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립과 고독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외로움을 느끼는 고립은 세계와 사회생활로부터 물러남을 의미한다. 반면 고독은 우리가 소통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만드는 긍정적인 면을 갖는다. 고립이 소통의 단절이라면 고독은 자신의 내외적 세계와의 소통의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지는 상태이기도 하다. _카타리나 침머,《 혼자 사는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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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화를 내고 싶었고,
울고 싶었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고 싶었다.

그러나
참았고,
웃었고,
많은 말을 했다.

나는 언제나 밝고 명랑한 사람이어야 했으니까.
우울하고 뾰로통한 내 모습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테니까.

근 데 , 내 가 왜 꼭 그래야 하 지 ?


규칙은 딱 하나. 낯선 사람에게 손 내미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것
49677c58c9a40혼자이기를 꿈꾸지만, 늘 같은 크기로 사람을 그리워했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누군가 말을 걸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다가 누군가 조금만 말을 걸어도 내 마음은 탁 풀려 묻지도 않은 질문에까지 주절주절 대답한다. 가까운 친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깊은 속내를 꺼내놓기도 한다.
무언가를 더 이야기하고 싶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궁금해 했다. 혼자 조용히 머물고 싶어서 떠난 여행에서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고, 한 옥타브 올라간 내 목소리는 그치지 않고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는데, 그곳에서 나는 항상 관계를 꿈꿨다. 이런 이중적인 욕망이 혼란스러웠다.
몇 번 여행을 다니다 보니 이런 내 마음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고립이 아니라 낯선 사람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낯선 내 모습을 꿈꾸는 것이다. 사람들과 떨어진 혼자를 원한 게 아니라 내 친구들이 알고 있는 나와의 단절을 원한 것이다. 혼자 있고 싶다는 것은“너희들이 알고 있는 내 모습으로부터 탈출을 원해!”라는 의미이다. 눈빛만 봐도 내 마음을 읽어낼 정도로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뻔한 내 모습이 답답하고 불편하다. 새로워지고 싶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은 나에 대해 하나의 이미지를 갖는다. 잘 웃는 사람, 꼼꼼한 사람, 보호해줘야 하는 사람, 술 좋아하는 사람……. 사람들은 그들이 정의해놓은 내 모습대로 내가 늘 한결같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는 자주 웃지만 가끔 화를 내기도 하고, 약해 보이지만 혼자의 여행을 꿈꾸기도 하고, 도와주는 걸 좋아하지만 피곤하고 힘들 때는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내 행동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다. 왜 그랬는지 설명을 원한다. 가끔은 약 먹었냐며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와주길 바라기도 한다. 나는 내 이미지에서 한 보도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늘 같은 모습 으로 서 있어야 했다.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면“뻔하지, 뻔해”하며 내 마음을 지레짐작하고 판단해버린다.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 사 이에서 내가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범위는 너무 좁다. 내가 꼭 그런 것도 아니 고 그래야만 하는 이유 또한 전혀 없는데, 나는 무언가에 묶여 있다. 그런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 대한 설렘은 낯선 나를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이다. 어렸을 때 한번쯤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고 싶어했던 마음과 비슷하다.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 아주 다른 내가 되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설렘 말이다. 뻔한 사람들 틈에서 정해진 역할만을 하는 게 답답하다면 낯선 사람을 만나야 할 때이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지금의 감정에 충실한 내가 되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말괄량이 같은 나, 과묵한 나, 잘 들어주는 나, 친절한 나, 유머러스한 나, 쫑알거리는 나, 참한 나, 애교 많은 나. 내 안의 아주 작은 모습을 꺼내어 또 다른 내가 되어보는 것이다. 전혀 내가 아닌 것 같지만, 그 순간은 가장 솔직한 순간이다. 그런 내 모습을 어색해 하지 않을, 나에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그립다. 낯선 내가 반갑다.




 시장에 가면

49677c58dab18한때 노량진 고시촌에 살았다. 그때 종종 가던 곳이 고시원 맞은편에 있는 수산시장이었다. 수험생 처지에 회
를 사 먹으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보며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서였다. 옆에서 같이 공
부하는 친구들 모두가 경쟁자인 각박한 세상에서, 노량진 수산시장은 목적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유
일한 곳이었다. 팔려는 사람은 친절하다. 자신의 물건에 관심을 보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극적이다. 하나를 물
으면 옆에 있는 것, 그 옆에 있는 것, 또 그 옆에 있는 것까지 줄줄줄 엮어 설명해준다. 아저씨, 이거 광어 맞죠?
아가씨, 하하. 좌광우도예요. 광어랑 도다리(가자미)는 비슷하게 생겼는데 눈이 왼쪽에 있으면 광어, 오른쪽에 있으면 도다리예요. 요놈은 눈이 오른쪽에 있으니까도다리죠. 광어는 이거구요.
시장은 이중적이다. 혼자인 사람을 외롭지 않게 하고, 삼삼오오 짝지어온 사람들을 혼자로 만든다. 하나의 물건에 관심을 두면 누구하고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일행과 떨어져 혼자가 되기도 한다. 시장에서 우리는 모두 아는사람이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다. 시장에서는 그동안의 역할과 관계와 지위가 무시된 채 사려는 사람, 팔려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으로만 구분된다. 먹을 것이든 입을 것이든 하나의 물건에 관심을 보이면 팔려는 사람과 관계가 성립된다. 상인과 구경꾼이 진지하게 대화를 시작한다. 이렇게 수많은 관계가 존재하니 시장은 왁자지껄하고 사람 냄새가 날 수밖에 없다. 수산시장, 재래시장, 오일장…… 물건만 잔뜩 있는 곳이 아니라 사
람이 있는 시장에서는 말이다.



 민박집의 2박 3일

49677c58f04fa섬진강 근처 민박집에 와 있다. 어제 여기에 도착해 이틀째 묵고 있다. 내일까지 여기 있을 계획이다. 이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찻방이다. 가건물로 된 찻방은 내 방 왼쪽에 있다. 지리산에서 직접 재배한 녹차를 마실 수 있다. 물론 공짜이다. 아저씨는 차를 많이 마셔야 혈액 순환이 잘 된다면서 나에게 일곱 주전자(일곱 잔이 아니라 일곱 주전자이다!!)의 차를 권하셨다. 그리고 그 일곱 주전자를 세 번씩 우려 마시는 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그만큼 아저씨의 이야기를 하셨다. 왜 혼자서 여행 왔냐는 이야기로 시작된 대화는 그 집에 찾아오는 각양 각색 손님들의 사연으로 이어졌다. 아저씨가 전라도와 경상도의 사투리를 섞어 쓰는 게 재미있었다. 모르는 사람과 이렇게 오랫동안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신기했다. 오늘 아저씨와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가끔은 나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친구보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더 잘 이해해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곳에서 2박 3일의 여행은 새로운 나를 만나는 여행이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일상을 보내다 보면 한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나의 새로운 모습을 꺼내놓게 된다. 예전의 내 모습, 앞으로의 내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오늘 드러내고, 오늘 이야기하는 것들로 사람들은 나를 받아들인다. 그 단순함이 좋다. 나에게 새로운 대본과 새로운 역할이 주어진 느낌이다. 첫 대사로 어떤말을 해야 할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내가 마음먹고 꺼내놓는 대로 나는 새롭게 정의된다. 낯선 곳에서 보내는 일상의 설렘이다.


 나를 모르는 당신에게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불쑥 얼굴을 들이 밀며, 버스 정거장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나는 왼팔로 큰 도로를 만들고 오른쪽 검지로 횡단보도를 만든 다음 온몸으로 길을 설명해줬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번이나 인사한 아가씨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찾았어. 내가 물어보고 버스 정거장을 찾았어. 아가씨는‘내가 물어보고’라는 대목에 악센트를 준다. 버스 정거장을 찾아낸 것보다 용기를 내어 누군가에게 물어봤다는 것을 더 기특해 했다. 하긴, 여기서 몇 시간쯤 헤매다 보면 정거장을 찾긴 찾았겠지. 누군가에게 용기 내어 묻는 게 더 어려운 일이긴 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처음 여행 갔을 때 길을 몰라 헤매면서도 절대 길을 묻지 못했던 내가 생각 났기 때문이다.
한참을 헤매다가, 가게 앞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아저씨들에게 수줍게 여쭤봤다. 그러자 술을 마시던 아저씨 세 명이 모두 한꺼번에 일어나 각자의 방식으로 길을 설명해주셨다. 그때 풍겼던 정겨운 술 냄새가 기억난다. 내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잡아줄 사람이 아주 많다는 것을 일깨워준 따뜻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경험을 어린 아가씨에게 나누어주었다.
처음에‘혼자 떠나야지!’마음먹었던 이유는“수많은 인연들이 기다리고 있어”라는 말 때문이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 대해 설렘 반 걱정 반이던 마음이 9대1 정도로 설렘으로 기울어졌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설렘으로 홀로 떠나는 나의 첫 여행이 시작됐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손 내미는 법을 몰랐던 나는 이틀 동안 혼자 다녔다.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제발 누구라도, 아무라도 말을 걸어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간절해진 후에야“여행 오셨어요?”라는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한번 여행 친구를 만난 이후로는 혼자 여행한 적이 없다. 어디서든 친구를 만나 서로 방향이 맞는 곳까지 여행하고 다시 흩어졌다.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길을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손을 잡아줄 준비를 하고 있다. 용기 내어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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