적인 장애라고 보는 것이지요.

 

P119. 어쨌든 결과적으로 역사의 소용돌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합리적이고 선진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희생당했지요.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초야에 묻히는 것이지요.

 

P119. 지천태괘와 천지비괘에서 고통적인 것은, 어느 것이나 다 같이 교交와 통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와 통이 곧 관계입니다. 이것이 [주역]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 산지박(5개의 음효)

P121. 산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형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형상이지만 천지비괘와 마찬가지로 막힌 괘로 읽고 있습니다.

 

P121. 이 박괘는 가장 어려운 상황을 표현하는 절망의 괘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지뢰복(산지박 반대)

P122. 땅 밑에 우레가 묻혀 있는 형상입니다. 씨가 땅에 묻혀 있는 형상입니다. 잠재력이 땅 밑에 묻혀 있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은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P123. 산지박괘는 그 다음 괘인 이 지뢰복괘와 함께 읽음으로써 절망의 괘가 희망의 괘로 바뀌고 있습니다.

 

P123. 그런 점에서 박괘는 64괘 중 가장 어려운 상황을 상징하는 괘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언어로 읽을 수 있다는 변증법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결국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올 것을 경계하고, 나쁜 일 뒤에는 너무 낙담하지 말고 좋은 일을 위해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겠다.

 

P123. 이 박괘는 흔히 혼돈 세상에서 사상적 순결성과 지조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어려운 때일수록 현명한 판단과 의지가 요구된다는 윤리적 차원에서 읽힙니다.

 

P123. 박괘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 만들기 입니다.

 

P124.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과거, 그리고 얼마전까지 어려움에 닥쳤을 때 감정에 치우쳐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나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객관적으로 보았다. 나와 분리시켜 보았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해답이 보였고 길이 보였다. 술을 마셨을 때 내가 술이 취한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우울할 때 내가 지금 우울하구나, 내가 지금 화가 나는구나 라고 객관화 시키고 직시를 하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 화수미제

P127.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제일 마지막이 미완성의 괘)

 

P127. 실패한 사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 즉 인간관계를 디딤돌로 하여 재기하는 것이지요. 작은 실수가 있고, 끝남이 없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상태 등등을 우리는 이 단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P128.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P128.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맞는 말이다. 완성이라는 개념은 관념일 수 밖에 없다. 완성이라고 단정짓는 순간 그것이 다시 하나의 과정이 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P128.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P129. ‘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P129. “목표의 올바름을 선이라고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라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하지 않으면 진미 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의 형태

 

P131.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 이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객관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합니다.

→ 지금 현재 나에게 형성된 관계망을 생각해 보면 우연의 연속이었고, 선택의 연속이었다. 결국 결국은 선택의 문제라는 것인가. 나의 선택에 의해 탄생한 관계망.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다른 관계망이 형성 되었으리라. 불교의 연기론도 이 이론 아닌가? 내가 A라는 선택을 했기에 지금 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에

 

P132. 절제와 겸손이란 바로 이러한 제한성으로부터 도출되는 당연한 결론이라고 해야 합니다. [주역]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춘추전국시대

 

P138. 따라서 이 시기의 사회 경제사적 성격을 이해하고 [논어]를 읽는 것이 순서하고 생각합니다.

 

P138.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적 가치가 붕괴되고 오직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는 시기입니다. 신자유주의와 무한 경쟁으로 질주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패권주의적 경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P140. 사회 경제적 배경은 사상사의 이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상도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제학과를 나온 친구 한 놈은 자주 이런 소리를 한다. 나중에 자식이 전공을 선택할 때 경제학을 꼭 했으면 한다고경제학에는 정치도 있고, 사회도 있고, 문화도 있고, 그리고 우리의 삶도 있다고내가 숫자에 알러지만 없다면 경제학을 한 번 공부해 보고 싶다. 그 무한함을 나도 한 번 느껴 보고 싶기에

 

P141.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인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관을 이유로 들어 그를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사상가로 매도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에 대한 담론이든 민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역사 뿐만 아닌 것 같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다. 내 가치가 맞다고, 내가 배운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누군가의 생각과 가치를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가. 나는 나. 너는 너. 본질이 다르기에 생각을 관철시키는 것은 폭력이다.

 

배움과 벗

 

P142. 학습은 그 자체가 기쁨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한 것입니다.

 

P143. 중요한 것은 을 복습(復習)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의 뜻은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내고 있듯이 실천의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 어린 새가 날갯짓을 하는 모양입니다.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P145. 사회는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 할 수 있으며, 이 인간관계의 사회적 존재 형태가 사회 구성체의 본질을 규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인간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지요. 사회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 이 부분은 잘 몰라서 신영복 선생님께 묻고 싶다.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3가지가 비교가 가능한 것인지. 기준이 자본주의는 경제체제이인데 나머지 2가지 제도도 경제적인 개념인 것인지.

 

옛 것과 새로운 것

 

P148. 시간을 굳이 흘러가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물질적 실재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작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은 반대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기는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P150.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 나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계속해서 나를 비판하고 파괴하고 창조한다면 나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지?

 

그릇이 되지 말아야

 

P151. 오늘날도 전문성을 강조하는 막스 베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자본가는 어느 한 분야에 스스로 옥죄이기를 철저하게 거부해왔던 것이지요. 오늘날의 대자본이 벌이고 있는 사업 영역을 점검해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크게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으로 작게는 다각적 경영, 문어발 확장이 그런 것이지요.

항상 회사에서는 전문성, 전문가가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제너럴리스트가 결국 최고의 경지라고 볼 수 있는 거네? 그래 나도 잡학을 해야지^^

 

P152. 전문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래층에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차를 전문적으로 모는 사람, 수레바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 배의 노를 전문적으로 젓는 사람 등 전문성은 대체로 노예 신분에게 요구된 직업윤리였습니다.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 지금의 전문직은 다르지 않나?

 

P152.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

→ 세무사, 회계사, 변호사 등 고급인력인 전문가들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로 설명 가능한 것인가? 노동생산성이란 투입된 노동과 그 노동으로 인한 아웃풋을 말하는 것인데, 이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P153. 법은 최소한의 도덕입니다. 따라서 법에서 적극적 가치를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덕치주의는 법치주의에 비해 보다 근본적인 관점, 즉 인간의 삶과 그 삶의 내용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153. 덕치가 평화로운 시대 즉 치세의 학이라고 한다면 행정명령과 형벌에 의한 규제를 중심에 두는 법치는 난세의 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154. 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형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정치인들이 하는 행태와 이 구절과 연결해 본다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잠재력이 전혀 없는 사회인 것인가. 너무나 슬픈 일 아닌가. 상식적인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비상식이 정치가 되고 있으니, 그렇다면 우리의 자화상은 비상인이라는 것인가.

 

P155. 부끄러움에 관한 것입니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으로 다스리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P156. 타인의 부정과 추락에 대하여, 그것도 사회 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단계가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P156.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범인들은 그렇다고 치자. 정치인들은 국민과 소통하면서 관계를 맺는다고 주장하면서 왜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르지? 그들은 국민들에게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인가?

 

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

 

P157. 대체로 미인은,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과는 다소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입니다. 미인은 대체로 자신에 대한 칭찬을 미리 예상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칭찬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준비된 사람입니다. 예상했던 칭찬이 끝내 없는 경우에 무척 서운한 것은 물론이지만 반면에 예상대로 칭찬을 받는 경우에도 그 칭찬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지요. 특별히 감사할 필요가 없지요.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자기 개인 스스로가 어떻게 느끼냐에 따른 문제이니까. 문제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하게 생각하고 자신은 예외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여자가 문제인 것이다. 간혹 있다. 물론여자로 한정 짓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 남자도 있거든.

 

P158. 그러나 자기의 미모에 대한 평가를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분류하고 그러한 평가가 사람과의 관계 건설에 초기부터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지요.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일익을 담당하려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에 비해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이입니다.

일반화를 시키는 것은 다소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여성분도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객관적인 미인이면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멋진 여성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이 의견 역시 틀리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 만큼 반대의 경우도 많이 보고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P159. 상품미학에 이르면 미의 내용은 의미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디자인과 패션이 미의 본령이 되고 그 상품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은 주목하지 않습니다.

이 고전강독을 하셨을 때와 시대가 많이 변하기는 했나보다. 우리의 인식이 과거에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역시 디자인이 중요하지만, 메인인 내용물이 형편없다면 소비자는 재구매를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SNS를 통해 상품에 대한 품평을 공유하면서 수정/보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 않은가.

 

P159.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이것도 어느 정도만 인정

 

공존과 평화

 

P160. 동양학에서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경우 그 개념 자체를 상술하거나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보다는 그와 대비되는 개념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뜻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P161.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체성 역시 결과적으로 타자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P162. 동양학에서 대체로 대비의 방식을 선호하는 까닭은 동양학 그 자체가 관계론적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P163. 따라서 군자화이부동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P163. 반대로 소인동이불화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P164.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 격동기에 도처에서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라는 극우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아냐 내 생각이 맞아!!’ → ‘그래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고맙다 내가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하게 만들어줘서!!’ 이러면 안싸운다. 서로 존중하는 자세니까 말이다.

 

P165. 화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P165. 화의 원리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롯하여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가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구도를 모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P168. 마음이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 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성은 관념적인 개념이라고 하셨으니,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 놓는다는 것은 없는 개념 아닌가?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그러면 나는 관계에 배려를 정말 잘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항상 부족하다 등 겸손하게 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지?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

 

P170. 정치란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며 백성들의 신뢰가 경제나 국방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천명한 구절입니다.

 

P171.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 관계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지요.

 

P172. 정치란, 우리나라 제도 정치권의 현실처럼 정권 창출을 위한 것이 아니지요. (중략) 바로 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뿌리를 바르게 하여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의 근원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이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치란 신뢰이며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량의 결집이라는 사실입니다.

 

참된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

 

P173. 지에 관한 공자의 답변은 그 언표에 나타난 의미와 앞뒤의 문맥으로 보면 비교적 간단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은 사람으로서 굽은 사람을 바르게 만드는 일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P174. 더구나 지인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일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아는 것이 지라는 대단히 근본적인 담론을 공자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P174.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중략)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논어에 상담심리의 원리가 있다니 참으로 신기하구나. 상담자는 내담자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지만, 내담자 역시 상담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알고 있어야 상담자를 믿고 신뢰가 쌓인다고 공부했는데, 논어에 그 정답이 있었다니. 결국 인간관계는 시간이 지나도 그리고 상담/내담자라는 특수관계에서도 그 근본원리는 같다니

 

P175. 지는 지인이라는 의미를 칼같이 읽는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한 사회입니다. 무지막지한 사회일뿐입니다.

 

정직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

 

P176.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것을 누리지 않으며,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P177. 문제는 이러한 과정과 역사가 드러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청산은 커녕 과거가 은폐되고 있는 역사를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지요. 그 과정과 역사는 완벽하게 망각되고 오로지 그 결과만을 바라보게 하는 사회를 살고 있지요.

 

이론과 실천의 통일

 

P179. 사는 생각이나 사색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리라고 한다면 경험적 사고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자의 구성도 +입니다. 밭의 마음입니다. 밭의 마음이 곧 사思입니다. 밭이란 노동하는 곳입니다. 실천의 현장입니다.

습이랑 같은 의미이네?

 

P181.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 한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이 보편적인 것임에 비하여 사는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학교 연구실에서 몰두하는 교수가 현실에 어두운 것이 사실입니다. 반대로 자기 경험을 유일한 잣대로 삼거나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일을 처리하면 위험한 것이지요.

 

P181. 경험적 지식은 매우 완고합니다. 따라서 경험주의를 주관주의라고 합니다.

 

P182. 자기의 처지에 눈이 달려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기 쉽지요. 따라서 사회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학과 사를 적절히 배합하는 자세를 키워가야 합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입니다.

 

P182.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이고 배움이고 교육이지요. 우리는 그 작은 것의 시공적 관계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빙산의 몸체를 깨달아야 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전 과정 속에 그것을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온고와 지신을 아울러야 하는 것이지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 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

 

P185. 사람이란 지혜롭기보다는 어리석기가 어렵습니다. 지혜를 드러내기 보다는 그것을 숨기고 어리석은 척하기가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P186. 우리는 지와 우에 대하여 보다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우가 그냥 우가 아니라 대지를 품고 있는 우라고 했습니다. 다만, 사실 진정한 지란 무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야말로 지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 사실 배움이라는 것은 끝이 없다. 배움에 완성은 없다. 본인 스스로가 아직 어리석다는 것을 인식하고 배움에 정진하고, 항상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P187. 세상에 영합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법이지요. 그나마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것은 세상을 우리에게 맞추려는 우직한 노력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P188. 제갈공명의 명석한 판단은 무사(無私)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하를 도모하려는사사로운 욕심이 없었음은 물론, ‘윗사람이 되려고 하는 욕심마저도 없었지요. 이처럼 무사하기 때문에 공평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이해관계 집단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그 주장과 논리가 결국 사사로운 것이기 때문이지요.

 

P188. 공과를 불문하고 아무리 교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치장하더라고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P193. 고대 사상을 오늘의 시제에서 평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당시의 사회적 조건에서 어떠한 의미로 진술된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모든 사상은 역사적 산물입니다.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묻히는 것이지요. 당시의 가치, 당시의 언어로 읽는 것은 해석학의 기본입니다.

 

P194. 어쨌든 우리는 [논어]가 인간관계론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관계론은 특정한 시대의 사회 질서를 뛰어넘는 관점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광고 카피의 약속

 

P198.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힘입니다.

 

P198. 위나라 대부인 극자성이 말하기를, “군자는 본바탕이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문식을 할 것이랴하였습니다. 당시에도 오늘날과 비슷한 상황이었던가 봅니다. 상당히 과격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자공이 반론했습니다. “애석하구나! 문文이 질質이고 질이 곧 문이다. (만일 무늬가 없다면) 표범의 털 뽑은 가죽이 개와 양의 털 뽑은 가죽과 무엇이 다르랴.” 내용과 형식은 분리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춤과 춤추는 사람을 어떻게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학습과 놀이와 노동의 통일

산과 강은 오래된 친구입니다

 

공자의 모습

 

P203. 보수와 진보, 억압과 자유라는 두 개의 대립축 사이에 공자학파의 사상적 본령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공자의 이러한 재야성이 공자의 인간과 사상을 원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5. 맹자의 의

 

P211. 전국시대는 수많은 나라가 결국 전국칠웅으로 압축되고 드디어 진나라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는 과정을 밟습니다. 음모와 하극상이 다반사였으며 배신과 야함이 그치지 않은 난세의 전형이었습니다.

 

P212.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이 맹자에 의해서 의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한마디로 인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P215. 맹자 사상이 공자의 인을 사회화했다고 하지만 당장의 부국강병을 국가적 목표로 하고 있떤 군주들에게 사회적 정의는 너무나 우원한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효율성과 속도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진정 필요한 것이 아닌가?

 

여럿이 함께하는 즐거움

 

P216. 여민락은 백성들과 함께 즐긴다는 뜻입니다.

 

P217.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 테면 민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의 민본 사상의 핵심입니다.

촛불민심!!

 

P217. 그리고 맹자 사상의 핵심을 의라고 할 경우 그 의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여민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219. 현자는 여민동락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중략) 오늘날 행복의 조건 즉 낙樂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독락獨樂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공감이 감동의 절정은 못 된다고 하더라도 동류라는 안도감과 동감이라는 편안함은 그 정서의 구원함에 있어서 순간의 감동보다는 훨씬 오래가는 것이지요.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

 

P224.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마치 손바닥 위의 물건을 움직이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P225.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의 싹이다. 사람에게 이 네 가지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

 

화살 만드는 사람과 갑옷 만드는 사람

 

P229. 소위, 즉 하는 일에 따라서 그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입장에 따라 그 생각과 정서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의 성선이란 어떤 경우에나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에 따라 달리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본성은 서로 차이가 없지만 습관에 따라 차츰 멀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P230. 공자의 이인위미를 인용하여 어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진 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지요.

 

P230. 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사회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요.

→ ‘선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비교의 대상이 있다는 의미지. 그러니까 사회성이 당연히 내포되어 있는 거야. 그리고 선하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사회적 기준, 그 사회에 물든 가치의 조건이 말하는 것이니까

 

P232. 부중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반구제기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삶의 자세와 철학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의 원인 화살도 아니고 활도 아닌 결국 에게서 찾아야 한다.

 

소를 양으로 바꾸는 까닭

 

P237.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안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의미합니다.

 

P237.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P239.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사단의 하나로 수오지심, 즉 치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0분을 초과하지 않는 일시적 군집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피차 배려하지 않습니다.

 

P242.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 SNS을 통한 관계를 진정한 인간관계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본다면 대면의 관계가 현저히 줄어들고 넓어진 틈을 SNS를 통한 관계로 채운 지금의 사회는 본질이 없는 사회라고도 볼 수 가 있는 것이네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P243.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P244. 이 글에서의 바다는 큰 깨달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깨달은 사람은 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 하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더구나 작은 것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취할 태도가 못 되지요.

 

P245.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 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뜻이지요.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모욕하는 법

 

P247. 조간자가 총신해를 위하여 앞으로도 마차를 몰겠느냐고 왕량에게 묻자 왕량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사냥의 법도대로 마차를 몰았더니 하루 종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법도를 어기고 궤우하게 하였더니 하루아침에 열 마리를 잡고서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리 그가 권세가라 하더라도 마차를 몰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맹자는 왕량의 그 법도를 잃지 않으려는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원칙과 정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P248. 어쨌든 세 번씩이나 이사한 다음에야 깨닫다니 현명한 어머니라 하기 어렵지요. 나는 맹모보다는 한석봉의 어머니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지도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맹모처럼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몸소 모법을 보여줌으로써 자식이 그것을 본받게 했던 것이지요.

 

P249. [맹자] – 이루 상의 일절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씨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6. 노자의 도와 자연

 

도는 자연을 본받습니다

 

P255. 인의예지와 같은 도덕적 가치는 인위적 재앙으로 보는 것이지요.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사전을 찾아봤다. ‘코스모스의 과학적 의미가 최고의 질서라는 것을 알았다.

 

P255. 진정한 부국강병이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부문의 자생력을 길러 내고 꽃피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러한 장기적인 재생산성을 법가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지요.

 

노자가 보이지 않는 [노자]

 

P258. 훌륭한 상인이라면 물건을 깊이 숨겨두고 아무것도 없는 듯이 하는 법이라는 충고는 공자에게 아는 체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밖에 이해할 수 없지요.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닙니다

 

P263. 1장의 핵심 개념은 무와 유이고 그것이 같은 것이라는 선언이지요.

 

P264.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는 제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자유로운 식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무와 무명은 같은 법주에 속합니다. 유와 유명도 마찬가지 입니다.

 

P269. 노자의 도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지요. 명의 경우도 도의 경우와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언어로 붙인 이름이 참된 이름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름이란 원래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P269.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곳에 노자의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이지요.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P270. 따라서 제1장에서 노자는 개념적 사유, 즉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부분에 대한 인식이며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인식일 뿐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위는 거짓입니다

 

P272. 노자의 기본 사상을 확인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무위의 사상과 상대주의 사상입니다. 무위란 작위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P273. 자연이야말로 최고, 최선, 최미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미와 선이란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라는 인식이지요.

 

P274. 거짓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자연을 속이는 것이지요. (중략) 그 인식에 있어서 자연을 왜곡하여 거짓 인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산을 깎고 물을 막아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지요. 그 실천에 있어서 자연의 운동 법칙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P275. 어려움과 수월함, 긺과 짧음, 노래와 소리, 앞과 뒤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 간의 차이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못 됩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인위적인 개입이며 불필요한 차이의 생산이라는 것이지요.

 

뼈를 튼튼히 해야

 

P282.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옷처럼 만물을 감싸 기르면서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P284. 노자 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도무수유라고 했지요.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P287. 물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뜻이며, 또 가장 약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민초가 그렇습니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이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며 이를 대신할 다른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촛불민심!! 그런데그 물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가장 약하지만 강한것을 공격하는 물. 작년 농민 백남기씨 사건은 약한 물이 약자를 공격한 것으로 참 아이러니 하다.

 

P288.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지요.

 

P289.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P289. 바다가 모든 강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빔이 쓰임이 됩니다

 

P292. 누구나 수레를 타고, 그릇을 사용하고, 방에서 생활하지만 그것은 수레나 그릇이나 방의 있음()에만 눈을 앗기어 막상 그 있음의 배후()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지요. 숨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P293. 한 개의 상품의 있음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P294.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

 

스스로를 신뢰하도록

 

P295. 최고의 정치는 무치라는 것이지요. 그 다음이 백성들이 친애하고 칭송하는 임금입니다. 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이 두려운 임금입니다. 권력을 행사하고 형벌로 다스리는 패권 정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운 임금보다 못한 임금이 바로 백성들이 업신여기는 임금입니다. 멸시의 대상이 되는 임금이지요.

대한민국의 현재를 여실히 보여주는 문장이구만

 

P297. 나는 해마다 신입생 몇 사람을 정해서 그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분명히 변화합니다. 변화하는 이유는 생활이 그대를 가르치기때문입니다. 삶의 골목에서 이러저러한 충돌을 통해서 현실의 벽을 몸으로 터득해 가기 때문이지요.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P300. 돈이 많은 사람은 겉으로는 별로 없는 듯이 차리고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헙수룩하게 차려입어도 개의치 않지요. 많이 아는 사람도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지요.

 

P300. 가장 중요한 원칙 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 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P301. 언어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소통은 화자와 청자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맷돌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경험 세계의 소통 없이는 결코 전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이것이 세대차이경험을 공유하고 나아가 공감하는 방법을 찾는다면 그 격차를 줄일 수 있을텐데방법을 찾아보고 향후에 꼭 활용해 봐야지.

 

P302.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화자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빠른편이 아니지만, 더욱더 눌러 말하며 나와 상대가 여유를 찾도록 해야겠다.

 

진보란 단순화입니다

 

P304. 간디는 진보란 단순화이다라고 했습니다.

 

7. 장자의 소요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 할 수 없다.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

높이 나는 새가 먼 곳을 바라봅니다

 

P317.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물 속의 개구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바로 이 점에 []에 대한 올바른 독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318. 장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도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 경지가 장자의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P320. 장자는 약소국의 가혹한 현실에서 자신의 사상을 키워낸 사람임에 틀립없습니다. 부자유와 억압의 극한 상황에서 그의 사상 세계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가 생각한 1차적 가치는 생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 없는 질서보다는 생명 있는 무질서를 존중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신의 자유입니다.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

 

P321. 사물은 어느 것이나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적 관점에 서면 보지 못하고 주관적 관점에서만 본다. 그래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에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여 이것을 저것과 이것의 모순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과 사, 사와 생 그리고 가와 불가, 불가와 가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는) 모순 관계에 있다. 가가 있기에 불가가 있고 불가가 있기에 가가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성인은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고 하늘에 비추어 본다고 하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가치관이 이러면 싸울 일이 없을텐데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입니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P328.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부끄러워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

아이가 자기를 닯았을까 두려워하다

 

P334.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P335. 다름 아닌 각성입니다. 엄정한 자기 성찰입니다. 천하가 길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자기가 불치병자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깨닫고 자식만이라도 자기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이 참담할 정도로 가슴을 적십니다.

 

P335. 어쨌든 선생들은 결과적으로 자기를 배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지요. 자신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거나 자기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하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이지요.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반성은 불가능합니다.

 

책은 예사람의 찌꺼기입니다

쓸모없는 나무와 울지 못하는 거위

 

P342.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게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빈 배

 

P343.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나비 꿈

 

P347. 불교의 연기설에 있어서 인과 과는 불일불이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가 아니면서도 둘이 아닌즉 서로 다르면서도 둘이 아니며 또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관계에 있습니다. 장자의 제물과 물화의 관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인과 과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과와 인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혼돈과 일곱 구멍

참다운 지식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P356. 고기는 이를 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여러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됩니다

묵자의 검은 얼굴

2천 년 만에 복권된 [묵자]

 

P371. 기층 민중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그들을 조직하여 세습 귀족 중심의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최초의 좌파 사상과 좌파 운동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지배 집단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여 소멸하게 됩니다. 그리고 2천 년이 지난 후인 19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유교 사회의 붕괴와 때를 같이하여 재조명됩니다. 그래서 2천 년만의 복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지요.

 

P372. 이에 반하여 묵자는 종래 귀족 지배 계층의 행동규범인 예악을 철저히 부정하고 유가의 덕치 이념 대신에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인민의 협동적 연대와 경제적 상호 이익을 통하여 사회를 새롭게 조직하려고 했습니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P375. 그렇다면 겸상애와 교리지법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묵자가 말하기를, 그것은 다른 나라를 자기 나라 보듯이 하고, 다른 가 보기를 자기 가 보듯이 하고, 다른 사람 보기를 자기 보듯이 해야 한다.

 

P375. 겸애는 별애別愛의 반대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겸애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평등주의, 박애주의입니다. 묵자는 사회적 혼란은 바로 나와 남을 구별하는 차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나아가 서로 이익이 되는 상리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P376. 애인약애기신이 그것입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성경구절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음이 놀랍습니다. 비단 이 예시 문안뿐만 아니라 묵자의 하느님 사상은 기독교의 사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마라

 

P378. 그러나 열 명, 백 명을 살인하는 것이 아니라, 수만 명을 살인하는 전쟁에 대해서는 비난할 줄 모르고 그것을 칭송하고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고 있다는 것이지요. 묵자는 바로 이것을 개탄합니다. 묵자는 그 집단적 허위의식에 대하여 <소염>편에서 국가도 물드는 것이라는 논리로 비판합니다.

 

P380. “만 명에게 약을 써서 서너 명만 효험을 보았다면 그는 양의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약이 아니다. 그러한 약을 부모님께 드리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몇 개의 전승국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수많은 패전 국가의 비극과 파괴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P382. 묵자께서 말씀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지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워야?

 

P386.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슬퍼하다

 

P387. 키예프의 전승 기념탑은 언덕 위에 팔 벌리고 서 있는 모상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아들이 죽지 않고 돌아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돌아오는 아들을 맞으러 언덕에 서 있는 어머니의 상이야말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전승의 의미를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어요.

으아….

 

P388.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물든다는 것은 곧 묵자의 사회 문화론이 됩니다. 물건을 많이 소비하는 것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전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나라가 그렇게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P397. 왕께서 비록 자식을 사면하셔서 처형하지 않도록 하셨더라도 저로서는 묵자의 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복돈은 혜왕의 사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식을 처형했습니다.

 

P399. 묵자에 대한 [장자]의 평가 묵가의 원칙은 너무나 각박하다.

 

■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하늘은 하늘일 뿐

 

P404.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313~238년이 통설입니다.

 

P407.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하여 겨울을 거두어가는 법이 없으며, 땅은 사람이 먼 길을 싫어한다고 하여 그 넓이를 줄이는 법이 없다. 군자는 소인이 떠든다고 하여 할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다. 하늘에는 변함없는 법칙이 있으며, 땅에는 변함없는 규격이 있으며, 군자에게는 변함없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능동적 참여

 

P409.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능참, 즉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악설의 이해와 오해

 

P412. 성은 선악 이전의 개념입니다. 선과 악은 사회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성과 선악을 조합하는 개념 구성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천과 천명을 부정한 순자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본성이라는 개념이 설 자리는 처음부터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순자의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P414. 맹자의 성선설이든 순자의 성악설이든 우리는 본성론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선악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로 자연을 재단하는, 이른바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본성을 선과 악으로 재단하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판단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결국 사람은 자라면서 생각, 즉 가치관이 생긴다. 그 가치의 조건은 외부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정에서의 교육이 중요하고, 그 사회의 보편적 가치가 중요하고, 공동선이 중요하고, 그리고 좋은 책이 필요한 것 같다.

 

P417. 순자의 이론 체계는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하여 악한 성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예란 기르는 것이다

 

P421. 예란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대목입니다.

 

나무는 먹줄을 받아 바르게 됩니다

예와 악이 함께하는 까닭

 

P426. ‘완전한 예란 마치 훌륭한 음악처럼 천지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악론의 핵심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P427. 순자가 악론을 전개한 이유. 순자는 법과 제도적 통제가 가져올 폐단을 경계했던 것이지요. 나아가 사회의 질서가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공감과 동의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지요.

 

■ 10. 법가와 천하 통일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

 

P433. 요컨대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법가의 현실 인식입니다.

 

옥중에서 사약을 받은 한비자

강한 나라 약한 나라

 

P441. 법은 귀족을 봐주지 않는다. 먹줄이 굽지 않는 것과 같다. 법이 시행됨에 있어서 지자智者도 이유를 붙일 수 없고 용자勇者도 감히 다투지 못한다. 과오를 벌함에 있어서 대신도 피할 수 없으며, 선행을 상줌에 있어서 필부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윗사람의 잘못을 바로잡고, 아랫사람의 속임수를 꾸짖으며, 혼란을 안정시키고 잘못을 바로잡으며,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공평하게 하여 백성들이 따라야 할 표준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는 법보다 나은 것이 없다. (중략) 임금이 법을 버리고 사사롭게 처리하면 상하의 분별이 없어진다.

법은 이래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이 혼란의 시간을 지나 어찌보면 다시 안정을 찾아가는 시점이 아닌가. 법을 집행하는 사람, 법을 수호하는 사람부터 잘못되었으면 심판해야 하고, 누구든 예외를 두지 않았으면 한다. 똑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박탈감은 더 클 것이며, 집단적 타락 증후군에 빠질 가능성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임금의 두 자루 칼

나라의 쇠망을 알려주는 일곱가지 징표

탁과 발, 책과 현실

나라를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 부류

교사는 졸성보다 못한 법

 

P455. 인의 장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임금이 어진 사람을 만날 수 없도록 하는 측근들의 이해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소그룹의 집단부터 대한민국의 수장인 대통령까지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뛰는스스로 움직여 솔선수범하는 자세가 정말 필요하다.

 

법가를 위한 변명

천하 통일과 이사

 

P466. [사기] <이사 열전>에서는 이사에 대하여 그 공적이 주공에 비견할 만함에도 불구하고 주살을 면치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정적 과오는 역시 윗사람의 의중을 당자보다 먼저 헤아려 영합하기에 급급했고 스스로 공명정대한 원칙을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중략) 그것은 그가 표방한 법가의 공명함과 공평함을 스스로 허무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비극이고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을 수호하고 지지했던 사람이 원칙을 저버리는 순간 비극이 온다는 사실. 그리고 법 그리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 모두가 공명정대해야 한다,

 

■ 11. 강의를 마치며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

 

P473. ‘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를 정리한다면 광대무변한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이라고 풀이됩니다.

 

P474.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큰 것이고 충분히 넓은 것입니다. 한 포기 작은 민들레도 그것이 땅과 물과 바람과 햇빛, 그리고 갈봄 여름과 연기되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지요. 공간적으로 무한히 넓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P474.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P477. 연기緣起를 상생의 개념이라고 합니다. 연하여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전와 응전

[대학] 독법

 

P489. 여기서 주자는 치지재격물의 의미를 우리의 인식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데서 온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사람에게는 인식 능력이 있고 사물에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앎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물에게로 나아가서 그 이치를 궁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P491. 평천하, 즉 평화로운 세계는 명덕과 친민과 지선이 실현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인간관계가 존중되는 사회, 민주주의 사회, 선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개인의 품성이 도야되어야 함은 물론이며 개인뿐만이 아니라 가와 국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가 평화로워야 합니다.

 

[중용] 독법

 

P497. [중용]이 가장 중요하게 선언하는 것이 바로 이理입니다. 성즉리입니다. 이는 법칙성입니다. 이 이가 성이며 성이 천명입니다. 이 성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도임은 물론입니다.

천복을 따르는 것과 같은가?

 

P498. 성인의 가르침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것이 우리들에게 원래부터 있던 바가 재단되어 나오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학에 대한 심학의 비판

 

P502. “효친의 마음이 없다면 효도의 이가 있을 수 없으며, 충성의 마음이 없다면 충성의 이가 있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성리학보다는 양명학이 맞는 사상인 것 같다. 맞다라는 표현이 부적한 것 같지만, 마음이 없는 이치가 과연 이치(이론)으로서 생명이 있는 것일까. 진정성이 결여된 이치가 소중한 것인지 모르겠다.

 

P504.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창신의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지적 관심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적 과제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고전 독법에서 문명 독법으로

가슴에 두 손

 

P508~509.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P509~510.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부언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의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도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합니다.

 

P511. 그 사람의 미적 정서, 나아가 그 사람의 사상, 그 사람의 인격이 서에 고스란히 담긴다는 뜻이지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람과 서의 관계론입니다.

 

 

3. 내가 저자라면

 

목차에 대하여

 

신화와 인생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을 당시 책의 구성과 목차에 대해 상당히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저자라면 테마별로 묶는 구성이나 소제목을 추가하여 독자가 읽기 쉽게 구성하겠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는 두 책에서 느꼈던 아쉬움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특히 소제목을 살펴보면 제목 자체가 마음에 무찔러 들어왔다. 또한 구성 자체도 상당히 좋았다. 중국 역사(사상 포함) , 사상순으로 잘 정리 되어서 이해도를 높였다고 생각한다.

 

보완점

 

 사실 너무나 감명 깊게 이 책을 읽었다. 발췌문 역시 그 어떤 책보다 많은 분량을 차지하였으며, 독서 역시도 한 자, 한 자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마음으로 읽었다. 이번 주 과제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진행된 너무나 훌륭한 강의를 청강한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독자를 떠나 이 시대의 젊은이로서 보완점을 찾을 수도 없었다.

 

이 책의 장점

 

 이 책은 신영복 선생의 고전 독법을 주제로 진행된 (한 학기로 생각됨) 강의를 책으로 옮겼다는 것이 특징이다. 지난 달 신화를 주제로 2권의 책을 읽었다. ‘신화의 힘신화와 인생’. 1권은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책으로, 한 권은 강연을 책으로 엮은 특징이 있다. 그 중 신화와 인생이 개인적으로 나에게 더 와 닿았다. 마치 내가 그 장소에서 직접 듣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강의의 장점이 바로 강의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책의 형태처럼 일방적인 지식 혹은 생각의 전달이 아닌 마치 대화를 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강의장에서 강의를 하는 신영복 선생과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모습도 상상할 수 있었다. 구어체를 그대로 사용한 점이 노교수의 지식 전달, 가르침이 아닌 젊은이들에게 간절한 설명을 그리고 당부를 하는 마음까지 전달되었다.

특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전에 대한 해석본이 아니다. 또한 자기계발서 처럼 이렇게 읽어라라는 방법론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각 사상별로 꼭 필요한 부분만을 선정하여 지금 우리사회와 연결하여 자신만의 색깔로 해석한 점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저자의 눈으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신영복 선생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저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으셨던 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성공회대 교수. 소주 처음처럼의 글자를 쓰신 분. 이게 다였다. 그리고 선입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을 본 후 선입견은 완전히 사라졌다. 오히려 내가 부끄러웠다. ‘신영복이라는사람이 궁금해졌다. 너무나 알고 싶어 졌다. 그는 시대를 걱정하는 그야말로 선생님이었다. 또한 신영복 선생의 책을 더 읽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더불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죽기전에 글로써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 세상을, 사람을 그 누구보다 사랑한 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간절함, 그런 저자가 되고 싶은 욕심이 생기며 한 주를 마쳤다.

 

IP *.140.65.74

프로필 이미지
2017.06.05 09:16:14 *.124.22.184

나도 꼭 성한씨만큼 신영복을 알고 있었는데 책보고 나니 왜 '신영복, 신영복!'하는 지 알겠더라. 고전을 막 읽고 싶게 만들지? ㅎㅎ

프로필 이미지
2017.06.05 19:00:29 *.146.87.23

네!! 왜 존경받는지 알 것 같았어요^^

그리고 신영복의 선생님의 다른 책도 읽고 싶어졌어요 ㅋ


그러다 보니 무찔러 들어온 문장이 어마어마 하더라구요 ㅋㅋ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652 #10 도덕경(송의섭) [1] 송의섭 2017.06.20 1274
4651 #11 도덕경(이정학) [1] 모닝 2017.06.20 1694
4650 #11 도덕경(정승훈) [2] 정승훈 2017.06.20 1455
4649 #11 도덕경 (윤정욱) file [1] 윤정욱 2017.06.20 1512
4648 # 9. 논어(김기상) [1] ggumdream 2017.06.12 1991
4647 #9 논어(송의섭) 송의섭 2017.06.12 1467
4646 #9 논어: 세상의 모든 인생을 위한 고전_이수정 알로하 2017.06.12 1964
4645 #10 논어(이정학) 모닝 2017.06.12 1509
4644 #10 논어 (윤정욱) 윤정욱 2017.06.12 1569
4643 #10 논어_세상의 모든 인생을 위한 고전 (장성한) 뚱냥이 2017.06.12 1637
4642 #9 논어 - 무인과 무녀의 아들 仁으로 천하를 다스리다 리아랑 2017.06.11 2296
4641 #10 논어(정승훈) 오늘 후회없이 2017.06.11 1446
4640 #8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송의섭) [1] 송의섭 2017.06.05 1280
4639 # 8.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김기상) [2] ggumdream 2017.06.05 1687
4638 #8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_이수정 [1] 알로하 2017.06.05 1380
4637 #9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_윤정욱 [3] 윤정욱 2017.06.05 1315
4636 #9 나의 동양고전 독법 - 강의(이정학) file [1] 모닝 2017.06.05 2712
» #9 강의_나의 동양고전 독법 (장성한) [2] 뚱냥이 2017.06.05 1492
4634 #8 강의(그와 더불어 함께 읽는 고전의 숲) file [1] 리아랑 2017.06.04 1426
4633 #9 강의(정승훈) [1] 오늘 후회없이 2017.06.04 16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