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하루가 다 지나가는데 오늘이라는 발자국 하나를 찍지 못한 날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잘 걷지 못하는 사람처럼 어제의 발자국을 끌며 산 날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_구본형, 《일상의 황홀》

매일 매일 내 하루의 챔피언이 되고 싶다.
하지만 끊임없이 달리는 것만으로는 곤란하다.
내가 지금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이고, 잃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한 걸음 한 걸음 의미 있는 걸음들을 떼고 있는지
내가 쏟아낸 땀방울이 헛되지는 않은지
관찰하고 의식하며 살아야겠다.
규칙은 딱 하나. 카페에 들어서서 그냥 생각나는 일을 시작할 것.
퇴근하고 혼자 가는 카페가 있으세요? 다이어리 한 페이지를 끼적일 수 있는 조용한 카페도 좋고, 책을 읽는 북 카페도 좋고, 마음 좋은 주인장과 수다를 떨 수 있는 작은 카페도 좋고, 아무 생각 없이 창 밖을 내려다볼 수 있는 3층의 카페도 좋다. 가만히 밤이 오는 풍경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견뎌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카페면 어디든 좋다. 퇴근 후, 그대로 집에 가기 싫은 내 마음이 잠시 들를 수 있는 곳이면 된다.
퇴근 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쯤은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되짚어보아야 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로 어지럽혀져 있지는 않은지, 사람들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내 길이 아닌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남편과 가족도 중요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얼마나 아껴주고 있는지, 한두 시간만 생각하면 금방 들통 날 일을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넘기는 건 옳지 않다! 주말에 특별히 시간을 내서 나와 앉아 있는 것도 번거롭고 괜히 유난을 떠는 것 같아서 나는 퇴근 후 혼자 카페에 들어가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 이 취미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102가지도 더 되지만, 그중 몇 가지를 얘기하면 우선은 친구와 한 잔 꺾자는 약속 없이도 언제든 할 일이 있어서 좋다. 어차피 카페는 혼자 가는 곳이니까. 혼자라고 머쓱해하지 않아도 된다. 퇴근 후 카페에 들어서기만 하면 신기하게도 뭐든지 할 일이 생긴다. 책 읽기, 글 쓰기, 편지 쓰기, 노래 듣기, 일기 쓰기, 공상하기…… 하고 싶었던 일들이 생각나고 별로 생각 없던 일들도 하고 싶어진다. 주말에 시간 내서 나오려면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 하지만 퇴근 후 잠시 카페에 들를 경우에는 아내나 남편, 가족에게 “오늘 야근이야”라는 한마디로 간단히 핑계를 댈 수 있다. 게다가 사람 구경하는 데는 카페만 한 곳이 없다. 카페 밖을 지나가는 사람은 물론이고 카페 안에 앉아서 수다를 떨거나 나처럼 혼자 바스락거리는 사람들을 관찰 혹은 구경하는 다소 무례한 행동도 쉽게 용서받는다. 아무런 의미 없어 보이는 이런 시간들이 내 생활을 정돈해주고, 숨통을 트여준다.
되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를 곳에 도착해 있다. 돌아가기에도 너무 먼 곳까지 오고 나서야 내가 어딘가에 도착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니 중간에 발을 멈추고 ‘너 맞게 가고 있니’ 하고 물어줘야 한다. 일상이 진짜 일상으로만 느껴질 때, 내 삶이 고장 난 브레이크를 장착한 것처럼 멈춤 없이 흘러가기만 할 때, 그저 해가 뜨고 진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하루가 끝나갈 때, 우리에게는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내 마음이 왜 이렇게 분주한지, 내가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방향키를 돌려야 할 지점은 어디인지, 체크해야 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혼자 조용히 정리해야 하는 나만의 세계가 있다. 퇴근길에 마음이 닿는 곳에 들어가 앉아 커피 한 잔 시키고 잠시 바쁜 숨을 골라보자. 카페에 들어서서 그냥 생각나는 일을 시작하면 된다. 커피 한 잔과 책 한 권, 다이어리,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이 함께 한다면 뭐든지 좋다. 혼자서. 조용히. 가만히. 열심히.
일상의 먼지를 털다
오늘은 카페에 앉아 나의 일상 중 엄마가 안다면 혼낼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봤다. 내 일상을 가볍게 돌아볼 수 있는 나만의 방식이다. 입고 나갔던 바지를 바로 옷걸이에 걸어놓지 않는 것, 가방에 넘쳐나는 영수증을 정리하지 않은 것, 거울을 닦지 않는 것, 구두굽을 갈지 않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걸어 다니는 것, 친구에게 일부러 바쁜 척하는 것, 다리를 꼬고 앉는 것…… 오늘부터 당장 실천해야 할 열 가지를 적어보았다. 아주 사소하고 단순한, 일상에 묻혀 있어서 티 나지 않는 그런 일들 몇 가지. 그렇게 적어놓고 보니 내가 그 사소한 것들조차 하지 못하고 지냈나 하는 생각에 스물아홉의 5월 하루가 이렇게 땀이 날 수 없다. 덕분에 내가 당장 그만두어야 할 것과 시작해야 할 것들을 추려낼 수 있었다. 항상 바쁘고 정신없던 하루가 정돈되지 않은 일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란 게 죽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끔은 월요일, 1일, 1월…… 뚝뚝 끊어주면서 계획도 다시 세우고 점검도 해줘야 한다. 어느 날 새삼스럽게 시작하지 않는다면 이 일은 다음 매듭에서도 또 그다음 매듭에서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언제고 마음이 닿는 날에는 카페에 앉아서 다이어리를 펼쳐놓고 무엇이든 적어보자. 무엇이든. 한 달이 끝나가는 지점이라면 한 달 동안 내가 새로 배운 노래가 무엇인지, 몇 번이나 속상해서 울었는지, 가장 즐거웠던 만남은 누구와의 만남이었는지,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하늘과 나무를 몇 번이나 바라보았는지, 내가 새롭게 길들인 버릇은 무엇인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무엇인지, 성공적으로 해낸 요리는 무엇인지, 한 달을 형용사로 표현하면 어떤 단어를 쓸 수 있을지 적어보는 것도 좋다.

카페에서 빈둥빈둥
할 일 없이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근사해 보였다. 혼자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가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거나, 메모를 끼적거리거나, 커피 한 모금을 아주 느리게 빨아먹는 모습까지. 겉으로는 괜히 폼 잡는다며 입을 삐쭉거렸지만 나도 따라해 보고 싶은 근사한 장면이었다. 그래서 나도 3층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았다. 오늘은 책을 읽을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만날 것도 아니고 특별히 얻어가고 싶은 것도 없다. 그냥 카페에 와서 생각나는 일을 하기로 했으니 할 일이 생각날 때까지 창가에 앉아 그저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기로 했다. 검은색 셔츠를 입은 사람들에게만 레이더를 집중해 관찰해보고, 연인들이 걸어가는 포즈를 관찰하고,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 남자가 많은지 여자가 많은지 세어보기도 했다. 남자 셋이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로 가는 거지?' 남자 친구가 열심히 페달을 밟고 그 뒤에는 여자 친구가 타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여자가 남자의 뒤통수를 쳤다. '남자가 뭐라고 한 거지?' 일상의 풍경이 재밌었다. 같은 위치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 높은 카페에 자리 잡고 앉으니 모두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앉아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수많은 생각들이 깡충거리고 있는 것이다. 목표 없이 카페에 앉아 창밖 풍경을 아주 진지하게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피식 웃을 수 있는 일상의 여유를 찾게 된다. 가만히 멈춰 서서 정물화 같은 도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의 여백이 생긴다.
혼자가기 좋은 카페
언제부턴가 주말이 되면 갑자기 내 블로그의 방문자 수가 늘었다. 특정 콘셉트가 있거나 정보를 모아둔 것도 아닌데 평소의 10배에 해당하는 방문자가 다녀갔다. 댓글도 남기지 않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그들의 정체가 궁금하여 유입경로 플러그인을 설치하고 그들이 어떻게 내 블로그를 찾아오는지 관찰했다. 정답은 혼자 가는 카페에 있었다. 회사를 강남에서 홍대로 옮기면서 홍대 근처에 혼자 갈 만한 카페를 찾고 있다는 포스트를 올려두었는데, 그 내용이 '혼자 가기 좋은 카페'라는 키워드에 자꾸 걸려드는 것이었다. 내 블로그를 찾아오시는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이지만 혼자 가기 좋은 카페란 게 따로 없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찾는 방법은 본인이 직접 돌아다녀보는 게 최고이다. 많이 다녀보고,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카페의 모습을 그리고 리스트를 만들고, 그렇게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카페라는 것이 워낙 개인의 취향이 중요한 공간이고 나 좋자고 찾아가는 공간이니, 다른 사람의 취향에 맡겨두기에는 조금 억울하다.
처음에 혼자 가기가 머쓱하다면 찜해둔 카페에 친구와 같이 가서 혼자 가기 적합한지 마음속으로 체크해보는 것도 좋다. 테이블이 너무 크지 않은지, 오래 앉아 있어도 눈치는 안 보이는지, 식사를 대신할 만한 메뉴가 있는지, 내 취향에 맞는 책이 있는지, 담배 연기로 숨이 막히지는 않는지 등등. 아참, 가장 중요한 건 화장실의 위치를 알아두는 거다. 가방을 두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소지품을 분실할 위험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은 혼자 카페에 가는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니까.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라고 써 두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구체적이면 구체적인 대로, 두루뭉수리하면 두루뭉수리한 대로.
비데가 있는 카페, 엘리자베스아덴바디크림, 바다가 보이는 산길, 꼭 맞는 신발, 여드름 가득한 남자 얼굴, 빠른 재즈 음악, 크래미&카스맥주, 새벽 2시의 귀가, 신혼집 구경, 이상은 13집, 맑은 수요일, 아저씨 같은 오빠, 뻔한 거짓말, 한쪽 쌍꺼풀, 가는 모 칫솔,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 밥 먹자, 24시간의 자유, 혼자 타는 그네, 부재중 전화, 막판 뒤집기, 늦은 오전에 책 읽기, 주문하신 책이 출고되었습니다, 나와의 대화, 분홍빛 청재킷, 자기 전 냉수 한 잔, 미국에서 걸려온 국제전화, 높은음자리표 모양의 볼펜, 그리스 산토리노의 해안 절벽 마을, 2002년 6월 홍대 앞, 주황색 야구모자, 오사쯔, 늘씬한 여자, 아톰 자석, 집에 가는 지름길, 옷 잘 입는 후배, 2652, 커플 자전거, 벚꽃 배경 아바타, 답변 메일, 쿠쿠하세요, 개구리 소년 왕눈이, 처음처럼, 목욕탕 때밀이, 술자리 라이브 노래 자랑, 다섯 글자 문자메시지, 떴다 비행기, 원숭이 인형, 세이 맞고, 여고생 피부, 엽기적인 그녀, 교촌치킨날개, 아이스 바닐라 카페라테, 인라인 타고 만나는 바람, 컴퓨터 정상 종료, 비, 노란 소파, 하루 종일 서점에서 놀기, 라네즈 투명 오렌지, 7번국도 도보 여행, 굽 낮은 보라색 구두, 보고 싶어 맛있는 거 많이 사와, 미래소년 코난, 하이브리드 세상 읽기, 아를에 있는 고흐의 침실, 불판 위의 삼겹살, 길거리 퍼레이드, 뽀드득 소리, 붕어빵 천 원어치, 낮잠 잔 후에 새롭게 맞이하는 오후 시간, 지구본, 공중 부양, 고맙습니다, 낙서 일기, 반바지 높이까지 올라오는 파도, 생크림 케이크, 포장마차 가스불의 흔들림, 1분 안마, 두 장짜리 CD.
내 리스트는 계속 늘어난다. 언제든지 이것만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우울한 날엔 이것들을 펼쳐놓고 오늘 만난 것들을 형광펜으로 칠해본다. 힘들고 짜증스럽기만 했는데 오늘도 수십 번의 기분 좋은 만남이 있었구나.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느꼈어야 했는데. 내일은 조금 마음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주변에 널려 있는,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로 피식 웃을 수 있는 하루를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