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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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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2일 01시 09분 등록

『논어』

공자, 김원중 역, 글항아리

 

10주차 (6/5~6/11)

티올(윤정욱)

 

I. 작가 분석

 

논어(論語) 이름의 유래 : 한서, 예문지를 보면 스승(공자)이 죽자 공자 문하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모아 논의하여 편찬하였으므로 논어(論語)’라고 한 것이다.

 

1.     공자의 생애 연보

 

B.C.551 아버지의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탄생

B.C.549( 3) 아버지 죽음

B.C.535(17) 어머니 죽음

B.C.533(19) 결혼

B.C.532(20) 아들 리() 출생, 자는 백어(伯魚)

B.C.522(30) 자로, 증점, 염백우, 염구, 중궁 등의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함 

B.C.518(34) 노나라 맹리자가 죽으면서 맹의자 등 두 아들에게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예를 배우라고 당부함

B.C.517(35)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 질문함

B.C.502(50) 공산불요가 공자를 부름

B.C.501(51) 처음 벼슬을 하여 노나라 중도재(中都宰)가 됨

B.C.500(52) 다시 사공(司空)이 되고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됨

B.C.497(55)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감

B.C.496(56) 광 땅에서 액운을 만남. 필힐이 부름

B.C.495(57) 위나라 영공을 만나 벼슬하고 남자(南子)를 만남

B.C.494(58) 벼슬을 그만두고 위나라를 떠남

B.C.492(60) 조나라를 거쳐 송나라로 가다가 환퇴의 액운을 당함

B.C.489(63) 진나라 채나라 초나라를 거쳐 위나라로 돌아감

B.C.488(64) 다시 위나라(출공 재위4)에 벼슬함

B.C.484(68) 노나라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자 노나라로 돌아감, 고국을 떠난 지 14년만임. 이후 유약, 증삼, 자하, 자장 등의 제자를 가르침

B.C.483(69) 아들 리가 죽음

B.C.481(71) 제자 안회가 죽음, 제나라 진항이 임금을 시해하자 노나라 임금에게 토벌을 간했으나 실현되지 않음,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이 사로잡히자 낙심하여 『춘추』 저작을 절필함 

B.C.480(72) 자로가 위나라 난리에 죽음

B.C.479(73) 세상을 떠남(錢穆, 『공자전』, 삼련서점, 2002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공자 [孔子, Confucius]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참조

 

 

2.     공자의 생애 해설

 

공자의 조상은 송나라 미자(微子)의 후손이다. 아버지 숙량흘은 안씨의 딸 징재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숙량흘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만 아홉을 두었고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다리 장애인이었다. 건강한 아들을 원했던 그가 안씨의 딸과 혼인하기를 구하자 그 딸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혼인을 했다. 야합(野合)이란 숙량흘은 70살이 넘었는데 안징재는 16세여서 예에 맞지 않음을 일컬은 것이라고도 하나, 아무튼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니었다. 어머니 안씨가 이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공자를 얻었다. 

 
나면서부터 머리 위가 오목하게 들어간 고로 인하여 구()라고 이름지었다. 공자가 출생한 후 곧 숙량흘은 죽어서 방산(防山)에 묻혔다. 공자는 아버지의 무덤의 위치를 몰라, 어머니가 돌아가자 거리에 빈소를 차렸다. 지방의 나이든 여인이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자 공자는 어머니를 방산에 합장했다. 공자는 가난하고 천하여 자라서는 계씨의 창고지기도 하고 축사지기 노릇도 하였다. 공자는 키가 9 6촌이나 되어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長人)'라고 부르며 이상하게 여겼다. 

 
공자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대부 맹희자(孟釐子)가 병이 나서 곧 죽게 되었을 때, 그는 후계자인 의자(懿子)에게 훈계하며 말하였다. "공구(孔丘)는 성인의 후손인데, 그 조상은 송나라에 있을 때 멸망 당하였다. 그 조상 불보하(弗父何)는 원래 송나라의 후계자였으나, 아우 여공(厲公)에게 양보하였다. 정고보(正考父)에 이르러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을 섬길 때, 세 번 명을 받았는데, 매번 명을 받을 때마다 더욱 공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정()에 새겨놓은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첫 번째 명에 몸을 숙이고, 두 번째 명에 허리를 굽혀 절하고, 세 번째 명에는 큰 절을 한 뒤 받았다. 길을 걸을 때는 중앙을 걷지 않고 담장가를 따라 다녀서 누구도 감히 나를 경멸하지 않았다. 이 솥에 풀과 죽을 쑤어서 청렴하게 살아왔다'라고 하였다. 그 공손함이 이와 같았다. 내가 듣기로 성인의 후손은 비록 국왕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해도 반드시 재덕(才德)에 통달한 자가 있다. 지금 공구는 나이는 어리나 예를 좋아하니 그가 바로 통달한 자가 아니겠느냐?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라." 희자(釐子)가 죽자 의자는 노나라 사람 남궁경숙(南宮敬叔)과 더불어 공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 이해에 계무자(季武子)가 죽고 계평자(季平子)가 대를 이어 경()의 자리에 올랐다. 

 

노 소공(魯昭公) 20, 공자는 나이가 서른이 되었다. 제 경공(齊景公)이 안영(晏嬰)과 함께 노나라에 갔는데,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 진 목공(秦穆公) 나라도 작고 외진 지역에 위치하였지만 패자(覇者)가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나라는 비록 나라는 작아도 그 뜻이 원대하였고, 비록 외진 곳에 처하였어도 정치를 베푸는 것이 매우 정당하였습니다. (목공은) 백리해(百里奚)를 몸소 등용하여 대부(大夫)의 벼슬자리를 내리고 감옥에서 석방시켜 더불어 3일간 대화를 나눈 뒤 그에게 정사를 맡겼습니다. 이로써 천하를 다스렸다면 (목공은) ()도 될 수 있었는데, 패자가 된 것은 오히려 대단치 않은 것입니다." 경공은 매우 기뻐하였다. 

 

공자가 35세 되었을 때, 계평자(季平子)가 후소백(郈昭伯)과 닭싸움 끝에 노 소공에게 죄를 지었다. 소공이 군대를 이끌고 평자를 공격하자 평자는 맹씨(孟氏), 숙손씨(叔孫氏)와 연합하여 3()가 함께 소공을 공격하였다. 소공의 군대는 패해서 제나라로 달아났고, 제나라는 소공을 간후(乾侯)에 거하도록 하였다. 그후 얼마 안 되어 노나라가 어지러워졌다.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 경공(景公)과 통하려고 하였다. 공자는 제나라의 태사(太師)와 음악을 토론하였는데 "()" 음악을 듣고 그것을 배워,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심취하자 제나라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고 말했다. 다른 날에 또 정치를 묻자 공자는 “정사는 비용을 절약하는 데 있다”고 하자, 경공이 기뻐서 장차 공자를 봉하려고 하자, 안영(晏嬰)이 반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유자(儒者)란 약디 약아서 법도를 좇으려 않으며, 오만하고 제멋대로여서 아래 사람으로 삼기 힘들고, 상례를 숭상하여 애도를 다한답시고 파산할지라도 장례는 후히 하니 풍속에 득이 없고, 유세나 하고 다니면서 재물만 빌어먹으니 나라에 득이 없습니다. 큰 현인이 없어진 뒤로, 주나라 왕실이 쇠약하여 예와 음악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공자가 예복(禮服)을 성대하게 차려 입고, 임금에게 예절과 진퇴의 절도를 번잡하게 하고 있으니, 여러 대를 두고 하더라도 그 학문을 다 할 수 없고, 한 평생 하여도 그 예를 다 할 수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그를 써서 제나라의 풍속을 고치고자 하시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는 첫째 일이 아닙니다." 

 

런데 『논어』를 보면 공자는 “안영은 타인과의 교우 관계가 몹시 좋았다. 관계가 오래 지속될수록 더욱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5-17)라며 안영을 찬양하고 있다. 그 후 경공이 공자를 보더라도 예를 묻지 않았다. 다른 날 경공은 공자에게 “선생을 계씨처럼 받들지는 못하더라도, 계씨와 맹씨 사이로 대접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 이에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고까지 하였다. 경공은 나중에 “내가 늙었는지라 등용하지 못하겠다"하니,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갔다. 

 

계씨는 공실(公室)을 업신여기고 배신(陪臣)이 국정을 잡으니, 이 때문으로 노나라에서는 대부 이하 모두가 바른 길(正道)을 무시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벼슬을 포기하고 물러나 『시(), 『서(), 『예(), 『악()』을 닦으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공산불요가 비() 땅을 근거로 계씨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사람을 보내 공자를 불렀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시험해 볼 곳이 없음을 답답해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풍()과 호() 지방에서 일어나 왕이 되었다. 이제 비 땅이 비록 작지만,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고, 가려고 했다. 자로가 화를 내며 공자를 막자, 공자는 말하였다. “나를 부르는 자는 어찌 아무 생각이 없었겠는가? 만약 나를 써준다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성사되지는 못 했다. 

 

그 뒤에 정공(定公)이 공자를 중도(中都)의 읍재로 삼았다. 일년 만에 사방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로 말미암아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에서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공자는 나이 56세에 대사구(大司寇)로서 재상의 일을 맡게 되자 기뻐하였다. 또 정치를 어지럽힌 노나라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죽였다. 공자가 정치를 맡은 지 삼 개월 만에 염소나 돼지를 파는 자는 값을 속이지 않았고, 남녀는 걸을 때 길을 달리하였고,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주워 가지 않았으며, 읍으로 오는 사방의 손님들이 관리에게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모두 대접받고 돌아갔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 일을 전해듣고 두려워하며, “공자가 정치를 하면 반드시 노나라가 패자가 될 것이고, 패자가 되면 우리나라부터 먼저 합병할 것이다” 하면서, 계책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제나라 가운데서 예쁜 여자 80명을 뽑아, 춤을 가르치고 화려한 옷을 입혀 장식을 한 말이 끄는 수레 30 대에 태워 노나라 임금에게 보냈다. 이에 노나라 임금 이하 신하들이 종일 구경하면서 정치에 태만했다. 그러자 공자는 제사 고기를 보내주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공자는 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머물렀다. 위나라 영공(衛靈公)이 묻기를 “노나라에서는 녹봉을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하자, “곡식 육 만( 2000)을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위나라에서도 곡식 육 만을 주었다. 얼마 지난 뒤에 공자를 참소하는 일이 생기자 공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열 달 후 위나라를 떠났다. 진나라로 가면서 광 땅을 지나는데, 광 사람들이 공자를 노나라의 양호로 착각하고 공자의 행차를 멈추게 했다.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한 관계로 5일 동안을 구금했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거백옥의 집에 머물렀다. 위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가 사람을 시켜 공자를 보기를 원한다고 했다. 공자는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만났다. 

 

부인은 갈포(葛布)로 만든 발(휘장) 안 쪽에 있었다. 공자가 문으로 들어와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절을 했다. 부인은 발 안에서 재배를 했는데, 차고 있던 패옥이 쨍그렁 소리를 냈다.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보지 않지만, 만나는 예로 답을 합니다” 하였다. 이 일로 자로가 화를 냈다. 공자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내가 만일 잘못하였다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공자가 조()나라에서 송()나라로 가는 도중, 제자들과 함께 큰 나무 밑에서 예를 익혔다. 송나라 사마(司馬) 환퇴(桓魋)가 공자를 죽이려고 그 나무를 쓰러뜨렸다. 제자들이 떠나기를 재촉하자 공자는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리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공자가 진()나라에 이르렀을 때,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진나라를 정벌해서 세 읍을 빼앗았고, 월나라 왕 구천(句踐)을 회계에서 쳐부수었다. 공자가 진나라에 머무는 3년 동안, 여러 나라들이 계속 전쟁을 벌였다. 진나라는 항상 침략을 당하고 있어서 그 나라를 떠나갔다. 

 

또 포 지방을 지나면서 반란자들이 공자를 붙잡아두고 괴롭히며 말하기를, 만약 위나라로만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놓아주겠다 하였다. 그러자 일행은 곧 맹세를 하고 동문으로 나갔다. 그러나 공자는 곧장 위나라로 갔다. 자공이 묻기를 “어찌 맹세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대답하기를 “강요된 맹세는 귀신도 듣지 않는다” 하였다. 

 

위령공이 늙어 정사에 태만하고 공자를 쓰지 않자, 공자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누가 나를 써주기만 한다면 1년만 되어도 좋고, 3년이면 성과를 낼텐데” 하고 위나라를 떠나갔다. 공자는 서쪽으로 조간자(趙簡子)를 만나려고 황하에 이르렀을 때,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가 조간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공자는 황하 강물에 서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아름답다, 물이여! 저렇게도 출렁거리는구나! 내가 이 물을 건너지 못함은 운명이로구나! 

 

자공이 감히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말하였다. “두명독과 순화는 진()나라의 어진 대부였다. 조간자가 세력을 잡지 못했을 때는 그 두 사람 말을 들은 뒤에 정사를 했는데, 세력을 잡은 뒤에는 그들을 죽이고 정사를 하고 있다. 나는 들으니 ‘태를 쪼개 어린것을 죽이면 기린이 들판에 오지 않고, 연못의 물을 말려 고기를 잡으면 교룡이 음양을 합하지 못하고, 둥지를 뒤엎고 알을 깨뜨리면 봉황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냐? 군자는 자기와 같은 부류를 해침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새나 짐승도 의롭지 못함을 오히려 피할 줄 알거든, 하물며 사람이랴!” 마을로 돌아와 거문고 가락을 연주하며 슬퍼하였다. 

 

가을에 계환자가 병이 들어 수레를 타고 노나라의 성을 보며 “옛날 이 나라가 흥성할 수 있었는데, 내가 공자에게 죄를 얻어 흥하지 못하였구나” 하고 탄식하며, 아들 계강자에게 “내가 죽거든 너는 노나라의 정승으로서 반드시 공자를 모셔와라”하고 당부하였다. 

 

아버지를 장사한 다음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려 하자, 공지어(公之魚)가 말하였다. “옛날에 우리 선군께서 그를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하고, 끝내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 하면, 또 다시 제후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 대신 제자인 염구(冉求)를 불러들였다. 자공(子貢)은 공자에게 노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있음을 알고 염구를 환송하면서 당부하기를 “자네가 등용되거든 곧 공자님을 부르게 하라” 하였다.

 

공자가 진·채의 국경에 있다는 말을 듣고 초나라에서 공자를 초빙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채의 대부들이 모의하면서 “공자가 초나라에서 등용되면 우리들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 일행을 들판에서 에워싸고 억류하자 공자는 초나라로 가지 못하고 식량마저 떨어졌다. 따르는 제자들은 굶고 병들어 잘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그런데도 공자가 강송(講誦)과 현가(弦歌)를 그치지 않자, 자로가 성을 내며 “군자도 이처럼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군자는 원래 곤궁한 것이다. 소인은 곤궁하면 혼란에 빠진다” 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이 불만이 많음을 알고 자로를 불러 말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했는데, 우리의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자로가 말하였다. “우리가 아직 어질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니! 우리가 아직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억류하고 있으니!” 공자가 말하였다. “대답이 그것뿐이냐! 자로야, 만약에 어진 사람은 반드시 남의 신임을 얻는다면 어째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겠느냐? 또 만약에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억류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 비간(比干)이 있었겠는가? 

 

자로가 나오고 자공이 들어가니 공자가 말하였다. “자공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천하에 어느 누구도 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낮추시면 어떨까요? 

 

공자가 말하였다. “자공아, 솜씨 좋은 농부가 씨를 잘 뿌린다고 잘 수확하는 것은 아니다. 솜씨 좋은 기술자가 기술을 잘 발휘한다고 꼭 사람들 뜻을 맞출 수는 없다. 군자는 도를 닦아서, 강기(綱紀)하고 통리(統理)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사람들에게 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너는 네 도를 닦지 않고, 포용되기만을 기다리는구나. 자공아, 네 뜻은 원대하지 않구나! 

 

자공이 나가고 안연이 들어와 뵈니 공자가 말하였다. “안연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의 도가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안회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선생님께서는 밀고 나아가시면 되지, 남이 용납하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그가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도를 닦지 못함은 나의 부끄러움이나, 도를 크게 닦았는데도 써 주지 않음은 임금들의 부끄러움(잘못)입니다. 용납되지 않음을 어찌 근심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흔연히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냐, 안씨의 아들이여! 만약 네가 재물이 많다면, 나는 너의 재무 관리인이 되리라.” 이에 자공을 시켜 초나라로 보냈다. 초나라 소왕(楚昭王)이 군사를 일으켜 공자를 맞이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마침내 계강자가 폐백을 갖추어 공자를 불러들이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만이었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않자, 공자도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그 후 육예를 편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였다. 공자가 72세 때 자로가 위나라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공자가 병이 깊은 후 자공이 찾아왔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를 짚고 문 앞을 거닐다가 “자공아, 왜 이제야 오느냐?” 하였다. 

 

공자는 탄식하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려나! 대들보가 부러지려나! 철인(哲人)이 시들려나!” 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가 오래 된지라 아무도 나를 받드는 이가 없구나. 어제 저녁 나는 은나라 식으로 제사 받는 꿈을 꾸었으니, 나의 선조가 은나라 사람임이라”고 말하였다. 그 뒤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노나라 애공은 만사(挽詞)하기를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니, 나는 괴로운 아픔 속에 있네. 아아 슬프다! 이보(尼父仲尼 존칭)시여!” 하였다. 이에 자공이 말하기를 “애공 임금은 노나라에서 죽지 못할 것이다. 살아서는 써 주지 않고, 죽어서야 만사하여 시호를 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였다. 

 

공자는 노나라 성 북쪽 사수(泗水) 가에 묻혔다. 제자들이 모두 3년 동안 복을 입었다. 자공은 홀로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다시 3년이 지난 후에야 떠나갔다. 제자와 노나라 사람 중에 묘소 밑에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100여 집이었다. 그래서 ‘공리(孔里: 공자 마을)'가 되었다. 공자 무덤에서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세시(歲時:새 해를 맞을 때)에 제사를 드렸고, 선비들은 향음주와 대사의 예를 행하였다. 

 

한나라 고조 황제는 노나라를 지나가다 태뢰(太牢: 천자에게 드리는 제사)로 제사지냈으며, 제후와 경상들이 오면 항상 먼저 공자 무덤에 참배하고 정사에 나아갔다. 사마천은 말하기를 “천하에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건만, 생시에 아무리 영화로웠던들 죽으면 다 끝이었다. 오직 공자만은 포의(布衣)로 죽었으나 대대로 전해오면서 학자들의 종주(宗主)로 숭앙되고 있다” 하였다. (『사기』 「공자세가」의 내용에서 발췌)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공자 [孔子, Confucius]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3.     사기 (史記) 속에서 본 공자의 흔적

 

그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사기 <공자세가>를 읽어보아야 하고, 제자들의 행적을 알기 위해서는 <중니제자열전>을 읽어보아야 하며, 유가 학파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는 <맹자순경열전>을 읽어보아야 하고, 공자 이후 유학의 발전 양상을 아기 위해서는 <유림열전>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p. 19)

 

 

II.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서문]

 

지난 20여 년간 나는 늘 새벽 3시에 일어나 고전을 번역하고 연구해왔다. 주말과 휴일도 예외 없이 홀로 고전과 씨름해온 일은 옛 정신을 대면하는 일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è 15초면 쓰는 이 문장 하나가 뭐라고 몇 번을 보고 또 봤다. 나에게 역자와 같은 이런 열정이 있는지. 나의 천복은 무엇인지. 천복은 찾아가는 것인지, 만들어 가는 것인지. 찾아 나서지 않는 천복은 나에게 오지 않는 것인지. 천복이 아닌 것도 내가 노력하면 천복이 되는 것인지. 무엇 하나 제대로 해보고나 이런 고민을 하는지.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23) 공자가 갈망한 주나라는 종법제를 바탕으로 한 조화로운 문명이었고, 대국 주나라였다.

 

(23) 공자는 도덕적 행동을 전통적 역할과 위계질서에 연계시킴으로써 주 왕조 체제를 옹호했지만, 주나라는 이미 쇠락한 상태였다.

 

 

[ 2 : 위정 (爲政)]

 

(54) 공자 왈, “그가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하는지 관찰하고, 그가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세밀히 살펴보라.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숨기겠는가?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숨기겠는가.

 

è라는 표현을 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나의 모습을 내가 지금까지 해온 많은 행동들의 결과물이다. 꿈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그가 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 그렇게 하는지를 살펴보고야 한다.

 

(55)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君子不器)

 

è 그릇은 그 형태가 이미 굳어서 고정이 된 사물이다. 한 번 구워진 그릇은 그것이 깨어지기 전까지는 그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과 상황은 그에 맞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하나의 상황에서 단 하나의 시선이 아닌 사물과 상황이 속한 관계 속에서 그에 맞는 적절함 유연함을 갖춘 것이 군자다. 아집에 갇힌 사람은 소인이다.

 

(55)  군자는 자신의 말보다 먼저 행동하고 나서 (말이) 행동을 따르도록 하는 사람이다. (先行其言而後從之)

 

è 늘 말이 행동보다 앞서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말이 행동보다 앞서나갈 때, 우리의 사고는 비루해진다.

 

(57) 어떤 것을 알면 그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 3 : 팔일]

 

 

[ 6 : 옹야 (雍也)]

 

(120) 어질구나 안회야! 한 통의 대나무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 누추한 골목에 살면서도, 다른 이들은 그 근심을 usel지 못하는데 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려 하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야!

 

è 군자의 즐거움은 천명을 실천하는 데 있고, 소인의 즐거움은 욕망을 충족하는데 있다.

 

(120) 능력의 부족이 아니고 의욕과 집념의 문제라는 것이다. 100리의 절반은 90리라는 말이 있다. 마무리를 어떻게 하는가가 대단히 중요하다. 마무리를 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오기가 있어야 함을 공자는 강조하고 있다.

 

è 나 역시 한 번 시작한 일을 자주 마무리 짓지 못한다. 그러면서 마음 한 편으로는 나의 능력이 부족함을 탓한다. 부족한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나의 집념의 문제임을 알겠다. 나의 의지의 문제임을 알겠다. 100리의 절반은 50리가 아니라 90리라는 말이 와 닿는다.

 

(122) “만일 축타 같은 말재간이 없거나, 송조 같은 미모를 갖지 못했다면, 오늘날 같은 세상에서 (재난을) 피하기 어렵겠구나.

 

(123) 바탕이 꾸밈을 이기면 촌스럽고, 꾸밈이 바탕을 이기면 텅 빈 듯하다. 꾸밈과 바탕이 고르게 조화를 이루고 난 뒤에야 군자인 것이다. (文質彬彬)

 

(124)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128) ()이라는 것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일으켜주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면 남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다.

 

è 나와 남을 구분하는 사회가 되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타인과의 선을 계속 긋다 보니, 어느덧 타인과의 틈새가 좀처럼 건너뛰기 어려울 만큼 벌어졌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사람들과 유리 된 생활을 한다. 그래서 한 시인은 우리는 저 마다 섬이라고 했나 보다.

 

 

[ 7 : 술이 (述而) ]

 

(135) 공자께서는 상을 당한 사람 곁에서 식사를 하실 때는 배부르게 드신 적이 없다. 공자께서는 이날 곡을 하시면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

 

è 공자의 사람(타인)에 대한 마음 씀씀이 (愛人)를 알 수 있다.

 

[ 8: 태백 (泰伯)]

 

(153) 증자가 병이 들어 문하의 제자를 불러 말했다. “나의 발을 펴보거라, 나의 손을 펴보거라. <시경>두려워하고 삼가기를, 깊은 연못가에 있는 것처럼,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하라고 했는제, 지금부터는 내가 (죽음의 근심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알겠노라. 제자들아

 

è 부모가 물려 주신 신체를 소중히 하고 항상 조심히 간직하려는 생전의 증자의 모습이 선히 보이는 듯 하다. 증자는 공자의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도 효심이 지극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157)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3년 동안 배우고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 사람을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è 일정 기간(3)의 수양을 마치고도, 명리나 벼슬에 욕심을 내지 않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정 수련을 하지도 않고 명리나 벼슬에 욕심을 내는 사람도 분명 있다.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메우는 것일까? 거짓말과 욕심으로 메우게 될 것이다.

 

(159)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울 때는 미치지 못할 것처럼 하며, 오히려 그것을 잃어 버릴까 두려워하듯이 한다.” (學如不及, 猶恐失之)

 

è 우리는 지갑에 어쩌다 큰 돈이 들어있으면 지갑을 들고 다니며 항상 불안해 한다. 어디를 가도 항상 지갑을 손에 들고 있으려고 하고, 자리를 옮길 때마다 두 번 세 번 확인한다. 그런데 무언가를 배움에 있어서도 우리가 그렇게 했는지 반성하게 된다. 어제 배운 것을 오늘 잊지는 않을까 조바심 낸다거나, 오늘 배운 것을 내일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조바심 내는 마음. 공자는 평생을 그런 마음으로 스스로를 닦고, 배움에 임했다고 한다. 반성하게 된다.

 

 

[ 9 : 자한 (子罕) ]

 

(173)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덕을 좋아하는 것을 마치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è 오늘 날에도 통용 될 수 있고, 스스로를 돌아보게끔 하는 문구라고 생각 된다.

 

[ 10 : 향당 (鄕黨) ]

 

[ 11 : 선진 (先進) ]

 

(201) 안연이 죽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 구나.”

 

è 공자의 이 외마디 탄식은 그 어떤 그의 슬픔보다 깊고, 그 어떤 분노보다 격하다.

 

(204) 자공이 여쭈었다. “자장과 자하 중에서 누가 더 현명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자공이 여쭈었다. “그렇다면 자장이 더 낫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過猶不及)

 

è 모자라는 것 만큼이나 때로는 그 보다 더 좋지 못한 것이 바로 과함이다. 특히 말이 그렇다.

 

 

[ 12: 안연 ]

 

(217) 중궁이 인()에 대해 여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중략)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III.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독자의 눈으로) : 목차의 좋은 점, 아쉬운 점, 잘못된 점을 분석

 

가.   소제목 구성

 

논어는 전체 20편으로 구성 되어 있다. 각 장 마다 번호를 매기되, 각 편의 절 마다 숫자를 구분 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Ex : 1.1 삶의 즐거움, 1.2 입신의 근본) 다른 논어 주석을 달아 놓은 책도 유사한 구성으로 되어 있는 것 같다. 각 절 마다 소제목을 달아 놓아 소제목을 보고도 대강의 내용을 유추 할 수 있다. 다만 소제목이 역자의 생각이 반영 되어 있는 것이다 보니, 거기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자기 나름의 소제목을 구성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나.   각 편의 주요 내용 소개

 

각 편이 시작하기 전에 역자가 해당 편에 실린 주요한 내용들과 그 의미들을 소개 해 놓은 단락이 있다. 논어의 20편으로 구분 되어 있지만, 각 편의 구성이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것도 많다. 하지만 공자의 제자들이 논어를 구성하면서 20편을 별도로 분리한 이유, 분리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독자의 혼자 힘 만으로는 논어의 각 편들에 대한 구분을 하는 힘을 키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역자의 소개 글을 통해 해당 편이 가지는 의미를 본문을 읽으면서 다시 곱씹을 수 있었다. 만약 역자의 내용 소개에 너무 얽매이고 싶지 않다면, 본문을 먼저 읽고 역자의 글을 다시 읽으며 본문 내용을 음미해도 좋을 것이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독자의 눈으로)

 

가.   독음이 아쉬울 때는?

 

동양 고전을 원문과 함께 읽을 때는 역시 독음이 없으면 늘 아쉽게 느껴진다. 매번 사전을 찾을 수가 없어, 본문을 읽을 때 궁금했던 독음이나 역자의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류종목 저자의 『논어의 문법적 이해 (2000), 문학과지성사』를 참조 하였다.

 

 

3) 이 책의 장점 (독자의 눈으로) :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등등

 

가.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한 책 (의역을 최대한 자제)

 

고전 원문을 번역한 번역서를 보다 보면 종종 과도한 의역으로 덧칠 된 책을 보기도 한다. 김원중 역자가 번역한 이 책은 최대한 의역을 자제하고, 원문의 뜻에 가장 근접하도록 번역의 힘을 뺐다는 점이 강점이다. 의역이 많아지면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는 맛을 빼앗게 된다. 원문은 최대한 담백하게 번역되어야 한다. 의역이 심하면 배가 산으로 간다. 그것이 고전 원문 번역의 어려움이 아닐까 한다.

 

나.   애매한 내용은 독자의 판단으로

 

역자는 논어 번역에 앞서 역대의 논어 주석을 달았던 주희, 왕보쥔 등의 책도 참고 하였다. 그런데 역대의 논어주석을 달았던 책들의 저자들의 의견이 모두 상이하거나, 일부는 공감이 되지만 일부는 공감이 되지 않을 때는 해당 주석을 참고는 하되,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게 할 필요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해당 역자의 주석과 자신의 생각을 함께 실어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저자의 눈으로)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이렇게 해결하겠다

 

가.   공자의 제자들

 

논어에는 많은 공자의 제자들이 등장한다. 중국의 리링(李零) 교수는 <상가구(喪家狗)>라는 책에서 공자의 제자들을 크게 3기로 구분하였다.

 

# 1기 제자 : 공자의 초창기인 35세 이전의 제자들 (5) #

‘- 안무요, 염경, 중유, 칠조계, 민손

 

# 2기 제자 : 제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시기인 54세까지의 제자들 (8) #

‘- 염옹, 염구, 재여, 안회, 무마시, 고시, 복부제, 단목사 등

 

# 3기 제자 : 55세부터 천하를 주유할 때 받아들인 제자들 (11) #

‘- 원헌, 번수, 진항, 유약, 복상, 언언, 증삼, 전손사, 사마경 등

 

본문에 소개 된 공자의 문하 제자들에 대한 상세 이력과 그들이 등장한 본문 내용을 따로 정리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공자의 각 제자들이 등장했던 부분을 따로 읽음으로써, 각 제자들을 향한 공자의 마음을 깊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 유자 (有子) : 그의 이름은 약()이고 자는 유()이다. 공자보다 33살 어린 유약은 성실하고 도덕적으로도 훌륭하여 공자가 늘 좋아했다. 공자가 죽은 뒤에 우상(偶像)이 없자 복상, 언언, 전손사 등이 유약을 시동(尸童, 산 사람이 죽은 자로 분장하여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으로 삼았다. 모두 그를 공자 대신 추대했고, 그는 제자들의 참배를 받았다고 한다)

 

‘- 증자 (曾子) : 증자는 공자 문하의 제자들이 증삼(曾參)을 높인 것이다. 증삼의 자는 자여(子與)로서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유약을 공자 대신 추대하여 제자들의 참배를 받도록 하였는데, 그는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공문십철(孔門十哲)에 증자가 없지만, 송유가 도통을 세울 때 그를 극히 높이 받들었고, 명대에는 증자를 복성(復聖)으로 봉하여 유약보다도 앞에 두었으며, 그 위상은 안회를 능가할 정도였다.

 

è 8.3 (죽음의 근심에서 벗어남), 8.4 (그 말이 착하다), 8.5 (증자가 인정한 덕), 8.6 (군자의 조건), 8.7 (임무는 무겁고 길은 멀다)

 

‘- 자하(子夏) : 이름은 복상. 공자보다 44세 어렸으며 문학으로 유명하고 위나라 영공을 섬긴 인물로, <시경>, <춘추>에 해석()을 붙여 경학을 전수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è 6.13 (자하에게 충고하다)

 

‘- 번지 (樊遲) : 번수이고, 자는 자지인데, 자로써 부른 것이다. 농사일을 좋아하여 공자에게 욕을 먹은 적이 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번지는 공자보다 36세 연하였다.  

 

è 6.22 (지혜를 여쭙다)

 

‘- 안회 : 안회는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연 (子淵)이며, 공자보다 서른 살이 적었다. 공자는 안연을 사기의 첫머리에 두었다. 안회는 스물아홉에 머리가 하얗게 세더니 일찍 죽었다.

 

è 6.3 (배우기를 좋아한 안회), 6.7 (석 달 어기지 않다), 6.11 (안빈낙도), 9.11 (안연의 탄식), 9.20 (게으르지 않은 안회), 9.21 (멈추지 않는 안회), 9.22 (, 이삭, 열매),

 

‘- 중유 (仲由) : 자로의 이름이며, ‘은 자로의 성이고 는 이름이다. 공자보다 불과 9세 연하인 그는 만년까지 공자의 곁을 떠나지 않은 몇 안 되는 제 1기 제자다. 중유는 덤벙대고 큰 소리 치길 좋아해 평소 공자에게 꾸지람을 많이 들었으나, 공자는 그의 솔직담백하고 의로운 성격을 좋아했다.

 

è 6.8 (정치 재목들), 6.28 (공자의 해명), 7.10 (용기와 용맹), 9.12 (누가 문제인가), 9.27 (오랜만에 들은 칭찬), 10.24 (산에서 만난 암꿩)

 

‘- 자장 (子張) : 전손사의 자이며, 공자보다 48살이나 적었다. 공자가 내가 전손사를 얻고 나서부터 앞에도 빛이 있고 뒤에도 빛이 있어다고 하면서 그를 안회/중유/단목사 등과 병칭하였다고 한다. 공문십철에는 자장이 없다.

 

‘- 염옹 :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하나.

 

è 6.1 (자질이 대단했던 염옹), 6.2 (너무 소탈한 자상백자)

 

‘- 염구 : 염자(冉子). 재정에 능해 계강자의 가신을 지냈다. ‘()’는 공자의 제자들이 높여 부른 것인데 증삼, 유약, 민자건 등과 더불어 ()’가 붙여졌다.

 

è 6.4 (부자는 돕지 않는다), 6.8 (정치 재목들), 6.12 (역부족의 의미), 7.14 (인을 추구하여 인을 얻다),  

 

‘- 원헌 (原憲) : 자는 자사(子思)이며, 노나라 사람이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사구직에 있을 때 공자의 가재가 되어 도왔다. 공문의 제 3기 제자로서 자공과 곧잘 대비 되는 인물이다.

 

è 6.5 (나눔의 미학)

 

‘- 중궁 (仲弓) : 공자의 제자.

 

è 6.6 (중궁을 평가하다),

 

‘- 자공 : 공자의 제자. 그는 공자의 마지막 죽음을 지켜본 제자 였다.

 

è 6.8 (정치 재목들), 6.30 (), 7.14 (인을 추구하여 인을 얻다), 9.6 (너무 많은 재능은), 9.13 (팔아야지), 9.13 (팔아야지)

 

‘- 민손 (閔損) : 자는 자건(子騫)이며, 공자보다 15살 아래다. 덕행과 효행으로 이름난 공자의 1기 제자다. 이 문장에 인용되어 있는 대로 그는 옳지 못한 일을 한 군주의 봉록을 받지 않은 소신파였다.

 

è 6.9 (읍재를 거절한 민자건),

 

‘- 백우 (伯牛) : 공자의 제자

 

è 6.10 (백우를 문병하다)

 

‘- 재여 (宰予) : 공자의 제자. 자는 자아(子我).

 

 

나.   내가 다시 쓴 소제목들

 

소제목을 나름의 기준으로 다시 써보려 하였다. 각 편의 각 절을 여러 번 곱씹어 읽으며 이를 핵심 단어 또는 구절로 압축하는 것 또한 논어를 깊이 있게 곱씹어 내 나름대로 소화시키는 맛이 있었다. 다만 모든 장을 다 하지는 못한 점이 아쉽다.

 

1.1   삶의 즐거움 è 군자의 즐거움

1.2   입신의 근본 è 효제(孝悌), ()의 근본

1.3   교언영색 è 좌동

1.4   세 번 반성한 일 è 증자의 반성(反省)

1.5   나라를 다스리는 법 è 좌동

1.6   사람됨이 먼저다 è 무릇 젊은 사람은

2.9 어리석지 않다 è 안회의 성실함

 

 

다.   논어에서 등장한 사자성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성어 가운데 그 출처가 논어인 것들이 많다. 이들을 따로 모아 정리해 두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공자의 사상과 그가 추구 했던 인의예지 (仁義禮智), 극기복례(克己復禮) 정신을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자주 환기하는데 유익하지 않을까 한다. 무려 2 5백년 전에 쓰였던 말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져 우리의 행동을 삼가게 하고, 이상을 실현하도록 하는 자극이 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자는 물론 제자들을 통해 이어진 그의 사상이 수 천 년이 지난 오늘 날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 교언영색 (巧言令色) : 말을 듣기 좋게 하고 그 얼굴빛을 보기 좋게 하면서 남의 비위나 맞추려는 가식적인 행동 (37p)

 

‘- 거일반삼 (擧一反三) : 하나를 배우면 다른 것까지도 유추해서 안다 (135p)

 

‘- 전전긍긍 (戰戰兢兢) : 겁을 먹고 벌벌 떨거나, 조심해 몸을 움츠리는 것으로 조심하는 모습을 비유함 (153p)

 

‘- 후생가외 (後生可畏) : 젊은 후학들을 두려워할 만하다는 뜻으로, 후진들이 선배들보다 젊고 기력이 좋아 학문을 닦음에 따라 큰 일이 될 수 있으므로 가히 두렵다는 말 (175p)

 

 

라. 역자와 다르게 한 나의 해석

 

본문의 절반 가까이는 역자의 해석을 읽기 전에 원문을 먼저 읽고, 그 뜻을 유추해보려고 했다. 쉬운 한자로 되어 있는 본문 위주로 읽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본문을 읽는 진도가 너무 늦어져 절반 밖에는 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원문을 먼저 읽으며 내가 유추했던 뜻과 역자의 뜻이 맞았을 때는 그 것대로 기분이 좋았고, 틀리더라도 자주 등장하는 조사나 같은 한자의 다른 쓰임에 대해서 알 수 있어서 유익했다. 많지는 않지만 역자가 했던 해석과 나의 해석이 다른 부분이 있어 한 번 더 본문을 곱씹으며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38) 증자가 말했다. “나는 날마다 세 번 나 자신을 반성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도모하는 데 진심을 다하지 않았는가? 벗들과 사귀면서 믿음이 없었는가? 전수받은 것을 익히지 않았는가? (傳不習乎)

 

è (본인이 직접 실천을 통해) 익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전달하지는 않았는가?

‘- ()을 배우고 익힌다는 내용 뿐만 아니라, “실천한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의미상으로도 단순히 글로 배우고 익힌 것에서 그치기 보다는 실천을 통해 체화 되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르치지는 않았는지를 반성하는 내용이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라는 책에도 해당 본문이 소개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70) 자공이 물었다.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궤에 넣어 보관하시겠습니까? 좋은 상인을 구하여 파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을 팔아야지! 그것을 팔아야지! 나는 상인을 기다릴 것이다

 

è 역자는 여기서 말하는 팔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상인의 그것 이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말하는 은 군자의 재능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옥을 궤에 넣어 보관한다는 것은 초야에 묻혀 자신을 재능을 숨기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좋은 상인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를 말한다. 바로 공자가 평생을 두고 찾으려 헤맸던 대상이다. 공자는 평생 자신을 인정해 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하고 말년(68)에 노나라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게 된다. 논어의 곳곳에는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아름다운 옥(군자의 재능)이 있다면 그것을 좋은 상인(덕망 있는 군주)에게 팔아야 한다는 것은 공자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말한 것이라고 생각 한다. 나는 상인을 기다릴 것이다라는 말에 공자의 신념과 현실 세계에서는 이루지 못한 그의 소망에 대한 안타까움을 볼 수 있다. 태백(泰伯) 8 13절에도 나라에 도가 없으면 모를지언정, 나라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타나 자신의 재능을 응당 펼쳐 보여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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