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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4일 10시 24분 등록

11기 연구원 장성한

한시미학산책

정민 지음

휴머니스트

 

 

1. 저자에 대하여

 

! 넌 사내자식이 뭔 말이 그렇게 많아?”

“네?”

“뭔 말이 그렇게 많냐구!”

지도교수가 논문을 탁 집어던졌다. 석사 학위 논문 심사 때 일이었다. 학생이 제출한 논문에 권필(權韠·1569-1612)의 한시를 적은空山木落雨蕭蕭(공산목락우소소)’라는 대목이 있었다. 이걸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라고 옮겼던 것. 우연히 그 쪽을 펴든 교수 입에서 불벼락이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학생이왜 그러세요?” 물었다.

“이거 무슨 자야?”

“빌 공()입니다.”

“거기자가 어딨어!”

‘빈 산하면 될 것을텅 빈 산이라고 늘여 썼다는 얘기였다. 질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뭇잎이나, 잎이나!” 하면서나무를 싹 지우고, “‘떨어지고, ‘지고!” 그러고는떨어를 없앴다. “비가 부슬부슬 하면 내리는 거여! 부슬부슬 올라가는 비도 있나?” 그러면서내리는데까지 떨어냈다. 결국 남은 것은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처음 번역문의 딱 절반이 돼 있었다.

나도 글을 쓰고 정민교수가 혼났던 방식으로 글을 덜어내 보자!

 

‘아, 글이란 보태는 게 아니라 줄이는 거구나.’ 정신이 번쩍 났다. 쩔쩔 매던 대학원생의 이름은 정민. 오늘날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정평이 난 고전 인문학자다. 그의 간결한 글쓰기는 그날의 대오각성에서 시작됐다. “그 후 박사 학위 논문을 쓸 때는 마지막 한 달을 문장 줄이기에만 매달렸어요. 그랬더니 논문 분량은 1400매에서 200매가 줄더군요. 글이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어딜 찔러도 들어갈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나 역시 정신이 번쩍 났다. 위와 같이 줄이기만 해도 뜻은 전달된다. 은은한 감정이 더 강하게 가슴으로 들어온다. 이런 글을 쓰도록 하자!

 

나이 서른에 박사가 되고 이듬해 그는 모교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전임교수가 됐다. 얼마 전엔 인문대 학장까지 맡아 더 바빠졌다. 지난 8월부로 그의 집무 공간이 된 학장실에서 그를 마주했다. 새로 출간된 그의 책새 문화사전’(글항아리)을 들고 찾아간 길이었다. 하지만 모처럼 얻은 인터뷰 시간.(평소 그의 꼼꼼한 시간 관리와 왕성한 지적 생산물을 생각하면 허튼 대화로 시간을 뺏기가 미안해진다) 물음을 책에만 가둘 수는 없었다. 정 교수도 시계를 힐끔힐끔 쳐다보긴 했지만, 걸려오는 여러 통의 전화들을 미뤄가며 질문에 끝까지 답했다. 글만큼이나 정돈된 말들 사이로 그의 글과 책 쓰기, 학문의 지나온 길과 나아가는 길이 보였다. 문답을 소개한다.

 

(중략)

 

-선생의 작업 방식은 복화술 같다. 옛것을 불러내 말을 하게 한다. 이런 스타일의 글은 언제 어떻게 시작했나?

 

"옛것을 불러내 대화한다는 느낌을 늘 갖는다. 옛글을 읽다 보면 반짝 빛나는 보석 같은 장면, 뭉클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나만 알게 된 이 장면에 일반 독자들을 가닿게 하려면 매개가 필요하다. 이런 식의 글은 명청 시대청언소품(淸言小品)’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음을 맑게 하는 짧은 글인데, 일종의 아포리즘이다. 중국에는 굉장히 발달해 있다. 대표적인 게 채근담이다. 짧지만 큰 울림을 주는 글이다. 우리는 이런 게 없는 줄 알았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오히려 너무 많았다. 그동안 이덕무나 성대중의 소품들을 찾아내 번역해서 알리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그냥 번역만 해서는 느낌이 안 산다. 울림이 오게 하려면 뭔가 설명이 들어가야 한다.

아포리즘이란 경구(警句)나 격언(格言), 금언이나 잠언(箴言) 등을 일컫는 말이다. 인생의 깊은 체험과 깨달음을 통해 얻은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기록한 명상물로서 가장 짧은 말로 가장 긴 문장의 설교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일반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발한 생각이나 기지를 짧은 글로 나타냄으로써 어떠한 원리나 인생의 교훈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일종의 충고나 처세(處世)훈을 주는 것은 격언이라고 하고, 주로 지혜와 교훈을 담은 말은 잠언이라고 한다.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작가 불명의 말들을 이언이나 속담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아포리즘은 이언이나 속담처럼 널리 유포되어 사용된다는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작가의 독자적인 창작이며 또한 교훈적 가치보다도 순수한 이론적 가치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이언이나 속담과는 구별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포리즘 [Aphorism]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국학자료원)

 

그런 설명을 달아 쓰기 시작한 것이 당시엔 새로운 시도였고 반응이 좋았다. 교수 4-5년차 때였다. 그때 나는 30대 초에 교수가 돼서 힘들었다. 마음 고생에다가 식도에 문제도 생기고 해서 먹기만 하면 토하고 체중이 20킬로 줄었다. 바지가 내려와서 멜빵을 했다. 수업도 앉아서 하고, 끝난 후에는 쓰러져서 한시간씩 자고. 저러다 죽겠다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4-5년 죽을 고생을 했다. 그때 청언이 내 마음을 붙들어줬다. 하나씩 읽을 때마다힘을 내야지’ 아, 이런 거구나했다. 그때 감상을 하나씩 블로그에 올리면서 마음을 조금씩 추스렸다. 그게 반응이 좋아서 책으로도 냈고, 비슷한 작업들을 꾸준히 해왔다.

 

글을 쓸 때마다 내가 옛글에 대한 통역자가 되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같은 글을 읽어도 어떤 느낌을 잡아내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한문 해석에 더해, 그런 감성이 접촉되는 지점을 끄집어내 지금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환하는 작업은 색다른 일이다. 그 일에 흥미를 많이 느꼈다. 이런 걸 나라면 어떻게 설명할까, 그 사람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 배경에는 내가 맨처음 한시로 논문을 썼다는 사실도 작용했다. 한시라는 게 압축된 언어 속에서 마음을 풀어내는 작업이다 보니 많이 도움됐던 것 같다. 그게 한 흐름으로 가서 만난 거다.”

 

-조선일보에 연재 중인 칼럼세설신어(世說新語)’도 그런 방식인데, 지난 번허착취패(虛著取敗)’ 편은 퇴계의 글을 다산이 보고 쓴 글을, 다시 선생이 풀고 더한 글이다. 이 경우엔 뭘 염두에 두고 썼나?

 

“글을 쓸 때에는 뭔가 구체적인 것을 두고 쓰기도 하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다. 칼럼이 나가는 순서도 있고. 평소 글을 읽다가 좋은 걸 보면 항목별로 분류해 파일로 저장해 둔다. 간단한 메모와 함께. 글을 쓸 때가 되면 이번엔 뭘 할까 생각해서 골라낸다. ‘허착취패칼럼은 그 무렵 어떤 인사의 발언을 염두에 두고 썼다. 그걸 지금 내 입으로 거명하기는 좀 그렇다. 아무리 잘 나가도 한번에 추락할 수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담은 글이었다.”

글을 읽다가 좋은 걸 보면 항목별로 분류를 한다메모와 함께 좋다는 것이 무엇일까? 항목을 나누는 기준을 무엇일까? 정민 교수의 방법이 궁금하다.

 

-그런 글이 읽는 사람에게는 숨은그림찾기 풀이처럼 행간의 의미를 유추하는 재미를 주기도 한다.

 

“어떤 때는 나도 깜짝 놀란다. 그런 뜻으로 쓴 게 아닌데, 전혀 다르게 유추한 댓글이 달리는 경우를 본다. 이렇게도 읽을 수 있겠구나 싶다. 그건 읽는 사람 몫이니까. 그런 점에서 고전은 열려 있다.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중략)

 

[인터뷰] 정민 '나의 글이 가는 길' -아직도 더 할 게 있나?

 

“더할 게 있는 게 아니라 아직 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들 만남은 정말 멋지다.(이 때부터 정 교수의 음성은 약간 들떴고 눈에서는 빛이 나는 듯했다) 20-30대 때의 그들을 보면 정말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그 그룹이 보석 같은 시기에 얼마나 아프게 만났고, 아름답고 따뜻하게 교류했던가,(이 대목에서는 내가 뭉클했다) 그걸 한번 좍 필름처럼 복원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연암을 했다가 다산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18세기로 올라갔는데, 여기서 다산을 타고 초의와 추사로 내려가면 19세기로 진입하는 거고, 다시 연암 쪽으로 올라가면 그쪽으로 가는 것이다. 이게 다 내겐 열려있는 공간이다. 아까 말한 태평성시도가 바로 이 시기의 시정 공간이다. 그 그림에 담긴 정보들이 이 사람들 책에 나오는 정보들이다. 이게 따로 노는 게 아니다. 모두가 그 시기 문화사이자 19세기 지성사로 넘어가는 접점이다. 다 만나는 작업이다. 연구자로서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그러고 보면 연구의 주 무대가 18세기다. 18세기 학회도 따로 해온 것으로 안다.

 

“한 학기에 한 번씩 모이는데 이번 주말에도 있다. 이번엔 18세기의 장인과 명품이 주제다. 지난번엔 1차로 18세기의 맛을 했고.”

 

-어쩌다 18세기에 빠지게 됐나?

 

2000년초 인터넷이 폭발하던 시기에, 그때가 18세기 상황과 아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보가 폭발적으로 늘고 쏟아져 들어오니까, 정보 자체보다 품질을 판단하는 게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18세기도 중국에서 사고전서, 고금도서집성 같은 책들이 한 짐씩 들어왔다. 한 질에 오천권씩 하는 것들이 막 쏟아져 들어오니까 예전엔 정보였던 것들이 갑자기 지식 쓰레기가 돼버린 거다. 그렇잖아도 성리학적 가치, 이런 토론이 지겹게 느껴지던 차에, 비둘기 사육 같은 게 부가가치 있는 정보가 된 거다. 서울에 비둘기 사육이 유행하면서, 어떤 게 값나가고 어떻게 길러야 하고 품종은 어떻게 개량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가치있게 됐다. 유득공 같은 사람은발합경(鴿)’이라는 비둘기 책을 냈고, 이서구는녹앵무경(綠鸚鵡經)’이라는 앵무새 사육서를 썼다.

 

이 사람들 지식 편집 방식이 똑같다. 가령, 이서구가 북경에서 앵무새를 갖다 키우면서 중국 앵무새 관련 책들을 정리하고 사육 경험을 합쳐 책을 써서 보여주니, 박제가가 거기다 새로운 사실을 주석처럼 덧붙여 주고, 이게 다시 이덕무한테 가서 또 추가되는 식이었다. 이렇게 한바퀴 돌고 나면 텍스트가 세 배쯤 늘어난다. 이걸 재편집한 다음 연암에게 가서선생님, 서문~” 하면 책 한 권이 나오는 식이었다. 이건 완전히 정보 사냥 대회였다. 이들의 직업이 책을 검사하는 검서관이었다. 요즘 정보검색사쯤 된다.

 

2000년대 밀레니엄 시작될 때, 인터넷 정보 혁명이다 해서 위기감이 팽배했던 차에, 18세기 지식인의 대응 방식이 그때 정보화 담론과 맞아떨어졌다. 18세기 지식인들은 어떻게 작업했을까. 그 메커니즘이 궁금했고 그걸 찾다 보니 결국 다산의 지식 편집론으로 가게 됐다. 그런 관점에서 18세기를 들여다 보니 새로운 게 많이 보였다. 거기에 더해 서양의 18세기 경험을 담은 담론을 자꾸 접하다 보니까, 어쩌면 우리에게도 그런 18세기가 있었고, 오히려 더 셌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18세기는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선험적 과정이었다고나 할까. 지금 우리가 혼란스럽다면 그 시기를 벤치마킹해서 뭔가 길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변함없는 생각이다. 지금 내가 하는 작업도 18세기적 지식 경영으로 하는 것이다.”

 

-그때 나온 게다산의 지식경영법이었나?

 

2005년 미국 갈 때 생각하고 가서 쓴 것이다. 그 전에 연암 그룹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하고 논문을 썼는데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이라는 논문집으로 나왔다. 그 중에서도 출중한 다산을 집중해서 들여다본 게 다산의 지식경영법이었다.”

 

-그러니까 다산의 지식경영법은지식을 경영하는 법이란 뜻인가? ‘지식으로 경영하는 법이 아니라?

 

“그렇다. 서문에도 썼지만 원래 대학원생 논문 작성법으로 쓴 것이다. 그걸 경영의 맥락에서 읽으면서 가져간 것이다. 옛글이라는 게 읽는 사람마다 나름대로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다산의 지식경영을 경영 이론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그까지 나설 생각은 없고. 그걸 가져다 발전시키는 것은 그 쪽에서 할 일이다. 내가 곁눈질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동안 다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맨날 목민심서 어쩌고 기중기 뭐 이런 얘기만 했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건지 컨텍스트 얘기가 없었다. 목민심서만 해도 애민정신, 공무원의 청렴만 강조하는 식이다. 언젠가 남양주 시청에서 찾아와서 강연을 좀 해달라고 했다. 다산이 자신들의 멘토인데, 다른 강연자들은 와서 하는 얘기가 맨날 공무원 청렴 이야기다, 우리가 무슨 도둑놈 집단인가, 그런 훈계만 들으니 불편하다고 했다. 그런데 내 책을 보니 다산한테 정말 배워야 할 것, 적용할 게 많다면서 무조건 해달라는 거였다. 하도 부탁을 하고, 사정도 이해가 가고 해서 거기 가서는 강연을 한 번 했다.

 

다산이 대단한 과학자였고 다빈치 같은 르네상스 인간형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다 안다. 하지만 그게 그 시대에 얼마나 강력한 콘텐츠였고, 그가 그 많은 작업을 어떻게 동시다발로 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좀 바꿔 이야기한 거다. 그러면 다산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걸 두고도 기존 다산학계에서는 내가 경영인 입맛에 맞춰 돈 벌려고 쓴 책이라고 의심하는 것 같다. 다산 연구자들은 그 책은 인용 안한다. 안타깝다.”

 

-요즘 인문학이 붐이다.

 

"이제는 진부해진 감마저 있다. 예전엔 짝퉁인지 아닌지가 비교적 명확했는데, 요즘은 편집 기술 덕에 묘하게 가려진다. 말하자면 지식 생산자보다 편집자들이 많아진 것 같다. 콘텐츠가 많아지니까 골라서 에디팅만 하는 식이다. 지난번에도 어떤 분이 세종과 다산의 이야기를 함께 묶어서 책을 냈는데, 보니까 세종대왕 책하고 내가 쓴 다산 지식경영법 둘을 합쳐 썼더라.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내 책 몇 단락을 인용하겠다고 해서 허락했다. 책 나온 걸 보니까 거의 반은 내 책이고 반은 다른 사람 책을 갖고 에디팅만 하는 식이었다. 참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편집이 중요해지긴 했는데 편법으로 남용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특히 자기계발서 쪽이 그런 것 같다. 자기 표절에 혼성 모방도 많고. 독자들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제목이 근사하니까 현혹된다. 하지만 이책 저책에서 좋은 것만 뽑아서 자기 글인 것처럼 펼쳐놓은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책은 신뢰를 높인답시고 원문을 달아놨는데 보니까 오자투성이다. 편집자도 그럴 능력이 못 되니까 못 잡아낸다. 그러면 출판 시장 자체가 혼탁해진다. 독자들도 이제는 으레 또 그렇고 그런 책이겠지 하고 말게 된다. 그런 식으로 시장이 얇고 좁아지게 된다. 그럴 경우 새로 진입하는 저자에 대한 신뢰도가 약하니까 지명도 있는 저자들에게 자꾸 기대게 되고, 이런 저자들은 대량 생산하게 되고 그러다가 선을 넘고 품질이 떨어지고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인문학 강연 연사로 0순위일텐데, 다 거절하는 걸로 안다. 어떤 원칙이 있나?

 

"지금도 수시로 요청 전화가 온다. 하지만 다 거절한다. 그런 데 갔다 오면 여러가지로 마음이 붕 뜬다. 가령 조찬 강연만 해도 그 전날 잠을 설치게 된다. 남의 회사 일인데 늦잠이라도 자면 어떡하나 싶어 깨고 나면 두 시 반이고 깨고 나면 세 시고 이러니까. 또 강연 전에 PPT 자료를 보내달라고 하는데, 그걸 준비하다 보면 하루가 간다. 갔다가 학교 오면 멍하다. 최소 이틀이 나가떨어진다. 그런 거 하면 공부를 못 하겠더라. 그동안 강연도 열심히 다니고 했으면 누구처럼 돈도 많이 벌고 책도 더 많이 팔았겠지만.(웃음) 하지만 그랬으면 지금처럼 생산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냥 소진되고 마는 거지. 내가 주도해서 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끌려다니면서 소모되는 것은 싫다.”

 

(중략)

 

-남양주시 강연에서는 뭘 얘기했나?

 

“다산식 작업의 위력을 들려줬다. 대세를 장악하거나 정보를 장악하는 데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이 되는지 설명했다. 사실 그 과정이라는 게 아주 간단하다. 정조가 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능)에 나무를 8년간 심게 했다. 다 심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어느 고을에서 어떤 나무를 몇 그루 심었는지 보고하라고 했다. 8년 동안 심은 수 천 그루를 어떻게 아나, ‘못 하겠는데요하니까, 정조가 다산을 불러네가 해결해라고 했다. , ‘보고서가 한 권을 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다산이알겠습니다하고는, 각 고을에 나무 심은 공문을 다 모아다 날자 순으로 분류했다. 그걸 가지고 표를 만들어 항목을 만들고 각 수치를 기입하게 했다. 그 결과를 한 장으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오늘날 엑셀을 한 것이다. 다산은 액셀의 원리를 이미 그때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들려줄 수 있는 얘기는 이런 것이다. 현륭원에서 임무 받고도 안된다고 할 때 다산은 책 한 권이 아니라 표 한 장으로 끝냈다.

 

또 정조가 화성 지을 때 다산에게 중국의 기기도설을 주면서 거중기를 만들라고 했다.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프린스턴대에 갔을 때 원본을 봤다. 거기 나오는 그림을 보니 다산의 고민이 명확히 이해됐다. 서양의 기기도설은 전부 구리나사로 이빨을 맞물리게 한 기아 방식이다. 이게 도르래와 연동돼서 물건을 들어올리는 건데, 다산은 도르래 열두 개로만 연동시켜 들어올리게 했다. 이건 완전히 조선형 거중기다. 다산은 강도 높은 구리 나사를 만들 기술력이 조선에 없다고 보고, 다르게 만든 것이다. 이 두 그림을 보여 주면서 이게 다산이라고 얘기했다. 당시 열악한 상황에서 이런 미션을 줬을 때 다산은 창의적으로 맞춰서 해냈다고. 경영자들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런 말 할 필요도 없다. 다산은 이렇게 했다고 설명하면 나머지는 자기들 언어로 알아듣는 거니까.

 

예전에 에버랜드 사장이 쓴 글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언론에도 나서 화제가 됐다. 그가 에버랜드를 세계적인 놀이공원으로 만들려고 외국 벤치마킹을 열심히 하다가 내가 쓴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책을 읽고는, 내가 왜 이걸 몰랐지했다는 내용이다. 디즈니랜드를 벤치마킹해 봐야 비슷한 가짜지 새로운 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 다 백지화하고 우리식 공원 개념으로 바꿔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나는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인데 그랬다고 한다. 연암이 그렇게 파워풀하다. 그 정도의 지적 자극을 준다. 그렇게 해서 큰 회사가 방침과 정책을 흔들어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오리지널 텍스트를 넘겨주는 사람도 필요하고, 이걸 받아서 가공해 전달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그걸 다시 받아서 경영자들에게 맞춰 얘기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내가 그쪽에 가서 직접 만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콘텐츠의 수준을 유지하면서 계속 보여주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역할과 다양한 접근을 허용하는 것이 인문학의 품이다. 그런 역할들을 서로 인정하는 여유들이 필요하다. 그런 것들에 대한 상호존중이 요즘 좀 미약한 느낌이 든다.”

 

-선생은 인문학의 실용적 힘을 일찍 보여준 경우인데, 요즘은 누구나 인문학을 얘기한다.

 

“너무 많아진 감이 있다. 문제는 어쨌거나 콘텐츠의 신선도가 중요한데 이건 전문성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오리지널 텍스트에 접근하는 능력은 없이 남이 해놓은 걸 뽑기만 해서는 절대 콘텐츠의 힘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건 그냥 간식 하듯이, 재밌네 하고 지나가는 것일 수는 있지만. 대중성이라는 것은 독자를 끌어올려야 하는 거지, 자기가 내려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령 내가 쓴삶을 바꾼 만남은 다산과 그의 제자 황상 이야기를 쓴 책인데, 가벼운 게 아니다. 어려운 한시 인용해가며 정보를 재조직해서 충실히 쓴 것 뿐인데, 그걸 교육 현장에서 읽고 감동했다는 것은 별개 문제다.

 

콘텐츠의 품질과 신선도가 살아있다면 독자들의 사랑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잠깐하다가에이하게 된다. 요즘은했다가에이하는 게 너무 많아지니까할 것도 다에이로 끝나버린다. 그러면 좋은 것도 지레그런 걸 꺼야라며 간과해 버리고 만다. 그럴수록 인문학자들이 콘텐츠의 선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고, 전문성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전문적인 깊이가 있는 정보를 가졌거나, 질문의 방향이 새로워야 한다. 다산의 애민 정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얘기들은 많이 했지만 지식경영법에 대해 쓴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나. 나는 다산의 작업 과정에 초점을 맞춘 거였다. 다산 자체는 새로운 콘텐츠가 아니다. 질문을 바꾸니 새로운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문학자들이 할 일이 앞으로도 굉장하다.

 

또 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사실 나는 문장론 전문가다. 글쓰기 말이다. 문장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9년 대만에서 연구 마치고 들어올 때 번역해서 갖고 온 옛 문장 이론 텍스트만 3000매 분량이다.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막론했다. 그걸 아직 손을 못 대고 있다. 이거면 지금 논술도 해결된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글쓰기로 시험보고 인재 선발한 나라 아닌가. 형법 민법 시험 본 나라 아니다. 글쓰기 문화가 얼마나 찬란한데. 이 대단한 글쓰기 이론을 현대적으로 써주면 좋을 텐데. 옛날에 글쓰기 주제와 구성은 어땠고 개요 작성은 어떻게 했고, 문장에서 탄력을 넣는 기술은 어떤 게 있었고. 얼마나 굉장한지 모른다. 그것도 해야 한다. 할 게 참 많다.”

 

[인터뷰] 정민 '나의 글이 가는 길'  -선생이 주목 받는 이유도 옛 문헌에 대한 전문성 외에 간결한 글의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문장론을 전공했다고 하지만 이론적 기반과 실행은 다른 문제다. 글쓰기의 비결이 있나?

 

“나는 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간결성이라고 생각한다. 군더더기를 빼는 것이다. 옛 글이론에서 한결같이 하는 얘기다. 절대로 형용사와 부사를 적게 쓰라는 것이다. 한 글자만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내가 맨날 들려주는 얘기가 있다. 내 석사학위 논문 심사 때였다. 권필의 한시 중의空山木落雨繡繡(공산목락우수수)’라는 대목을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라고 옮겼다. 지도교수가 이걸 보더니 호되게 야단을 쳤다. 불필요한 단어가 많다고. 곁가지를 다 쳐낸 끝에 결국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로 절반이 줄었다. 거기서 진짜 충격을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 쓸 때는 한 달 동안 문장 줄이는 것만 했다. 그랬더니 1400매에서 200매가 줄더라. 물론 글도 좋아졌고. 옛글이 다 그렇다. 그걸 원리화한 게 문장론이다. 내 글에 그런 게 많이 들어가 있다. ‘글에는 여운이 있어야 한다’ ‘절대 다 말하면 안된다’ ‘드러낼 듯 감춰라’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의미가 전달되는 글을 써라이런 금언이 수도 없이 많다.”

 

-정민의 글쓰기 책이라면 사람들이 관심 많을 것 같다.

 

“슬슬 시작하려고 한다. 그동안 학생들과 수요일 저녁마다 한문 원전 읽기를 해왔다. 3개월이나 6개월에 하나씩 끝내는데, 학생들에게 돌아가면서 소리내 읽히고 번역해서 다시 읽히고, 그걸 내가 바로잡아 주고 다시 읽고 나면, 마지막에 그걸 받아 쳐서 파일로 쌓아두는 식이다. 그렇게 하면 같은 원문을 모두 다섯 번 읽게 된다. 이런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그때 훈련 받은 친구들이 그 방식대로 해서 책도 내고 한다. 그렇게 하면 한문 실력이 금방 느는 걸 느낀다. 처음엔 완전 초보였다가도 6개월 지나면 조금 찾는 법도 알고, 내가 중간에 보충 설명을 하고 문장의 기교 같은 것도 설명해주면 훨씬 더 좋아지는 걸 본다.”

 

(중략)

 

-선생은 지금 같은 역할을 예감했나. 원래 꿈은 시인이라고 들었다.

 

“시인 얘기는 학부 때 이야기고.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지."

 

-언제 이런 방향을 결심했나?

 

"나는 한시로 석사를 했다. 시 비평에 관한 작업에 관심이 많았다. 예전에 '한국역대시화유편'이라고 해서, 한시를 주제별로 분류한 570쪽짜리 자료집을 낸 적이 있다. 현대시학이라는 잡지에서 현대시 독자를 위해 옛날 한시 비평이나 한시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해서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 목월 선생을 추모하는 어떤 자리에 우연히 합석했다가 나를 한시 전문가라고 소개하니까, 현대시학 주간이 부탁해서 한 편 쓰게 됐다. 그 글이 그 다음달 평론 세 군데에서 인용됐다. 옛날 시인들이 이런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나는 그냥 옛글에서 시화 에피소드 몇 개를 모아 정리한 것이었는데, 이걸 시인들이 인용하고 난리가 났다. 유안진 선생이나 박희진 선생 같은 분은 폴 발레리의정신의 체조라는 시가 생각났다며팬 레터를 보내오기도 했다. 바로 두 달 뒤, 현대시에서 연재하자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쓴 게한시미학산책이었다. 2년 반 연재했다. 그때 반응이 대단했다. 지금도 시인들이 시집을 많이 보내온다.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에피소드 중심으로 썼는데 내용들이 재밌다는 반응이 많았다. 중국의 시학이론은 많았지만 우리는 없었는데 그 공백을 메운 셈이다. 내 책의 이론은 중국이론이었고 예시를 우리 걸로 들었는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 식의 글쓰기는 못 보던 거니까. 그전까지 한시에는 관심이 있지만 막상 한시 책을 보면 뭔지 모르니까 짜증이 났던 상황에서 내가 행간을 풀어줬으니까. 그때 처음으로 대중적인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 식으로 책이 나오고, 심지어 시인들도 시창작론 강의 교재로 쓰기도 했다. 그때 상당히 고무가 됐다.

 

그러다 연암에 매료돼 빠져들면서, 3년 뒤 현대시학에서 다시 연재했다. 그게비슷한 것은 가짜다였다. 연암의 산문미학을 갖고 쓴 것이었다. 예술미학에 관한 내용이어서 한시미학보다 더 어려웠는데 더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옛날 사람들 사유가 이렇게 대단하구나 하고 사람들이 실감하게 됐다. 정말이지 연암은 막강하거든. 거기에 사람들이 다 한방을 먹은 것이다. 그렇게 두 번 연재를 하면서, 몸이 아픈 중에 짬짬이 위안으로 쓴 아포리즘도 편승이 되고 하면서, 이런 식의 글쓰기가 한 범주로 자리잡게 됐다.”

 

-독서론도 여러 곳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 것이 좋은가?

 

“독서에서 가장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다독의 개념이다. 흔히 구양수가 말한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다작(多作)을 얘기한다.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독을 그저 이책저책 많이 읽는 거라고 생각하고, 1년에 백권 읽기 같은 운동도 하는데, 나는 그런 것은 독서법 중에 제일 나쁜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같은 책도 여러 번 읽어야 할 책이 있고, 그냥 한 번 보고 지나가야 할 책도 있다. 또 목차만 봐도 대개 알 만한 책도 있고, 한두 장만 읽어 보면 더 볼 것도 없는 책도 있다. 그걸 어떻게 똑같이 다 읽나. 1년에 백 권이면 사흘에 한 권씩 해치우는 각오로 읽는 건데, 그런 어거지로 읽는 독서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하나를 읽어도 곱씹어서 읽을 책과 되풀이해서 읽을 책도 있고, 소리내 읽을 때 훨씬 더 위력이 있는 책들도 있다. 아무데나 가까이 두고 틈 날 때마다 읽어서 환기해야 할 책도 있다. 종류별로 갈라서 읽어야지 획일적인 방식으로는 읽어서는 안된다.

 

한 책을 되풀이해 읽는 것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너무 간과한다. 적어도 몇 권 정도는 그런 책이 읽어야 한다. 멘토가 될 책들이다. 요즘 논어 같은 책이 그런 게 될 수 있다. 한구절 한구절 음미를 할 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이니까. 어떤 것은 외워가며 읽기도 하면 좋다. 우리 시대에 사라진 것 중 하나가 낭독의 즐거움이다. 소리내 읽는 독서 습관이 없어졌다. 그냥 눈으로 좍 읽어내리고 마는 경우가 많은데, 글의 결을 익히거나 할 때 좋은 글을 소리내 읽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다산이 제일 강조한 것은 초서(抄書). 베껴쓰면서 읽는 것이다. 내가 어제 학생들과 학술답사를 가면서 급하게 박사 논문 하나를 가져갔다. 버스 안에서 필요한 대목을 밑줄 치면서 읽고는, 그날 밤 회식 후에 숙소로 들어와서는 밑줄친 부분을 노트북에 타이핑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마저 하고 나니 책 한 권의 주요 부분이 다 입력됐다. 그러는 동안 무수한 생각들이 머리 속에 집적이 된다. 다산이 즐겨 찾던 강진의 정원에 관한 글을 쓰는 중이었는데, 그 논문을 참고한 것이다. 그 논문의 전문성과 내가 가진 구체적인 콘텐츠가 결합해 강력한 새로운 글이 나온다. 암튼 책도 종류에 따라 읽기를 달리해야 한다는 것, 소리내 읽기와 베껴쓰기의 중요성, 이 세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정작 어떤 책을 흘려 읽고 어떤 걸 정독해야 하는지 헷갈려 하는 사람이 많다. 뭘 기준으로 삼아야 하나?

 

"기본적으로는 본인이 판단할 문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것들을 정독해야겠지. 역사를 반복해서 살아남은 책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보증을 써준 책이니까. 고전이나 일생에 멘토가 될 만한 책 몇 권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어야 한다. 내가 어떤 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책 중에서도 손때 묻은 책을 사랑한다고. 어떤 책에서도 하도 읽어서 거기만 손때가 새까맣게 묻은 게 있다. 지금 내 경우엔 한국사 연표라는 책이 그렇다. (손바닥만 한 소책자를 들고 와서 보여준다.) 이게 연구실과 집무실, 집에 한 권씩 있다. 여기 손때 묻은 지점이 18세기다. 이게 전문가라는 표시다. 어떤 책들은 그런 게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사 연표 말고 반복해서 보는 책이 있나?

 

"나는 연암이 제일 좋다. 연암이나 이덕무, 다산 같은 분은 텍스트가 워낙 많아서 한곳에 손때 묻을 겨를이 없다."

 

-그나저나, 책을 읽고 쓰는 것이 왜 중요한가?

 

"나는 여기 앉아서 도장을 찍거나 업무를 볼 때는 내가 소진된다는 느낌이 든다. 정말 그렇다. 그것도 중요한 일이기는 하다.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여러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일이니까. 하지만 글을 쓰고 책을 보고 할 때만 나는 살아있는 것 같다. 그럴 때는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다. 책 속에 있거나, 글이 될 때는 내가 즐겁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고, 글이 안되거나 막히면 괴롭고 힘들다. 사람들이 명예롭게 생각하는 자리나 회의 같은 것은 그냥 나를 소진시키고 죽이는 느낌이 든다. 나를 살리는 일을 해야지. 왜 나를 소모시키는 일을 하겠나. 그렇게 보면 글을 쓰고 읽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힘을 주는 에너지 공급원이라고 할까. 사유를 멈추는 순간 생명이 끝나는 것 아닌가. 학자가 사유가 멎고 지적 생산이 정지되면 즐거울 수가 없다."

 

-요즘 다른 볼거리, 즐길 것도 많다. 그래서 독서 인구는 갈수록 줄고 있다. 일반인이 굳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뭔가?

 

"일종의 삶의 가닥을 잡아주는 하나의 마지막 보루라고나 할까. 책을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의 차이는 워낙 크다. 그 차이는 겉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아주 치명적인 차이다. 책을 놓은 사람, 안 읽고도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책을 통해 자기 삶을 보듬어 가는 사람은 차이가 크다. 그 차이가 얼마나 막강한지 잘 모르니까 안 읽는데, 그걸 알면 책을 안 읽을 수가 없다. 뭔가 자기를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마지막 장치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정 교수는 지난 여름 자신의 칼럼에 옛 사람들의 독서법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의 글과 책 읽기에 대한 생각의 정수가 담겨있다. 함께 싣는다.

 

삼심양합 (三心兩合) /조선일보정민의 세설신어’ 8 5일자

 

근세 중국의 기재(奇才) 서석린(徐錫麟·1873~1907)은 독서에서 삼심양합(三心兩合)의 태도를 중시했다. 먼저 삼심은 독서할 때 지녀야 할 세 가지 마음가짐이다. 전심(專心)과 세심(細心), 항심(恒心)을 꼽았다. 전심은 모든 잡념을 배제하고 마음을 오롯이 모아 책에 몰두하는 것이다. 세심은 말 그대로 꼼꼼히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훑는 자세다. 그는 책을 읽다가 중요한 대목이나 좋은 구절과 만나면 표시해두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부친에게 나아가 물어 완전히 안 뒤에야 그만두었다. 항심은 기복 없는 꾸준한 마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매일 밥을 먹어야 하고 날마다 책을 읽어야 한다. 하루만 굶으면 배가 고프고 하루만 안 읽으면 머리가 고프다." 안중근 의사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고 한 뜻과 같다.

양합(兩合)은 두 가지 결합과 연계를 말한다. 첫째는 독서와 수신양덕(修身養德)의 결합을 강조했다. 그는 책상 위에 직접 제갈공명의 '계자서(誡子書)' 중 다음 대목을 써놓았다. "군자의 배움은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 덕을 길러야 한다. 담박함이 아니고는 뜻을 밝게 할 수가 없고, 고요함이 아니고는 먼 데까지 다다를 수가 없다(夫君子之學 靜以修身 儉以養德 非澹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 고요함과 검소함으로 자신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향상시킬 때 독서의 진정한 보람이 있다. 내면의 성찰 없는 독서는 교만과 독선을 낳기 쉽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면 못쓴다. 둘째로 그는 독서와 신체 단련의 결합을 중시했다. 공부로 잔뜩 긴장한 머리는 산책과 체조 등의 활동으로 한번씩 풀어주어 독서에 리듬과 탄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욱여넣기만 하면 효율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오래 지속할 수가 없다.

그저 읽고 벌로 읽으면 안 읽느니만 못하다. 성호(星湖) 선생 식으로 말하면, 흑백을 말하면서 희고 검은 것은 모르고 말을 하지만 귀로 들어갔다가 입으로 나오는 데 지나지 않아 실컷 먹고 토하는 것과 같게 된다. 건강을 해치고 뜻마저 사납게 된다.

 

인터뷰] 정민 '나의 글이 가는 길' 편집

전병근 기자

 

원문보기: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1/21/2014112101629.html#csidx615f9d7207e8939b15f0b96b2a0a2a7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첫 번째 이야기   허공 속으로 난 길 한시의 언어 미학

 

푸른 하늘과 까마귀의 날개 빛깔

 

P17. 연암 박지원(1737~1805) <답창애>란 글에 동네 꼬마가 <천자문>을 배우다가 게으름을 부리자, 선생이 야단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야단맞은 꼬마의 대답이 걸작이다. “하늘을 보면 푸르기만 한데, ‘하늘 천天자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 싫어요!”

웨버님이 이 대목에서 내가 생각났다 했는데, 나도 왠지 어릴 적 나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나도 좀 엉뚱하게, 꾀 부린다고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P17. 저 까마귀를 보라.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하지만 홀연 유금 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췻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이를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까마귀는 본디 정해진 색깔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린다. 어찌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겠는가.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버린다.

보이는 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하늘은 파란색이 아니다. 밤에는 검고, 해질녘은 붉다. 붉음도 붉음이 아니더라. 연분홍도 있고, 새빨간도 있고, 검붉음도 있더라.

 

P17. 연암이 <능양시집서>에서 한 말이다. <천자문>이 푸른 하늘을 검다고 가르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았던가? 까마귀의 색깔 속에 감춰진 많은 빛깔을 관찰한 적이 있었던가? 연암은 이렇듯 시인에게 죽은 지식이나 고정된 선입견을 훌훌 털어버리고, 건강한 눈과 열린 가슴으로 세계와 만날 것을 요구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되, 다른 감정,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볼 수 있는 태도와 시선을 기르자.

 

P18. 생취나 생의가 없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사물의 심장부에 곧장 들어가 핵심을 찌르려면 죽은 정신, 몽롱한 시선으로는 안 된다. 시인은 천지현황의 나태한 관습을 거부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선입견에 붙박여 간과하고 마는 까마귀의 날개 빛깔을 살피는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 생동하는 물상 속에서 순간순간 포착되는 비의를 날카롭게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시는 언어의 사원이다. 시인은 그 사원의 제사장이다. 시는 촌천살인의 미학이다.

고정관념을 깨자! 다른 시선으로 보자! 사물의 입장, 삼라만상의 소리를 듣자!

 

영양이 뿔을 걸 듯

 

P20. 시인이 한 번 사변의 늪에 빠져들면 생취는 간데없고 진부한 관념의 시체들만 뒹굴게 된다. 이것은 시가 아니라 구호다. 표현의 기교에 지나치게 빠져도 안 된다. 언어를 매만지며 단어들의 질량을 느끼는 일은 시인의 큰 기쁨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시인의 정신을 본질 아닌 말단으로 쏠리게 한다. 그 결과, 시인의 정신은 간데없고 가공된 언어만 판치게 된다. 이것은 시가 아니라 암호다.

 

P22. 시인의 정신은 저만치 허공에 떠 있고, 언어를 통해 수면 위에 그 정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다. 한 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에게 느껴서 알게 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들지 않는다.

근데 왜 난 셰익스피어가 너무 좋지? 큰 일이네;; 셰익스피어의 글은 화려한데내가 잘못생각하고 있나?

 

허공 속으로 난 길

 

P22. 시는 시인이 짓는 것이 아니다. 천지만물이 시인으로 하여금 짓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시에서는 사물이 직접 말을 건넨다. 이옥(1760~1812) <이언인>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는 만물이 사람에게 가탁하여 짓게 하는 것이다. 물 흐르듯 귀와 눈으로 들어와서 단전 위를 맴돌다가 끊임없이 입과 손을 따라 나오니, 시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물은 제 스스로 성색정경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 시인의 입과 손을 빌려 언어로 형상화될 뿐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때 시인은 사물의 몸짓을 언어로 전달하는 매개자일 뿐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관찰한 대상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알고 싶게 만든다. 알고 나니 사랑하고 싶고, 일부러라도 사랑하려고 애쓰니 조금씩 나에게 보여주더라.

 

P28. 시인이 글자로 말하고 있는 지시적 사실은 시에서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그 행간에 감춰진 울림. 언어의 발자취를 벗어나 허공에 매달려 있는 떨림이 중요하다. 그런 울림이 아예 없거나 그런 떨림을 외면한 시는 화려한 수사로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교언영색에 지나지 않는다. 천진天眞에서 우러나오는 흥취가 없는 시는 독자를 짜증나게 만든다.

 

눈과 귀가 있다 말하지 말라

 

P28~29. 홍양호(1724~1802) <질뢰>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렛소리에 산이 무너져도 귀머거리는 못 듣는다. 해가 중천에 솟아도 소경은 못 본다. 도덕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하고, 속인은 왕도와 패도, 의와 이利를 변별하지 못한다. 아아! 세상 사람들이여, 눈과 귀가 있다고 말하지 말라. 총명은 눈과 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조각 영각靈覺에 있다.

 

P29. <채근담>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고작 유자서有字書나 읽을 줄 알았지 무자서無字書를 읽을 줄 모르며, 유현금有絃琴이나 뜯을 줄 알았지 무현금無絃琴은 뜯을 줄 모른다.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쫓아다니는데 어찌 금서琴書의 참맛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 홍양호의 글과 담긴 뜻이 서로 같다.

 

이명과 코골기

 

P32. 왜 연암은 난데없이 이명과 코골기를 들고 나왔을까. 이명은 자기만 알고 남은 결코 알 수가 없다. 코골기는 남들은 다 아는데 정작 자기만 모른다. 사람들이 안목이 없어 나의 이 훌륭한 작품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탄식하고 원망하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이명증에 걸린 꼬마다. 남의 적적한 지적에도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는 사람은 코를 고는 버릇이 있는 시골 사람이다. 정작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명에는 쉽게 도취되면서, 자기의 코 고는 습관만은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명은 병인데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화이니, 만약 그가 병 아닌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면 으스대는 양을 어찌 볼 것인가. 고골기는 병이 아닌데도 남이 먼저 안 것에 발끈하니, 정말 그의 병통을 지적해준다면 그 성내는 꼴을 또 차마 어찌 보겠는가.

비유가 기가 막히다. 이명과 코골이를 활용하다니, 이것 역시 끊임없는 사색과 연결짓기의 결과겠지?

 

두 번째 이야기   그림과 시 사의전신론

 

그리지 않고 그리기

 

P37. 시와 그림은 전통적으로 서로 연관이 깊다.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란 말도 있다.

 

P41.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예화는 모두 같은 원리를 전달한다. 즉 그리려는 대상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물 길러 나온 중, 말의 꽁무니를 쫓아가는 나비, 난간에 기댄 소녀, 피리 부는 뱃사공, 남녀의 신발 한 켤레로 대신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동양화의 화법 가운데 홍운탁월법이라는 것이 있다. 수묵으로 달을 그릴 때 달은 희므로 색칠할 수 없다. 달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달만 남겨둔 채 그 나머지 부분을 채색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그리는 방법이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그린다!

 

말하지 않고 말하기

 

P43. 요컨대 한 편의 훌륭한 시는 시인의 진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상을 통한 객관적 상관물의 원리로써 독자와 소통한다.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건네는 대신, 대상 속에 응축시켜 전달한다.

 

P44. 시는 어떤 사실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시는 언어 그 자체로 살아 숨쉬는 생물체여야 한다. 시인은 외롭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독자를 외로움에 젖어들게 해야 한다. 괴롭다는 말을 해서도 안 된다. 그래도 독자가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P45. 흔히 시인이 시를 짓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 가운데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과정이라고 한다.

초고를 쓰고 퇴고를 할 때 많이 덜어내자. 쓸까 말까 고민한다면 말자!

 

장수는 목이 없고, 미인은 어깨가 없다

 

P53. 유몽인(1559~1623) <어우야담>에는 이런 시가 실려 있다. 한 사나이가 길을 가다가 나귀를 타고 가는 미인을 만났다. 선녀가 적강한 듯 아름다운 모습에 그는 그만 발길이 얼어붙었다.

 

마음은 미인 따라가고 있는데

이 몸은 부질없이 문 기대섰소

 

그녀가 답장을 보내왔다.

 

노새는 짐 무겁다 투덜대는데

그대 마음 그 위에 또 얹었으니

 

정오의 고양이 눈

 

P56. 유몽인은 다시 이렇게 덧붙인다. “무릇 그림과 문장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번 본의를 벗어나면, 제아무리 화려하게 꾸민 문장이라 해도 식자는 취하지 않는다. 오직 안목 갖춘 자만이 능히 이를 알 것이다.” 예술 작품의 감상은 바로 이 호리의 차이를 변별하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다.

 

P59. 이 또한 예리한 관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준다. 가짜와 진짜는 종이 한 장의 차이도 없다. 가짜가 오히려 더 진짜같이 보인다. 관념화된 그림, 진정을 상실한 그림은 좋은 그림이 아니다. 정신은 간데없이 손끝의 기교만으로 그리려 드니, 난초를 그린다는 것이 파가 되고, 대나무를 그렸는데 갈대가 되고 만다.

관찰! 관찰! 또 관찰!

 

P59. 시인이 정을 머금어 이를 펴고, 경물을 대하여 마음을 움직이며, 물상을 그려냄에 그 정신을 얻게 된다면, 저절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정신의 향기 없이 표현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성정의 천진함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다. 그 결과 생동감도 찾아볼 수 없다.

 

마음에서 얻어 뜻으로 깨달으니

 

P66. 추가 김정희(1786~1856) <세한도>. ‘대교약졸’, 정말 큰 기교는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졸렬해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시인의 덤덤한 듯 툭 던지는 한마디가 예리한 비수처럼 독자의 의식을 헤집는다. 좋은 시는 독자에게 방심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허를 찔린 느낌을 준다.

 

세 번째 이야기   언어의 감옥 입상진의론

 

싱거운 편지

왜 사냐건 웃지요

언덕에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장자> [천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제나라 환공이 누각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아래서 땀을 흘리며 수레바퀴의 굴대를 끼우던 윤편이 계단을 올라와 임금에게 물었다.

전하! 지금 읽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옛 성인의 책이니라.”

그 분은 지금 살아 계신가요?”

죽었지.”

그렇다면 전하께선 옛사람의 껍데기를 읽고 계신 거로군요.”

환공은 화가 났다.

네 이놈! 무엄하구나. 그 말이 무슨 뜻인가? 까닭이 있으면 살려주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살려두지 않으리라.”

윤편은 대답한다.

저는 저의 일을 가지고 판단할 뿐입니다. 제가 바퀴를 끼운 것이 지금까지 수십 년입니다. 그런데 굴대가 조금만 느슨해도 금세 빠져버리고, 조금만 빡빡해도 들어가질 않습니다. 느슨하지도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제 마음과 손으로 느껴 깨달을 뿐이지요. 그 이치는 제 아들 녀석에게도 가르쳐줄 수가 없고, 전하께도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옛 성인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해도, 그가 죽으면서 그 말은 다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의 껍데기일밖에요.”

 

P77. 더는 나아갈 수 없는 깨달음은 말로는 가르쳐줄 수가 없다. 마음으로 깨달아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이른바 심수상응이다.

 

P77. 언어란 본시 부질없는 것이기에 큰 진리는 언제나 언어를 초월하여 전해지고, 깨달음은 언어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사벌등안의 법을 말한다. 언덕을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장자는 득어망전을 말한다. 고기를 얻었으면 통발을 잊어라. 득의망언’, 즉 뜻을 얻었거든 말을 잊으라고 주문한다.

 

내 혀가 있느냐?

 

P81. 이것이 입상진의이다. (중략) 큰 가르침은 사람마다 일깨워 가르칠 수 없다. 본래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말해도 알아듣고, 모를 사람에게는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해준댔자 더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다.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청산 위로 학이 날아간 자취

 

P90. 명나라의 사진은 그의 <사명시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를 지을 때 실제와 똑 같은 것은 마땅치 않다. 아침에 나가 멀리 바라보면 청산의 아름다운 빛이 은은하여 사랑스럽고, 안개와 노을은 변화무쌍하여 말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막상 올라가보면 별반 기이한 경치가 아니고, 오직 바위 덩어리와 몇 그루 나무뿐이다. 멀고 가까움에 본 바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묘는 어렴품함에 있으니, 그 속에서 비로소 솜씨가 드러난다.

이 거리감이 쓰는 이의 감정이 아닐까? 수영할 때는 바다의 위대함을 모르고, 등산 할 때는 산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거리감이 곧 감정?? 관찰은 그 사물이 되는 것인데아 헷깔리

 

네 번째 이야기   보여주는 시, 말하는 시 당시와 송시

 

꿈에 세운 시의 나라

작약의 화려함과 국화의 은은함

 

P100. 작약이나 해당화의 화려한 색채는 화려하게 성장한 미인의 우아한 자태를 연상시킨다. 이것이 당시이다. 반면 눈 속에 피어나는 매화나 서리를 이겨내는 국화의 은은하고 그윽한 향기는 화장을 하지 않고 소복을 입은 여인의 얼음 같은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이것이 바로 송시이다.

 

당음, 가슴으로 쓴 시

 

P103. 당시는 가슴으로 쓴 시이다. 여기에는 시인의 웃음과 눈물이 있어, 마음으로 전해오는 인간의 채취가 물씬하다. 이에 반해 송시는 머리로 쓴 시이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깊고 담담한 관조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망이 있다.

 

송조, 머리로 쓴 시

 

P109. 그러나 대체로 송시는 이 시기 발달한 선종과 성리학의 영향으로 인생에 대한 철학적 음미를 내용으로 하는 경향이 짙다. 또 쓸데없는 수식을 배제하고 섬세한 관찰과 개성적 표현을 중시하였으며, 제재 상 일상생활에의 관심과 밀착이 두드러진다.

 

▶ 뱃속에 넣은 먹물

 

P114. 마이어 에이브럼스는 <거울과 등불>이란 책에서 문학의 기능을 거울과 등불의 두 가지로 나누었다. 시인은 캄캄한 밤에 어둠 속을 헤매는 영혼들의 길을 등불로 비춰주는 선지자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시대를 물끄러미 비쳐주는 거울일 뿐인가?

 

P115. 한때 우리 시단에서도 참여시니 순수시니 하는 이름으로 소모적인 논쟁이 반복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한편에서는 암흑의 시대에 거울만 닦고 있는 시인을 향해, 창밖에서 천둥 번개가 치든 말든 안방에서 내방가사나 읊고 있는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이라고 매도했다. 또 한쪽에선 등불ㅇ을 높이 들고 무조건 따라오라고만 외치는 시인을 향해 시가 무슨 혁명의 도구냐고 항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무리 시의 겉모양을 갖추었다 해도 선동가의 연설이나 삐라를 시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가슴을 저미는 감미로운 유행가의 가사도 시와는 다르다.

 

P115. 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당시와 송시의 구분이나 참여니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좋고 싫음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맞아 시는 시가 되어야 한다. 도대체 이게 맞고, 저게 맞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이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지. 정답은 없다. 상대적일 뿐.

 

P116. 현세에서 시인의 삶이란 곁에 누운 병든 아내의 신음처럼 고달프고 괴로운 것을. 그러고 보면 시란 까맣게 잊고 있던 신선세계, 또는 존재하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향한 회귀의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다섯 번째 이야기   버들을 꺾는 뜻은 한시의 정운미

 

남포의 비밀

버들을 꺾는 마음

 

P125. 우리 옛 시조에, “말은 가자 울고 임은 잡고 아니 놓네. 석양은 재를 넘고 갈 길은 천리로다. 저 임아 가는 날 말고 지는 해를 잡아라.”란 것이 있다. 바로 이 정황에 꼭 맞을 듯하다.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

난간에 기대어

 

P135.

그동안 소식이 어떠신가 여쭈려니

하룻밤 그리움에 머리가 다 세겠네.

난간에 홀로 기대 잠들지 못하는데

주렴 밖 성근 댓잎에 빗소리 후득인다.

 

저물녘의 피리 소리

 

P139.

봄 그늘 아득히 황혼 향해 가는데

빈 골목 사람 없고 참새만 조잘댄다.

다만 홀로 산양 땅엔 옛 벗만 남아서

피리 소리 없어도 그만 애가 녹는다.

 

권필이 지은 <성산 땅 구용의 집을 지나며> 두 수의 둘째 수이다.

 

이해 못할 <국화 옆에서>

 

P140. 대개 특정의 어휘가 정운을 머금는 과정에는 동질의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의 내적 교감이 전제된다.

 

P141. 무궁화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궁화를 두고 피고 지고 또 피어 무궁화라네.”라고 노래한다. 저녁때 졌는가 싶으면 다음 날 아침 어느새 나무 가득 꽃을 피우는 그 모습에서 무궁의 의미를 읽어 나라꽃으로 기린다. 이에 반해 중국 사람들은 이를 조개모락화’, 즉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는 꽃이라 하여 인간의 덧없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 또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소인배의 상징으로 폄하한다.

 

P143. 특정 어휘가 특수한 정운을 띠게 되면 요즘 식으로 말해 사은유가 된다. 이것이 진부한 표현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시인은 늘 새로운 감성과 참신한 생각으로 이를 다르실 줄 알아야 한다. 진부한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익숙한 것을 새롭게 만나도록 하는 것. 이것은 시인의 창조적 정신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마술이다.

이것 역시 관찰과 생각훈련에서 나오는 거겠지??

 

여섯 번째 이야기   즐거운 오독 모호성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을 그리다

오랑캐 땅의 화초

 

P150. 일상의 언어에서 의미는 어느 하나가 옳으면 나머지는 그른 것이 되지만, 시의 언어에서는 꼭 그렇지가 않다. 이 대목에서 모호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면에서 시인은 이러한 언어의 모호성을 은근히 즐기는 사람들이다. 시 속에서 이러한 의미들은 오히려 풍부와 함축이 된다.

 

P150. 시의 어휘나 구절들은 대개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포용력과 융통성을 지닌 문맥을 형성한다. 뛰어난 시는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포용력과 융통성을 극대화한 시라고 말해도 괜찮다.

 

개가 짖는 이유

무지개가 뜬 까닭

 

P162. 스무 글자 어디에도 춥다는 말은 없다. 그저 경물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제목마저 없었다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해질 법하다. 시인은 제목으로 분위기를 잡아놓고, 정작 시 속에서는 독자의 예상을 외면하고 딴청을 부렸다.

 

백발삼천장

뱃속 아이의 정체

 

P168. 정몽중의 <정부원>

한 번 떠난 뒤로 여러 해 소식 없어

수자리의 삶과 죽음 그 누가 알랴.

오늘 처음 솜옷을 지어서 보내나니

울며 보내고 돌아올 때 뱃속에 아기 있었네.

 

P169. 그런데 4구에서 이야기가 갑자기 엉뚱하게 전개된다. 남편에게 솜옷을 보내고 울며 돌아올 때 뱃속에 아이가 있었다고 하여, 현재 자신이 임신 중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 헤어진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렇다면 뱃속의 아이는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P172.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이 언어의 미로 위에 숨겨놓은 코드를 독자가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진진한 지적, 감성적 여정이어서 때로는 오독도 즐겁다. 시인은 부러 말꼬리를 흐려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독자는 잠시 멍해 있다가 다시 코드를 찾아 나선다. 설사 가다가 길을 잠시 잃은들 어떠랴. 아니, 애초부터 길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일곱 번째 이야기   사물과 자아의 접속 정경론

 

묘합무은, 가장자리가 없다

 

P175. 하루의 물리적 시간이야 봄가을이 다를 바 없고, 부는 바람 또한 차이가 없다. 그러나 봄날의 하루해는 느릿느릿 좀체 흐르지 않고, 가을바람은 공연히 뼈에 저밀 듯 스산한 마음을 일으킨다. 마음에 일어나는 정을 건네듯 사물에 보내면, 사물은 답이라는 듯이 흥을 불러일으킨다. 경물은 이렇듯 시인의 눈 속에서 어느 순간 정으로 착색된다.

내 마음, 내 정서에 따라 보는 느낌이 다르다. 같은 경물도 상황에 따라 달라보이는 법. 비교관찰도 해 봐야겠다.

 

P175. 명나라 때 사진은 <사명시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은 시의 매개이고, 정은 시의 배아다. 이 둘이 합하여 시가 된다. 몇 마디 말로 만 가지 형상을 부려서 원기가 혼성하니 그 넒음이 가없다.”

 

P176. 가슴에 자욱한 정을 품고 경을 바라보면 무심한 경물이 내 마음의 빛깔로 물든다. 정은 경에 의미를 불어넣는 배아인 셈이다. 정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 경만 가지고 시가 되는 법도 없다.

 

P176. 청나라 왕부지는 <석당영일서론>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정과 경은 이름이 둘이나 실제로는 나눌 수 없다. 빼어난 시는 정 가운데 경이 있고, 경 가운데 정이 있다.이른바 묘합무은의 주장이다.

 

정수경생, 촉경생정

 

P183. 조선 중기 송한필의 <우연히 읊다>

간밤 비 맞아 꽃을 피우곤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지누나

슬프다 한바탕 봄날의 일이

비바람 가운데서 오고 가노매.

 

우리네 인생도 풍파 속에 덧없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겨를도 없이 허망하게 진 꽃잎이 세상에 어디 한둘이겠는가? 바람은 언제나 딴 데서 불어온다. 그 심술을 탓하기엔 꽃잎의 힘이 너무 여리다.

 

이정입경, 경종정출

정경교융, 물아위일

 

P192. 정렴(1505~1549) <배꽃>

집 모퉁이 하얗게 피어난 배꽃

화사함 지난해와 다름없구나.

봄바람 묵은 병이 애처로운지

약 달이는 창가로 바람 보낸다.

 

봄기운을 타고 집 모퉁이에 배꽃이 활짝 피었다. 적막하던 마당이 환하니 밝다. 꽃은 지난해와 다름없는데 주인의 쇠락은 좀체 회복될 기미가 없다. 긴 병 끝에 맞은 꽃잔치는 마음 한구석에 애잔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래도 아직은 실망하지 말라는 듯, 추운 겨울을 견뎌 활짝 핀 꽃처럼 어서 빨리 회복하라고, 봄은 약탕관 위로 살랑살랑 바람을 보낸다.

!! 약 달이는 창가로 바람 보낸다.

 

지수술경, 정의자출

즉정견경, 정의핍진

 

P198. 서거정은 <동인시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란 마음이 가는 바이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장계가 <세한당시화>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는 것이 시인의 본뜻이다. 사물을 노래하는 것은 시인의 여사일 뿐이다.”라고 한 것도 의미가 같다.

 

P199. 이필운의 부인 남씨가 죽은 손녀를 애도하여 지은 시

여덟 살에 일곱 해를 병 앓았으니

돌아가 누움이 외려 편하겠구나.

흰 눈이 펄펄 오는 오늘 이 밤에

어밀 떠나 추위 모름 가슴 아프다.

 

여덟 살배기 손녀는 일곱 해를 병마에 시달리다 저세상으로 떠났다. 아프다고 보채 울던 어린것이야 고통 없는 세상으로 간 것이 오히려 편안하겠지. 하지만 이 겨울 그 어린 것이 제 어미 품을 떠나 추운 줄도 모르고 꽁꽁 언 땅 속에서 눈 감고 누워 있을 생각을 하니, 금이야 옥이야 안쓰럽던 할머니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P201. 박지원의 <연암협에서 세상을 뜬 형님을 생각하며>

형님의 모습이 누구와 닮았던가

아버님 생각나면 형님을 뵈었었네.

오늘 형님 보고파도 어데 가 만나볼까

의관을 정제하고 시냇가로 나가본다.

 

형님은 이제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로 아버님 뵙듯 형님을 따랐다. 이제 형님마저 세상을 뜨니 어디 가서 그 모습을 볼 것인가. 가만히 의관을 갖춰 입고 시냇가로 나가본다. 시내에 비친 제 모습을 보려 함이다. 덤덤한 듯 별 말 하지 않았으되, 그리움이 메아리쳐 긴 울림을 남긴다.

 

P202. 시는 찬 샘물이다. 시를 잘 쓰려면 물의 선변을 배워야 한다. 굴원의 시와 장자의 산문에는 강개의 비분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강개는 어디까지나 돌에 부딪혀 난 여울의 소리였지. 악악대며 떠는 왜가리 소리가 아니었다.

 

P202. 그러나 진정한 시법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최후의 현관이 있다. 그 현관 앞에 서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 문을 여는 법은 아무도 일러줄 수가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제 손으로 직접 열고 들어가야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   일자사 이야기 시안론

 

한 글자를 찾아서

 

서거정이 <동인시화>에서 말했다. “시는 묘함이 한 글자에 달려 있다. 옛사람은 한 글자를 가지고 스승으로 삼았다.” 호자도 <호계어은총화>에서 시구는 한 글자가 공교로우면 절로 빼어나게 된다. 마치 한 낱의 영단으로 돌을 두드려 금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했다. 원매가 <수원시화>에서 시는 한 글자만 고쳐도 경계가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진다.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한 것도 같은 뜻이다.

 

P208~209. 여러 글자를 차례로 원시에 대입시켜보면 의경의 미묘한 변화가 느껴진다. 각 표현의 질량을 저울질하고 정서를 감별해낼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상승의 시인이다. 명나라의 사진은 시인이 한 글자의 선택을 위해 심혈 쏟는 것을 모자 고르기에 비유했다.

 

비유하자면 사람이 급하게 모자를 사려고 시장에 들어가 여러 개를 꺼내놓고 하나하나 써보면 반드시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자 고르는 법을 쓸 수만 있다면 시안은 공교롭지 않음이 없다.

 

하나하나 골라 써보고 거울에 비춰 비교하듯, 글자를 바꿔 넣었을 때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음미할 수 있어야 시안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뼈대와 힘줄

 

P210. 시인의 정신이 집약된 지점. 하나만 건드려도 나머지가 따라 움직이는 일동만수의 경락이다. 시안은 단순히 수사적으로 자구를 단련하는 기교의 문제가 아니다. 시가 예술의 의경미를 형성하는 핵심처인 것이다.

 

한 글자의 스승

일자사의 미감 원리

 

P221. 일자사의 첫 번째 미감 원리는 의미의 중복을 피하라.’는 것이다.

 

P221. 1구의 문聞 2구의 청聽두 글자가 중복된다며 문聞자를 간看자로 고쳤다. 번역 상으로도 들리더니~ 들려오네의 중복보다는 보았는데 ~ 들려오네의 조합이 훨씬 낫다.

 

P223. 두 번째 미감 원리는 여운을 남기고 호응을 중시하라.’는 것이다. 여운은 추상의 여백에서 생긴다. 시는 단정적 언사를 꺼린다. 사물과 시인이 만나 빚는 의경은 카메라 렌즈처럼 또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러 초점을 흐리는 데 묘한 맛이 있다. 그래도 의경의 호흡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시안과 티눈

 

P229.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말했다. “글을 일러 조화라고 말한다. 마음속에서는 틀림없이 예술적인데, 막상 손끝에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예술적이지 못하다.”

최자(1188~1260) <보한집>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시 조탁을 두보처럼 한다면 묘하기는 하다. 다만 솜씨가 거친 자는 조탁하려 애쓸수록 점점 더 졸렬하고 껄끄럽게 되어 공연히 애만 태우다만다. 각기 타고난 재주에 따라 있는 그대로를 토해내어 조탁의 흔적이 없는 것만 못하다.”

 

P231. 시인은 시안을 연마할 때 집착을 버려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시안은 시안을 감추는 장안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혜안과 통찰력 없이 그저 남의 눈이나 놀라게 만드는 수사적 기교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아홉 번째 이야기   작시, 즐거운 괴로움 고음론

 

예술과 광기

 

P235. 대상을 향한 미친 듯한 몰두 없이 위대한 예술은 이룩되지 않는다. 불광불급이라 했다. 미쳐야 미친다. 비록 하찮은 기예라 해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가 있어야 비로소 성취를 말할 수 있다. 예술의 천재들에게는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광기가 있다. 그들 안에서는 열정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과 다른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느껴진다.

결국엔 또 관찰! 그래 미친 듯이 보자. 물아일체!!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고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듯

 

P244.

일경이 다 가고 삼경에 이르도록

이별의 맘 읊으려도 구절을 못 이루네.

 

백년 인생 뜻 맞는 일 없어도 괜찮지만

하루라도 시 안 짓고 견디기가 어렵다네.

 

살아선 한가한 날 결코 없으리

죽어야만 시를 읊조리지 않겠네.

 

맹교는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시를 위해 살았던 시인이다. 시를 빼면 그의 삶에서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목숨을 걸고 시를 썼다.

 

가슴속에 서리가 든 듯

참을 수 없는 가려움, 기양

 

P252. 매요신은 앞서 여러 시인처럼 시에 고질이 든 시인었다. 그는 아예 <시벽>을 제목으로 한 시를 남겼다.

 

인간의 시벽이 돈 욕심보다 더하니

애 졸이며 시구 찾다 몇 봄을 보냈던고.

주머니 빔 상관 않아 가난은 변함없고

시 읊어 새 시구 많은 것만 기뻐했네.

괴롭게 층층 하늘 만져보려 했을 뿐

곤궁 속에 저승 갈 일 따지지도 않았다.

 

시에 대한 고질이 되면 편작이 열이라도 고칠 방도가 없다. 일상의 모든 행동이 시와 무관한 것이 없다. 시를 쓰는 일은 이들에게 있어 매 순간을 살아 숨쉬게 만드는 원동력인 셈이다.

 

P253. 아무 짝에 쓸모없는 줄 잘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표현 욕구를 옛사람들은 기양이란 말로 표현했다. ‘은 가려움증을 말한다. 아무리 긁어도 긁어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다. 이런 가려움은 어떤 연고나 내복약으로도 못 고친다. 이와 마찬가지로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표현욕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기양이다.

뭐지? 그럼 나도 기양인가? 근데 잘 쓰고 싶은데너무 부족하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매일의 힘을 믿어보자. 내가 너무 조급한가?

 

P255. 김득신 (1604~1684)도 고음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 한번은 비 오는 처마 아래서 오줌을 누며 시작에 골몰했다.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제 오줌 줄기로 착각해서 한참을 바지를 내린 채 서 있었다.

나는 아직 글에 미치지 못한 것이구나. 글에 대한 목마름이 부족한 것이구나. 골몰하면서 소변이 멈추면 옷을 다시 고쳐 입으니 글에 빠지지 못한 것이구나. 이 정도는 되야 글에 미쳤다고 볼 수 있구나.

 

P257. 그러고 보면 산꼭대기 시인의 산 아래를 향한 연민과 탄식, 조소와 비아냥거림도 아래쪽 사람들이 보기에는 같잖기 그지없는 일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한 사람은 위에서 아래를 보며 개미 같다고 하고, 훅 불면 날려가 버릴 것 같다고 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한다. 아래서는 또 위를 보며 머리카락에 붙은 이 같다고 하고, 저 혼자만 공연히 고상한 체한다 하고, 꼴 같지 않게 논다고 눈을 흘기니 말이다.

 

P258. 정약용은 <오학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문장학은 우리 도의 커다란 해독이다. 문장이란 무엇인가? 문장이란 허공에 걸려 있고 땅에 퍼져 있으니, 어찌 바람을 보고 달려가 붙잡기를 바라겠는가?” 또 세상에 보탬이 되지 않는 글은 한평생 읽고 외워본들 슬프고 우울하기만 하지. 천하와 국가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문학의 해독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열 번째 이야기   미워할 수 없는 손님 시마론

 

즐거운 손님, 시마

 

P263. 시마는 시 귀신이다. 시마는 어느 순간 시인에게 들어와 살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를 생각하고 시만 짓게 하는 귀신이다. 시마가 한번 붙으면 다른 일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시에만 몰두하게 된다. 더욱이 짓는 시마다 절창 아닌 것이 없다. 시마는 시인에게 즐거운 괴로움을 선사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P264. 시마는 시인에게 제멋대로 들어왔다가 어느 순간 훌쩍 떠나버리는 재미난 귀신이다. 일단 시마가 붙으면 잠시도 시를 떠나 살 수 없게 된다. 그러다가 시마가 훌쩍 떠나가면 시를 짓고 싶은 마음도 없어질 뿐 아니라, 제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시를 지을 수 없게 된다.

 

시마와의 논쟁과 시마 증후군

시마의 죄상

 

P271. 최연도 <축시마>에서 시마의 죄상을 네 가지로 적시했다. 앞서 이규보가 든 시마의 죄상을 말만 바꾸었다. 첫째는 멋대로 붓을 휘둘러 어지럽게 하고, 샘솟는 듯한 생각과 봄날 구름 같은 태도로 번화함을 다투어, 이목을 현혹시키고 날로 진기를 소모케 하는 죄다. 둘째는 천지자연의 비밀을 엿보고 서책을 표절하여 오묘한 표현을 찾으며, 자구를 조탁하여 기이함을 다투며, 수염을 배배 꼬면서 정미함을 추구하여 마음을 격동시키는 죄다. 셋째는 온갖 형식과 격식을 만들어 변화를 뽐내고 솜씨를 자랑하여 임금의 마음을 방탕케 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죄이다. 넷째는 시휘를 저촉하고 재앙의 기틀을 밟아 몸을 곤궁케 하고 비방을 불러들이는 죄이다.

 

P272.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 글은 모두 반어다. 말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이규보와 최연이 제시한 시마의 죄상을 뒤집어 읽어보면 바로 시인 예찬론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남이 알아주든 말든 시로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날카로운 예지로 드러나지 않은 사물의 깊은 의미를 파헤쳐 사람들의 인식을 높은 곳으로 이끌어준다. 그뿐인가? 사물을 관찰하여 감춰진 의미를 찾아내고, 세속의 질서나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시를 통해 마음껏 비판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 겉모양의 꾸밈을 우습게 보고 한 편의 훌륭한 시를 창작하기 위한 고초를 더욱 소중히 여긴다. 한마디로 이규보와 최연 등이 꼽은 시마의 죄상은 오로지 시만 생각하고 시에 죽고 시에 사는 전업 시인으로 누리는 특권에 대한 즐거운 비명일 뿐이다. 결국 시마란 놈은 이마에 뿔 달린 귀신이 아니라,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시마! 나도 어쩌면 시마란 놈이 들어온 건가? 계속 쓰고 싶고, 미친듯이 좋은 글을 쓰고 싶고, 생각이 멈추지 않고. 아니다. 거창하게 무슨 시마냐. 나는 좋으니까 하는 게 맞다.

 

시귀와 귀시

 

P278. 그러고 보면 시 귀신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은 모두 시를 향한 시인들의 끝없는 몰두와 집착이 빚어낸 환영일 뿐이다. 꿈속에서 귀신이 들려준 시는 실상 귀신이 들려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귀신의 입장이 되어 노래한 것일 따름이다. 시와 관련된 귀신들은 한결같이 무섭지 않고 인간에게 해코지를 하는 법이 없다. 이들 귀신이 바로 시인 자신의 분신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귀신의 조화와 시인의 궁달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P282. 시마는 한 마디로 옛사람의 시를 향한 열정의 다른 표현이다. 시귀는 사물의 비밀을 끝까지 꿰뚫으려는 시인의 집착이다.

 

P283. 시마를 쫓아내겠다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이규보의 경우는 오히려 행복하다. 시마가 더는 오지 않는 시인들은 붓을 꺾든지, 아니면 차라리 <영시마문>이라도 지을 일이다. 배부르고 따뜻함 속으로 시마는 깃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충족된 넉넉함을 시마는 혐오한다. 무언가 결핍된 상태, 그 결핍을 채우려는 시인의 정신이 죽창처럼 곤두서 있는 지점에서 시마는 슬그머니 시인에게 스며든다. 그래서 시인은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열한 번째 이야기   시인과 궁핍 시궁이후공론

 

불평즉명, 불평이 있어야 운다

 

무릇 물건은 화평함을 얻지 못하면 운다. 초목은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흔들면 운다. 물은 소리가 없지만 바람이 움직이면 운다. 솟구치는 것은 부딪치기 때문이요, 달리는 것은 막는 까닭이며, 끓는 것은 불로 덥히기 때문이다. 금석은 소리가 없으나 이를 치면 소리가 난다. 사람의 말 또한 그러하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은 뒤에야 말하게 되니, 노래에 생각이 담기고 울음에는 품은 뜻이 있다. 무릇 입에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은 모두 불평함이 있기 때문이다.

 

한유가 <송맹동야서>에서 한 말이다. 사물이 우는 것은 부득이한 데서 말미암은 불평이 있기 때문이다. 불평은 마음이 평정을 잃은 상태, 달리 말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상태다. 한유는 <형담창화시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화평한 소리는 담박하고, 근심이 담긴 소리는 아름답다. 떠들썩 즐거운 말은 공교하기 어렵고, 곤궁한 말은 쉬이 좋다. 이런 까닭에 문장을 짓는 것은 늘 길 위의 나그네나 초야에 묻혀 사는 인사에게 있었다. 왕공이나 귀한 신분의 사람에 이르러서는 기운이 가득 차고 득의 한지라, 타고난 성품이 원래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힘쓸 겨를이 없다.

 

문학은 득의가 아닌 실의에서 나온다. 아무 아쉬울 것 없는 왕공 귀인들은 문학에 목숨 거는 일이 거의 없다. 그들에게 문학은 치장이나 나머지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낙척한 떠돌이와 불우한 재야의 문인에게 문학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수단이다.

 

P289.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 입을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속에 이른바 정서란 것이 생겨난다. 그것이 슬픔과 분노, 격정과 눈물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이 바로 시이다.

흐음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질 때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비를 놓친 소년, 발분서정의 정신

 

P290. 사마천의 생동감 넘치는 문장력에 감탄하는 것은, 마치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을 하나 주어놓고 무슨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이 순가락 주었다!”라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잘라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사마천의 글 솜씨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그 글을 지을 때 품었던 마음자리를 얻는 것이다.

물아일체. 나는 나뭇잎이 될 수 있고, 개미가 될 수 있고, 참새가 될 수 있고, 의자가 될 수 있고, 책상이 될 수 있다. 뭐든지 될 수 있다. 그래 뭐든 되어 보자.

 

P294. 다음은 조선 후기 강위의 글이다.

가장 훌륭한 시는 재주 부지리 않고 얻은 것이다. 재주를 부려 얻은 것은 훌륭하지 않다. 난새와 봉황의 맑은 소리와 주옥의 빛나는 기운, 병든 이의 앓는 소리, 슬피 울며 흘리는 눈물이 어찌 모두 재주를 부려 얻어진 것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시 삼백 편은 모두 성현이 발분하여 지은 바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발분하지 않고는 지을 수 없다.

 

시인은 코 앞에서 나비를 놓쳐버린 소년의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좌절 앞에서 주저 앉지 않는 발분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발분하는 서정 없이 어찌 남을 감동시키겠는가.

 

궁한 사람의 시가 좋은 이유

 

P298. 한 편의 시가 뛰어난 작품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상성을 뛰어 넘는 인식의 갱신이 필요하다. 이는 현실과 밀착되어 있을 때에는 알기 어렵다.

 

P301. 대체로 문학은 충족에서 나오지 않고 상실과 일탈에서 나온다. 어느 여유 시인이 시를 쓸 때는 먼저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서 실연의 기억과 같은 슬픈 일을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말은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 상실이 주는 감정이 나를 변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시와 궁달의 관계

 

P305.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시능궁인의 생각을 배척하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개진하였다.

시 또한 그러하다. 궁할 때는 그 말이 궁하고, 달하게 되면 그 말이 달하게 된다. 시에 능한 사람이 형용하여 말로 표현함에 능하기 때문이다. 어찌 시인이 시로 인해 궁하게 되고 달하게 되는 이치가 있겠는가?

 

탄탈로스의 갈증

 

P307. 불평즉명, 발분서정, 시궁이후정 등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아이덴티티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아이덴티티, 즉 동일성은 자신을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는 감정이다. 즉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상적, 관념적 자아와 실제의 자아 사이에 어떤 편차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P307. 호적은 <백화문학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잠과 두보는 해학적 풍취가 있는 사람들로, 궁하고 쓰라린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코 풍취를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우스운 소리도 하고 통속적인 자유시도 쓰는 풍취를 지녔기에 궁핍하고 배고픈 중에도 미쳐버리지 않았고 타락하지도 않았다.” 궁하다고 그 궁함 속에 가라앉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결코 풍취를 포기하지 않는 독립불구의 정신, 시의 공교로움은 이러한 정신 안에서만 보장될 수 있다. 시인은 탄탈로스와도 같은 존재다. 맛있는 음식과 샘물을 앞에 두고도 영원한 갈증과 갈망 속에서 헤맨다는 탄탈로스! 시인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열 두 번째 이야기   시는 그 사람이다 기상론

 

이런 맛을 아는가?

시로 쓴 자기소개서

 

P314. ‘문여기인즉 글은 그 사람과 같다고 한다. 무심히 내뱉는 말 속에 이미 그의 인생관이나 처세의 방식이 드러난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

매일명상을 통해 정신을 가다듬자! 나에게 명상은 법구경과 성경이니깐! 그 속에서 나의 인생관과 처세방식을 찾고 체화합시다.

 

P318. 비슷한 형편에서 같은 의도로 쓴 작품이 어찌 이리 다를까? 그 사람의 그릇이 같지 않은 까닭이다. 인간은 삶의 외형적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곤궁에 찌들어 본연의 기상마저 허물어서는 안 된다. 한시 비평에서 말하는 기상론이란 바로 시인의 기질과 삶의 자세가 그의 시에 거울처럼 비쳐진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만나보지 않고도 그 사람을 알게 된다.

그래!!! 수요소풍 때도 이야기가 나왔지만, 나는 경쾌한 김훈 쌤 같은 문체를 만들어 보자! 나만의 문체를 찾는다면 나는 유쾌한 김훈, 재미있는 김훈이 되어 보련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강아지만 반기고

 

P325.

하룻밤에 아홉 번을 탄식하느라

꿈이 짧아 집에도 닿지 못하네

꿈이 짧아 집에도 닿지 못한다라꿈 속에서라도 집에 가고 싶었는데 가지 못함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정말 소름. 사실 꿈 속이면 한 번에 날아가도 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공간에서도 마음대로 못한다라는 표현을.. 그냥 소름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자족의 경계, 탈속의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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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4 22:37:12 *.124.22.184

이번에 저자 연구를 이만큼하면 다음 주에 뭐할려고? ㅎㅎㅎㅎ

셰익스피어의 문체를 좋아하는 경쾌한 김훈이라.... 어떤 문체가 나올지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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