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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gum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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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일 11시 41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윌 듀란트는 현재 읽고 있는 철학 이야기로 성공한다. 돈을 움켜쥐게 된다.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거대한 프로젝트를 준비한다. 그것이 일생동안 써낸 11권의 책으로 구성된 문명이야기이다.

* ‘철학 이야기가 대단한 것에 동의는 하지만 내가 과연 이 과정이 아니라면 이 책을 읽었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둘수 있다니 놀랍다. 미국의 독자들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문명 이야기'는 고대 인류 문명의 기원에서 시작해 서양사를 꿰뚫고 나폴레옹 시대까지, 그리고 1930년대의 인도, 중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1만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역사책이다. 이 책의 방대한 분량과 철학을 했던 사람 특유의 사변과 통찰로 듀란트는 동서양을 통섭하면서 다채롭고 풍성하게 역사서술을 이끌어가 '18세기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백과사전에 버금가는 역작'이라는 평을 듣는다.

 

듀란트는 서문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선을 긋듯 역사를 나누어 서술하는 통상적인 방식은 인류 삶의 통일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해 왔다""역사는 통시적인 동시에 공시적으로, 분석적인 동시에 종합적으로 서술돼야 마땅하다"고 피력했다.

* 철학 이야기에서도 단순히 철학의 정보들만 제공한 것이 아니라, 철학자의 다양한 시선과 그 사람에 대한 일화, 그리고 비판까지 곁들여 통합적으로 볼 수있게 해주었다. 아마 문명이야기도 뻔한 역사책이 아니라 이와 같이 다양한 시선과 방법으로 역사를 안내해주는 책일 것이다.

 

* 그가 철학이야기문명이야기를 쓴 이유가 뭘까? 돈을 벌기 위해서. 물론 배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이유로는 이렇게 방대한 양을 쓸 수는 없다. ‘철학이야기에 나오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부나 명예보다는, 세속적인 성공과 행복보다는 철학에 목숨바쳐 일생을 다한 것처럼 철학자인 저자역시 인류에게 철학문명이라는 것을 보다 알기쉽게 전해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현재를 살고 있는 독자들이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해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한번쯤 생각해보게 하는 그런 의도가 아니였나 생각해본다. 책을 쓴다는 것은 이와같이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함을.....

 

듀란트는 이 책에서 기존 역사서들이 범하고 있는 서구 중심적 편견을 극복하고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그는 대부분 그리스, 로마로부터 시작하는 서양의 보통 역사책과 달리 먼저 인간이 어떤 단계를 밟아 야만성을 벗고 문명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탐색에서 출발해 문명의 발상지라고 일컬어지는 근동을 천착하고, 바로 이어서 인도와 중국, 일본의 문명사를 서술함으로써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서구만의 산물이 아님을 먼저 밝힌다. 듀란트는 "우리의 서양 이야기는 동양에서 시작된다""이는 단지 아시아가 가장 유서 깊은 문명의 장으로 유명해서가 아니다. 바로 그 동양의 문명들이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배경과 토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는 이 같은 성찰을 바탕으로 서구의 퇴조와 중국을 비롯 아시아의 부상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시대를 앞서 예견하는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다. 란트는 서문에서 "지금 우리는 유럽의 패권이 급격한 종말을 맞고 아시아가 부활의 삶을 누리고 있어, 동양과 서양 사이의 전반적 갈등이 20세기의 주요 테마가 될 수밖에 없는 듯 보이는 역사적 순간에 와 있다"고 예견했다.

 

1'동양문명'에서는 문명의 기원과 성립조건을 논한다. 그는 문명의 요소로서 노동, 가족, , 도덕, 종교, 과학, 철학, 문학, 예술, 등을 꼽는데 이 기둥들을 바탕으로 인류의 문명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2'그리스문명'에서는 서양 현대문명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 문명의 다양한 모습을 다룬다. 크레타의 광대한 에게 제국에서부터 로마군에 짓밟히면서 그리스의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자유가 사멸할 때까지 전 그리스 역사가 그려진다. "오늘날의 모둔 문명 국가는 모든 지적 활동 분야에서 헬라스의 식민지이다"라는 다소 과장된 표현처럼 그리스 문명의 모든 요소는 서구 문명의 형성에 절대적이다.

 

5'르레상스'에서는 1340년 페트라르카의 탄생부터 1576년 티찌아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 시대의 매혹적이고 활기 넘치는 이탈리아가 찬란한 절정에 도달했을 때의 초상화가 펼쳐진다.

 

1926년에 출간된 '철학 이야기'는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의 성공 이후 일체의 저술활동을 중단한 채 50여년에 걸쳐 문명이야기를 써냈다. 10'루소와 혁명'1968년도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 '뉴욕타임스'"그는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이미지로 우리가 물려받은 문화의 찬란하고 거대한 파노라마를 보여 준다"라는 서평을 싣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이유이다. 이상하게 어렵게 쓰려는 사람들이 있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들어온 문장

 

6장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관념론

 

339. “나는 이미 지키고자 결심한 노선에 마음을 고정시켰다. 나는 나의 길로 들어설 것이며, 무엇도 내가 이 길을 좇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과 무명의 세월을 살며 거의 15년 동안 자신의 걸작을 스케치하고 쓰고 다시 썼다. 이렇게 느리게 성숙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 이렇게 철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적도 없었다.

비장하다. 비장함을 무기로 성실함으로 밀고 나갔다. 15년을 그렇게 살았다.

 

1절 칸트로 가는 길

 

341.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이 19세기 사상을 지배한 정도로 한 사상 체계가 시대를 지배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칸트는 거의 60년 동안 조용히 계획대로 발전시켜온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으로 세상을 교조의 잠에서 깨웠다.

 

341. 그해부터 지금까지 비판철학은 유럽 사상의 보금자리를 지배해왔다. 1848년에 끼어든 낭만주의의 물결을 타고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잠깐 권좌에 올랐을 뿐이다. 1859년 이후 진화론은 그전의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니체의 환희에 찬 우상 파괴가 철학 무대의 중심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에서 전개된 부차적 사태일 뿐이다. 그 밑에서는 칸트주의운동이라는 강하고 꾸준한 흐름이 계속 이어지며 점점 넓어지고 깊어졌다. 오늘날까지도 그 핵심적인 원리들은 모든 성숙한 철학의 공리가 되고 있다.

 

341. 니체는 칸트를 당연하게 여기고 그다음으로 나아간다. 쇼펜하우어는 <순수이성비판>독일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말하며, 누구나 칸트를 이해하기 전에는 아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341. 스피노자에 대해 헤겔이 한 말을 조금 바꾸어 표현하자면, 철학자가 되려면 우선 칸트주의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니 즉시 칸트주의자가 되어보자.

 

341. 그는(칸트는) 예와 구체적인 것을 경멸한다. 그런 것을 넣으면 그의 책이 너무 길어졌을 거라고 주장한다. 그는 전문적 철학자들만 자신을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사람들이라면 예증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341. 헤르츠는 사변에 꽤 능통한 사람이었음에도 반쯤 읽다 돌려주면서 계속 읽다가는 미쳐버릴까 두렵다고 말했다. 이런 철학자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까?

 

343. 베이컨의 이성주의는 홉스에 이르러 비타협적 무신론과 유물론이 되었다. 다시 원자와 공허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343. 멋진 세부와 기괴한 면은 갖춘 중세 고딕 성당은 붕괴했다. 낡은 신은 부르봉 왕조와 함께 왕좌에서 내려왔고, 천국은 단순한 하늘로 희미해졌으며, 지옥은 감정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343. 유럽 모든 땅에서 솟아오른 수많은 첨탑으로 표현되는 종교적 믿음과 희망은 사회제도와 인간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에 이성의 적대적 평결에 쉽사리 굴복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격해대던 교회는 끝까지 살아남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이성과 과학은 더욱 발전하고 사람들은 이제 미신을 믿지 않고 과학을 신봉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 기대고 있다. 그 이유는 뭘까.

 

345. 그는(로크는)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오고, 우리 감각을 통해서 온다고, “감각에 먼저 존재하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라고 조용히 선언했다. 정신은 태어날 때는 백지다. 감각경험이 그 위에 수많은 방법으로 기록되어, 마침내 감각된 것이 기억을 낳고, 기억이 관념을 낳는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물질적인 것들만 우리 감각에 영향을 미치므로 우리는 물질적인 것밖에 모르고, 따라서 유물론적 철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놀라운 결론에 다가서는 것 같았다.

 

345. 절대 그렇지 않다. 조지 버클리 주교는 그렇게 말했다........망치는 감각된 것들의 다발, 또는 기억들의 다발에 불과하다. 그것은 정신의 한 가지 상태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아는 유일한 현실성은 정신이다. 유물론은 이렇게 간단히 처리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처음으로 신학자가 철학자들의 주장에 반대논리를 펼쳤다. 그것도 그럴듯하게...

 

348. 그러나 인생의 큰 위기에서, 행동과 믿음이라는 큰 문제에서, 우리는 도식보다는 느낌을 신뢰한다. 만일 이성이 종교에 반대한다면, 바로 그 점이 이성을 더욱더 신뢰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직관도 마찬가지 아닐까. 직관이나 느낌은 경험 및 무의식속에 나오는 것 아닐까? 그럼 이것은 유물론과 정신에 해당되는 것 아닌가? 어렵다.

 

349. 장자크 루소는 프랑스에서 거의 혼자 계몽주의의 유물론이나 무신론과 싸웠다.

 

349. 인쇄가 유럽에 가져온 무시무시한 무질서를 생각해보라. 철학이 생기는 곳마다 나라의 도덕적 건강은 악회된다. “나는 생각하는 상태는 본성에 위배된다고 생각한다. 또 생각하는 사람은 타락한 동물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지성의 지나치게 빠른 발달이 아니라, 마음과 애정의 훈련을 목표로 삼는 편이 나을 것이다. 교육은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는 못하고 영리하게 만들 뿐이다. 게다가 대개는 못된 짓에 영리해진다. 본능과 감정은 이성보다 믿음직하다. 루소는 유명한 소설<신엘로이즈>에서 지성보다 감정이 우월하다는 것을 길게 보여주었다.

이걸로 감정이 우월하다고 할 수 있나? 본능과 감정으로만 사회가 유지될수 있나.

 

350. 이성에서 종교를 구해내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회의주의에서 과학을 구해내는 것-이것이 칸트의 사명이었다.

 

2절 칸트 자신

 

351. 우리의 철학자는 아침부터 밤까지 종교에 완전히 물들어 살았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는 반발심이 생겨 내내 교회를 멀리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독일 청교도라는 엄숙한 낙인을 유지하였으며, 나이가 들면서는 어머니가 그에게 그렇게 깊이 주입한 신앙의 핵심만큼은 자신과 세상을 위하여 유지하고 싶다는 갈망을 또렷이 느꼈다.

 

351. 칸트는 나중에 그가 논박하고자 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심오한 영향을 받았는데, 아마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은 그가 총애하는 적, 흄일 것이다. 우리는 나중에, 일흔 살이 다 된 철학자가 거의 마지막 작업에서 장년기의 보수주의를 넘어서서, 노령과 명성이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순교의 자리로 끌려가는 죄목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씩씩한 자유주의로 돌아가는 주목할 만한 현상을 볼 것이다.

 

354. 어떤 전기 작가에 따르면, 칸트의 삶은 규칙동사 가운데서도 가장 규칙적인 동사처럼 흘러갔다. “일어나고,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식사를 하고, 걷는다.” 하이네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현재 내가 가장 살고 싶어하는 것 삶의 한 형태이다.

 

354. 일흔 살에는 <아픈 느낌을 결단의 힘으로 정복하는 정신력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를 썼다.

읽어보고 싶네. 몸이 하나둘 아프기 시작하는데 정신력만 있으면 되는 것인가.

 

3. 순수이성비판

 

355. ‘순수이성은 우리 감각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 경험에서 독립된 인식을 뜻하기 때문이다. 정신의 타고난 본성과 구조에 의해 우리에게 속한 지식인 셈이다.

 

356. <순수이성비판>은 사고를 연구하는 세밀한 생물학, 개념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조사, 타고난 정신 구조의 분석이다. 칸트는 이것이 형이상학의 문제 전체라고 믿는다. 이 책에서 나는 주로 완전함을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감히 여기에서 해결되지 않는, 적어도 해결의 열쇠를 제공하지 않는 형이상학의 문제가 단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청동보다 오래 지속될 기념비를 세웠다. 자연은 이런 자부심으로 우리를 자극하여 창조로 나아가게 한다.

 

357.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절대성과 필연성이라는 특징을 어디서 얻는가? 경험은 아니다. 경험은 우리에게 분리된 감각 결과물과 사건들만 주며, 미래에는 순서가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는 우리 정신의 내적구조로부터, 우리 정신이 작동하는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방식으로부터 그 필연적 성격을 끌어온다. 인간의 정신(여기서 마침내 칸트의 위대한 명제가 등장한다.) 경험과 감각이 절대적이면서도 변덕스러운 의지를 기록하는 수동적 밀랍이 아니며, 일련의 또는 일군의 정신적 상태에 붙여놓은 한낱 추상적 이름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정신은 감각 결과를 관념으로 만들고 조정하는 적극적 기관,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경험을 질서있게 통일된 사고로 변형하는 기관이다.

 

358. “나는 대상보다는 우리의 선험적 대상 개념”-우리가 경험을 인식과 관련시키는 양식-관여하는 인식을 선험적이라고 부른다.” 감각경험이라는 원료를 사고의 최종 생산물로 바꾸는 이 과정에는 두 긍급 또는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감각 경험에 지각 형식, 즉 시간과 공간을 적용하여 조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그렇게 발전시킨 지각에 개념형식, 즉 사고의 범주를 적용하여 조정하는 것이다. 칸트는 감성이라는 말을 원래의 어원적 의미대로 사용하여 감각이나 느낌이라는 뜻을 전달하며, 이 두 단계 가운데 첫 번째 단계의 연구를 선험적 감성론이라고 부른다. 또 논리라는 말을 사고 형식의 과학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여, 두 번째 단계는 선험적 논리학이라고 부른다.

 

359. 하지만 이런 역행, 이런 결집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가? 감각 경험은 저절로, 자연발생적으로, 자연적으로 모여서 질서를 이루고, 그렇게 지각되는가? 그렇다고 로크와 흄은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칸트는 말한다.

칸트 이전에는 사과의 본질이나 존재를 묻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였다. 이것이 바로 대상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질문이다. 하지만 칸트는 우리의 인식능력이 없다면 사과는 존재할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에게 눈이라는 감각기관과 사과라는 개념이 먼제 주어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사과라고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칸트에 따르면 사과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발적인 인식 능력에 의해 구성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칸트에 이르러 세계의 모든 대상들은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독립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사유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들은 모두 인간이 자발적인 인식능력이 능동적으로 작용하여 구성해 낸 결과물들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359. 이 순간에도 수많은 힘들이 당신의 몸에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외적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아메바처럼 내밀고 있는 신경말단을 자극이 폭풍처럼 두드려댄다. 그러나 이 가운데 우리의 현재 목적에 적합한 지각으로 빚어낼 수 있는 감각경험, 늘 우선권을 지니는 긴급한 위험 보고를 전달하는 감각 경험들만 선별된다.

 

360. 갓난아기의 요람 옆에서 자고 있는 어머니는 주변의 소란은 전혀 듣지 못한다. 그러나 아기가 움직이면 어머니는 서둘려 수면으로 올라오는 잠수부처럼 더듬더듬 잠에서 깨어 관심을 갖는다. 목적이 덧셈이 되면, ‘23’이라는 자극은 ‘5’라는 답을 가져온다. 목적이 곱셈이 되면, 똑같은 자극, 똑같은 청각 경험인 ‘23’‘6’이라는 답을 가져온다. 이 연합은 무엇보다도 정신의 목적에 의해 결정된다. 감각이나 사고는 하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부름을 기다리며, 우리가 요구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이들을 선별하고 지휘하는 작용이 바로 이들을 사용하는 주인인 것이다. 감각 경험과 관념 위에 정신이 있는 것이다.

 

360. 칸트는 이 선별과 조정 작용은 자신에게 제시된 자료를 분류할 때 우선 단순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공간감각과 시간감각이다.....정신도 감각 경험에 공간과 시간을 할당하고, 그 경험들을 여기 이 대상이나 저기 저 대상, 현재 이 시간이나 과거 저 시간에 귀속된 것으로 파악한다. 공간과 시간은 지각된 사물이 아니라 지각 양식, 즉 감각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공간과 시간은 지각 기관인 셈이다.

 

360. 공간과 시간은 선험적이다. 모든 질서 잡힌 경험이 그것들과 관련되고 그것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공간과 시간이 없으면, 감각은 절대지각으로 자라날 수 없다. 공간과 시간은 선험적이다. 또 그것들은 선험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법칙, 즉 수학의 법칙도 선험적이고, 절대적이고 필연적이며, 무한하다.

 

361. 지각이 감각경험들을 공간과 시간 속에서 대상 주위에 배치하듯이, 개념도 지각된 것을(대상과 사건)을 원인, 통일, 상호 관계, 필연성, 우연성 등의 관념들 주위에 배치한다. 이런 것들을 포함한 다른 범주들은 지각을 받아들이는 구조이며, 이 구조에 의해 지각된 것들이 분류되어 사고라는 질서잡힌 개념으로 빚어진다. 이 범주들이야말로 정신의 본질이자 특징이다. 정신은 경험의 조정인 것이다.

 

363. 그러나 논리학과 과학의 최고 수준의 일반화 결과물들의 이런 확실성, 절대성은 역설적으로 제한이 있으며 상대적이다. 실제 경험의 영역에만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경험의 양식하고만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365. “인간의 이해는 감각 가능성의 한계 너머로 절대 나아갈 수 없다.” 그것을 넘어가는 초월적 과학은 이율배반 빠져버리고, 그것을 넘어가는 신학은 오류추론 빠져버린다. 감각 경험과 겉모습이라는 폐쇄된 테두리에서 벗어나 물자체라는 알 수 없는 세계로 탈출하려는 이성의 시도가 타당한지를 조사하는 것이 선험증 변증론의 잔인한 기능이다.

 

366. ‘이성적신학의 오류 추론도 마찬가지다. 이 신학은 이론적 추론으로 영혼이 썩지 않는 실체이고, 의지는 자유로워서 인과법칙을 벗어나 있고, 모든 실재의 전제인 필연적 존재’, 즉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선험적 변증론은 실체와 원인과 필연성이 한정된 범주이고, 정신이 감각 경험에 적용하는 배치와 분류의 양식이고, 그런 경험으로 나타나는 현상에만 신뢰할 만한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지적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런 개념들을 누메논(즉 단지 추리이고 추측된) 세계에는 적용할 수 없다. 따라서 종교는 이론적 추론으로 증명할 수 없다.

 

4절 실천이성비판

 

367. 종교가 과학과 신학에 기초를 둘 수 없다면, 어디에 기초를 두어야 할까? 도덕이다. 신학이라는 기초는 너무 불안정하다. 차라리 그것을 버리는 것이, 심지어 파괴하는 것이 낫다. 신앙은 이성의 범위나 영역 너머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종교의 도덕적 기초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의문의 여지가 있는 감각경험이나 위태로운 추리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오류가 생길 수도 있는 이성이 섞여 부패해버리면 안 된다. 이 기초는 직접적 지각과 직관에 의해 내적자아로부터 나와야 한다.

 

368. 우리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윤리학을 찾아야만 한다. 수학처럼 절대적이고 확실한, 도덕적 선험적 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순수이성이 실천적일 수 있다는 것, 즉 경험적인 것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의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여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종교의 기초는 절대적이고 정언적인 명령이어야 한다.

 

368. 우리의 모든 경험 가운데 가장 놀라운 현실은 바로 우리의 도덕감각, 즉 유혹과 마주했을 때 이것이 그르다는 피할 수 없는 느낌이다. 유혹에 굴복할 수 있지만, 그 느낌은 그대로 남는다. 아침에는 휼륭한 결심을 하지만 저녁이면 어리석은 짓을 하는구나.....도대체 무엇이 뼈아픈 가책을 일으켜 새로 결심을 하게 하는가? “우리 행위의 준칙이 의지에 따라 보편적인 자연법이 되도록 행위하라.”우리 내부의 정언적 명령, 우리 양심의 무조건적 명령이다.

 

369. 불완전한 상태에 완전한 법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움 위에 의무를 두고, 행복 위에 도덕을 두는 것이 어려운 윤리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짐승이 되기를 그치고 신이 되기 시작할 수 있다.

 

370. 마지막으로, 같은 이유로, 신은 존재한다. 의무에 대한 의식이 다가올 보상에 대한 믿음과 관련되고 그것을 정당화한다면, 불멸에 대한 가정은....이런 결과에 어울리는 원인의 존재를 상정하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말을 바꾸면 신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다.” 이 또한 추론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우리의 행동 세계와 관련된 도덕 의식이 감각 현상을 다루고자 하는 한 가지 목적으로 계발된 이론적 논리학보다 우선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은 물자체 배후에 정의로운 신이 존재한다고 자유롭게 믿도록 허락하며, 우리의 도덕의식은 우리에게 그것을 믿으라고 명령한다. 루소가 옳았다. 심장의 느낌은 머리의 논리보다 위에 있다. 파스칼이 옳았다. 심장은 자기 나름의 이유가 있고, 머리는 이것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5절 종교와 이성에 관하여

 

371. ‘이성적신학을 부정하고, 이렇게 솔직하게 종교를 도덕적 믿음과 희망으로 환원시키는 태도에 독일의 모든 정통파가 항의했다.

왜 항의했을까? 볼테르처럼 교회에 대항한 것도 아닌데. 도덕적 믿음의 역할만 하기에는 교회의 욕심이 너무 크기 때문일까. 내 생각은 칸트에 근접한 것 같다. 종교는 실제적 증거나 존재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냥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372. 종교는 이론적 추론의 논리가 아니라 도덕 의식이라는 실천이성에 근거해야 하므로 결과적으로 <성경>이나 계시도 도덕적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며, 그 자체로는 도덕률의 심판관이 될 수 없다. 교회와 교조는 인류의 도덕적 발달을 도울 때만 가치가 있다. 종교의 시험대로서 단순한 신조나 제의가 도덕적 우수성보다 우선권을 갖게 되면서 종교는 사라졌다.

 

372. 그리스도가 살고 죽은 것은 그런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가 바리새인의 교회주의와 대립하며 내세웠던 것이 이런 진짜 교회였다. 그러나 또 다른 교회주의가 이 고귀한 개념을 거의 압도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더 가까이 가져왔다. 그러나 그는 오해받았다. 그 결과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 대신 사제의 나라가 세워졌다.” 신조와 제의가 다시 선한 삶을 대체했다. 사람들은 종교로 함께 묶이는 대신 수많은 종파가 나뉘어 있다. 온갖 종류의 경건한 헛소리천국의 궁정에서 하는 봉사이며, “이런 헛소리를 이용한 아첨으로 천국 통치자의 호의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374. 칸트는 모든 학자는 종교적 문제에 관하여 독립적 판단을 하고 자신의 견해를 알릴 권리를 가져야 하지만, 현황의 치세 동안에는 침묵을 지키겠다고 대답했다.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용감할 수 있었던 일부 전기 작가들은 이런 양보를 두고 그를 비난했지만, 이때 칸트는 일흔 살이었고, 몸이 몹시 약했으며, 싸움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 또 그는 이미 할 말을 세상에 다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결혼도 하지 않아 지켜야 할 가정도 없었고 철저하게 혼자인데 무엇이 그를 타협하게 했을까? 보통 철학자는 자기 주장을 웬만해서는 안 꺾는데 특이한 점이다. 아니면 그가 아직 쓰고 싶은 주제가 있어서?

 

6절 정치와 영구 평화에 관하여

 

375. “비사회적 특징이 없다면.......사람들은 완전한 조화, 만족, 서로에 대한 사랑 속에서 전원적인 목자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경우 그들의 모든 재능은 영원히 맹아 상태로 감추어질 것이다.” “따라서 이런 비사회적인 면, 이런 질투심과 허영심, 소유와 권력에 대한 이런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준 자연에게 감사해야 한다.....인간은 일치를 바란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 종에게 무엇이 좋읁지 더 잘 알며, 인간이 어쩔 수없이 자신의 힘을 새롭게 발휘하고, 타고난 능력을 더 계발할 수 있도록 불화를 일으킨다.”

그렇다. 완전하다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불완전함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완전해질수 없지만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리라.

 

376. “전체로 보자면 인류의 역사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완벽한 계획, 즉 자연이 인류에게 심어준 모든 능력이 완전하게 계발되는 유일한 정체를 만들어낸다는 자연의 감추어진 계획의 실현으로 볼 수도 있다.”

7절 비판과 평가

 

381. 칸트의 위대한 업적은, 외적 세계는 오직 감각의 결과로만 우리에게 알려진다는 것, 정신은 단순히 무력한 백지, 감각경험의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힘, 경험이 도달하는 대로 선별하고 재구성하는 경험임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382. 도덕적 자아, 사회적 인간은 신의 손으로부터 신비하게 나오는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라, 느긋한 진화의 뒤늦은 생산물이다. 도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도덕은 대체로 우연히 발전하는, 집단 생존을 위한 행동 규약이며, 집단의 본질이나 조건에 따라 변한다. 칸트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어떤 행동도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아니다.

 

382. 그러나 100년 동안 칸트 윤리학의 절대주의에 반발하고 난 지금 우리는 다시 도시적 관능주의와 비도덕성, 민주적 양심이나 귀족 명예의 규제를 받지 않는 무자비한 개인주의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따라서 무너져가는 문명이 다시 칸트주의적 의무를 이행하라는 외침을 환영할 날이 곧 다가올지도 모른다.

 

386. 심지어 난폭하게 혁신을 향해 나아갔던 니체는 그토록 흥분하여 칸트의 정적인 윤리학을 비난하면서도 이 쾨니히스베르크의 위대한 중국인에게서 자신의 인식론을 가져왔다.

 

386. 위대한 유물론자 엘베시우스마저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말을 했다. “내가 감히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은 물질의 창조주다. 이제 철학은 이전의 소박했던 시절처럼 다시 순진해질 수 없을 것이다. 칸트가 있었기에 철학은 이제 늘 달라지고, 심오해질 수 밖에 없다.

 

8절 헤겔에 관한 메모

 

389. 그는 이곳에서(예나) <논리학>을 썼으며, 이 책은 그 이해할 수 없는 면 때문에 독일을 사로잡았고,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엄청난 분량의 <철학강요>를 썻고, 이에 힘입어 베를린 대학으로 영전했다. 이때부터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괴테가 문학계를 지배하고 베토벤이 음악계를 지배했듯이, 논란의 여지 없이 철학계를 지배했다.

 

390. 헤겔은 이 개념들이 칸트가 명명한 범주들, 즉 존재, , , 관계 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고 모든 곳에 퍼져 있는 이런 기본 개념들을 분석하는 것이 철학의 첫 번째 일이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것이 관계다. 모든 관념은 관계들의 집단이다. 우리는 뭔가를 생각할 때는 그것을 반드시 다른 것과 관련지으며,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지각한다. 어떤 관계도 없는 관념은 공허하다. 이것이 순수한 존재와 무()는 같은 것이라는 말의 완전한 의미다. 관계나 질이 전혀 없는 존재는 없으며, 그런 존재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

 

390. 모든 관계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대조나 대립의 관계다. 사고나 사물의 모든 조건-세상의 모든 관념과 상황-은 어쩔 수 없이 그 대립물로 통하며, 그런 다음 그것과 결합하여 더 높고 더 복잡한 전체가 된다. 이런 변증법적 운동은 헤겔의 모든 저작에 흐르고 있다.

 

392. 갈등은 성장의 법칙이다. ..사람은 강제, 책임, 고통을 통해서만 완전하게 성장한다. 심지어 고통에도 이유가 있다....“세상의 위대한 것들 가운데 감정없이 완성되는 것은 없다.”

 

393. 헤겔이 말년에 자신의 철학에 내포된 급진적 암시보다는 보수주의적 암시로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 많은 변화에 지친 시대정신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40년간의 전쟁과 측량할 수 없는 혼란 뒤에 늙은 심장은 마침내 그 모든 것이 끝나고 평화로운 만족의 시기가 시작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갈등이 성장의 변증법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자가 만족의 옹호자가 되었다니, 그리 어울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순 살 쯤 되면 평화를 요구할 권리가 있는 법이다.

이렇게 나이가 들면 변하는 것이다. 철학자도 그렇고 모든 사람이 나이를 먹게 되면 생각과 행동이 변한다. 그나마 나는 40대에 이렇게 변할수 있어서 다행이다.

 

394. 마르크스는 시대정신을 통하여 역사를 결정하는 절대자 대신, 사물의 세계에서든 사상의 삶에서든 모든 근본적인 변화의 기본적 원인으로 대중운동과 경제적인 힘을 내세웠다. 제위 앉은 교수, 헤겔이 사회주의의 알을 부화시킨 것이다.

 

394. 그는 프로이센 정부와 동맹을 맺었고, 그 정부가 절대자의 최신 표현 형태라고 축복해주었으며, 그 정부가 보내준 학문적 호의의 볕을 쬐었다. 그의 적들은 그를 어용 철학자라고 불렀다.

 

7장 쇼펜하우어

 

 

397. 쇼펜하우어 덕분에 우리의 은밀한 심장이 드러났다. 그는 욕망이 철학의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사고가 비인격적 사건들의 추상적 계산이 아니라 행동과 욕망의 유연한 도구하는 것을 이해하는 길을 닦아놓았다. 그는 천재의 필요성과 예술의 가치를 우리에게 다시 가르쳐주었다. 모든 위대한 것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그는 다시 한번 영웅을 고귀하게 섬기라고 설교했다.

 

1절 시대

 

399. 마침내 의지는 패배하고 어두운 죽음만이 모든 전쟁의 승자가 되었던 것이다. 부르봉 왕조는 돌아왔고, 봉건귀족들은 자기 땅을 되찾으려 했으며, 알렉산드로의 평화적 이상주의는 그 자신도 모르는 색에 도처에서 진보를 억업하는 동맹을 낳았다. 위대한 시대는 끝났다.

 

400. 그래, 혁명은 죽었다. 그와 더불어 유럽의 영혼에서는 생명이 빠져나간것처럼 보였다.

 

401. 이 환멸과 고난의 시기에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종교적 희망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상층 계급의 다수는 신앙을 잃었으며, 최후에 추한 악들이 해소되면서 정의와 아름다움이 지배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위로받지 못한 채 폐허가 된 세계를 바라보았다.

 

401.메피스토텔레서는 승리를 거두었으며, 모든 파우스트가 절망에 빠졌다. 볼테르는 회오리바람의 씨를 뿌렸고, 쇼펜하우어는 그 결과를 거두어들였다.

 

402. 지친 탕자가 기쁜 마음으로 다시 집에 돌아가듯이 오랜 신앙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더 가혹한 답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유럽의 혼돈은 우주의 혼돈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며, 어차피 신의 질서는 없고 천국의 희망도 없으며, 만일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눈이 멀었으며 지구는 악으로 덮여 있다는 것이었다. 바이런, 하이네, 레르몬토프, 레오파르티. 그리고 우리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그렇게 생각했다.

 

2절 인간

 

403. 어머니가 그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은 그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너는 견디기 힘들고 부담스러워서 같이 살기가 어려워. 좋은 자질은 모두 자만심에 가려져 있고, 다른 사람들의 흠을 찾는 기질을 억누르지 못해서 세상에 쓸모도 없어.”

친자식인데 이렇게 대하다니 그의 어머니는 진짜 대단하거나 아니거나 둘중에 하나다.

 

403. 이 두사람은 이런 환경때문에라도 비관주의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남자, 더 심한 경우 어머니의 증오를 아는 남자는 세상에 매혹될 이유가 없는 법이다.

 

404. 그에게는 어머니도, 아내도, 자식도, 가족도, 조국도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으며, 친구 한 명 없었다. 하나라도 있는 것과 하나도 없는 것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

 

404. 그는 그의 걸작이 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모든 시간과 힘을 쏟았다. ....그는 이 원고는 낡은 관념들을 고쳐 말한 것이 아니라 독창적 사상의 매우 일관된 구조물로서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힘이 넘치며, 아름다움도 없지 않다.”라고 한껏 자랑했다. 이 책이 앞으로 다른 수많은 책의 자료이자 계기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 모든 말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기는 했지만, 또 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보통은 자기가 쓴 책에 대해 겸손한 척이라도 하건만 얼마나 자신이 있었으면 이렇게 재수 없는 말까지 할 수 있을까.

 

406. 그러나 이런 자기중심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명성을 얻을 기회가 오면 덥석 달려들기 십상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책에 자신을 완전히 쏟아부었기 때문에 그 뒤의 작업은 이 책에 대한 주석들에 불과했다.

 

407. 그는 분별력 있는 비관주의자답게 낙관주의자들의 함정을 피했다. 즉 펜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 회사의 소유권 일부를 상속받아, 거기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검소하게 살았다. 또 철학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지혜로 돈을 투자했다. 그가 주식을 소유한 어떤 회사가 망하여 다른 채권자들은 70퍼센트만 보상받고 끝내려 했을 때 쇼펜하우어는 끝까지 싸워서 다 받아냈다. 그는 하숙집의 방 두 개를 빌릴 여유가 있었으며, 그 곳에서 유일한 동지인 개와 함께 마지막 30년을 살았다.

펜으로 먹기 살려는 자는 펜에만 의지하면 안되는 예를 보여준다. 진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물론 그일로 먹고살수 있으면 좋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런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수 있는건 경제력이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408. 1848년의 이상과 노력이 실패하여 환멸을 느끼던 유럽은 1815년의 절망을 얘기한 그의 철학을 돌아보며 갈채를 보냈다. 과학의 신학공격, 사회주의의 가난과 전쟁의 고발, 생물학의 생존투쟁 강조-이 모든 것이 마침내 쇼펜하우어에게 명성을 안겨주는 데 기여했다.

 

408. 1854년 바그너가 <니벨룽겐의 반지>를 보내면서 쇼펜하우어의 음악철학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이 위대한 비관주의자는 말년에 거의 낙관주의자가 되었다. 저녁식사 후에는 플루트를 열심히 불었고, 젊음의 불길을 꺼준 시간에 감사했다.....일흔 살 생일에 모든 대륙 모든 지역에서 축하가 쏟아져 들어왔다.

 

3절 표상으로서의 세계

 

409. 그의 선배들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추상적이었고 이론만 제시했지 실제 세계를 내다보는 설명의 창은 거의 없었지만, 쇼펜하우어는 상인의 아들답게 구체성이 풍부하고, 예가 풍부하고, 응용이 풍부하고, 심지어 유머도 풍부하다. 칸트 이후로 철학에서 유머는 놀랄만한 혁신이었다.

모름지기 철학이란 어렵다는 이미지가 굳어있는 것이 다 이런 이유일 것이다. 하긴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법률용어를 보더라도 그들만의 언어로 무장되어 있다. 그러니 변호사를 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놔야 소수의 사람만이 무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돈을 벌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도 그렇게 봐야 하는 것일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409. 그런데 이 책이 왜 출판사에서 거부당했는가? 한 가지 이유는 이 책이 자신을 홍보해줄 수 있는 바로 그 사람들, 즉 대학 교수들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헤겔은 1818년 독일에서 철학의 독재자였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지체 없이 그를 공격했다.

오히려 이런 공격이야말로 변두리 철학가를 단숨에 스타반열로 올라갈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는가.

 

409. 특별한 사고방식으로 진리가 즐길 만하다는 것을 발견할 소수를 조용히, 겸손하게 기다려야 한다.....인생은 짧지만 진리는 멀리까지 영향을 미치며 오래 산다. 우리는 진리를 이야기해야 한다.

 

411. 그는 처음부터 외적 세계는 오직 우리의 감각과 표상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진다는 칸트의 명제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세상이 쇼펜하우어를 발견하는 데 한 세대가 걸린 것은 그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 데다가 자신의 생각을 기존의 관념론이라는 200페이지의 장벽 뒤에 감추어두었기 때문이다.

 

411. 우리가 정신을 통해서만 물질을 아는데 어떻게 정신을 물질이라고 설명할수 있겠는가?......19세기 중반인 지금도 독창성이라는 무지한 미망으로 포장되어 다시 제시되고 있는 조잡한 유물론은.....어리석게도 생명력을 부정하며, 무엇보다도 생명 현상을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힘으로, 또 물질의 기계적 결과로 설명하려 한다......그러나 나는 가장 단순한 화학적 조합조차 기계적 설명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다. 하물며 빛, , 전기의 속성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것들은 늘 동태적 설명을 요구한다.

 

412. 먼저 물질을 검토하고, 그 다음에 사고를 검토하여 형이상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것, 실재의 은밀한 본질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선 우리가 직접적으로 친밀하게 아는 것, 즉 우리 자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바깥으로부터는 사물의 진정한 본질에 결코 이를 수 없다. 아무리 열심히 연구해도, 사물의 이미지와 이름외에는 어떤 것에도 이를 수 없다. 입구를 찾아 헛되이 성 주위를 맴돌다 가끔 성의 앞모습만 스케치하는 사람과 비슷하다.” 그 안으로 들어가보자, 우리 정신의 궁극적인 본질을 찾아낼 수 있다면, 외적 세계를 여는 열쇠도 손에 넣을지도 모른다.

 

4절 의지로서의 세계

 

1편 살려는 의지

 

412. 철학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생각과 의식에 정신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인식하는 동물, 이성적 동물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이 오래되고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오류, 이 엄청난 최초의 오류....를 없애야 한다.” “의식은 우리 정신의 표면에 불과하며, 지구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껍질만 알 뿐이지 속은 모른다.” 의식적 지성 밑에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의지, 노력하는 집요한 생명력, 자발적 행동, 오만한 욕망의 의지가 있다.

 

413. 지성은 가끔 의지를 이끄는 듯하지만, 이것은 안내자가 주인을 이끄는 것에 불과하다. 의지는 눈이 보이는 절름발이를 어깨에 태우고 다니는 힘센 맹인이다.” 우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이유를 찾는다. 우리는 심지어 욕망을 덮어버리려고 하는 철학이나 신학을 열심히 만들어내기도 한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형이상학적 동물이라고 부른다. 다른 동물들은 형이상학 없이 욕망을 갖기 때문이다. “이성과 설명 능력을 갖춘 사람을 상대로 논쟁하고 설득하려다가 마침내 그가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 우리가 그의 의지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보다 짜증나는 일은 없다.”

 

413. 사람을 설득하려면 그의 이익, 욕망, 의지에 호소해야 한다. 우리가 승리는 얼마나 오래 기억하고, 패배는 얼마나 빨리 잊는지 보라. 기억은 의지의 하인이다.

 

413. “반대로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소망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일에서는 이해력이 높아진다.”전체적으로 지성은, 교활한 사람의 경우처럼 위험 때문에 발달하거나, 아니면 범죄자의 경우처럼 결핍 때문에 발달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지성은 욕망에 종속되며 그 도구가 된다. 지성이 의지를 대체하려 하면 혼란이 따른다. 오직 생각에만 기초해서 행동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실수하기 쉽다.

 

413. 원인은 절반쯤은 생의 의지, 충만하게 살려는 의지다. “사람은 겉으로 보면 앞에서 끄니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뒤에서 미니까 움직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이끌려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느끼는 것에 의해, 반은 그 작용을 의식하지도 못하는 본능에 의해 떠밀려 간다는 것이다.

 

414. “의지는 정신에서 유일하게 지속적이고 변화가 없는 요소다.“ ”의식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모든 관념과 사고에 수반되는 지속 화음으로서 그것들을 통합한다.“ 의지는 사고의 지속음이다. 성격은 의지에 있지, 지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414. 모든 종교는 의지나 마음이 훌륭한 것에는....보상을 약속하지만 머리나 이해력이 뛰어난 것에는 아무런 보상도 약속하지 않는다.

 

415. 몸의 각 부분은 의지가 표현되는 통로인 주요한 욕망들에 상응한다. 신체 부위는 이런 욕망들의 눈에 보이는 표현임이 틀림없다. , 목구멍, 장은 객관화된 허기다. 생식기관은 객관화된 성욕이다.....신경계 전체는 의지의 더듬이를 이루며,.........일반적인 인간 신체가 일반적인 인간 의지에 상응하듯이, 개인의 신체구조도 개인적으로 조절된 의지, 즉 개인의 성격에 상응한다.

 

415. 지성은 지치지만 의지는 절대 지치지 않는다. 지성은 잠이 필요하지만 의지는 자는 중에도 움직인다.

 

415. 의지는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원래의 핵심적 본성에 따라 행동한다. 뇌의 활동이나 가장 부담스러운 유기적 기능인 인식작용 때문에 그 힘이 줄지도 않는다. ..... 따라서 잠잘 때는 의지의 전체적인 힘이 유기체의 유지와 개선을 향한다. 그 결과 고비를 순조롭게 넘기는 일이나 치유는 잘 때 이루어진다.

 

416. 생명은 잠에 대한 투쟁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잠에서 영토를 빼앗지만, 결국은 잠이 도로 찾아간다. 잠은 죽음의 일부를 빌려와 생명가운데 낮에 소진할 부분을 갱신하여 유지하는 것이다.” 잠은 우리의 영원한 적이다.

 

416. 의지는 인간의 본질이다. 그런데 의지가 모든 생명 형태의 본질이고, 심지어 생명 없는물질의 본질이기도 하다면 어떨까?

 

417. 예컨대 연인들 사이의 저항할수 없는 끌림을 선택 친화력이라고 불렀다. 연인들을 당기는 힘이나 행성을 담기는 힘이나 똑같다는 것이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생명 형태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지성의 역할은 작아진다. 그러나 의지는 작아지지 않는다.

 

417.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 식물과 행성, 동물과 사람에게는 모든 형태를 빚어내는 내적 힘이 있다.

 

418. 물론 이 의지는 살려는 의지, 또 삶을 최대화하려는 의지다....의지는 살려는 의지이며, 그 영원한 적은 죽음이다. 혹시 이 의지가 죽음조차 물리칠 수 있을까?

 

2편 재생산의 의지

 

418. 혹시 이 의지가 죽음조차 물리칠 수 있을까? 재생산 전략과 순교로 물리칠 수 있다.

 

418. 재생산은 모든 유기체의 궁극적 목적이자 가장 강한 본능이다. 그렇게 해야만 의지가 죽음을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재생산의 의지는 지식이나 사고가 거의 통제할 수 없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심지어 철학자도 가끔 자식을 둔다.

 

419. 의지는 여기에서 지식으로부터 독립하여 나타나며, 무의식적인 자연 안에서처럼 맹목적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생식기관은 당연한 의지의 초점이며, 지식의 대표자인 뇌의 반대편 극을 이룬다......생식기관은 생명을 유지하는 원리다.

 

422. 괴테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영은 절대 파괴할 수 없는 자연속의 존재이며, 그 활동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속된다. 그것은 마치 우리 지상의 눈에는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지않고 쉼 없이 계속 빛나는 해와 같다.” 괴테가 나에게 이 비유를 가져간 것이지, 내가 그에게서 가져온 것이 아니다.

 

422. 우리는 오직 공간과 시간 속에서만 별개의 존재처럼 보일 뿐이다. 공간과 시간은 생명을 별개의 유기체로 나누어 여러 장소나 시기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개체화 원리를 구성한다. 공간과 시간은 마야의 베일이다. 즉 사물들의 통일성을 감추는 환상이다. 실제로는 오직 종, 오직 생명, 오직 의지 밖에 없다. 개체는 현상일 뿐, 사물 자체가 아님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 “질료의 항상적 변화속에서 형상의 고정된 영속성을 보는 것, 이것이 철학의 핵심이다.

 

5편 악으로서의 세계

 

424. 세계가 의지라면, 그것은 고난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우선 의지자체가 결핍이며, 의지는 늘 자신이 가질수 있는 것보다 큰 것을 쥐려 하기 때문이다. 충족되는 소망이 하나라면, 충족되지 않은 소망은 열이다. 욕망은 무한하며, 충족은 제한적이다.

 

425. 모든 개인은 내부에 파괴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실현된 욕망은 새로운 욕망을 키우며, 이 과정은 끝없이 반복된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의지가 그 자체의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의지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의지는 늘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427. 사실 고통 자체는 짧다.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생각하는 데서 훨씬 큰 고통이 생기는 법이다.

 

427.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삶은 전쟁이기에 악이다. 자연 어디를 가나 우리는 다툼, 경쟁, 갈등, 승리와 패배의 자살적 반복을 본다. 모든 종은 다른 종의 물질, 공간, 시간을 빼앗으려고 싸운다.

 

428. 우리는 결혼해서 불행하고, 결혼하지 않아서 불행하다. 우리는 혼자일 때 불행하고, 함께일 때 불행하다.

 

430. 행복해지려면 아이처럼 무지해야 한다. 아이는 의지를 갖고 노력하는 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피곤함, 충족의 보람 없음을 아직 알지 못한다.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한 갓난아이처럼 부드러워지라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431.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철학의 출발이며, 종교의 최종원인이다. 보통 사람은 죽음과 화해할 수 없다. 그래서 수많은 철학과 신학을 만들어낸다. 불멸에 대한 믿음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의 증거다.

 

432. 삶은 자살을 비웃고, 죽음에 미소를 짓는다. 의도적인 죽음이 한번 있을때마다 의도하지 않은 출생은 수천번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현상적 존재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자살은 헛되고 어리석은 행동이다. 물자체-, 생명, 전체적 의지-는 그것에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곤궁과 다툼은 개인의 죽음 뒤에도 계속되며, 의지가 인간을 지배하는 한,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의지가 지식과 지성에 완전히 종속될 때까지는 삶의 불행에 승리를 거둘 수 없는 것이다.

 

6절 삶의 지혜

 

1편 철학

 

433. 계속 감각적인 것만 추구하면 결코 오랜 만족을 얻지 못한다. 재산을 모으는 기술만이 아니라 삶의 목적도 이해해야 한다.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는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행복에 더 기여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교양을 얻는 것보다는 부자가 되는 것에 훨씬 집중한다.”

 

433. 부가 아니라 지혜가 길이다. “인간은 맹렬하게 의지를 실현하려고 싸우는 존재인 동시에 순수한 지식을 추구하는 영원하고 자유롭고 고요한 주체다.” 놀라운 일이지만, 인식은 의지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의지를 정복할 수 있다. 인식의 독립 가능성은 인식이 가끔 욕망의 명령에 무관심하게 대응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434. 욕망은 지식으로,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그보다 앞서는 것의 불가피한 결과로 인식하는 결정론적 철학으로 조절하거나 가라앉힐 수 있다......인간의 지성은 의지라는 다룰 수 없는 말을 묶는 고삐나 재갈과 같기 때문이다.

 

434. 우리가 열정을 깊이 알면, 열정은 우리를 통제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통제만큼 외적 강제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이성에 복종하라. 가장 경이로운 사람은 세상을 정복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정복한 사람이다. 이렇게 철학은 의지를 정화한다.

 

436. 끝없는 의지라는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지적인 눈으로 삶을 바라보고,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위대한 인물의 성취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 위대한 인물들은 오직 그렇게 사랑해주는 정신들을 위해 살았다. “비이기적 지성이 의지의 세계의 결함과 어리섞음들 위로 향수처럼 솟아 오른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물을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따라서 비참하다. 하지만 사물을 순수하게 이해의 대상으로 보면 자유로 올라설수 있다.

 

436. 동기가 아니라 표상으로서의 사물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늘 찾고 있었지만 이전의 욕망의 길에서는 늘 우리를 피해 달아났던 평화가 갑자기 저절로 찾아와 우리에게서 자리를 잡는다...그 순간 우리는 의지의 비참한 투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3편 예술

 

439. 이렇게 인식을 의지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해주고, 이렇게 개인적 자아와 그 물질적 이해관계를 잊게 해주고, 이렇게 정신을 의지없이 진리를 명상하는 수준으로 고양하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다.

 

439. 예술이 과학보다 위대한 것은 과학은 고된 축적과 신중한 추론에 의해 전진하지만, 예술은 직관과 제시에 의해 바로 목표에 이르기 때문이다. 과학은 재능과 더불어 나아가지만, 예술은 천재를 요구한다.

 

440. 예술은 우리에게 일시적이고 개인적인 것 뒤에 있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것을 보여줌으로써 삶의 괴로움을 덜어준다. 스피노자가 옳았다. “사물의 영원한 측면을 볼 때 정신은 영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4편 종교

 

441. 쇼펜하우어는 성숙기에 이르러 자신의 예술 이론-의지의 철회와 영원하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명상-이 동시에 종교 이론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또 그는 종교를 대중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일부 종교적 관행과 교조에서 심오한 의미를 보기 시작했다.

 

441. 예를 들어 기독교는 심오한 비관주의 철학이다. 원죄(의지의 주장)과 구원(의지의 부정)의 교리는 기독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위대한 진리다.

 

441. 기독교가 우선 유대교를 누르고, 이어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를 누른 힘은 오직 그 비판주의, 우리의 상태가 매우 비참한 동시에 죄로 가득 차 있다는 고백에서 나왔다. 이에 반해 유대교와 이교는 둘 다 낙관주의적이었다.

 

442. 불교는 기독교보다 심오하다. 의지의 파괴가 종교의 모든 것이며, 니르바나가 모든 개인 발달의 목표라고 설교하기 때문이다.

 

442. 궁극적 지혜는 니르바나다. 자신의 자아를 욕망과 의지가 최소한인 상태로 줄이자는 것이다. 세계 의지는 우리의지보다 강하다. 따라서 즉시 항복하자.

 

7절 죽음의 지혜

 

443.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개인만 아니라 인류에게도 니르바나가 있을까? 물론 의지의 최종적이고 근본적인 정복은 오직 생명의 원천, 즉 재생산의 의지를 막는데 있을 수밖에 없다. “재생산 충동의 충족은 삶에 대한 욕구의 가장 강한 긍정이기에 본질적으로, 철저하게 비난할 만하다.”

 

444. 자연은 젊은 여자들에게, 연극의 언어로 말하자면 충격의 효과라고 할만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자연은 여자들에게 몇 년 동안 큰 아름다움과 매력을 아낌없이 선물로 주는데, 그 대가는 여자들의 나머지 인생이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여자들은 한 남자의 상상력을 강력하게 사로잡으며, 남자는 서둘러.....여자가 사는 동안.....그 여자를 돌보는 명예로운 일을 떠맡는다.

 

446. 지성의 발달은 재생산의 의지를 약하게 만들거나 꺾어버릴 것이며, 이로써 마침내 인류의 멸종이 가능해질 것이다....의지에 맞서 도전하는 용기, 삶의 아름다움은 거짓이고 가장 큰 은혜는 죽음이라고 말할 용기를 우리는 언제쯤에나 가질 수 있을까?

 

8절 비판

 

447. 자연의 외적인 의지를 인간의 의지보다 훨씬 강한 것으로 보고, 기꺼이 체념과 절망의 가르침에 다가가는 것이 동양의 특징이다.

 

447. 나폴레옹 전쟁의 혼돈으로 유럽의 영혼에는 애처로운 피로가 나타났고, 그것을 철학적 목소리로 대변한 사람이 쇼펜하우어였다. 유럽은 1815년에 심각한 두통을 앓고 있었던 셈이다. 쇼펜하우어 개인에 대한 진단은 인간의 행복이 외적 환경보다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있다고 인정한 점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447. 쇼펜하우어에게는 계속 여가를 누릴 만한 돈이 있었으며, 그는 지속적인 여가가 지속적인 일보다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철학자들의 우울해지는 경향은 앉아 있는 직업의 부자연스러움에서 오는 것인지 모른다.

 

448. 존재에 대한 거만한 혐오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은밀한 혐오의 위장인지도 모른다.

 

448. 사실 세상은 우리편도 아니고 적도 아니다. 우리 손에 쥐어진 원료일 뿐이며, 우리가 하는 바에 따라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다.

 

449. 나폴레옹이 제국의 꼭대기에 올라가는 광경, 루소의 맹렬한 지성 비난과 칸트의 지성 비판, 그 자신의 열정적 기질과 경험이 모두 합해진 결과,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일차적이고 궁극적인 지위에 있다고 보았다.

 

450. 행복은 소요나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취에 있다.

 

450. “지식을 늘리는 것은 슬픔을 늘리는 것이고, 가장 높은 수준으로 조직된 존재들이 가장 큰 고난을 겪는다는 말은 사실일까? 그렇다. 그러나 지식의 증가가 슬픔만이 아니라 기쁨도 늘리고, 발달한 영혼에게는 가장 아픈 고통만이 아니라 가장 은근한 기쁨도 준비되어 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우리는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강렬하고 심오하게 삶을 경험하고 싶어한다.

 

450. 감각이 만족을 주지 않자 오직 성숙한 정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예술가, 시인, 철학자 들과 사귀는 쪽이 비록 힘은 들어도 중요한 일이 되었다. 지혜는 달콤쌉쌀한 기쁨으로, 그 조화 속으로 파고드는 바로 그 부조화 때문에 더욱 심오해진다.

 

451. 죽음이 무섭다는 것은 물론 여전히 진실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 그 공포의 많은 부분은 사라진다. 따라서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이 없다면 기쁠까? 누가 인간에게 내려진 가장 무거운 형벌로 불멸의 삶을 선고받은 아하수로에로를 부러워할까? 또 인생이 달콤하지 않다면 왜 죽음이 무섭겠는가?

 

452. 거의 평생 하숙집에서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비관주의를 피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의 유일한 자식을 사생아라는 익명성에 버려둔 사람이. 쇼펜하우어의 불행의 밑바닥에는 정상적인 샌활에 대한 거부, 여자와 결혼과 자식에 대한 거부가 있었다. 건강한 사람은 부모 노릇에서 삶의 가장 큰 만족을 찾는 반면, 그는 거기에서 가장 큰 악을 발견한다. 그는 사랑의 은밀함이 종족을 이어가는 수치때문이라고 생각한다....그는 사랑에서 인류를 위한 개인의 희생만 보며, 본능이 그러한 희생을 보상하는 기쁨은 무시한다. 그는 여자는 잔소리가 심한 죄인이라고만 생각한다....그러나 그런 남자들이 독신의 불행 속에서 살았던 우리의 열정적 사도보다 별로 불행할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제대로 된 여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된 직장없이 하숙집에 틀혀 박혀 생활하는 그가 연애를 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겠는가? 여자는 남자를 있게 하는 존재 이유 중 하나이다. 그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면 비관주의는 빨리 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의 철학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철학자들은 하나같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정녕 철학자는 이런 보통의 삶을 살면 안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일까?

 

454. 지성주의-인간이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동물로서, 이성적으로 선택한 목적에 의식적으로 수단을 맞춘다는 개념-는 루소에서 병이 들어, 칸트에서 자리에 눕고, 쇼펜하우어에서 죽음에 이르렀다. 철학은 200년에 걸친 내성적 분석 끝에 생각 뒤에서 욕망을 발견했고, 지성 뒤에서 본능을 발견했다....쇼펜하우어 덕분에 우리의 은밀한 심장이 드러났다. 그는 욕망이 철학의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사고가 비인격적 사건들의 추상적 계산이 아니라 행동과 욕망의 유연한 도구라는 것을 이해하는 길을 닦아놓았다.

 

8장 허버트 스펜서

 

455. 그는 자신의 시대를 요약했는데, 단테 이래로 어떤 시대를 요약한 사람은 스펜서 외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대가다운 솜씨로 방대한 지식영역을 조정하는 일을 완수했기에 그 성취 앞에서는 비판하기가 부끄러워져서 입을 다물 지경이다. 우리는 지금 그의 노력과 노고가 밀어준 덕분에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 우리가 그보다 높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가 우리를 자신의 어깨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1편 콩트와 다윈

 

457. ‘모든 미래 형이상학의 서문이라고 자임한 칸트 철학은 그 심술궂은 의도대로 전통적인 사변 양식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그리고 의도대로 전통적인 사변 양식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그리고 의도와는 반대로 모든 형이상학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사상사 전체에 걸쳐 형이상학은 실재의 궁극적 본질을 발견하려는 시도였는데, 이제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권위에 의거하여 실재를 절대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실재란 생각할 수 있지만 알 수는 없는 누메논이라는 것, 아무리 명석한 인간 지능으로도 현상은 결코 넘어설 수 없고, 마야의 베일은 결코 뚫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457. 오귀스트 콩트, 젊은 시절 그의 우상은 벤저민 프랭클린으로, 콩트는 그를 현대의 소크라테스라고 불렀다. “알다시피 그는 스물다섯 살에 완벽하게 지혜로워 지기 위한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나는 아직 스무 살이 안되었지만, 감히 똑같은 일을 해보기로 했다.”

 

458. 생시몽은 그에게 튀르고와 콩도르세의 개혁적 열망과 더불어 사회적 현상도 물리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법칙과 과학으로 환원될 수 있을지 모르며, 모든 철학은 인류의 도덕적정치적 개선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해주었다. 콩트는 불운한 결환 생활을 한 뒤 정신적으로 붕괴하여 센 강에서 자살을 기도했다. 그를 구해준 사람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실증철학강의> 다섯권, <실증정치체계> 네 권을 읽을수 있게 되었다.

 

458. 사고의 각 분야에서 관념의 역사를 살피는 3단계 법칙을 관찰할 수 있다. 첫 단계에는 주제는 신학적 방식으로 파악되며, 모든 문제는 신의 의지로 설명된다. 그 뒤에 같은 주제가 형이상학적 단계에 이르면 형이상학적 추상으로 설명된다. ....마지막으로 이 주제는 정확한 관찰, 가설, 실험에 의해 실증과학으로 환원되며, 그 현상은 자연의 인과적 규칙성으로 설명된다. ‘신의 의지는 플라톤의 이데아나 헤겔의 절대관념같은 환상적 존재로 넘어가며, 이것은 다시 과학의 법칙에 굴복한다......그에게 철학은 과학과 다르지 않다. 철학은 인간 생활의 개선을 목표로 모든 과학을 조정하는 것이다.

 

459. 실증주의 운동은 산업과 교역의 생활에서 영감을 얻고 사실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던 영국 사상의 흐름과 맞아떨어졌다. 베이컨의 전통은 사고를 사물의 방향으로, 정신을 물질의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홉스의 유물론, 로크의 감각론, 흄의 회의주의, 벤담의 공리주의는 실용적이고 바쁜 삶이라는 주제의 변주들이었다.

 

460. 이렇게 실증주의는 그 출생지보다 영국에서 더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이런 끈기 덕분에 존 스튜어트 밀과 프레더릭 해리슨은 평생 콩트 철학에 충실했으며, 그러면서도 영국인다운 조심성으로 그의 격실을 차리는 종교에는 거리를 두었다.

 

460. 과학이 복잡한 단계에 이르자 당황한 세계는 누군가가 그것을 종합해주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허버트 스펜서의 젊은 시절에 영국을 흔들었던 이런 지적 영향들은 가운데서도 가장 압도적이었던 것은 생물학의 성장, 즉 진화론이었다.

 

461. 1850년대에는 진화론이 퍼지고 있었다. .....1859년에는 <종의 기원>의 출간과 더불어, 선량한 주교들이 생각했던 대로 낡은 세계가 박살 났다.....스펜서가 이런 사상적 물결의 정점에 올라선 것은 진화의 개념을 모든 연구영역에 적용하고자 제안한 명석한 정신, 그리고 거의 모든 지식이 그의 이론에 경의를 표하게 만든 폭넓은 정신때문이었다. 17세기에 수학은 철학을 지배하여 세상에 데카르트, 홉스,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파스칼을 보내주었다. 버클리와 흄은 콩디야크와 칸트에게서 심리학은 철학의 배경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19세기에 셸링과 쇼펜하우어, 스펜서와 니체와 베르그송에세게서 생물학은 철학적 사고의 배경이 되었다. 각각의 경우에 획기적인 관념은 한 개인의 단편적 생산물이었으며, 대체로 모호했다. 이런 관념들은 그것을 조정하고 명료하게 밝힌 사람들의 것이 된다.

 

2편 스펜서의 발전

 

462. 숙부와 할아버지만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도 사립학교 교사였다. 그러나 자신의 세기에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될 아들은 마흔이 될 때까지도 교육을 받지 않았다. 허버트는 게을렀고, 아버지는 너그러웠다.

 

463. 그는 나이 마흔에 <일리아스>를 읽으려 했으나, 6권까지 읽은 뒤에 이 책을 계속 읽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느꼈다. 끝까지 읽느니 차라리 책값을 버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비서 가운데 한 사람인 콜리어는 스펜서가 어떤 과학책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에서도 아무런 체계적인 가르침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서른이 될 때까지 철학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그러나 출발점에서 칸트가 공간과 시간을 객관적인 실체라기 보다는 감각 지각의 형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칸트는 바보라고 생각하여 책을 던져버렸다.

 

464. 콩트나 타일러를 읽지 않고 <사회학 원리>를 썼으며, 세지윅외에 칸트나 밀이나 다른 윤리학자는 읽지 않고 <윤리학 원리>를 썼다. 존 스튜어트 밀이 받은 집중적이고 가차 없는 교육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때묻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은 분명 신선한 일일 것이다. 또 한편 바보로 취급받을수 있는데 스펜서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464. 그렇다면 스펜서는 어디에서 그의 수많은 주장을 뒷받침할 그 무수한 사실들을 찾아낸 것일까? 대부분 독서보다는 직접적인 관찰로 손에 넣었다.” “그의 호기심은 늘 깨어 있었으며, 그는 늘 그때까지만 혼자만 관찰하고 있던.....주목할 만한 현상을 이야기하여 함께 있는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464. “그의 방앗간으로 오는 곡식 가루와 같은 사실들을 모두 스라소니의 눈으로 살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결정했기에, 자신의 모든 작업의 중심을 이룰 진화라는 관념을 찾아냈기에, 그의 뇌는 관련된 자료를 끌어당기는 자석이 되었으며, 유례가 없을 정도로 질서 정연한 그의 사고가 그 자료를 오는 즉시 자동으로 분류했다.

 

464. 실제로 그는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직업은 그의 사고의 실용적 경향을 강화했다. 그는 철로나 교량의 측량기사, 건설감독, 설계자였으며, 일반적인 의미의 엔지니어였다.

 

465. 채식주의자가 빈혈에 걸리고 자신도 기운이 빠지자 그만두었다. “채식주의자 시절에 쓴 글은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힘이 너무 빠져 있었다.”

 

465. 그의 성격에는 그 장점에 수반되는 결함이 있었다. 단호한 현실주의와 실용적 감각에 대한 대가로 시와 예술 쪽의 감각과 열의는 부족했다.

 

466. 독신 생활을 한 탓인지 따뜻하고 인간적인 자질은 부족했다. 그는 저 위대한 영국 여자, 조지 엘리엇과 연애를 했지만, 그녀는 너무 지성이 너무 강해 그의 비위에 맞지 않았다. 그는 유머가 부족했으며, 문체에 섬세함이나 은근함이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당구에서 지면 상대가 그런 게임에 전문가가 되려고 긴 시간을 쏟았다고 비난했다.

 

466, 나이아가라 폭포를 본 뒤에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대체로 예상하던 대로였다.”

 

467. 그는 대단히 논리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선험적인 것들과 귀납적인 것들을 체스 선수처럼 정확하게 배치한다. 복잡한 주제를 명료하게 설명하는 데는 근대사에서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는 어려운 문제를 아주 명료한 언어로 표현하여 한 세대 동안 온 세상이 철학에 관심을 보이게 한다.

 

467. “나는 설명에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듣곤 했다. 흔치 않은 명료하고 일관된 방식으로 내 자료와 추론과 결론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는 넓은 범위의 일반화를 사랑했으며, 증명보다는 가설로 자신의 작업을 흥미롭게 만들었다. 헉슬리의 말에 따르면, 스펜서는 이론이 사실에 해당하는 것은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467. 그는 받아들이는 것 이상으로 정리해냈다. 그는 조정과 종합의 신봉자였다. 그래서 비슷한 경향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유로 칼라일을 깎아내렸다. 질서에 대한 애착은 그를 노예로 만들었다. 뛰어난 일반화가 그를 지배했다. 세상은 그와 같은 정신을 요구하고 있었다. 명료한 햇빛을 비추어 사실들의 광야를 문명화된 의미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스펜서가 자신의 세대를 위해 한 일 덕분에 그에게 부족한 부분도 그를 인간적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 여기에서는 그를 약간 솔직하게 묘사했지만, 그것은 우리가 결함을 알 때 위대한 인물을 더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고, 흠 없는 완벽함으로 빛날 때 오히려 수상쩍게 보며 싫어하게 되기 때문이다.

 

468. 스펜서는 마흔살에 이렇게 썼다. “오늘날까지 나의 인생은 잡다했다고 말하면 적절할 것이다.” 사실 철학자의 경력이 그렇게 일관성 없이 왔다 갔다 한 경우는 드물다. “이무렵(스물세살 때)나는 시계를 조립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자기 분야를 찾아, 정직한 농부처럼 그 땅을 갈았다....6년 뒤 그는 공학을 그만두고 <이코노미스트>를 편집한다. 서른 살에 그가 조너던 다이먼드의 <도덕 원리론>을 비난하자, 그의 아버지는 그런 주제로 다이먼드만큼 한 번 써보라고 스펜서를 자극했으며, 그는 이 도전을 받아들여 <사회 정역학>을 썼다.

 

469. 새로운 종의 발달은 난자와 정자에서 인간이 발달하고 씨앗에서 식물이 발달하는 것만큼이나 놀랍지도 경이롭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모든 생물형태의 성장에서 시작은 동질적이고 발달만 이질적이라는 폰 베어의 관념을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역사와 진보의 일반적 원리로 끌어올린 것이다. 간단히 말해, 스펜서는 시대의 정신과 함께 성장했으며, 이제 보편적 진화론의 철학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469. 1858년 스펜서는 전집에 들어갈 자신의 에세이를 묶어내려고 수정을 하다가 자신이 표현한 관념들의 통일성과 연속성에 놀랐다. 그 순간 마치 문을 열었을 때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 것처럼 진화론은 생물학만이 아니라 모든 과학에 적용할 수 있으며, 종과 속만이 아니라 행성과 지층, 사회와 정치의 역사, 도덕과 미학 개념도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대한 발견의 시작은 그렇게 미미한,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였다.

 

469.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의식하자 약점이 더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이 다시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할 수 없다는 것, 한 번에 한 시간 이상 정신적 작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가난했다. 먹고사는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470. <1원리>가 나오자, 과학과 종교의 화해를 시도한 유명한 ‘1때문에 주교와 박식한 사람들이 동시에 불쾌감을 느꼈고 많은 예약자들이 예약을 철회했다.....<1원리><종의 기원>은 대규모로 벌어진 책들의 전투의 중심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헉슬리는 다윈주의와 불가지론 세력의 총사령관 역할을 맡았다.

 

472. 40년 동안 애쓴 끝에 마침내 종합철학이 무사히 출간되었다. 병과 수많은 장애를 극복한 이 정신과 의지의 승리는 인간의 책 가운데 밝게 빛나는 한 점이 되었다.

 

3절 제 1원리들

 

1편 알수 없는 것들

 

472. 그는 수많은 신앙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볼 때 종교에 인간 영혼을 지배하는 끈질긴 힘을 낳는 핵심적 진리가 있다고 가정하고, 중교적 관념들을 살펴봄으로써 그것을 찾아내 보자고 제안한다.

 

472. 그래서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신학자에게 아이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한다. “신은 누가 만들었나요?” 모든 궁극적 종교관념들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모든 궁극적 과학 관념들 또한 이성적 개념을 넘어서 있다. 물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물질을 원자로 환원하지만, 분자를 나누었듯이 이 원자도 나눌 수밖에 없다. 결국 물질을 무한히 나눌 수 있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공간과 시간들을 나눌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473. 과학자의 연구는 모든 방향에서 해결 불가능한 수수께끼와 마주치게 되고, 그 결과 그것이 해결 불가능한 수수께끼라는 것을 점점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과학자는 인간 지성의 위대함과 하찮음을 동시에 알게 된다.

 

473. 이런 모호함의 일반적 원인은 모든 지식의 상대성이다. “생각하는 것은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므로 어떤 생각도 관계 이상은 표현할 수 없다.....지성은 현상에 의해 현상과 대화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어서 현상 너머 어떤 것에 사용하려고 하면 터무니없는 상황에 휘말린다.

 

474. 과학과 종교의 화해가 별로 어렵지 않다. “진리는 일반적으로 대립하는 견해들의 조정에 있다.” 과학은 자신의 법칙이 현상과 상대적인 것에만 적용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자. 종교는 자신의 신학이 개념화에 저항하는 믿음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화라는 점을 인정하게 하자.

 

474. 과학이 신을 부정하거나 유물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그만두게 하자. 정신과 물질 또한 상대적 현상이며, 본질을 알 수 없는 궁극적 원인의 이중의 결과일 뿐이다. 이 헤아릴 수 없는 힘에 대한 인식이 모든 종교에서 진리의 핵심이며, 모든 철학의 시작이다.

 

2편 진화

 

475. 현실의 역동적 원리는 무엇일까? 만물의 성장과 쇠퇴의 공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화와 사멸의 공식임이 틀림없다. “어떤 것의 전체 역사는 그것이 지각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나타나 지각할 수 없는 것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포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펜서가 유명한 진화 공식을 제시하자 유럽의 지성은 입을 떡 벌렸고, 스펜서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40년 동안 책을 열권 써야 했다. “진화는 물질의 통합과 거기에 따르는 운동의 소실이다. 이 과정에서 물질은 정의할 수 없고 일관성도 없는 동질성으로부터 한정되고 일관성 있는 이질성으로 넘어간다. 또 이 과정에서 유지되는 운동도 유사한 변화를 겪는다.”

 

476. 감각과 기억이 지식과 사고로 통일되고, 지식이 과학과 철학으로 통일되는 것을 보라. 가족이 씨족과 부족과 도시와 국가와 동맹체와 세계연방으로 발달하는 것을 보라. 이것이 물질의 통합이다..... 이런 통합은 물론 부분들의 운동이 줄어드는 과정을 수반한다. 예를 들어 국가의 힘이 커지면 개인의 자유는 줄어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부분에 상호 의존성을 부여한다. 관계라는 보호막을 제공하고, 이것이 일관성을 이루며 집단적 생존을 촉진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또 형식과 기능도 훨씬 더 한정된다.

 

477. 무엇이든 확산에서 통합과 통일로 가는 것, 동질적 단순성에서 분화된 복잡성으로 가는 것은 진화의 흐름 안에 있다. 무엇이든 통합에서 확산으로 가는 것, 복잡성에서 단순성으로 가는 것은 사멸의 썰물을 타고 있다.

 

477. 그러나 마지막에는 불가피하게 평형이 찾아온다. 모든 운동은 저항을 받으며 움직이기에 조만간 끝이 난다.

 

478. <1원리>는 웅장한 드라마로, 거의 고전적인 차분한 분위기로 상승과 몰락, 진화와 소멸, 행성과 생명과 인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극적인 드라마다......스펜서에게는 거의 쇼펜하우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인간 노력의 무용성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너무 멀리 내다보는 바람에 존재의 작고 유쾌한 형태와 색채가 깡그리 눈에 띄지 않고 지나가버리는 철학자의 병을 앓았던 것이다.

 

4절 생물학 : 생명의 진화

 

480. 이 책들은 당연히 전문가의 분야를 침범하는 철학자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생물학적 사실들이라는 방대한 영역에 새로운 통일성과 이해 가능성을 부여하는 계몽적 일반화로 세밀한 부분의 오류를 보상한다. 스펜서는 유명한 정의에서 출발한다. “생명은 내적 관계가 외적관계에 지속적으로 적응하는 것이다.” 생명의 완전성은 이런 상응의 완전성에 의존한다. 이런 상응이 완벽하면 생명도 완벽하다. 이 상응은 단순히 수동적인 적응이 아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외적 관계의 변화를 예상하고 내적 관계를 조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481. 후기 판본에 덧붙인 장에서 스펜서는 생명의 역동적 요소를 논의하면서 자신의 정의가 사실 생명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했다.“우리는 생명의 본질을 물리화학적 맥락에서 생각할 수 없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그는 이 점을 인정하면 자신의 체계가 갖춘 통일성과 완결성에 얼마나 해가 되는지를 깨닫지 못했다.

 

482. 인구 증가는 생존 투쟁의 주된 요인이며, 이 투쟁을 통해 적자는 생존할 수 있었고, 인류의 수준이 올라갔다.

 

5절 심리학 : 정신의 진화

 

483. 나이가 들고 생각이 바뀌면서 내용이 온건해졌고, 여기에 수고스럽기는 하지만 별로 밝혀주는 것은 없는 분석이 몇 백 페이지 보태졌다. 여기에서는 이론은 풍부하고 증거는 빈곤한 스펜서의 경향이 다른 곳에서보다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

 

484.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여기에서 심리학의 역사상 처음으로 단호하게 진화론적 관점을 채택하고 발생론적 설명을 시도함으로써 당혹스러울 정도로 복잡한 사고 과정을 추적하여 가장 단순한 신경 작용에까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물질의 운동에까지 이르려는 노력을 마주한다는 점이다.

 

484. 정신적 현상을 물리적 현상으로 번역하느냐, 아니면 물리적 현상을 정신적 현상으로 번역하느냐, 이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 밖 에 없다면, 후자가 둘 가운데 더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보인다.

 

485. 본능과 이성사이에는 벌어진 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내적 관계가 외적 관계에 적응한 것이며, 유일한 차이는 정도의 차이다.

 

485. 의지는 우리의 적극적 충동들의 총합에 부여하는 추상적 용어이며, 의욕이란 관념이 방해받지 않고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다. 관념은 행동의 첫 단계이며, 행동은 관념의 마지막 단계다. 마찬가지로 감정은 본능적 행동의 첫 단계이며, 감정의 표현은 완성된 반응의 유용한 서곡이다.

 

485. ‘사고의 형식은 칸트가 타고난다고 말한 공간과 시간 인식, 또는 양과 원인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본능적 방식일 뿐이다.

 

6절 사회학 : 사회의 진화

 

486. 20년간에 걸쳐 발표된 이 당당한 책들은 스펜서의 걸작이다. 사회학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를 다루며, 함축적 일반화와 정치철학이라는 면에서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

 

486. 심리학에서 결정론이 옳다면, 사회적 현상에도 틀림없이 원인과 결과의 규칙성이 있을 것이다.

 

488. 이질적인 것들의 통합이라는 원리는 종교와 정부에서부터 과학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사회 현상의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종교는 처음에는 다수의 신과 영에 대한 숭배로 시작하며, 이 점은 대체로 어느나라와 비슷했다. 그러다가 종교가 발달하면서 중심의 전능한 신이 다른 신들을 복속시켜, 이들을 특정한 역할에 따른 위계로 조정하는 개념이 나타났다.

 

489. ‘여호와강한자’, ‘전사을 뜻했다. 그는 아마 한 지역의 권력가였을 것이며, 죽은 뒤에 만군의 신으로 숭배받았을 것이다.

 

490. 실제로 서구 사회의 전체 역사에서 벌어진 가장 큰 변화는 군사 정권이 산업 WJDRNJSDFMH 점진적으로 바뀐 일이다. 국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사회를 그 통치 형태가 군주제냐, 귀족제냐, 민주제냐에 따라 분류한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구분이다. 가장 큰 구분선은 군사적 사회와 산업적 사회, 전쟁으로 먹고사는 나라와 일해서 먹고사는 나라를 나누는 것이다.

1·2차 세계대전은 결국 자국산업의 팽창으로 인해 자국의 물건을 팔기 위한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일해서 먹고 사는 나라가 되지만 결국은 다시 전쟁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490. 식인이 원시사회의 수치라고 하지만, 일부 현대 사회는 사회를 잡아먹는다. 민족 전체를 노예로 만들어 잡아먹는 것이다. 전쟁을 불법으로 간주하여 극복할때까지, 문명은 재앙들 사이의 위태로운 간주곡일 뿐이다. “높은 수준의 사회적....국가의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전쟁의 중단에 달려 있다.”

 

491. 군국주의 사회와 산업 사회의 차이는 개인들이 국가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이 국가가 개인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전환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492. 스펜서는 사회주의가 군국주의적이고 봉건적인 유형의 국가에서 파생되며, 산업과는 타고는 친화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는 군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중앙집중의 발전, 정부권력의 확장, 진취성의 쇠퇴, 개인의 좃옷과 관련된다는 것이다......“완전해질수록 경직되는 것은 모든 조직의 법칙이다.

 

493. 현재와 같은 상태의 인간은 강제적 평등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저절로 변화된 환경이 저절로 인간의 성격을 바꾸기 전에 인공적 변화를 시도하는 법률은 점성술만큼이나 쓸모가 없을 것이다.

 

494. 그는 인간들이 그렇게 민주적인 산업 체계를 능률적으로 운영할 만큼 정직하고 유능한지 의심하지만, 그렇게 노력하는 데에는 전적으로 찬성한다.

 

7절 윤리학 : 도덕의 진화

 

495. 스펜서는 자연선택과 생존 투쟁의 검증을 통과할 수 없는 도덕률은 처음부터 아무 의미없는 것, 입에 발린 말에 그칠 수 밖에 없다고 느꼈다. 행위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삶의 목적에 잘 적응했느냐, 잘못 적응했느냐에 따라 선하거나 악하다고 규정해야 한다. “가장 수준 높은 행위는 가장 길고, 가장 폭넓고, 가장 완전한 삶을 이룩하는데 기여한다.”

 

496. 도덕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이루며, 가장 수준 높은 유형의 인간은 그 자신 안에서 삶의 가장 광범위한 다양성·복잡성·완전성을 효과적으로 통일하는 사람이다.

 

500. 나중에 토지는 그것을 소유한 가족, 자신이 쏟아부은 노동의 결과를 후손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가족만이 세심하게 관리할수 있다는 근거에서 그 주장을 철회한다(이 때문에 헨리 조지는 혐오감을 느끼며 스펜서를 혼란에 빠진 철학자라고 불렀다.). 사적 소유는 정의의 법칙에서 곧바로 나온다. 각 사람은 똑같이 자유롭게 자신이 절약한 결과물을 계속 소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502. 그러나 그의 책의 정점에는 산업과 평화가 이타주의를 발전시켜 마침내 이기주의와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 이르고, 그렇게 해서 철학적 무정부주의라는 자연발생적인 질서가 발전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502. 사회적 조건이 규정하는 한계 내에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전체의 행복을 최대로 달성하는 첫 번째 필요조건일지도 모른다.

 

503. 사회적 유용성을 위한 자연선택을 통하여 본능이 된 이타주의적 행동은 모든 본능적 작용과 마찬기지로 강제없이, 기쁘게 수행될 것이다. 인간 사회의 자연적 진화는 우리를 완벽한 상태에 더 가까디 데려갈 것이다.

 

8절 비판

 

1편 제1원리

 

505. 스펜서는 과학자처럼 관찰에서 시작하여, 과학자처럼 가설을 만드는 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나 과학자와는 달리 실험에 의존하지도 않고, 유리한 자료의 선택적 축적에만 의존한다.

 

2편 생물학과 심리학

 

506. 그는 생명을 물리화학적 맥락에서 생각할 수 없다라고 고백하는데 이 고백은 그의 진화공식, 생명규정, 종합철학의 일관성에 치명적이다.”

 

507. 정신이 원시 성운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기계적으로 진화한 신경 과정들에 주관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는 한다. 그러나 신경 기제 외에 이런 주관적인 것이 수반되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모든 심리학의 핵심이다.

 

3편 사회학과 윤리학

 

507. 현대 유럽국가들도 자신이 산업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는 전혀 관심없이 전쟁을 일으킨다. 산업 제국주의가 땅에 굶주린 왕조들보다 군국주의적일 수 있는 것이다.

 

508. 스펜서는 우리가 통제적인 국가사회주의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일관성과 논리를 희생해야 했다.

 

509. 한번은 전쟁 관리를 국가의 일인 아니라 사적인 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9절 결론

 

510. <1원리>로 스펜서는 곧바로 당대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되었다. ...스펜서는 시대정신의 철학적 옹호자로 받아들여졌으며, 그의 영향력은 모든 곳을 거쳐 유럽의 사고 속으로 들어갔을 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의 리얼리즘 운동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510.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의 명성은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그는 거의 모든 계급에게 인기를 잃었다.

 

511. 노동자들에게 고용주들로부터 피해를 보는 사람이라고 공감을 표명한 뒤, 지위가 역전되면 노동자들이 권력을 휘두를 거라고 덧붙였다. 남자에게 피해를 당한다고 여자에게 공감한 뒤, 여자는 기회가 생기면 남자에게 피해를 준다고 어김없이 덧붙였다. 그는 외롭게 늙어갔다.

 

511. 열심히 일하며 살아온 나날을 돌아보며 삶의 소박한 기쁨들이 아니라 문명을 얻으려 한 일이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생각했다.

 

9장 프리드리히 니체

 

513. 나는 그곳에 앉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 선과 악을 넘어서서 가끔은 빛을, 또 가끔은 어둠을 즐겼다. 오직 낮, 호수,끝없는 시간만 있었다. 나의 친구여, 그때 갑자기 하나가 둘이 되었고, 차라투스트라가 내 옆을 지나갔다.

 

1절 네체의 혈통

 

515. 만일 삶이 적자생존의 생존 투쟁이라면, 힘이 최고의 미덕이고 약한 것은 결함일 뿐이다. 살아남고 승리하는 것이 선이다. 글복하고 실패하는 것은 악이다.

 

516.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 전투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이 아니라 힘이며, 겸손이 아니라 자부심이며, 이타주의가 아니라 단호한 지성이라는 것, 평등과 민주주의는 선택과 생존이라는 결을 거스른다는 것, 대중이 아니라 천재가 진화의 목표라는 것. ‘정의가 아니라 권력이 모든 차이와 모든 운명의 중재자 라는 것,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렇게 보았다.

 

2절 청년 시절

 

517. 그가 기독교를 공격한 것은 그의 안에 그만큼 기독교의 도덕적 정신이 강했던 탓이다. 그의 철학은 격렬한 반박을 동원하여, 부드러움과 친절과 평화로 향하는 자신의 저항할 수 없는 성향에 균형을 맞추고 그것을 교정하려는 시도였다.

 

520. 명령과 복종, 인내와 규율이라는 힘든 스파르타 생활은 이제 자신이 그런 이상을 실현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상상력을 한껏 자극했다. 한마디로 그는 건강문제로 군인이 될수 없었기에 군인을 숭배했다.

 

520.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음악에 끌리고 있었다. 그는 피아니스트 비슷한 존재가 되었고, 소나타도 썼다. “음악이 없다면 인생은 실수일 것입니다.”니체는 그렇게 말했다.

 

521. 그는 조국의 부름에 저항할 수 없었다. 여기에도 시가 있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여기에 국가가 있으며, 그 기원은 수치스러운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것은 마르지 않는 고난의 샘이며, 빈번한 위기 때마다 그들을 태워버리는 불길이다. 그럼에도 국가가 부르면, 우리 영혼은 자신을 잊고 만다. 그 피비린내 나는 호소에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다그쳐 용기를 내고 고양되어 영웅주의에 이른다.”

 

521. 니체는 전선으로 가는 길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기병대가 화려한 모습으로 떠들썩하게 도시를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철학 전체의 씨앗이 되는 인식, 비전이 찾아왔다고 니체는 말한다.

 

521. 나는 처음으로 가장 강하고 가장 높은 삶의 의지는 비참한 생존 투쟁에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의지’, ‘권력의지’, ‘제압하려는 의지로 표현된다고 느꼈다.

 

3절 니체와 바그너

 

525. 독일 민족의 본능이 그런 퇴폐적인 문화들보다 건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라. 그들이 종교에서 처럼 음악에서도 개혁을 단행하여 루터의 난폭한 힘을 예술과 삶에 쏟아붓게 하라. 독일 민족이 겪는 전쟁의 고통으로부터 또 다른 영웅시대가 동터오를지,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이 다시 태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527. “나는 심포니로 뒤덮인 드라마, 가곡에서 성장한 형식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바그너는 오페라의 이질적인 호소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다른 방향으로 끌려갔다.” 니체는 그 방향으로 갈 수 없었다.

 

527. “낭만주의, 이상주의적 거짓말, 인간의 양심을 물렁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이 이곳에서 가장 용감한 영혼 가운데 하나를 정복해버렸으며, 나는 그 안에 담긴 모든 여성성과 무질서한 광시곡이 혐오스럽고 지겨워 달아났다.

 

528. 니체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바그너에게 등을 돌렸고, 그 뒤로 바로 그녀와 두 번 다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자신을 향한 솔직함과 진지함이 결합되지 않은 위대성을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 점이 눈에 띄는 순간, 그 사람의 성취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4절 차라투스트라의 노래

 

529. 철학은 어떤 압제도 뚫고 들어올 수 없는 도피처를 제공한다.”

 

531. 오만한 철학자도 예쁘고 연약한 모습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인지, 니체는 갑자기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루 살로메는 그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서로 사랑했다면 오늘날의 니체가 있었을까? 니체는 없었지만 한 여자를 사랑하는 니체는 있었을 것이다. 니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쨌든 이 사랑의 실패로 니체는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본다.

 

531. 이제 그는 더 깊은 고독을 찾아 나선다. “사람들과 사는 것이 어렵다. 침묵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531. 남자도 여자도 사랑하지 않고 인간을 넘어서기를 기도하면서, 그 외로운 고지대에서 그의 가장 위대한 책의 영감이 찾아왔다.

 

531. 이제 그의 영혼이 치솟아 가장자리까지 흘러넘쳤다.” 그는 조로아스터라는 새로운 스승, 초인이라는 새로운 신, 영겁회귀라는 새로운 종교를 발견했다.

 

532. “이 작품을 말하면서 시인들 이야기는 하지 말도록 하자. 아마 이렇게 엄청난 힘 속에서 태어난 작품은 없을 것이다......모든 위대한 영혼의 영과 선을 모은다 해도, 그 전체로도 차라투스트라의 말 가운데 단 한마디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532. 책은 마흔 부가 팔렸다. 일곱 부는 증정본이었다. 한 사람은 잘 받았다고 인사를 했다. 찬사를 보낸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외로운 적은 없었다.

 

533. 차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아의 원형, 조로아스터와 마찬가지로 나이 서른에 명상을 하던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한다.

 

533. “이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숲속의 이 늙은 성자는 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아직 전혀 듣지 못했다!” 그러나 물론 신은 죽었다. 모든 신들은 죽었다.

 

534. 누구든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차라투스트라는 그렇게 말했다.

얼마나 흥겨운 무신론인가! “신들은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다운 일 아니겠는가?” “신들이 있다면 무엇이 창조될 수 있겠는가.......신들이 있다면, 어떻게 내가 신이 아닌 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따라서 신들은 없다.”

 

534. 그러므로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의 일부다. 그러나 이것은 창조적 선이다.....우리의 진실로 인해 부서질 것은 무엇이든 부서지게 하라! 아직 지어야 할 집이 많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렇게 말했다.

 

535.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그 초인이 살아 있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넘어설 어떤 것이다. 너희는 인간을 넘어서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가? 인간이 위대한 것은 그가 목표가 아니라 다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사랑할 수 있는 점은 그가 과도기이고 파괴라는 것이다.

 

535. 니체는 모든 독자가 자신을 초인으로 생각할 거라고 예측한 듯 하다. 그래서 초인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고백하여 그런 생각을 막으려 했다.

 

536. 니체는 자신의 형상대로 신을 창조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느다. 그는 자신을 불멸로 만들어야 했다. 초인 다음에는 영겁회귀가 온다. 만물은 정확히 그대로 돌아올 것이다.

 

536. 결정론은 우리를 그런 길로 데려간다. 차라투스트라가 마지막 가르침에서 이 이야기하기를 두려워했던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두려워 떨며 입을 다물려 했으나, 마침내 어떤 목소리가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차라투스트라여?해야 할 말을 하고, 산산이 부서지도록 하라!“

 

5절 영웅 도덕

 

537.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에게 복음이 되었고, 그 뒤에 그가 쓴 책들은 그것의 주석에 불과했다.

 

537. 니체는 몸의 건강보다 정신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겼다.

 

538. 인간행동에 대한 두가지 모순적인 평가, 두가지 윤리적 관점과 기준이 있었다. 주인의 도덕무리의 도덕이었다. 앞의 것은 고전주의적 고대, 특히 로마인들이 받아들인 기준이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특히 정치적 굴종을 겪던 시절의 유대인에게서 다른 기준이 들어왔다. 굴종은 자기비하, 무력감을 낳고 이타주의를 낳는다. 이런 무리의 도덕에서 위험과 힘에 대한 사랑은 안정과 평화에 대한 사랑에 자리를 내준다.

 

539. 명예는 이교도적이고, 로마적이고, 봉건적이고, 귀족적이다. 양심은 유대적이고, 기독교적이고, 부르주아적이고, 민주적이다. 아모스에서 예수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지자들의 웅변 때문에 굴종하는 계급의 관점이 거의 보편적인 윤리가 되고 말았다. ‘세상육신은 악과 동의어가 되었으며, 가난은 미덕의 증거가 되었다.

 

540. 예를 들어 문병에서 우리는 이웃의 무력함을 바라보며 우월감의 절정을 맛본다.

우월감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아픔은 이렇게 멀쩡하고 건강한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건 사실이다.

 

540. 이 모든 도덕뒤에는 은밀한 권력의지가 있다. 사랑도 소유의 욕망에 불과하다. 연애는 전투이고 짝짓기는 정복이다. 사람들은 사랑을 할 때 자신이 이기적이지 않다고 상상한다. 종종 자신의 이익에 어긋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익을 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다른 사람을 소유하고 싶어한다....사랑은 모든 감정 가운데 가장 이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장애에 부딪히면 가장 인색해진다.”

 

540. 권력을 향한 이런 열정과 맞설 때 이성이나 도덕은 무력하다.

 

540. “우리의 지적활동은 대부분 무의식으로,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진행된다....의식적 사고는....가장 약하다.” 본능은 권력의지가 의식의 방해를 받지 않고 직접 작용하는 것이므로 이제까지 발견된 모든 종류의 지성 가운데 가장 지적이다.

 

540. 강한 사람은 욕망을 이성으로 위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간단하게 나는 원한다라고 주장한다.

 

541. 그러나 유대-기독교-민주주의적 관점이 근대를 지배하면서 강한 자들도 자신의 힘과 건강을 부끄러워하고,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유럽은 새로운 불교의 위협을 받고 있다.

 

541. 위대한 개인은 위험과 폭력과 무자비한 궁핍한 시대에만 나타난다.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강한의지, 힘차게 지속되는 열정이다. 열정이 없으면 사람은 행동하지 못하는 유액에 지나지 않는다.

 

542. 악이 선하지 않다면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선한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인간은 더 선해지고 더 악해져야 한다.”

 

542. “인간은 가장 잔인한 동물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비극, 투우,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며 그는 지상에서 다른 어느때보다 행복하다고 느꼈다.

 

542. 따라서 철학은 표현하고 찬양하고자 하는 것이 상승하는 삶이냐, 하강하는 삶이냐에 따라 참이 되기도 하고 거짓이 되기도 한다. 퇴폐주의자는 말한다.

 

6절 초인

 

543. 도덕이 친절이 아니라 힘에 있듯이, 인간 노력의 목표도 만인의 고양이 아니라 더 훌륭하고 강한 개인의 계발이 되어야 한다. “인류가 아니라 초인이 목표다.” 분별력 있는 사람이 절대 떠맡지 말아야 할 일이 인류의 개선이다. 인류는 개선되지 않고,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는다.

 

544. 사회는 개인의 권력과 개성을 고양하는 도구다.

 

544. 처음에 니체는 새로운 종의 생산이 자신의 희망인 양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이 말하는 초인이 대중의 평범함이라는 진창에서 불안하게 솟아오르는 우월한 개인이며, 그의 존재는 자연선택이라는 우연보다는 계획적인 개량과 세심한 양육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545. 결혼, 하나를 창조하되, 그것을 창조하는 둘을 넘어서는 하나를 창조하려는 둘의 의지를 나는 그렇게 부르겠노라.

 

545. 초인의 공식에서 그다음 요소는 엄격한 교육이다. 이 교육에서는 완벽함이 당연한 일로 요구되므로 칭찬할 거리도 못된다. 여기에서는 위로는 거의 없고 책임은 많을 것이다.

 

546. 이렇게 태어나고 양육된 인간은 선과 악을 넘어설 것이다. 자신의 목적이 요구한다면 악해지는 것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선해지기보다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를 원할 것이다.

 

547. “우리에게는 목표가 있어야 하며 목표가 있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모두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법이다.” 위대해지자. 아니면 위대한 자의 종이나 도구가 되자.

 

7절 퇴폐

 

548. 따라서 초인으로 가는 길은 귀족제를 통과할 수 밖에 없다...여기에서 첫 번째 높은 수준에 이른 사람들 모두가 기독교를 파괴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승리가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

 

549. 르네상스가 무엇이었는지 누가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 누가 이해하려할까? 그것은 기독교적 가치의 재평가, 모든 수단, 모든 본능, 모든 천재성으로 그 반대의 가치, 즉 고귀한 가치들에게 승리를 안겨주려는 시도였다.

 

8절 귀족주의

 

552. 민주주의는 흐름에 맡긴다는 뜻이다. 그것은 유기체의 각 부분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응집과 상호 의존의 이완을 뜻하고, 자유와 혼돈이 왕좌에 앉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범용을 숭배하고, 수월성을 증오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위대한 인물의 출현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552. 우월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를 이루는 사람이 이상이자 모범이 된다.....따라서 페미니즘은 민주주의와 기독교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553. 남자는 여자에게 구애할 때 온 세상을 주겠다고 하고, 결혼하면 실제로 그렇게 한다. 사랑의 이타주의는 가족의 이기주의가 된다. 정직과 혁신은 독신의 사치다.

 

554. 페미니즘과 더불어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가 온다. 이 모든 것이 민주주의가 낳은 새끼들이다.....“어떤 사람들은 삶에 대한 나의 가르침을 설교하면서 동시에 평등을 설교한다......나는 이런 평등의 설교자들과 혼동되고 싶지 않다. 내 안의 정의는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557. 자신의 자아에 복종할수 없는 자는 명령을 받는다. 이것이 살아 있는 것들의 존재방식이다......명령하는 것은 복종하는 것보다 어렵다. 대개 명령하는 자는 복종하는 모든 자의 짐을 감당해야 하고, 이 짐이 그를 짓누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모든 명령에는 노력과 위험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살아 있는 것은 명령할 때마다 자신을 건다.

 

558. 따라서 이상적인 사회는 세 계급으로 나뉜다. 즉 생산자(농부, 프롤레타리아, 사업가), 공무원(군인과 관리), 통치자다....철학자들은 최고의 인간이다. 그들은 용기와 힘만이 아니라 품위를 갖춘 사람들이다. 학자와 장군이 하나로 합해진 인물이다. 그들은 예의와 소속감으로 결합되어 있다.

 

9절 비판

 

559. 이것은 아름다운 시다. 어쩌면 철학이라기보다는 시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터무니 없는 점이 있다는 것, 이 사람이 자신을 설득하고 교정하려고 시도하면서 너무 멀리 나아갔다는 것을 안다.

 

560. “내 문체는 춤을 춘다.” 그는 말한다. 내 모든 문장은 창이다. 나의 언어는 유연하고, 힘차고, 예민하다. 이것은 검객의 문체로, 평범한 눈에는 너무 빠르고 너무 빛난다. 그러나 그를 다시 읽다보면 이런 반짝거림 가운데 일부는 과장에서 기인하고, 흥미롭기는 하지만 결국은 신경증적인 자기중심주의때문이고, 모든 개념을 너무 손쉽게 뒤집고 모든 미덕을 조롱하고 모든 악덕을 찬양하는 태도 탓임을 깨달을 것이다.

 

560. 결국 우리는 도덕에 우호적인 태도를 버리면 흥미를 끌기가 아주 쉽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런 교조적 주장, 이런 조절되지 않은 일반화, 이런 예언적 반복, 이런 부정-타인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은 균형을 잃고 광기의 언저리에서 맴도는 정신을 드러낸다.

 

561. 그는 단지 철학만, 시만 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 새로운 희망, 새로은 종교를 준다.

 

564. 니체의 책들 가운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비판에서 가장 안전하다. 한편으로는 모호하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 확고부동한 장점들이 온갖 흠잡기를 아주 잘아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565. 니체는 사회적 본능의 자리와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이기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충동들이 철학으로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565. 사랑을 탐색하다 좌절한 니체는 철학자답지 못한, 그리고 남자에게는 부자연스러운 원한에 사로잡혀 여자를 공격했다. 부모자식 관계를 놓치고 우정을 잃은 니체는 삶의 가장 좋은 순간들이 지배와 전쟁보다는 상호성과 동지애에서 온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567. 그는 현대 사상의 이정표로 서 있으며, 독일 산문의 산봉우리다....그는 수백년 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제도와 의견을 건강하게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성공했다.

 

567. 그는 신랄하게 말했지만, 거기에는 귀중한 진지함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정화하는 번개와 몰아치는 바람처럼 근대 정신의 구름과 거미줄을 뚫고 지나갔다. 유럽 철학의 공기는 니체의 글 덕분에 맑아지고 신선해졌다.

 

10절 피날레

 

568. “나는 자신을 넘어선 어떤 것을 창조하려다가 죽는 사람을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렇게 말했다.

 

10장 현대 유럽 철학자들

베르그송, 크로체, 버트런드 러셀

 

573. 베르그송은 인간의 가슴에서 영원히 솟아오르는 희망을 방어하러 나섰기 때문에 일찌감치 크나큰 인기를 얻었다. 사람들은 철학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도 불멸과 신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쁘고 감사했다. 베르그송의 강의실은 자신의 마음속의 욕망이 그런 박식한 웅변으로 뒷받침되는 것을 기뻐한 화려한 숙녀들의 살롱이 되었다.

 

1절 앙리 베르그송

 

1편 유물론에 대한 반발

 

575. 현대 철학사는 물리학과 심리학의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은 대상에서 시작되어, 마지막에는 일관성 유지를 위해 물질적 현상과 기계적 법칙의 테두리 안에 자신의 신비한 실재를 가두려 할 수도 있다. 또는 자신에서 시작하여, 논리적 필연성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밀려, 모든 것을 정신의 형식이자 창조물로 여길 수도 있다.

 

576. 그는 성실한 학생으로,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쓸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여 근대 과학에 경의를 표해Twlks, 곧 분석 능력을 바탕으로 모든 과학 뒤에 웅크리고 있는 형이상학적 문제와 대면했다. 결국 그는 자발적으로 철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576. 1914<창조적 진화>라는 책이 로마교황청 금서목록에 들어감으로써 그의 성공에 필요한 모든 준비가 갖춰졌다.

 

577. 베르그송은 스펜서를 공부할수록 유뮬론적 기계론의 류머티즘에 걸린 세가지 관절을 더 예리하게 의식했다. 물질과 생명사이의 관절, 육체와 정신 사이의 관절, 결정론과 자유의지 사이의 관절이었다.

 

2편 정신과 뇌

 

578. 우리의 생각이 공간과 관련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도 공간만큼이나 근본적이다. 또 생명의 본질을 지탱하는 것, 아마도 모든 현실의 본질을 지탱하는 것은 틀림없이 시간일것이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시간이 축적, 성장, 지속이라는 점이다.

 

579. “현실에서는 살아 있는 존재가 행동의 중심이 되며 세상으로 진입하는 우연성의 총합을 나타낸다. 즉 가능한 행동의 일정량을 나타낸다.” 인간은 수동적인 적응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방향이 바뀐 힘의 초점이며, 창조적 진화의 중심이다. 자유의지는 의식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안다는 뜻이다.

 

580. 인간의 경우 의식은 사슬을 끊는다. 인간은, 오로지 인간만이, 스스로 풀려난다. 따라서 정신은 뇌와 동일하지 않다. 의식은 뇌에 의존하고 뇌와 함께 죽지만, 외투에 걸어놓은 못이 빠지면 외투도 함께 떨어진다.

 

583. 생명은 이런 고체적 개념들을 피해간다. 생명은 공간의 문제라기 보다는 시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583. 생각과 지성 없이 어떻게 생명의 흐름과 본질을 포착할 것인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수동성이 아니라 행동이다.

 

584. 지성은 물질적이고 공간적인 세계, 생명과 정신의 물질적 측면이나 공간적 표현을 다루는 정상적 기능을 유지한다. 직관은 생명과 정신에 대한 직접적인 느낌, 그 외적 구현이 아니라 내적 존재의 느낌에 한정된다. ....나는 그저 우리가 수학과 물리학의 영역을 떠나 생명과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는 순수한 이해를 질러가고, 본능과 같은 생명의 충동에 기원을 둔 어떤 생명감각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585. 영이라고 말하면 숨이 떠오르고, 정신이라고 말하면 자가 떠오르고, 생각은 사물을 가리킨다.

 

585. 무의식의 가장 성스러운 깊은 곳을 탐사하고 의식의 표층 밑에서 노력하는 것, 이것이 열리는 세기의 심리학에 주어진 핵심 과제다. 그곳에서 놀라운 발견들이 심리학을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3편 창조적 진화

 

586, 본능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획득된 습관의 축적물을 물려받은 것이 본능이라고 생각하면 편리할 것이다....현재 유행하는 가설에 따르면 획득된 힘은 유전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본능의 출현과 유전은 기적이 된다.

 

588. 생명은 기계를 넘어선다. 생명은 성장할수 있고, 스스로 회복할 수 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주변환경을 어느 정도 형성할 수 있다.....생명은 매 단계마다 매체의 타성과 싸워야 한다. 재생산을 통해 죽음을 정복한다 해도 그 대가로 모든 요새를 내어주고, 마침내 모든 개별적인 몸을 타성과 쇠퇴에 내맡길 수밖에 없다.

 

590. 생명은 진화에서 세 갈래 길을 택한다. 첫 번째 길에서는 식물의 물질적 마비 상태에 빠져들어, 이따금씩 거기에서 무기력한 안정, 소심한 천 년의 삶을 발견했다. 두 번째 길에서는 정신과 노력이 개미나 벌의 경우처럼 본능으로 응결되었다.....본능은 여전히 현실을 그려보고 세계의 본질을 포착하는, 더 심오한 방식이다. 그러나 지성은 점점 강해지고 대담해지면서, 그 폭도 넓어진다. 마침내 생명은 지성에 관심과 희망을 두기 시작했다.

 

590. 이 생명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신이다. 신과 생명은 하나다. 그러나 이 신은 한정되어 있고, 전능하지 않다.-물질의 제한을 받고, 그 타성을 고통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극복해간다. 또 전능하지 않지만, 조금씩 지식과 의식을 향해, ‘더 많음 빛을 향해 더듬더듬 나아간다.

 

4편 비판

 

591. 베르그송은 말한다. “나는 철학에서 반박에 할애하는 시간은 대개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믿는다. 많은 사상가들이 서로를 겨누고 벌인 많은 공격 가운데 지금 남은 것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있다 해도, 자신 있게 말하는데, 아주 적다. 중요하게 여겨져 계속 남는 것은 각자가 기여하는 얼마 안되는 실증적 진실이다. 참인 진술은 저절로 그릇된 관념을 대체할 수 있으며, 굳이 누군가를 반박하지 않고도 최선의 반박이 될 수 있다.”

 

592. 우리가 비난했던 오루에서 더 많은 진실을 발견하며, 반대로 젊은 날의 영원한 진실에서 더 많은 오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592. 지성이 실재와 생명의 흐름이 아니라 상태만 포착한다고 생각한 것은 베르그송이 너무 나아간 것이다. 베르그송이 쓰기 전에 제임스가 보여주었듯이 사고는 이행하는 관념들의 흐름이다. ‘관념은 그저 사고의 흐름에서 기억이 선택하는 지점일 뿐이다. 정신의 흐름은 인식의 연속성과 생명의 운동을 적절하게 반영한다.

 

593. 인간은 본능에 의해 존재하지만, 지성에 의해 진보한다. 베르그송에게서 가장 훌륭한 점은 유물론적 기계론에 대한 공격이다.

 

594. 베르그송의 다윈주의 비판은 그의 생기론에서 나온다. 그는 라마르크가 수립한 프랑스 전통을 이어가며, 충동과 욕망이 진화에서 적극적인 힘이라고 본다. ...생명은 적극적 힘이며, 욕망을 끈질기게 유지하여 자신의 기관들을 구축하려는 노력이다.

 

595. 그는 쇼펜하우어를 뒤따라 주관적 세계만이 아니라 객관적 세계에서도 에너지를 주는 원리, 활동적인 엔텔레케이아를 찾으려 했으며, 이것이 생명의 기적과 미묘함을 더 알기 쉽게 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기론이 이렇게 강력하게 주장된 적도 없었고, 이렇게 매력적인 옷을 입는 적도 없었다.

 

595. 그러나 현대에 와서 철학에 기여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은 베르그송이다. 그는 파악하기 어려운 물질의 우연성과 정신의 창조적 활동을 강조했다. ....그러나 베르그송 이후 우리는 세계를 우리 자신의 독창적인 힘들의 무대이자 재료로 보게 되었다. 베르그송 이전에 우리는 거대한, 죽은 기계의 톱니와 바퀴였다. 이제 우리는 얼마든지 창조의 드라마에서 우리의 역할을 써나갈수 있다.

 

2절 베네데토 크로체

 

1편 인간

 

596. 크로체는 거의 독일적인 모호함을 재능으로 타고난 회의주의자다. 베르그송은 종교적인 정신의 소유자이면서도, 마치 철저한 진화론자처럼 말하낟. 반면 크로체는 미국의 헤겔주의자처럼 글을 쓰는 반교권주의자다.

 

596. 이탈리아는 르네상스가 일어난 땅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종교개혁은 없었다.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자멸이라도 하겠지만, 진리에 대해서는 빌라도처럼 회의적이 되는 것이다.

 

597. 이탈리아에서는 교양인이 교회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그래서 이탈리아는 낡은 신앙에 계속 의리를 지켰으며, 철학에서는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으로 만족했다.

 

597. 크로체는 카톨릭 신학 훈련을 철저하게 받는 바람에 결국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무신론자가 되었다.

 

598. 그는 평생 연구자로 살았고 글과 여가를 사랑했다.

 

599. 베네데토 크로체의 체계가 현대 사상에서 정복하기 가장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2편 정신의 철학

 

597. 그는 곧 인류의 정치적 불합리를 받아들였으며, 다시 철학의 제단에서 예배를 드렸다.

 

600. 그는 또 유물론이 어른을 위한 철학도 아니고, 심지어 과학의 방법도 아니라고 거부했다. 그에게는 정신이 일차적이고 궁극적인 현실이었다.....크로체는 관념론자였고, 헤겔 철학 이후로는 어떤 철학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현실은 관념이다. 우리는 감각이나 사고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그에게는 논리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

 

601. 크로체는 어떤 관념을 그 실천적 결과로 환원하여 정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반대로 실천적인 일들을 관념, 관계, 범부로 환원하는 쪽을 좋아한다.

 

601. 그는 종교를 거부한다. 그는 의지와 자유를 믿지만, 영혼의 불멸은 믿지 않는다. 미의 숭배와 교양 있는 삶이 그에게는 종교를 대신한다.

 

602. 그는 완벽하게 과학적인 역사라는 물신이 미시적 박학을 낳았고, 그 안에서 역사가는 너무 많이 아는 통에 진실을 놓친다고 믿는다.

 

3편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603. 크로체는 역사와 문학연구에서 철학으로 건너갔다. ....예술은 우리를 특수한 인간과 유일무이한 사실로 구체적 개별성이라는 형태로 직관된 철학적 보편성으로 곧바로 데려간다.

 

606. 이 모든 것이 명료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별 없는 밤과 같다. 마땅히 지혜로워야 하는 것 이상으로 지혜롭지 않다. <정신의 철학>에는 정신이 결여되어 있어, 공감 어린 설명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3절 버트런드 러셀

 

608. 1차세계대전 발발한 직후 그때, 이 마음 여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철학자는 가장 문명화된 대륙이 야만으로 타락하는 꼴을 지켜보며 충격 속에서 괴로워했다.

 

609. 그에게는 수학 외에 다른 신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고전을 좋아하지 않았다.

11장 현대 미국 철학자들

산타야나, 제임스, 듀이

 

621. 이 영혼은 마치 고대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이교도 학자와 같은 억양으로 말하면서 침착하고 탁월한 안목으로 우리의 작은 체계를 살피고, 아주 차분한 추론과 가장 완벽한 산문으로 우리의 새롭고도 낡은 꿈들을 박살냈다. 플라톤 이후 철학이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된 적은 없었다. 산타야나, 그의 말은 새로운 풍미, 섬세한 질감이 느껴지는 구절로 가득했고, 섬세한 통찰로 향기를 풍겼으며, 풍자적인 위트로 가시가 박혀 있었다.

 

머리말

 

624. 유럽이 아니라 이 땅에 뿌리내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태도, 관념, 이상은 토착적 형성물이다. 그들의 영혼은 보스턴이나 뉴욕이나 필라델피아나 리치먼드를 장식하는 가문들의 공상함에 물들이지도 않았고, 남부나 동부 유럽인의 격한 정렬에 물들이지도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원시적 환경과 과제에 의해 신체적으로는 억세고 정신적으로는 직접적이고 단순하게 빚어져 있다. 이것이 말도 아는 상식을 갖춘 미국이고, ‘실용적인 사람들의 미국이고, ‘냉정한 사업가들의 미국이다.

 

631. 자연이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시적이다. 그 말은 내가 사는 세계의 만들어 내고 통제하는 기능, 끝없는 활력, 변화무쌍한 질서를 충분히 암시한다.

 

636. 종교는 인간의 상상력으로 해석된 인간경험이다. 종교에 진리와 생명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다.

 

643. 혁명은 모호한 것이다. 혁명의 성공은 일반적으로 적응 능력, 그들 내부에서 그들이 맞서 싸우는 것을 다시 흡수하는 능력에 비례한다. 수많은 개혁이 있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부패한 상태다. 각각의 성공적 개혁은 새로운 제도를 건설했고, 이런 제도는 자기에게 맞는 새로운 남용을 낳았기 때문이다.

 

2절 윌리엄 제임스

 

652. 진리는 과정이며, “하나의 관념에서 발생한다.” 참은 증명이다. 실용주의는 하나의 관념이 어디에서 왔으며 그 전제가 무엇인지를 묻는 대신 그 결과를 살핀다. 실용주의는 강조점을 옮겨서 앞을 본다.”

 

656. 우주는 일원적 세계가 아니라 다원적 세계임이 애처로울 정도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658. 그는 인간을 낫게 만들려는 수많은 노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늘 누군가를 돕고 용기를 불어넣어 사람들을 고양시켰다. 그는 모든 개인에게 환경이 적절한 산파 노릇을 하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비축 에너지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늘 개인을 향해서나 사회를 향해서나 이 자원을 완전히 이용하자고 호소했다.

 

660. “결론은 없다. 우리가 그와 관련하여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고 누가 결론을 내려주었는가? 점을 쳐줄 것도 없고 조언 해줄 것도 없다. 안녕.”

 

3절 존 듀이

 

662. 이제 유럽과 미국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이 산업화에 말려들어간 상황에서 우리는 책보다는 직업을 통해 배워야 한다. 학자적인 문화는 속물근성으로 향하지만, 직업 내의 동료애는 민주주의를 향한다. 산업 사회에서 학교는 축소판 작업장이자 축소판 공동체다. 학교는 실습과 시행착오를 통해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질서에 필요한 기술과 분야를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육은 성숙에 대비할 뿐 아니라 (여기에서 사춘기 뒤에는 교육이 끝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나온다) 정신의 지속적인 성장과 삶의 지속적인 해명으로 다시 설정되어야 한다.

 

666. 나쁜 사람이란 전에 아무리 좋았다 해도 이제 나빠지기 시작하는 사람, 덜 좋아지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란 전에 아무리 도덕적으로 가치가 없었다 해도 지금 좋아지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다.

 

671. 영국이 세워지고 나서 세익스피어가 나오기까지 800년이 필요했고, 프랑스가 세워지고 나서 몽테뉴가 나오기까지 800년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나라는 과연 언제 나올까? 내가 젊었더라면 철학을 전공하고 싶을 정도다.

 

3. 내가 저자라면

 

보완이 필요한점

1. 각주를 제일 뒷장에 했다. 궁금하면 뒤에 가서 들춰봐야 한다. 바로 밑에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하는 걸까.

 

2. 저자 스스로도 이 책에 유머라는 양념을 뿌리려고 노력했다고 했다(p.14).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철학자들과 연관된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어 좋기는 했다. 그래도 책을 보면 알겠지만 오로지 글자만 있다. 철학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재미있게 풀어내고 싶었다면 여기에 그림이 들어가야 되는 건 상식이다.

각 철학자에 대한 사진이라도 넣겠다. 대표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엄청 못생긴 얼굴이라 얘기하는데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상상해야 한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소크라테스의 조각상은 유명하다. 이런 사진을 첨부한다면 독자의 읽는 즐거움이 증가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3. 플라톤의 경우 <대화>라는 35편의 책에서 나온 그의 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표현한다. 먼저 자기의 생각을 얘기하고 플라톤의 원문을 보여주는 식이다. 차라리 먼저 원문을 보여주고 거기에 대한 해석을 해주면 이해가 쉬웠을 것이다. 읽으면서 플라톤이 이렇게 얘기했나. 어떻게 얘기했지 하고 궁금증이 많이 유발되었다.

 

4. 철학자들의 사생활에 대해 특히 부인과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물론 자료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는 어쩌면 그렇게 위대한 철학자들의 부인과 자식들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하는 부분이 많다.

 

 

이 책의 장점

철학사 정리나 정보전달에 만족하지 않고, 철학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재현해 놓은 바탕 위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전하려 했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1. 저자는 생각을 적을때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았다. 글을 읽는 내내 집중을 잃지 않게 해주었다. 철학자들이 글을 적을때 꼭 어렵게 적는 속성이 있다.

p. 70. 하지만 쉰 살의 남자들이 어떻게 유연한 지성을 가질 수 있을까? 반복되는 일과로 정신에 깁스를 하게 되지 않을까?(번역자의 위트인가?)

 

2. 독자들이 궁금해 할수 있는 부분들을 콕 찍어서 질문하고 답해준다.

 

p.73. 하지만 그들의 부인들은 이 모든 일을 두고 무슨 말을 할까? 부인들 또한 사치스러운 생활과 아낌없는 물자 소비를 포기하고도 만족할까? 그러나 수호자에게는 부인이 없다.

 

3. 철학자들의 생애, 사상을 소개하면서 마지막에 그에 대한 비판과 문제점을 잊지 않는다. 나쁜 뜻은 아니다.

 

4. 철학가들에게 숨겨진 뒷 이야기를 들려준다.

.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싸움(p.94)

. 재미를 얻으려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갔다가 재미가 없어서 돈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걸게 될 것이다.(p.102)-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보다는 과학에 집중해서 따분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시작(내생각)

 

5. 저자의 뛰어난 표현력

p. 105.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대상을 그 부류라는 바다에 떨어뜨린 다음 다시 끄집어내는데, 그러면 대상에서는 공통의 의미, 같은 종류와 집단의 표시가 몸에서 물방울처럼 뚝뚝 떨어진다. 동시에 그 개별성과 차이는 이 대상과 무척 닮았으면서도 동시에 무척이나 차이가 나는 다른 대상들과 함께 놓여 있기에 한층 분명하게 반짝인다.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문명이야기는 1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철학 이야기는 왜 1권일까? 물론 어려운 내용이었고 이해안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읽는 내내 저자의 노력과 탁월한 식견을 볼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철학자도 여럿이고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물론 저자의 판단이겠지만 내가 저자라면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는 다 포함시켰으면 물론이고 우리 동양 철학자까지 포함해서 작성을 해보고 싶다. 이를테면 서양(유럽, 미국), 동양편으로 구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철학자간 대립되는 주장이 많았고 서로를 비난하고 반박하는 것들이 많이 나왔다. 그것 또한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주는 것이므로 중간 중간에 서로 대립되는 철학가들의 에피소드를 넣어 주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플라톤 vs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맹자 vs 순자이런 식으로 추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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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3 20:42:40 *.18.218.234

기상씨 북리뷰 보면, 각잡고 앉아 정주행 하며 읽는 모습이 연상되어 훔쳐 보게 됨.

이번 주도 꼼꼼한 북리뷰 잘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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