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외부적으로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다. _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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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기 위해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포기하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포기하는 것은 나를 아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였다면
그들 때문에 견디기도 했을 것이고,
그들 때문에 포기하고 좌절하기도 했을 것이다.
나의 한계를 모른 채 성공하거나 실패했을 것이다.
혼자 도보여행을 하다 보면 견디거나 포기하는 것이
모두 내 안에 있다.


규칙은 딱 하나. 다시 포기하기 위해 도전할 것.
제대로 방전되지 않은 건전지를 다시 충전하면 수명이 점점 짧아진다. 건전지는 소모된 에너지 이상으로 채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방전됐던 것만큼만 충전될 수 있다. 끝까지 방전하지 않고 다시 충전한 배터리는 나중에는 아무리 충전해도 힘을 낼 수 없게 된다. 그 모양이 꼭 나의 20대를 보는 것 같다. 지쳐 나가떨어 지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드러눕거나 다시 충전모드로 돌아가버렸다. 피곤할 것을 염려하다 보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 있을 때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항상 피곤하고 바빴다. 제대로 방전되지 않은 배터리를 다시 충전하
느라 바빴다. 채 바빠지기도 전에 바쁘다는 핑계를 대느라 바빴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쓰러져 자느라 더욱 피곤한 하루를 보냈다. 완전히 방전되기 전의 나를 자꾸 재충전 모드로 두었다. 쓰러지는 것이 두려워 에너지를 모두 쓰기 전에 드러누워 충전모드로 돌아서기를 반복했다. 결국 내 에너지의 바닥은 점점 높아져 이제는 충전도, 방전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 나의 20대가 그러했다.
498c5c6e19e43아직 젊은데 에너지의 바닥은 이미 너무 높아져 있다. 쉬고 싶다는 일념이 주말을 팽팽하지 못하게 만든다. 주말은 무조건 충전의 시간이어야 하기에. 나에게 충전의 시간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기에. 다음 주를 잘 보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쉬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주말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늘 늘어져 있는 주말은 만사가 귀찮은 날들의 연속이다. 이런 주말을 꽉 찬 스케줄 로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내가 힘들어할 만한 일들을 미리 포기하지 말고 한번쯤 시도해보고 어느 만큼의 힘을 쓸 수 있는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한계에 도전하는 이유는 내 포기 지점을 알기 위해서이다. 내 에너지가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여기까지! 이제 그만!”을 외치는 지점을 알기 위해서 이다. 내게 충전된 에너지를 모두 쓰고 나서야 내 에너지의 크기를 알 수 있다. 내가 썼던 에너지 이상으로 충전될 수 없다. 조금 더 피곤하고 조금 더 쓰러져야 한다. 에너지의 바닥을 점점 더 아래로, 다시 발이 닿지 않는 곳까지 자꾸만 밀어 넣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한계를 보는 일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 바닥을 치지 않는 사람들은 에너지의 한계가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다. 어느 지점에서 쓰러질지는 모르지만, 당분간은 내 에너지가 충만했다 다시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까지 나의 에너지를 방출해야겠다. 아직 젊으니 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도전하는 이유는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한
계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이다.

 포기 그리고 또 다른 도전
내가 처음 도보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다들 이런저런 말로 말렸다. 그래서 더 하고 싶었다. 흑산도를 하루 만에 돌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겁도 없이 덤벼든 게 시작이었다. 흑산도에 있는11촌 중에 9촌을 지나, 열 번째 마을에 도착했을 때 해가 꼴깍 져버렸다. 가운데 산이 떡 버티고 있던 섬인지라 순식간에 새까만 공기로 가득 찼다. 차를 잡아 두고서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차에 올라탔다. 처음 출발했던 지점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포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굽이굽이 고개가 열 개 넘게 남아 있었다. 섬을 완주하지는 못했지만 포기까지 기특한 여행이었다.
7번 국도를 따라 9박 10일 여행을 하겠다는 뚱뚱한 꿈이 나의 두 번째 도보여행으로 이어졌다. 통일전망대에서부터 울진까지 걸어가는 게 목표였다. 속초와 양양을 지나는 동안 오른쪽 허리의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4일만에 강릉에서 포기하고 돌아왔다. 첫날부터 내린 비로 힘들기도 했지만, 가방 무게를 견디지 못해 한걸음 걸을 때마다 허리가 끊어지게 아팠다. 손이 닿지 않는 위치에 파스를 정확히 붙이기 위해 여관방에서 혼자 파스를 펼쳐 놓고 그 위에 드러누워 파스를 붙이는 경험도 했다.
먼 길을 아주 오랫동안 혼자 걷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마음속에 출렁거리는 두려움이 나라고 왜 없었겠는가. 그리고 사실 첫 번째 도보여행보다는 두 번째 도보여행이, 두 번째 도보여행보다는 세 번째 도보여행이 더 두렵고 망설여진 것은사실이다. 그래서 에라, 소리를 백두 번도 넘게 반복하게 된다. 혼자 걷는 길이기에 그냥 걷고 싶은 만큼 걷고, 가다가 힘들면 돌아서면 그만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혼자 걷는 길에서는 어느 지점이 포기하기에 가장 적절한 지점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도보여행을 떠나면서 가방 가장 안쪽에 챙겨 넣었던 우리 집 열쇠를, 나는 예정보다 빨리 꺼내들게 된다. 10일을 계획하고 가지만 그 일자를 채우지 못하고 돌아서게 된다. 다 채우지 못할 걸 알면서도 다시 출발할 때는 또 그만큼의 계획을 세운다. 아마도 내 도보여행의 목표는 승리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내 한계를 정해놓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것이리라. 이때의 포기가 의미 있는 것은 포기하고 견디는 것이 모두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498c5c6e38e53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게 하고, 적당한 지점에서 포기하는 연습도 하게 한다. 그리고 포기하는 순간의 경험이 다음 경험으로 이어진다. 나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멈춰선 지점에서 정확히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걷다가 포기하기를 반복하더라도, 또 혼자 걷기를 계획하고 출발하고 포기할 것이다. 그 지점이
내가 다시 완전한 충전모드로 들어설 수 있는 내 에너지의 바닥점이기에.


 혼자 떠나는 산행 
498c5c6e4daa4문득, 가을 한라산을 오르고 싶었다. 단풍이 들기 전 녹음이 짙은 초록산을 보고 싶었다.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으니 서둘러야 했다. 마음먹은 김에 당장 나서기로 했다. 사실, 나는 등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올랐던 길을 다시 내려오는 것이 싫다. 항상 더 걸어간 만큼 더 걸어와야 한다는 생각에 산을 오르는 게 두렵다. 이를 악물고 정상까지 오를 때면 2박 3일을 앓아누웠다. 그것이 두려워 중간쯤에서 발길을 돌려 하산하기도 여러 번 했다. 이런 내가 혼자 산에 간다고 하니 모두들 걱정이다. 안 터져도 핸드폰은 꼭꼭 들고 가라는 염려의 마음도 챙겨주었고,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비장한 응원도 해주었다. 혼자 산을 오르는 일은 의외로 쉬웠다. 내가 올라갈 수 있을 만큼만 올라가자는 마음가짐이 나를 정상까지 끌어주었다. 포기를 결심하고 출발한 등산이기에 산을 정복할 수 있었다. 항상 남들만큼은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들을 쫓아가느라 내 페이스를 잃었던 것이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쫓아다니느라 힘들었던 것이다. 내 한계를 만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한계를 내 안으로 들여놓느라 버벅거렸던 것이다. 나는 산 하나도 정복하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다. 내 한계를 만나기 위해서는 내 페이스로 혼자 시도해 봐야 한다.

 실패는 나의 힘
언제부턴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아무도 정해주지 않았는데도 많은 날
들을 살아갈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2분의 1, 3분의 1, 4분의 1로 점점 줄어들었다. 만약 실패하지 않는다
면 시도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어봤다. 더 이상 불가능의 영역이 넓어지지 않도록. 한라산 정상 오르기, 다른 사람
에게 먼저 친구하자고 조르기, 10킬로미터 달리기, 요리 일곱 가지 배우기, 혼자 해외여행 가기……. 적고 보니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은 아니었다. 단지 시도를 안 했을 뿐.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상처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내 가능성과 능력의 범위를 점점 줄여간 채. 내가 무기력해지기 시작한 것은 내 능력의 한계를 정하면서부터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기에 나는 점점 나약해졌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한번씩은 해봐야겠다. 내가 정확히 못한다는 것을 실제로 확인할 때까지. 해볼 만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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