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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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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님께서 2007761332분에 등록한 글에 댓글을 답니다.
님의 고민이 맴돌았어요. 내 고민일 수도 있으니까. 에이... 쓰지말 걸, 뭐야 난... 내 궁금증은 무얼까. 관음증에 가깝다는 생각과 함께......

생에 대한 고민은 누구나 다 다르지요, 다 달라요, 다 다르기에 기준을 필요로 하겠지요. 유한의 시간동안 해결해야 할 문제들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보편의 길에 섰다는 것이 어쩌면 아닐 수도 있어요. 외롭게 태어난 사람은 외롭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살아낸 모습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세상과 함께 걸으려면 힘이 들어요. 내 삶을 살면서도...
우리 모두는 어쩌면 겁장이 일지도 모르죠. 더러는 심하게 갇힘, 소속, 지지, 한용운시인이 말하는 복종하고 싶은 이(것)에게만 복종하고 싶은, 유한성과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핑계를 가지고 산다고 하면 너무 유치한 표현이될까요?

님의 고민을 생각하다가 세상을 향한 이중적 시선과 보편적 가치라는 것의 잣대가 도대체 왜 필요한 것일까도 되짚어보게 되었어요.
현실과 이상을 함께 거머쥔다는 것이 때로는 더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보다나은 진보는 인간의 사명인가? 물론 이러한 것들 조차 취향과 선택의 문제이겠지요.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님과 같은 고민을 꽤나 오래 끌며 살아온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염체불구하고 남자들의 이야기일 법한 이 고민에 버럭 뛰어들었답니다. 지금은 애써 잊은 듯 하지만 그때 10년 전 타들어갈 것 처럼 새까맣게 죽어갔던 나를 기억하지요. 휴~
그 답을 풀지 못하고 10년 동안 헤매온 사람이기에 사실 남의 일 같지 않아요. 솔직히 드릴 말씀도 딱이 없을 것 같으면서도 맴돌게 되네요.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전혀 다른 것이 아닌 "차이"가 있다. 싫다고 딱 잘라 말하기에는 뭐하고 수용할 만큼 좋지는 않은 계륵 같은 관계, 그 만큼의 그것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싶은 내가/ 그 남자 길을 서성이고 있다.

질문 하나, 애인이 있으세요? 사업에 파트너가 능력있는/ 편안한 여자인가요?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아보기에 원군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되는 그런 아니면 그런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인가요?
전혀 이성을 고려치 않은 것은 아니었어요. 그 해결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어요. 돈도 있다고 했지요. 님께서 원하는 것이 합법적인 완전한 인생에 있는 것인가요?

질문 두울, 사업에 대한 주위의 유혹 말고 본인의 의사는 어떤 것이죠? 현재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죠. 지금도 뭐 괜찮지만 더 나아진다면야 하는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유혹의 솔직한 본인의 비중은 얼마만큼 일까요?

만일 님의 그 생각들에 대한 낌새(?)를 댁에서 눈치챘다면 그것은 부정적 마인드가 아니라 당연함이거나 염려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한편 누군가 님께 절대적 믿음으로 살아주기를 바래왔고 본인도 다시 이혼의 상태로 돌아갈 만큼 적당한 이유나 합리성을 찾지 못했더랬죠.
그런데 그러한 계기를 주는 동기요인이 분명 나타났을 거에요. 그것은 내부적일 수도 외부적일 수도 있고 평상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아넘기던 사소함 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요는 지금 본인이 그렇게 느끼지 않는 다는 것이고 이대로 살아도 좋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죠.

나와 다른 상대에 대해 바뀌거나 고치는 것에 중점을 두고 헤게모니의 장악을 포기하거나 기대를 늦추지 않는 한 갈등은 나아지는 시늉만을 하다가 도리어 더 쌓여가고 좋은 의도는 퇴색하여 답답함만이 증폭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재결합의 상태를 불안한 상태로 끌어 왔었을까요?

애증으로 인한 갈등구조 속에서 최소한의 상태를 유지해 왔다고 할 수도 있지요. 두 사람 다 희생과 이득(?)의 최소한 것들을 챙기면서...

님의 능력은 돈이고 불안은 불완전한 인생이라 할 수 있죠. 속으로 상대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내 돈이잖아. 그러니까 너는 내가 제공하는 만큼의 굴림을 당연히 받아드려야 하는 것이지.

네가 없어도 나는 살아. 나는 사랑해서 산 것이 아니라 내 책임을 다 하고 싶었고 부모님과 형제들을 나로인해 걱정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자존심 상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좀 더 솔직히는 실패한 인생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지. 그래, 나는 네가 아니었더라면 좀 더 완전한 인생이 될 수 있었을 거야. 알아? 아냐구?>

<당신은 떠날 수 있었어. 얼마든지.. 어쨌거나 돌아온 것은 당신이야. 이유를 붙이는 것은 자신의 선택과 진실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야. 우리가 함께 잘 살아갈 수 없는 이유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일, 사랑, 돈, 신념, 가족, 성취감, 출세, 건강, 인정, 존재의 의미 등등은 어느 한 개인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법정스님이나 성철스님이 아닌 내가 이 땅에서 사회성을 익히며 살아가는 방식의 선택 또한 지극히 현실적이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었었다. 그런데 아니다. 우리의 가치체계가 흔들리고 나 또한 혼돈스러우며 나는 내 의지와 달리 완전하지 못하다. 이 불감증과 불안증의 이중성의 해결이야말로 내게는 보다 더 적극적 필요와 철학이다. 내게 돌을 던질 자 얼마든지 던져라. 하지만 당신들의 주장으로 제발 나를 납득시켜다오.

세상은 돈보다 가치로운 것들이 많다.

< 나는 너를 다 가르쳤어. 나는 행복하지 않았지만 네가 필요할 만큼 네 곁에 있었다. 이제 너희들은 다 컸다고 생각해. 나도 내 발로 섰고 운도 따라 주었겠지만 내 스스로 자수성가 했어.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아버지는 자신에게 충실하셨지요. 내 유년은 침울 했어요. 우리는 다른 집과 달랐어요. 아버지는 늘 겉돌았어요. 이제와서 왜 내가 필요하지요. 저에게 남겨줄 재산이라도 있으세요? 이제와서 나와 함께 뭘 어쩌자는 거에요? 내 아내나 남편을 설득할 자신이 내겐 없답니다. 내 아이들도 이제 냄세나 나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싫테요. 그것을 내 입으로 꼭 말을 해야 하나요? 유료 양로원이 내가 모시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에요. 사회보장이 잘 되어있고 나는 세금을 거르지 않고 내고 있어요. 아버지가 계시기에 견딜만 하실 거에요. 무엇보다 돈이 있으시잖아요.>

< 당신 말대로 아이들이 다 자랐지요. 이제 내 몸도 다 귀찮아요. 지쳤어요. 돈이고 뭐고 당신을 내가 무엇으로 어떻게 얼마만큼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거에요. 나는 이제 아무것도 더는 노력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마음처럼 아니 그보다 100배 1000배 수만 수천 배나 더 힘들었어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쉬는 거에요. 쉬고 싶어요.>

라고 할 지 모르겠어요.

그들을 편하게 해주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지금의 가정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쪽에서 헤어지자는 것이 아니고 저들이 내가 버는 돈으로 혜택을 누리면서 나를 없신여긴다고 하는 노여움이 아니라면,
적어도 내가 모든 것을 감당하더라도 우리 가운데 너만이라도 살아 남으라는 염원을 담을 수 없는 것이라면 이제까지 느껴오지 못했던 행복이나 사랑, 감사 등등에 대한 불감증과 앞으로 닥칠 완전한 인간에 대한 목마름과 해갈이 불안/문제없이 찾아질까요? 혹시 사랑을 하지 않은/못한 불행한 삶이 아니라 잘 느끼지 못했거나 덜 풀어나간 것은 혹여 아닐 런지요.

물론 애써오셨을 그동안의 노고를 전혀 반영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오라 적어도 상대가 원하는 것이 돈이나 남의 이목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것, 내 귀소가 일말의 바램이었듯 상대도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었을 것들에 대한 한치의 후회도 없는 결정에 자신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다시 물어봐 달라는 부탁 같은 거지요.

우리의 생각에도 식물인간처럼 깨어나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다 어느 날 정말 너무나 멀쩡하게 살아 움직이듯 각을 이루어 솟아오를 수는 정녕 없는 걸까요? 없을 수도, 전혀 불가능하게 아득하기만 할 수도 있기는 해요. 그래도...

또 하나, 이 즈음의 우리들의 사회상에 대해 말을 하고 싶어요. 대다수의 제법 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누구보다 부정적 이미지를 정착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시각이에요. 많은 남성과 요즘엔 제법 많은 여성들에게 성이 너무 무분별하고 왜곡된 방향으로 개방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 혹시 안 드시나요?
30대만 해도 인생을 다 알아버린 듯 체념하고 여자의 몸을 정복하는 것이나 남자의 몸에 매달려 사는 것이 재미있는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방법인양 만연화 되고 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그러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은 그렇게 인정치 않으려고 할 거에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긍정적 소울메이트가 지금이 사회에 몇이나 되느냐는 것이죠. 적어도 30대 후반에서 4~50대에 이르면 이 부분에서 걸려들지 않고 전혀 무관하게 깨끗한 사람이 정작 몇이나 되겠느냐고요. 혹시 눈가리고 아옹하는 격은 아닐까요. 정작 너무나 익숙하다는 이유로 내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내팽겨쳐버리고 겉포장만이 화려한 눈요기감들에 현혹되어 구름을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왜 그토록 많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그리기보다 적당히 얼버무려 암암리에 눈과 입을 맞추면서 혼탁한 사회의 한 부분과 결탁하며 스스로에 대해 그럴 듯하게 합리화를 해 가는 경우가 많은지 안타까워요. 심지어 언젠가 여성부에서 기획화했던 미성년자에 대한 원조교제를 철퇴하는 금기조항으로 성매매금지특별법안에 대한 해석조차 '불륜은 해도 좋다 하지만 성매매는 안된다'라는 아주 단순처방에 입각한 땜빵식 발언을 한적이 있었지요. 예전에는 내가 하면 로멘스 네가 하면 불륜이었지만 이즘에는 너나 나나 그렇지 뭐하는 식의 짜웅분위기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지나치게 거세지는 여성우세 분위기도(사회적 부조리-정치에서 선거시 또는 경제/시장(상품)민주주의에서 상업성 광고 등이 해당) 문제이지만 남성이 스스로가 치어가며 자신의 존재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밖으로 도는 것도 보다 큰 문제는 아닐 런지요. 남성이 밖에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란 게 도대체 뭐죠? 술로 대표되는 잡기에 놀아나고 여자 만나는 것 아니면 솔직히 밖에서 해결되어질 일 없다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사업은 얼마든지 가정으로 끌고 들어와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잖아요. 굳이 밖에서 해결해야 할 일의 대부분은 예로부터 거론되어온 주색잡기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 당연 변.경.연 같은 off-line 건전모드를 능가할 일들이 얼마나 되느냐는 거죠.^^

님을 제가 긍정적 시각으로 보면서 이 글에 집착하며 매달리는 이유가 님이 적어도 그러한 경우와는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긍정의 바람직한 사람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반드시 가장 최선의 선택을 찾아 가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깨는 것보다 붙이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을 짐작하기에. 우리가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집착하는 한 사람에게 국한된 삶이기보다 보다 전체를 아우르며 인간적이고 사람다운 삶의 길에 대한 방향이나 모색, 문제의 재구성을 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저의 당치 않은 지나치게 큰 욕심과 제 머리도 못 깎는 어줍잖음으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얼굴에 나타나고 미흡함이 없어야 한다는 불혹의 나이를 넘어, 하늘이 내게 준 사명과 뜻을 알아야 한다는 지천명의 나이가 퍽이나 두렵지 않을 수 없어요. 뿌듯함만 갖고 살아갈 수 없는 저에게는. 님의 고민에 빗대어 나의 넋두리가 되살아 났는지도 모르겠어요. 어제 늦게 택시를 탔는데 타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예순이 넘었다는 기사아저씨의 말씀,

<우리나라 큰 일이에요. 요즘 젊은 사람들 왜 그래요. 나도 도통 해결이 안 되는 사람들을 보면서 헤어지라고 말을 합니다.그런데 참 걱정이에요, 나는 다 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나라의 매말라가는 정서가 정말 걱정이 되요. 이혼할 자격도 없는 것들이 이혼을 해요. 아니, 애들이 싫어서 이혼했습니까? 애들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남의 자식도 내 자식처럼 키울수 있는 연후에야 이혼을 해야 할 거 아니겠어요? 제 핏줄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무슨 이혼이냐구요. 그 감당도 할 수 있을 때에 이혼을 해도 해야 할 것 아니겠어요?>

열변을 토하시는 기사님 말씀에 그저 <네.>하고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왜 그 말씀을 그토록 강조하셨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새로운 문제가 생기고 그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해야 한다는 것과 그 어떤 선택에도 책임이 따른 다는 것, 무엇보다 자신을 먼저 가늠하고 모색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나의 최상의 능동적인 선택보다 무가치해 보이고 무기력해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선택과 초라한 희생이 더 가치로운 삶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것도 그 극과 극(성공과 실패/ 아름다움과 추함 등)의 강렬한 절실함이 뿜어내는 의미/메시지가 아니고는 한 발자국도 나아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쪼록 지금의 님의 고민이 자신의 인생이 담긴 선택으로 해결 되길 바라며 그 과정들도 여기 변.경.연에서 우리 함께 나눌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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