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는 우리네 자신이 결코 참된 자기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에 우리 모두는 동감한다. 그저 목숨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만 애쓴다면 뭔가 허전하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숨길 수 없는 확신이다. _임어당,《 생활의 발견》
8시 23분. 버스 안. 출근 중.
봄 햇살이 적당히 버스 안에 드리우고 있었고
나는 반쯤 졸고 있었다.
문득 눈을 떴는데 벚나무에 하얀 불이 들어와 있었다.
“이제 터트려도 되겠습니까?”하는 벚나무의 물음에
오늘 아침 햇살이 오케이!
그럼 나도 오케이!
출근하던 버스에서
그냥 내 렸 다 .
규칙은 딱 하나. 내가 정해놓은 책임의 짐을 내려놓을 것
나에게 하루라는 시간은 주어졌는데 나의 하루는 없다. 24시간은 누군가에 의해 이미 스케줄링이 되어 있다. 나에게는 항상 책임이라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 그 녀석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다 보면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간다. 회사에 가면 직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 이미 쌓여 있고, 그 일을 순서에 맞춰 해야 한다. 그래야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이라는 마약을 받아 마실 수 있으니까. 일을 마치면 늦지 않게 집으로 돌아와야 하고, 가족들을 위해 청소도 도와줘야 한다. 그게 나이다. 아무도 정해주지 않았는데, 스스로 정해놓고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묶어두고 있는 일들을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꾸역꾸역 엮어가는 모습이 꼭 태산을 등에 지고 하루하루를 넘어가는 것 같다.
매일 아침 정상적으로 일어나 출근하고 시간이 되면 퇴근하고, 특별한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들에게는 목표가 있어야 하는 만큼 재미와 즐거움도 있어야 한다. 내 일상이 책임에 의해서 정해진 대로만 굴러간다면 내 삶은 정말 맛없고 질기기만 할 것이다.
내 기분을 약간은 들뜨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라는 무거운 돌을 발에 묶은 채 현실의 한가운데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나를 산뜻하게 끌어올려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모든 책임을 벗어던지고 오늘 하루만은 자체 휴업 간판을 달고, 내가 하루 목숨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해야겠다. 나의 책임을 모두 벗어던질 수 있었던 단 하루의 시간. 나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면 좋을까? 그런 날 나 혼자서 조용히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나는 갖고 있을까?
모든 책임에서 벗어난 하루를 만들고 보면 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그토록 나를 옭아매던 아빠, 엄마, 딸, 아들, 며느리, 첫째, 사원, 동료, 친구라는 이름보다‘나’라는 이름이 더 중요하다. 나라는 이름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봐야겠다. 모든 것을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온전히 내 마음대로 즐겨보는 거다.
그렇다. 나는 아직 내 삶에 대해 싱싱한 애정을 갖고 있다. 앞만 보고 달리고 시간을 쫓고 돈을 잡으려고만 노력하지는 않는다. 가슴 한구석으로는, 내 삶을 촉촉하게 적셔주거나 폭죽처럼 터뜨려줄 신나는 일을 기다리고 있다. 일년에 한번쯤은 내가 지고 가야 할 모든 책임을 뒤로한 채 지하로 떨어지기 직전의 내 마음을 지상 세계로 가볍게 끌여올려줄 무언가를 찾는다. 출근 버스에서 나를 끌어내리는 것은 그때그때 다르다. 좋은 날씨나 파란 하늘, 화려한 립스틱, 거울에 비친 슬픈 내 모습, 혹은 친구의 전화 한통에 이끌려 출근 버스에서 뛰어내리기도 한다. 이렇게 모든 것에서 풀려나 깃털처럼 가볍게 하루 종일 떠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보니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어디쯤인지도 알겠다. 내려놓았던 짐을 다시 등에 지고 보니 내가 지고 가야 할 책임이라는 짐의 무게가 어느정도 인지도 알겠다. 자, 그렇다면 방황은 오늘 하루로 끝! 내일부터는 내 자리에서 더욱 열심히 살아가야지!
동물원, 이젠 혼자 가는 거야! 
하늘 봤어? 구름 한 점 없이 파래. 가을인가 봐.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출근하기 위해 잠실에서 2호선으로 막 갈아탔을 때였다. 성내역을 지나 지상으로 올라온 지하철에서 내다본 창밖은 정말 파랬다. 잠실철교를 따라 한강을 지날 때에는 소설에서만 보던 금빛 물결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 날씨 정말 좋네. 그래. 이런 날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하는 건 죄악이야. 그럼 어쩔 건데? 그래도 먹고살려면 출근해야지. 출근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
글쎄. 혼자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오늘 해야 할 일과 미팅들을 주르륵 꿰어봤다. 그리고 바로 지하철에서 내렸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하지는 말자.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내일 하자. 회사에 전화해 적당히(!) 둘러대고, 반대편 지하철로 갈아탔다. 어디로 가지? 적당한 곳이 떠오르지 않아 지하철에 몸을 실은 채 계속 달렸다. 반대편 지하철로 출근하는 사람들(강남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들 틈에 조그맣게 끼어 나는 소풍을 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도 저들처럼 죽을 맛으로 출근하고 있었는데, 지하철의 방향을 바꿔 타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가벼워지다니. 내 단순한 감정 변화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었다. 강남역을 지날 때쯤, 사람들이 전철에서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이제 나도 목적지를 정해야 한다는 압박이 다가왔다. 지하철 노선도 앞에 섰다. 경마공원. 그래 저기로 가자. 사당에서 4호선으로 갈아탔다. 4호선에서 또 지하철 노선도를 보니, 대공원이 더 좋을 것 같다. 놀이공원에 혼자 갈 수 있을까? 있을까? 있을 자신이 없었다. 아. 그럼 동물원은 어때? 미술관
옆 동물원. 그래. 거기 좋다. 혼자 가니까 가다가 생각이 바뀌면 바로 목적지가 바뀌는구나. 히히. 혼자 웃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동물원에 도착해 있었다. 어른 한 명이오. 당당하게 혼자임을 알리며 입장했지만 조금은 어색했다. 평일 오전에 사람들이 많지 않은 조용한 공간에 남겨지고 보니 방향감각도 상실한 느낌이었다. 항상 이리로 가자, 저거 먼저 보자, 빨리 가자, 소리에 맞춰 동물원을 돌았는데 오늘은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정해줄 사운드가 없었다. 볼 것 많은 동물원에서 뭘 봐야 할지 몰랐다. 내가 그동안 사람들을 쫓아다니느라 얼마나 분주했는지 잠시 반성했다. 그러자 동분서주했던 동물원 구경이 새롭게 다가왔다.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발길을 옮겼다. 무얼 하자고 제안하는 사람도 없고, 놓치지 않도록 집중해서 따라가야 하는 일행도 없다. 친구들과 같이 왔을 때는 호흡을 맞추느라, 가족들과 같이 왔을 때는 그들을 살피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씩 내 안으로 들어
왔다. 나는 새장에서 하루 종일 놀았다. 코끼리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동물들이 아니기에 수십 가지 동작을 관찰하고 지켜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거위는 흰색만 있는 줄 알았더니 검은 거위도 있었다. 매일 즐겨 먹던 닭도 애완용이 따로 있었다. 치킨집 간판에 붙어 있는 펠리컨도 처음 만났다. 큰 부리 속에 물고기를 세 마리씩 집어넣고 먹는 펠리컨은 친구하고 싶은 멋쟁이 중 하나였다. 동물원 입장료 3,000원이면 내 마음은 가
벼워진다. 내 마음에도 살랑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번 가을도 오늘의 시원한 바람을 기억하며 잘 이겨내자. 파이팅!
어느 날 갑자기 휴가가 생긴다면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오늘 휴가야. 남편이 애 봐준데. 하루 종일 놀다 오래. 뭐 하지?”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혼자만의 시간에 친구는 당황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그토록 많았는데 막상“맘껏 놀아보세요!”라는 멍석이 깔리고 보니 뭘 해야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만 하다 하루를 보낸다. 어렸을 때 시험 기간에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평소에는 안 보던 책도 읽고 싶었는데 막상 시험이 끝나면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 모두 까먹고 할 일이 없어 멍해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어느 날 갑자기 생긴 휴가를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당황한다. 그렇게 방황하느라 하루를 다 보내기도 한다. 어른들의 놀 거리는 많지 않다. 그러니 언젠가 가보고 싶은 곳이 생긴다면, 해보고 싶은 일을 찾는다면 끊임없이 마음속에 기록하고 모아두어야 한다. 번잡스러웠던 꽃구경을 소풍이라는 이름으로 아무 준비 없이 떠나거나, 아이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평소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빠른 재즈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 편안히 앉아 있어보거나,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조용한 시간을 가져보거나, 멋진 길을 걸으면서 저녁 메뉴에 대한 걱정 따윌랑 구겨서 가까운 휴지통에 버리고 오늘은 조금 늦게 집에 들어가도 좋겠다고 생각해보거나, 미술관에 가서 내 느낌대로 그림을 감상해보거나, 친구 회사로 가서 같이 점심을 먹어보거나, 집에 드러누운 채 말 낮잠보다 두 배로 달콤한 평일 낮잠을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 어느 날 난데없이 떨어진 휴가. 만나야 할 사람도 정해지지 않았고, 해야 할 일도 정해지지 않은 날. 혼자서 조용히 돌아볼 경로를 정해두는 것만으로도 내 삶은 안정이 된다. 람들과의 감정 접촉도 그립지만 그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이 더 그리운 날, 나는 어디로 찾아가야 할까?

종로, 인사동, 종묘... 거리거리 골목골목을 마구 헤매는데
낯선 것들이 어찌나 그리 많은지...
걷다 문득 언니의 글이 생각났지.
아침에 출근하다가 오락실로 샌다는...
점심시간, 다른 세상으로 새보는 것도 좋은거 같어~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