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단군의

/

2단계,

두

  • 조영미
  • 조회 수 9171
  • 댓글 수 63
  • 추천 수 0
2011년 1월 8일 08시 47분 등록
아일랜드 작가인 존 오도나휴의 깊은 축복에 소개된 '아름다움'이라는 시를 소개 드립니다. 아직 어두운 새벽길을 걸어가는 저와 단군 사우 여러분들의 발 밑을 밝히는 축복의 글입니다.

아름다움

조용히 놓여 있는 돌이 정적과 결합하듯
고독이 그대가 하는 말의 진실을 북돋아주길 바랍니다.

강이 유유히 흐르듯
그대 영혼이 시간이 존재하는 곳을 밝혀주길 바랍니다.

달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는 어둠을 사면해주듯
그대의 사고방식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연결하는 가교가 되길 바랍니다.

빛의 숨결이 색을 일깨우듯
새벽이 그대 눈을 경이로움으로 축복해주길 바랍니다.

봄비가 지구를 놀라게 하며 부드럽게 만들어주듯
빛이 그대의 겨울에 입맞춤해주길 바랍니다.

대양이 기쁨의 춤을 추길 꿈꾸듯
변화의 은총으로 그대가 기품 있는 이가 되길 바랍니다.

흙이 빛과 바람 속에서도 나무를 잡아주듯
그대의 외적 삶이 내면의 평화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여명이 밤의 믿음을 채워주듯
아름다움이 그대 마음에서 편안히 잠들길 바랍니다.

1. 제목 : 충만한 새벽길을 한발 한발~

2. 새벽기상 시간 및 새벽활동 시간 : 5시 ~ 7시
    새벽활동 : 5시~6시: 내면을 들여다보는 글쓰기와 독서, 6시~7시: 브릿징 번역

3.나의  전체적인 목표 : 브릿징 번역 15편 이상 완료
 
4. 중간목표
- 매주 한 편 이상의 브릿징 번역을 반드시 완수한다
- 단군 일지와 블로그를 통해 일부 내용을 공유한다

5. 목표달성을 위해 직면할 난관과 극복방법
- 규칙적인 생활을 통한 수면시간 확보
- 번역이 하기 싫은 날도 눈을 쓸 듯 꾸준히 한다.
- 새로운 일을 하며 지나치게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다.

6. 목표를 달성했을 때 나에게 일어날 긍정적 변화
- 새벽 활동이 주는 충만함과 활력
- 다음 300일 활동을 위한 책의 기초 토대 마련
- 도전과 변화를 위한 무한 에너지 보급소!

7.목표를 달성했을 때 나에게 주는 보상 
- 우주의 놀라운 선물^^

IP *.118.58.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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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8 09:28:48 *.118.58.154
100일차 100편의 시에 이어 이번에는 글쓰기와 번역이시네요.
글쓰기를 통해 자기내면을 쏟아내시면 천복찾기에 많은 진전을 이루실 것 같습니다.

말씀처럼 "한발 한발 나아가는 새벽"되시기를 기원하고 응원합니다.
영미님 홧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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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
2011.01.10 08:41:38 *.44.124.42
네, 이번에는 많은 분들이 내면과의 대화를 하는 글쓰기를 선택한 듯 하네요. 수희향님도 300일차 기쁜 출발하셨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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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2011.01.09 22:00:25 *.97.192.181
영미님~~^^
영미님의 시 선물은 늘 마음에 쏙쏙 보석처럼 박힙니다. ㅎㅎ
주신시 고이고이 가져가 단군일지 일면을 장식할께요.
200일도 한발 한발 함께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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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
2011.01.10 08:42:21 *.44.124.42
감사해요, 소라님~
소라님도 200일차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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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단군일지
2011.01.10 10:44:53 *.44.124.42

새벽에 일어나 출석 체크하고 어영 부영 하다보니 어느덧 6시 30분이 되어 있었다. 하려고 맘 먹었던 브릿징 #159 호세 아구레스편은 사회자 알랜의 인사말 서너 마디 정도 번역했을 뿐이다. 시간이 어쩌다 이렇게 술술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 버렸지?

 

앞으로 100일간 뉴에이지 계열의 작가, 학자, 예술가, 힐러, 채널러 등과 10년 동안 인터뷰를 진행한 '브릿징 해븐 & 어뜨 (Bridging Heaven & Earth)' 동영상을 번역하려고 한다. 여러 사람들과 충분히 나눌만한 메시지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영어공부도 되고.

호세 아구레스는 마야달력을 연구하여 2012년 종말론을 부각시킨 과학자라고 한다. 내가 읽어본 2012년은 종말이라기 보다는 변혁, 상승의 해로 이해되었는데 이 분은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다.
에너지의 촛점을 모아 불꽃을 피우는 2011년이 되기를!

브릿징 #159 호세 아구레스 6'20''까지 소개 부분

 

안녕하세요? 좋은 저녁시간입니다. 이름은 알란이고 우리 팀을 대신하여 브릿징 해븐 어쓰를 시청하시는 여러분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여기 이렇게 앉아서 오프닝 화면 속에 소년과 제가 함께 놀고 웃으며 노래하는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인종과 종족, 국적에 상관없이 땅을 가지거나, 차를 사거나, 종교를 가지거나, 불교신자가 되거나, 어떤 나라의 대표자가 되거나 하는 여러 가지 욕망을 가집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우리는 그저 삶의 기쁨을 알고 사랑으로 가득한 나날을 경험하고 삶을 축복하는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소망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소망을 이룰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계속하여 내면의 , 진실함, 어떤 종교든 초월하여 우리 모두를 연결하는 앎을 지속할 있을까요? 모든 종교의 핵심은 신과 연결된 사랑, 초월을 경험케 하는 참됨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으로 어떠한 차별이나 어떠한 예외도 없이 모든 인간들은 이러한 참됨을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많든 적든 기쁨을 온전히 누리고 있지를 못합니다. 그러한 온전한 받아들임, 우리들 모두의 연결됨, 하나됨을 받아들이는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는 초월적이고 은총이 가득한 경험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 우리가 안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여기 동그란 , 멋진 행성 지구 위에서 모두 전력 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여기에 있게 , 우리가 아는 모든 논리와 사유를 떠나 우리 존재의 신비에 몸을 맡겨야 합니다. 어떤 수단을 통하든, 은총, 마법적인 경험, 일반적인 경험 어떠한 경험을 통하든 사유는 영원의 작은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밤은 바로 사람들의 새로운 인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가장 앞서서 담당하고 이성을 넘어선 사랑으로 사람들을 인도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조화의 모임Harmonic Convergence’이라는 책을 썼고, ‘ 지구 축제Whole Earth Festival’ 만들고 주도한 사람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가 바로 호세 아구레스라는 것을 알아 차리셨겠지요. 그는 지난 수년 동안 마야 달력 연구분야에서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오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 편의 뛰어난 책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가장 최신작으로 알려진 책들은 마야 팩터 The Mind Factor” 시간 그리고 인류의 기술 Time and the Technosphere” 입니다.

 

그는 시간의 기술 재단 이사이며 여러분과 나눌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각을 일시에 정지시키고, 우리들 대부분이 바라보는 방식으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유들을 일시에 날려버릴 만한 이야기들을 해줄 것입니다. 그가 자리에 있습니다.

 

그는 오레곤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서 내일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갈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나눠주고, 자신이 가진 정보를 나누고, 재능을 나누기 위해 자리에 왔습니다. 오늘 자리에 그를 모신 것은 기쁨입니다.

 

오늘은 처음 소개 드리는 뛰어난 편의 뮤직 비디오를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덴버에서 보내온 트윈 플래임 아름다운 뮤직 비디오를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잠시 명상을 번째 뮤직 비디오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호세와 함께 최근에 그가 펴낸 , 그의 생각들, 사랑과 의식에 대해 얘기 나누겠습니다. 여기 꽃이 있습니다. 잠시 저와 함께 짧은 명상을 편안하게 비디오를 감상하시겠습니다. 호세가 우리와 함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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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선
2011.01.10 13:14:28 *.170.1.22

영미님
안녕하세요. 200일은 글쓰기와 번역이시네요.
한발 한발 천복에 가까워지시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천복부족으로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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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
2011.01.10 21:28:43 *.154.29.110
네, 희선님도 더욱 수행이 깊어지시는 200일 맞으시기 바래요. 저도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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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희
2011.01.10 16:45:30 *.143.199.187
우주의 놀라운 선물 이라는 보상이 과연 무엇일까... 궁금하네요. ^^
영미님 단군일지에 올라올 글들이 제게도 좋은 읽을거리가 될듯해요.
기대하고있답니다. (그렇다고 너무 부담갖진 마시길..ㅋ)
앞으로 200일도 함께할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아름다움이라는 시가 읽을수록 참 좋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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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
2011.01.10 21:31:07 *.154.29.110
저도 뭔지 몰라 궁금해요~ 그런데 우주가 선물을 줄거라 믿어요^^. 번역체가 좀 구려도,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도 그냥 한번 해볼려구요. ㅎㅎ 성희님의 글도 기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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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단군일지
2011.01.11 16:49:28 *.44.124.42

새벽 한 시간은 눈을 잠시 감고 생각에 잠겼을 뿐인데 순식간에 후딱 지나가 버렸다. 어제 밤에 이어 라즈니쉬의 '틈'을 읽고 있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열어가는 생을 부추기는 글귀들.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되, 실패를 두려워 말고 도전하세요. 해 보면 정말 별거 아니거든요.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되잖아요? 인생은 생각보다 길더라구요.' - 오늘 조선일보에 소개된, 암을 이기고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73가지 꿈 가운데 34번째 꿈인 '킬리만자로 오르기'를 이룬 김수영씨의 말이다.

도전하는 삶이 얼마나 활기차고 아름다운 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젊지만 엄청난 인생의 폭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 주어진 틀 안에서만 맞춰 살아온 사람의 사고는 점점 틀에 갇혀 생각도 틀 바깥을 넘어서지 못한다.

흔들의자에 앉아 생애를 회상하는 검버섯 핀 나의 늙은 손이 보인다.

'음, 그때 좀더 안전한 걸 선택한답시고 이런 기회를 포기했었지. 왜 눈 앞에 앞 길이 보이는 빤한 밧줄만 잡고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미래만 선택하려 했을까? 내가 누리지 못한 어떤 경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이런 생각으로 서늘해진 마음에 따스한 햇빛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생을 보는 안목이 넓고 깊지 못해 좁은 선택을 할까 그것이 근심될 뿐..하지만 그도 제 수준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 아니겠는가.

브릿징 호세 아구레스편 이어서..

Allan (7:58min)

감사합니다. 먼저 트윈 플래임 공연하는 뮤직 비디오 편을 시청하시겠습니다. ‘치료의 바퀴 Medicine Wheel’라고 하는 곡으로 트윈 플래임 레베카 힐튼과 그웬 보울리가 곡을 쓰고 공연했습니다.   곡은 평화의 전사’ CD음반의 타이틀곡으로 2002 콜로라도 덴버에서 5월에 개최된 평화를 위한 콘서트에서 녹음되었습니다. ‘평화의 전사 Peaceful Warrior’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알란

여러분, 여기 호세와 함께 있습니다. 호세를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호세, 자리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세

알란, 자리에 있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A.

, 정말 감사합니다. 아까 우리끼리 얘기할 7 무렵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셨죠. 멕시코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갔을 때의 경험이 당신을 길로 이끈 하다구요. 이야기를 좀더 해주시죠.

 

J.

거기에 것은 내가 14 때였죠. 7 때는 예술가가 되는 길로 이끌어졌죠. 내가 14, 청소년일 저희 아버지와 멕시코로 갔어요.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은 피라미드에 가보는 것이었죠. 도서관에서 책을 우리는 멕시코 시티로 향했어요. 미네소타에서 멕시코까지 차를 몰고 갔는데 때가 1953 여름이었죠. 거기서 우리는 신이 땅을 만졌다고 하는 장소의 하나인 “ Teotihuacan” 있는 피라미드로 갔어요. 아주 아주 오래된 고대의 피라미드 도시이죠. 거기에 있는 피라미드 하나가 태양의 피라미드 pyramid of the Sun’라고 하는데 바닥은 기자(Giza) 있는 피라미드만큼 넓지만 그만큼 높지는 않아요.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나는 스스로 나는 위로 올라가야 라고 읊조렸죠. 그때 아버지와 삼촌 형보다 훨씬 빨리 꼭대기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생각했어요. , 이건 정말 멋지다. 나는 멕시코 시티를 생각했어요. 내가 보는 것과 현실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어요. 이건 무언가 다른 세계에 속했어요. 그리고 자리에 앉아 이런 생각을 나는 일종의 경험, 소명, 혹은 운명에 대한 일종의 자각을 거지요. 바로 그때 나는 삶의 소명, 운명은 어떻게 도시가 건설되게 되었는지에 관한 우주적 지식을 되살려 현대에 알리는 것이라는 알았죠. 예감으로는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지식을 다시 필요로 하게 되리라는 거였어요. 그게 바로 소명이죠.…

 

A.

이걸 바로 14살이던 그때 분명히 아셨다는 거죠..

 

J.

14, 아주 명확했죠. 미네소타에 있는 고향 마을에 돌아와서 나는 공공도서관에서 도서를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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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
2011.01.12 11:22:51 *.44.124.42
^^ 감사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계속 번역도 하고 글도 쓰고 시도 쓰는 것이 꿈이에요^^.
영미님도 계속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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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미
2011.01.11 19:46:45 *.158.234.29
이렇게 인사(영미씨보다 한 발 늦게)를 하게 되네요^&^
시면 시,수필이면 수필,번역이면 번역...영미씨는 재능도 많은데다 부지런함까지..
많이 많이 부러워요^&^
글통삶 자주 갑니다...글도 읽고 잘지내시고들 있는지 궁금도 해서요....
건강조심하시고 끝까지 화이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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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우
2011.01.12 10:01:42 *.136.209.2
와우...자주 와보고 싶어집니다. ^^
혹시 아직 안 읽어 보셨다면 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 (한국어 제목은 '잊을 수 없는 여행' 절판) 한 번 읽어 보세요. 왠지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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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
2011.01.12 11:24:16 *.44.124.42
와~ 성우님,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추천해주신 책 꼭 찾아서 읽어야겠네요. 언젠가 짧막한 서평을 성우님 일지 댓글로 달 것을 약속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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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차 일지
2011.01.12 11:25:12 *.44.124.42

삼일 째 아침. 오늘은 홀가분하다. 모든 상황을 정리했으니.

 

한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가 또다른 사람에게는 좌절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이 세상 인연의 시소 게임에서 옷깃을 가다듬고 있어야 겠다. 업연의 저울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작용하고 있음을 배울 기회이니.

 

새벽 여명이 밝아오는 걸 보고 오늘은 날씨가 좋다는 걸 알았다. 아주 시리지만 맑은 날이다. 진한 감사와 축복의 하루!

 

브릿징 호세 아구레스 편 이어서..

 

J.

14, 아주 명확했죠. 미네소타에 있는 고향 마을에 돌아와서 나는 공공도서관에서 도서를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고대 마야의 문명이라는 책을 보고 바로 책이 내가 찾던 바로 그것임을 알았죠! 책에는 역법과 천문학, 수학에 관한 장이 있었어요. 나는 수학 시스템을 배웠고 역법을 연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가야할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A.

그리고 나서 정말 우리 시대의 획기적인 모임이었던 조화의 수렴 지구 가족같은 행사에 관여하며 주기를 종결하는 길을 걸으신 것이네요. 당신은 49 뒤에 그곳을 원로들과 함께 다시 가셨죠. 얘기를 들려주실 있나요?

 

J.

그랬어요 나는 길을 따라갔고 조화의 수렴같은 사건들은 모두 예견된 일의 일부였어요. 그리고 작년, 2002 3 3일에 나는 멕시코에 갔어요. 내가 현재 이끌고 있는 평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행사를 준비하려고 했었는데 대신 원로들, 지구의 수호자들, 멕시코의 각기 다른 부족의 샤먼이신 아홉 명의 원주민 원로들이 오셔서 나의 공로를 치하하고 싶다고 얘기를 주셔서 나는 다시 계단을 올라 태양의 피라미드위에 올라섰어요.

 

A.

49 올라갔던 바로 그곳 말이죠..

 

J.

49년전 올라갔던 바로 피라미드, 같은 장소였죠. 의식으로 피라미드의 꼭대기까지 올라갔고 그분들은 나에게 너무도 아름답고 신성한 물건을 주었어요. 내가 그때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던 것인데 줄마노로 만들어진 너무도 아름답게 조각된 물건이었어요. 그것을 주시며 그들은 전래된 가르침과 예언에 따라 누군가가 나타나 오래된 지식에 바탕한 새로운 지식을 불러오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셨어요. 새로운 지식은 우주적인 지식으로 전통을 새롭게 하며 지구 사람들을 새롭게 것인데 그가 바로 나이며 그래서 나를 주기의 종결자 명명하며 나의 공로를 기린다고 하셨죠. 왜냐하면 주기는 2012년에 끝나기 때문이죠. 그것은 너무도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알란. 나에게는 자체가 바뀌는 경험이었어요. 피라미드에 올랐던 49 나는 비젼을 가졌었고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원로 분들이 나의 공로를 치하해주었으니까요.  나는 비전을 가졌었고 그래서 너무도 강력하게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소명에 따라 지구의 사람들을 위한 목적의식을 가질 있었어요.

 

A.

그렇군요.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들려줄 어떤 메시지가 있는 건가요? 말씀해주시죠.

 

J.

우리는 2012년을 주기의 종결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마야 역법의 지식에 따른 것이지요. 마야 역법 안에는 수학과, 예언, 우주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에 대한 이해를 담은 너무도 방대한 체계화된 지식이 담겨있어요. 마야어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우주의 진동이고 우리는 우주적 진동의 뿌리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위축된 삶을 살고 있어요. 우리는 위축된 삶을 살고 있는데 그건 바로 우리가 적절하지 못한 시간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야인들은 시간의 마스터였어요. 그들은 동시에 사용하던 17 내지 19개의 역법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건 그들이 시간은 바로 동시화의 요소라는 알았기 때문이죠. 시간은 우리를 동시에 움직이게끔 하죠. 조화의 수렴은 모든 사람이 동시화되는 아침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게 동시화 효과입니다. 그것의 핵심은 바로 주기의 마지막이 완성된다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가 진행되고 이것이 바로 시간의 끝이며, 종말이고 그것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야인들은 그것이 2012 12 21일에 일어날 것이고 때가 바로 주기의 종결 시점임을 알려줍니다. 어떤 주기이냐구요? 5125 주기의 완성이자, 26,000 째의 주기로 태양이 지구와 일직선상에 놓이는 때이죠. 크게 보면 104,000년의 주기이기도 하구요. 이런 모든 주기들이 종결점을 향해 가고 있어요. 우리는 너무도 강력하고 중대한 국면을 때에 맞게 것입니다. 주기의 종결이 가까워 오면 자신이 하던 일들을 계속하며 붉은 길을 따라가세요. 길은 진리를 향한 길이며 2012년을 향해 갑니다. 그리고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시간을 바꾸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려주세요. 우리는 전쟁과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전쟁과 혼돈의 시대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간단한 역법에 갇혀 있어요. 역법이라는 것은 프로그램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그걸 이해 하고 있어요. 2012년을 모두를 위한 정의와 함께 평화와 조화로움으로 맞이하려면 이러한 시간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인류가 그럴 있을지의 여부는 그야말로 커다란 시험입니다. 그러한 전환의 수단은 역법, 시간 단위 체계를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규칙하게 진행되며 측정의 기준이 되는 현재의 역법에서 벗어나야 해요. 실제와 일치되지 않는 단위를 가진 측정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week) (month) 실제와 어긋나게 되고 달의 숫자가 불균등해지지요. 실제 그런 일은 당신을 미치게 만들 있습니다. 만일 집을 짓는 경우 그렇게 어긋난 측정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비뚤어진 집을 짓게 되겠죠. 여러 측면에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집은 바로 그렇게 비뚤어진 집이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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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2 13:51:28 *.126.91.37

삼일 째 아침. 오늘은 홀가분하다. 모든 상황을 정리했으니.-->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해짐.^^
100일차와 마찬가지로 일단 목표를 정하면 추진력있게 밀고 나가는 모습이 참 좋아 보이는군용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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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
2011.01.12 13:57:10 *.44.124.42
그동안 상당히 많은 반전이^^. Facebook 으로 알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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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 일지
2011.01.13 08:46:52 *.44.124.42

가슴에 불 하나 켜들고
새벽길 간다

가슴 속 심지가
더 깊은 영혼의 샘터에 닿기 위해

모든 영혼의 두레박이 닿는 그곳
그곳의 샘물로 목축이기 위해

이유와 목적이 사라진 자리
살포시 젖어 오래 미소지를 목마른 영혼을 위해.

오늘 오후에 언니와 함께 부산에 간다. 부산에서 엄마, 큰언니, 올케언니, 조카와 만나 하루밤을 자고 내일 아침 쾌속선을 타고 후쿠오카에 도착한 후 우레시노 와라쿠엔 온천에서 일박, 다시 후쿠오카에 와서 호텔에서 일박, 일요일날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엄마와 언니들의 첫 해외 나들이이다. 행복하고 즐거운 여행을 해야지~.

호세 아루레스 인터뷰가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흐른다. 한 달이 28일로 이루어진 13개 달로 한 해가 구성되면 매달 일요일로 시작해서 토요일로 끝나고 매년, 일요일로 시작해 토요일로 끝나는 조화롭고 균등한 시간의 흐름이 지속된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 시간의 기본 틀이 되면 우리 생도 조화를 되찾을 것이라고.. 이미 2011년. 그리고 여전히 12달에 기초한 시간. 주장은 주장일 뿐이니까..  

호세 아구레스 이어서..

A.

어떻게 해서 우리는 마야역법이 아닌 이렇게 불규칙적이고 조화가 깨어진 역법을 사용하게 것입니까?

J.

그것을 살펴보아야만 해요. – 마야인들은 신세계에 있었고 구세계의 역법은 바빌로니아 문명, 바빌로니아인들의 시간 개념에 의해 만들어졌죠. 아시다시피 그것은 12 근거해있죠.  마야인들의 역법은 13 근거해 있어요. 오래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13달에 기초한 역법을 사용했어요.  내가 해석한 시간에 관한 마야 예언서에 따르면 시간을 변화시키는 수단은, 12달에 기초한 그레고리안 역법을 벗어나 완벽하게 조화롭고 지속적인 28일로 이루어진 13달의 역법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마야인들은 여러 가지 다른 역법들과 함께 역법을 사용하였고 아즈텍인들 또한 그러했으며 유태인들과 남미의 잉카부족들도 역법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역법입니다. 2012년을 평화와 조화로 맞이하려면 역법을 바꿈으로써 시간을 바꾸어야 합니다. 역법을 바꾸면 프로그램을 바꿀 있습니다. 그레고리안 역법 프로그램은 경직과, 혼돈, 혼란, 불평등, 억압, 불균등 이러한 것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역법을 바꾼다면 완벽하게 조화롭고 모든 달이 균등한 28일을 가지고, 모든 달이 4주로 이루어졌으며, 모든 달이 일요일로 시작하고 토요일로 끝나는 완벽하게 지속적인 역법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해가 일요일로 시작해 토요일로 끝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조화를 우리 삶의 토대가 되는 프로그램으로 설정할 있습니다. 이제 핵심은 우리가 마지막 순간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환을 이루어낼 있는 마지막 관문으로 들어설 것입니다. 올해 11 8일부터 2004 7 26일까지입니다.

A.

2003 11 8일부터 2004 7 26일까지 라구요.

J.

맞습니다.

A.

만일 시기 이후 누군가가 영상을 본다면,…….

J.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를 있겠죠. 만일 가능했다면, 2004 7 26일은 역법 대변환을 위한 순간이라고 얘기할 있겠죠. 그때가 바로 인간 의식의 대변환이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있습니다. 불규칙적이고 기계론적인 시간에서 조화롭고 지속적인 우주적 시간으로 들어가는 시점이라구요. 자연스러운 시간으로 회귀하면 우주 주기의 시간대로 회귀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인류는 이탈된 무리, 그야말로 질서에서 벗어난 종족이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기계론적인 시간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질서에서 벗어나 있고 시계가 불규칙한 역법시간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이토록 미친 기계론적인 가속화된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죠. 모든 사람들이 시간의 가속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의식의 가속화를 경험하고 있구요.

A.

마야인들에게서도 부조화가 있지는 않았나요? 혹은 당신이 공부했던 여러 문화권에서 말이죠. 제게는 문명에도 부조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J.

거기에도 부조화가 있었지요. 거기에는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도 눈에 띄는 부조화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마야식 역법을 기준으로 사용한 문명들을 살펴보았을 아주 상당히 높은 수준의 조화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들의 지식기반은 매우 포괄적이고 광대한 것이었습니다. 마야인들은 우리의 시간 개념을 아주 원시적인 것으로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자료조사를 좀
해보니 이 분 주장이 상당히 억지스럽다. 뉴에이지가 상당히 이런 면이 많다. ㅠ.ㅠ

마야 문명의 수학과 천문학 (참고자료 원문: http://blog.daum.net/eotek58/18266872?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eotek58%2F18266872)

마야 문명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수학과 천문학이다. 그들은 0 개념을 알았으며,20진법을 썼고,막대기와 점 모양으로 숫자를 나타냈다. 이렇듯 뛰어난 수학 실력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학을 발전시켰다.

마야인의 태양력에서 1년은 365.2420일,오늘날의 365.2422일과 비교해 오차가 거의 없다. 달의 운행은 29.5320일,금성의 주기는 580일로 계산했는데,지금과 비교해 오차가 겨우 0.00039일(달)과 0.08일(금성)이다. 마야의 복잡한 역법(曆法)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마야의 달력은 서로 다른 날짜를 나타내는 그림 문자(그림 숫자) 20개로 되어 있다(그림의 왼쪽 바깥 원).

이것들은 다시 1에서 13까지의 숫자 기호(그림의 안쪽 원)와 조합되어 모두 260일을 만들어 낸다. 이것을 트졸킨이라 하는데,진짜 역년(曆年)과 구별되는 신성한 역년이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진짜 역년은 1년이 18개월로 이루어져 있고(그림의 오른쪽 큰 원의 일부),이것들은 한 달이 20일씩으로 되어 있어 모두 360일이다. 여기에 닷새밖에 없는 19번째 달이 덧붙어서 1년은 365일이 된다.

이 역년을 하아브라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60갑자(六十甲子)가 10천간(十天干)과 12지지(十二地支)가 맞물려 갑자·을축 등 60개로 조합되듯 트졸킨과 하아브가 서로 같이 출발해 똑같이 맞아떨어지는 데 필요한 날은 (260과 365의 최소공배수를 계산하면) 18,980일이다. 이것을 365일로 나누면 52년이 된다. 바로 이 52라는 숫자가 마야인들의 의식과 일상을 지배했다. 그들은 세상이 52년마다 한 번씩 끝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멕시코 땅에서는 52년마다 기존 피라미드 옆에 새 피라미드를 세웠고,유카탄 반도에서는 52년째 되는 날 살던 도시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새 도시를 세웠다.

 마야의 모든 장식이나 조각들은 반드시 어떤 날짜와 관계가 있다. 어떤 건축물이든지 그 이마에는 생년월일을 복잡하게 써놓았으며, 일상 생활도 역법과 숫자의 신비에 따랐다. 그들은 그 엄청난 피라미드와 건축물들을 생활이나 예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역법의 지시에 따라 정해진 날에 세웠다. 마야인들은 5년,10년,또는 20년마다 합당한 생일 날짜를 지닌 건축물을 세웠다. 가끔 피라미드 옆에 새로운 윤일(閏日)을 기억하려고 그때마다 피라미드를 세우기도 했다.

마야인들은 신관의 지시에 따라 어느 날 모든 건축활동을 딱 멈추고 한 사람 남김없이 도시를 버리고 떠나기도 했다. 수만명이 400㎞가 넘게 밀림 속을 이동해 다른 곳에 터를 잡고,신관들이 시키는 날부터 새 도시 건설을 시작했다. 가장 뛰어났던 문명인들이 가장 어리석은 미신에 사로잡혀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진 것이 바로 마야인이었다. 이 복잡한 역법과 건축 설계술은 신관들만이 알았다. 그들은 일식과 월식 따위를 예언해 평민들로부터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오로지 천체를 관측하고 역법을 계산하면서 시간의 비밀을 풀고 그 해의 길흉을 점치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신관들은 또 노예나 평민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산 사람의 가슴을 돌칼로 가르고 뜨거운 심장을 꺼내어 신에게 바치는 잔인한 의식이었다. 신관들은 사람 제물을 많이 구하려고 포로를 잡기 위한 전쟁을 자주 부추겼다. 마야의 전쟁기록에는 어떤 사람을 얼마나 잡았다는 기록만 있을 뿐 어떤 도시나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은 아무 데도 없다.

마야 문명의 또 한 가지 약점은 잉카와 마찬가지로 쇠붙이를 쓸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복잡한 그림문자를 돌에 조각할 때 돌칼을 썼다. 그뿐이랴. 짐수레가 없었으며,심지어 밭을 가는 쟁기와 가축도 없었다. 그런데도 맨손으로 돌을 날라 밀림 속에 피라미드를 쌓고 도시를 건설했으니 노예와 평민의 고통이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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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희
2011.01.17 09:40:17 *.143.199.187
즐거운 여행중 이신가요? 언제쯤 돌아 오시려나..저는 기다려 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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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
2011.01.18 09:05:37 *.44.124.42
성희님, 잘 지내시죠? 기다려주셔서 감사드려요~ 매일 충만한 아침시간 보내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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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하
2011.01.18 15:58:34 *.126.91.37
지난 주말이 한국은 올 겨울들어 가장 추웠는데, 홋카이도는 날씨가 어땠는지? ^^
좋은 곳에 좋은 사람들과 다녀온 여행이라 더 즐거웠을 것 같아. 완전 부럽삼 ㅎㅎ
재충전된 힘으로 다시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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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하
2011.01.19 09:17:32 *.126.91.37
 후쿠오카^^(not 홋카이도ㅋㅋ) 여행 정말 좋았겠다.
전에 일본 의사가 쓴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 중의 하나가
'가고 싶은 곳을 여행하지 않았던 것' 이라고 하더라구...
우리 딸 소원이 일본에 가보는 건데, 매일 회사 생활에 매여서 가보지 못했는데,
나도 꼭 짬을 내 봐야할 것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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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
2011.01.18 16:14:17 *.44.124.42
후쿠오카^^ 우레시노 온천마을 날씨는 정말 좋았어요. 영상 4~5도는 된 듯 해요. 엄마, 언니들과 함께 산책하고, 맛있는 거 먹고, 온천도 하고 정말 즐거운 시간 보내고 왔어요. 후쿠오카에서 부산오는 길에 풍랑이 심해 배가 후쿠오카로 다시 회항하는 바람에 하루밤을 더 후쿠오카에서 묵었지요.. 덕분에 잊지 못할 추억 만들고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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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차 아침
2011.01.18 16:28:05 *.44.124.42
어제 저녁 서울에 도착했다. 일요일 오후, 파도가 높아 배가 회항을 하는 바람에 하루밤을 더 일본에서 묵고 월요일 오전에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KTX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저녁 7시.

엄마와 언니들이 모두 무척 행복해 했다. 배가 회항한 것도 좋은 추억거리로 앞으로 두고 두고 얘기거리가 되지 않을까? 온천에서 모두 기모노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 앞으로도 엄마, 언니들과 국내 여행이든, 해외 여행이든 많이 같이 다녔으면 좋겠다.

지난 4일간 부담없이 결석을 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각했기 때문.
며칠만에 새벽에 일어나려니 살짝 저항이 왔다. 어쨌든 습관적으로 모닝벨 소리에 일어나 출석하고 책을 읽으려 했는데 앉아서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다리가 저려 깨어나니 어느새 6시였다. 무의식적으로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들어버렸다. 호세 아구레스 번역도 내용에 대한 부담감이 살짝 생겨난다. 이걸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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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차
2011.01.20 09:33:19 *.44.124.42
어제 점심경부터 저녁이 되도록 내내 사람들과 만나 얘기하고 통역하고 했더니 집에 가면서는 구역질과 식은땀이 났다. 에너지가 고갈된 느낌이다. 집에 가서 바로 잠이 들었는데도 오늘 아침 출석만 겨우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이런 고갈의 원인이 정신적인 것인지, 육체적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연이어 삼일 새벽 시간을 이렇게 출석만 하고 다시 잠들어 버렸다. 오늘 아침은 여전히 눈이 퀭하고 에너지가 딸리는 느낌이다. 놀다 온 후 리듬이 깨어지고 정신적으로도 영향을 받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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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차
2011.01.21 13:43:16 *.44.124.42
어제 조퇴하고 오후 내도록 잠자고 일어난 후 저녁에도 일찍 잠들었다. 오늘 새벽, 일단 출석하고 책상에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몸과 마음을 지켜 보았다. 새벽 활동보다도 여전히 잠을 더 원하고 있었다. 아침에 번역을 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것인가 싶어 그냥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려 했으나 여전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다시 잠자리로 향했다. 측정가능한 부담되지 않는 새벽활동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매일 한권의 시집을 읽을 땐 참으로 부담없고 뿌듯했는데.. 일단 요번주는 좀더 내면으로 파고 드는 시간을 가져야 겠다. 일년이 안되어 두 번 직장을 옮기는 변화에 대한 심적 부담감도 상당히 큰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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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희
2011.01.24 09:54:56 *.143.199.187
영미님~
변화를 겪고 계셨군요..
다음번 세미나에서 꼭 뵐수 있기를 바래요...
세미나가 큰 도움이 되는것 같아요...꼭꼭 뵐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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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
2011.01.25 04:59:21 *.154.29.110
성희님, 감사드려요~ 200일차는 제 개인적 변화와 함께 순조롭지가 않네요. 심기일전하고 새 마음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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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차
2011.01.25 05:46:14 *.154.29.110
가슴이 쿵닥거리고 어깨가 긴장되는 증세가 마치 심장에 시동이 걸리듯 다시 시작되었다. 지난 토요일 슬며시 사라지는 생각의 끝자락을 보고 난 후 사라졌던 증상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불안 증상이다.

반디 앤 루니스에서 보내온 이메일의 주제가 마침 불안이라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 대한 소개문을 읽을 수 있었다. '불안은 욕망의 하녀다', 불안의 크기는 곧 욕망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말, 그리고 원제인 Status Anxiety가 '사회적 지위에 따른 불안요소'를 뜻한다는 소개글을 읽자마자 이 책이 지금 내게 필요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차를 보면 책은 불안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불안에 대한 원인이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으로 제시가 되고 불안에 대한 해법으로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가 제시된다. 무척 친절한 책이다. 불안한 사람의 심리상태를 그대로 반영한 목차이다. 불안한 사람은 내가 느끼는 이 불안이 무엇인지,  왜 불안한지, 불안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지 궁금한 법이니까.

이런 책을 쓸 정도였으면 알랭 드 보통도 무척이나 불안에 시달렸을 것 같고 책을 읽다보니 나뿐만 아니라 불안은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보편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

새벽활동으로 번역도 하기 싫고 읽고 싶은 책도 없던 차라 (도무지 책에 집중이 안되어) 곤란했었는데 이 책을 읽는 것으로 며칠을 보낼까 한다.

작년 5월, 10년만에 직장을 옮기며 막혀있던 물꼬가 트인 듯 무척이나 새로움을 갈망했었다. 그리고 9개월만인 올 2월부터 또다시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선택을 내린 이후에도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었나 갈등하게 되는 건 아직 과도기이기 때문일까. 변환이 아닌 변화만이 반복되는 것인가. 이직을 앞두고 불안에 시달리는 이 증상을 며칠간 책을 읽으며 파헤쳐 볼까한다.

불안의 정의

지위: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 이 책에서는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높은 지위는 즐거운 결과를 낳는다. 이 결과에는 자원, 자유, 공간, 안락, 시간이 포함되며, 남들에게 먼저 배려받고 귀중하게 여겨진다는 느낌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런 느낌은 다른 사람들의 초대, 아첨, 웃음(농담이 썰렁할 때도), 경의, 관심을 통해 당사자에게 전달된다. 

지위로 인한 불안: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불안은 무엇보다도 불황, 실업, 승진, 퇴직, 업계 동료와 나누는 대화, 성공을 거둔 걸출한 친구에 관한 신문기사 등으로 유발된다. 질투(불안도 이 감정과 관련이 있다)를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안을 드러내는 것 역시 사회적으로 경솔한 행동이며, 따라서 이 내적인 드라마의 증거는 흔치 않다. 보통 어디에 몰두한 듯한 눈길, 부서질 것 같은 미소, 다른 사람의 성공 소식을 들은 뒤 이어지는 유난히 긴 침묵 등으로만 간간이 나타날 뿐이다. 

우리가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사람들 (소크라테스나 예수)은 다르겠지만, 세상이 자신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면 스스로도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지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있다. 이것은 자신의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자극하며, 남들보다 나아지도록 고무하며, 남에게 해를 주는 괴팍한 행동을 못하게 억제하며, 공동의 가치체계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결합한다. 그러나 모든 욕구가 그렇듯이, 이 갈망도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이쯤 읽고 보니 내 불안 증상과 딱 일치한다. 나는 지난 십여년, 직장생활을 하며 끊임없이 이 불안 증상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 불안 증상을 잊게 해줄 두 가지에 매달렸다. 하나는 불교의 마음공부, 위빠사나의 알아차림과 같은 고상한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로맨스소설, 판타지 읽기, 드라마 보기에 며칠간 몰입해서 빠져드는 대중적인^^ 방법이었다. 둘다 불안한 나를 잊기 위한 방법이었고 이 양 극단을 주기적으로 왔다갔다 했다. 그러다가, 현재는 글쓰기라는 제 3의 수단을 탐색 중에 있다.

문제는 마음공부, 글쓰기 역시 위에서 말한 '지위로 인한 불안'과 '욕망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직장생활로 인한 불안을 잊기 위해 시작한 마음공부와 글쓰기가 어느새 또 하나의 욕망의 대상, 지위 강화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버리곤 한다. 불안의 증상은 불어난 욕망의 대상으로 인해 한층 크게 강화된다.  

다음은 불안의 원인들이다. 우선 등장하는 사랑결핍. 일전 스님 한 분이 말씀하시길 아이들이 자랄 때 사랑 단지에 물이 꽉 차서 꼭 한번은 철철 넘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애정과 관심이 모자라 한번도 꽉차지 못했던 사랑 단지를 가진 아이는 평생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을 느끼고 살아가는 반면 한번 넘친 사랑 단지를 경험한 아이들은 나중에 어떤 일을 겪게되더라도 충족된 사랑의 경험을 잊지 않게 된다고 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어린 시절 내 사랑 단지는 철철 넘친 적이 없다. 부모님의 애정과 관심이 부족했다기 보다는 부모님의 시간과 여건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항상 관심과 주목이 결핍되었다고 느꼈다.

사랑결핍

높은 지위를 바라는 마음: 사랑은 가족에서 나타나든, 성적 관계에서 나타나든, 세상에서 나타나든 일종의 존중이라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볼 수도 있겠다. 누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면 우리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의 존재에 주목하고,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고, 우리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고, 약점이 있어도 관대하게 받아주고, 요구가 있으면 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관심을 가져주면 우리는 번창한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눈에 띄지도 않고, 퉁명스러운 대꾸를 듣고, 미묘한 개성은 짓밟히고, 정체성은 무시당한다..
낮은 지위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들을 낳는다..
아무도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가장 열렬한 욕구의 충족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반면 지위와 이름이 있는 사람은 온 세상이 주목한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관심을 가진다. 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이렇게 흔들린다면 사회의 태도가 우리의 의미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무시를 당하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고개를 쳐들며, 미소나 칭찬과 마주치면 어느새 역전이 이루어진다. 남의 남의 애정 덕분에 우리 자신을 견디고 사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어린 시절, 친척들이 놀러 와서 우리 오남매가 우르르 인사를 하면 나에게 아는 체를 해주는 어른이 없었다.  항상 묻혀있는 느낌을 가졌다. 오죽하면 무척이나 아팠던 어느날, 고무부와 고모가 내 머리맡에 둘러 앉아 아는 체를 해주던 것이 무척이나 새롭고 신기했던 경험으로 남아있을까.  남자아이를 기다리던 할머니께서 한겨울날 셋째딸로 내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윗목으로 밀쳐놓으셨다고 했다. 실망에 겨워 누워있다가 갓난 아기가 추워서 오옹 앓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듣고 품에 안아 아랫목으로 데려오니 비로소 잠이 들었다고 한다. 나중에 엄마에게 들은 얘기이다.

내 이런 투덜거림은 농사지어 오남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잘 보내신 우리 부모님이 들으시면 마음 아파할 소리이다. 하지만 오남매의 넷째로, 셋째딸로 자라며 나는 항상 내 존재의 미미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랐다.

초등학교(그당시는 물론 국민학교지)에 입학했을 때 선생님이 부르는 내 이름에 대답하지 못해 줄에서 빠지고 견학도 따라가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히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를 특별히 이뻐해주시는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주목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을까? 

이번주 글쓰기반 공동과제가 '나는 누구인가'이다. 그 주제를 생각하다보니 얘기가 여기까지 흘러왔다. 7시다. 출근준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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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차
2011.01.26 06:45:26 *.41.16.144
가슴의 쿵덕거림이 가라앉았다. 새벽 시간 자체를 잘 보낸 것에 대한 보상인지 아니면 나를 지켜보는 알아차림의 힘이 강화된 것인지 어쨌든 안정감이 살아났다. 감사드린다.
오늘은 유난히 춥다. 바깥 온도를 확인해보니 영하 12도이다. 아, 추위가 질린다. 이 엄동설한에 내가 태어났다니..박완서 선생님이 가신 지난 토요일이 내 생일이었다. 따져보니 대한 무렵이다. 대한에 난 사람은 낮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에너지와 열정을 살리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라고 읽은 바 있다. 만물이 얼어붙은 이 시점에 생명의 에너지가 안으로 잠겨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나무나 씨앗을 보면 이해되듯.

알랑 드 보통에 따르면 불안의 두번째 속성은 속물근성이라고 한다. 속물은 '겉으로 드러난 힘을 부끄럼없이 해바라기하고 명품과 사치를 내세운 자기 과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속성'  정도로 이해되는데..

불안의 두번째 원인: 속물근성

속물이란 하나의 가치 척도를 지나치게 떠벌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

속물의 일차적 관심은 권력이며, 권력 구조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리고 순식간에 속물의 존경 대상도 바뀌기 때문이다..

속물집단은 분노를 일으키거나 좌절감을 안겨준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으로는, 즉 우리의 지위가 아닌 다른 것으로는 그들이 우리에게 하는 행동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질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표지로 제시하지 못한다면 우리 존재는 그들에게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아기는 그 통제할 수 없는,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특성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애정은 성취와 관련을 맺기 시작한다. 예의를 지킨다든가, 학교나 다른 곳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다든가, 계급이나 명성을 얻는 일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속물은 독립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는 데다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갈망한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두려움에서 시작된 속물근성의 순환은 중단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사실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 역사는 남들의 경멸에 압박감을 느껴 자신에게도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텅 빈 선반에 엄청난 것들을 전시하려 했던 사람들이 남긴 유산이기 때문이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직장안에는 파워게임이 있다. 이너써클이라고 불린다는 영향력있는 몇몇 사람들을 중심으로 권력이 구성된다. 10년째 일했던 지난 직장에서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내 또래 직장 동료 하나와 나를 항상 비교하며 (나자신 뿐만 아니라 남들도) 그녀가 나보다 더 주목받고 더 인정받고 있음을 매일 확인하는 것이었다. 사람들과 같이 얘기를 하고 있으면 나보다 그녀에게 항상 남들의 눈길이 더 가있고 사람들은 뒤에서 그녀를 욕하면서도 앞에서는 더 떠받들고 존중해줬다. 마치 사람들의 눈에 레벨 테스트기라도 설치되어 있는 듯 사람들은 음, 쟤는 만만치 않아, 나보다 세, 음 쟤는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별로 위협적이지 않아 하고 쉴 새없는 평가를 내리고 눈길과 몸짓으로 은연중에 그것을 표현하는 듯 했다. 영향력이라는 내면의 파워게임과 사람들의 인정이라는 외적 파워게임에서 낮은 지위에 머물러 있다는 인식이 나를 괴롭혔다.  

모든 사람들과 무난하게 지내는 가운데 스스로 느끼기에 나는 회사 사람들에게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식물 등급 정도로 매겨진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알랑 드 보통에 따르면 내 속에 있는 속물근성이 무던히도 나를 괴롭힐 것일게다. 어쨌든 스스로 비교의식에 시달리면서 자존감, 자기 확신이야말로 내가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가장 긴요한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결국 남들이야 어쨌든 내가 만든 잣대로 내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일테니. 곧잘 주목받지 못하고 큰 어린 시절을 탓하곤 했다.

불안의 세번째 원인: 기대

물질적 진보

평등, 기대, 선망: 서양 문명 2,000년의 장점은 이제 익숙하다. 무엇보다도 부, 식량, 과학 지식, 소비 물자, 신체적 안전, 기대 수명, 경제적 기회 등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상적인 물질적 발전이 닉슨의 소비에트 연설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현상을 수반한다는 곤혹스러운 사실은 그렇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현상이란 서구의 보통 시민에게 지위로 인한 불안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즉 자리, 성취, 수입을 놓고 걱정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 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 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불평등을 고려할 때 질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가 모두를 질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축복을 누리며 살아도 전혀 마음이 쓰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보다 약간 더 나을 뿐인데도 끔찍한 괴로움에 시달리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 상태다. 일반 병사는 상사나 상병에게 느끼는 것과 비교하면 장군에게는 질투심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뛰어난 작가 역시 평범한 삼류작가보다는 자신에게 좀 더 접근한 작가들로부터 질투를 더 받는다. 불균형이 심하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며, 그 결과 우리에게서 먼 것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되거나 그런 비교의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겨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록 질투할 사람도 늘어난다...

18세기와 19세기의 위대한 정치 혁명과 소비자 혁명은 인류의 물질적 운명을 크게 개선시키는 동시에 심리적 고뇌도 안겨주었다. 그 중심에 자리 잡은 특별하고 새로운 이상, 즉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하며 누구나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미국인은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이런 부에도 불구하고 계속 더 많은 것을 요구했으며,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을 볼 때마다 괴로워했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의 '왜 미국인은 번영 속에서도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라는 제목의 장에서 불만과 높은 기대, 선망과 평등의 관계를 끈질기게 분석한다...

출생과 운에 따른 모든 특권을 폐지했을 때, 모든 사람이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릴 때, 야망이 큰 사람은 위대한 일을 쉽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자신이 비범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을 통해 금세 교정되고 마는 망상이다.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자살률 증가를 걱정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자살은 드문 대신 광증이 다른 어느곳보다 흔하다고 한다...

자존심=  이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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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운 것

제임스의 방정식은 우리의 기대 수준이 높아지면 수모를 당할 위험도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무엇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된다. 한때 유명했던 배우, 몰락한 정치가, 그리고 토크빌의 말을 따르자면, 성공하지 못한 미국인이 겪는 고통에 비길 만한 것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이 방정식은 우리의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두가지 방법도 암시한다. 하나는 더 많은 성취를 거두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취하고 싶은 일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제임스는 두 번째 방법의 장점을 지적한다.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점거나 늘씬해지려고 애쓰기를 포기하는 날은 얼마나 즐거운가. 우리는 말한다. '다행이야! 그런 환상들은 이제 사라졌어.' 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이기도 하다."

제임스의 방정식에 따르면 이 사회는 요구를 잔뜩 늘여놓는 바람에 적절한 자존심을 얻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믄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발전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우리의 현재의 모습과 달라졌을 수도 있는 모습 사이에 늘 간격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원시의 야만인보다 더 심한 궁핍을 느낄 수도 있다...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내 비교의 잣대가 되던 그녀는 나와 나이가 같았고 같은 나이대의 딸 둘을 똑같이 두었다. 인생의 파동과 자잘한 흐름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내게 큰 프로젝트의 일이 들어오면 그녀에게도 비슷한 수준의 일이 들어오고 내가 일년간 휴직하고 호주에 있을 땐 그녀도 곧 호주로 파견 근무를 왔을 정도이다  

시골 출신에 전세 2000에서 시작하여 대출이 절반인 방 둘 28평 아파트를 겨우 장만하고 허덕이는 나에 비해 그녀는 오빠 둘이 있는 막내 외동딸에 대학교수이신 아버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서울 출신의 교양있는 친정 엄마, 아파트 몇 채를 가지고 있는 부동산 갑부 시어머니, 평생 마이너스 대출이나 빚이라고는 가져 본 적이 없이 강남 40평대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다. 반드시 직장을 다녀야 하는 나에 비해 그녀는 사실 경제적인 이유로 회사를 다녀야 할 필요는 없었다. 내적 열등감에 시달리던 나에 비해 인정받는 직장생활이 주는 보상감, 사회에서 받는 존중감으로 인해 그녀의 내적 만족감은 무척 컸으리라 생각된다.

그녀의 지나친 자기 중심성에 질려 하면서도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천성적인 매력에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끌리곤 했다. 사실 내가 존경하는 그녀의 속성이 몇가지 있다. 속으로 질투했으면서 희안했던 건 자타공인 베스트 프렌드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나또한 그녀에게 일말의 도전이 되기도 했다. 쉬지 않고 무언가를 추구하던 내 성향 때문일 것이다.
직장 친구 관계란 원래 그런 것인가?

불안의 네번째 원인: 능력주의

사회적 위계에서 낮은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물질적 관점에서 보자면 즐겁기 어려운 노릇이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가난이 자존심에 미치는 영향은 공동체가 가난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 서양이 2,000년간 물질적으로 진보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왜 사람이 가난하고, 무엇이 사람의 사회적 가치를 결정하느냐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응보의 관점이 강력하게 개입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낮은 지위에 처한 사람은 점차 감정적으로 견디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낮은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얻는 데 불안을 느끼는 네 번째 이유가 될 수 있다,.

실패에 관한 유용한 옛이야기 세 가지

첫번째 이야기: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책임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크다
두번째 이야기: 낮은 지위에 도덕적 의미는 없다
세번째 이야기: 부자는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부를 쌓았다

불안을 일으키는 새로운 성공 이야기 세 가지

첫번째 이야기: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있다
두번째 이야기: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세번째 이야기: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생생하게 꿈꾸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라는 꿈꾸는 다락방의 R=VD공식과 무지개 원리, 씨크릿의 끌어당김의 원칙 같은 것들에 나또한 열광했다. 내안의 거인을 깨우라는 안소니 로빈스의 메시지와 나폴레온 힐의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 수많은 성공서적들이 잠자고 있던 우리를 매일 세차게 두드리고 있다. 새벽에 잠 안자고 이러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런 책들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알랭 드 보통은 이런 성공 신화들 덕분에 내가 더 불안해졌다고 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 내 조건에 만족하고 살 수 없게 만든 가난에 관한 이야기들. 더 욕망하고 더 가지려 하기 때문에 더 가난해진다는 것은 맞는 말 같다. 기본적으로 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의 새벽잠을 깨우고 있다고 한다.  새벽잠 안자고 나는 더 가지고, 더 소유하려 하는가? 더 똑똑하고 더 많이 알려 하는가?

하나 분명한 건 가슴의 콩닥거림을 줄이고 알아차림을 키우고 안정감을 키우는데 새벽에 깃는 샘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거면 된다. 나는 불안이 싫다. 불안이 기본인 인간이기는 하지만 불안한 조건을 벗어나고 싶다. 그래서 위빠사나도 하고 로맨스 판타지 소설도 읽고 이 새벽에 불 밝혀 책 읽고 글 쓰고 있다.  불안의 원인이 아직 하나 더 남아있다.
불확실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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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차
2011.01.27 06:19:26 *.41.16.144
글을 우리 글통삶 식구들에게 보이니 불안과 가슴떨림은 같은 증상이고 살아있음의 증거라는 댓글이 달렸다. 어깨가 경직되고 새가슴이 되어 콩닥거리는 걸 한번도 긍정적인 증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어쩐 아이스께끼같은 소리람? 나는 불안을 극복하고 옆으로 치우고 싶을 뿐인데 이것이 살아있음의 증거라면 앞으로도 평생 이럴 것?
가슴 콩닥거림이라는 말이 어쩌면 '가슴뛰는 삶을 살아라'라는 말과 중첩되기에 이런 말씀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실상 경미한 불안과 스트레스란  삶에 활력을 주는 프로펠러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고.. 찾아온걸 알면 항상 마치 호환마마가 찾아온 듯 잔뜩 긴장하여 내치고자 애쓰던 내 속 미세한 불안을 예쁘게 껴안는 상상을 해본다. '아, 오랜 친구야, 또 놀러왔네? 잘왔어. 고마워. 우리집에서 잘 놀다가 가~' 그리고 놀아준다.

불안의 다섯번째 원인: 불확실성

다섯가지 예측 불가능한 원인

1. 변덕스러운 재능: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뮤즈는 9명인데, 그들은 각각 특수한 재능을 통제하거나 자기 멋대로 나누어준다. 서사시, 역사, 연애시, 음악, 비극, 찬가, 춤, 희극, 천문학을 담당하는 뮤즈가 다 따로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든 그 사람은 자신의 재능이 진정한 자기 것이 결코 아니며, 이 예민한 신들의 마음이 바뀌면 한 방에 날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그리스의 뮤즈들이 활동하는 영역은 현대의 관심사를 거의 반영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신화적인 개념은 우리가 성취 능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으며, 그래서 미래와 관련하여 주도적으로 나설 수 없는 불안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절묘한 이미지로 포착해내고 있다.

2. 운: 승자는 운을 만든다. 이것이 현대의 주문(呪文)이다. ..우리의 지위의 문제를 우연적 요소들에 맡긴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그러나 합리적 통제라는 관념에 완전히 물들어, '불운'이 실패를 설명하는 그럴듯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을 폐기해버린 세상에 산다는 것은 더 힘든 일이다.

3. 고용주: 1800년에는 미국 노동력 가운데 20퍼센트가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있었다. 1900년에는 그 수치가 50퍼센트로 늘었다. 2000년에는 90퍼센트가 되었다. .근대의 산업 프롤레타리아란 자신이 가진 자원으로 먹고살 수 없어 불리한 조건으로 돈을 받고 자기 자신을 고용주에게 팔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정의된다. 피고용자가 되는 고통에는 고용 기간의 불확실성만 아니라 수많은 작업 관행과 역학에서 오는 모욕감도 포함된다. 대부분의 사업체가 피라미드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피고용자로 이루어진 넓은 밑변은 관리자들로 이루어진 좁은 꼭짓점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보상을 받고 누가 뒤처지느냐하는 문제는 작업장을 억압적인 분위기로 이끄는 요인이 되며, 이런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불안이 자라나게 된다. ..조직의 피라미드를 성공적으로 기어올라가는 등반가는 자신이 맡은 일에서 최고라기보다는, 문명화된 삶에서는 지침을 얻기 힘든 여러 가지 음침한 정치적 기술에 가장 숙달된 사람들이다.  마키아벨리 등의 생존 책략: 동료를 조심해야 한다, 거짓말을 하고 과장해야 한다, 무서워야 한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사랑은 감사의 유대에 의해 유지되지만, 사람은 지나치게 이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이 유대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공포는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며 이것은 늘 효과적이다. - 마키아벨리-')

4. 고용주의 이익: 고용의 안정성은 조직 내의 정치만이 아니라 회사가 시장에서 계속 이윤을 내는 능력에도 달려 있다. .. 많은 노동자들이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녹아내리는 부빙 위에 서 있는 듯한 불안감을 느낀다. 그것은 회사가이윤을 개선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이 언제나 피고용자 숫자를 대폭 줄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ATM 한 대는 무려 37명의 은행 출납계원 일을 한다. (게다가 병이 드는 일도 없다)..제품의 수명은 19세기 중반부터 급속하게 짧아져, 자신이 하는 일이 장기간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일꾼의 신념도 무너졌다. ..

5. 세계 경제: 19세기 초 이후 서양 경제의 역사는 성장과 후퇴를 주기적으로 반복해왔다. 보통 4, 5년 팽창하면 그 뒤에 1, 2년 수축이 발생했고, 이따금씩 수축 기간이 5, 6년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

우리가 실패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성공을 해야만 세상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족의 유대, 우정, 성적인 매력 때문에 가끔 물질적 동기가 부차적인 것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자신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무모한 낙관주의자일 것이다.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 어떤 동지애가 이룩된다 해도, 노동자가 어떤 선의를 보여주고 아무리 오랜 세월 일에 헌신한다 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위가 평생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 지위가 자신의 성과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경제적 성공에 의존한다는 것, 따라서 자신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변함없이 갈망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늘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을 하느냐하는 질문에 우리가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우리를 대접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맨 처음에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어제 저녁, 남산의 고급 호텔에서 스테이크 코스 요리와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리더십 강의를 하는 선배언니와 일을 통해 알게된 금융업체 본부장님, 그 금융업체의 30대 후반 과장님 한분과 밤늦도록 즐거운 저녁식사를 했다. 그 식사비는 아마도 그 회사에서 접대비로 처리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직장생활을 통해 우리가 바라는 상징적인 혜택들이 거기에 있다. 고급호텔에서 와인을 마시는 즐거운 저녁식사를 가능하게 하는 회사와 고용.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이 얘기하듯 이 고용은 불확실성을 기반으로 한다. 50대 후반, 고용 시장의 쓴맛 단맛을 다 맛보며 그 자리에 와계신 본부장님도 조만간 짤리게 되면 시골에 내려가 여행 가이드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사실, 조만간 그 자리를 떠난다는 말이 '언젠가'의 개념이 아닌 2011년 상반기 어느 날의 현실이 될 이야기이다. M&A로 인해 임원급은 실적에 상관없이 조만간 물러서야 할 입장이시기 때문이다.

동석하신 과장님이 태어날 때부터 약간 장애가 있는 자신의 애기 생일 선물을 본부장님이 너무도 가슴 아파 하시고 눈물 글썽이며 챙겨주셨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회식 때 직원들이 먹을 고기를 내내 굽고 계시던 그 본부장님은 우리나라에서 찾기 쉽지 않은 상사 중의 한 분이다. 본인의 실력이 탁월하기도 하지만 직원들을 진심으로 챙겨주고 자율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셔서인지 회사에서 최고의 실적을 내는 최고의 부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도 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실력과 실적에 상관없이 이 분은 조만간 회사를 떠나셔야 하고 퇴사 이후에는 시골에 들어가 가이드일을 하실 것을 생각하고 계시다. 순수하지 못한 온갖 것들 속에서 순수함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본인을 청정하게 가꾸어오신 분이지만 퇴사 이후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그야말로 불확실성 그 자체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조직 안에서 앞으로 차근 차근 밟아 나갈 계단 앞에서 몸조심을 하고 있는 그 과장님과 같은 입장이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비정한 권모술수, 순수하지 못한 온갖 것들을 감내하겠다는 각오가 없는 이상 그 길은 오래 걷기가 쉽지 않다. 피라미드의 윗부분에 올라 임원이 된 미래에도 결국 앞길에 남은 것은 불확실성 뿐이지만 피라미드의 아랫 부분에 있는 일개 평사원의 길에도 깔린 건 불확실성 뿐이다. 시장의 어떤 변덕이, 어떤 합병이, 어떤 서비스와 상품의 변화가, 어떤 무지막지한 상사가 내 앞길을 막고 나설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챨스 핸디가 말하는 코끼리와 벼룩의 세상을 견주며 모든 고용인들이 스스로를 고용하는 일인 창업을 꿈꾸기는 한다. 그러나 이곳은 소수가 성공하는 더욱 열악한 시장이다. 고용인의 삶을 고용주의 삶으로 전환하기가 쉬운 일인가? 내적인 의식전환 부터 재능에 대한 회의, 통제불가능한 운, 고용인의 삶보다 더한 불확실성의 삶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제 불안의 원인 분석이 끝나고 다음 장부터는 불안의 해법이 제시된다. 감수성 예민한 얼굴에 속머리가 엄청나게 빠져버린 알랭 드 보통의 얼굴을 보면 작가의 삶을 통해 이분도 무척 불안해했을 것 같다. 40대 초반인 작가의 얼굴에 소년의 얼굴이 여전히 남아있다.  40이 되어도, 50이 되어도, 아니, 80이 되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소년과 소녀의 얼굴.
어떻게 소년과 소녀의 얼굴을 간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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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차
2011.01.28 07:38:45 *.41.16.144
자기 자신에 대한 파악이 제대로 안되어 있으면 시간은 낭비된다. 방전이 되어버리는 충전지처럼 제 할 일을 못하고 감정과 고민의 과잉으로 에너지가 그냥 소모되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그려지는 그림이 없는 것도 문제이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시간과 에너지를 쓰다가 말아버리니 원하는 풍광이 실현되어 익을 원자재가 부족한것이지..

어제 밤에 내가 진짜 원하는 풍광은 무엇이지 고민해봐야지 하다가 잠이 들었다. 아주 뚜렷하고 구체적인 풍광, 특히 내면에서 받아들여지는 스스로 말이 되는 풍광이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간절한 삶의 이유가 되는 구체적인 풍광이 머리에 잡히면 방향성에 대해서는 고민을 안해도 될 것 같다. 새벽활동을 통해 천복, 천직을 탐색해보자는 것도 결국 머리 속에 이 구체적인 풍광 하나를 그려넣자는 것이니.

나는 작가들의 삶이 부럽기는 하다. 그런데 그냥 작가는 덜 부럽고 시골에서 자연을 누리며 창작 활동을 병행한 헬렌 니어링, 타샤 튜더과 같은 작가의 삶이 아주 좋아 보인다. 그런데 무언가를 쓰고 싶은 욕구는 넘치는데 쓰고 싶은 구체적인 무언가가 나타나지 않는다. 내면에서 삶과 연결되는 그 끈이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없이 실은 작가는 무조건 쓰고 싶고 작가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이다. 그저 작가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만으로도 작가가 된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이 사회적 지위 불안에 대해 여러가지 이유를 나열했지만 어제 저녁 일본 화산폭팔과 이집트 민주화 운동, 우리나라의 어지러운 정계 등 9시 뉴스만 보고 있어도 우리는 불안해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삶의 조건 자체가 위태롭기 그지 없게 느껴진다. 위험, 위험 하고 빨간 불이 항상 반짝 거리고 있는 빌딩에 입주해 살고 있는 것처럼.

불안의 해법으로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가 제시된다. 물론 불안 중에서 지위 불안을 해소할 해법들이다. 책을 읽어봐야지.  

불안의 해법

1. 철학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상자를 하나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사람들의 인식은 모두 이 상자에 먼저 들어가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만일 그것이 참이면 더 강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만일 거짓이면,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깨를 으쓱하고 털어버리는 것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철학자들은 이 상자를 '이성'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불안도 종류에 따라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불안 때문에 잠 못 이루며 성공을 거둔 불면증 환자들이 오래전부터 강조해왔듯이 생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불안에 떠는 사람일 수도 있다. 불안 덕분에 안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능력을 계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한다면, 이런 점과 관련하여 다른 감정들의 쓸모도 생각해볼 수 있다...감정은 과녁을 넘어가거나 못 미치기 십상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해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서워할 만한 것인지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샹포르는 이렇게 말한다. '혼자 사는 사람을 두고 사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것은 밤에 봉디 숲에서 산책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산책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철학자들은 함께 모여 연구를 한 것도 아닌데 입을 모아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고 권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에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이 정도의 경미한 불안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얘기한 분의 조언과 일치한다. 위험을 감지하는 발달된 촉수로 인해 뜨거운 걸 보면 멈출 줄 알기에 큰 위험없이 살 수 있다는데 동의한다. 에너지를 받는 마음의 뿌리를 어디로 뻗치고 있느냐에 따라 인식이 달라진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생각으로 괴로울 때면 마음의 뿌리를 내 속으로 돌리는 상상을 한다. 내 내면에 생명의 근원이 있기에 그곳에 뿌리를 담그면 외부 조건들로 인해 흔들리지 않겠지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을 내면으로 보내면 불안감은 곧 진정된다. 명상과 알아차림의 효과가 바로 이것일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이성'으로서 내리는 판단을 불안의 해법으로 제시했는데 내면으로의 전환은 이성과는 별 상관없어 보인다. 그러면 이런 방법은 뒤에 기독교 부분에 해당되려나? 어쨓든 올바른 사고와 판단으로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을 필터링해야 한다는 이 철학파트에 동의한다.

2. 예술
아널드의 말에 따르면 위대한 예술은 구름 잡는 이야기이기는커녕, 삶의 가장 깊은 긴장과 불안에 해법을 제공하는 매체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라. 거기에서 "인간의 잘못을 없애고, 인간의 혼돈을 정리하고, 인간의 곤궁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의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형을 다시 잡아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아널드는 이런 태도의 핵심을 이루는 선언으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한다 - 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우선 가장 분명한 점은 삶이 비평이 필요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세상을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해준다. 우리가 지위와 그 분배에 접근하는 방법만큼 비평 (또는 통찰과 분석)이 필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시대를 막론하고 아주 많은 예술가들이 어떤 식으로든 사회가 사람들에게 등급을 부여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을 창조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예술의 역사는 지위의 체계에 대한 도전, 풍자나 분노가 서려 있기도 하고, 서정적이거나 슬프거나 재미있기도 한 도전으로 가득하다.

소설은 감추어진 삶의 목격자이기 때문에 지배적인 위계 관념에 상상의 평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교훈을 잊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 내면의 가장 좋은 부분이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외적인 성취로 표현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다.

존스는 무시당해온 광경을 우리 눈앞에 들어 올려 그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샤르댕이나 존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쾨브케의 예술에도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지배적인 물질적 관념에 도전하는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일상생활을 묘사한 위대한 화가들은 제인 오스틴이나 조지 엘리엇처럼 세상에서 무엇을 존경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속물적 관념을 교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나의 실패를 다른 사람들이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며 가혹하게 해석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일에서 실패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실패의 물질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세상이 실패를 바라보는 냉정한 태도, 실패한 사람을 '패배자'로 지목하는 집요한 경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심각해진다. '패배자'라는 말은 졌다는 의미와 더불어 졌기 때문에 공감을 얻을 권리도 상실했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는 냉혹한 말이다.
비극의 주인공들을 신문 기사 제목으로 뽑자면;;
오셀로 "사랑에 논이 먼 이민자 원로원 의원의 딸을 죽이다"
마담 보바리 "쇼핑 중독의 간통녀 신용 사기 후 비소를 삼키다"
오이디푸스 왕 "어머니와 동침으로 눈이 멀다"

특히 처음 생겨날 때부터 위대한 실패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조롱이나 심판은 삼간 특별한 예술 형식이 있다. 이 형식의 장점은 파구글 맞이한 사람들 - 불명예스러운 정치가, 살인자, 파산자, 감정적으로 강박감에 사로잡힌 사람-의 행동의 책임을 면제해주지는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어떤 수준의 공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이 마땅히 이런 공감을 받아야 하지만, 실제로 받는 일은 드물다.

변태와 정신병자, 실패자와 패배자를 이야기하는 신문이 이해의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 있다면, 비극은 반대편 끝에 있다. 비극은 죄 지은 자와 죄가 없어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비극 작품은 재앙을 피하는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동싱 재앙을 만난 사람들에게 공감을 느끼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비극작가들은 저항할 수 없는 진실로 우리를 이끈다. 역사상 인간이 저지른 모든 어리석은 일은 우리자신의 본성의 여러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내부에도 최악의 측면과 최선의 측면을 아울러 인간 조건 전체가 담겨 있으며, 따라서 적당한, 아니 엉뚱한 상황이 닥치면 우리 역시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러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면 기꺼이 높은 말에서 내릴 것이고, 공감이 커지면서 마음이 겸손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비극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평소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작품을 통해 실패의 유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 많이 아는 것은 곧 더 많이 이해하고 용서하는것이다.
델핀 들라마르 사건이 신문 기사로 났을 때 지방의 보수적 논평가들은 이것을 젊은이들 사이의 결혼 경시 풍조, 사회의 상업화, 종교적 가치의 상실의 예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플로베르에게 예술은 조악한 도덕주의의 정반대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예술은 인간의 동기와 행동을 깊이 탐사하는 영역이고, 이 영역에서는 어떤 사람을 성자나 죄인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조롱했다.
우리는 플로베르의 소설을 덮으면서 우리가 사는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 행동이 엄청난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잘못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이 무자비하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

유머는 불만을 제기하는 데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겉으로는 즐거움만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은근히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만화는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설교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만화를 보면서 낄낄거리다가 권위에 대한 불만 토로가 적절하다고 인정하게 된다...우리는 정당화할 수 없고 어울리지 않는 것은 조롱한다.
우리는 그런 유머를 보고 들으면서 세상에는 나만큼이나 질투심 많고 사회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처럼 돈문제 때문에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처럼 멀쩡한 표정을 짓지만 속으로는 약간 맛이 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또 나처럼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사랑결핍에 대한 처방전이 남들 시선이야 별거 아니라는 이성적 사고로서의 철학이었다면 속물 근성에 대한 처방전은 예술이다. 드러나지 않은 삶,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패배한 삶, 즉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한 위로와 다독임, 혹은 각성제, 삶에 대한 비평이 바로 예술이라는 것이다.

삶의 비극성 속성에 대한 이해, 그래서 나와 같이 똑같이 찌질한 이웃 사람의 비극에 연민어린 동감의 시선을 보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한다. 비극과 희극의 요지경 세상을 펼쳐 놓아 자신의 불운에 따른 불안에 울거나 웃어버리게 만든다는 예술의 역할.

처음에 나는 알랭 드 보통이 그래, 예술가들, 특히 작가들은 이런 훌륭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살 가치가 충분해, 이런 가치를 느끼면 삶이 불안하지 않아, 그런 속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설을 포함한 예술작품을 통해 지위 불안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삶과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를 키우도록 해 불안을 잠재우는 것도 말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의 역할에 대해 아주 좋은 공부를 했다. 알랭 드 보통이 점점 더 좋아진다.

불안의 원인인 '기대'와 '능력주의' 부분에 대한 처방전으로 제시된 것이 '정치'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토대가 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해 의심해보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정치의식이라고. 배금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잘 버는 것은 능력과 미덕을 갖추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 사회도 그렇지만 특히 서양 사회는 자본주의가 시작된 만큼 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알랭 드 보통은 1989년을 기점으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 대립에서 세계의 지배적 이념이 확실하게 자본주의가 되었다고 보는 것 같다. 내 경험에도 실제 지난 30여년을 되돌아 보면 소비주의, 물질주의의 뿌리가 광고나 미디어를 통해 너무도 우리 안에 깊숙히 들어오게 되었다고 느낀다. 소셜 네트워크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다음 시대의 지배적 이념은 '소유'가 아닌 '접속'이 되었다고 한다. 러프킨의 주장에 따르면 이 접속 또한 자본주의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접속'의 권리를 위해서 돈이 필요하지 않다면 모르겠지만 '접속'과 '관계' 그리고 '경험'은 이제 금전적인 토대위에서 사고 파는 것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러프킨의 요지였다.

자본주의을 대체할 어떤 이데올로기가 등장할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사회의 모든 요소가 자본주의화 되어있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가 왔을 때 대공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무엇일까 공부해본 적이 있다. 그때 호주에서 '국제정치경제'과목을 수강하고 있었는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 뭐 이런 맥락의 제목으로 인도의 사카르라는 분이 시작한 프라우트 공동체에 대한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공부해보니 쿄뮨주의에 기반한 많은 환경, 지역공동체가 전세계에서 활발하게 만들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프라우트 공동체는 특이하게도 엄청난 지구적 재난 이후에 파괴된 세계에서 살아갈 기반으로 지역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만들어질 무소유 공동체라고 한다. 자급자족을 기반으로 하고 각자의 재능을 살려 공동체에 기여하며 영적 스승을 중심으로 하는 그런 공동체이다. 이런 영성에 기반한 공동체 얘기가 국제정치경제 에세이로서는 영 황당했는지 P(겨우 통과) 점수를 받았다. 영적인 얘기는 질색이라는 프랑스 출신 강사의 평과 함께..

내 경우 항상 경쟁의식에 시달려 불안한 가운데 마음의 의지처로 삼은 것은 불교의 위빠사나 명상이었다. 위빠사나에서는 '무아'와 '알아차림'을 강조한다. 그리고 책번역까지 하며 공부한 연기법은 괴로움의 원인이 탐욕이고 탐욕의 뿌리는 무지라는 것, 태어남의 최고 목적은 다시 태어남을 끊기 위한 욕망의 소멸이라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법사님의 표현에 따라) 반복해서 얘기해준다. 그래서 다른 욕망을 낼 필요가 없었다. 다만 내가 왜 아직도 괴로운가, 이것만을 탐색할 뿐이었다. 12연기에 따라 욕망과 집착의 굴레만 끊어버리면 바로 무지가 해결되고 완벽한 해탈의 길이 열린다고 했으니.

그러나 나는 여전히 불안했고 낙원같은 해탈의 세계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듯한 현실이 불만스러웠다. 그리고 한번 태어난 세상에서 풍요롭게 누리고 사랑을 느끼며 삶을 긍정하고 살고 싶었지 자아를 부정하고, 삶을 부정하고, 즐김을 부정하고 살다보면 사는 것 자체가 메마른 사막이 될 것만 같다고 느껴졌다. 스승을 떠나고 위빠사나를 떠난 후 에크하르트 톨레로 대표되는 뉴에이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삶의 괴로움과 불안을 떠나게 해줄 그 어떤 스승, 그 어떤 철학, 그 어떤 가르침은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돌아볼 것은 내 가슴속 밖에 없다는 인식에 재차, 삼차 다다르고 나서 선택한 것이 글쓰기이다.

이제 삶에서 무언가를 꾸준히 창조하고 남기고 싶었다. '표현, 창조, 성장' 이 세가지의 키워드가 현재 내 삶의 이정표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불안을 호소하며 이 글을 시작했다. 나는 불안해하는 인간이다는 정의와 함께. 글쓰기를 통해 나는 어디에 도달하고 싶은 것일까?

알랭 드 보통이 '가족에서 나타나든, 성적관계에서 나타나든, 세상에서 나타나든 일종의 존중이라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사랑의 정의를 내린 바와 같이 나는 다른 사람의 민감한 반응과 존중을 기대하고 있는 것 뿐일까?

작가가 되고, 강사가 되어 어떤 새로운 인식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각성케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변경연이나 글통삶에서 만나는 많은 분들이 말하는 꿈의 풍광이다. 작가가 되었을 때 갖게될 어떤 우월적 지위 때문이 아닌가 물어볼 수도 있고 거기에 대해 100프로 아니라고 답할 사람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풍광과 꿈을 가질 때 볼록 렌즈가 태양열을 모으듯 시간과 에너지의 집중적인 투여가 가능해진다.  

직장을 통한 사회적 지위는 진정한 내 것이 아니고, 나의 브랜드가 아니고, 내 노년과 함께 할 것이 절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글을 통한 '표현, 창조, 성장'이 이루어져야 내가 만족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시간이 걸린다. 익어야 한다. 많이 읽어야 하고 많이 배워야 한다. 많이 느껴야 한다. 다독, 다상량, 매일 글쓰기 이것들이 앞으로 몇년간 내 삶에 필요한 것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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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차
2011.01.29 07:18:15 *.41.16.144

아, 무엇에 대한 글을 적어야 하지?
멜랑콜리한 소설 쓰던가..
소설 못 쓴다니까, 논픽션 쓰고 싶다니까~
당신은 가치관이 없어서 그런 글 못써.

우문에 우답이다. 날 씩씩거리게 만드는 우리집 아저씨의 말..사람이 가치관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일까? 물론 곧 사과를 받았지만 내가 씩씩거릴만큼 이 말은 뼈가 있다.

내가 글로써 전달하고 싶은 가치관이 없다는 것에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내가 전달하고, 기여하고 싶은 메시지 자체가 안보이는데 책쓰기는 욕심일까?

난 뭘 쓸 수 있지?

어젯밤 심홍 이소영씨가 쓴 '산에 올라 마음의 붓을 들었네'를 읽다가 잠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옛 산수화 안내책이다.

정선, 김홍도, 강세황 이런 옛 화가들의 희고 검기만 하던 그림들이 아, 아름답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치 마음의 눈을 뜨게 만드는 글이었다.

존경스럽습니다. 심홍 선생님..

산에 올라 마음의 붓을 들었네
이소영| 낮은산 | 2008.09.05

이소영

이소영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미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논문으로는 <산수화의 수지법에 관한 연구> <인물화의 사의성에 관한 연구>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홉 번의 개인전과 아흔 차례 이상의 단체전, 기획전에 참여한 이소영 선생님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홍익대학교, 배재대학교, 단국대학교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수묵화와 미술해부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머지 시간에는 여행하기를 좋아합니다.
작품으로는 주로 수묵화를 영상에 응용한 수묵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고 자라는 환경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랍니다. 어려서부터 우리 것에 관심을 가져야 우리 문화가 더욱 발전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이렇게 산수화에 관한 책도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 어린이들에게 국악이나 전통 미술 등 우리 문화를 접할 기회가 더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무엇을 쓸 것인가?
일전 한선생님이 얘기해준 대로 '40대가 읽는 시' 같은 에세이 + 시 안내서?
브릿징 번역을 통해서 해보려고 했던 '삶을 깨우는 사람들?'
제목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가치관과 주제이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가?

시를 마음에 찰싹 붙여 떨어질세라, 애걸복걸하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는 문정희 시인의 말처럼 시가 마음에 찰싹 붙어있지 않으면 시를 쓰기도 힘들다.

얄팍하지만 의문사항이 있으면 항상 그러듯이 네이버 검색을 해보자. 가치관이란 무엇인가?

가치관 [價値觀]

[명사] <심리> 가치에 대한 관점. 인간이 자기를 포함한 세계나 그 속의 사상(事象)에 대하여 가지는 평가의 근본적 태도이다.

Q. 가치관이 머예요?

A. 가치관이란 쉽게 설명하면 사물이나 생각을 어떤 견해로 판단하느냐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볼때 그 사람이 가진 재산, 학력, 능력, 그사람의 진실성 등에서 어느것을 가장 중요하게 보느냐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 사실 나는 되도록이면 가치 평가를 안해야 한다고 배우고 들으며 살고 있었다.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가진 것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그것도 가치관이지. 가치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어제 '불안'을 드디어 끝내고 오늘부터는 고미숙씨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읽으려 한다. 이 분은 가치관이 확실하신 분이다.

자기 세계가 분명하다는 의미로 이 말을 내가 쓰고 있는 것 같다. 자기 주관이 매사에 너무도 분명하신 분 같다. 그러고 보니, 나는 자기 주관, 자기 주장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 아저씨가 '가치관'이란 말을 썼나?

이제 베껴쓰기 들어간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1960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어문학부에 입학하여 독일문학을 전공하였으나, 대학교 4학년 때 김흥규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고전문학에 매료되어 한국 고전문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후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 진학하여 마르크스를 공부하면서 역사와 실천, 삶과 혁명, 혁명과 구도 등 인생을 걸 만한 문제들과 대면하게 된다. 19세기 예술사로 논문을 써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잠시 비평활동을 한 적이 있다. 이 때 『비평기계』라는 비평집을 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수유리 강북구청 옆 조그만 사무실을 열어 '수유연구실'이라는 세미나를 조직했다. 처음은 고미숙과 권보드래가 주도한 '계몽기 신문세미나'로 출발했고, 고병권, 이진경 등이 참여해 니체에 관한 강의를 듣고 푸코의 『말과 사물』을 집중 강독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더 많은 친구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강원도 정선 산간부락 조동리 출신이다. 책머리, 목차, 프롤로그..첫 문장이 어디 하나 도발적이지 않은 데가 없다..

책머리에: 하나 - 나는 천재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90퍼센트의 실패를 겪은 뒤에야 10퍼센트의 성취를 이루는 둔재의 '콤플렉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대부분의 천재들이 지닌 원초적 '싸늘함이 체질에 안맞기 때문이다(참고로, 나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이념보다 체질을 중시한다. 체질 분석이 종종 틀린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목차 1장: 나는 너고, 너는 나다

프롤로그: 여행.편력.유목 -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길맹' 혹은 '공간치'라고 불릴 정도로 워낙 방향 감각이 없기도 하지만, 웬만큼 멋진 풍경이나 스펙타클한 기념비를 봐서는 도통 감동을 받지 않는 '쿨'한 성격 탓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공간 지각력이 제로에 가까운 편인데, 거기다 남한 최고의 오지인 강원도 정선군에 속한 산간부락인 '조동'리 출신이라 이국적 풍경에 대한 호기심이 별로 없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음, 호불호와 가치관이 아주 뚜렷하시군요.. 나는 ~~~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도발적인 선언으로 시작되는 글이 사실 전 아주 낯섭니다. 경상도 안동 도심 접경 농촌부락 미뚜리 출신의 제가 열심히 읽어 보겠습니다. ㅋㅋ

프롤로그 여행.편력.유목

어린 시절 내게 여행이란 늘 기차를 타고 도시를 향해 가는 것이었을 뿐, 이국적 풍경을 찾아 떠난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사계절 변화무쌍한 풍광을 즐길 수 있는데, 대체 무엇이 아쉬워 또 다른 '풍경'을 찾아다닌단 말인가.  

.. 내가 여행에 대해 냉소적인 진짜 이유는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파노라마식 관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파노라마란 무엇인가? 차장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의 퍼레이드다. 거기에는 그 공간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얼굴과 액션이 지워져 있다. 또, 그때 풍경은 자연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생명의 거친 호흡과 약동이 생략된 '침묵의 소묘'일 따름이다. 이런 구도에선 오직 주체의 나른한 시선만이 특권적 지위를 확보한다. 시선이 '클로즈 업'되는 순간, 대상은 전적으로 거기에 종속될 뿐.

도시인들이 보는 전원, 동양인의 눈에 비친 서구, 서구가 발견한 동양. 사실 이런건 모두 외부자가 낯선 땅을 '흘깃' 바라보고서 자신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상 아니던가. 그 허상이 막강한 힘을 확보해 한 시대와 사회를 '주름잡는' 표상이 되면 모두 그것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 다음엔 그것을 대상에 위압적으로 덧씌우는 식의 악순환을 얼마나 반복했던지. p14

이 옹골찬 주체성. 나는 버스나 기차여행을 좋아한다. 고양이의 나른한 시선으로 창 밖을 수동적으로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지나가는 창밖은 희미한 이미지들의 나열이다. 진짜 지켜보는 건 내 마음의 흐름이다. 스치는 배경 중에서 마음에 파고드는 한 조각 인상이나 상념을 곱씹는다. 깊이 있게, 세밀하게, 참여해서 보지 않고 스치듯 나른하게 반쯤 감긴 눈으로 보려는 내 게으른 천성 때문이다.

고미숙은 이와 정반대이다. 참여하지 않고, 제대로 마주 보지 않고, 손 잡지 않기 때문에 파노라마 풍경, 파노라마식 관계가 펼치지는 여행이 싫다고 한다. 이 분의 기질과 고집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다. 나에게는 이런 기질이 도발적으로 느껴진다. 나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살짝 거부감이 든다. 그러면서도 부럽다. 그리고 존경스럽다. 이런 참여성, 적극성이 있기에 삶에 저토록 자발적으로 뛰어든 것이겠지. 방관자적 태도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삶의 방관자인가? 그렇다는 생각도 든다. 뛰어드는 삶보다는 지켜보는 삶 쪽이었으니.

'허상이 막강한 힘을 확보해 한 시대와 사회를 주름잡는 표상이 되면 모두 그것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 이 대목은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사회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이다 라는 '불안'에서 읽은 마르크스의 말을 연상시킨다. 서양 중심,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권 문화 요소들이 우리 사회에 일종의 허상으로 사회를 주름잡는 표상이 되었다는 말로도 이해된다. 어륀쥐 발음 사건처럼 영어와 서구적 담론이 지배하는 세상. 그 지배적 담론에 덕을 보며 밥벌이를 하는 나같은 사람은 이 분에게 또 하나의 허깨비로 보일 수도 있겠다. 주체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사람이 소위 '파노라마식 여행'을 하며 허상을 듣고 보고 말하고 써서 우리 사회에 뿌린 허상의 바이러스가 너무 많다.. 뭐 이 대목을 이 정도로 이해한다.

새로운 신체적 체험과 삶의 낯선 경계 -- 고미숙님이 여행을 통해 기대하는 것.

양식.한식.간식이 뒤섞인 국적불명(혹은 international?)의 식사 ..

아, 인터내셔날이 국적불명으로 읽힐 수도 있구나. 글로벌, 인터내셔널 하면 뭔가 좋은 말, 미래로 향해있는 말, 나를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는 말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스웨덴어를 전공한 사람이니만큼 세계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동경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조동리 출신 고미숙 씨에 이르러 이 인터내셔날이란 말이 '국적불명'이 되어 버리니 좀 황당하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하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하고 외치는 꼬장 꼬장한 시골 할아버지를 보는 것도 같고, 아흔 아홉 명이 주체성 없이 헤매고 있을 때 '나를 따르라' 깃발을 내세우는 한 명의 전사를 보는 것도 같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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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차
2011.01.30 07:20:32 *.41.16.144

어젯밤은 갑자기 책(진보집권플랜)을 읽다 우울해져 잠들었다. 우리 사회의 여러 이슈가 거론된 가운데 반값 아파트 얘기가 나왔는데 계산해보니 현재 집이 반값이 되면 남는 건 대출금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일 좋은 건 당장이라도 집을 팔아 빚 없이 혹은 최소한의 빚으로 살 수 있는 지역으로 이사를 가는 것인데 아이들 교육 문제와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마저 쉽지가 않다.

정말 막차 탄 하우스 푸어의 전형이다. 나 개인으로 봐서는 물론 아직 선택권이 있으니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책에서 거론된 대로 많은 중년 세대들이 이러한 경제적 불만 (혹은 불안) 상황으로 인해 정치는 진보, 경제는 보수가 되어 여러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경제 관념의 부족 혹은 사회적 열풍에 휩쓸려 선택한 것들이 취업, 자녀교육 등 여러가지 결정사항에 있어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내 현금 흐름을 생각해 볼 때 집을 팔고 현재 수입에 가장 적합한 집을 새로 사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집 값이 떨어질 것을 대비하여 내가 집을 판다는 건 나 다음에 집을 사는 사람이 나 대신 손해를 보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라고 바라는 것과 같다. 일괄적으로 집값이 반값이 된다면 집을 판 돈에 맞추어 새로 집을 살 때 그 집 가격도 떨어질 것이 분명하고, 집을 사자니 고공으로 치솟는 전월세가가 무섭기만 하다.  주식을 팔 때도 내가 팔고 나서 주식이 더 올라가야 건강한 것인데 내가 최고점에 팔고 나서 가격이 떨어질 걸 기대하는 건 고약한 짓이다. 장기적인 집 값 하락이 예상되고 반값아파트 얘기가 나오는 건 이래서 무서운 일이다. 내가 손해 보지 않겠다는 건 나 대신 누군가가, 우리 세대 아닌 다음 세대가 고스란히 모든 부담을 짊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런 심리로 무슨 매매 거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우울한 기분 떨치고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나 읽어보자. 어제부터 쓰게 된 글 상자가 마음에 들어 남발하게 된다. 

천안문과 자금성의 규모가 별볼일 없어서가 아니라, 그 엄청난 스케일이 평범하게 느껴질 만큼,나는 이미 영상이 실물을 압도하는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질적인 마주침과 신체적 변이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떤 화려한 여행도 타인에게 과시하기위한 '패션' 혹은 '레져' 이상이 되기 어렵다. 하나의 문턱을 넘는 체험이 되지 않는 여행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편력을 좋아한다...여행을 싫어하는 자의 편력이란? 여행이 주로 지리적 이동을 통해 낯선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면, 편력은 삶의 여정 속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에 부딪히는 것을 말한다. .. 돌연 발생하는 방향선회, 그것이 일으키는 수많은 분자적 마주침들, 편위란 이런 식으로 정의될 수 있을 터, 내가 '열하일기'를 만나기까지의 과정도 이런 우발적인 편위들을 통해서였다.

대학시절, 나름대로 독일 문학에 심취했던 내가 한국 고전문학을 택하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난생 처음 원전으로 읽은 고전들은 기묘한 울림으로 내 신체에 육박해 들어왔다.

전공 기초지식은 물론 한문에 대한 최소한의 소양도 없이 고전문학을 택한 나는 무식의 용맹함말고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당시 나는 돈도 없었고, 연애도 제대로 안 되는 한심한 청춘이었지만, 그런 건 정말 고민거리도 되지 않았다. 나를 사로잡은 건 오직 글쓰기에 대한 욕망뿐이었다. 멋진 글을 쓸 수 있다면, 파우스트처럼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으로 '뜨거운 한철'을 통과했다.

'변증법'과 '유물론'을 통해 그때까지 희뿌옇게 시야를 가리고 있던 삶과 사유의 추상성이 한방에 날아가 버렸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맑스의 수사학은 '환희' 그 자체였다. 그렇게 '프로페셔널'하고 전투적인 내용을 그토록 선정적(?)이고 생기발랄한 말들로 구성할 수 있다니! 석사논문을 쓴 이후 내 영혼을 장악하고 있었던 글쓰기에 대한 통념이 전반적으로 수정되는 순간이었다. 두번째 클리나멘.

루카치, 푸코와 들뢰즈/가타리, 이른바 68혁명 이후의 철학자들가 접속한 것이 그 즈음이었다. 세번째 클리나멘.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편력이 시작되었다. '탈근대' 혹은 '근대 외부'라는 새로운 화두를 들게 되면서 삶과 지식, 혁명과 일상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운명적인 해후!...(열하일기)에 담긴 것은 스쳐 지나가는 여행이 아니라, 이질적인 사유들이 충돌하는 장쾌한 편력이자 대장정이었다. 

유목은 단순한 편력이 아니다.그렇다고 유랑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면서 머무르는 것이고, 떠돌아다니면서 들러붙는 것이다. '지금 여기'와 온몸으로 겨감하지만, 결코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다.어디서든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세상 모두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세상 모든 것들을 낯설게 느끼는 것이다.

..전 세계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신비주의 스콜라철학자 빅톨 위고 - 친숙함과 낯섦의 끝없는 변주, 여행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바로 거기일 터..

박차와 고삐, 말모가지와 말대가리의 경계가 없는 인디언의 말달리기. 인디언과 말, 그리고 광야의 경계조차 사라진 '고요한질주'! 유목민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강렬한 '액션'의 흐름뿐이다. 그 흐름 속에서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아니, 한 시인의 말을 빌리면,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나도 이제 편력이 아니라 유목을 하고 싶다! 내 글쓰기도 유목적 지도가 되었으면! 삶과 지식의 경계가 사라져, 삶이 글이 되고 글이 삶이 되는 '노마드'가 되기를! 어느덧 내 욕망의 배치는 이렇게 바뀌고 말았다.

여행이 주지 못하고 편력이 준다고 하는 이질적인 마주침과 신체적 변이. '기묘한 울림으로 내 신체에 육박해 들어왔다'는 말이 작가가 말하는 신체적 변이를 설명한다. 내 열정을 바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뛰는 울림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고전문학이, 글쓰기가 그리고 다음에는 맋스주의가 작가의 '뜨거운 한철', '영혼을 장악' 했다는 것인데.. 두근거리지 않고, 뜨겁지 않고, 영혼을 장악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상대하기 싫다는 작가의 말을 읽으니 '희뿌옇게 시야를 가리고 있던 삶과 사유의 추상성'에 내가 아직도 갇혀 있다는 것이 내 문제가 아닐까..싶은 생각이 든다.

뜨겁게 산 작가의 글을 읽으면 항상 상대적으로 미적지근하게 산 내 삶으로 눈이 돌려지고 약간의 자괴감이 든다. 내 삶에도 분명 방향전환의 변위가 있었는데 그 변위는 기묘한 울림으로 인한 뜨거운 선택이 아닌 현실과의 타협에 기반한 것이었다. 대학 전공과는 무관하게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산업 분야로, 영업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 많은 사람들의 선택이 그러했으리라.

가슴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일 생각조차 않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실적 선택을 해버렸던 가련한 청춘들이다. 대학 졸업 무렵, 내가 만일 가슴의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당시 나는 편집학원을 다녔다. 샘터같은 잡지의 기자가 되고 싶었다. 취직이 아닌 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 있는 처지였다면 (취직 이외의 대안은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스웨덴유학을 생각했을까? 대학에 들어갈 때 북구문학을 전공하고 싶어했지만 일년의 스웨덴 연수를 거친 후 전공과는 무관한 취업만을 준비하는 스웨덴어과 풍토에 젖어 더이상 스웨덴 문학을 전공하든가 다시 스웨덴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스웨덴에서 이민자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스웨덴에 대한 환상이 식은 것 때문일 수도 있다.

편집학원을 다닌 후 졸업 전 2개월과 졸업 후 4개월 쯤에 걸쳐 '수입경영'이라는 잡지사에 6개월간 다녔다. 월급 못 받고, 밤 늦도록 일하고, 때론 밤 세우던 6개월이었다. 청년창업한 사장님과 사장님의 동생, 친구들, 후배들로 이루어진 직장을 더이상 못다니겠다고 그만 둔 이후 잡지도 곧 문을 닫았다. 그 후 작은 개인 변호사 사무실 비서로 2년여를 조용하게 보낸 후 스웨덴계 회사 마케팅부로 옮기고 이후 외국업체의 국내 진출과 수입통상을 지원해주는 외국계 기관에서 오래 일하게 된 걸 보면 '수입경영'이 이후 내 직장생활의 키워드가 된 출발점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 이 나이에 왜 갑자기 글쓰기를 통한 삶의 혁명일까? 삶에서 성취로 남을 만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삶을 통틀어 가장 가치있게 생각되던 무언가를 내 삶에 다시 불러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할테고. 아직은 글을 통한 소통 보다는 나자신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다. 짧게 읽고 길게 쓰는구나..이러면 진도가 안나가는데.

'클리나멘', 돌연 발생하는 방향선회를 뜻한다고 하는데 작가는 삶의 갑작스런 전환을 가능케하는 요소들로 쓰고 있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성곽과 봉수대에 꽂혀 30여년을 보내며 책을 열권이나 펴낸 분이나 한국의 산에 반해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책을 쓴 후 다음 작업으로 옛 봉수대 탐험을 하겠다고 하는 외국분의 사례를 볼 때 그렇게 꽂히는 무언가에 온 삶을 얹을 때 유목적 삶으로의 변환이 이루어지는 것일게다.

아직은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아니라 고미숙 작가를 읽고 있다. 고미숙을 통해 열하일기를 읽을지 고미숙을 읽고 말지 그건 모르겠다. 1장 "나는 너고 너는 나다"가 곧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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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차
2011.01.31 07:07:20 *.41.16.144

오늘은 그믐밤 같다. 어제 봤던 초승달이 오늘은 흔적도 없다. 날이 흐려서 그런가?

달이 차고 빠지다 사라지고, 꽃봉우리가 부풀다 피어 사그라지고, 산을 올라갔다 내려가고..

조국 교수가 정동영 의원에 대해 서울을 버리고 전라도 고향 선거구에서 쉽게 당선된 것에 대해  '무관을 견딜 수 없어 했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논평한 부분을 읽었다. 욕망이 이리 저리 갈래로 많고 여러 갈래로 뻗힌 욕망의 영역 하나 하나 마음을 쉽게 비우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뜨끔한 말이다. 욕망을 다 비우는 것이 아니라 한 부분에 집중하여 돋보기로 불꽃을 한번 피워보자는 것인데, 그러자면 소소한 마음 비우는 것이 우선인가 보다.

오늘은 1장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불평지기와 고독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이 빛나는 명랑성!

스스로 질병이라 여길 정도의 이 '투명한 열정'이 그의 삶을 계속 주류의 사이클로부터 벗어나게 했으리라. 하지만 그로 하여금 인식과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도록 추동한 힘 역시 바로 그 투명한 열정의 소산일 터, 이 또한 생의 역설이라면 역설인 셈이다.

가난하지만 언제든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는 계보에 속하는 인물과 비록 권력의 중심부에 있다 해도 평생 출신의 멍에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인물 사이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천양의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원인이 뭐든 중요한 건 청년 연암의 내부에 참을 수 없는 동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입신양명이라는 '홈 패인 공간'과의 격렬한 마찰음이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듯 질병은 다른 삶을 살라는, 문턱을 넘으라는 몸의 신호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치료의 방편으로 삼은 건 그렇다 치고 글의 소재들이 주로 시정의 풍문, 그것도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야담들이라는건 정말 희한하기 짝이 없다. 성인들의 말씀이나 현자의 지혜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시정에 떠도는 '개그'를 통해 마음을 수양하다니. 이런 발상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말하자면 연암은 흔히 떠올리듯, 원대한 뜻을 품었으나 제도권으로부터 축출당한 '불운한 천재'가 아니라, 체제의 내부로 끌어들이려는 국가장치로부터 끊임없이 '클리나멘'을 그으며 미끄러져 간 '유쾌한 분열자'였던 것.

그가 말하는 바 '우도(우정의 길)'란 초월적 원리에 종속된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생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자 '나'의 경계를 넘어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변이되는 능력의 다른 이름이다.

슬픔의 밑바닥을 본 자만이 유쾌하게 비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빛나는 명랑성과 깊은 애상은 상통하는 법, 니체의 아포리즘을 빌리면 '산정과 심연은 하나이다'

연암의 일생에 대한 소개글인 이 일장을 다 읽고난 소감은 상당히 슬프다. 연암의 기질과 성격이 자세히 그려지고 그의 삶의 족적에 따라 만난 사람들, 느낀 것들, 글로 남긴 것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연암은 당시의 제도권 삶이 요구하는 것들을 자발적으로 벗어 살아나간 이탈자다. 고미숙 선생님은 연암의 태양인의 기질, 우정과 연대의 삶, 이탈자로 사는 고난과 노고에 커다란 동질감과 연민을 함께 느끼고 있는 듯도 하다. 성격이 운명이다고 하는 말대로 남다른 기질과 자유의 추구로 인해 남다른 삶을 산 사람이다. 작가의 애정으로 인해 연암 박지원에 대한 생생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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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차
2011.02.01 19:25:35 *.154.29.110
거실에서 사용하는 노트북이 고장났다. 방에 있는 데스크탑 컴퓨터로 출첵했지만 남편이 자고 있는지라 불을 켤수가 없어 망설이다 출첵만 하고 잠들어 버렸다. 몸도 많이 뻐근해서 그 핑계와 함께.

오늘은 첫 출근날. 많이 불안해했던 지난 며칠간과는 달리 어제밤부터 무척 마음이 평온했고 오늘 종일 별 긴장없이 편안한 하루를 보내었다.  오늘 같이 근무할 직장 사람들을 만나고 회의를 하고 일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다. 일과 새벽활동, 그리고 삶 전반에 조화를 이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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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차
2011.02.02 06:37:16 *.41.16.144
고장난 노트북모니터를 대신해 남편이 커다란 모니터를 노트북에 연결해 주었다.  

배치에 따라 유동하고 변화하는 차이

어차피 '내가 누구인가는 타자의 호명 속에서 규정되는' 법. 쏘가리도 되었다 새우도 되었다 가오리도 되었다 좀도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원래 추종세력이 원조보다 한술 더 뜨는 법.주자학의 본향인 중국보다 조선의 선비들이 더 과격한 주자주의 혹은 중화문명의 수호자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전도가 일어난 것이다.

요컨대 북벌은 단지 명분으로만, 이데올로기로만 지탱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망상일수록 더더욱 견고해지는 것이 도그마들의 숙명이다. 연암은 그 숙명적 공허함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것이다.

한 시대가 갇혀있는 패러다임을 벗어나 사고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는 글이다. 작가가 보기에 연암 박지원은 중화주의, 고결한 유교주의, 신분주의로 경직된 조선사회의 패러다임 바깥에서 사고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마음이 깨어있지 않아서인지 작가가 감탄하고 포복절도하는 것처럼 연암의 글에 감탄이 되지는 않는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만큼 사랑한다고 한 말처럼, 내게는 비교대상이 없어서 그런지도. 다른 조선 사대부들이 얼마나 갇힌 사고를 했는지 실감이 안되기에 연암의 유머와 열린 사고에 작가만큼 감탄을 덜하는 것일지도.. 무언가를 배타하고 거부할 때 우선 자신을 의심해봐야 하는 것일까? 박지원은 오랑캐라는 명목으로 청을 극도로 배타시하고 무시하는 조선 사대부들의 상복에 같은 흰색 의복과 상투머리, 넓은 소매에 갇힌 위선을 비판하고 민족적 의분에 갇힌 북벌론를 비판한다. 이 시대가 꼭 붙들고 있는 패러다임은 뭘까? 당시로는 너무도 확실했지만 미래에서 보면 망상에 가깝게 여겨질 닫힌 의식들은?

5장: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을 아껴 여룡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 또한 여의주를 가지고 스스로 뽐내고 교만하여 저 말똥을 비웃지않는다. - 이덕무의 선귤당농소 - 요점은 척도를 고정시키지 말라는 것. 진리 혹은 가치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놓이는 자리, 곧 배치에 따라 달라지는 까닭이다.

 

세계를 주재하는 외부적 실체란 없다. 무상하게 변화해 가는 생의 흐름만이 있을 뿐! 그런데도 사람들은 백로를 보고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보고서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만물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차이들, 거기에 눈감은 채한가지 고정된 형상으로 가두려는 모든 시도는 헛되다.

 

초월적인 중심을 전복하고 현실의 변화무쌍한 표면을 주시할 때 진리 혹은 선악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만약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만 본다면 허무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의 무화라는 벡터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변화하는 흐름을 예의주시하면서 때에 맞게 새로운 가치들을 생성시켜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편이 바로 '사이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자기가 혼자 아는 것은 언제나 남이 알아주지 않아 걱정이고,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은 남이 먼저 앎을 미워한다. ..사이의 은유들을 통해 그가 의도하는 바는 어떤 해결책이나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계속 물음을 구성해내라는 것, 어떤 대상이든 입체적으로, 다층적으로 사유하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이면에 숨겨진 성격을 보려 하고, 그것을 인접한 것들과의 관게에서 파악하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길은 하나가 아니다. 방향도, 목적도 없이 뻗어나가면서 무수한 차이들이 생성되는, 말하자면 '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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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차
2011.02.03 07:05:15 *.154.29.110

설날 아침이다. 어린 시절 설날 전에 대청소를 하곤 했었다. 툇마루 밑이나 구석진 곳에 오래도록 쌓여있던 먼지나 안쓰던 물건을 치우고 목욕을 했다. 가마솥에 물을 데워 씻던 어린 시절 겨울철엔 방에 큰 통을 들여놓고 여러번 물을 날라야 했기에 설날을 맞아 하는 묵은 목욕도 설날맞이 큰 행사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설날 아침, 고향에 오신 두 삼촌네 식구들로 방마다 사람들이 그득하곤 했다. 명절 때마다 잠 잘 자리를 찾으며 사람 많지 않은 조용한 집으로 시집갔으면 했는데 과연 소원대로 설날 오후에 잠시 큰아버님댁에 다녀오면 그만인 일가 친척 많지않은 집으로 시집을 왔다. 따지고 보면 원하는 것들이 어떤 형태로든 다 이루어진다. 우리 딸 둘은 지금 일곱살, 여섯살 어린 사촌동생들과 한 방에서 잠들어 있다. 사촌들이 집에 오는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걸 보면 우리 아이들은 나와 다르게 설날은 반가운 친척들이 오는 즐거운 날로 기억할 것 같다.

어제 저녁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를 읽었다. 줄친 부분을 조용한 새벽에 다시 한번 반추해본다.

-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듣는 데서 출발한다.

- 소명은 내가 들어야 할 내면의 부름의 소리이다.

- 나는 누구인가? 내가 타고난 본성은 무엇인가? 세상 만물은 나름의 본성이 있다. 누구에게나 능력은 물론 한계도 있다.

- 우리의 가장 깊은 소명은 그것이 우리가 '되고자 하는' 어떤 이미지가 맞든 안맞든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향해 성장하는 것이다.

- 뉴크너의 정의는 소명이란 자아에서 시작하여 세상의 요구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내 타고난 본성, 혹은 어린 시절 형성된 본성과 그에 따른 능력과 한계를 생각해본다. 생각한다는 것이 귀를 기울인다는 것의 첫 발걸음이기를 빈다.

1. 어린 시절 설날의 추억이 상기시키 듯, 내게는 혼자만의 방을 가지려는 욕구가 강하다.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회식이나 큰 모임에 대한 부담감과 거부감이 크고 내향성이 여전히 강하다. 한사람 한사람 직원들과 밥을 먹는 건 편한데 전체가 함께 모이는 회사 회식 자리는 부담스럽고 싫었다. 대중에 하나로 묻히는 그 느낌이 싫은 모양이다. 일대일의 만남은 상대방의 눈동자에 오롯이 한 점으로 집중되고 서로의 전 존재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기에 좋아하는 모양이다. 나자신의 본 모습과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모습에 대한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더 커서 일대일로 사람들을 만나서 짓는 웃음도 위선적으로 느껴져 머리가 아프곤 했다. 내향성이 절대적으로 강한 타고난 성향이 사회생활을 하며 외향성을 키워온 타입이다. '자기 혼자만의 방'에 대한 욕구는 일정 시간 혼자 있으면서 내면에서 얻는 힘이 있어야 세상을 상대할 용기가 생긴다는 의미이다. 사회생활을 하며 매일 사람들을 대하려면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매일 힘을 키워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새벽시간 오롯한 나만의 시간은 결국 내 혼자만의 방, 나의 성소이다. 새벽활동을 해야 하루가 당당해지고 사람들을 만나며 일을 해나갈 힘이 생기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휴가기간이나 주말에는 새벽활동을 안 해도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모양이다. 새벽을 '내면의 힘을 키워나갈 물 긷는 시간'정도로 이해하나 보다.

그랬으니, 일정한 자기 자리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전화 내용이 온 사무실에 들리는 업무 공간에서 내가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 이해된다. 무슨 이유로든 나는 일단 나 자신을 가려줄 보호막이 필요했다. 사람들과 항상 마주 대하고 있지 않아도 되는 독립된 혼자만의 내 사무실이 있다는 것이 좋다.

2. 내게는 주목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내 경우는 드러내놓고 표시하지 않는 좀더 은밀한 내적 욕구이다. 은밀한 것이니만큼 병적으로 강할 수도 있다. 초등학교 1, 2학년 무렵인가? 동네 마을회관에서 '동그랑 한푼, 동그랑 두푼, 벙어리 저금통이 어휴 무거워'하는 동요를 불러 크게 박수를 받은 기억이 있다. 왜 노래를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뭏튼 그것은 주목받는 것에 대한 최초의 짜릿한 기억이고 승리의 느낌이었다. 혼자만의 방이 필요한 내향성과는 별도로 주목받고자 하는 욕구 또한 내게 아주 강하게 내재되어 있다.

3. 논리적이고 계획적인 좌뇌적 이성적 사고가 부족한 반면 감정적이고 통째로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우뇌적 사고를 하는 편이다. 그래서 논리적인 것, 수학적인 것, 기계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고2때 수학선생님은 죽일 정도로 미웠다. 사고 체계가 논리적이지 못해 두리뭉실 비약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4. 나는 사람들을 동기유발시키고 이끄는 리더십 보다는 구성원으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에 익숙하다. 고 2때 학급 반장을 처음으로 해봤었는데 나나 반아이들이나 아주 괴로운 시간이었다. 리더가 되어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욕구는 많지 않다. 주목받고자 하는 욕구와 상충되는가? 그럴 수도. 하지만 솔직한 의견으론 내게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카리스마가 없다.

5. 타인들의 특히 상사들의 인정에 한없이 약하다. 어렸을 때부터 남들의 인정을 갈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라들이 나의 가치를 결정하도록 언제까지 내버려둘 것인가? 내 보물상자를 잠군 자물쇠를 열 황금열쇠를 남들에게 더이상 맡겨놓지 말아야 겠다. 내 보물 상자의 열쇠는 내 손에! 잊지말고 되뇌어야할 말이다.

- 더 이상 내면에 깊이 간직한 진실과 상반되는 외면의 상식을 가장하여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 참자아를 주장하다가 받는 처벌이 아무리 호되다 해도, 참자아를 주장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내리는 처벌보다는 견디기 쉽다

- 어떤 여정은 곧은 직선으로 뻗어있고 어떤 여정은 빙빙 에우르는 길이다. 어떤 여행은 영웅적이고 어떤 여행은 두려움과 혼란 투성이이다.

- 한계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가지는 자아에서 오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사람들이나 정치적인 세력이 우리를 현재 상황에 눌러 앉히기 위해 무모하게 부과하는 것이다.

- 아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신문에 내 사진과 함께 그 밑에 '학장'이라는 글자가 실리는 것 같습니다.

- 능력과 한계를 지닌 우리 본성의 실체에 맞추어 살려는 노력이야말로 매우 도덕적인 삶의 방식이다.

- 길이 닫히는 것에서 어떤 안내를 얻지 못하고 계속 저항한다면 내 본성에 있는 한계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내가 타고난 재능을 무시하는 것이며 참 자아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 인생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반대의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하며, 한계와 능력 사이의 창조적 긴장 속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제 민주노동당 이숙정 의원 난동사건이라고 명명된 사건을 보고 이숙정 의원의 심리상태를 생각해보았다. 오마이뉴스 기자와 얘기를 나누며 지역 정치권에서 자신을 너무 무시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아 자신도 힘들었다고, 그래서 지금 그만 둬도 미련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하는 주민센터 직원에게 찾아와 행패를 부린 것은 억눌린 스트레스의 폭발이란 말인가. 내가 시의회 의원이고 이만한 사람인데 이만한 존중을 받아야 하는데 왜 날 알아주지 않고 무시하는 건데? 라고 세상에 외치고 싶었던 것인가.

자기의 권력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강하게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숙정 의원은 신문에 자신의 사진과 함께 그 밑에 '시의원'이라는 글자가 실린 순간을 가장 좋아했을 것이다. 나또한 타이틀을 위해 살고 있지 않은가 나자신을 돌아 본다. 내 내적인 본성과 그 한계에 맞지 않는 어느 타이틀을 쓰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헛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작년에 직장을 그만 두며 내 한계에 직면했다. 때마침 문이 닫히는 조짐을 느꼈고 내게 맞지 않던 많은 것을 떠나 여전히 내게 맞는 자리 하나를 찾으려 분투 중이다. 새로 옮긴 직장도 그리고 지금 이 글쓰기도 여전히 분투 중이라는 표시이다.

- 다른 사람의 고독의 가장자리에서 존경과 믿음을 갖고 서있음으로써 우리는 신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다

- 우울증은 나를 안전한 땅, 한계와 재능, 약점과 강점, 어둠과 빛이 복잡하게 뒤섞여있는 나의 진실, 나의 본성의 땅 위로 내려서게 하는 친구의 손이었다.

-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불안을 느낄 때면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방편의 하나로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빼앗는 환경을 만들어낸다.

-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것인가?'와 같은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의 주위를 나선형으로 돌면서 따라 내려간다.

- 겨울 속으로 뛰어들어가지 않으면 겨울 때문에 미쳐 버린다.

자기 정체성과 존재가치에 대한 불안, 인생의 혼돈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작년 이맘 때 잠들지 못하고 깨어있던 많은 밤에 나를 괴롭히던 것들이다. 절벽에 매달려 가지 끝에서 떨어지는 꿀방울에 정신이 팔려있다는 비유대로 내 삶이 대롱 대롱,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듯 위기감을 느꼈다. 하나의 문이 닫힐 조짐이었다. 내 스스로 문을 닫고 나왔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선택한 시련은 시련이 아니다'라는 말을 읊조리곤 했다. 어쨌든 문이 닫힌 건 문이 닫힌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불안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빼앗아 자아의식을 강화시킨다는 말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만나보기도 했다.

가을, 겨울, 봄, 여름의 비유를 들어 인생을 설명하는 것은 삶의 오르내림과 환희와 좌절을 맛본 사람으로서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나는 나선형의 계단을 돌며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나선형의 계단은 위가 아니라 아래를 향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내부로 향한 어둠의 길을 통과해야 안전한 본성의 땅 위에 내려설 수 있다고.. 그 길 어디쯤을 걷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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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차
2011.02.06 05:00:38 *.41.16.144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을 읽었다. 김연수의 사진은 언젠가 만났던 누군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누군지 이름도 얼굴도 기억에 제대로 남아있지 않지만 그렇게 생긴 사람을 오래전 만났었던 것만 같다.

1970년생. 김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김천에서 자랐고 성균관대 영문과로 진학하며 서울로 올라왔다. 이런 삶의 이력이 이 사람을 어딘가 학교 다니며 마주쳤던 사람 정도로 여겨지게 만드나 보다. 작가의 나이 서른 다섯, 이미 문학상을 여러번 받은 이름난 소설가가 되어 있는 작가가 자신의 10대와 20대를 회상한다. 회상의 내용들 또한 내 청춘 어느 한 자락을 스쳐간 그런 심상한 얘기들이다. 극적인 그 무엇도, 절대적인 그 무엇도 없다.

대학 재학 때 시인으로, 소설가로 등단한 걸 보면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대한 뜻이 있었을까? 소년과 청년 시절에는 팝송 음악에 심취했던 것으로 나오는데 과거를 회상하는 글 사이 사이에 음악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과연 그러한 듯 하다. 대중음악평론가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질투심이 난다. 이 사람이 음악을 듣고, 혼자 여행을 가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던 같은 시간에 난 무얼 하고 있었지? 회사 다니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글들을 읽으며 에너지를 소진시켜 버렸다. 뜻을 분명히 세우지 않았고, 작가의 세계를 곁눈질 하다 높은 벽을 스스로 쌓아 버렸던 것, 타협하고, 수긍하고, 생활인으로 스스로를 가둬버린 것이 원인일까?

아래는 2008년 7월 호주에 가기 전, 블로그를 시작하며 써내려간 글이다.

돌아가든, 질러가든 버티고 가라
삶의 길목 하나 하나에 의미가 있나니,
골목 끝 막아서는 벽이 보이면 돌아서고

돌다, 돌다 또 다시 맞닥뜨린 저 돌벽
저 벽 너머에 무엇이 있나
저 벽 넘지 않으면 우물 안 개구리 신세

뛰어 넘기엔 너무 높고
뚫고 가기엔 너무 단단한
저 붉은 돌벽 자세히 보니

살지 않고 곁눈질한 수많은 날들
서성이다 돌아선 무거운 발걸음
넘지않고 재보았던 눈길 켜켜이 쌓여

이제 내 의지로 벽에게 이르노니
'벽이여, 이제 내게 길을 열어라.'

 2008년 7월 7일

'자기로 향하는 모든 길은 나선형으로 아래로 향해 있다'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옛 사람과 요즘 사람의 마음이 스며든 글귀 한 구절에 눈길이 오래 머물어 시공을 연결한 공감을 느끼는 것, 그것이 앞으로 쭉, 글을 읽으며 내가 소망하는 세계이다.

어젯밤 늦도록 설날특선영화를 보는 바람에 새벽에 눈을 뜨긴 했지만 곧 포기하고 잠들어 버렸다. '좋은 자기 이미지 갖기',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약간의 자괴감이 들자 이걸 위해 새벽활동을 하는게 아닌가 잠시 의심. 그렇기도 하고 좋은 시간 보내는 것 자체에 대한 열망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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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차
2011.02.06 05:38:43 *.41.16.144
어제밤 늦도록 남편과 함께 TV에서 방영되는 영화 '시'를 보았다. 일전 영화관에서 언니와 보고 나서 두번째로 본 것이다. 

영화를 처음 보는 남편은 드러나는 현실이 괴롭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아, 이창동 감독, 영화 참 괴롭게 만드네,"를 연발하더니 다보고 나서  "왜 제목이 '시'인지 알겠어" 한다. "왜?" 했더니 "장미자 할머니가 사물들과 사람들에 민감하게 반응하잖아, 그리고 죽은 여자애의 삶에 감정 이입이 되고, 공감하고.. 시가 바로 주변의 모든 것과 공감하고 감정 이입되는 거잖아. 할머니 삶이 시였네." 하는 거였다.

아, TV를 끄고 눈을 감으며 나는 왜 '삶이 시'인지를 남편의 말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시란 그런 것이었나?  그렇게 자기 주변의 것들과 공감하고 이입하며 쓰는 것이 시인가? 그래서 삶 자체가 연민과 공감으로 주변과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 시를 쓰는 삶이었나?

처음 영화를 볼 때도 인상적이었던 등장인물 박경사가 어젯밤 보기에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시 낭송회에서 시를 읊은 후 (두번 째 읊은 시는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였다) 음담패설을 연이어서 하던 사람, 시는 아름답고 순수한 것인데 왜 음담패설로 시를 모독하냐는 장미자 할머니의 말을 전해듣고 '미안합니다, 누님'하고 계면쩍은 얼굴로 웃던 남자, 알고보면 경찰 내부 비리 고발로 지방으로 좌천된 '순수한' 사람이라고 했다. 시낭송회 회식 자리에서 나와 화단근처에서 울고 있는 장미자 할머니에게 '시를 못써서 우시는 거예요?' 하며 옆에 쭈그리고 앉던 남자. 동행한 경찰이 손자를 연행해가자 그 남자가 배드민턴 채를 대신 잡고 장미자 할머니에게 공을 패스하도록 고개짓한다. 그리고 둘은 한참 동안 말 없이 배드민턴을 친다.

남편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남자 박경사도 자기의 시를 쓰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과 사물의 기쁨과 슬픔에 반응할 수 있는 가슴이 있다면 시를 쓰고 있는 사람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고결하고 아름다운 감정을 읊는 것과 음담패설을 하는 것을 하나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시'라고 말하는 듯도 했다.

6.25를 겪고난 후 어느 작가가 쓴 글 중에 '나무에서 떨어지는 벌레의 아픔 마저도 생생했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한 때 정말 주변의 슬픔과 아픔에 이입이 된 듯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내 속의 아픔과 바깥의 아픔이 하나로 이어져 흐르는 듯한 느낌. 그럴 때 시를 쓰고 있는 것인가 보다.

시를 쓰지 못한다는 건 자연과 사람들에게서 단절되어 있고, 공감하지 못하고,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 속에서 쥐어짜 내는 생각과 감정의 찌꺼기가 시는 아니지..시 쓰기가 왜 힘든지 이제 알겠다. 장미자 할머니가 읊는 아네스의 노래가 죽은 소녀 아네스가 읊는 노래가 되어 그녀가 마지막으로 돌아본 학교와 집과 마을을 거쳐 강물을 쳐다보며 끝을 맺는 것도 이해가 된다. 장미자 할머니가 죽은 아네스가 되었으니 그런 시가 나왔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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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차
2011.02.07 06:21:52 *.41.16.144
아, 컴퓨터 켜고 잠시 눈을 붙였는데 다시 눈을 뜨니 5시 10분이 넘어 있어 지각을 했다. ㅠㅠ
연휴 동안 늦게 잠들던 버릇대로 어젯밤도 잠이 오지 않아 2시가 넘도록 잠을 자지 않았더니 이 모양이다.
시들었던 화초가 물을 먹고 쌩쌩해져 있다.

오늘은 출근 이틀 째, 새로운 곳의 시스템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이 인의 '청춘대학' 읽는 중.
고미숙 선생님의 키워드, 체화 & 우정네트워크

고미숙 편

먹을게 있고 만날 사람이 있고 뜻을 펼칠 공간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뭐든지 할 수가 있어요. 거기서 더 나아가서 세상에 사람 인연만 있으면 두려울 게 있습니까? 그 연으로 의식주 해결하고 자기 뜻을 펼칠 공간이 열리잖아요. 이걸 활성화시키면 제도나 법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도 지금보다 훨씬 풍요롭게 살 수 있어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절대 굶지 않아요. 가난한 사람들이 모이면 어떻게든 먹고삽니다. 그런데 어설픈 부자들이 굶어요. 돈 있어요 굶게 돼요. 근본적으로 생각한다는 건 이렇게 일상의 주변 자체를 뒤집어엎는 거를 말해요. - 42

결국, 제어할 수 없는 환상이 재앙을 불러왔다면, 앞으로는 무엇을 읽고 공부해야 하는가? 질문을 던져봐야죠. 욕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읽어야 해요. 그건 곧 인간을 이해하는 거고, 이 세상을 이해하는 거죠. 인간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시공간, 봄, 여름, 가을, 겨울, 풍한서습이라는 대기의 흐름 속에서, 사회 조건 안에서 욕망을 구성하거든요. 이를 알아간다면 자기 존재에 대한 질문이 풀릴 거예요. 내가 왜 이렇게 망동하지? 내가 왜 이런 것들을 보면 참지 못하지? 이것이 내 신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것을 알기 위한 과정이 통찰이에요. 이게 안 되면 자기 안에서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타자를 자기 안에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인간이 타자와 소통하지 못하면 성숙할 수 없지요. - 48, 49

부처님 설법이 온 우주를 포괄하지만 내용은 한마디로 '내 몸을 관찰해라'입니다. 몸 어디가 아픈지, 기운이 어디로 가는지, 왜 404가지 병을 앓게 되는지, 번뇌가 왜 108번뇌인지, 봐라 이거거든요. 예수님 말씀, 공자님 말씀도 모두 마찬가지예요. - 50

신자유주의 자본은 맹목적 증식을 위해서 국경, 민족, 오프라인, 온라인, 성별, 모든 경계를 깨면서 상품을 만들었거든요. 우리도 그 조건을 역이용해서 우리를 붙잡고 있던 규범과 코드 경계들을 진짜 삶으로 격파하는 거지요. 모든 존재는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는 자기 존재와 몸, 자기 인생에 대한 탐구다, 이걸 통해 세상 전체와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 벌려고 여기저기 다닐 게 아니라 어떤 낯선 타자와도 바로 그 자리에서 삶에 대해서 실험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타자 속에 자기와 함께하는 동료들을 보고 세대적 일치를 이뤄야 해요. - 51

자신의 무의식 속에 엄청난 차별들이 있어요. 사랑에 대한 고정관념도 엄청 많아요. 사회에서 진보를 외치며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도 자기 안에 일어나는 사랑과 성에 관해서는 엄청난 차별을 갖고 있잖아요. 이것하고도 싸워야 하죠. 그러면 앎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 위치에 도달하는 거죠. 그것이 구도요, 수행이요, 공부의 끝이라 시작이라 생각해요. - 52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곧 공부니까요... 근데 내 몸과 영혼의 주인은 바로 나예요. 나 자신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하지요. 공부는 지식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내 존재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길이에요. 여기는 외부가 없어요. 어디까지는 내가 하고 나머지는 스님과 목사님 몫이 아니에요. - 52

공부할 게 너무 많아요. 공부를 하면 세상이 열리고 내가 모르는 것이 확 열려요. 공부를 해서 뭘 아는 게 아니고, '이걸 몰랐구나'를 알아요. 무지해서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공부할 게 많아서 너무 행복한 거예요. 저는 <열하일기>를 통해서 글쓰기와 여행, 삶이 일치하는 길이 있다는 걸 알고 굉장히 놀랐어요. 그 이후에 <동의보감>과 의역학을 배우면서 몸과 우주가 직통한다는 걸 알게 되었죠. 공부는 다음 생애까지 해도 끝이 없어요. 그걸 생각하면 정말 부자가 된 것 같아요.

어제 <임꺽정> 강의를 했는데 임꺽정 인물들의 삶을 보니까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너무나 많아요. 비정규직 얘기, 우정의 네트워크, 야생 기질.., 연애도 너무나 야성적이고 여성들 목소리도 아주 세요. 우리가 조선을 그런 식으로 배우지 않았잖아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에요. - 55

자기 친구들의 자식이 불행을 겪는데 가만히 있으면 친구란 도대체 뭐예요? 왜 이렇게 꽉꽉 막혔을까요? 물질적 풍요를 더 누리고 더 거머쥐어야 한다는 걸 버려야 해요. 인간은 살아 있으면 재화 활동을 하게 되어 있어요. 간접 노동이나 재화 활동을 어떻게 순환시킬 건지, 순환의 방식을 바꾸도록 상상력을 써야 돼요.. -58

가난해서 불행한 게 아니고 나를 경제만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불행한 겁니다. 저는 이걸 순환시키는 수많은 실험들을 해보고 싶고 그게 이뤄지길 바라죠..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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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차
2011.02.08 05:25:40 *.41.16.144
30일차 새벽이다. 윤정님의 대문글을 읽고 보니 중간점검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벽활동을 두가지로 나누지 말라는 충고대로 역시 두가지를 하겠다고 하는것이 무리였나 보다.
출석실패가 7일, 어제 지각까지 합치면 8일이다. 초반의 여행도 있었고 무조건적인 출석에 목매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결과로 느슨한 출석을 하고 있다. 

5시 ~6시 내면을 들여다보는 책읽기와 글쓰기로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브릿징 번역은 초반에 호세 부분에서 진도가 더이상 나가지 않고 있다. 내용에 일말 회의가 들기도 했고 책읽고 글쓰다 보니 더 좋아하고 더 편안한 것으로 부담없이 가자는 마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내면을 좀더 깊숙이 들여다 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학을 졸업하던 시점에 사회의 요구에 맞추어 어떻게 꿈을 포기했는지, 그 꿈이라는 것이 어떻게 체화되지 못하고, 빈약한 기반으로 허물어졌던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깊숙한 욕망을 이해하고 이러한 뼈대 위에서 탄탄한 꿈을 쌓고 싶다.

눈이 시큼시큼하고 잠이 부족해~를 마음은 외치고 있다. 한편, 새벽을 잘 보내야 하루가 든든해~하고 마음이 외치고 있기도 하다. 새로운 일,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마음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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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차
2011.02.09 20:54:38 *.41.16.144
어제 저녁 너무 마음을 많이 쓰고 새벽이 되어 잠이 들어서 출석만 하고 바로 다시 잠들어 버렸다. 새벽활동에 대한 목마름보다는 수면부족으로 퀭한 눈을 하고 하루를 보내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커 아침 늦도록 푹 잤다.

이인의 청춘대학을 다 읽었다. 어제 저녁 읽은 고은광순, 임지현, 서동은 파트들은 자존감에 대한 강조가 무척 많았다. 나이가 들수록 나역시 실감하는 건 자기 존중의 중요성이다. 비난과 거절에 쉽게 상처받지 않고, 상대방의 무관심에도 마음 상하지 않고, 부당함에 당당히 대응하고, 모든 상대방의 가치를 제대로 존중해줄 수 있는 바탕은 자기 존중감이다.

'삶은 고통과 쾌락의 연속이에요. 보통 고통을 피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경향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살아간다는 것은 병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거예요. 고통을 더불어 안고 살아내려고 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때론 힘겨운 일이 있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놓치지 않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거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았으면 해요.'

서동은 선생님의 말이다. 삶에서 평탄함과 행복 만을 바라고 있을 때 돌아오는 것은 실망과 좌절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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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일차
2011.02.10 06:00:29 *.41.16.144
반쯤 감겨있던 눈이 반짝 떠지던 시점이 있었다. 뭔가 마음의 변화가 그렇게 잠을 깨웠을 것인데 그게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잠보다 깨어있는 것이 더 좋게 만든 그것은 무엇? 요며칠간 줄곧 잠의 유혹에 넘어갔던지라 깨어있게 만드는 생각 한 모금이 커피 한 모금 마냥 필요하다.

1995년작 고 박완서 선생님의 에세이 '한길 사람 속'을 읽고 있다. 이때만 해도 이미 연세가 60세가 넘어 있던 때이다.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의식이 잘 벼려져 있었고 허투루 하는 말이 없는 속깊은 어른의 눈길이 있었다. 전쟁을 겪은 젊은 시절의 체험이 생활 곳곳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곳곳에 스며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붕 뜬 추상적 사유가 아닌 체화된 글쓰기란 이런 시각과 생활의 체험으로 작가 자신이 온전히 드러나는 글일 것이다. 곧잘 추상적 언어를 사용하는 나의 경우 생각으로는 이게 좋은데 하다가도 실제 생활에서는 무관심하게 지나치거나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자면 환경보호와 친환경적인 생활태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거품이 많이 일어 그릇을 뽀득뽀득하게 닦을 수 있도록 세제를 엄청 쓰며 설겆이를 하거나, 뜨거운 물이 몸에 닿는 촉감이 좋아 매일 아침 저녁으로 과도하게 오래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는 식이다.  생활과 생각이 다르다면 그건 체화된 내 생각이 아닐 것이다.

불교 관련, 명상 관련 글을 읽으면서 곧잘 사용하게된 추상적 언어들도 그 중 하나이다. 알아차림,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 우주의 은총, 이런 말들을 낯간지러워하지 않고 종종 쓰는데 내 일상의 마음상태는 충만감 보다는 주로 직장생활에서 비롯된 스트레스와 불안을 끊임없이 말소시키려는 시도에 집중되어 있다.

일전 김태원 신부의 '꼭 한번 살아보고 싶었던 삶'이라는 책을 읽고 추상적 사유가 전혀 없고, 실제적 만남이 없는 보통명사로서의 동식물이 아닌 이런 저런 사연으로 만나고 헤어지게 된 구체적인 고유 명사로서 아주 세세하고 구체적인 관찰을 통해 많은 동물 친구들과 식물들에 대해 적고 있어 놀란 기억이 있다.  그 차이는 세심한 오랜 관찰, 애정을 기울인 시선에 있었다. 애정을 가지고 오래 관찰하면, 즉 공감하면 체화된 글이 나오는 것이었다.

고미숙 선생님이 열하일기에서 강조하는 것이 이렇게 사유와 생활이 하나가 된 몸으로 익힌 글쓰기, 여행자의 스쳐가는 시선이 아니라, 기존 권력에 순응하는 정착민의 닫힌 눈이 아니라 여행과 생활이 하나가 된 유목민의 사유와 글쓰기를 하라는 것이었다.

내 생활과 일에 새로운 테마들이 들어오고 있다. 그 외적 테마들을 어떻게 내적으로 구체적으로 체화할 것인지가 문제이다. 좀더 환경친화적인 생활, 일정 수준의 관찰과 성찰에 기반한 글쓰기가 필요하다. '붕뜬 추상적 사유'라는 말이 이제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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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일차
2011.02.11 21:34:15 *.41.16.144
오늘 새벽도 출석만 하고 잠들었다. 출근시간이 늦어지니 아무래도 여유가 있어서 완전히 잠이 깨기 전에 다시 잠들어 버리곤 한다. 다음주 월요일부터는 6시 기상으로 바꾸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글을 쓰고 싶은 갈증은 여전한데 글감을 찾는 노력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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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일차
2011.02.13 05:38:58 *.41.16.144
세계와 나 W 1, 2편을 그저께 밤과 어제 하루 동안에 다 읽었다. 얼마전 폐지된 국제시사프로그램 W를 책으로 펴낸 내용이다. 세계가 얼마나 불균형을 이루며 발달하고 있는지가 극명했다. 스웨덴, 덴마크,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100% 화석연료에서 탈피하여 자전거를 타고, 각종 재생에너지를 자치적으로 개발하고, 자급자족하는 환경 친화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아이티, 콩고, 필리핀 등 제3세계 국가에서는 온갖 재난과 기아, 가난에 직면하여 아이들이 일하고, 진흑쿠키조차도 못 사먹으며 굶주리고, 권력에 억압받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안보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급격한 자본화, 세계화로 누구보다 극심한 불안감에시달리긴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으로 태어났다는 건 지구 기준에 평균 이상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농업을 포기하면서 식량의 자급자족 균형이 깨져 식량수급에 큰 문제를 겪고 있는 이집트, 필리핀 등의 사례는 우리나라도 식량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경각심을 다시 한번 불러 일으켰고,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는 국가들에서 유가 파동을 겪고난 후 화석연료에서 탈피하여 신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하는 삶의 양식으로 바꾸려 노력하며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도 볼 수 있었다.

지난번 후카오카 근교의 우레시노온천에 갔을 때 언니들과 마을 산책을 하고 일본의 아담한 경차 문화에 탄복했던 기억이 난다. 중고를 사더라도 중형 이상을 사려고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해 일본 사람들이 무척이나 실리적으로 경제적인 관념에 기준해 소형차를 선호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너지 효율 면에서 보아도 소형차를 선택해 연료값을 아끼고 환경을 생각하더라도 소형차를 선택해 대기가스 배출을 최소한으로 줄임이 옳다. 그런데 우리는 기본적으로 소형 경차는 안전하지 못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강하다. 

농업의 포기 (개방에 의해 더욱 더 경쟁력을 상실하게 해서 농민들이 농업과 축산을 포기하는 걸 가속화하고), 화석연료에 너무도 의존적인 에너지 구조, 에너지 절약에는 둔감한 소비 행태, - 이러한 현 우리 모습들이 앞으로의 재난을 예고하는 것 같기도 해 섬뜩하기도 하다. 30, 40년 전만 해도 자급 자족하던 풍요롭던 나라들이 요즘에 식량수급 문제로 폭동을 겪고 국민들이 극단적인 가난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가 현재 누리고 있는 부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더욱 강하게 든다.

W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현재 생활 방식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전기를 아껴 써야 하고, 물도 아껴야 하고, 세제는 적게 써야 하고, 쓰레기는 줄여야 한다. 일상 생활에서 무심코 넘어가던 것들이 얼마나 위급한 마음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들인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샤워를 줄이고, 시간을 짧게 하고, 뜨거운 물 사용을 줄이고, 세제를 적게 쓰고, 포장이 많이 된 인스턴트 제품의 사용은 되도록 줄여야 한다.

차와 에어컨은 없으니 되었고, 일단은 중앙 난방이니 전기와 물을 아껴 쓰는 것 부터 일상화 해야 겠다. 새로 들어간 곳의 에너지, 종이 절약 노력을 보고 녹색 재생에너지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니 당장의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으로 환경보호에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제 실천해야지..

아래는 인터넷을 뒤져보니 환경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들.

교통

가까운 거리는 걸어다닌다.
먼 거리도 될수 있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잠시 멈춰있을땐 시동을 끈다.
운전할때 속도를 줄이고 급한 출발이나 멈춤은 하지 않는다.

소비

동물을 죽여서 만든 물건은 사지 않는다.
쇼핑할때 장바구니를 가지고 간다.
일회용 제품은 쓰지 않는다.
과대포장된 제품은 사지 않는다.
CFC를 쓰지 않는다.
유기농 농산물을 먹는다.
수입식품은 되도록 먹지 않는다.
환경마크나 재활용마크가 붙어 있는 제품을 산다.
종이를 아껴쓴다.

생활

샴푸나 합성세제를 쓰지 않는다.
음식물쓰레기는 최대한 물기를 빼고 부피를 줄여서 버린다.
에너지를 절약한다.
변기청정제 대신 붕산을 넣어본다.
린스대신 식초를 써 본다.
쌀뜨물은 설거지를 하고 화분에 준다.
변기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

정부

댐을 되도록 건설하지 않는다.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한다.

기업

몰래 폐수를 흘려보내지 않는다.
환경운동에 참여한다.

기타

실험후에 남은 약품들을 하수구에 버리지 않는다.
나무를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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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일차
2011.02.14 06:19:24 *.41.16.144

잠과 새벽 활동의 효용 사이에서 마음은 매일 갈등한다. 어떤 날은 너무도 가뿐하게 잠에서 깨어 글을 읽고 쓰고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즐겁고 충만하게 느껴지는 반면 어떤 날은 잘 떠지지 않는 시큼한 눈을 부비며 '아, 잠자고 싶다'라는 유혹이 호시탐탐 마음 속에 비져 들어와 쉽게 그 유혹에 굴복해버리곤 한다. 즉, 항상 '더 좋은 것, 더 당기는 걸' 선택한다. 이것은 몸과 마음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문제이다.

아주 늦게 잠들고도 가뿐한 새벽이 있는가 하면, 하루 종일 긴장해서 일할 그 날의 일정을 생각해 '잠을 자는게 더 좋겠어'하고 판단하는 새벽도 있다. 어찌 되었든 깨어있음을 선택한 날은 깨어있는 것이 더 낫다는 걸 인정한 날이다. 결국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선택을 내리곤 한다.

드디어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 초반부를 읽고 있다. 일상의 철학자답게 참치 통조림과 비스켓이 슈퍼마켓을 통해 우리 앞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과정을 추적하며 일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나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는 이 일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진다. 작가로서는 비스켓 공장에서 본 분업화된 일군들, 비스켓의 판촉을 위해 몇 달의 소모적인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일이 '생계' 그 자체를 위한 의미 이외에 어떤 삶의 의미를 지녔는지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소비재, 특히 그 중에 잉여적인 사치품들을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나도 내 일의 의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차피 내 일이란 전체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가 잘 돌아가도록 만들기 위한 조그만 나사 톱니 바퀴에 불과하다. 나를 대체할 부품은 수없이 깔려 있고, 내가 작동을 멈춘다고 해서 이 거대한 사회의 움직임이 멈출리도 없다. 현대에서 고용된다는건 자기가 수많은 부품 중의 하나임을 인정하고 내 생계를 위해 내 자율권을 조직에 스스로 반납하는 것과 같다.

반납했던 자율권을 다시 자신에게 회수하고, 부품으로서의 자기가 아닌 한번뿐인 소중한 인생으로서 낭비할 수 없는 가치있는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이 이직, 퇴직, 휴직 등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스스로가 자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큰 승리이긴 하지만 자유에는 댓가가 따르는 법. 자유를 선택한 자는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을 맞설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 선택한 일을 만들어가는 책임지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다시 '일의 의미'이다. 내 일은 생계의 수단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 사회가 잘 돌아가도록 만드는 나사 바퀴 중 하나라는 건 확실. 내 일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누구에게 도움을 주고, 어떤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과정인지를 추적해보는 것이 그래서 의미가 있다. 전체 과정 중 자기가 담당한 일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일의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이 하고자 하는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의 일이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는 지를 물어보고 파악해보도록 방아쇠를 당기는 일.

불안에 이어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이제 두번째로 접하지만 이 사람의 글쓰기가 우리 삶에서 맞닥드리는 핵심적인 요소들, 즉 사랑, 자유, 여행, 불안, 일, 예술 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스스로 찾아 다니고, 사유하고, 책을 뒤적이며 답을 찾기 위해 고심하지만 결국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스스로에게 적합한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것, 그것만으로 이 사람의 책을 읽는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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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일차
2011.02.15 05:54:01 *.41.16.144
어제와는 달리 쉽게 일의 의미에 대한 긍정적인 답을 내리기가 참 애매한 결론..

일상을 깊이 성찰할 수록 일상을 싸놓은 달콤한 당의정이 벗겨지고 씁쓸함만 남게 되는 모양이다.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은 일의 당의정을 벗기는 작업이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사랑'과 함께 삶의 또다른 의미를 줄 수 있다고 하는 '일', 과연 그 일이 삶의 의미를 줄만한 것인가에 대한 탐색이라고 볼 수 있다.

화물선 관찰을 통해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남자들을 보며 현대인들이 얼마나 일의 전반적인 과정에 대해 무지한가를 깨닫고 현대 일터의 지성과 특수성,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노래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 이 책을 쓰게된 동기라고 한다. 물건들의 제조와 유통과정에 대한 무지로 인해 경이, 감사, 죄책감 등 많은 기회에 대해 박탈되어 있다고 생각해 작가는 몰디브의 참치 바다 낚시부터 프랑스 가정에서 최종 소비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비스킷 공장의 분업화된 제조 공정, 판촉활동을 보면서 '생존' 의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의 일에 슬픔을 느낀다.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를 하는 직업상담사에 대한 연민과 슬픔을 통해 예외를 규칙으로 표현하는 이 사회의 성공신화가 특별한 저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음을 통찰한다. 개인신화가 사라지고 전체적인 과학적 효율과 통제를 통해 성공적으로 일본 통신위성이 발사되는 과정을 관찰한 후 작가가 느끼는 우울함과 내면의 혹독함, 중력에 대한 불안을 보면 이 즈음부터 일이라는 주제에 대해 글을 이어가는 것이 상당히 버거운 일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후, 박달나무를 표현하는데 20년을 바친 무명작가의 작업활동과 그림 판매를 추적하며 '우리 모습보다 더 우아하고 지적인 대상을 창조하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인간 본성의 비실용적 측면'을 본다.

송전탑 평가라는 취미활동을 하는 전기회사 직원을 따라 첨탑을 따라가는 여행을 하며 소비자가 전류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할 필요가 없는 소외 과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리고, 회계사의 세계는 작가에게는 상극처럼 느껴진 모양이다. 이제까지 이름을 가진 개인들이 나왔다면 회계사의 삶에 대한 묘사에서는 그냥 회계사라는 보통 명사가 계속 등장한다. 관료적인 지루한 일, 이제 인생을 더이상 '신비하거나, 슬프거나, 괴롭거나, 감동적이거나, 혼란스럽거나, 우울하게' 느끼지 않도록 해주는 회계사의 일. 그 일은 '자유의 끝이자 동시에 의심과 집념과 변덕스러운 욕망의 끝'으로 느껴진다. 창업자 정신에 경탄하면서도 그 어리석음에 대해 탄식하는 과정을 거친 후 항공산업 박람회에 참석하고 버려진 비행기를 보며 느끼는 죽음과 사라짐에 대한 압박감. 이 지점에서 일은 허무와 불안을 가리는 시도이자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수단으로 비쳐지며 일에 대한 긴 탐색을 끝낸다.

불안에서도 그려졌지만 이 현대 자본주의의 성공 신화를 알랭 드 보통은 믿지 않는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작가가 일이라는 주제에 대해 지쳐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글쓰기 자체에 대한 회의도 느껴졌고, 삶의 존재 의미를 충족시키는 일의 기쁨이라는 효능보다는 슬픔과 괴로움에 더욱 치중한 것 같다. 작가는 불안을 잊기 위해,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몰두하는 기계화된 무엇으로 일을 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일은 그만큼 소외된 삶을 대변하고 있다는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책을 읽는 중반까지는 나도 내 일의 의미에 대한 탐색을 계속 하며 아래와 같은 긍정적 결론을 내렸었다.

'어차피 내 일이란 전체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가 잘 돌아가도록 만들기 위한 조그만 나사 톱니 바퀴에 불과하다. 나를 대체할 부품은 수없이 깔려 있고, 내가 작동을 멈춘다고 해서 이 거대한 사회의 움직임이 멈출리도 없다. 현대에서 고용된다는건 자기가 수많은 부품 중의 하나임을 인정하고 내 생계를 위해 내 자율권을 조직에 스스로 반납하는 것과 같다.

반납했던 자율권을 다시 자신에게 회수하고, 부품으로서의 자기가 아닌 한번뿐인 소중한 인생으로서 낭비할 수 없는 가치있는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이 이직, 퇴직, 휴직 등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스스로가 자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큰 승리이긴 하지만 자유에는 댓가가 따르는 법. 자유를 선택한 자는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을 맞설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 선택한 일을 만들어가는 책임지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다시 '일의 의미'이다. 내 일은 생계의 수단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 사회가 잘 돌아가도록 만드는 나사 바퀴 중 하나라는 건 확실. 내 일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누구에게 도움을 주고, 어떤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과정인지를 추적해보는 것이 그래서 의미가 있다. 전체 과정 중 자기가 담당한 일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일의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이 하고자 하는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의 일이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는 지를 물어보고 파악해보도록 방아쇠를 당기는 일.'

책을 다 읽고 보니 알랭 드 보통이 얘기하고자 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사는 나사일 뿐, 내가 이 사회에서 하는 역할로 내 삶의 의의를 찾겠다고 하는 착한 인식은 옛날 군사부일체의 교육처럼 이 거대한 자본 사회가 생존의 메카니즘을 이어가기 위한 주입 교육의 결과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살짝 엊는다. 그래도 어찌할까나? 오늘도 나는 당장 일터에 가서 내 의심과 회의를 비우고 긍정의 정신으로 충만하여 일의 성과를 내어야 하는 존재인데..내가 나 스스로를 위로하는 당의정을 쉽게 벗겨버릴 수야 없지...

 

머리가 빨리 벗겨진 40대 초반의 아저씨가 불안과 회의 속에서 지쳐가는 것이 느껴진다. 알랭 드 보통의 다음 주제는 어쩌면 구원과 믿음, 영성 같은 무엇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가족, 어쩌면 일탈, 어쩌면 결혼 생활 바깥의 연애.. 삶의 의미를 줄 수도 있을 것 같은 뭔가를 집요하게 파고 들겠지.

책의 서두에 있는 편지글에서 본 알랭 드 보통의 글씨체는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꼼꼼하고, 분석적 사유에 능하고, 사교적 관계에 서툴고, 순수하고, 치기어린 사람. 지극히 주관적으로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었다. 글을 쓰며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사람들과 기관에 대한 너무도 솔직한 작가의 관점과 소감을 보며 이래도 되나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 작가는 이래야 되는구나 싶기도 했고. 책을 쓰기 위해 일이라는 주제를 좇아 온갖 사람과 장소를 여기 저기 찾아다닌 작가의 글쓰기가 대단하면서도 힘겨워보인다.

'우리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고 현재를 역사의 정점으로 보는 것, 코앞에 닥친 회의가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묘지의 교훈을 태만히 하는 것, 가끔씩만 책을 읽는 것, 마감의 압박을 느끼는 것, 동료를 물려고 하는 것, "오전 11:00에서 오전 11:15까지 커피를 마시며 휴식"이라고 적힌 회의 일정을 꾸역꾸역 소화해 나아가는 것, 부주의하고 탐욕스럽게 행동하다가 전투에서 산화해버리는 것 -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생활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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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기획의 궁극적인 운명을 직접 목격한다면, 우리는 바로 몸이 마비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스를 정복하러 떠나는 크세르세스의 군대를 지켜보던 사람들, 칸쿤의 황금 신전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리던 마야의 타찬악을 지켜보던 사람들, 인도 우편제도를 시작한 영국 식민지 행정관들을 지켜보던 사람들 가운데,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 노력의 궁극적 운명을 알려줄 용기가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세월과 문명의 무상함을 바라보는 허망한 눈이 보인다. 나이가 더 들면 알랭 드 보통의 공허함이 스쳐가는 지친 눈에 생기와 지혜의 기쁨이 돌아올 수 있을까? 일상을 깊이 성찰할 수록 공허함이 오는 건 슬픈 일이다. 알랭 드 보통이 불안의 해결책으로 제시했던 철학, 예술, 종교 조차도 지금은 공허의 세계안에 들어와 있다. 허망의 세계를 직시하면서도 꾸준한 글쓰기를 통해 영원의 순간을 남기려고 하는 모순의 존재, 작가의 일이 바로 그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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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일차
2011.02.16 06:25:39 *.41.16.144

'경계를 넘어서는 일'

프랑스/한국, 결혼/비혼, 운동권/제도권, 예술/문화, 운동/정치.- 수많은 경계 위에 서 있는 나.

목수정의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프롤로그를 읽으며 강렬하게 들어온 말입니다. 대학시절 '미제타도'와 '노동해방'을 주입시키던 선배들이 그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거나 독립된 자아로 사고한 적이 있었을까? 의심했다는 말에 딱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강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지요. 역시 모든 질투는 이 사람이 나와 비슷한 수준의, 만만한 연배로 보여질 때 가능한 것인가봐요.

책을 읽으며 많은 부분에서 이 사람과 비슷한 것을 경험했다는 걸 알 수 있었지요. 러시아어를 대학에서 전공한 것을 보면 이질적인 언어를 대학 전공학과로 선택한 사람들의 기질도 엇비슷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고, 심지어 나이와 생일도 한 3일 차이로 비슷하다는것을 알 수 있었지요.

확실한 차이는 30세가 되어 프랑스로 가기 이전 문화기획과 예술 분야의 자유로운 일을 하며 (관광공사 일에서 공연기획으로 일을 바꾸며 점점 연봉이 낮아졌다고 했지요.) 좀더 유연하고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문화와 예술적인 삶에 대한 강한 열망을 키웠고, 불행중독증에 걸린 남자의 폭력으로 연애를 마감하며 가부장적 한국 남자들의 세계에 진절머리를 느꼈다는 정도이겠지요. 

유학생활에 대한 소회와 예술가 동거인 (혹은 남편)과의 만남과 사랑, 프랑스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감회가 이어집니다. 베껴쓰고 싶은 많은 구절들이 있었던 걸 보면 목수정의 글이 마음 속에 쏙쏙 들어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구요.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라는 함민복의 말대로 경계를 아우르며 사는 사람에게 피어난 삶과 사유의 꽃은 강한 향기를 풍긴다는 걸 점점 확인하네요. 굳이 국경의 경계를 아우르며 살지 않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경계를 아우르며 살 수 있는데요. 일과 예술, 일상과 꿈, 부모와 학부모 같은 자기만의 경계들을 멋지게 아우르는 삶도 경계에서 꽃을 피우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한국에서 프랑스로 공간이동을 했을 때 목수정은 한동안 백지처럼 느껴지며 시간이동을 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고 의도적인 결핍과 절연을 시도했더니, 시를 읽고 싶은 욕구가 가장 먼저 치솟아 올랐다고 하네요. 목수정의 글 속에서 상징적인 축약을 느낄 수 있었는데 시적인 감성 덕분인지도 모르겠네요.아직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암튼 배우고 싶은 글쓰기를 하는 일인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요.

도서관에서 함께 대출한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 선생님의 글씨와 그림 '좁쌀 한 알'도 어제 저녁에 읽다 잠들었는데요. 난초 그림과 글씨에서 풍겨나오는 기운이 범상치 않다는 느낌이 팍팍 오네요. 원주의 카톨릭성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변혁운동과 한살림공동체 활동 등에 대한 일화들을 장일순선생님의 글과 그림과 함께 볼 수 있는데요. 목수정의 글과 함께 읽으니 다른 삶이지만, 자신만의 삶을 열어나간 사람들의 포스를 함께 느끼는 것도 좋네요.

목수정이 자신의 남편에 대해 '자신만의 성'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하고 '자신감과 여유,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차갑게 현실을 직시하고, 이질적이지만 견고한 세계를 딛고 서 있는 듯한 그 모습은 자신만의 성을 지닌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단면이었다'라고 썼네요. '경계를 아우르는 삶'과 '자신만의 성', 두 가지 키워드가 멋지네요.

새벽을 넘어 동녁하늘이 불그스름해집니다. 해가 경계를 넘어오려 준비 중인가 봐요. 경계에 선 동녁하늘이 층층이 물든 보라빛과 주홍빛의 구름과 함께 사이 사이로 드러나는 연한 푸른 빛 하늘색과 섞여 아름답게 물들어 갑니다.

아침에서 일상으로, 탐구자에서 생활인으로 경계를 넘어갑니다. 물질과 돈과, 직접적인 인간관계와 영향력의 범주에서 활동하는 생활인의 일상 또한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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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일차
2011.02.18 06:00:28 *.41.16.144

늦은 밤,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수다를 실컷 떨고 들어오는 밤에 달을 보았어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둥근 달이 휘영청 떠있었지요. 정월대보름이라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땅콩을 까먹으며 부름도 깨고 어머님이 싸주신 오곡밥도 잘 먹고 들어왔으면서도 정월대보름은 달을 보는 날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어렸을 땐 동네 앞산에 달구경도 가고, 깡통에 불을 넣어 빙빙 돌리는 쥐불놀이도 하고, 대보름달이 뜬 논과 밭을 신나게 뛰어다니곤 했었지요. 아이들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은 농촌에서 더이상 쥐불놀이를 할 것 같진 않네요.  

10시가 넘은 늦은 밤이었지만 강남역에서 2호선을 타고, 교대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오는 내내 지하철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어요. 좋은 사람들의 싱싱한 기운을 나눠 받아서일까요? 늦은 밤이지만 조금도 피곤하지 않네요.

오늘 아침은 출석하고 한 40분쯤 책 읽다가 졸음에 겨워 다시 잠들어 버렸어요. 아침에 출근하면서 기분이 좋지 않더라구요. 내일은 쌩쌩하게 일어나서 좋은 시간 보냈음 좋겠어요~

장일순 선생님의 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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