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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써니님께서 2007742209분에 등록한 글에 댓글을 답니다.
건강한 육체의 쓰임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다가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의 시가 문득 떠올라 적어봅니다.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어린시절 시인의 시를 채 외우지도 못했는데, 내 기억엔 그토록 가슴을 저미는 시가 종이에서 잉크가 바래기도 전, 그 아내를 떠나보내고 재혼을 한다는 시인의 소문을 들었더랬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여 또한 사랑을 알지 못하여 그리고 진정 사람을 알지 못하여 의문만이 남았더랬습니다.


최근에는 시인의 이 시를 읽습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어언 20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까지도 나는 정녕 남자를 알지 못하겠더이다. 사랑을 알지 못하겠더이다. 사람을 알지 못하겠더이다.

50줄이 내일모레에 애가 타는 내 마음을 부여 잡으며 평생 처음으로 사부님이라는 말을 더듬으며 눈물 고이듯 변.경.연에 합류 했답니다.

윗글 제목에서 50이라는 숫자를 그냥 넘기지 못함을 어찌하겠나이까.
50... 반평생? 아니, 남은 날을 알 수 없는 내 인생의 숫자...

공감이 가다가 짜증이 나고 이해를 하다가 돌아설까 망설이게 됩니다.
공연히 마음이 저리기 때문입니다.


상처

- 이승하

산 개미가 죽은 개미를 물고
어디론가 가는 광경을
어린 시절 본 적이 있다.

산 군인이 죽은 군인을 업고
비틀대며 가는 장면을
영화관에서 본 적이 있다.

상처입은 자는 알 것이다.
상처입은 타인한테 다가가
그 상처 닦아주고 싸매주고
그리고 벌떡 일어나
상처입힌 자들을 향해
외치고 싶어지는 이유를

상한 개가 상한 개한테 다가가
상처 핥아주는 모습을
나는 오늘 개시장을 지나가다 보았다.



나도 본 적 있다.
상한 개가 상한 개에게 다가가 상처 핥는 모습을.
적의도 지나친 친절함도 없이, 다만 상한 것끼리의 본능으로 서로를 핥는 것을.
사람은 어떤가.
상처입은 자는 상처입은 자를 금방 알아본다.
그런 사람은 두 부류다.
상처를 알아본 이들끼리 친구가 되거나 적이 된다.
상처를 들키고 싶지 않아 적이 되는 슬픔까지 상처여, 네 몫인가. (김선우. 시인)


4년 동안 혼자 살아보았다면서 결국은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나이까?
남자가 혼자 사는 것이 두려운가요? 왜죠?
병들까봐서, 후회, 천벌 ... 두려움의 정체가 뭐죠? 님만이 알 텐데요.

우리가 인정할 것은 사실은 단 하나 일지 모르죠. 상대가 아니라 무엇보다 내가 견딜 수 없다는 것, 내가 원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 그게 무엇인지는 아시나요?

저 역시 님과 같이 50이 내일모레일지라도 제게 있어 부모님은 평생 필요한 존재에요. 아니시던가요?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력이 혹시 무료할 만치 혹은 무슨 일이든 저질러서 더 크게 벌든 뒤집어 엎든 승부라도 하고 싶은 가요? 그건 아니죠.
망설이는 걸 보면.

정말 서성이면서 스스로가 납득이 안 갈 만큼이라면 전문의와 상담해 보시는건 어떨까요? 저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경제적인 측면과 우선 당장에 먹고 살아야 하는 절박함 때문에 저 자신을 뒤로 하는 바람에 아니 세상의 잣대와 현실이라는 벽에 처박으면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괴로워 했던 것 같아요.

만약 내가 님과 같은 처지였다면 저는 전문가와 상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정신과 의사라든지, 상담치료사라든지, 그 모두를 아우르며 자기계발 프로그램과 치료적 변화 프로그램 과정에 등록을 해서 보다 나은 구체적이고 체계적 자아 찾기와 도움을 요청했을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그렇게 해보는 것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미움, 증오, 사랑, 기쁨의 이런 일련의 감정들은 어떤 면에서는 외부적인 영향에서라기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만들거나 덧씌우는 어떤 상이거나 감정일 수도 있을지 몰라요. 경제력도 있고 하니 시간을 내셔서 새로운 사업이나 여러 갈등에 시달리기 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해결해 보는 것은 어떠실런지요.

아, 그리고 건강한 육체에 대해 말해야 겠군요.
저는 여자라서 그런지 -물론 사람은 다 똑같은 생물적 존재는 같다고 생각하는 바이지만- 극복할 수 없는 건강한 육체에 대한 한계는 없다고 봐요. 건강하기 때문에 반드시 성생활을 해야 할까요? 혹시 그래야 건강할 수 있다는 전제에 대한 강박은 아닐까요? 남자의 건강은 성생활의 능력이다라거나 경제력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혹시 아닙니까?

둘 다 자신없어서 마치 자신이 있는 것처럼 환상을 갖고 계신 것은 전혀 아니십니까? 자연스럽게는 오히려 하강 구조가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습니까? 50에도 펄펄 끓는다? 50에도 주체 할 수 없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청춘이라면 이해가 될 것 같은데, 그 시기에 그러하다는 것이 다소 의문스러워서요. 실례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집착이 아닌 성이 의도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 납득이 덜 되어서요. 그리고 이 부분의 님의 능력에 의혹이라기보다 건강한 육체의 쓰임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요.

건강한 육체를 육체로서만이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삶에서 혁명에 가꾸운 몰입, 그 강렬함이 육체적 해소 만이 아닌 정신적으로도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에요. 생리구조 운운 하면 할 말 없을 것 같구요.^^ 그렇더라도 야박하게는 스님이나 신부의 경우는 어떨까요? 저는 그것이 인간 혹은 생명체에 대한 문제이지 여성 혹은 남성의 대립적 생리구조에 기인한다고 전혀 생각질 않아서 아직도(?) 납득을 못한답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의견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전문가와 가족과 함께 정말 최선을 다하는 가장 바람직한 선택을 하시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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