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 조회 수 4344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10년 2월 13일 05시 01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조지프 캠벨(미국, 1904~1987)은 허무맹랑한 과거의 이야기로 치부되어 오던 신화를 현재로 끌어와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종교 학자이자 신화학자이다. 

  1949년 첫 작품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발간한 것을 시작으로 1952년 <어디서나 읽는 아라비안나이트>, 1959~1968년 <신의 가면>(4부작), 1971년 <어디서나 읽는 융 이야기>, 1964년 <영혼이 닿은 우주공간>, 1985~1986년 다큐멘터리<신화의 힘>촬영(후에 대담집 출간) 등 1987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여든 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끊임없는 역작을 쏟아내며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캠벨은 미국과 유럽에서 생물학, 수학, 영문학 등을 공부했으나 제도권 내에서 자신의 관심사인 인도철학과 미술에 관한 탐색을 지속하는데 한계에 부딪히자 박사학위를 과감히 포기하고 뉴욕 우드스턱 근처의 숲으로 들어가 책을 읽고 재즈 밴드에서 연주를 하며 5년 가까운 칩거 생활을 보냈다.

  캠벨에게 이 기간은 읽고 싶었던 책을 대부분 다 읽는 ‘성스러운 시간‘이었으며, 동서양의 문명을 넘나드는 독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신학, 인류학, 문학, 철학, 역사, 과학, 심리학, 예술, 종교 등을 아우르는 독서를 통해 세계 여러 곳의 문화와 신화를 연구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알려진 바로는 어린 시절 자연사 박물관에서 토템 등 소장품을 보고 아메리칸 인디언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유럽의 뮌헨 대학과 파리 대학에서 아서왕 이야기를 공부하면서 어릴 때 즐겨 읽던 인디언 신화와 아서왕 이야기의 주제들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부터 신화의 세계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 후 동서양의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신화들이 동일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평범한 미래의 영웅은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며 그 과정에서 많은 시련을 겪지만 조력자를 만나 도움을 얻고 또 스스로 성장하면서 무사히 고난을 극복하고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할 보물을 가지고 귀환 한다’ 는 이 구조는 과거 신화에서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영화나 소설, 만화 등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이 연구 과정에서 각 문화권의 차이가 아닌 공통점을 발견했으며 또한 신화가 철학과 예술, 종교,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입증했다. 뿐만 아니라, 각 개인이 모두 자신의 삶에서 탄생과 부름, 도전과 모험, 고난과 극복, 귀환으로 이어지는 영웅의 삶을 살고 있으며, 인생의 의미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인생의 목표라고 설파했다. 욕망, 두려움, 의무의 굴레를 벗어나 아무도 가지 않은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다면 신들이 그것을 도울 것이며, 이것이 바로 삶의 희열을 따라가는 길이라고 했다. 또한 한 개인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태도를 선택할 수 있으며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것을 주장한다. 

  

  캠벨 본인이 바로 이런 희열을 따라가는 삶을 살았다고 평가된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신화’라는 볼모지에 자신의 끌림만을 믿고 뛰어들었으며 결국 스스로의 성취와 만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동 시대와 후대의 사람들에게 영웅과 신화라는 아름다운 보물을 주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웅 신화라는 새로운 통찰을 안겨 주었다.    



*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들어가는 글 - 캠벨 사상의 정수,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


자기 자신을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을 구별하는 것-가령 “어, 아니야, ‘우리’는 달라”하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전체성에 대립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 폭을 좁히고 우리 자신이 들어갈 감옥의 벽을 만든다. 자신의 사고와 삶에서 이원성을 만드는 것은, 곧 대립을 만드는 행위이다. [7]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은 노예의 도덕이며, 영혼과 육체에 있어 죽음과 부패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그 말 자체가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 귀를 기울이라고 조언했다. 그 의도가 오만이거나 악의이거나 무지인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9]


우리가 스스로의 선택 폭을 제한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을 제한하게 되고, 그런 제한이 지나치면 우리 역시 ‘세계의 경찰관’, 즉 자기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상자 밖으로 남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9]


우리 스스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진리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의 희열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캠벨에 따르면 여기서 희열이란 우리의 가장 높은 [종교적]열광을 의미한다. 우리를 신성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즉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기 위해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뒤에야 우리는 애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부과한 제한을 넘어 나아가도록, 그리고 각자의 길로 나아가도록 해 줄 수 있다. 최종 목표는 이 세계를 바로잡기 위해 바깥으로 투사되었던 그 에너지를 안쪽으로 돌려 스스로를 바로잡는 바로 그 경지로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다. [9-10]


상징 그 너머를, 즉 그것이 표상하고 있는 풍부함... 상징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은... 그 결과 공허감과 영혼의 곤궁이 비롯되는 것이다. [10]


그의 열린 태도는 경이와 마법의 가장 거대한 원천이 바로 그 자신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10]


우리 각자의 희열을 따르는 것은...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다. [11]


우리가 신들을 향해 한 걸음 내딛기만 하면 신들은 우리를 향해 열 걸음을 다가서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한 걸음, 여정의 그 영웅적인 첫 걸음은 여러분의 울타리 바깥으로 또는 그 가장자리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며, 우리는 가끔 심지어 도움을 받고 있음을 깨닫기도 전에 발걸음을 먼저 내딛어야만 한다. [11]


노년기를 인생의 감소기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개의 시기로 보았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컵을 가득 채우고, 태워 버릴 것은 다 태워 버렸다면 노년의 고요는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면 우리는 노년의 문턱에 도달해서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욕구 때문에 눈길을 자꾸 뒤로 돌리게 될 것이다. [12]


우리가 환희 속에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저 바깥’의 어떤 다른 곳이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굳이 다른 어딘가로 가거나 어떤 무언가를 혹은 어느 누군가를 굳이 소유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바로 ‘여기’있다. 바로 ‘여기’있다. 바로 ‘여기’있다” 오직 필요한 것이라곤 의식의 전환뿐이다. [12]



도입의 단계 -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의 지금 모습 그대로.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평생 누릴 특권이다. [19]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20]


진정한 의미란 살아 있음 바로 그것이다 [20]


전사의 방식이란 삶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하는 것이다 [21]


만약 우리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우리는 단단히 잘못 짚은 셈이다 ...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21]


예전 것에 집착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어떤 형상에 매달리게 되면 우리는 썩을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 [22]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서 오므렛을 만들 수 있겠는가. [23]


파괴가 있은 다음에 창조가 있다. [23]


생명이란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켜 살아가는 것이다. [24]


우리의 삶에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삶을 경험하는 것, 고통과 기쁨 모두를 경험하는 것이다. [25]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26]


여러분의 진정한 의무는 공동체로부터 멀리 떠나 여러분만의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28]


뱀이 그 허물을 벗어 버리듯, 여러분은 지난날을 내팽개쳐라 [29]


여러분이 긍정적으로 경험하지 않는 것은 결국 부정적으로 경험될 것이다. [30]


그곳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 만약 그곳에 어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길이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길이 아니다. [31]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않을 것이다 [33]


삶의 길을 가다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37]



의식의 첫 번째 단계 - 현세에서의 삶


금지된 나무가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 나무는 바로 선과 악 또는 이원성에 관한 지식의 나무였고 두 번째 나무는 영원한 생명에 간한 지식의 나무였다. [42]


그 투사는 내 깊은 삶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었고, 바로 그곳에서 한 사람의 운명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내 삶이 ... 투사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즉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몸 속에 있는 에너지의 잠재성이 성취된 것이다. [47]


아니무스의 방식이다. 여성 자신도 할 수 있지만, 대신 남성에게 위임하는 그 어떤 일을 투사하는 것이다. 존재 가치로는 그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지만, 남자는 특화된 신체를 지닌 기계나 다름없어서, 그런 일을 너끈히 해낼 수 있는 것이다. 힘을 자각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힘에 의해 가능한 행동이 여성으로서의 여러분보다는 오히려 남성에 의해 더 적절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곧 관계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다. [49-50]


사랑에 빠지는 것은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성에게 자기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그 시작이다. [50]


‘아모르’는 ... 바로 앞에 있는 길, 눈의 길이며 눈이 심장에 보내는 메시지이다.

눈으로 들어와 마음으로부터 환영받는 것에서 완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51]


사랑에 눈을 뜨는 순간, 어떤 것이 명백히 외부로부터 “영원히 그의 영혼 속으로 옮겨갔고, 그의 영혼은 그 부름을 받고 뛰었다. 살며, 과오를 범하며, 타락해 보고, 승리하고, 삶에서 삶을 재창조하는 거다!” [52]


사랑이 멀리 있으면 삶도 멀리 있다. 사랑은 정확히 삶만큼 강력하다. [53]


여러분이 견뎌 내는 재난은 그 무엇이건 간에 여러분의 성격, 여러분의 됨됨이, 여러분의 삶을 향상시킨다. 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이야말로 여러분 자신의 본성을 자발적으로 샘솟게 할 기회다.... 마치 어마어마한 실패인 양 보였던 파멸 직후의 순간들이 사실은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만들어 준 사건들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에게 벌어지는 일 가운데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재난은 여러분을 뒤로 물러서게 하지만, 여러분이 힘을 드러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재난이 생기는 것이다. [55]


인생의 전반기에 우리는 사회에 봉사한다. 이것은 종속이다.

인생의 후반기에 우리는 내면으로 돌아선다. 이것은 해방이다. [58]


사랑 (1)주인에 대한 하인의 사랑 - 율법의 종교, 두려움의 종교

     (2)친구와 친구의 관계-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랑, 자발적인 행동으로 경험

     (3)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 친밀하고 강력한 사랑, 자신안의 성스러운 힘 깨달음

     (4)배우자 대 배우자의 관계 - ‘다른 한쪽’의 발견

     (5)미친 사랑 - 강박감에 사로잡힌 금지된 사랑  [60-63]


우리는 순수한 사랑의 경험을 과대평가할 위험을 지니고 있다... 반드시 그걸 완화시켜야 한다. ... 순수한 사랑의 경험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지금 여러분이 수림하고 있는 관계의 구체적인 측면 속에 있는 어떤 깊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 이런 순수한 열광을 완화시키면서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 이것이야말로 결혼에 있어서의 비결이다. [65]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멋지고 작은 의식으로 바꿀 수 있고, 인생은 그런 크고 작은 행사들 위에서 아름답게 흘러갈 수 있다. [66]


결호이란 상대방을 책임지고 사랑함으로써 상대방과 진정한 일체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것, 여러분 혼자의 운명을 두 사람의 운명으로 전환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헌신이다. 그런 헌신을 여러분에게 바친 상대방에 대한 책임감을 잃는 것은...결혼생활이 아니다. 배우자와의 관계가 여러분의 삶에서 반드시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69-70]


결혼이 해독을 끼친다면, 그 상황을 전환시킬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해야만 한다. ... 상대방을 변화시키기 위한 시련을 감내해야 한다. 반면 여러분의 삶이나 심지어 여러분의 삶에 대한 사랑이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며, 그 상황이 변화될 수 없는 것이거나, 그렇게 헌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70-71]


남자는 여자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72]


존재의 토대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라는 더 크고 더 참된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77]


신화는 우리의 깨어나는 의식과 우주의 신비 사이를 연결시켜 준다. [79]


어머니는 자연을 표상하지만, 아버지는 아들과 딸을 사회적 관계로 인도한다.  [80]


돈은 응결된 에너지이므로 돈을 포기하는 것은 삶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경제중심적인 사회에서 삶의 가능성이란 사실상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는지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82]


삶의 에너지로서 경험되는 돈은 실제로 명상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을 축적하는 대신 흘려보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는 한가지방법이기도 하다. 돈에 몰두한 삶으로부터 뭔가 아름다운 것이 자라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겐 매우 놀라웠다. [83]


돈이 있다는 것은 마치 차에 기름이 있는 것과도 유사해서 만약 기름이 없었더라면 결코 갈 수 없을 장소에 갈 수 있는 것이다. [84]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87]


나는 뉴욕주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 살면서 그저 책만 파고들었다. 그저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노트필기를 했다. [88]


일기를 쓰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려 애써 보았다. [89]


자유는 의사결정을 수반하는 것이고, 각각의 결정은 운명적인 결정이다. [89]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내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맞춰 나타나 주었다. [89]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여러분에게 찾아오게 마련이다. [90]


나는 그저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다녔다. ...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99]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라. 중요한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는 것이다. [99]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다. 다음번에 어디가 자라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 나중에 가서 하나의 유기적 발전 과정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100-101]


성배의 전설에서 말하는 황무지란 뭔가 마땅히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또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땅이다. [104]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런 느낌이 없을 경우, 여러분은 그저 삶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살아가는 셈이다. [105]


융의 표현대로, 개성화를 위해서는, 즉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다양한 역할의 가면을 언제, 어떻게 쓰고 벗을지 알아야 한다. [105-106]


결국 모든 삶은 전체의 실현, 즉 자아의 실현이다. 때문에 그 현실을 ‘개성화’라고 할 수 있다. [107]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나는 내가 성배의 성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109]


여러분도 거기 도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또 이미 거기 도달했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거기서 내쳐지기가 쉽다. ... 내적 만족을 제공함으로써 여러분을 내쫓기지 않게 만들어 주는 행동의 분야를 발견하는 것이다. [110]


영웅의 여정은 항상 부름으로 시작된다. [111]


부름은 곧 어떤 사회적 지위로부터 떠나라는, 즉 여러분 자신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 보석을 찾으라는, 즉 여러분이 사회적으로 속박되어 있을 때에는 찾기 불가능한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스스로가 중심을 잃은 상태라고 느낄 경우, 여러분은 떠날 때를 맞이한 것이다. [111]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112]


만약 여러분이 따르는 모험이 본인의 진정한 모험이라면, 또한 그것이 여러분의 깊은 영적 필요 또는 준비에 적합한 것이라면, 여러분을 돕기 위해 마법의 인도자가 나타날 것이다. ...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전까지는 문이라곤 없었던 곳에서, 그리고 다른 누구도 겪어 보지 못했던 곳에서 여러분을 위한 문이 열릴 것이다. 여러분은 반드시 용기를 가져야 한다. [112-113]


의식적이며 합리적인 의지의 영역으로부터 그러한 또 다른 중심으로부터 옮겨오는 중인 신체의 에너지의 지대로 들어가는 여행이다. [113]


여러분이 더 깊이 들어갈수록, 여러분은 궁극적인 깨달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저항 역시 더 강력해진다. [114]


자신이 출발했던 바로 그 장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고 또 만드는 마지막 경험에 도달한다. [114]


선물을 도로 가져와서, 그것을 합리적인 삶 속에 통합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는 오히려 지하로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116]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 여러분은 결코 모험을 완결한 수 없다. [118]


맨 마지막은 여러분이 영원히 휴식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삶을 알고, 사랑하고, 베푸는 것이다. [118]


일생의 곡선이 딱 반으로 나누어진다. 전반의 관계의 시간이며, 나머지 후반은 자기 안의 삶의 감각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120]


삶 : 1/4 - 학생의 삶

     1/4 - 순종, 낙타의 기간

     1/4 - 집주인의 삶, 중년은 달성의 기간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간이며 성취의 기간

             낙타는 사막에서 사자로 변신. [121-122]


사자의 임무는 “너는 할지니”라는 이름의 용을 죽이는 것이다. 이 자기발견의 사자가 용을 죽이고 나면, 용 속에 묶여있던 모든 에너지는 이제 여러분 것이 된다. [122]


뒤에 매달린 것이 바로 근심이다. [123]


노년은 꽃을 활짝 피우는 시기이며, 진정한 성취의 시기이며, 여러분이 열매 맺기 위해 준비해 왔던 것을 드디어 열매 맺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127]


우리는 영혼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물질적인 부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음식은 세속의 음식이지만, 우리는 또한 우리의 영적인 부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영적 음식을 먹어야만 한다. [130]


여러분의 마음을 여러분이 지금 실제로 하고 있는 일과 결부시켜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만 한다.


여성 특유의 경험이란 이처럼 뭔가를 견뎌 내야 하는 것임을, 따라서 거기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인내, 즉 견디는 힘임을 깨닫게 되었다. [134]


소년은 남자임을 ‘드러내야만’ 한다. 반면 소녀는 여자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135]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물건 일곱 가지... 하나씩 포기하도록 함 -자신의 가치 순서가 어떤지 진정으로 알게 된 것 [136-137]


각자의 마지막 보물을 포기하는 순간 ‘모크샤’, 즉 ‘해방’을 실제로 경험했다. [137]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진정으로 정복할 수 있다. [144]


모든 순간들은 그야말로 유일하며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삶을 특유의 통렬함을 지니는 것이며, 여러분은 지금 경험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149]



의식의 두 번째 단계 - 깨달음을 향한 길


마음은 바람에 물결이 이는 연못에 비유할 수 있다. 요가의 사고방식은 바람을 가라앉히고 물을 다시 평온한 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155-156]


물이 잠장해져서 침전물들이 깨끗이 가라앉고 수면이 맑게 빛나는 거울처럼 되어야 흔들리는 물결위에 흩어졌던 그림자들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이 하나의 이미지는 요가에서 깨달은 자아의 이미지에 비유될 수 있다. [156]


제 1차크라 -생존, 기면 상태의 욕망

제 2차크라 -섹스, 프로이트적 리비도

제 3챠크라 -힘, ‘힘을 향한 의지’

=> 낮은 단계에 있는 이 세 개의 차크라들은 ... 외적으로는 연인들, 전사들, 건설자들, 성취자들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 단계들에서의 기쁨과 슬픔은 ‘저 바깥’ 세상에서 성취한 것, 즉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얻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해 작용한다.

제 4차크라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깨달음, 영적 차원으로 가는 입구

제 5차크라 -정화됨. 육체적인 목표가 영적인 목표로 변화됨. 스스로를 다스림

제 6차크라 -육신을 작춘 형체의 세계에서는 가장 높은 차크라. 가장 높은 장애물

            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지의 마지막 속삭임, 최후의 장벽

            계속해서 여러분의 영혼에 매달린다면, 신과 함께 있는 자가 될 수 없다

제 7차크라 -‘천 개의 꽃잎이 달린’ 연꽃, 신을 지나서 초월 속으로 들어감

            신을 의식하지 않음, 하나의 사물로 환원됨 [158-164]


제 4차크라이자 영적 삶이 시작되는 곳으로 내려온다면, 주체와 객체가 합쳐지게 된다. [165]


“요가는 마음의 자발적인 활동을 의도적으로 중지시키는 것이다.” [168]


이것이 구루가 하는 일이다. 내 모습을 마음에 새기고, 나하고 똑같이 되거라. 이는 혼자 하는 수행과는 정반대의 방법인 것이다. [169]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 [171]


영원에 근거하되 시간의 장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172]


옴은 자연의 소리, 다시 말해 자연이 그 스스로 즐거워할 때에 발하는 소리라네. [173]


의식 그 자체는 이러한 어둠의 단계 아래에, 꿈의 의식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176]


요가의 목표는 깨어 있는 채로 그 영역에 가는 것이다.  [176]


여러분이 세상 속에서 움직이면서 영적 삶을 지니는 비결은 언제든지 모든 것에 들어있는 아움 소리를 듣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모든 것이 변화될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성취와 달성을, 그리고 여러분이 찾던 보물을 찾기 위해 더 이상 어디로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여기 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있다. [177]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고 에로틱한 충동에 사로잡히면 여러분은 자기보호를 포기하는 것이다.  [180]


어떤 것을 가리켜 ‘그것’이라고 하는 순간, 여러분은 이원성을 지니게 된다. 반면 ‘나’와 ‘너’는 이원성이 아니다. 그것은 비이원적인 자각이다. [185]


여러분의 삶에 있어 크나큰 중요성을 지니게 될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 첫 만남에서부터 장차 뭔가 벌어질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187]


우리를 외부 세계와 연결해 주는 심리학적 기능 네 가지- 감각, 사고, 감정, 직관이다. [188]


진정한 기술은 여러분이 운하를 건너기 위해 사용하는 배의 구조를 잘 아는 것뿐이다. [189]


절대진리의 관념-즉 사고하려는 인간 정신의 상대성의 범위 너머에 이른바 절대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진리발견의 오류’라고 부른다. [190]


행동하는 인간은 완벽을 표상할 수 없다. [191]


여러분이 환생을 거듭하는 한, 여러분은 불완전하다. 따라서 여러분은 스스로의 불완전에 대해 충실해야만 한다. [192]


힘과 공간 두 가지가 숭고함을 연출하며, 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 자아는 위축된다. 여러분 자신이 더 작아질수록, 여러분은 더 많은 숭고함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193]


일상사가 시의 경지로 승화되었다... [194]


삶에 있어 탁월함은 매우 좋은 목표인 것 같다. [196]


우리의 제한된 어휘가 우리를 옭아매고, 우리를 묶어 두고 있는 것이다. [202]


무엇이 계속해서 여러분을 동산 바깥에 있게 만드는 걸까? 죽음의 두려움과 삶에 대한 욕망이다. [204-205]


광신자는 자기 마음을 청결히 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오히려 세상을 청결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209]


지옥이란 여러분의 삶의 경험의 구체화이며 여러분이 집착하는 곳, 바로 황무지다. 지옥에 있으면 여러분은 어찌나 스스로에게 매여 있는지, 은혜가 들어올 수 없다. [215] 


성령에 반대하는 죄는 바로 절망이다. 성령은 여러분이 깨닫도록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며, 절망은 아무것도 나올 수 없도록 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지옥이다. [216]


아래로 뽀족한 삼각형을 두 가지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다. 하나는 장애물로, 또 하나는 여러분이 향상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수단으로서 말이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장애가 되는 듯 보였던 모든 것들은 변화될 수 있다. 그것이 여러분의 변이를 위한 수단임을 깨달음으로써 말이다. [220]


마귀나 악마는 여러분 속에 있는 힘, 그러나 여러분이 차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힘, 다시 말해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억압된 신이다. [222]


여러분을 가로막는 상징을 발견하고 나면, 이번에는 그 상징이 여러분에게 의미하는 바의 중요성에 부합되는 사고와 경험의 양태를 찾아내도록 하라. ... 자신의 마음 속에서 경험의 중심-일찍이 그 상징으로 인해 대체된-을 발견한다면, 그 상징은 용해될 것이다. ... 그것을 발견하면 그 상징은 그 가로막는 힘을 잃거나 아니면 오히려 길잡이가 될 것이다. [223]


그것을 장애물로 여기는 대신에, 오히려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으로 여러분을 안내하는 무언가로 여기게 될 것이다. [224]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상상의 존재의 이미지에 투사된 것은 사실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는 사실상 그때그때 인간이 처한 조건이 반영된 거울 속 이미지라는 것이다. [237]


어느 누구도 궁극의 환희를 경험할 수 없다...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경험했다면, 그곳에는 이미 어느 누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37]


영지주의는 서구에서 불교에 상응하는 것이다. [250]


여러분들이 만약 그 상징들의 의미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대신 은유로 읽는 방법을 배운다면 그것은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벗어나면, 여러분은 반드시 자신의 성스러운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256-257]


여러분만의 작은 예배당, 즉 여러분 자신의 성스러운 공간을 직접 만드는 것이다. 일상적인 삶의 맥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무엇이든지 성스러운 공간이 될 수 있다. [257]


여러분의 성스러운 공간은 여러분이 자신의 모습을 거듭거듭 찾을 수 있는 장소다. [258]

여러분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공간이라든지, 피난처를 지니려 한다면, 그곳은 우선 황무지가 아니어야 하며, 암브로시아-외부로부터 여러분 안에 불어넣는 기쁨이 아니라, 여러분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의 샘이 있는 어떤 활동 공간, 즉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모든 사람은-본인이 알건 모르건 간에- 그런 공간을 필요로 한다. [258]


우리 모두에게는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과 즐거운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런 이후에는 거의 모든 것이 지속적이고 늘어나는 기쁨이 된다. [259]

            

성스러운 공간을 고안하는 좋은 방법은 그것을 놀이터로 삼는 것이다. [259]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260]


내가 훗날 나 자신을 위해 만든 성스러운 공간, 즉 내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방은 사실상 내 어린 시절의 공간의 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쓰기 위해 그 방에 들어가면, 나는 지금껏 길을 찾는 데 있어 도움을 받았던 책들에 둘러싸이게 되고, 문득문득 그 중에서도 유난히 통찰력이 있었던 작품들을 읽는 순간을 상기하게 된다.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으면, 나는 사소한 의례적 세부사항 -즉 메모장은 어디에 두고, 연필은 어디에 두는 등-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만사를 내가 기억하는 이전의 모습과 똑같이 만든다. 이 모두가 나를 해방시키는 일종의 ‘준비’라고 할 수 있다. [261]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때, 그때부터 일이 시작된다. 여러분의 삶이 놀이가 아니라면, 또는 여러분이 놀이를 하긴 하지만 아무런 재미가 없다면, 그때는 그만 두도록 하라! [262]


언제든지 필요할 때마다 그런 봉인 프로그램을 가져야만 한다. ... 장차 내적 삶을 지니려 한다면 그것은 절대 필수인 셈이다. 그것이 제공하는 바는 여러분 안에 있는 영원한 것이 시간의 장으로부터 해방되는 여유 공간이다. [263]


그곳의 웅장함과 마법이 어떤 식으로건 여러분을 각자의 중심으로 데려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일단 그곳에 도달하면 성스러운 공간은 사방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266]


동양의 신이나 붓다는 ... 그런 존재 너머에 있는 것, 즉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그러나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한 어떤 존재, 의식, 그리고 기쁨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그리고 그런 존재를 예배함에 있어서 궁극적 목표는 그 귀의자에게 심리학적 변모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시야를 덧없는 것에서부터 영속하는 것으로 이동시킴으로써 가능... [273]


불교사상 - 개인의 구원, 수도적인 자기수양, 히나야나 (소승)

           모든 사람의 구원, 대중의 귀의와 보편적인 세속 참여라는 보다 발전된 원칙 

           마하야나 (대승)

           니르바나(열반), 삼사라(존재의 순환, 환생의 순환)  [276-277]


행동 상으로는 여전히 살아 있을 수 있지만, 자기 행동을 향한 욕망으로부터, 행동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또한 행동의 결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여러분의 삶의 사건들로부터 비롯되는 이런 열정으로부터의 심리학적 해방이 곧 ‘니르바나’이다. [278]


합리적인 정신은 대립자들을 강조한다. 동정과 사랑은 대립자의 쌍들을 넘어선다. [284]


여러분이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 볼 때, 거기 비친 것이 바로 유한이다. 영원은 여러분의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이다. 따라서 영원과 유한 사이에 있는 여러분의 삶에서 판별을 하는 것이 이 형상의 본질인 것이다.

여러분이 뭔가를 욕망하고 뭔가를 두려워할 때, 그것이 바로 유한이다. 붓다가 겪은 세 가지 시험-욕망, 두려움, 그리고 의무-은 시간의 장에서 여러분들을 붙잡고 있는 것들이다. 유한과 영원을 판별함으로써,... 스스로의 안에서 변하지 않는 정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니르바나’를 성취한 것이다. 그 정적인 장소는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타오르는 불길이다. [285]


그 정점을 잃는다면, 여러분에게는 오로지 자기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된다. [286]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과도 비슷하다. 처음에는 계속 넘어지다가 일단 타는 법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넘어지려고 해도 넘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287]


정상적인 삶의 경험과 니르바나의 저편 물가 사이를 가르는 강물을 건너갔으면, 모든 대립자의 쌍을 넘어섰으면, 모든 둘 됨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289]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290]


진정한 자아는 초월적 삶이며, 우리 모두는 그저 환영적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이 붓다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마하냐나다. [293]


불교의 가장 큰 가르침, ... “여러분의 합리 체계를 떠나, 항상 만물 사이로 움직여 나가는 놀라운 경험 속으로 들어가라” [297]


심리학적 변화란 이처럼 이전까지만 해도 애써 견뎌 내야 했던 것을 이제는 알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299]


귀환은 어디에서나 광휘를 목격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돌아온 마을은 바로 여러분이 떠난 마을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 그 여정은 아직 완수된 것이 아니다. [300]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304]


프로이트 심리학- 쾌락 원칙에 집착하는 삶에의 열망을 뜻하는 ‘이드’

                 반대되는 개념인 ‘초자아’, 개인을 훈련시키는 사회적 규율로, 결국 자신

                 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시키는 것을 하게 만든다. [307]


자기 속에서 성스러운 장소의 대응물 격인 중심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굳이 숲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 중심으로부터 자신의 평안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을 지닐 수 있다. 결국 여러분은 그 중심에 근거하고 살아가면서, 여전히 이 세상과 관계하며 남아 있을 것이다. [308]


남성의 주된 기능은 그 안에서 여성이 출산을 할 수 있는 환경적 상황을 수립하는 것이며, 또한 여성이 미래를 가져올 수 있도록 그 장을 조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이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전체다. 남성은 보호하는 인자이며, 여성의 힘의 대행자이다. [319]


여성은 원래부터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도리어 남성의 일을 하는 2차적인 에너지의 지위로 이동함에 따라서 여성을 자신의 진짜 힘을 잃어버리고 분개하게 되었다. ...“남성은 역사를 만든다. 여성은 역사 자체다.” [320]


성숙한 그리고 삶을 육성하는 조언을 할 수 있는 역할에 서는 것이다. [326]


어떤 여성이 성취의 장에 들어서는 남성의 과업을 수행한다면, 그녀의 신화는 본질적으로 그 남성 영웅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327]


남성의 만다라의 중심 이미지는 종종 빛을 방사하는 보석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이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그런 중심 이미지가 아이-자신의 영적 출산으로 낳은 아이-를 팔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여성의 신체적인 특성의 심상이 영적인 형상으로 변환되었기 때문이다. [327]


어떤 여성이 전통적으로 남성의 과업이라고 여겨졌던 종류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뛰어들었을 경우-즉 고독 속에서 어떤 일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대신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 뛰어들었을 경우-라면 말이다. ...적극적 역할을 충분히 성취했으며, 그녀의 난국은 본질적으로 남성의 것과 똑같다. ... 여성들이 이처럼 비인습적인 삶의 방식을 지닐 수 있는 유일한 분야는 -학계를 제외한다면-예술계뿐이다. ‘정신노동’의 세계에 있는 여성들을 여럿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결코 예술 분야의 여성들만큼 풍부한 성취를 거두지는 못한 것 같다. 그들의 성취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반면, 예술가의 성취는 오히려 과정을 중요시하므로, 그 두 가지는 전혀 다르다. [328]


남성은 밖으로 나아가, 자신의 온전한 힘을 발휘할 장소와 도구를 발견... [329]


이른바 조각가라는 내부의 여성이 자신의 힘의 도구인 망치와 끌을 발견한 경우, 말 그대로 거기에만 하루 종일 매달릴 수가 없다면 진지한 예술가로서 그녀의 이력은 지속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녀의 예술은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만다. [330]


여성에게 주어진 본성 속에는 여성이 다루어야 할 훨씬 더 무거운 짐이 있다는 것이다.

[330]


어머니는 그런 식의 어떤 성취를 토대로 하여 자녀를 평가하지는 않는다. [334]


남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 여러분은 분리를 겪는다. 여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둘이 아닌, 포용하는 특성이 존재한다. [334]


주요한 여성의 힘과 미덕이 바로 공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우리 모두의 존재 기반이기도 한 보편적 공통성에 대한 포용성이 바로 공감이다. 자발적 감정을 인식하고, 포용하고, 나아가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여성의 힘이다. [339]



의식의 세 번째 단계 -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가령 우리가 그것의 세계, 즉 세계라고 할 수도 없는 세계를 갖고 있다고 치자. 다시 말해 이원성의 세계가 생기기 ‘이전’의 에덴동산, 즉 초월의 신비를 말이다. 그런 뒤에 우리는 사물의 세계, 즉 이원성과 다양성의 세계, 마야의 세계를 갖게 된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초월과의 연결을 상실한다. [345]


마야의 세 가지 힘

  * 차단하는 힘 - 사물의 실재적, 내적, 본질적인 성격을 감추거나 은폐하는 힘

  * 투사하는 힘- 환영으로서의 인상과 생각을, 그와 결합되는 욕망이나 혐오와 함께 방출하는 힘

  * 드러내 보이는 힘- 뭔가를 알게 하는 기능 [346-347]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을 불러낸다는 원칙 [350]


삶의 목표는 환희다. 예술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351]


대상을 향한 욕망을 부추기는 예술을 그는 외설적이라고 말한다. 대상을 향한 혐오나 두려움을 부추기는 예술은 교훈적이라고 한다. [352]


더 이상 이 사물들이 어떻게 이름 붙여지는지, 또는 이 사물들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 필요가 없다. 이것이 미학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356]


“예술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다.”

하나의 자연, 즉 저 바깥에 있는 세계고, 또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자연(본성)의 세계다. 다시 말해서 예술가의 의도가 ‘자연과 나란히 하는 조화’를 도모하는 것이라면 그 조화는 여러분의 내부에 있는 뭔가와 공명하고, 여러분을 심미적으로 심취시키고, 여러분은 그렇게 큰 “아하!”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기능이란 유형적이고 가시적인 세계의 소진 가능한 것을 열어젖힘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광휘-여러분의 안에 있는 것과 똑같은 광휘-가 환히 비치게 하는 것이다. [358]


이런 조화로운 리듬을 막는 두 가지 운동은... 하나는 욕망으로 여러분이 대상을 소유하게 만들며, 또 하나는 혐오 또는 두려움으로 여러분이 그 대상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든다. [359]


심미적 도구-즉 심미적 도취를 유발하는 아름다움의 리듬의 도구-는 마야의 드러내 보이는 힘이다. [360]


마야의 투사하는 힘을 경험하는지, 또는 드러내 보이는 힘을 경험하는지 여부는 여러분의 정신적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이 세계는 그 양쪽의 양상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여러분의 의식이 변화할 뿐이다.

심미적 도취는 이러한 초점의 변화에서 비롯된 결과다. ... 이러한 초점의 변화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내적 깊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삶의 목표를 완전히 성취하기를 추기하는 자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 성스러운 공간은 입문과 명상을 위한 장소다.  [361-362]


그 궁극적 깊이에 매료되지 않은 한, 그리고 여러분의 삶의 외적 국면에 아울러서 내부까지도 풍부하게 하고 건설하는 데 관심을 지니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를 실천할 어떤 장소, 어떤 방법을 필요로 한다.

여러분이 이런 내적 깊이를 달성하면 온 세상이 열리고, 여러분이 삶에서 하던 놀이는 이 광휘로 가득 차게 된다. [362]


마치 석유를 탐사하는 것과 유사하다. 파이프를 꽂아 넣고, 그 파이프가 석유를 건드리면, 그제야 그 지역 밑이 온통 석유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362]


이러한 심미적 정지의 상태에 도달한 스스로를 상상한다면, 여러분은 무슨 일에 대해서건 두려움과 욕망을 제거하는 것에 관해서, 그리고 ‘삼사라’가 ‘니르바나’가 되는 것-즉 변화하는 세상 한가운데의 정점-에 관해서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세계는 여러분이 벗어난, 그런 한편으로 자발적으로 관여하게 된 사물의 현시가 된다. 즉 “세상의 슬픔 속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강제적으로 연결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363]


자발적으로 거기 속박될 수 있지만, 강제적 속박은 마야와 연관된다. [363]


우리는 동정과 공포의 감정을 지닌다. 한편으로 초월적 작동원리, 또 한편으로 시간의 경과에 의한 결과, 이 양쪽 모두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것은 정적이며, 다시 말해 움직이는 공포가 아니라. 정적인 공포다. 이것은 동정의 깨달음이다. 고통 받는 인간과의 동일시다....이는 사회적인 교훈을 제거해 준다... 공포는 모든 움직임을 지나쳐서 괴테가 말한 ‘샤우데른(전율) 이라는 정점에 도달한다. 이는 곧 세계의 순전한 현상성에 관한 깨달음의 전율인 것이다. 이것이 전부다. [363-364]


여러분이 어떤 결정을 내리건 간에, 거기에는 학습과 분석의 기간이 있으며, 여러분이 행동하고 있지 않을 때, 여러분의 몸은 움직이고 있지 않은 셈이다. [371]


예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오랜 속담이 있다. “우선 모든 규칙을 배운 다음, 그 규칙을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규칙들이 순수한 행동 속으로 녹아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372]


책을 한 권 쓰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우선 자신의 영감과 직관에서 출발한 다음, 곧이어 어려운 과정을, 즉 여러분이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역을 맞닥뜨리게 되고, 바로 거기서 멈춰 버리게 된다. 바로 그때가 여러분이 규칙을 끌어내야 할 때이다. [373]


이 모든 것을 흡수하고 난 다음에야, 여러분은 이전에 가졌던 것보다 더 강력한 추진력을 얻게 되어, 그 모두를 깨뜨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73]


학생은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해서-기술과 법칙을 배우는 것이며, 이것이 그가 반드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그 모두에 통달한 다음에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373-374]


예술가가 되려고 시도하면서도, 그 기예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결코 예술가가 될 수 없다. [374]


예술을 통한 치료요법의 실시는 그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놓는, 그를 조화로운 인간으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조화로운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 “예술은 자연과 평행한 조화다.”  [375]


신체를 조종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것들, 다시 말해 그 모든 훈련 과정 동안에는 본격적인 춤이 한동안 배제된다. [376]


직업을 선택할 때에는 두 가지 접근방식이 있다. ... 또 다른 방법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만약 여러분이 “나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 거야”라고 말하고 그 신념을 고수한다면, 뭔가가 일어날 것이다. 여러분은 혹시 직업을 얻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삶을 얻기는 할 것이며, 그것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380]


기본 수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위에 더 많은 무더기를 얹어 놓지는 마라. 여러분은 자신의 직업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작업에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381]


여러분의 창조적 측면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폐 봉인된 은신처를 만들어, 매일 몇 시간가량은 아무것도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 그 시간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382]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큼을 여러분의 예술에 바치고, 그것을 시종일관 지켜야 한다. [382]


내가 지적하고 싶은 바는 여러분의 작업-즉 여러분의 예술-과 여러분의 직업이 서로 물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82]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383]


비판을 미루어 두는 것은 이른바 ‘너는 할지니’라는 용을 죽이는 것이다. [385]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다. 특정한 사람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더 이상의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 크나큰 촉진제가 된다. [385]


흔히 말하는 작가의 슬럼프를 돌파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은, 첫째는 우선 여러분이 말을 걸고 싶은 상대를 하나 찾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루에 두 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시간을 떼어 두라는 것이다. [386]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일을 비판의 두려움 없이 계속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움직일 것이다. 여러분은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 붓다의 세 번째 시험은 바로 ‘다르마’, 즉 의무이며, 남들이 여러분에게 하라고 기대하는 것이었음을 말이다. 그것은 검열에 대한 두려움이다.  [387]


이제 작가라기보다는 독자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기예는 뭔가를 예술 작품으로 변모시키는 과정의 일부다. [387]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보내고, 아예 죽여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2년 뒤에 진작 그래야 했다며 후회하리라. [388]


상업예술가들 “그들이 무엇을 원하든, 나는 그것을 줄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에게 찾아온 재능을 표현하는 것이며, “나는 그걸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었다.” [390]


감상적인 예술가-예술은 곧 자신의 삶이며, 그 외의 다른 무엇도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의 예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소박한 예술가 단지 그의 삶에서 한 가지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397]


성스러운 공간을 예술로 가득 채워야 한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예술’이란 곧 ‘성스럽게 넘쳐나는 아름다움’인 것이지, 가령 여러분의 집 안에 예쁜 장식을 달고 지내라는 뜻은 아니다.  [399]


실용적 활동은 유기체가 그 스스로를 성숙에 도달한 것으로 선언한 다음에 오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왜곡된 방식으로 올 것이다. [399]


욕망과 혐오의 동기가 여러분을 움직이는 한, 그것은 바로 투사하는 측면인 것이다. 여러분 스스로가 곧 마야를 만들어 내는 존재이며, 여러분의 태도가 붓다의 태도일 때 여러분은 그 드러내 보이는 힘을 여는 사람인 것이다. [401]


상징을 통해서 인간은 효과적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 다른 사람들, 하나님과 접촉하게 된다. [404]


여러분이 진정으로 이 세상을 돕고 싶다면, 여러분이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은 어떻게 그 안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413]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413]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425]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

현재의 견지에서 시적으로 갱신되는 신화이다.

개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각성할 수 있게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개인이 스스로를 이 아름다운 형성 표면의 특정한 장소를 얻기 위해 싸우는 자아로서 뿐만 아니라 거대한 정신의 중심으로서 각성하도록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427]



옮긴이의 말


캠벨의 주 전공은 종교학, 그 중에서도 인도의 전통에 비중을 많이 둔 비교종교학이라 할 수 있다. 신화 연구는 그러한 학문의 추구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며, 보다 더 근본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신화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를 통해 캠벨이 가리키고자 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430]


캠벨의 사상은... 힌두교-불교 전통에 근거한 일종의 범신론... 기독교나 불교나 힌두교 등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이 결국 한 점으로 모인다고 믿었고, 그 배후의 어떤 절대적 가치를 신봉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나 ‘신의 가면’은 하나같이 그런 어떤 절대적 가치의 외양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그는 특정 종교의 독단을 배제하고 궁극의 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에서 겸손과 양보를 주장했다. [430]


평생을 신화와 종교와 은유의 해석에 바친 어느 노학자의 인생철학에 가깝다. 캠벨의 인생철학은 이른바 ‘희열을 좇으라’ 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또한 캠벨은 인생의 어떤 긍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까지도, 가령 삶과 선뿐만 아니라 죽음과 악까지도 포용하고 인정하라고 역설한다.  [430-431]


인간의 인생을 영웅의 여정에 비유했다. 사람마다 짧고 길고의 차이는 있지만, 그 하나하나는 태어남과 부름과 모험과 역경과 귀환과 노년으로 이루어지는 영웅의 여정인 것이다. ...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희열’을 따라,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선한 것뿐만 아니라 악하고 더러운 것까지도 포용하면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431]



* 내가 저자라면


  우선 <신화와 인생>이 내가 읽은 첫 번째 조지프 캠벨의 책이라는 것을 밝힌다. 또한 신화에 대한 첫 독서였다. 그런 내가 20세기 최대의 신화학자이자 종교학자인 저자의 책에 대해 ‘내가 저자라면’ 이라고 가정하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에 딱 맞는 예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와 함께 ‘인생’이라는 누구나 고민하는 주제가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며, 또 다 읽고 난 후 다양한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첫 느낌은 사랑과 결혼, 재난과 극복, 자녀와의 관계, 돈, 직업선택, 노년과 죽음 등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인생과 예술, 종교에 이르는 방대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저자의 힘에 감동받은 것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상징과 은유’라는 관점에서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조지프 캠벨의 지식과 통찰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내가 근 40년을 살면서 전혀 듣지도 알지도 못했던 영역의 이야기는 나의 무지에 대한 아픈 자각과 함께 새로운 신천지를 맛보는 즐거움과 도전의식을 함께 던져주었다.


  한편 이 책은 조지프 캠벨이 직접 저술한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이 책은 1983년 한 달(또는 수개월) 간 에설런 연구소에서 10여명의 인원으로 열린 조지프 캠벨 주도의 세미나에서 다루어진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캠벨의 기존 저서에서 관련내용을 인용하고 또한 캠벨의 평소의 어록을 첨가해 다이앤 K. 오스본이 엮은 책이다. 캠벨이 1987년 사망한 것을 고려해 보면 거의 전 인생에 걸친 캠벨의 사상이 들어갔다고 보여 지긴 하지만 엮은이의 가치판단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책이라는 특성과 삶의 전 영역에 걸친 방대한 주제에 대한 상대적으로 짧은 글모음이라는 점이 아쉽기도 했다. 엮은이인 오스본에 대한 소개가 간략하게라도 있었다면 첫 번째 아쉬움이 조금 보완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신화에 대한 집중적인 세미나였던 만큼, 참석자들이 신화에 대해 또 캠벨의 기존 저서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전제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그러한 10여명의 참석자과 함께한  세미나의 내용-물론 기존 저서로서 관련내용이 보완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일반 대중에게 그 감동을 그대로 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또한 처음 접하는 요가와 명상에 대한 용어들은 계속해서 읽는 흐름을 끊어놓기도 했다. 불교 사상의 큰 줄기 두 가지를 설명하는 히나야나와 마하야나가 우리가 학교 때 배웠던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는-를 의미한다는 것을 한참을 읽은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동양의 사상이라고는 하지만 힌두교를 포함한 인도의 사상에 대해서는 오히려 서양의 사상에 비해서도 배경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고, 불교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의 불교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불교의 교리 등 종교 자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짧은 배경지식 때문에 <신화와 인생>에서 중간중간 언급되는 보다 깊은 내용들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고, 이런 부분은 옮긴이의 말처럼 필히 캠벨의 다른 저서를 통해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조지프 캠벨’이라는 저자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것과 ‘영웅신화’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얻게 된 것이 이 책을 읽고 난 가장 큰 소득이다.              

  책 자체에 대해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목차 구성이 친절하게 되어있었다면 인생의 각 항목을 아우르는 캠벨의 깊은 사상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는 말]에 이 책의 구성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나오긴 하지만 [현세에서의 삶], [깨달음을 향한 길].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라는 세 가지 단계에서 각각의 세부 목차가 있다면-예를 들어 첫 단계를 사랑과 결혼, 재난과 극복, 자녀, 돈, 학위와 직업, 노년과 죽음 등 좀 더 주제를 묶어서 엮어주었다면 훨씬 읽기 쉽지 않았을까. 또한 성스러운 공간과 시간의 필요성, 예술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 여성과 남성의 차이로 인한 여성 문제의 인식 등 세부 목차 없이 계속 찾아 읽기가 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것 또한 ‘준비된 사람에게만 여러분의 보석을 주라’고 한 캠벨의 생각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으며 몇 번씩 읽었던 부분을 되돌아가며 다 읽은 지금, 처음 책을 접했을 때의 난감함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읽히는 책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도 든다. 물론 이 부분은 캠벨의 책을 처음 접하는 초보 독자의 의견이다.


  가장 나의 마음을 두드린 것은 욕망과 두려움과 의무가 아닌 내 마음 속의 희열을 따라 가라는 것, 그럴 준비만 되어 있다면, 내가 한 발짝 내딛기만 하면 나를 위한 문이 열릴 것이라는 것, ‘할지니’라는 이름의 의무를 죽이는 것이 나의 첫 번째 모험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의무를 죽이고 그 자리에 나의 정점을 유지하면서 ‘세상의 슬픔 속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 나의 희열이 될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IP *.106.7.10

프로필 이미지
김종인
2010.02.17 20:55:20 *.145.76.75
친구~ 잘 읽었네~^^
이 글을 읽어보니 너무나 많은 깨달음의 백과사전같아서 어지러웠다. ㅎㅎ
나도 기회가 되면~읽어보겠네...화이팅! 하라구~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북리뷰 안보이시는 분들 일단 파일첨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4] 관리자 2009.03.09 86421
298 '신화와 인생' Review (박현주) 박현주 2010.02.15 4281
297 신화와 인생 북 리뷰 file narara 2010.02.15 4279
296 신화와 인생 file 박미옥 2010.02.15 4304
295 1. 신화와 인생 Review 최우성 2010.02.15 4272
294 첫번째 북리뷰_신화와 인생 김혜영 2010.02.15 4318
293 신화와 인생(조셉 캠벨) 김용빈 2010.02.15 4334
292 1. 신화와 인생 (노미선) 별빛 2010.02.15 4314
291 "신화와 인생"-6기 후보자 김창환 야콘 2010.02.15 4300
290 6기 < 신화와 인생 > 김연주 2010.02.15 4312
289 북리뷰 1주차 - 신화와 인생 [2] 이은주 2010.02.15 4287
288 1. 신화와 인생 - 저자와 책 [1] 맑은 김인건 2010.02.14 4360
287 북리뷰 1.[신화와 인생]을 읽고(박상현) file [2] 박상현 2010.02.14 4330
286 신화와 인생 김이미나 2010.02.13 4303
285 [6기후보과제1] 萬流歸宗 悲中與樂...'신화와 인생' 심장호 2010.02.13 4277
» 북리뷰 1. <신화와 인생> (이선형) [1] 2010.02.13 4344
283 <신화와 인생>을 읽고 - 김영숙 김영숙 2010.02.13 5185
282 돈과 권력의 세상. [2] 맑은 김인건 2010.02.11 4883
281 ‘타고난 강점’보다 자신의 강점을 인식하고 개발하는 능력... [2] 승완 2010.02.10 4326
280 비범성을 탄생시키는 3가지 요소 [4] 승완 2010.02.03 4797
279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 이만성 2010.01.21 4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