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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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문학의 숲, 2012
수강생에게서 시집 한 권을 선물받았다. 류시화, 시인이기보다는 명상시집의 편집자로서 탁월하다고 생각했고, 어딘지 음습해 보이는 인상 때문에 그다지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별 기대 없이 책을 펼쳤다가 깜짝 놀랐다. 평이한 시어 속에 담긴 상념이 너무나 진솔하여 거의 모든 시가 내 속을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번쯤 나도 느껴 보았던 단상들이 그의 손을 빌어 시로 탄생해 있었다. 비슷한 연배겠구나 싶어 서둘러 찾아보니 나보다 한 살 아래인 58년생이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쓸쓸한 경이감’이다. 이 책에 네 번째로 실린 ‘소면’을 나는 이 시집의 대표시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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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면, 우리가 이곳에 없는 날이 오리라
열흘 전 내린 삼월의 눈처럼
봄날의 번개처럼
물 위에 이는 꽃과 바람처럼
이곳에 모든 것이 그대로이지만
우리는 부재하리라
그 많은 생 중 하나에서 소면을 좋아하고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하던
우리는 여기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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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것인가 이것이 전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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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원 속에서 죽음은 누락된 작은 기억일 뿐
나는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경이로워하는 것이다
저녁의 환한 살구나무 아래서
중년이 지나면 끝이 보인다. 언제고 이 모든 것이 끝나는 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러니 지금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모두 기적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또 다시 내게 주어진 하루, 어김없이 피어난 진달래, 맛있게 무쳐진 나물, 공기와 햇살... 모든 것이 너무나 소중해서 가슴이 저리다. 이 生을 좀 더 맛보고 싶어 허둥거려질 때, 내 삶의 정점은 언제였나 되짚어 보기도 한다.
첫사랑... 내가 30년 만에 그 마을을 찾아갔듯이 시인도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고향을 추억한다. “내 사랑은 언제나 과적이었다”고 말하는 감성 풍부한 시인이지만, 그래도 '처음'은 독보적인 가치를 가진다. 서툴고 가난하던 시절에 다락방에서 몸부림치던 실존을 알아 봐 준 사람과, ‘훗날 우연히 명성을 얻어 자유로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던’ 시절의 풍요가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두 편의 시에서 발견한 그이의 ‘이마’에 나는 가슴이 뛴다. 우리 모두가 두고 온 시절, 너무 어리고 뭘 몰랐지만 그렇기에 더욱 충만하고 가슴 벅차던 시절, 이제 믿지 못할 나이의 지쳐 빠진 낙타가 되어 되돌아 보는 우리들의 청춘.
어머니에게 인사를 시키려고
당신을 처음 고향 마을에 데리고 간 날
밤의 마당에 서 있을 때
반딧불이 하나가
당신 이마에 날아와 앉았지
그때 나는 가난한 문학청년
나 자신도 이해 못할 난해한 시 몇 편과
머뭇거림과
그 반딧불이 밖에는
줄 것이 없었지
나는 너의 이마를 사랑했지
새들이 탐내는 이마
이제 막 태어난 돌 같은 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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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두 살의 봄이었지
새들의 비밀 속에
내가 너를 찾아낸 것은
책을 쌓아 놓으면 둘이 누울 공간도 없어
거의 포개서 자다시피 한 오월
내 심장은 자주 너의 피로 뛰었지
시인은 계속해서 이와 비슷한 감성을 변주해 낸다. 그저 길을 걷다가 生이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세대답게, 남들보다 두세 배는 예민한 촉수를 가진 시인답게, ‘이 곳’에 간절한 시선을 던진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시종 담담하다. 잘은 몰라도 명상과 수행에 오랜 관심을 가져 온 덕분일지, 비통하기 보다 그저 조금 쓸쓸하다. 생명이 오고 가는 것은 계절이 바뀌는 것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앞서고 뒤서는 것 역시 '다른 꽃보다 아홉 밤은 먼저 지는 흰 모란' 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인 목소리로 '이 곳'을 노래하듯 '저 곳'에 수신호를 보낸다. 그래도 계속해서 그의 시상을 점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담담함이 얼마나 깊은 슬픔을 거쳐 왔을지는 짐작이 가는지라 그의 담담함이 더욱 애잔하다.
지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매화는 피었나요 소복이
삼월의 마지막 눈도 내렸나요 지난번
가시에 찔린 상처는 아물었나요
천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그곳에도 매화가 피었나요 촉촉이
초봄의 매우도 내렸나요 혹시
육체를 잃어서 슬픈가요
어느 날 갑자기 너는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질문과 회피로 일관하던 삶을 떠나
이미 떨어진 산목련 꽃잎들 위에
또 한 장의 꽃잎이 떨어지듯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생들에
또 하나의 생을 보태며
15년 만에 펴낸 세 번째 시집이란다. 그의 명성에 비해 시집이 너무 적어서 살짝 놀랐지만, 350여 편의 시에서 고른 56편을 보는 것만으로도 “놀지 않았구나!” 하는 심경이 된다. 동시에 그에게 가졌던 근거 없는 비호감을 거두어 들인다. 이 시집에서 보여준 쓸쓸한 해탈에 깊은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구절들이 좋았다.
슬픔만으로는 무거워 날지 못할 테니
기쁨만으로는 가벼워 내려앉지 못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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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한 손이 다른 한 손을 맞잡으면
기도가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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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계절보다 약간 긴 삶에서
이 꽃만큼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를
일러 준 것도 드물었지요
그의 해탈에 일등공신은 당연히 詩일 것이다. ‘저쪽 세계’에 가서도 할 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나도 행복하다.
모로 돌아누우며 귓속에 담긴 별들 쏟아 내다
어느 소수민족은
여인이 죽어서 땅에 묻힐 때면
그 영혼이 한쪽으로 돌아눕는다고 한다
영혼들의 세계에 가서 한 손으로 실을 자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여인이 잣는 실 아득히
은하처럼 흐르는 밤
별똥별은 깜박 졸다가 지붕 위로 떨어진 것
내가 죽어서 땅에 묻히면
내 혼도 모로 눕겠다
저쪽 세계로 가서
한 손으로 시를 지어야 하니까
글쓰기, 책쓰기 강좌를 하고 있습니다.
글쓰기를 통한 삶의 혁명 ---> http://cafe.naver.com/writingsu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