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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7일 10시 14분 등록
 

북리뷰14-백범일지-20100607


1. 저자에 대하여


백범 김구(1876~1949)


1876년 7월 11일(양력 8월 29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현재의 벽성군 운산면)에서 부친 김순영, 모친 곽낙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구의 조상은 원래 양반이었으나 역모에 휘말려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해 상놈으로 신분을 숨기고 숨어 살았다. 아명은 창암(昌巖)이었는데 14살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그 자국이 남았다고 한다. 양반이 아니었지만 부친의 배려로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지만 부친의 병환으로 그만둔 후,  정문재의 서당에서 당시와 대학을 배웠다, 17세에 과거에 응시했다가 포기한 후 관상서와 지리서를 공부하고 병서를 탐독한다.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 접주가 되고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꾼다.

19세에 보은에서 동학교주 최시형을 만나고 해주에서 동학기병, 구월산 패엽사에 진을 친다. 1891년 21세 나이에 청나라로 가다가 중단하고 돌아오는 길에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한 죄명으로 5월 11일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구금되어 7월 인천 감리영 이감된다. 10월말 경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국모보수’라는 말을 본 고종의 선처로 사형이 극적으로 정지된다.

23세에 마곡사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하였는데 24세에 평양 극암 최재학의 소개로 대보산 영천사 방주가 되고, 9월에 환속한다. 1900년 25세에 김두래(金斗來)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며 김경득의 집에서 학동을 가르친다, 유완무를 만나 함께 서울로 온 후 삼남지방을 돌며 우국지사들과 교제를 한다. 이름을 구(龜), 호를 연하(連下), 자를 연상(連上)으로 바꾸고 고향으로 돌아온 바로 다음달 12월에 부친이 사망한다. 1902년 27세에 장연 사는 최여옥과 약혼하고 예수교인들과 친분을 갖고 신교육을 장려한다. 1903년 28세에 약혼녀가 사망하고, 오인형의 집에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장련 공교 교원이 된다. 이후 장련 농부 종상위원이 된다. 신천 사평동의 최준례와 결혼한다.

30세가 되던 1905년에 을사조약을 계기로 진남포 에벳 청년회 총무 직책으로 경성 상동에 가서 전덕기, 이준, 이동녕 등과 을사조약 철회를 상소하는 등 구국운동에 참여한다. 33세에  서명의숙 교사가 되고 첫딸이 태어나나 이듬해 딸이 사망한다. 34세 된 1909년 양산학교 교장으로 취임되었고, 해서 교육 총회를 조직하고 학무총감, 제령 보강 학교 교장에 취임한다. 이해에 안중근 의사 의거에 연루되어 2차 투옥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다. 35세에 신민회 비밀회의에 참석한다. 이해에 둘째딸이 출생한다. 36세에 안명근 사건 관련 3차 투옥되어 15년형을 언도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된다, 39세에  감옥에서 이름을 김구(金九), 호를 백범(白凡)으로 고친다. 40세된 1914년 7월에 가출옥되고 안산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한다. 세 딸은 출생 후 얼마되지 않아 모두 사망하는 악운을 맞지만, 43세 늦은 나이에 첫아들 인(仁) 출생한다. 1919년 44세에 삼일 운동을 계기로 상해로 출국한다. 4월 11일 임시정부가 성립되고 국무총리에 이승만이 선출되고 백범은 경무국장에 취임한다. 9월 임정 총리제를 대통령제로 변경한 뒤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취임한다.

부인과 아들 인(仁), 모친이 모두 상해로 이주하고 둘째아들  신(信)을 47세에 얻는다. 1927년 52세에 임시헌법을 수정하였고, 국무령제를 국무위원제로 바꾸고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53세에 [백범일지] 상권 집필을 시작하여 이듬해 상권 집필이 완료된다. 1931년 56세 상해 한인거류민단장 겸임, 12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한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상해 흥구공원 의거 배후 조종한다. 1933년 남경에서 장개석과 면담하고, 한국독립당 등 5개 정당 대표가 남경에서 회동하여 합당을 결의하고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지만 이때 김구는 배제된다. 1933년 남경으로 이주 한후  1936년 임시정부가 남경으로 이전된다. 1937년 62세 8월 남경에서 광복진전을 결성하고, 중일전쟁 발발로 임정 대가족과 함께 12월 호남성 장사로 이주한다.

1938년 9월 남해현에 임정 사무실 설치,  11월 경 중국정부 임시수도인 중경 도착, 임정과 대가족은 광서성 유주에 도착한다. 1939년 김약산과 민족주의 단일당 통일선언 후 1940년 3당 통일로 한국독립당을 창설하고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했다. 10월 임정 임시 헌법에서 국무위원제가 주석제로 바뀌면서 초대 주석에 선출된다. 1942년 67세에 [백범일지] 하권을 집필한다. 1945년 70세에 미군 측과 작전 협의차 서안으로 간다. 일본이 항복하고 고국이 해방되고 나서 상해를 경유하여 환국 후 12월 반탁운동을 전개한다. 1946년에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고 1947년 국민회의 부주석에 취임한다.  국사원에서 현대어 역 [백범일지]가 간행된다. 1948년 김규식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남북협상을 마치고 조국통일에 관한 공동성명서를 발표 귀환한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36분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을 맞고 사망한다. 7월 5일 국민장으로 장례 후 효창공원에 안장된다,  
           

백범 김구선생님의 생애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연소된 듯하다. 아들들을 위해 기록한 자서전도 개인적인 감정이나 행위보다는 대의를 위한 선택과 결단에 초점이 맞춰져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과 그의 의지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아름다운 고국을 위해 모두 사용된 것이어서 개인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21세기를 자유롭게 사는 우리는 김구선생님을 보면서 자주 국가가 주는 자유로움을, 너무나도 당연히 여기고 있었던 자유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새겨봐야 할듯하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저자의 말

[P. 3] 이글을 쓸 생각을 한 것은 내가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서 내 몸이 언제 죽음이 닥칠지는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에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두 아들에게 내가 지낸 일을 알리자는 동기에서 였다.

[P. 3]유서 대신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이후에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에는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아니하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고하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P. 4]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이 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고 저희끼리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P. 4] 오늘날 우리의 현상으로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P. 5] 무릇 난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어니와, 개인이 나고 죽은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젊은 것이다.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혀야 한다. 

[P. 5] 나는 내가 못난 줄을 잘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하여온 것이다. 이것이 내생애요, 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P. 5] 내가 이 책을 발행하기에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임으로써이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 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만 것은 대한 사람이면 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P. 5]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백범일지 상권

인(仁) ․ 신(信) 두 아들에게 주는 글  

[P. 11] 내 나이 벌써 쉰 셋이건만 너희는 겨우 열 살, 일곱 살 어린이들인즉, 너희의 나이와 지식이 점점 늘어갈수록 나의 정신과 기력은 쇠퇴할 뿐 아니라, 내 이미 왜놈들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지금 사선(死線)에 서 있음에랴.

[P. 11] 지금 이글을 쓰는 것은 너희가 나를 본받으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너희도 또한 대한민국의 국민 일원인즉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들 중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을 택하여 스승으로 섬기는 일에 있을 뿐이다, 


선조와 가정 

[P. 13] 우리의 조상은  안동 김씨이나 김자점(金自點)씨의 방계라. 당시 자점씨가 반역죄를 저질러 온 집안이 멸망의 화를 당할 때, 우리 선조는 처음에 고양군으로 망명하였다가 그곳이 역시 서울과 가까워 다시 멀리 해주읍에서 서쪽으로 80리 떨어진 백운방 텃골 팔봉산 아래 양가봉 밑으로 옮겨가 숨어 살았다. 

[P. 13] 우리 선조들도 양반이 싫어 상놈 행세를 즐겨 하였을리는 없지만, 자기가 김자점의 집안임을 숨기고 멸문지화를 면하기 위해 일부러 상놈이 된 것이다.

[P. 15] 당시 노비 이정길은 우리 문중이 가난하여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고 하는데, 문중에 혼사나 장례가 있을 때는 이정길이가 와서 봉사하였다하니 소위 종의 종이었던가 보다. 우리네보다도 더 흉악한 운명을 가진 사람도 있던 것이다. 

[P. 15] 부친 순영씨는 4형제중 둘째이시니, 집안이 가난하여 아내를 맞아들이지 못하고 노총각으로 계시다가 24세 때 소위 삼각혼(三角昏)이라는 기괴한 혼제를 실시하였으니 삼성(三姓)이 각기 혼기를 맞은 자녀를 서로 바꾼 것이다.

[P. 15] 모친은 꿈에 푸른 밤송이에서 붉은 밤 한 톨을 얻어서 감추어 둔 것이 태몽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출생 및 유년시대

[P. 16] 내 일생이 너무도 기구한 징조이던지 유례없는 난산이었던 것이다. 모친의 진통이 있은지 근 일주일에 모친의 생명이 위험하며 친족 전부가 모여 의학적으로 혹은 미신을 동원하여 모든 시험을 다하였으나 효력이 없은즉 자못 황급한 중에 어른들이 강제로 태부가 소의 길마를 쓰고 지붕에 올라가서 소 울음을 내라고 하는데, 부친이 못하겠다고 하자 종조부가 엄명을 내려 그것까지를 한 후에 내가 나왔다.

[P. 16] 내가 서너 살 때 천연두를 앓았다는데, 여러 군데 농이 생기자 모친께서 예사 종기 치료하듯 침으로 농을 터뜨려 짜냈으므로 내 얼굴에 천연두 흉터가 크게 남게 됐다는 것이다.

[P. 17-18] 엿이 먹고 싶어서 방문 걸쇠를 걸고 엿장수를 불렀다. 주먹으로 문구멍을 뚫고 부친께서 자시는 좋은 숟갈을 발로 디디고 부러뜨려-그것은 헌 숟갈이라야 엿을 주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절반은 두고 절반은 문구멍으로 내보냈더니 엿장수가 엿을 한 주먹 뭉쳐서 들여보내 주는지라, 그것을 잘 먹던 즈음에 부친께서 들어오시는데, 엿과 반동강 난 숟갈은[감출 수 없어] 그 대로 가지고 있다 부친이 질문하시기에 사실대로 고하였다. 부친은 말씀으로만 나무라시고 다시 그런 짓을 하면 엄벌을 주겠다고 꾸중하셨다. 

[P. 17] 그다음에는 부친께서 엽전 20냥을 가져다가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넣고 나가시는 것을 보았다. 또 혼자 심심은 하고 앞동 구걸이 집에서 떡을 파는 줄을 알았다. 돈을 전부 꺼내어 온몸에 감고서 문 앞을 나섰다. ...........그 뒤로  부친이 들어오셔서 일언반구 없이 나를 발랫줄로 꽁꽁 동여 들보 위에 매어달고 회초리로 때려서 아파 죽을 지경이라.   

[P. 18] 한때는 여름 장마비로 근처에 샘이 솟아서 작은 시냇물이 흘렀는데, 나는 붉은 물감과 푸른 물감을 통째로 꺼내다가 양쪽 시냇물 상류에 풀어놓고 청천 홍천이 합류하는 특이한 모습을 구경하다가 어머니에게 몹시 매를 맞은 일도 있다.

[P. 22] 어머님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 집의 허다한 풍파가 거의 술 때문에 생겨나니, 두고 보아서 너도 또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을 하였어도 내 꼴은 안보겠다. ” 나는 이 말씀을 깊이 새겼다.


학동시대 

[P. 24] “네가 늘 우등을 하였으니 이번ㅇ는 네가 글을 일부러 못외는 것처럼 하고 내가 물어도 모른다고 대답하여라” 나는 그리하오리다. 하고 선생 부탁과 같이 하였으니 그날은 신존위 아들이 장원을 했다고 고주살계(沽酒殺鷄) 하여 한끼 잘먹었다. 그러나 결국은 그 선생이 해고되었으니 진실로 소위 상놈의 짓이었다.

[P. 26-27 문중에서는 나에게 바라고 기대하기를 장래 상당한 존위의 자격만 얻으면 족하겠다고 하지마는, 나는 그때 학문의 정도가 겨우 글을 얽어 맞추는데도 통감을 읽을때에 ‘황후나 장상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겠는가’ 하던 진승의 말과 ‘검을 뽑아 뱀을 쳐죽이던’ 유방의 행동이나, ‘빨래하는 노파에게서 밥을 얻어 먹던  한신의 사적을 볼 때에는 부지불식간에 양어깨에 바람이 돋았다. 그리하여 어찌하든지 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 하나, 집안이 가난하여 집을 떠나 고명한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형편은 되지 못한즉 아버님은 심히 고민하신다.

[P. 28-29] 과장에는 노소 귀천이 없이 무질서한 것이 전래의 풍습이라 한다. 또 가관인 것은 늙은 선비들의 걸과(乞科) 하는 모습이니, 관풍각 새끼그물에 머리를 들이밀고 청하여 말하기를 “소생의 성명은 아무개이옵는데 먼 시골레 살면서 과거시험마다 참가하여 금년 70여세올시다, 요 다음은 다시 못 참가하겠습니다. 초시라도 한번 합격이 되면 사무여한(死無餘恨)이올시다” 하며 혹은 고함을 지르고 혹은 목 놓아 울어대니 비루(鄙陋)해 보이기도 하고 가련해 보이기도 하다. 

[P. 29] 또 괴이한 말은, 돈만 많으면 과거도 할 수 있고 벼슬도 할 수 있으며 글을 모르는 부자들이 거유(巨儒)의 글을 기백 냥 기천냥씩 주고 사서 진사도 하고 급제도 하였다고 한다.

[P. 30] 서울 아무 대신에게 편지를 써 부쳤으니까 반드시 된다고 자신하는 사람, 아무개는 시관의 수청 기생에게 붉은 비단 몇필을 선사하였으니 이번에는 꼭 과거를 한다고 자신하는 자도 있더라, 나는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모양의 과거를 한다면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내가 장래를 개척하고자 혈심(血心)을 다하여 공부를 하는 것인데, 선비의 유일 통로인  과거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인즉 나라일이 이 지경이면 내가 시를 짓고 부를 지어 과문육체(科文六體)에 능통한다 하여도 아무 선생 아무 접장 모양으로 과거 시험 장소의 대서업자에 불과할지니, 나도 이제는 앞으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과거 보러가서 불쾌한 느낌과 비관적인 생각만 품고 집에 돌아왔다.  

[P. 31] 과거 시험에서 얻은 비관을 털어버리기 위하여 [상서]를 공부하던 것이 그 이상의 비관에 빠졌다. 짐승과 같이 살기나 위하여 살까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상서]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 얼굴 좋은 젓이 몸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호상인(好相人)보다 호심인(好心人)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굳게 정하여진다, 

이제부터는 외적 수양은 어찌되든지 내적 수양을 힘써야만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동학접주

[P. 36] 나는 예품을 가지고 곧 가 입도를 하고 동학 공부를 열심히 한다. 아버님도 이어 입도를 하셨다.

[P. 36]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서 “그대가 동학을 하여 보니 무슨 조화가 나더냐?”고 물으면 나는 정직하게 “諸惡莫作 衆善奉行(제악막작 중선봉행:모든 악을 저지르지 않고 선을 행하는것)이 동학의 조화입니다.” 라고 하지마는, 듣는 자들은 자기네들에게는 그런 조화를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남에게 전파하기를.

“김창수-그때부터 나의 이름- 가 한길 이상 공중에게 보행하는 것을 보았다.” 라고 한 것이다. 이오전오(以誤傳誤:잘못된 것을 가지고 잘못되게 전함)하여 점점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호아해도 일대는 물론이고 평안남북도에 까지 나를 따르는 연비가 수천에 달하였다.

[P. 51]나의 그때 심리상태로 말하면 제일먼저 과장에서 비관을 품었다가 희망을 [상서] 공부로 옮기었고, 자기 상격이 너무 못생긴 것을 비탄하다가 호심인(好心人)이 되리라는 결심을 하였고, 호심인이 되는 방법이 묘연하던 차에 동학의 수양을 받아 가지고 신국가 신국님을 꿈꾸었으나  이에 와서 보면 그도 역시 포풍(捕風:바람잡기)이고, 이제 패군지장의 신세로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서 생명만은 편안히 보존하지마는, 장래를 생각하면 어떤 것에다가 발을 붙이고 진로를 취함이 가할까 하는데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던 즈음이라, 고선생이 저처럼 나를 사랑하는 빛이 보이지마는 참으로 내가 저러한 고명한 선생의 사랑을 바로 받을 만한 소질이 있는가?

[P. 52] 고선생은 나의 마음에 고통이 있음을 극히 동정하는 말로,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용이한 일이 아니어든, 항차 타인을 밝히 알 수 있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하고 성현의 발자취를 밟아 가는 중에 고래로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미치지 못하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기까지는 아주 요원하다 하여 중도에 옆길로 빠지거나, 도한 자포자기하여 짐승과 다름없이 되는 자도 있느니라. 자네가 호심인 되려는 본의를 가진 이상에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 실패나 곤란을 겪을을지라도, 본심만 변치말고 개지불이(改之不已: 끊임없이 고쳐나감) 진지불이(進之不已:끊임없이 정진함) 하노라면 목적지에 달하는 날이 필시 있으리니 지금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는 역행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모요, 고민은 쾌락의 본이니 자네는 상심말게. 나같은 노부도 자네의 앞날에 혹시 보탬이 있다면 노부도 영광이 아닌가?” 한다. 나는 고선생의 말씀을 듣고서 위안만 될 뿐 아니라 젖을 주리던 어린아이가 모유를 빠는 것과 같다.

[P. 53] “자네가 그같이 결심하면 나의 안광(눈빛)이 미치는 데까지 자네 역량이 있는대로 내게 있는 만큼은 자네를 위하여 진심(盡心: 마음을 다 기울여 씀) 할 터이니 젊은 사람이 너무 상심말고 매일 나와 같이 놀세. 갑갑할 때는 우리 원명이와 산구경도 다니며 놀게.”

[P. 53] “무슨일이나 바로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출발점에 과단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

[P. 53-54]  得樹攀枝無足奇 懸崖撒手丈夫兒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살수장부아 : 가지를 잡고 오르는 것은 누구나 할수 있는 것이되/ 벼랑에서 잡은 가지마저 놓을 수 있는 사람이 가히 장부로다)

[P. 55] 나라는 망하는데 국내의 최고 학식을 가졌다는 산림학자(山林學者:벼슬을 하지 않는 재야의 덕망있는 이름난 학자) 들도 세태를 돌탄(咄嘆:혀를 차며 탄식함)할뿐이지 어떠한 구국의 경륜이 있는 자 보이지 않음이 큰 유감일세. 나라 망하는데도 신성하게 망함과 더럽게 망함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

[P. 56] “나라가 신성하게 망한다 함은 일반 백성이 옳음을 위해 끝까지 싸우다가 적에게 복몰(覆沒:배가 엎어지듯 아주 기울어 망함)을 당하여 망함이요 더럽게 망한다 함은 일반 백성이 적에게 아부하다가 적의 술수에 떨어져 항복하고 망함일세. 지금 왜놈의 세력이 전국에 횡일(橫溢)하고, 궐내까지 침입하여 대신을 제 마음대로 출척(黜陟:내어 쫒고 들어 씀)하고, 모든 시정이 제2 왜국이 아닌가. 만고천하에 무장존불망지국(無長存不亡之國: 오래 가서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음)이요, 만고천하에 무장생불사지인(無長生不死之人: 오래 살아 죽지 않는 사람이 없음)인즉 자네가 나는 일사보국(一死報國: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충성함)의 한 가지일만 남았네.”

[P. 56] “그런데 망할 것으로 하여금 망치 않게 할 방법은 없습니까?“  ”자네 말이 옳으네. 기왕에 망할 나라라도 망치 않게 힘써 보는 것도 백성의 의무이지. 우리는 현 조정 대관들 모양으로 아첨을 하지 말고 상호 협조적으로 청국과 결탁은 할 필요가 있지. 상당한 인재가 있으면 이제 청국에 가서 사정도 조사하고 인물도 사귀었다가 후일에 동성상응(同聲相應: 한묵소리로 서로 동조함) 하면 절대 필요하니 자네 한번 가보려나?“ ”저 같은 연소몰각(年少沒覺: 나이 어리고 지각이 없음) 으로 간들 무슨 효과를 얻으리있가?“


청국시찰

[P. 60] 그 다리를 지나니 조선 4대물의 하나인 장승 4개가 좌우 길 옆에 마주 서 있다. 나무로 만든 인물상인데 머리에 사모를 쓰고 얼굴은 적색으로 칠하고 눈을 부릅떠 위엄있는 형상이다, 조선 4대물이란 것은 경주 인경(봉덕사종) 은진미륵, 연산철, 함흥 장승 이것들이다.  

[P. 73] ‘지자막여부(知子莫如父:자시을 아는데는 아버지가 제일이다) 라고 하나. 내가 노형보다 좀더 알는지 알겠소? 아들에게 다하여 못생겻다고 근심마시오. 내가 보건대 창수는 호상(범의 상)입니다. 이중이 짧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나 걸음걸이를 보면 장래 두고보시오.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경동케 할는지 알겠소?’ 그러그러 약혼을 하였다. 

[P. 73] 나는 고선생이 그같이 나에게 촉망하고 자원하여 손녀를 허락함에 대하여 책임이 중하고 성의를 감당키 어려운 감이 있으나, 그 규수의 자품이나 상당한 가정 교육을 받은 잠으로나 만족스런 마음도 있다.

[P. 75] “나의 장래에 몸과 마음을 위탁할 만한 사람을 물색하기에 많은 심력을 소비하여 자네를 만났고, 더욱이 미혼이므로 혼사까지를 성약한 것인데 이런 괴변이 어디 있겠나, 그러면 혼사는 다시 거론하지 않기일세. 그러나 지금 관리가 단발한 후에는 평민에게도 실행할 터이니 자네는 시급히 몸을 피해 발화를 면하게. 이 노부는 발화가 미치면 죽기로 작정하네”  


국모보수

[P. 79] 이렇게 하여 죽을 마음을 작정하자 흉해(마음의 바다)에 풍정낭식(바람이 가라앉고 풍랑이 멈춤) 하여 백가지 계책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내가 방안 40여명 투숙인, 동네사람 수백명을 무형의 노끈으로 꽁꽁 동여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저 왜에게는 불안한 상태를 보이면 방어할 준비를 할 터이니 그 놈도 안심시키고 나 일개인만 자유자재로 연극을 펼치리라는 방법을 편다,

[P. 83] “왜논, 우리 조선의 사람만 원수가 아닌즉 바다 속에 던져서 어별까지 즐겁게 뜯어 먹도록 하여라.” 하고 이화보를 불러서 필기구를 대령하라 하여 몇줄의 포고문을 썼다. 국모보수(國母報讐: 국모의 원수를 갚음)의 목적으로 이 왜를 타살하노라.  하고 끝줄에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 써서 통로의 벽 위에 붙였다.

[P. 84] “사람의 일은 광명하여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살기만 도모하는 것은 장부의 일이 아니라.”

[P. 84] “금번 왜를 죽임은 개인 감정의 이유가 아니요. 국가 대치(大恥:큰 치욕)를 위한 행동인즉 구구히 피신할 마음이 있다면 당초에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실행한 이상에는 자연히 법사(法司) 의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때 가서 일신(一身) 을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하면 수사유영(비록 죽어도 영광 됨)c이옵니다. 자식 소견에는 집에 앉아서 당할 대로 당하는 것이 의로움에 지극히 가당(可當)할 줄 생각합니다.” 하였다. 아버님도 다시 강권을 아니 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집이 흥하든 만하든 네가 알아서 하여라. ”


투옥

[P. 91] 옥안이 극히 불결하고 아직 뜨거운 여름이라, 나는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려 고통이 극도에 달하였다, 좁은 소견으로 자살을 생각하고 동료 죄수들이 잠든 때를 타서 이마에 손톱으로 ‘충(忠)’ 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매 드디어 절식(絶息:숨이 끊어짐)되었다 절식된 그 짧은 시간에 나는 고향에 가서 평시에 친애하던 사촌동생 창학이와 놀았다.

고시의 고언장재목 혼거불수초(고향이 항상 눈앞에 아른하니/굳이 부르지 않아도 혼백은 이미 가 있도다)가 실로 헛된말이 아니로다, 홀연 정신이 회복되니 동료 죄수들이 고함하여 죽는다고 소동을 한다. 그 자들이 나의 죽음을 위하여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절식될때에 무슨 격렬한 요동이 있었던 것이더라. 그 후로는 여러 사람의 주의로 자살할 여가도 없으려니와, 병마가 죽여서 죽든지 원수가 죽여서 죽든지 죽여져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어도 자살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P. 94] “......나는 땅에 금을 그어 이것이 감옥이라 하여도 그 금을 넘을 사람이 아니다. 내가 당초에 도망할 마음이 있었다면 왜놈을 죽이고 주소 성명을 갖추어 포고를 하고 내집에 와서 3삭이나 체포를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너희 관리배가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내게 이런 박대를 하느냐?“

[P. 95] 이화보는 불려가서 신문당할 때나 옥중에서나 “김창수는 지용을 겸비하여 누구도 당해낼 수가 없으며, 하루 칠백리를 걷고 한끼에 일곱 그릇 밥을 먹는다”고 선전을 하고, 내가 감옥에서 야단을 할 때나 죄수들이 소동할 때나 이화보 자기가 앞서 한말이 부합이나 되는 것처럼 떠든다.

[P. 95] 다음날부터는 옥문 앞에 지면면회(처음만나 인사하기 위한 면회)를 청하는 인사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다, 그것은 감리서. 경무청. 순검청. 사령청 등 수백명 직원이 각각 자기의 친한 사람들에게 ‘제물포 개항된 지 9년 즉 감리서가 설립된 후 처음 보는 희귀한 사건’이라 자랑 겸 선전을 한 까닭이더라.


[P. 98-101]

이후로 옥중 생활의 대강을 열거하면

 1. 독서
아버님이 오셔서 [대학] 한질을 매입하여 주시므로 늘상 [대학]을 동송하였다.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즉어도 좋다) 격으로 내가 죽을 날을 당하는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하고 수불석권(手不釋卷:손에서 책을 떼지 않음)한다. 감리서 직원들이 종종 와서 신서적을 열심히 읽는 것을 보고 매우 좋아하는 빛이 보인다.

2. 교육

내가 문자를 가르쳐주마 한즉 그 수도(囚徒)들이 문자를 배워 자기가 후일에 긴히 사용할 마음보다 내게 잘못 보이면 날마다 진수성찬을 얻어먹을 수 없는 고로 배우는 체만 하는자 많다. 

조덕근은 [대학]을 배우는데 ‘인생팔세 개입소학(人生八歲 皆入小學)’을 고성태독(高聲太讀:큰 소리로 읽음)하다가 ‘개입(皆入)’ 두글자를 잊고 ‘개아가리 소학’이라고 읽는 것을 보고서 절도(絶倒:기절하여 넘어짐)하게 웃은 일도 있다.


3. 대서

김창수의 쓴 소장은 모두 승소한다고 와전이 되어 심지어 관리의 대서까지도 하는 일이 있다. 대서만이 아니라 인민을 궁지에 빠뜨리고 금전을 강탈하는 사건이 있으면 상급관리에게 권계(권계: 타이르도록 함)하여 파면시킨 일도 있으니 압뢰들이 나를 꺼리어 수인들을 학대하지 못하였다.


사형 선고

[P. 102] 아침에 [황성신문]을 열람한즉 -지금까지 기억되기는 7월 27일로 생각된다- 강도 누구 누구, 살인 누구 누구, 인천에는 살인 강도 김창수를 처교(處絞:교수형에 처함)한다고 기재되었다.

나는 그 기사를 보고 고의로라도 자약(태연자약)한 태도를 가지려고 할 터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마음에 놀라는 동요가 생기지 않는다. 단명대에 갈 시간이 반일 남았지만 음식과 독서며 남과 대화를 평상시처럼 하고 지낸다. 그것은 고선생(고능선)의 강의 말씀 중에 박태보가 보습(쇠로 만든 농기구) 단근질 고문을 당할 때 ‘차철유냉갱자래(이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던 일화와 삼학사(三學士)의 역사를 힘 있게 들었던 효험으로 안다.

[P. 103] 끌려나갈 시간은 되었다. 그때까지 성현의 말에 잠심(潛心:깊이 생각함)하다가 성현과 동행할 생각으로 [대학]만 읽고 앉았으나 아무 소식이 없어 그럭 저럭 저녁밥을 먹었다. 여러 사람들이 창수는 특수(特囚:특별한 죄수) 인즉 야간 집행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사령 친전 정형(大赦令 親電 停刑)

[P. 104-105] “아이구 이제는 창수 살았소” ................각 죄수의 문건을 넘겨가며 보일세 ‘국모보수’ 4자가 눈에 이상히 보여서 재가 수속을 거친 안건을 다시 빼어다가 임금에게 뵌즉 대 군주가 즉시 어잔회의를 열고 의결한 결과, 국제관계니 아직(일단) 생명이나 살리고 보자 하여 전화로 천칙하였다 한다. 

어찌 되었든지 대군주-이태황(李太皇)-가 친히 전화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때 경성부 내는 이미 전화가설이 된지 오래였으나 경성 이외에는 장도전화(장거리 전화)가 인천까지가 처음이요, 인천까지의 전화가설공사가 완공된지 3일째 되는 날 -병신 8월 26일- 이라. 만일 전화 준공이 못되어도 사형 집행되었겠다고 한다.

[P. 105] 동수들부터 참말 이인(異人)으로 안다. 사형을 당할 날인데 평소와 똑같이 언어 음식 동작을 한 것이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을 미리 아는 듯 하였다 한다. 관리들 중에도 그렇게 아는 사람이 있고, 누구보다도 어머님이 그날 밤에야 감리가 대군주 친전을 받고 어머님에게 전지를 하여 비로소 아시고 나를 이인으로 아신다. 

[P. 106] 대군주 친칙으로 김창수의 사형이 정지되었다는 소문이 전파됨에  전일에 와서 영결(永訣:영원히 이별함) 하던 인사로부터 치하면회(축하면회) 하러 오는 사람이 옥문에 답지하므로 옥문 내에 자리를 하고 앉아서 몇 날 동안 응접을 하였다. 

[P. 109] 脫籠眞好鳥 拔扈豈常鏻 求忠必於孝 請看依閭人 (탈농진호조 발호기상린 구충필어효 청간의려인 : 새장을 벗어나니 진정한 새요/ 힘껏 날뛰니 보통의 물고기가 아니로다/ 충신은 반드시 효과가 있는 집에서 찾을 수 있으니/ 청컨대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바라보시오)

이시를 읽고 김주경에게 ‘그간 나를 위하여 몸과 마음으로 고생을 다함은 지극히 감사하나 일시 구생(苟生:구차히 삶)을 위하여 생명보다 중한 광명을 버릴 수 없다, 과히 염려치말라 ’ 는 뜻으로 회답을 하고서 그대로 옥중생활을 계속하여 구 서적보다 신학문을 열심히 보고 있다.

[P. 111] 다만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인즉 왜놈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내가 옥에서 죽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아닌가? 심사숙려하다가 파옥(破獄:옥을깨뜨림)하기로 결심하였다.


파옥(破獄)

[P. 113] 조덕근, 양봉구, 황순용, 김백석은 다 내가 자기네들을 옥문 밖에 내어 놓을줄 믿으나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는 감히 묻지도 못하고, 자기들 생각에 나는 결코 도주하지 않을 줄 믿는 모양이다. 

[P. 117] 허즉실 실즉허(虛卽實 實卽虛:허함이 곧 실함이요 실함이 곧 허함) 격으로 대로변에 숨으리라 하고 살펴보니 인천서 기흥 가는 대로변에 동송(어린 소나무)를 길러 드문 드문 방석솔(가지가 옆으로 넓게 펴져 자란 소나무) 포기가 한 개씩 섰다. 나는 그 솔 포기 밑으로 두 다리를 들이밀고 반듯이 드러누워 본즉 얼굴만 드러났다. 얼굴은 솔가지를 꺽어 가리었다.

[P. 118] “ ........그중 김창수는 잡기가 제일 어려울걸 “ ”관연 장사야, 창수만은 잘했지. 갇히어 있기만 하면 무엇하나.“

[P. 121] 조덕근과 상의한즉 나는 자기보다 중죄인이니 이미 출옥한 바에 다시 보아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고 잡아떼는 수작이더라. 세상 내가 퍽도 어리석다, 파옥하고 내가 먼저 나와서 단신으로 쉽게 달아나려다 가 그가 나에게 애걸하던 모습을 생각하고 이중의 함한 곳에 다시 들어가서 그 자들을 위험지대는 다 면케 하여 준  것인데, 지금 내가 적수(맨손)로 자기를 찾았을 줄 알고 나를 보면 금전의 해가 있을까 거절하누나, 그 사람에 그 행실인즉 심히 책망할 것 없다 하고 돌아와서는 다시 가지 않는다, 

[P. 129] 임금이 ‘경은 어인 일로 여러 사람 중에 홀로 웃느냐’ 물은즉, 화담이 아뢰되 ‘오늘밤 마곡사 상좌승(주지승) 이 밤을 새워 팥죽을 끊이다가 졸음을 못이겨 죽 솥에 빠져 죽었는데 여러 중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죽을 퍼먹으며 희히낙락하는 것을 생각하니 우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곧 파마발을 놓아 하루 낮밤 3백리 마곡사에 가서 조사한 바 과연 그러했더라는 문구를 아버님이 소설로 이야기하시던 것이 연상된다,

[P. 131] 양반의 낙지(살기 좋은곳) 는 삼남이요, 상놈의 작지는 서북이로다, 내가 해서 상놈이 된것이 큰 행복이지, 만일 삼남 상놈이 되었던들 얼마나 불행하였을까.


치도(緇徒)

[P. 134] “절에 들어가 보아서 중이 되려는 자와 중을 만들 자 사이에 의견이 합하여야 될 것이 아니오”

[P. 136]나는 하룻밤 사이에 청정 법계(번뇌없이 깨끗한 불도의 세계)에서 만년묵회(만가지 생각이 무두 재로 변한다) 라. 중이 되기로 숭낙하였다. ......나의 상투가 모래위에 특떨아진다. 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함께 눈물이 둑뚝 떨어진다.

[P. 137] “생기기는 미련스럽게 되어서 고명한 중은 되지 못하겠다, 얼굴은 저다지 밉게 생겼을까 어서 나가서 물도 긷고 나무도 쪼개어라 ”

[P. 137]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허영적 야욕적 심리는 즉 악마라서 불씨(佛氏) 문중에는 한 치도 용납할 곳이 없고, 만일 이 같은 악념이 마음에 싹틀 때는 곧 호법선신(護法善神)을 의뢰하여 물러치지 않으면 아니될 터이라. 하도 많이 돌아다니더니 나중에는 별세계 생활을 다하겠다며 자소자탄(스스로 웃고 탄식함)을 마지 아니하나 순종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장작도 패고 물도 긷는다.

[P. 137] “전에도 사람들은 괜찮다는 것들을 상좌를 데려다 주면 못 견디게 굴어서 다 내쫓았는데 금번 원종이도 잘 가르치면  장래에 제 앞 쓸이는 하겠는걸. 또 저모양을 하니 몇날이나 붙어있을까.” 그 말에 좀 위로가 된다.

주간에 노역을 하고 야간에는 보통 중의 본분인 예불절차와 [천수경][심경]등을 외우고 수계사 용담 사주는 불학의 요집인 [보각서장]을 가르친다.

[P. 143] 儒傳千歲佛千勢 我亦一般君一般 (유전천세불천세 아역일반군일반 : 유가도 천년이어지고 불가도 천년이어진다/ 나도 평범한 사람이요 그대들도 평범한 사람이로다) 이 있다. 

[P. 146] 만일 문맹으로 있었으면 동학 두령이나 또는 인천 사건이 없겠고, 순전한 텃골의 한 농부로 경전식착정음( 耕田食鑿井飮 : 밭을 갈아 음식을 먹고 우물을 파 물을 먹음)하고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이 없었을 것은 명백하도다.

[P. 153] “뱀의 꼬리를 붙들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터이지요”

[P. 159] 우리 할머님 임종시에 아버님이 단지(손가락을 자름)를 하심도 이런 절박한 지경에서 행한 일이니, 내가 단지를 할 것 같으면 어머님의 마음이 상하실 터이니 나는 할고(割股: 허벅지 살을 베어냄)를 하리라 하고, 어머님이 안계실 때를 타서 왼쪽 허벅지에서 살코기를 한점을 떼어서 고기를 불에 구워서 약 삼아 잡수시게 하고, 흐른 피를 마시워 드린다.

[P. 161] “지금 약혼을 한다 하여도 내가 해상(3년상을 마침)후에 성례할 터이니 그 기한 이내는 낭자가 나를 선생님이라고 하고 한문 공부를 정성껏 하다가 해상 후에 성례할 조건을 이행한대야 됩니다. “ 할머님 ”여보게  혼인하여야 데려다가 공부를 시키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네 마음대로 할 것 아닌가?“ ”근 1년동안의 세월을 허송할 필요가 있습니까?“

[P. 163] “당신이 나와 혼인할 마음이 있으며, 또는 성례하기 전에는 나에게 학문을 배울 생각이 있는가?”

[P. 163] 계부의 말은 이세상에서 참으로 어수룩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야소교(耶蘇敎)와 교육자

[P. 172] 7년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즉 자기 집인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 재신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외에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대 모였던  동지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여, 나도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P. 178] 나라가 죽게 되니까 국내의 중견세력을 가지고 온갖 못된 위세를 부리던 양반부터 저 꼴이 된 것이 아닌가, 만일 양반이 있음으로 국가가 독립할 수 있다면 나는 양반의 학대를 받아도 나라만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난다.


재차투옥(하얼빈 사건)

[P. 182]구류를 당한댔자 며칠 후 훈계방면될 것으로 알았는데, 하얼빈 사건의 혐의라면 좀 길게 고생하리라고 생각된다.

[P. 183] 나에게 지방에서 일본 관헌과 반목하는 증거인 ‘김구’라고 쓴 백여쪽의 책자 하나를 내놓고 신문한다. 내용은 전부가 나의 수년간 각처에서 행동하는 것을 경찰이 보고한 것을 집성(集成)한 것이더라. 결국은 불기소로 방면되었다.

[P. 187] 이현에서 이의사가 군밤장수로 가장하고 길에서 밤을 팔다가 이완용을 칼로 찔러서 이완용은 생명이 위험하고, 이의사와 김정익, 김용문, 전태선등은 체포된 사건이 신문에 게재된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으면 역적 이완용의 생명 결말이 확실할 것인데, 사람을 볼줄 모르는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탈취하였기 때문에 충분한 성공을 못함이로다, 한탄과 후회가 그칠 줄 몰랐다.

[P. 188] 국가는 병합된 후이다. 국가가 합병의 치욕을 당한 당시 이정은 심히 흉흉하다. 원로대신들 중에 자살하는 자들과 내외 관인 중에도 자살하는 자 거다(다수를 차지함)하고, 교육계에는 배일 사상이 극도에 달하고 오직 불문불식항 농민들 중에는 합병이 무엇인지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자도 많다.

나부터 망국의 치를 당하고 나라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을 때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곧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나옴과 같이 나라가 망하기는 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 같이 생각된다. 그리하려면 후생(후배)으로 하여금 애국심을 양성하여 장래에 광복케 할 도리 외에 다른 방법이 없으리라고 생각되어, 계속 양산학교를 확장하여 중소학부의 학생을 더 모집하고 교장의 임무를 충실히 하였다.


삼차투옥(15년역) 

[P. 193] 위태롭고 어려운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 ‘바람이 세게 불어야 강한 풀을 알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 참된 신하를 안다. 는 옛 교훈과 고후조 선생의 강의 내용에 사육신. 삼학사의 지사불굴(죽음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음)하던 말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

[P. 194] “너가 어찌하여 여기를 왔는지 알겠느냐?” 였다. 나는 ” 잡아오니 끌려올 뿐이고 이유는 알지 못하노라“ 하였다. 다시는 묻지도 않고 수족을 결박하여 천정에 달아맨다. 

[P. 194] 처음에 성명부터 신문을 시작하던 놈이 촛불을 켜놓고 밤을 꼬박 넘기는 것과, 그놈들이 힘과 정성을 다하여 사무에 충실한 것을 생각하니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P. 196] “나의 가슴에는 엑스 광선을 대고 있어 너의 일생 행동에 대하여 일체의 비밀스러운 것까지 명백히 알고 있으니 한치의 숨김없이 자백을 하면 그만이거니와 만일에 숨김이 있을 터이면 이 자리에서 때려 죽일 터이다.”
[P. 197] 나는 공포보다는 ‘너의 가슴에 붙였다는 엑스 광이 병이 나지를 않았는냐’ 하는 우스운 생각이 나서 ............’

[P. 198] 그러고 본즉 국가는 망하였으나 인민은 망하지를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에게 공격을 받은 정탐배까지도 자기가 잘 아는 그 사실만은 밀고를 하지 않고 왜놈에게 대하여 비밀을 지켜준 것이 아닌가.  .........사회에서 나에게 이같은 동정을 주었으니 나로서는 최후 남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동지를 위하여 분투하고 원수의 요구에 불응하리라 결심하였다.

[P. 198] “나의 생명은 빼앗을 수 있거니와 내 정신은 빼앗지 못하리라” 란 말을 하면 왜놈은 혼을 내며 위협을 하지마는 내말을 들은 동지는 견고한 마음을 가지더라.

[P. 199-200] 왜놈의 신문하는 방법이 대략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흑형이다. 채찍과 몽둥이로 난타하는 것이다.  ..........둘째는 굶주리게 하는 것이다, ........그밖에 한 가지는 온화한 수단으로 좋은 음식도 대접하고 훌륭히 장식한 명성의 방으로 데리고 가서 지극히 점잖게 대우하는 것이다. 이 바람에 흑형에 인내한 자도 그 자리에서 실토한 사람을 더러 알 수 잇다. 내가 체형에는 한 두 번 참아보았고 저놈이 발악을 하면 나도 감정이 발하여 자연 저항력이 생기므로 능히 참아내었으나,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참기 아주 어려운 경우를 겪었다. 

[P. 200] “차철유냉갱자래(此鐵猶冷更煮來:이쇠가 시었으니 더 달구어 오너라)” 라고 했던 구를 암송하면서 동절이라 그리하는지 겉옷만 벗기고 서양직물로 만든 속옷은 입은채로 때릴 때에 ‘속옷을 입어서 아프지 않으니 속옷을 다 벗고 맞겠다’ 하여 매번 알몸으로 매를 맞아서 살점이 떨어져 나갈 뿐 아니라 온전한 살가죽이 없다. 

[P. 201] 나도 남에게 해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먹을까. 도한 아내가 묘년(妙年:꽃다운 나이)이니 매신을 하여서라도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매일 조석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더러운 생각이 난다.

[P. 202] 같은 방에 있는 이종록은 어린 청년이라 따라 온 친척이 없으므로 사식을 갖다줄 사람이 없는데, 방안에서 먹게 되면 나눠먹겠으나 반드시 사식은 방 밖으로 따로이 먹게 하므로 종록이 먹고 싶어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음이라, 내가 방밖에서 바을 먹다가 고기 한덩이와 밥 한덩이를 입에 물고 방안에 들어와서 입속에서 도로 꺼내어 마치 어미새가 새끼를 물어 먹이듯 하였다.

[P. 204] “젖먹이 무렵의 유아는 부모나 존장에게 경어를 사용치 못한대도 탓할 수 없으나, 너와 같이 어른된 표시로 상투도 짜고 초립도 쓰고서 부모와 학교의 어른에게 공대할 줄을 모르니 그러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느냐?” 물었다. 두환은  “그러면 언제부터 공대를 하오리까?” 묻는다 내 대답은 “잘못인 줄 아는 시간부터니라.”

[P. 205] “우리 두환이 놈이 어제 저녁에 학교에서 돌아와서 내게 공대를 하고 저의 모친에게는 전과 같이 ‘해라’를 하더니 깜짝 놀라 ‘에고 잘못했습니다.’하고 말을 그치며 선생님 교훈이라고 합니다. 선생님 진지 많이 잡수시고 그놈 교훈하여 주십시오. 밥 맛 좋은 쌀이 들어왔기로 좀 가져 왔습니다.”

[P. 210] 동지들은 전부가 그곳에 함께 복역하게 되니 매일 서로 대면함으로도 족히 위로가 되고 간간 말로도 정을 통하고 지내는 고로 고중락의 느낌이 된다.

[P. 210] 나의 심리 상태가 체포이전 이후에 대변동이 생김을 스스로 느끼겠다.

[P. 211] 이를 연구하여 보면, 경시 총감부에서 신문을 받을때에 도변(渡邊)이 놈이 17년후에 다시 마주앉아 금일에 김구가 17년전 김창수인 것도 모르는 놈이 대담히 자기 가슴에 X광선을 붙여서 나의 출생이후 지금껏 일체 행동을 투시하고 있으니 일호라도 숨기면 당장 타살한다고 허세를 부리던 때로부터 시작된다. 태산만큼 크게 상상하던 왜놈이 겨자씨와 같이 작아보이고 무릇 7회나 질식된 후에 냉수를 끼얹어 회생시킴을 당하여도 심지는 점점 강고(强固)하고 왜놈에게 국권울 빼앗긴 것이 우리의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으로는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음을 명약관화(明若觀火)로 생각된다.  

[P. 212] 옥규(감옥규칙)에 보면 수인들이 서로 담화를 하거나 무슨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그러나 말을 많이 하고 소식도 서로 신속하게 통한다. 40명에 가까운 우리 동지들은 무슨 말이나 의견을 충분히 교환하고 지낸다.

[P. 213] “전일에 전옥장 덕으로 돌없는 밥을 먹는 것은 감사하나 의복에 이가 끓어서 잠을 잘 수가 없고 개어서 이 때문에 온몸이 근지러워서 견디기 난하오. 구한국시대 감옥에는 수인이 자기 집의 의복을 갖다 착용할 수 있었으나 대일본의 문명한 법률은 그도 불허가인즉 이처럼 불결한 의복을 입으면 질병이 생길까 염려되오.”  한즉 즉시로 각 감방에 새 의복을 들여오고 헌옷은 증가 기계를 사용하여 간간 소독하여 주는 고로 다시는 이  잡는 사람이 없었다.

[P. 216] 食人之食衣人衣 所志平生莫有違 (식인지식의인의 소지평생막유위 :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품은 뜻을 평생 어기자 말아야 한다.)를 망각 하였느냐. 네가 자소지로(젊을때부터 늙을때까지)에 스스로 밭갈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짓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먹여주고 입혀줌이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데 순종하라고 힘이더냐?

[P. 217] “내가 입감(入監) 이후에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하루를 살면 하루가 욕되고, 이틀을 살면, 이틀이 욕되니 굶어 죽기로 생각한다,...” 나는 쾌히 찬성하였다. “가능하거든 단행하시오” 그날부터 명근 형은 단식한다. ......하나 눈치빠른 왜놈들이 병원으로 이감하여 놓고 진찰하여 보아야 아무 병이 없으므로 명근 형을 뒷짐지우고 계란을 풀어서 억지로 입에 부어 넣는다. 이봉변을 당한 명근 형은 나에게 기별한다. “제(아우)는 부득이 금일부터 음식을 먹습니다” 하더라. 나는 전하여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이 자유자재라는 부처님이라도 이곳 문에 들어서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니 자중하라.”


옥중생활

[P. 221] 표면으로 나도 붉은 옥을 입은 복역수이나, 정신상으로 나는 결코 죄인이 아니다, 왜놈의 소위 신부지민(식민백성)이 아니고 나의 장신으로는 죽으나 사나 당당한 대한의 애국자이다.

[P. 222] 내게 대하여는 함부로 못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으니, 수인 중에 정수분자(精秀分子)인 이재명의사의 동지들이 모두 일ㅇ에 능통하여 왜놈들에게 대신임을 받는데 그 사람들이 나에게 대하여 극히 존경하는 것을 보았으니 수인들에게 임시 신문할 시는 통역들에게 미움을 사고서는 자기에게 직접 해가 돌아올까 하는 것이 첫째요 둘째는 내가 날마다 밥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본즉 후일에 소망이 있음이라.

[P. 224] 감옥의 고통은 하절과 동절 두계절이 더욱 심하니, 하절에는 감방에서 수인들의 호흠과 땀에서 증기가 발하여 서로 얼굴을 분간 못하게 된다.

[P. 225] 그놈들이 내게 대하여는 유달리 대우를 하는데, 복역시킨다고 말만 하고 실지는 복역을 아니 시킨다. ............동수들도 잠결에 나의 수갑이 몸에 닿으면 죽는다고 야단이니 좀 넓은 방에 거처할 생각으로 그리(옴 걸린 모양을) 하여 계획이 맞아 들었으나, 모처럼 이야기를 좀 하다가 이 봉변을 당한 것이다.

[P. 231] 대장을 부르는 통지로는 각도 각지의 책임자에게 부하 누구누구 몇 명을 보내라 하면 어김없이 행하는데, 흔히 큰 시장이나 시찰로 부르게 됩니다. 소명을 받고 길을 떠나는데 돌림장수(떠돌이 행상인)로, 중으로 상제로 양반행차로 등짐장수로 별별 형식을 다 가장하여 가지고 갑니다. 

[P. 234] “........입당식에는 책임 우사가 정석(正席)에 앉아 자격자를 앞에 꿇어앉히고 입을 벌리라 한뒤에 검을 빼어 검끝을 입안에 넣고 자격자에게 호령하기를 ‘아래위 이발로 검끝을 힘껏 물라’ 고 한뒤에 검을 잡았던 손을 놓고 다시 호령하기를 ‘네가 하늘을 쳐다 보아라 땅을 내려다 보아라 나를 보아라‘ 한뒤에 다시 검을 입에서 빼내 갑(匣:칼집 혹은 상자)에 넣고 자격자에게 선고하여 왈 ’너는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사람을 안즉 확실히 우리의 동지로 인정한다.‘ 합니다. 식을 마치고는 입당자를 데리고 예정방침에 의하여 정식으로 강도질을 한차례 한후 신입당원까지 평균히 재물을 나누어 주고 몇 번 만 동행하면 완전한 도적놈이 되어집니다“

[P. 241] “자본없는 장사는 걸인과 도작이지요. 더우기 도적질에 입맛을 붙이면 별수가 없습니다. ..... 도적질하다가 징역한 놈이라고 누가 받기를 하오?”


출국(出國)

[P. 255] “독립이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사를 계획 진행하여야 할 터인즉 나의 참. 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어서 만세를 부르라.”


경무국장(警務局長)

[P. 258] 나는 안씨(안창호)에게 정부 문지기를 청원하였다. ........“내가 미국에서 보는 바에 특히 백궁(白宮:백악관) 만 수호하는 관리를 둔즉 우리도 백범같은 이가 정부 청사를 수호케되는 것이 좋으니 국무회의에 제출하여 결정하겠다.”

[P. 258]  “백범이 다년 감옥생활에 왜놈의 실정을 잘 알터인즉 경무국장이 합당하다고 인정되었다.” 한다. “나는 순사의 자격이 되지 못하는데 경무국장이 어찌 합당한가?” 한즉 도산은 강권하기를 “백범리 만일 사양하면 청년 차장들의 부하되기가  싫다는 것으로 여러 사람이 생각할 터이니 사양하지 말고 공무를 수행하라.” 고 한다. 나난 부득이 응낙하고 취임 시무하였다.

[P. 259] 경무국에서 접수한 내지 보도에 의하면 왜놈이 나의 국모보수 사건을 24년만에 비로소 알았다 한다. 이 비밀이 이같이 장구한 세월, 하물며 양서에는 인인개지(人人改知: 사람마다 모두 알고함) 하던 일을 그같이 오랫동안 지내어 온 것은 참으로 희기(드물고 기이함) 하다 하겠다.

[P. 260] 민국 5년(1923)에 내무총장으로 시무하였다.


국무령(國務領),  국무위원

[P. 261] 동년(1927) 11월에 국무령으로 피선되었다.

[P. 261] 나의 60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리(常理)에 벗어지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이 없겠고 궁하면 귀가 없을 것이나 나는 귀역궁 궁역궁(貴亦窮 窮亦窮: 귀한 몸이어도 궁하고 궁한몸이어도 궁함)으로 일생을 지낸다.



백범일지-하권 

자인언(自引言)

[P. 267] 하권은 중경 화평로 오사야항 1호 입시정부 청사에서 67세 집필

[P. 267] 본지 상권은 53세 시에 상해 불란서 조계 마랑로(馬浪路)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1년여의 시간을 가지고 기술하였나니 그 동기로  말하면 약관(20세)에 투필(붓을 놓음) 하고 나이가 근 이순(60세)이 되도록 대지(大志)를 품은 채 나의 약한 역량과 고루한 재주도 불고(돌아보지 않음)허고, 성공과 실패를 불계(계측하지 않음)하고, 명예와 수치도 불문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0여년을 분투하였으나 일무소성(하나도 이룬게 없음)이라

[P. 268]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6-7자 지움] 하여금 나의 50년 분투사적(奮鬪事跡)을 열람하여 허다한 과오를 거울삼아 경계하여 다시 이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P. 268] 전후 정세를 논하면 상권을 기술하던 시 임시정부는 외인(外人)은 고사하고 한인으로는 국무위원과 십수면 의정원 이외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없으니 당시 일반의 평판과 같이 명존이실무(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음)이었으나, 하권을 기술하는 시는 의원 위원들의 석양빛 시들한 기운도 싹 가시고 내(內), 외(外), 군(軍), 재(財) 4부의 행정이 비약적으로 진전되었다고 할만하다.

[P. 269] 어떤 사람이 묻기를  ‘필경은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하면 나의 최대 욕망은 독립 성공 후에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음이나, 아주 작게도 미국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가 비행기 위에서 죽어지면 시체를 투하하여 산중에 떨어지면 금수의 뱃속에 바다에 떨어지면 어류의 뱃속에 영장하는 것이다, 

[P. 269] 세상은 고해라더니 생역난 사역난(生亦難 死亦難: 살기도 어렵고 죽기도 어려움)이다. 타살보다 자살은 결심이 곧 강하면 용이하염직하지마는 자살도 자유가 있는데서 가능한 것이다,


정의 신민 참의부

[P. 286] 남북 만주의 독립운동 단결체로 정의부(正義部), 신민부(新民部), 참의부(參議部)

 외에 남군정서 북군정서 등 각 기관에 동산당이 침입하여 각 기관을 여지없이 파훼하고 인명을 살해하니 백광운(白狂雲), 정일우(鄭一雨), 김좌진, 김규식 등 우리 운동계에 없지 못할 건장(健將)들을 다 상실하였고, 그로 인하여 내외지 동포의 독립 사상이 날로 감쇄(減殺)되었다. 


국무위원(國務委員)

[P. 288] 상해 정세도 대략 양패구상(兩敗俱喪: 둘로 나뉨에 둘이 패하면 함께 죽는 형국)이나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으로 민족진영의 잔해만은 남았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인재난도 심하고 경제난도 심하여 정부제도도 이승만이 교체되고 박은식이 취임하면서 대통령 제도를 변경하여 국무령제로 하였다.

[P. 288] “첫째는 이유될 것 없고, 둘째는 백범 곧 출산(出山: 은자가 산을 벗어나 세상에 나옴) 하면 지원자들이 있은즉 쾌히 응낙하여 의정원에 수속을 밟고 곧 조각하여 무정부상태를 면케하라.”

[P. 292] 미. 포. 묵. 큐(미국. 하와이. 멕시코. 쿠바) 동포들이 이 같은 애국심을 가지고도 어찌하여 정부에 정성을 다하여 바치는 것이 소홀하였던가. 다름이 아니라 정부에서 1년에도 몇 차례씩 각료들이 바뀌고 헌법도 자주 변경되었는데 따라 정부 위신이 추락된 원인이고, 도는 정부 사정을 자주 알게도 하지 않아서 동포들이 정부를 불신임 하였던 것이다.


이봉창(李奉昌) 투탄

[P. 295] 이왈 “내가 거년(작년)에 동경에 있을 때 천황이 능행(임금이 능에 거동함)한다고 행인을 포복하라고 하기에 엎드려서 생각하기를 내게 지금 폭발탄이 있다 하면 용이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나는 젊은이들 음주하는 주방으로 흘러 나오는 이씨의 말을 유심히 듣고 저녁에 이씨가 머무는 집을 조용히 방문하였다. ..............“제 나이 30세입니다. 이 앞으로 다시 30세를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반생 생활에 방랑생활을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 하면 30년 동안 육신으로는 인생 쾌락을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쾌락을 도모키 위하여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하고 상해로 왔습니다” 나는 이씨의 위대한 인생관을 보고 감루영광(감동의 눈물이 눈에 가득 참)을 금치 못하였다.

[P. 296] 수류탄은 두 개를 휴대케 하는데 한 개는 일천황을 작살(터뜨려 죽임)하고, 한 개는 자살용으로 정하고 사용법과 만일 자살이 실패하는 시 체포되면 신문에 응할 답변 내용을 지시하였다.  

[P. 298] 1월 8일 신문에 ‘이봉창 저격 일황 부중: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하였으나 실패함’이라 등재되었다.

[P. 298] “일황이 즉사한 것만은 못하나 우리 한인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은 것을 웅변으로 증명함이니 족히 성공으로 간주하겠고, 지금부터 백범은 주의하라.”

[P. 289-299] “10여년래에 법국(불란스)에서 김구를 극히 보호하여 왔으나 이번에 김구가 부하를 보내어 일황에게 부탄한 사건에 대하여 일본이 반드시 체포 인도를 조회할 터인즉 불란서가 일본과 개전 결심을 하기 전에는 김구를 보호키 불능하다. ”

[P. 300] 나의사는 총과 폭탄을 품고 수년전에 경성에 잠입하여 동양척식회사에 들어가 7명의 일인을 사살하고 자살하였고, 이승춘은 천진서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윤봉길(尹奉吉) 의거

[P. 303] “금일 홍구에 가서 식장 설비를 구경하는데 백천이 놈도 와서 제(弟)가 그놈의 곁에를 섰을 때에 하대명일고(何待明日-: 어찌 내일을 기다릴까) 오늘 작탄을 가졌던들 이제 당장 쳐죽일 터인데 하고 생각나던데요. ” 한다.

[P. 305] 흥구공원에서 중국인이 작탄을 던져서 다수의 일인이 즉사하였다는 둥, 고려인의 소행이라는 둥, 우리 사람들도 엊그제 까지 채소 바구니를 메고 닐마다 흥구로 다니면서 장사하던 윤봉길이 경천동지(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듦) 의 대사건을 연출할 줄이야. 김구 이외에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몇 사람만이 짐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흥(嘉興) 피신

[P. 318]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이 만들어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리 민복의 실생활은 도외시하고 주희(朱熹:朱子) 학설 같은 것은 그대로보다 주희 이상으로 강고(强固)한 이론으로 주창함으로 사색당파가 생기어 수 백년 싸움질만 하는데 민족적 원기가 다 소모되고 남은 것이 없으니 발달된 것은 오직 의타심뿐이라. 망하지 않고 배기리오.


장개석(蔣介石) 면담

[P. 321] 장씨 의견을 대신 말하기를 “특무 공작으로는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지 않은가. 장래 독립하려면 무인(武人)을 양성하여야 하지 않은가? ”함에 나의 대답은 “고소원불감청(固所願不敢請:간절히 바랐지만 감히 청하지 못하였음) 이다. 지대(장소)문제, 물력(재정)문제이라”

[P. 321] 지대는 낙양분교(洛陽分校: 중앙군사학교 낙양분교)로 물력은 발전을 따라 공급한다는 약속하에 군관 백명씩 1기에 양성하기로 결의하고 동삼성에 사람을 보내 니전 독립군인들을 소집할 제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김창환 등 장교와 그 부하 수십명의 청년들과 관내 북평 천진 상해 남경 등지에 있던 청년을 총소집하여 백명을 제1차로 입교하게 하고, 이청천, 이범석은 교관 영관으로 입교 시무케하였다.


오당통일 논의

[P. 322] 이때 우리 사회에서는 또다시 통일풍이 일어나 대일전선 통일 동맹의 발동으로 의론이 분분하더니 하루는 의혈단장 김원봉 군이 특별회면을 청하기로 남경 진회 해안가에서 밀회하였다.

[P. 322] 그로부터 소위 5당 통일회의가 개최되니 의열단, 신한독당(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미주대한인독립당이 통합하여 조선 민족 형명당으로 출세(出世:세상에 나옴)되었다.


망명가정(亡命家庭)

[P. 328] 상해우리생활은 극도로 곤란하다.

[P. 330] 모친은 안악 계시면서 동경사건이 발생된 후 주택을 포위하고 순사대가 며칠을 경계하였고, 흥구사건에는 더욱 심하였다. 나는 비밀히 보고하였다. “모친 께서 아해놈들을 데리고 다시 중국에 오셔됴 연전과 같이 기아는 당치 않을 정세이오니 나올수만 있으시거든 오십시오.” 하였더니 모친께서는 본시 용감하기로 다른 여류가 미치지 못하나니 안악 경찰서에 출국원을 제출하였다. 이유는 연로사무기일하니 생전에 손자 둘을 데려다가 아비에게 맡기겠다는 것이다.
[P. 331-332] “나는 지금부터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책하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이유는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린다니,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 보아주자는 것일세 ”


광동(廣東)이전

[P. 336-337] “양반의 집에서 화재가 마녀 사당부터 옮겨 나오거니 우리 혁명가로 의바 부인을 윤함구에서 구출함 이상의 대 급선무가 없다. ”


대가족(大家族)

[P. 345] 우편으로 온 서신이 아니고 인편으로 보낸것인데 신봉빈이란 여자가 상덕(尙德) 포로수용소에 포로의 1인이 되어 해방하여 주기를 청원한 진정서다.

[P. 345] 나는 백번 생각하여도 아 편지가 오게 된 내력을 알수 없다, 

[P. 348] 망국 이래 왜구에게 온가족 도륙당함이 무릇 몇백 몇천이랴마는 기미 독립 선언 이래 상해에서 운동하던 장면에는 이명옥 군이 당한 참사가 첫째자리이라 하겠다. 무릇 우리 동포 자손들에게 한마디 남기노니 광복 완성후에 이명옥 일가를 위하여 충렬문을 수안 본향에 세워 영구 기념케 하기를 부탁하여 두노라.


그후의 일들

[P. 358] 첫째로 본 것은 심리학적으로 모험에 능한 자, 슬기가 있어서 정탐에 능한자, 눈과 귀가 밝아서 무선전선에 능한 자를 고르는 것이었다. 이 시험이었다. 일곱 청년은 잠깐 모여서 의논하더니 그들의 숙마바를 이어서 한길 바를 만들어, 한 끝을 바위에 매고 그줄을 붙들고 일곱이 다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 입에 물고 다시 그 줄에 달려 일곱이 차례 차례로 다 올라왔다, 시험관은 이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중국 학생 4백명을 모아놓고 시켯건마는 그들이 해결치 못한 문제를 한국청년 일곱이 훌륭하게 하였소. 참으로 한국 사람은 전도 유망한 국민이요” 

[P. 359] 다음에는 폭파술, 사격술, 비밀히 강을 건너가는 재주같은 것을 시험하여 다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을 보고 나는 만족하여 그 날로 두 곳으로 돌아왔다.

[P. 362] 이 두 동포가 죽던 폭격이 가장 심한 폭격이어서 한 방공호에서 4백명이니 8백명이니 하는 질식사를 내인 것도 이때였다.

[P. 362]중경의 옛날 이름으로는 파(巴)다. 지금은 성도(成都)라고 부르는 촉(蜀)과 아울러 파촉이라고 하던 데다.

[P. 365-366]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물러나 속세 일들을 바라보니 꿈속의 일일 뿐이로다, ) 그대에는 무심히 보았던 이 글귀를 오늘에 자세히 보고 나를 두고 이른 말인 것 같았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포기와 향나무 한그루를 심고 마곡사를 떠났다.


나의 소원

[P. 369]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치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 독립이요” 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 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레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P. 369] 나는 일찍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P. 370] 나는 공자, 석거,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 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됨과 같이 이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 마치 형제도 한집에서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P. 370] 일찍이 어느 민족 내에서나 혹은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릐 충돌로 하여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사운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작인 것이요, 인족은 필경 바람 잔뒤에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P. 371]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외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주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P. 372] 내가 원하는 우리민족의 사업은 겵=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정치이념

[P. 372]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을 일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데 달렸다. 

[P. 373]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 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온다. 일 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체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P. 373] 독재 중의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독재다. ...........우리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독재어니와 이것은 수백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P. 374] 산에는 한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이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도 철학으로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P. 374-375]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 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도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P. 377]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P. 377]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P. 378]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 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친필본 주해 [백범일지]를 펴내며

[P. 387] [일지의 첫머리에서 상놈의 집안 출신임을 스스럼없이 밝혔듯이 자신의 치부를 솔직히 드러내 놓을 줄 알았다.  그것은 곧 [백범일지]에 나타난 그의 행적이 허구성을 띠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P. 387] 조국을 위한 그의 삶이 안중근 의사나 이봉창 의사의 순국으로써 저항한 의로운 행적과 비교할 때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하며,

[P. 387-388] 단신 상해로 건너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식들이 아비의 행적을 알길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 자서전을 남긴 것이다.

[P. 388] 이 책을 읽음으로써 임시정부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의 생활상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 388] 원본 윤문을 맡은 춘원 이광수가 책으로서의 구성 요건을 생각하였음인지 단순 교열을 넘어서 심지어는 원고지 2~3장 분량을 그대로 삭제하기도 하고,  또는 자기의 필력을 믿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P. 389] 친필본을 확인할 수 없었으므로 심지어 백범의 원고를 순 한문체 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P. 389] 서문당본도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는, 그것이 친필본을 저본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문당본 해제에 따르면 “이 책은 백범이 측근이어던 엄항섭을 시켜 원래의 것을 등사하게 하여 미국의 동지들에게 후세에 전하도록 당부하여 보낸 것” 즉 친필본을 베껴쓴 미국소장본을 자본으로 했다고 한다.

둘재는 국한문 혼용체에다 구식 표현인 것을 현대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려운 말을 그대로 두어 일부 문맥의 연결에 혼선이 생겼다는 점이다.  셋째는 국사원본에 비해서는 덜하지만 현대어로 윤문하는 과정에서 백범 특유의 문투가 변형되었다는 점이다. 예건대 백범은 ‘.... 하더라’ ‘.....한지라’등과 같이 당시의 문투를 대변하면서도 친근감있는 표현을 즐겨 썼는데, 이런 것들이 교열과정에서 완전히 삭제된 것이다. 

[P. 390] 백범일지 판본에는 세종류가 있다.  그중 가장 권위있는 것은 당연히 친필본이다.

두 번째 판본은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백범이 상권집필을 끝내고 이를 측근에게 필사시켜 쓰여 있으며, 필사한 측근은 엄항섭이라는 설이 현재 유력하다.

[P. 391] 세 번째 판본은 해방이후 백범의 측근이 친필본을 필사한 것이다. 이것이 고서점에 유출되었다가 이동녕 선생의 손자인 이석희씨가 입수하여 현재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일반적으로 필사본이라고 한다.

[P. 391] 1997년은 [백범일지] 출간 50주년을 맞는 해이다. 반세기의 세월을 거치면서 백범일지의 발행 종수도 그 햇수만큼이나 많고 다양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아쉬운 면도 없지 않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국민도서로 평가 받을 만큼 대중적이고 교육적 가치를 띠는 책이지만 많이 읽혔으면 하는 뜻있는 사람들의 소망이 무색하리 만치 쉽게 쓰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P. 392] 주해자 들은 이같은 문제점들이 언젠가는 해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1995년부터 초보 단계이나마 원본 [백범일지]의 복원에 일단 손을 대보자고 결심하고 몇가지 방침을 정하여 작업을 추진하였다.
첫째는 기왕에 친필본을 기초로 한 간행본이 없는 만큼 영인본을 저본으로 삼아 가장 객관성있는 [백범일지] 간행본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필사본에 빠진 부분까지 넣을 수 있다는 점과 가장 권위있는 원본을 대본으로 함으로써 독자에게 [백범일지]의 판본에 대한 신뢰감을 줄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보인다. 다만 지질 훼손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은 내용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가능한 한 궐자로 남기지 않고 등사본을 참조하여 보완하였다.

둘째는, 기존의 간행본과 틀을 달리하여 주해를 넣고 설명을 붙이자는 것이다. ..........셋째는 백범의 문투를 그대로 옮겨보자는 것이다.

[P. 393] 국한문 혼용체라서 읽기가 까다롭고, 만연체 문장이다보니 주어 술ㅇ간 호응관계가 다소 흐트러진다는 점을 접어둔다면 한편의 소설도 l만큼 흥미있고 탄탄하게 구성된 소설은 드물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P. 395] 특히 주해 중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유실되어 버린 대가족 명단을 추정 복원한 것이다.

[P. 395] 끝머리 [그 후의 일들] 및 [나의 소원]도 원본에는 없으나 국사원간에서 뽑아 추가하였다. 이 부분도 이광수가 윤문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원본은 유실되고 필사본은 백범의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P. 396] 어렵다? ‘민족의 교과서’를 국민의 평균적인 학력 수준인 중고교생이 못 읽어낸다면 그건 정말 문제인 것이다. ... [백범일지]의 서술이 1947년 시점에서 국한문 혼용을 단순히 풀어놓은 것임을 그 동안 우리 모두가 깜박 잊어버린 것이다.

[P. 396-397] [백범일지]의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모양새는 크게는 해방이후 ‘미족의 자주 독립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로 압축되는 백범 노선, 백범정신을 말살하여온 역대 군사 독재 정권의 비자주 반통일 노선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작게는 학문 연구의 가장 기본이 되는 텍스트 분석을 소홀히 하는 우리 학계의 고질적 병폐에도 기인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3. 내가 저자라면


(1) 책의 구성과 장점

 이 책은 [백범일지] 출간 50주년을 기념하여 백범의 친필본 자서전을 김학민, 이병갑 선생이 해설한 ‘친필본 김구 자서전 완역해설 백범일지’이다.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저자 백범의 서문을 맨 앞에 삽입하여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그 뒤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백범일지 상권과 하권을 순서대로 기술하고 있는데,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의 ‘그 후의 일들’과 ‘나의 소원’은 원본에는 없는 것을 국사원간에서 뽑아 삽입하였다고 해설자들은 말하는데 이 부분은 이광수가 윤문한 것으로 국한문 혼용된 친필본과는 문체가 달라 읽기가 수월했다. 

 이 책 백범일지는 백범이 단신으로 상해에 건너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식들이 아비의 행적을 알 길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 작성한 자서전이다. 따라서 진솔하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출신이 상놈임을 밝히는 것으로 봐서 모든 사실을 가감없이 작성하려고 한 듯하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임시정부의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의 생활상, 옥중생활의 가혹함 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은 친필본을 기초로 해설한 것이라,  백범일지의 필사본에는 빠진 부분까지 들어 있다고 해설자들이 말한다. 따라서 백범일지의 여러 판본 중 가장 권위있는 원본을 대본으로 함으로써 독자에게 [백범일지]의 판본에 대한 신뢰감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어 보인다. 50주년을 기념으로, 그때까지 친필본을 기초로 한 간행본이 없었던 것을 고려하여 영인본을 저본으로 삼아 가장 객관성있는 [백범일지] 간행본을 만들려고 한 것이 이 책이 갖는 의의라고 볼수 있다.  지질 훼손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은 등사본을 참조하여 보완하였다고 하니 해설자들이 가능한 원본에 가깝게 만들려고 노력한 점을 의미잇게 보아야 할것 같다.  

또한 이 책은 그때까지 출판된 간행본들과 틀을 달리하여 주해를 넣고 설명을 붙이고 있다. 이 점이 독자들에게 상당한 장점으로 작용한다. 또한 백범의 문투를 그대로 가져왔으므로 백범이 자서전을 작성하던 당시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려 하고 있어서 읽는 사람에게 그 시대의 언어 사용에 대해 알게 해주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국한문 혼용체를 기반하여 있어서 상당히 읽기가 난해했다. 하지만 그나마 한자를 풀어서 설명하거나 지역 등을 설명한 해설 덕분에 조금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미주 대신 각주를 쓰고 있어서 보기 편했고, 지도를 삽입하여 백범의 탈주경로라든지, 삼남유력지, 임시정부 이동 경로 등을 책의 중간 중간에 삽입하여 두어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2) 내가 저자라면 보완할 점


아쉬운 면도 없지 않다. 일단 이 책은 이해가 어려웠다. 국한문 혼용체이고, 만연체 문장이다 보니 주어 술어간의 관계가 다소 모호하여 읽기가 불편했고 이해가 쉽지 않았다.

 한글로 해설된 다른 판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이광수가 윤문한 것이 재미 있었을 듯 하다) 

해설자들이 백범의 연보를 책의 뒷부분에 삽입하여 두긴 했지만, 연보의 기록을 들춰보면서 본문을 읽는 것이 상당히 불편했다. 차라리 연보를 앞으로 보내어 독자가 맨 먼저 연보부터 읽게끔 배려하였다면 좋았을 듯하다. 또한 백범은 자서전을 기록하면서 기준을 년도별이 아닌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했는데, 독자에게는 각 테마별로 연관성이 적어서 이해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해설자가 각 장마다 그 일이 일어난 배경과 연도 등을 해설하여 두었더라면 훨씬 배경 이해가 쉬웠을 것이다.

아니면 사건 중심의 테마 순이 아닌 년도 순으로 기록하여 전후 관계를 독자가 명확히 알 수 있게 배려를 하였더라면 훨씬 이해가 쉬웠을 것이다.  아니면 중간 중간 해설자가 백범의 실제 활동과 자서전의 내용을 비교하며 독자에게 상세히 설명을 하는 란을 따로 만들어 둔다면 백범일지가 읽기 어렵다는 평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다시 편집하거나 해설을 해야 한다면, 독자가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두고 재작업을 해야 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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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saint laurent
2011.05.31 18:18:14 *.111.182.3
Wear your high heels in a sitting position and around the gianmarco lorenzi shoes home first. After a period of gianmarco lorenzi pumps time they will become comfortable and you gianmarco lorenzi boots will probably forget you are even wearing them.If you are giuseppe zanotti shoes planning to wear heels outdoors or at a club on the weekend, wear giuseppe zanotti boots them around the house for a few hours first until they feel nat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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