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은 ‘욕’일지도 모른다. 아주 옛날 원시인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환담하다가 어떤 이해관계로 논쟁이 붙고, 누군가가 화가 나서 상대방을 곤봉으로 내려치려다 대신 욕 한마디하고 나서 분노를 삭였다면, 그래서 그의 생명을 해치지 않았다면, 그것은 인간 역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이다. _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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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지 않는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
아무 때나 울음을 터트린다.
말짱하게 생긴 서른 살 아가씨가
삐딱한 방식으로 화를 표현한다.
혼자 계속 화나 있다.
내 버 려 두 시 오 .


규칙은 딱 하나. 내가 분노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

나는 분노를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대부분의 경우에 내가 화가 났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화나지 않은 척, 괜찮은 척한다. 그러다가 엉뚱한 지점에서 삐뚤어진 방법으로 분노가 표현된다.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비꼬아 말하거나 빈정거리는 투로 말한다. 울화통을 터트리거나 노발대발 노골적으로 화를 낼 때도 있다. 한번 삐딱선을 타면 배배 꼬인 사람처럼 엉뚱한 곳으로 분노를 표현하기 일쑤이다.
그 원인을 찾자면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인정 받는 사람, 항상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항상 웃었고, 양보했고, 친절했다. 사람들은 나의, 그런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좋아해주었다. 그럴수록 나는 그런 모습만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쁜 감정들은 내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어쩌다가 나에게 찾아오더라도 온 힘을 다해 가리고 다녔다. 내 분노를 부정했다. 그렇게 내 분노는 자라지 못했다. 너무도 오랫동안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돌보지 못했다.
4983056270c61서른 살인 나는 열 살 수준으로 분노를 표현한다. 뭐라 한마디만 하면 토라져 밥을 먹지 않거나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식이다. 토라져 있을 때 무슨 일이냐고 묻는 친구가 있으면“그냥 가만히 내버려둬”라며 버럭 화를 낸다. 밥을 먹지 않거나,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됐어”로 일관할 때도 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입을 삐쭉 내민 채 화가 나 있을 뿐이다. 이런 나의 분노는 정확히 내 의사를 전달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에게로 옮아간다. 그렇게 그 사람마저 함께 분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나의 분노는 성숙하지 못했다.
제대로 화내는 방법을 연습해야 한다. 지금은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세련되게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내 분노가 어디서 발생했는지 알아차리고 화났다는 사실을 적대감 없이 상대에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꼭 표현되지 않아도 되는 분노라면 내 안에서 적절하게 녹이고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 감정을 내 안에서 추스르고 녹여내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말고, 숨기지 말아야 한다. 다행히도 이젠 내가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차린다. 처음 내 분노를 알아차리기 시작한 후 더 쉽게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성숙하지 못한 내 분노를 알아차린 것이 다행스럽다. 앞으로도 몇 년은 이런 분노를 안고 살아야 할 것 같다. 나는 조금씩 느끼고 있다. 내 안의 분노가 이제 울음을 멈추고 성장을 시작했음을.

 소심한 반항
498305627e416풍선껌이라는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풍선껌은 씹는 내내 우리를 아주 오래전의 어린 시절로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풍선껌 씹기가 취미라면 좀 웃길까? 누가 뭐라 생각하든 나는 풍선껌을 즐겨 씹는다. 입에서 오물오물 씹어대며 단물을 빨아먹는 것도 좋고, 한순간이라도 입을 놀리지 않으면 금세 질겨지기 때문에 끊임없이 껌을 입 안에서 굴리며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것도 재밌다. 풍선이 툭 하고 터지는 순간 껌이 얼굴에 얼마나 묻었나를 궁금해하며 혀를 빼서 껌을 다시 입 안으로 거둬들이는 것도. 매력덩어리 풍선껌의 최고 매력은 나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풍선껌을 씹는 이유는 풍선을 불기 위해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혓바닥을 입 밖으로 살짝 내밀어 껌을 얇게 펴는, 풍선 불기 준비 자세 때문이다. 이때 내 마음은 이미‘메롱’이라는 말을 내뱉고 있다. 열 받게 하는 사람이 앞에서 어정거리고 있을 때 나는 풍선껌을 부는 척 그 사람에게 메롱 하며 혀를 내민다. 나의 소심한 반항이다. 어떤 어르신은 메롱하는 나를 귀엽다고도 했다. 자기한테 그러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어렸을 때 씹었던‘꿀껌’, 자신 있게 씹고 30분 후 노래해봐‘츄앤씽’, 깨물면 터지는‘부푸러’, 과일칩 풍선껌‘와우’. 어쩜 이렇게 이름도 하나같이 씹음직스럽게 만들어놨는지.


 뒤끝노트
점심을 먹기 위해 우르르 몰려나왔다. 마치 여고생들이라도 된 듯이 재잘재잘 할 말을 쏟아내며, 먹잇감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뒤에서 걸어오던 옆자리 신입사원이 내게 깡충 다가오며 말했다.“ 재잘재잘 미영님, 미영님, 제가 읽으면 좋은 책 두 권만 추천해주세요.”읽지는 않아도 사놓은 책은 많아서 풍월 정도는 읊을 수 있다고 생각한 나는 서너 권을 추려서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팀장님이 불쑥 대화에 끼어든다. “그렇게 열심히 읽어서 지금 미영님, 훌륭한 사람 됐어요?”다정히 걸어가던 세 사람 사이의 화기애애함이 순간 와장창 깨졌다. 헐. 이건 또 뭐니? 오늘 저녁에는 뒤끝 노트를 써야겠다. 꼭꼭꼭. 뒤끝 노트는 에쿠니 가오리 소설에 등장하는 카라의 사탕 일기를 따라 만든 것이다. 카라는 매일 밤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독약 사탕 처방을 내린다. 나는 맘에 안 드는 사람에 대한 욕을 이 노트에 잔뜩 내뱉어놓는다. 이 노트를 쓰면서부터 분노를 참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팀장님이 열 받게 하는 이야기를 했지만 뒤통수 확 때리지 않고 저녁까지 그 분노를 담아놓을 수 있었다. 뒤끝 노트에 쓸 욕을 생각하면서 두 번쯤 웃기도 했다. 내 뒤끝 노트는 노란색이다.“ 당신 옐로카드야!”조만간 빨간 노트도 하나 만들어야 하나? 퇴장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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