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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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 대하여
카를 구스타프 융(스위스, 1875~1961)은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로서 정신의학과 심리학은 물론, 종교와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등 인문학 전 분야의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웠다고 평가된다.
1902년 취리히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명성을 얻었고, 1907년부터 5년 동안 프로이트와 공동 연구 작업을 했다. 한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프로이드의 합리주의와 ‘성’의 역할 등에 따른 견해 차이로 결별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세웠다.
인간을 내향성과 외향성, 사고와 감정, 감각과 직관으로 나눔으로써 심리학적 유형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오늘날 성격진단 심리검사인 MBTI검사를 비롯한 다양한 심리검사에서도 많이 응용되었으며 일반론으로서의 심리학을 개인에게도 적용, 발전시켰다. 그 외에도 원형(原型), 집단 무의식, 콤플렉스, 개성화,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페르소나 등의 개념을 제시하고 발전시켰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무척 강렬한 꿈과 환상을 많이 경험한 융은 자기 자신의 내면의 꿈과 환상을 들여다보고 이해와 해석을 하는데 평생을 쏟았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환상을 방대한 신화와 민담, 종교적 표상과 비교하며 연구했으며 이것이 '집단 무의식' 개념으로 발전했다.
무의식에 대한 평생의 연구는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라는 자서전의 첫 문장으로 명확히 표현된다.
융의 아버지는 목사였으나 이성과 합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신앙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고 본 융은 교리의 틀에서 벗어나 개인의 체험에 따른 신의 문제와 영혼의 불멸을 고민했다. BBC 인터뷰에서 융이 한 말, ‘나는 신을 압니다.’는 유명한 표현이 되었으며, 심리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존재의 최고 의미는 ‘오직 그것이 존재한다는 데 있으며’,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해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융의 대표저서로는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자아와 무의식의 관계>,<황금꽃의 비밀>,<정신의 에너지에 대하여>,<심리학과 종교>,<심리학과 연금술>,<아이온>,<욥에의 회답>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2008년 5월 융의 '기본저작집'(전 9권)이 독일어번역판으로 완역되었다고 한다.
*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옮긴이 서문>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자기실현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는 ‘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의 상징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
‘자기’가 ‘자아’에게 보내주는 신호들을 포착해나가는 과정이 융 자서전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셈이다. [9]
<프롤로그>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11]
내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영원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이는가는 오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준다. 과학은 평균 개념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개념들은 각 개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다. [11-12]
나는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감각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다...
나의 생애에서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은 영원한 불멸의 세계가 무상한 세계로 침투했던 사건들뿐이다. [13]
젊었을 때나 그 이후에 밖에서부터 나에게로 다가와 의미를 가지게 된 것들도 내적 체험의 표지가 찍혀 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내부로부터 해답과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들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외적인 상황들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14]
<일생을 사로잡은 꿈, 유년시절>
그때 호수 근처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물이 없이는 아무도 존재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졌다. [25]
이런 소녀의 유형이 나중에 내 아니마의 한 측면이 되었다. [27]
반복되는 이런 생각들은 내 의식의 첫 외상(Trauma)로 이어졌다. [30]
누가 나의 내부에서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누구의 정신이 이런 체험을 고안해냈을까? 얼마나 빼어난 통찰이 여기에 작용한 것일까?...
그때 무엇이 내 안에서 말을 한 것일까? 누가 뛰어난 문제제기를 표현하는 발언을 한 것일까? ...나의 후반기 생애를 격렬하기 그지없는 폭풍으로 채운 그 모든 것의 기초를 제공했단 말인가?...
이러한 유년시절의 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비밀들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다. [37]
지금 나는 그 일이 가능한 한 많은 빛을 어둠 속으로 가져가기 위해 일어난 것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그때 나의 정신적 삶이 무의식적인 출발을 한 것이었다. [37]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누가 누구인지 골똘히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46-47]
나는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 유년시절의 영원성이 번개와도 같이 내게 깨달아졌기 때문이다. 이 ‘영원성’이 의미하는 바는 곧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분명해졌다. 나 자신과의 불화와 거대한 세계 속에서의 불확실성... [47]
아무도 모르고 누구의 손도 미칠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했다는데서 오는 새로운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충분했다. [49]
전통을 거치지 않고도 개인의 마음속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영혼의 고태적 구성요소가 있다는 확신이 처음으로 나에게 생겼다. [51]
사람들은 우선 행동을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 대해 숙고해보는 것이다. [52]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학창시절>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53]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 기억들은 지하에서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뿌리에서 각각 뻗어나간 작은 가지들과 같으며, 무의식의 발달과정에 있는 정류장들과 같다. [59]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나를 둘러싼 광대한 세계 앞에서 느끼는 왜소감은 내 마음에 의욕상실뿐만 아니라 일종의 은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63]
나는 방랑, 독서, 수집, 놀이 등으로 시간을 빈둥빈둥 보냈다. 그러면서도 나는 거기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음을 막연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65]
신경증은 나의 또 다른 비밀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부끄러운 비밀, 일종의 패배였다. 그럼에도 신경증은 나를 결국 아주 꼼꼼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특히 부지런한 사람이 되게 했다... 내가 무언가 덕을 보려고 하는 외관상의 성실성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성실성이었다. [67]
한순간 갑자기,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의식과 함께,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할 때 내가 옆으로 밀려나 있었으나 지금은 ‘내’가 스스로 하고자 한다...
나의 내부에 ‘권위가’가 자리잡았다. [68-69]
그때 무엇이 나의 내부에서 일어났는지, 무엇이 나에게 그토록 강한 인상을 주었는지 표현할 수가 없다. 동경이라고 해야 할지, 향수라고 해야 할지, 재인식이라고 해야 할지, ‘그래, 저거였어! 그래, 저거였어!’라고 말이다. [71]
하느님의 의지가 무엇이며 하느님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전에는 복종할 수 없었다...
하느님의 통일성과 위대함, 그리고 초인성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굴복을 강요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문제는 내 영혼의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이었다. [78-79]
인간의 용기를 시험할 때 하느님은 비록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한다... 사람이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한다면 그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실할 수 있을 것이다. [81]
나는 내적인 불확실성을 외적인 확실성으로 보상했다. [89]
여기서 나는 나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이며 참다운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나는 또 다른 존재, 즉 제2의 인격의 방해받지 않는 평온과 고독을 추구했다...
무엇보다 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제2의 인격, 즉 ‘내적 인간’에 대해 말해왔다. [90-91]
나는 체험을 통해, 은총은 오직 하느님의 의지를 철저히 실현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91]
내게 일어난 바와 같이, 하느님은 자신의 압도적이고 충격적인 의지를 무력한 인간들에게 철저히 실현되도록 할 수 있는 존재다. [93]
나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하며 내 운명을 어떻게 만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그 해답을 나 자신의 고유한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내가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라는 것을 내가 행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확신을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결정적인 일에서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되었다. [96]
‘진정한 인식’은 본능에서 비롯되거나 타인과의 신비로운 교제에 기인한다. 그것은 비개인적인 관조행위를 통해 보는 ‘배후의 눈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101]
종교란 ‘인간이 하느님과 자립적인 관계를 맺는 영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11]
하느님의 존재는 우리의 증명 여하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는가?... 그런 것들로부터 나의 관념이 나온 것이 아니었다. [120]
그 무렵 나는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 사이의 차이점을 잘 보지 못하고, 제2의 인격의 세계를 나 자신의 세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 자신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거기 있다는 의미심장한 느낌이 늘 있었다. [128]
제2의 인격 안에서 나는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을 초월해 있었다. [144]
나는 실제 사물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면 그것에 관해 숙고할 만한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여겼다. [158]
<아름다운 시간들, 대학시절>
나는 또한 그 작은 등불이 나의 의식이라는 것과 그것이 내가 지닌 유일한 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 자신의 인식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하고 유일한 보물이었다. 그것은 어둠의 힘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약했으나 그래도 하나의 빛이었고 나의 유일한 빛이었다. [170]
나를 향해 밀려오는 폭풍은 시간이었으며, 그것은 끊임없이 과거로 흘러가면서도 동시에 쉼없이 나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것은 강력한 흡인력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속으로 탐욕스럽게 끌어들인다. 우리는 단지 앞으로 돌진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잠깐 동안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과거는 무서울 정도로 바로 여기에 실제하며, 충분한 해답으로써 몸값을 치르고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자들을 모두 잡아서 끌고 가버린다. [171]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개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며... 그는 자신의 개성 때문에 부모의 정신세계와는 제약된 범위 안에서만 일치할 뿐이다. 그런데 가족정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나름대로 시대정신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정신 그 자체는 대개 무의식적이다. 이 가족정신이 전반적으로 동의를 표시할 경우 그것은 일종의 세계확실성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정신이 많은 것과 대립하여 스스로 어긋나버리면 세계불확실감이 생겨난다. [174]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175]
적어도 우리 존재의 일부는 수세기에 걸쳐서 살아온 것이다. 그 부분을 나의 개인적인 용어로 ‘제2의 인격’이라고 일컬었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가에 깃들여 있다!” [175-176]
나는 자연과학이 엄청난 분량의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지만 통찰은 아주 빈약한데, 그것도 주로 전문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철학 강의를 통해 마음이라는 것이 그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음 없이는 지식도 통찰도 있을 수 없었다. [193]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점에서 순진한 사람은 동료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모욕이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201]
나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려도 하지 않고 따라올 수도 없는 옆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분명히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러나 결심은 섰고 그것은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나의 확신을 흩뜨려놓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강물이 합류하여 세차게 흘러가면서 먼 목적지로 나를 가차 없이 실어가는 것과도 같았다. [211]
정신의학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병든 정신과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의사의 정신 간의 대화이며, ‘병든’ 인격과 치료자 인격 간의 대결이다. [213]
결국 인간이란 스스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들의 판결에 맡겨진 하나의 사건인 셈이다. [217]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환자를 연구함으로써 나는 피해망상과 환각이 일종의 의미의 핵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인격, 하나의 인생사, 하나의 희망과 욕망이 그 배후에 있었다. [241]
사실 우리는 정신병에서 새로운 것이나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과 마주치게 된다. [241]
정신치료와 분석은 인간 개체가 그러하듯 다양한 법이다...
보편적인 원칙은 다만 최소한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그는 규격화된 일정한 방식에 매이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248-249]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제대로 기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어버리면 수소폭탄이 터질 수도 있다! [250]
정신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의사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다룰 줄 알고 있을 경우에만 환자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 [250-251]
모든 치료자는 제3자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다른 관점도 가지게 된다. 교황 자신도 고해신부를 두고 있다. [253]
분석자가 된다는 것, 당신이 우선 당신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254]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부인들이 질투심이 많아 남편의 교우관계를 깨뜨리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법이다. 그러한 부인들은 자신들이 남편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남편이 자신에게 전적으로 속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든 질투의 핵심은 사랑의 결여에 있다. [259-260]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261]
나는 사람들이 인생문제들에 대해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해답으로 얼버무릴 때 신경증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사람들은 지위, 결혼, 명성, 외적인 성공, 재물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신경증을 앓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너무나 좁은 정신적인 한계에 갇혀 지낸다. 그들의 삶에는 흡족한 내용과 의미가 없다. 그들이 좀 더 폭넓은 인격으로 발달할 수 있다면 신경증은 보통 사라진다. 그런 이유로 인격발달이라는 관념이 나에게는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264]
문제가 내적인 체험, 즉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때는 대부분의 사람이 섬뜩한 기분이 들어 도망하기 일쑤다. [266]
오늘날 소위 신경증 환자들 가운데는 이전 시대라면 신경증, 즉 자기 자신과의 분열을 겪지 않았을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이 신화에 의해 조상들의 세계와 여전히 관련을 맺고 있고, 그리하여 단지 바깥에서 보는 자연이 아닌 실제로 체험하는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그러한 시대와 환경에 살았다면, 그들은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를 면했을 것이다. 문제는, 신화의 상실을 견디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 불과한 세계, 즉 자연과학의 세계상으로 향한 길을 찾을 수도 없고, 지혜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언어의 지적인 즉흥연주로 만족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270]
그 세계는 삶의 진실을 소위 명료한 개념들로 은폐하려고 한다. ..
영혼은 개념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사실들 가운데 깃들어 있다. [271]
무엇보다 나 자신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오류와 실패로부터 배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 [272]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272]
<프로이트와의 만남>
나의 치료과정에서는 신경증의 많은 사례에서 성욕의 문제는 다만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고 다른 요인들이 주요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76-277]
이러한 문제의 해결이 밝은 관념론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마도 어두운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283]
무의식에서 떠오르는 모든 것은 위와 아래가 있고 안과 밖이 있음... 사람들이 밖에 관해서 말할 때, 전체의 반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무의식에서 반작용이 일어나는 법이다. [285]
신성한 힘의 체험으로 마음이 격렬히 동요하게 되면 사람들이 매달려 있는 실이 끊어질 위험이 항상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은 절대적인 긍정으로, 또 다른 사람은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부정으로 빠지게 된다. [287]
'니르드반드바(양쪽으로부터의 자유)‘
마음의 진동추는 바른 것과 그른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287]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허위가 되며, 그저께 잘못된 결론으로 간주되던 것이 내일은 하나의 계시가 될 수도 있다. [288]
그 꿈은 개인정신의 밑바닥에 있는 선험적이고 집단적인 것에 대한 최초의 암시였다. 본능의 형태, 즉 원형 [300]
오늘날의 문화의식은 무의식개념과 거기에 따르는 결과들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정신의 존재가 두 개의 극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통찰은 여전히 장래의 과제로 남아 있다. [312]
<내 안의 여인 아니마>
나는 무의식에는 고대 체험의 유물이 남아 있다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 유물이 결코 죽은 형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정신에 속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었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이것으로부터 원형설이 발전되어 나왔다. [319]
내 안에는 마력 같은 힘이 있어, 내가 환상에서 겪은 것의 의미를 찾지 않으면 안 되도록 처음부터 나를 붙들어 주었다. 내가 노도와 같은 무의식의 엄습을 견뎌냈을 때, 보다 높은 어떤 의지에 순종하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고, 그러한 느낌은 나의 과제를 수행하는데 나침반 역할을 해주었다. [325]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지닌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차츰 나에게 정신적인 객관성, ‘마음의 진실’을 깨우쳐주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고 내 생각이 아닌 것들을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내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335-336]
나는 내 안에 있는 여성상이 남성 무의식 속에 있는 전형적인, 또는 원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아니마’라고 불렀다. [340]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음만 먹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적어놓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341]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342]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 [343]
삶을 대체할 만한 완전한 언어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언어가 삶을 대체하려고 시도한다면 언어뿐 아니라 삶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 [345]
환상에 관한 작업을 하던 바로 그 무렵, 물론 나는 ‘이승’에 발판이 필요했다...
그 낯선 내면세계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대극으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었다. 가족과 직업은 내가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기반으로 남아 있었고, 그것은 내가 실제로 현실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임을 증명했다...
니체는 내면의 사상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사실 그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소유했다기보다 오히려 내면세계가 그를 소유한 셈이었다. 그는 뿌리가 뽑혀 땅 위를 떠돌아다녔다...
그런 비현실성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 세상이 아닌 이 세계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토록 방황하고 침체되어 있던 때이긴 했지만, 내가 체험한 모든 것은 나의 실제적인 삶과 연결됨을 나는 항상 알고 있었고 삶의 의미를 폭넓게 채우고자 노력했다. 나의 좌우명은 ‘도전에 맞서 싸워라!’ 였다. [346-347]
내가 나 자신에게만 속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그후로 내 인생은 보편성에 속하게 되었다. [350]
나는 내 앞에 펼쳐진 학문적인 출세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나의 내적 인격 즉 ‘보다 높은 이성’의 길을 쫓아 무의식과 직면하는 실험, 그 흥미있는 나의 과제를 서서히 밀고나갈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알았다...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충만히 채울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점을 여러 면에서 후회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감정은 지나가는 것이었고, 실은 하찮은 것이었다. ..
우리가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이런 일은 내가 학문적 출세를 포기했을 때뿐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늘 겪어왔다. [352-353]
나는 정신적 발달의 목표가 ‘자기’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직선적 발달은 없고 다만 자기를 중심으로 한 순환이 있을 뿐이다. [357]
나는 ‘자기’가 방향성과 의미의 원리이며 그것들의 원형임을 이해했다. 그 안에 치유의 기능이 들어 있다. [360]
나의 내적 이미지를 추적하던 그 몇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기간에 온갖 본질적인 것이 정해졌다. 그 무렵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내 후기 작업은 모두 그 기간에 무의식에서 솟아나와 나를 휩쓸었던 자료들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데 있었다. 그것은 필생의 작업을 위한 원재료였다. [361-362]
연금술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상징의 하나는 물질의 변환이 완성되는 그릇이었다. 나의 심리학적 발견의 핵심도 이와 같은 내면의 변환과정, 즉 개성화였다. [367]
원초적 이미지와 원형의 본체가 내 연구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고, 역사 없이는 심리학, 특히 무의식의 심리학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73]
나의 생애는 하나의 과제, 하나의 목표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것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373]
무의식의 내용에 대한 자아의 관계에 의해 정신의 변환과 발달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 개인의 경우 그 과정을 꿈이나 환상에서 읽어낼 수 있다. 집단적인 세계에서는 그것이 반영된 표현이 특히 다양한 종교체계와 종교상징의 변환에서 발견된다. [377-378]
내가 무의식의 상징표현이 기독교 또는 다른 종교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문제를 항상 생각해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시대정신의 세기적 변화에 부응하려면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시대와 동떨어지게 되고 인간이 전체성을 가지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378-379]
예수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그 시대의 기대를 그토록 완벽하게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격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382]
로마제국의 막강한 권력은, 수없이 많은 개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자주적인 삶의 방식과 정신적인 독립성을 빼앗긴 세계를 만들어냈다. 오늘날의 개인이나 문화공동체도 비슷한 위협, 즉 대중화의 위험에 처해있다. [382]
맹목적인 수용은 결코 해답을 주지 못한다. 기껏해야 답보상태로 있게 할 뿐이다. [387]
나의 모든 저술은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부과된 과제인 셈이다. [397]
<아,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이런 단순한 일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런데 단순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405]
시간은 어린이다 [407]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의식과 함께하는 삶이 전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409]
동시성현상, 우리가 내적감각으로 지각하거나 예감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외부의 현실과 자구 상응하게 되는 것을 동시성현상이라고 한다. [413]
나는 부모나 조부모, 그리고 더 먼 조상들이 완성하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놓은 일들과 문제들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아주 강하게 느낀다. [417]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상 대대로 이미 존재해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이란 아득한 옛날의 구성요소들이 끝없이 변화하여 재결합된 것이다. [420]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421]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422]
우리의 내적인 평안과 만족은, 개체를 통하여 인격화된 역사적 가족이 우리 현재의 덧없는 상황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거의 대부분 좌우된다. [423]
<여행>
시간의 신으로서 아직 영원을 연상케 하는 이들의 시간을 무자비하게 날과 시, 분과 초로 조각조각 잘게 쪼개게 될 것이었다. [430]
시계라는 것은... 시간과 그 동의어인 진보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들로부터 빼앗아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짐을 가볍게 하고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점점 더 속력을 올리며 여행을 재촉하고 있다. 그들은 중량의 상실과 이에 따른 공허를 열차, 기선, 항공기, 로켓과 같은 성과물의 환상으로 보상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빠른 속력으로 인해 유럽인으로부터 존재의 지속성을 더욱더 빼앗아가고, 더 나아가 유럽인을 속도와 폭발적인 가속도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현실로 옮겨놓는다. [431]
발전에 대한 맹신은 그것이 우리의 의식을 과거로부터 멀리 떼어놓을수록 더욱더 유치한 미래의 꿈에 매달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437]
유럽인은 합리적인 특성을 꽤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의 열정을 희생하고 얻은 것... [438]
살아있는 정신구조에서는 단순히 기계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 관리되며 전체와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난다. [439]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451]
인간은 창조의 완성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가 되게 하는 두 번째 세계창조자인 것이다. [457]
‘여성의 평등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동반관계가 의미를 잃어버린 시대의 산물이다. 원시사회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여자가 바라는 대로 무의식적으로 충분히 잘 조절되고 있다. [467]
백인여성의 남성화가 그녀들의 천연적인 전체성(샴바, 아이, 작은 가축, 자기 집, 그리고 부엌의 불)의 상실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여성의 결핍에 대한 보상이 아닌가. 그리고 백인남성의 여성화는 여성의 남성화에서 야기된 후속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자문해보았다. [469-470]
그들의 지혜는 그들에게 속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만이 나에게 속할 뿐이다...
오직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하고, 나의 내면이 말하는 것이거나 본성이 내게 가져다주는 것으로 살아야 한다. [489]
기독교인은 선을 추구하면서도 악에 빠진다. 이에 반하여 인도인은 선과 악의 바깥에서 자신을 느끼거나, 명상이나 요가로써 이러한 상태에 이르려고 한다. [490]
인도인의 목적은 도덕적인 완전성이 아니라 니르드반드바 상태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며 거기에 걸맞게 또한 명상을 통해서 형상이 없는 공의 상태에 이르려고 한다. 이에 반해 나는 자연과 정신의 이미지에 대한 생생한 관찰을 고수하고 싶다. 나는 인간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지도 않으며 나로부터도 자연으로부터도 그러고 싶지 않다...
나에게 존재의 최고의미는 오직 그것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그것이 원래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하능 데 있지 않다. [490-491]
나에게는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491]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하다. [491]
나는 부처의 삶을 개인의 인생 전체를 통해 스스로를 주장한 ‘자기’의 실현으로 이해했다...
인간실존과 시계의 정수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 자체의 측면뿐 아니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인식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495]
그리스도, 부처
둘 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부처는 이를테면 이성적 통찰로써, 그리스도는 숙명적인 희생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495-496]
나는 인도의 세계에서 끌어내어져. 인도가 나의 과제가 아니고 단지 나로 하여금 목표에 접근하도록 하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란 사실을 상기했다. 그 과정도 또한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501]
<환상들>
‘나(자아)는 성취된 것과 지금까지 있었던 것의 그와 같은 묶음이다.’
이런 체험은 나에게 극도의 결핍감을 안겨주면서도 동시에 커다란 만족을 주었다. 내가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즉, 나는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었다. [516]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527]
안전한 길을 가는 자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527]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527-528]
<사후의 삶에 관하여>
오늘날 인간이 대부분 오로지 그들의 의식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신들에 관해 알고 있는 지식만이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우리가 앓고 있는 시대병이다. [532]
우리는 일정한 세계에 살며 그 세계를 통해 우리의 혼과 정신적인 전제가 함께 형성되고 부여된다. 우리는 타고난 구조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그리하여 우리의 존재와 사고로써 이 세계와 관련을 맺는다. [533]
무의식의 가능성과 능력에 대해 일종의 존경심을 갖게 된다. 다만 우리는 비평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하며, 그러한 ‘전달(무의식이 전해주는 내용들)’이 언제나 주관적인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39]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 [551]
서양인으로서는 정적이기만 한 세계의 무의미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세계의 의미를 전제해야 한다. 동양인은 이런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이 그 전제를 구현한다. 서양인이 세계의 의미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면, 동양인은 인간 속에서 의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자신으로부터 세계나 존재를 벗어버린다.
서양인은 외향적인 경향이 강하고 동양인은 내향적인 경향이 강한 듯하다. 서양인은 의미를 투사하여 객체에 의미가 있는 듯이 추정한다. 동양인은 그 의미를 자신 속에서 느낀다. 그런데 의미는 밖에도 있고 안에도 있는 법이다. [560]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562]
노년에 인간은 그의 내면의 눈으로 추억들을 펼쳐보며 과거의 내적, 외적 이미지들 속에서 자신을 생각하면서 인식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성찰하고 이미지로 바꾸는 회고는 ‘전진을 위한 후진’을 의미하게 된다. 내 인생을 통하여 이 세계 안으로 이끌었고 다시 이 세계에서 밖으로 인도하는 그 줄(노선)을 보려고 시도한다. [565]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지위들 때문에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이생에서 무한한 것에 이미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낄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달라진다. 결국 인간이 가치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572]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573]
인간의 과제는, 무의식에서 밀려오는 것에 관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거나 동일시하지 않고 그것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 인간실존의 유일한 의미는 존재 그 자체의 어둠속에 빛을 밝히는 것이다. [574]
<만년의 사상>
오늘날 제기된 악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철저한 자기인식, 즉 자신의 전체성에 대한 최선의 인식을 필요로 한다. [582]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어 자기 자신의 발로 서는 것이 개인의 고유한 과제임을 여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601]
나에게 그 토대를 붙잡고자 하는 내적 동인이 결여되어 있다면 외부세계가 무슨 뜻이 있겠는가. [610]
정신은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다. [613]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한 바울의 조건문이 모든 인식 중에서 최초의 인식이며 신성 그 자체의 진수인 것처럼 여겨진다. [619]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그리고 “모든 것을 견딘다”. 이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619]
<회고>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624]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일어난 것들은 그야말로 기대 밖의 일들이었다.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 대로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생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628]
노자, 그는 가치와 무가치를 보았고 경험했으며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 인색할 수 없는 영원한 의미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630]
<편집자의 말>
항상 그랬듯이 내 인생에서 모든 외적인 것은 우연한 것이고, 오직 내적인 것만이 실체성이 있으며 결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숙명적이네. [636]
외적인 사실들의 결핍과 불완전성은 다른 것들, 즉 융의 내적 경험에 관한 보고와 풍부한 사상들로 충분히 보충되고 있다. [639]
* 내가 저자라면
보통의 경우 자서전이라 하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 시대적 상황과 사건들과 개인적인 사건과 주변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과 느낌을 연대기 순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그 틀에서 우리는 위대한 인물의 사적인 생활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위대한 인물의 사상이 성립되어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즐거움도 맛보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자칫 의도하지 않았으나 결과적인 과장이 있을 수 있고, 사실의 왜곡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은 외적 사건들에 대해 의도적인 배제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자기 자신과 생활에 대해서 세상에 공개되는 것을 극히 꺼렸던 성격의 영향도 크고 주변인의 이야기를 자서전을 통해 공개하길 원하지 않았던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적인 의미로 체험되지 못한 외적세계는 별 의미가 없으며 오직 내적인 것만이 실체성을 가진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생각은 자서전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적용되어 외적인 기억들을 거의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이유로 융의 자서전을 통해서 융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이나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346쪽에 가서야 융이 처와 다섯 아이가 있는 가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융이 가정을 포함한 외부세계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내적세계에만 빠져 지낸 것은 아니다. 내면세계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대극으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가족과 직업은 그가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는 이름없는 사람들과의 만남만이 그의 사상을 수립하는 의미있는 만남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또한 융이 세상적 출세를 버리고 자신의 내면을 따라가기로 결심했을 때조차도 스스로 체함하고 이해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실제 삶과 연결됨을 항상 알고 있었고 삶의 의미를 폭넓게 채우고자 노력했다고 이야기한다. 내적세계 탐구에 평생을 바친 노학자의 좌우명은 ‘도전에 맞서 싸워라!’ 였다. (p.347) 융을 둘러싼 현실세계와 그에 따른 갈등과 영향이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졌다면 융의 학문세계를 수립하게 되는 과정과 좌우명이 좀 더 읽는 이에게 쉽게 다가올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든다. 또한 외부 작가가 아닌 본인이 이야기하는 융의 외적인생도 의미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기억, 꿈, 사상>은 자기만의 세상을 탐구하고 연구하느라 세상과 불화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을 겪고 때로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학문적, 경험적 신념을 지키고자 평생을 바친 한 인간의 위대한 여정을 담담하고 일관되게 그리고 있다.
나의 경우 융이 이룬 이론의 내용 자체보다도 그 이론을 세워가는 과정이 더욱 흥미있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기억과 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고 그 어린 시절의 느낌이 평생을 지배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다. 또한 스스로의 신경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성실성을 확립했다는 것, 자신 안에 두 개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탐색해 가는 과정, 말년에 신비주의와 인도의 사상에 기울지만 결코 그에 빠지지 않고 수단이 목적이 되지 않도록 한 점 등이 인상깊었다.
시간에 대한 융의 통찰 또한 놀라웠다.
과거는 바로 여기에 실제하며, 충분한 해답으로써 몸값을 치르고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자들을 모두 잡아서 끌고 가버리며, 현재의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얄팍한 미래의 약속에 의지한다는 것, 발전과 진보에 대한 맹신은 현재의 공허를 물질적 충족으로 채우려는 헛된 환상 속에서 더욱 인간의 열정과 풍요로움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본질에 대한 탐색 없이 시간을 단축하고자 하는 노력은 일상의 속도를 빠르게 하지만 결국 시간은 더욱 부족하게 만든다는 통찰은 물질의 놀라운 발전 속에서도 점점 더 바빠지고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는 현대 우리의 모습을 명확히 설명해주고 있다.
융은 또한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고 내적 욕망이 지시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색하는 길로 들어서면서 갈등을 겪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지나가는 것이고 하찮은 것이며, 스스로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고 이것이 인생을 충만히 채울 것을 알고 이를 위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단언한다. 이런 결단을 통해 융은 많고 많은 대학교수 중 한명이 아니라 내적세계에 대한 자신의 학문세계를 확립한 유일한 존재가 된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체가 되게 하는 ‘두 번째 세계창조자’로서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는 인식은 인간 존재에 대한 답을 해준다. 자신의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타인의 답에 의지한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는 외부세계를 의미있게 하는 내적 동인을 찾아야한다는 주장과 함께, 우리가 자신의 삶에서 자신만의 의미와 대답은 찾아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나의 생애는 하나의 과제, 하나의 목표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것으로 통합되어 있었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융은 행복한 사람이었고 이 책을 읽으며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나 또한 행복한 사람이 확실하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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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 북리뷰 안보이시는 분들 일단 파일첨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4] | 관리자 | 2009.03.09 | 106493 |
358 |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Review [1] | 최우성 | 2010.03.08 | 5839 |
357 | 북리뷰4주차-기억 꿈 사상 | 이은주 | 2010.03.08 | 4789 |
356 | 4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1] | 신진철 | 2010.03.08 | 5549 |
355 | 기억, 꿈, 사상 (카를 융) [3] | 김용빈 | 2010.03.08 | 6171 |
354 | <카를 융 기억 꿈 사상>을 읽고 - 김영숙 | 김영숙 | 2010.03.08 | 5680 |
353 | 북리뷰 4.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박상현 | 2010.03.08 | 5622 |
352 | 카를 융 자서전 | narara | 2010.03.07 | 5534 |
351 | 4. 카를 융 자서전 –기억 꿈 사상 | 미나 | 2010.03.07 | 5576 |
350 | 4. 카를 융 기억 꿈 사상(노미선) | 별빛 | 2010.03.07 | 5574 |
349 | 4. 기억 꿈 사상(융) 불가능은 없다. 생각의 차이와 한계... | 윤인희 | 2010.03.07 | 5539 |
348 | 어쩌면 좋아.... [3] | 맑은 김인건 | 2010.03.07 | 5519 |
347 | 4. 기억 꿈 사상 | 박미옥 | 2010.03.06 | 6040 |
» | 북리뷰 4. <기억 꿈 사상> [2] | 이선형 | 2010.03.04 | 5742 |
345 | 디지털 혁명의 미래_고든벨, 짐겜멜 | 맑은 김인건 | 2010.03.02 | 5492 |
344 | 세번째 북리뷰_마흔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1] | 김혜영 | 2010.03.01 | 5955 |
343 | 3.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노미선) | 별빛 | 2010.03.01 | 5548 |
342 | 북 리뷰3. [마흔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2] | 박상현 | 2010.03.01 | 5995 |
341 |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 김연주 | 2010.03.01 | 5556 |
340 |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구본형) | 김용빈 | 2010.03.01 | 5739 |
339 | 리뷰 3주차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 윤인희 | 2010.03.01 | 576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