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알로하
  • 조회 수 185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8년 1월 29일 11시 53분 등록

 

저자 연구

폴 칼라니티(1977.04.01 ~ 2015.03.09): 미국, 뉴욕 출생.

신경외과 의사이자 작가로 37세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젊은 나이로 죽은 사람의 얘기를 듣는 건, 그 사람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마음이 안 좋다. 더구나 그가 노력의 결실을 눈앞에 두고 죽었고, 어린 아이까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남일이 아닌 듯 마음이 아프다.

폴 칼라니티가 그런 사람이다.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생물학을 공부했고,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문학과 철학, 삶과 죽음의 의미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그는 문학에서 죽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죽음을 경험할 수 있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 먹는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과학과 의학의 역사 및 철학 과정을 이수하고, 예일 의과 대학원에 진학해 의사의 길을 걸었다. 스탠퍼드 대학 병원으로 돌아와 신경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하며, 포스트 닥터를 하던 중에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미국 신경외과 학회에서 수여하는 최우수 연구상을 수상했다.

최고의 의사로 꼽히며 여러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받는 등, 이제 막 그간의 노력의 과실을 즐기려고 할 때 폐암 선고를 받았다. 서른 여섯 살의 젊은 의사가 하루 아침에 자신의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신을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분노로 보내다 눈도 못 감고 죽지나 않았을까?

폐암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나는 열흘 전에 폐렴에 걸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아픈 며칠을 보냈다. 그 바로 일주일전 변경연의 마지막 오프 수업을 잘 마무리하고 싶어서 이틀 밤을 거의 새며 무리를 했는데, 별 이상이 없길래 그 이후로도 며칠을 또 무리를 했었다. 2~30대에도 못하던 이틀 밤샘 작업을 하고도 잘 견디는 나의 체력에 감탄했었다. 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과제를 해서 50만원을 모두 돌려받을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칭찬했었는데…… 1주일만에 책도 못 읽고, 칼럼도 못쓰고 말았다. 입이 방정이다.

 

폴 칼라니티는 폐암 투병을 하던 중에도 레지던트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아이를 갖는 등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의사이자 이제 환자의 입장에서 죽음에 대한 독특한 철학을 보이며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가(How Long Have I Got Left?)’, ‘떠나기 전에(Before I Go)’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뉴욕 타임즈><스탠퍼드 메디슨>에 기고하는 등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그리고 201539일 아내 루시와 딸 케이디 등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해져 있을 때 읽어서 그런지, 읽는 내내 작가에게 감정이입이 되어서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다가 결국 머리까지 아파져서 읽기가 힘들었다.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어서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많을 거다. 하지만 한 권 쯤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어도 괜찮을 것 같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프롤로그

19 나는 CT 정밀검사 결과를 휙휙 넘겼다. 진단은 명확했다. 무수한 종양이 폐를 덮고 있었다. 척추는 변형되었고 간엽 전체가 없어졌다. 암이 넓게 전이되어 있었다. 나는 신경외과 레지던트로서 마지막 해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난 6년 동안 이런 정밀검사 결과를 수없이 검토했다. 혹시나 환자에게 도움이 될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하지만 이번 검사 결과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녔다. 그 사진은 내 것이었다.

잘 알고 있으니 더 절망적이었겠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될 때까지 병을 키웠을까? 의사가 아니었더라면 병을 더 빨리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20 우리 부부는 지난 한 해 동안 내 몸 속에서 암세포가 자라고 있지 않나 의심하면서도 그것을 사실로 믿거나 심지어 입 밖에 내는 것조차 피해왔다.

바보같지만 너무나 두려운 일은 피하고 싶어진다. 그럴 수 있을거라 생각하면서…… 의사라고 다르지 않은가 보다.

 

30 이 정도 통증은 요통을 달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요통에 대해서 해부학적, 생리학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환자들은 제각각의 고통을 제각각의 단어로 표현하며 호소한다. 하지만 나는 그 고통이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이게 그 불운의 조짐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그런 조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암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기 싫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34 그곳은 내가 몇 년 동안 수백 명의 환자를 진찰한 방이었다. 나는 이 방에 앉아서 환자들에게 말기 진단을 내리고 복잡한 수술에 대해 설명했다. 또 완쾌되어 기쁜 표정으로 일상에 돌아가게 된 환자들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리고 이 방에서 환자들의 사망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나는 이 방에서 의자에 앉아 있기도 했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기도 했고, 흰색 보드에 처방을 휘갈겨 쓰기도 했고, 달력을 넘기기도 했다. 아주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으면 이 방에 있는 진찰용 침대에 누워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제 나는 그 침대에, 완전히 깬 상태로 누워 있다. 전에 만난 적이 없는 젊은 간호사가 머리를 방 안으로 살짝 들이밀고 말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곧 오실 거예요.”

그 말과 함께 내가 꿈꿔왔으며 곧 실현되려던 미래, 그리고 오랜 세월 부단히 노력하며 도달하려 했던 삶의 정점은 사라지고 말았다.

 

  1. 나는 아주 건강하게 시작했다

47 그중 몇몇 작품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나는 도덕 철학의 기초를 쌓았고, 그 책을 대학 입학 논술 주제로 삼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햄릿>은 내게 사춘기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큰 힘이 되어주었다.

고등학생 때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도덕 철학의 기초를 쌓고, 그 책을 대학 입학 논술 주제로 삼았다니, 보통 사람은 아니다. 나도 학생 때 <햄릿>을 읽었지만 셰익스피어의 책을 읽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던 것 같은데…… 책도 제대로 읽어야 한다.

 

49  졸업반이 되었을 때 차석 졸업생이자 내가 아는 가장 가난한 아이였던 절친한 친구 리오는 상담교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넌 머리가 좋잖니. 그러니까 군대에 가야지.”

리오는 나중에 그 일을 얘기하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무슨 빌어먹을 소리야. 네가 하버드나 예일이나 스탠퍼드에 갈 거라면 나도 갈 거야.”

내가 스탠퍼드에, 리오가 예일에 입학했을 때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다른 사람이 잘 된 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같이 행복해지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아마도 저자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52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 뇌의 규칙을 가장 명쾌하게 제시하는 것은 신경과학이지만 우리의 정신적인 삶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문학이라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삶의 의미를 온전히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인간관계나 도덕적 가치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52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우리 자신이 고통받을 때 다른 사람의 명백한 고통에 얼마나 무감각해지는가에 주목헸다. 조지프 콘래드는 잘못된 의사소통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특유의 명쾌한 감각을 통해 보여주었다. 나는 문학이 다른 사람의 경험을 비추어줄 뿐만 아니라, 도덕적 반성에 도움이 되는 소재를 가장 풍부하게 제공한다고 믿었다.

 

53 반성하지 않는 삶이 살 가치가 없다면, 제대로 살지 않은 삶은 뒤돌아볼 가치가 있을까?

 

55 그런 다음 차분히 앉아서 동쪽 지평선이 밝아오며 하늘이 푸른빛으로 변하고 별들이 천천히 지워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희붐한 하늘이 넓고 높이 퍼져 나가다 첫 햇살이 나타났다. ~ 하지만 뒤로 머리를 길게 빼면 새벽녘의 푸른빛은 아직 하늘의 절반 정도밖에 퍼지지 못했고, 서쪽 하늘의 어두운 밤은 여전히 정복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칠흑의 하늘에 별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보름달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동쪽을 보면 환한 빛이 나를 향해 내리비치지만, 서쪽을 보면 도무지 물러설 것 같지 않은 밤하늘이 버티고 있었다. 그 어떤 철학자도 낮과 밤 사이의 이 광경만큼 자연의 숭고함을 잘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하느님이 빛이 있으라하고 말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 지구, 우주의 이런 광대무변함 속에서는 스스로가 작은 알갱이처럼 보잘 것 느껴진다. 그러나 절벽의 경사면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으면 자연의 장엄함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재확인하게 된다.

일출은 일몰에는 없는 어떤 신비함이 있다. 집에서 보는 일출은 동쪽 하늘 밖에 볼 수 없지만 아직 어두운 서쪽 하늘도 같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몇 년 전 이집트의 사막에서 캠핑을 할 때 아침에 이런 일출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밥 먹느라 해 뜨는 장면을 놓쳤었다. 사막은 아니더라도 다시 자연에서 일출을 보게 될 기회를 조만간 만들어야 겠다. 아님, 집 옥상에서라도……

 

60 나는 부모들이 불쌍한 아이를 내팽개치는 상황에 경악했고, 한 아이는 그런 처지인데도 내게 미소를 지어주더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이었고, 과학과 도덕이 어떻게 교차하는지에 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내 생각에 동의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래, 자네에게 좋은 경험이 됐군. 하지만 난 가끔 그 아이들이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네.”

나는 가방을 집어들고 그 방에서 나왔다. 그 아이는 분명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던가? 나중에 가서야 이 견학이 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이해로 나를 이끌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우리는 뇌 덕분에 인간 관계를 맺고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그러나 때때로 뇌는 망가져버린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앞으로 남은 삶을 그런 식으로밖에 살 수 없다면 본인을 위해서, 또 가족을 위해서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64 “책은 치우고 의학을 공부하라.” 갑자기 모든 게 분명해졌다. 비록 아버지, 삼촌, 형이 모두 의사지만(혹은 그래서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의학 분야를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휘트먼도 의사만이 진정으로 생리적.영적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

그리고 나는 문학을 접어야 할 테고. 하지만 이 길은, 책에는 나오지 않는 답을 찾고 전혀 다른 종류의 숭고함을 발견하며, 고통받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의사는 의학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학부에서부터 의학을 공부하는 우리와 달리 의과대학원이 따로 있고 학부에서는 다른 과정을 공부하는 미국 시스템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사 친구의 말을 듣고 의사들에게 인문 과정 공부 및 다른 공부를 하는 사람들과 섞여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도덕과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효율이 아니라 인성의 기본을 만드는 미국의 시스템이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69 얼굴을 천으로 덮어놓고 이름도 모른 채 해부 실습을 했지만, 그래도 시신에게서 인간성이 갑자기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맡은 시체의 위를 절개하여 열었다가 채 소화되지 않은 모르핀 알약 두 정을 발견한 적이 있다. 생전에 그는 홀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며 약병의 뚜껑을 더듬어 이 약을 꺼냈을 것이다.

내가 즐겨보는 미국 드라마 Criminal Mind에서 부검의로 나오는 May라는 캐릭터가 치유가 아닌 이미 죽은 시체를 해부하는 부검의가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죽은 사람을 해부하다 보면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말을 해줘요. 그리고 그들에게 정의를 찾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73 시체 해부뿐 아니라 모든 의학은 신성한 영역을 침범한다. 의사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환자의 신체를 침입해 들어간다. 그리고 환자의 가장 취약하고, 가장 신성하며, 가장 은밀한 부분을 들여다본다. 그런 다음 환자를 회복시켜 세상으로 돌려보낸 뒤 다시 그에게서 빠져나온다. 신체를 물질이자 구조로 보는 것과 인간의 극심한 고통을 줄이는 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74 의과 대학원에 다니면서 나는 의미, , 죽음 사이의 관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학부생일 때 글을 써서 논했던 인간의 관계성이 의사와 혼자 사이에서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의학도인 우리는 죽음과 고통, 그리고 환자를 돌보는 데 수반되는 여러 업무에 직면했다. 배우는 과정이라 실제로 책임을 지는 일은 없었지만, 그 무게를 희미하게나마 느낄 순 있었다.


75 어느 날 밤 루시와 나는 내 아파트의 소파에 앉아 심전도 파형을 공부했다. 그녀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치명적인 부정맥을 정확히 짚어냈다. 갑작스럽게 뭉클해진 루시는 울기 시작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연습용 심전도가 누구의 것이든, 그 환자는 살아남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 페이지 위의 구불구불한 선들은 단순한 선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심실세동이 악화되어 결국 심장 수축이 멈출지도 모르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고, 사람을 눈물짓게 만들 수도 있었다.

아직 학생때라서 그랬을까? 자꾸 접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익숙해지게 마련인 것 같은데…… 심전도 파형이 단순한 선 이상임을 깨달은,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깨닫고 울었다는 의과 대학원생의 이야기에 나도 울컥해졌다.


88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소식을 전해주었다. 한 아이는 어제 오후에 죽었고, 다른 아이는 24시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내가 새로운 아이를 받을 무렵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

우리는 어느 날 태어났고, 어느 날 죽을 거요. 같은 날, 같은 순간에. 여자들은 무덤에 걸터앉아 아기를 낳고, 빛은 잠깐 반짝이고, 그러고 나면 다시 밤이 오지.” 나는 겸자를 든 무덤 파는 사람옆에 서 있었던 셈이다. 쌍둥이의 삶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정말 무엇이었을까? 고통 속에 자랄 것을 생각하면 그 때 죽은 것이 다행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거면 아예 임신도 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까? 아니 그 엄마는 아이들을 뱃속에 넣고 있던 몇 달간이라도 행복했을까?


90 “하지만 어느 정도가 나쁜 상태라고 할 수 있죠? 너무 빨리 태어나는 것과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안 좋은가요?”

그건 의사의 판단에 달렸죠.”

이 얼마나 중대한 판단인가. 내가 여태껏 살면서 프렌치 딥 샌드위치와 루벤 샌드위치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판단을 해본 적이 있었나? 어떻게 하면 의사다운 판단을 내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앞으로 실제적인 의학을 더 많이 배워야겠지만,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지식만으로 충분할까? 물론 지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도덕적 명확성 또한 필요했다. 앞으로 내가 지식뿐만 아니라 지혜도 함께 얻게 될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91 암이 광범위하게 전이되었다면 수술은 무용지물이므로 당연히 취소된다. 복도에 서서 닥쳐올 아홉 시간을 기다리던 마리는 내심 이런 생각을 했다. ‘너무 피곤해. 하느님 제발, 전이가 있게 해주세요.’ 실제로 전이가 확인되어 환자의 절개 구멍은 봉합되고 수술이 취소되었다. 마리는 처음엔 안도했지만, 곧이어 깊은 괴로움과 수치심에 시달렸다. 그녀는 수술실을 뛰쳐나왔고, 고해 신부가 필요하던 차에 나를 보았다. 나는 그녀의 바람대로 해주었다.

 

94 대화가 끝났을 즈음 아이의 부모는 여전히 편치 않은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닥쳐올 일과 마주할 준비는 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창백하고 칙칙하고 멍해 보이던 그들의 얼굴이 결연한 표정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나는 모든 이가 언젠가는 마주치기 마련인, 삶과 죽음과 의미가 서로 교차하는 문제들은 대개 의학적 상황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이런 문제들과 마주치면, 필연적으로 철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주제를 파고들게 된다.

 

95 이처럼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요점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 가령 당신이나 당신의 어머니가 몇 달 더 연명하는 대가로 말을 못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치명적인 뇌출혈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낮은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시력 손상을 감수해야 한다면? 발작을 멈추려고 하다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된다면? 당신의 아이가 얼마만큼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하게 될까? 뇌는 우리가 겪는 세상의 경험을 중재하기 때문에, 신경성 질환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101 나는 분노와 슬픔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 하비 부인은 수많은 서류 작업 끝에 내가 맡게 된 환자였다. 다음날 나는 그녀의 검시에 참여하여, 병리학 전문의들이 그녀를 절개하고 장기를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 장기들을 직접 만지고 세밀히 살피며 내가 그녀의 창자에 묶었던 매듭들을 확인했다. 그때부터 나는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를 환자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

 

102 2. 폐렴으로 죽어가던 한 병리학 전문의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씨근거리다 결국 병리검사실로 옮겨졌다. 생전에 수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난 셈이었다.

 

102 때때로 죽음의 무게가 손에 잡힐 듯 뚜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스트레스와 고통이 공기 중에 감돌았다. 평소에는 그 공기를 들이마시면서도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습하고 후텁지근한 날처럼, 공기의 무게 때문에 질식할 것 같은 날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끝이 보이지 않는 여름날의 정글에 갇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환자의 가족이 흘리는 눈물을 비처럼 맞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104 기량이 발전할수록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점점 더 커졌다. 어떤 환자를 구할 수 있고 구할 수 없는지, 또 구해서는 안 되는지 제대로 판단하려면 손에 넣기 어려운 예지력이 필요하다. 나는 실수도 했다. 한 환자를 수술실로 급히 데려갔지만 그의 뇌를 완전히 구해내지는 못했다. 그 결과 환자의 심장은 뛰었지만, 그는 이제 말을 하지 못하고 튜브를 통해 음식을 먹었다. 그가 결코 원하지 않았을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이 환자의 사망보다 더 지독한 실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105 무의식 상태로 신진대사를 하는 이런 불완전한 생존 상태는 가족에게 견디기 힘든 짐이 되어 대개는 시설로 보내진다. 감정적인 정리를 아직 하지 못한 가족이 환자를 찾아오는 발길은 점점 뜸해지고 환자는 결국 치명적인 욕창이나 폐렴에 걸리고 만다. 환자가 언젠가 눈을 뜨지 않겠냐며 연명치료를 고집하는 가족도 있지만, 많은 환자들이 그렇지 않기에, 아니 그렇게 될 수 없기에 신경외과는 선고를 내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106 생사의 순간에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 순간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태양을 직접 응시하며 천문학을 배우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나는 결정적 순간에 환자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그저 그 순간에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많은 고통을 목격했고, 더 나쁘게도 그런 고통에 익숙해졌다. 핏속에서 익사할 듯 허우적거리면서도 그런 생활에 적응하고, 그 와중에 떠다니는 법, 수영하는 법을 배우며, 심지어는 같은 파도에 휘말리고 같은 뗏목에 매달린 간호사들이나 의사들과 유대관계를 맺으며 삶을 즐기기까지 한다.

 

110 그 순간 환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던 예전의 기억들이 몰려왔다. 걱정하는 환자에게 퇴원을 밀어붙였던 일, 다른 급한 일들 때문에 환자의 고통을 외면했던 일. 내가 진찰하고, 기록하고, 몇 가지 진단으로 깔끔하게 분류해버린 환자들의 고통, 그리고 내가 보지 못한 고통의 의미들이 전부 부메랑이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복수심에 불타고, 분노하고, 냉혹한 모습으로.

나는 톨스토이가 묘사한 정형화된 이미지의 의사, 무의미한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기계적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로 변해가고 있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인간적인 의미를 완전히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112 기술적인 탁월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레지던트로서 내가 꿈꾸었던 가장 높은 이상은 목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누구나 결국에는 죽는다), 환자나 가족이 죽음이나 질병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환자가 치명적인 두부 출혈로 병원에 들어올 때, 신경외과의와 나누는 첫 대화는 환자의 가족이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환자를 평화롭게 보내줄 수도 있고(“천명이 다해서 떠난거야”), 아니면 결코 아물지 않는 회환으로 남을 수도 있다(“그 의사들은 우리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어! 그 아이를 구하려는 시늉조차 안 했다고!”). 메스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면, 외과의가 선택할 수 있는 도구는 따뜻한 말뿐이다.

 

113 이런 순간 나는 대부분의 경우 죽음에 맞서 싸우는 전사가 아닌 죽음의 전령사 역할을 했다. 가족들에게 그들이 기억하는 사람(온전하고 생기가 넘치는 독립적인 사람)은 이미 과거의 사람이고, 환자가 어떤 미래를 원할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들이 가진 정보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했다. 편안한 죽음을 원할까, 아니면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액체가 들어가고 나오는 여러 주머니들과 끈을 매달고 연명하는 삶을 원할까.

 

116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던 그녀는 힘겹지만 납득할 만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보았다. 그녀는 수술을 선택했고, 수술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녀는 이틀 뒤에 퇴원했으며 다시는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116 큰 병은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 전체의 삶을 바꾸어놓는다. 하지만 뇌 질환은 거기에 난해하고 신비한 분위기가 더해진다. 아들의 죽음만으로도 부모의 정돈된 세계는 뒤집혀 버린다. 그런데 환자의 뇌는 죽었고 몸은 따뜻하고 심장도 여전히 뛰고 있다니, 이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을까? 재앙(disaster)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부서지는 별을 의미하는데, 신경외과의의 진단을 들었을 때 환자의 눈빛이 바로 그렇다. 때로는 그 소식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뇌파가 일시 중단되며 고통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을 심인성증후군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나쁜 소식을 들었을 때 경험하기도 하는 졸도의 심각한 형태이다.

 

121 둘째, 정확한 것도 중요하지만, 희망의 여지는 반드시 남겨둬야 한다. ‘평균 생존 기간은 11개월입니다’, 라고 말하기보다는 대다수 환자가 수개월부터 2~3년까지 생존합니다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 더 정직한 표현이다. 문제는 환자가 곡선의 어디에 있다고 정확히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환자는 6개월 만에 사망할 것인가, 아니면 60개월 만에 사망할 것인가? 필요 이상으로 정확성을 기하려고 하는 건 무책임한 짓이다.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는 의사들이 있는데(“의사 선생님이 나한테 6개월 남았다고 했어요”), 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이며 누가 그런 수치를 가르쳐 주는 건지 나는 너무나 의아했다.

 

122 “우리는 싸워서 이겨낼 거예요, 선생님.” 그들은 기도에서부터 재산, 약초, 줄기세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에 기댄다. 내 눈에는 그런 강인함이 절망에 맞서기 위한 불안정하고 비현실적인 낙관주의처럼 보인다. 어쨌든 수술에 직면할 때는 싸우겠다는 태도가 적당하다.

 

124 나는 환자의 뇌를 수술하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정체성, 가치관, 무엇이 그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지, 또 얼마나 망가져야 삶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수술에 성공하려는 헌신적인 노력에는 큰 대가가 따랐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불가피한 실패는 참기 힘든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이런 부담감은 의학을 신성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영역으로 만든다. 의사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지려다가 때로는 그 무게를 못 이겨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132 최고참 레지던트가 되자 나는 거의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했고 성공과 실패의 기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주어졌다. 실패하면 괴로웠고, 기술적인 탁월함이 곧 도덕적 요건이라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내 기술에 정말 많은 게 걸려 있거나, 불과 1~2밀리미터 차이로 비극과 성공이 갈릴 때에는 좋은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133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는 동안 그의 시상하부가 약간 손상을 입었는데, 그 결과 사랑스러웠던 여덟 살짜리 꼬마가 열두 살의 괴물이 되고 말았다. 매슈는 먹는 걸 멈추지 못했고, 폭력적인 발작을 일으켰다. 매슈 어머니의 팔에는 아이가 할퀴어서 생긴 보라색 흉터가 가득했다. 결국 매슈는 보호 시설로 보내졌다. 그는 1밀리미터의 손상 때문에 괴물이 되었다. 무슨 수술이든 위험보다 이익이 더 클 거라는 가족과 외과의의 판단 하에 결정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면 가슴이 아프다. 매슈가 열두 살에 140킬로그램의 몸무게로 살아갈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135 “아니, 락트인 증후군(locked-in syndrome) 상태에 빠지지.” 2밀리미터를 더 자르면, 환자는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는 완전한 마비 상태가 된다. 담당의는 현미경에서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내가 이걸 아는 건 이 수술을 하면서 세 번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일세.”

 

140 긴장감 높은 분야의 의사는 삶과 정체성이 위협받고 삶이 굴절되는 가장 위급한 순간에 환자를 만나게 된다. 의사의 책무는 무엇이 환자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지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지켜주려 애쓰되 불가능하다면 평화로운 죽음을 허용해주는 것이다. 그런 책무를 감당하려면 철두철미한 책임감과 함께, 죄책감과 비난을 견디는 힘도 필요하다.

 

142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우리 의사에게도, 살고,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유기체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살아간다. 죽음은 당신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제프와 나는 몇 년 동안 죽음에 능동적으로 관여하고, 마치 천사와 씨름한 야곱처럼 죽음과 씨름하는 훈련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의미와 대변하려 했다. 우리는 사람의 생사가 걸린 일을 책임져야 하는 힘겨운 멍에를 졌다. 우리 환자의 삶과 정체성은 우리 손에 달렸을지 몰라도, 늘 승리하는 건 죽음이다. 설혹 당신이 완벽하더라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1.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 마라

148 내 삶은 그동안 잠재력을 쌓아왔으나 그 잠재력은 결국 빛을 보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정말 많은 걸 계획했고, 그 계획이 곧 성사될 참이었다. 내 몸은 쇠약해졌고, 내가 꿈꿨던 미래와 나 자신의 정체성은 붕괴되었으며, 내 환자들이 대면했던 실존적 문제를 나 역시 마주하게 되었다. 폐암 진단은 확정되었다. 내가 신중하게 계획하고 힘겹게 성취한 미래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하는 동안 무척 익숙했던 죽음이 이제 내게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죽음과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지만, 아직 죽음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치료했던 수많은 환자들이 남긴 발자국을 보고 따라갈 수 있어야 할 텐데, 기로에 선 내 앞에 보이는 거라곤 텅 비고, 냉혹하고, 공허하고, 하얗게 빛나는 사막뿐이었다. 마치 모래 폭풍이 그동안 친숙했던 모든 흔적을 쓸어간 것처럼.

 

154 환자들을 돌봐야 한다면서 나를 몰아붙이던 그 의무가 사라지자 나 자신이 어느새 병약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있는 힘을 다해 결승선을 통과한 후 쓰러지는 달리기 선수처럼.

 

155 우리는 춤을 추며 웃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고 있자니 너무 슬펐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존재인지도 모르고 함께할 인생을 계획했다. 내 친구인 로리는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을 때 약혼자가 있었다. 이 편이 더 잔인할까?

 

161 나는 나 자신의 죽음과 아주 가까이 대면하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동시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가 될지는 알지 못했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통렬하게 자각한다. 그 문제는 사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라는 건 없다.

 

162 희망(hope)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영어에 등장한 건 약 1,000년 전으로, 확신과 소망을 결합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소망하는 것()과 확신하는 것(죽음)은 달랐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희망의 진짜 의미는 헛된 소망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의학 통계는 평균 생존 기간 같은 수치를 나타낼 뿐 아니라, 신뢰 수준, 신뢰 구간, 신뢰 한계 같은 도구들을 이용해 수치에 대한 우리의 신뢰도도 측정한다. 그렇다면 통계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여전히 가능성 있는 결과, 95퍼센트로 측정된 신뢰 구간을 극복하고 생존할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 이것이 내게는 희망이란 것일까? 우리는 과연 생존 곡선을 패배’, ‘비관적’, ‘현실적’, ‘희망적’ ‘망상등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을까? 숫자는 그저 숫자가 아니던가? 우리는 모든 환자의 생존 확률이 평균 이상이라는 희망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165 내 신체에서 그나마 자랑할 만한 매력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외모가 다소 추해지더라도 살아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루시는 여드름이 나고 지저분해진 내 피부도 예전과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정체성은 뇌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그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신체 안에서 살 수 밖에 없다. 산행, 캠핑, 달리기를 좋아하고, 양팔을 쫙 벌려 꼭 껴안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하던, 그리고 키득거리는 조카를 번쩍 들어주던 남자, 나는 더는 그 남자가 될 수 없었다. 기껏해야 그런 남자를 목표로 삼는 것이 최선이었다.

 

165 “저는 40년의 인생 계획을 짰었어요. 20년은 외과의사이자 과학자로, 마지막 20년은 작가로 살 생각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마지막 20년에 들어서게 됐으니, 어쩐 계획을 세워야 할지 난감하네요.”

 

167 창문 없는 상담실의 안락의자에 앉아 우리 부부의 삶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암 진단과 함께 부서져버린 현재와 미래, 미래를 아는 고통과 알지 못하는 고통,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어려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절실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실 어떻게 보면 암은 우리의 결혼 생활을 구원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168 “당신 아직도 모르겠어?” 루시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지금 우리 상태가 최고라는 건, 더 나아질 게 없다는 뜻이잖아.”

 

170 물리 치료에서 나는 역기가 아니라 겨우 두 다리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진이 빠지고 굴욕적이었다. 뇌는 멀쩡했지만, 왠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몸은 허약했고 하프 마라톤을 달리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 추억이 되어버렸다. 이런 몸 역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고통스러운 요통이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피로와 메스꺼움 또한 마찬가지이다.

 

171 쇠약해진 몸으로 집에만 있으니 루시에게 남편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두려웠다. 나는 내 삶의 모든 문장에서 주어가 아닌 직접 목적어가 된 기분이었다. 14세기 철학에서 환자(patient)라는 단어는 그저 행동의 대상을 의미했고, 나는 딱 그런 존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의사였을 땐 행위의 주체이자 원인이었으나, 환자인 나는 그저 어떤 일을 당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172 죽음에 직면하고 보니 더 미뤄선 안 되고 급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를 가져도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173 “아기가 생기면 우리가 제대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까?” 루시가 물었다. “아기와 헤어져야 한다면 죽음이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그렇다 해도 아기는 멋진 선물 아니겠어?” 내가 말했다. 루시와 나는 고통을 피하는 것만이 삶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렇다고 해도 본인에게 멋진 선물을 하기 위해서 아기를 갖기로 한 건 이기적인 결정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남겨진 아이를 홀로 키울 아내를 생각해도 그렇고, 아빠에 대한 기억 없이 살아가야할 아기를 위해서도……

 

174 수년을 죽음과 함께 보낸 후 나는 편안한 죽음이 반드시 최고의 죽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아기를 갖기로 한 결정을 양가에 알리고, 가족의 축복을 받았다. 우리는 죽어가는 대신 계속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177 그 주말에 스탠퍼드 신경외과 동문 모임이 있었고, 나는 거기에 참석하면 예전의 나로 어느 정도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있어 보니 지금의 내 삶이 예전과 얼마나 다른지 더욱더 실감날 뿐이었다. 내 주변은 온통 성공, 가능성, 야심으로 가득했다. 사람을 녹초로 만드는 여덟 시간의 수술도 서서 견딜 수 있는 동료들과 선배들은 이제 나와는 다른 삶의 궤도를 따라 맹렬히 달리고 있었다. 나는 거꾸로 돌리는 크리스마스 캐럴에 갇힌 기분이었다. 동료 레지던트 빅토리아는 행운의 선물 꾸러미(연구 보조금, 일자리 제의, 의학 전문지 논문 게재)를 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도 함께 누렸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선배들은 더는 내 것이 아닌 미래(젊은 의과학자 상 수상, 승진, 새집)를 살아가고 있었다.

 

177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까, 그리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환자? 과학자? 교사? 생명 윤리학자? 아니면 에마의 말대로 신경외과 의사 복귀? 집에만 있는 아빠? 작가? 대체 나는 무엇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가? 의사 시절 나는 중병에 걸린 환자들이 마주친 문제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었고, 바로 이런 순간을 그들과 함께 깊이 파고들기를 원했었다. 그렇다면, 죽음을 이해하고 싶었던 청년에게 불치병은 완벽한 선물이 아닌가? 죽음을 실제로 겪는 것보다 죽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얼마나 힘들지, 또 얼마나 많은 영역을 탐구하고, 조사하고, 정리해야 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의사의 일이란 두 개의 선로를 잘 연결해서 환자가 순조로운 기차 여행을 하도록 돕는 거시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죽음을 대면하는 일이 이토록 혼란스러울 줄은 미처 몰랐다.

 

179 여느 때처럼 나는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고, 아침을 먹은 다음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

 

180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190 하지만 셋째 날이 되자 몸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근무가 다시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환자와 다시 접촉하면서부터는 이 일의 의미도 되찾을 수 있었다. 수술 사이에, 그리고 회진을 돌기 전에 나는 구토 방지제와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제를 복용했다. 힘들었지만, 나는 완전히 업무에 복귀했다. 이제는 빈 침대를 찾는 대신 후배 레지던트들의 소파에서 쉬었고, 허리 통증을 참으면서 후배들에게 내 환자들의 치료와 관련된 사항을 지시하거나 훈계를 하기도 했다. 몸이 고통스러울수록 성취감은 더욱 커졌다. 그렇게 첫 주를 보낸 후 나는 40시간을 내리 잤다.

 

192 병을 앓으면서 겪게 되는 종잡을 수 없는 건 가치관이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이다. 환자가 되면 자신에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려고 계속 애를 쓰게 된다. 누군가가 내 신용카드를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자금 계획 세우는 법을 배워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과 비슷하다. 신경외과 의사로 일하기로 결정했더라도, 두 달 뒤엔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두 달 후에는 색소폰 연주를 배우거나 신앙생활에 몰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죽음은 단 한 번 있는 일이지만, 불치병을 안고 살아가는 건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다.

 

193 어느 순간 나는 약간의 협상을 시도했다. 정확히 말하면 협상이라기보다는 이런 식이었다. “하느님, <욥기>를 읽었는데 이해가 안 됩니다. 하지만 제 믿음을 시험하려고 이러시는 거라면, 제 믿음이 얼마나 약해 빠졌는지 이제 아셨을 겁니다. 저는 파스트라미 샌드위치에 매운 겨자가 빠져 있기만 해도 불경스러운 말을 뱉는 사람이니까요. 하느님, 제게 이렇게 핵폭탄급 시련을 주실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이렇게 협상을 하다가 분노가 치밀었다. “평생을 바쳐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암을 주십니까?”

그리고 마침내 나는 부정, 그것도 전면적인 부정 단계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

 

198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닐, 삶이 무너져 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다.

 

198 에마는 나의 옛 정체성을 되돌려주지는 않았다. 대시에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내 능력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202 과학은 경험적이고 재현 가능한 정보를 체계화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과학의 능력은 역설적으로 인생의 가장 중심적인 측면들(희망, 두려움, 사랑, 증오, 아름다움, 질투, 명예, 나약함, 부단한 노력, 고통, 미덕)을 포착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204 결국 우리 각자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 인류의 지식은 한 사람 안에 담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와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 생성되며,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인 진리는 이 모든 지식 위 어딘가에 있다.

 

205 씨 뿌리는 이가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214 “이게 끝은 아니에요.” 에마가 말했다. 분명 그녀는 지금껏 환자에게 천 번도 넘게 이 말을 햇을 것이다. 나 역시 환자에게 비슷한 말을 했었으니까. 불가능한 답을 구하는 환자에게 의사는 늘 이렇게 말한다. “끝의 시작도 아니에요. 그냥 시작의 끝인 거에요.”

 

216 다음 날 곧바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주 피곤했고 온몸이 나른했다. 큰 즐거움이었던 식사는 이제 바닷물을 마시는 일처럼 되어버렸다. 갑자기 내 모든 기쁨에 소금이 뿌려졌다. 아침에 루시가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서 줬는데, 마치 소금을 핥는 것 같았다. 나는 베이글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책을 읽는 것도 힘들었다. 나는 전에 브이에게 두 권의 두꺼운 신경외과 교재에 내 연구의 잠재적 치료 효과에 대한 글을 몇 장 써주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그 일 역시 제쳐두었다. 며칠이 지나자 텔레비전 시청과 억지 식사가 주요 일과가 되었다. 몇 주 후에는 일정한 생활 패턴이 생겼다. 불쾌감은 차츰 줄었고, 다음 번 약물 주사를 맞을 때가 되자 몸은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226 “좌절하셨나요?” 에마가 물었다.

아니요.”

그렇게 될 거에요. 회복하려면 오래 걸리니까요.”

, 인정할게요. 크게 보면 좌절한 게 맞아요. 하지만 하루하루 다시 물리 치료를 받고 조금씩 회복하는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요. 한 번 해봤으니 별거 아니겠죠.”

 

227 “에마, 다음엔 뭘 해야 하죠?”

더 힘을 내세요. 그게 중요해요.”

하지만 암이 재발하면, 그러니까, 확률이……” 나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멈췄다. 첫 번째 치료인 타세바 투약은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째 치료인 화학 요법을 시도했다가 나는 거의 죽다 살아났다. 세 번째 치료는, 만약 내가 살아남아 그 치료를 받는다 해도 성공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았다.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실험적인 치료법들이 있었다. 회의적인 말들이 내 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러니까, 수술실로 복직하거나, 다시 걸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죠, 아니면……”

당신에게는 아직 5년이라는 시간이 남았어요.” 에마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권위 넘치는 신탁의 말투도 아니었고, 진정으로 믿는 사람의 확신 같은 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

그녀 역시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녀와 나는 근엄한 분위기에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로 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평범한 두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심연에 직면하여 한없이 위축된 한 사람과 그를 바라보는 또 한 사람.

결국 의사도 희망이 필요한 존재였다.

 

230 그들은 내 딸을 이불로 감싸서 내게 건네주었다. 한쪽 팔로 아이의 무게를 느끼고 다른 팔로 루시의 손을 잡고 있으니 삶의 가능성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내 몸의 암세포는 여전히 죽어가거나 아니면 다시 자라고 있을 것이다. 내 앞에 펼쳐진 넓은 지평선에서 나는 공허한 황무지가 아니라 그보다 더 단순한 어떤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계속 글을 써내려가야 할 빈 페이지였다.

 

230 시간은 이제 나에게 양 날의 검과도 같다. 지난번에 병세가 악화되어 심하게 축난 몸 상태는 점점 나아지고 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암이 재발하게 될 테고, 그러다 결국 죽음에 이를 것이다. 죽음은 예상보다 느리게 올지도 모르지만, 원하는 것보다는 분명 빠르게 닥쳐올 것이다. 이런 자각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가장 명백한 반응은 정신없이 움직이려는 충동일 것이다. , 여행도 하고, 근사한 식사도 하고, 여태껏 접어둔 많은 소망을 성취하면서 삶을 만끽하는것이다. 하지만 암은 무자비하게도 시간뿐만 아니라 기력까지 빼앗아버려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의 양이 크게 줄었다. 마치 경주하다가 지친 토끼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설사 기력이 있더라도 나는 거북이의 방식이 더 마음에 든다.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고 깊이 명상하는 방식 말이다. 물론 그냥 어떻게든 버티는 날들도 있다.

 

232 지금이 몇 시인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료 훈련은 철저하게 미래 지향적이며, 나중의 큰 보상을 위해 현재의 유혹을 참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들은 5년 후에 뭘 하고 있을까 늘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5년 후에 내가 뭘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죽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건강할 수도 있다.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될지는 정말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점심 식사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다.

 

233 하지만 절대 미래를 빼앗기지 않을 한 가지가 있다. 우리 딸 케이디. 나는 케이디가 내 얼굴을 기억할 정도까지는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목숨은 사라지겠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 케이디에게 편지를 남길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대체 뭐라고 써야 할까? 케이디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일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지어준 별명이 딸아이 마음에 들지도 알 수 없다. 미래가 창창한 이 아이는,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 한 과거만 남아 있는 나와 아주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다. 이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잇는 말은 다 하나뿐이다.

그 메시지는 간단하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젔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에필로그_루시 칼라니티

240 폴은 마지막 토요일을 가족과 함께 아늑한 거실에서 보냈다. 그는 안락의자에 기댄 채 케이대를 데리고 놀았고, 시아버지는 내가 케이디에게 젖을 먹일 때 쓰는 흔들의자에, 시어머니와 하는 근처의 소파에 앉았다. 폴은 무릎 위에 앉힌 케이디에게 노래를 불러주며 살살 흔들어댔다. 케이디는 아빠의 콧속으로 산소를 넣어주는 관을 의식하지 못한 채 활짝 웃고 있었다. 폴의 세계는 더욱 작아졌다. 가족이 아닌 손님은 돌려보내는 내게 폴은 이렇게 말했다. “만나지는 못해도 내가 사랑한다는 건 다들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그 친구들의 우정이 소중해. 그리고 아드벡 한 잔 더 마신다고 해도 내 마음은 변치 않을 거야.” 폴은 그날 글을 쓰지 못했다. 이 책의 원고는 일부만 마친 상태였고, 폴은 책 한 권을 완성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거기에 필요한 체력, 정신, 시간 모두 부족했다.

 

242 폴은 오후에 편안하게 조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아주 심각하게 아팠다. 그가 잠든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조용히 거실로 나오니 시아버지도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나는 벌써부터 그가 그리웠다.

 

243 폴은 의사답게 불길한 검사결과를 금방 알아보았다. 나 역시 그랬다.

 

244 폴의 병세가 심각하여 인공호흡 장치를 떼어낼 수 없으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가 큰 문제였다. 정신착란과 장기 부전이 차례로 들이닥쳐 정신에 이어 신체까지 무너진다면? 의사인 우리는 이런 고통스러운 시나리오를 예전부터 목격해왔다. 폴은 대안을 검토하더니 결단을 내렸다. 죽음이 더 확실히 그리고 더 빠르게 찾아오겠지만, 삽관 대신 안락치료를 선택하겠다는 것이었다. 폴은 외에 있는 암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어떻게 잘 버틴다 해도, 앞으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어.”

 

246 우리 친구 빅토리아가 집에서 케이디를 데려왔다. 케이디는 폴의 오른쪽 팔꿈치 안쪽에 기분 좋게 앉아 자기의 작은 양말을 잡아당기고 병원 이불을 두들기면서 웃고 옹알이를 했다. 그 아이는 폴을 숨 쉬게 해주는 바이팝 장치가 쉭쉭 소리를 내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케이디는 자기도 모르게 아빠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247 “폴은 성공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은 시도는 바라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가망이 없다면, 마스크를 벗고 케이디를 안고 싶어 해요.”

 

247 그리고 폴은 부드럽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난 준비됐어.”

바이팝을 떼고 모르핀을 맞으며 생을 마무리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

, 당신이 숨을 거둔 뒤에 가족 분들은 힘들겠지만, 당신이 보여준 용기있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빨리 이겨내실 겁니다.” 폴의 형 수만이 이제 편히 가, 내 동생하고 남편에게 말하는 동안 동생 지반은 폴의 얼굴만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248 12년 전 뉴헤이븐에서 서로 사랑에 빠졌을 때가 기억났다. 우리의 몸이 어찌나 서로에게 잘 들어맞는지 깜짝 놀랐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둘이서 몸을 휘감고 있을 때 가장 편안하게 잤다. 나는 이제 폴이 내 품에서 예전처럼 편안하게 위로받기를 간절히 바랐다.

 

249 의식을 잃은 폴은 눈꺼풀을 닫은 채 드물게 숨을 쉬었다.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폴의 긴 손가락은 내 손가락에 부드럽게 놓여 있었다. ~ 사랑으로 가득한 병실은 지난 세월 우리가 함께 보낸 휴일이나 주말과 별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폴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정말 용감한 팔라딘(내가 그를 부르는 애칭: 샤를마뉴 대제의 전설적인 열두 용사 중 한 사람)이야.” 그리고 나는 그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서 우리가 지난 몇 달 동안 함께 지은 시를 나지막하게 읊었다. 그 시의 핵심은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였다. ~

그렇게 우리는 이 소중한 시간의 고통과 위안을 함께 나누면서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250 폴의 호흡은 불안정하고 불규칙하게 변했다. 그럼에도 그의 몸은 편안해 보였고, 팔다리도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9시 직전 폴의 입술이 벌어지고 눈이 감겼다. 폴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마지막으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

 

251 <숨결이 바람 될 때>는 폴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는 바람에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미완성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완성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 폴이 직면한 현실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252 삼십 대에 죽는 건 이제 드문 일이지만, 죽음 그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다. “폐암에 대한 중요한 사실은 그게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거야.” ~ ”그냥 충분히 비극적이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 독자들은 잠깐 내 입장이 되어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야. ‘그런 처지가 되면 이런 기분이구나…… 조만간 나도 저런 입장이 되겠지.’ 내 목표는 바로 그 정도라고 생각해. 죽음을 선정적으로 그리려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을 때 인생을 즐기라고 훈계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지.” 물론 폴은 그저 죽음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죽음을 용감하게 헤쳐 나갔다.

 

253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로 한 폴의 결정은 더할 나위 없이 용감했지만, 죽음을 기피하는 우리 문화에서는 그리 칭송받지 못한다. ~ 그는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오랜 시간 씨름했고 이 책은 그 본질적인 영역을 탐구하고 있다. ~ 용감한 보 는 자 폴은 이 책을 쓰면서 말하는 자가 되었고, 우리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죽음을 대면하라고 가르쳐주었다.

 

253 암 진단이라는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서 우리는 예전의 부드럽고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폴의 육체적인 생존과 우리의 감정적인 생존을 위해 우리는 서로를 꼭 붙잡았고, 그러면서 우리의 깊은 사랑이 있는 그대로 드러났다. 우리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결혼 생활을 지키는 비결은 한 사람이 불치병에 걸리는 거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역으로 말하자면, 불치병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서로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서로에게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며, 감사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 불확실성과 고통에 함께 맞서고 잇던 우리에게 찬송가의 가사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기쁨과 슬픔을 그대와 나누리라, 이 여정이 끝나는 걸 볼 때까지.”

 

254 암 진단을 받은 직후 내게 자신이 죽으면 재혼하라고 했던 폴의 말은, 투병하는 내내 나의 미래를 안전하게 보장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열심히 애쓸 것인지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었다. ~ 동시에 나 역시 그의 현재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남은 시간을 최대한 잘 보내도록 돕고 싶었다.

 

255 남편이 숨을 거두기 몇 주 전, 함께 침대에 누워서 내가 그에게 물었다. “이렇게 내가 당신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있어도 숨 쉴 수 있어?”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이게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폴과 내가 서로의 삶에 깊은 의미가 될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257 폴은 자신의 강인함과 가족 및 공동체의 응원에 힘입어 암의 여러 단계에 우아한 자세로 맞섰다. 그는 암을 극복하거나 물리치겠다고 허세를 부리거나 허황된 믿음에 휘둘리지 않고, 성실하게 대처했다. 그래서 미리 계획해둔 미래를 잃고 슬픈 와중에도 새로운 미래를 구축할 수 있었다.

 

257 폴은 암 진단을 받은 날 소리내어 울었다. 그는 우리가 욕실 거울에 걸어둔 그림을 보면서 울었다. 그 그림에는 내게 남은 모든 말을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보내고 싶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수술실에서 보낸 마지막 날에도 울었다. 폴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줬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불치병에 걸렸어도 폴은 완전히 살아 있었다. 육체적으로 무너지고 있었음에도, 활기차고 솔직하고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 없는 완치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258 내게 가장 그리운 폴은 연애하기 시작했을 때의 팔팔하고 눈부셨던 그 남자가 아니다. 뭔가에 집중하는 아름다운 남자였던 투병 말기의 폴, 이 책을 쓴 폴, 병약하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았던 그 남자가 그립다.

 

261 무덤가에 튤립, 백합, 카네이션 같은 꽃을 두고 왔다가 나중에 다시 가보면 사슴이 꽃을 먹어치운 경우가 많았다. 꽃이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는 증거이고, 폴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벌레들이 재빠르게 땅을 뒤집고 자연이 계속 변화하는 걸 보면 폴이 일찍이 깨달았고 나 역시 뼛속 깊이 실감하고 있는 사실이 떠오른다. 생과 사는 떼어내려고 해도 뗄 수 없으며, 그럼에도 혹은 그 때문에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폴에게 벌어진 일은 비극적이었지만, 폴은 비극이 아니었다.

 

262 폴은 세상을 떠났고 나는 거의 매순간 그가 사무치게 그립지만, 우리가 여전히 함께 만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263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잇다.”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는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폴에게 주어진 삶이었고, 그는 그 삶으로부터 이 책을 써냈다. 그래서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지금 이대로 완결된 작품이다.

 

263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좋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어. 하지만 사람들이 지금 아빠를 칭찬하는 말들은 전부 사실이란다. 아빠는 정말 그렇게 훌륭하고 용감한 사람이었어.”

 

264 폴은 평생 죽음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죽음을 진실하게 마주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결국 그는 그 일을 해냈다.

나는 그의 아내이자 목격자였다.

 

추천의 글_에이브러햄 버기즈

267 하지만 늘 어떤 형태로든 문학으로 되돌아가기를 꿈꾸었고, 언젠가는 책을 쓰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러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제 시간이야말로 그에게 정말 부족한 것이 되고 말았다.

 

272 그리고 시간이 흘러 폴은 숨을 거두었다. 나는 스탠퍼드 대학의 교회에서 열린 그의 추도식에 참석했다. 나는 그 멋진 교회가 비어 있을 때, 종종 찾아가 앉아 그 안에 비치는 햇빛과 정적을 감상하며 새로운 힘을 얻곤 한다. ~

나는 조금 구석진 자리에 앉아 그의 절친한 친구들, 목사와 그의 형제들이 들려주는 감동적이고 때로는 가슴 아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폴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나는 한 번의 만남과, 그가 썼던 몇 편의 글을 뛰어넘어 그를 진정으로 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그의 멋진 아내와 아직 아기인 딸, 슬픔에 잠긴 그의 부모님과 형제의 모습 속에서, 또 교회를 가득 메운 친구 동료, 옛 환자들의 얼굴 표정에서 폴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옮긴이의 말

278 칼라니티의 글을 읽으면서 특히 감동적인 부분은 비록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으나,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평소 하던 수련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장면이다. 그를 치료한 의사 에마 헤이워드는 암에 걸린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말한다. 하나는 평소에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칭병하며 아무것도 안 하는 절망적인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그 병 때문에 더욱 평소 하는 일에 몰두하는 긍정적인 태도가 그것이다. 칼라니티는 후자의 태도를 보인다.

 

279 죽음을 맞이하는 칼라니티의 태도 또한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암이 폐에서 뇌까지 전이되어 호흡하기가 힘들어진 상태에서 이제 목에 삽관을 해야만 연명할 수 있게 되자 그는 삽관을 거부하고 자발적인 죽음을 선택한다. 평소 죽음이 무엇인지 깊이 명상하여 그 죽음을 삶의 동반자로 여기는 사람다운 선택을 한 것이다.

 

279 칼라니티의 죽음이 너무나도 아쉬운 것은 그가 가나안 땅에 거의 다 도착했는데 막상 그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경외과 수련의로서 탁월한 기량과 성취를 보였기 때문에 스탠퍼드 대학의 교무국장은 그를 모교의 신경외과 전문의 겸 교수로 채용할 뜻을 내비쳤고, 전국의 유명 의과대학들은 지금보다 여섯 배나 높은 연봉을 주면서 채용하겠다고 제안했으며, 투병 중에 어린 딸 케이디까지 얻었는데, 이런 완성 직전의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한탄스러웠겠는가. 그러나 칼라니티는 산을 쌓아올리다가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했더라도 그것 역시 자신이 감당할 몫이라면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

    프롤로그, 어린시절과 의사가 된 후 아직 폐암 선고를 받기 전 건강하던 때를 다룬 1, 폐암 선고를 받은 후 투병생활을 다룬 2, 아내가 쓴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얼핏 단순하게 보인다. 저자가 아픈 이후부터 쓰기 시작해서 사망 직전까지 썼으나 결국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리고 저자의 사망 시점과 그 이후의 모습을 아내의 에필로그로 보완해 완성작을 만들었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서 더 리얼리티를 갖고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책이 됐다는 생각이 든다.

  2. 보완할 점

     

  3. 이 책의 장점

    이 책의 한 구절이 이 책의 장점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삼십 대에 죽는 건 이제 드문 일이지만, 죽음 그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다. “폐암에 대한 중요한 사실은 그게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거야.” ~ ”그냥 충분히 비극적이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 독자들은 잠깐 내 입장이 되어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야. ‘그런 처지가 되면 이런 기분이구나…… 조만간 나도 저런 입장이 되겠지.’ 내 목표는 바로 그 정도라고 생각해. 죽음을 선정적으로 그리려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을 때 인생을 즐기라고 훈계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지.” 물론 폴은 그저 죽음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죽음을 용감하게 헤쳐 나갔다.

  4. 내가 저자라면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게 마련이다. 책이고 뭐고 하던 일도 다 팽개치고 그냥 쉬고 싶고, 병을 고치는데만 집중할 것 같은데…… 그는 죽음을 앞두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저자라면 쓰던 글이 있더라도 잠시 중단하고 일단 치료에만 몰두했을 것 같다. 나을 가망성이 없다는 걸 알면 다를까? 모르겠다. 그 입장이 안 되어봐서. 그리고 아직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 것에 감사한다.

IP *.222.255.24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892 #43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 (윤정욱) 윤정욱 2018.02.05 1288
4891 #43 그들의 생각을 훔치다(이정학) 모닝 2018.02.04 1390
4890 #43 쇠이유, 문턱이라는 이름의 기적(정승훈) 정승훈 2018.02.03 1460
4889 #40 위대한 멈춤 1_다시 멈춤, 또 다른 시작 뚱냥이 2018.02.02 1353
» #42 숨결이 바람될 때: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_이수정 알로하 2018.01.29 1855
4887 #42. 숨결이 바람 될 때 ggumdream 2018.01.29 1465
4886 숨결이 바람될 때 - 미완성의 인생, 책으로 삶의 의미가 완성되다 file 보따리아 2018.01.29 2010
4885 #42 숨결이 바람 될때 (윤정욱) [1] 윤정욱 2018.01.28 2996
4884 숨결이 바람 될 때 송의섭 2018.01.28 1277
4883 #42 숨결이 바람될때 (이정학) 모닝 2018.01.28 1533
4882 #42 숨결이 바람이 될 때 (정승훈) 정승훈 2018.01.27 1658
4881 # 41. 명상록 [1] ggumdream 2018.01.22 1668
4880 #41 명상록 (윤정욱) 윤정욱 2018.01.22 1390
4879 # 41 명상록(이정학) [1] 모닝 2018.01.21 1397
4878 명상록 송의섭 2018.01.21 1337
4877 #41 명상록 (정승훈) 정승훈 2018.01.21 1285
4876 명상록 보따리아 2018.01.20 1543
4875 대통령의 글쓰기 송의섭 2018.01.16 1311
4874 #40 대통령의 글쓰기_대통령에게 배우는 사람을 움직이는 글쓰기 비법_이수정 알로하 2018.01.16 1337
4873 #40 - 대통령의 글쓰기(이정학) 모닝 2018.01.16 1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