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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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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일 09시 04분 등록

『철학 이야기』 2/2

윌 듀런트, 정영목 옮김, 봄날의 책

 

13주차 (6/26~7/2)

티올(윤정욱)

 

 

I. 저자 분석

 

가.   , 철학 '이야기'라고 이름 붙였나?

'차례'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이 책이 플라톤부터 산타야나에 이르는 중요한 철학자 열다섯 명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 사상의 발달이 역사의 어떠한 발달 못지않게 흥분되는 이야기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스피노자, 볼테르, 칸트, 쇼펜하우어, 스펜서, 니체, 베르그송, 크로체, 러셀, 산타야나, 제임스, 듀이 등 모두 15명의 철학가를 다루고 있는데,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그저 쉽고 재미있게 철학을 서술하는 양념 노릇에 머물지 않고, 각각의 인간의 지적?사상적?인간적 고투의 과정임을, 즉 한 인간의 욕망의 숨김과 드러냄 과정임을 잘 보여준다. 당연히, 그들을 둘러싼 개인사? 가족사? 시대사 등을 촘촘히 살핀 후 내적 필연성 아래에서 묘사한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격정과 격동 넘치는 열다섯 편의 드라마라고 부를 만하다. 

 

 

나.   윌 듀런트가 본 각각의 철학자

 

6장 이마누엘 칸트

“나는 이미 지키고자 결심한 노선에 마음을 고정시켰다. 나는 나의 길로 들어설 것이며, 무엇도 내가 이 길을 좇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과 무명의 세월을 살며 거의 15년 동안 자신의 걸작을 스케치하고 쓰고 다시 썼다. 이렇게 느리게 성숙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 이렇게 철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적도 없었다. 

7장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덕분에 우리의 은밀한 심장이 드러났다. 그는 욕망이 철학의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사고가 비인격적 사건들의 추상적 계산이 아니라 행동과 욕망의 유연한 도구라는 것을 이해하는 길을 닦아놓았다. 그는 천재의 필요성과 예술의 가치를 우리에게 다시 가르쳐주었다. 모든 위대한 것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그는 다시 한번 영웅을 고귀하게 섬기라고 설교했다. 

8장 허버트 스펜서

그는 자신의 시대를 요약했는데, 단테 이래로 어떤 시대를 요약한 사람은 스펜서 외에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대가다운 솜씨로 방대한 지식 영역을 조정하는 일을 완수했기에 그 성취 앞에서는 비판하기가 부끄러워져서 입을 다물 지경이다. 우리는 지금 그의 노력과 노고가 밀어준 덕분에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 우리가 그보다 높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가 우리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9장 프리드리히 니체

이것은 아름다운 시다. 어쩌면 철학이라기보다는 시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터무니없는 점이 있다는 것, 이 사람이 자신을 설득하고 교정하려고 너무 멀리 나아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한 줄 한 줄 쓰면서 고통을 겪었음을 알 수 있고, 그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자리에서도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감상과 망상이 지겨워, 날카로운 의심과 부정에 감사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니체는 강장제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10장 현대 유렵 철학자들: 앙리 베르그송 등

베르그송은 인간의 가슴에서 영원히 솟아오르는 희망을 방어하러 나섰기 때문에 일찌감치 크나큰 인기를 얻었다. 사람들은 철학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도 불멸과 신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쁘고 감사했다. 베르그송의 강의실은 자신의 마음속의 욕망이 그런 박식한 웅변으로 뒷받침되는 것을 기뻐한 화려한 숙녀들의 살롱이 되었다.

 

11장 현대 미국 철학자들: 조지 산타야나 등

 

이 영혼은 마치 고대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이교도 학자와 같은 억양으로 말하면서 침착하고 탁월한 안목으로 우리의 작은 체계를 살피고, 아주 차분한 추론과 가장 완벽한 산문으로 우리의 새롭고도 낡은 꿈들을 박살냈다. 플라톤 이후 철학이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된 적은 없었다. 산타야나, 그의 말은 새로운 풍미, 섬세한 질감이 느껴지는 구절로 가득했고, 섬세한 통찰로 향기를 풍겼으며, 풍자적인 위트로 가시가 박혀 있었다.

 

 

다.   철학자들은 각자 또 함께 존재한다

 

각각의 철학자들을 당연히 독립된 주체로 다루면서도 동시에 사상적 영향 관계를 충실히 살펴서, 그 얽히고설킨 그물망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철학사의 양대 산맥이라고 불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계보학은 말할 것도 없고,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등의 철학자들 역시 영향을 받고 영향을 준 철학자들의 삶과 사유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여준다.

 

 

II.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 6 :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 >

 

(341) 1781년 쾨니히스베르크의 신비한 스코틀랜인 칸트는 거의 60년 동안 조용히 계획대로 발전시켜온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으로 세상을 교조의 잠에서 깨웠다.

 

(346) 흄에 따르면 우리는 물질을 아는 식으로 정신을 안다. 즉 지각으로 아는 것인데, 다만 이 경우에는 내적인 지각이다.

 

(346) 흄은 영혼 개념을 소멸시켜 정통 정교를 파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법칙 개념도 해체하여 과학을 파괴하겠다고 나섰다.

 

(350) 이성이 신이나 불멸에 대한 믿음에 반대할 수도 있지만, 감정은 압도적으로 그 믿음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350) 이런 논거의 실들을 한데 모으는 것, 버클리와 흄의 사상을 루소의 감정들과 결합하는 것, 이성에서 종교를 구해내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회의주의에서 과학을 구해내는 것, 이것이 이마누엘 칸트의 사명이었다.

 

(354) 그는 양말 신는 법에도 철학을 적용하여, 양말 끈을 바지 주머니 안으로 끌어올려, 그 끝에 용수철을 달고, 용수철은 작은 상자에 담았다. 그는 모든 것을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 행동에 옮겼으며, 그 결과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355) “나는 이미 지키고자 결심한 노선에 마음을 고정시켰다. 나는 나의 길로 들어설 것이며, 무엇도 내가 그 길을 좇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칸트)”

 

(356) <순수이성비판>은 사고를 연구하는 세밀한 생물학, 개념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조사, 타고난 정신 구조의 분석이다.

 

(357) 인간의 정신은 경험과 감각이 절대적이면서도 변덕스러운 의지를 기록하는 수동적 밀랍이 아니며, 일련의 또는 일군의 정신적 상태에 붙여놓은 한낱 추상적 이름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정신은 감각 결과를 관념으로 만들고 조정하는 적극적 기관,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경험을 질서 있게 통일된 사고로 변형하는 기관이다.

 

(362) 감각 경험은 조직되지 않은 자극이고, 지각은 조직된 감각 경험이며, 개념은 조직된 자각이고, 과학은 조직된 지식이며, 지혜는 조직된 삶이다.

 

(362) 이 끈질긴 무법 상태에 질서와 순서와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다. 이 바다에 빛을 비추는 것은 우리 자신, 우리의 인격, 우리의 정신이다.

 

(364) 칸트가 물질이나 외적 세계의 존재를 의심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고 덧붙인다. 우리의 세세한 지식은 그 겉모습, 그 현상, 우리가 갖고 있는 감각 경험과 관련된 것일 뿐이다.

 

(368) 우리는 순수이성이 실천적일 수 있다는 것, 즉 경험적인 것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의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368) 아침에는 훌륭한 결심을 하지만 저녁이면 어리석은 짓을 하는구나.

 

(368) 따라서 설사 나에게 이익이 되더라도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의식이 내 안에 생겨난다.

 

(369) 이 세상에서 조건 없이 선한 것은 선한 의지, 즉 자신의 이익이나 손해에 관계없이 도덕법칙을 따르려는 의지뿐이다.

 

(369) “남들의 행복을 구하고, 우리 자신에게는 완벽을 구하자그것이 행복을 주건 고통을 주건. 자신의 완벽을 남들의 행복을 이루려면 자신이건 다른 사람이건 모든 경우에 인간을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접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370) 불편하지만 선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이 삶이 삶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 이 지상의 꿈이 새로운 탄생, 새로운 깨어남을 향한 맹아적 서곡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중에 더 긴 삶에서 균형이 회복되어 관대하게 건네준 물 한 컵을 반드시 백 배로 보답 받으리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알지 못한다면, 의를 느끼는 이런 감각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378) 모든 인간은 그 자체가 절대적 목적으로 존중 받아야 한다. 인간을 어떤 외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존엄을 위반하는 범죄다.

 

(392) 위인들은 미래를 낳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산파다. 산모는 시대정신이다. 천재는 다른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무더기 위에 돌 하나를 얹을 뿐이다.

 

 

< 7 : 쇼펜하우어 >

 

(411) 그는 처음부터 외적 세계는 오직 우리의 감각과 표상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진다는 칸트의 명제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415) 몸의 각 부분은 의지가 표현되는 통로인 주요한 욕망들에 상응한다. 신체 부위는 이런 욕망들의 눈에 보이는 표현임이 틀림없다. , 목구멍, 장은 객관화된 허기다. 생식기관은 객관화된 성욕이다.

 

(415) 따라서 잠잘 때는 의지의 전체적인 힘이 유기체의 유지와 개선을 향한다. 그 결과 고비를 순조롭게 넘기는 일이나 치유는 잘 때 이루어진다.

 

(419) 우선 성적 매력의 법칙에 따르면 짝을 고르는 것이 비록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 서로 자식 생산에 적합한지 여부에 대한 판단으로 결정된다.

 

(420)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결함이 상속되지 않도록 그 결함을 없애줄 짝을 구한다. 신체적으로 허약한 남자는 강한 여자를 구한다. 각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에게 결여된 완전성이, 아니, 자신의 불완전성과 반대일 경우에는 불완전성마저도 특별히 아름답다고 여긴다.

 

(420) 아름답지 않은 젊음은 그래도 늘 매력이 있지만, 젊음이 없는 아름다움은 매력이 없다.

 

(422) 질료의 항상적 변화 속에서 형상의 고정된 영속성을 보는 것. 이것이 철학의 핵심이다.

 

(424) 모든 사람은 심지어 개별적 행동을 할 때도 자신이 선험적으로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믿으며, 매 순간 다른 방식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곧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자유롭지 않고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자신의 모든 결단과 사유에도 불구하고 행동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스스로 비난하는 바로 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마지막까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란다.

 

(424) 우리 의식이 의지로 채워지는 한, 우리가 수많은 욕망에 굴복하면서 늘 희망과 공포에 시달리는 한, 우리가 의지에 종속되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지속적인 행복이나 평화를 누릴 수 없다.

 

(425) 지혜로운 사람은 쾌락을 구하려 하는 대신 걱정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430) 마지막에 우리는 죽음과 만난다. 경험이 지혜로 통합되기 시작할 때, 뇌와 몸이 쇠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겨우 한 순간 미적거리다가 서둘러 죽음으로 간다.

 

(431)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철학의 출발이며, 종교의 최종원인이다.

 

(433)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보다는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행복에 더 기여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교양을 얻는 것보다는 부자가 되는 것에 훨씬 집중한다.

 

(434) 가장 경이로운 사람은 세상을 정복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정복한 사람이다.

 

(435) 세상 경험은 일종의 텍스트로 볼 수 있으며, 생각과 지식은 주석을 이룬다. 생각과 지식은 많은데 경험이 거의 없을 경우, 그 결과는 페이지마다 본문은 두 줄인데 주석은 마흔 줄 달려 있는 책과 같다.

 

(435) 따라서 첫 번째 조언은 책보다 삶이 먼저라는 것이고, 두 번째 조언은 주석보다 본문이 먼저라는 것이다. 해설자와 비평가보다는 저자를 읽어라. “오직 저자에게서만 철학적 사고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철학에 끌린다고 느끼는 사람은 저자 자신의 저작이라는 고요한 성소에서 불멸의 스승을 찾아야 한다.

 

(435)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얻는 행복이 우리 주변에서 얻는 것보다 크다. 한 사람이 사는 세계는 주로 그가 그 세계를 보는 방식에 의해 형성된다. 한 사람에게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의 의식에만 존재하고 그 사람 혼자에게만 일어나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가장 핵심적인 일은 그의 의식의 구성이다.

 

(436) 끝없는 의지라는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지적인 눈으로 삶을 바라보고,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위대한 인물의 성취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437) 천재란 인식 기능이 의지가 요구하는 수준보다 상당히 많이 발달한 존재이다.

 

(437) 천재는 자신의 이해관계, 소망, 목적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버려두는 능력, 한동안 자신의 개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능력, 그래서 순수하게 인식하는 주체, 세상을 보는 맑은 눈으로 남아 있는 능력이다.

 

(438) “대체로 사람은 지적으로 빈곤하고 일반적으로 천박한 만큼 사교성이 강하다천재적인 사람에게는 그만의 보상이 있으므로, 늘 밖에 있는 것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만큼 벗이 필요하지 않다.

 

(447) 쇼펜하우어 개인에 대한 진단은 인간의 행복이 외적 환경보다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고 인정한 점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448) 세상은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지만,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450) 건강한 사람은 행복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구한다.

 

 

< 8: 허버트 스펜서 >

 

(455) 그는 자신의 시대를 요약했는데, 단테 이래로 어떤 시대를 요약한 사람은 스펜서 외에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대가다운 솜씨로 방대한 지식 영역을 조정하는 일을 완수했기에 그 성취 앞에서는 비판하기가 부끄러워져서 입을 다물 지경이다. 우리는 지금 그의 노력과 노고가 밀어준 덕분에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 우리가 그보다 높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가 우리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482) 철학자들은 부모가 되기를 기피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반면 여자의 경우 어머니가 되면 보통 지적 활동이 축소된다. 어쩌면 여자의 사춘기가 남자보다 짧은 것도 여자가 더 일찍 재생산에 희생되기 때문일지 모른다.

 

(485) 본능이 반응하는 관계는 비교적 판에 박힌 단순한 것인 반면, 이성이 대응하는 관계는 비교적 새롭고 복잡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성적인 행동이란 단지 어떤 상황에서 다른 본능적 반응들과 싸워서 살아남은 특정한 본능적 반응들에 불과하다. ‘숙고’란 경쟁하는 충동들이 서로 죽이는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밑바닥에서는 이성과 본능, 정신과 생명이 하나다.

 

(502) 아마 이기주의는 계속해서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사실 그러는 쪽이 바람직한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익보다 남들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예의와 겸양으로 인한 혼돈이 나타날 것이다. 어쩌면 “사회적 조건이 규정하는 한계 내에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전체의 행복을 최대로 달성하는 첫 번째 필요조건일지도 모른다.

 

 

< 9 : 프리드리히 니체 >

 

(513) 나는 그곳에 앉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 선과 악을 넘어서서 가끔은 빛을, 또 가끔은 어둠을 즐겼다. 오직 낮, 호수, 정오, 끝없는 시간만 있었다. 나의 친구여, 그때 갑자기 하나가 둘이 되었고, 차라투스트라가 내 옆을 지나갔다.

 

(521) 니체는 전선으로 가는 길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기병대가 화려한 모습으로 떠들썩하게 도시를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철학 전체의 씨앗이 되는 인식, 비전이 찾아왔다고 니체는 말한다. “나는 처음으로 가장 강하고 가장 높은 ‘삶의 의지’는 비참한 생존 투쟁에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의지’, ‘권력의지’, ‘제압하려는 의지’로 표현된다고 느꼈다.

 

(536) “네 능력을 넘어선 것은 바라지 마라. …… 네 능력을 넘어선 덕을 가지려 하지 마라. 너 자신에게 있을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마라.” 오직 초인만이 아는 행복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의 최대 목표는 일이다.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짓을 오래 전에 중단했다. 지금 나는 나의 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542) 철학은 표현하고 찬양하고자 하는 것이 상승하는 삶이냐, 하강하는 삶이냐에 따라 참이 되기도 하고 거짓이 되기도 한다. 퇴폐주의자는 말한다. “인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차라리 그가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라고 말하게 하라. 삶의 모든 영웅적 가치가 쇠퇴하는 것이 허용되고, 민주주의 – 즉 모든 위인에 대한 불신 – 가 10년마다 또 다른 민족을 파멸로 몰아넣는 상황에서 어떻게 삶이 살 가치가 있겠는가?

 

(547) 에너지, 지성, 자부심 – 이것이 초인을 만든다. 하지만 이것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혼란스러운 욕망을 재료로 개성의 힘을 빚어내는 어떤 위대한 목적이 선별하고 통일할 때에만 열정은 권력이 된다. “자신의 식물을 기르는 원예사가 아니라 그 밑에 깔린 흙이 되는 사상가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자신의 충동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약한 자다. 억제할 힘이 없는 자이고, 퇴폐주의자다. 자신의 규율을 잡는 것 – 그것이 최고다.

 

 

< 10: 현대 유럽 철학자들 - 베르그송, 그로체, 버트런드 러셀 >

 

(573) 베르그송은 인간의 가슴에서 영원히 솟아오르는 희망을 방어하러 나섰기 때문에 일찌감치 크나큰 인기를 얻었다. 사람들은 철학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도 불멸과 신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쁘고 감사했다. 베르그송의 강의실은 자신의 마음속의 욕망이 그런 박식한 웅변으로 뒷받침되는 것을 기뻐한 화려한 숙녀들의 살롱이 되었다

 

 

1. 앙리 베르그송

 

(577) 그러나 너무 많이 알면 회의주의에 빠지기 마련이다. 젊은 시절 독실했던 사람은 배교자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젊은 시절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늙어서 성자가 된다.

 

(579) 자유의지는 의식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안다는 뜻이다.

 

(590) 이 신은 쉼 없는 생명, 행동, 자유다. 이렇게 생각하면 창조는 신비가 아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할 때,” 의식적으로 행동을 선택하고 삶을 계획할 때, “우리 내부에서 창조를 경험한다. 우리의 투쟁과 고난, 우리의 야망과 좌절, 현재보다 더 나아지고 더 강해지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은 우리 내부의 ‘생명의 약진’, 즉 우리의 성장을 이끌고 이 방황하는 행성을 끝없는 창조의 무대로 바꾸어놓은 생명의 충동의 목소리이자 흐름이다.

 

(596) 베르그송 이후 우리는 세계를 우리 자신의 독창적인 힘들의 무대이자 재료로 보게 되었다. 베르기송 이전에 우리는 거대한, 죽은 기계의 톱니 바퀴였다. 이제 우리는 얼마든지 창조의 드라마에서 우리의 역할을 써나갈 수 있다.

 

 

2. 베네데토 그로체

 

(604) 상상은 사고에 선행하므로, 상상도 사고에 필수적이기에, 정신의 예술적 활동, 즉 이미지를 형성하는 활동은 논리적인 활동, 즉 개념을 형성하는 활동보다 앞선다. 인간은 상상하는 순간, 예술가가 된다. 이것은 추론보다 훨씬 앞서는 일이다.

 

(605) 차이는 이미지를 외화하는 능력이 아니라 대상을 표현하는 이미지를 내적으로 형성하는 능력에 있다.

 

(607) “나에게 정확하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줄 수 있었던 사람은 없다. 내 경우에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나의 느낌을 따른다. 어느 누가 더 나은 안내자를 발견했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 아름다움과 진실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지킬 것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제외하면 세상에 진실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3. 버트런드 러셀

 

(610) 러셀은 명료함에 대한 열망 탓에 불가피하게 수학으로 떠밀려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귀족적 과학의 차분한 정확성에 전율을 느꼈다. “제대로 보면 수학에는 진리만이 아니라 최고의 아름다움도 있다. 이 아름다운 조각처럼 차갑고 꾸밈없는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약한 본성 어느 곳에도 호소하지 않고, 회화나 음악 같은 화려한 치장도 없지만, 그럼에도 숭고하고 순수하며, 오직 가장 위대한 예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엄격한 완벽성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

 

< 11: 현대 미국 철학자들 - 산타야나, 제임스, 듀이 >

 

(621) 이 영혼은 마치 고대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이교도 학자와 같은 억양으로 말하면서 침착하고 탁월한 안목으로 우리의 작은 체계를 살피고, 아주 차분한 추론과 가장 완벽한 산문으로 우리의 새롭고도 낡은 꿈들을 박살냈다. 플라톤 이후 철학이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된 적은 없었다. 산타야나, 그의 말은 새로운 풍미, 섬세한 질감이 느껴지는 구절로 가득했고, 섬세한 통찰로 향기를 풍겼으며, 풍자적인 위트로 가시가 박혀 있었다.

 

(624) 유럽이 아니라 이 땅에 뿌리내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태도, 관념, 이상은 토착적 형성물이다. 그들의 영혼은 보스턴이나 뉴욕이나 필라델피아나 리치먼드를 장식하는 가문들의 공상함에 물들이지도 않았고, 남부나 동부 유럽인의 격한 정렬에 물들이지도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원시적 환경과 과제에 의해 신체적으로는 억세고 정신적으로는 직접적이고 단순하게 빚어져 있다. 이것이 ‘말도 아는 상식’을 갖춘 미국이고, ‘실용적인 사람들’의 미국이고, ‘냉정한 사업가들’의 미국이다.

 

 

1. 조지 산타야나

 

(626) 플라톤 이후 철학이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된 적은 거의 없었다. 그의 말은 새로운 풍미, 섬세한 질감이 느껴지는 구절로 가득했고, 섬세한 통찰로 향기를 풍겼으며, 풍자적인 위트로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의 시인적 기질은 풍부한 비유로, 그의 예술가적 기질은 끌로 다듬은 문단으로 말했다. 기분 좋게도 미국은 아름다움의 유혹과 진리의 부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627) 그는 <이성의 삶>의 윤곽을 그리기 전에 전문적인 인식론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모든 전문적인 자잘한 장치들을 동원하여 인간 이성의 기원, 타당성, 한계를 기꺼이 토론하려 한다. 그는 전통적인 가정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고의 큰 덫임을 알고 있다. “비판은 관습의 품에 안긴 영혼을 놀라게 한다.” 그는 그렇게 비관습적으로 말한다. 그는 기꺼이 거의 모든 것을 의심하려 한다.

 

(630) 자연을 신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자연에 보태질 것은 없다. “자연이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시적이다. 그 말은 내가 사는 세계의, 만들어내고 통제하는 기능, 끝없는 활력, 변화무쌍한 질서를 충분히 암시한다.

 

(637) 산타야나는 말한다. “이상 속에서 살고 사회나 예술에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은 이중의 불멸을 누린다. 그는 사는 동안 영원한 것에 몰입했고, 죽으면 그의 영향으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거기에 몰입하게 된다. 그들은 그의 가장 좋은 것과 이상적 동일시를 하기 때문에 그가 합리적인 마음으로 그의 내부에서 파괴로부터 구출되기를 바랐던 모든 것의 화신이며 영원한 거처가 된다. 그는 자신을 미혹시키려는 어떤 속임수나 욕망 없이 자신이 완전히 죽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642) 고전적 전통은 오직 소수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민주주의는 능력만큼 잡는 자유롭고 자유방임적 산업주의라는 대규모의 레슬링 시합을 모두에게 열어놓았기 때문에 모든 영혼이 올라가려다 상처를 입고, 아무도 만족을 모른다.

 

 

2. 윌리엄 제임스

 

(652) 진리는 과정이며, “하나의 관념에서 발생한다.” 참은 증명이다. 실용주의는 하나의 관념이 어디에서 왔으며 그 전제가 무엇인지를 묻는 대신 그 결과를 살핀다. 실용주의는 “강조점을 옮겨서 앞을 본다.

 

(658) 그는 인간을 낫게 만들려는 수많은 노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늘 누군가를 돕고 용기를 불어넣어 사람들을 고양시켰다. 그는 모든 개인에게 환경이 적절한 산파 노릇을 하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비축 에너지’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늘 개인을 향해서나 사회를 향해서나 이 자원을 완전히 이용하자고 호소했다.

 

(660) “결론은 없다. 우리가 그와 관련하여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고 누가 결론을 내려주었는가? 점을 쳐줄 것도 없고 조언 해줄 것도 없다. 안녕.

 

 

3. 존 듀이

 

(662) 이제 유럽과 미국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이 산업화에 말려들어간 상황에서 우리는 책보다는 직업을 통해 배워야 한다. 학자적인 문화는 속물근성으로 향하지만, 직업 내의 동료애는 민주주의를 향한다. 산업 사회에서 학교는 축소판 작업장이자 축소판 공동체다. 학교는 실습과 시행착오를 통해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질서에 필요한 기술과 분야를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육은 성숙에 대비할 뿐 아니라 (여기에서 사춘기 뒤에는 교육이 끝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나온다) 정신의 지속적인 성장과 삶의 지속적인 해명으로 다시 설정되어야 한다.

 

(666) 우리는 불변의 인간 본성과 전능한 환경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잊어야 한다. 변화나 성장에 알려진 한계는 없다. 어쩌면 불가능은 없을지 모른다. 다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

 

(669) 이런 낡은 문제들은 이제 우리에게 의미를 잃었다. “우리는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선다.” 그런 문제들은 사회적 마찰과 삶의 변화에 대한 열기 속에서 증발한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스스로 세속적이 되어야 한다. 지상에 머물며 삶을 해명해주면서 자립해야 한다.

 

(670) 철학이라는 전문적 일에 종사하지는 않지만 진지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것은 새로워진 산업적 정치적 과학적 운동이 지적 유산 가운데 무엇을 수정하고 무엇을 버리라고 요구하느냐 하는 것이다. …… 미래 철학의 과제는 그 시대의 사회적 도덕적 갈등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밝히는 것이다. 미래 철학의 목적은 되도록이면 이런 갈등에 대처하는 기관이 되는 것이다……. 삶의 갈등하는 요인의 조정에 관한 멀리 내다보는 보편적 이론이 철학이다.

 

 

III.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독자의 눈으로) : 목차의 좋은 점, 아쉬운 점, 잘못된 점을 분석

 

. 북 리뷰의 기원 (?)

 

본문을 처음 접하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생각해보니 저자가 각 시대의 철학자들을 파고 들어가는 과정이 연구원 북 리뷰의 과정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의 철학자를 그리고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좇는 것은 물론 그에게 영향을 준 또는 살아 생전 그와 치열하게 대립 된 철학자들도 함께 좇고 있다. 그의 주요 저서들에서 철학자의 글을 발췌 하기도 하고, 그에 사상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덧붙이기도 한다. 물론 각 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저자의 비판적인 시각에 대해서도 함께 싣고 있다. 북 리뷰의 내가 저자라면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으로는 옛날의 석학의 독서법을 따라 하고 있는 것 같은 안도감도 든다. 당대의 철학자를 저자의 시대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점이다. 이 책에서 내가 꼽는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저자의 각 철학자에 대한 비판의 시선을 매 장마다 함께 싣고 있다는 것이다.

 

. 시대 순으로 본 철학자들의 계보

 

시대 순으로 주요 철학자들을 선정하여 철학자의 계보를 정리했다. 그런데 왜 이 철학자들을 정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은 아쉬웠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독자의 눈으로)

 

딱히 없다. 굳이 하나를 생각해 보자면 단지 좀 많이 어려웠다. 두 시간을 꼬박 읽어도 마흔 페이지를 읽기가 어려웠다. 나의 수준과 지적 한계를 느끼게 한 책이었다. 물론 저자가 소개했던 작가의 책들을 내가 직접 소화하려 했으면 분명 더 어려웠을 것이고 분명히 체했을 것들이다. 그나마 작가가 스스로 읽고 소화한 내용을 친절하게 전해주는 데도 소화하기 힘들었다는 것은 순전히 위장이 작은 나의 잘못이다.

 

 

3) 이 책의 장점 (독자의 눈으로) :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등등

 

가.   철학자의 흐름 (본문 160페이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한 페이지로 요약 된다. 바로 본문 160페이지에 실린 서양 철학자들의 계보이다. 기존에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 들이는 것들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그 시점에서 철학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과거의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현재의 철학자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과거의 선배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건 그들의 어깨를 밟고 올라서 낡은 철학을 비판을 하는 경우에도 모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자들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철학자들의 저서와 그들의 사상에 대한 안목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새삼 저자의 수고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의 종합철학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글을 썼던 허버트 스펜서가 떠올랐다.

 

나.   저자 소개에 대한 정성

 

이 책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기존 철학 체계의 단순한 소개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철학자에 대한 저자 소개가 각 장마다 자연스럽게 녹아있다는 사실이다. 왜 쇼펜하우어가 그렇게나 우울했고, 냉소적이었으며 비관적이었는지 전쟁 등으로 암울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함께 녹여낸다. 특히 식사 중에 금화 한 닢을 테이블에 항상 올려두고 식사가 마치면 가져가는 모습은 마치 그가 식사를 하던 그 식당 어느 한 켠에 내가 앉아있는 듯한 착각도 들게 했다.

 

그 뿐만 아니다. 특별히 제도권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마흔 살 전까지 특출 난 재능이나 자신만의 사상적 날카로움으로 칼을 휘두른 적이 없었던 하버트 스펜서는 특유의 부지런함과 실용적 경향 그리고 신기에 가까운 정리의 힘으로 생물학적 진화라는 단어 하나로 기존의 거의 모든 학문의 철학을 정리해 낸다. 그 학문적 범위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다시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이었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그에 대한 소문을 백 번 듣는 것보다 단 한 번이라도 그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철학자의 저서에서 전해지는 모습을 먼 거리에서 전달하는 것이 아닌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직접 만나는 듯한 저자 소개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더 많은 도움을 주었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저자의 눈으로)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이렇게 해결하겠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쓰면서 지적 수준이 중간 정도 되는 사람들을 독자층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가 설명했던 것처럼 본인이 그린 형이상학적 철학의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 구체적인 비유와 예시를 드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애초부터 불친절한 책이다. 그렇게 덜어내고 덜어내서 나온 책이 800페이지라고 한다. 그러한 철학자 십 수명의 사상을 한 권의 책으로 모아서 엮는데 700페이지 안 밖으로 갈무리 한 것으로 보면 저자의 수고에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여진다. 하지만 칸트가 생각하는 중간 정도의 지적 수준을 애초에 흉내도 못 내고, 아주 밑바닥의 지적 수준이 가진 나 같은 독자를 생각하면 역시나 구체적인 비유와 예시, 명료한 표현은 역시나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양 떼 한 무리를 목장에 풀어두고 집으로 돌려 보낼 때 모든 양 한 마리 한 마리에 신경을 쓸 수는 없다. 하지만 갓 태어난 새끼 양은 아직 다리 힘이 없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냥 내버려 두면 세상의 좋은 풀은 구경조차 못할 것이다. 그러니 새끼 양들을 위한 순하고 마른 풀도 지어 둔다는 생각으로 좀 더 쉽게 읽히는 책이 나왔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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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3 20:49:39 *.18.218.234

'내가 저자라면' 파트 보며 반성 중...ㅠ.ㅠ

다들 정성껏 잘하네요.

(정욱씨는 비유, 구체화에 강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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