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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8일 02시 40분 등록

기억, , 사상

카를 구스타프 융, 성기, 2007, 김영사

 

v       저자에 대하여

 

가.   저자에 대한 기록

   (1875~1961)은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프로이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의 많은 정신과 치료자 들은 물론이고 MBTI를 개발한 브릭스와 마이어스 모녀나 신화학자로 잘 알려진 켐벨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심리학자 중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은 프로이트(1856~1939)가 아닐까.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대표되는 어릴 적의 성적인 억압이라는 개념을 통해 정신병을 새롭게 해석하고 치료하였는데,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의 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바로 융도 마찬가지로 성욕의 문제는 단지 부차적인 원인이라는 견해 등으로 1913년 그의 나이 38세 때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분석심리학을 개척하였다. 이런 프로이트와의 결별의 사유를 볼 때 필자가 융에 대해서 어떤 동질감을 느낀 것이 사실이다. 어떻게 모든 문제를 프로이트처럼 하나의 원인(성적인 억압)으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융은 프로이트의 성이론이 그야말로 신비적이라 하면서 오로지 진리를 위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데, 심리유형론이나 원형에 대한 이론은 이해가 되었지만, 사후세계 및 사자(死者)와의 만남이라든가 연금술과 점성술 등은 일반인이 볼 때 더욱 신비적인 분야라서 나중엔 꾀 아이러니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융은 이런 독특한 연구와 이론을 구축할 수 있었을까? 그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융은 니체보다 더욱 더 기독교적인 문화에서 성장했다. 외가 쪽은 6명이 목사였고, 아버지와 두 형제도 목사였다. 하지만, 교회와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진 않았다. 또한, 세 살 때의 상징적인 꿈에 대한 탐구를 평생토록 계속했듯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편이었고, 진리탐구에 대한 의지 및 독립성도 강했다. 또한, 본인의 성향 상, 상징이나 신비적인 세계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융이 살던 시대환경 상, 경험과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면은 그가 지녔던 의식과 무의식, 외형적 인격과 그림자 그리고 선과 악 같은 이원론적 호기심과 갈등과도 일정 부분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융은 86세로 죽기 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융에게 있어 자기실현은 꿈이나 신화 등을 통해서 자아(Ego)가 자기(Self)의 목소리를 듣고 전체적인 인격으로 통합해나가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를 쉼 없이 진행한 삶이라 하겠다.

 

나.   개인적 평가

   융은 긴 연구인생을 통해 수많은 정신치료를 수행한 것은 물론, 개인적 무의식 집단적 무의식과 원형 아니마와 아니무스 개성화 심리유형 등 수많은 개념을 발표했는데, 이중 집단적 무의식의 내용을 의미하는 원형 이론과 개인의 심리유형이 한 사람의 판단을 결정하고 제약한다는 심리유형 이론 등은 우리 인식의 영역을 넓힌 융의 커다란 공로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다.   저자의 주요 저서

   19권에 이르는 융 전집 중 많이 알려진 책들은 ≪리비도의 변환과 제 상징(1912),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발표한 ≪죽음에 관한 일곱 가지 설법(1916), MBTI의 기초가 된 ≪심리학적 유형(1921), ≪자아와 무의식과의 관계(1928), ≪심리학과 연금술(1944), ≪욥에의 회답(1952), 그리고 전집에는 포함되지 않은 이 책 ≪기억, , 사상(1962)≫ 등이 있다.

 

 

v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1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Selbst : 인격의 가장 깊은 구심점) 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 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11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준다. 과학은 평균 개념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개념들은 각 개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다.

 

26 그 무렵 어머니는 여러 달 동안 바젤의 병원에서 지냈는데, 추측컨대 그녀의 병은 결혼생활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당시 어머니 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친척아주머니가 나를 돌봐주었다. 어머니의 오랜 부재로 나는 무척 힘들었다.

   그 후로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항상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여성이라는 말도 오랫동안 생래적인 불신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뜻하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인생을 출발하면서 함께 가져가야 하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37 이러한 유년시절의 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비밀들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때 이를 테면 땅에 묻히는 매장식이 거행된 것이다. 내가 다시 땅에서 나오기까지는 여러 해가 지나갔다. 지금 나는 그 일이 가능한 한 많은 빛을 어둠 속으로 가져가기 위해 일어난 것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그때 나의 정신적 삶이 무의식적인 출발을 한 것이다.

 

47 내가 심취했던 유년시절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었으며, 나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계속 굴러가며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만 것이었다. 나는 나의 미래를 잃지 않기 위해 그 장소에서 억지로 몸을 돌려야만 했다.

 

56 아버지에 대해서 연민을 느꼈으나, 이상하게도 어머니에 대해서는 별로 연민이 생기지 않았다. 나로서는 어머니가 좀더 강해 보였다.

 

84 오늘날에도 나는 괴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87 나는 모든 경쟁을 싫어했다. 누가 놀이까지도 경쟁적으로 하게 되면 나는 그 놀이를 그만두었다. 그 후 나는 학급에서 2등에 머물렀는데 그것이 마음이 훨씬 편했다.

 

91 무엇보다 종교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제2성격, 내적 인간에 대해 말해왔다. 2의 인격은 내 생애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내부에서 나에게로 다가오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길을 열어주려고 노력했다.

 

97 그녀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인습적이고 전통적인 견해를 가졌으나, 그녀의 무의식적인 인격이 갑자기 돌출하곤 했다. 그 인격은 예상 외로 강력했으며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어둡고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 역시 두 개의 인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확신했다. 하나는 악의 없고 인간적이었으며, 거기에 반해 또 하나는 으스스했다. 그것은 가끔씩만 나타났으나 그럴 때마다 예기치 못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곤 했다. 그럴 때 어머니는 독백을 하듯 말했으나 내게는 유용한 말들이었고, 보통 내 가장 깊은 곳을 찔렀기 때문에 나는 할말을 잃곤 했다.

 

116 하느님이 지선(至善) 이라면, 그가 창조한 세계와 피조물이 왜 이토록 불완전하고 부패하고 비참하단 말인가? 분명히 악마에게 침투당해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악마 역시 하느님의 피조물이었다. 나는 악마에 관해 읽어보아야만 했다. 악마는 아주 중요한 존재로 여겨졌다.

 

130 그 동물들도 우리처럼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불안과 신뢰를 경험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언어, 예리한 의식, 과학 들을 제외한 존재의 온갖 본질적인 요소들을 공유하는 셈이다. 나는 그 제외된 요소들을 인습대로 경탄해 마지않았지만, 인간들을 신의 세계로부터 멀어지고 벗어나게 하여 동물에게서는 일어날 수 없는 타락으로 이끌 가능성이 그 요소들에 있음을 발견했다.

 

133 성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주지주의는 나에게 사막보다 더 생명력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생각했다. 이들은 모두 자기들이 받아들이지도 않고 진정으로 알고 있지도 않은 것을 논리의 곡예로써 억지로 꾸미려 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사실은 체험이 문제인 것이다!

 

133 (쇼펜하우어)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고통, 그리고 혼란과 고난과 악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143 학교나 친구들 앞에서는 제2의 인격을 잊을 수 있었다.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도 제2의 인격은 사라졌다.

   그러나 혼자 집에 있거나 자연 속에 있을 때는 그 즉시 쇼펜하우어와 칸트가 강력하게 되살아나고, 그들과 함께 위대한 신의 세계도 되살아났다. 나의 자연과학적 지식도 그 속에 포함되어 그 위대한 그림을 색체와 형상으로 채웠다. 그러면 제1의 인격과 직업선택에 대한 걱정들은 1890년대의 작은 삽화 정도로 여겨지면서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는다.

 

172 내가 제2의 인격을 뒤에 남겨두고 떠나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내 앞에서 제2의 인격을 부정한다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스스로를 불구로 만드는 것이며, 더 나아가 꿈의 출처를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이상 없게 되는 것이다. 2의 인격이 꿈의 생성과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73~174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개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며,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개성 때문에 부모의 정신세계와는 제약된 범위 안에서만 일치할 뿐이다. 그런데 가족정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나름대로 시대정신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정신 그 자체는 대개 무의식적이다. 이 가족정신이 전반적으로 동의를 표시할 경우 그것은 일종의 세계확실성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정신이 많은 것과 대립하여 스스로 어긋나버리면 세계 불확실감이 생겨난다.

 

175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더 크다.

   이와 같이, 적어도 우리의 존재의 일부는 수세기에 걸쳐서 살아온 것이다. 그 부분을 나의 개인적인 용어로 2의 인격 이라고 일컬었다.

 

183~184 아버지의 인생이 대학 졸업과 함께 결정적으로 정지되어버렸다는 사실을 홀연히 깨달았다. 학생들 노래가사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들은 눈을 내리 깔고

   대학을 떠나 속물의 땅으로 돌아갔도다.

   , 저런, 저런, 저런,

   , 얼마나 변해버렸는가!

 

   아버지도 한 때는, 대학 신입생시절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세계는 나에게 그러하듯 아버지에게도 활짝 열려 있었다. 무한한 지식의 보물이 내 앞에서처럼 아버지 앞에도 놓여 있었다. 그러한 아버지를 온통 기죽게 하고 우둔하게 만들고 쓰라리게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02 나는 더 나은 방법이 정말 없어 사실들을 제시하는 대신 말만 늘어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는 사실들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중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전보다 더 경험주의로 치우치게 되었다. 나는 철학자들을 좋지 않게 여겼다. 철학자들은 온통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만 말을 늘어놓고, 정작 사실들을 가지고 답변할 때는 침묵해버리기 일쑤였다.

 

210 정신의학에서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두 흐름이 합류하여 그 합해진 물의 힘으로 스스로 물길을 내어 흘러갈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에 내가 사방으로 찾아 헤매었으나 발견하지 못했던, 생물학적 사실과 정신적 사실에 관한 공동경험의 장이 있었다. 정신의학은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인 셈이었다.

 

222 그 무렵 나는 연상진단법 연구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이 환자에게 연상검사를 시행했다. 더 나아가 나는 그녀의 꿈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나는 기어코 그녀의 과거를 드러내게 되었고, 그녀의 일상적인 병력이 밝히지 않고 있는 중요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무의식으로부터 이른바 직접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를 통해 어둡고 비극적인 사연이 드러났다.

 

236 임상적 진단은 어떤 방향설정을 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지만 환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점은 환자 사연의 문제다. 그것이 인간적인 배경과 인간적인 고통을 드러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의사의 치료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241 나는 정신병에 보편적인 인간심리학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과, 여기서도 오랜 인류의 갈등이 재발견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사실 우리는 정신병에서 새로운 것이나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과 마주치게 된다.

 

250 정신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의 필수조건은 이른바 교육분석이라고 일컬어지는 자기분석이다. 환자의 치료는 말하자면 의사로부터 시작된다. 의사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다룰 줄 알고 있을 경우에만 환자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254 여자들은 남자가 보지 못하는 측면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남편이 초인이라고 확신하는 부인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259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부인들이 질투심이 많아 남편의 교우관계를 깨뜨리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법이다. 그러한 부인들은 자신들이 남편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남편이 자신에게 전적으로 속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든 질투의 핵심은 사랑의 결여에 있다.

 

261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270 문제는, 신화의 상실을 견디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 불과한 세계, 즉 자연과학의 세계상으로 향한 길을 찾을 수도 없고, 지혜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언어의 지적인 즉흥연주로 만족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276 환자는 어떤 자극어에 대해서는 연상어를 전혀 떠올리지 못하거나 반응시간이 무척 길어지곤 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러한 연상장애는 자극어가 정신적인 상처나 갈등을 건드릴 적마다 일어났다. 하지만 환자들은 대부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장애의 원인에 대해 물으면 환자는 흔히 기묘하게 꾸며낸 답변을 하곤 했다.

 

276 (프로이트)는 억압의 원인을 성적 외상(Trauma)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의 치료과정에서는 신경증의 많은 사례에서 성욕의 문제는 다만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고 다른 요인들이 주요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사회적응, 비극적인 삶의 정황으로 인한 억압, 체면차리기 등의 문제들이었다.

 

279 (프로이트)의 성이론이 그에게는 개인적으로나 철학적인 의미에서나 대단히 중요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도 했으나, 나로서는 그러한 성에 대한 단호한 평가가 그의 주관적 전제와 어느 정도로 연관되어 있는지, 그의 성이론이 입증 가능한 경험과 어느 정도까지 연관되어 있는지 분명치 않았다.

 

281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보루교리 같은 단어들이었다. 왜냐하면 교리, 즉 논의할 필요도 없는 신앙고백은 오직 의심을 단번에 눌러버리려고 할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과학적 판단과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개인적인 권력충동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

 

281 나에게는 성이론이 그야말로 신비적 이었다. 다시 말해, 다른 많은 사변적인 견해와 마찬가지로 단지 가능성만을 지닌, 증명할 수 없는 가설에 불과했다. 내가 아는 바로는 과학적 진리는 얼마 동안만 만족스러운 가설이지 모든 시대에 걸친 교리는 아니었다.

 

300 나는 꿈을 배후에 그 의미를 숨기고 있는 가면으로 이해하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 의미는 이미 인식된 바 있으나 소위 악의적으로 의식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꿈이란 자연의 일부로서 속이려는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귀가 먹었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이지 귀가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니다.

 

340 내 안에서 생겨난 한 여인이 나의 생각에 간섭한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십중팔구 그것은 원시적인 의미의 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혼이 왜 아니마 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자문해보았다. 왜 사람들은 그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상상하는가? 나중에 나는 내 안에 있는 여성상이 남성 무의식 속에 있는 전형적인, 또는 원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아니마(Anima) 라고 불렀다.

 

341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 내용을 구별하는 일이다. 무의식 내용은 이를테면 격리를 시켜야 한다. 그것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그 내용을 인격화하여 의식으로 하여금 그 인격들과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무의식 내용에서 힘을 제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이 그 힘을 의식에 행사하게 된다.

 

343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마는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으로 한 남자를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아니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 이것이 내게는 중요했다.

 

346 니체는 내면의 사상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사실 그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소유했다기보다 오히려 내면세계가 그를 소유한 셈이었다. 그는 뿌리가 뽑혀 땅 위를 떠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그는 과장하는 습성이 생기고 비현실성에 빠졌다.

   그런 비현실성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 세상이 아닌 이 세계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365 우선 나는 내적 체험에 관해 역사에서 예시의 증거를 찾아야만 했다. 다시 말해 나는 나의 가설이 역사 속에서 어디에 나타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그런 증거를 찾는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내 생각을 증명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연금술과의 만남은 나에게 결정적인 경험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때까지 부족했던 역사적 기반을 나에게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366 연금술은 하나의 중세 자연철학으로서 한편으로는 과거 그노시스주의에, 다른 한 편으로는 미래 즉 현대 무의식의 심리학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375 내가 프로이트나 아들러와 어떻게 다른가? 우리의 견해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내가 거기에 관해 숙고했을 때 유형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판단을 애초부터 결정하고 제약하는 것은 심리학적 유형이기 때문이었다.

   유형에 관한 책은 한 인간의 모든 판단은 그의 유형에 의해 제약되며 모든 관점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410 불협화음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자연은 조화로울 뿐만 아니라 무섭도록 모순되고 혼돈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조화로울 뿐만 아니라 무섭도록 모순되고 혼돈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420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상 대대로 이미 존재해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 이란 아득한 옛날의 구성요소들이 끝없이 변화하여 재결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나 마음은 현저하게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새로운 것, 즉 방금 생겨난 것 속에서는 알맞은 자리를 찾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조상의 특징들은 그 속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437 발전에 대한 맹신은 그것이 우리의 의식을 과거로부터 멀리 떼어놓을수록 더욱더 유치한 미래의 꿈에 매달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어린이답다는 것은 다른 한편 그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훨씬 완벽한 자기의 이미지, 즉 꾸밈없는 개성을 갖춘 전인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린이나 원시인을 보게 되면 성숙한 문화인의 마음 속에, 채우지 못한 욕구나 필요로 말미암은 갈망이 일어난다. 이것은 적응상태, 즉 페르소나를 위하여 인간의 전체상에서 떨어져나간 인격부분에 해당한다.

 

443 나는 그에게 왜 백인이 모두 넋이 나간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디서 생각하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451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469 백인여성의 남성화가 그녀들의 천연적인 정체성(샴바, 아이, 작은 가축, 자기 집, 그리고 부엌의 불)의 상실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여성의 결핍에 대한 보상이 아닌가, 그리고 백인남성의 여성화는 여성의 남성화에서 야기된 후속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자문해보았다. 가장 합리적이라는 국가들이 성의 차이를 가장 많이 소멸시키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동성애가 맡은 역할은 대단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모성콤플렉스의 결과이며 일부는 자연의 합목적적 현상(번식의 저지!)이다.

 

472 그러나 백인들이 아프리카로 온 후로는 아무도 꿈을 감득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 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는 영국인들이 그것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479 자연의 밤보다도 그와는 전혀 다른 어둠이 그 땅을 짓누르고 있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수 없는 수백만 년 동안 언제나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했던 정신적인 원초적 밤이다. 빛에 대한 동경은 의식에의 동경인 셈이다.

 

507 남자의 아니마는 현저히 역사적인 성격을 띤다. 아니마는 무의식의 인격화로 역사와 선사에 깊이 물들어 있다. 아니마는 과거의 것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남성이 그의 선사에 관해 알아야 할 것들을 남성 속에서 대신 보충해주고 있다. 남성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이미 있었던 모든 삶이 아니마다.

 

527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 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527 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영속성이 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숙명의 의도를 주제넘게 간섭하지 않을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다.

 

533 신화적인 인간은 그 너머로 나가기를 갈망하지만 학문적인 책임을 고려하는 인간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이성의 차원에서는 신화화야말로 쓸모 없는 사변일 뿐이다. 하지만 감정의 차원에서는 치유를 가져오는 활동력이며 인간존재에 광채를 부여한다. 그 광채를 사람들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런 것 없이 지내야 하는 어떤 그럴듯한 이유도 제시할 수 없다.

 

535 나의 가설은 무의식이 이를테면 꿈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는 암시의 도움으로 그 일[사후의 삶에 대한 증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541 그가 죽음에 관한 신화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성은 그가 들어갈 어두운 구덩이 외에는 아무것도 그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화는 그의 눈앞에 다른 이미지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것은 유익을 주며 정신을 풍성하게 하는 사후세계 삶의 이미지들이다. 그가 이 이미지들을 믿거나 약간만 신뢰하더라도 그것들을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어쨌든 부인하는 자는 ()를 향해 가는 반면에, 원형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두 사람 다 불확실성 속에 있다. 그런데 전자는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고 있고, 후자는 본능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현저한 차이이며 후자에게 이로운 점이 있음을 의미한다.

 

551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이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앎으로 영원 속의 앎, 대개 지금 여기와 관계가 없고 우리의 지적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다.

 

558 신화적 상상에서 중간세계가 없다면 정신은 교조주의에 갇혀 경직될 위험이 있다. 또한 반대로 신화적인 내용을 고려하는 것이 피암시적인 약한 마음의 소유자들에게는 예감을 인식으로 여기고 환상을 실체화할 위험이 있다.

 

566 죽음 후에 우리가 가는 세계는 거룩한 신성과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처럼 웅대하며 두려운 곳일 것이다.

 

572 무의식의 통합성은 나에게는 모든 생물학적 정신적 현상의 고유한 영적 인도자로 여겨진다. 그것은 총체적인 실현 즉 인간의 경우 전적인 의식화를 추구한다. 의식화는 넓은 의미에서 문화이며, 그리하여 자기인식은 이러한 과정의 정수이며 핵심이다.

 

573 우리 시대는 모든 강조점을 이생의 인간에 두어왔다. 이로써 인간과 그의 세계의 신들림이 초래되었다. 독재자들이 출현하고 그들이 온갖 재앙을 가져오게 된 원인은, 영리하기 그지없는 지성인들의 근시안으로 인해 인간에게서 내세적인 것이 박탈된 데 있다. 그런 사람들처럼 인간은 무의식성의 제물이 되어버린다.

   인간의 과제는 이를테면 그것과는 정반대로, 무의식에서 밀려오는 것에 관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거나 동일시하지 않고 그것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584 신화가 생동하지 않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으면 신화는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신화는 벙어리가 되었고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 잘못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은 신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런 방면의 온갖 시도를 억압한 우리 자신에게 있다.

 

598 신화는 델피의 신탁이나 꿈처럼 이중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또한 욥이 이미 파악했듯이, 본능이 우리를 긴급히 도와주고 신이 신에 맞서 우리를 지지해주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608 의식보다 먼저 존재하며 의식을 규정하는 원형들은 실제적인 역할로 출현한다. 다시 말해 본능적 의식 토대의 선험적 구조형태로 나타난다. 원형들은 물() 자체를 결코 표현하지 않고 단지 형태만을 표현한다.

 

609 정신에 관해서는 진부한 견해가 남아 있다. 정신은 원형적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백지상태(tabula rasa)이고, 출생시에 새로 생겨나며, 정신이란 단지 사람들이 스스로 상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그런 견해 말이다.

   의식은 계통발생학적으로나 개체발생학적으로 이차적인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사람들이 언젠가 기어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신체가 수백만 년의 해부학적 전사(前史)를 가진 것처럼, 정신세계도 그러하다.

 

616 사람들은 그 진술이 진정으로 개별적인 주체로부터 나왔고 오로지 개인적인 동기에서 야기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보편적으로 나타났고 집단적으로 존재하는 역동적 유형(類型)' 에서 솟아나온 것인지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실수를 범하고 있다.

 

625 사람은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비밀로 가득 찬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는 마음 속으로 예상되는 일뿐만 아니라 그 외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636 내 인생에서 모든 외적인 것은 우연한 것이고, 오직 내적인 것만 실체성이 있으며 결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숙명적이네.

 

 

v       내가 저자라면

 

가.   전체적인 뼈대

   이 책의 원제는 Memories, Dreams, Reflections』로, 그의 제자이며 비서인 A. 야페가 1957년부터 5년 동안 융의 구술을 적은 내용인데, 융의 요청에 따라 그의 사후인 1962년 출판되었다. 대부분의 내용을 생전의 융이 직접 검토했던 것이라고 하니, 융의 저서라 보아도 무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체적인 책의 구성은, 시간적 순서에서는 타 자서전들과 동일하게 유년시절 학창시절 대학시절 등으로 이어져 후반부에서 만년의 사상에 대한 설명과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내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라고 언급한 융 자신의 말처럼, 대부분의 내용이 외적인 사건 보다는 내적인 사건 위주로 서술되어 있어 한편으로는 융 개인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가 오히려 용이한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이정표 같은 것이 잘 드러나지 않아 그의 일생이 명료하게 표현되었다고 보기에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런 면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세계를, 외형적인 인격보다는 이면에 존재하는 그림자를, 현실의 영역보다는 상상의 영역에 더욱 관심을 보였던 그의 삶에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생애에 대한 서술은 그가 자란 환경과 타고난 성격으로 인해 다소 어둠이 드리워졌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거쳐, 자신의 철학을 확립하고 자기의 소명을 찾아 독립하고 유년시절부터의 상상과 꿈을 망각하지 않고 자기만의 관심사에 천착하여 끝없는 지적 여행을 했던 융의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자서전에서 흔히 등장하는 객관적인 사건들이 숨어있어 융의 생애에 대한 명료한 인상을 주지 못하는 면도 있으나, 일생을 사로 잡은 꿈 이야기로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자기의 궁금증을 푸는 과정에서 분석심리학의 기원을 이룬 융의 학문적 자서전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해본다면 좀 더 이해가 쉽고 낯 설음도 적어질 것으로 보인다.

 

나.   감동적인 부분

   아버지도 한 때는, 대학 신입생시절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세계는 나에게 그러하듯 아버지에게도 활짝 열려 있었다. 무한한 지식의 보물이 내 앞에서처럼 아버지 앞에도 놓여 있었다. 그러한 아버지를 온통 기죽게 하고 우둔하게 만들고 쓰라리게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p. 184)

   아버지나 부모님의 젊은 시절을 상상하는 것은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그 분들에게도 젊음이 있었고 뜨거운 시간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언제부터인지 기죽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세상이 참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이와 같은 기죽은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불가항력적인가? 아니면, 자연스런 인생의 단계인가? 요즘은 비극보다는 희극이 좋다. 뭔가 아련하면서도, 나 자신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분발하자는 생각을 하게 했던 부분이다.

 

   정신에 관해서는 진부한 견해가 남아 있다. 정신은 원형적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백지상태(tabula rasa)이고, 출생시에 새로 생겨나며, 정신이란 단지 사람들이 스스로 상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그런 견해 말이다.

   의식은 계통발생학적으로나 개체발생학적으로 이차적인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사람들이 언젠가 기어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신체가 수백만 년의 해부학적 전사(前史)를 가진 것처럼, 정신세계도 그러하다. (p. 609)

   ⇒ 초기 경험주의에서는 로크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은 태어날 때 백지상태라고 보았다. 여기에 칸트는 그의 인식론에서 합리론으로 경험주의를 좀더 보완하여 선천적인 틀[범주]가 인간에게 존재함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런 범주는 어떤 대상에 대한 인간 고유의 인식 틀[형식]을 의미할 뿐이지 대상 자체의 내용에 대한 논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심리학 분야에서 융은, 프로이트가 유아시절 무의식의 형성과 같은 경험적인 무의식을 주장한 것에 반해, ‘집단적 무의식이 개인의 탄생 이전부터 공통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정말 인간은 이전의 역사를 무의식에 캡슐화된 채로 갖고 태어난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아마 융은 이것을 발견하고 증명하고 활용하려는데 그의 일생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다.   보완했으면 하는 것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세 살 때의 꿈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것의 계속적인 진행과정을 그려나갔다는 면에서 매우 적절한 구성과 서술로 보여진다. 단지, 독자에게 혼란을 주는 것은, 프로이트와 결별 후 독자적인 분야를 개척해 나가는 부분에서 자주 경험과 이성을 강조하거나 지지하는 표현이 나오면서도, 융의 미지의 것에 대한 폭 넓은 관심영역 때문이었겠지만, 사후세계와 연금술 등에 대한 연구에 대한 서술에서는 이런 분야의 전 후 맥락에 대해 조금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보충하였다면 좋았을 것 같다.

   그리고, 구성적인 면에서 보면, 책 말미에 찾아보기[색인]개념 및 용어를 추가한 점은 좋은데, 저자 연보도 추가하여 저자의 생애에 대한 이해도를 좀 더 높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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