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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31일 10시 09분 등록
난중일기-20100531


1. 저자에 대하여 :이순신(1545년~1598)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 자시 서울 건천동(현재 인현동1가)에서 태어났다. 1556년 12세경에 <논어><맹자>등 사서삼경을 읽었고, 유성룡과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그 시기가 8세, 16세 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맞는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1564년 20세가 되던 해 보성 군수 방진의 딸과 혼인을 하고, 무인이 될 것을 결심하고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567년 2월 첫째아들 회가 태어났고, 1571년 2월에 둘째아들 울이 태어났다, 1572년 28세 되던 때 훈련원 별과 시험을 치르던 중 다리가 골절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무과 수련을 10년 이상 거친 후, 32세 되던 1576년에 무과의 병과에 합격했다, 1577년 셋째아들 염(후에 면으로 개명)이 태어났는데 그 해에 권지 훈련원 봉사로 첫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옮겨 국경 지대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1579년 충청도 병마 절도사의 군관이 되었다. 1580년 전라도 좌수영의 발포 수군 만호가 되어 수군의 경험을 쌓기 시작하지만  1581년 군기 경차관 서익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가  1582년 다시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었다. 1583년 함경도 남병사 군관,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이 되었다. 1586년 사복사 주부, 함경도 조산보의 만호가 되어 국경을 사수하였고, 1587년 녹도 둔전관을 겸했으나 이일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백의종군을 하였다. 1588년 시전 부락 여진족 징벌의 공으로 백의종군이 해제되었다. 1598년 전라관찰사 이광의 군관 겸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 정읍 현감이 되었다. 1590년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로 임명되나 대간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만포진 수군첨절제사로 임용되나 대간의 반대로 정읍 현감에 유임되었다.

 1591년 진도 군수,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에 제수되었다가 전라좌도 수군절제사가 되어 왜의 침략을 예견하여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군율을 바로 잡았으며 거북선 제작을 시작하였다. 1592년 거북선에서 대포를 시험하였고 지자, 연자포를 시험했다. 1592년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 4월 27일 왕명을 받고 출전한다. 5월 옥포 함포 적진포 해전에서 적선 42척을 격파하였고, 이공을 인정받아 가선대부에 승자되었다. 같은 해 6월 사천, 당항포, 율포해전에서 왜선 67척을 격파하였고 이 공으로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7월에는 견내량, 안골포해전에서 왜선 79척을 격파하고 정헌대부에 승자되었으며 9월 부산포에서 왜선 100척을 격파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1593년 삼군수군통제사가 되어 진영에서 둔전, 포어, 자염, 도웅 등을 시행하여 군량을 비축하는 정책을 폈다. 1594년 2차 당항포 해전에서 왜선 31척을 격파하였고, 같은 해 8월 권율, 곽재우, 김덕령과 작전을 세우고 9월에 장문포에서 왜선을 격파하고 영등포, 장문포의 왜적과 격투한다. 1597년 53세 되던 해 원균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가, 권율장군 휘하로 또 다시 백의종군한다.

 정탁의 신구자로 특사되어 삼도 수군통제사에 다시 오른 후 4월 11일에 모친상을 당하지만 장례식도 못 치르고 진영으로 간다. 명량해전에서 12척의 배로 왜선 130여척과 대결하여 크게 승리한다. 1598년 54세 되던 해 노량 앞바다에서 도망가던 왜선을 쫒던 중 적의 총탄을 맞고 돌아가셨다.

이순신이 전사한 후 1599년 2월에 아산 금성산 선영에서 장사지내고, 1604년 선조에 하명으로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풍덕 부원군에 추봉, 좌의정에 주증되었는데, 이때 충무공(忠武工)의 시호를 받는다. 1613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열사, 충님사, 현충사에 배향되었고, 1795년 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되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역자서문


[P. 5] 인류의 역사가 변해도 만고불변의 진리가 항상 존재하듯이 어느 시대든 이상적 사회를 위한 도리의 추구는 항상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것은 국가의 보전과 민족의 안녕을 위해 올바른 의식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한시대의 인물이 후대에 길이 기억되어 존경을 받는다면 그는 진정한 인간의 도리를 실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첨던 과학이 발달한 문명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충무공 이순신을 400여년이 지난 후에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가 나라를 위해 지대한 공을 세운 역사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국난 극복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항상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각ㄱ오로 전쟁에 임했으니, 진정한 구국의 명장(名將)이었다.

[P. 6] [난중일기]란 바로 그 당시에 충무공이 전쟁을 몸소 체험하며 기록한 진중(陣中)일기다. 임진년(1592)1월 1일부터 무술년(1598)11월 17일까지 7년 동안 부득이 출전한 날은 쓰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날짜마다 간지 및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P. 6] 충무공이 무관 출신의 장수로서 이러한 일기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워 문인적 기질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P. 7] 오늘날 학자들은 “[남중일기]는 그의 문력(文力)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한다. 임금에게 올린 장계(狀啓) 초안과 관청에 보낸 공문, 시와 문, 간찰 등의 내용에서 그의 문장력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P. 7] [난중일기]는 충무공이 직접 초서(草書)채로 작성한 것이다. ......조선 정조19년 (1795)에 이초고본을 정자로 해독하여 [이충무공전서][난중일기](전서본)가 나왔지만, 그 원문에 상당한 누락과 오독이 있게 되었다. 그 후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이를 다시 해독하여 [난중일기초]가 나왔는데, 이는 전서본 보다 진전된 작업이었으나 해독상의 문제점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했다.


해제 

[P. 9] 1591년(선조 24) 2월 조선(朝鮮)의 조정은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어 풍신수길을 접견하고 정세를 파악한뒤 귀국한 황윤길과 김성길의 보고로 인해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한다. ‘왜(倭)의 침입설’에 대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한데다 이들이 가져온 일본의 국서(國書)에 “군사를 거느리고 명마라에 뛰어 들어가겠다”는 말이 단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김응남을 급히 명나라에 성정사로 파견하여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 후 조정은 일본의 움직임을 근심하여 변방을 철저히 대비하기 위해 비변사에 장수가 될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명하였다. 

[P. 10] 그때 유성룡이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한다고 천거하여 전라좌수사에 임명하게 되었다.

[P. 10] 임진년(1592) 3월 27일에는 새로 만든 거북선에서 대포를 쏘는 시험도 하였다. 드디어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왜군은 20여 만명을 동원하여 배로 대마도로부터 온 바다를 뒤덮고 몰려오는데 이를 바라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P. 10] 이순신은 임진년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왜적과 첫 교전을 벌여 왜선을 분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 후에도 승전의 기세를 잃지 않아 수년에 걸친 당포, 한산포, 명량 등의 해전에서도 전공을 세울 수가 있었다. 무려 7년 동안의 일이었는데, [난중일기]란 바로 그 기간에 진영 중에 있으면서 기록한 진중일기인 것이다, 곧 임진년(1592) 1월 1일부터 무술년(1598) 11월 17일 까지 부득이 출전한 날은 쓰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날짜마다 간지 및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기록하였다.  

[P. 10-11] 전쟁은 임진년 4월 13일에 일어났지만 전서본 [난중일기] 에는 1월 1일자부터 적혀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순신이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년에  귀선을 만들고 군대를 정비한 것처럼 일기도 전쟁에 미리 대비하여 기록한 것임을 알게 해 준다. 

[P. 11] 이순신은 항상 미리 대비하는 정신으로 생활하였다. 임진년부터 최후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진영에서 보고들은 여러 가지 사건과 문제들을 남긴 일기는 물론 나중을 위해 개인적으로 작성한 비망 기록이지만, 내용은 주로 일신보다는 국가와 민중을 위한 것이다.  항시 전투가 따르는 현실 속에서 나라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긴박한 전쟁 중에도 일기를 쓰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자세, 바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항상 위기에 대처했기 때문에 수 십 차례의 해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P. 12] 초고본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해독 작업과 번역이 있었지만, 초고본의 해독상의 문제점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에 초고본과 이본에 대한 정밀한 교감 작업을 시도하여 비로소 새로운 원문과 번역본을 만들게 되었다

[P. 13] [난중일기] 내용은 주로 전쟁의 출동, 상황, 부하장수의 보고 내용, 공문을 발송한 일, 군율을 어긴 부하 장수를 처형한 사건, 장계를 올린일등이며, 그중에는 장계초안 및 서간문으로 추정되는 내용들이 간간이 삽입되어 있다. (입진 계사 갑오일기) 또한 공사간의 인사문제와 가족에 대한 안부 걱정, 그리고 진중 생활에서 느끼는 울분과 한탄 등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간혹 시와 문을 지어 적기도 하였고, 옛 시문과 병서를 인용한 글과 이순신 자신의 별호인 ‘일심(一心)’ 을 연습한 낙서도 있으며, 명나라 장수의 이름과 그들로부터 받은 물품 목록도 적혀 있다.

[P. 13] 초고본은 전편이 초서로 작성되어 있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순신이 평소에 주로 사용한 서체이긴 하지만, 이 일기에는 긴박한 상황에서 심하게 흘려 적은 글씨들과 삭제와 수정을 반복한 흔적이 자주 보인다, 후대의 활자본에는 이 부분에 해당하는 글자들이 대부분 오독되거나 미상인 채로 남게 되었다. 특히 초고본 [임진일기]와 [계사일기] [정유일기]에서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해당일기를 작성한 해에는 유난히 치열한 전쟁이 있었다. 

[P. 14] 큰 전쟁이 일어난 해에는 일기 분량이 일정하지 않고 누락이 심한 반면, 큰 전쟁이 없었던 해는 비교적 일정하게 이어져있다. [임진, 계사 정유일기]가 전자에 속하고 [갑오, 병신일기]가 후자에 속하는데, [갑오, 병신일기]의 초고 상태는 전자의 일기보다 훼손이 훨씬 적다.  

[P. 15] 노산 이은상은 [정유일기](현암사 판)에 대해 “본시 충무공 자신이 왜 그렇게 다시 쓰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앞 책에 간지가 잘못 적혀 있는 것과, 또 내용에 있어서도 뒤의 것이 앞의 책보다 비교적 좀더  많이 적힌 것 등을 보아, 혹시 공(公)이 시간의 여유를 타서 기억을 되살려 가며 새로 한번 더 적어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P. 15] 초고본에는 알아보기 어렵게 쓴 미상자(未詳字)와 오기(誤記)한 글자 및 훼손된 글자들이 아직까지도 제대로 판독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P. 15] 1959년 1월 23일에 초고본 [난중일기]는 [임진장초]및 [서간첩]고 함께 아홉책이 국보 76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된 문화재 명칭은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牒壬辰狀草)’이다.

[P. 15-16] 이 초고본은 이순신이 전사한 후 아산의 이충무공 종가에 대대로 소장되어 오다가 현재는 현충사 유물전시관에 [인진장초]와 [서간첩], [충무공유사]와 함께 소장되어 있다. 1967년 [난중일기]의 도난, 회수 사건이 일어난 이듬해에 문화재관리국에서 영인하여 간행하였다. 

[P. 16] 초고본을 옮겨 적은 전사본(傳寫本)은 비록 적은 분량이지만 [충무공유사]의 일기초가 유일하다.

[P. 27] 이 전서본 활자본들은 초간본을 비롯하여 후대에 총 여섯차례 간행되었다.

[P. 35] [난중일기초]는 거의 초고본의 형태에 따라 날ㅈ별로 기사를 편집하되 간간이 일기 사이에 적힌 문과 시도 원본의 위치대로 삽입하였다. 간혹 초고본에서 마멸되거나 판독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미상기호(☐, ▉)로 처리하였고, 썻다가 지운 경우에도 이를 빠뜨리지 않고 우변에 별도로 기호를 붙여 표시하였다.

[P. 38] 2005년 필자는 초고본 해독 과정에서 발견한 오류 100여곳을 발견하여 전서본  [난중일기초]와 비교하고, 기존 해독의 문제된 것을 교감(校勘)하여 완역(完譯)을 시도하였다, 인명, 지명 등의 잘못된 표기와 동형(同形)의 글씨를 오독한 경우 새롭게 해독하였는데, 대부분 초고본의 훼손상태가 심하거나 수정을 반복하고 난필로 알아보기 어렵게 씌어진 글자들이었다.


완역 난중일기

임진년(1592)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P. 51] (1월 16일 정축) ..............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에 곤장을 쳤다. 우후, 기수가 제대로 단속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자기 한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알만하다. 성 밑에 사는 토병 박몽세는 석수로서 선생원의 쇄석(쇠사슬 박을 돌)을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 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곤장 여든대를 쳤다. 

[P. 56] (2월 25일 병진) 흐림. 전쟁 준비에 여러 가지 결함이 많아 군관과 색리들에게 죄를 처결하였으며, 첨사는 잡아들이고 교수(敎授)는 내보냈다. 방비가 다섯 포구 가운데 가장 못한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그 죄상을 조사하지 못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역풍이 크게 불어 출항할 수 없어서 그대로 머물러 잤다.

[P. 57] (2월 26일 무오) 흐림 아침에 점검을 마친뒤 북봉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외롭고 위태로운 외딴섬이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과 해자 또한 매우 엉성하니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심력을 다했지만 미처 시설하지 못했으니 어찌하겟는가.

[P. 60-61] (3월 24일 갑신) 우후가 수색 토벌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순찰사와 도사의 답장을 송희립이 함께 가져왔다. 순찰사의 편지 가운데, “영남 관찰수(김수)의 편지는 ‘쓰시마 도주의 문서에. ;일찍이 배 한척을 내어 보냈는데, 만약 귀국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바람에 부서진 것이다..;’ 라고 했다‘” 는 것이다. 그 말이 매우 음흉하고도 거짓되다, 동래에서 서로 바라보이는 바다인데 그럴리 만무하다. 말을 그와 같이 꾸며대니, 그 간사함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P. 68] (6월 2일 경자) 아침에 출항하여 곧장 당포 앞 선창에 이르니, 적선 이십여척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우리배가 둘러싸고 싸우는데, 적선 중에 큰 배 한척은 크기가 우리나라의 판옥선만 하였다. 배 위에는 누각을 꾸몄는데, 높이가 두 길은 되겠고, 누각 위에는 봬장이 우뚝 앉아서 끄떡도 하지 않았다. 편전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을 비오듯 마구 쏘아댔더니, 왜장이 화살에 맞고 떨어졌다. 그러자 모든 왜적이 한꺼번에 놀라 흩어졌다. 여러 장졸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는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어 모조리 섬별하여 남겨두지 않았다. 얼마 후 큰 왜선 이십여 척이 부산에서부터 바다에 줄지어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는 도망쳐서 개도로 들어갔다. 

[P. 69] (6월 5일 계묘) 아침에 출발하여 고성 당항포에 이르니 왜적의 큰 배한척이 크기가 판옥선과 같았는데, 배위의 누각이 높고 그 위에는 적장이란 자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중간 배가 열두 척이고 작은 배가 스무척이었다. 한꺼번에 쳐서 깨뜨리려고 비내리듯 화살을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왜장의 머리를 벤 것이 모두 일곱 급이고 나머지 왜병들은 육지로 달아나니 남은 수효가 매우 적었다, 우리 군서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P. 72] 우리나라 팔도 중에 오직 이 호남만이 온전한 것은 천만다행인데,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운송하는 것이 모두 이도(전라도)에 달려 있고, 적을 물리쳐 국권을 회복하는 것도 이 도를 위한 계책에 달렸습니다.

[P. 75] 먼저 전례를 따라 변방의 방어를 견고하게ㅜ한 다음 차츰 조사하고 밝히어 군사와 백성의 고통을 구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가장 급선무라 생각합니다. 국가가 호남과의 마치 제(齊)나라의 거(莒), 즉묵(卽墨)과 같은 것이니. 이는 바로 온몸에 폐질이 있는 자가(기백만 남아) 구원하기 어려운 다리 하나만을 겨우 간호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군사와 말들이 이곳(호남)을 휩쓸고 갔습니다.


계사년(1593)-만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한 마음 그지없네

[P. 80] (2월 12일 정유) 삼도의 군사가 동시에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과 웅포에 이르니, 왜적들은 어제와 같았다. 나아갔다 물러갔다 하며 유인했지만, 끝내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두 번이나 뒤쫓았으나 잡아 섬멸하지 못했으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분하고 분하였다.

[P. 82] (2월 18일 계묘) 이른 아침에 군사를 이동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의 형세는 여전했다. 사도 첨사(김완)를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여도 만호, 녹도 가장, 좌우돌격장, 광양 2선, 흥양대장, 방답 2선 등을 거느리고 송도에 매복하게 하고, 모든 배들로 하여금 유인케하니, 과연 적선 여남은 척이 뒤따라 나왔다. 경산도  복병선 다섯 척이 재빨리 나가 쫓을때, 다른 복병선들이 돌진해 들어가 적선을 에워싸고 수없이 쏘아대나, 왜적으로 죽은자가 부지기수였다. 한 놈의 목을 베고 났더니 적의 무리가 크게 꺾여 마침내 뒤따라 나오지 못하였다. 날이 저물기 전에 여러 배를 거느리고 원포로 가서 물을 길었다. 어둠을 틈타 영등포 뒷바다로 돌아왔다. 사화랑의 진영에서 밤을 지샜다. 

[P. 89] 아래 관청에 내릴 공문

이제 섬 오랑캐가 일으킨 변란은 천고에도 들어보지 못한 바이고 역사에도 전해진 적이 없는 일이다. 영해(嶺海)의 여러 성(城)들은 적의 위세만 보고도 달아나 무너졌으며, 각 진의 크고 작은 장수들도 모두 뒤로 물러나 움츠리고 산골의 쥐새끼처럼 숨어 버렸다. 임금은 서쪽으로 피난을 가고 연이어 삼경(평양, 개성, 한양)이 함락되었다. 종사(종묘와 사직)가 풍진을 입어 이년간 폐허가 되니.............

[P. 89] 약속한일, 천고에도 들어보지 못한 흉변이 우리 동방예의지국에 갑자기 닥쳐왔다.

[P. 90] 영해의 여러 성들은 적의 위세만 보고도 달아나 무너지니, 적이 석권하는 형세가 되어버렸다. 임금님의 수레는 서쪽으로 옮겨가고 백성은 짓밟히고 살육을 당했으며, 연이어 삼경이 함락되고 종사가 폐허가 되니, 오직 우리 삼도 수군의 의리를 떨쳐 죽음을 바치려 하지 않는 이가 없건만 기회가 알맞지 않아 뜻한 바람을 펴지 못하였다. 

[P. 90]어제 적을 만나 지휘할 때 교묘히 피하여 머물러있는 자들이 많았는데, 너무도 통분하였다.

[P. 91] “신의 뒤를 이어 서로 번갈아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연거푸 천자(天字), 지자(地字)의 각 총통을 쏘아 왜적선 오십여 척을 쳐부수었는데, 그때 날이 막 어두워졌다,” 고 하였습니다.

[P. 92] 더위가 흑심한데 삼가 살피지 못하였지만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전에 앓던 학질과 이질이 지금은 어떠하십니까? 근심과 걱정이 과도하니 그 병환의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할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탄환맞은 자리의 통증 때문에 바로 나아가 배알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P. 92] “적들이 수륙으로 침범하여 우도의 여러 읍은 이미 적들의 늪이 되었고 곤양, 사천도 모두 함락되어 폐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P. 95]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시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할 따름이며,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 두 번이나 안부 편지를 받고 곧바로 나아가 뵈려하였으나 탄환을 맞은 자리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억지로라도 달려가려고 하면 증세가 할어 뭉그러지려고 하여 두려움에 주저하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도 인심은 이미 무너져 세력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으니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혹 징집에 응하는 자가 있다 해도 혼자서는 나아갈 수 없는 일입니다.

분함과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고 득실과 성패가 서로 이같이 멀기만 하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군사를 일으켜 국가의 치욕을 씻는 것이 지금에 급급한 일이긴 하지만, 오히려 신중히 하여 경솔하게 싸워서는 안될 것입니다.  형세를 살펴보니 근심에 괴로워하며 독해(毒害)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P. 96] “물길을 따라가서 적을 토벌하고 자리를 옮겨 싸우러 깊이 들어가면 되돌아올 기약을 하기가 어렵다.”고 하고, 또 “경상도와 인접한 땅에서 남김없이 징발한다면, 이는 곧 이도를 왜적에게 넘겨주는 것이니, 수비하는 사람은 부모처자가 없게 되고 다시는 서로 만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한답니다.

[P. 98] 교전할 때 스스로 조심하지 않아 적의 철환을 맞았는데, 비록 죽을 만큼 다치지는 않았지만 연일 갑옷을 착용하여 헌 상처가 뭉그러지고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고 있으며, 밤낮을 잊고서 혹은 뽕나무 잿물로 혹은 바닷물로 씻어 보았지만, 아직 차도가 없으니 근심스러울 뿐입니다.  

[P. 100] 이도의 임심이 흩어져 달아나려고 하는 탓에 늘 징병한다는 소식만 들으면 모두 달아나 피한다고 하니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요즘 이도의 민심을 살펴보면, 한번 징집한다는 소식을 듣기만 해도 모두 달아날 꾀만 낼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해(沿海)의 사람들이 거의 다 흩어져 달아나며 말하기를 ‘물길을 따라 관서 지방(평안, 황해북부)으로 옮겨 간다면 되돌아올 것을 기약하기 어렵고, 바닷가 땅에서는 방어할 사람도 없어 앞으로는 적의 소굴이 될 것이니, 부모 처자가 다시 만나 볼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P. 102-103] 왜놈들이 기이하게 여기는 것은 수군인데 수군으로서 싸움에 나아가는 자가 없고, 각 고을의 수령이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도 조금도 감독할 뜻이 없습니다. 군량은 더욱 의뢰할 곳이 없어 온갖 생각을 해보아도 조처할 방도를 알 수 없으니, 수군에 고나한 한 가지 일도 그 형세 상 장차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와 같은 이의  한 몸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지만 나랏일에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P. 108](5월 15일 무진) 아침에 낙안 군수 신호가 와서 만났다. 조금 뒤에 운동구가 그의 대장 원균이 올린 장계의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의 거짓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P. 109] (5월 17일 경오)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과 약탈을 일삼고 있으니 통분하고도 통분하다. 

[P. 111] (5월 21일 갑술) 원수사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보내어 대군을 동요하게 했다. 군중에서 속임이 이러하니, 그 흉포하고 패악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P. 116] (6월 1일 갑신) 명나라에서 온 관원 양보가 왜놈의 물건을 보고 기뻐 날뛰었다더니, 왜놈의 말안장 하나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P. 117] (6월 5일 무자) 경상 수사가 웅천의 적들이 혹 감동포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면서 공문을 보내어 토벌하자고 하였다, 그 흉계가 가소롭다

[P. 117] (6월 6일 가축) 또 듣자니 흥양 현감의 말이 낙안에 이르러 죽었다고 한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P. 119] (6월 10일 계사) 사경에 경상 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아가 싸우자” 는 것이었다. 그 흉악하고 음험하고 시기하는 마음은 이루 말로 하지 못하겠다. 이날 밤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네 고을 군량에 대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P. 119] (6월 11일 갑오) 아침에 왜적을 토벌하다는 공문을 작성하여 영남 수사에게 보냈더니, 취기에 정신이 없다고 핑계 대며 대답이 없었다.

[P. 125] (7월 1일 계축) 인종(仁宗)의 제삿날이다. 밤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고 홀로 뜸 밑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P. 126] (7월 2일 갑인) 해질 무렵에 김득룡이 와서 진양이 불리하다고 전했다. 놀라움과 걱정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그러나 절대 그럴 리 없다. 이는 필시 미친 사람이 잘못 전한 말일 것이다, 초저녁에 원연, 원식이 여기에 와서 군중의 일을 극도로 말하니 참으로 우습다. 

[P. 127] (7월 8일 신유) 남해 현령이 또 와서 전하기를, “광양, 순천이 이미 분탕당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광양 현감, 순천 부사 및 송희립, 김득룡, 정사립 등을 내보냈고, 이설은 어제 먼저 보냈다. 이 소식을 듣자니 뼛속까지 아파 와 말을 할 수 없었다.  

[P. 128] (7월 10일 임술) 늦게 김봉만이 두치에서 와서 하는 말이 “광양일은 사실이다. 다만 왜적 백여명이 도탄에서 건너와 이미 광양을 침범했으나 놈들이 한짓을 보면 총통을 한번도 쏜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왜놈들이 포를 한발도 쏘지 않았을 리가 없다, 

[P. 129] (7월 11일 계해) 오수성이 광양에서 돌아와 보고하기를, “광양의 적에 관한 일은 모두 진주와 그 고을 사람들이 그런 흉계를 짜낸 것이다. 고을의 창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마을은 텅비어 종일 돌아다녀도 한사람도 없으니, 순천이 가장 심하고 낙안이 그 다음이다, ”

[P. 130]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벌써 닭이 울었구나

[P. 133] (7월 29일 신사) 새벽꿈에 사내아이를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간 사내아이를 얻을 징조이다,

[P. 134] (8월 2일 계미) “아들 염의 아픈데가 종기가 생겨 침으로 쨌더니 고름이 흘러나왔는데, 며칠만 더 늦었어도 치료하기 어려울 뻔했다.”고 한다. 매우 놀랍고, 한탄스러운 심정을 이기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생기가 났다고 하니, 다행임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의사 정종(鄭宗)의 은혜가 매우 크다.

[P. 134-135] (8월 3일 갑신) 이경복, 양응원 및 영리 강기경등이 들어왔다. 아들 염의 종기를 침으로 쨌던 일을 전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며칠만 늦어더라면 미처 구하지 못할뻔했다는 것이다,  

[P. 135-136] (8월 7일 무자) 원수사와 그의 군관은 평소에 헛소문을 잘 내니 믿을수가 없다. 

[P. 138](8월 19일 경자) 말하는 사이 원수사에게 음흉하고 도리에 어긋난 일이 많으니 그의 거짓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P. 139] (8월 25일 병오) 꿈에 적의 형상이 보였다. 그래서 새벽에 각도의 대장에게 알려서 바깥바다로 나가 진을 치게 하였다. 해질 무렵에 한산도 안쪽 바다로 돌아왔다.  

[P. 139] (8월 26일 정미) 원공이 술을 마시자고 하여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지껄였다, 매우 해괴하였다.

(8월 28일 기유) 원수사가 왔다. 음흉하고 속이는 말을 많이 했다. 

(8월 30일 신해) 원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로 가기를 독촉했다. 참으로 음흉하다고 할만하다. 그가 거느린 배 스무척은 모두 다 내보내고 다만 칠팔 척을 가지고 이런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일하는 것이 다 이따위다 

[P. 143-144] 나랏일이 다급한 날에

누가 곽리의 충성을 바치리오

서울을 떠난것은 큰 계획이루려 함인데

회복하는 것은 그대들에게 달려있네
관산의 달 아래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에 마음이 슬퍼지네

신하들이여! 오늘 이후에도

여전히  또다시 동과 서로 다투겠는가

[P. 144]  칼날 휘두르며 이르니 그 형세가 비바람과 같아 흉도의 남은 넋들도 달아나 숨고....

척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도다

만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하는 마음 그지 없네

[P. 145] 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능력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리라

[P. 145] 임금의 수레는 서쪽으로 가고 종사는 폐허가 되니 사바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기운을 빼앗기어 백성들의 희망도 절로 끊어졌다.  

[P. 145-146]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이 많지만 몸소 시석을 무릅쓰고 나아가 여러 장수들의 선봉이 되어서 몸을 바쳐 나라에 은혜를 갚으려는데, 지금 만약 기회를 놓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P. 146] 한참 위급한 일에 쓰였다. 더욱이 누차 해전에서 승첩하여 왜적의 칼날을 크게 꺾고 군사들의 소리가 바다를 진동했으니, 비록 중과부적이었으나 흉악한 적들이 두려워하여 그 위세에 감히 맞서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갑오년(1594) -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P. 149] (1월 12일 신묘) 아침 식사 후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 ” 라고 분부하여 두세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에어지는 심정으로 탄식하지 않으셨다. 

[P. 150] (1월 19일 무술) 소비포 군관(이영남)에게서 영남의 여러 배의 사부와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어간다는 말을 들었다.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원수사, 공연수, 이극성이 서로 누독 들인 여자들을 모두 다 관계했다고 한다.   

[P. 155] (2월 3일 임자) 새벽꿈에 한쪽 눈이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식후에 활터 정자에 올라서 활을 쏘았다..... 우조방장((어영담)이 왔는데, 역적들의 소식을 들었다. 걱정스러움과 통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P. 156] (2월 5일 갑인) 새벽꿈에  좋은 말을 타고 곧장 바위가 첩첩인 큰 산 마루로 올라가니 산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 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이 있어 자리를 잡으려고 하다가 깨었다. 그것이 무슨 징후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서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다, 

[P. 158] (2월 9일 무오) 새벽에 우후가 배 두세 척을 거느리고 소비포 뒤쪽으로 띠풀을 베러 갔다. 아침에 고성 현령이 왔는데 돼지고기도 가져왔다. 그 편에 당항포에 적선이 드나든 일을 물었다. 또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는 참담한 상황에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물었다.

[P. 160] (2월 13일 임술)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찌르기를 서로 작정하자.” 는 것이었다.

[P. 161] (2월 16일 을축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나랏일이 이러고서야 싸움이 평정될 리가 만무하여 천장만 쳐다보게 될 뿐이다,

[P. 164]  (3월 3일 신사) “수군이 많이 잡아오지 못한 일로 그의 수사(원균)가 매질을 허고 또 발바닥까지 치려고 했다. ”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P. 165] (3월 5일 계미) 우조방장 어영담이 급히 보고한 내용에 “적도들이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밤을 틈타 도망했기에 빈배 열일곱 척을 남김없이 쳐부수었다, ”고 했다. 

[P. 167]  (3월 13일 신묘) 오후에 원수사가 와서 자기의 잘못된 일을 말하기에 장계를 도로 가져다가 원사진과 이응원등이 거짓으로 왜군의 목을 베어 바친 일을 고쳐서 보냈다. 

[P. 170] (4월 3일 신해) 오늘 여제를 지냈다.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 천팔십 동이를 먹었다. 우수사와 충청 수사도 같이 앉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P. 176]  (5월 9일 병술)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멍하기가 취중이고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P. 180-181]  (6월 4일 신해) 저녁에 겸사복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내용은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니, 이제 부터는 예전의 폐습을 모두 바꾸라”는 것이었다. 통탄하는 마음 어찌 다하랴. 이는 원균이 술에 취하여 망령된 짓을 했기 때문이다.  

[P. 184]  (6월 22일 기사) 오늘 삼복더위가 전보다 훨씬 더하여 큰 섬 전체가 찌는 듯하니,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다.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밥을 두때나 먹지 않았다.  

[P. 184]  (6월 23일 경오) 견내량에서 생포한 왜놈에게 적의 정세와 형편을 신문하고 또 무엇을 잘하는지를 물었더니, “화약 굽는 것과 총 쏘는 것을 다 잘한다.” 고 했다. 

[P. 188] (7월 10일 병술) 아침에 들으니 아들 면의 병이 다시 심해지고 또 피를 토하는 증세까지 있다고 하므로 물과 심약 신경환, 정사립, 배응록 등을 함께 보냈다. 

[P. 189] (7월 13일 기축) 홀로 앉아 아들면의 병세가 어떠한지 염려되어 글자 점을 쳐보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보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것과 같다. ”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길하여 마음이 조금 놓였다. 또 유상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 “는 괘가 나왔다. 매우 길한 것이다, 저녁 내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있는 마음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다.

............비가 올 것인가 갤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내뿜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앞으로 큰비가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경에 발포의 탐후선이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

[P. 189] ( 7월 14일 경인) 점괘에서 얻은 그대로니 참으로 절묘하구나

[P. 191] (7월 19일 을미) 저밈을 올린 뒤에 경상 원수사가 혼자서 술한잔을 올리는데 상은 무척 어지럽건만 먹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우스웠다,

[P. 195] (7월 21일 정유)  저녁에 소비포 만호가 와서 보고는 하는 말이, “기한에 미치지 못했다고 해서  원수사에게 곤장 서른대를 맞았다. ”고 한다, 몹시 해괴한 일이다. 우수사가 군량 스무섬을 빌려 갔다.

[P. 194] (7월 27일 계묘) 흐리고 비람이 불었다, 밤의 꿈에 머리를 풀고 곡을 했는데, 이것은 매우 길한 조짐이라고 한다.

[P. 195] (8월 2일 정미) 초하루 자시에 꿈을 꾸니 부안의 첩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따져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으므로  꿈이지만  내쫓아 버렸다. 몸이 좀 나은 것 같다.  

[P. 201] (9월 1일 병자) 이른 아침에 손을  씻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보니, “중이 속세에 돌아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다시 쳤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매우 길하다. 또 병세가 나아질 것인지와 어떤 소식이 올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들을 징조였다. 순무사 서성의 공문과 장계 초본이 들어왔다. 

[P. 202] (9월 2일 정축)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좀 나아졌다고 하나 원기가 몹시 약하다고 하였다. 매우 걱정스럽다.

[P. 202] (9월 3일 무인) “나를 알고 작을 알아야만 백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랏일이 위태롭건만 안으로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이경에 흥양 현감이 내가 혼자 앉아 있음을 알고 들어와서 삼경까지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P. 202] (9월 5일 경진) 닭이 운 뒤에 머리를 긁어도 가려움을 견딜 수 없어서 사람을 기켜 긁게 했다.

[P.207-208] (9월 28일 계묘)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칠일이 길한지 점을 쳤다. 첫 점은 “활이 화살을 얻은 것과 같다.”는 것이었고, 다시 점을 치니 “산을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흉도 안바다에 진을 치고서 잤다.

[P. 209] (10월 26일 경오) 장인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첨지 신호를 통해 들으니, 김상용이 이조화랑이 되어 서울로 갈 때, 남원부 내에 들어가 숙박하면서도  체찰사를 만나 보지 않고 갔다고 한다. 그때의 일이 이와 같았으니 매우 해괴하다.    

[P. 218] (11월 25일 기해) 새벽꿈에 이일과 서로 만나 내가 많은 말을 하였는데, “나라가  위태하고 혼란한 때를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마음을 두지 않고 구태여 음탕한 계집을 두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 밖의 집에 멋대로 거처하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생각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니 한바탕 꿈이었다. ”

[P. 219]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P. 219] 나를 알고 작을 알면 백번 싸움에 백번 이기고, 나를 알고 작을 모르면 한번 이기고 한번 질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이다,

[P. 220] 왜놈이 두려워하는 바는 수군이지만 수군으로서  싸움에 나서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

[P. 222-223]

슬쓸히 바라보며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맘이 초조하여 잠 못이룰 적에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흐르네

배를 부린 몇해의 계책은

다만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산하는 오히려 부끄러운 빛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나라의 다금한 형세에

누구에게 능히 평정을 맡기리오

배를 몰던 몇해의 계책은

이제 성군을 속인것이 되었네

중원 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 몰아낸 곽자를 사모하네


을미년(1595) -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공로는 티끌 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했고, 입으로 교서를 외우고 있으나 군서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P. 227] (1월 1일 갑술)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P. 229] (1월 12일 을유) 삼경에 꿈을 꾸니 선군께서 와서 분부하기를 “13일” 회를 초례하여 장가보내는 데 알맞지 않는 것 같구나. 나흘 뒤에 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셨다. 이는 완전히 평소 때와 같은 모습이어서 s이를 생각하며 홀로 앉았으니, 그리움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일기초)

[P. 229] (1월 15일 무자) “이천주씨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죽었다. ”는 말을 들으니ㅡ 경탄함을 이기지 못했다. 천리 밖에 던져진 사람이 만나 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더욱 애통과 슬픔이 심했다. (일기초)

[P. 242] (4월 13일 을묘)  저녁에 고성 현령 조응도가 와서 왜적의 일을 말하고, 또 “거제의 왜적이 웅천에 군사를 청하여 야간 습격을 하려고 한다.” 고 말했다. 비록 믿을 만하지는 못하나 그럴 염려가 없지는 않았다.

[P. 243-244] (4월 24일 병인) “도망한 왜놈 망기시로가 우거진 풀숲 속에 엎드려 있다가 붙잡혔고, 왜인 한 놈은 물에 빠져 죽었다.” 고 했다 곧 망기시로를 압송해 오게하고 삼도에 나누어 맡긴 항복한 왜놈들을 모두 불러 모어 곧 바로 머리를 베라 명하였다. 망기시로는 조금도 난색없이 죽으러 나왔다. 참으로 독한 놈이었다.

[P. 244] (4월 29일 신미) 하동 현감은 두 번이나 약속했으나 오지 않았기에 곤장 아흔대를 치고, 해남 현감은 곤장 열대를 때렷다.

[P. 252] (6월 9일 경술) “수군 한명에게 날마다 식량 다섯 홉, 물 일곱 홈씩을 준다,” 고 했다니, 인간 세상의 일이란 참으로 놀랍다. 천지간에 어지 이처럼 속이는 일이 있을수 있을까. 저물녘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이질에 걸리셨다고 한다.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난다. 

[P. 256] (7월 1일 임신) 내일이 돌아가신 부친의 생신이신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일기초)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동량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시작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P. 257] (7월 7일 무인) “나라의 재앙이 참혹하고 원수가 사직에 남아 있어서 귀신의 부그리움과 사람의 원통함이 온천지에 사무쳤건만, 아직도 요사한 기운을 재빨리 쓸 버리지 못하고 원수와 함께 한 하늘을 이는 분통함을 모두 절감하고 있다. 무릇 혈기있는 자라면 누가 팔을 걷고 정치부심하며 그놈의 그 살을 찢고 싶지 않겠는가! ”

[P. 258] (7월 7일 무인) 김응서란 어떠한 사람이기에 스스로 회개하여 힘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는가. 만약 쓸개있는 자라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

[P. 270] 북방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했더니

남방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하네

한잔 술 오늘 밤 달빛 아래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의 슬픈 정만 남으리


병신년(1596) 만일 서쪽의 적이 급한데 남쪽의 적까지 동원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가시겠는가

[P. 286] (1월 4일 신미) 송한등이 말하기를 “청어 천여 두릅을 잡아다 널었는데, 통제사 께서 행차하신 뒤에 잡은 것이 천 팔백여 두름이나 됩니다”라고 했다.

[P. 288] (1월 10일 정축) 서풍이 세게 불었다. 이른 아침에 작이 다시 나올지를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는 쾌가 나왔다. 다시 점을 쳤더니, ‘군왕을 만나 본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와 모두 길한 괘라고 기뻐하였다,

[P. 289] (1월 12일 기묘) 칙자점을 쳐보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을 들을지 점쳤더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과 같다’고 했다, 이괘는 내우 좋다,

[P. 302] (2월 30일 정묘) 장흥부사도 제찰사에게 갔다. 해기 지려 할때 우수사 가 보고하기를, “이미 바람이 잔잔하여 계책으로 호응해야 할때를 장하니 급히 소속 부하를 거느리고 본도(전라우도) 로 가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 작심한 것이 지극히 해괴하여 그의 군관 및 도훈도에게 곤장 일흔대를 쳤다.  

[P. 310] (3월 26일 계사) 체찰사의 전령이 왔는데, “전날 우도의 수군을 돌려 보내라고 한것은 회계를 잘못 보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매우 가소롭다, 

[P. 317] (5월 6일 일신) 아침에 흐렸다가  늦게 큰비가 왔다, 농민의 소망을 흡족하게 채워주니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말할 수 없다, 비가 오기 전에 활 대여섯순을 쏘았다. 비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이는 감독관들이 새로 받은 숯을 쌓을때 조심하지 앟고 묵은 불씨를 살피지 않아서 이러한 재난이 있게 한 것이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우과 김대복이 배를 함께 타고 나갔다. 비가 크게 쏟아졌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밤새도록 안ㅈ아서 걱정했다.

[P. 322] (6월 3일 기해) 새벽꿈에 어린 아이가 태어난 지 겨우 대여섯달 밖에 안되었는데 직접 안았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금감도 만호가 와서 만났다. 

[P.328-329] (7월 10일 을해) 새벽꿈에 어떤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이었다. 스스로 이것을 점쳐보니, ‘화살을 멀리 쏜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삿갓을 발로 차서 부순 것’은 삿갓이 머리에 써야 할것이나 발로 걷어채인 것이니, 이는 적의 괴수에 대한 것으로서 왜적을 모조리 무찌를 징조라 하겠다. 늦게 체찰사의 전령에, “황첨지(황신)가 이제 명나라 사신을 따라가는 정사가 되고, 권황이 부사가 되어 가까운 시일에 마다를 건너게 될것이니, 그들이 타고 갈 배 세척을 정비하여 부선에다 대어 놓으라” 고 하였다.

[P. 331] (6월 22일 정해) 저녁에 순천 관리의 공문에, “충청도 도둑들이 흥산에서 일어났다가 처형되었고, 홍주 등 세 고을이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면했다. ”

[P. 340] (윤 8월 7일 신미) 아침에 아산의 종 백시가 들어왔다. 가을 보리의 소출이 마흔세섬이고, 봄보리는 서른 다섯 섬이며, 어미(생선과 바꾼 쌀)는 모두 열두 섬 네말인데, 도 일곱 섬 열말이 나고, 또 네섬이 났다고 했다.


정유년(1597)-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컴캄해 보였다.

[P. 356] (4월 11일 신미) 새벽꿈이 매우 심란하여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덕이를 불러서 대강 이야기를 하고 아들 울에게도 말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듯 미친듯 마음을 가눌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종을 보내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금부도사는 온양으로 갔다. 

[P. 356] (4월 13일 계해)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면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E 적을 수가 없다,

[P. 357] (4월 15일 을해) 아버님의 친구 오종수가 정성을 다해 상을 치르게 해주니 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지 못하겠다. 관에 대해서만은 서운함이 없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P. 357] (4월 16일 병자) 나는 기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일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천안 군수가 돌아갔다. 

[P. 357] (4월 18일 무인)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고개도 내밀지 못하고, 다만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의 집으로 나왔다.

[P. 358] (4월 19일 기묘) 일찍 나와서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지하랴. 어찌하랴. 천지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P. 362] (5월 4일 갑오) 오늘은 어머님의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어지 견디랴. 닭이 울때 일어나 앉으니 눈물만이 흘렀다.

[P. 362] (5월 5일 을미) 새벽꿈이 매우 어지러웠다.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되는 천애의 땅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로 일ㄴ 앙갚음을 받을 것ㅇ니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에도 같은 것이 없을 터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P. 362] (5월 6일 병신) 꿈에 돌아가신 두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통곡하면서 하신느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도 잔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주관한단 말인가. 통곡한들 어찌하리.” 라고 하셨다. 이것은 두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와서 이토록 근심하고 애달파 한 것이니 비통함이 그치지 않는다, 또 남원의 추수 감독하는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형님들의 혼령이 말없이 걱정하여 주는 터라 애통함이 더욱 간절하다.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원통한 마음에 눈물이 엉겨 피가 되건마는,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내 사정을 살펴 주지 모하는가. 왜 어서 죽지 않는 것인가

[P. 363-364] (5월 7일 정유) 이날 새벽꿈에 사나운 범을 때려잡아 가죽을 벗기고 휘둘렀는데, 이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원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도한 운수로다. 뇌물로 실어보내는 짐이 서울길을 연잇고 나를 헐뜯는 것이 날로 심하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P. 364] (5월 10일 경자) 오늘은 태종의 제삿날이다. 옛날부터 이날에는 비가 온다더니 늦게 큰비가 내렸다.

[P. 367] (5월 20일 경술) 조용히 일을 의논하는 가운데 체찰사는 개탄해 마지 않았다. 밤이 깊도록 이야기 하는 가운데에 "일찍이 유자가 있었는데 거기에 미안하다는 말이 많이 있어서, 그 심정이 미심쩍었으나 어떤 뜻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고 하였다. 또 말하되 ”음흉한 자(원균)의 일은 기만함이 극심하건만 임금이 살피지 못하니 나랏일을 어찌할 꼬“

[P. 368] (5월 21일 신해) “백전(百錢)의 돈으로 죽은 혼을 살게 한다.”

[P. 370] (5월 28일 무오) 그리고 원(원균)이 하는 짓에 미친 짓이 많다고 말했다. 날이 저물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P. 377] (6월 17일 병자) 원균의 장계에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먼저 안골포의 적을 무찌른 연후에 수군이 부산등지로 진군하겠다고 하니, 안골포의 적을 먼저 칠 수 없겠습니까?” 하였고 또 원수의 장계에는 “통제사 원(원균)이 전진하려 하지 않고, 우선 안골포의 적을 먼저 쳐야 한다고 하지만 수군의 여러 장수들은 이와 다른 생각을 많이 갖고 있고,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으니, 절대로 여러 정수들과 합의하여 꾀하지 못한 것이므로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합니다. ” 라고 하였다.

[P. 378] (6월 19일 무인) “통제사(원균)의 일은 흉악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소. 그는 조정에 청하여 안골과 가덕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정말 어떤 마음이겠소? ” 일을 글어 미루고 나아가지 않으려는 뜻에 불과한 것이오

[P. 380] (6월 25일 갑신) 보성 군수 안흥국이 적탄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놀랍고 슬픈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놀라서 탄식할 따름이다, 적 한놈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었으니 통탄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P. 384] (7월 6일 을미) 꿈에 윤삼빙을 만났는데 나주로 귀양간다고 했다. 늦게 이방이 와서 만났다. 홀로 빈방에 앉았으니 그리움과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할 것인가 

[P. 385] (7월 10일 기해) 저녁에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어머님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더욱 심하여 밤이 깊도록 잠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P. 396] (8월 19일 정축)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배설은 교서를 위하여 지영하여 잘하지 않았다. 그 능멸하고 오만한 태도가 이루 말할 수 없기에 그의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P. 400] (9월 16일 갑진) “무려 이백여 척의 적선이 명량(鳴梁) 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것으로 향해 온다,” 고 했다. 여러 장수들은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서른 세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쌌다. .... 배위에 잇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 얼굴빛이 질려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 하고 말했다.

[P. 401] (9월 16일 갑진)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가 있는 데로 들어갔다. 안위의 배위에 있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한 채 마구 쏘아대고 내가 탄 배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 대어 작선 두 척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매우 천행한 일이었다, 우리를 에워쌌던 적선 서른척도 부서지니 모든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정유년  II -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P. 407] (8월 5일 계해) 거느리고 온 군사를 인계할 곳이 없어서 이제 이 압록원에 이르니, 병사가 경솔히 후퇴하는 꼴이 매우 한탄스러웠다. 점심을 먹은 뒤에 곡성현에 이르니 온 경내가 이미 텅 비고 말 먹일 꼴도 구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그대로 잤다. 

[P. 408] (8월 6일 갑자) 순천과 낙안의 피난민들이 길에 가득히 쓰러져 남녀가 서로 부축하며 갔다. 그 참혹한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울부짖고 곡하며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살았다”고 하였다.

[P. 412] (8월 28일 병술) 묘시에 적선 여덟척이 뜻하지 않게 돌입하자, 우리의 여러 배들은 겁을 먹고 후퇴하려는 계획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도 동요하는 빛을 띠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추격하게 하니, 여러 배들은 회피하지 못하고 일시에 적선을 추격하여 갈두까지 나갔다. 그러나 적선이 멀리 도망쳤기에 끝까지 뒤쫓지는 않았다. 뒤따르는 왜선이 오십여척이라고 했다.  저녁에 장도에 진을 쳤다.

[P. 415] (9월 11일 기해) 홀로 배위에 앉았으니 어머님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첮니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겠는가.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심히 불편해하였다. 

[P. 415] (9월 13일 신축) 북풍이 세게 불어서 배가 안정할 수 없었다. 꿈이 예사롭지 않으니 임진년 대첩할 때의 꿈과 거의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었다.

[P. 415] (9월 14일 임인) 벽파정 맞은편에서 연기가 오르기에 배를 보내고 싣고 오니 바로 암준영이었다. 그가 정탐하고 와서 보고하기를 , “전선 이백여 척 가운데 쉰 다석 척이 먼저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P. 416] (9월 15일 계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허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 고 하였고, 도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잇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이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P. 417-419] (9월 16일 갑진)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전선들이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곧장 진지를 향해 온다”고 했다..................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더욱 심력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라고 하였다,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내 배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무늬 붉은 비단옷을 입은자가 바로 아골진에 있던 정정 마다시(馬多時)입니다” 라고 말했다. 내가 무상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뱃머리에 올리게 하니, 준사가 날뛰면서 “이자가 마다시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바로 시체를 토막내라고 명령하니, 정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시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하 나아가 각기 자자, 현자 총통을 쏘니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울 빗발처럼 쏘아대어 적선 서른한 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서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우리의 수군이 싸움하던 바다에 정박하고 싶었지만 물살이 매우 험하고 바람도 역풍으로 불며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이번일은 실로 천행(天幸)이었다

[P. 419] (9월 17일 을사) 우리 수군이 크게 승리한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하고 또 많은 양식을 가져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P. 421] (10월 2일 기미) 아들 회가 배를 타고 올라갔는데 잘 갔는지 알 수가 없다. 내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하랴. 

[P. 424] (10월 14일 신미) 사경에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위에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은 형상이 보이는 듯하다가 깨어났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慟哭)’ 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게 되어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는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것이냐.....................하루밤 지내기가 한해를 지내는것 같구나. 

[P. 425] (10월 16일 계유) 내일이면 막내아들 죽음을 들은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 마음 놓고 통곡하지도 못했다.

[P. 425] (10월 17일 갑술) 새벽에 향을 피우고 곡을 하는데, 하얀띠를 두르고 있으니, 이 비통함을 어찌 참으랴


무술년(1598) - 나의 임무는 철수하라고 호령함인데, 앞에 있는 배들의 함성이 하늘에까지 울리고 대포소리는 우레와 같아서 호령을 듣지 못하였다. 

[P. 442]  무술년 7월 24일, 복병장(伏兵將) 녹도 만호 송여종이 전함 여덟척을 거두다가 적선 열한 척을 절이도에서 만나서 여섯척을 통째로 포획하여 적군의 머리 예순아홉 급을 베고 용기를 발휘하여 진영으로 돌아왔다. 


 

3. 내가 저자라면


(1) 책의 구성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전쟁을 몸소 체험하며 기록한 진중(陣中)일기다. 임진년(1592) 1월 1일부터 무술년 (1598) 11월 17일까지 7년 동안 기록했는데 부득이 출전한 날은 쓰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거의 매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날씨, 일기, 편지, 장궤초안, 등을 기록한 문화재이다. 

1959년 1월 23일에 초고본 [난중일기]가 [임진장초] 및 [서간첩]과 함께 아홉책이 국보 76호로 지정되었는데 지정된 문화재 명칭은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牒壬辰狀草)’이다.


초고본 이후, 현재까지 수차례의 해독 작업과 번역이 있었지만, 초고본의 해독이 어려웠는데 이순신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노승석의 “교감 완역 난중일기”는 초고본과 이본에 대한 정밀한 교감 작업을 시도한 후 새로운 원문과 번역본을 만든 후 출판된 책이다.


책의 구성은 역자의 서문과 해제, ‘완역한 난중일기’, ‘교감본 난중일기 원문’, ‘난중일기 교감기’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핵심인 완역본 난중일기는 임진년, 계사년, 갑오년, 을미년, 병신년, 정유년I, 정유년II, 무술년의 순으로, 실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년도별로 묶여져 있다.

 ‘교감본 난중일기 원문’은 이순신이 기록한 한자 그대로의 원문이고,  ‘난중일기 교감기’ 초고본과 전서본 등을 대조하여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원문에 가깝게 편집한 역자의 연구과정을 기록한 부분이다. 아마 역자의  이순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자의 연구과정과 학위논문이 해제와 교감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난중일기 교감기’ 부분은 일반인이 읽기에 다소 무리가 있는 전문적인 교감과정이다. 이 부분은 난중일기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될 학술적 자료이지만 일반 독자가 보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교감본 난중일기 원문’은 한자와 한문을 잘 아는 사람은 읽으면 이순신이 일기에서 표현 하고자 의도한 것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만, 한문을 잘 모르는 사람이 옥편을 대조하며 읽는 것은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작업이라 권장하고 싶지 않은 독서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난중일기]라면 전쟁 중 작성된 일기만 수록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책에는 전쟁의 출동, 상황, 부하장수의 보고 내용, 공문을 발송한 일, 군율을 어긴 부하 장수를 처형한 사건, 장계를 올린일, 장계초안 및 서간문으로 추정되는 내용들이 간간이 삽입되어 있었다. 특히 일기 중 임진년,  계사년,  갑오년 일기는 공사간의 인사문제와 가족에 대한 안부 걱정, 그리고 진중 생활에서 느끼는 울분과 한탄 등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간혹 시와 문을 지어 적기도 하였고, 옛 시문과 병서를 인용한 글과 이순신 자신의 별호인 ‘일심(一心)’ 을 연습한 낙서도 있으며, 명나라 장수의 이름과 그들로부터 받은 물품 목록도 적혀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일기로서의 역할 외에 오늘날 다이어리나 플래너의 용도로 사용된 기록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2) 난중일기를 보면서 느낀 이순신의 성품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여태까지 알고 있던 ‘구국장수로서의 이순신’외에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의 면모를 알게 되었다.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느낀 이순신의 인간적인 특징과 면모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일기에 사용된, 감정표현을 나타내는 단어 선택으로 볼 때 상당히 인간적이고 진솔한 면이 있었던 듯하다.

 일기에 보면 [“해괴하기 짝이 없다”  “가소로운 일이다”  “그 말이 매우 음흉하고도 거짓되다,”  “너무도 통분하였다.”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그 흉계가 가소롭다” “경악을 금치못했다.” “참으로 우습다”] 등의 표현이 자주 등장 한다. 원문의 한자를 노승석이 해석하면서 사용한 한글의 선택에서 온 것 일수도 있겠으나,  한글로만 볼 때 이런 표현을 이순신이 사용했다는 것이 상당히 놀랍고 재미있다.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을 보는 듯하다. 


② 이순신은 꿈의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한듯하다.

일기의 많은 곳에서 꿈 이야기가 등장한다. 장수가 치열한 전쟁을 치루는 동안 작성한 일기임에도 꿈에 대한 생각을 기록한 것으로 봐서 이순신은 상당히 영적인 특성이 강한 장수였던 듯하다 .

(사례1) P. 133에서  (7월 29일 신사) 새벽꿈에 사내아이를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간 사내아이를 얻을 징조이다,

 (사례2 ) P. 194  (7월 27일 계묘) 밤의 꿈에 머리를 풀고 곡을 했는데, 이것은 매우 길한 조짐이라고 한다.

 (사례 3) P. 195 (8월 2일 정미) 초하루 자시에 꿈을 꾸니 부안의 첩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따져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으므로  꿈이지만  내쫓아 버렸다. 몸이 좀 나은 것 같다.   

이런 사례 외에도  일기 곳곳에 꿈에 대한 묘사와  그 꿈에 대한 자신의 느낌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순신의 꿈에 대한 기록만 모아 연구하면 이순신의 무의식을 기반으로 한 성품의 상당 부분까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



③ 꿈으로부터 가족의 사망/ 승리/ 병법에 대한 계시까지 받는다.

이순신의 꿈은 참 특이하다.

자신의 모친이 돌아가실 때 이미 꿈으로 불길한 징조를 느끼고 일기에 그 내용을 기록하였는데 그 직후 모친의 부고를 듣는다.  또한 막내아들 면이 전사했던 날은 아예 꿈에서 막내아들이 나오는 악몽을 꾸고 불길하게 여기는 예지를 하더니 당일 아들의 전사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 외에도 이순신은 꿈으로 정보를 얻기도 하는데 “꿈에서 신으로부터 병법을 계시받은 경우도 있었다.

페이지 416에서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 고 하였고, 또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이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고 그 꿈을 꾸고 난 당일날 큰 승리를 하게 된다.

꿈에서 벤젠 고리를 구조를 찾아낸 과학자 등 우리는 꿈으로부터 진리를 찾아내었거나, 미래를 예지한 사례를 많이 알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그런 경우 당사자들이 그 문제에 대해 계속적으로 집중하고 몰입할 때 그런 창조성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전쟁에 대한 승리를 계속적으로 추구 하였고, 그 계속된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승리 추구에 대한 집요한 생각들이 그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 “라는 가르침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출정하여 전쟁터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가족에 대한 걱정, 그리움 등이 항상 있었기에 가족의 죽음에 대한 예지몽을 꾼 것이 아니었나 유추해 볼 수 있다.


④  이순신은 점을 치는 것을 즐긴 듯하다

이순신의 꿈 만큼 특이했던 것은 그가 점치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일기 곳곳에 어떤 문제를 놓고 점치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두 번 세 번 연거푸 점을 친 사례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점을 친다는 것은 욕망이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순신은 전쟁에 대한 승리를 계속 희망했고 그 욕망을 이루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계속적으로 점을 치게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그가 사용한 점은 정확히는 잘 나타나 있지 않으나,  여러 종류였던 듯하고 혹 한문을 공부하면서 배운 주역점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순신은 무장이지만 문인으로서의 자질도 충분했다는 것이 난중일기를 통해 볼 수 있고, 따라서 많은 한학자들이 주역을 공부했듯이 이순신역시 주역을 배웠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례를 보면 그가 점을 치고, 그 점괘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은 것을 알 수 있다.


(사례1) [P. 189] (7월 13일 기축) 홀로 앉아 아들면의 병세가 어떠한지 염려되어 글자 점을 쳐보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보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것과 같다. ”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길하여 마음이 조금 놓였다. 또 유상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 “는 괘가 나왔다. 매우 길한 것이다, 저녁 내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있는 마음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다.

(사례2) 비가 올 것인가 갤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내뿜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앞으로 큰비가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사례3) [P. 189] 점괘에서 얻은 그대로니 참으로 절묘하구나

(사례4) [P. 201] 이른 아침에 손을  씻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보니, “중이 속세에 돌아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다시 쳤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매우 길하다. 또 병세가 나아질 것인지와 어떤 소식이 올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들을 징조였다.

(사례5) [P. 288]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를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는 쾌가 나왔다. 다시 점을 쳤더니, ‘군왕을 만나 본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와 모두 길한 괘라고 기뻐하였다,

(사례6) [P. 289] 칙자점을 쳐보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을 들을지 점쳤더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과 같다’고 했다, 이괘는 매우 좋다,


⑤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증거가 보인다.

명량대첩에서 크게 이긴 후에 이순신은  “이번일은 실로 천행(天幸)이었다”라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기에 기록한 말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순신은 상당히 겸손한 사람이었든 듯하다. 일기에 쓰는 기록이라면 자신의 병법이 적중했음을 자화자찬하는 문장으로 표현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순신은 ‘천행’이라는 표현을 선택하고 있다. 여기 외에도 천행이라는 표현이 가끔 보였는데 이런 면은 그의 겸손한 면을 보여주는 사례이고 이런 겸손함은 대가나 천재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특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대가나 천재들은 자신의 능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신이든 우주이든 행운이든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자각을 한다고 하는데 이순신의 이런 겸손함은 그가 전쟁을 힘과 병법으로만 이긴 장수가 아니라, 지략과 노력과 인고로 병법대가의 수준에 올라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단서로 보여진다.


⑥ 원균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봐서 상당히  인간적이다.

이순신은 원균에 대해 다소 과격한 표현을 쓰고 그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경멸하는 말투가 일기 곳곳에서 보인다. 그의 이런 면은 그가 상당히 솔직하고 청렴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이런 솔직함은 적을 만드는 성품이 되었을 것이고, 그 덕분에 수차례 모함을 받고, 두 번이나 백의종군 한게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무튼 이순신이 원균을 무시하는 대목에서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는듯하여 상당히 재미있었다.

(사례1) [P. 139] 원공이 술을 마시자고 하여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지껄였다, 매우 해괴하였다.

............. 원수사가 왔다. 음흉하고 속이는 말을 많이 했다. 

....... 원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로 가기를 독촉했다. 참으로 음흉하다고 할만하다. 그가 거느린 배 스무 척은 모두 다 내보내고 다만 칠팔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일하는 것이 다 이따위다 

(사례2) [P. 370] (5월 28일 무오) 그리고 원(원균)이 하는 짓에 미친 짓이 많다고 말했다. 날이 저물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등등 이외에도 많은 사례가 있다.



(3) 내가 역자라면 보완할 점


① 해제부분이 복잡하여 읽을 때 정리가 잘 안되고 어려웠다. 역자는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오래 연구하였으므로 그 자신은 내용과 교감과정을 잘 알고 있겠으나, 독자는 기본 지식이 없이 난중일기를 접하므로, 해제부분에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듯 나열하지 말고,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써주는 배려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② 역자는 주석 처리를 상당히 꼼꼼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주석이 일기의 뒷부분에 한꺼번에 미주로 정리되어 있어서 보는 것이 상당히 불편했다. 차라리 페이지 하단을 각주 영역으로 할애하는 편집방법을 택하였다면, 주석을 놓치지 않고 바로 바로 대조하며 읽었을 듯하다.

그리고 주석번호의 글자 색깔(갈색)이 눈에 잘 띄지 않아 주석이 있음에도 건너뛰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주석번호도 검정색으로 표기하였다면 더 나았을 듯하다.

③ ‘교감기’부분은 전문적으로 난중일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볼 부분이다. 역자는 자신이 박사학위 과정 동안 연구 내용을 이 부분에 삽입한 듯한데, 학술적 가치는 충분히 있으나 일반 독자가 보는 것은 무리가 있으므로 이 부분을 과감히 삭제한 편집본도 출판하여 부피와 부담을 줄이고 책의 가격도 낮추는 것이 어땠을까 생각한다. 

④ 페이지 38에서 "인명, 지명 등의 잘못된 표기와 동형(同形)의 글씨를 오독한 경우 새롭게 해독하였는데..." 라는 표현이 있다. 역자가 한문을 많이 풀어 해석해서 그런지 자신의 문장에서도 한문 용어를 많이 섞어 쓰는 사례가 있다. 이 경우  “동형(同形)의 글씨”라는 말을 쓰는 대신 “같은 형태의 글씨“ 혹은 ”글씨의 형상이 같은 경우“.라는 식으로 바꿔 쓰는 것이 독자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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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05.31 21:04:10 *.154.57.140
같이 보고..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면...
한 권을 읽고도, 두 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ㅋㅋ
늘... 자극받아요. 늘어지려는 저를 잡아채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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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1 09:09:08 *.145.204.123
정말 우리들은 각자에 시각에서 책을봅니다 그죠?
저 역시 진철님 때문에 없는 힘 짜내고 있답니다
(인희님이 쉬어가신다는 소식에 넘 섭섭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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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io
2010.07.24 14:28:19 *.254.24.85

月の光が降りそそぎ香る パティオ情欲に溺れる快楽に誘われ 運命を背負う 悪魔の囁きに欺く 焼津市 ヘアサロン 焼津市 美容室世界の果てまで 鳴り響く警告の鐘が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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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enist
2010.08.05 16:53:17 *.16.159.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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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jimadesign
2010.08.09 16:24:47 *.190.2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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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akien
2010.08.09 17:08:10 *.190.208.44

어떡하죠 바라만 보네요 造園 エクステリア짧은 인사조차 건낼수가 없네요 시리도록 차가운 내손잡아 주지마 外構 이제는 그만 보내야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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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wa
2010.08.10 11:30:18 *.190.208.44

Sorry Sorry Sorry Sorry내가 내가 내가 먼저 三重県 造園 네게 네게 네게 빠져빠져 빠져 버려 baby 鈴鹿市 造園 Sorry Shawty Sorry Shawty 눈이 부셔 부셔 부셔 鈴鹿市 庭園숨이 막혀 막혀 막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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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ride
2010.08.12 13:09:45 *.190.14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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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a 4cty
2010.08.30 20:35:18 *.162.9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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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saint lau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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