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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5일 07시 36분 등록


 

저자 연구

신영복(申榮福: 1941.08.23~2016.01.15)

잘 알려져 있듯이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수로 복역하다 20년 만에 출소했고, 출소 후에 아직까지도 스테디셀러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출간했다. 내가 신영복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됐던 것도 이 책 덕분이다. 그런데 어쩐지 감옥’, ‘무기징역수라는 이름 때문에 나는 부정적인 편견을 가졌었다. 아마도 노자가 말한 이름과 인식간의 관계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의 권유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며, 나는 서문만 읽고도 내가 얼마나 심한 편견에 갖혀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에게 감옥은 그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죄값을 치르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에 대해서 근본 지점에서부터 깊은 반성과 성찰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우리 사회의 사유의 폭과 깊이를 한 차원 높였다는 평을 받은 30년 가까이 팔리는 스테디 셀러는 책으로 가득찬 서재나 도서관이 아니라 가장 통제된 감옥의 독방에서 제한된 집필 도구만으로 완성되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은 경제학자였지만 출소 후 성공회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경제학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부 교수로써 중문학과 동양 고전 등도 가르쳤고, <나무야 나무야>(1996), <더불어 숲>(1998), <강의-나의 동양고전독법>(2004) 등 다양한 인문서적을 출간했으니 그의 인문, 한문, 사회학에 대한 이해의 경지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저서 <강의-나의 동양고전독법>에서 그는 배움(이론)과 실천의 중요성에 대해서 여러 번에 걸쳐 강조했다. 특히 실천이 없는 사상의 허망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509P)

 

그의 삶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그의 책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그의 배움을 실천한 삶 때문이다. 2017 115일에 그가 희귀암으로 사망했을 때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었다. 사상이나 믿음은 다를지라도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삶의 진정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책을 내면서

6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아직은 잘 이해가 안 된다. 책을 다 읽은 뒤에는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가 되길 바란다.

 

1.     서론

나와 동양고전과의 인연

16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의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내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 되고 우리 사회가 지향했던 가치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감옥, 독방에서 그런 성찰이 가능했다는 것이 상상이 되질 않는다. 사실 저자는 감옥이 아니더라도 그런 성찰이 가능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독방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나 자신을 돌이켜보고,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17 말하자면 나의 사고와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의식을 반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반성은 동시에 우리 시대에 대한 반성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국어사전 290

화두(話頭)오래된 미래

21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는 말을 요즘처럼 실감하는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정말 인간은 발전하는 건지 회의가 드는 것도 요즘이 제일 심한 것 같다. 전에는 관심 없던 고전들을 읽으면서 더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역시 알아야 반성도 성찰도 가능하다.

 

23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實體性)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自己增殖)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근대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 원리가 관철되는 체계입니다. 근대사회의 사회론(社會論)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 ~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천지현황과 I am a dog

26 과학적 방법이나 첩경(捷徑)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암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성과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요.

동의한다. 새로운 방법이나 요령으로 한 공부는 금방 잊어버리는 걸 많이 봤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27 과거의 사상과 현대의 사상이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래는 오래된 과거라고 했습니다.

구본형 선생님의 책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왔었다. ‘미래는 오래된 과거’, 그래서 과거를 잘 알아야 하고 미래는 더 미래의 시점에서 과거라고 했었나? 아무튼 미래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시점이 아니라는 건 공통된 의견인 것 같다.

 

28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비교하는 방식의 접근 방법을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 그러한 관점은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물론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한 경우보다는 그 형식에 있어서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 즉 지엽적인 부분이 비교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

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한쪽을 부당하게 왜곡하는 것이 아닐 수 없으며, 기껏해야 지엽적인 것이나 표면에 국한된 것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화로 귀착되는 것이지요.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통해서 이해를 해야 하는데, 두개 이상의 것을 공부할 때는 차이를 통해 접근할 때 이해가 더 쉽기 때문에 비교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 뒷부분에서도 비교가 많이 나오던데처음 시작은 비교로 하더라도 결국은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이해하자.

 

29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時空)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關係網)입니다.

 

고전 독법의 참여점 (Entry point)

30 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을 추구합니다. 과학 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합니다. 서양 문명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잘 조화된 구조이며 이처럼 조화된 구조가 바로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서양 문화의 기본 구조와 장점과 단점을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하다니역시 저자의 내공이 느껴진다. 아니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건가?

 

31 이러한 상황은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 제기의 형태를 띠면서 동시에 서양 문명의 구조 자체의 모순과 불완전성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과학과 종교라는 이원적 구조와 모순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현대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패권 국가의 일방주의적 세계 전략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첨예화하고 있습니다. ~ 패권주의적 세계 전략은 자기 증식 운동의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그러한 전략은 결국 위기를 심화할 뿐이라는 것이 모순이지요.

 

32 패권주의적 질주는 자기의 목표를 부단히 허물어버리는 모순 운동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 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3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不忍人之心),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溫故知新)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그동안 서양적 사고가 현실주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반대로 알고 있었던 건가? 이렇게 배웠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배운건 지, 제대로 배워 놓고 잘못 기억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어떤 경우든 간에 이제라도 제대로 배워서 잘 기억해 보자.

 

36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37 도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진리란 일상적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 터득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이미 기성의 형태로 우리의 삶의 저편에 또는 높은 차원에 마치 밤하늘의 아득한 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 진리는 존재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역시 이렇게 비교하니까 이해가 쉽다. 첫 단계의 비교는 신영복 교수님도 어쩔 수 없었던 듯. 비교를 통해 차이점을 알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동양 사상에 대해서 알아보겠지.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38 자연 이외의 어떠한 힘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연에 대하여 지시적 기능을 하는 어떠한 존재도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

 

38 동양학에서 자연이란 자원(資源)이 아닐 뿐 아니라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對象)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무궁한 시공으로 열려 있는 질서입니다. ~ 따라서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생주이멸(生住移滅)의 순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39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근대사회의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人本主義)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코 중심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한 때는 인간적인 것, 인간 중심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들어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본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에 두기까지도 오래 걸렸는데, 자연을 중심에 두는 것은 더 오래 걸릴 것이다. 너무 늦게 깨닫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40 생기의 장으로서의 자연 개념은 현실적인 삶에서 욕망의 절제로 나타납니다. ~ 동양 사상의 현실주의란 이러한 자연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인간과 인간 관계를 두루 포괄하는 사회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양학에서는 자연을 생기의 장이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존재하고 있는 것 중의 최고(最高), 최량(最良)의 어떤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은 최고의 질서입니다.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41 최고의 가치가 바로 사람과 관련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1 덕성(德性)이 곧 인성입니다. 인간이란 존재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입니다. 이 사회성이 바로 인성의 중심 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인성은 개인의 특성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사회성이 인성의 중심이란다. 여기서 사회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회성과는 다르게 쓰였을 것 같다. 본문을 읽다 보면 정확히 이해가 될 것 같다.

 

41 ()은 기본적으로 인()+(), 즉 이인(二人)의 의미입니다. 즉 인간관계입니다. 인간을 인간(人間), 즉 인()과 인()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 동양적 구성 원리로서의 관계론에서는 관계가 존재입니다. ~

동양적 인간주의는 이처럼 철저하게 관계론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

이것은 인성의 고양이 곧 사회성의 고양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눈에는 뭔가 말장난 같았지만 다시 천천히 읽어보면 이보다 명쾌하게 인()과 인간(人間)을 정리할 수는 없겠다 싶다. 역시 저자의 내공의 힘이 보인다.

 

모순의 조화와 균형

43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에 대하여 대단히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중용(중용)이 그것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의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순 대립의 두 측면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43 동양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견제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 노장(老壯)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입니다. ~ 오만과 좌절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가 맡고 있는 셈입니다.

인본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것의 독선과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바로 도가입니다. 유가와 도가는 이로써 서로 견제하고, 이로써 중용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요.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곳

45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47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 같다.

 

2.     오래된 시()와 언(): <시경>(詩經), <서경>(書經), <초사>(楚辭)

상품미학의 허위의식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으로

54 왕실이 불타는 듯 어지럽더라도 그러한 전쟁이나 정쟁에 일체 관여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지요. 관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부모가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부모를 모시고 있는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근심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내의 논리지요. 소박한 민중의 삶이며 소망입니다.

어쩐지 저자가 감옥에 있을 때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인용한 표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이 한창 나이에 무기수로 감옥에 가게 되었을 때 부모님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것도 실체가 있는 범죄가 아니라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거짓 없는 생각이 시의 정신입니다.

56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실이란 진실의 조각 그림입니다.

61 그러나 사실과 전설 가운데에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사실이라고 해서 반드시 진실인 것은 아니다. 혼동하지 말자.

 

풀은 바람 속에서도 일어섭니다.

66 자기의 개인적 세계를 열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자기의 좁은 체험의 세계를 부단히 열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지요. <시경>의 세계는 그 시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거짓없는 애환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매몰되고 있는 허구성입니다. 미적 정서의 허구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67 <시경>의 정신은 이처럼 땅을 밟고 걸어가듯 확실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땅을 밟고 있는 확실함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삶의 진정성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발이 땅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지향해야 할 확실한 방향을 잃고 잇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경>에 담겨 있는 사무사(思無邪)의 정서가 절실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록은 무서운 규제 장치입니다.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중국 최고의 정치가 주공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75 나는 이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 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씹어 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요즘 젊은이에 해당하는 나는 누구보다도 효율성과 편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유일하게 나에게비효율과 불편이 허락되는 영역은 패션. 걸을 때 비율적이고 불편한 걸 알면서도 외출할 때는 꼭 하이힐을 고집한다. 겨울에 아무리 추워도 따뜻한 수면바지를 입고 나가지는 않는다. 물론 <무일>의 불편이 이런 불편을 의미하지는 않겠지만 <무일>의 불편을 생각하며 나에게 불편함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76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사회가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조로화 (早老化)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낭비이면서 역사 경험의 낭비입니다.

매우 동감. 평균 수명은 점점 길어지는데, 젊음이 길어지는 게 아니라 일찍 늙기 시작해서 노년의 기간만 길어지는 느낌이다.

 

<초사>의 낭만과 자유

현실과 이상의 영원한 갈등

80 굴원이 밝힌 유배의 이유는 다소 엉뚱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다 부패했는데 자기 혼자만 깨끗했기 때문에 추방당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있는데 자기 혼자만 맑은 정신이어서 추방당했다는 것입니다. ~

어쨌든 추방당한 이유가 부패한 친진파의 참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천하가 부패하고 술에 취해 있는데 함께 어울리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라는 주장은 일단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이해된다. 무리와 다른 사람을 못 견디는 것은 이천 몇 백년 전이거나 지금이나 비슷한 듯 하다.

 

82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3.     <주역>의 관계론: <주역>(周易)

바닷물을 뜨는 그릇

88 왜냐햐면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을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부류의 의기(意氣) 방자(放恣)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 틀림 없습니다.

내가 점점 사주며 토정비결 등에 끌리는게 이런 이유인 걸까? 겸손하며 좋은 사람이라고 하니 좋아해야 하나?

 

89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敬畏)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러한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가장 무서운(경계해야 할) 사람은 두려운 게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저자가 점치는 사람을 적어도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이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듯이, 비슷한 이유로 나도 종교가 있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이 믿는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과 전()

()와 괘()

<주역> 읽기의 기초 개념

()와 응()

100 그 처지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금언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는 표현을 하지요. 눈이 얼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달려 있다는 뜻이지요.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입장이라고 합니다. 계급도 말하자면 처지입니다. 당파성과 계급적 이해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1 어쨌든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매우 공감한다. 특히 그 자리가 크고 중요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리일 때 더욱 그렇다.

 

101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잘못된 사람이 차지하고 앉아서 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 역시 매우 공감한다. 명심하고 자리에 욕심내지 말자.

 

102 ‘70%의 자리가 득위(得位)의 비결입니다. ~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어떤 사물이나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역> 사상입니다.

 

105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 하지요.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응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장의 개념도 바뀌어서 최근에는 직장 동료들이 좋은 곳을 좋은 직장으로 칩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좋은”, 특히 좋은 직장 동료란 무엇인지 좋은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죽간의 가죽 끈이 세번이나 끊어지도록

지천태(地天泰)

110 혁명은 한 사회의 억압 구조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억압당한 역량을 해방하고 재갈 물린 목소리를 열어줍니다. ~ 혁명을 치르지 않은 나라가 진정한 발전을 이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을 치르지 않은 사회가 두고두고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는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바로 그 현장이기도 하지요.

이정학님의 지난주 칼럼 후불제 민주주의가 떠오른다.

 

113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식복이 있으리라. ~

한 번 겪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어느 한 단계를 마무리하는 시점에는 그에 따른 어려움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럴수록 마음을 곧게 가지고 최초의 뜻, 즉 믿음을 회의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114 춘하추동이 반복됩니다. 인간의 화복도 대체로 다시 반복됩니다.

 

천지비(天地否)

119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그것이 태()인 까닭, 그것이 비()인 까닭이 오로지 열려 있는가 그리고 소통하고 있는 가의 여부에 의하여 판단되고 있는 것이지요.

 

120 태괘는 선길후흉(先吉後凶)임에 비하여 비괘는 선흉후길(先凶後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동양적 사고에서는 선흉후길이 선호됩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가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아서 좋기만 한 것도 없고, 나빠서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 영어의 ‘This too shall pass’도 마찬가지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이 또한 지나가리니 지금 좋다고 너무 기뻐하지도 말고 현재가 안 좋다고 너무 좌절하지도 말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지금이 좋다면 현재를 있는 그대로 즐기면 되고 현실이 어렵다면 이 또한 지나가고 더 좋은 날이 올거라는 희망을 갖자.

  

산지박(山地剝)

122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 ~ 까마귀밥으로 남겨두는 크고 잘생긴 감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비단 감뿐만 아니라 모든 과일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을 먹지 않고 씨 과실로 남기지요.

그런가? 우리집 감나무에서 감을 딸 때 까마귀밥을 남기기는 하지만 주로 맨 꼭대기에 있어서 따기 어려운 걸 남기는 것 같던데올해는 어떤 감을 까마귀밥으로 남기는 지 봐야겠다.

 

지뢰복(地雷福)

122 땅 밑에 우뢰가 묻혀 있는 형상입니다. 씨가 땅에 묻혀 있는 형상입니다. 잠재력이 땅 밑에 묻혀 있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희망은 있는 법이지요. ~ 그런 점에서 박괘는 64괘 중 가장 어려운 상황을 상징하는 괘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언어로 읽을 수 있다는 변증법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역시나 나쁘기만 한 건 없다.

 

123 어려운 때일수록 현명한 판단과 의지가 요구된다는 윤리적 차원에서 읽힙니다. ~ 가정이 어려울 때 좋은 아내가 생각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충신을 분별할 수 있으며, 세찬 바람이 불면 어떤 풀이 곧은 풀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123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

어쨌든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을 박괘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추풍 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의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수미제(火水未濟)

127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127 실패한 사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 즉 인간관계를 디딤돌로 하여 재기하는 것이지요. 작은 실수가 있고, 끝남이 없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상태 등등을 우리는 이 단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잘 될 때보다 안 될 때 인간 관계가 중요하다는 건 동양 뿐아니라 서양도 마찬가지이다.

 

128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29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 ‘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길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지만 도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체로 의미가 있다. 과정 자체를 의미 있게 보내야 한다.

 

129 목표의 올바름을 선()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올바른 대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盡善)하지 않으면 진미(盡美)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으면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129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 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본주의, 대량생산사회가 되면서 이 부분이 제일 무시되고 있는 영역인 것 같다. 해결이 가능할까?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

131 즉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경계(警戒)입니다. 초로 만들어진 날개를 달고 있는 이카루스가 너무 높이 날아오르자 태양열에 녹아서 추락하는 것과 같습니다.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논어>(論語)

춘추전국시대

138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적 가치가 붕괴되고 오직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는 시기입니다. 신자유주의와 무한 경쟁으로 질주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패권주의적 경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규모와 기술발전의 결과물인 도구만 다를 뿐이지 그 내용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정말 놀랍다.

 

배움과 벗

144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

()하기만 하고 행하지 않고(不習) 있지는 않은가?”

 

146 계급 관계는 생산관계이기 이전에 인간관계입니다. 자본 제도의 핵심은 위계적인 노동 분업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산자에 대한 지배 체제가 자본 제도의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옛 것과 새로운 것

147 시간이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존재 형식일 따름이다. ~ 아프리카의 오지에 1년을 365개의 숫자로 나눈 캘린더는 없다.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분 역시 구본형 선생님의 책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읽었던 것 같은데그 때도 이해가 안 되었는데 지금도 잘 이해가 될 것도 같고 안 될 것도 같다. 결국 1 365 24시간 등은 인위적인 구분이란 건 알겠는데 시간이 실재가 아니라니. 여기서 시간이란 정말 숫자만 의미하는 건가?

 

149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단절된 형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사유(思惟)의 차원에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

그렇지. ‘미래는 결코 오지 않는다. 그래서 미래(未來).’와 비슷한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릇이 되지 말아야

151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덕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자본가는 어느 한 분야에 스스로 옥죄이기를 철저하게 거부해왔던 것이지요. ~ 전문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래층에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육예(六藝)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 (), (), (), (), ()를 모두 익혀야 했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시도 읊고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창칼도 다루었습니다. 문사철(文史哲) 시서화(詩書畵)를 두루 익혀야 했습니다. ~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

152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강조되고 있는 전문성 담론이 바로 2천 년 전의 노예 계급의 그것으로 회귀하는 것임을 반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전문가가 되는 것보다 여러 재능을 조화롭게 쓰는 르네상스적 삶을 살고 싶은 나, 비정상인가요?’를 고민했었는데이렇게 명쾌한 답을 찾았다. 맞다. 우리나라만 봐도 이론뿐일지는 모르겠지만 전인교육(全人敎育)’이 주요 교육 이념이다. 즉 한가지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육예(六藝)를 두루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의 비싼 사립학교에서는 학교 내에서 방과 후에 온갖 종류의 육예 활동이 가능하며, 중산층의 기준에서도 경제적 정의 말고 외국어와 스포츠, 악기 등 육예에 조예가 있어야 한다. 더 이상 내가 비정상인가를 고민하지 말고 있는 재주에 감사하며 잘 즐기면서 살자.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153 ()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지서도 바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 덕치주의는 법치주의에 비해 보다 근본적인 관점, 즉 인간의 삶과 그 삶의 내용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4 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형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56 유명인의 부정이나 추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부정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거나 추락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기 보다는 한마디로 고소하다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과 추락에 대하여, 그것도 사회 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단계가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연예인의 스캔들이나 이로 인한 추락을 보면서 그럴 줄 알았어라며 고소해 하던 나. 반성한다.

 

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

158 미인은 대체로 자신에 대한 칭찬을 미리 예상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칭찬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준비된 사람입니다. ~ 예상했던 칭찬이 끝내 없는 경우에 무척 서운한 것은 물론이지만 반면에 예상대로 칭찬을 받는 경우에도 그 칭찬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지요.

미인에만 한정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미모뿐 아니라 재주나 잘한 일에 대해서도 칭찬을 미리 예상하게 된다. 칭찬을 받으면 당연하고 칭찬이 없음 무척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아쉽기는 하다.

 

159 양이 큰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 한마디로 양은 물질적 토대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 흐뭇한 마음, 안도의 마음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존과 평화

162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 따라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63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168 옛말에 쉰 살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그가 맺어온 인간관계가 안전망이 되어 그의 노후를 책임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삶의 내용 자체를 인간적이고 덕성스럽게 영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말하자면 복지 문제를 삶의 문제로 포용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옛말인 것 같다. 이 말의 인간관계의 안전망은 자식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이제는 쉰 살, 아니 그보다 1~ 20년 쯤은 더 성실하게 살아서 스스로 노후를 걱정하지 않게 해야 한다.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

171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 관계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지요. ~ 함부로 말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서라고 합니다. ~ ()은 원래 신()에게 고하는 자기 맹세이므로 신()이란 곧 신()에 대한 맹세로 보기도 합니다. ~ 그만큼 신()의 의미는 엄격한 것이지요.

말의 무거움과 엄중함. 항상 기억하면서 살고 싶다. 그 첫 단계. 말을 많이 하지 말자.

 

172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이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치란 신뢰이며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량의 결집이라는 사실입니다.

 

참된 지()는 사람을 아는 것

174 지인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일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

이건 서양에서도 마찬가지. 영어에도 ‘It’s not important that you know who but who know you.’라는 표현이 있다. 즉 내가 누구를 아는 것 보다 누가 나를 아는 가가 더 중요하다는 표현이다. 둘이 서로 알면 금상첨화.

 

175 ()는 지인(知人)이라는 의미를 칼같이 읽는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無知)한 사회입니다.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사회일 뿐입니다.

 

정직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

178 자본주의의 부귀에 대하여 그 과정과 그 도()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 무지합니다. 우리가 선진 자본주의를 국가적 목표로 하여 매진하고 있는 한 자본주의의 그 어두운 역사는 드러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침략과 수탈까지도 합리화되고 미화되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지요.

 

이론과 실천의 통일

180 책을 읽는 것()이나 책을 덮고 생각하는 것()은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의미 이상일 수가 없었습니다. ~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사를 경험과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임에 비하여 사()는 특수한 것(specialism)입니다. ~ 학교 연구실에서 학문에만 몰두하는 교수가 현실에 어두운 것이 사실입니다. 반대로 자기 경험을 유일한 잣대로 삼거나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일을 처리하면 위험한 것이지요.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

186 진정한 지()란 무지(無知)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야말로 지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187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영합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법이지요. 그나마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것은 세상을 우리에게 맞추려는 우직한 노력 때문입니다.

동양사상은 이런 부분에서 매우 깊이 있고 지혜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말장난 같다는 생각이 쉽게 떠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188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189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190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

만인으로부터 호감을 받는 경우와 만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경우 둘 다 좋지 않다는 것이지요.

맞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도 없고, 설사 있다고 해도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누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가의 문제가 있다. 여기서는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현실에서는 마을의 힘있는 사람,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문제.

 

193 고대 사상을 오늘의 시제에서 평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당시의 사회적 조건에서 어떠한 의미로 진술된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모든 사상은 역사적 산물입니다.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묻히는 것이지요. 당시의 가치, 당시의 언어로 읽는 것은 해석학의 기본입니다.

 

광고 카피의 약속

195 내용이 형식을 잃어버리면 거칠게 되고 형식이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면 공동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학습과 놀이와 노동의 통일

200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요즘은 특히 유아들에게 이런 이론을 적용한 놀이 겸 학습, 노동 과정이 많이 개발되어 있는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이 부럽다.

 

산과 강은 오래된 친구입니다.

201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動的)이고 인자는 정적(靜的)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 ~

오늘날에는 굳이 지자와 인자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 지자와 인자라는 특징이 각각 별개의 사람에게 외화되어 있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내면에 복합적으로 혼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굳이 대비할 필요가 없을지 모릅니다.

나는 물을 좋아하고 산을 싫어해서 지자(知者)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런 구분이 없다니. 내 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인자의 성향을 찾아봐야겠다.

 

201 지자는 눈빛도 총명하고 사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며 특히 사물의 변화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인자는 한마디로 세상의 무궁한 관계망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지자는 개별적인 사물들 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인자는 최대한의 관계성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시 나는 지자(知者) 쪽에 가까운 것 같다. 인자는 있다 해도 아주 깊이 숨어있는 것 같다.

 

공자의 모습

203 공자는 스스로 비천한 출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공자의 초기 입지는 국()이 아닌 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유가(儒家)의 발상 공간이 국과 국 사이의 야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야라는 공간은 국법 질서가 미치지 못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국의 질서에 저항하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의 근거지이기도 했다는 것이지요. 이 근거지에서 소유(小儒)를 극복하고 인문 질서를 세우고 대유(大儒)의 길, 즉 군자(君子)의 도()를 지향했던 것이 공자와 공자학파라는 것이지요. 보수와 진보, 억압과 자유라는 두 개의 대립축 사이에 공자학파의 사상적 본령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공자의 이러한 재야성(在野性)이 공자의 인간과 사상을 원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맹자의 의(): <맹자>(孟子)

어찌 이()를 말씀하십니까

213 인과 의의 차이가 곧 공자와 맹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럿이 함께하는 즐거움

217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 테면 민()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의 민본 사상의 핵심입니다. 임금과 사직을 두는 목적이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219 현자는 여민동락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 무심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일반적 정서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닮는 것을 피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에 가치를 두려고 하지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개인적 정서의 만족을 낙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많이 찔린다.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

225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의 싹이다. 사람에게 이 네 가지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

 

화살 만드는 사람과 갑옷 만드는 사람

229 사람의 소위(所爲), 즉 하는 일에 따라서 그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입장에 따라 그 생각과 정서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인간 본성의 사회적 존재 양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성선(性善)이란 어떤 경우에나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에 따라 달리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본성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 맹자는 그 사람의 사상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본성도 사회적 입장에 따라서 재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사회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요.

이래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요즘 같아서는 어떤 회사 얼마나 윤리적인에서 일을 할지 선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231 인을 행하지 않고, 지혜롭지 못하며, 무례하고, 의롭지 못한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 남의 부림을 받으면서 남의 부림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마치 활 만드는 사람이 활 만드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같고, 화살 만드는 사람이 화살 만드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열심히 인을 행하는 것만 못하다. 활을 쏠 때는 자세를 바르게 한 후에 쏘는 법이다.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으면 자기를 이긴 자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과녁에 맞지 않은 까닭을)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소를 양으로 바꾸는 까닭

237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239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 맹자가 사단(四端)의 하나로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피차 배려하지 않습니다. 소매치기나 폭행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잠시만 지나고 나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242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1,000만명이 넘게 사는 거대 도시에서 이웃, 지나치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지속성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지너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245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 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 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捷徑)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모욕하는 법

248 나는 맹모보다는 한석봉의 어머니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 맹모처럼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몸소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자식이 그것을 본받게 했던 것이지요. ~

부모가 직접 자신의 일면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교육적 효과는 차치하고라도 참된 스승의 모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그렇게 하려고 노력은 하나 실행이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도 못 하면서 자식에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 정말 못할 짓이라고 본다.

 

6.     노자의 도와 자연: <노자>(老子)

()는 자연을 본받습니다

253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自然)입니다. 노자의 귀()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노자가 보이지 않는 <노자>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닙니다

263 더욱더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같은 것이 두 측면이라는 선언입니다. ~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제로(0)’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無名)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有名)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자유로운 식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267 이처럼 상식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고 또 역사적인 지식(?)이 있어야 올바른 해석이 가능한 것이지요.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자구에 매달리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외국어를 번역할 때도 마찬가지. 제대로 된 번역을 하려면 한 문장만 봐서는 안된다. Context를 알아야 하고 그 글의 배경까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270 따라서 노자의 무()제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을 초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입니다.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무라는 것이지요.

 

271 도가 작용하여 만물이 생성 변화 발전하는 것 그것이 유()입니다. 형이상학적 체()는 무이지만 형이하학적 용()은 유라는 것이지요. ‘도무수유(道無水有)’가 바로 그것입니다. 도는 없고 물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무형인 도체(道體)가 유형인 도용(道用)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결론적으로 무의 세계든 유의 세계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한 세계입니다.

 

인위(人爲)는 거짓()입니다

273 노자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대립적인 것은 없습니다. 상호 전화(轉化)돌 수 없는 고정 불변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호 전화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인 체계입니다.

 

274 미와 선은 지역이나 시대에 갇혀 있는 사회적 개념입니다. 미와 선의 그러한 특성을 한마디로 인위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 인식의 상투성을 반성하고, 나아가 실천 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인위적 작풍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입니다.

 

277 유무(有無), 난이(難易), 고저(高低), 장단(長短)은 비교할 것이 아니지요.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굳이 비교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지요. 더구나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미의식마저도 기존의 인위적 틀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지요.

동양사상 중에서도 특히 도와 불교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더 나아가 말장난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제대로 알아 들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할까?

 

277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 열린 마음과 유장(悠長)한 걸음걸이로 대응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지요.

 

뼈를 튼튼히 해야

278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해야 하며,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282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285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曲流)하기도 하고 할수(割水)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내가 물을 좋아하고 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 중의 하나.

 

287 물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뜻이며, 또 가장 약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민초가 그렇습니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이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며 이를 대신할 다른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88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

첫째,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수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흐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

둘째, 다수는 곧 정의(正義)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 원리입니다. 불벌중책(不罰衆責), 많은 사람이 범한 잘못은 벌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신호는 신호 위반자를 처벌하기 보다는 신호등을 철거해야 하는 것이지요. ~ 약한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수이기 때문이며 다수가 바로 현실이며 정의라는 것이지요.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수가 항상 옳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나쁜 다수가 이기는 걸 많이 봤다.

 

289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잇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빔이 쓰임이 됩니다

293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일이 지금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294 참석했을 경우에는 눈에 띄지 않고, 결석했을 경우에는 그 자리가 큼직하게 텅 비어버리는 그런 분입니다. 아마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이것저것 꼭 필요한 일들을 거두거나 거들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됩니다 없는 듯이 있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노자의 무()를 연상케 하는 품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 무와 유가 절묘하게 융화되고 있는 것이 바람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런 사람을 존재감이 없다고 폄하한다. 동양사상을 실천하고 살기에는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살아야하는 건 아닌가?

 

스스로를 신뢰하도록

295 가장 이상적인 정치 즉 태상(太上)의 정치는 백성들이 임금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임금이 백성들의 삶에 간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 최고의 정치는 무치(무치)라는 것이지요. 그 다음이 백성들이 친애하고 칭송하는 임금입니다. 덕치(德治)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임금이 백성들을 자상하게 보살피기 때문에 백성들이 친애하고 칭송하겠지만 이러한 임금은 없는 듯이 존재하는 임금만 못하다는 것이지요. ~

요컨대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품성은 백성, 즉 민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뢰함으로써 신뢰받는 입입니다. 백성들을 믿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296 ()을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백성개위아자연’, 즉 모든 성취는 백성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믿게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정치가는 진심으로 백성들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정치적 목표는 백성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그러한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려면 얼마나 도를 닦아야 할까? 나라는 커녕 일개 회사에서도 잘 된 일의 공을 부하직원에게 돌리는 상사를 보기 어렵다.

 

298 치산치수(治山治水)에서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개입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정치라는 것이지요. 백성들의 삶은 한강이나 북한산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수많은 세월을 겪어온 것입니다. 장구한 역사를 겪어온 가장 자연스러운 가치와 질서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존중해야 하고 그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노자의 도()이고 노자의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299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역시나 아직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300 돈이 많은 사람은 겉으로는 별로 없는 듯이 차리고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헙수룩하게 차려입어도 개의치 않지요. 많이 아는 사람도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지요. ~

어떤 분야든 최고 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뭐든 잘 모르고, 자신이 없는 사람이 더 겉치레를 하고 꾸미는 것 같다. 꾸밀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지

 

302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화자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말이 빠른 편이다. 프리젠테이션을 하거나 강의를 하는 등 많은 사람 앞에서 말을 할 때, 긴장하거나 흥분하면 더 빨라지면서 결국 청자는 물론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말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신경을 써도 잠시는 괜찮지만 잠시 후에 도로 빨라진다. 평소에 느리게 말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겠다.

 

진보란 단순화입니다

304 노자 사상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것의 핵심은 동()보다는 정(), (滿)보다는 허()를 교()보다는 졸(), ()보다는 자(), 그리고 진()보다는 귀()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 데 있습니다.

 

7.     장자의 소요: <장자>(莊子)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310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른바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입니다 개인을 지도, 감독, 보호하려는 일체의 행정적 또는 이념적 규제를 인위적 재앙으로 파악하였습니다.

 

311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잇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313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겠다는 것이 바로 장자입니다. 부정적이기는커녕 대단히 낙천적인 세계관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게. 이런 부분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장자와는 다르다. 역시 나는 겉핥기조차 안 되는 지식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

316 장자의 무시비(無是非)란 결국 통치자에게 유리한 논리임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호루라기는 권력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장자 사상이 권력에 봉사한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렇게 원용되었을 뿐이며 <장자>는 권력 그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사상으로 평가됩니다.

 

높이 나는 새가 먼 곳을 바라 봅니다

317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318 장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도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 것에도 기대지 않고 (無待),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 경지가 장자의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해탈의 경지와 비슷한 것 같다.

 

319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

322 현실의 상대주의적 한계를 깨달아 사물의 한 면만을 보지 말고 하늘에 비추어 보고, 도의 중심에서 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입니다

325 ‘포정해우의 이야기는 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도()에 관한 이야기임은 물론입니다. 장자 사상의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 평가됩니다.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것을 체득하고 있는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325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 짧은 것은 늘여서도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우환이 없어질 까닭이 없다.

<장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글귀. 짧은 다리는 짧은 대로 긴 다리는 긴 다리대로 그 소용과 이유가 있다.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모르고 남의 것을 탐하지 말자.

 

327 한마디로 인()을 거부하고 천()과 합일해야 한다는 것이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328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合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습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끄러워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

331 그러나 장자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미리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인간이 비인간화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支出)이 노동이지요. ~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노동이 삶의 실현. 자기가 잘 하고 좋아해야 하는 일을 해야만 삶이 행복해지는 이유다.

 

333 최근 여론조사 전화가 부쩍 많이 걸려옵니다. 그런데 참으로 황당한 것은 기계와 기계가 서로 응답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옆에서 보자니 가관이었어요. 이미 녹음된 질문이 질문을 하고 답변하는 쪽도 응답기가 돌아가는 것이지요. 기계와 기계가 서로 상대방을 고려하는 법 없이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이래서 나는 기계가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사람이 할 일은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 마저 해결하는 기계가 나올거라 하지만 솔직히 나는 믿지 않는다. 아무리 기계가 높은 지능을 갖는다 해도 마음마저 가질 수는 없다.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하다

335 자기가 불치병자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깨닫고 자식만이라도 자기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이 참담할 정도로 가슴을 적십니다. 엄중한 자기 성찰과 냉철한 문명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335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반성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미혹(迷惑)을 반성할 여지가 원천적으로 없어지는 것이지요. 한 사회, 한 시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 그 시대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것을 답습할 까 봐 부단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회 발전은 그러한 경로를 거치는 것이지요.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입니다

337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 (글로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38 세상에서 도()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형()과 색()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과 성()일 뿐이다.  

 

쓸모없는 나무와 울지 못하는 거위

339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중간, 중용, 균형이 제일 어렵더라.

 

340 마음을 만물의 근원인 도()에 노닐게 함으로써 만물을 부리되 만물에 얽매이지 않아야 화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빈 배

343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步行)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앞서 나온 삶이란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도로가 아니라 자체란 글귀와 일맥상통한다. 삶은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 여행 역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정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이다.

 

나비 꿈

345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물화(物化)라 한다. ~

장주와 나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개별적 사물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커다란 전체의 미미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지요. 개별적 사물과 그 개별적 상()을 아우르는 깨달음이 바로 제물론(齊物論)’입니다. ~

세상의 시비와 진위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넘어서고 망라하는 것이 제()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식이란 분별상(分別相)에 매달리고 있는 분별지(分別智)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347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입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요.

 

347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물은 이이일(異而一)의 관계, 다르면서도 같은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 침투(interpenetrate)하는 것이지요. 장자의 나비 꿈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순과 통일’, ‘상호 침투’, 스승이면서 제자. 모두 살아가면서 내가 꼭 기억해야할 것들이다.

 

혼돈과 일곱 구멍

349 날마다 구멍 한 개씩 뚫어주었는데 칠 일 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

여기서 구멍을 뚫는 행위가 바로 통체적인 전체를 분()하고 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누고 가르는 것이지요. ~ 혼돈은 이러한 분석과 분별 이전의 통체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혼돈이 죽어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진정한 세계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참다운 지식

351 지식이란 한마디로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명()입니다. 그 명의 실체가 되고 있는 실()과 비교하여 명실(名實)이 부합할 때에 지식은 합당(合當)한 것이 됩니다.

 

354 “나는 하늘과 땅을 널()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으로 알며, 별을 구슬로 삼고, 세상 만물을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네. 이처럼 내 장례를 위하여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또 더한단 말이냐?” ~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 것이고, 땅 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될 것이다. (장례를 후히 지내는 것은) 한쪽 것을 빼앗아 다른 쪽에다 주어 편을 드는 것일 뿐이다. 인지(人知)라는 불공평한 측도로 사물을 공평하게 하려고 한들 그것은 결코 진정한 공평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장례를 지냈다면 정말 득도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인지(人知)라는 불공평한 측도로 사물을 공평하게 하려고 한들 그것은 결코 진정한 공평이 될 수 없는 것이다라는 문구는 공감하고 동의하지만 또 실제로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해서 사랑스러운인간이라 생각한다.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357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즐기기이런 건 요즘은 오히려 서양식 사고방식 같은데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묵자>(墨子)

여러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됩니다

363 사상이란 독자성에 앞서 시대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시대가 사상을 낳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음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학파 간의 차이는 그 시대의 과제를 인식하는 관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 학파 간의 차별화가 진행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학파 간의 침투가 진행되는 것이 사상사의 일반적 발전 과정입니다. 여러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되듯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상호 침투합니다.

 

묵자의 검은 얼굴

364 묵자(墨子)의 묵()은 죄인의 이마에 먹자로 자자(刺字)하는 묵형((墨형)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 검은 노동복을 입고 전쟁을 반대하고 허례(虛禮) 허식(虛飾)을 배격하며 근로와 절용(節用)을 주장하는 하층민이나 공인(工人)들의 집단이 묵가라는 것입니다.

365 나도 오랫동안 수형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정서를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만 묵적처럼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름으로 삼아 공공연히 밝힌다는 것은 그 형벌이 부당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또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언하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반체제적 성격을 분명히 선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당시는 혁명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혁명적 상황에서 묵가는 통치 권력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좌파 조직의 좌파 사상이었으며 묵적이란 이름은 그것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자는 그동안 내가 오해하고 있었다. “묵자(墨子)”라는 이름에서 왠지 어둠의 포스가 느껴져 법가사상가 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반대 방향이라고 할 수 있는 좌파사상가이자 박애주의자란다. 나의 무식함의 깊이를 깨달았다.

 

366 우임금의 실천궁행을 모델로 삼은 것은 유가가 모델로 삼고 있는 주()나라의 계급 사회가 아닌 하()나라의 공동체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

묵가 집단이 이처럼 헌신적 실천을 강조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몸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어 누구나 깡말랐고 살갗 또한 먹빛처럼 검었다는 것이지요. ~

이처럼 묵자는 다른 학파의 사람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층 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검소한 삶을 영위하고 신명을 다하여 실천궁행하는 모습이 묵가의 이미지입니다.

 

2천 년 만에 복권된 <묵자>

370 백성들은 세 가지의 고통을 받고 있는 바, 주린 자는 먹을 것이 없고, 추운 자는 입을 것이 없고, 일하는 자는 쉴 틈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보더라도 묵자가 기층 민중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에 근거하여 묵자는 겸애(兼愛)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交利)라는 상생(相生)이론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연대(連帶)라는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당면의 실천적 과제로서 반전 평화의 기치를 내걸고 헌신적으로 방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370 묵자는 그의 사상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천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한 모범을 보입니다. ~ 묵가는 강고한 조직과 엄격한 규율을 가진 집단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묵가는 불 속에도 뛰어들고 칼날 위에도 올라설 뿐 아니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발길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박애주의자에 평화주의자인데, 우리가 보통 그들을 떠올릴 때의 유약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불 속에 뛰어들고 칼날 위에도 올라설 뿐 아니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발길을 돌리는 법이 없는 평화주의자라니, 뭔가 앞뒤가 않 맞는 것도 같고 혁명가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371 기층 민중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그들을 조직하여 세습 귀족 중심의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최초의 좌파 사상과 좌파 운동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지배 집단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여 소멸하게 됩니다. 그리고 2천 년이 지난 후인 19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유교 사회의 붕괴와 때를 같이하여 재조명됩니다. 그래서 2천 년 만의 복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지요. <묵자>의 기구한 운명은 민중들의 그것만큼이나 장구한 흑암의 세월을 견뎌온 셈입니다.

371 제자백가 중 가장 위대한 경험론자, 평등론자로 평가받으면서도 하느님 사상(天志論)과 비폭력 사상 때문에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적으로 간주됩니다. 한편 우파로부터는 세습과 상속을 반대하는 그의 평등사상 때문에 여전히 배척되는 기구한 운명을 다시 반복하게 됩니다.

2천년만에 겨우 복권되서도 또 우파와 좌파 양쪽으로부터 배척되다니관념적 이해의 무서움을 알겠다.

 

373 상하의 계층적 차별을 무시하고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묵가 학설은 결국 그 학설의 사회 경제적 기반의 와해와 함께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374 강자는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능멸하고,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 오만하며 간사한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며, 천하의 화와 찬탈과 원한이 생겨나는 근본적인 원인을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 천하의 이익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무든 사람들이 서로 이롭게 되도록 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렇습니다. ~ 겸애와 교리가 사회적으로 작동될 수 있는 법 즉 제도 개혁에 관한 주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겸애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평등주의, 박애주의입니다. 묵자는 사회적 혼란은 바로 나와 남을 구별하는 차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나아가 서로 이익이 되는 상리(相利)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 제도적 법제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76 묵자의 하느님 사상 (天志)은 기독교의 사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하느님이 사랑이듯이 묵자의 하느님 역시 겸애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놀랍게도 기독교 사상과 비슷하다. 사람의 생각이 비슷해서인걸까? 몇 백 년의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두고 이렇게 비슷한 사상이 나타난다는 것이 놀라운 한편, 조지 캠벨의 비교 신학이 맞다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지 캠벨이 기독교와 묵가 사상을 비교하지 못했던 건 아마도 묵가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였던걸까?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마라

379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의로움이라고 한다. 이러고서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379 전쟁은 수천수만의 사람을 살인하는 행위이며, 수많은 사람의 생업을 빼앗고, 불행의 구렁으로 떨어트리는 최대의 죄악입니다. 단 한 줌의 의로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따라서 비공(非攻), 즉 침략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사상이지요. 그런 점에서 반전 평화론이야말로 전국시대 최고의 사상이며 최상의 윤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 나쁜 평화가 없듯이 좋은 전쟁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매일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2천년도 더 전에 깨달은 걸 왜 아직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을까?

 

382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지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전쟁이야말로 흉물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거울에 비추지 마라는 묵자의 금언은 비단 반전의 메시지로만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가 실종된 물신주의적 문화와 의식을 반성하는 귀중한 금언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워야?

384 그 말()은 믿을 수 있고, 그 행동은 반드시 결과가 있으며, 한번 승낙하면 반드시 성실하게 이행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람들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뛰어드는 것이 묵가의 조직 규율입니다.

 

386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놓고 싸우는 사람은 알아준다.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묵가 사상 중에서 가장 공감이 되는 글귀.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슬퍼하다

388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며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것(所染)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져야(染當)’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89 쓸데 없는 비용을 없애는 것은 성왕의 도이며 천하의 큰 이익이다.

지금 청와대에서는 실천 중이라고 한다. 나는 집에서 쓸데 없는 비용을 없애도록 해보자.

 

390 나는 사실 거리마다 즐비한 그 많은 음식점이 불황을 겪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식을 해야 할지 걱정됩니다. ~

새로운 상품이나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부단히 그 규모를 확대해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 운동의 일환일 뿐입니다.

나도 걱정이다. 한편에서는 절약을 외치지만 사실 내가 절약하는 만큼 원래 소비하던 곳의 수익은 줄어든다. 마케팅을 할 때 소비자의 니즈를 찾고 이를 자극하라고 하는데 이 때 니즈는 소비자가 정말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고 (갖고 싶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상품이나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를 끊임없이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게 될텐데걱정이긴 하지만 어떤 일을 하든지 그런 마케팅을 할 수밖에 없을텐데. 진짜 걱정이다.

 

393 묵자의 입장은 기층 민중의 이익입니다. 그리고 기층 민중의 이익은 전쟁을 반대하고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이처럼 묵자 사상의 근본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용, 절장(節葬), 사과 등 근검절약할 것을 주장하여 자연의 질서와 사회적 구조를 함께 온전히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묵자 사상은 인간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을 철학적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처럼 묵자의 도는 근본에 있어서 관계론입니다. 묵자는 결코 일방적인 사랑이나 희생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맺고 있는 상화 관계를 강조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관계의 본질이라고 주장합니다. 겸애와 함께 교리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관계의 본질을 상생(相生)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묵자는 겸애와 교리를 하늘의 뜻이라고 합니다. 묵자의 천지론(天志論)입니다. ~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천은 도()와 마찬가지로 진리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겸상애(兼相愛)와 교상리(交相利)가 하늘의 뜻이라는 주장은 그것이 세계의 본질적 구조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 따라서 묵자의 천()은 인격천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자의 도와 같은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상애상리(相愛相利)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형식으로 그의 사상을 개진하고 있는 것이지요.

 

398 맹자는 묵가의 고결한 가치인 엄격성과 비타협성 그 자체를 비판합니다. 그리고 겸애라는 이상주의적 가치에 대해서도 그것이 인지상정에 어긋나는 것임을 비판합니다. ~

순은 임금 자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몰래 부친을 업고 도망가 멀리 바닷가에 숨어 살면서 부친을 봉양하고 천하를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묵가의 박애와 평화주의가 맘에 들었지만 읽을수록 너무 비현실적이고 비인간적이란 생각이 들게 되었다. 가장 인간을 사랑할 것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어긋나고 있다. 예에서 보듯이 오히려 맹자가 인간적이다.

 

399 노래하고 싶을 때 노래하지 말고, 울고 싶을 때 울지 말고, 즐거울 때 즐거워하지 말아야 한다면 이런 묵가의 절제는 과연 인간의 본성과 맞는 것인가? 묵가의 원칙은 너무나 각박하다. ~ 묵자와 금활리의 뜻은 좋지만 실천은 잘못된 것이다. ~ 사회를 어지럽히기에는 최상이요 다스리기에는 최하이다. ~ 묵자는 천하에 참으로 좋은 인물이다. ~ 자기의 생활이 아무리 마른 나무처럼 되어도 자기의 주장을 버리지 않으니 이는 정말 구세(救世)의 재사(才士)라 하겠다.

 

400 묵자가 죽은 후에도 200여 년 동안 여전히 셰력을 떨쳤지만 그후 2천 년이라는 긴 망각의 시대를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묵가는 좌파사상과 좌파운동이 그 이후 장구한 역사 속에서 겪어 나갈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역사의 초기에 미리 보여준 역설적인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순자>(荀子)

하늘은 하늘일 뿐

406 바르게 응하면 이롭고 어지럽게 응하면 흉할 뿐이다. 농사를 부지런히 하고 아껴 쓰면 하늘이 가난하게 할 수 없고, 기르고 비축하고 때 맞추어 움직이면 하늘이 병들게 할 수 없으며, 도를 닦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407 군자는 소인이 떠든다고 하여 할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다. 하늘에는 변함없는 법칙이 있으며, 당에는 변함없는 규격이 있으며, 군자에게는 변함없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능동적 참여

408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실천적 노력이라는 것이지요. 순자의 능참실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를 제어하여 활용할 것을 강조합니다. ‘자연은 만물을 만들었지만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인본주의적 관점입니다. 이것은 유가학파의 공통된 입장으로 문화사관(文化史觀), 발전사관(發展史觀)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을 벗어 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人定勝天)이 바로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 순자 사상은 실제에 있어서 공자나 맹자에 비하여 훨씬 더 현실적이었으며 당시 패자(覇者)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인간의 적극 의지와 능동적 실천에 근거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묵가처럼 순자도 그동안 오해했던 것 같다. 순자가 법가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법가를 몰인정하고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다시 한번 나의 무식함을 깨닫는다.

 

410 순자에게 있어서 하늘을 안다(知天)는 것은 하늘의 무한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대교(大巧) 즉 뛰어난 장인(匠人)은 손대지 않고 남겨두는 데서 그 진가를 발휘하며, 뛰어난 지자(大智)는 생각을 남겨두는 데 그 진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겨두는 것은 천의 법칙을 모두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을 구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천(知天)은 지기(知己)와 통하는 것입니다.

 

성악설의 이해와 오해

416 묵자는 소염론(所染論)에서 인간의 본성은 물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이론이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귀납적으로 구성한 개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417 순자의 이론 체계는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하여 악한 성()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순자는 모든 사람은 인의(仁義)와 법도(法度)를 알 수 있는 지()의 바탕을 갖추고 있으며 또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선단(善端)을 갖추고 있다는 맹자의 주장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순자는 모든 가치 있는 문화적 소산은 인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인문 철학자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란 기르는 것이다

418 순자의 예론은 사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 이론입니다. 첫째 예란 물()을 기르는 것이며, 둘째 그 물로써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되 물질의 생산과 소비에 일정한 한계를 두어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예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경우의 예란 당연히 사회의 제도와 규범입니다. 제도와 규범이 분계(分界)를 세워서 쟁란(爭亂)을 안정적으로 방지한다는 것입니다. 순자의 예는 후에 법이 됩니다.

 

420 맹자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초도덕적 가치를 지향하고 천명론이라는 종교적 편향을 보였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보수적이었다고 평가됩니다. 이에 반하여 순자는 사회적 통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천명을 비판하고 관념적 잔재를 떨어버렸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 순자 사상은 현실 인식과 인간 이해에 있어서 냉정한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그러한 냉정함을 바탕으로 전통적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명하게 단절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비교하니 이해가 빠르다. 그리고 장.단점이 보인다. 어떤 한 사상도 장점만 있을 수는 없다. 주장하는 사상가는 본인의 사상이 최고이고 무결점이라고 주장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한 가지만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각각의 장점을 나의 사정과 상황에 맞게 받아들여 적용하면 될 것이다.

 

나무는 먹줄을 받아 바르게 됩니다

423 순자가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첫째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욕구 충족이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성악적 측면이 순자의 교육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으며, 성인이나 폭군이나 군자나 소인이나 그 본성은 같은 것이며,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인간관이 되고 있습니다.

 

423 인간에게 선단(善端)은 없지만 인간은 인() () () ()을 알 수 있는 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교화될 수 있으며 또 교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교육학이며 사회학입니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까닭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나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 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424 순자는 수기보다는 치인을 앞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수양에 앞서 제도의 합리성과 사회적 정의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성은 선천적인 것도 아니며 개인의 수양의 결과물도 아니며 오로지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순자는 개량주의적이기보다는 개혁주의적입니다. 훌륭한 규범과 제도가 사람을 착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도덕성의 근원을 인간의 본성에서 찾는 맹자가 주정주의(主情主義)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사회 제도에서 찾는 순자는 주지주의(主知主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에게 일관되고 있는 것이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사실입니다. ~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보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에게서 훨씬 더 깊이 있는 인간주의를 발견하는 것이지요.

순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도(人道)와 인심(人心)입니다. 천도(天道)와 천심(天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게. 순자에게서 깊은 인간주의와 인간에 대한 신뢰가 느껴진다. 역시 나의 오해였다.

 

425 그는 성인(聖人)이라면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군자는 자기의 내부에 있는 것을 공경할 뿐이며, 하늘에 잇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순자의 이와 같은 인간주의와 인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주의가 감상적으로 피력되지 않고 냉정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와 악이 함께하는 까닭

426 순자는 법이란 무엇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잠재력을 길러내는 것이며, ‘이란 글자 그대로 물()이 잘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427 음악이란 천하를 고르게 하는 것이며, 화목하게 하는 것이며, 사람의 정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왕이 음악을 만든 것이다.

묵가와 법가에 대해 의외라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법가는 왠지 법만 중요시 여기고 딱딱해 보여서 음악 등 예술을 폄하할 거라 생각했는데.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묵가가 예술이 소용없다고 하고 법가가 음악을 꼭 필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428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좇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養生)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 시대에는 이와 반대이다.

왠지 낯설지 않다.

 

10.  법가와 천하 통일: <한비자>(韓非子)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

432 법가는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응 방식을 모색해갑니다. 법가의 사관을 미래사관(未來事觀) 또는 변화사관(變化史觀)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법가의 현실 인식입니다.

 

옥중에서 사약을 받은 한비자

439 당시의 법치란 무엇보다 권력의 자의성(恣意性)을 제한하고 성문법에 근거하여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앙이 강조한 행제야천(行制也天)입니다. 법제를 행함에 있어서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법가의 차별성을 개혁성에서만 찾는 것은 법가의 일면만을 부각시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법의 공개성이야말로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것은 귀족들이 누리고 있던 특권을 폐지하고 군주의 절대 권력을 뒷받침하는 것이었습니다.

 

강한 나라 약한 나라

442 법 지상주의의 선언입니다. 법치는 먼저 귀족, 지자, 용자 등 법외자(法外者)에 대한 규제로 나타납니다. 법 위에 군림하거나 법을 지키지 않는 사회적 강자들에 대한 규제에서 시작합니다. ~

귀족을 내려 똑같이 상벌로써 다스리는 것입니다. 유가는 반대로 서민을 올려 귀족과 마찬가지로 예로써 다스리자는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법가의 주장이 더 현실성이 있고 공정 사회 구현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물론 서민을 올려 귀족과 마찬가지로 대하면 좋겠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

 

443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생스럽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로우며, ()의 도리는 처음에는 잠깐 동안 즐겁지만 뒤에 가서는 곤궁해진다

 

임금의 두 자루 칼

448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관료제란 사사로운 통치 방식을 지양하는, 이를테면 제도와 조직을 통한 통치 방식이라는 사실입니다. 법가의 법치 부분이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라의 쇠망을 알려주는 일곱 가지 징표

449 나라는 작은데 대부의 영지는 크고, 임금의 권세는 가벼운데 신하의 세도가 심하면 나라는 망한다. 법령을 완비하지 않고 지모와 꾀로써 일을 처리하거나, 나라를 황폐한 채로 버려두고 동맹국의 도움만 믿고 있으면 망한다. ~ 궁전과 누각과 정원을 꾸미고, 수레, 의복, 가구들을 호사스럽게 하며,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고 재화를 낭비하면 나라는 망한다. ~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의 말만 따르고 많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한 사람만을 요직에 앉히면 나라는 망한다.

 

탁과 발, 책의 현실

452 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나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라 반성해 본다. 그런데 책과 기존 데이터의 참고 없이 내가 경험한 현실만을 가지고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탁과 발의 비교가 책과 현실의 비교와는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나라를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 부류

교사는 졸성보다 못한 법

456 나는 그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 사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상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요. 사상과 시대, 사상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는 것도 같습니다. 그것의 분리가 바로 관념화의 과정이고 물신화의 과정입니다.

 

457 교사(巧詐)가 졸성(拙誠)보다 못하다는 이 말의 뜻을 나는 세상 사람들 중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로 읽고 있습니다. 아무리 교묘하게 꾸미더라도 결국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458 그림이든 노래든 글이든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공감. 요즘 쏟아져 나오는 노래와 책이 나타났다 1~2주만에 그냥 사라지는 것은 진실과 혼이 담겨있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나는 인간의 진실과 혼이 담긴 책을 쓸 수 있을까?

 

법가를 위한 변명

460 모든 사상은 다른 모든 사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파란만장한 역사적 전개 과정의 일환으로 출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떠한 철학 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식을 제약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461 법가의 개혁성은 구사회의 종법 구조가 이완되고 보수적 저항성이 약화됨으로써 형성된 새로운 공간을 충분히 향유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공간은 일차적으로 과거의 관념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미래사관과 변화사관이 그것입니다. 법가의 개혁성은 이 과거의 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구조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개념입니다. 법치주의는 이러한 개혁성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의 법치주의는 먼저 성문법의 제정과 신상필벌 원칙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대단한 발전입니다. 군주의 자의적 폭력에 대한 제도적 규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사회적 예측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천하 통일과 이사

466 진나라 최대의 공신이었던 이사는 법가적 단호함과 공평무사함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간신 조고(趙高)에게 이용당하고 결국 비명에 가고 맙니다. ~ 그 결정적 과오는 역시 윗사람의 의중을 당자보다 먼저 헤아려 영합하기에 급급했고 스스로 공명정대한 원칙을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잇습니다. 간신 조고의 사설(邪說)에 부화(附和)하여 적장자(嫡長子)인 부소(扶蘇)를 폐하고 서자인 호해(胡亥)를 옹립한 것은 정도(正道)를 배반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표방한 법가의 공명함과 공평함을 스스로 허무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비극이고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11.  강의를 마치며: 불교(佛敎), 신유학(新儒學), <대학>(大學), 중용(中庸), 양명학(陽明學)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

474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無邊)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은 미물(微物)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김춘수 시인의 <>이 연상된다. 내가 세상 모든 사물을 찬란한 꽃으로 피울 날이 올까?

 

475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결국 관계로 시작해서 관계로 끝난다.

 

476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분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작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긴 도정에 나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갇혀 잇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잇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트려야 하는 것입니다. 묵자가 슬퍼했듯이 국역유염(國亦有染)’, 나라 전체가 물들어 있기 때문에 국가와 체제가 쌓아놓은 거대한 벽을 허물어야 하는 것이지요.

 

478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지요. ~ 인과 과는 하나가 아니면서 서로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것입니다. 그것을 불이무이(不二無異)라 합니다.

 

478 화엄과 무상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이 불교 속에 있는 것이지요. 모든 사회적 실천과 사회적 업적에 대하여 일말의 의미 부여도 하지 않는 무정부적 해체주의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불교 사상은 해체 철학의 진보성과 무책임성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전과 응전

483 해탈에는 일체의 사회적 관점이 없습니다. 사회적 책무도 사회적 윤리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사회적 실천과 사회적 업적에 대하여 일말의 의미 부여도 하지 않는 무정부적 해체주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학> 독법

487 <대학>은 일반적으로 대인(大人), 즉 귀족, 위정자의 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학>은 단지 지식 계층의 학이라기 보다는 당대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덕이 있는 사회, 백성을 친애하는 사회, 최고의 선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해탈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 <대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평화로운 세계의 건설입니다.

 

491 평천하, 즉 평화로운 세계는 명덕과 친민과 지선이 실현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인간관계가 존중되는 사회(明德), 민주적인 사회(親民), 선량한 사회(至善)를 만들기 위하여 개인의 품성이 도야되어야 함은 물론이며 개인뿐만이 아니라 가()와 국() 그리고 국가 간(天下)의 관계가 평화로워야 합니다.

명덕과 친민, 지선이 실현되는 세상부터가 현실에서는 요원하다. 평천하를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492 세계가 평화롭기 위해서는 테러 국가가 있어서도 안 되지만, 테러를 야기하는 원인 제공자로서의 패권적 국가가 없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테러란 기본적으로 거대 폭력에 대한 저항 폭력입니다. 거대 폭력이 먼저 거론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더구나 저항 폭력을 테러로 규정하고 테러를 빙자하여 폭압적인 개입과 일방주의적 지배를 관철하려는 패권 국가의 거대 폭력이 건재하는 한 세계 평화는 요원한 것이지요.

 

492 세계 평화는 세계를 구성하는 각 국가의 평화이며, 국가의 평화는 국()을 구성하는 각 가()의 평화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의 평화를 위해서는 가의 구성원인 개개인의 품성이 높아져야 합니다.

 

494 해체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거대한 집합표상을 해체하는 통절한 깨달음의 학()이면서 동시에 개인을 탈사회화하고 단 하나의 감성적 코드에 매달리게 만드는 일탈과 도피의 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용> 독법

498 주자가 <중용>을 통하여 제기하려고 하는 가장 절실한 주제는 바로 도()의 큰 근원이란 하늘에서 명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그것을 따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는 것이지요.

 

이학(理學)에 대한 심학(心學)의 비판

502 심론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주체성의 강조입니다. 주체성이 심()이라는 또 하나의 주관적 관념론으로 표상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심론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주체성이라는 적극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상산의 이론을 계승한 왕양명은 성()과 이()를 심()으로 톤합해냅니다. 구체적 현실은 심으로 통일된 인식된 세계이며 그런 점에서 인간과 세계는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왕양명의 체계는 심()=()=()이되 그것은 심으로 통일되는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성리학이 이렇게 탄생되었구나. 역시나 의도와 이론은 좋았으나 실천 과정이 문제다.

 

고전 독법에서 문명 독법으로

506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 인()으로 나아가고 인()은 덕()으로 나아가고 덕은 치국(治國)으로 나아가도 치국은 평천하(平天下)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천하는 도()와 합일되어 소요하는 체계입니다.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잇는 것이지요.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507 우리는 우민화(愚民化)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상품 문화(商品文化)의 실상을 직시하는 것에서 비판 정신을 키워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장 반성하고 깊은 성찰이 필요한 영역이다.

 

508 창신은 재조명과는 다른 창의적 사고가 요구됩니다. 창의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갇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가슴에 두 손

509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의 나와는 완전 반대다. 신영복 교수님을 믿고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도록 노력해보자.

 

509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맞다. 자신이 실천을 못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광고나 마케팅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먹지 않을 음식을, 사용하지 않을 물건이나 서비스를 다른 사람에게 먹어보라고, 써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저자라면

 

l  목차에 대하여

강의()의 순서가 시대적 순서로 되어 있기에 목차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큰 목차는 책의 내용에 따라 잘 분류가 되어 있고 분량도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소목차의 경우 대표성을 띄고 있어서 앞으로 나올 내용을 예상할 수 있게 하고, 정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좋으나 너무 많이 분류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논어의 경우,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와 같이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거나 너무 상세히 분류한 소목차는 통합하는 것이 더 날 것 같다.

 

l  보완이 필요한

저자가 맨 처음에 그리고 거의 매 장에 언급하듯이 사상은 그 시대 속에서 읽고 해석해야 한다. 책의 구조가 역사의 흐름에 따른 것이라면 서론 부분에서 전반적인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갔더라면 책을 읽는데 이해가 더 잘 됐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l  책의 장점

동양 고전 입문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은 후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소개하는 책들을 읽고 싶게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마침 <논어> <도덕경>이 그 다음 차례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강의>에 나온 해석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신화와 인생>과 마찬가지로 강의 내용을 책으로 정리했다. 그런데 <신화와 인생>을 읽으면서는 구어체가 거슬리고 이해에 방해가 되었었는데(아마도 번역서라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이 책은 마치 실제로 신영복 교수의 강의를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어려운 내용을 구어체로 쉽게 풀어서 동양 고전에 흥미를 갖게 하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본다.

 

l  내가 저자라면

내가 가장 관심이 없고 어려워하는 내용인데도 예상외로 이해가 잘 됐다. 저자의 내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저자라면 나와 같은 동양고전 무식자를 위해서 훨씬 쉽게 쓰려고 노력했을 것 같다. 크게 관련이 없는 한 시는 빼고 역사적 배경을 더 넣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쓰면 분량이 너무 늘어나거나 중.고등학생을 위한 책처럼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우려가 들기는 한다. 이 책은 이 책 그대로 두는 게 훨씬 날 것 같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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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5 09:54:14 *.124.22.184

맞아요. 논어볼 때 같이 보면 좋아요~ 전 아예 논어, 노자 부분은 안봤어요. 같이 보려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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