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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gum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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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4일 10시 5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삼국유사><삼국사기>에 대해 제대로 몰랐다. 사마천의 <사기>는 읽어보았지만 정작 우리나라 것에는 인색했다. 왜 그랬을까? 사실 이런 책들이 있는 줄을 알지 못했다.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책을 읽었다.

 

고운기

 

61년생이니까 57세이다. 특이한건 시인이자 국문학자이다. 당연히 역사책이니 역사학자라는 편견을 깨주었다. 하긴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출생이며,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하였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석·박사 과정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 방문 연구원(1999~20028),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2004), 일본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객원교수(20074~20083)를 거쳐 2015년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 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월인, 2001), 일연을 묻는다(미래인, 2006), 길 위의 삼국유사(현암사, 2006),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현암사, 2005)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현암사, 2011) 삼국 유사 글쓰기 감각(현암사, 2015) 그가 그간 출판 책들 중의 일부이다. 물론 다른 책들도 있지만 삼국유사를 기본으로 쓴 책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삼국유사>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저자 고운기는 "시 한 편으로 시작한 짝사랑"으로 삼국유사를 가슴에 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시인이 어떤 계기가 있었으니까 삼국유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 시는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홀연히 들리는 노 젓는 소리, 깜짝 놀라 멀리 나네

어느 곳 고깃배인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

 

이 시는 372년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가 처음으로, 이어서 374년 진()의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이야기를 적고 난 다음 쓴 것이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시는 그러나 많은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시인이기도 한 고운기 교수는 <삼국유사> 속의 이 시 한 편으로 단박에 삼국유사와 일연에게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는 "<삼국유사>에는 삶이 있고 현장이 있다. 고대인의 숨결까지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삶의 현장, 그것이 <삼국유사>가 가진 최고의 미덕이다. 나는 <삼국유사>를 밭에서 방금 캐낸 야채로 비유한다. <삼국사기>의 그것을 통조림이라 비유하는 것과 대조해서 말이다. 해석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제공해 주는 이야기는 마치 방금 캐낸 야채로 무엇이든 요리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아니면 라이브 무대의 가수로 비유한다"고 적고 있다.

 

사진작가 양진

그의 공식적인 직업은 웹 컨설턴트다. 관람객 수 1,200만 명을 넘어선 영화 <왕의 남자>의 공식 홈페이지를 비롯해 <질투는 나의 힘>, <영어완전정복>, <우리 형>, <아는 여자>, <연애의 목적> 등 유쾌발랄한 홈페이지가 모두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비공식적직업은 사진작가이다.

삼국유사라는 한 가지 주제로 15년 넘게 사진을 찍어왔지만, 양진 씨는 굳이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내세우지 않는다. 대학에서도 금속공학을 전공했고 현재 직업이나 전공만 본다면 그런 호칭이 낯설기는 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사진부에서 활동했다. 연세대에 입학해서도 사진동아리 연영회에 가입해 민속·전통 문화 관련 사진을 찍어 왔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유적지를 찾아 전국을 누비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91년부터 학교 선배인 고운기 씨와 함께 삼국유사의 현장을 답사하고 사진을 찍은 결과물이 얼마 전 단행본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현암사)로 묶여 나왔다. 고운기 씨의 글에, 양진 씨의 사진 400여 장이 고루 스며들어 있다. 그의 사진이 한층 생생해 보이는 건 계절감이 잘 녹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밤새 내린 폭설에 덮여 거대한 눈 언덕으로 변신한 경주 대릉원, 팝콘 같은 벽오동 꽃이 우수수 떨어진 울산 망해사 터, 노란 벼이삭 속에 파묻혀 살짝 머리만 내민 경주 보문동 절터, 이슬 먹은 가을 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경주 사천왕사 터.

이런 풍경은 시간과 예산에 쫓겨 가며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급히 찍은 사진에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다. 오랜 시간 발품을 팔아, 꾸준히 유적지를 찾는 끈기가 이 사진들을 만들었다. 심지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진표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변산의 불사의암 터를 찍을 때는, 마음에 드는 장면을 얻기 위해 다섯 차례나 험난한 산을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무턱대고 자주 찍으러 간다고 좋은 사진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양진 씨는 되도록 여름을 제외한 계절에 사진을 찍는다. 5월부터는 여름이 다 갈 때까지는 신록이 우거져 풍경에 별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를 잘 만나는 일이다. 여기에는 운도 따라야 하지만, 과학적인 날씨 분석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가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기상청의 일기도이다. 그래도 그 많은 시간 동안 꾸준히 찍는다는 것에서 그의 열정을 볼 수 있다. 경주에 살지만 어쩌면 나보다 더 경주에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은 곳을 가본 그 일 것이다. 덕분에 좋은 사진을 보고 있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들어온 문장

 

머리말

 

1.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나는 <삼국유사>를 맴돌았다. ....... 이제 다시 내가 고쳐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오랜 모색속에서도 여전 막막하다.

 

1. 나는 <삼국유사>를 방금 따낸 과일이나 방금 캐낸 채소에다 비유해 본 적이 있다. <삼국사기>가 사대주의라는 방부제를 친 통조림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들어가며

 

2. 사실 두 책은 우위를 가리는 일이 부질없는 만큼 절대적 권위와 가치가 있다. 그런데도 언제부터인가 한 쪽으로 몰아가는 분위기. 곧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책이 <삼국사기>라고 말한 선학의 명쾌한 자리 매김을 지나치게 해석하여, 무게 중심이 <삼국유사>쪽으로 치우친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2. <삼국사기>이고, <삼국유사>라는 사실은 중학교에 올라와서 틀리는 문제였다.

이런 것이 시험문제 나왔던 적이 있었나? 어찌됐든 나도 오늘 처음 알았네. 삼국유사의 사가 가 아니라 인지는. 삼국유사의 유사라는 말은 유문일사(遺聞逸事)라는 말의 준말이다. 이는 정사에 빠진 이야기나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일사 逸事)일이나 풍문으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유문 遺聞)을 정리한 책이란 뜻이다. 즉 삼국시대의 여러 이야기와 풍문을 적은 책이란 것이죠. 그래서 다른 말로 하면 야사인 것이다. 반면 삼국사기는 한나라 무제 때 사마천 지은 정사 사기史記의 형식(기년체)으로 지어진 삼국에 대한 국가차원의 역사서라는 뜻이다. 즉 삼국의 사기, 삼국의 역사를 기년체로 정리한 역사책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史記라는 말을 그대로 쓴 것이라고 한다.

 

3. 고려 초부터 이 시기 지식인들은 우리 고대사를 정리하는 역사서의 편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는 문자 생활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 문자에 대한 자신감, 이는 저술을 감발시키는 촉진제다.

 

4.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 다음, 그 앞 시대를 정리한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에서 보편화되어 있었다. .... 사마천의 <사기>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름마저 거기에 기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고려 인종 23(1145)의 일이다.

 

4. 그러니 이념의 틀은 우리에게서 다시 만들어져야 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4. 송으로 이어지면 높아질 대로 높아진 漢族(한족)의 자존심을 일거에 무너뜨린 이 일은, 그렇지 않아도 우리 중심의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해 보려던 고려의 정권 담당자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암시를 함께 주었다.

 

4. 세계관의 변화는 곧 역사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삼국사기>의 역사기술은 이쯤 와서 힘을 잃게 된다.

 

4. <삼국유사> 탄생의 배경은 아무래도 이 두가지 당대의 세계사적 사건으로 잡아야 할 것 같다. 1206년에 태어나 13세기를 온전히 살다간 일연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시대의 변화를 겪었던 사람이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그가 승려였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이었다. 유학을 기본으로 하는 선비들이야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고 한들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 주는 데 반해, 승려들은 처음부터 중국 중심에 서 있지 않으므로 보다 빨리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신라 말부터 유입된 선종은 사고의 혁신을 불교 안에서 먼저 이루어 사회로 퍼져나가게 했다.

이래 저래 불교는 우리나라와 뗄레야 뗄수 없는 한 부분이기도 하다.

 

5.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련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책을 들자면 <삼국사기>를 젖혀놓기 힘들다. ..... 삼국의 고대사를 보여 주는 데에 <삼국사기>가 지닌 강점과 맹점을 누구보다 일연 자신이 깊이 간파하고 있었다.

 

6. 단군 신화가 처음으로 문서상에 기록되었다는 데에 더 이상 강조할 필요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8. 조선 후기에 실학자인 한치윤은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심히 괴탄하여 믿지 못할 바라 하였고, 그 이후 그나마 인용하거나 거론하는 일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9. 이 책을 쓰면서 내가 유념한 몇 가지 점을 미리 밝혀 둔다. 첫째, 본문을 읽어나가며 설명하는 방식이다. <삼국유사>를 읽으려 해도 앞뒤 배경을 모르니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는 그 배경을 설명해 주되, ‘내가 만일 <삼국유사>를 썼다면 이런식으로 했을 것이라는 기분으로, 어디까지나 본문의 이해와 전달을 위주로 하였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뜻인데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면 힘들텐데

 

10. 셋째, 배경을 설명하면서 앞은 <삼국사기>와 면밀히 비교해 보았고, 뒤는 승전 등을 많이 참고하였다. 그동안 <삼국유사>를 연구한 여러 선학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한편,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를 많이 참고했거니와, 여기에는 일본에서 정리해 놓은 여러 자료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10. 넷째, <삼국유사>1290년경 일연에 의해 쓰여졌고, 곧이어 그의 제자들에 의해 출판된 것으로 보인다. ... 그의 생애와 저술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삼국유사> 본체를 이해하는 데 요긴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의 생애와 관련된 사실을 군데군데 설명하였다. <삼국유사>는 분명 10세기까지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나, 13세기의 일연이라는 인물에 의해 재구성되었다는 점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

 

10. 여기에 기술된 내용들에는 아직 학문적으로 검증되지 않았거나, 내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가미한 부분들이 있다. 사실 그것들은 앞으로 획기적인 발굴이나 자료의 출현 없이는 학문적으로 어떻게 더 나갈수 없는 난처들이다.

 

이 땅의 첫 나라

 

11. 단군신화를 실었다는 것 그 하나로 일연의 <삼국유사>는 특별한 대우를 받아 왔다. 애써 이 시기를 눈감아버린 <삼국사기>의 태도와 견주어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삼국유사>의 다른 곳이 아닌 그 책의 첫 머리에 단군 신화를 실었다는 점으로 더욱 호들갑을 떨고 싶다.

 

11. 이야기가 책의 어느 한 구석에 밀려 있다면 첫머리에 실린 것과 의미가 다르다.

하긴 제일 중요한 내용을 앞에다 기술하는 것이긴 하다.

 

11-12. 일연이 살았던 13세기의 사람들이야말로, 그 샘과 뿌리를 단군이라고 본 아마도 첫 세대였던가 한다.

 

12. 10세기부터의 고려사회는 중국적 유교 사관으로 무장한 김부식과 같은 지식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 나갔다. ...... <삼국사기>의 첫머리에 단군은 실리지 못했고, ...... 크나큰 나라 몽고와 20여 년에 걸친 전쟁도 겪었다. 곤고(困苦)한 세월이었다.

 

12. 그 쓰디쓴 경험이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꾼 것일까? 그렇다면 값비싼 희생을 치렀지만 귀중한 결과물을 얻은 셈이다. 승려 출신의 일연 같은 이가 <삼국사기>와는 다른 책을 편찬하겠다고 나선 것이 그 결과물의 하나였다.

 

12. 늘 큰 나라가 만든 규범을 좇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높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상징이 자리잡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예시라도 들어주지

 

12. 한편 비애스러운 그러나 풍부한 이야기의 세계가 거기서 만들어진다. 상징으로 그리는 역사를 옳게 읽자면 독자는 상상력을 써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다른 한편 즐겁기도 하다.

 

13. 단군신화는 <삼국유사>를 가치 있게 만든, 그래서 그 저자인 일연을 일약 민족주의 사학자로 만든 데서 그 의미가 끝나지 않는다. 상징의 체계로 들여다 볼 때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즐거운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오롯이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다.

 

14. 여기 <위서><삼국지><위지>는 아닌 듯하다..... 사실상 본토인 북쪽을 오랑캐인 516국의 숱한 왕조 교체속에서 통일시킨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그 책이다.

 

16. 우리 민족이 곰으로 상징되고, 어디서든 곰 비슷한 것만 나오면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신화는 아무 의미없이 동물이나 상징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곰과 호랑이가 나온다는 것은 다 하나하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저자도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프로의 자세.

 

17. 우리네 민간 신앙에서 3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데서 자주 쓰이고, 꺼린다는 것은 민간 신앙적 의식에서 특별히 조심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17. 여기서 곰과 호랑이가 단순한 동물이 아닌, 그것들로 상징되는 어느 부족이라는 인류학적 해석이 덧붙여진다.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고자 각고면려(刻苦勉勵)한 곰 부족에게서 새로운 인물이 나온다. 그가 바로 단군이다.

 

18. 곰은 뜻한 바 목적을 달성했다. .... 재미있게도 곰이 세운 치밀한 계획에 환웅이 한 발 한 발 말려들더니, 드디어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곰은 여자가 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최후의 주인공 단군의 출생까지 커다란 각본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것을 움직여 나간 주체는 바로 어머니 곰이다.

 

18.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의 왕으로 보냈다.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겨 가고,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1908세를 살았다.

이때도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난 것이다. 안타깝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이제 이런 민족주의에 대해 다시 살펴보려한다. 얼굴과 피부색, 속해 있는 나라가 달라서 그렇지 같은 사피엔스인데 뭐 이런 사소한 것에 감정을 들쑤실 필요가 있을까.

 

19. 사실 건국 연대보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이 땅에 세워진 첫 나라의 이름이요, 이후 우리 역사에서 이만큼 자주 국호로 애용된 이름이 없다.

 

20. 그런데 일연은 기자가 다스린 조선이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거니와, 아예 기자조선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단군조선 이후 곧바로 위만조선으로 넘어가 버린다. 여기에 <삼국유사> 첫 부분을 제대로 읽는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다.

 

21. 단군신화는 창세신화인가 건국신화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군 신화는 건국 신화다. 이 땅에서 첫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21. 처음 환웅이 신단수에 내려왔을 때 그 곳에는 이미 사람 사는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을 묶어 나라를 이룩하고 다스리는 제도가 없었을 뿐이다. ...... 단군은 곧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더러 단군의 자손도 있겠지만, 그 때 이미 한반도에 살고 있다가 단군을 왕으로 모신,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자손이다.

 

22. 그들을 제어하는 힘은 하늘에서 나온다고 믿어, 하늘의 힘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던가를 설명하면 그만이다. 단군 신화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22. 일연의 단군에 대한 관심은 신화로서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단군조선위만조선 등의 존재를 무시하고서, 이 땅에 생겨나고 없어진 나라들을 온전히 설명 할 수 없다.

 

22. 사실 <삼국사기>는 한반도에 살았던 지식인층이 중국으로부터 문자와 그와 관련된 여러 문화를 전수 받은 다음, 이제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했음을 보여 주는 책이다.

 

22. <삼국사기>는 체제나 내용에서 그렇게 세련되게 나왔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다음 모든 자료를 없애 버렸다는 김부식의 행동 저 편에는 이 같은 의식이 잠재해있었을 것이다.

 

23. 모방이 창조의 원동력이라고는 하나 지나치면 부작용이 따른다. 한껏 폼을 내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라는 명약이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과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바이러스로도 기능할 줄은 아마도 그 찬술자들조차 몰랐던 것 같다.

 

23. 일연은 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발견했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24. <삼국사기>가 나온 12세기 중반과 <삼국유사>13세기 후반까지는 150여 년의 사이가 있다. 그러나 실로 고려의 역사에서 이 150년은 그 이상의 현력한 차이를 보여 준다. 단군조선의 수록 여부는 그 시대 상황의 차이에서도 갈렸다.

 

24. 고려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을 겪었다. 첫째는 무신 정권의 성립이고, 둘째는 몽고와의 전쟁이다. 대내외적으로 같은 시기에 겪은 이 사건은 고려 사회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데, 무엇보다 기존에 세워졌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자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24.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는 힘을 잃는 대신,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삼국유사>는 그 변화의 끄트머리에 자리잡는다.

 

25. 이 같은 분위기가 일연으로 하여금 우리 역사의 더 먼 곳에 관심을 갖게 했고, 거기서 단군이 발견되었음은 당연하다. 단군의 발견과 그 기록은 일연이 지닌 선각적 혜안만으로 이루어질 성질의 일은 아니었다.

 

29. 위만이 조선출신의 연나라 사람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34. 사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실은 일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36. 한반도가 다시 삼국으로 정립되기까지 있었던 여러 작은 나라들을 소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37. 먼저 북방계의 흐름이다. 이 계통은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로 흘러간다. 물론 최후에는 고구려와 백제로 정리된다.

 

37. 흥미로운 것은 인용한 <고기>가 다시 <전한서>를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이중의 인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러나 우리는 <전한서>에서도 앞서 고조선이 <위서>처럼 이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연대만 원용한다는 것이 본문까지 이어져, 마치 본문을 인용한 것처럼 된 것일까? <고기>가 어떤 신빙성을 중국 쪽 역사서에 기대려 나온 해프닝일까?

설마 거짓 근거를 기준으로 작성하지는 않았겠지

 

43. “여러 동생들과 나와 노닐 때에 한 남자가 자신은 하늘님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라 한 데서, ‘하느님의 아들은 그냥 하늘님이라 했어야 했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부분일까? 하늘님과 하늘님의 아들?

 

43. 주몽은 하늘님으로 이어지는 부계의 신이한 존재로서 모계를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43. 그러나 이런 난생신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첫 출발의 의미를 문학적으로까지 보이게 하는 이 표현은 곧 그 옛날 왕을 맞이하는 어떤 의식과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

 

44.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45. 일연은 백제의 출발을 변한과의 관련성을 따져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최치원이 변한은 백제다고 한 데서 촉발된 듯하다.

 

46. <삼국유사>가 신라 중심의 기술을 했다는 주장은 이런 점을 보아서도 분명하다.

그래도 객관적으로 썼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자료가 많이 남아서 일 수도 있겠지만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고구려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신라가 중심이다.

 

54. 신라 건국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삼국사기>와 일연은 처음부터 충돌한다. ..... 그러나 <삼국사기>가 여섯 부족을 조선의 유민이라 한 데 반해 일연은 여섯 부족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56.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남쪽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을 말하는 일연의 의도란 곧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자는 데 있지 않을까?

 

59. 사내아이는 알에서 생겼는데 알이 표주박과 같아, 마을 사람들이 표주박을 박()이라고 한 데 다라, 성을 박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의 모든 이름은 그 어원이 있을 것이다. 나는 김()가이다. ,금 혹은 김 . 김씨 성은 금속을 만들수 있게 되면서 만들어졌다고 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제주나 내가 살고 있는 경주의 지명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하나씩 궁금해하면서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할 듯

 

59. 신라는 삼국시대를 열었던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다.

 

61. 서로 연결된 것처럼 자리잡은 다섯 개의 능을 아름드리 나무들이 빙 둘러 감싸고 있다. 혁거세왕과 알영부인 이외에도 신라의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바사왕도 여기에 묻혔다고 전해온다.

나는 경주에 살면서 오릉이 누구의 무덤인지 몰랐는데 오늘에야 알았네. 오릉에는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능이 누구의 무덤인지 나오지 않는다. 사실 경주에 능이 많은데 누구의 능인지 어떻게 아는지에 대해 항상 궁금함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구전이 전부일 건데 이렇게 이건 누구의 능인지를 아는게 신기하다.

 

62. 고구려 동명왕이 그보다 20년 뒤진 기원전 37, 백제의 온조왕은 40년 뒤진 기원전 18년에 출발하였다. 중국의 한나라 때였다.

 

62. 일연은 혁거세의 최후를, “나라를 다스린지 61년만에 하늘로 올라가고, 7일 뒤 몸만 남아 땅으로 흩어 떨어졌다. 왕후 또한 죽자 사람들이 합하여 장례를 치르려 하였다. 그런데 큰 뱀이 나타나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몸뚱이를 다섯으로 나누어 각각 묻고 오릉으로 만들고, 또한 사릉(蛇陵)이라 이름지었다. 담엄사의 북쪽 능이 이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경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언젠가 경주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는데 많은 도움이될 것 같다.

 

63. “솔개를 따라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어라라고 하였다. 사소는 편지를 받고 솔개를 놓아주자, 이 산에 날아와 멈추었다. 그대로 따라와 집을 짓고, 이 땅의 신선이 되었기에, 이름을 서연산이라 했다. 서연산은 선도산의 다른 이름이다. 이 산은 지금 경주 서쪽에 자리잡은, 높이가 380m로 나지막하지만, 예로부터 경주의 진산이요 사람들에게 신성한 곳으로 불리었다.

내가 등산해 본 산인데 이런 전설이 있었다니. 늘 궁금해 했었다. 내가 사는 경주의 지명, 전설에 대해. 이제 이 책이 나를 이 길로 안내해주네.

 

66. 지리산 승모천왕 전승은 무당이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알려 주는 이야기다. 이를 무조신화라 한다.

 

68. 무당의 탄생 내력을 담은 이야기는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와 사촌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데에서 연유한다. 삼국의 건국신화 가운데 신라 쪽이 유독 무조신화나, 민간 전승의 신모 신화에 가까운 것은 왕실의 성격이 곧 거기에 기반을 두었다는 강한 증거다.

 

68. 경주의 선도산은 지금도 민간에서 성스러운 진산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마애삼존불이 바라보는 산 아래로는 태종무열왕릉 등 크고 작은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다.

여기서 나도 경주 시내를 둘러보았다. 진산은 진산이라 생각했다. 아직도 그 풍광이 머릿속에 있다.

 

69. “서라벌(徐羅伐) 또 서벌(徐伐)이라 하였고, 어떤 이는 사라(斯羅) 또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서벌이 나중에 서울로 바뀌어 나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70. 촌놈에서 출발해 왕의 사위에 이어 왕까지 된 신라 드림의 원조다.

 

70. 탈해는 무척 복잡하고 신비한 인간이다. ...... 물론 밑바닥에서 시작한 인생이 평탄할 수 만은 있겠는가?

 

72. 박씨에 의해 대가 이어지는 초기 신라 왕실에서, 갑자기 벗어나 탈해를 왕으로 세워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관한 이야기의 이면에서 우리는 아직 안정되지 못한 신라 왕실의 고민과, 한 인간이 가진 본연의 욕망의 그림자를 읽게 된다. 온갖 신격화로 치장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거둬내면 더욱 그렇다.

 

72. 노례왕은 못내 그 자리가 불편한 표정이다. 그것은 자신의 매부인 탈해 때문이다. 어느 모로 보나 자신보다 낫다는 생각에다. 매부에게 왕위가 간다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았던 듯하다. ..... 여기서 저 유명한, 떡을 물어 치아의 숫자를 세 보는 사건이 벌어졌다.

 

72. 무릇 덕 있는 자는 이()가 많으니, 마땅히 이를 가지고 시험에 봅시다하고, 떡을 물어 살펴보았다. 노례왕의 이가 많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닛금이라 부르는 것이 이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72 왕은 아들과 사위를 불러 나이순으로 왕을 하라고 일렀었다. 나이로 치자면 탈해가 더 위다. 그런데 탈해가 먼저 기이한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탈해는 왕의 자리에 욕심이 없었다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았으리라. 사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시대는 사위가 왕도 가능했구나. 옛날 짧은 수명 때문에 먼저 양보를 했으나 이것이 그렇게 오래 갈줄은 탈해도 몰랐을 것이다.

 

74. 왕의 사위까지 되었지만, 탈해로서는 서라벌이 아직도 남의 동네다. 뭔가 자신의 기반을 확실히 닦은 다음 굳건한 위치에서 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76. 용성국은 어디일까? ...... 어쨌건 일본이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탈해는 일본 출신인가? 이것도 의문으로 남겨두자.

역사란 그런 것이다. 불충분한 증거와 부정확한 시선의 결과물이다.

 

78. 이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우리는 탈해의 인간성을 그다지 탐탁하게 볼수 없다.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

 

78. 한편 탈해가 호공에게 우리 집이 본디 대장간을 했다.”는 말을 가지고 풀어본다면, 탈해의 출신지가 야철술 곧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한 곳이고, 선진된 문물을 가진 이 집단이 신라 중심지로 이동했다는 증거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79. 이런저런 일이 겹치자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큰 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는데, 이 사람이 아니부인이다.

 

82. 어쨌든 탈해는 왕위에 오른다. ..... 왕위에 오를 뻔하다 34년을 기다린 끝의 일이다.

그래도 어쨌든 기다리긴 하네. 반란을 일으키다가 뻔한 스토리는 가질 않네.

 

83. 탈해가 일본과 우호조약을 맺는 것은 그들로부터 침략의 위협을 해소하고 자신의 후원자를 얻는 이중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

 

83. 탈해를 더욱 초조하게 만든 것은 김알지의 출현이었다.

 

86. 구름 속에 황금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궤짝에서는 빛이 새어나왔다. 또한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우는 것이었다. .... 마치 혁거세의 옛일과 같았다. 그래서 알지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알지는 이 지방말로 어린 아이를 가리킨다.

 

86. 결국 그가 잠시 탈해에 의해 끊어진 박씨 계열을 이어나가는 적통자로 본다는 것일가? 알지가 성을 김으로 삼았다지만 성이 무언가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90. 히미코가 한반도에서 건너가 가야 지방의 미오야마국을 이어 일본에 야마일국을 세운 여왕이라고 설명하였다.

 

91. 오래도록 남성에 복종하며 살아온 일본의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찾고 자기의 삶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데, 그들이 내세우는 상징적인 인물이 여왕 히미코라는 것이다.

 

91. 1993년 일본을 방문한 불가리아의 어떤 여성 초능력 치료사가 히미코의 조상은 한반도에서 건너왔다.”고 하였다. 이씨는 이 말에 상당한 흥미와 매력을 느낀 듯하다.

이 얘기는 하지 않는게 더 나을 뻔 했다.

 

91. 즐거운 상상력에 민족적 쇼비니즘이 끼어들면 곤란하다.

 

92.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 있는 역사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

 

94. 일본에 가서 자리잡은 세오녀는 히미코가 되어, 금의환향하듯 자랑스레 본국에 사람을 보냈다고 추정할 만하다.

 

95. 일연은 삼국의 역사적 사실을 쓰면서 <삼국사기>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자신이 조사한 부분이 일부 첨가되기는 한다. 그런데 연오랑 세오녀의 이야기에 와서 처음으로 일연은 <삼국사기>를 떠나 독자적인 길을 가고 있는데, 매우 자신만만한 태도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96. 승려 생활을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운수행각이라고 한다.

 

96. 그런데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일 하나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승려라 해서 불교적인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미 앞서 단군 신화의 경우와, 앞으로 소개할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오늘날의 민속학자가 따로 없다.

그러나 그가 왜 역사에 관심을 가졌고 이런 일을 했을까? 비교적 성공적인 승려로서 자리를 잡을수 있었는데. 아무튼 그 덕분에 우리는 재미있는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

 

96. 일연이 영일에서 가까운 오어사라는 자그마한 절에 찾아든 것은 그의 나이 환갑을 바라보던 때였다. ..... 영일은 한자어로 뜻을 풀었을 때 해를 맞는 고장이다.

내가 가본 곳이 이렇게 하나씩 나오니 재미있다. 오어사역시 모든 절이 그러하듯이 풍경이 너무 좋다. 오어사 뒤쪽에는 기암절벽이 있는데 우스개 소리로 포항의 장가계라 얘기한다.

 

97. 무당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은 해와 달과 별 곧 일월성신이다.

 

98. 해병부대 안에은 연오가 보낸 비단을 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일월지라는 연못이 있는데, 출입을 하려면 일주일 전에 부대에 신청을 한 다음 보안검열에서 통과해야 된다.

그 연못 주변을 거의 매일 조깅을 했는데 감회가 새롭다.

 

98. 신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을 해와 달로 볼 수 있는 그 정령이었다.

 

100. 정령을 잃은 사람은 눈 뜬 소경과 같다. 사회도 그렇다. 일연이 강조한 것은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100. 신라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유독 토착 신앙에 강했다는 말을 우리는 상식적으로 한다.

 

100. 그들이 7세기 들어 자기들의 나라 이름을 왜()에서 일본으로 고친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101. <삼국유사>에 나오는 도기야(都祈野)’와 비슷한 윗도구’, ‘아랫도구같은 지명이 일월동에 남아 있다. 도구해수욕장도 그 중 하나다.

우리부대 앞에 위치해 있다. 훈련도 많이 한 장소인데.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하나는 배웠다. 우리나라의 지명은 그냥 있는게 아니라는 것.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103. 말소리까지 들어도 잘 구분되지 않는 사람은 한국인과 일본인이다.

그런 말이 싫어도 외국인에게는 그런 것인가 보다.

 

106. 왜의 잦은 침공을 받은 신라로서는 비록 그 때마다 물리쳤다고는 해도 늘 걱정거리를 안고 사는 셈이었고, 그런 걱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숙원이었다.

 

109. 왜의 침략을 방어하는 신라의 방법은 대체적으로 지공이었다. 간단히 쳐부술 정도면 모르되, 알천까지 깊숙이 쳐들어오는 적에 대해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나가지 않으면서 스스로 지치기를 기다렸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당시 사람들을 이해를 못하겠다. 그렇게 당하고도 늘 막기만 하는 수비적인 그들의 태도에 울분이 생긴다. 문제가 생기면 근원을 뿌리뽑아야 되는데 왜 그때 발생하는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일까. 정벌을 하고 속국으로 만들면 되는 것인데 계속해서 이런 태도를 취하다보니 근대에 들어 그런 식민지배를 받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일본이 통일된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로 분리되어 있다지만 한 나라만 복속시키면 이웃나라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인데.

 

110. 참는 데도 한도가 있는, 그래서 쌓이고 쌓인 감정의 폭발이라고나 할까, 좀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116. 문제는 박제상의 일 이후 신라와 왜의 관계가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 한반도의 가장 가까운 신라가 그들과 적대 관계로 정착되는 상징적인 사건, 나는 그것을 박제상의 죽음으로 본다.

 

117. <삼국유사><기이>편은 왕의 재위 순대로 엮었다. 그러면서 그 왕대에 일어난 특이한 사람을 하나 소개하고, 그것이 제목을 만드는 재료가 되기도 한다.

 

118. 고구려 사람들은 화살촉을 뽑아 내고 쏘는 시늉함 한 데 비해, 발바닥 거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걷게 하는 왜왕의 고문은 처참하기만 하다. 이렇듯 처참한 장면을 집어넣는 일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점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고와 고려 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나섰던 때와 시기를 같이 하고 있다.

 

119. 개성으로 돌아가는 왕을 따라가서 국사의 자리에 오른다. 그의 나이 77세 때의 일이다.

개인적으로도 성공한 삶을 살았다.

 

119. 뜻밖에 전쟁을 벌여야 하는 이 황당한 교류로 인해 새삼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떠올리게 하였고, 먼 옛날 신라와의 관계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임박한 전쟁에서 반드시 쳐부숴야할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 적절한 감이었을 것이다.

 

119. 그러나 일연의 이 같은 기술을, 단순히 일본을 적으로 만들자는 협소한 목적에 마감시켜서는 곤란하다. ....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지은 절 감은사에 대해서 일연은, “문무왕이 왜적을 막기 위해 이 절을 짓다 돌아가시자 아들 신문왕이 공사를 마쳤다.”

 

119. 일연의 눈은 보다 더 크고 궁극적인 데로 향하여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도 걸리게 했다는 점만 유의하기로 하자.

 

밤에 찾아오는 손님

 

120. 승려의 신분을 벗어난 파격적인 내용으로 삼국시대 그 밑바닥의 정서를 전해 준 점, 우리는 지금 <삼국유사>의 편찬자 일연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다. ..... 점잖은 승려의 신분으로 입에 담기에는 어딘지 껄끄러운 이야기다. 그것을 스스럼없이 해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일연의 그릇을 헤아려 보는 것이지만 말이다.

 

120. 야래자 곧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하는 데서 일차 역할이 끝난다.

 

134. 현실에서는 실패한 왕을 다른 역할로 복권시켜주고 있는 느낌이 든다. 불명예스럽게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진지왕을 데려다 그 혼의 힘으로 특이한 아들을 낳게 하고, 이렇게 해서 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못다 이룬 일을 보상하게 했던 것일까? 몸으로 못하면 혼으로라도 말이다.

 

137.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139. 신라는 나라를 세운 시기로는 삼국 가운데 가장 앞섰지만, 문명의 개화는 가장 뒤쳐졌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한반도에서 신라가 위치한 지리상의 여건, 즉 문명의 고장이라 할 중국과의 통로가 쉽지 않은 구석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140. 그런 후진국이 어떻게 삼국을 통일하는 최후의 승리자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이제 <삼국유사>의 기록들을 통해 이 의문을 해결하기로 한다. ‘먼저 된 자가 나중에 되고, 나중에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이다.

 

141. 신라의 후진성을 인정하고 그 극복을 처음으로 꾀한 왕은 아무래도 법흥왕일 것이다. 법제 정비와 불교 공인은 그의 가장 큰 업적이지만, 이 두 가지가 곧 후진성 탈피에 기치를 든 일이나 다름없다.

 

141. 한 사상, 더욱이 종교가 한 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필요한 절대 시간을 계산하기 어렵지만, 민간에 퍼져 있는 초보적 종교 형태의 전통과 힘이 강했던 것이 신라이기에, 다른 두 나라에 비한다면 어려움은 이중으로 겹쳐 있었다.

 

149. 기대했던 대로 미시는 국선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화랑 제도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 그 같은 모범을 보인 국선이 있었다는 것은 곧 그 제도의 성패를 좌우할 뿐만 아니라, 신라로서는 하나의 행운이었다. 이런 경과를 거쳐 굳게 뿌리내린 화랑이 신라의 삼국 통일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149. ()는 미()와 소리가 서로 가깝고 시()는 력()과 모양이 서로 가깝다. 그렇게 매우 닮은 것을 응용해 헤매게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만 감은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땅에 인연이 있기에 자주 나타나 보이셨다.

 

150. 미시는 복합적 성격을 지닌 존재다. 그만큼 신라의 화랑이, 더 나아가 신라의 불교 수용 후의 역사가 복합적임을 말해 준다.

 

150.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늦었기에 오히려 선진적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점만 적어 두기로 하자. ..... 신라의 경우, 비록 수용이 늦어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나는 앞서 불국토 사상본지수적 등의 용어로 신라 불교의 성격을 설명했다. 이 같은 성격은 자연스럽게 호국 불교 쪽으로 흘러간다.

 

150.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고 따로 열 가지가 있다. 자네들은 남의 산하가 된 몸으로 감당할수 없을 듯 싶다. 그래서 세속오계를 주노라.

여기서 그 유명한 세속오계가 나오는구나. 군인에게는 군인의 신조가 있듯이 무릇 조직에는 비전을 담아낼수 있는 신조가 필요한 법이다.

 

152. 원광 이후 신라 불교를 일으킨 삼총사라면 역시 자장, 원효, 의상이다. ...... 자장은 황룡사 구층탑을 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지금은 구층탑이 없다. 불국사처럼 이 시대에 남았다면 큰 유산임에는 틀림없지만, 난 이제 항상 이런 유명한 건물을 보면 놀랍고 감탄스럽기도 하지만, 그것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으며 죽어 나갔을까를 생각해본다. 감탄과 동경을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애도하는 마음을 갖자.

 

152. 원효는 보다 직접적으로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에 참여한 듯하다.

 

153. 의상은 삼국 통일 후 계속되는 당나라의 신라 간섭기에 유학승으로 있다가, 당나라의 신라 침공 계획을 급히 알려 주기도 한다. 신라 고승 세 사람이 모두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하고 있다. 신라인의 사상적 무장은 이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것은 곧 국력의 신장으로 이어졌다.

 

153.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린 것이오.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감히 어찌 넘보겠소.

 

156. 사실 백제와의 싸움이 이것 한 번 만이 아니며, 고구려와 늘 친하게 지냈던 것도 아니다. <삼국사기>의 본기를 읽어나가건대, 세 나라는 얼키고 설키는 원근의 관계를 되풀이 했다.

 

156. 그런 가운데서 일연이 이 사건만을 유독 내세운 데는 까닭이 있다. 진흥왕이 구사한 외교적 수완으로, 이후 신라가 삼국 통일까지 걸어가면서 변함 없이 지켰던 어떤 대원칙 같은 것이 있었기 때뮨이다.

 

157. 백제나 일본과는 오랫동안 좋지 않은 관계였다. 이제 그런 관계를 개선하기보다 고구려와 가까워지는 것이 더 쉽고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을 법하다.

 

157. 중국이 안정된 통일 국가를 이루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진다. .... 일단 침공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도 없고, 당나라와 화친하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할 수 있다는 이중의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157. 선덕왕이 절묘하게 알아차린 세가지 일 조에서는 저 유명한 당 태종이 보낸 모란꽃 그림 이야기를 쓰고 있다.

 

158. ‘진덕왕조에서 일연은 왕이 태평가를 손수 지어 비단을 짜 무늬를 새기고, 사신을 당나라에 가 바친 일을, 그 시의 전문을 인용하며 소개한다. 신라와 당나라의 밀월 관계는 여러모로 분위기를 잡아 나가는 모습이다. 거기에 외교의 달인 김춘추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160. 신라의 전반기가 박제상과 이차돈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면, 그 중반기가 김유신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64. 두 사람의 만남은 곧 신라의 삼국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이루어 내는 드라마의 시작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문희라는, 두 사람을 굳게 묶어 주는 제 3의 인물이 매우 중요한 배역으로 등장한다.

 

169.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국민에다 이민 4세의 신분적 제약은 좀체 지워지지 않았던 것 같다. 유신에게는 치명적인 콤플렉스였다.

 

169. 그 곳에서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결혼이 불가능할 것을 안 유신의 아버지 서현공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유신의 갈등이 매우 확대되어 자세히 묘사된다.

 

170. 왕이 될 만한 이로 춘추 밖에 없었고, 문희와의 결혼이 이뤄졌을 때라야만 신라와 가야는 진정한 한 나라가 된다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었다.

 

171. 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나중 문무왕이 되는 법민은 626년생이다. 춘추가 24세인 이 해는 바로 진평왕 48년이다.

 

175. 두 남자 뒤에 숨은 한 여인의 그림자는 그만큼 짙어만간다. 물론 이 여인은 문희다. 화려한 것을 받쳐줘야 하기에 속으로 인고하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177. 동생의 처지가 처량해서만 그랬을 리 없다. 일은 제가 벌여 놓고 길길이 날뛰는 유신의 노한 목소리에 묻혀 한 여자의 여린 일생이 가려 있다.

어쩌겠는가! 그녀의 운명인 것을. 대신 아들이 왕이 되지 않는가. 거기에 대리만족을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178. 신라의 삼국 통일을 말할 때면 언제나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을 들지만, 실질적인 통일의 주역은 문무왕 법민이라 해야 옳을지 모른다.

 

179.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한반도 땅 전체를 집어삼키자는 것이 당나라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 법민은,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의 땅을 지켜 낸 사람이다.

 

183. 뇌물은 그 옛날부터 필요악이었던 모양이다. 사천왕사를 끝내 보여 주어서는 안 될 것 같아 이렇게까지 했으나, 그것은 신라가 당나라와 벌이고 있는 신경전이 얼마나 심했던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184. 풍상을 무릅쓰다 보니 마침내 고질병이 생겼으며, 정무에 애쓰다 보니 더욱 깊은 병에 걸리고 말았다.

 

185. 살아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으로 태어나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용으로 태어나는 것은 축생도 곧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에 떨어지는 일이다. 지의 법사가 이를 걱정해서 한마디 거들지만, 왕의 신념은 비록 축생도에 떨어진 들 변함 없어 보인다.

 

187. 만파식적, 이 신기한 요술 피리에 대해서는 그는(김부식) 심히 믿지 못하겠다는 투다. <삼국사기> <잡지>삼죽조에 <고기>의 기록을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기는 하나, “괴이쩍어 믿을 수 없다고 결론 짓는다. ..... 다만 그는(일연) 이 모든 일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터다.

 

189.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195. 예컨대 김유신은 각간이었지만, 더 공을 세우자 대각간이라 했고, 다시 더 공을 세우자 태대각간이라 한 것이 그렇다. 만파식적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더할 데 없는 보배이나, 거기에 공을 더 세우니 글자를 하나씩 더 붙여 주었던 것이다.

 

권력의 끝

 

196.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요리해 먹는 다는 말에서 유래한 권력의 비정한 뒤통수 치기를 나타내는 이 말은 이미 비유도 아니다.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무상한 세월로 돌려보냈다.

 

197. 혜공왕 때였다. 대력 14년은 기미년(779)인데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의 무덤에서 일더니 거기서 장군과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뒤따라 갑옷에다 무기를 든 40여 명이 좇아 나와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얼마 있다 능 안에서 크게 우는 소리처럼 울리고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197 .김유신은 문무왕 13(673)에 죽었다. 삼국 통일의 위업이 달성된 5년 뒤의 일이다. 그로부터 100년 뒤에 이 사건이 벌어졌다. 죽어서도 100년동안 김유신의 자손들은 그 영화를 누렸으되 언제나 가시방석이었다.

 

210. 이 일화의 내면에는 한낱 종이호랑이로 변해 버린 화랑 출신들의 쓸쓸한 노년이 숨어 있다.

 

211. 더욱이 죽지랑은 성골, 진골 귀족 가운데서도 특별한 집안 출신일뿐만 아니라 삼국 통일의 전쟁터를 숱하게 누빈 역전의 영웅이다. 그런 그에게 아간 벼슬아치가 대들고 있다.

 

211. 그것은 바로 화랑 출신들의 투사구팽이다. 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과 그의 아들 신문왕을 거쳐 효소왕이 이르면 이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219. 신문왕에서 출발한 출궁 사건은 중간에 일찍 죽은 효소왕과 효성왕을 제외하고 3대에 걸쳐 내리 일어났다. 공을 다투는 이는 많고, 새로운 통일국가의 이념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 끝내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은 바로 그 반역의 칼날에 목숨마저 잃는다. 신문왕 즉위년에서 시작해 혜공왕 폐위에 이르는 동안 그치지 않는 반역의 칼날, 그것은 김춘추 직계 후손의 쓸쓸한 종말을 가져왔다.

 

220. 성덕왕의 출궁 사건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기록을 하나 발견해 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성덕왕 조 15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서려있다.

 

224.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수로부인이다. 그의 아름다운 용모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이 조의 마지막에 수로부인의 자태와 얼굴이 너무도 뛰어나 매번 깊은 산과 큰 연못을 지날 때면 여러 차례 신물들에게 끌려갔다고 적은 데서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미색을 갖춘 여자였으니 혈기왕성한 청장년만이 그녀에게 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골에 사는 초라한 노인까지도 어떻게 하든 그에게 잘 보여 점수 좀 따려고 설친다.

 

 

226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꽃을 꺾어 바치는 노인의 다음 행동이다. 자긍심을 가지고 부인 앞에선 노인은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노래를 함께 지어 바쳤다. .......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은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228. 다만 세상을 살며 경험해 터득한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는 점이 같다. 그가 알려준 방법은 여론의 힘이었다.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는 말은 원문에서 중구삭금이라 표현되어 있다.

 

첫 성전환증 환자

 

235. 경덕왕에게는 비원이 있었다. 아들을 얻어 자신의 뒤를 이를 일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첫 왕비를 출궁시키고 두 번째 왕비까지 맞았건만 경덕왕은 10년이 넘도록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237. 표훈이 하늘님께 아뢰고 돌아와 왕에게 대답했다. “하늘님께서 딸은 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딸을 바꾸어 아들이 되게 해주시오.” 표훈이 다시 이를 하늘님께 청하자 말하였다. “한다면 할 수 있노라. 그러나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져.” 표훈이 내려가려 하자 하늘님이 다시 불렀다. “하늘과 사람은 어지러워져선 안 되느니, 지금 그대가 마치 이웃 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노라. 이제 이후로는 다시 통하지 못할 것이야.”

 

239. 토함산은 예로부터 경주를 감싸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산 가운데 하나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러 오는 이들이 많지만 그 안에는 감춰진 보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토함산 동쪽 자락에 있는 장항리 절터다. 불국사나 석굴암처럼 번듯한 탑이나 불상이 남아있는 것도 아닌데 꼭꼭 숨겨두고 혼자만 보고 싶은 그런 곳이다. 반쯤 부서진 오층탑에 새겨진 인왕상, 내 사진으로는 이 인왕상의 아름다움을 다 담아낼 수 없다.

여기도 가봐야 하는구나. 부끄럽구나 경주에 사는 것이

242. 다시 만날 것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구도자이면서 시인으로서 월명사가 택한 최선의 길이다. 그 지점이 곧 한 편의 시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249. 어린 왕은 여자아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늘 부녀자들의 놀이를 하였고,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였다. 도사 무리들과 놀았으므로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 마침내 선덕왕과 김양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왕이 되는 자

 

254. 왕이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쓰고 십이현금을 끼고 천관사의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256. 일본의 문경왕이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물러갔다. 그러면서 사신을 시켜 금 50냥을 내고 그 피리를 보자고 했다. 왕이 사신에게 말했다.

짐도 웃대의 진평왕 때 있었다고 들었을 뿐이오. 지금은 어디 있는 지 모르오

다음해 7월 다시 일본 왕은 사신에게 금 1000냥을 보내며 청하였다.

과인이 신기한 물건을 보고 돌려주려 합니다. “

원성왕은 저번처럼 사양하면서 은 3000냥을 그 사신에게 내려주었다.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피리를 내황전에 보관하게 하였다.

 

261. 원성왕 이후 신라 왕실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왕의 자리를 놓고 벌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란 결국 정권을 잡고자 하는 진골 귀족 계급간의 골육상쟁이었는데 특히 소성왕부터 헌안왕까지 960여년이 지나는 동안 세 명의 왕이 살해되면서 혼란은 극에 달한다. 여삼의 말대로 원성왕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왕이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형제간에 죽고 죽이며 오른 왕위가 그 무슨 영화였을까? 그런 싸움 때문에라도 헌안왕은 자신의 대에서 비극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는 무엇보다도 덕을 갖춘 후사를 세우리라 결심했고, 그래서 왕이 된 이가 경문왕이었다.

 

264. 경문왕을 따르는 부하 가운데 범교사는 그에게 목숨을 건 제안을 하고 있다. 결국 그것이 경문왕의 즉위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겠다.

제가 말씀드린 좋은 일이 지금 모두 나타났습니다. 큰딸을 맞아 들였으므로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 예전에 미모에 끌렸던 동생을 이제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둘째요, 언니를 맞아들였으므로 왕과 부인께서 기뻐하셨음이 셋째입니다.”

 

266. 유복해 보이는 경문왕에게도 겉으로 보아 뜻하지 않은 내면이 있었다. 왕의 침소에 저녁마다 뱀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놀랍고 두려워 쫒아내려 하자 왕이 말하길 내가 뱀이 없이는 편안히 잠을 자지 못하는구나. 막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매번 침상에선 혀를 날름거리며 가슴 가득 덮었다.

 

267.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뿐만 아니라 부인도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혼자 지고 가야 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나라가 망하는 징조

 

271 기이편 신라사를 마감하면서 이 혼란기의 신라 왕실을 착잡한 심경으로 써내려 가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그리고 이채로운 제목을 달고 다가오는 조가 이른 눈이다.

40대 애장왕 마지막 해는 무자년(808)인데 815일에 눈이 내렸다. 41대 헌덕왕 원화 13년은 무술년(818)년인데 314일에 눈이 많이 내렸다. 46대 문성왕 기미년 (839) 519일에 눈이 많이 왔으며, 천지가 어둡고 깜깜해졌다.

 

272. 이는 어떤 메시지를 표면에 내세우기 보담 객관적 사실만 나열해놓고 읽는 이들에게 그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일종의 상징적 기술임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상징하는 가는 명약하다. 자연의 이상 변동을 기록하는 사관의 뜻은 그것이 사람의 잘못으로 구체적으로는 정치의 불안정이겠지만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어려움이 닥친다는 경고에 있을 것이다.

 

276. 염장은 한때 장보고와 같은 편으로 신무왕의 반란을 도운 사람이다. 그가 장보고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거기에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의 야심 밖에는 아무런 목적도 보이지 않는다.

장보고는 8~9세기에 걸쳐 청해진 지금의 완도, 진도, 신안 지방을 근거로 해상 왕국의 일으킨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이 지역이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요충지였으므로 여기를 장악한다는 것은 바로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갖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보고의 죽음도 죽음이려니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해상왕국의 붕괴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그의 최후가 어이없게도 권력다툼의 일개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데서 더욱 안타깝다. 인재들이 죽어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그가 정치에만 기웃거리지 않았어도 이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는데 안타깝다. 항상 군인의 몰락은 정치 개입이다. 하지만 또한 정치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281. 낯선 서울 땅에 와서 헤매다 제 처가 역신과 동침하는 현장을 목격해야 하는 불행한 사나이의 노래다. ..... 앞서 말한 무속적인 것 외에도 지방 호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지방호족의 자식을 서울에 볼모로 잡아두는 기인제도가 신라에 있었거니와 왕이 울산에 간 것이 모종의 정치적 사건 때문이라면 일이 해결되고 난 다음 자식을 데리고 가는 것은 전형적인 기인제도의 볼모다.

 

지는 해 뜨는 해

 

287. 신라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백경화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실패로 돌아간 데서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수도인 경주가 통일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던 것도 한 원인으로 들 수 있겠다.

 

288.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도적까지 들끓자. 백성들이 이를 걱정하여 다라니로 은밀한 문장을 지어 길거리에 내붙였다.

 

289. 하늘이 감옥을 흔들었다는 대목은 사족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억울한 일을 당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단박에 하늘이라도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아무리 간절해도 끝내 가슴에 묻어야할 답답한 현실이 엄연하지 않던가? 사피귀정이요 새옹지마라 하니,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르는 결과는 아니요, 다만 그 말대로 이뤄진 경험을 해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쪽이다.

 

296.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종용을 받았고 왕비는 강제로 당했으며 첩들은 그 아랫것들에게 수난을 입었다.

 

297. 대체로 포석정은 고대왕권 국가에서는 왕의 연회 장소가 제사의 장소를 겸하고 있음을 일본의 경우에도 쉽게 발견된다포석정의 기묘한 굴곡은 거북을 닮아 있고, 거북은 영생불사의 신선 사상과 연결되며, 거기에 물을 흘려보내는 구조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세상의 어떤 순조로운 흐름을 기원하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00. 예전에 견훤이란 자가 왔을 때에는 마치 이리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왕공이 이르자 마치 부모를 만나 뵌 것 같구나.

 

301. 나라가 서고 망하기는 반드시 하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마땅히 충신과 뜻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민심을 거두고 힘을 다한 다음이라야 그만둘 것이오. 어찌 천 년 사직을 그다지 가벼이 남에게 준단 말입니까?

 

302. 경순왕이 항복할 때 향기롭게 장식된 마차가 30여리를 가득채우고 태조는 바깥까지 나가 맞이하여 동쪽 한 구역의 궁을 내려주었으며 큰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두 아들의 출가는 한층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버지인 경순왕은 새 나라 고려의 부마가 되어 40여년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말이다.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309. 정말 백제의 고도가 부여일까? 물론 백제가 부여를 도읍으로 삼아 120년이나 지냈고, 거기서 나라의 최후를 맞이했으니 중요하기는 하겠다. 웅진에서 도읍했던 63년까지 합한다면 그 183년의 백제 역사는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백제의 전 역사를 통틀어본다면 이 기간은 전체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311. 웅진, 부여 천도 뒤의 백제 역사는 특히 그것이 왕실과 관련된 것일수록 늘 일본과의 교섭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

 

319. 507년에 즉위하는 계체왕이 다름 아닌 무녕왕과 형제관임을 밝히는 유물이 나왔다. 바로 인물화상경이다. 청동으로 만든 이 거울은 1914년 일본의 오사카 근처 와카야마 현의 한 신사에서 발견되었는데 지금은 국보로 지정되어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기 503년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거울에 새겨진 글자 가운데 남제왕과 사마가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사마가 남동생인 왕을 위해 만들어 보낸다는 내용이다. 수수께끼는 1971년에 와서야 풀렸다. 사마는 무녕왕의 이름이었다. 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에서 이 이름을 적은 묘지석이 나왔다.

 

325. 왕실로만 놓고 본다면 일본은 분명히 백제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7세기 후반에 들어 중주국 백제가 멸망했다. 어느 정도 힘이 쌓이면 내심 독립할 요량이었던 일본 왕실로는 어쩌면 복음과 같은 소식이었을 지 모른다. 백제가 망할 무렵, 일본의 구원군은 적시에 도착하지 않았고 그렇게 늦장 부리다가 싸우려는 시늉만 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325. 중주국 백제의 멸망후 7년 국호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선언으로 보인다.

 

326. 사실 그 이후 일본 왕실에서 백제의 흔적 지우기는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14세기에는 신황정통기에서는 8세기 말 환무왕이 일본과 삼한은 같은 종족이라고 적은 책들을 불태웠다고 했다.나는 그것을 일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는 독립의 비원으로 본다.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329. 일연이 적고 있는 남쪽 연못가의 용이 사실을 비유한 것이라면 용은 왕위에 오르기 전의 법왕일 것이다. 왕족이긴 하나 장래가 보장된 것도 아닌 남자에게 몸을 허락한 여자는 떳떳이 자신을 드러내 놓고 살지 못했으리라. 더욱이 과부의 신분으로 말이다.

 

330. 선화공주님은 남모르게 짝지어 놓고 서동 서방을 밤에 알을 품고 간다.

 

335. 일연이 쓴 무왕조를 사실로 보아 무왕의 출생이나 왕위 등극의 과정을 설명하자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법왕이 아직 왕자일 때 그것도 등극과는 서열이 먼 상태에서 만난 여염집 여자 더욱이 과부에게서 얻은 아들을 떳떳이 자기 집 안으로 거두지 않았을 것이고, 왕위계승은 큰아들이 아니라 누구든 뛰어든 왕자가 차지하는 당시 관례로 보아, 어떻든 왕족인데다 비범한 서동의 발군으로 곧 그것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점 인정된다.

 

338.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며 백제를 지켜낸 오왕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의자왕대로 늦추어진 것도 무왕의 강고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345. 백제에 주재하던 미륵보살을 신라에 빼앗기는 사건이 벌어진다. 나는 그 부분을 앞서 신라의 화랑 제도 성립과 관련해 소개한 바 있다. 바로 미륵선화와 l미시랑 그리고 진자사 조의 미륵선화다.

 

견휜, 비운의 영웅

 

352. 견훤에게는 망해가는 신라보다 더한 강적이 있었다. 바로 북쪽의 왕건이었다. 왕건이 철원경에서 고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353.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 편으로 만드는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휜의 경애왕 살해일 것이다.

 

353. 왕건이 연패하는 중인데도 신라에서는 고려와 화친하고 더 나아가 나라를 맡기자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됨됨이가 견훤처럼 사나운 사람보다 온순하고 정이 많기로 왕건이 그들의 뒤를 잘 봐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359. 어쨌건 큰아들 신검에게 왕위가 가지 않을 것임은 분명했다. 여기서 큰아들이 아버지를 절간에 가두는 반역사건이 일어났다. 밑의 두 동생과 합작한 것이었는데 모든 일의 계략은 이찬 능환이 했다. 청태 2년 을미년(935)의 일이었다. 견훤은 금산사 불당에 위리안치 되었고 금강은 죽임을 당했으며,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361. 왕건은 그가 지닌 성품대로 부하들을 보내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에게 당한 배신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온 이 노장이 도착하자 자기보다 10년 위라고 해서 그를 높여 상보라고 했다. 상보는 경순왕에게도 주었던 직함이었다. 이 와중에도 살길을 찾은 이는 용케 그 길을 간다.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견훤의 사위 영규다.

 

363. 왕건은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다만 능환만은 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 꾀다. 신하된 도리에 마땅히 이래야 한단 말이야 하고 목을 쳤다.

 

363. 견훤이 울화가 나서 등창이 생긴 것이 바로 그때였는지 잘 모르겠다그 때가 언제인들 무슨 상관이랴? 따지고 보면 자식을 원수로 여겨 죽이지 못하는 것을 분통해 하고, 치사한 목숨 부지하다 등창이 나서 제 명을 재촉한 사람의 생애다. 실제로 그 지경까지 되었을까 의아스러운 점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신비의 왕조, 가야

 

364.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려 있기에 오늘날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된 베스트 3을 꼽으라고 한다면 무엇을 들겠는가?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생님은 단군신화, 향가, 가락국기 이 세 가지에다 점을 찍었다. ...... 그런데 왜 가락국기일까? 일단 표면적으로는 지금까지 전하는 가야사에 관한 유일한 사료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400년 가까이 존속된 나라의 역사치고는 철저히 외면되어 있다.

 

365. 가야를 그냥 건너뛸 수 없는 이유가 일연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허황옥이라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부터 멀리 시집온 여자, 이 땅에 불국토의 신성함이 서려 있다고 믿는 일연으로서는 이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홀히 대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든 좋은 자료가 바로 가락국기다.

 

368. 어렵사리 찍은 만어산 사진을 한 장만 보여주기 아쉬워서 하나 더 싣는다. 11월에 내리는 찬비를 맞고 돌아다니려니 이빨 부딪히는 소리가 골짜기를 울릴 정도였는데. 만어산 너덜에 널린 바위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것도 그 가운데 하나로 여린 나무 한 그루가 고래만한 바위의 배를 갈라놓았다.

 

372. 심지어 구워먹겠다는 불경스런 표현을 서슴지 않는 데에서 우리 옛 노래의 특이성을 발견한다. 이것은 삶을 개척하는 매우 강한 의지나 다름없다.

 

373.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무리한 토목 사업을 애초에 벌이지 않았다. 새로 궁궐을 지으면서도 농사가 한가한 틈을 기다렸다.

예나 지금이나 SOC사업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

 

375. 왕이 처음 신부를 맞으러 나간 날이 727일 나흘을 보낸 다음 81일에 궁궐로 돌아왔다고 가락국기는 전한다. 두 사람의 꿈 같은 밀월여행은 짧기만 하다.

 

376. 이 때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같이 해서, 그 교화가 엄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위엄이 있고,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게 되었다.

 

378. 먼 뱃길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석탑, 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한다.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가 있다. 그 길을 지켜 주는 석탑.

 

382. 김춘추와 문희 민족의 결혼이 낳은 아들 문무왕, 삼국통일을 완성한 그는 신라와 가야 두 민족 간의 결합으로 태어났다. 그러기에 민족 간 결합에 의욕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민족 간은 결합해야 하고 결합할 수 있다는 신념과 경험을 가진 그라면 나아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세 나라를 한 나라로 만드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384. 사료가 부족한 쪽만 억울할 일이다. 거기서 우리는 김부식이 원망스러운 것이고, 일연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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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4 12:30:57 *.18.218.234

저자연구 좋네요. 양진씨까지.


역사적 공간에 있으니 남다르게 읽혔을 거 같아요.

오어사 쪽 장가계(^^) 나도 가보고 싶네. 일연 스님 계신지 노크도 해보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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