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단군의

/

3단계,

세

  • 이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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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8일 20시 15분 등록
100일동안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매일 그 소리를 기록하리라
고통과 의심과 열광과 영감에 차 있는
온갖 삶을 기록하여
영혼이 거칠어지는 것을 막을 것이며
마치 소리굽쇠로 악기의 현을 조율하듯
영혼의 음조를 맞추어 가리라

마음속 깊은 곳에 불을 비추듯
100일의 여정을 시작하며 햇살이 스며들기를......



IP *.149.1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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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8 22:34:03 *.72.153.166
디지털 악기로는 재현하기 어려운 것중에 하나가 공명이라고 하대요.
소리굽쇠의 원리처럼.
바이올린이 C를 연주하면 피아노의 줄이 첼로의 현이, 현악기의 줄들이, 관악기들이 그 소리에 작게 떨린데요.

이번 100일 동안에는 만다라가 아닌 다른 것인가요?.... 누군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저는 참 복이 많이 사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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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1 17:48:46 *.196.18.243
평생동안 만다라는 품고 있을거예요^^
눈만 감으면 선연히 차오르니까...
이번 100일동안 언니들과 어떻게 주파수를 맞춰야 공명할 수 있을지 더 집중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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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민
2011.01.09 05:34:52 *.142.197.96
관계. 좋은 응원자로, 좋은 코치로, 동행합니다.
동행. 이것으로 우리가 됩니다.
우리. 함께...그리고 멀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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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0 10:59:52 *.124.233.1
영혼의 공명..

누님의 새로운 100일 누님의 소망대로 마음 속 깊은 곳에

밝은 빛이 비추어 지길 바랄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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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0 14:15:39 *.118.58.45
emoticon어쩐지 이헌님 가시는 길에는 장미꽃 한 송이르 드리고 싶습니다..
장미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이라 일컬어지지만, 가시 또한 가장 아프기도 합니다.
아프기에 더욱 아름다운 길 열어가시리라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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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1 17:40:32 *.196.18.243
첫날부터 많이 아팠어요
왜 이길을 가는지 어떻게 가야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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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우
2011.01.10 20:40:00 *.226.153.99
한걸음 한걸음...
한 걸음에 생각 하나
한 걸음에 사람 하나
한 걸음에 마음 하나

그런 백일이 되기를 기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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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1 06:35:29 *.148.64.43
201일차

수선언니의 알콜중독 후유증은 모든 공동체식구들을 힘들게 한다.
전체월례회의는 한달에 한번씩 언니들과 직원들이 함께 모여 중요사항을 의논하는 자리에
수선언니 문제가 불거졌다.
심리적으로 약하여 알콜에 의존하는 수선언니는 술에 취하면 여러사람들에게 전화를 하여
하소연을 하거나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들을 쏟아 놓는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처음에는 측은지심으로 응해주지만 밤새 전화를 해오는 수선언니에게
나중에는 짜증과 분노심마저 갖게 한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고 수선언니를 이해하라고 두둔하고 감싸는 나의 메세지가 벽에 부딪혔다.
모두가 트라우마에 빠져 힘들다.
나도 휩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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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1 17:39:08 *.196.18.243
서울 출장을 위해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어제 밤에 수선언니가 윤정이로부터 폭행을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연락이 왔다. 
사태수습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종일 네트워크 회의에만 5시간 동안 집중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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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2 06:10:41 *.148.64.43

202일차

어제의 후유증으로 밤새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 활동을 위해 일어났지만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어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고 잠들기를 바랬지만 기분이 더럽고 화를 이겨내기 어렵다.

매일이 절망이고 전쟁같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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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2 12:46:48 *.55.76.110
오직 한 진동수의 음만 내는 소리굽쇠처럼 한결같음으로 울려퍼져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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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2 21:49:45 *.180.75.152
203일차

왜 나는 실패를 반복하지?

지난 연말부터 사업을 마무리하고 정산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일정을 보냈다.
마음을 추스리거나 여유를 갖지 못하고 무조건 달려와야했다.
이런 상태로 계속 달려야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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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3 15:17:44 *.149.140.77
             벼랑

                                             이 재 무

벼랑은 번번이 파도를 놓친다.
외롭고 고달픈,
저 유구한 천년 만년의 고독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철썩철썩 매번 와서는 따귀나
안기고 가는 몰인정한 사랑아
희망을 놓쳐도
바보같이 바보같이 벼랑은
눈부신 고집 꺾지 않는다.
마침내 시간은 그를 녹여
바다가 되게 하리라


서울로 출장을 가게 되면 지하철을 이용하게 되고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만나게 되는 시들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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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3 21:51:13 *.180.75.152
204일차

지인과의 약속이 한시간 딜레이되어 교보문고에 들려 리더란 무엇인가를 구입했다.
같은 부족원들이 읽은 소감들을 보면서 조금은 기대를 하였었는데 역시나 탁월한 책이다.
새벽활동으로 인도에서 구입한 향을 피워놓고 융의 어린시절과 텍스트 프롤로그를 읽다.

전심전력을 다해 꿈을 추구하다 보면,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가 자각하는 의지를 넘어서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꿈을 좇아가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자양분을 제공하고 정한 길을 가도록 끊임없이 도와주는
어떤 힘에 대해 나의 여정을 비춰볼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어떤 힘의 공급을 받고 있음을 인정한다.  

또한
선택한 방향에 대한 우리의 헌신성을 시험하고
실패를 통해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크나큰 시련들...
전심전력을 다해 헌신하지 않고 있는 나를 본다.

여전히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내자신이 꼭 읽어볼 책이다.

수선이 문제를 풀기위해 내일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의 찌꺼기가 잔재해있다.
공동의 선을 도출해내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할까?

가해자 윤정이는 쉼터에서 퇴소당하고 모텔에서 이 시련을 견디고 있다.
회의를 잘 버텨내고 다시 힘을 내어 평범한 일상을 이어갈 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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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4 21:38:38 *.180.75.152
205일차

몸이 천근만근 일어나기 힘들었다.
과중한 스트레스를 몸이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걸까
출첵을 하고도 오늘 진행할 회의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막막한채로 아침을 맞았다.

리더쉽은 섬김을 통해서 구현된다는 문구가 아침을 다독여준다.

윤정이는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서도 여러 사람들 앞에 서는게 두려웠는지 
결국 회의에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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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5 21:02:38 *.180.75.152
마라톤 허리가 많이 아파서 접수도 못했어요^^
윤정이는 어려서부터 고아원에서 자라고 성적폭력에 일찍 노출되어 트라우마가 강해요. 
난 그런 윤정이를 어떻게 안아줘야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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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윤정
2011.01.15 07:17:21 *.154.223.196
아, 저는 또 그 '윤정이'에게 불려서 이헌님께 옵니다. 이헌님 안녕하셨어요? 
여수국제마라톤은 구제역 때문에 3월로 연기되었더군요. 
스트레스 많아서 위가 힘들 때는 소화 잘 안되니까 부드러운 거 골라 드시고요. 다음에 또 올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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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5 22:10:57 *.180.75.152
206일차

언니들을 구조하러 다니면서 섬지역에 팔려간 언니들의 인권유린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2007한국여성재단의 지원으로 도서지역 아웃리치를 프로젝트사업으로
거문도, 보길도, 흑산도, 완도 등 전남지역의 대표적인 섬들을 방문하여
주민들에게 성매매는 폭력이고 범죄라는 프랑카드를 내걸고 캠페인을 하고 다녔다.
또한 밤에는 티켓다방을 찾아다니며 아웃리치를 실시하고. 
그땐 그렇게 하는 것이 성매매근절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찾아 간 어느 섬에서 만난 장로님이 우리의 활동을 눈여겨보고 말을 걸어왔다.
이 섬에는 기혼여성의 절반이상이 성매매를 하다 빚이 많아
빚을 갚아준 남성들과 결혼하여 살고 있다고.
아.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듯 한동안 프로젝트를 추진한걸 한없이 후회하였었다.
언니들의 깊은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는 상태에서
대신 빚을 갚아주고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과
살아가야하는 언니들은 얼마나 힘들게 살아내고 있을까....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구조적 가족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섬은 좁은 공간이다. 
그 섬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도 섬주민 대부분이 알고 있다.
우리가 외쳐댔던 캠페인이 그 가족들과 주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생각만해도 지금도 뒷골이 땡긴다. 
난 그 프로젝트로 상도 받았다. 
2007년 이후로 난 그 언니들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어제 3차전남여성발전종합계획연구 최종보고회에 다녀왔다.
지난 6년간 전남의 22개 시.군을 발로 뛰며 알게 된 지역의 특성과 현장을 보며 
연구하고 추진하고 싶은 많은 과제들이 있는데  
용역을 맡아 연구에 참여한 교수들의 보고서가 현장단체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고
제도적 시스템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내용들을 계획이라고 내놓다니.
어제 보고회에서 다 말하지 못한 감정이 다시 올라와 아침내내 부글부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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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6 21:47:07 *.180.75.152
207일차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
하버드대학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강좌 중 하나로 꼽힌다는 정보를 듣고 어제 저녁 EBS에서
방영된 내용을 녹화해두고 오늘 새벽활동으로 1회 강의를 집중해서 듣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강의를 바탕으로 한 책 "정의"도 국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랐고
저명 인사들의 독서 목록에 끊임없이 거론되어 우리 기관에서도 구입하여 비치만 하고
아직 읽어보지 못했던 터라 관심이 고조되어 왔었다.
그러나 조금은 난해하고 관념적일 것이라고 책은 밀쳐두었다.
특별한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남편과 함께 거실에 난로를 켜두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제러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임마누엘 칸트, 존 롤스 같은 철학자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도덕, 정의, 자유, 평등을 논하는 샌델 교수의
유연하고 풍부한 철학적 이해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아침이었다.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으로  일방적인 수업이나 지식의 암기가 아니라
실생활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을 바탕으로 질문들을 학생들에게 던지고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보면서
나의 강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점검해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2편 3편도 집중해서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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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8 21:35:04 *.180.75.152
한규님의 공헌 항상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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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8 18:13:14 *.76.121.104
험 207일차 에요. 오타에요. 수정해주세요. ^^.
이상 출석부지기 인사하고 갑니다.
댓글 달지는 않지만 항상 가슴깊은 울림을 주시는 일지입니다. 
항상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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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7 22:47:46 *.180.75.152
208일차

연일 강행군이다.
어느 하루 한날이라도 아무 생각없이 잠들어 있었으면 좋으련만...
내게 주어진 현실은 사력을 다해야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상황.
전직원이 둘러앉아 토론을 거듭해도 뾰족한 방안이 세워지지 않는다.
지난 폭행사건 이후 직원들은 더욱 강도높은 규칙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항변한다.
특히 새로 들어 온 직원들의 요구는 더 강하다.
난 6년간 매일 전쟁같은 날들을 견뎌왔는데 니들은 일한지 얼마나 되었길래 힘들다고 그러냐.
속이 불편해진다.
한편에선 이런 곳에서 일하겠다고 있어준 것만도 고맙지.
직원들을 먼저 생각할 것인지, 나약한 언니들을 먼저 감싸야할지....나두 나약해지려하네.
이럴때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일을 진행하는거 해결방법이 없다는거 알지.
하루 하루가 고해네.

10년 넘게 현장에서 일하던 언니 2명이 일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겠다고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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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8 22:01:33 *.180.75.152
209일차

출석체크 후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아침을 시작하다.
몸은 여전히 고단하다고 신호를 보내오고 다시 드러눕자고 유혹한다.
30분만 누웠다가 일어나자고 알람을 다시 설정하고 이불속으로 들어갔지만
몸과 의식은 따로 논다.
이런저런 고민과 염려로 잠들지 못하고 부산 출장 준비를 위해 다시 일어났다.
난 왜이렇게 힘들어할까?
돌파구가 필요한걸까. 위로를 받고 싶은걸까. 천직이 아니어서일까
매일 전심전력을 다해 달려도 계속 그 자리에서 맴도는걸까
일련의 사태 기저에 리더쉽의 부재가 영향을 미쳤을까.
사회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이 자리에 있다는 소명의식이 흐릿해진다.
계속되는 무력감에 어떤 변화를 줘야하는지 답답하다. 멘토가 나타나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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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19 15:34:46 *.180.75.152

210일차

구본형 칼럼

2011년 1월 16일은 내 세례식이었다.  종교의 본질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제자 몇이 와서 기타치고 노래를 불러 주었다. 은주가 바이올린을 켰는데, 삑살이 났다. 아주 귀여운 삑살이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경건해질 뻔 한 세례식이 유쾌해졌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찬란해 지듯 우리 속으로 신의 웃음이 퍼져나갔다. 나는 근엄해 지거나 경건해 지기 위해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삶은 기쁨이니 나는 웃음과 기쁨과 찬란한 인생을 위해 내 안에 신을 모시게 되었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사랑이시니 가는 곳 마다 기쁨이리라. 눈오는 날 포도주를 마시다 제 흥에 겨워 세례를 받겠다했으니 신의 섭리가 얼마나 아름다우신가.

나는 거부할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익을 대로 익은 순간이 좋다. 운명 같은 것 말이다. 종교란 신을 향해 마주 서는 것이다. 나는 이제 신을 향해 서게 되었다. 그동안 나도 다른 먹물들처럼, 더 분명한 기준, 객관적으로 확실한 것것이 나를 설득하여 믿을 수 밖에 없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눈뜬 믿음' 같은 것은 없다. 확실한 다음에 떠나는 것은 모험이 아니다. 나는 인생의 모험을 원했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을 때 믿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깊은 인생을 향한 모험은 오직 믿음으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얕은 인생을 버리고 깊은 인생을 살고 싶다. 그리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꿈꾸어 보았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다음과 같으리라.

집착하지 마라
가지려 하지 않으면 매이지 않으니
그때 자유다.
산들 바람이 되는 것이니 그 따뜻한 봄날
날리는 벚꽃잎처럼 웃어라.
가장 먼저 자신의 모자람을 웃음의 대상으로 삼아라.
그러면 언제 어디서나 웃을 수 있다.
모두 내어줘라.
가진 것을 다 쓰고 늙고 빈 가죽포대만 남겨라.

재주가 끝에 닿아 더 나아갈 수 없을 때 절망하라.
그러나 신에게 절망해서는 안된다.
신은 무한이시니,
낭떠러지에 다다르면 날개를 주실 것이다.
까보 다 로까의 절벽을 기억하라.
바다로 뛰어 내리는 자가 신대륙을 향하게 되지 않았는가 ?
받은 것이 초라한 것이라도 평생 갈고 닦아라.
영웅의 허리에 채워진 빛나는 보검이 되리라.

술과 구라를 즐기되 항상 혀를 조심하라.
어느 장소에서나 어느 주제에 대해서나 할 말은 다하는 자는
불행한 자니
말하고 싶을 때 마다 세 번을 더 깊이 들어라
특히 나이가 들어서는 혀를 잘 묶어 두어야 한다.
고약한 늙은이 옆에는 사람이 없으니 외로움이 끝없으리라
배워서 알고 있는 것을 다 쓰지 못하고 가는 것은 서운한 일이나
친구는 들어주는 사람 곁에 모이는 것이니
하나를 말하고 둘을 들어라

더 많이 노래하라
찬미하는 자는 영혼이 깃털 같으니
새가 하늘을 나는 이유는 노래하기 때문이다
신은 노래 부르는 자를 더 가까이 두고 싶어 하신다
더 많이 춤을 춰라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엉덩이를 흔들고 허리를 돌려라
육체의 기쁨을 축하하라
땅의 기쁨을 위해 몸을 주셨으니
쓰지 못할 때 까지 춤으로 찬양하라
온 몸으로 슬픈 단명을 사랑하라

나를 지배하는 세 가지 열정이 있으니
세상을 따뜻한 미풍으로 떠도는 것과
샘 솟듯 멈추지 않는 사랑과
노래하고 춤추고 이야기하는 축제에 대한 그리움이니
나는 세상이 잔치이기를 바란다
고난은 사라지고
사위어가는 모닥불 옆에서
기나긴 인생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가장 초라한 모습 속에 감춰진 흥미진진한 긴 여정을 따라나서고
가장 부유한 자의 외로움과 후회를 위로하고
지난 사랑의 이야기를 눈물로 듣기를 좋아한다

그리하여 햇살이 쏟아져 눈을 뜰 수 없는 빛나는 바다를
하얀 돛배로 항해하고
달빛 가득한 여름 바다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헤엄을 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는 날
촛불을 밝히고 포도주를 마시고
흰눈이 쏟아질 때 모자를 쓰고
설산을 걸어가리라
가까운 사람들과 더불어 낯선 사람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내 안에 더 많은 하느님을 품고
하늘에 가득한 별을 쳐다보리니
이것이 내가 꿈꾸는 일이다

이런 것들은 신이 없어도 가능한 일이 아닐까 ?   아니다. 
자신에 대한 절망과  체념없이는 신에게 나아갈 수 없다.  
'나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하오나 당신께 절망하지 말게 하소서'
우리의 기도는 늘 이래야한다. 

사부님의 글을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면 할수록 황홀하다.
꿈을 꾼다.
가슴이 떨린다.
시처럼 아름답게 사는 사부님을 알게 되어 참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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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21 15:23:17 *.149.140.210
211일차

윤정이가 쉼터에서 퇴소당한 후 모두가 가해자인 윤정이만 나쁜년으로 몰고 갔다. 
지치고 고단한 나는 그 힘에 밀려 
뭔지모를 불편함에 시달리면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윤정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피드백을 구하였다.
"더이상 감싸지 말라, 잘못을 해도 소장이 안아주니 믿는 구석이 있어서 잘못된 행동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등등 다른 소장들도 직원들도 모두가 하나같이 윤정이를 거부한다.
"윤정이를 우리가 다시 손잡아 주지 않으면 다시 유입될 가능성이 100%로다. 우울, 불안, 성정체감, 충동장애 등 온갖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윤정이의 상태는 너무 허약하다...등등"
"다른 입소자들을 돕기 위해서는 윤정이를 포기하는 수 밖에 없다"
"아무 준비도 안된 윤정이를 우리가 퇴소시킨 것만으로도 모텔에서 생활하고 있는 윤정이에게는 가혹하다. 한달 후에 다시 입소시키자"
"...."

나이 39살에 낳은 늦둥이 딸은 8살이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있다.
아침마다 밥투정을 부린다.
아침밥을 먹이기 위해 숟가락으로 떠 먹이기도 하고 매를 들기도 하면서 밥을 먹인다.
때론 1시간 동안 밥먹는 시간을 할애하면서 밥을 먹이느라
출근하는데 어려움을 겪기가 다반사다.
딸아이가 어떤 투정을 부리고 잘못을 해도 뒤돌아서면 용서가 되고 사랑스럽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딸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동원하여 키울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딸아이의 밥을 먹이느라 40분간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
내가 윤정이를 위해 해준게 딸아이를 위해 애정을 쏟는 절반이라도 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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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23 19:31:36 *.180.75.152
마라톤이 연기되었나봐요.
저는 신체의 중간통증이 지속되고 있어서 감희 뛰는 것 상상도 못하구 있네요^^
어찌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두려워하시나이까 ㅋㅋ
담에 날씨 따닷하면 놀러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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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24 12:35:28 *.149.140.210
작년 봄 텃밭에 거름을 주는 작업중.
이쁜이는 뭐든 참여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넘쳐나요

작년에는 마늘도 심었었는데 마늘 사는 시기를 놓쳐 종자확보를 못해거든요
양파, 부추, 배추, 갓이 텃밭에서 자라고 있어요.
올 겨울은 넘 추워서 생육조건이 여의치않는지 쑥쑥 자라지를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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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두
2011.01.24 07:22:23 *.154.223.196
옴마나, 옴마나!!!!
이헌님 댁에는 질투나는 보물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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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23 20:45:27 *.180.75.152
이쁜 공주님^^
SSL2903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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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윤정
2011.01.22 09:36:04 *.154.223.196
여수마라톤 저는 신청했었어요. 오늘 새벽에 취소를 했어요. 3월 6일로 최종 옮겨졌다는데 그 주는 놀토가 아니더군요. 남도에 가게 되면 뵈러 가야지, 남들이 책을 보내는 주소로 찾아가도 반겨주실 것 같았어요. 근데 내가 갈 수 있을까 했어요. 솔직히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저한테 대단한 도전이라....3월에는 이 근처 어디 10km 마라톤대회에 나가볼까 합니다.

지혜가 길을 인도하길 빕니다. 
아 너무너무 이쁘겠습니다. 이헌님 댁의 8살 아이^^ 
이헌님도 밥 많이 드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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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23 19:47:31 *.180.75.152
212일차

뭔가 꽉 막힌 느낌이 들어 깊은 차 한잔이 땡길때 달려가는 곳.
티벳 스님들이 손으로 직접 만든 향이 온 방안에 그윽히 맴도는 방에서
스님과 마주 앉아 보이차를 연신 받아 마셨다.
주저리 주저리 쏟아 놓은 하소연을 가만히 듣고 계신다.
20년전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때  스님이 거둬 옆방에서 키우셨단다.
3년동안 손수 빨래를 해주고 옷을 다려 주셨는데 그 아들이 6학년이 되어서
"스님 이제부터는 제가 옷을 빨아서 입을께요".
스님은 말씀하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아이에게 깊은 사랑을 줬던 것 같아"
깊은 사랑은 어느 만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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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24 18:24:14 *.149.140.210
213일차

신입직원의 업무스타일을 피드백하는 과정에서 불편한 감정들을 정리하는거 쉽지 않다.
다시 꺼내든 여금현목사님의 메시지를 통해 힘을 추스린다.

막달레나 하우스

Henna Y. Hahn(여 금현)
Hillside United Methodist Church, New Hyde Park.

그러니까 약 20 여 년 전, 무지개의 집 자매들을 돌보느라 점점 일이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있을 때, 한국방문 할 기회가 있었고, 한국 교회여성 연합회 총무님의 소개로 용산역 앞에 자리 잡은 막달레나 하우스의 이옥님을 만났다. 마른 체구에 아담한 몸매를 지녔으나, 인사 한마디 없이 강한 눈빛을 들여대며 안하무인으로 사람을 머리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주욱 꿰뚫어 보던 그 무시무시하던 첫 인상을 잊을 수 없다.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험악한 경험을 쌓아 온 이들을 만날때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 공연히 잘못 한 일도 없는데 짧은 목을 움추리고 어색한 미소를 날리는 나를 불쌍하게 봐 준게 틀림없다. “어디서 굴러 온 개 뼉따귄지? 내가 불쌍해서 한번 봐 준다”는 듯 묘한 표정과 몸짓으로 나를 압도한 것이 분명하다 싶을 때 쯤, 벼란간 모든 방어기재를 다 풀고 역시 강한 목소리로 자신이 살아 온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한마디로 이옥, 그녀는 독하고 강한 여자였다.

“구구한 사연으로 처음 용산역 앞에 여자 장사하는 음침한 집으로 들어 갔을 때 20년이나 이곳에 있었다는 40 쯤 된 여자가 술주정을 하는 걸 보고, 참 불쌍한 인생도 있구나. 나는 그 나이까지 절대 이런짓은 안하고 산다. 이를 악물었는데, 어느날 보니까 내가 이바닥에서 냄비를 팔아먹은지 20년이 되었더라구. 그냥 이 집을 뛰쳐나갔고 용산역 앞에 코구멍 만한 방 하나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어. 2년전에. 여자들 빤스장사로 연명했지. 싸게 해 주니까 다 나한테서 샀어. 죽일 X 들 그렇게 비싸게 팔아 먹었더라구, 아무튼 별 것들이 다 우리 피를 빨아 먹었다니까!”

뭔가 인간답게 살다 죽는 길은 없을까? 고민하는 중 새마을 운동 기사를 읽었고, 자기 나름대로 용산역 앞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단다. “우리 냄비 장사 가족들도 사람인 것만 은 분명하니 다른 사람들 하는 것도 해보자.” 해서 같은 패거리를 모아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집 앞길을 깨끗이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좋은 일을 시작한 지 며칠 후 경찰에 잡혀갔다. “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시켰느냐?” “그 빌어먹을 x 들이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어야지? 왜 한다니? 야 너는 네 집앞 도 안쓸고 사냐? 누가 시켰냐고? 내가 누구 시키는대로 사는 X 이냐? 우리 아버지 말도 안듣고 집나와서 이 장사한지 20년이다. 너희들이 별짓을 다해봐라 내가 이바닥에서 너희들 구린내 나는 밑구멍은 다 알고 있으니…” 안에 두어봤자 별통 쑤신 것이고 내 보낼 수 밖에…..

며칠 후에 두 경찰이 일류 식당에 초대를 했다. “새 삶을 살려는 이옥의 결정에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살 만한 집을 마련 해 줄테니 용산역을 조용히 떠나서 다시는 길 청소하는 일 따위는 그만두라.”는 끈적끈적 비위 상하는 회유도 받았다.

“야, 내가 용산역 앞에서 내 청춘을 바쳐 너희들에게 봉사한 것만도 얼마냐? 돈을 제대로 주기나했냐? 너희들 우리 개 돼지 취급한데서 살아 남은 우리다. 나는 억울해서 절대로 못 떠난다. 우리 공로를 인정해서 용산역 앞에 큼지막한 비석을 세워주기 전에는 못 간다.”로 버티었다. 경찰이 딴지를 붙을 수록 더 열이나서 열심히 하다보니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드디어 어느 날 새벽 아침, 몸싸움으로 번지고 신문에 나게 되었단다. “창녀들까지 나와서 데모를 하니 세상 다 됐군” “신문에 얼굴 내놓고 챙피한 줄도 모르니…” 혀차는 소리로 세상이 시끌시끌 했단다.

바로 그 신문을 김수한 신부님이 보셨다 신부님은 사람을 보내 이옥님을 관저에서 맞이했고 장한 일을 한다고 격려와 칭찬 그리고 도움의 손길을 피셨다. 즉 그토록 떠나기 싫다니 용산역 앞에 집 한 채를 마련해서 “막달레나의 집”이라는 간판을 내걸어 주고 이옥이 살면서 하고 싶은 무슨 일이든 하도록 하셨다. 집은 방 세개에 정갈한 마루와 부엌, 햇빛 잘드는 뜨락도 붙어 있었다.

“처음 신부님을 만났을 때 소원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물어 보셔서 나 같은 여자들을 10명만 구해주는 게 소원이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말씀 드렸더니 아주 훌륭한 생각을 했다. 지금부터 무엇이든 다 도와 줄테니 언제든 도움을 청하라고 하셨어. 그 신부님은 처음부터 하시는 게 그동안 만났던 놈들과는 아주 다른 남자더라구. 내가 처음으로 남자 앞에서 주눅이 들더라니까”

이옥은 아는바도 없고 해 본 일도 아니지만 자기 경험을 살려서 가장 필요했던 도움을 펴나가기 시작 했단다. 자기 동료들 중 아픈 사람, 공부 하기를 원하는 사람, 급한 돈이 필요한 사람 등 누구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언제나 찾아와서 쉬고 갈 수 있도록 했다. 김 신부님은 한번도 이래라 저래라가 없었고, 이옥이 하는 모든 일을 뒤따라가며 뒷바라지를하셨단다. 김 신부님은 이여사의 지도력에 감탄하셨고 그를 돕는 직원까지 제공해 주셨다. 즉 한국 말을 잘하는 미국 수녀와 함께 차 한대를 제공하셔서 이옥의 비서로 사무적인 일과 스케쥴 조종과 운전은 물론 집안 청소와 식사 시중까지 들게 하셨다.

그리고 2년이 흘렀고, 이미 50여명은 구해 냈으니 이제 죽어도 소원은 없다고 했다. 벌써 10여명이 고졸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식당에서 일하며 야간 학교를 다니는 것을 제일 기뻐했다. 막 달레나의 집은 날이 갈수록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써비스를 줄 수 있도록 틀이 잡히고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그때 마땅히 갈 곳도 없었고 또 제대로 견학을 할 마음으로 막달레나의 집에서 이틀 밤을 함께 보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심한 병에 결려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고 이여사는 걱정을 땅이 꺼지게 하면서 독방을 내 주고 외부인 출입을 금했다. 연실 동료들이 드나들면서 그녀를 돌보는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밤이되자 문고리가 불이 날 정도로 사람들의 발길이 번잡하게 오 가는데, 오는 이마다 사정은 구구했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같은 한국말을 쓰는 것은 분명한데 대부분 걸찍한 욕찌거리거나 은어를 사용하는 통에 대부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이옥의 용어 역시 그들과는 대부분 욕찌거리였다. 평상 언어가 욕으로만 가능함이 신기했다. 때로는 큰 싸움이 일어날 것 같은 기세로 서로 욕을 퍼 붓는데 실은 목청만 커진 것이지 싸우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정이 넘도록 손님을 받지 못하거나, 손님에게 폭력을 당하고 들어 오는 시간은 대개 2시 이후 였다. 술이 만취가 되어서 실려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은 이 집에 도착하면 한결같이 통곡을 하는데 아직 피도 안마른 년이 네가 먼저 죽을려고? 이런 세상도 있냐. 죽으면 내가 먼저 죽어야지. 나는 산전수전 다 겪고 더 살고 싶지도 않다. 내가 대신 죽어 줄테니 네가 살아서 좋은 세상보면서 떳떳하게 살아봐 이무슨무슨 X아! 제발. 불쌍해서 어쩐다냐, 저 년을 어쩐다냐?

나는 그들이 하는 욕을 애써 기억하려고도 하고 노트에 쓰기도 했는데, 지금은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다만 하룻 밤을 욕찌거리로 밤을 세우고나니 그 다음 날 내 입에서도 술술술 욕이 새어 나오는 것이다. 욕을 섞고나니 나도 그들과 금방 하나로 동화 됨을 느꼈다. “이 여자 소질이 있는데. 먹고 살기 힘들면 용산역 앞에 찾아와 봐. 아직은 쓸만하니 더 늦기전에….”

하룻 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했는가? 나는 그 하룻밤으로 용산역 앞 여자들의 삶을 조금은 알 수 있었고, 그동안 뒤에서 손가락질과 혀만 차대던 삶에서 그들을 나와 같은 소중한 여성으로 받아드리는 혁명이 내안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 여성들의 욕찌거리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곳에 붙여저 있는 10여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김 신부님이 지난 년말 밤에 혼자 찾아 오셔서. 우리와 오버나잇 하신 사진이에요.” 김신부님은 그 해의 송구영신을 막달레나 자매들(창녀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사진 속에서는 화투장을 손에 든 신부님, 구경하는 30여명의 여자들과 대표로 뽑힌 여자와 한판 씩 돌아가면서 자정을 넘길 때까지 화투를 치셨단다. “돈 따기를 했는데, 얼마나 진지하게 하시는지 글쎄, 슬슬 속임수까지 쓰시더라구. 그러나 우리가 누굽니까? 눈을 끔뻑거리며 봐 드린거지. 그것도 모르고 돈을 따기만 하면 어린애처럼 좋아 하시는거야. 돈을 꽤 따셨어. 계속 이기게 해 드렸으니까.”

새벽이 밝아오자 고운 옷으로 갈아 입고 와서 세배를 하라고 하셨단다. 한복을 차려 입고 세배하는 자매들에게는 “어느 집 규수인지 참 곱구나. 새해 복많이 받으시게.” 유일한 홍일 점으로 밤을 세우시면서 따신 돈과 더 보태서 놀랄 만큼 과하게 세벳 돈을 개인마다 주시고 이른 떡국을 드시고 가셨단다. 그 사건이 이들의 삶에 얼마나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는지는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나쁜 놈들만 사는 세상인 줄 알았다가 신부님 때문에 큰 코 다칠번 했어. 아직 세상 다 살지 안 했는데, 더 살다보면 좋은 일도 있을 것 같은 희망도 생기더라구.” 내가 일면식도 하지 못 했던 김신부님은 그들에게 또 나에게 인카네이션 하신 예수님이 틀림 없었다. 그때부터 내 마음에도 살아나신 예수님으로 자리했다.

이옥이 착실한 천주 교인이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그 후 국회 연설을 비롯 해 수 많은 강연을 했고- 그녀는 타고 난 웅변가였다- 2년간 목숨을 걸고 따라 다니며 구혼을 한 택시 운전사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가정을 꾸렸고, 그녀가 낸 자서전 책을 미국에서 받아 읽기도 했다. 그녀의 뒤에 김 신부님이 계심을 삼척동자도 다 알게 되었다. 언젠가 방문했을 때는 훨씬 부드러워지고 세련된 태도로 “내 성질에 남의 도움 계속 받으면서는 못살아요. 자립하기 위해서 참기름을 팔러 다니고 회비도 걷고 도움 받은 사람들이 다시 돕게도 하고 포주들 한테 후원금내라고 긁어내기도 하면서 계속 잘 하고 있어요. 다 천주님 은총이라 감사하지요. 그런데 나는 천주님이 곧 김 신부님이라 생각하는데, 그러면 안 되나요? 여 목사님!” 이렇게 어려운 질문을 할 때는 꼭 비꼬듯 ‘여 목사님’ 호칭을 붙여 대는게 그녀의 버릇임을 안다. “천주교 교인이니 신부님이나 수녀님께 물어 보지 그래요? 내 교인도 아니면서 벼란간 웬 여 목사님?!”

이옥은 둘쨋 날 오후 늦은 시간에 그 여성들이 살고 있는 판잣집 가정 방문에 나섰고 나에게 동행을 권했다. 용산역 앞에 이름 지어진 가게 말고도 그들의 살림집까지 남자들이 찾아오면 밤 낮 때를 가리지 않고 돈벌이는 가능했다. 그렇게 위험하고 좁은 길과 좁은 계단을 올라 방이라는 곳이 있을 줄이야!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이상한 소리가 이방 저 방에서 새어 나오는데

”저 년 놈들 짐승이지 사람 아니야!” 그랬다가 “너무 욕하지 마.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야. 불쌍한 족속들이지. 뭐” 바로 그런 와중에 엄마는 아프다고 누어 있고, 3학년이라는 아이가 밥상을 펴 놓고 숙제를 하고 있었다. “저런 아이들이 이 작은 동네 만도 50여명이 되는데, 저 아이들 공부방을 따로 차려 주는 게 또 다른 소원으로 떠 올랐어. 애는 왜 낳느냐구 병신들! 저 아이들이 뭐가 되겠어. 뻔한 일이지.”

그리고 밤이 깊어 졌을 때, 홍등가라는 길로 나를 안내했다. 그런 곳이 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지 몰랐을 때니까 호랑이 담배 피울 때 쯤의 이야기이다.

나는 나의 위선과 오만, 이중적인 신앙을 깨느라 그들 앞에서 고개를 땅에 박고 먹은 것도 별로 없는 배를 쥐어짜며 꾸역꾸역 구역질을 했다. 홍등가의 경험이 나에게 무엇이었는지는 다른 기회에 더 말하려니와 그때 했던 이 여사의 말 한마디가 생각난다. “김 신부님도 한 번 모시고 왔었는데 “나를 용서 해 주게.” 여러번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 그 분은 절대로 이런 짓을 하실 분은 아닌 데 말이야. 그렇더라도 돈은 많이 주셨을테구. 왜 용서 해 달라구 하시는지 모르겠어. 나도 그때는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런 일이 없으신 신부님이, 잘못한 것도 없으신 분이, 무슨 잘못을 한 줄도 모르고, 용서를 빌 줄도 모르는 모든 입을 대신해서 몸을 낮추시기를 그처럼 하셨음을.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아무도 가지 않을 길을 걸어 가심으로 새롭게 사는 길을 내 주셨으니 용산역 창녀들의 친구 김 신부님! 이제 그들은 누구와 송구영신 화투 놀이를 해야 하나요? 누구에게 세배를 하고 세벳 돈을 받아야 하나요? 신부님이 계셨던 자리만큼 우리들에겐 은총이요 축복이었으니 감사합니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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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25 14:47:18 *.149.140.210

국제선

Feburuary, 19,2009

Henna Y. Hahn(여 금현)

Hillside United Methodist Church, New Hyde Park.

6.25 한국동란 이후 한인여성들 중에 미국 병사와 결혼하여 미국 이민 길에 오른 한인여성들이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약 20 만명으로 추산한다(박이섭 목사 설교 등). 미주 연합 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 산하 한인교회 목사님들 중에 특히 군인기지에서 목회하는 목사님들 중심으로 선교회가 1989년도에 구성되었다. 2년 후, 평신도 중심의 만명회원 연결망 위원회가 생기고 그것이 “미주 국제결혼가정선교 전국연합회(이하 국제선)” 로 다시 태어나서 명실공히 미주 내 국제결혼 한인여성들의 선교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송여인 석방운동이 전국적인 운동으로 퍼져 나갔을 때 무지개의 집은 탄생 했고 튼튼한 연결망으로 성장했으니 국제선에게는 쎈터나 모델 내지는 깃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깃발 아래 회원들이 모여들고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 할 수 있었다. 그 중에 한국 기지촌 방문, 혼혈인을 찾아서, 국제결혼 여성 평화 대행진, 등의 수련회를 한국에서 가질수 있었다.

미주 내 “한미 부인회”는 국제결혼 한인 여성들이 구성한 한인이민 역사상 최초의 단체이다. 한미부인회는 자생적으로 발족하고 회원들 스스로 발전 시켜 온 것으로 국제선과 출발 때부터 그 사명과 비젼이 다르다. 즉 미국 남편들의 계급에 따라 장교 부인과 사병부인으로 갈리고, 군대의 규율인 만큼 같은 한국여성이지만 함께 어울리기는 어려웠다. 대부분 장교 부인들은 미국 교회나 한미부인회로 모여들어 사교적이거나 사회 봉사클럽으로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사병 부인들은 한인교회에 모여 신앙적인 헌신으로 각 개체 교회 중심으로 모였으니 사실은 작은 섬에 고립된 것처럼 각각 살았다. 그들 사이에 문제가 생겨도 함께 문제를 해결 하려는 노력이 거의 불가능했다.

송여인 석방 운동이 시작 할 무렵에는 교회 중심으로 운동이 펼쳐졌으나 나중에 사회 각층, 아시안, 미국 주류층까지 합세를 했으니 자연스럽게 한미부인회와 국제선이 만나 자매애로 연결 될 수 있었다.

2004년 가을 무지개의 집 주관으로 “무지개 평화 대행진”이라는 기치 아래 미 전국, 독일, 캐나다, 일본, 한국의 대표들, 즉 한미 부인회와 국제선 대표, 그리고 그 외의 나라에서 참석하는, 국제 대회라 할 만큼 꽤나 의미심장한 수련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더구나 한국 동란이후 반세기가 지나, 친정나라를 찾아오는 국제결혼한인여성들을 공식적이고 정책적으로 한국정부가 환영한다는 의미가 실려 있는 수련회였다. 그 상징으로 둘쨋날 저녁,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이 청와대에서 베푸시는 환영만찬 초대가 계획되었고, 첫날에는 재외동포 재단 이사장(이광규 박사)의 환영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53년만에 환향녀가 아닌 금의환향으로 환영 만찬이 예정되었으니 어찌 떨리지 아니하리!

고운 한복으로 차려입고 스카이 라운지에 마련된 재외동포 이사장의 환영식장에 들어서는 참석자들을 바라보며 나는 그날만은 하늘이 땅이되고 땅이 하늘로 뒤집히는 모습을 보았다. 국회의원들, 몇 여성단체 대표들의 환영사가 이어 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 조화순 목사님의 환영사가 특히 기억나는 것은 그분 특유의 목소리와 제스츄어는 그만두더라도 “타국에 가서 고생하고 성공적인 삶을 일구어 낸 여러분들, 즉 고생한 여성들이야말로 세계평화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게 평소의 내 신념인데, 여러분을 만나니 더욱 확신이 왔다.” 조리있게 말씀 하시는가 했더니 별안간 “기죽지마! 미국 놈들 앞에서나 대통령 앞에서 누구 앞에서도 기죽지마, 당신들이야말로 평화를 이룩할 사람인데 기죽지 말라구!” 한옥타브 높아진 음성으로 악을 쓰셨다.

North West Airline 스튜어디스가 직업인 보스톤에서 온 자매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 묻은 체로 울음을 터트리며 “목사님, 슬퍼서 우는 게 아니에요. 너무 기쁘고 너무 감격스럽고 너무나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우는거예요.” 어찌 그자매 뿐이랴, 환영사에 이어 답사로 나선 미시간 대학 교수님을 비롯해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대표들의 합창을 마지막으로 53년간 쌓였던 서러움이 기쁨으로 터져나와 눈물 바다를 이룬 환영 만찬이었다.

둘쨋날에 예정되었던 청와대 노 대동령 내외분의 환영 만찬은 때마침 불어 닥친 탄핵 열풍으로 취소 되었다. 대통령님은 끝까지 기다려 보라고 하셨고, 청와대와 대통령의 모든 권한이 제한되자 “권양숙 여사가 밖에 나와서라도 환영 할 수 있도록 하라.” 고 지시를 하셨건만 그것도 취소되고 말았다. 수련회 참석자들은 그 시간 광화문에 나가서 촛불집회를 참석했다. 참석자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지개의 집 수련회 준비 위원들은 이들의 실망을 채우기 위한 대안 마련에 고심했다. 그 당시 김수환 추기경님을 보좌 하시는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절대 안정과 보살핌으로 외부 방문을 금하고 있을 때라 엄두도 내지 못했었으나 대안은 김수환 추기경님 밖에 없어서 통 사정을 아뢰게 되었다.

혜와동 로터리에 있는 김추기경님의 관저를 들어가는 우리 무리들은 천국문에 들어 가는 것처럼 조심스럽고도 영광스러웠다. 관저안 집무실과 접대실, 사무실등은 엄숙하고도 정갈하게 우리를 맞이 해 주었고, 작은 강당으로 인도 되어 자리 잡고 앉으니, 신부님, 수녀님이 최근의 김 추기경님의 건강의 동향과 우리가 극히 조심해야 할 것 등을 말해 주었다. “추기경님을 위해서는 이런 행사는 해로운 것이어서 말려 보았지만, 만나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셨어요. 조심조심 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숨을 죽이고 있는데, 불편하신 몸으로 들어 오신 추기경님은 특유의 미소와 손을 흔들어 환영의 인사를 하신 후 이미 준비된 일인용 소파에 앉으셨다. “무지개 평화 대행진 수련회”와 참석자들을 소개하고 국제결혼 여성들을 위한 덕담을 부탁드리자. “여러분들이 자신을 희생하고 가족들을 돌보고, 달러를 이나라를 위해서 보내주고, 어디든지 한인 사회를 이룩하는데 큰 역할 을 했다는 것을 알고 늘 고마운 마음, 감사한 마음, 빚진 마음이 있었는데 이번 한국정부가 여러분을 환영했다니 나도 기쁩니다. 내가 이 만큼 살고 돌아보니 모든 사람들은 가슴에 촛불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 촛불을 밝혀 빛을 비추면서 살기를 부탁합니다. 빛은 어떤 어두움도 이기는 법이니 어둠에 속하지 말고 우리 주님처럼 빛을 비추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한사람 한사람 이렇게 살다보면 평화는 하느님이 선물로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게 고작이다. 추기경님은 어려운 말씀은 하나도 섞지 않으셨고 음성 또한 잔잔하게 느릿느릿 말씀하셨지만 참으로 소중한 말씀을 가슴마다 심어 주셨다. 나중 평가회에서 김 추기경님을 만난 시간이 가장 좋았고 평생 잊지 못 할 것이다. 청와대보다 추기경님께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어느덧 엄숙하고 조심스럽기만 했던 분위기는 없어지고 동네 마음 좋은 할아버지를 만나고 있다는 기운이 맴도는 것 같았다. 순서에도 없었는데 캐나다에서 온 박애나(Anna Short) 집사는 손을 번쩍 들고 왠 박스 하나를 들고 추기경님 앞으로 나갔다. “추기경 님, 캐나다에서 온 박애나에요. 저는 빵굽는 여인으로 살아왔어요. 우리집 부엌에서 $15불로 밀가루, 기름, 설탕등 으로 시작하여 제가 20년 간 아직도 홈메이드로 빵을 구어 내고 있어요. 몇년 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캐나다에 오셨을 때 제 빵과 쿠키를 잡수시고 좋아 하신다고 돌아 가신 후에도 한번 주문 해 가셨거든요. 그 후 주문이 쇄도했지만 아직도 홈메이드로 100여 군데 가게에 내고 있어요. 제가 그 쿠키를 구워 왔는데 추기경님이 좋아 하실지 모르겠어요?..” “나도 홈메이드 쿠키 좋아 하지.” 추기경님의 훈수로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 비결은 언제나 노래를 부르면서 빵을 만들거든요. 그러다가 노래 공부를 하게 되었구요. 2000명 모이는 교회에 쏠로 가수로, 그외 각 종 사회 활동에서도 쏘프라노 가수로 활동을 해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거든요.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추기경님께서 가수 인순이만 좋아 하지 마시고, 캐나다에 가수 박애나도 사랑 해 주십사 해서 사랑의 노래 한 곡을 바치겠습니다. 추기경님이 총각이시니까 사랑의 노래 좋아 하시지요?” 누구도 말릴 수 없이 신바람이나서 일생일대의 스피치를 하는 박애나를 바라보녀 주최측에서는 손에 땀을 쥐고 나는 나이 많은 수녀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했다. 더구나 “총각” 운운 했을 때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김추경님 같은 어른신께 해서는 안 될 말 이 아닌가? 오히려 김추경님은 소년같은 웃음을 띄우고 “그럼, 좋아 해” 하시니 또 웃음바다가 되었다. 애나의 무대 근성도 한 몫을 했지만 Musical에서 주인공 남녀 두 사람이 노래로 사랑 고백을 하는 것처럼, 그 장면 만은 참으로 로맨틱 했다.

(주: 노래 제목은 나중에 확인 후 올림)

가수 인순이의 신인 시절, 김 추기경님은 TV를 통해 가수 인순이의 등장을 보셨고 그 후 인순이의 열렬한 펜이심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밝히셨다.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인순이라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천명하셨고, 인순이의 공연장 맨 앞자리에 앉으셔서 박수치시며 메스컴에 노출 되시기를 바라셨다. 인순이의 무명 시절이었으니, 누구보다 유별난 치장에다가 노래하는 모습 또한 선뜻 호감이 가는 가수가 아니였음에도 가장 거룩하신 최고의 종교지도자께서 가장 세속적인 가수의 공연장에서 박수치며 흥을 돋우시는 기이한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언젠가 뉴욕에 공연하러 온 인순이는 “김 추기경 할아버지요? 나를 좋아하시는 것은 내가 노래를 잘하기 때문이 아니란 걸 잘 알아요. 그러나 김 추기경님 때문에라도 열심히 해야해요. 이제 지금은 국민 가수도 되었고…. 자신의 CD 에 싸인을 하면서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펜으로부터 변함없이 그리고 그렇게 열렬한 사랑을 받은 가수가 인순이 이외에 또 있을까? “인순이는 무슨 재주로 그런 복을 누리는건데?” 누구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김 추기경님은 노래와 관계없이 인순이라는 특종이 브라운 관에 나타나니 사람에게 필이 꽂히셨고, 관심과 사랑을 폭포수처럼 부으신 것이다. “왜 그러신건데?” 아무도 정답을 가르쳐주진 않았어도 우리는 왜 김추기경님이 그렇게 하셨는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사람은 최소한도 대한민국 안에는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된 날, 한국에 나가있는 둘째 아들이 “어머니, 저를 미국 시민권자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국이 처음으로 자랑스러워요. 미국이 아니라면 어느나라도 그렇게 못할 꺼에요!” 미국 국민들은 그렇게 해냈다.

조국의 민도가 낮고도 좁아서 타민족에 대한 차별의식은 거의 살인적이었음을 한국에서 태어난 혼혈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더구나 흑인 여자 혼혈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미주내에 국제선이 왜 모여 들었는지가 웅변처럼 말하고 있다. 똑같은 땅에서 태어나신 김 추기경님은 낮은 민도를 탄식만 하신 분이 아니시다. 그 분에게 인순이는 한사람이 아니었다.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국제선을 환영 해 주시고 그들의 무례한 농담까지 수용하시면서 그들에게 편안한 웃음을 선물하시는 어른! 우리는 같은 시대에 우리 삶의 한 가운데 함께 숨쉬고 살았음을 감사한다.

캐나다에서 20 년 간 빵을 굽는 여인으로 살아 온 애나는 김추기경님의 혼혈인 사랑을 알고 그냥 지나칠 수 없음은 자신도 혼혈인 자녀 셋을 기르면서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받은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님께 “인순이를 그렇게 사랑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인순이와는 통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인순이를 사랑하시는 김 추기경님은 더 많은 인순이를 만나시려고 불편하신 옥체를 이끌고 한시간 정도 함께 웃으시고, 귀한 말씀을 주시고, 함께 노래하시고, 선물을 하나씩 손수 나누어 주시고, 얼마나 국제결혼여성들을 사랑하시는지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하셨다. 선물을 손에 쥐어주며 일일히 손을 잡고 눈을 맟추시는 신부님, 감히 우럴어 뵐 수 없었다는 자매! 잡아 주신 손등 위로 바윗 돌 같은 눈물 방울이 뚝 떨어저 내리는 걸 나는 바라보고 있었다.

추기경님이 방에서 나가시고 시야에서 멀어 질 때까지 기립한 상태로 조용히 서서 배웅을 하는 자매들을 뒤로하고 수녀님 한 분과 나란히 김 추기경님 뒤를 따르며 사제관 문 앞까지 배웅해 드렸다. “추기경님이 저렇게 즐거워 하시는 걸 처음 봤어요.” 귓속말 처럼 조용히 수녀님이 속삭여 주셨다. 추기경님은 약간 꾸불꾸불한 길로 멀지 않은 길이었지만, 숨이 차신 듯 잠간씩 쉬면서 웃음을 보이시곤 했다. 애나가 드린 박스가 짐이 되실 것 같아서 대신 들어다 드리겠다고 했으나 거절 당했다. “애나라고 했나? 노래하면서 구은 쿠키라니까 이걸 먹으면 노래소리가 들리겠구만, 한국여성은 분명한데, 또 이미 한국여성이 아니야. 노래도 잘하고, 그렇게 자유롭고 씩씩한 여성은 처음이네. 나를 참 즐겁게 해 주었어. 귀한 쿠키도 선물하고 고마운 사람이야!” 가슴에 꼭 안으신 체로 쿠키 상자는 신부님과 함께 문안으로 사라졌다.

꿈에라도 만나 뵙기를 원했던 김 추기경님! 드디어 가까이에서 뵐 수 있었으나 내게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으셨다. 다만 이름도 모르는 수녀님과 김 추기경님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던 사제관 가는 길은 홍복의 길이었다고 가슴에 새겨 두길 얼마나 잘 한 일인가?

“아마도 김수환 총각님께 많은 사람을 앞에 놓고 사랑을 고백한 여자는 나 밖에 없을 걸, 노래를 부르며 추기경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소년같은 웃음이 얼굴에 번지시더라구, 볼이 빨게 지시더라니까.” 그때 찍은 사진을 가보로 보관하겠다는 애나를 비롯해서 그 방안에서 함께 했던 국제결혼 여성들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들인가? 지금 이 소식을 접하고 그들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

김수환 총각님께 사람들 앞에서 사랑을 노래로 고백한 여성은 애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국제결혼여성, 캐나다에서 노래하며 빵굽는 여인의 사랑이 코메디가 아니고 진실한 것이었다고 가정을 한다해도 애나의 사랑과 김 추기경님의 사랑이 같은 것이 아님은 삼척동자도 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침묵의 유언으로 남겨 주셨다. 나는 이옥, 난이, 인순이의 사랑밖에는 모르지만 그 사람들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하셨는지는 숫자로 풀어서 답을 낼 수 있는 계산법이 아니다. 누구인가 찾아 내려고 할 필요도 없다. 사랑받은 사람은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가슴으로 온 몸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나타나신 또 한 분의 부활하신 예수님, 김수환 추기경님! 부활의 영으로 우리와 영원히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겐 삶의 희망입니다. 편히 안식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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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25 14:44:26 *.149.140.210

민들레의 집

 

Feburuary, 18,2009

Henna Y. Hahn(여 금현)

Hillside United Methodist Church, New Hyde Park.

다시 무지개의 집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아들을 죽였다는 억울한 누명으로 28년 언도를 받고 North Carolina, Raleigh(노쓰캐롤라이나 랄리)에 있는 여성 장기수들의 감옥에서 5년간 살던 송여인 석방 운동에 나섰던 길고도 긴 이야기는 접어야 할 것 같다. 다만 송여인 석방 운동 1년 만에 미국의 철통같은 법과 재판과정의 벽을 허물고 그 허물어진 틈으로 송여인은 감옥에서 자유로운 세상에 나왔다. 전국 한인 동포들을 중심으로 했던 석방 운동의 승리를 증명하는 이 사건은 온갖 메스컴의 주목을 받으며 기자 회견을 할 때 “작은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나왔을 뿐!” 송 여인의 짤막한 멘트였다. 내가 늘 감탄하는 것은 무지개 자매들이 원고도 쓰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기가 막힐 정도로 불후의 명언들을 즉흥적으로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석방 후, 무지개교회 담임이었던 나의 수퍼비젼 하에 송여인이 보내지면서 송여인을 돕기 위해 문동환 목사님 부인인 미국인 소셜워커 문혜림(Faye Moon)선생과 함께 무지개의 집 문을 열었고, 무지개의 집 7 주년 기념 행사인 모금만찬 디너 파티가 아스토리아 월드메너의 산드리아 불빛 아래서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무지개의 색갈에 따라 그 해에는 모든 실내 장식을 보라색으로 물들여 놓은 가운데, 지난 7년간 생활 했던 무지개 자매 중에 7명을 선택해서 “무지개 선교사”로 임명하는 예배를 드렸다. “그렇고 그런 여자들을 선교사 임명이라니 말도 안된다”는 일부의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부르도자로 밀듯이 밀어 붙여서 성사 되었다. 즉 자기의 경험에 따라 신앙고백을 하고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믿는 대로 이름을 짓고 그 선교사로 임명한 예배! 내 미니스트리에 절정을 이룬 것으로 회상한다. 앞으로도 그 보다 더 잘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식모살이 18년동안 잔뼈가 굵은 자매는 “살림 선교사”로 무지개의 집 주방을 맡고 음식이 필요한 곳 마다 배달 할 수 있도록 도시락까지 마련했다. 밑반찬을 개발 해 모금 활동도 펴면서 작은 주급도 지불 받았다. 감옥살이의 송여인은 “아리랑 선교사”로 감옥 심방과 필요한 물건을 배달 해 주는 일을 하기를 원했고,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입원 된 후 갈 곳이 없었던 자매는 “무궁화 선교사”로 정신병동에 심방을 일삼을 때 특히 한국 음식을 날라다 주고 손을 잡고 구성진 기도를 해 주는 일을 전담했다. 불법 입국으로 영주권 신청이 불가능했던 자매는 “잔디 선교사”로 무지개 중고품 가게를 운영했는데 그는 정식 직원 대우를 받고 일했다.

 

“해바라기 선교사”로는 무기개의 집 졸업생들을 위해 한달에 한번씩 자기 방에서 모임을 하고 주로 김 밥을 싸서 나누어 먹으며 여행도 하고 맨하탄 나들이도 했다. 송여인과 함께 처음 입주하여 7년간 남아 있어야 했던 자매는 나갔던 자매들이 다시 찾아 왔을 때 큰 언니처럼 알아차리고 따뜻한 환영을 팔자로 잘 한다하여 “무지개 선교사”로 임명했다. 자매들 새벽기도나 예배를 주관 하고 나이와 관계없이 큰 언니의 권위와 위상을 늘 견재하는 것은 그녀의 봉사정신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다.

가장 맹렬한 활동력과 교포 신문에 많이 오르내린 “민들레 선교사.” 난이는 자신이 홈레스 출신으로 무지개 자매가 된지 2년 만에 홈레스 선교를 개척했다. 즉 자기가 홈레스로 구걸하고 잠자던 맨하탄 바로 그 거리(32가 브로드웨이)에 나가서 홈레스 한국 여성들을 데려오는가 하면, 줄비한 한국 가게를 들려서 자신의 변화를 설명하고 홈레스 선교 후원자를 만들어 후원금과 주소를 가져 오는 것이다. 후원금은 난이의 설명대로 그 당시 쌀 한포대 값($25.00)이었다. 난이의 간단한 발상에 놀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저 누군지 아시지요? 제가 2 년전까지 이 앞길에서 구걸하던 그 홈레스잔아요. 2년 동안 죽었나 했었지요? 저는 그때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뿌러저 버렸어요. 할 수 없이 무지개의 집에 들어 갔구요. 다시는 홈레스는 안하기로 했거든요. 아! 다리를 전다구요? 잘 됐지요.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길에 서서 구걸하고 그 돈으로 마약하고 그랬을 거예요. 걷는데는 아무 문제 없어요. 용건이 있어서 왔는데요. 제가 무지개의 집 신세를 너무졌거든요.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데, 그곳이 워낙 돈이 많이 필요한 곳이더라구요. 그리고 뉴욕의 홈레스 한국 여자들은 다 모아다 놓으니까요. 뭐니뭐니해도 배고픈 거 제일 못참는거거든요. 그러니까 한 달에 쌀 하포대씩 만 주시면 회원이 되시는거예요.. 자세한 것은 여기 신문에 난 것 보시면 되구요. 저를 믿지 못하면 무지개의 집에 전화 해 보세요.”

전화가 빗발쳤고,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 할 수 있는가? 난이의 변화는 기적인 놀라운 일이었고 그녀의 용기에 더 충격을 받았다. 난이의 홈레스 선교는 동포사회의 활력소가 될 정도로 훈훈한 미담으로 번저 나갔다. 난이가 철판깔고 한 왕성한 활동의 결과로 $10,000 모금이 되던 날을 기념해서 아파트 하나를 렌트하여 “민들레의 집”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홈레스 선교를 시작했다. 그 아파트는 스페니시가 주로 살고 있는 허름한 아프트로서 입주나 생활 규칙이 느슨해서 민들레 선교에는 안성마춤이었다. 홈레스 한인 여성들은 무지개의 집으로 엄마 오리를 따라 다니는 새끼 오리처럼 난이를 따라 잘도 들어왔다. 무지개의 집 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아 비교적 커다란 방 세개와 리빙룸 부엌까지 달린 아파트를 새로 더 얻은 것이다. 방하나는 소셜워커 한 사람이 입주하여 그들과 공동 생활을 하게 하니 사무실 겸 침실이 되었고, 난이의 선교 사업을 돕도록 했다. 김수환 신부님의 방법을 도입 해 본 것인데, 난이의 선교도 이야기마다 감동적이었다. 남은 공간에 20여명이 넘는 자매들을 위해 슬립핑 백을 나누어 주었고 나란히 방마다 가득차곤 했다.

“홈레스 없는 세상 만들기, 민들레의 집, 민들레 선교사 난이입니다.” 난이가 주문처럼 외우는 자신의 아이덴티티였다. 신문, 방송에 출연 하길 여러번, 세번의 수상 경력, 모 기관의 년말 노래 자랑까지 해 냈다. 어디에서나 난이의 인삿말은 한결 같았으나 인삿말 자체에서 풍겨나오는 에너지가 사람들을 재압하곤 했다. 얼마 전까지도 코리아 타운 길몫에서 홈레스로 구걸하던 하찮은 여자가 아무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홈레스없는 세상 만들기를 부르짓고 나서니 들을 귀가 준비 안 된 사람들에겐 기가 찰 노릇이었다.

2,000년 봄이었던가? 김수환 신부님이 뉴욕을 방문하셨고, 뉴욕 평화신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신부님이 홈레스 선교회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으시니 무지개의 집 대표가 방문 해 달라는 것이다. ‘꿈에도 만나 뵙기를 원했던 신부님을 드디어...! 더구나 이옥을 불러 주셨을 때 처럼 이번에는 나를, 뉴욕의 하늘 아래서….’ 나는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어떻게 살고 싶으냐? 를 물으면 대답할 내용을 노트에 적어 두었다. 무지개 자료를 읽어 보실 수 있도록 정리해서 봉투에 넣는 일도 잊지 않았다.

“약속을 확인 하려구요? 저 혼자 가서 뵙는 것도 좀 떨리구요. 사실은 “홈레스 없는 세상을 만들기”를 외치고 다니는 홈레스 출신 민들레의 집 선교사가 있거든요. 함께 가면 어떨까 하구요? 이름은 난이입니다.” 하루 전 날 전화를 했다. “아, 실은 추기경님이 시간차로 워낙 기력이 쇄약하셔서 사람을 만나시는 게 무리하십니다. 그럼 또….” 로 전화가 끝난 것으로 보아 꿈은 물거품이 된 것을 알았다.

며칠 후, 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추기경님께서 난이 선교사를 만나시기 원합니다. 사람을 보낼테니 보내 주십시오.” 난이를 만나시려는 추기경님의 바램은 의사의 권고로 다시 취소 되었고, 결국은 TV. 방송을 통해서 추기경님이 하사 하신 금일봉을 받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고, 김 추기경님과 대화를 나누 듯이 함께 동석했던 평화 신문사 담당과 인터뷰 하는 형식으로 끝났다. 뉴욕을 방문하신 길에 추기경님이 금일봉을 하사하신 다는 사실을 알리기 원하신 곳은 캐토릭 재단의 자선사업 기관이 아니었고 홈레스 출신 민들레의 집 선교사 난이였다는 사실이 뉴욕 사회에 이야기 거리로 천파만파 퍼져 나갔고, 무지개의 집에 또 다른 경사로 신문에 오르 내렸다.

“추경님이 뭐하는 사람이오? 엄청 높은 분이신가봐요. 방송국 사람들이 나를 공주나 된 것 처럼 떠 받들더라구요.” 난이는 추기경님 발음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신부님에 대해서도 아는바가 없다고 했다. “추경님요 뭐하는 분이세요?” 난이의 질문을 받고도 선 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왜 난이를 불러내시고 후원금을 주시려고 했는지? 설명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김 추기경님이 어떤 분이시며, 지금 난이가 어떤 대접을 받은 것인지는 말로나 설명으로 가능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난이가 내민 봉투 위에 “홈레스 없는 세상 만들기 선교회, 민들레의 집”이라고 손수 쓰신 필적을 눈물 가득한 눈으로 읽으려니 글씨들이 한 획씩 머리 풀고 공중으로 날아 오르는 것 같았다.

“신앙과 사랑” 이라는 추기경님이 직접 쓰신 책에서 “마더 테레사가 하신 일을 생각하면, 나는 홈레스 한 사람도 제대로 도운 일이 없으니 무익한 종으로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것인가?”를 읽은 기억이 새롭다.

김 추기경님이 “민들레의 집”에 하사 하신 이 사건은 “홈레스 없는 세상 만들기”를 부르짖던 난이의 모기 소리가 “한인 여성 홈레스 없는 뉴욕 사회 만들기”라고 TV. 방송을 통해 나팔 소리 되어 퍼져 나가더니, 신문마다 큼직한 사진과 함께 대서 특필을 했다. 그 후 추기경님이 뉴욕을 떠나시기 전 녹화 방송을 보았다고 난이의 “홈레스 없는 세상만들기”는 사람이면 누구나 노력해야 하는 주제인데 난이가 앞장을 서 주어 감사 한다는 편지를 보내 주셨다.

“우리 민들레의 집에 돈을 주셨는데, 우리가 감사를 해야 하는거 아닌가? 왜 나 한테 감사 하신다는 건지 내 돌대가리로는 앞 뒤가 안 맞는 일이라. 내 어찌 생각해야 하는가?” 난이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도 돌대가리인 것 만은 분명하다. 우리를 돌대가리로 만들기 위해서 하신 일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면 할 수록 말이 부족해서 난이를 이해 시킬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생각 해 보니 난이의 말대로 김 추기경님께 우리가 감사를 해야 하는데 제대로 감사한 인사를 올려 드리지 못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지금 민들레의 집을 거쳐간 모든 자매들을 일렬로 세우고 “김 추기경님, 저희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감사를 올린 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나 뒤늦게라도 해야 한다. 나 혼자라도 해야 한다.

“쥐구멍에 빛을 비추어 주시는 은총을 민들레의 집에 내리셨음은 그 빛을 받아 살아난 사람들이 많음으로 저희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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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24 21:36:50 *.180.75.152
214일차

"윤정아 오늘은 사무실로 나와라 너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
윤정이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수차례하였으나 통화를 거절한다.
오늘은 전화번호까지 바꿨다.
덜컥 겁이 난다. 윤정이의 선택은 뻔하다.
내가 출장 가 있는 동안 주상담원에게 찾아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할 줄 아는게 그거 밖에 없는데
이러다 그 지긋지긋한 곳으로 갈까봐 겁나요"라고 하소연을 하고 갔단다.
친언니에게 연락을 하여 행방을 물었으나 모른다는 대답만 들려온다.
윤정이가 다시 찾아올 힘이 생기도록 기도하는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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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25 13:20:05 *.149.140.210
215일차

라디오에서 ccm "소원"이 흘러 나온다.
평소엔 바쁘다는 핑계로 끼어들거나 과속하는 것에 익순한데
아주 천천히 운전을 한다.
햇살이 따사롭다.
나에게 평화가 스며든다. 
그 가사 한구절 한구절 같은 삶을 살고프다.

              "소   원"
                                            꿈이 있는 자유
  
삶의 작은 일에도 그 맘을 알기 원하네
그길,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해

나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알며
소망,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 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 가는 길만 비추기 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 준다면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살길
나 그렇게 죽기 원하네

사랑, 그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 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가는 길만 비추기 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 준다면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살길

나 그렇게 죽기 원하네
삶의 한절이라도 그분을 닮기 원하네

사랑,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하네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그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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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27 21:15:33 *.180.75.152
216일차

계속되는 허리통증으로 집에서는 누워있을때가 많아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견디기 힘들어 오후에 잠시 시간을 내어 물리치료를 받는 중에 깜박 잠이 들었다.
5분정도 잔것같은데 깊이 잠들었나보다.
몸이 가뿐해진 느낌이 들어 물리치료를 계속 받고 싶어진다.
허나 나에게 주어진 다양한 과제들을 수행해 내기 위해서는 잠시라도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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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28 12:49:31 *.149.140.210
217일차

꿈을 꾸었다.
가족들과 냇가로 놀러갔다.
물속에서 나올 때 서로가 손을 잡아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구름 사이로 많은 무지개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 하늘에서 저 하늘 끝까지 연결된 것도 있었고
작은 무지개들이 많아 다 세지 못하였다.
조금 지나자 하늘에 먹구름이 끼었다.
먹구름은 양쪽에서 몰려왔고 서로 부딪히는 순간 땅도 부딪혔다.
꿈속에서 지축이 흔들리고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지축이 흔들릴때마다 나무들과 사람들 온갖 것들이 튕겨져 나왔고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가족들은 남편과 아들, 나와 딸이 두팀으로 나뉘어 떨어졌다.
나는 딸을 보호하고 지켜내기 위해 무척 애썼던 것 같다.
가족들을 찾아 나서고 숨을 곳을 찾는 중에
아무리 숨어도 오래버티지 못한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알람 소리에 깨어났다.

나는 땅이 갈라지고 뇌성이 치며 우박이 떨어지는 꿈을 20여년전에도 꾼적이 있다.
그 꿈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또 비슷한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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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30 19:51:16 *.180.75.152
218일차

여기저기 고장난 몸을 풀어주기 위해 목욕탕을 찾았다.
평소에는 뜨거운 온탕에 몸을 담그지 않는데 오늘은 푹 담그고 싶었다.
물이 뜨겁지 않아 고온탕에 들어가 몸을 기대고 눈이 감겨 뜨거움을 즐기다.
뜬금없이 윤정이가 떠오른다.
며칠있으면 설 명절인데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윤정이 엄마가 생각나 눈이 더욱 지그시 감겨진다.
"윤정아 설에 엄마 병문안 갈꺼니"
"왜요"
"화요일날 나랑 같이 엄마 병문안 갔다오자"
"신경쓰지 마세요"
"선생님 시간 비워놓을테니 화요일날 같이 가자"
"소장님하고 안갈꺼든요. 저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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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30 20:09:29 *.180.75.152
219일차

잠을 자면서 식은땀을 많이 흘려 잠옷이 다 젖을 정도로 몸 상태가 심각한듯하다.
오늘 하루 이불속에서 몸을 보살피고 싶었으나 오늘 내게 주어진 스케줄이 많다.
평소에 자신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시간을 내어 혹한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집수리활동을 계획한 분들이 일하는 곳에서 도움을 드려야하므로 누워있을 상황이 아니다.
벌떡 일어나 따뜻한 차들을 준비하여 현장으로 달려갔다.
일하는 중간에 적당히 눈치를 봐서 집으로 올려고 마음먹고 갔으나 왠걸
내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간식부터 활동에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준비해오고
쉬는 시간없이 추운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붕위에 올라가서 칼바람을 맞으며
일하시는 그분들을 못본척할 수가 없었다.
예정시간 3시가 지나고 5시 30분까지 8시간 그분들과 함께 했다.
가끔 햇볕이 따뜻한 곳으로 가서 햇볕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행복도 누렸다.
아프고 힘들지만 지지하고 격려해주시는 분들이 옆에 있어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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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1.31 22:26:30 *.180.75.152
220일차

아웃리치 소식지 낱말맞추기 문제를 풀었다며 두 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물세트를 들고 업소를 가던 길에 혜림이를 만났다.
무슨일이 생겼는지 급하게 뛰어가고 있어 인사만 나누고 말았는데 설 잘지내라는 문자가 왔다

"다른 업소 언니들이 문제 맞춰서 선물주고 왔다"
"잉 우리는 왜 안주는거예요?"
"너희들은 문제맞췄다고 연락안했잖어"
"나는 초이스 마추고 일들어가서 못만났어요. 나두 선물줘요"
"이제 늦었거든 메롱@@"
"잉잉 나두 선물받고 싶어요. 나두 줘요"

혜림이나 언니들이 작은 선물에도 받고 싶어한 이유를 안다.
언니들이 그 끈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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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2.01 22:34:26 *.180.75.152
221일차

설 명절을 맞아 지인의 집을 방문했다.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커피를 주문했다.
일본산 식물성 프림이 몸에 좋다며 커피와 함께 내 놓은 프림을
무의식적으로 한숟갈 푹 떠서 입으로 넣었다.
참 부드럽고 고소한 풍미가 입 안 가득 퍼지고 살짝 추억을 불러낸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가정 형편에
서울에 있는 어느 세무과장의 집에 가정부로 일하러 갔다.
2남2녀의 자녀와 부부, 할머니가 살았던 2층집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가족들이 학교와 직장으로 출근할 때까지 밥하고 상을 차리고 준비물을 챙겨주느라
아침은 정신없이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아침마다 식사를 마칠 즈음에 우유를 따듯이 데워
유리컵에 담아 출근하는 세무과장을 위해 우유를 갖다 주곤 했다.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우유.
나는 우유가 어떤 맛인지 궁금했다.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질 무렵 우유를 아주 조금씩 맛보았다. 표시가 안날만큼씩.
그 집에는 내가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것들이 아주 많았었다.
특히 사모님은 친구들을 초청해 커피를 즐겨마셨었다.
커피의 향을 처음 맡아보았지만 사모님이 시키는대로 커피를 타서 갔다주면 모두 맛있다고들 했다.
어느날 부엌에서 커피를 타다 우연히 프림이 어떤 맛인지 궁금해 살짝 맛을 보았다.
아 그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을 감싸는 그 풍미에
나는 자주 부엌에서 몰래 몰래 프림을 한숟갈씩 떠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그집 가족들은  "우유를 먹어볼래?" "커피를 한잔 마셔볼래?"라고 한번도 권유하지 않았었다.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진학할 수 있었지만 육성회비 낼 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고 상심했던 나는 가정부로 들어간 그 집에서
몰래 먹은 우유와 프림으로 그 상심을 달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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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2.06 20:51:35 *.180.75.152
222일차

오후 2시 30분 기차로 설 명절을 지내러 온 시댁 식구들이 모두 돌아갔다.
날씨가 포근하여 식구들과 함께 지내는 기간 동안 별 불편함은 없었지만
늘 명절때마다 많은 식구들을 돌보느라 언니들을 챙기는데 소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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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2.07 00:00:41 *.180.75.152
223일차

전심전력으로 최선을 다한 여정이었는데
아쉽고 부족한 느낌이다
가슴 한켠은 왜 이렇게 차갑고, 시리고 채워지지 않는걸까
왜 나는 전심전력하여 달려가기만 하고 고단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1년간 집안 살림을 도와야 했다.
그 와중에 배가 고파서였는지 집안을 도울요량으로 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광주에 있는 어느 대학교수의 집에서 부엌떼기로 몇달간 지냈었다. 가정부였지.
초등학교 졸업한 아이가 뭘 얼마나 도왔을까.
밥을 태워 야단맞기도 했을테고 설겆이 깨끗이 안한다고 꾸지람도 맞았을터
아침부터 밤늦도록 청소하고 빨래하느라 힘들었겠지.
끄집어낼 수록 아프다.

어쩔 수 없이 굴러온 가난 앞에서 난 동생들을 돌보며 살아야했고 고단해도 쉴 틈이 없었다.
힘들고 외롭기도 했겠지.
살갑게 토닥거림을 받아 본 기억이 없네.
때마다 내게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기에 급급했을뿐.
어린시절 충분한 보살핌을 경험하지 못해서일까.
채워지지 않음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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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윤정
2011.02.08 05:41:39 *.154.223.196
어쩐지 이헌님이 올해부터 7살 딸 둘을 기르실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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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2.11 22:16:58 *.180.75.152
콩두씨 그 마음이 참 부드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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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윤정
2011.02.10 08:26:43 *.154.223.196
잠옷이 젖을만큼 식은 땀을 흘리면서 깨어났다는 걸 여러번 읽었는데 병원에 다녀왔다는 건 읽지 못해서 불안해요. 이때 찾아오라고 양의, 한의들이 긴 시간, 많은 노력과 돈을 들여 수련하였고요, 착실히 부어놓은 의료보험도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겁니다. 여건이 어려우시겠지만 짬내어 한 번 다녀오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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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2.08 15:03:01 *.149.140.210
균형을 잡기위해서는 과거의 경험을 지금 다루어야할듯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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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2.09 12:44:27 *.149.140.210
224일차

식은땀이 나 잠옷이 젖는 상태가 며칠째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상태로는 버티기 작전으로 일괄하기에 무리가 있다.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의 이완을 시도해보지만 효과가 없다.
오늘부터 가볍게 달리기를 시도하다.
새벽공기가 차지않고 시원하게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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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
2011.02.09 18:25:46 *.149.140.210
225일차

과거를 회상하면서 다시 꺼내 든 10여년이 넘은 책.
심리학, 사회학,문화인류학,교육학,경제학,정치학,종교와 철학을 망라한
통합적 근저를 제공해주는 책들을 가까이할 수 있다는거 참 좋다.
전공관련서들이 이제서야 이해되기 시작하니 다행인게지.
고립적인 상태에 처한듯 처연하다가 먼저 고뇌한 선각들이 정리해준 맥락들이 고맙다.
언니들을 잘 돕기 위해선 먼저 나의 여정을 깊이 이해하고 보듬자.
오늘은 Perls의 형태주의적 접근을 학습하다.
특별히 성격 발달 중 영적단계(spiritual stage)가 재미있다. 
"해야 하는 것(shoulds<self-image>)과
"원하는 것(wants<self>)"사이에 균형을 발달시키고자 애쓰는 나를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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