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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4일 08시 32분 등록

한시미학산책

 

정민지음 / 휴머니스트

 

저자연구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에 뜨이면 빛을 이루어서,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는 조물주의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정민 한양대 교수(51·국문학과)가 고등학교 때부터 외우고 있다는 소동파의 ‘적벽부’ 일부이다. 그에게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옛 우리 문인들의 지혜였을까. 그는 ‘다함이 없는 보물’ 같은 한문학 문헌들을 자기만의 것으로 가두지 않고 공유하려는 노력을 계속 하고 있다.

정민 교수는 첫 책 <한시미학산책> 이후 지금껏 고전에 담긴 전통의 가치와 멋을 현대의 언어로 되살려 폭넓은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그는 예스러운 멋과 여운 있는 글쓰기로 인문학이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지웠다. 방대한 자료를 분류해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삶을 차 문화, 한 분야에만 몰두한 기인들, 꽃과 새 등 다양한 주제로 변주해 내는 그의 능력은 독보적이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고전을 쉽고 재밌게 풀어쓴 그의 책은 대부분 2만부 이상 팔리며 흥행에 성공했다. 고전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해 난해와 고리타분함을 지워냈기 때문이다. ‘옛것을 그대로 따라해서도 안되고, 옛것과 완전히 달라서도 안된다’는 그의 지론인 ‘상동구이(尙同求異)’의 글쓰기 결과이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 한양대학교 인문관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 들어서자 은근한 묵향이 배었다. 연구실 양쪽 벽을 메운 책꽂이의 맨 위에는 그가 한지에 먹으로 쓴 소동파의 ‘적벽부’가 띠처럼 둘러져 있었다. 붓글씨가 취미라는 정 교수는 연구실 안에 문방사우를 갖추고 틈틈이 다산과 연암의 글을 따라 적는 연습을 하고 있다

정 교수는 700쪽이 넘는 책들을 1년 사이에 세권씩 출간할 정도로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낸 책도 36 38권에 이른다. 다양한 주제의 책들을 짧은 기간에 내는 비결은 그가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에서도 소개한 ‘촉류방통법(觸類旁通法·묶어 생각하고 미루어 확장하라)’ ‘어망득홍법(魚網得鴻法·동시에 몇 작업을 병행하여 진행하라)’이다. 정 교수는 “하나가 끝나면 다음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가지 작업을 병진한다”면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 논문으로 발표하거나 잡지에 연재를 하고 그것들을 주제별로 묶어서 책을 낸다”고 말했다. 그는 2006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에서부터 다산의 정보처리방식을 활용했다. 다산의 자료를 모으면서 차에 관한 자료들이 나오면 따로 빼고 또 다산의 제자 이야기는 따로 떼어 정리했다. 이 작업으로 올해 완성한 책들이 다산 문집에 포함되지 않았던 새로운 문헌들을 모은 <다산의 재발견>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 그리고 곧 출간될 <삶을 바꾼 만남>이다. 정 교수는 “차와 다산이 전혀 관계없어 보이지만 책을 읽으면 하나의 주제에서 곁가지로 퍼진 것을 알 수 있다”면서 “주제들이 연결되어 있으면 시너지가 생기고 가속도가 생긴다”고 말했다

자료를 수집하는 정 교수의 노력은 각별하다. 다산 친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바로 그곳으로 카메라를 들고 달려간다. 자료를 얻기 위해 소장자를 일년씩 설득하기도 했고 때론 끝끝내 보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자료를 정리하는 데도 나름의 방법이 있다. 소장자에게서 얻은 자료를 사진으로 찍은 뒤 컬러로 출력해 중국에서 수입해온 ‘호접장(蝴蝶裝)’에 붙인다. 그는 새로 쓰는 책의 원고도 출력해 이렇게 호접장으로 만든다. 컴퓨터 파일로 보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앞뒤의 내용을 순서대로 보기 어렵고 침을 박아 편철을 하면 두꺼워서 책장이 넘어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두 명의 큰 스승이 있다.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연암은 높고 깊고, 다산은 넓고 크다”고 말한다. 그는 “연암이 공부하는 사람에게 화두를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스승이라면 다산은 제자들에게 따라야할 매뉴얼을 제시하고 그대로 따라오게 한다”며 “연암이 훨씬 더 무서운 스승”이라고 평했다

그의 글쓰기는 고전을 현대에 되살리기 위한 작업이면서 폐쇄적이고 고답적인 인문학 연구 풍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는 인문학이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료보다는 자료를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면서 “대답을 바꿀 수 있는 질문이 아니면 새로운 게 나오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암과 다산의 육성들이 이렇게 많이 남아있는데 연구자들이 출판된 다산 문집만 가지고 연구를 한다면 우리나라 대표선수에 대한 대접이 아니죠”라고 덧붙인다. 있는 자료로만 연구하고 질문을 바꾸지 않으면 새것조차 구태의연하다는 말이다. 그는 “학자는 관점으로 싸워야지 자료로 싸워선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글을 쓰면서 대중적인 것을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고 한다. 실제 <다산의 재발견>이나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 등은 모두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엮은 것이다. 그는 “학술적인 책들도 고리타분하게 쓰지 않고 도판을 활용하고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과 언어로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중적이 된 것이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서 작업을 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한다면 오래가지 못할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글을 쓴 후 꼭 두 번 내지 세 번 원고를 소리내어 읽고 마지막으로 가능하면 아내에게 읽어보라고 부탁한다고 한다. 소리내서 읽다보면 꼭 걸리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좋은 글은 글의 리듬이 읽는 것을 간섭하지 않는다”며 “소리를 내어 읽을 때 자연스러워야 그 리듬이 살아있고 내용도 전달이 잘 된다”고 한다. 스스로를 고전의 ‘트랜스레이터’라고 정의내린 그는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맥락을 짚어주고 해설을 하는 게 국학자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산 작업을 마무리한 뒤 그가 큰 스승이라고 평가한 연암 연구로 되돌아갈 계획이다.

<경향신문 인터뷰 중>

 

■ 정민의 주요 저서 

정민 교수는 지금까지 36 38(공저 포함)의 책을 냈다. <한시미학산책>을 데뷔작으로 출간 예정인 <삶을 바꾼 만남>에 이르기까지 모두 현대적인 관점에서 고전을 해석해 ‘그때 여기’의 삶에서 ‘지금 여기’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저작이다. <한시미학산책>(2010·휴머니스트)은 한시입문서로 한시의 세계를 풍성한 예화로 전하고, 한시의 다양한 형태미와 내용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이 책의 어린이용이라 할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 41만부가 팔리며 또래의 필독서가 되었다

정민이라는 이름을 대중에 각인시킨 <미쳐야 미친다>(2004·푸른역사)는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이덕무 등 그들만의 열정과 광기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18세기 지식인들의 마니아적인 내면을 탐구한 책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의미를 담은 강렬한 제목으로 화제를 일으키며 20만부 가까이 팔렸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2000·태학사)는 그가 학문의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연암의 대표 산문 40여 편을 25개의 주제로 나누어 원문과 그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저자의 연암 연구는 1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고전 문장론과 연암 박지원>(2010·태학사)으로 이어진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2006·김영사) 18년 유배생활 중 다양한 분야에서 5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완성한 다산 정약용을 지식경영이라는 시각에서 조명했다. 8만여부가 팔렸다.

올해 내놓은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김영사)는 조선 후기의 차 문화를 일으킨 다산과 초의, 추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차 관련 자료와 사료들을 연구해 쓴 조선 후기의 차 문화사이다. 지금까지 1만부가 팔렸다

<다산의 재발견>(2011·휴머니스트)은 강진 유배 시기 다산의 육성을 담은 친필 편지를 발로 뛰며 찾아내 연구·정리하여 다산의 ‘사람냄새’나는 면모를 볼 수 있는 책이다. 12월 중 출간되는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은 인간의 삶을 본질적으로 바꾸는 만남에 관한 책이다. 스승 다산을 만나 일생을 학문에 정진한 황상의 삶을 다산과 그의 자제들과의 교류를 통해 살핀다.

<경향신문 인터뷰 중>


마음을 무찔러 온 글귀

 

지은이의 말

한시는 전달의 특수성 때문에 오늘날 그 효용가치를 상실했다. 한시는 전문 연구자들의 학술적 관심사가 되고 있을 뿐,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버린 낡은 길이다. 그렇다고 한시가 추구한 정신의 깊이나 미학의 너비마저 덤불속에 버려둘 수는 없다.

새로움에 팔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면 정작 나 자신의 정체성은 어디가서 찾을 것인가. 개중에는 저도 모르면서 떠드는 현학이 있고, 속임수도 없지 않은 듯하다. 이런 터에 선인들의 숨결 생생한 한시 이야기를 먼지 털어 선뵌 일은 때 늦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첫번째 이야기 - 허풍속으로 난 길

 

P17 – 까마귀는 본디 정해진 색깔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린다. 어찌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겠는가.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 버린다.

 

P18 – 생취나 생의가 없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사물의 심장부에 곧장 들어가 핵심을 찌르려면 죽은 정신, 몽롱한 시선으로는 안된다. 시인은 천지현황의 나태한 관습을 거부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P19 – 언어에 끌려 다니지 말고 언어를 주재하라는 주문이다.  

 

P20 – 정작 시인이 전달하려는 의미는 문면에 있지 않고 글자와 글자의 사이, 행과 행의 사이, 혹은 아예 그것을 벗어난 공중에 매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독자 또한 영양의 발자취에 지나치게 현혹되거나 그것만이 전부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시인이 쳐 놓은 언어의 통발에 걸려들어서는 안된다.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안된다.

 

P22 – 종을 치면 종소리는 긴 파장을 내면서 허공으로 퍼져 나간다. 이렇듯이 시는 독자로 하여금 읽은 행위가 끝나는 순간부터 정말로 읽는 행위를 시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두 번째 이야기 - 그림과 시

 

P37 – 시와 그림은 전통적으로 서로 연관이 깊다.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란 말도 있다.

어디 그림뿐이겠는가? 소설, 논문, 시나리오, 기사, 짧은 카피 모두 시에게 배우고 있다. 함축과 은유, 상징 등 시는 모든 창작의 출발점인 것 같다.

 

P39– 다만 버드나무 그림자 은은한 곳에 자리 잡은 정자 위에 한 소녀가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을 그렸을 뿐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흔히 여성을 홍 紅 으로 표현했다. 화가는 그 소녀로써 홍일점을 표현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홍일점이란 말의 연원이다.

 

P41 – 여러 예화는 모두 같은 원리를 전달한다. 즉 그리려는 대상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물 길러 나온 중, 말의 꽁무니를 쫓아가는 나비, 난간에 기댄 소녀, 피리 부는 뱃사공, 남녀의 신발 한 켤레로 대신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나타내려는 본질을 감춰두거나 비워둠으로써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P45 – 시인이 시를 짓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 가운데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과정이라고 한다.

인생도 그러하다. 어떤 일이 불필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가름해서 본인이 생각하는 안 하면 안되는 가장 필요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P47 – 이는 좋은 시절을 다 보내고 난 두사람의 낙화시절이기도 하다. 동시에 성세의 변화를 뒤로 보낸 당나라의 낙화시절이기도 한 것이다. 한 층 한 층 의미가 확정되면서 울리는 여운이 길고 가녀린 파장을 남긴다.

 

P50 – 이광의 화사이 추격병의 가슴을 꿰뚫어야만 그의 용맹한 정신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의전신의 본질을 해칠 뿐이다. 다 말하지 않고 말하기, 다 그리지 않고 그리기, 시와 그림은 이러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P52 – 그렇다면 화가는 사실을 무시해도 좋은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러한 과장과 변형은 의경의 함축에 목적이 있다.

 

P53 – 그러므로 시를 읽는 독자는 시인이 쳐 놓은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행간을 읽을 줄 아는 식견을 길러야 한다.

 

P54 – 글자는 스무 자에 지나지 않는데,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감정과 씩씩대는 나귀의 숨소리, 그와 함께 커져가는 두 사람의 먹먹 소리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지 않은가.

 

P56 – 기교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 속에 예리한 관찰과 예술가의 정신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교훈을 전달한다.

 

P59 – 화가가 형상을 핍진하게 묘사하거나, 시인이 대상을 방불하게 묘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거기에 정신을 담는 일이다. 그래서 송나라 진욱은 <설부>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개 형상을 그릴 때는 반드시 정신을 전해야 하고, 정신을 전하려면 마음을 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군자와 소인이 모습은 같지만 마음은 다른데, 귀하고 천하며 충성스럽고 사악한 것을 어찌 스스로 구별하겠는가? 겉모습이 비록 닮았다 한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을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P66 – 시인의 진실한 느낌이 없는 시는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해도 독자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맹자는 아무리 서시와 같은 미인이라도 오물을 뒤집어쓰면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고 지나간다고 말했다.

 

좋은 시는 독자에게 방심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허를 찔린 느낌을 준다. 이에 반해 화가의 정신이 들어가 있지 않은 그림은 이발소 그림, 목욕탕벽화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과 똑같이 그려진 영화관의 간판은 결코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가끔 그 기교에 감탄할 뿐이다. 예술과 기술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세번째 이야기 언어의 감옥

 

P69 – 삼천 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로 얼굴을 빠끔히 내민 달과 친하다니 말이다. 그리움을 보고 싶단 말을 이리 전하는 마음, 삼천 리 밖에서 보낸 편지치고는 싱거워서 뭉클한 사연이다.

이렇게 담담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무엇이든 더하기 보다 빼기가 힘들다.

 

P71 – 옛 글에는 야단스러움이 없다. 간결하게 할 말만 하고, 때로 아무말 않기로 한다. 그래도 마음은 글자 사이로 흘러, 행간에 고여 넘친다.

 

P72 – 본래 동양의 예술 정신은 다변과 요설을 싫어한다. 긴장을 머금은 함축을 소중히 여긴다.

 

P74 – 그래서 내가 봄 동산이 되고, 그 동산의 나비가 되어 봄날의 석양 속으로 휠휠 날아가 버리는 느낌을 노래한다. 필설로 옮기려 하는 순간 증발해 버리듯 사라져버린 기심, 사물과의 순간적인 만남이 가져다 주는 이러한 생취를 설명적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는 얼마나 허망한가. 그러고 보면 언어는 참으로 무력하기 찍이 없는 도구에 불과하다.

 

P76 –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고 했다. 장자의 말과 그 뜻이 같다. 그러고 보면 옛 성인들이 남긴 글은 그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뜻과는 두 단계나 떨어져 있다. 그래서 순찬은 비록 육경이 남아 있다고 해도, 진실로 성인의 겨와 쑥정이일 뿐 이라고 까지 말하였다. 언어 표현이 갖는 한계를 철저히 인식한 발언이다.

 

P77 – 깨달음은 말로는 가르쳐줄 수가 없다. 마음으로 깨달아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이른바 심수상응이다.

득의망언 得意妄言즉 뜻을 얻었거든 말을 잊으라고 주문한다.

 

P78 – 그래서 도연명은 시 <음주>에서 이 가운데 참다운 뜻이 있으나, 말하려 하니 이미 말을 잊었네라 했다.

 

P81– 본래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말해도 알아듣고, 모를 사람에게는 아무리 친철하게 설명해준댔자 더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다.

 

P89 – 네 구 가운데 어디에도 시인의 정은 드러남이 없다. 단지 있는 그대로를 서술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미 많은 이야기가 독자에게 건네지고 있다. 경물 속에 몰입하면서 독자들은 마치 자신이 직접 숲 속을 거니는 듯한 흥취를 만끽한다. 벗과 헤어져 있음을, 봄이 떠나감을, 떠나감이나 헤어짐으로 인식치 하니하고, 꽃잎이 묻은 소매로 내가 꽃이 되고 봄이 되는 인식의 갱신에서 시인은 몰아의 희열 속으로 빠져든다.

 

P91 – 시에서 입상진의를 귀히 여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막상 시인이 말하고자 한 것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놓고 보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몇 줄의 교훈이거나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미묘하고 추상적인 느낌의 단편뿐이다.

양파의 껍질은 아무리 벗겨도 알맹이가 나오지 않는다. 시를 낱낱이 해부하여 파헤치고 나면, 남는 것은 언어의 시체뿐이다. 멀리서 바라보이던 은은하고 아름다운 산의 모습은 간곳없게 된다.

 

네번째 이야기 보여주는 시, 말하는 시

 

P97 – 산은 늘 그 자리에 서 있지만,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면 날마다 그 모습을 바꾼다.

당시를 두고 흔히 중국 고전시가의 꽃이라고 말하여 계절로 치면 봄에 해당한다고들 하고, 이에반해 송시는 가을에 비긴다. 백화난만한 고궁의 봄 뜰을 친구와 어울려 산책하는 정취를 당시의 세계에 견주고, 들국화 가득히 핀 가을 들판을 홀로 걸으며 사색에 잠기는 것을 송시의 세계에 비유하기도 한다.

 

P101 – ‘영묘란 글자 그대로 그림자를 묘사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다. 실체가 아닌 것을 어떻게 묘사해낸다는 말인가. 대상과 마주하여 일어나는 시인의 감정은 실로 그림자와 같아서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시는 그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느낌을 언어로 옮겨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반면 포진이라 함은 있는 그대로 펼쳐 진술한다는 의미이다. 시인이 의론을 세워 자신의 주의 주장을 전달하려 할 때 흔히 이 방법을 사용한다.

 

P103 – 당시는 가슴으로 쓴 시이다. 여기에는 시인의 웃음과 눈물이 있어, 마음으로 전해오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하다. 이에 반해 송시는 머리로 쓴 시이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깊고 담담한 관조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망이 있다.

 

P112 – 깨달음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우리의 마음이 욕망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P114 – 당시와 송시도 거울과 등불이 이라는 문학의 두 기능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다만 나는 당시풍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송시풍의 시는 시가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내가 빨간색을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파란색을 좋아하면 안 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

 

P115 – 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당시와 송시의 구분이나 참여니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좋고 싫음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P116 – 현세에서 시인의 삶이란 곁에 누운 병든 아내의 신음처럼 고달프고 괴로운 것을, 그러고 보면 시란 까맣게 잊고 있던 신선세계, 또는 존재하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향한 회귀의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천상의 백옥루가 준공되었으나 상량문을 지을 사림이 없자 옥황상제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하를 하늘나라로 불렀던 것처럼, 티끌세상의 귀양살이가 끝나 천상으로 복귀할 때까지 뱃속의 먹물이 다 마르도록 시인은 다만 깨어 노래할 뿐이다.

 

다섯번째 이야기 버들을 꺽는 뜻은

 

P119 – 떠난 이를 그리며 흘리는 눈물로 대동강 물이 마를 날 없다는 엄살은 허풍스럽기는 커녕 그 곡진한 마음새가 콧날을 찡하게 한다. 이 섬세한 시심만으로도 과연 신운절창의 감탄은 있음 직하다.

 

P121 – 남포란 단어에는 유장한 연원이 있다. 굴원은 일찍이 <구가> <하백>에서 그대의 손을 잡고 동으로 가서, 고운 임을 남포에서 떠나 보내네라고 노래한 한 바 있다. 그 뒤 많은 시인들이 실제 헤어지는 포구가 동포이든 서포이든 북포이든 간에 남포라고 말하곤 했다. 굴원의 이 노래가 있은 뒤로 남포란 말은 시인들에게 으레 이별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정운 情韻이 담긴 말이 되었다.

 

P123 – ‘는 글자 그대로 대상을 보면서 생각을 일으키고, ‘은 이를 이어받아 보충한다. ‘에서는 시상을 틀어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1,2구와 3구 사이에 단절이 온다. 그 단절에 독자들이 의아해할 때 4에 가서 하나로 묶어줌으로써 완결된 구조를 이룬다.

시를 쓸 때 유념해야 할 좋은 구조적 법칙인 듯 하다.

 

P125 – 작품을 감상해보자. 여기서도 새봄을 재촉하는 빗속에 이별을 노래한다. 아침부터 내린 보슬비로 사람이 지날 때마다 길 위로 풀풀 날리던 먼지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실제로 촉촉이 젖은 것은 흙먼지이기보다 사랑하는 벗을 멀리 떠나보내는 나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절류折柳, 즉 버들가지를 꺽는다는 말에는 앞서 본 남포와 마찬가지로 이별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버들가지가 이별의 신표가 된 사정은 이러하다. 버드나무는 꺾꽂이가 가능하다. 신표로 받은 버들가지를 가져다 심어두면 뿌리를 내려 새 잎을 돋운다. 보내는 사람은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하는 심정으로 버들가지를 꺾어주었고, 또 꺽이어 가지를 떨어졌어도 다시 뿌리를 내려 생명을 구가하는 버들가지처럼 우리의 우정도 사랑도 그와 같이 시들지 말자는 다짐의 의미도 담겼다.

 

P129 – 여러 해 전 신문에서 어느 조경학자가 우리나라 한시에 자주 나오는 초목의 빈도수를 조사하여 통계 낸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것은 소나무도 국화도 아닌 바로 버드나무였다. 그는 이 결과를 놓고 버드나무가 우리 생활공간 가까이에 많이 있었으므로 빈번하게 시의 제재로 쓰인 것이 아니겠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버드나무가 봄날의 서정을 촉진시키는 환기물인 동시에 이별과 재회에의 염원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P131 – 부체는 더운 여름날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물건이다. 하지만 더위가 물러가고 가을이 오면 여름내 애지중지하던 부채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잊힌다. 마찬가지로 한 때 내게 그토록 다정하던 임은 어느덧 나를 까맣게 잊고 돌아보지 않으신다. 시인은 비록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을부채를 손에 쥐었다는 말만 가지고 이미 그녀가 임에게 버림받은 여인임을 구체적으로 말한다.

 

P141 – 외국시를 읽을 때는 특히 이점이 어렵다. 이러한 어휘들은 시가 속에 감춰둔 암호와도 같아, 이것을 해독하지 않고는 그 시에 접근하는 통로를 열 수가 없다.

미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 시인에게 한국의 대표시로 소개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국화하면 도리야 곶이온 양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처럼 추위를 아랑곳 않는 매운 절개를 상징하는 꽃으로 배워왔다. 그러기에 머나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라는 시인의 언급은 이것의 자연스런 변용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프랑스에서 국화는 장례식 때나 쓰는 죽음을 의미하는 꽃이다.

 

P143 – 도연명이 <음주>에서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캐다,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 라고 한 이래로 은사를 자처하는 이들은 자신의 집 울타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 있건 간에 모두 동리 東籬라고 하였다. 화가들도 덩달아 채국동리도를 다투어 그렸다. 이후 이 말은 세상을 피해 사는 고상한 선비의 거처를 상징하는 의미로 굳어져 시문 속에 자주 등장한다.

 

여섯번째 이야기 즐거운 오독

 

P148 – ‘그리고 사람을 그리다라는 제목을 단 수필집이 보인다. 여기서 그리고그림을 그린다인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인가. 아니면 단순히 ‘and’의 뜻인가, 또는 사람을 그려놓고 그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인가,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인가? 이 경우 언어는 어느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기를 즐기지 않는다.

 

P150 – 어떤 면에서 시인은 이러한 언어의 모호성을 은근히 즐기는 사람들이다. 시 속에서 이러한 의미들은 오히려 풍부와 함축이 된다.

 

P153 – ‘춘래불사춘이라는 구절은 1980년 봄에 모 정치자가 당시 군부의 서슬 푸른 위세를 빗대어 말해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던 사연 많은 구절이기도 하다. 뒷날 그녀는 죽어 흉노의 땅에 묻혔다.

 

P166– 10년 세월 동안 고향 함양을 밤낮으로 그리며 돌아갈 꿈을 키워왔는데, 이제 다시금 상건수를 건너고 나니 도리어 병주가 고향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서울 사는 사람은 언제나 전원의 목가적 풍경을 사모한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가면 며칠이 못 되어 다시 도회의 변화한 풍광과 따뜻한 커피 한잔이 그립게 마련이다. 아에 대한 처방은 무엇일까? 서울과 시골의 중간쯤에 사는 것은 어떨까?

 

P170 – 이 외에도 고사를 모르고 글자의 사전적인 뜻대로만 번역하는 데서 오는 오류는 연구자들 사이에 수도 없이 발견되는 것이다. 권필이 중국 사신을 맞으러 의주에 갔다가 겨울을 나며 몇 달 머물 때에 형 권겹이 멀리 그곳까지 아우를 찾아왔다. 감격의 상봉을 한 형제가 겨우 감정을 추스린 뒤 아우는 이렇게 그 심경을 읊었다.

 

P172 – 멀리 서울에서 우리 형제 걱정에 매일 대문간에 기대어 서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니 기쁘던 마음은 간데없고 구슬픈 생각에 목이 맨다는 이야기다. 한문이 갖는 언어의 함축과 정운, 그리고 시인이 행간에 감춰둔 마음을 십분 이해하지 못한 탓에 이런 오역이 나왔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이 언어의 미로 위에 숨겨놓은 코드를 독자가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진진한 지적, 감성적 여정이어서 때로는 오독도 즐겁다. 시인은 부러 말꼬리를 흐려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독자는 잠시 멍해 있다가 다시 코드를 찾아 나선다. 설사 가다가 길을 잠시 잃은들 어떠랴. 아니 애초부터 길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일곱번째 이야기 사물과 자아의 접속

 

P176 – 청나라 왕부지는 <석당영일서론>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정과 경은 이름이 둘이나 실제로는 나눌 수 없다. 시에 뛰어난 자는 이 둘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가장자리가 없다. 빼어난 시는 정 가운데 경이 있고, 경 가운데 정이 있다.” 이른바 묘합무은의 주장이다.

 

P180 – 누구를 기다리는가. 딱히 누구랄 것도 없는 막막한 기다림이다. 봄날의 하루해는 뉘엿뉘엿기운다. 그리움처럼 그림자가 길어진다.

제자는 허구한 날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익히다가, 마침내 바다의 짠 기운에 기혈이 삭아서 일찍 죽고 말았다. 우암 송시열이 <남운경에게>란 편지에 적은 사연이다. 그깟 시가 무어라고 불법 월경도 마다 않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애를 썼단 말인가. 시키는 스승이나 하란다고 하는 제자나 다 딱하다.

이것이 실화인가? 정말 좀 이해가 안되는 경우다.

 

P184 – “시가 뜻만 말하면 맑지 않아 맛이 없고, 경만 말해도 또한 맛이 없다. 모름지기 경과 뜻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좋다.” 문제는 언제나 정과 경의 조화다.

 

P195 – 하상이 <추수헌사전>에서 말했다. “시는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 곧장 말해 버리면 문제가생긴다. 시인은 그저 경상을 묘사하면서 정의가 절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왜 경만 보여주는가? 저도 모를 정서를 말로 표현하기는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쉽지 않다. 효과도 신통치 않다. 경물만 묘사했는데 정의가 드러날 수 있을까? 시를 통해 살펴보자.

 

P197 – 시인이 아무리 경만 말해도 그 속에 어느새 정이 녹아든다. 시인은 눈앞의 여러 대상 중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춘다. 렌즈야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초점을 맞추는 시인의 선택에 감정이 스민다. 시 속에서는 어떤 경물도 포착과 동시에 주관의 색채로 물들고 만다.

 

P198 – 시란 무엇인가? 품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뜻은? 나아가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말하는가? 문제가 여기까지 미치면 다소 복잡해지지만 위진 이전의 고시들은 영물보다는 영회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서거정은 <동인시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란 마음이 가는 바이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P200 – 그가 왜 평생 면식도 없던 이를 조문 왔던가. 폭군의 서슬에 모두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강상으로 제자리를 굳게 지켰던 그 정신을 사모해서라는 것이다. 선비의 늠연한 기개가 장하다. 이 시가 나오자 그때 지은 여러 만시 중에 가장 으뜸이라 하였다. 오억령의 이름 석 자가 이 한수로 세상에 더욱 드러났다. 위대할 손 시의 힘이여.

시 하나가 천년만년 이름을 드 높이는 경우로다.

 

P202 – 시는 찬 샘물이다. 시를 잘 쓰려면 물의 선별을 배워야 한다. 진정한 시법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최후의 현관이 있다. 그 현관 앞에서 서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 문을 여는 법은 아무도 일러줄 수가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제 손으로 직접 열고 들어가야 한다.

그 문 앞에 조차 설 수 있을까? 궁금해 진다.  

 

여덟번 째 이야기 일자사 이야기

 

P205 – 시인이 뭇 글자의 숲 속에 숨어 있는 꼭 맞는 딱 한 글자를 찾는 과정도 이와 다를 것이없다. 한 글자가 시를 죽이고 살린다.

시가 가진 매력이다. 함축과 상징, 한 글자로 모든 것을 말한다

 

P209 – 하나하나 골라 써보고 거울에 비춰 비교하듯 글자를 바꿔 넣었을 때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음미할 수 있어야 시안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P210 – 시안이란 시의 어느 글자가 좋고 어느 구절이 뛰어나다는 식의 개념이 아니라, 전체 시의 핵심이 집중되어 신묘한 빛이 엉겨 붙은 지점을 말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P221 – 일자사의 첫 번째 미감 원리는 의미의 중복을 피하라.’ 는 것이다. 시는 중복을 꺼린다. 한 글자도 넘치거나 부족해서는 안 된다. 이 절제된 경지를 한유는 이렇게 말했다. ‘풍부하되 한 글자도 남지 않고, 간략하되 한 마디도 빼먹지 않는다한 글자만 더하거나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글, 그런 시를 쓰라는 주문이다.

 

P223 – 두 번째 마감 원리는 여운을 남기고 호응을 중시하라.’는 것이다. 여운은 추상의 여백에서 생긴다. 시는 단정적 언사를 꺼린다. 사물과 시인이 만나 빚는 의경은 카메라 렌즈처럼 또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러 초점을 흐리는 데 묘한 맛이 있다. 그래도 의경의 호흡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P227 – 세번째 미감 원리는 시상의 은유돈후를 중시하라.’는 것이다. 감각적 직설보다는 애둘러 말하는 데서 온건한 맛이 깊어진다. 모난 말보다는 각지지 않은 표현에서 중후한 제취가 풍겨난다.

 

아홉번째 이야기 작시, 즐거운 괴로움

 

P235 – 예술의 전재들에게는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광기가 있다. 그들안에서는 열정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과 다른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느껴진다.

 

P237 –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잗다란 기교쯤은 까맣게 잊어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영욕도 득실도 생사까지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P249 – 가도는 매년 그믐날이 되면 반드시 그 한 해 동안에 지은 작품을 책상 위에 모아놓고, 향을 살라 두 번 절하고는 술을 부으며 빌었다. “이것이 내가 한 해 동안 고심한 자취다.” 그러고는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P252 – 소동파가 <적벽부>를 짓자, 사람들은 그가 고치지 않고 단숨에 지은 줄 알았다. 막상 이를 짓느라 버린 초고가 수레 석 대에 가득하였다. 그 사이의 고심참담이야 따져 무엇하겠는가.

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 같다. 소동파마저 이럴진대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능력없다고 좌절하지 말자.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비교하지 말자.

 

P258 – 지금도 날마다 시집이 쏟아져 나오고 잡지마다 시가 넘쳐난다. 하지만 낙루의 감격은 고사하고 수염을 꼬는 고심의 흔적조차 찾지 못할 시가 수두룩하다 정신은 간데없이 껍데기만 남은 시가 너무도 많다.

 

열 번째 이야기 미워할 수 없는 손님

 

P263 – 시마는 시 귀신이다. 시마는 어느 순간 시인에게 들어와 살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를 생각하고 시만 짓게 하는 귀신이다. 시마가 한번 붙으면 다른 일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시에만 몰두하게 된다. 더욱이 짓는 시마다 절창 아닌 것이 없다. 시마는 시인에게 즐거운 괴로움을 선사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P267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섯 귀신이 일제히 나와 눈을 부릅뜨고 혀를 차며 항의했다. ‘사람이 한세상을 산다는 것을 잠깐일 뿐이다. 내가 그대의 이름을 세워 백세토록 닳아 없어지지 않도록 했으니 그 공이 어찌 작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를 쫓아내려 하다니 참을 수 없다,”고 하였다.  

 

P269 – 길을 가면서도 시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시 생각, 심지어 꿈에서까지 시 생각뿐, 그밖에 다른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지는 증세 예의와 염치, 체모조차 우습게 보는 태도, 눈에 띄는 사물마다 허투루 보지 않고 거기에 담긴 비밀을 찾아내겠다고 달려드는 증상이 이른바 시마 중후군이다.

 

P271 – 첫째는 멋대로 붓을 휘둘러 어지럽게 하고, 샘솟는 듯한 생각과 봄날 구름 같은 태도로 번화함을 다투어, 이목을 현혹시키고 날로 진기를 소모케 하는 죄다. 둘째는 천지자연의 비밀을 엿보고 서책을 표절하여 오묘한 표현을 찾으며, 지구를 조탁하여 기이함을 다투며, 수염을 배배 꼬면서 정미함을 추구하여 마음을 격동시키는 죄다. 셋째는 온갖 형식과 격식을 만들어 변화를 뽐내고 솜씨를 자랑하여 임금의 마음을 방탕케 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죄이다. 넷째는 시휘를 저촉하고 재앙의 기틀을 밟아 몸을 곤궁케 하고 비방을 불러들이는 죄이다.

 

P282 – 시마는 한마디로 옛사람의 시를 향한 열정의 다른 표현이다. 시귀는 사물의 비밀을 끝까지 꿰뚫으려는 시인의 집착이다.

 

P283 – 무언가 결핍된 상태, 그 결핍을 채우려는 시인의 정신이 죽창처럼 곤두서 있는 지점에서 시마는 슬그머니 시인에게 스며든다. 그래서 시인은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열한번째 이야기 시인과 궁핍

 

P289 – 모든 것이 갖춰진 넉넉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 입을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 속에 이른바 정서란 것이 생겨난다. 그것이 슬픔과 분노, 격정과 눈물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이 바로 시이다.

 

P292 – 후세는 사마천의 이 발분저서의 정신을 높여 기린다. 연암이 강조한 사마천의 마음발분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주자의 풀이에 따르면 이란 마음을 통하려 하지만 아직 얻지는 못한 상태를 말한다.

 

P294 – 시인은 코앞에서 나비를 놓쳐버린 소년의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좌절 앞에서 주저앉지 않는 발분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발분하는 서정 없이 어찌 남을 감동시키겠는가

 

P295 – 한유가 말한 불평즉명의 논리를 계승했다. 선비가 마음속에 지식과 경륜을 쌓아두고도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없을 때 마음속에 근심과 울분이 쌓인다. 이것을 글로 표현하니 보통 사람이 말하기 어려운 것을 그려낼 수 있다.

 

P301 – 문학은 충족에서 나오지 않고 상실과 일탈에서 나온다. 어느 여류 시인이 시를 쓸 때는 먼저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서 실연의 기억과 같은 슬픈 일을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커튼 치고 촛불 켠다고 좋은 시가 나올 수 없다. 자기 최면의 수식은 교언명색의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그친다면 시인은 가능적인 언어조립공에 불과하다.

 

P307 – 회재불우 즉 재주를 품고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니 여기에서 갈등이 생긴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기에 대상에 투사하여 해결하려 든다. 그 결과가 독자의 입장에서는 공이라는 평가요, 자신의 입장에서는 동일성의 상태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다는 위안이다.

 

열 두번째 이야기  - 시는 그 사람이다.

 

P314 – 문여기인, ‘즉 글은 그 사람과 같다고 한다. 무심히 내 뱉는 말 속에 이미 그의 인생관이나 처세의 방식이 드러난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

 

P318 – 모란을 아끼는 것은 꽃이 아니라 부귀를 사랑함이다. 붉고 농염한 자태, 동산 가득 대접을 받으며 호사롭게 피어난 모란, 부러울 것이 없는 당당한 모습이다.

 

P319 – 기상론이라느 바로 시인의 기질과 삶의 자세가 그의 시에 거울처럼 비쳐진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만나보지 않고도 그 사람을 알게 된다.

 

P323 – 뒤로 벌렁 누워 오랜만에 보는 주인이 반갑다고 꼬리를 흔드는 누렁이의 모습이 이를 바라보는 주인의 씁쓸한 표정과 함께 함께 마치 영화를 한 장면처럼 선명하다.

낙제하고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내의 냉대다. 당나라 때 두고가 과거에 낙방하고 집에 돌아가려 할 때, 아내가 시를 보내왔다.

 

P326 – 하지만 섭리는 어김없이 어느덧 높아진 가을 하늘에 눈이 시리다. 손톱으로 톡 치면 쨍하고 금이 갈 듯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 상쾌하다.

 

P328 – 정약용의 이 연작을 읽노라면 갈증 끝에 청량음료를 마신 듯 체증이 후련하게 내려간다. 이러한 경계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가슴 속에 독만권서의 온축과 행만리로이 기상을 담고서야 가능하다. 호방하기로는 다시 이런 시는 어떨까.

 

P330 – 송익필의 일생 학문이 이 한 수의 시에 녹아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군자는 어찌하여 늘 스스로 만족하고

소인은 어이해 언제나 부족한가

부족해도 만족하면 언제나 여유롭고

족한테도 부족타 하면 언제나 부족하리

넉넉함을 즐기면 족하지 않음 없고

부족함을 즐기면 족하지 않음 없고

부족함을 근심하면 만족할 때가 없네.

순리대로 편안하니 또 무엇을 근심하리

하늘 원망 남 탓해도 슬픔은 끝 없으리.

내 것을 구한다면 족하지 않음 없고

밖의 것을 구하면 어이 능히 만족할까.

표주박의 물로도 즐거움은 남음 있고

만 전짜리 음식에도 근심은 끝이 없네

고금의 지락은 족함 앎에 달렸나니

천하의 큰 근심은 부족함에 있도다.

진 이세가 망이궁서 베게 높이 햇을 젠

죽도록 즐긴대도 부족할 줄 알았지

당 현종이 마외파서 길이 막히었을 때

다른 삶을 산다 해도 만족하지 않았으리.

필부의 한 아름도 족함 알면 즐거우나

왕공의 부귀로도 오히려 부족하네.

천자의 한 자리도 부족함을 아나니

필부의 가난은 그 족함 부러워라.

부족함과 족함이 모두 내게 달렸으니

오물 어이 족함과 부족함이 되리오.

내 나이 일흔에 궁곡에 누웠자니

남들이야 부족타 해도 나는야 족하다네.

아침 산에 흰 구름이 피어남 보노라면

절로 갔다 절로 오는 높은 운치 족하고,

저물녘엔 푸른 바다 밝은 달 토함 보면

가없은 금물결에 안개가 족하도다.

봄에는 매화 있고 가을엔 국화 있어

피고 짐이 끝없으니 깊은 흥취 족하고,

책상 가득 경서엔 도의 맛이 깊으니

천고를 벗 삼으매 스승과 벗 족하다네.

덕이야 선현 비해 비록 부족하지만

머리 가득 흰 머리털 나이는 족하도다.

내 즐길 바 함께함에 진실로 때가 있어

몸에 책을 간직하니 즐거움이 족하도다.

하늘 보고 땅을 굽어 능히 자재로우니

하늘도 나를 보고 족하다고 하리라

 

P332 – 달리 무슨 사족이 필요하랴. 시는 곧 그 사람이다. 알려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언어가 제 스스로 말해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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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4 22:35:49 *.124.22.184

"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 같다소동파마저 이럴진대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능력없다고 좌절하지 말자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비교하지 말자."


참 쉽지 않아요. 능력없다 좌절 안 하는 것도, 다른 사람 부러워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는 거요. 글을 잘 쓰는 비법은 없고 단시, 습관이 글을 잘 쓰게 하는 방법이라고 이기주 작가가 말했대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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