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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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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0일 22시 3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Joseph John Campbell, 1904. 3. 26 – 1987. 10. 30)은 미국의 신화학자이자 작가, 강연가로 신화종교학과 비교신화학 부문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는 미국 뉴욕의 와이트 플레인즈(White Plains)의 로마 카톨릭 집안에서 나서 자랐으며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국립자연사박물관에 갔다가 북미대륙 원주민 문화에 매료되었다. 그 이후 그는 북미 원주민 신화와 그 문화에 정통하게 되었고 다른 문화간에도 유사한 신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에 대한 연구에 평생을 바치게 되었다.

 

그는 1921년 코네티컷 주 뉴 밀포드(New Milford)의 캔터베리(Canterbury) 학교를 졸업하고 다트마우스(Dartmouth) 대학에서는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지만 인문학 쪽으로 진로를 수정했다. 이후 콜롬비아 대학교에 진학해 1925년에 영문학사 학위를, 1927년에는 중세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캠벨은 또한 운동선수로도 활동했는데 한 때 1/2 마일 경주 세계 챔피언이기도 했다.

 

1924년 가족과 떠난 유럽 여행길에서 캠벨은 지두 크리스나무티(Jiddu Krishnamurti)를 만나 동양 철학에 관해 논의할 기회를 우연히 얻게 되었다. 그 후 그는 힌두와 인도 사상에 대해 평생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고 카톨릭 신앙을 버리게 되었다.

 

1927년 캠벨은 콜럼비아 대학교로부터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연구원 장려금을 받았고 프랑스 파리대학과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했다. 그는 프랑스어와 독일어, 라틴어를 능숙히 구사했으며 일본어까지 습득하고자 했다.

 

그는 지적, 예술적 혁신의 시기인 Lost Generation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와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또한 유럽에 있을 당시 모던 아트를 접하게 되었고 폴 클레(Paul Klee)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에 매료되었다. 또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칼 융(Karl Jung)의 작품에 빠져들었다.

 

1929년 캠벨은 유럽에서 돌아와 콜롬비아 대학교 교수진에게 산스크리트어, 모던아트 그리고 중세문학을 연구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이에 대한 지지를 받지 못하자 박사 학위 취득을 포기했다. 이후 평생 동안 캠벨은 닥터 캠벨이 아닌 미스터 캠벨로 불리우길 고집했다.

 

이후 캠벨의 위대한 방황시대(Great Depression)가 시작되었다. 캠벨은 이후 5(1929-1934) 동안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치열하게 하면서 그의 인생을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지 고민했다. 그는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캘리포니아를 여행했는데 작가 존 슈타인벡(John Steinbeck)과 해양 생물학자인 에드 리켓츠(Ed Ricketts)와 교류하였다. 1933년에는 캔터베리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자신의 소설을 출간하려 하기도 했다.

 

1934년 캠벨은 사라 로렌즈 대학(Sarah Lawrence College)의 교수 제의를 받아 들였고 1938년에는 자신의 옛 제자였던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Jean Erdman과 결혼했다. 둘 사이에 아이는 없었으며 49년 동안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방 2개짜리 아파트에서 생활했다. 1980년대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 아파트를 장만해 뉴욕과 하와이에서 지냈다.

 

1955년부터 56년까지 캠벨은 인도학자인 하인리히 짐머(Heinrich Zimmer)의 저서 ‘The Art of Indian Asia, its Mythology and Transformations’의 마지막 편을 출간했으며 사라 로렌스 대학으로부터 안식년 휴가를 얻어 생애 처음으로 인도와 일본 등지를 여행했다. 이 시기의 여행은 캠벨이 아시아 종교와 신화에 대한 심오한 고찰을 하도록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비교신화학 강의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의 저서로는 <신의 가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신화의 이미지> 등이 있으며 1987 10 3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식도암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Sharacard에서 제작한 다음 동영상에서는 조셉 캠벨의 명언과 명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 http://www.dailymotion.com/video/x7ovev_joseph-campbell-to-find-your-won-wa_music

[참고자료]
Wikipedia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Campbell
Joseph Campbell Foundation http://www.jcf.org/new/index.php?categoryid=11
<신화의 힘> 저자 소개
알라딘, YES24, 교보문고 저자 소개
www. sharacard.com

조셉 캠벨의 삶은 자신의 천복을 찾아 떠난 기나긴 여정 그 자체다. 그의 책을 읽고 그의 인생을 돌아보니 그가 더 제대로 보인다. 버팔로 빌이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해마다 공연하는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보고 인디언을 짝사랑하게 된 개구장이, 흑백 서부영화에 근사한 총잡이로 등장하는 더글러스 페이뱅크스를 롤 모델로 여기는 철부지, 파리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종소리를 들었던 것이 평생 가장 가슴 설레는 경험이었다고 말하는 낭만주의자, 유럽 유학을 마치고 박사 학위를 포기하더니 자신의 천복을 찾기 위해 수도도 없는 년 20달러짜리 방에서 5년 동안이나 홀로 공부한 의지의 사나이, 자신 인생의 행운의 바퀴 굴대를 잡고 중심을 놓치지 않는 여유만만한 확신가, 40대가 되도록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으며 문학에서 신화적 전통의 모습을 찾아가는 탐험가, 평생을 방 2개짜리 아파트에서 산 간소한 삶의 실천자, 사람들에게 신화의 필요성과 힘을 알리기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활동가가 바로 캠벨이었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하다. “우리 개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란 천복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을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니까요.” 그는 진정한 영웅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Theme 1. 신화의 힘

 

P5. 한 문화 권역과 다른 문화 권역의 영웅, 혹은 구세주는 두 문화권이 교섭한 경험이 없는 경우에도 서로 비슷비슷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바닥,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이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른 것, ‘원형이라고 부른 것이 서로 비슷비슷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캠벨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입니다.

 

P10. 대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 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P18.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그러나 이 신화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다른 까닭은 각 문화권에 따라 마땅히 자각하여야 할 삶 자체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

 

P21.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P26.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정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 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하고 읽는 다는 말씀이군요.

 

P29.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P30.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P37.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신화)는 삶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P41.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P48.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P59. 신화 자체가 노래입니다. 육신의 에너지를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P61. 신화가 무엇이지요? 사전적인 의미를 좇으면, 신들에 관한 이야기이겠지요. 그러면 응당 신들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이어서 나와야 합니다. 신은 인간의 삶과 우수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신화학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회적인 신화가 있지요.

 

P74.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며 살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는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세 번째 기능을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네 번째 기능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P85. 신화의 이미지는 아득한 옛날부터 앞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전수된 것이겠군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이게 왜 놀라운 것이냐 하면, 우리와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사상의 심오한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까닭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부수기 때문이고,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적인 신비, 내적인 삶, 영원한 삶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경우, 그 생각을 확장시켜줄 이미지가 처음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관념 체계에서 제시된 이미지를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 신화가 바로 이 메시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줄 겁니다. 신화는 우리 인류에게 전형적인 어떤 것을 일러주니까요.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에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P86.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 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P89.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에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P107.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 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원형은 바탕 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세계 전역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를 통하여 이 원형 혹은 근본적인 관념은 각기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옷이 이렇게 다른 것은 환경적,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P109.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P113.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P117. 현실의 개념을 넘어서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라는 범주도 초월합니다. 신화가 바로 우리를 늘 이 지점에다 데려다 놓고는 합니다. 신화는 우리에게 그것의 신비에 이르는 사다리를 마련해줍니다.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의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P122. 민담을 그저 듣고 즐기는 겁니다. 그러나 신화는 영적인 교시를 위한 것이지요.

 

P141.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들어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있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P175.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구체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P186. 왜 우리가 새삼스럽게 신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까?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히 바로잡아 줍니다.

 

P 189.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P189. 자연의 본성인 신성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P217.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 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P218.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이 연민으로 변모하는 순간입니다.

 

P234.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P237. 세계의 서로 다른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어요.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P244. 과학은 머지 않아 신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세계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벼랑으로 접근하고 있지요.

 

P272.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P286. 신화는 우리에게 나이 몇 살에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까지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P296.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P303.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인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P306. 아버지 탐색은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이루지요.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P335. 신화는 우리에게 영적인 삶으로 가는 길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약도까지 그려주고 있어요.

 

P376. 서구인의 사고 방식은 하느님을 우주의 에너지와 경이의 종국적인 근원, 혹은 본원으로 봅니다. 그러나 동양의 사고 방식은 신들을 결굴 비인격적인 에너지의, 그 자체로서의 드러남이자 에너지의 공급자로 파악하지요. 따라서 이들에게 신은 에너지의 본원이 아닌 겁니다. 신은 그러니까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인 것이지요.

 

P396. 종교 체계의 상징을 해석하는 비교신화학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라는 점, 비교종교학은 신앙 체계에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게 분명해진 겁니다. , 우리는 신화 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지, 사실이라고 부리지는 않거든요.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가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딸 아이가 읽는 우리나라 전래동화인 콩쥐팥쥐와 세계명작동화 신데렐라의 이야기 구조가 매우 유사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약한 새엄마가 들어와 주인공을 괴롭힌다는 점,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마다 누군가가 나타나 착한 주인공을 도와 준다는 점, 왕자님(원님의 아들)을 무도회(잔치)에서 만나고 신발 한 짝을 잃어 버리게 되는 점, 신발을 통해 행복을 찾게 된다는 점 등. 왜 문화적으로 연관이 없는데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일까? 캠벨은 신화가 인류의 근본적인 관념인 원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고 해석한다. 다만 환경적,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캠벨은 신화를 통해 내면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신화를 읽으면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고 절망의 위기,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할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 신화를 읽으면 세상에 숨겨져 있는 상징의 의미를 해독하고 삶의 순간들에 어떻게 대응할지 알게 되는 것인가? 딸 아이와 함께 읽은 만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신들의 이름과 에피소드를 파악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1, 2편은 신화, 그림 그리고 그 메시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에로스와 프쉬케의 사랑이야기를 읽으며 프쉬케의 주도적인 선택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어떤 상황에 마주치면 신화의 주인공들은 어떻게 대처했나 생각해 보곤 한다. 캠벨의 말대로 신화는 영적인 삶으로 가는 단서를 제공하고 약도를 그려준다.

 

캠벨이 말한 신성을 이해하는 방법은 참으로 흥미롭다. 캠벨은 분명 그렇게 책을 읽으며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고 자신만의 세상을 열었을 것이다. 그가 사랑한 토마스 만과 제임스 조이스의 책을 모두 읽고, 그 사람들이 읽은 책을 또 모두 읽으면서. 누군가 그랬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그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고. 저자가 참고한 참고 서적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예전에 운전하며 오디오 강의 CD를 많이 들었는데 강사들이 언급한 책들을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한 권 한 권 찾아 읽게 되었고 그 책들이 나에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캠벨은 말한다.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는 장애물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고. 미로에서 길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주어진 힌트를 잘 보고 자신의 방향을 가늠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인다면 미로에서 나오는 날은 있기 마련이다. 그 미로를 나오고 나면 다른 삶이 나를 기다린다. 나 역시 미로 같은 삶의 고통을 체험하고 나서야 새로운 삶을 열 수 있었다.

 

Theme 2. 삶 그리고 죽음

 

P9.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P12.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

 

P14.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 끄는 것은 아니라오.

 

P26. 나이를 먹어 나날의 삶에 대한 관심이 심드렁해지면, 사람은 내면적인 삶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P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P30.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P80.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P96.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이지요. 삶 역시 한 세대에서 이울면서 다음 세대로 넘겨져 거듭납니다. 뱀은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징합니다.

 

P97. 기독교는 삶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요. 우리가 이어받은 성서 문화를 보면, 할례나 세례를 받지 않은 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썩은 것, 아주 자연스러운 충동은 죄악입니다. 이런 식으로 여성과 죄악, 뱀과 죄악, 결국을 삶과 죄악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한 왜곡입니다. 그런데 성서적인 신화와 타락의 교리 전반에 걸쳐 이런 왜곡이 생기고 있어요.

 

P101.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궁극적인 떠남, 최고의 떠남은 하느님을 위한 하느님으로부터의 떠남, 모든 관념을 초월하는 경험을 위해 하느님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P106.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P119.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P120.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랑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P133.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P133.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이것은 석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으니까요.

 

P134. 제임스 조이스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 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사상의 끝은 늘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고통 또한 세상이 존재하는 까닭의 일부입니다.

 

P136. 우리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일 중 하나는, 속으로는 구역질이 나는 타인, 혹은 타인의 행동, 혹은 타인의 조건에 대해서도 옳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P137. 이 아귀는 발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차례로 먹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남의 생명을 먹고 사는 생명의 이미지입니다. 결국 아귀가 있던 자리에는 얼굴 하나만 덩그러니 남게 되지요. 시바 신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하지요.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을 터이다. 내 너를 키르티무카라고 이름하리라. ‘키르티무타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P143.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신화에서 배웠어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빛을 내는 전구인가, 전구가 수레가 되어 실어 나르는 빛인가나이를 먹어갈 때 생기는 심리적인 문제는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죽음의 문을 한사코 거부해요. 그러나 육체는 의식의 수레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의식의 수레인 육신이 낡은 자동차처럼 부서져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p. 147. 죽임이라는 것은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의례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 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 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니까 사냥은 의례인 것이지요.

 

P156. 만물이 비롯될 때에는, 지혜와 지식은 짐승들에게만 있었다. ‘절대적 존재인 티라와가 인간에게는 직접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라와 신은 어떤 짐승을 인간에게 보내고, 그 짐승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현현한다. 인간은 그런 짐승, 하늘의 해, , 별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P189.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P201.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가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P203. 삶의 모습 자체는 반드시 삶의 행위를 통해서만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P206. 삶에서 승리한 자만이 제물이 될 수 있다. 이게 바로 희생과 관련된 옛날의 관념입니다.

 

P209.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P213.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P217.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 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 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P239.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P255. 유태 전승에 따르면 40은 신화적으로 대단히 의미심장한 숫자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맸지요? 예수도 광야에서 40일을 견뎠어요.

 

P261. 우리는 자아가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쇼를 연출하는 줄(주도권을 행사하는 줄) 알지만, 아니에요. 무엇이 쇼를 연출하는가 하는 것은 무의식에서 무엇이 솟아오르느냐에 달려 있어요. 한 인간이 쇼를 연출하는 게 나 자신이 아니구나이런 걸 깨닫는 시기가 바로 사춘기예요. 전혀 새로운 요구 체제가 우리의 의식 아래에서 자기 존재를 알리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죠.

 

P262. 어떤 젊은이가 모종의 장벽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특정 신화 대응물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이의 경우는 문턱 넘기 의례와 관련된 신화 대응물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P263. 진짜 자기를 알기 위해서는 첫째,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통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이 두 사람은 기초적인 신화 테마를 현대 젊은이들이 경험하는 개인적인 문제, 어려움, 깨달음, 관심의 해석에다 응용하고 있으니까요.

 

P270. 구체적인 프로그램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기 가슴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정신분열증적 해리의 위험이 있어요. 자기 중심에서 이탈해 있는 사람이거든요.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P271. 우리는 내적 원동력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동양의 영적인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자신있게 네 안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라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이런 능력은 우리 안에 있어요. 나날의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는, 진짜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이런 능력이 있어요.

 

P273. 마지막 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P276. 젊은 사람의 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을 만나는 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P278.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P297.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의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 또한 그만큼 큽니다.

 

P299.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우연 혹은 인연을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P301.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P411. 쇼펜하우어는 그의 명문 <개인의 운명에서의 명백한 의지에 대하여>에서 재미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어요. 그의 생각은 이래요. 어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자기 인생이 누군가의 명령과 계획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어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말하자면 어떤 소설가에 의해 쓰여진 소설 같다는 느낌을 받는 거지요. 이렇게 놓고 보면, 인생을 살면서 당한 중요한 사건은 외견상으로는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일관된 구성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듯 보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우리 안에 있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P412.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P413. 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은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만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있어요.

 

나는 내년이면 마흔이 된다. 주위를 둘러보면 많은 사람들이 마흔 고개를 참으로 어렵게 넘긴다. 캠벨은 40이 유태 전승에서 신화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숫자라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맸고 예수는 광야에서 40일을 견뎠다. 아마 40은 수련의 숫자인가보다.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40년 동안 삶의 단서들을 추적하고 이를 모색해야 하는가 보다. 마흔이 넘으면 사람들은 이제 중년이 되었다고 한다. 캠벨은 중년의 문제에 대해서도 통찰력 있는 견해를 내어 놓는다. 우리는 살면서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때위기를 만나게 된다. 몸은 점점 시들어 가는데 의식은 점점 또렷해 진다. 일상의 삶이 심드렁해지고 내면의 문제에 눈을 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의 답은 간단하다. 자신을 자신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자신의 의식과 동일시해라. 외적인 가치에 집착하지 말고 가장 중요한 내적 가치에 몰두해라.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 살아 있음의 경험을 놓치지 마라.

 

나는 몇 해 전부터 진짜 나를 찾기 위한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 시중에 나와있는 각종 검사도 해보고 각종 워크샵에도 참여했다. 스승을 찾아 나서기도 했고 인쇄된 책의 갈피에서 길을 찾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가족, 선후배, 친구들에게도 물어보고 나 자신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를 글로 쓰기도 했다. 하지만 캠벨의 말대로 가장 중요한 마지막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했다. 내 마음 속에 살고 있는 용을 죽이고 속박된 자아를 해방시키는 일은 역시 내 몫이었다. 그 용을 죽이자 한없이 자유로운 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말대로 우리 안에는 우리 삶이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이탈했는지를 아는 그 무엇이 있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 마음과 몸이 행복한 순간, 그것이 바로 내가 나의 궤도 안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그 순간이었다.

 

살다 보면 일상의 무수한 일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길을 안내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징검다리를 하나씩 놓아 주는데 내 인생을 책으로 쓰면 장편소설이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때이다. 분명 보았는데 내가 밟으려던 징검다리가 난데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징검다리에 다리가 달려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순간도 만나게 된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하늘을 원망하기도하고 자신이 걸어 온 길을 후회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알게 된다. 캠벨의 말대로 우리 인생은 우리 안에 있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다. 결국 징검다리는 내가 놓는 것이고 문은 내가 여는 것이다.  

 

Theme 3. 천복을 좇으라.

 

P179. 초원의 사냥꾼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성소였어요. 그러나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는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리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P221.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이게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천복을 좇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P223. 중세의 필사본에 여러 문맥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가 바로 행운의 바퀴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습니다.

 

P223.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P223.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아이에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도울 수 있지요. 학생들과 독서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노라면 학생이 보이는 반응에서 뭔가를 느껴낼 수 있지요.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P224. 천복 거리를 찾는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자기가 전적으로 관심을 쏟지 않던 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방향 전환의 계기를 기다리는 능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세상이 뭐라고 하던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P226.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P227.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는 굳게 믿는 미신이 있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P272. 우리 개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란 천복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을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P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캠벨은 이 책에서 신화뿐 아니라 그의 인생 철학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천복을 좇으라는 말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두려움 없이 살아가라는 의미다. 그의 천복을 찾는 방법 또한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우리 모두는 천복에 들어온 것을 느끼는 직관이 있다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가슴이 말해준다는 것이다. 살면서 들뜨거나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가 아닌,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느끼는 순간을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나는 회사 일을 하면서 짜릿한 성취감을 느꼈던 것 같다.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며 우쭐해 하기도 했다.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좌충우돌 뛰어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윽한 행복의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제 나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내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행복을 느낀다. 붓글씨를 쓰고, 바느질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 이게 행복이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천복인 것이다.

 

살다 보면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오르막 길에는 자만하고 내리막 길에는 좌절한다. 이제 알겠다. 그러지 않는 방법을. 캠벨이 말한 행운의 바퀴에서 굴대를 잡고 있는 것이다.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중심에 있을 수 있다. 아이들의 천복을 찾을 찾아 주는 방법도 알겠다. 어느 때 눈빛과 낯빛이 달라지는지 살펴봐야겠다. 그 순간이 바로 삶의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라고 캠벨은 말한다. 천복을 따르는 삶을 살면서는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을 살다 보면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내가 그런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길을 잃었다 느꼈을 때 길을 알려주는 스승을 만났고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니 글쓰기 선생님이 나타났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내 인생의 징검다리를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닫혀 있는 어느 문을 열어야 하는지 일러주었다. 그래서 나는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말했다. “계단의 처음과 끝을 다 보려 하지 마라. 그냥 첫 발을 내디뎌라.”

 

Theme 4. 영웅의 탄생

 

P11. 영웅의 역정에서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캠벨은 루카스의 영화를 보고는 영웅의 역정을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닌 자기 발견의 삶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P12. 자기 내부에 자기 운명의 실을 풀어낼 힘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그렇게 합리적일 수 없는 것이지요.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P89.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P135.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행위지요. 우리는 이런 짓을 무리지어 합니다. 그게 삶인 것이죠.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

 

P211.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P230. 우리는 보통, 누군가의 보호와 감독 아래 의존적인 상태로 줄잡아 14년에서 20년 동안이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만, 대신 벌이면 벌, 상이면 상을 받아야 하는 복종적인 예속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던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P223. <코란>앞서 간 사람들이 치른 것과 같은 시련을 치르지 않고 지복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태 전승에 나오는 영웅은 무서운 시험을 겪어야 보상을 받지요.

 

P245. 영웅이 필요한 이유는 분열 증세를 보이는 이 모든 경향을 한 곳으로 모아 바람직한 목표를 향해 할 수 있는 별자리 같은 이미지가 필요한 거지요.

 

P248. 많은 영웅이 목숨을 내어 놓지요. 그러나 신화는 내어 놓는 목숨에서 새 생명이 비롯된다는 메시지도 전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영웅의 목숨이 아니라 새 생명, 새로운 존재, 혹은 육화의 길일 겁니다.

 

P249. 이 세계 모든 문화권, 많은 시대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영웅의 행동에서 하나의 전형적인 체계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심지어 원형적인 영웅상은 하나밖에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랍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의 원형적인 영웅상이 많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모든 지역에서 베껴졌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을 발견했다면 그 사람은 자기 삶의 영웅이다.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이 그러했듯이 자기 삶을 발견하는 일은 고난이 따른다. 캠벨의 말대로 복종적인 예속의 삶을 살아내야 하고, 심리적 미성숙의 상태를 박차고 나와야 하고, 자기 책임과 자기 핵심의 삶의 현장으로 자신을 내몰아야 한다. 자기 내부에 살고 있는 용을 죽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지만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가 그랬듯이 자신의 내부에는 자신의 운명의 실을 풀어낼 힘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자기 삶의 영웅이 되었다면 이제 진정한 영웅이 될 차례다. 자신이 아닌 사람들을 구원하고, 다른 사람의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다.

 

Theme 5. 사랑과 결혼

 

P31.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은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것입니까?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 이거다, 하고 오는 게 있어요. 그러면 사람의 내면에 있는 어떤 존재가 이게 바로 그것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P32.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P32. 결혼은 서로 전혀 다른 두 단계가 있어요. 첫 번째 단계는 자연이 부여한 불가사의한 충동에 따라 두 젊은이가 결혼하는 단계이지요. 젊은이들을 이 자연의 충동을 좇아 생물학적인 성의 교합을 하고 자식을 낳습니다. 젊은이들의 결혼이 어느 대목에 이르면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드는데 이것이 내가 바로 연금술적 단계라고 이름 붙인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단계에서 부부는 내가 앞서 말한 희생의 의미를 서로 아름답게 깨닫게 됩니다.

 

P33.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 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됩니다.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P34. 결혼은 사회적 계약이 아니라 영적인 수련이다.

 

P345.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P355.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은 가슴을 얻는 거지요.

 

P360.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P368.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이성의 측면과의 만남이랍니다.

 

P371. 지옥의 고통 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사랑하던 것과 함께 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P391. 반지를 보고 있으면 원이라는 게 두 반원이 엮이어 하나가 되었다는 인식이 가능해 집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보는 결혼입니다. 둘로 이루어진 더 큰 하나, 여기에서 나의 개인적인 삶이 생겨납니다. 결혼 반지는 우리는 원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나는 열렬히 사랑하고 영화처럼 결혼했다. 캠벨의 말대로 내가 그 사람을 만났을 때 가슴이 말해주었다. ‘이 남자를 잡아라. 네가 사랑하는 남자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그와 결혼했다. 아이도 낳았고 10년을 살았다. 킴벨의 말대로 결혼은 관계며 시련이었다. 아이를 위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었고 결혼으로 맺어진 사람들을 위해 내가 가진 것들을 양보해야 하기도 했다. 아직 캠벨이 말한 연금술적 단계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나의 사랑과 결혼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그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는 그 단계에 이르게 될 거라는 것을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캠벨의 저서가 아니다.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가 그와 진행한 대담을 녹화한 필름을 기반으로 엮어진 책이다. 그래서인지 여러 가지 놀라운 점과 아쉬운 점이 눈에 들어온다. 글이 아닌 말로 이렇게 방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의 신화에 대한 지식과 열정이 참으로 부럽다. 어떻게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기억할 수 있으며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듯 신명 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는 또한 여든을 넘긴 노인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 체득한 삶의 방법과 진리를 젊은이들에게 조곤조곤 들려준다. 그의 인생을 살펴보니 그의 말과 그의 삶이 한치의 어긋남이 없음에 또 한번 놀란다. 그는 천복을 따라 살았고 결혼의 연금술적 단계에 이른 듯싶다.

 

이 책은 8개의 장(신화와 현대세계. 내면으로의 여행, 태초의 이야기꾼들, 희생과 천복, 영웅의 모험, 조화여신의 은혜, 사랑과 결혼 이야기, 영원의 가면)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TV에서 대담한 내용을 나누어 엮다 보니 각 주제와 관련이 적거나 각 장에 여러 번 중복된 내용들도 종종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다섯 개의 주제(신화의 힘, 삶 그리고 죽음, 천복을 좇으라, 영웅의 탄생, 사랑과 결혼)로 나누어 엮어 보았다.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주제인 각 테마를 기준으로 캠벨이 한 이야기를 엮어보면 그의 이야기가 더 우리 일상에 가까워오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또한 책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사진들이 인쇄되어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나 역시 그림을 보면서 그가 말하는 바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림들이 흑백으로 되어 있어 디테일을 보기에 어려웠고 그림의 해제는 책의 관련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 아쉬웠다. 또한 우리말임에도 그 내용을 가늠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가끔 만나게 되어 당혹스러웠다. 모듬살이의 뜻을 찾아보니 사회생활을 일컫는 순 우리 말이다. ‘신인동형동성론적이란 말은 신과 인간이 같은 형상과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논리쯤으로 해석하면 맞는지 모르겠다. 옮긴이의 해박한 한자 지식이 한자가 생소한 젊은 세대에게는 어렵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내용은 1985년 캠벨이 모이어스와 대담한 이야기이고 1992년 옮긴이가 그 이야기를 처음 옮겼고 2002년 개정판을 내었다. 이제는 지은이도 옮긴이도 고인이 되었고 오리지날 컨텐츠는 25년 전의 이야기다. 광속의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이지만 그가 말하는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해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하지만 그 가르침은 자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천복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에게만 들릴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두 번째 읽으니 처음과는 다른 이야기들이 나를 붙잡았다. 내가 이 책을 세 번째 읽게 되면 또 어떤 이야기들이 나를 붙잡을까 궁금하다. 또 나의 천복의 길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궁금하다. 그들이 나에게 어떤 길을 안내하고 어떤 문을 보여줄지, 내가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될지, 나는 내 인생이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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