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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6일 23시 56분 등록

6-2리뷰 백범일지(풀고 보탠이 배경식, 여건상 선택하였음)

*청강조건 2번째(격주 과제물 제출)로 바뀐 후 첫 리뷰입니다.

1. 저자에 대하여

저자 金九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에서 극빈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주 평화통일을 위해 온몸을 바친 겨레의 큰 스승이다. 어려서 서당 교육을 받다가 1893년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팔봉 접주(八峰接主)로 임명된다. 황해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고, 동학농민운동 후 황해도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머물며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에게 유학을 배우다 만주 지역을 순회 후 의병 활동에 가담한다.
1896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일본 육군중위 스치다(土田讓亮)를 처단한 후 체포되어 인천 감리서에 투옥된다. 옥중에서 독서로 개화사상을 배웠으며 탈옥 후 승려가 되었다.
1899년 환속한 후에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고 신교육운동에 노력한다. 1905년 을사조약 무효 투쟁을 벌이며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국권회복운동의 비밀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 1911년 안악 사건, 105인 사건으로 수감된다. 1915년 출옥한 후 동산평농장의 농감생활을 하며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다. 임시정부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등을 역임하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진력한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를 일으키게 해 국내외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 사건으로 백범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피신생활을 하면서, 한인 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훈련을 받게 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한다.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 후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 활동을 전개하며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이루고, 연합국에게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다.
1945년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된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자주 민족의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고 반탁운동을 전개한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 소위원회의 결의에 반대한 후, 남북한의 하나 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협상을 제의하여 평양에서 ‘남북조선제정당 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를 개최한다.
그 후 백범 선생은 민족통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1949년 6월 26일 당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 당하여 지금의 효창공원에 안치되었다.

백범은 상해 임시정부 시절, 안창호를 찾아가 "내가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느님께 소원하기를, 우리 나라 정부가 서거든 내가 그 집 마당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해 달라고, 그러니 내가 임시정부의 문지기 노릇을 해야겠소. "라고 말한다. 또한 '나의 소원'에는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 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라고 적고 있다. 스스로 범부임을 자처했지만 결코 범상치 않은 그의  민족정신을 '백범일지'를 통해 면밀히 추적해 볼 수 있다.

백범 자신의 삶이 순탄하지 않았듯이 가족사 또한 비극의 연속이었다.  서른 한 살에 결혼해서 딸 셋과 아들 둘을 낳았지만 딸 셋은 모두 어려서 죽고 아들 둘만 키웠다. 그리고 열세 살 연하의 아내 최준례도 1924년 새해 첫날에 폐병으로 먼저 떠났다. 그녀의 나이 겨우 서른여섯이었고, 둘째 아들 신은 만 세살도 되지 않았다. 장남은 해당되기 직전인 1945년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참으로 기구한 가족사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5
나는 내가 못난 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다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왔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7 "우리나라는 옛적부터 오늘까지 '대가리 싸움', 곧 헤게모니 싸움으로 말썽이 많았다.....해방후 우리나라에서도 머리싸움이 벌어져서 서로 머리가 되려고 머리가 부서져라 싸움만 하고 누구 하나 발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백범은 머리가 되려고 다투지 말고, 자기를 낮추어 발이 되기를 노력하라고 호소했다. 이것이 바로 백범이 평소 강조한 겸허의 정신이다. 백범이 백정이라는 뜻에서 백자를 따고 범부라는 뜻에서 범자를 따서 호를 백범이라고 지은 것도 바로 겸허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8 '역수어 정신'은 모진 시련과 실패를 딛고 마침내 민족의 지도자로 우뚝 선 백범 자신의 삶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의 겸허정신과 역수어 정신, 이것이야말로 시공을 초월하여 백범의 삶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분명한 메시지이다. 백범일지는 바로 그러한 백범 정신의 살아있는 기록이자 교과서이다.

첫째, [백범일지]는 자신의 허물과 내면의 고민까지도 드러낸 감동적인 '수기'이다.

9 둘째, [백범일지]는 백범으로 인해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던 가족들의 비극적인 삶을 생생하게 기록한 독립운동가의 가족사이다. 백범은 든든한 후원자로 인천옥에 갇힌 자식을 뒷바라지한 아버지 김순영, 서대문감옥에 갇힌 남편을 옥바라지하는 등 온갖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13년 연하의 젊은 아내 최준례, 서대문감옥에 갇힌 백범을 면회 와서 "나는 네가 평양감사가 된 것보다 더 기쁘다"고 하면서 ...

10 인천감옥에서 언제 사형될지 모르는 미결수로서 앞날을 내다보기 어려운 불안한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옥중학교'를 열어 죄수들을 가르쳤다는 것은 세계의 감옥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선구적인 일이다.

11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로서보다는 다시없는 스승으로 섬기고 싶었다"고 회고하며, 백범을 아버지이기 이전에 인생의 스승으로 존경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을 수 있는 말중에 이보다 더한 찬사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백범일지]는 필자가 어린 두 아들에게, 더 나아가서 이 시대의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권할 수 있는 필독서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다시 [백범일지]를 출간한다고 하면, "왜 또다시?" 하고 고개부터 흔든다. 그만큼 [백범일지]의 출간은 신선하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저명한 대학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20세기 한국의 지성사를 빛낸 한국인 1위에 선정되었고, 10만원권 화폐의 주인공으로 뽑혔을 정도로 백범의 명성은 한국 근현대사의 인물 가운데 단연 돋보인다. 그럼에도 우리가 백범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얼마 전에 누군가 내게 [백범일지]의 '일지'라는 말이 날마다 적는 기록을 의미하는 '일지'가 아니냐고 물어와서 역사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백범일지'에서

12 '일지'는 숨겨진 기록, 곧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의 '일지'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소한 사실에서부터 백범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필자가 이 책을 출간해야 하는 하나의 이유이다.

14 우리는 백범 정신, 곧 자신의 허물을 숨기지 않고 세상의 비판을 달게 받겠다는 백범의 비판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실패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자식들에게 들려주면서, 자신의 실패를 교훈삼아 동일한 과오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백범이 [백범일지]를 쓴 진정한 동기이자 [백범일지]의 정신이다.

15 일찍이 한국 독립운동에 공헌한 언더우드의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백범은, 쉽게 깨어지는 '구리동상'을 세우지 말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마음의 동상'을 세우자는 축사를 한 적이 있다.

19 나는 우리 젊은 남자와 여자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그와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에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낸다.

33 지금 이 글을 기록하는 것은 결코 너희 형제에게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너희 또한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니, 동서고금의 수많은 위인 중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이를 골라서 스승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35 이 편지에는 [백범일지]를 집필하게 된 절박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구는 본시 글이 부족하여 긴 기록문은 처음이요 또 막음(마지막)입니다. 해가 바뀔수록 점점 바람 앞의 등잔 같은 생명을 겨우 보존하고 있느나 왜놈의 극단적인 활동으로 어느 날에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지경 입니다. 그래서 구 또한 원수 손에 목숨을 끊게 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자식들에게 한 자의 유서도 남기지 않고 죽으면 너무도 무정할 듯하여 일생 경력을 간단히 적어서 삼가 부탁하오니,

38 그때는 조선시대의 전성기라서 양반과 상놈의 계급차별이 엄격했다. 우리 조상들은 양반이 싫어서 상놈 행세를 한 것이 아니라 김자점의 일족임을 숨기고 집안이 화를 입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상놈 노릇을 했다. 양반 냄새가 나는 문화생활을 접어두고 시골에서 묵은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으며 살다 보니 영원히 상놈이 되었다.

40 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붉은 밤 한 톨을 얻어서 감추어둔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태몽이었다고 늘 말씀하셨다.

41 백범이 자신의 뿌리를 '역적 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다. 역적의 후손으로 신분을 숨기고 상놈으로 살면서 겪어야 했던 조상들의 처절했던 차별의 경험은 백범의 평민의식과 저항정신의 우너천이 되었다. 그런데 1947년 국사원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백범일지]는 친필본에 없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첫 줄을 시작하면서 기존의 이러한 인식을 완전히 뒤엎고 있다.

43 내가 열 살 무렵에 그 어른이 돌아가셔서 텃골 동쪽 기슭에 묻혔다. 나는 그 무덤 앞을 지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감사의 절을 올렸다.

47 백범의 이러한 성품과 튼튼한 기질은 서대문형무소에서의 모진 고문을 이겨내는 등 고난에 찬 삶의 역정을 굽힘없이 헤쳐나가며 한국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48 순전히 옳지 못한 일에 대한 불평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힘을 믿고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욕보이는 자들을 보기만 하면 [수호지]의 영웅들처럼 멀고 가까운 사이를 가리지 않고 조금도 참지 못하는 불같은 분이셨다. 그래서 인근 상놈들은 아버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고, 양반들은 무서워서 피했다.

50 "너희 집안의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 때문이니 너마저 또 술을 입에 댄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을 할지언정 그런 꼴은 안 보겠다."

나는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겼다.

51 평상시에 한마디씩 건네주는 말 속에, 때로는 눈물이 찔끔거리도록 매섭게 꾸짖는 말 속에 그분의 소박하되 의기 서린 인품이 고스란히 배어나오곤 했다. 곽여사는 쉬운 한글 몇자와 아라비아숫자를 읽을 정도로 배운 것은 없는 분이었다. 그러나 많은 교육을 받은 어느 지식인 못지않게 침착하고 대범하고 경우가 밝은 분이었다.

52 "진사는 어찌하여 되는가요?"

"진사 급제는 글공부를 하여 큰 선비가 되어 과거를 보아서 되는 것이다."

이말을 들은 뒤로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했다. 아버님께 서당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버님은 주저하셨다. 

55 나무하는 것이 처음이라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그 동네 큰서당에서 밤낮으로 들리는 책 읽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말할 수 없이 슬펐다.

56 "밥 빌어먹기는 장타령(동냥꾼들이 구걸하면서 부르는 노래)이 제일 이라고,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이나 배우거라"

그리하여 나는 땅문서 짓기, 소장 쓰기, 축문 쓰기. 혼서문 쓰기. 편지 쓰기 등을 짬짬히 익혀서 무식한 우리 집안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문중에서는 내가 장차 존위 한 자리는 하리라고 기대했다.

57 나는 너무 좋아서 일년 내내 날마다 밥그릇 망태기를 메고 험한 고개와 깊은 골짜기를 쏜살같이 달려서 그곳에서는 먹고 자는 학생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도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65 "너 그러면 풍수나 관상 공부를 해보아라. 풍수를 잘 배워서 명당에 조상님 산소를 쓰면 자손이 복과 재물을 누리게 되고, 관상을 잘 보면 사람 볼 줄을 알아서 착한 사람과 어진 이를 만날 수 있단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그것을 보고서야 관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겉을 가꾸는 외적 수양보다는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79 "내가 설혹 계책을 말하여도 그대가 그것을 실행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네, 요새 동학군 접주라는 자들이 어줍지 않게 하늘을 찌를 듯한 호기를 부리며 선배를 무시하는 판인데, 귿대도 그런 동학 접주의 한 사람이 아닌가? "

하고 반문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공손히 물었다.

"먼저 한번 가르쳐주신 뒤에 제가 실천하는 것을 보시고 나서 제가 다른 접주와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81 정씨 등이 밀사를 만나서 들은 내용에 따르면, 안진사는 비밀리에 나를 조사하고 "군이 비록 나이 어리지만 인품이 아까워 토벌하지 않을 터이나, 만일 청계동을 침범하다가 패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는 후의에서 밀사를 보냈다고 한다. 나는 곧바로 참모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했다. 그리하여 '저쪽이 먼저 나를 치지 않으면 나도 저쪽을 치지않고, 어느 한쪽이 어려운 지경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84 날마다 군인들에게 실탄 연습과 전술을 가르쳤다. 또한 어진 이를 초빙한다는 글을 내고 구월산 주위에 지혜 있다는 인사를 조사하여 혼자 직접 걸어서 찾아가기도 했다.

87 "이용선은 내 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뿐이다. 만일 이용선에게 죽을죄가 있다면 그것은 곧 나의 죄이니 나를 총살하라."

그러나 이동엽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부하들에게 명하여 나의 손발을 꼭 껴안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이용선만 끌고 나갔다.

잠시 뒤에 마을 어귀에서 총소리가 났다. 뒤이어 이동엽 부대는 퇴각하고, 이용선이 총살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나는 황급히 마을 어귀로 달려갔다. 이용선은 총에 맞아 죽었고, 그가 입은 옷은 전부 불타고 있었다. 나는 죽은 이용선의 머리를 껴안고 통곡했다. 한참을 울다가 저고리를 벗어 이용선의 머리를 감싸고 마을사람들을 시켜서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묻어주게 했다.

89 그러나 정씨는 "안진사가 밀사를 파견한 참뜻은 군사원조나 계략이라기보다는 나이 어린 형의 담대한 기개를 아낀 것이니 염력 말고 같이 가자"고 힘써 권했다.

93 "김석사가 패엽사에서 위험을 벗어난 뒤에 몸시 걱정되어 애써 계신 곳을 찾았으나 아직 계신 곳을 모르던 터에 오늘 이처럼 찾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첫말을 건넸다. 그러고 나서 다시 나에게 물었다.

"양친께서 생존해 계시다던데, 두 분은 편히 계실 만한 곳이 있습니까?"

"달리 계실 만한 곳이 없어 아직 본가에 계십니다."

안진사는 곧바로 오일선에게 총 가진 병사 30명을 데리고 오늘 안으로 텃골로 가서 김석사 부모님을 모시고 오되,

96 특히 안진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글로써 그와 다투어 당장은 안진사를 악평하던 조정 대관들도 일단 그와 한번 얼굴을 마주 대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경외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도 그러했다. 그는 퍽 소탈하여 무식한 아랫사람들에게조차 조금도 교만하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 위아래 모두 그와 함께 하기를 좋아했다. 얼굴 맑고 수려한 안진사의 유일한 흠이라고는 주량이 과하여 코끝이 약간 붉은 것뿐이었다.

101 고선생이 거처하는 조그마한 사랑은 온통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방 벽에는 옛 명현 달사들의 좌우명과 선생 자신이 마음 깊이 깨우쳐 얻은 문구들이 붙어 있었다.

102 당시 나의 심리상태는 매우 절박했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관상 공부에 희망을 걸었으나, 내 관상이 너무 못생겨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막막하던 차에 동학의 수양을 받아 새 국가 새 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장의 신세로 안진사의 후의로 다행히 목숨만은 보전하게 되었지만, 과연 어디에 발을 디뎌야 장차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했다.

고선생이 저처럼 나를 사랑하는 빛이 보이지만 참으로 내게 저렇게 고명한 선생의 사랑을 제대로 받을 만한 소질이 있는가? 내가 그이의 과분한 사랑을 받는다 하여도 만약 이전에 과거니 관상이니 동학을 했을 때와 같이 별 효과가 없으면 나 자신의 타락은 고사하고 도리어 고선생과 같이 순결한 양반에게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나는 고선생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저를 잘 살펴서 가르쳐주세요. 저는 불과 스무 살에 일생의 진로에 대하여 스스로를 속이고 잘못을 저질러서 허다한 실패를 겪었으니 참으로 민망합니다. 선생님이 저의 자질과 품성을 밝히 보시고 장차 취할 점이 있어 보이시거든 사랑도 해주시고 바로잡아 주십시오. 만일 좋은 사람이 될 조짐이 없어 보이면 저는 고사하고 선생님의 높으신 덕에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그것이 걱정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고였다. 고선생은 내 마음속에 그러한 괴로움이 있는 것을 보고 무척 동정하는 듯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신을 아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 성현을 목표로 하여 성현의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부터 성현의 지ㅏ위에 오른 사람도 있고 좀 모자라는 사람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포기하거나 자포자기하여 짐승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사람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 실패나 곤란을 겼었을지라도, 그 마음만 변치 않고 끊임없이 고쳐나가노라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것보다 실행에 힘써야 할 때가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는 너무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의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고선생의 이 말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리던 아이가 엄마 젖을 빨아먹는 것과 같았다.

111 사람됨이 그다지 뛰어나거나 학식이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시국에 대한 불평을 품고 무슨 일을 해보겠다는 결심은 있어 보였다. 다음날 함께 고선생 집을 방문하여 김형진의 인격을 살펴보시게 했다. 고선생도 이야기해 보더니 우두머리가 될 인물은 못 되나 다른 사람을 도와서 일을 성사시킬 만한 소질은 있어 보인다고 하셨다.

124 나는 서둘러 필통을 꺼내 필담을 시작했다. 먼저 그 무관이 물었다.

"일본이 어찌하여 그대의 원수인가?"

137 아드님이 못생겼다고 그다지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보건대 창수는 범상입디다. 인중이 짧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라든지 걸음걸이라든지..., 장차 두고 보시오.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놀라게 할는지 알겠소?' 하시더라"

146 "지금 소위 만국공법이니 국제공법이니 하는 조약 규정 가운데 국가간에 통상화친조약을 체결한 뒤에 그 나라 임금을 살해하라는 조문이 어디 있느냐?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살해했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으로, 죽으면 귀신이 되어 너희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서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163 백범은 앞의 두 가지 문제는 인정했으나 정작 치하포 사건은 부인했다. 이처럼 백범이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내 해주 감영에서 자신의 살해동기를 자백하지 않은 것은 뒤에서 보듯이 내부에 가서 조정 고관들 앞에서 자신의 일본인 살해동기를 당당하게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83 내 것이 남의 것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시무를 아는 영웅의 할 일이오.

189 교수대에 오를 시간이 반나절밖에 남지 않았지만, 먹고 책 읽고 사람들과 만나는 일을 평소처럼 했다. 그것은 고선생에게 들은 말씀 가운데 보습 단근질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궈오너라"했던 박태보의 이야기와 귀담아 들어둔 삼학사에 관한 이야기의 효험이 컸던것 같다.

190 이윽고 교수대로 끌려나갈 시간이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성현의 말씀을 되뇌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다가 성현과 동행할 생각으로 [대학]만 읽고 앉아 있었다.

198 일여덟 달 동안이나 소송에 전력하는 동안 김주경의 돈은 바닥이 났다. 그동안 아버님과 어머님이 번갈아 인천과 경성을 오르락 내리락하셨다.

199 시를 읽고 나서 곧바로 김주경에게 '그동안 나를 위하여 온 힘을 다해 준 정성에는 지극히 감사하나, 한때 구차스러운 삶을 위하여 생명보다 중한 광명을 버릴 수 없으니 과히 염려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다.

214 그 선생은 초면인데도 반말을 했다. 나는 정색을 하고 선생을 꾸짖었다.

"당신이 남의 사표가 되어 마음이 이처럼 교만하니, 어찌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소? 내가 잠시 운이 나빠 길을 가다 도적을 만나 이 모양으로 선생을 대하나, 결코 선생에게 하대를 받을 사람은 아니오."

242 달을 보되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잊으라는 뜻으로 '견월망지'의 오묘한 이치를 말해 주고, 또 칼날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참을인'자의 뜻을 가르쳐주셨다.

263 또한 유씨가 주경의 실패를 알고도 나를 살리기 위해 모험적인 일을 꾸미고 추진했다는 것도 가히 믿을 만했다. "군자는 알고도 속아줄 수 있다"는 말과 같이 내가 이만큼 알고도 끝내 피하거나 자취를 감춘다면 그 또한 의롭지 못한 것이다.

267 창수라는 이름이 드러내놓고 쓰기에는 몸시 불편하다면서 성태영과 유완무는 내 이름과 호를 고쳐 지어주었다. 이름을 김구라 하고 , 호는 연하, 자는 연상으로 했다.

"연산 이천경이나 지례 성태영은 다 나의 동지입니다. 우리는 새로 동지가 생길 때마다 반드시 몇 곳으로 돌려 달포씩 함께 지내면서 각자 관찰한 것과 시험한 것을 종합해서 어떤 사업에 적당한 자질이 있는지를 판정합니다."

274 그러므로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전국 인민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건전한 2세 국민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모아서 국민에게 나라가 망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흥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멸망에서 벗어나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281 저주하리로다, 해주 서촌의 양반들이여! 자기네가 충신의 자손이니 공신의 자손이니 하며 일반 백성을 소나 말처럼 여기고 노예처럼 대하던 기염은 오늘 어디에 갔는가!... 구식 양반은 군주 한 사람에게만 충성하여도 자자손손이 그 혜택을 입었거니와, 신식 양반은 삼천리강토의 이천만 민중에게 충성을 다하여 자기 자손과 이천만 민중의 자손에게 만세토록 복된 음덕을 남길지라. 이 얼마나 훌륭한 양반이냐.

292 비록 약혼은 깨어졌으나 나는 쾌활하고 시원스럽게 결단을 내리는 신호의 도량을 보고 더욱 흠모하게 되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294 "주사는 경성에 살아서 장련이 산골 군임을 모르시나 봅니다. 장련군에도 땔나무는 충분하여 다른 군에 의지할 필요가 없소이다. 나는 멀리 해주까지 땔감을 구하러 오지 않았소. 그대가 본부에서 파견된 사명은 묘목을 잘 관리하여 나눠주고 심게 하는 것이거늘, 이같이 묘목을 말라죽게 해서 위혐하여 나눠주니 책임소재를 분명히 알아야만 하겠소. 나는 관찰사에게 이 사유를 보고하고 그냥 돌아가겠소"

내 말에 겁을 먹은 주사는 애써 나를 달랬다.

"장련에 갈 묘목은 그대가 직접 살아 있는 것으로만 골라 가져가시오.`"

329 서대문 감옥의 국사범 강도,

왜놈들이 밤을 꼬박 새우면서 신문하고 온 힘을 다해 자신들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는 것을 볼 때 스스로 부끄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씹어대는 저 왜구처럼 밤새워 일해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내게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411 고국 탈출,

자식들에게도 아비된 도리를 조금도 못했으니, 내가 아비라 하여 너희들에게 자식된 도리를 다해주기도 원치 않는다. 다만 너희들은 사회의 은혜와 보살핌으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스스로 사회의 아들이라는 마음으로 사회를 알고 부모처럼 효도하면 더 이상바랄 것이 없다.

447 나는 지난 세월 인물이 모자라 경험 부족한 탓에 숱한 과오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것을 진솔하게 기록하여 둠으로써 해외와 고국에 있는 동지들이 거울로 삼아 다시 나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455 임시정부에 운명을 맡기다.
이대통령이 취임 시무할 때에는 중국 인사는 물론이고 눈 푸르고 코 높은 서양 친구들도 더러 임시정부를 찾아왔지만 이제는 한 사람도 찾아오는 이가 없다. 서양사람이라고는 공무국의 프랑스 순경이 왜놈을 데리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세금 독촉하러 오는 것이 전부였다.

495 살신성인,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
"제 나이 이제 서른입니다. 앞으로 30년을 더 산다 한들 늙은 생활이 과거 반생 동안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보다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나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고 싶습니다."(이봉창)

508 뜻이 있으면 반드시 성공한다.
"제가 채소 바구니를 메고 날만다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오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럭저럭 중일 전쟁도 중국의 굴욕적인 태도로 정전협정이 성립될 모양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죽을 만한 마땅한 자리를 구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는 동경사건과 같은 경 륜이 계실줄 믿고 찾아왔으니, 저를 믿고 지도하여 주시면 그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509 그런데 이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해보니 살신성인의 크고 의로운 뜻을 품은 의기남아가 아닌가. 나는 감복하여 말했다.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일을 이룬다고 했으니 안심하시오.내가 요즘 연구하는 바가 있으나 마땅히 사람을 구하지 못해 고민하던 참이었소. ...."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이제부터 가슴속에 한 점의 번민도 없이 편안해 집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511 그러는 가운데 4월 29일이 점점 다가왔다. 일본식 양복을 사입은 윤 군은 날마다 홍구공원으로 가서 식장 설비며 거사할 위치 등을 살펴보았다. 시라카와 대장의 사진을 구해서 얼굴을 익히고, 일장기도 샀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느낀 바를 말했다.

512 "여보. 그게 무슨 말이오. 사냥꾼이 꿩이 날아갈 때 쏘아 떨어뜨리는 것이나, 수풀 속에서 자고 있는 사슴은 쏘지 않고 달아날 때에 쏘는 것은 통쾌한 맛을 즐기기 위함이오. 내일 성공할 자신감이 없어 그러시오?"
"아닙니다. 오늘 그 놈이 내 곁에 선 것을 보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을 뿐입니다."

"내가 치하포에서 쓰치다를 죽이려고 할 때 가슴이 울렁거렸으나, 고능선 선생이 가르쳐주신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그다지 대단할 것은 없으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은 놓을 수 있어야 장부라 할 수 있다.'는 구절을 떠올리고 마음이 가라앉았소. 군과 나의 결심 행동이 서로 같은 까닭이 아니겠소?"



527 피신과 유랑의 세월
"자네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한다고 하였네. 하나 유감인 것은 이운한 정탐꾼도 우리 동포이니, 우리 동포의 총을 맞고 살아난 것은 왜놈의 총을 맞고 죽는 것보다 못하네."

567 "단군 한배의 피를 가진 놈이면 왜적의 개질을 하는 놈이라도 나를 해치지 못하리라 믿었습니다."

568 중경시대."통일은 찬성하지만 김약산은 공산주의자요. 만약 선생이 공산당과 합작하여 통일하는 날이면 우리 미주 교포와의 인연은 끊어지는 줄 알고 통일운동을 하시오."

595 우리 일행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왔지만 국내 동포들은 '임시정부 환영회'라고 크게 쓴 글씨를 태극기와 함께 푸른 하늘에 휘날리며, 수십만 겨레가 모두 나와 대대적인 시가행진을 하니, 만리 해외에서 온갖 풍상을 다 겪은 고통을 알고 동정하는 듯 싶었다.

597 해방 전후의 임시정부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그것은 네게 기쁜 소식이라기 보다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었다. 몇 년 동안 고생하면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진실로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앞으로 닥칠 일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620 고국에 돌아와서
48년 전에 중이 되어 굴갓을 쓰고 목에 염주를 걸고 바랑을 지고 드나들던 길로 좌우를 살펴보며 천천히 들어가니, 옛 모습 그대로의 산천이 나를 반겨주는 듯했다.

636 나의 소원
옛날 한나라 땅에 기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엿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않으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 지고 어찌하랴.

647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3. 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는 무엇보다 본인이 직접 본인의 인생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정리해 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백범일지는 소설과 같은 긴박감과 재미를 끌어내고 있다. 사실적인 설명이나 묘사 위주의 글쓰기여서 전후,사실 관계가 분명하다. 단지 인간의 한계인 망각이나 착각 등으로 인한 오류를 제외하고 말이다. 사실의 서술만으로 그의 자서전은 한 편의 소설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본인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일생을 아들들에게만은 남기고 싶어했다. 그의 나이 53세, 상해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1년에 걸쳐 상권을 집필하였고 뒤 이어 중경 1호 임시정부 시절인 67세(1942년) 에 하권을 마저 집필하였다.

상권은 서문 '인 신 두 아들에게 주는 글'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권은 머리말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윤봉길 의거와 1937년 중일 전쟁의 결과로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되어 사회적 정세가 일부 호전된 듯 했지만, 한편으로 앞날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해외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상권이 주로 백범의 개인사적인 성장 과정과 독립운동의 이력을 소개하고 있다면, 하권은 임시정부의 활동과 정황들이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김구 선생의 생을 함께 읽어나가다 보면 마음 속에 가장 강하게 떠오르는 화두는 바로 ‘어떤 것이 그에게 죽음도 무섭지 않은 용기를 가져다 주었을까? ‘이다. 어떻게 신념이라는 것이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목숨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백범 일지에서 종종 드러나는 그의 목숨에 대한 미련 없음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보통의 사상은 아니다.
단순하고 무지할 정도로 꾸준히 실행시킨 독립에의 의지, 교육에의 의지는 한 인간의 끈기와 한계도 보여준다.

도대체 그에게는 어디서 그러한 지속성과 열망이 생겨났던 것일까?
너무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본성이 너무 무지할 정도로 순수한 사람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대단한 일들을 해낸 그이지만 그의 사상과 가치관은 단순하고 또 단순하다. 그에게는 오로지 그것 하나만이 보였고 밀고 나갔을 뿐이다. 하지만 그 실천 자체가 최고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백범일지를 풀고 보탠이, 배경식의 책 구성면에서 장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일지를 올바르게 풀어 쓰려고 많은 애를 썼다. 사이사이에 '깊이읽기'라는 박스형 설명을 삽입하여 읽는이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이해하기 애매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또한 당시의 상황 상황 마다 지도와 사진을 삽입하였고, 어려운 용어는 괄호로 하여 보충설명하였다.

소제목을 많이 달아 놓으므로써 독자에게 쉽게 주제를 파악하도록 하였다.

감동적인 글은,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내가 치하포에서 쓰치다를 죽이려고 할 때 가슴이 울렁거렸으나, 고능선 선생이 가르쳐주신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그다지 대단할 것은 없으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은 놓을 수 있어야 장부라 할 수 있다.'는 구절을 떠올리고 마음이 가라앉았소. 윤 군과 나의 결심 행동이 서로 같은 까닭이 아니겠소?"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 및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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