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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5일 15시 00분 등록

철학이야기(63째주)

11기 정승훈

 

저자 연구

윌 듀런트(Will Durant, 1885~1981)

1885년에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나,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학교에 다니며 예수회 수도자로서 성직자의 길을 걸으려 했다.

그러나 10대 말에 도서관에서 다윈, 헉슬리, 스펜서의 책을 접하면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가톨릭교회와 사회주의를 결합하려는 꿈을 꾸게 되었다. 1905년 그는 사회주의 철학을 실험하기 시작했지만 제 1차 세계대전 후 "권력욕"이 모든 형태의 정치적 행동에 기초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듀란트는 1907년 졸업하고 Arthur BrisbaneNew York Evening Journal 기자로 일주일에 10달러를 벌었다. 이브닝 저널 (Evening Journal)에서 그는 성범죄에 관한 기사를 여러 편 썼다. 1907년 뉴저지 주 사우스 오렌지에 있는 Seton Hall University에서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및 기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20대 중반 신학교에 진학한 듀런트는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접했는데, 스피노자는 철학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듀런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듀런트는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가톨릭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는 꿈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1911년에 그는 신학교를 떠났다. 신학교를 그만둔 뒤에는 성인 교육에 힘쓰면서 철학과 사회적 문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노동 계급을 교육하기 위한 고급 학교인 페레르 현대 학교 (Ferrer Modern School )의 교장이 되었다. 현대 학교에서 그는 사랑에 빠졌고 15세의 학생 Chaya (Ida) Kaufman과 결혼했다. Chaya (Ida) Kaufman은 후에 Ariel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듀런트는 딸 Ethel이 있었고, 아들 Louis를 입양했다.

 

192130대 중반이던 듀런트는 성인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레이버 템플 스쿨을 조직하여 그곳에서 철학, 문학, 과학, 음악 예술을 가르쳤다. 학교에서 듀런트의 플라톤 강의를 우연히 듣고 감명 받은 한 출판업자의 제안으로 그 강연을 원고로 만들어 블루 북이라는 이름의 저렴한 팸플릿이 나왔다.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서 아리스토텔레스 등 총 11권의 팸플릿이 나왔다. 그것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1926년 사이먼 앤드 슈스터 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 덕분에 듀런트는 평생 여행하고 글만 쓰며 살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듀런트는 그 후 11권짜리 대작 문명 이야기를 집필했다. (몇몇은 아내 에이리얼과 공저이다.) 그중 루소와 혁명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1981, 9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2판 서문 나의 책을 위한 변명

신학은 부서지고, 정치 이론에는 금이 갔다. 발명은 삶과 전쟁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경제적 신조는 정부를 전복하고 세상에 불을 질렀다. ... 인간의 지식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렸다. (8)

대단하다. 모든 학문을 짧게 현실에 맞게 정의하고 있다. 핵무기의 발명이 전쟁으로 이어졌고, 인간의 지식은 철학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비관주의를 중얼거리는 과학의 사제와 믿을 수 없는 희망을 중얼거리는 신학의 사제 사이에서 보통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8)

신영복 [강의] 서론에서 서양의 모순으로 설명했던 내용이다.

미국에는 대학에는 갈 수 없었지만 역사와 과학의 발견에 목마른 사람들이 수백만 명 있었다. 심지어 대학을 나온 사람들도 지식에 대한 허기를 상당히 드러냈다. (11)

저자가 개설서 형식의 [철학이야기]를 낸 시점이 이런 시기였다는 거겠지.

유행은 시작될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바뀌었다. 이제 아무도 감히 지식의 인간화를 지지하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개설서를 비난하는 것은 평론가로서 명성을 얻는 쉬운 길이 되었다. (11)

무엇보다도 가장 큰 죄는 중국 철학과 인도 철학의 생략이었다. (12)

인식론을 무시한 것은 사과할 생각이 없다. (13)

저자 나름의 주관적 판단으로 구성을 한 것이다. 한국의 철학과에선 독일의 관념론에만 몰두하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결코 도덕철학과 정치철학, 역사철학과 종교철학을 배제할 정도로 인식론에 열광한 적이 없다. (13)

요즘은 인문학과 예술, 정치철학에서 프랑스 현대철학이 바탕이 되고 있다.

이제 독일에서는 인식론이 죽어가므로 민주주의를 선물한 적절한 보답으로서 미국에 수입될 것이 분명하다. (14)

유머가 있다는 평판은 정치가나 철학자에게는 재앙이다. 독일은 쇼펜하우어의 운첼만 이야기를 용서할 수 없었다. 오직 프랑스만 볼테르의 위트와 재기 발랄함의 깊이를 알아보았다. (14)

이 책은 원래의 텍스트를 읽어보라고 독자들을 여러 번 자극한다. (15)

변경연 커리큘럼이 끝나면 원문을 읽을 게 너무 많다. 신화에서부터 동서양 철학서까지.

아마추어들이 그들의 어정쩡한 노력을 돕는 것을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 이 아마추어들이 극진히 사랑하는 삶 덕분에 그들의 가르침이 인간화될 수 있다. (16)

 

독자에게

소크라테스 이전의 반전설적 철학자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스콜라 철학자들, 인실론자들은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 나는 인식론이 현대 철학을 납치하여, 거의 망쳐버렸다고 믿는다. ... 분석은 과학에 속하며, 우리에게 지식을 준다. 철학은 지혜를 위한 종합을 제공해야 마땅하다. (17)

나도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독일철학 이제 그만 할 때가 되었다.

 

서론 철학의 쓸모에 관하여

우리는 안팎의 혼돈과 싸우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안에 뭔가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이 있다고, 다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혼을 판독할 수 없을 뿐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23)

베이컨은 우리에게 훈계한다. “너희는 먼저 마음에 좋은 것을 구하라. 그러면 나머지는 따라오거나, 아니면 없어도 아쉽지 않을 것이다.” 진리가 우리를 부유하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자유롭게는 해줄 것이다. (24)

철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이것이다.

사실 과학은 늘 전지하는 반면, 철학은 늘 쇠퇴하는 것 같다. (24)

철학은 미지의 것(형이상학의 경우)이나 부정확하게 알려진 것(윤리학이나 정치철학의 경우)에 대한 가설적 해석이다. (25)

과학은 분석적 묘사이고, 철학은 종합적 해석이다. ... 그러나 철학자는 사실을 묘사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사실과 경험 일반의 관계를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그 의미와 가치에 이르고 싶어한다. 그는 사물들을 해석적 종합 안에 묶으려 한다. (25)

과장을 관찰하고 수단을 구축하는 것은 과학이다. 목적을 비판하고 조정하는 것은 철학이다. ... 과학은 우리에게 지식을 주지만, 지혜를 줄 수 있는 것은 철학뿐이다. (25)

과학과 철학을 대비시켜 설명하고 비유한 게 흥미롭다.

 

1장 플라톤

 

플라톤의 등장배경

기원전 490~470년 젊은 유럽과 노쇠한 동방이 맞붙은 이 싸움에서 스파르타는 육군, 아테네는 해군을 제공했다. ... 스파르타는 농사를 지으며 은둔과 정체에 빠져든 반면, 아테네는 번잡한 시장과 항구가 되어, 여러 인종의 사람들, 다양한 종교와 관습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32)

교환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수학이 성장했고, 항해가 점점 대담해지면서 천문학이 성장했다. .. 마법과 제의가 서서히 물러나면서 과학과 통제가 들어섰다. 그리고 철학이 시작되었다. (33)

상업과 교역이 성행하면서 사람들이 많아지고 제도가 생겨나고 그러면서 정치철학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무엇에나 질문을 던졌다. 종교나 정치적 금기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었다. 대담하게도 모든 신조와 제도에 이성의 법정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보냈다.

아테네의 주민 40만 명 가운데 25만 명은 아무런 정치적 권리가 없는 노예들이었다. 15만 명의 자유민 또는 시민 가운데 오직 소수만이 국가의 정책을 토론하고 결정하는 에클레시아, 즉 민회에 참석했다. (34)

이런 구성에서 민주정치가 시작되었다니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대의 민주주의가 발전한 건가.

2. 소크라테스

우리는 그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귀족적인 플라톤이나 과묵한 학자풍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친밀하게 느끼고 있다. (35)

내가 아는 유일한 한 가지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철학은 의심할 때, 특히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믿음, 교조, 이치를 의심할 때 시작된다. (37)

우리는 너무도 확신에 차서 이야기한다. 그러지 않으면 다그치고 재촉한다. 노자도 성인은 남들이 보기에 어리숙해 보인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 영혼을 파헤치며 돌아다녔다. 가정을 드러내고 확실한 것에 의문을 던졌다. (38)

이래서 결국 젏은이들을 선동하고 다닌다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지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에서는 사회적이고 성실한 행동을 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며, 분명하게 보는 눈만 있으면 평화와 질서와 선의가 유지될 수 있을 터였다. (40)

사람들이 배울 준비가 되기 전에 가르치는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41)

준비되지 않은 대중에게 너무 빨리 나온 철학자인건가.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진 게 있네. 잊지 말고 갚아주겠나?” (44)

소크라테스의 친구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3. 플라톤의 준비 단계

내가 야만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으로,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난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 ” (45)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한 말이다. 신분과 남녀의 차별이 있던 시대니 당연하다. 위대한 스승이 있을 수 있는 건 훌륭한 제자가 있기 때문이다.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자신이 아닌 제자에 의해 칭송되었다.

그는 민주정치를 경멸하게 되었고, 군중을 증오하게 되었다. (45)

플라톤은 기원전 387년에 아테네로 돌아왔다. 이제 그는 다양한 많은 민족과 많은 땅의 지혜로 무르익은 마흔의 남자였다. (46)

12년의 기간이었다. 스승의 죽음이 얼마나 충격이었으면 이런 방랑을 선택했을까. 혹은 이런 방랑의 시간이 있었기에 그의 철학이 생겨났을 수도 있다.

 

4. 윤리적 문제

정의(定意)만큼 어려운 것이 없고, 또 정의만큼 가혹하게 정신적 명석함이나 기술을 시험하고 훈련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49)

정의(正義)롭다를 정의(定意)해보라는 질문을 했다는 것인데, 저자는 정의하는 것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모든 정의는 그 뜻을 명확히 알아야만 가능하고 정의가 가능하도록 사회적 함의를 거치지 않을 때 그 정의는 혼란스럽다. 정의하려면 따져야 한다. 예를 들어 사교육이라 하면 어디까지가 사교육인지, 공교육을 뺀 나머지는 사교육인지를 엄마표는 사교육이 아닌 건지 이런 기준이 없으니 다들 다르게 생각한다.

각기 다른 형태의 정부는 자기들 각자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민주적인 법, 귀족적인 법, 독재적인 법을 만드는 거요. 이렇게 자기네 이익에 맞게 만든 법을 백성에게 정의라는 이름으로 전해주고, 그걸 위반하는 사람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벌하는 거요.” (50)

소피스트인 칼리클레스가 도덕은 강한 자를 무력하게 만들려는 약자들의 발명품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 아마 이런 완강한 비도덕주의는 아테네의 대외정책에서 제국주의가 발달하면서 약한 나라들을 무자비하게 다룬 상황을 반영한 듯하다. (51)

강한 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한 자는 어쩔 수 없이 싫은 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52)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관점을 비교해보니 난 소크라테스 쪽이 맞다고 여겨진다. 인간이 욕구대로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는 건 성숙한 인간만이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보통수준으론 힘들기 때문이다.

5. 정치 문제

플라톤은 대답한다. 탐욕과 사치 탓이다. 사람들은 소박한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 (54)

민중은 이해력이 없기 때문에 통치자들이 자기들 멋대로 하는 말을 되풀이할 뿐입니다.”[프로타고라스] 317 (55)

플라톤은 생각하면 할수록, 변덕스럽고 속기 쉬운 군중에게 정치적 공직자를 선출하는 일을 맡기는 어리석음에 놀란다. (56)

플라톤은 스승을 우매한 군중이 죽게 만들었다고 여긴다. 민주주의는 성숙한 시민이 만드는 것이 맞다.

 

6. 심리 문제

국가가 지금 이런 상태인 것은 그 시민이 지금 이런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더 나아지기 전에는 국가가 더 나이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전에는 모든 것이 변해도 본질적인 것은 전혀 변하지 않을 것이다. (56)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욕망, 감정, 지식 등 세 가지 주요 원천에서 흘러나온다. ... 모든 사람이 이런 힘과 자질을 갖고 있지만 그 수준은 다 다르다. (57)

감정에 의해 뜨거워진 욕망이 지혜의 인도를 받을 때 효과적인 인간 행동이 나오듯이, ... 지혜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민중은 혼란에 빠진 욕망과 다름없는 무질서한 군중일 뿐이다. 욕망에 지혜의 계몽이 필요하듯이, 민중에게는 철학자의 인도가 필요하다. (58)

철학은 민중을 이끄는 것이다. 함석헌이 한국에는 변변한 철학이 없다고 했었다. 성리학, 유교에 기본이 두긴 했지만 사상보다는 형식만이 남아서 더 옥죄는 역할을 할 뿐이다. 김상봉교수는 동학에서 찾고자 한다.

나라를 인도하는 데 적합한 사람은 오직 철학자 군주뿐이다. (58)

그 유명한 철인 정치다.

 

7. 심리적 해법

도시의 열 살 이상 거주자를 전부 시골로 보내, 국가가 이 아이들을 맡아 부모의 습관으로부터 보호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59)

플라톤의 생각은 보통교육과 부모로부터 잘못 받는 습관이 들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인데, 참 위험한 생각이다. 국가가 개인을 교육하고 관리한다는 거지만 인간은 교육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좋은 교육만을 한다고 다 인성이 바른 사람으로 크는 것도 아니고 부모의 잘못된 양육이 꼭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하긴 신분제가 있던 고대에 평등 교육을 주장한 것은 획기적인 발상일 수 있겠다.

음악은 성격을 형성하며, 따라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쟁점들을 결정하는 데 한몫한다. (60)

동서고금에서 음악을 중요하게 여겼다. 논어에서 봐도 공자도 그랬다. 고대에 음악이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기본 과목은 ... 어린 시절에 가르쳐야 하지만, 절대 강요하면 안 됩니다. 자유인은 지식의 획득에서도 자유인이어야 한다.” (62)

고대에도 이런 강제가 없었는데 현대는 이런 생각조차 없다. 자유인이란 개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란 천성적으로 탐욕스럽고, 질투심이 많고, 전투적이고, 욕정이 많은데, 어떻게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설득할 것인가? ... 그것은 초국가적 권위가 공동체의 도덕적 요구를 승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가 있어야 한다. (63)

현대에 와선 종교인보다 비종교인의 수가 더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은 과반수가 넘어갔다. 사회심리학 교수는 한국이 중심을 잡을 종교가 없어서 혼란스럽고 불안한 사회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함석헌도 같은 얘기를 한다. 우리에겐 종교도 철학도 없다면서. 그럼 우린 어디에서 우리의 중심을 잡아야 할까.

그들은 철학을 배운다. 그들은 이제 서른이 되었다. 그들에게 그 귀한 즐거움을 너무 일찍 맛보게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65)

귀한 즐거움이 철학이라고 했다. 서른이란 나이에 맞춘 것은 플라톤 개인의 경험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소크라테스가 죽고 세상으로 나간 나이가 스물여덟이었고 세상으로 나간 나이이니 서른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명료하게 생각하는 것, 즉 형이상학이다. 그다음에는 지혜롭게 다스리는 것, 즉 정치학이다. (65)

이데아 이런 일반성, 규칙성, 이상 가 없다면, 우리에게 세상은 틀림없이 아이가 처음 눈뜨고 본 바와 같을 것이다. 즉 분류되지 않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지각되기만 하는 특수한 것들의 덩어리일 것이다. (67)

이 가장 험난한 마지막 시험은 1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무자비하게 계속될 것이다. ... 살아남은 자들은 이제 흉터 많은 쉰 살이 되어, ,,, 마침내 이 사람들은 자동으로 국가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69)

예전에 수명이 길지 않았을 텐데 쉰 살에 정치를 해야 하면 늦은 거 아닐까. 플라톤이 제시한 시험들을 통과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 면에선 쉰 살이라도 가능한 사람이 많지 않을 거다. 여기서의 자동은 투표 없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8. 정치적 해법

말이란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모조 화폐다. 바보와 정치가만 그것을 현금으로 여긴다. (69)

재미있는 표현이다. 사상가들은 공통적으로 현란하고 현혹을 줄 수 있는 말을 삼가라고 한다.

교육적 선발을 통해 공직에 나아갈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얻는 것이다. ... 이것이 교육의 민주주의로, 투표의 민주주의보다 백 배는 정직하고 효과적이다. (70)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은 행동하는 교양이며, 삶의 구체적이고 분주한 면과 어우러진 지혜다. (71)

그들의 유일한 보상은 명예와 집단에 봉사한다는 자부심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심사숙고하여 그렇게 물질적으로 제한된 삶에 동의한 사람들이다. ... 이들은 자신의 이기주의만이 아니라 가족의 이기주의에서도 해방될 것이다. (73)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하는 정치인은 [도덕경]의 성인 수준이다. 이런 인간이 가능하긴 한 걸까. 플라톤 자신은 됐나.

부인의 공유는 무차별적 짝짓기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재생산 관계는 우생학적으로 엄격하게 감독된다. ... 어떤 남자든 여자든 완벽한 건강 상태가 아니면 자식을 낳지 말아야 한다. (74)

국가가 재생산의 나이도 정하고 정한 나이에 생긴 2세는 유산을 시킨다는 내용도 있다. 교육기회, 남녀의 평등, 계급도 없는 민주사회이면서 개인의 자유는 철저히 막는 이중적인 내용이다. 영아 살해를 해서 인구수를 조정했던 사회이니 가능했을 수도 있다. 플라톤이 비판받는 지점이 여기에 있었구나. 어떤 내용들은 괴변처럼 들린다.

 

간단히 말해서 완벽한 사회란 각각의 계급과 단위가 자신의 본성과 적성에 가장 잘 맞는 일을 하는 사회다. 어떤 계급이나 개인도 다른 계급이나 사회에 개입하지 않고,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능률적이고 조화로운 전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협력하는 사회다. (77)

 

9. 윤리적 해법

모든 악은 부조화, 즉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인간과 그 자신 사이의 부조화다. ... 정의는 단순한 힘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 힘이다. (78)

예수는 도덕이 약자에게 친절한 것이라고 말했다. 니체는 강한 자의 용기라고 말했다. 플라톤은 전체의 효과적인 조화라고 말한다. (79)

 

10. 비판

유럽은 천 년동안 이 철학자가 꿈꾸었던 것과 상당히 비슷한 수호자 집단이 통치했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기독교 나라의 주민을 노동자, 군인, 성직자로 나누는 것이 관례였다.

카톨릭의 정치 가운데 많은 부분은 플라톤의 고상한 거짓말에서 파생되었거나 그 영향을 받았다. (80)

우리는 일반인의 수준을 넘어서는 미덕의 기준을 가정하지 말아야 하며, 본성과 환경이 특별히 우호적인 경우에만 가능한 교육도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삶, 그리고 일반 국가가 달성할 수 있는 통치 형태를 존중해야 한다.”

나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생각이다.

플라톤은 그의 공산주의적 계획에서 분명히 다수를 배제했다. (83)

수호자의 경우, 그들의 욕구는 공산주의적 기질이라기보다는 명예감, 또 명예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84)

플라톤의 계획이 공산주의적이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개인의 선택과 자유보다 국가주도하의 계획적인 운영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정치적 권력은 변하는 경제적 힘들의 균형에 계속 적응해야 한다. (85)

플라톤은 이 세계를 찍은 영화를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그림으로 바꾸려고 안달을 한다. (86)

적절한 비유다. 플라톤에게 있어 스승의 죽음은 트라우마가 됐나보다. 그것에 너무 연연하다보니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앞과 뒤를 보고, 있지 않은 것을 갈망한다.” (87)

플라톤의 생각들이 비판 받을 부분이 많더라도 그의 생각들을 비판하며 또 다른 유토피아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2장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과학

역사적 배경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아스클레피오스(의술의 신)를 섬기는 위대한 의료 단체의 구성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93)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밑에서 8년 또는 20년을 공부했다. ... 이들의 나이 차이는 거의 쉰 살이었다.

그는 에우리피데스 이후 최초로 책을 모아 도서관을 만든 인물이었으며, 도서관 분류 원칙을 만든 일도 그의 학문적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94)

도서관 분류를 만든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였다니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왔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열세 살 난 난폭한 아이였다. 정열적이었고, 간질병이 있었으며, 거의 알코올 중독이었다. (96)

열세 살에 알코올 중독 수준이라, 2병이었나 보다.

생명은 아버지에게서 받았지만, 삶의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말했다.” (“생명은 자연의 선물이지만, 아름다운 삶은 지혜의 선물이라는 그리스의 멋진 격언이 있다.) (97)

소크라테스 밑에 플라톤, 플라톤 밑에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밑에 알렉산드리아. 소크라테스가 결국 그리스를 넘어 아시아까지 통일하려는 젊은이에게 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아리스토텔레스는 쉰세 살이 되어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세웠을 때 많은 학생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질서 유지를 위하여 복잡한 규칙을 만들어야 했다. 규칙은 학생들 스스로 결정했으며, 열흘마다 학교를 감독할 학생을 선출했다. (98)

서머힐 스쿨의 모습과 비슷하다. 학생들이 생활할 공간의 규칙을 학생이 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우리의 학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교육 역시 그렇지만. 결국 교사, 어른이 관리감독하기 편하게 만든 규칙이고 수업이다.

아카데메이아는 무엇보다도 수학과 더불어 사변적이고 정치적인 철학에 몰두했다. 반면 리케이온에서는 생물학과 저연과학을 공부했다. (99)

그리스는 육체노동을 경멸했기 때문에 열의 없는 노예를 제외한 누구도 생산 과정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했고, 기계와 접촉하며 자극을 받는 과정에서 결함을 파악하고 가능성을 예감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100)

육체노동은 경멸했지만 올림픽을 통한 육체적 활동은 좋아하고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여겨 건강한 몸을 자랑으로 여겼다니 모순적이다. 하긴 현대의 시각으로 고대의 삶을 평가할 순 없다.

그에게 최선은 거의 모든 것을 쉬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었다. (101)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문학 용어가 아닌 과학 용어들과 철학 용어들을 만들었다. ... 그런 용어들은 마치 화석처럼 우리 언어의 지층에 박혀 있다. (102)

 

3. 논리학의 창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첫 번째 위대하고 탁월한 점은 거의 선배 없이, 거의 전적으로 혼자 열심히 생각해서 논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103)

대단한 사람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논리학을... 아마 플라톤과 토론하면서 키워낸 것 아닐까.

나와 대화하고 싶으면 너의 용어를 정의해라.” 볼테르는 그렇게 말했다. (105)

~ 멋진 말이다. 언젠가 써 먹어야지. 그러려면 나의 용어부터 정의해 놔야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대상을 그 부류라는 바다에 떨어뜨린 다음 다시 끄집어내는데, 그러면 대상에서는 공통의 의미, 같은 종류와 집단의 표시가 몸에서 물방울처럼 뚝뚝 떨어진다. 동시에 그 개별성과 차이는 이 대상과 무척 닮았으면서도 동시에 무척이나 차이가 나는 다른 대상들과 함께 놓여 있기에 한층 분명하게 반짝인다. (105)

이런 표현 너무 좋다. 딱딱한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비유를 하다니... 정말 배워보고 싶다.

이런 보편은 주관적 개념일 뿐, 손에 잡히는 객관적 실체는 아니다. 이름(nomina)이지 실물(res)이 아닌 것이다. (106)

우리는 늘 우리가 비난하는 것을 우리 안에 상당히 갖고 있다. (107)

삼단논법은 진리 발견의 메커니즘이라기보다는 설명과 사고를 명료하게 해주는 매커니즘임이 분명하다. (108)

 

4. 과학의 조직

1.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그리스 과학

그들의 과학은 신학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즉 그리스 이전 민족들은 자연의 모든 모호한 작용을 어떤 초자연적 힘을 빌려 설명했다. (109)

우주의 역사는 반복해서 순환하며, 그 각각은 불에서 시작하여 불로 끝난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과 지옥이라는 스토아 학파의 학설과 기독교 교리의 한 원천을 이룬다.)

여기에서부터 불의 심판과 지옥이 나온 것이었다. 지구 온난화로 사막화되고 빙하가 녹고 있으니 불의 심판은 자연재해로 생겨날 수도 있다.

그는 뒤로 자신의 스승 너머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의 과학 발전의 실마리를 다시 움켜쥐고서 더 단호하고 꼼꼼하게, 또 더 다양한 관찰을 통해 그 작업을 이어갔으며, 조직된 과학이라는 웅장한 몸체 안에 축적된 결과를 전부 통합해냈다. (112)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관해서만 기억하고 있는데 논리학과 과학에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겼는지 몰랐다.

 

2. 자연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문명마다 똑같은 발명과 발견,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축적이 느리게 이루어지는 암흑시대’, 학문과 과학과 예술의 재탄생이 영원히 반복된다. (114)

 

3. 생물학의 창시

자연은 무생물로부터 생물로 매우 점진적으로 이동하므로 이들을 나누는 구분선은 불명확하고 미심쩍다.” (114)

그의 시대에는 인체 해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리학적 면에서 특히 오류가 많다. (115)

인체 해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많은 지식을 밝혀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무엇을 물을지 아는 것은 이미 반은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117)

맞다.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알아야 물을 것이 생기는 것이다. 이를 메타인지라 부른다.

 

5. 형이상학과 신의 본질

만물은 그 질료 또는 원료였던 것으로부터 성장한 형상 또는 실체다. ... 세상 만물은 자기 나름의 완성을 향해 저절로 움직인다. (118)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의 섭리는 자연적인 원인들의 작용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119)

신은 인격체라기보다는 자력(磁力)이다.

 

6. 심리학과 예술의 본질

그는 습관의 힘을 강조하여, 처음으로 습관을 2의 천성이라고 불렀다. (121)

육체적 힘의 총화인 영혼은 육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122)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예술적 창조는 형성의 충동과 감정적 표현에 대한 갈망에서 나온다. 기본적으로 예술의 형식은 현실의 모방이다. ... 인간은 모방에서 쾌감을 느끼는데, 이것은 하등동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122)

무엇보다도 예술의 기능은 카타르시스, 즉 정화이다. ... 카타르시스 이론은 예술의 신비한 힘에 대한 이해가 자라나는, 무한히 비옥한 옥토가 되었다. (123)

대단한 사람이다.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전혀 다른 분야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다니...

 

7. 윤리학과 행복의 본질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목적은 선을 위한 선이 아니라 행복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 인간이 독특하게 뛰어난 점은 사고의 힘이다. (124)

이렇게 외부에서 행복을 지원하는 것 가운데 우정이 가장 고귀하다. 사실 우정은 불행한 사람보다는 행복한 사람에게 더 필요하다. 행복은 나눌수록 늘어나기 때문이다. ... “친구란 두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 ... 또한 우정은 평등을 요구한다. (127)

외적인 재물이나 인간관계가 행복에 필요하기는 하지만, 행복의 핵심은 여전히 우리 안에, 원숙한 지식과 영혼의 맑은 상태에 있다. (128)

행복의 조건은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이 힘이 세다. 외적인 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 채워지지 않음에 불행해질 수 있다.

근심하는 사람만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고 걸음이 급해진다.” (129)

 

8. 정치학

1. 공산주의와 보수주의

이렇게 귀족적인 윤리학에서는 당연히 매우 귀족적인 정치철학이 나온다. (129)

아리스토텔레스는 보수적인 사람이지만, 사회적 능률보다는 개인적 특질, 사생활, 자유를 높이 평가한다. (130)

굳이 손으로 안내하지 않아도 베틀이 천을 짜고 채가 수금을 탄다면, 일꾼 우두머리에게는 조수가 필요하지 않을 테고, 주인에게는 노예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132)

자동화시대를 예견한 듯한 대목이다. 통찰이 있어 가능한 것일 수도 있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인과 대부업자도 노예로 분류한다. (133)

 

2. 결혼과 교육

여자와 남자의 관계는 노예와 주인, 육체노동자와 정시노동자, 이방인과 그리스인의 관계와 같다. ... 남성은 본디 우월하고 여성은 열등하다. (133)

생명학적으로 뇌의 크기, 치아의 개수에서도 남녀의 차이가 난다고 봤으니 당연한 생각일 수 있다.

국가는 양성의 결혼 연령의 상한과 하한, 회임에 최적인 철, 인구 증가 비율을 결정해야 한다. (134)

교육도 국가의 손에 맡겨야 한다. (135)

공산주의 사상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되었나보다.

혼자 살려면 동물이 되거나 신이 되어야 한다.” (136)

위험할 정도로 인구가 과밀한 경우에는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 식민지 개척을 장려해야 한다. (136)

 

3. 민주정치와 귀족정치

현실적인 최선의 정체(政體)는 귀족정치, 즉 지식과 능력을 갖춘 소수의 통치다. (137)

민주정치는 보통 금권정치에 반한 혁명의 결과다. ... 많은 사람이 모두 하나의 감정에 빠져들어 동시에 잘못 판단하는 경우는 떠올리기 어렵다. 그러나 민주정치는 전체적으로 귀족정치보다 열등하다. 민주정치는 평등이라는 그릇된 가정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138)

입헌정치는 그런 행복한 결합을 제공한다. (139)

귀족정치와 민주정치가 결합한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추구할 목적은 공동체가 결정해야 하지만, 그 수단을 선택하고 적용하는 일은 오직 전문가가 해야 한다는 말이다. (140)

 

9. 비판

관찰 경향과 재능에는 플라톤과 다를 바 없는, 형이상학에 대한 중독이 따라다닌다. 이 때문에 그는 모든 과학에서 실수를 범하며, 아주 황당한 가설을 제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 정신의 큰 결함이다. (141)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그의 논리학에서 뻗어 나온 한 가지다. (142)

그는 지나침을 피하라는 델포이의 명령을 너무 완벽하게 이행했다. 극단을 깎아내려 너무 안달하느라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143)

유럽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신학에서 [성경]과 같은 것이 되었다. (144)

 

10. 말년

대사제였던 에우리메돈은 기도와 제사가 소용없다고 가르쳤다는 혐의로 아리스토텔렛를 기소했다. ... 아테네에서 고발당한 사람은 언제나 망명을 택할 권리가 있었다. (146)

위대한 철학자의 말로가 너무 쓸쓸했다. 스스로 독을 마시고 죽음을 선택했다니. 그 많던 제자들은 다 어디 갔을까.

 

3장 프랜시스 베이컨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르네상스까지

기원전 5세기 말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봉쇄하여 무너뜨렸을 때, 그리스 철학과 예술의 어머니는 정치적 주관을 잃었고, 아테네 정신의 활력과 독립성은 쇠퇴했다. (151)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건 노예 에픽테토스이건, 로마인들은 주로 제논 학파의 철학으로 기울었다. (154)

로마 사람들에게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는 종교가 퍼져나갈 때 루크페티우스는 거기에 맞서 냉엄한 유물론을 제시했다. (155)

민족도 개체와 같아 천천히 성장하고 반드시 죽는다. (156)

에픽테토스의 주인은 그에게 늘 잔인하게 굴었는데 하루는 무료한 시간을 때우려고 에픽테토스의 다리를 비틀었다. (157)

아무리 노예라고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에픽테토스는 이런 노예생활 때문에 철학자가 되었을까.

13세기가 되자 교회는 유럽 땅의 3분의 1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그 돈궤는 부자와 빈자의 기부금으로 넘쳐났다. (158)

그리스로마시대라고 뭉쳐서 부르지만 엄연히 다른 문화이고 사람들이다. 철학과 종교가 부딪히는 것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흥미 있겠다.

지식이 늘어나면서 공포는 줄었다. ...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시작과 기획의 시대였다. (161)

 

2. 프랜시스 베이컨의 정치인생

천재는 한 가문이 재능으로 구축한 구조물의 정점이며, 천재의 후손으로 가면 이 재능은 다시 범상한 사람 수준으로 가라앉는다. (162)

베이컨을 위대하게 길러낸 주역은 엘리자베스 시대 잉글랜드, 즉 근대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국가의 가장 위대한 시대였다. (162)

그는 아직 열여섯 살의 소년이었음에도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의 참모 자리를 제안 받았다. (163)

영국의 국새상서를 지낸 아버지의 영향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대단하다. 열여섯이면 아직 철부지 아닌가. 세상 경험도 없을 텐데, 베이컨의 어떤 점이 이런 직책을 맡겨도 된다고 여겼을까.

사랑과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것은 효과가 없다. 언제나 내주어야 하지만, 절대 다 내주면 안 된다. 받는 쪽에서는 기대가 있어야 고마운 마음을 키워나가는 법이다. (165)

저자의 이런 표현들이 있기에 이 책이 베스트 & 스테디셀러인 것이다.

베이컨은 채워지지 않는 야망으로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는 만족할 줄 몰랐으며, 늘 수입보다 1년 정도 미리 지출했다. (166)

3. 수상록

교활한 사람은 공부를 비난하고, 단순한 사람은 공부를 찬양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공부를 이용한다. 공부는 공부의 용도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공부 바깥에서, 공부 위에서, 관찰에 의해 얻어지는 지혜다.” (167)

야망과 과한 지출로 살았던 사람이 철학자라고 하니 좀 아이러니다. 이 전에 본 도덕경의 가르침과 너무도 다른 사람이라 더욱 그렇다. 평생 노동을 하지 않고 친구와 지인들에게 빌붙어 살았던 마르크스가 생각난다.

어떤 책은 삼켜야 하고, 소수의 책은 씹고 소화해야 한다.” 물론 이런 책들은 세상이 매일 목욕하고 중독되고 익사하는 잉크의 대양과 폭포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169)

[수상록]은 기름지고 영양이 좋은 음식과 같아, 한 번에 많이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 하지만 한 번에 4,5편씩만 읽으면 영어로 기록된 가장 훌륭한 지적 자양분이 될 것이다. (169)

원서로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괴테와 마찬가지로 베이컨도 행동에 이르지 않는 지식은 경멸한다. (171)

인간의 정신은 철학을 조금만 알 때는 무신론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철학으로 깊이 들어가면 종교로 돌아가게 된다.“ (172)

내가 종교에 대해 왔다갔다 하는 것이 철학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해서 일까.

습관은 인간 삶의 최고 지휘권자” (174)

폭동의 재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심한 가난과 심한 불만이다.“... 혁명을 피하는 더 나은 처방은 부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 베이컨은 당대에 교육을 받을 길이 전혀 없던 민중을 불신한다. (175)

근대의 철학자 사상을 현대의 관점에서 논하는 것은 맞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베이컨의 사상은 귀족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4. 위대한 재건

그는 출세 가도를 달리며 지위가 점점 높아지는 동안에도 내내 철학의 복원 또는 재건 문제를 깊이 생각했다. (176)

 

1. 학문의 진보

결과물을 생산하려면 지식이 있어야 한다. “자연을 부리려면 자연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무지한 상태에서 자연의 노예가 된 것과는 반대로, 자연의 법칙을 배우면 자연의 주인이 될 것이다. 과학은 유토피아에 이르는 길이다. (177)

그는 생리학과 의학에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178)

베이컨은 큰 고통을 대가로 죽음을 며칠 늦출 수 있을 뿐인 상황에서는 의사가 편하고 빠르게 죽게 해주는(안락사)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의사들에게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을 더 연구할 것을 권한다. (179)

안락사에 대해 요즘처럼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왜냐 고대엔 영아살인으로 인구 제한하는 것에 아무런 죄의식도 없었던 것 같으니까.

8권에 가면 또 하나의 과학이 자라나온다. 바로 처세학이다. ... ‘너 자신을 알라는 반쪽에 불과하다. 자신을 아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아는 수단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 (180)

베이컨에게 친구는 주로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 어쩌면 우정에 대한 이런 매우 실용적인 평가가 권력의 자리에서 베이컨이 추락한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181)

베이컨이 맘에 안 들더니 여기선 더 맘에 안 드네. 그런데 사상과 그 사람을 같이 평가해야하는 건지, 분리시켜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2. 신기관

베이컨의 가장 큰 성과는 [신기관]의 첫 권이다.” (186)

인간은 자연의 관리자이자 해석자로서 자연의 질서에 대한 관찰이... 허락하는 만큼만 행동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상은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다.” (187)

사람은 자신이 진실이기를 바라는 것을 더 쉽게 믿기 때문이다.” (189)

단순한 경험을 생기는 대로 받아들이면 우연이라고(‘경험적이라고’)부르지만 그것을 구하고자 노력했을 때에는 실험이라고 부른다.”

논리학을 공부한다면 이 책으로 해라라고 했다는데 논리학 책보다 과학책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3. 과학의 유토피아

베이컨이 죽기 2년 전에 발표한 짧은 단편이다 마지막 저술인 [신아틀란티스]에서 묘사한 세계다. (193)

철학자들은 누구나 자기가 꿈꾸는 이상향이 있다. 본인들의 철학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을 바라는 마음이겠지.

사실 신아틀란티스에는 정부가 아예 없다. 통치자들은 사람을 다스리기보다는 자연을 통제하는 데 몰두한다. (196)

5. 비판

논리학이란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 경험과 방법론을 정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이란 소수가 가진 기술을 규칙에 의거하여 모두에게 가르칠 수 있는 과학으로 바꾸려는 시도이지 않은가. (198)

그가 철학과 과학에서 한 일은 단편으로만 남아 있고 그나마 혼란스럽다. (200)

통제의 정신이 체념의 정신을 극복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베이컨의 영향이 느껴졌다. ... 베이컨은 말했다. “인간은 직립한 동물이 아니라 불멸의 신이다.” “창조주는 우리에게 온 세상을 감당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세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영혼들을 주셨다.” (203)

 

6. 에필로그

괴테는 말했다. “한 사람의 약점은 그의 시대에서 온다. 반대로 그의 장점과 위대함은 그 자신의 것이다.” 이것은 시대정신에게는 약간 부당해 보이지만, 베이컨의 경우에는 특히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204)

그는 더 일찍 정치를 버리고 모든 시간을 문학과 과학에 쏟지 못한 것을 애달파했다. (206)

 

4장 스피노자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사실들

1. 유대인의 오디세이아

그 어느 때보다 수가 늘었고, 모든 분야에서 그 천재성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2000년의 방랑 끝에 잊지 않고 있던 옛 땅으로 의기양양하게 귀환했다. (209)

중부 유럽에서 유대인은 상인과 자본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 스페인 왕은 이 이질적인 인종이 끈기 있게 모은 부를 빼앗아 자신의 지갑을 불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10)

유대인은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림책에서도 유대인 작가가 많다. 간혹 책에선 수전노로 표현되기도 한다. 아마 유대인이 가진 경제적 부에 대한 부정적 모습일 것이다.

마침내 아프리카의 해안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는 보석을 삼켰을 거라는 이유로 많은 유대인이 살해당했다. (211)

유대인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한국이 외침을 많이 받고 식민지 시대를 거쳤지만 자국의 영토에서 벗어난 적은 없었다. 이렇게 떠돌며 받은 고난들이 이 민족을 더 뭉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2. 스피노자가 받은 교육

그의 아버지는 상인으로 성공했지만 아이는 그런 인생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회당 안팎에서 시간을 보내며 자기 민족의 종교와 역사를 흡수해 들였다. (212)

신앙의 가장 영리한 옹호자들은 사실 가장 큰 적이다. 그 예리한 면들 때문에 의심이 생기고 정신이 자극받기 때문이다. ... 그는 기독교 세계의 사상가들은 신과 인간의 운명이라는 이 큰 문제에 관해 뭐라고 말했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을 느꼈다. (213)

유대교는 구약만을 믿는다. 율법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의 종족만이 구원받을 종족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던 것 같다.

라틴어를 통해 고대와 중세 유럽 사상의 유산으로 진입했다. (213)

스피노자는 근대철학에서 주관적이고 관념론적인 전통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았다. (214)

그가 매력을 느꼈던 것은, 모든 형태의 물질의 바탕에 있는 동질의 실체와 모든 형태의 정신의 바탕에 있다는 또 다른 동질의 실체라는 데카르트의 개념이었다. ... 또 한 가지 그가 매력을 느꼈던 것은 신과 영혼을 제외한 세상 만물을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법칙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데카르트의 욕망이었다. (215)

철학자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발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서구 철학이란 범주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럼 동양은 중국 철학이 중심이었을 텐데 얼만큼 발전시켰던 것일지 궁금해진다.

 

3. 파문

회당과 자신의 종교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는 데 동의한다면 500달러의 연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고, 그가 그 제안을 거부했으며, 1656727일 히브리 제의의 모든 엄숙한 형식적 절차를 거쳐 파문당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216)

종교가 참 큰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렇게 직접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린 마을 공동체가 그런 역할을 했었는데 현대엔 이마저도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써 지금부터 누구도 이자와 입에서 나오는 말로 대화하지 말고, 글로 생각을 나누지 말고, 누구도 이자에게 어떤 일도 해주지 말고, 누구도 이자와 한지붕 밑에서 거하지 말고, 누구도 이자에게 4큐빗 이내로 접근하지 말고.” (217)

참 가혹한 파문이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듯 살아야 하는 거다.

그들의 종교는 그들에게 신앙인 동시에 애국심이었으며, 회당은 의식과 예배의 중심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삶의 중심이었다. (218)

 

4. 은거와 죽음

그는 다른 종파에 들어가지 않고 혼자 살아간다. (219)

한 독실한 악당이 살인으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옹호하겠다는 마음으로 단검을 뽑아 들고 이 젊은 학자를 공격한 것이다. (220)

가말리엘이 말했듯이 일은 사람의 덕을 유지해주는 반면, “일을 배우지 못한 모든 학식 있는 사람은 결국 악당이 되기 마련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220)

파문당해서 다락방에 숨어살았으나 유대인의 삶은 살았던 것이다.

그는 섬세하게 주의를 기울여 분기마다 가계부를 정리했다. 매해 써야 할 돈 이상도 이하도 쓰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221)

베이컨과 너무도 비교된다. 내가 철학자가 성공하는 것 특히 돈에 대해 절제하지 못하는 건 잘못됐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가 파문과 제명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것은 167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 교수 자리를 제안 받은 사실로도 알 수 있다. (226)

각하, 저는 제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보다 높은 세속적 지위를 구하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을 듯한 현재의 평온을 사랑하기에 공적인 교사라는 자리에 들어가는 일은 삼가야 할 듯합니다.” (226)

학생들을 가르쳤음에도 대학 교수자리는 사양한 것은 앞에 말한 철학을 할 자유가 어느 선까지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 더 클 수도 있다.

 

2. 신학정치론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너무 철저하게 증명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결론은 모든 교육받은 정신에게 상식으로 통용되며, 그의 저작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끌어당기는 신비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227)

이 책의 핵심적 원리는 [성경]이 의도적으로 비유적 표현을 쓰거나 알레고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228)

내가 성경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항상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고 비유적으로 대답을 하는 것을 보고 왜 이렇게 하지 그러니 잘 모르겠다고 느꼈고 한편 그러니 대단해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것이 다 의도였다는 것이다. 놀랍다.

철학자는 신과 자연이 하나라는 것, 필연성에 의해 활동하고 변함없는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229)

그래서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별로 없었던 거다.

유대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에 대한 기도교도의 증오 때문이었다. 유대인은 박해 때문에 종족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통일성과 연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230)

나와 같은 생각이다. 내부 결속은 결국 폐쇄성을 동반한다. 그래서 종교가 점점 더 폐쇄적이면서 본인들의 결속으로만 유지된다.

스피노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가 인간 가운데는 제일이라고 여긴다. (230)

하긴 예수가 인간으로 도덕성의 성인과 같은 경지에 이른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구약으로 부족했던 기독교인들이 그를 신격화한 것일 수도 있다.

 

3. 지성 정화론

내가 두려워하는 모든 대상과 내가 두려워하게 되는 모든 이유는 정신이 그것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그 자체로서 선하거나 악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마침내 진정으로 선하고 그 선함을 전달할 수 있는 것, 다른 모든 것을 버리게 할 만큼 정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혹시 있을까 하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결심했다.” (231)

위대한 철학자는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 구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깨닫는 것조차 힘든 게 보통의 사람들인데 거기서 더 나아가 탐구했다는 것이다.

 

4. 윤리학

질서는 우리 정신의 결을 거스른다. 우리는 공상의 무질서한 선들을 따르고, 위태롭다 해도 우리의 꿈에서 철학을 짜 나아가는 쪽을 더 좋아한다. (235)

스피노자는 읽는 것이 아니라 연구해야 한다. (235)

스피노자를 읽고 연구하고 싶어진다. 스피노자에 대한 글을 써보는 것도 좋겠다.

 

1. 자연과 신

과학이 가정하는 형이상학이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이다. (237)

실체는 모든 사건과 사물 밑에 놓여 있으면서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존재의 구조 자체를 가리키게 된다. (238)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만물이 ... 나온다.“ (239)

선과 악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만 생각하면 확실한 것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 똑같은 것이 동시에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을 수 있다. (241)

스피노자는 여전히 신을 여성이 아니라 남성으로 그리는 일반적인 믿음에 주목하여,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지상의 상황을 반영한 개념을 용감하게 거부한다. (241)

여성보다 남성이 우월하다는 사고는 신화와 종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이를 거부했다고 하니 더욱 신선하다.

2. 물질과 정신

몸은 정신이 생각하도록 결정할 수 없다. 또 정신은 몸이 계속 움직이거나 쉬라고, 또는 다른 어떤 상태에 있으라고 결정할 수 없다.” “정신의 결정. 몸의 욕망과 결정은 ... 하나이자 같기때문이다. (243)

모든 관념은 이행 과정에서 다른 관념에 막히지 않으면 행동이 된다. 관념 자체는 통일된 유기적 과정의 첫 단계이며, 외적인 행동은 그 완성이다. (245)

자유의지란 없다.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본능을 결정하고, 본능이 욕망을 결정하며, 욕망은 사고와 행동을 결정한다. “정신의 결정은 오로지 욕망에서 나오며, 이 욕망은 기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245)

성격과 기질은 날 때 지니고 태어나기도 하지만 살면서 생겨나는 생존본능이라는 말과 통하는 말이다.

 

3. 지성과 도덕

스피노자는 우선 행복을 행동의 목표로 설정한다. 그러면서 행복이란 쾌락의 존재이고 고통의 부재라고 아주 단순하게 정의한다. (247)

그는 자기중심주의가 불가피하고 또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고 여기에 기초하여 윤리학을 세운다. (249)

키케로가 말했듯이, 겸손을 찬양하는 책을 쓰는 철학자들도 잊지 않고 속표지에 자기 이름을 적어놓지 않는가. ... “자만하는 사람은 자신에 관해서는 훌륭한 행동만 이야기하고, 남에 관해서는 나쁜 행동만 이야기한다.” (249)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말을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아~하는 탄성이 나오게 하는 것이 진정한 대가들이다.

증오는 같은 감정과 마주칠 거라는 느낌에 자극을 받아 더 커지기 때문이다. (250)

본능은 추진력으로서는 굉장하지만, 안내자로서는 위험하다. 본능은 우리가 본능의 개인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 때문에 인격 전체의 유익에 관계없이 각자 자신의 만족을 추구한다.(251)

그는 이성 없는 열정이 장님이듯, 열정 없는 이성은 죽은 것임을 알고 있다. (251)

우리는 상상과 이성을 이용해 경험을 예측으로 바꿀 수 있다. 과거의 노예에서 벗어나 미래의 창조자가 될 수 있다. (253)

이를 통찰이라고 부른다. 일일이 다 경험하지 않아도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위대해지는 것은 인간 위에 올라서서 남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불균등한 욕망의 편파성과 무용성 위에 올라서서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253)

그렇다.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가 가장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존재에 정신을 집중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자잘한 일을 내려다볼 시간이 없고, 질투와 적의에 사로잡혀 그들과 맞서 싸울 여유가 없다. 그의 눈은 늘 고정된 불변의 원리를 향한다.” (255)

 

4. 종교와 불멸성

우리 몸은 인류라는 몸의 세포이며, 인류는 생명의 드라마 가운데 한 사건이다. 우리 정신은 영원한 빛의 순간적인 반짝임이다. (256)

우리 생각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아름다운 것은 우리보다 오래 살아남아 오랜 세월에 걸쳐 거의 시간을 초월하는 영향력을 가진다는 말이다. (257)

고전 인문학이 몇 천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읽히고 감동을 주는 이유다.

무지한 사람은 외적인 원인 때문에 여러 가지로 흥분할 뿐 아니라 정신의 진정한 만족을 한 가지도 누리지 못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무지한 사람은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워야한다. 철학자들을 보면 모두 지난 철학자, 과학자 각계의 사람들에게서 배웠다. 직접 만나기도 했고 책을 보기도 했다. 물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본인이 연구하고 을 썼다. 이 당대에 인정받기도 했지만 대부분 비주류라 후대에 가서야 빛을 밝혔다.

 

5. 정치론

당시에는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힘과 권리는 하나였다. (259)

죄란 자연 상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일반적 동의에 의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선포하여 각자 국가에 책임을 지게 하는 사회적 상태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259)

시대적 상황과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 알지 않고 지금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아무도 혼자서는 자신을 방어하고 삶의 필수품을 확보할 만큼 강하지 않으므로 모든 사람에게는 혼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며, 이 때문에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 조직을 구서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말이다. 혼자서는 살 수 없으며 같이 살아야 한다. 그래야 존재감도 생겨나고 이타심도 생겨난다.

양신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으로,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 양심은 성장하는 개인의 정신에 집단의 도덕적 전통이 저장되는 것이다. (261)

이성은 형이상학에서는 사물의 질서를 인식하고 윤리학에서는 욕망들 사이에 질서를 세우듯이, 정치학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질서를 배운다. 완벽한 국가는 서로 파괴적이 되는 경우에만 시민의 힘을 제한할 거시다. (261)

자유는 국가의 목표다. 국가의 기능은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고, 성장은 자유를 찾는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262)

스피노자는 국가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국가를 불신한다. ... 스피노자는 교육, 특히 대학에 대한 국가 통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263)

모든 권위를 한 사람에게 넘기면 평화가 아니라 노예제가 촉진될 것이다.” (264)

훈련받은 적합한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을 통치해줄 사람을 선택할 기회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제공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서 최고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것이 여전히 민주주의의 숙제다. (265)

민주주의에 관한 장을 쓰다가 다 맺지 못하고 죽었다는 스피노자의 글이 어떻게 끝이 났을지 궁금하다. 그 좁은 다락방에서 일부러 궁핍한 삶을 추구하며 유전적 병을 견뎠다는 게 아마 단명의 원인이겠지만 많이 아쉽다.

 

6. 스피노자의 영향

스피노자는 괴테의 시와 산문에 스며들었다. (267)

헤겔은 정직하게 철학자가 되려면 우선 스피노자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267)

어쩌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스피노자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그의 글이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면을 드러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심오한 말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면을 보여준다. (268)

그렇다. 그래서 파면 팔수록 팔게 많은 것들이 진정한 고전이라고 정의한 사람도 있다.

 

5장 볼테르와 프랑스 계몽주의

파리 ; [오이디푸스]

어떤 예술에서든 성공하려면 안에 악마가 있어야 해.” (273)

일에 몰두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 볼테르는 말했다. “게으른 사람만 빼면 모든 사람은 선하다.”

나보다 더한 사람을 만났다. 너무 열심히 하는 것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평생을 그렇게 산 사람도 있구나 싶고 오히려 너무 확고하게 이야기한다.

볼테르가 늘 일을 했던 것을 보면 계속 자살의 유혹을 느꼈던 것이 틀림없다. (275)

이탈리아에 르네상스가 있었고 독일에 종교개혁이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라에서 르네상스인 동시에 종교개혁이었으며, 혁명의 반이었다. (275)

볼테르가 프랑스에선 이렇게나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이었다니.

책은 세상을 지배한다. 적어도 글이 있는 나라는 지배한다. 다른 나라는 사실 고려할 필요가 없다.” (276)

우리가 36년의 일제강점기를 겪었지만 말과 글을 뺏기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한 점이다. 우리의 선조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문학은 사회에 쓸모없고 친척에게는 짐이 되다가 결국에는 굶어 죽기를 원하는 사람의 직업이다.” (278)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우리가 들으며 컸고 또 우리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다. 인문학은 밥이 되지 않는다며.

바스티유에 있는 동안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볼테르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진지한 장시를 썼다. (279)

그의 프랑스 사람 특유의 재치 있는 펜에 유대인에 가까운 이재가 보태진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280)

희곡을 써서 성공했다니 철학자로 남다른 면이다. 어쩌다 희곡을 쓰고 공연까지 관여하게 됐는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줬으면 좋겠다.

그는 늘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여론에 민감했으며, 동물들은 사람들이 자기에 관해 뭐라고 하는지 모른다며 부러워했다. (281)

참 독특하다. 동물들을 그런 점에서 부러워하다니.

 

2. 런던 ; [영국 통신]

그는 역병이라는 단어는 한 음절이고 학질이라는 단어는 두 음절인 점에 기분이 상해, 영어의 반이 역병에 걸리고 나머지 반은 학질에 걸리기를 바랐다. (282)

프랑스에서라면 잘못된 생각이라는 이유로 순교의 명예를 안았을 것이다. (283)

프랑스가 더 자유롭고 허용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영국이 더 자유롭다는 것도 놀랍다. 하긴 프랑스에서 유태인을 경기장에 몰아넣고 신분을 밝히는 행정과정을 진행했는데 먹을 것도 주지 않아 그곳에서 죽은 사람의 수가 많았다는 것과 그 역사적 사실을 프랑스 스스로 숨기려한다는 것을 프랑스 유학 다녀온 교수를 통해 들었었다.

이 통신은 영국의 정치적 자유와 지적 독립성을 프랑스의 압제나 굴레와 비교했다. 또 모든 질문과 의심에 대한 답으로 계속 바스티유만 제시하는 프랑스의 게으른 귀족과 십일조를 빨아먹는 성직자들을 비난했다. ... 스스로 알지도 못했고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이 통신은 혁명을 알리는 닭의 첫 울음소리가 되었다. (284)

 

3. 시레 ; [로망스]

그녀를 여자라는 점이 유일한 결함인 위대한 인간이라고 묘사했다. (285)

샤틀레 후작 부인이라는 여성이다. 첫 여성 수학자인 히파티아도 있었고 철학, 수학사에서 묻힌 여성들을 찾아내는 것도 의미 있을 수 있겠다.

당시의 도덕은 인류의 위선을 계속 품위 있게 존중해주기만 한다면 연인을 여자의 살림에 보태는 일을 허락했다. (286)

성과 도덕관념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는 거다.

사람은 경박해질 수 있기에 목을 매달지 않는 것이다.“ (286)

이 작품들은 장편소설이 아니라 짧고 해학적인 중편이다.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관념이고, 악당은 미신이고, 사건은 생각이다. (287)

그는 인간 종이 아주 작은 진흙 한 조각을 두고 서로 잡아먹는 벌레들 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실제로도 그러하다.” (291)

 

4. 포츠담과 프리드리히

볼테르를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자 언어에 명예를 베푸는 사람이라고 일컫고 있다. (292)

그게 만물의 질서다. 못 하나가 박히면 다른 못은 빠져나간다.” (294)

볼테르는 독일어를 배우다가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 되자 포기하면서, 독일 사람들이 재치는 늘리고 자음은 줄이기를 바란다고 한마디 했다. (295)

그는 반쯤은 결별을 바라고 있었다. 프랑스 사람 특유의 향수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296)

그의 삶이 노쇠의 시기로 저물어가는 것처럼 보이던 그 시절에 가장 고상하고 위대한 작업을 하게 된다. (298)

대부분 마지막 순간까지, 오히려 마지막 순간에 시대의 역작이 나온다.

 

5. 레델리스 ; [도덕론]

역사는 범죄와 불행의 묘사에 불과하다.” ... “오직 철학자만 역사를 써야 한다.” ... “역사는 결국 우리가 죽은 자들을 가지고 노는 속임수들의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299)

그는 자신의 역사는 왕들이 아니라 운동, , 대중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족이 아니라 인류를 다루고, 전쟁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행군을 다루어야 한다. (300)

볼테르가 쓴 역사서가 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해서 볼테르는 최초의 역사철학을 내놓았다. (301)

기독교가 이교를 급속히 정복하는 바람에 로마가 내부에서부터 해체되면서 이주를 위해 침략해 들어오는 이방인들의 손쉬운 먹이가 되었다는 관점을 택함으로써 성직자들의 분노를 샀다. (301)

서구는 종교가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바람에 어느 분야든 종교를 불편하게 하면 막아버렸다. 결국 볼테르는 프랑스에서 추방당했다.

 

6. 페르네 ; [캉디드]

그가 변덕스럽게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닌 것은 단지 신경과민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디를 가나 박해 때문에 불안정한 상태를 반영한 것이었다. (302)

볼테르의 삶은 추방과 도망과 투옥의 연속이었다. 고단한 삶이었을 것이다.

몇 달 뒤에는 7년전쟁이 벌어졌다. 볼테르는 이 전쟁을 광기와 자살로, 캐나다의 눈 몇 에이커를 영국과 프랑스 가운데 누가 얻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유럽을 파괴하는 짓으로 보았다. (307)

[캉디드]는 아마 모든 문학 가운데 가장 훌륭한 단편일 것이다. (307)

그 모험은 중세 신학과 라이프니츠 낙관주의의 난점을 조롱하는 논평과 다름없다. (310)

 

7. [백과전서][철학 사전]

프랑스는 종교개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무오류와 불신앙 사이의 중도를 잃어버렸다. (311)

인간이 최고의 지능을 갖춘 것은 인간이 원하는 것이 가장 크고 가장 넓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욕구가 없으면 정신도 없다.” (312)

마지막 사제의 창자로 마지막 왕의 목을 매달아야 인간은 자유를 얻을 것이다.” (312)

너무 적나라한 표현이다.

어떤 사람들은 작은 책을 써도 장황하다. 그러나 볼테르는 100권 내내 간결하다.” (314)

의심은 별로 유쾌한 상태는 아니지만, 확신은 확실히 우스꽝스러운 상태다. (314)

 

8. 파렴치를 박살 내라

툴루즈에는 자살자를 벌거벗겨 죄인 운반용 수레에 엎드린 자세로 실은 다음, 거리로 끌고 다니다 교수대에 목을 매다는 법이 있었다. (317)

종교적인 법이 더 가혹하다. 신은 용서와 사랑의 신이면서도 단죄하는 신이다.

이 무렵 그는 파렴치를 박살 내라는 유명한 좌우명을 채택하고, 교회의 권력 남용에 맞서 프랑스의 영혼을 흔들어 깨웠다. (318)

이때는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곧이곧대로 말하면 안 되고, 자신의 목적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은 결코 직선일 수 없는 위험한 시대였다. (321)

그는 고대의 거의 모든 민족에게 비슷한 신화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나서, 이렇게 해서 신화들은 사제들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서둘러 결론을 내린다. (321)

캠벨이 각 민족마다 비슷한 신화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볼테르가 먼저였다.

신이 어떤 존재이고, 왜 현존하는 모든 것을 만들었는지 추측하는 것이 주제넘은 짓이라면,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주제넘은 짓 같네.” (322)

그는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도 부정한다. 영혼에 관해서는 불가지론자다. “형이상학 책 4000권도 우리에게 영혼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다.” (323)

 

9. 볼테르와 루소

부자에게 답을 물어보라. 그들은 모두 귀족제를 원할 것이다. 민중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민주제를 원할 것이다. 군주제를 원하는 것은 군주들뿐이다. (327)

그는 애국심이란 일반적으로 자신의 나라 외에 다른 모든 나라를 싫어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자기 나라가 번영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다른 나라를 희생시키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면, 그는 똑똑한 애국자인 동시에 세계시민이다. (328)

자유만이 아니라 평등, 심지어 자유를 희생해서라도 평등을 원하는 억압받는 자들은 만족시킬 수 없었다. (329)

혁명이 루소 추종자들인 마라와 로베스피에르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평등이 앞으로 나서고 자유는 단두대로 갔다. (329)

루소의 사상을 다시 확인해 봐야겠다. 볼테르와 어떤 점에서 다른지 궁금하다.

이제 그가 옹호하던 개혁이 이루어질 터였다. 배심제 시행, 십일조 폐지, 가난한 사람의 완전한 세금 면제 등등.

교회에선 여전히 십일조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볼테르는 십일조 폐지를 주장했구나.

볼테르는 늘 이성을 믿었다. “우리는 말과 펜으로 인간을 계몽시킬 수 있고 더 낫게 만들 수 있다.” 루소는 이성을 거의 믿지 않았다. 그는 행동을 바랐다. (331)

볼테르는 자신의 유명한 원칙, “네가 하는 말에는 한마디도 동의할 수 없지만, 네가 그 말을 할 권리는 목숨을 걸고 지켜줄 것이라는 원칙에 따라 루소의 책을 불태운 스위스 당국을 공격했다. (331)

멋진 원칙이다. 어떠한 주장과 관점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행동으로 그 원칙을 지켰다.

 

10. 대단원

내 두려움은 봉사를 다하기 전에 죽는 겁니다.” (333)

다만 신의 용서를 구할 때만 무릎을 꿇으라고 말했다. (334)

다음 날 그의 방에는 손님 300명이 모여들어 그를 왕처럼 환영했다. 루이 16세는 질투심에 안달을 했다. (335)

어떤 사람은 극장에 들어왔다가 정신병원에 들어온 줄 알고 겁을 먹고 다시 거리로 뛰쳐나갔다. (336)

우리에겐 왜 이런 사상가들이 없는 것일까. 민중들에게 지지받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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