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흥미 있는 것은 모두 발견했다고 자신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곳에 오래 살았다는 것
이 주된 이유이다. 우리가 10년 이상 산 곳에 뭔가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는 생각은 하기 힘들다. 우리는 습관화되
어 있고, 따라서 우리가 사는 곳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 _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집에서 같이 뒹굴던 추리닝을 입은 채 집을 나섰다.
인디안밥을 사다가 우유에 말아 먹어야겠다.
가까운 동네 슈퍼는 오늘 하루 쉰단다.
먹지 말까, 다른 데 가볼까.
조금 더 먼 두 번째 슈퍼에는 인디안밥이 없다.
그냥 죠리퐁 먹을까, 다른 데 가볼까.
세 번째 슈퍼에서 드디어 인디안밥을 사 들고 돌아오는데
뭐지? 여행한 듯한 이 느낌은?
규칙은 딱 하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간에 챙기고 나설 것여행이란 낯선 공간으로의 이동이라 생각해왔다. 적어도 몇 시간쯤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내 시선이 닿지 않았던 낯선 장소에 나를 떨어뜨려 놓고서야 아, 내가 여행을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고, 기차를 놓치면 아무도 모르는 공간에 혼자 남겨질까 두려워 서두르게 되고, 불쾌한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것조차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불편거리들이었다. 나의 여행은 언제나 새로운 공간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게 됐다. 하나의 공간을 다른 시간에 여행하는 것은 또 다른 여행이 될 수 있다. 아침과 저녁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어제와 오늘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공간도 자란다. 그러니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에 여행하면 다른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 동네도 새벽에 만나보니 다른 모습이었다. 아침 출근길에 버스 타러 가면서 만나는 우리 동네와 주말 오후 기분전환 삼아 나선 우리 동네는 아주 아주 달랐다. 익숙한 공간을 새로운 시간에 만나는 것은 새로운 공간을 만나는 여
행만큼 신나는 일이다. 공간 이동 여행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을 다른 시간에 있어보는 시간 이동 여행이다.

동네 여행은 아주 가까운 곳으로 떠나는 시간 이동 여행이다. 가까운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니 준비도 필요 없다. 가벼운 운동화 하나만 챙겨 신으면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다. 동네 여행은 아무런 목적 없이 출발하지만 항상 기대 이상의 것을 얻게 된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재료를 얻기도 하고, 동네에서 낯선 모습을 발견해 기분전환이 되기도 하고, 가슴 뭉클한 깨달음이 꿀렁꿀렁 올라오기도한다.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기만 하면 걸어간 만큼 모두 내 땅이 되는 톨스토이의 동화처럼,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마음먹고 걸어간 만큼 우리 동네가 된다. 마음 닿는 대로 걸어갔다 돌아오면 된다. 꼭 동네에 어떤 좋은 공간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릴없이 거닐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로 걸어보기 위해, 정거장에 앉아 빠르게 흘러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목적지가 있는 사람처럼 빠르게 걷거나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느릿느릿 걸어보기 위해 동네 여행을 한다. 매일 만나는 우리 동네를 새로운 시간에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나를 충전하거나 위로하거나 새로운 친구를 사귀거나 자극이 필요할 때 떠나는 게 여행이라면, 나는 매일매일 여행을 할 수 있다. 우리 동네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나드는 장소니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 특정 시간을 선택하거나 따로 짐을 꾸리지 않아도 된다. 몇 박 며칠 계획을 세우고, 혹시나 필요할지도 모르는 것까지 꽁꽁 챙겨 넣으며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여놓았던 공간 이동 여행은 일 년에 한 번으로
족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동네 여행으로 콧구멍에 바람 좀 넣으며 살자!
주말 오후에는 동네 한 바퀴 
몸이 힘들어졌다. 드러누운 채 다리를 들면 90도로 세워 올릴 수 없을 만큼 복근이 약해졌다. 손을 머리에 대고 하트를 만드는데 뿌드득 소리가 날 만큼 어깨 근육도 굳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뭐? 운.동.운.동.운.동. 근데 뭘 하지? 인터넷 검색창에 생활 체육을 입력해 넣고 내가 할 만한 운동을 찾았다. 탁구는 짝꿍이 없어서 못하겠고, 줄넘기는 심심해서 못하겠고, 댄스는 박치라 못하겠고, 요가는 졸려서 못하겠고. 에이, 괜히 인터넷 검색하느라 어깨 근육만 더 굳었네. 구시렁. 이런 나를 옆에서 지켜보던 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가서 걷기라도 해!!! 그렇게 나는 거리로 내몰렸다. 집에서 뒹굴던 추리닝 차림 그대로. 그래. 이왕 나온 거 동네라도 한바퀴 돌자. 이렇게 난데없는 내몰림에서 시작된 동네 여행은 이제 취미로 발전했다. 주말 오후 우리 동네에서는 살아 있는 것들을 만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동네는 죽어 있었다. 항상 길과 건물을 중심으로 우리 동네를 바라봤었는데, 주말 오후의 여유로움 속에서는 꾸물거리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 동네에 사람들이 생겨났다. 슈퍼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무대 위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 같다. 지난주에는 피지 않았던 꽃이 오늘은 담장 너머로 붉게 피어오는 것도 보게 된다. 서두르면 보이지 않을 만큼 느린 속도로 우리 동네는 자라고 있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자신 있게 얘기한다. 나 요즘 운동해. 무슨 운동? 걷기 운동. 그럼 친구 일동. 풋! 비웃는다. 누가 뭐래도 나는 걷기 운동을 사랑한다. 이렇게 주말마다 열심히 걷는데 조금은 건강해지지 않을
까? 은근히 기대해본다.
새벽 6 시 , 낯선 시간 속으로 
너무 일찍 깼다. 어제저녁에 조금 일찍 잤더니 나도 모르게 새벽에 눈이 떠졌다. 5시 반. 아아. 더 자야 해. 자
장자장자장. 더 자라. 더 자라. 더워서 그런가. 선풍기 타이머를 90도 돌려놓고 다시 누웠다. 그러나 정신은
이미 너무 말짱해져 버렸다. 덥네.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아니. 갑자기 새벽에 웬 아이스크림? 그냥 자자. 문
득 일어나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한잔 꺼내 원샷! 이불을 머리 쪽으로 쭉 밀어놓고 다시 누웠다. 두 눈을 질끈
감았는데도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안 되겠다!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집을 나왔다.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한 새벽 여행이 시작됐다. 슈퍼 냉장고 앞에 섰다. 죠스바 하나를 샀는데 50퍼센트 세일을 한다. 아직 덜 깬 내 기분은 사소한 것 하나에 살짝 업되었다. 파마머리는 범벅이 되었고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이었지만 새벽의 상쾌한 기운에 취해있었다. 이왕 나온 거 좀 걷다 갈까. 슈퍼 앞 공원으로 갔다. 사람들이 나와서 운
동을 하고 있었다. 걷겠다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바로 가까운 벤치를 찾아 앉았다. 오, 운동하는 사람들이 꽤 많네. 이 사람들은 잠도 없나. 뭘 이리 새벽부터 이러고 있지. 그러다가 갑자기 내 슬리퍼 차림이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정신이 들었다.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기에는 이미 날이 너무 밝았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입은 죠스바로 시퍼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새벽 6시, 다들 나처럼 이불 속에서 미적거릴 줄 알았는데 이런 새벽 시간에도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구나. 열심히 사는 줄 알았는데 내가 살아보지 않은 시간이 참 많구나. 가슴 깊은 곳에서 뭉클한 기운이 올라왔다. 새벽에 동네 슈퍼에서 사 먹은 죠스바 하나가 나를 일깨워주었다.
퇴근길 여행 퇴근길에 원래 내리는 곳보다 한 정거장 앞에서 내렸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집까지 걸어왔다. 걷는 동안 옆 동네와 우리 동네 사이에 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뚜레주르 앞에서“여기는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없네. 엄마가 내일 아이스크림 케이크 사줄게”라며 어린아이를 달래는 엄마를 만났다. 패밀리마트 앞에서는 MP3를 꽂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여학생을 만났다. 치킨집 밖에 놓인 테이블에는 큰 잔에 맥주를 받아든 사람과 작은 잔에 맥주를 받아든 사람이 서로 자기가 말할 차례라며 손을 크게 휘젓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나도 한번쯤은 겪었음 직한 그런 일들이 그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나도 저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걸어가거나 앉아 있었다. 오늘 혹은 내일 나에게도 벌어질 일들을 미리 보고 있었다. 그들을 죽 지나 집에 도착하고 보니 내게 30년 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아주 작은 일상의 파편들로 돌아본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그 일들을 아주아주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바라보았을까? 처음 보는 일처럼 낯설게 느꼈을까? 내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을 구경하는 것처럼 “어라. 저 사람, 저러고 있네”라며 그들을 바라본 걸까? 예전의 내 모습이거나 지금의 내 모습이거나 앞으로의 내 모습일 텐데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 닮아 있음에 반갑기보다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 같아 낯설게 느껴진다. 어쩌면 오늘 이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는 내 모습을 다른 사람의 일상에서 발견한다면 또 어색하다 하겠지. 다른 사람들의 일상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별 볼일 없이 반복되는 것 같던 내 일상을 아주 낯설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이렇게 자꾸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는‘오늘 하루도 똑같았음!’으로 기록될 내 일상도 조금은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20분 동안 높은 굽의 신발을 신고 걷느라 좀 힘들긴 했지만,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퇴근길 여행 해내다니. 그래도 본전은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