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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0일 23시 40분 등록

1. 저자 조셉 캠벨에 대하여
조셉캠벨.jpg
1904-1987

“A hero is someone who has given his or her life to something bigger than oneself.

[1]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소년 시절 북미대륙 원주민의 신화와 아더왕 전설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컬럼비아 대학과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아메리칸 인디언에 관한 책을 즐겨 읽었으며, 뉴욕 맨해튼에 있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방문하였다. 캠벨은 그 박물관의 한 코너에 있는 토템기둥에 특히 매료되었는데, 그 뒤 1925년과 1927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대학과 뮌헨대학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에는 존스타인벡과 생물학자 에드 리켓츠와 교류하였다. 1934년에는 캔터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신의 가면>을 펴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 볼링켄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신화 이미지>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활동을 펼치다 1987년 세상을 등졌다.
 [
출처. 신화의 힘. 이끌리오 책의 저자소개에서]

 

[2]

The most memorable contribution of Campbell's career was made by way of television. It was the six-part series Joseph Campbell and The Power of Myth with Bill Moyers. Most of the interviews were conducted at Skywalker Ranch, the film studio built by George Lucas in California's Marin County. The interviews for the last episode were done at the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This was where Campbell had pondered Native American artifacts as a boy. Public television stations broadcast the series for the first time in late 1987. It has been rebroadcast many times since then. This book based on the transcripts of the interviews became a best-seller in America. The Power of Myth radically increased public awareness of the wisdom to be found in mythology. In 1987 Joseph Campbell died at his Honolulu home from cancer of the esophagus. In his last days, he was once again reading the Bhagavad Gita. An obituary in Newsweek summarized his accomplishments, “Campbell has become one of the rarest of intellectuals in American life: a serious thinker who has been embraced by the popular culture.”

[출처 : A Scholar's Life / by Jonathan Young / New Perspectives Magazine / July 1994]


바가바드기타.jpg
조셉 캡벨이 생의 마지막 날 읽었다는 힌두교 2대 서사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중에서 마하바라타에 실린 '바가바드 기타'

 

[3] 캠벨의 Mind Map / Designed by Austin Kleon]

campbell_mind map.jpg
Keeping in mind we have not begun to study Campbell in-depth yet, and this mind map is obviously the work of someone who has studied Campbell, what details interest you?

[출처 : http://www.huffenglish.com/webquests/campbell.html]

 

[4]

조셉 캠벨은 자신의 삶에서 특별히 신화적인 부분을 끄집어 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이 위대한 신화를 닮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중심 사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영웅의 여정'이라는 조셉 캠벨의 사상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겸손한 많은 사람들을 위대한 삶이란 궤도로 이끌었다.

 

조셉 캠벨이 말하고자 한 핵심은 당신이 살아가는 현재의 평범한 삶은 언제든지 위대한 신화에게 자리를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출처 : 내 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 50 에서 , 톰 버들러 보던 / 이정은 역 / 흐름출판사]

 

[5] 조셉 캠벨은, 1904년 미국의 뉴욕에서 태어나, 평생을 비교 신화학자로서, 서로 다른 문화권 시화와 종교의 공통되는 현상과 기능을 연구해 온 분이다. 그는 어린 시절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화를 접하고, 문화적 접촉이 전혀 없었던 이들 민화와 아더왕 전설의 상징 체계가 놀라우리만치 유사한 데 착안, 모든 문화권 신화를 두루 꿰는 신화의 본(원형)을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출처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의 역자 후기 에서]

 

캠벨이 여느 신화학 학자들과 다른 것은 그의 순수한 학문적 성과의 이면에서 인류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현재와 미래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 자신과 함께 성장해온 신화의 상상력과 초월적 힘을 잃은 비문화적 인류 문명에 대한 경고이다. 또한 좁게는 자기 민족의 신화체계와 자기 문명권의 종교만을 주장함으로써 다른 민족의 문명권의 그것들을 파괴하고 배척하는 비도덕적 인류 역사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특히 그의 비판은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향한 것이다.

[출처 : 신화의 세계 역자 후기 에서]

 

'조셉 캠벨'에 대한 나의 생각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해주는 선생님의 입을 바라보는 어린이마냥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참으로 많은 것을 아는 이야기 꾼이고 우리시대에 올바른 가치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에 대해서, 종교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말과 글이 넘쳐난다. 많은 이야기들이 삶을 이야기 하지만 공허하고, 교의를 이야기 하지만 범부의 마음보다도 더 편협하고, 진리를 이야기 하지만 울림이 없다. 하지만 그의 글과 그의 이야기에서는 삶의 오의(奧義)를 느낄 수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본인의 삶을 통해서 얻은 진실함을 느낄 수 있다.

나의 시선은 삶의, 세상의 껍질에 머물러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에 무심하고 둔감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통하고 나니 나무에 부는 바람 조차 저 멀리 태고에서 불어오는 신화 속 영웅의 숨결인 듯 그 느낌이 다르다.


 

[ 모이어스에 대해서]

 
빌모이어스.jpg
1934-

텔레비젼이라는 대중 매체는 특히 사상을 포용하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 부족을 국가라는 이름의 캠프파이어 주위로 불러 모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바닷가에서 다른 사람들의 지혜에서 떨어져 나온 표류물을 주워 생활하는 직업인' 빌 모이어스는 특유의 겸손한 어조로 미국인들의 삶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이렇게 묘사한다. 국방성에서 해외에 주둔군을 위해서 발행하는 <성조기 The Stars and Stripes>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국의 양심으로 여기며, 어떤 이들은 그에게 대통령 출마를 간청했다고 보도한다. 그는 지금껏 이러한 간청을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다. 사실상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사람인데, 모이어스는 다른 사람의 애기를 경청하여 보다 많은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는 일반시민뿐 아니라 철학과 영성과 정치와 시와 의학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 우리의 정신을 확장시켜주는 공상가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우리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미국 역사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새롭고 눈부신 사상을 소개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략)

그는 어떤 분야를 고르는 과정에서 인터뷰 중에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제시한 유명한 조언을 따른다. "너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라."

(중략)

여느 뛰어난 저널리스트처럼 모이어스는 미국의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조셉 캠벨이라는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신화학자와 토론을 나누는 여섯 시간짜리 프로그램을 기획했을 때, 그는 시리즈 제작비를 모으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으며 일부 방송국 경영자들은 이 시리즈의 방영을 거부했다. 모이어스의 오랜 협력자인 베티 수 플라워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그들은 뻔질나게 이런 질문을 입에 올렸다. '83세 신화학자와 여섯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라고?', '당신들은 정신이 나갔어. 도대체 누가 이런 프로그램을 시청하겠어?" 그러나 캠벨의 <신화의 힘> 시리즈는 입소문을 통해서 엄청난 주목을 끌었고 이후에 책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출처 : 틱닛한에서 촘스키까지(원제 Visionaries) 에서 / 죤 스페이드 저 / 원재길 역 / 마음 산책 2004]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문

 

이그쥬가르쥬크. 북부 캐나다 카리부 에스키모의 샤먼이었소. 이 사람은 유럽 손님들에게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9)

 

테크놀로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11)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12)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군요” / “아니지, 그게 아니오. 살아 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이지요.” (15)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_힌두경전 (18)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18)

 

----신화와 현대세계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 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29)

살아있음의 황홀. 멋진 말이다. 삶은 고난이라 하고 폼을 잡아보기는 했지만 황홀할 수 있다라고 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삶과 스스로 교류하면서 그것으로부터 가슴 떨림을 느끼는 것 그것 만큼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외적인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30)

 

<고린도전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야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35)

육체가 자라는 만큼 비례하여 정신도 자라야 함을. 정신이 자란다는 것은 무엇인가? 삶의 단계마다 적절한 '눈뜸'.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률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36)

 

이 나라에는 법이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잖아요. 그래서 법과 법률가들이 우리를 꽉 잡고 있어요. 여기에는 에토스가 없어요. (36)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 것을 벗어 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41)

 

저는 동경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젊은 시절의 저에게는 제가 지향하는 방향을 가르키는  붙박이별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붙박이별의 영원성은 저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습니다. 붙박이별은 저에게 삶의 지평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저에게, 저 우주 어느 곳에서는 늘 저의 일에 관심을 두시고 언제든지 맞아들일 차비를 마치신 채 저를 내려다보시는 자애롭고 다정하고 공정한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일러준 것도 이 붙박이별입니다.(43)

나에게 붙박이별과 같은 것은 무엇인가? 적지도 않은 나이에 그것 조차 만들어 놓지 못했다.

 

의식을 머리가 지닌 특수한 기능으로 여기는 것은 데카르트식 사고방식의 일부이지요. 데카르트파 사람들은 머리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의식에 영향을 미쳐 어떤 방향, 혹은 어떤 목적에 맞게 작용하게 하는 기관이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은 아니지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온몸에 두루 존재합니다. 이 의식은 의식을 하는 주체에게 살아 있는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 (46)

 

모이어스_어떻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까?

캠벨_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명상이라는 게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그 명상의 대부분이 비의도적인 명상이기는 하지만요. 많은 사람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 데, 돈이 나갈 데에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의 문제에만 관심을 둡니다. 물론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조건과 관계가 있는 관심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자식들과 영적인 의식을 나누고자 하지만 이게 안 됩니다. 영적인 의식이 없는 사람이 자기 자식과 그것을 어떻게 나눕니까? 그러면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47)

영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 나날의 생활에서 찾아보아야겠다.

 

제가 스타워즈에서 보는 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과 똑 같은 질문입니다. 기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메피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어떤 수단이든지 다 제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생의 과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말끔하게 정의해줄 듯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54)

 

피그미족의 전설. 한 소년이 숲 속에서 아름다운 새 소리를 듣고는 그 새를 사로잡아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소년은 새에게 먹이를 주자고 아버지를 조르지요. 아버지는 새 따위에게는 먹이를 줄 수 없다면서 새를 죽여버리고요. 이 전설은 그 사내는 새를 죽이고, 새를 죽임으로써 새의 노래를 죽이고, 노래를 죽임으로써 제 자신을 죽인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로써 그 사내는 죽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영원히 죽는 것이지요. (59)

아무것도 아닌 줄 알고 죽였던, 관심주지 않아서 죽은 나의 내면의 심성들. 그럼으로써 이렇게 푸석하고 둔감한 사람이 되어있다. 창조적인 태초의 나를 죽인 것이다.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61)

 

이성의 소리. 인류는 기원전 5백 년 경에 큰 전기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천체 운행의 아날로지를 길잡이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는 이성을 길잡이로 했던 것이지요. (71)

 

그것이 바로 미래 신화의 바탕입니다. 그 바탕은 벌써부터 여기에 있어요. 내 나라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종교 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언어 집단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아시겠지요? 이렇게 태동한 신화는 이 집단, 저 집단, 그 집단의 철학이 아닌 이 땅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78)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81)

 

----내면으로의 여행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 성립된 인도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 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이 갈등한다고 한 까닭은 이 기관은 이것을 원하고 저 기관은 저것을 원하는 식으로 바람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뇌도 이러한 기관의 하나입니다. (86)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 (102) 개념 너머란 무엇인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뜻인가?

 

내 생각으로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시인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의 영혼이 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고요. (109)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115)

 

부처라는 말은 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 깨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혹은 부처의 의식에 다가서야 합니다.(118)

 

재림 혹은 환생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는 이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관념에는 우리의 존재 및 우리의 깨달음과 의식의 잠재력에 다른 차원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깊이 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19)

 

삶을 하나의 시련으로 보는 관념, 이 시련을 겪어야 세속적 의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관념은 고등 종교의 관념입니다. 나는 원시 신화에서는 이런 관념을 접한 적이 없어요. (120)

영웅신화에서는 시련을 통과의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때의 시련과는 다른 것인가?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120)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웨이의 모닝페이지를 쓰는 경험으로 조금은 이해가 되는듯하다.

 

우리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금생을 사는 인드라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빠질지, 속세에 남아 있을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면서 사는 일은 모두 다 금생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어때요? 내가 보기에는 아주 근사한 신화 같은데요. (132)

그렇다. 영적으로 사는 것과 세속적으로 사는 것을 물리적으로 구분하여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얼마나 조화롭게 이 두 가지 것을 나에게 적용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133)

이해 안됨.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나는 누가 이런 식으로 되기를 의도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제임스 조이스의 한마디가 기억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134)

이해 안됨2.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참여주어진 운명대로 살아라? 되는대로 사는 것과의 차이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139)

세속적인 생각이란? 영적인 생각이란? 세속적인 삶과 영적인 삶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태초의 이야기꾼들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들어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있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141)

 

우리가 삶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들어갈 때는 입는 것도 달라지고 이름도 달라집니다.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나서 나는 내가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삶에 관한 나의 사고방식을 바꿨습니다. 말하자면 삶에 관한 관념 자체를 바꾼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하고 활동하는 삶을 이 신비를 즐기고 감사하고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꾼 것이지요. (142)

길을 달리하고, 뜻을 달리한다면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하면서도 그 이전의 오랜 습관과 삶의 방식이 굳은 살처럼 몸에 마음에 깊이 박혀있다.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데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143)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나이가 들면서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많아져서 좋다고 느낀 적이 있다. 겸손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인가 보다.

 

의례의 중심적인 목적은 한 개인을, 그 개인의 육신보다 훨씬 큰 형태론적 구조에 귀속시키기는 것이다. (145) 그렇게 함으로써 얻게 되는 사회적인 이점, 즉 의례의 의도는 무엇일까? 모든 자연과 함께 개인 또한 구성원임을 느끼게 함으로써 서로 존중하고 숭배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인가?

 

모이어스 : '그대'이던 들소가 졸지에....

캠벨 : '그것'이 되고 말았지요. (155)

두 대담자의 선문답 같은 것, 연극과도 같이 그들의 마음이 통하는 것을 나도 느낄 수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문제에 생각이 미칩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도한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일까? 새들의 노래가 아름다운 것은, 새들에게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새들이 지닌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 것일까? 암벽화를 볼 때마다 예술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하고는 하지요. 어느 단계까지가 우리가 '미학'이라고 부르는 예술가의 '의도'이고, 어느 단계까지가 아름다움을 간직한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지, 어느 단계까지가 그들이 습득한 바를 드러내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겁니다. 거미가 아름다운 거미줄을 만들 때, 그 아름다움은 거미의 심성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거미줄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거미가 지닌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삶이 지닌 아름다움 중에 어느 정도가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일까...... 어느 정도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일까......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지요. (158)

나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현재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고대의 의례가 지닌 중요한 역할은 개인을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 한 지역 사회의 구성원으로, 한 모듬살이의 구성원으로 통합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서구 문명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켜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먼저, 개인 먼저가 되어버렸지요. (165)

 

내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의례는 이제 껍데기만 남았어요. 사회의 의례도 그렇고 개인적인 결혼의례도 그렇습니다. (166)

성당의 미사, 교회의 예배, 일상의 결혼식, 성인식 등 대부분의 현대 사회의 의례는 약화됨으로써 그것의 본래의 목적과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절차는 중요하지 않다, 의미가 중요하다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절차를 버림으로써 차츰 그것의 의미도 잃어가고 있는 것인가? 나도 집안의 제사에 대해서 그리고 어릴 적 명절날의 제례와 같은 의례를 지금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의미가 없어졌다. 어릴 적에는 '정월 대보름'이면 온 동네 사람들과 늦은 밤까지 하는 것이 참 많았는데...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68)

그들의 본분은 새롭게 깨닫는다. 그들의 삶과 위상이 달리 보인다.

 

전통문화는 엘리트의 경험,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들의 귀는 우주의 노래에 열려 있어요. 이들이 민중에게 이야기하면 민중에게서 반등이 생기는데, 이 작용과 반작용이 상호작용을 하는 겁니다. 민중의 문화를 빚겠다는 최초의 충동은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아래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168)

 

세계의 중심에 있는 산은 바로 '악시스 문디(axis mundi, 세계의 축-옮긴이)'를 말합니다. '악시스 문디'는 중심점, 모든 사물의 회전 중심인 극점을 말합니다.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이 함께 하는 점입니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시적 체험이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거야 말로 신화 체험인 것입니다. (174~175)

 

신은 이해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구체(球體)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175) 감각으로 하는 이해와 마음으로 하는 이해는 어떻게 다른가? 신은 이해 가능한 구체라니 그것은 어떤 뜻을 담은 은유인지 생각해볼 것.

 

------희생과 천복

 

사는 곳을 성화(聖化)시키는 것,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177)

 

성소,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179)

내가 내 안에 여백을 만드는 것, 내가 쉬고 몸과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 하덕규의 '가시나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 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 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天福)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180~181)

요구된 일이 아닌 바라는 것을 하고 있을 때의 행복감과 몰입은 바로 나의 천복이었구나 하는 생각. / 삶을 친구처럼 '그대'라는 부르는 것. ...페이지 156 '그것' '그대'에 대한 구절로 해석해 봄.

 

왜 우리가 새삼스럽게 신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까?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 잡아 줍니다. (187)

 

이러한 모습에 내재하고 외재하는 위대한 침묵. (187)

 

자연 위에서, 자연에 군림하는 것으로서의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관념은 정말 몹쓸 것입니다. 중세에, 이 세상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린 것이 바로 이러한 관념입니다. 초자연적인 법률이 백성들에게, 관리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을 요구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 삶을,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결코 하지 못하는 채 살아야 했던 중세는 바로 황무지나 다름없어요. 황무지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불가항력의 법이 설정한 목표를 좇았습니다. 초자연이라는 관념이 과연 이런 것이라면 이거야말로 사람을 죽이는 관점 아닙니까? (188)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189)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희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189)

 

모이어스 :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캠벨 :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지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서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189~190)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유오성의 대화 '나는 끝까지 한 놈만 팬다.'가 생각난다. '무식하다, 재미있다.' 생각하면서 웃고 넘긴 말이었는데...심오한 삶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원하는 어떤 것에서 문리가 트이려면 '그래...한 놈만 패자'.

 

그리스도는 '성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지요. '성 십자가'는 나무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그 나무의 열매가 되는 셈이지요. 그리스도는 영원한 삶의 열매입니다. 이 나무는 에덴 동산에 있던 두 번째 금단의 나무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첫 번째 나무의 과실을 따먹자, 하느님은 이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내 버리지요. 에덴 동산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곳입니다. 남녀의 선악과 신인(神人)이라는 이원적인 구별이 없는 곳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여기에서 이원성의 과실을 먹고는 쫓겨납니다. 이렇게 쫓겨난 인간을 다시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게 하는 나무는 영생의 나무입니다. 이 영생의 나무 아래 이르러야 '' '아버지'가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은 많은 종교가 겨냥하는 것입니다. (203)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무사 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204)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211)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217)

 

아벨라르적 관념. 인자(人子)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이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연민 쪽으로 열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인간의 추잡한 관심을, 고통을 나누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인간만이 지닌 가치의 세계 쪽으로 쏠리게 하기 위함이다. (218)

 

싱클레어 루이스의 <바비트>..."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구나" (221)

나와 나의 아버지,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는 나는 많은 친구들이 생각난다. 현대 바비트의 화신들이여....

 

그 사람은 자기 천복을 한 번도 좇아보지 못하고 산 셈입니다.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던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222)

 

행운의 바퀴.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223)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223)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

 

----영웅의 모험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229)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230)

 

다른 사람의 영웅적인 행적을 구경하면서 불구가 되어버린 우리 자신을 위로하는 일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좀 위험하지 않습니까? (정치적인 의미라는 어의는 무엇일까?)

이런 현상은 우리 문명권에서도 최근에 들어와서야 생긴 것 같아요. 경기에 참가하지 않고 경기를 구경하는 것은 대리 체험을 통하여 참가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우리 문화권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알면 현대인 노릇을 한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가족을 부양하는 많은 사람의 삶은 고단합니다. 이건 정말 끝없는 소모적이지요. (241)

 

사회에 영웅이 필요합니까?

분열증세를 보이는 이 모든 경향을 한곳으로 모아 바람직한 목표를 향가게 할 수 있는 별자리 같은 이미지가 필요한 거지요. (245)

개인들에게도 '별자리'와 같은 대상의 영웅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삶(남의 삶을 시늉하는 것이 아닌 우리만의 삶) 역시 탐색의 여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251)

 

플라톤의 원_플라톤은 어느 책에선가, 영혼은 원 같다고 했어요. 나는 이 플라톤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칠판에다 원을 하나 그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원에다 가로 선을 하나 긋지요. 그러면 이 선의 위는 의식, 아래는 무의식이 됩니다. 다음에는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나오는 곳을 표시합니다. 즉 가로 선 밑에 접을 찍는데 이 점은 조금 전에 그린 원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원 속의 가로 선위에는 자아가 있어요. 나는 이 자아를 조그만 사각형으로 표시하지요. 이 자아는 우리가 중심과 동일시하는 의식의 한 측면이에요. 하지만 보세요. 자아가 우리의 중심은 아니잖아요? 자아를 나타내는 사각형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나타내는 점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지 않아요? 우리는 자아가,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쇼를 연출하는 줄(주도권을 행사하는 줄) 알지만 아니에요. (260~261)

뛰어난 통찰과 비유..놀라울 따름이다.

 

우리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지요. 사고를 하기는 하되 가게를 운영하는 것처럼 사고를 해요. 하지만 의식은 우리 인간 존재의 부수적인 기관일 뿐이에요.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꺽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270)

가게를 운영하는 것과 같은 사고는 무엇인가? 의식이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면 무엇이 우리를 인도하여야 하는가? 무엇이 나의 주인 노릇을 해야 하는가?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 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다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0)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뿐인데,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재물, 우리를 구해줄 권력, 우리를 구해줄 사상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매지요. (275)

 

그 실이라는 게 찾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선생님 소리 듣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이 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 (275)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279)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끝이 아닌 것이다. 매력적인 새로운 삶의 지표를 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해 나가야 하는 것이 궁극적인 존재의 의미인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이승의 삶의 가치에서 해탈하는 것이 나니라 이승의 삶의 가치에 충실하는 방법은 받아들입니다. (283)

의미는 알겠으나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볼 것. 가치에서 해탈하는 것 & 가치에 충실한 것...

 

짐이 실리면 낙타는 일어나 비틀거리면서 광야로 나가는데, 낙타는 여기에서 사자로 변모합니다. 등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자의 힘은 그만큼 강해집니다. 이 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용을 죽이는 일인데, 용의 이름은 '미래의 그대'입니다. 이 괴물의 비늘이라는 비늘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의 미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요. 그 중에는 4천 년 전에 씌어진 것도 있고 바로 오늘 아침에 씌어진 것도 있습니다. 낙타, 즉 아이는 '그대의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에, 사자, 즉 청년은 이것을 벗어 던지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284)

 

아이의 자기 성취를 방해하는 것이면 모두 다 아이가 벼려야 할 '그대의 미래'이지요. 낙타에게 '그대의 미래'는 낙타를 순치(順治)하는 수많은 '강제(must)'인 겁니다. 낙타는 이 순치를 통하여 인류의 동물에서 문명화한 인류의 동물로 변모 합니다. 그러나 청년기는 자기 발견의 시대, 사자로 변모하는 시기입니다.....

스승이 시키는 대로 쓸 것이 아니라, 한번 자기 식으로 써보고 싶을 때가 오지요. 이게 바로 사자의 행위가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284)

요구된 일만을 하는 바비트적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 사자로서 사는 것. 나는 이제서야 청년의 시기를 살고 있는 중년이다. 캡벨은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데 있어요'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위안.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286)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라는 질문은 평생 삶의 친구와 같이 곁에 두어야 할 질문인 것 같다. 하지만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위험한 길'을 지나야 하는가?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운동 경기를 보면서 내가 조금 깨달은 게 있습니다. 정점에 이르러 있는 운동 선수는 내부에 정점을 하나 지니고 있어요. 그의 움직임은 바로 이 정점에서 생겨납니다. 움직임의 장에서 뛰고 있는 한, 운동 선수는 제대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어요. 내 아내는 춤꾼인데요. 내가 물어보니까 춤의 세계에도 그런 게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 안에 정점이 있다는 겉 거의 확인이 된 셈입니다. 우리는 이 정점을 찾아내어 우리 의지로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299)

내부의 정점. 어떤 것인지 좀더 생각해볼 것.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서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 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의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303)

신화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체험하는 것....일상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관념에서는 이해가 되지만 현실에서의 적용을 생각해보면 안개 속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조화여신의 은혜

 

인도에는, 척추에 있는 정신의 중심 체계 일곱 가지가 있어요. 이 체계는 바로 관심과 의식과 행동의 심리적 차원을 상징합니다.

첫째, 중심은 직장(直腸)에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생명 유지의 기능인 보양을 상징하지요....두 번째는 성기로 성징 됩니다. 성기는 곧 생식의 충동을 실현하지요. 세 번째 중심은 배꼽 높입니다. 이곳은 의지력의 중심이기도 하지요. 이 의지력은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자기 통제와 자기 성취가 됩니다만,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정복, 파괴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의, 공격적인 기능입니다.

인도의 심리 체계의 상징성에서 보았듯 첫 번째 기능인 보양은 동물의 본능입니다. 두 번째 기능인 생식 역시 동물의 본능입니다. 세 번째의 기능인 의지력 역시 그 부정적인 기능을 보면 동물의 본능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그래서 이 세 중심은 상징적으로 골반과 가까이 있습니다.

네 번째 중심은 가슴 가까이 있어요. 이 중심은 자비로운 마음 쪽으로 열려 있지요.....(319)

 

예수는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지 육체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두 번째 탄생이에요.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가슴 아래쪽에 있는 세 차크라는 바로 우리가 초극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초극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 가슴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322)

 

모든 시대의 현자들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살면 바람직한 삶을 살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곧 육인데 어떻게 영적으로 살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육의 욕망은 영에 반하고 영의 욕망의 육에 반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335)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종교에 귀의한 삶인가? 신화적인 삶은 어떤 것인가?

 

----사랑과 결혼 이야기

 

<황무지>를 통하여 엘리엇이 표현하려고 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황무지의 거죽은 실제성을 표상하지 못합니다.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357)

 

성배는 뭐라고 할까....참 삶을 산 사람들이 획득한 것, 혹은 깨달은 것을 표상합니다. 성배는 결국 인간 의식의 가장 고귀한 영적 잠재성의 성취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358)

 

자연이 성배를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이자 성취이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358)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인 겁니다. (359)

 

모듬살이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간섭하고 나서는 것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모듬살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듬살이가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티어주는 것이 모듬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361)

모듬살이의 혜택을 최소한으로 하고, 나의 삶을 최대한으로 확장하는 것. 지금은 여전히 어려운 삶 속에 살고 있다.

 

제우스는 기왕에 장님이 되어버린 테이레시아스에게 미래를 예언하는 재능을 줍니다. 재미있지 않아요? 이것은 말이지요. 문을 감음으로써, 즉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모르폴로지, 즉 사물의 근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명상을 할 때 눈을 감는 것, 그럼으로써 나의 감각, 나의 육신, 내가 존재하는 세상 기운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보고 있다고 해서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믿어보면, 지옥의 고통 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사랑하는 것'과 함께 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371)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영원의 가면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375)

 

천사나 마귀란 나를 이끌고 인도하는 충동을 의인화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377)

 

자기 삶을 가슴으로 사는 삶의 단계에 올려놓은 사람에게는 다 그렇습니다. (387)

가슴 아래쪽에 있는 세 차크라는 바로 우리가 초극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초극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 가슴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라는 가르침과 같은 말이다.

 

물고기와 같은 본성은, 인간의 본성 중에서도 가장 조악한 수성에 속하지요. 종교라는 낚싯줄은 바로 그런 수성에서 인간을 건져 올리는 겁니다. (391)

 

이것이 바로 성배가 상징하고 있는 무궁무진한 중심인 겁니다.우리 삶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을 생각해보세요.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 점으로 돌아가보세요. 이 한 점이 바로 요처랍니다. 괴테는 신성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다라서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한 점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나가는 병사의 마음이 바로 이 한 점의 상태와 같지요.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394~395)

 

인생은 목적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412)

 

우리 안에는 우리가 중심이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향 그 자체이다.

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은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있어요. (413)

 

3. 내가 저자라면

 

담화문의 형식 그대로 책에 옮겼다. 깨달음을 통한 두 사람의 대화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1인 저자의 일방적인 가르침보다는 대화로 엮긴 이야기는 신화에 대해 생소한 나에게 편안한 이해를 주는 것 같다. 물론 책의 구석구석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많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책의 처음과 끝을 일관되게 뚫고 지나가는 하나의 느낌은 '중심'이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의도했거나 혹은 그렇지 않았거나 '중심'이라는 의미는 모든 주제에서 고루 사용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의 이미지, 극점, 정점과 같은 이미지는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삶의 정수, 정신의 원형에 대한 메타포가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이 중심은 우리 삶의 질서를 잡아주고 더 나아가 '영웅'의 삶으로써 자신을 인도하고 '홍익'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쉬운 점은 '신화의 힘'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을 보통사람(캠벨은 '보통사람'은 없다고 했지만...)인 나는 어떻게 나의 일반적인 생활에 적용하고 활용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천복을 좇아서, 영웅의 길을 찾아서 길은 나서지는 않았지 않은가. 길을 나선 사람이야 신화의 힘을 쫓아 길을 모색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신화를 우리 삶에 적용하는 '어떻게'라는 방법에 대해서 좀더 길을 제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다.

이렇게 중요한 신화를 그래 어쩌란 말이냐?라는 나의 우문에 대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저자라면 이 대담을 기획한 목적과 의도를 좀더 밝히고 싶다. 그리고 각 주제에 대해서 대담을 한 것인지, 대담을 하고 난 이후에 적절한 제목을 붙인 것 인지를 알 수 없지만 여덟 개의 주제에 대해서 대담이 끝난 후에라도 대화의 형식이 아닌 저자 자신의 논설을 실었으면 더욱 충실한 이해를 돕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기타]

1. 책을 읽고 들었던 의문과 생각들

신화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와 무슨 상관인가?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인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신은 무엇인가?

자기 구원이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신화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2. 옮겨 적으면서 '좇다' '쫓다'의 의미적 차이를 배움

 

3. 재미있게 본 내용들

(68~69) 미국 1달러 지폐

(212)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까닭

(219) <피네간의 경야>에 나오는 1132라는 숫자의 비밀

(243)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의 신화

(275) 테세우스와 이리아네드의 신화

(279) 거웨인과 녹기사의 이야기

(371) 악마는 어쩌다가 지옥에 떨어졌는가?

(372) 페르시아 최초의 부모 이야기.

 

IP *.219.8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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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1 01:25:17 *.166.205.132
리뷰 잘 보았습니다^^
사진을 첨부하려면 아래의 파일 첨부에서 첨부를 한 후 선택을 한다음에 '본문삽입'을 누르니까
커서가 있는 본문에 들어가더군요.
그 다음 위치 조정해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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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2.21 13:57:05 *.219.84.74
양경수님 사진첨부하는 것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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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2011.02.23 13:25:57 *.146.26.24
늑대님 열심히 하고 계시는것 확인하러 왔어요..
꼭 늑대님의 출판기념회는 우리 AYCW가 함께 할테니
열심히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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