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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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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수희향님께서 201111262010분에 등록한 글에 댓글을 답니다.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441>

# 드디어 끝났다..

드디어 끝났다. 애니어그램 심화과정이.
그러나 진정한 시작은 지금부터이다..

지성, 감성 그리고 영성.
한 인간이 참 자아를 찾아 온전한 존재가 되는 길.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기 마련이다.
그 나름의 타고난 환경과 그 환경에 대항하여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을 잉태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생존전략이라는 것이 바로 "만들어진 성격"이다.
그렇다. 성격이란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선택한 페르소나로서
우린 한겹이 아닌 여러 겹의 페르소나에 둘러 싸여 있다.

그렇게 우리를 겹겹이 쌓고 있는 페르소나를 한겹, 한겹 벗겨내어
참 자아를 찾아 가는 길, 그것을 우린 "내적 여정의 길"이라 부른다.

수희향은 은둔하기를 좋아하는 지독한 사고형 인간이다.
그녀가 가장 회피하는 것은 사람들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사적인 시간, 사적인 공간을 찔러 들어오는 일이다.
그럴 때 그녀는 모든 관계를 끊고 움츠러들고 싶어진다. 혼자있고 싶고, 그래야만 한다.
심지어 가족간에도 거리두기를 하는 그녀, 아주 전형적인 (  ) 번 유형이다.

그런 그녀가 온전한 인간으로 나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감성적 체험이다.
머리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거기서 끝낸다.
그러나 삶은 그걸로 전부가 아니다.
가슴으로 체험하고 몸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사랑하면 눈짓으로, 표정으로 혹은 미소로 전달할 필요가 있는게다.

카톨릭 재단답게 맨 마지막 시간에 각 유형별로 성인들을 예로 들어 설명해주었는데 압권이었다.
내가 삶의 지평을 어찌 넓힐수 있는지가 한순간 훅~하고 전달되오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렇다. 느낌이다.
내가 수많은 내적탐구 과정들 중에서 애니어그램을
그 중에서도 이 곳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분석심리학으로 시작해서 스스로 체험하게 해주면서 영적인 성장으로 이끄는 과정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만큼 예상보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기도 해서 벅찬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분명 나의 영혼은 다음 단계에 꼭 필요한 곳이라고 말해 온다.

지성, 감성 그리고 영성.
깊고 어두운 바다 저 편에 숨쉬고 있는 감성을 깨워 일으킨다..
얼핏 스쳐지나가는 내가 건너야 할 과정들이 정말이지 막막하다못해 먹먹하기까지 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기도 하다. 그 무게감이 너무도 두렵다.

그러나 이미 난 무의식 세계에 한걸음 발을 들여놓았고
진실된 삶을 향한 영혼의 간절함을 들어버리고 말았다. 돌아갈 수 없다..

천천히 가자..
가다 힘들면 때론 쉬어가며 가자.
그저 멈추지만 말자.

연구원을 시작할때 죽음편지를 쓰면서 사는듯이 살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될 것 같다하였는데
이제 죽음을 떠올리라하면 용기내어 한걸음 더 내적탐험을 하지 못하면 후회할 것 같다.

신은 인간에게 감당할 수 있는 무게만큼의 삶만 허용한다 하셨다.
사부님과 성철 스님의 수행법 아래서 지난 3년 열씸 정진했다면
지금부턴 애니어그램이라는 지도를 의지하여 무의식 세계를 여행해보는게다.

이 길을 걷다보면 아마 춤 테라피를 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고형인 내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몸으로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데
애니어그램과 함께 춤테라피가 유용한 도구가 될 것 같다.

그렇다. 이들 모두는 그 자체로 진리는 아니다. 내적 여행을 위한 도구들일뿐.
세상에는 수많은 진리에의 길이 있으니, 스스로 가장 끌리는 것을 찾아 자기에게 가장 편한 옷을 입으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그렇게 가다보면 드디어 명상에 젖어들 수 있을 것 같다.
난, 언젠가 불교경전 공부를 하겠다 맘먹고 있었다. 내 유형의 전형적인 목표이다.
그러나 길을 조금 바꿔보려한다.

내가 절 수행을 하면서 경전공부를 하면
자칫하면 교조주의적 이론에만 매달릴 수 있는 위험이 있을 듯 하다.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경전공부가 될터이고, 나도 언젠가는 접해야 할 부분이겠지만
지금 내가 갈 길은 아닌 것 같다.

조화로운 삶.

한 인간의 삶 속에도 조화가 숨쉬고 있다. 온전한 하나의 존재로의 길에 말이다.
한 인간 속에 조화가 숨쉬기 시작하면, 그가 속한 소우주가 조화롭게 운행된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존재이유가 아니고 무엇일까.

수희향이 속한 유형의 대표 성인이 토마라고 한다.
예수님께 질문을 많이 하고 의심도 많았던 사고형 제자, 토마.
예수님은 그에게 당신의 상처받은 손에 토마의 손가락을 집어넣어보게 해주셨다.
그의 의심을 잠재워주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다..

그로 하여금 직접 "체험"해보게 해주시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가슴으로) 체험해보고, 직접 (몸으로) 느끼게 해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토마가 얻은 구원의 은총은 무엇이었을까?
수희향 그녀가 속한 유형의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은총어린 삶은 다름아닌 "객관성"이라 한다.

여기까지 왔을 때 난 "이론의 객관성"을 떠올렸다.
이제까지 충분히 사고형 인간이라 그것을 탈피하라 해놓고 무슨 말인지 얼핏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가슴아린 충격 그 자체였다.
지적이던 토마가 선택한 예수님의 죽음 이후의 삶은 전해내려오기를 바로 목수로의 삶이라고 한다.

목수.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는듯 하다.

머리로 삶을 살던 토마가 몸으로 하는 일을 택했다.
그는 그렇게 자기완성의 길을 체험으로 채워갔던게다.

그리고 또 하나. 목수는 예수님의 세속에서의 직업이기도 했다.
그는 역방향으로 예수의 삶을 되짚어가며 자신만의 완성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게다..

많은걸 배우고, 많은걸 깨우치고, 더 많은 과제를 안고 끝난 심화과정이다.
끝은 늘 또 하나의 시작이니 그것이 인생이다.
그렇게 삶은 직선이 아닌 하나의 원인게다..

감사하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삶을 느낄 수 있음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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