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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향님께서 20123112120분에 등록한 글에 댓글을 답니다.

 

[406일차] 2012 03 10 토요일

 

<4회기 가족치료 후 >

토요일 아침 9시 서울에서 상담 약속이 있어 부랴부랴 나섰다. 혼자 갔으면 절대로 늦지도 않았을게 분명했건만 하필이면 오늘 서울에서 있는 결혼식에 가야하는 신랑은 나랑 같이가고 싶어해서 함께 나서야 했다. 성질 같아서는 거의 날다시피해서 정시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어찌나 모범적인 운전자인지 신랑은 너무나 느긋하다. 뚱뚱하면 원래 저렇게 느리냐? 속이 터질 것 같지만 날 내려놓고 또 거기서 2시간 30분여 넘게 기다리겠다고까지 하는 걸 어찌 할 수도 없어 한숨만 푹푹 내쉬는 사이 도착했다. 속 터져 죽는줄 알았다. 뭐 저리 느긋하냐? 넘은 미치겠구만.

 

하여튼 도착하니 20분은 늦었다. 주말이라 밀린 탓도 있다. 신랑이야 본체만체하고 뛰어나와 또 뛰어들어간다. 함께 나오기로 되어있던 할머니께서는 나오지 않으셨다. 어젯밤 내내 할머니께서 어린 상담자 앞에서 어떻게 말씀하실까 궁금하기도 했고, 나름 어떻게 만나뵈어야겠다고 생각햇는데, 81세된 노인분께서 나오신다 하시기에 어지간히 기대도 했는데 늘 그랬듯 내담자와 그 동생 두 분만 나오셨다. 오늘이 4회째의 상담이었다. 나날이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그게 보인다. 그래도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시작한다. 생각한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힘이 된다. 다음에는 아마도 오실 용기가 나실지도 모른다.

 

상담을 하면 행복하다. 추운 구석 방에 앉아 밥도 못 먹고 앉아 있어도 그 시간이 내겐 충만하다. 그 사람들이 행복한 그림을 그려갈 수 있도록 이리저리 휘젓고 돌아다닐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그 어떤 신인지 존재인지 우주인지 모르겠지만 그 어떤 존재에게 무한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알수 없다만 이런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준 데 대해 너무나 감사하다.

 

첫 회기 상담 이후 이 가족의 변화는 실로 놀랍다. 전 가족이 치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만 참여하는 것이지만 결국은 가족 전체가 변하고 있다. 이 것이 가족치료의 놀라운 힘이다. 한 사람의 변화를 기점으로 그 변화가 결국 가족 전체 혹은 그 사람이 생활하는 모든 장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내도록 도와주는 힘, 이 것이 내가 가족치료의 힘을 굳게 믿는 힘이다.

 

이 가족의 경우는 본인과 아이의 탈바꿈 그리고 한 집에 사는 세 식구 뿐만 아니라, 지금은 그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변화를 가져왔고, 오늘은 원가족의 관계까지 건드리고 있다. 물론 내 머리 속에는 가족은 이러이러해야한다는 그 어떤 기준도 없다. 천만 가족이 있다면 모두가 다 다른 사정이 있고 다른 그림을 그리며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지만, 희안하게도 마지막 그림은 모두 같다는 것을 안다.

 

지금까지 그려온 수천가지의 그림들을 휘저어 결국은 그들이 가장 그리고 싶어하는 결말로 안내하는 것, 아니 그들이 갈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며, 내 말을 아껴 가르침은 티나지 않아야하고 모든 것은 그들의 선택으로 남아야 한다.

 

이 가족이 사실 원가족의 문제까지 건드릴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워낙 용기있고 저력있고 영리한 내담자여서 그런지 변화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한 번 트이기 시작하니 스스로 더 이상의 것을 알아가고 깨우치고 있다. 지켜보는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세 식구의 변화라면 말할 것도 없이 오늘은 용기있게 원가족의 이야기를 두런두런 꺼냈다. 사실 81세의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이 가족의 경우 그렇기에 친정식구들의 관계를 떼어놓고 말하기는 힘들다는 것이야 뻔한 이치지만, 그래도 내담자가 거기까지 다다른 것이 너무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드리고 싶다.

 

상담이 중반기를 넘어가는 것 같다. 이 가족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어떻게 다시 써 나갈지 매우 궁금하고 기대하나 또 조심스럽기도 하다.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상담자여도 사실은 극도로 민감하게 흐름의 방향을 예의 주시하며 참여하고 있고, 상담자 스스로가 스스로를 넘어서지 못하면 가족치료도 뭣도 되지 않는다.

 

모든 직업이 그렇듯, 사람과 마주앉아 자신이 그들의 일에 무색무취의 색깔로 스며들지만 그러나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물질처럼 되어야 하는 일,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그들은 맡지 못하지만 결국은 그 힘이 작용하게 되는 것,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접근방법이다. 그래야 내담자가 지치지 않고 나가 떨어지지 않고 견뎌나가기에 쉽다. 아니 흥분하여 고무되어 변화해나간다. 나를 만나러 오는 내담자는 첫날부터 자신에게 놀라면서 돌아간다. 미처 보지 못하던 자신의 좋은 점이 구슬처럼 줄줄이 꿰어나오는 그 시간에 놀라고 고무되어 돌아간다. 그러니 그 다음 시간을 기다리고 또 기대한다.

 

 처음 만나러 오는날, 얼마나 힘든 가슴을 안고 오겠는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기에, 얼마나 지옥같은 고통 속에 살았기에 그 곳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내 앞에 와 앉게 되었겠는가? 그런 내담자들이 측은하고 기특하고 용감하고 그렇게까지 살아온 그들이 그저 놀랍고 그렇다.

 

어쨌든 다음 주 토요일 또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다. 마주 앉은 2시간 20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내담자가 상담내용을 잊지않도록 후속조치를 취해두어야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지내고 오도록 더 나은 세상이 그들 앞에 열리고 내담자들도 나 같은 행복함을 느끼며 살도록 돕고 싶다.

 

상담이 조금 길어진다 싶으니, '가자'하는 문자가 온다. 전화가 오는 걸 가볍게 거절했더니만. 하여튼 좀 얌전히 기다릴 것이지 ㅎㅎㅎ. 화장실 들렀다 뛰어나오니 문 앞에 차를 대 놓고 기다린다. 기다린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해서 흥흥거리며 애교 한 판 피워주었더니 좋아 죽는다, 나 참, 남자들이란 ! 아셈타워 옆 무슨 예식장이었다. 그 옆에 봉은사가 보인다. 그러고보니 지인이랑 대훈님이랑 점심먹고 봉은사 산책이 어쩌고 저쩌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음~ 가능하겠구만... 싶다. 도심 한 가운데 절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아니 어쩌면 절은 첩첩 산중에 있어야한다는 고정관념일 수도 있지만, 익숙하거나 흔하지는 않은 풍경 같았다. 어쨌거나 치를 대놓고 손을 잡고 갔다.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간만에 우아한 식사를 즐겼다. 어쩐지 이런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은 나와 어울리지가 앉는데, 이럴 땐 지인이가 있어야 뭐라도 쫌 물어보면서 먹는긴데.... 하면서 나름 우아한척 하면서 먹었다. 코스요리 중에서 역시나 해산물 요리가 최고다. 그냥 이런거 주지말고 부페 쫘~악 펼쳐놓고 먹고 싶은거 먹어라 하면 기냥 해산물 실컷 먹고 올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그거야 내 맘인 것이고. 흐흐

 

나와 서서 아시는 분들 만나서 담소를 나눴다. 다들 한 기업체의 싸장님들이시지만 지극히 펑범하고 가정적이고 마음이 따뜻하고 성실하신 분들이시다. 건강하시시도 하고.... 오랫만에 뵈니 그래도 참 반갑다.

 

돌아오는 길, 햇살이 너무 따사롭다.

아침에 너무 헐레벌떡 뛰어다니느라 느끼지 못했던 날씨가 새삼 피부에 와 닿는다. 집에 오니 산이 이 만큼 더 가까이 앉은 것 같다. 봄이 시작되나보다. 내일은 일요일이다. 하루 더 쉴 수 있는 날이다. 다행이다 그런 날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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