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더 귀한 시간이다.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_곽재구,《 곽재구의 포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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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친구를 두고도 오늘 만나고 싶은 친구가 없다.
사 람 들 사 이 에 서 나 는 외 롭 다 .
규칙은 딱 하나. 사람들 사이에서 내 자리를 찾을 것시끌벅적한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있으면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치지 않고 잡혀 있는 술 약속은 내가 사회생활을 원만하게잘 이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됐다. 날마다 사람들과 술잔을 부딪치며 그들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와 섞어 나갔다. 어쩌다가 그들의 다양한 웃음과 에피소드가 중단될 때 나는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불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한없이 그들 속으로 파고들려고만 했다. 나를 버리면서, 나를 잃어가면서, 관계 속으로 관계 속으로만 들어가는 시간을 보냈다.
언제부터 다시 외로워졌는지 모르겠다. 사람들 속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약속이 있는 금요일 저녁에도 문득 외롭다는 느낌이 찾아왔다. 끼려고만 하면 어디든 낄 수 있겠지만 의미 없는 만남이 싫었다. 만나자고만 하면 만날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 틈에서 속마음과는 다르게 웃어야 할 내가 싫었다. 어떤 칼럼니스트가 썼듯이“도시라는 일반 명사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말”로 느껴지던 저녁이었다. 사람을 만나도 예전의 즐거움과 기쁨은 없었다. 사람 좋아하고 활동적인 나이기에 이런 감정 변화는 당황스러웠다. 나는 핸드폰을 잘 받지 않는 사람으로 공공연히 알려졌고, 매번 못 간다는 연락도 없이 모임에 나타나지 않는 나를 사람들은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사람들과 같이 웃으며 놀다가도 쉽게 짜증을 내며 돌아섰다. 사람들과의 단절을 고하는 지점에서 이상한 희열을 느꼈다.

사람들과의 사이가 너무 가까워 오히려 외로웠다. 이웃이 많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만, 시골에 홀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외로웠다. 어디에도 내 것은 찾을 수 없음에 외로웠다. 너무 빽빽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보니 우리 사이에는 여백이 없다. 여백은커녕 내 자리라 할 만큼의 공간도 부족하다. 그래서 서로 제자리를 잡기 위해 경쟁한다. 예전에는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니지만, 내 것이기도 하고 네 것이기도 한 공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의 우리들에게는 그런 여백을 찾아볼 수가 없다.
사람들을 깊게 많이 사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속에서 내 자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에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 이야기를 만들어갈 때에는 내 영역이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관계의 양적 성장이 질적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으며 많은 사람들을 정말‘미친 듯이’만나고 다녔다. 그런데 관계라는 것이 어느 수위에 이르니 더 이상 나를 넓혀주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외로움을 잘 보듬어줘야 한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 내 자리를 굳건히 다져가고 싶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혼자 영화를 보고, 길을 걷고, 비를 맞고, 사진을 찍고, 카페에 앉아 조각 케이크를 먹는 것도 좋다.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내 안의 것들을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가끔씩 찾아오는 이 시간들을 잘 보내고 나면 다른 사람들을 더 힘껏 끌어안을 수 있다. 만날 사람은 많지만 오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는 저녁, 우리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인가?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로움에서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혼자 극장에 가다 
8년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지면서 내가 치른 이별식은 혼자 영화 보기였다. 함께 영화 보기야말로 암흑이 주는 두근거림을 공식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기회이고, 연인들이 가장 먼저, 가장 흔하게 택하는 데이트 코스이지 않은가. 이 일을 혼자 함으로써 완벽한 솔로를 선언했다고 생각했다. 처음 동기가 그랬듯이 혼자 영화를 보는 일은 우울하고, 외롭고, 어찌 보면 안타깝기까지 한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퇴근길에 혼자 영화 보러 가기를 즐긴다.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외롭거나 쓸쓸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혼자 극장에 갔을 때 무슨 영화를 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새까만 정적에서 느껴지는 그 느낌 때문에 극장에 가는 것이다. 극장에 들어서고 보면 모두가 혼자이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자신만의 자리를 차지 한 채 같은 화면을 보며 저마다의 감상에 빠져든다. 삼삼오오 몰려온 사람들도 결국에는 모두 혼자이다. 다들 같이 어울리는 척 살아가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모두가 혼자이다.
관계 다이어트 
친구는 많지만 외로울 때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외롭게 한다. 누군가와 수다를 한바탕 떨어야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을 것 같은 날,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연락할 친구를 찾는다. “소주 생각나. 나올래?”라는 메시지를 보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내 마음을 같이 느낄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핸드폰이며 메신저에 수백 명의 사람을 두고도 오늘 이 밤을 같이 보내고 싶은 사람을 골라내지 못하는 날이 있다. 이렇게 외로운 날, 우리는 가장 감성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가장 이성적이다. 나는 사람들을 일렬로 두고 한 사람씩 삭제하기 시작한다. 아주 냉정하게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라본다.“ 오랜만이야. 잘 지내?”라는 인사가 어색한 친구는 거침없이 삭제한다. 예전 회사에서 알게 된 거래처 사장님, 옛날 남자 친구의 친구는 모두 삭제 대상 1호이다. 해묵은 관계가 너무도 많다.
인간관계에도 휴지통이 필요하다. 가끔씩 내 지인이라 칭할 수 있는 관계의 범위를 정하고 의미 없는 관계를 삭제해가는 것도 아주 외로운 밤을 조금 덜 외롭게 보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