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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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명이 이끄는 길을 따라갈 것이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목표나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늘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이루는 방법에 집착하지 않는다. 예를들어 일 년에 책 한 권을 써내는 것은 나의 목표다. 어떤 책을 쓸 것인가 역시 관심사다. 그러나 그 책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른다. 글이 글을 이끌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매일 새벽에 일어나 나의 책상에 앉는다. 그리고 어제 내가 마쳤던 글을 쳐다본다. 글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내 마음을 따르고, 이내 여과되지 않은 생각들이 펼쳐진다. 그리하여 책은 한 페이지씩 써진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이 일을 주도한다. 글이 달려가기 시작하면 나는 고삐를 풀어 둔다. 마치 말을 타고 질주하는 듯하다. 나는 귓가에 바람을 즐기고 몸을 낮춘다. 순식간에 말은 내가 모르는 곳을 달려 새로운 세상에 이른다. 나는 환호한다. 글은 그렇게 쓰여진다. 그 새벽 달려간 거리들이 모이고 모이면 책이 된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방법이다. 또한 인생을 사는 방식이다.
여름이 오면 나는 여행을 떠난다. 나는 늘 여행에서 나를 놓아둔다. 나는 무뇌(無腦)다. 뇌가 없다. 모든 기회들이 나에게 달려들도록 놓아둔다. 다른 사람들의 먹던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다른 사람들이 자던 침대 위에서 잔다. 그리고 그 낯선 벽들이 기억하는 은밀한 이야기들을 듣는다. 나는 사라지고 그들이 내 자리를 차지한다. 그들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그들의 마음으로 술을 마시고 그들의 마음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새로운 나로 나를 가득 채운다. 여행을 떠나면 달과 별도 달라진다. 북반구의 초승달은 기역자(ㄱ)처럼 휘었지만 남반부의 초승달은 니은자(ㄴ)처럼 휘어있다. 별자리 역시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별들로 하늘이 온통 덮혀있다. 나는 밥을 거의 먹지 않는다. 그 대신 빵을 먹는다. 고추장도 깻잎조림도 가져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그곳의 음식이 있기 때문이다. 변비도 없다. 어디서나 잘 눈다.
여행에서 무언가를 바라고 고집하면 자유를 잃게 된다. 여행은 자유다. 자유롭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잃으면 여행도 없다. 수많은 사진, 방문 목록 속의 볼 곳들을 하나씩 채우는 것이 여행은 아니다. 나는 늘 마음의 사진을 찍어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마음에 어떤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프린트되기 시작한다. 몽골의 호수 위로 새벽 그믐달이 상어의 지느러미처럼 떠올라 찬란한 은빛으로 물 위의 길을 내며 내게 달려드는 장면도 있고, 드레스를 입은 모르는 여인이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달려가는데, 바람이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 흰 무릎 위 살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다. 이스탄불의 골목 뒤 까페에 앉아 창문 너머 둥근 모스크의 첨탐 사이로 함박눈이 내리는 것을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 내가 찍혀 있기도 하다. 나는 이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모두 사라져 갔으나 이것들은 남아 그것이 내 삶이었다고 말해준다.
인생은 수많은 우연으로 짜여진 여행이다. 목표를 향해 떠나지만 길 위에서 우리는 수많은 우연을 만나게 된다. 나는 이십대의 여행에서 아내를 만났다. 봄날, 꽃도 드믄 아직 봄샘 추위 가슴을 무찔러 오는 날, 그녀는 분홍빛 투피스를 입고 느닷없이 내 인생으로 뛰어들었다. 내 아이들 둘이 불쑥 세상으로 튀어 나왔다. 두 아이들은 내가 바라는 모습을 반 쯤은 그럭저럭 닮아 있는 듯하지만, 결국 제 생긴대로 살게 될 것이다. 나는 교수가 되고 싶었으나 작가가 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인생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 나는 그리스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좋아한다. 크레타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살면서 그렇게 될지 나는 모르겠다. 그건 어쩌면 죽은 다음에나 오는 평화리라. 그러나 여행을 떠난다면 나는 그렇게 무욕의 며칠을 보내고 오고 싶다.
통곡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삶을 열렬히 사랑하려면 우연을 사랑해야한다. 그 사람 거기서 만난 그 우연을 사랑하고, 나에게 찾아와 내 일이 된 그 일을 사랑하고, 느닷없는 삶의 초대에 흥분해야한다. 내 작은 계획의 그물망에 잡히지 않은 일정이라 하여 거부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어떤 기회에 대해서는, 나의 모든 계획을 적어 둔 수첩을 송두리째 버리고, 그 떨림을 따라 나서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삶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고, 흥미진진해 진다. 나의 스토리가 궁금해지고, 긴장된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가 새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는 길이 내 길이다. 나는 자유다.
(7월 18일 부산일보/매일신문 기고문)

작년에 니체를 읽고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제 앞에서 사라진 것만 같았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저를 옭죄던 이 세상이, 어느 한 순간 불이 번쩍! 하면서 무대 뒤로 사라져버린 그 느낌.
이제 니진스키와 카잔차키스를 만나보려 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또 스승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의식과 무의식" 혹은 "현실과 이상"의 균형점을 찾으려 애써보겠지요..
사부님. 어쩌면 제게 미로에서 세상 밖으로 연결해주는 한줄기 실타래는 연구소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칫 현실의 길 위에 그냥 주저앉아 일어나지 않거나
자칫 이상의 세계로 그냥 뛰어내려 돌아오지 않거나 하지 않고
균형점을 찾으려 제 안을 찾고 또 찾으며, 자유를,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고 누려볼 수 있다면
그건 오롯이 사부님과 연구소가 제 삶에 들어와서라 믿습니다.
사부님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우연.
제겐 전 삶을 통해 가장 감사한 필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복이라 합니다.
이 여름 변함없이 몸 건강하시고 그 영혼, 더 자유로우시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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