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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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4]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1. “지금 어디야?”
“응, 나무라디오에서 융이랑 놀고 있어.”
“융? 소녀시대 융?”
“아니... 칼 구스타프 융. 그 있잖아. 심리학자”
“재밌어?”
“재미는 무슨, 별로 재미는 없어, 솔직히... ”
솔직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소 무서운 이야기고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무거운 이야기다. 만약 그가 겪은 경험들에 대한 개인적 공감이 없는 사람들에게, 융의 자서전은 아니 그의 삶은 어떻게 비쳐지고 이해될까.
숲 속에 사는 현자, 고양이 발톱에 개구리 혓바닥을 넣고 뭔가를 끓여대는 마녀, 신들린 무당, 출정을 앞둔 전사들의 축원을 비는 인디언 점쟁이, 안수기도를 하는 목사. 연극배우. 정신과의사. 시공간을 달리하면서 그들이 종사하는 직업은 달랐지만, 같은 피 냄새가 난다. 융이 다시 태어났다면,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저런 비슷한 일들 중 하나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정신병동에 환자로 장기 입원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복잡한 신경회로를 가진 시한폭탄 같다. 85년의 시간동안 뜨겁게 회로가 가열되어 있었을 텐데, 터지지 않고, 미치거나 자살하지도 않고 살아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겠다.
자유롭고 싶었을 것이다. 미치도록 자유롭고 싶었을 것이다. 평생을 자기 세계 속에 갇혀서 살아야만 했던 그는 수인(囚人)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업보, 잠시도 가만 놔두지 않는 소리들. 잠을 자도 꿈을 꿔야만 하는 팔자. 그리고 그것이 버젓이 눈앞의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머리를 깍고 수도승이 되어버리고도 싶었을 테다. 왜 도망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의 자서전은 신앙고백 같다. 그의 용기 덕분에 나는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과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위안 삼게 해주었다. 그는 친구를 얻었다. 백년이 지난 뒤에.
다른 사람들이 생각이 궁금하다.
2. 가슴을 무찔러 드는 글 그리고 나를 위한 변명
[옮긴이 서문]
융의 나이 82세가 된 1957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줄기차게 대담한 결과 엮어진 자서전이다. ...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p8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p11)
자기실현(Selfstverwirklichung)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가리킨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는 ‘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들의 상징들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 p9
그리고 무엇보다 신(神)의 존재를 심리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한 저서라고 할 만하다. p9
그는 신을 가리켜 ‘위대한 위험’이라고 규정했다. p10
융이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신을 압니다.”
[프롤로그] 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내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영원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이는가는 오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은 말해준다. 과학은 평균 개념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개념들은 각 개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다루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다. p11
그 이야기들이 사실 그대로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나의 옛이야기’, ‘나의’ 진실인가 하는 것이다. p12
인간은 자신을 무엇과도 비교해 볼 수 없다.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오직 신화적인 존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겠는가? p12
언제나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p13
엄밀히 말해 나의 생애에서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은 영원한 불멸의 세계가 무상한 세계로 침투했던 사건들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적 체험들을 주로 이야기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나의 꿈과 환상들이 포함된다. p14
지난 40년, 가까이 20년 전 대학의 진로가 나에게 맞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선택과 경험은 좀 더 일찍 선택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뭐 그리 나쁜 일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 힘든 과정을 통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절하게 찾게 되었으며, 또한 자칫 내가 기피했을지도 모르는 기술(살아가는 요령)과 페르소나를 훈련하는데 걸린 시간으로 이해한다. 그러고 나니 한편으로 매우 홀가분해진다.
또, 한 가지 다행스럽고 고마운 것은 나의 기질이다. 적응이 빨랐다. 선택에 필요한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일단 선택하고 난 뒤에는 온 열정과 혼신을 다해 ‘자기화’하려고 노력해 온 나 자신의 기질에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그렇게 훈련되고 성장했으며, 성숙되고 만들어져 왔다.
나는 나 자신을 내적 사건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내 생애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 ‘자서전’은 그러한 내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p15
일생을 사로잡은 꿈(유년시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또 다른 기억이 하나 있다. ...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우유냄새를 의식하는 순간이었다. p24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른다. ... “어부들이 시체 한 구를 라인폭포에서 건져냈어요...” 덮개 없는 배수구가 있었는데, 거기서 피와 물이 졸졸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거기에 온통 관심이 쏠리고 말았다. 그 무렵 나는 아직 네 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그리고 또 다른 영상이 떠오른다. p25
그후로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항상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여성’이라는 말도 오랫동안 생래적인 불신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뜻하기도 했다. ... 나중에는 인생 초기의 이러한 인상들이 수정되었다. 나는 친구를 믿었다가 그들로 인해 실망하기도 했지만, 여성들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p26
또한 그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신비한 것들과 내게는 알려지지 낳은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소녀의 유형이 나중에 내 아니마(Anima)의 한 측면이 되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생소한 느낌과 그런데도 그녀를 처음부터 알아온 것 같은 감정은 나에게 훗날 여성적인 것의 본질을 나타내는 여성상의 특징이 되었다. p27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초의 꿈을 꾸었다. p31
오랜 후에야 비로소 그 기이한 형상이 일종의 남근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33
그 지하의 신이 자꾸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주어진 무시무시한 계시였다. p35
나에게 ‘주 예수’는 어쩐지 일종의 죽음의 신처럼 여겨졌는데, ... 늘 찬양을 받는 그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 나는 남몰래 의심하게 되었다. p35
사람들이 요구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긍정적인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나의 은밀한 불신을 좀체 극복할 수 없을 듯싶었다. p35
그 구절은 성만찬 상징 속에 있는 식인의 기본 동기에 관해 언급하고 있었다. p36
‘검은 남자’ ‘사람을 잡아먹는 것’ ‘우연’ ‘회고적인 해석’
유년시절의 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비밀들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다. p37
불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어머니가 나의 ‘계시’를 듣는다면 깜짝 놀라며 거부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상처를 자초하고 싶지는 않았다. p42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혼자서 놀았다. p42
30년이 지난 후에 나는 다시 그 비탈에 올라서보았다. 이미 결혼을 했으며..아이들과 집도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었다. ... 그것은 마치 다른 세계와 다른 시간으로부터 온 기별처럼 낯설게 여겨졌다. 그것은 유혹적이면서 동시에 충격적이었다. 내가 심취했던 유년시절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었으며, 나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계속 굴러가며 점점 더 멀어져가는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만 것이었다. p47
이러한 행위의 의미 또는 그와 같은 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의 손도 미칠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새로운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충분했다. ... 왜냐하면 나의 자신감이 그 비밀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p49
이러한 회상을 함으로써, 전통을 거치지 않고도 개인의 마음속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영혼의 고태적 구성요소가 있다는 확신이 처음으로 나에게 생겼다. p51
키스타에는 생명력을 저장해두는 물품, 즉 길쭉하고 검은 돌이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이런 연관성은 훨씬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그 일이 나중에 아프리카 원주민에게서 발견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사람들은 우선 행동을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 대해 숙고해보는 것이다.
두렵다. 내 의식의 건너편, 무의식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을 만나게 될 것인가. 내가 그것들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판도라의 상자.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학창시절)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p53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다
나는 놀라움과 은밀하고 지독한 부러움을 안은 채 그들이 방학 동안에 알프스, 그러니까 취리히 근처 저 ‘불타오르는 눈덮인 산들’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바다에 갔다 온 이야기도 들었는데, 나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p55
그 기억들은 지하에서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뿌리에서 각각 뻗어나간 작은 가지들과 같으며, 무의식의 발달과정에 있는 정류장들과 같다.
‘주 예수’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차츰 불가능해지기는 했지만, 열한 살 때부터 신의 관념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다. p59
그 수치스러운 사건 전체를 조정해온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나를 밀쳐 넘어뜨린 친구에게 나는 한 번도 심하게 화를 내지 않은 것이었다. ... 나는 나 자신에게 분노했고 동시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에게 옳지 않은 일을 했으며 나 자신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p66-67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p67
한순간 갑자기,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의식과 함께,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막 빠져 나온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안개의 벽 같은 것이 나의 등 뒤에 있었고, 그 벽 너머에는 아직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p68
‘그래, 그러면 너는 누구냐? 너는 마치 자기가 대단하다고 내세우는 악동처럼 반응하고 있구나! 게다가 너는 그 사람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는 열두 살에 불과한 학생이지만, 그는 한 집안의 가장인 데다 집 두 채와 멋진 말도 가지고 있는 세력가요 부자이지 않은가.’
그때 몹시 난처하게도 나 자신이 실제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수학도 잘 모르고 자신감이 없는 학생이었으나, 다른 하나는 위대한 권위를 지닌 중요한 인물로 경시해서는 안 될 사람이며 그 공장주보다 더 막강하고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p70
(비록 권위를 내세우는 목소리와 분노로 통화를 하였지만, 나는 그가 무언가를 몹시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막상 만나 본 그는 생각보다 불쌍한 사람이었다. 목소리는 떨렸고, 손은 잠시도 가만두지 못하고서... 떨고 있었다. 그를 만나는 일이 전혀 무섭거나 심난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성심을 다해야 할 이유가 있을 뿐이다. 그 사람, 안쓰러워 보였다. - W아파트 관리소장을 만나던 날.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저것이다! 저 마차는 분명히 ‘나의’시대에서 온 것이다. 그 마차는 마치 내가 직접 타고 다녔던 것과 똑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다시 알아보는 것 같았다! ... ” “그래 저거였어! 그래, 저거였어!” p71
탄성을 지르고야 말았다. 카페에서. 맙소사, 나를 들킨 것 같았다.
가끔씩 이런 영감을 강하게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시험지를 받아 보기도 전에 시험결과가 어떨 거라는 느낌. 프로젝트 공모가 떴을 때, 변경연 연구원 모집 공고를 봤을 때, 아! 저건 나를 위한 거야. 지금 나한테 보내는 메시지라는 느낌을 받는다. 실로 남들에게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마침내 나는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어떻든 지금은 작은 학생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의 처벌을 받아 마땅하고 그의 나이에 맞게 예절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사실들이었다. p72
내 안에 얼마쯤 모세의 피가 흐르고, 무당이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왜 설명을 해야 하나. 글서 주변 가까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데... 내가 어찌해야 할 도리가 없다. 안타까울 뿐이다. 최대한 성심을 다하고 그들에게 맞추려고 하지만, 간혹 내가 너무 아프고 힘들다.
생각에 구멍이 뚫리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생각을 하지 말자. 무언가 무서운 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 결코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왜 안 되는가? 왜냐하면 너는 가장 무서운 죄를 범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 가장 무서운 지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며 그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p74
하지만 어딘가 분명히 이런 비밀의 열쇠를 쥔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나는 언젠가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들과 다시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그들도 나와 같은 별에서 왔을까. 나처럼 지구에서 살기 힘들어 하는 외계인이라고 믿고 있을까?
하느님이 원치 않는 일을 행함으로써 최초의 죄를 범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느님이 그들 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은 뱀이라는 존재로 인해 분명해졌다. 아담과 이브를 말고 꾀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그들보다 먼저 뱀을 창조했다. p77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였다.
이와 같은 생각이 나를 지독한 괴로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하느님 자신이 나를 이런 상황에 처하게 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p78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하지 말라는 것인가? 나는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도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아내야만 한다. p78
하느님의 의지가 무엇이며 하느님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전에는 복종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하느님이야말로 이런 절망적인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p79
나는 결국 굴복을 강요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문제는 내 영혼의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이었다. p79
하느님은 종교적 전통으로는 내가 거부하고 싶은 것도 나에게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은총을 가져다준 것은 복종이었다. 그 체험 이후 나는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p81
오늘날에도 나는 외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p84
자연과 사원
그러한 세계 옆에는 또 다른 영역이 있었다. 그 영역은 사원과 같아서 그 속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나 변화되었다. p90
그 무렵에는 물론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압도적인 예감과 강렬한 느낌은 받았다. 내가 혼자 있는 순간이면 곧바로 이러한 상태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나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이며 참다운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p90
그들은 별 생각없이 온갖 모순, 예를 들면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여 당연히 인간의 역사를 미리 내다본다는 식의 모순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느님은 인간들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렇게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지 말도록 금하고, 심지어 지옥불길의 영원한 저주로 벌을 주기까지 한다. p92
실로 부당하기 짝이 없는 말도 안 되는 약속이다. 이런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다니.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누가 이렇게 부당한 계약을 맺었단 말인가. 나는 알고 있다. 최소한 나는 아니다. 나는 그렇게 부당한 계약에 동의할 수 없으며, 설사 나도 모르는 과거의 업보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면, 나는 그 계약을 다시 맺어야한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의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만일 사람들이 하느님의 의지를 안다면, 이 중심과제를 정말 하느님을 몹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경외심을 가지고 다루었을 것이다. p93
아무튼 <신약성서>에는 그와 같은 것이 없었다. <구약성서> 특히 <욥기>가 이런 점에서 깨우침을 줄 수도 있었으나, ... 하느님에 대하 두려움은 물론 언급되었지만,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유대적’이라 여겨졌고, 오래전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기독교 복음에 자리를 내주었다. p94
두 인격의 어머니
나는 자문해보았다. “도대체 누가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인가? ...”
무당과 연극배우는 결국 같은 직업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이해된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 길을 선택하게 한 것일까?
그 무렵 나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하며 내 운명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p95
처음부터 나는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내 생애에서 그것을 실현해야만 될 것처럼 여겨졌다. 나로서는 결코 증명할 수 없었던 어떤 내적 확신이 있었다. ... 나는 확신을 붙든 적이 없었으나 확신이 나를 붙들어주어 그와 반대되는 모든 신념에 종종 대항하게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라는 것을 내가 행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확신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p96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결정적이 일에서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되었다. 내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곳’에 있을 때면 언제나 나는 시간을 초월해 있었다. 나는 수백 년의 세월 속에 있었으며, 그때 답을 준 자는 이미 항상 있었고 지금도 항상 있는 존재였다. 그 ‘다른 인물’과의 대화는 나의 가장 심오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피흘리는 전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극도의 황홀경이었다. p96
물론 나는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누구와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들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p96
나는 혼자서 놀았고 혼자 돌아다니며 공상하면서 나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품고 있었다. p97
그녀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인습적이고 전통적인 견해를 가졌으나, 그녀의 무의식적인 인격이 갑자기 돌출하곤 했다. 그 인격은 예상 외로 강력했으며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어둡고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p97
어머니는 할머니(당신에게는 시어머니)의 신기(神氣)를 매우 못마땅해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두려워하셨다. 우리 남매들을 일찍부터 성당에 데리고 나간 것도 그런 모습이 피를 타고 대물림되는 것을 두려워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당신의 신기(神氣)를 부정하지는 못하셨다. 어머니의 꿈은 신기하게도 정확했다. 집안 어른들에게나 가족들에게, 심지어는 이미 고인이 된 이들의 꿈도 자주 꾸곤 하신다. 그리고 그런 꿈들에 대한 어머니 나름대로의 해석도 있다. 정작 두렵고 무서운 것은 꿈을 통한 어머니의 예감이 거의 틀리지 않고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때 삼위일체에 관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관심을 끄는 뭔가가 있었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는 문제였는데, 그 모순이 내 마음을 끌었다. p104
성찬식은 단지 하나의 추모식사에 불과했다. ... 즉 1860년 전에 죽은 ‘주 예수’를 추도하는 축제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와 같은 다소 시사적인 말들이 있었다. ... 나는 이런 방식으로 예수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로서는 너무나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분명히 그 배후에 뭔가 커다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p105
오, 맙소사. 내가 왜 성찬식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거기에 숨은 비밀이 있을 거라는 수수께끼 같은 오래된 의문이 있었다. 융도 그랬다. 미치겠다. 갑자기 도망치고 싶어졌다. 어딘가로 숨어야 할 것 같았다. 융의 그림자가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계속 읽어야 하나... 계속 읽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리켜 ‘기독교’라고 불렀으나, 내가 하느님을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 모든 것은 하느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 그것은 종교가 아니었고 거기에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는 내가 더 이상 가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나에게는 그곳이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있는 곳이었다. p108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은 인간적이 아니다. 그는 인간적인 것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위대한 존재다. 하느님은 자비로우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존재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위대한 위험이다. ... 예수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p109
종교를 전체와의 유일하고 의미있는 관계로 여겼던 나의 종교관은 붕괴되고 말았다. .. 나는 더 이상 일반적인 신앙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누구하고도 나누어가질 수 없는 ‘나의 비밀’과 관련을 맺을 뿐이었다. 그것은 역겹기도 하고, 아주 나쁘게 말하면 천박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그것은 일종의 악마적인 웃음거리였다. p109
이것과 관련하여 악마를 고소해봤자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악마 역시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실재였으며 파괴하는 불이요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이었다. ... 나는 매우 진지하게 성찬식을 준비하고 은총과 계시를 체험하기를 기대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느님은 그 자리에 없었다. 원, 세상에! p110
그렇지, 그래야 맞지!!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바로 어제 새벽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기대했고, 그렇게 실망했다. 그리고 오늘 융으로부터 고백을 듣고 있는 것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누구,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나도 그랬다고 말해 줄 사람 없나. 이 믿기지 않는 사실 앞에서 나는 주체할 수 없다. 어찌해야 하나....
나는 교회로부터 굴러 떨어졌다. 그것이 나를 슬픔으로 가득 차게 했고,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줄곧 마음을 어둡게 했다. p110
악의 기원
1869년에 간행된 비더만(Biedermann)의 <기독교 교리>
나는 그로부터 종교란 ‘인간이 하느님과 자립적인 관계를 맺는 영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견해가 나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종교란 하느님이 나와 함께 이루는 그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것은 하느님 편에서의 행위로 나는 다만 거기에 맡겨져 있을 뿐이었다. 하느님은 나보다 강하기 때문이었다. ...
나는 비더만의 <하느님의 본질>이라는 장에서, 하느님은 ‘인간 자아와 유사하게 상상될 수 있는 인격’으로서, 그리고 또한 ‘세계를 포괄하면서 세계를 전적으로 초월하는 고유의 자아’로서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112
나는 나 자신의 자아와 유사하게 하느님을 상상하는 것에 대해 자못 심하게 반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직접적인 신성모독은 아닐지라도 지나친 오만이라고 여겨졌다. p112
나는 이 구절이 내가 몰두하고 있던 하느님의 어두운 측면, 즉 하느님의 복수심과 위험한 격노, 하느님의 전능함으로 창조된 피조물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행위 등에 관해 뭔가 말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피조물을 시험대 위에 세웠다. 자, 그럼 이런 하느님의 성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와 같이 행동하는 인간적인 인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단식을 다녀오면서, 성경책은 무겁고 짐만 되었을 뿐이었다. 때로 어떤 구절은 강한 거부감만 키웠을 뿐이었다. 나를 이끈 것은 무엇이었는가? 결과적으로 해석해서 뜻하신 바를 해석하고, 또 그렇게 짜맞춰갈 것인가. 그럼, 정말이지 나는 무엇인가. 그걸 선택하고 행동하는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우리 진실해지자. 용기를 내어 말해보자. 더 이상 겸손한 척 하지 말고,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말고,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묻자.
악마 역시 하느님의 피조물이었다. 나는 악마에 관해 읽어보아야만 했다. 악마는 아주 중요한 존재로 여겨졌다. 나는 다시 교리책을 열어 고통과 불완전함과 악의 근거에 대한 화급한 물음의 답을 찾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p116
그러나 어딘가에서, 어떤 시간에, 나처럼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자신과 남들을 속이려 하지 않으며,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의 현실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었다. p116
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여기에 악마를 진지하게 다루고,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방해하는 힘을 가진 적대자와 피로 계약을 맺기까지 한 자가 있구나.’ p117
아버지의 서재에는 철학자의 책이 없었다. 그들은 따지며 생각한다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다. p118
신의 존재는 증명될 수 없으며 신이라는 관념의 선재성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 그렇지 않을지라도 잠재적으로는 인간 안에 본래부터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우리의 “정신적 능력은 그토록 숭고한 관념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어느 일정한 수준까지는 이미 발달되어 잇음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p119
그가 신의 존재에 대해 충분히 확신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싶어 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인가? 왜 그는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내며’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일정한 수준으로 발달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정말로 생각하는 것처럼 행하는 것인가? p119
하느님의 존재는 우리의 증명 여하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는가? ... 그것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상상하고 생각해서 고안해내고, 그러고 나서 믿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 어떻게 하느님이 나에게는 자명한 것이 되었을까? ... 이 철학자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은 일종이 관념이며 자기들이 만들어낼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임의적인 가설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 나는 철학자들에게 틀림없이 뭔가 잘못된 것이 있을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p121
악마가 본래부터 악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명백한 모순, 즉 이원론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마도 원래는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나 그의 오만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다고 가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주장은 그것이 설명하려고 하는 악이 이미 자만심이라는 악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 지적을 읽고 대단히 흡족했다. 그밖에 악의 기원은 ‘설명되지도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것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 그 말은 그도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숙고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p122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유감스럽게도 이 작문은 거짓이다. 너는 이것을 어디서 베꼈느냐? 진실을 자백하라!”
“나는 그것을 베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좋은 작문을 쓰려고 특별히 노력을 기울였단 말입니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너는 이런 작문을 지금까지 한 번도 쓴 적이 없어. 아무도 네 말을 믿지 않을 거야. 그래, 어디서 베꼈지?” p126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내가 자문을 베끼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
내가 무력하여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운명에 던져졌다는 결론으로 언제나 다시 돌아올 뿐이었다. 그 운명은 나에게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라는 낙인을 찍어주었다. p127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질서있는 우주 속에, 신의 세계 안에, 온갖 것이 태어나고 온갖 것이 이미 죽어 있는 영원 속에 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p130
만족스럽게도 나는 나의 많은 영감이 그 사상들과 역사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p132
쇼펜하우어, 그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고통, 그리고 혼란과 고난과 악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 비로소 세계가 어쩐지 가장 좋은 것만을 기초로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철학자가 나왔다. p133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신은 어떤 신성모독에 의해서도 기분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인간이 밝고 긍정적인 면 뿐만 아니라 어둠과 불경스러움도 갖도록 신성모독을 요구하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p134
<순수이성 비판>은 몹시 골머리를 앓으며 읽었다. ... 보람이 있었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체계에서 근본적인 결함을 발견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순수한 본체, 즉 ‘사물 그 자체’를 인격화하고 그 성질을 규정하여 형이상학적인 진술을 하는 심각한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p135
조심스럽게 물어서 조사해본 결과, 내가 사람들이 알 리가 없는 것들에 관해 자주 발언하거나 넌지시 의견을 말하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137
성경을 열심히 읽기 보다는 자기 식으로 해석하기를 좋아하는 내 버릇 때문에 나는 가끔씩 술자리를 썰렁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그들은 나의 가볍고 유쾌하면서도 많이 아프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뼈가 있는, 제법 재치있는 말장난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늘상 그렇게 했다. 처음만난 사람들도 그렇게 두어 번을 만나고 나면, 내가 말을 꺼내면 귀가 쏠려든다. 그들은 듣고 싶어라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었다. 그것은 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만 있어야 했다.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혼자가 되면 나는 그것을 꺼내놓고 논다. 어쩌면 나는 이중인격자였고, 이단자였는지도 모른다.
‘신의 세계’라는 표현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초인간적’인 것들, 눈부신 빛, 심연의 어두움, 시공의 무한성이 지닌 차가운 무감정, 비합리적인 우연세계의 으스스한 괴기성 등이 ‘신의 세계’에 속했다. ‘신’은 나의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p138
최인호는 마흔 두 살에 하늘과 땅이 날카로운 키스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고서, 천주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그 느낌이 무엇인지 혹시 지금 나의 느낌들과 비슷한 것이었는지. 나는 또 다시 우리별에서 온 외계인들을 아니 동족들을 찾아 나서고 있다.
내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들어 준 사람은 지금까지 단 두 사람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머지 삶을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
자연과학 vs 신의 세계
하느님 자신이 어떻게 한 인간을 영적인 세계질서로부터 떼어내 신성모독을 하도록 저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p142
그 밤중에 내가 불려간 곳은 김oo(전북대 철학과) 교수님이 낀 술자리였다.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어서 조용히 있으려고 했지만, 화제가 UFO로 번져오더니, 외계인이 있네, 없네하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내 의견을 물었다. (잠시 망설였다.)
“저는 UFO의 존재에 대한 논쟁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면 그건 이미 있으니까요. 그건 마치 지구인에게 지구가 있느냐고 묻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그리고선 리차드 바크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갈매기 조나단을 통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이지만 전혀 별개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지구에서의 삶은 조나단의 어머니를 통해서 보여지는 조나단, 즉 또라이 갈매기, 머저리 갈매기,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미친 갈매기로 봅니다. 하지만 참말로 다행스러운 것은 리차드 바크 같은 천재의 도움으로 우리는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 메시지는 단 돈 몇 천원만 투자하면, 가까운 서점에만 가도 수신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송신자의 의지에 달렸지요. 채널만 맞추면 되는 간단한 문제인데....
썰렁했다. (또 맥없는 이야기를 했다.)
교회공동체라는 말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p144
그렇지만 교회라도 열심히 나가고, 성경과 기도문을 반복적으로 외우는 일이 가치 있고, 의미있는 사람들도 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니다. 교회에 충실하는 것과 하느님께 충실하는 문제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여행과 환상, 매력적인 모험의 세계로!
그러나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그 음료는 술이므로......
그 곳에는 더 이상 안과 밖이 따로 없고 나와 타인,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 조심스러움과 소심함도 없었다. 땅과 하늘, 세계와 그 안에서 ‘기고 날고’, 돌고, 올라가고, 떨어지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다. 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분 좋게 의기양양하게 술에 취했다. ... 그것은 아름다움과 감각에 대한 하나의 발견과 예감으로 남았다. 나는 그것들을 단지 나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못 쓰게 만들어왔던 것이다. p148
누가 언제부터 마약을 금지했는지 궁금해졌다. 특히, 대마초라 불리는 마리화나.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것은 범죄가 아니었다. 마리화나는 담배보다도 더 중독성이 적다고들 한다. 그런데 왜 담배는 합법이고, 대마초는 불법인지. 조용필, 전인권... 참 멋진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았을까. 혹시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한 것은 아닐까? 신이 살고 있는... 나도 경험해 볼 수 있을까?
아름다운 시간들(대학시절)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나는 괴테가 그 시대에 제공한 해답이 바로 파우스트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러한 통찰은 나에게 위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적 안정감과 인류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확신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다. 나는 더 이상 고립된 존재가 아니며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나 이를테면 잔인한 자연의 희롱물도 아니었다. 나의 대부요 보증인은 위대한 괴테 바로 그 자신이었다.
p169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느낌들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느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하는 것은 결국 본인들의 몫이다. 또한 이런 느낌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받는 사람의 운명이 결국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주변에서의 경고도 만만치 않다. 누구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결국 미쳤다더라. 참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안됐다더라. 등등 이러한 느낌을 접어버리지 않고서 또는 못하고서 그 느낌들을 쫒는 일은 분명 매우 위험하다.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필연적으로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 공모자가 필요하다. 꼭 정해진 시간에 누군가가 정해놓은 것처럼 나타난다. 나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제 곧 그가 무대 위로 출연할 시간이다. 그는 아무런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나에게 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누가 그를 보냈는지 조차도. 누가 융에게 괴테를 보냈는지. 누가 융으로 하여금 자신의 몸속에 괴테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믿게 했는지.
그 당시 나의 세계관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나는 나의 길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외부로, 제한된 세계 속으로, 삼차원의 어둠속으로 이끌려가고 있음을 인식했다. p171
어디서 이런 꿈이 오는 것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꿈들은 당연히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보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수많은 인식비판을 익혔기 때문에 의혹이 거세게 일었다. p171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개성 때문에 부모의 정신세계와는 제약된 범위 안에서만 일치할 뿐이다. 그런데 가족정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나름대로 시대정신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정신 그 자체는 대개 무의식적이다. p173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p175
서양 종교는 분명히 말해 이러한 내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2천 년 전부터 내적 인간을 의식의 표층으로 끌어올려 그 인격의 특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진지하게 노력해왔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p176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해 바칠 내 몸이니라.”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라. 이는 새롭고 영원할 계약을 맺는 나의 피이니, 너희는 이를 통하여 나를 기념하라.”
현재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찬식을 진행할 때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성찬식에 담긴 몇 가지 은유와 상징에 온통 신경을 집중하곤 했다. 미사 시간에 졸다가도, 이 성찬식 때만 되면, 매번 같은 말이지만, 그 느낌을 잘 기억해두려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듣곤 했다. 새롭다... 영원하다... 계약?
예수 이전에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 몇 더 있었다. 아브라함, 노아 그리고 모세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과는 자손과 민족의 번영을, 노아와는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그리고 모세에게는 십계명과 언약의 궤, 이스라엘 민족의 번영을 약속하지만, 옵션이 달린 노예계약이지 않았나 싶다. 자신만을 섬기는 조건이다. (대표적으로 유대주의의 배타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가끔씩 연예인들이 소속사와의 계약조건을 보면서 노예계약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 현실적인 파급과 강제력의 영향은 감히 비교가 안 된다.) 이러한 부당한 계약을 새롭게 맺은 것이 예수다. 그 자신 스스로를 번제로 삼아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대학시절 읽었던 <오리진>에서 식인풍습에 관한 내용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식인풍습은 매우 야만적인 행위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본질에서는 그렇지 않다. 더러 전쟁포로에 대한 식인의식은 배고파서 잡아먹는 그런 것보다는 스스로 겁을 내쫒고 용기로 무장하기 위한 의식행위라는 측면이 강하며, 또 하나의 경우, 조상들의 시신을 내 몸속에 모시기 위한 장례의식의 하나로 식인풍습이 있다고 기억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 식인 풍습의 형식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다. 왜? 무엇 때문에? 최소한 지금까지의 나의 결론은 그 행위에 담긴 가장 커다란 메시지는 “신이 더 이상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교리를 열심히 외우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 아니라는 융의 의견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다. 불교의 명상과 기독교의 기도가 본질에서 자신의 자아... 하느님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길이라는 점에 다르지 않다는 말에 어찌 공감하지 않겠는가. 교리의 차이를 내세워,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불쌍할 따름이다. 더 나아가 종교와 문명을 갈등의 동기로 전쟁의 이유로, 살육을 정당화하는 짓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궁핍한 시절
한번은 아버지가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신앙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충격을 받고 화까지 치밀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교회와 그 신학적 사고방식에 붙들려 있는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아버지가 하느님에게 직접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길을 막아버리고는 의리없이 아버지를 버리고 말았다. p180
유물론 역시 신학과 마찬가지로 믿어야만 하는 것 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 다 인식론적 비판이나 경험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p181
그의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우리 두 사람은 어두운 그림자가 더욱 길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자주 만났다. p190
나도 이런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나는 그리스도를 전면에 내세워 그를 하느님과 인간의 드라마에서 결정적인 유일한 인물로 만드는 견해에 대해 동조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견해는 그리스도가 죽은 후에는 그를 낳았던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대신할 것이라는 그리스도 자신의 견해와도 전적으로 모순되었다. p192
아무튼 어느 시대나 세계 어느 곳이나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보고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디서나 똑같은 종교적인 전제들이 있었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도 없을 것이었다. p193
그런 이유로 니체는 과장된 문체, 도가 지나친 은유, 환희의 송가를 떠벌리게 된 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연관성 없는 배울 만한 지식들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듣게 하려는 시도이긴 했지만 허사였다. 그리고 그는 줄 타는 광대로서 자기 자신의 한도를 넘어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p200
나도 융처럼 되는 것일까. 나도 융을 닮은 것일까. 솔직히 두렵다.
그러나 융의 말을 잘 들어보자. 그는 모든 이에게 잠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유별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맞다. 이 이상한 무당의 자서전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환자들
나는 정신병 환자의 고통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그들의 내적 체험의 의미있는 현상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p247
꿈의 분석
나의 분석에서는 이론적 전제들은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체계적인 것을 멀리하고 있다. 나에게는 각 개인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환자에게 각각 다른 언어가 필요한 법이다. p249
1909년에 나는 이미 잠재적 정신병의 상징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신화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p249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 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p250
정신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p250
꿈은 의식적인 태도에 대한 보상 바로 그것이다. p253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체면(Persona)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 p253
글을 쓴다는 것은 일기를 쓰는 것과 다르다. 토해내듯 뱉어내는 것과는 다르다. 막 토해낸 배설물(토물)로 자기 속이야 좀 편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들이밀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남세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일기와는 달리 세상에 내어 놓는 글은 걸러지고, 다듬어져야 한다. 아니, 그러려면 먼저 내가 다듬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이들을 치유하는 글을 쓰겠다면, 내가 먼저 아파야 하고, 내가 먼저 치유되어야 한다. 그렇게 얻어진 힘이 담긴 글만이 감동을 줄 수 있고,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 마력 같은 힘,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아파야 한다. 온전히 내가 아파했던 것만이 내 입을 통해, 내 가슴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내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 영혼에 부끄럽지 않을 테다.
천박한 글쟁이, 싼 재주를 팔아 밥 빌어먹는 장사치가 된다는 것이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일이 되게 해야 한다. 쉽게 영혼을 거래하는 싸구려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 남의 손가락질을 받기 전에 내 양심이 먼저 알고, 내 후각이 썩어가는 냄새를 먼저 맡게 될 것이다.
고해신부 역할을 해줄 아버지 같은 사람이나 어머니 같은 사람을 가지도록 하시오! 여성들은 그런 일에 대단한 재능이 있다. 여성들은 대개 뛰어난 직관과 정확한 비판력을 지니고 있으며, 남자의 비밀스러운 의향을 간파할 줄 알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의 아니마(Anima)가 꾸미는 음모까지 꿰뚫어볼 줄도 안다. 여자들은 남자가 보지 못하는 측면을 본다. p254
그것은 당신이 우선 당신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 자신이 치료의 도구입니다. 당신이 올바르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가 올바르게 되겠습니까? 당신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를 확신시킬 수 있겠습니까? 당신 자신이 진정한 재료가 되어야만 합니다. p254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환자 편에서 전이가 일어난다든지 의사와 환자 간에 다소 무의식적인 동일시가 일어날 때에는 때때로 심령심리학적 성질을 지닌 현상이 야기될 수도 있다. p259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부인들이 질투심이 많아 남편의 교우관계를 깨뜨리는 일이 흔히 일어나는 법이다. p259
이러한 경험에서 중요한 점은 원형적인 상황(이 사례에서는 죽음이라는 상황이지만)과 관련하여 종종 관찰되는 전형적인 동시성 현상이다.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이 사례에서는 나의 무의식이 내 환자의 상태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이미 그날 저녁 내내 보통 때의 기분하고는 유난히 달리, 이상하게도 마음이 어수선하고 신경이 예민했던 것이다. p261
나는 사람들이 인생문제들에 대해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해답으로 얼버무릴 때 신경증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사람들은 지위, 결혼, 명성, 외적인 성공, 재물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신경증을 앓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너무나 좁은 정신적인 한계에 갇혀 지낸다. 그들의 삶에는 흡족한 내용과 의미가 없다. 그들이 좀 더 폭넓은 인격으로 발달할 수 있다면 신경증은 보통 사라진다. 그런 이유로 인격발달이라는 관념이 나에게는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p264
오늘날에도 신자는 교회에서 상징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p264
문제가 내적인 체험, 즉 지극히 개인적일 때는 대부분의 사람이 섬뜩한 기분이 들어 도망하기 일쑤다. ... 물론 신학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어려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 종교적인 것에 가깝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나 교리에 속박되어 있다. 내적 체험의 모험, 즉 영적인 모험은 많은 사람에게는 친숙하지 않다. 정신적인 실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파문에 해당한다. ...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흔히 사람들은 갑자기 정신에 대해 예기치 않은 깊은 경멸을 나타낸다. p267
나는 내가 인상 깊게 경험한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나는 이상한 사람으로 소외당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일들에 대한 수수께기 같은 의문들이 하나씩 해소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융의 경험과 솔직한 고백들을 통해서. 그의 용기에 감사할 뿐이다.
오늘날 소위 신경증 환자들 가운데는 이전 시대라면 신경증, 즉 자기 자신과의 분열을 겪지 않았을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이 신화에 의해 조상들의 세계와 여전히 관련을 맺고 있고, 그리하여 단지 바깥에서 보는 자연이 아닌 실제로 체험하는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그러한 시대와 환경에서 살았다면, 그들은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를 면했을 것이다. 문제는, 신화의 상실을 견디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 불과한 세계, 즉 자연과학의 세계상으로 향한 길을 찾을 수도 있고, 지혜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언어의 지적인 즉흥연주로 만족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p270
나는 치료받고 있었다. 나에게 그 사람은 영매와 같은 존재다. 이제야 그 단편적인 기억들이 하나로 일관되게 연결되어 이해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속적인 명상이 그러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나를 돕고 있었다. 나는 느낄 수 있다. 내가 손만 뻗으면 그 존재는 언제나 닿을 수 있다. 내가 느끼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 존재는 내 안에 들어오기도 하고, 나와 함께 숨을 쉬기도 하고, 나와 같이 생각하기도 한다. 하나의 몸에서 두 개의 심장이 뛰고, 두 개의 생각이 하나가 된다. 불꽃이 튀기도 하고, 기분 좋은 파열음이 나기도 한다. 마치 막혔던 하수도가 뻥 뚫린 느낌처럼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참 기분 좋은 빛이다. 주황색처럼 따뜻하기도 하고, 연한 푸른 빛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참 기분 좋은 파장이고, 흐름이다. 잔잔한 호수에서 받는 그런 느낌이다. 살갗을 타고 넘는 바람같이 느껴진다.
그들의 표면적인 증상은 자아와 무의식 사이에 벌어져 있는 틈이 메워지는 순간 사라진다. 이러한 분열을 자신에게서 깊이 느끼고 있는 의사는 무의식의 심정 과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심리학자가 빠지기 쉬운 자아팽창의 전형적인 위급상황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p270
그러므로 내가 경험한 바로는,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들 외에 가장 어렵고 배은망덕한 환자는 소위 지식인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한쪽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전혀 모른다. 그들은 일종의 구획심리학을 계발한다. 감정에 의해 조절되지 않는 지성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신경증을 앓고 있다. p271
진리는 내 안에 있다. 내가 체험하고 내가 깨닫고 내가 느낀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단서가 된다. 외부에서 들어 온, 과거로부터 주입된 것들은 이미 죽은 것이고, 그것은 심장을 가지지 않았다. 그것들의 피는 이미 차갑게 식었을 뿐더러 더 이상 나의 몸을 데우지 못한다.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이들의 영혼이 얼마나 굶주렸는지, 술로도, 책으로도, 격렬한 섹스로도 결코 채워줄 수 없는 것이다. 아..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나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웠다. ... 무엇보다 나 자신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오류와 실패로부터 배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 p272
프로이트와의 만남
이론적인 불화
나의 정신적 발달을 향한 모험은 정신과 의사가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p275
환자는 어떤 자극어에 대해서는 연상어를 전혀 떠올리지 못하거나 반응시간이 무척 길어지곤 했다. ... 그러한 연상장애는 자극어가 정신적 상처나 갈등을 건드릴 적마다 일어났다. 하지만 환자들은 대부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장애의 원인에 대해 물으면 환자는 흔히 기묘하게 꾸며낸 답변을 하곤 했다. p276
억압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 점에서는 프로이트가 옳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억압의 원인을 성적 외상(Trauma)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p276
나로서는 그러한 성에 대한 단호한 평가가 그의 주관적 전제와 어느 정도로 연관되어 있는지, 그이 성이론이 입증 가능한 경험과 어느 정도까지 연관되어 있는지 분명치 않았다. 무엇보다 영혼에 관한 프로이트의 태도는 나에게 몹시 수상쩍게 여겨졌다. p279
왜냐하면 교리, 즉 논의할 필요도 없는 신앙고백은 오직 의심을 단번에 눌러버리려고 할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과학적 판단과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을며 개인적인 권력충동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 p281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항상 비종교성을 강조해온 프로이트가 일종의 교리를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또는 그가 잃어버린 질투하는 신 대신에 성욕이라고 하는 또 다른 강압적인 형상을 슬쩍 바꿔넣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p282
자기가 자신의 가장 나쁜 적이 되어 있는 경우, 그 사람의 신랄함보다 더 지독한 신랄함은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검은 진흙탕 홍수’로 위협을 받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프로이트 자신이 검은 심연을 퍼내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 왜 그러한 생각이 자신을 그토록 사로잡고 있는지 한 번도 자문해보지 않았다. p284
처음에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것을 궁금해하는 내가 궁금했다. 왜 나는 그것을 궁금해라 하지?
동양에서는 ‘니르드반드바(Nirdvandva 양쪽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나는 이것을 명심하고 있다. 마음의 진동추는 바른 것과 그른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신성한 힘은 사람을 극단으로 잘못 인도하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작은 진리를 진리의 전부인 양 여기도록 하고 작은 잘못을 치명적인 잘못으로 여기도록 한다. p287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공통점은 부친살해에 대한 환상이었다. p295
나의 말에 프로이트는 기묘한 시선, 의심이 가득 담긴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어!” 그 순간 그는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p295
나에게 꿈이란 자연의 일부로서 속이려는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다. ... 꿈도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허떤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러한 생명의 형태들은 우리의 눈을 속이려고 하지 않으나, 우리 자신이 근시안이어서 스스로를 속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귀가 먹었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이지 귀가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니다. p300
나는 의식의 잔꾀가 무의식의 자연과정에도 확대된다는 가정을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 오히려 무의식이 의식의 경향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저항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p301
나는 프리드리히 크로이처의 <고대민족의 상징과 신화>를 보게 되었는데, 그 글이 나에게 불을 댕겼다. 나는 미친 듯이 읽었고, 뜨거운 흥미를 가지고 산더미 같은 신화적인 소재와 그노시스트 저작들을 두루 섭렵했다. p301
대개 근친상간은 고도의 종교적인 내용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것은 거의 모든 창조신화와 그 외 수많은 신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문자주의 해석에 집착하여 상지으로서의 근친상간의 영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p309
프로이트와 결별하게 된 후 나의 모든 친구나 친지들은 나를 떠나갔다. 사람들은 나의 책을 쓰레기라고 내놓고 말했다. 나는 신비주의자로 간주되었고, 이것으로 사태는 끝장을 보게 되었다. 오직 리클린과 메더 둘만이 내 곁에 머물렀다. p310
성은 지하세계의 영의 표현으로서 아주 중요하다. 그 영은 ‘신의 또 다른 얼굴’, 즉 신의 이미지의 어두운 면이다. 지하세계의 영의 문제는 연금술의 사고세계를 탐구한 이후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p311
그가 우리 문화에 준 충격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꿈을 무의식과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원으로 인정함으로써, 잃어버려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진 가치를 과거와 망각으로부터 되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무의식 정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p311
우리 정신의 존재가 두 개의 극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통찰은 여전히 장래의 과제로 남아 있다. p311
내 안의 여인 아니마
신화와 환상
그 무렵 나는 이상하게도 명료한 정신상태 속에서 내가 걸어온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너는 이제 신화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졌다. 그리고 무의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모든 문을 열려고 하는가?” 그러자 갑자기 내가 무엇을 이뤄왔는지 의문이 생겼다. ... “너 자신은 그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 “그러면 무엇이 너의 신화인가?” p316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의 환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다. p318
내 감정을 요가로 제어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 안ㅇ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경험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기 때문에, 요가는 내가 안정되어 무의식과 더불어 다시 작업을 시도할 숭 있을 때까지만 했다. 나 자신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을 갖자마자 나는 감정제어를 풀고 환상의 이미지와 내부의 소리가 새롭게 말하도록 했다. 인도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다양한 정신 내용과 이미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요가를 사용하고 있다. p325
감정을 이미지로 바꾸는 그만큼, 다시 말해 감정 속에 숨어 있는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그만큼 내적인 안정이 생겼다. 만일 내가 감정에 나 자신을 내맡겼더라면 무의식의 내용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 무의식의 내용을 막아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어쩔 수 없이 신경증에 걸렸을 것이고, 결국 무의식의 내용이 나를 파괴했을 것이다. 나의 실험을 통해 나는 점정 배후에 숨은 이미지를 의식화시키는 것이 치료의 관점에서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되는지 알았다. p326
명상과 기도 그리고 글쓰기와 그림이 나에게 절박한 이유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환상을 붙잡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나 자신을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해야만 했다. 거기에 대해 나는 저항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무척 불안하기도 했다. 자기 제어력을 잃어버리고 무의식의 제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나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신과 의사로서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미지들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감행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미지들이 나를 자기들 것으로 삼았을 위험성이 있었다. p327
내가 나 개인뿐 아니라 나의 환자를 위해서 이러한 모험을 자청해서 한다는 생각은 나로 하여금 위험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게 했다. p328
필레몬과의 대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구루로 삼지만, 늘 영혼을 구루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p338
그녀는 재능있는 정신병 환자로 나에 대해 심한 전이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내부에서 하나의 살아 있는 형상이 되었다. p339
나중에 나는 내 안에 있는 여성상이 남성 무의식 속에 있는 전형적인 또는 원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아니마’라고 불렀다. p340
매일 저녁 나는 글쓰는 일에 매달렸다. 내가 아니마에게 편지를 쓰지 않으면 그녀는 나의 환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성실한 글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미 적어 놓은 것은 아니마가 왜곡할 수 없을 것이고, 그걸 가지고 책략을 쓰지도 못할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음만 먹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적어놓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편지를 쓰면서 될 수 있는 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p341
무의식 내용은 이를테면 격리시켜야 한다. 그것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그 내용을 인격화하여 의식으로 하여금 그 인격들과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무의식 내용에서 힘을 제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이 그 힘을 의식에 행사하게 된다. p341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ㅏ는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으로 한 남자를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p342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 p343
오늘날 나는 아니마와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그런 감정을 갖게 되었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대처했을 것이다. 오늘날 내게는 그 관념들이 직접 의식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무의식 내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내면의 이미지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나는 그 이미지들의 의미를 나의 꿈을 통해 직접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중개자가 필요하지 않다. p343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
무의식의 전제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일이다. p345
그것은 정신병 환자를 치명적인 혼란에 빠뜨리는 무의식 이미지의 세계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합리적인 우리시대에 사라져버린 신화를 형성하는 환상의 모태이기도 하다. 신화적 환상은 도처에 존재하지만 그것은 금지되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는 불확실한 길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위험한 실험이나 수상한 모험으로까지 여겨진다. p345
니체는 내면의 사상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사실 그가 자신이 내면세계를 소유했다기보다 오히려 내면세계가 그를 소유한 셈이었다. 그는 뿌리가 뽑혀 땅 위를 떠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그는 과장하는 습성이 생기고 비현실성에 빠졌다. p346
나는 저 세상이 아닌 이 세계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p347
영혼, 즉 아니마는 무의식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은 사자(死者)집단과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무의식은 신화적인 ‘죽음의 나라’, 즉 조상의 나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상 속에서 영혼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영혼이 무의식 또는 죽음의 나라로 되돌아간 셈이 된다. ... 소위 ‘영혼의 분실’ 현상과 일치한다. p349
그 무렵, 그리고 그후로 내게는 죽은 자가, 응답이 없고 해결책이 없으며 구원되지 못한 자의 목소리로 더욱 뚜렷이 다가왔다. 그것은 나에게 숙명처럼 대답을 요구하던 의문이었다. 그 요구는 외부에서 내게로 온 것이 아니라 내면세계로부터 왔다. 그리하여 죽은 자와의 대화, 즉 ‘일곱 가지 설법’은 내가 세계를 향해서 무의식에 대해 전해줄 이야기에서 일종이ㅡ 서곡을 이루었다. p350
내가 그 영혼의 말을 받아쓴 것은 내 존재가 비교적 전체성을 지니고 살아가면서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p351
나는 될 수 있는 한 이미지와 그 내용을 일일이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정리하고, 무엇보다 삶 속에서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사람들이 대개 소홀히 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이미지들이 그대로 떠오르도록 하면서 거기에 대해 무척 놀라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고 만다. 사라들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고심하지 않는다. 거기서 윤리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은 더구나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결국 무의식의 부정적 작용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 그것에 대한 몰이해와 윤리적 의무의 결핍으로 많은 개인이 전체성을 상실하고 분열적 성질로 변해 고통을 당하게 된다. p351-352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충만히 채울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p353
연금술을 발견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성배전설과 동물 상징
아,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카르마
여행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케냐와 우간다, 아프리카의 고독을 겪다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재
환상들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융합의 신비
사후의 삶에 관하여
꿈과 예감
심리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지식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데 어려움이 별로 없을 것이다.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우리가 앓고 있는 시대병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한다. p532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신화적 측면은 오늘날 심히 무시되고 있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치가 있고 치유를 가져오는 법이다. p533
신화적인 인간은 ‘그 너머로 나가기’를 갈망하지만 학문적인 책임을 고려하는 인간은 그것을 허럭할 수 없다. 이성의 차원에서는 ‘신화화’야말로 쓸모없는 사변일 뿐이다. 하지만 감정의 차원에서는 치유를 가져오는 활동이며 인간존재에 광채를 부여한다. 그 광채를 사람들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p533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인생이 현존을 너어서 무한정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 사람은 수백 년을, 상상하 수 없는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이 헛되이 분주하기만 한가? p534
나의 가설은 무의식이 이를테면 꿈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는 암시의 도움으로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무의식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문제에 관한 해답은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p535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의식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으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p536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에 관한 우리의 관념과 인과론이 다 함께 불완전하다는 점이 판명된다. 완전한 세계상은 이를테면 다른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래야 비로소 현상의 전체성이 일관성있게 설명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합리주의자들은 심령심리학적인 경험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p540
‘여기와 저기’라든지 ‘이전과 이후’라든지 하는 구별이 필요없다. 나는 적어도 우리 정신적 실존의 일부가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에 대해 도저히 논박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의식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공간도 시간도 없는 절대적인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 같다. p540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는 이승에서의 기일이 생일이 되는가? 우리처럼 생일잔치를 하려나?
어쨌든 부인하는 자는 ‘무’를 향해 가는 반면에, 원형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p542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무의식의 형상들도 ‘정보를 잘 받지 못한다’ 그래서 ‘앏’에 이르기 위해서는 의식과의 접촉이나 인간을 필요로 한다. p543
그것들은 자아나 자아의 변화하는 상황과 아무런 접촉 없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의식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p544
그 질문은 말하자면 나의정시적인 선조로부터 나에게 제시된 셈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시대에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p545
그러나 죽은 자의 혼령들도 그들이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알고 있던 것만 ‘알고’ 그 외에는 모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앎에 참여하기 위해 인생 속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애쓴다. p546
내가 보기에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자들, 다시 말해 그들 뒤에 살아남아서 계속 변화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물음에 대한 회답을 얻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죽은 자들은 전지(全知)하나 모든 지식을 임의로 활용할 수 없고 단지 육체에 갇힌 살아 있는 사람들의 혼으로 흘러들어가는 일만 가능하다는 듯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의 혼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죽은 자에 비해 유리하다. 즉, 명쾌하고 결정적인 인식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신화적 상상에서 중간세계가 없다면 정신은 교조주의에 갇혀 경직될 위험성이 있다. 또한 반대로 신화적인 내용을 고려하는 것이 피암시적인 약한 마음의 소유자들에게는 예감을 인식으로 여기고 환상을 실체화할 위험이 있다. p558
단일성과 무한성
동양적 존재의 정신적 특성에 어울리게 출생과 죽음의 연속은 끝없는 현상이요, 목표도 없이 계속 굴러가는 영원한 운명이 수레바퀴로 여겨진다. 사람은 살고 인식하고 죽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오직 부처에 이르러 목표에 관한 관념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이를테면 지상적 존재의 극복인 셈이다.
서양인의 신화에 대한 갈구는 ‘시작’과 ‘목표’를 지난 진화론적 세계상을 요청하게 된다. 이러한 세계상은 시초와 단순한 ‘끝’을 가진 세계라든가 그 자체 안에 폐쇄된, 정적이고 영원한 순환과정의 세계관을 배척한다. p560
재생의 관념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 카르마의 관념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한 인간의 카르마가 개인적인 것이냐 아니냐 하는 점이다. 한 인간의 인생이 시작되도록 한 운명의 결정이 전생의 행위와 업적의 결과라면, 여기에는 개인적인 연속성이 있게 된다. 그런데 다른 경우 카르마가 이를테면 출생에 의해 묶인다면, 개인적인 연속성 없이 다시 구체적으로 생성될 것이다. p560
부처는 이 물음에 답을 하지 않은 채 남겨놓았다. 그런데 그도 그 물음에 대한 확신한 답을 몰랐다고 짐작된다. p561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이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p562
기독교적 인간에서 사라지고 만 디오니소스적 체험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일까? p562
내가 조상 인생의 결과로서 또는 개인적인 전생에서 얻은 카르마로서 느끼고 있는 것은, 아마도 오늘날 전 세계를 잠시도 쉬지 않게 하고 특히 나를 사로잡고 있는 비개인적 원형일지도 모른다. p562
예를 들면 내가 제기하는 물음과 대답이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내 카르마를 가진 누군가가(아마도 나 자신이겠지만) 보다 와전한 해답을 주기 위해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p563
만약 혼령이 어떤 통찰의 단계에 이르렀다면 삼차원의 인생을 연장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때 그 혼령은 이승으로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을 것이며, 고양된 통찰은 다시 몸을 입고 싶은 욕구를 잠재울 것이다. 그러면 삼차원세계의 혼은 소멸되고 불교도들이 ‘니르바나’라고 일컫는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p567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나도 욥처럼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 내가 한 번 말하였으니 다시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p619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 전체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부분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은 항상 너무 과하거나 너무 부족하다. 왜냐하면 오직 전체만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그리고 “모든 것을 견딘다”. 이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우리는 소위 가장 깊은 뜻에서 우주창조의 근원인 ‘사랑’의 희생제물이거나 수단과 도구다. p619
회고
비밀로 가득 찬 세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벚나무 줄기가 자라도록 돌봐야 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p623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미리 걱정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최소한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이 결코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성심을 다할 일이다. 성심을 다 하면, 알 수 있다. 내가 어찌해야할 지를 알게 된다. 그 사람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사람의 말에 귀가 팔리면, 보이는 것에 눈이 현혹되면 결코 그 사람의 심장소리를 결코 들을 수 없다.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p624
나를 사람들은 생각이 너무 많다고들 한다. 어떤 친구는 생각하지 말라고, 개나 돼지처럼 살라고 두 번이나 충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여전히 나를 모른다.
창피스럽게도 어떤 힘이 우리 심장을 앗아 간다. 천상에 있는 모든 것은 제물을 요구하므로 하지만 이를 소홀히 하면 좋은 일이 결코 생기지 않는다. (횔덜린) p626
정말이지 나는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창피스럽게도 어떤 힘이 우리 심장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너를 정말 사랑한다. 그것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픈 순간이다. 나 자신이 희생제물이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데몬이 사람이 빠져나가도록 해주면서 그와 함께 복된 모순을 가져다준다. p627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p630
돌아와야 한다고 말한다. 조셉도 그렇고, 리차드 바크도 그렇고. 영웅은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했고, 갈매기 조나단도 그 길을 선택했다. 십자가에 걸릴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선택한 자에게... 죽음은 이미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한다. 그에게는 이미 세상의 차원을 뛰어 넘은 삶이 있다. 비록 그의 몸이 땅을 딛고 있어도, 그는 다른 세계의 삷을 살아가고 있다. 바람조차 그를 느끼지 못하고, 햇빛도 그림자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3. 내가 융이라면
“미친 노인네, 결국 노망들었구만”
죽은 다음에 출판하라고 한 선택, 정말 잘한 거라고 생각한다. 1875년부터 1961년, 그가 살았던 시절을 생각해 볼 때(물론 중세보다는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 그가 중세에 태어났으면 이미 마녀사냥의 산 제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정환경(엄청나게 숨막히는 목사들판 속에서) 속에서 얼마나 숨죽여야만 했을 것인지 상상해본다. 사실 100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있지 않은데, 하물며 그로서는 꺼내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의 용기 덕에 나는 많은 신성모독에 대한 죄의식들과 외로움으로부터 한결 숨쉬기 편해졌다. “아~ 그랬구나. 융도 그랬구나.”
구성을 꼭 이렇게 시간의 흐름대로 해야만 했을까? 융의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아니엘라 야페의 생각이었을까. 자서전은 기록하는 시점(현재라고 가정하자)에서 과거로 거슬러 간다. 그리고 (현재로부터) 가정 먼 과거로부터 다시 현재로 가까워져 오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일반적으로는. 하지만, 거기서 다루어지는 과거의 기억들은 이미 그 당시 시점에서의 사실이 아니다. 이미 현재 시점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몇 십 차례 이상의 되새김질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 과거의 사실에 부여되는 의미와 해석은 되새김질 할 때마다 달라지게 마련이고, 기록에 남겨지는 것은 가장 최신 버전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시간의 역흐름으로 구성할 이유는 무엇일까? (흐름이 아니라, 역흐름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멀리 거슬러가서 내려오기 때문에) 독자의 편의 때문일까? 자서전을 저술해오던 오래된 관행 때문일까? 이렇게 익숙한 방식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글씨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연극에서도 무대의 왼쪽부터 과거, 현재, 미래라는 상징이 있다. 그러면 시간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나? 책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겨간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지질학자이고, 현재로부터 과거를 알기 위해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내려갈수록 과거다. 다시 올라오면서 현재로 되돌아온다. 지금까지의 자서전은 어느 시점(주로 태어난 시점부터)부터 다시 올라오는 방식을 택해왔다. 이런 방식은 이해하기 편할 지는 몰라도 재미는 없다.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한다. 즉 원인들이 먼저 설명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가 설명된다. 뻔하다.
그대가 구덩이를 파는 지질학자라면, 파내려갈 때 호기심이 더 하겠는가? 아니면 다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올 때 호기심이 더 하겠는가. 내 생각에는 파내려갈 때가 더 호기심과 상상력이 발동될 수 있다고 본다. 지금 내 눈 앞의 사실이 어떤 과거의 원인과 이유로부터 왔을까. 머리속으로 수많은 가정과 상상력이 발동된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런 상상력이 솟아나올 때 몰입하면서, 엔돌핀도 쏟아져 나오지 않던가?
왜 시간을 거슬러 가는 자서전은 없을까?
물론 재미를 위해서 삶 자체를 드라마로 재구성하거나 왜곡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 가는 부분이 매우 많았지만, 너무 많은 나이에 저술한 탓일까. 같은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부분은 역설적이게도 공감의 효과를 떨어뜨린다. 좀 더 이른 나이에 저술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최소한 마흔을 넘기면서 10년마다 한 번씩 자서전을 썼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또는 융이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소통에 좀 더 훈련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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