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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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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일+

단군의

  • 김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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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1일 15시 14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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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25:36 *.109.80.171

001일차 (4월 18일)

연구원 생활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자신을 만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글을 통해 자신을 만나고 돌아온다. 그들의 글을 읽으며 그 흔적을 엿본다. 그들은 자신들의 글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들은 나에게 보이지 않는 거울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 거울을 통해 또 다른 내 모습을 본다. 놓치고 잊혀져 있는 내 자아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어두운 그림자까지 함께.

알고 있다. 지나치게 삶이 한 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그래도 내 오른발에 묶인 안전 로프가 나를 현실 세계로부터 유리되지 않도록 지켜준다. 내가 꿈꾸는 세계로의 비행을 다녀오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괴리감과 그 괴리감으로 인하여 찾아오는 따끔함이다. 그들의 글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들의 글에는 혼이 담겨져 있다. 내가 써놓은 글을 보니 자꾸만 부끄러워져 어디론가 숨고 싶다.

내가 이렇게 치열해지는 이유는 현실의 날카로운 고리가 언제 나를 낚아채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할 수 있을 때 해두자는 심산이다. 이것도 일종의 또 다른 집착. 가볍고 경쾌하게 가고 싶은 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동안 내가 해온 연습은 '무조건 앞으로' 였다. 잠시 쉬어가는 법도, 어깨와 양손에 있는 짐을 내려 놓는 법도 잘 알지 못한다. 아무 것도 내려 놓지 못하는 미련한 자신이 측은하게 여겨진다.

왜 한 곳만을 보고 가는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이 나를 미련하게 한 곳만 향하게 만든다. 그렇게 부여된 관성은 멈추는 것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든다. 또한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무한 질주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한다. 눈 막고, 귀 막은 질주하는 불의 전차와도 같다. 자! 이 다이내믹 한 영상에 과감히 정지 버튼을 누른다. 이렇게 멈출 수 있다. 잠시 모든 것을 내려 놓는다. 무엇이 보이는가? 무엇이 들리는가? 무엇이 느껴지는가? 관념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온 몸으로 느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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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26:23 *.124.233.1

002일차 (4월 19일)

오늘로 정확히 3번째 단군프로젝트의 100일이 끝났다. 출사표를 던지고 출정한 2010년 5월 24일부터 300일차 마지막 날인 2011년 4월 19일까지 총 331일 중 열흘을 제외한 321일을 새벽 4시 전에 깨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담담하다. 담담할 수밖에 없다. 내게 있어 새벽 기상은 해치우고 끝내버려야 하는 과제가 아니라 하나의 생활양식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실감이 나질 않지만, 새벽이면 글로나마 늘 보던 단군사우들과 볼 수 없다는 것. 시간이 지나면 사무치게 그리워질 것이다. 늘 그래왔으니깐. 다행히도 늘 출석 체크를 하던 꿈벗 30기 단군도 아직 27일 남아 있고, 7기 연구원 단군 프로젝트도 이번 주 월요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래서 아직 크게 허전한 것은 없다.

또 다행인 것은 여정 마지막에 대한 감회를 지난 주에 칼럼으로 정리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미완성이지만 대장정이 끝나기 전에 미리 갈무리를 해둔 것이 그나마 허전함을 달래주는 것 같다. 아직 그들의 댓 글에 답을 달지 못했고, 금요일 저녁에 있을 마지막 파티에 참석하는 것도 미지수다. 영광스러운 마지막 자리인데, 양평에 내려가야 할 것 같다. 되도록이면 토요일에 내려가도록 조정은 해보겠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아직 비밀 친구에게 선물도 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마무리가 중요한데, 너무나 아쉽고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를 놓치면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내게 있어서는 봄이다. 매일 새벽에 같은 시간에 일어나다 보니 하루하루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늘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올 봄에 꼭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새벽에 중랑천을 거닐며, 새벽녘 가로등 아래 꽃 피운 개나리와 벚꽃을 보는 일이었다. 유난히 추웠던 이번 겨울 중랑천을 거닐 때마다 꿈꾸었던 풍광이다. 아직 못 보았다. 이번 주 일요일은 반드시 볼 수 있길. 또 하나는 처가인 쌍문동에서 우이동 쪽으로 향하는 길, 그 길가에 나란히 늘어선 벚꽃 길을 보는 일이었다. 왠지 모르게 나는 그 길이 참 좋다. 전생에 그곳에 살아서일까? 몇 년 전 장모님, 장인어른을 모시고 잠시 다녀온 봄의 그 길이 매년 봄마다 나를 사무치게 그립게 한다. 역시 이번 주에 꼭 보고 싶다. 물론 벚꽃 비가 이미 다 내리고 난 후겠지만.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다' 라는 배움을 가슴으로 얻은 하루였다. 관계로 인하여 매일 극심한 갈등에 시달리던 내게 찾아와준 단비 같은 답이다. 물론 그 전에 이 말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6기 인건 형님과 소중한 사우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 아름다운 원칙이 탱크의 장갑 같은 내 가슴 속에 작은 균열을 찾아 스며 들어 왔다. 정말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이야기 해 주었다. '너 잘 하고 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처럼 편안하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람하고 밥 먹고, 내일을 위해 일찍 집으로 돌아와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마음을 자아내어 친해지려고 하지 말아라. 이런 말들 말고도 그들은 내게 너무나 많은 소중한 조언을 해주었다.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갔고, 그제서야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홀로 지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일 명치 끝을 날카롭게 찌르던 그 바늘을 없애버린 느낌이었다. 물론 다시 나타나 또 나를 찌를지도 모르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너무 행복했다. 늘 펼치던 책도 어제는 그냥 접었다. 그 여운을 누리고 싶었다. 가슴으로 되뇌었다. '결국은 사람이구나' '결국 사람이구나' 몇 번을 되풀이 해서 되뇌었다. 우주의 섭리가 내 존재의 빈 곳을 잔잔히 메워주는 값진 순간이었다. 함께 할 수 있어 멀리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음 번엔 반드시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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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27:11 *.124.233.1

003일차 (4월 20일)

오늘 오전 오후 휘갈겨 쓴 글만 7장이 넘었다. 어제 재경 누나가 해준 말이 종일 가슴에 위안이 되어 준다. <어쩔 수는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다> 오늘 이 말만 수십 번을 되풀이 해서 썼다. 영웅의 여정 중 <출발> 단계를 지나 본격적으로 <입문>의 길에 들어섰다. 초심자의 행운은 끝이 나고 <시련의 길>이 시작되었다. 지난해 <단군프로젝트>에 비하면 몇 곱절은 더 큰 정신적 압박감이다. 그 때는 그저 새벽에 일어나기만 하면 되었었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강도가 좀 많이 세다. 연구원 과제가 일단 만만치가 않고, 회사에서도 프로젝트를 하나 맡게 되었고, 부모님께도 문제가 있다. 또한 회사 안에서의 관계도 만만치가 않다. 매일 지뢰밭을 걷는 심정이다. 벌써 4일째 이어지는 오른쪽 어깻죽지의 통증은 압박감과 긴장감의 정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쉬울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새벽에 나를 눈뜨게 하는 것은 반은 습관 반은 두려움이다. 잠이 아까울 정도로 설레어 일어난 적은 많지 않다.

새벽 기상은 자칫 흔들리고 무너지기 쉬운 불안한 내 삶을 받쳐주는 기둥과 같다. 적어도 내게 새벽은 그러한 의미다. 나의 정체성을 새벽에 투사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나보다 훨씬 불행하고 부족하지만, 속으로는 세상 모두를 가진 것처럼 행복한 사람을 찾아보려고 한다. 신체적 장애, 정신적 장애를 극복하고 용기를 내어 즐겁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비록 세속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하고 자신을 바쳐 세상에 헌신하는 사람들. 그런 평범한 영웅들을 찾아보고 싶다.

두려움의 골방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무엇이 나를 압박하고, 쫓으며, 괴롭히는 용인 것일까? 알고 보면 그 실체는 나 자신일 것이고, 허상일 것이다. 그 어리석음에 틀에서 벗어나 훨훨 나는 것이 내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이다. 행복하기 위해 하루를 치열하게 살기로 한 것이 아니던가? 중요한 가치들을 희생시켜야만 해낼 수 있는 것이라면 당장에 때려치울 것. <자승자박>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스스로를 포박시키는 것이다. 그런 우매함에 빠져들지 말라. 즐기자. 어떻게? 웃자.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면 즐거워진다. 즐길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즐기고 보자. 그러면 그런 환경이 따라와 줄 것이다. 행복을 뒤로 미루지 말자. 먼저 행복하자. 대신 두려움은 뒤로 미루자. 어떻게? 그냥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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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27:55 *.124.233.1

004일차 (4월 21일)

밤 10시 이전에 잠 자리에 들기가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는 일보다 더 힘들다. 정말 그렇다. 수면 부족은 당장에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서서히 스며드는 독이다. 종일 졸리다. 그리고 집중력이 저하된다. 뭔가 하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깊이가 떨어진다. 질적 가치가 저하된다. 주말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피로가 더욱 더 가중되어 고단함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단군 프로젝트 300일 종료 후 기상 시간은 여전히 규칙적이지만 첫 차를 타고 출근하는 일과 순수하게 2시간을 몰입하는 일에 약간의 기복이 생기기 시작했다. 건강 면에서도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며 헬스를 중단 후 출퇴근 왕복 4km 걷기와 하루에 계단 13층 두 번 오르기가 하루 운동량의 전부다. 매주 일요일 하던 중랑천 산책도 2주를 걸렀다. 물론 다른 활동으로 대체된 것이긴 하지만, 내 영혼의 양식을 충전하는 의례라는 점에서 마음이 공허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지난해 말 한창 운동에 몰입했을 때, 그때도 시간이 남아 돌아서 운동했던 것이 아니다. 하루의 우선 순위로 올려 놓고, 시간을 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시간을 내지 않고서는 운동도 관계도 공부도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우선순위를 그곳에다 두다 보니 상대적으로 미약해진 부분이 많다. 이미 예측했던 결과다.

지금 내 삶을 지탱하는 것은 새벽기상을 중심으로 한 짜임새 있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이라고 하니 좀 차갑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 체계적인 하루의 시스템 덕분에 매일의 반복과 수련이 흔들림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 내게 하셨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긴다. "매일의 힘, 그것에 의지하면 세월이 너를 키울 것이다." 사부님의 저서 <깊은 인생>에 나오는 구절  "나의 낙관의 근거는 분명하다. '매일의 습관'이 나를 이끌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이 시스템은 예외 없이 철두철미 하게 지켜져야 한다.

문득 훈이 형님이 생각나 전화를 드렸더니 근처에 계셨다. 만나서 술 한잔 하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마음이 맞는 사람에게 먼저 연락해서 만나고, 함께 노래를 불렀던 일이. 아주 오랜만에 느껴본 소통의 순간이었다. 그 동안 참 오랫동안 스스로 고립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제 서서히 열기 시작한다. 나 이 사람들이 너무 좋다. 너무 좋아서 보고 싶다.

스스로에게 철두철미하고, 자유롭게 더불어 어울리는 일, 이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이것을 하나로 녹이는 연금술을 발휘하는 것이 삶을 잘 사는 비결이다. 나는 잘 살고 싶다. 마음 공부도 많이 해서 인생 MBA 수료하고, 너무나 좋은 이 사람들과 어우러져 평생 친구가 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말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삶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소중함이다. 연구원을 마친다는 것도 책을 쓴다는 것도  함께 시작한 동지를 평생  껴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온 힘을 다해 그 시간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힘껏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이냐?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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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28:47 *.124.233.1

005일차 (4월 22일)

두 번 읽기 주가 잘못하면 이도 저도 아닌 한 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의 의도는 책을 깊게 읽으라는 의도임에도 성급한 독서에 길들여진 나는 두 번째 읽음에 있어 서두름과 나태함을 동시에 느낀다. 눈으로는 두 번을 읽지만 깊이는 깊어지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 과제에 대한 심리적 비중을 줄이고, 회사와 관계에 관한 비중을 늘리려는 시도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래 가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움켜쥐는 것은 쉽지만 움켜지는 것을 놓는 것은 곱절 힘들다.

병곤 형님과 여수에서 올라온 선관 누나를 만나 점심을 먹었다. 선관 누나는 지난 300일 간 함께 해 온 단군 사우다. 내 300일을 잘 안다. 그리고 내 허 접한 단군일지를 꼼꼼히 읽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나와 공통 관심사가 많다. 법정스님을 존경하고, 융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에 대한 누나의 애정 어린 조언은 100% 신뢰할 수 있다. 그런 누나가 이번에 여수에 카페를 차린다고 하셨다. 기회가 되면 반드시 내려가서 축하를 해드리고 싶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누나는 나에게 어울리는 키워드를 몇 개 이야기 해주었다. 모두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나에게 어울리는 키워드다. 고맙고 또 고맙다.

훈이 형님 말씀대로 가볍고 경쾌하게 가려고 한다. 너무 무거우면 오래 갈 수 없다. 매일 즐겁고 경쾌하게 나아가야 한다. 물론 힘든 적과 맞설 때는 온 힘이 실린 한 방을 날려야 하는 무거움이 있지만, 나의 발걸음과 몸짓은 늘 가볍고 경쾌한 쾌 검이 될 필요가 있다. 나의 목표는 회사 생활의 성공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인생, 깊은 인생을 사는 일이다. 그렇다.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깨달아진 것을 밝게 빛내기 위함이다. 본래 청정한 내면의 밝음을 닦는 일인 것이다. 그 기본 단위가 오늘 하루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양평에 내려와 어머니께서 해주신 카레와 김치찌개를 먹었다. 최고다. 늘 어머니의 음식에서 사랑을 느낀다. 그리움을 느낀다. 오래오래 이 음식을 먹고 싶다. 암브로시아와 넥타르 부럽지 않다. 작은 김치 조각 하나라도 좋으니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이 음식을 오랫동안 먹고 싶다. 늘 그리운 나의 가족들. 사람에 대한 집착은 도심(道心)을 성글게 한다는 어느 수행자의 말이 떠오르지만, 출가한다고 하여 관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님을 안다. 출가 수행자나 재가 수행자 모두 사람 사이에서 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당신들의 손을 꼭 잡고, 꼭 안아드리며,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아주 많이 만들어 볼 것이다. 결국은 사랑이고, 사랑은 곧 사람이고 자연임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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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29:43 *.124.233.1

006일차 (4월 23일)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 정도 모닝페이지와 수련일지를 썼다. 방에서 나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2시간을 보냈다. 깊은 이야기를 썼다가 이내 다시 일지를 쓴다. 아직은 그냥 가슴 속에 담아 두고 싶다. 동생과 조카들을 데리고 왔다. 졸음이 쏟아졌다. 잠시 눈을 붙이고 아내와 산책을 나섰다. 벚꽃은 지고 있지만 봄은 남아 있었다. 아.. 저 산의 연두 빛 물감을 어찌하면 좋은 것인가? 자연은 우리에게 이렇게도 아름다운 경이를 안겨주는데 인간인 나는 그 좋은 기운을 받아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가? 소모하고 더러운 기운만을 내뿜는 것은 아닐까? 감히 아니라고 말 할 수는 없다.

나를 지배하고, 나를 움직이게 하는 커다란 감정 중 하나가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접근할 수록 힘들어 진다. 아직 내 마음이 마음의 준비를 못한 것 같다. 그저 마음이 자연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까지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연구원 생활 이후 지속적으로 쫓기는 듯한 일상.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명상이다. 연구원 생활을 하는 내내 과제와 칼럼, 책 쓰기는 계속해서 나를 다그치며 뒤쫓을 것이다. 스트레스가 될 것이다. 관점의 전환. 그것들로부터 쫓기지 말고, 그들을 쫓아 보는 건 어떨까? 말이 쉽지 어려운 일이다. 당장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는다. 그러나 아주 좋은 생각이다.

내가 매일 고통스럽게 부딪히고 깨지고 하면서 거칠게 단련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균형과 조화>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관계, 일, 사랑, 가족, 미래, 연구원, 과제, 책 쓰기, 독서 등등> 나는 내 삶을 이루는 수 많은 요소들에 대한 깊이와 중요성을 관장한다. 정해진 에너지 범위 내에서. 이것은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회사를 이끌어 가는 경영하고 비슷하다. 벅차다. 때로는 괴롭다. 내 영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2가지 방법이 있다. 삶의 역할과 요소를 축소 시킨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정리 정돈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또 하나는 정해진 에너지를 늘리는 일이다. 다시 말해 잠재력을 끌어 올리는 일이다. 이 또한 쉽지 않다.

내가 <맑고 향기롭게, 단순하고 간소하게>라는 법정스님의 사상과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라는 엔서니 라빈스의 책을 그 동안 바이블처럼 끼고 살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아마도 내 생활방식, 사고방식의 7할 이상이 그들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나의 부족함이 그들의 위대한 사상을 따라가지 못할 뿐이다. 늘 내 안에서 수 많은 가치들이 으르렁거린다. 밥과 존재, 안정과 도전, 개인주의와 이타주의 등등 수 많은 역할과 가치들이 부딪히고 깨지며 한시도 쉬지 않고 소동을 피운다.

이런 소동에서 잠시나마 나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바로 <명상>이다. 나에겐 걷기 명상이다. 앉아서 하는 명상은 아직 잘 하지 못한다. 졸음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잘 안 되긴 하지만, 걸으며 명상하는 동안 나는 되도록 많은 것을 내려 놓으려고 한다. 근심 걱정, 집착, 번뇌. 이런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높은 언덕으로 올라간다. 그 언덕 위에 올라 거대한 마음의 강을 들여다 본다. 온갖 일렁이는 감정들과 생각들로 가득 찬 저 강을 그저 무심히 지켜본다.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초연하게 그 흐름을 지켜보기만 한다. 그렇게 하는 것 만으로도 내 마음은 위안을 얻는다.

이런 시간을 자주 갖고 싶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매주 일요일 새벽에 하는 2시간의 중랑천 걷기가 그 역할을 해주었는데, 2주를 쉬었다. 가끔 그 마음에게 조차 부담을 안 기는 경우가 많다. 그 시간에 과제를 생각한다거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단서를 찾으라는 부담을 안기기도 한다. 되도록 삼가 하려고 한다. 그래. 내가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무거운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가볍고, 경쾌하게, 그렇게 단순하고 간소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함이 아닌가. 그건 지금도 할 수 있는 일. 잠시 내려 놓고 길을 다녀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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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30:53 *.124.233.1

007일차 (4월 24일)

1주일, 7일차의 관문을 넘어섰다. 이제는 몸에 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늦게 자면 새벽에 피곤하여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지난 1년간 이 피로감과 지독하게 으르렁거리며 싸웠다. 그러나 이내 깨닫는다. 싸워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것. 때로는 얻어서 독이 되는 일도 있고, 버려서 득이 되는 일도 있다. 잠과는 결코 싸워서는 안 된다. 잠은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3당 4락 이란 말이 공부하는 학생들을 혹사시키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아마 그런 말을 지키는 대단한 학생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었다. 잠을 줄이고 수련을 하는 것이 미덕인 줄 알았다.

미련한 일이다. 잠은 충전이다. 몸도 마음도 쉬게 하는 충전이다. 깨어있는 시간에 사용한 몸과 정신의 톱날을 가는 줄의 역할을 한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하루를 집중할 수 없다. 애초에 그런 걸 바랬던 것이 아닌데 말이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잠 만큼은 예외가 되었으면 한다. 잠만큼은 지켜주었으면 한다.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나를 옥죄는 것은 무엇인가? 생과 사의 갈림길인가? 잠을 이를 수 없는 비탄 때문인가? 그렇지 않은 시시껄렁한 이유 때문이라면 잠을 자라. 스스로에게 간절하게 전하는 가슴의 메시지다.

대부분의 스트레스의 원인은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 때문이다. 그 두려움과 걱정에는 결코 실체가 없다. 실체가 되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많지 않다. 거의 대부분이 지레 짐작한 걱정과 근심이다. 아직 현재에 나타나지도 않은 적을 미래로 부터 끌어와 지금 전전 긍긍하고 있다. 시간 밖에 살아도 즐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삶에 있지도 않은 괴물을 끌어와 미리부터 걱정하고, 어깨를 짓누르는 이 어리석음을 어찌 하면 좋을까. 무거운 짐을 저 불구덩이 속에 던져 버리고 다 태워 버려라! 그리고 나서 가볍고 경쾌하게 달려 나가자. 그리고 훨훨 날아 오르자. 대신 이카로스처럼 개념 없이 높이 올라 추락하지 말자.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된다. 두꺼운 책이 나를 기다린다.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지금까지 지켜보면 늘 솟아날 구멍은 있더라. 회사일? 집안일? 언제는 이런 게 없었나?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기왕지사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고, 머리와 어깨 무겁게 살지 말고, 지금 이 순간 그냥 웃으며, 가볍고 경쾌하게 가자. 신화도 배웠으니, 이왕지사 삶에 좋은 은유를 무더기로 선물하자. 나의 하루가 눈부신 햇살이 되게 하기 위하여. 향기로운 꽃 향기가 되기 위하여. 내 삶을 위한 건배제의 아주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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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31:55 *.124.233.1

008일차 (4월 25일)

마음 같지가 않다. 마음 같지 않을 때 생기는 증상이 명치가 따끔거리는 현상이다. 예전에 뇌뿐만 아니라 소화기관에도 감각 수용기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기억이 난다. 연구원 레이스를 시작했을 때 시작된 증상인데 요즘 들어 더 자주 이 증상이 나타난다. 그만큼 스트레스 상황에 많이 노출되었다는 얘기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쓸 때, 출근 길에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때, 사무실에 도착하여 조용한 분위기에서 과제를 수행할 때까지는 말짱하고 평안하다가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씩 사무실에 도착하고, 시끌시끌한 파트장이 사무실에 도착한 다음부터 이 증상은 시작된다.

동료들의 과제를 읽었다. 하나같이 가슴을 울리는 글들이다. 원래 오전에는 일에만 몰입하려고 했는데, 한 번 읽고 코멘트를 달기 시작하니 멈출 수 없었다.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점점 위험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 수록 콕콕 쑤시는 아픔은 더 세진다. 화장실에 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변기 뚜껑을 덮고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감는다. 마음이 쉬 가라앉지 않는다. 피로가 몰려왔다. 자세가 흐트러졌다. 깜빡 하는 사이에 졸은 모양이다. 깨고 나니 아팠던 명치가 괜찮아졌다.

자리에 돌아와 일을 하려다 재경이 누나 Me Story 파일을 열었다. 누나의 글에 빨려 들었다.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어내려 갔다. 중간 중간 눈물이 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다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누나한테 함부로 까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들도 누나들도 그리고 동생들도 하나 같이 알면 알 수록 고개가 숙여지게 만든다. 나를 더욱 더 낮추고 낮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훌륭한 동기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나도 내 Me Story를 올렸다. 마음을 문을 여는 문고리는 내 안에 있다는 믿음과 함께.

단군 1기 부족장 형님이 300일 종료 기념으로 부족원 들에게 어울리는 음악과 직접 만든 동영상과 함께 손수 적은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오셨다. 오후에는 단군 마니또로부터 소포가 왔다. 회색 가디건이다. 젠장. 이렇게 감동적일 수도 있구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막막하다. 어떻게 이들에게 보답을 해야 할까?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오늘 따라 더욱 더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대학 입학 후, 회사 입사 후 진정한 우정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많지는 않지만 좋은 인연은 언제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말 복 많은 사람이다.

불현듯 고등학교 은사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사고를 해라" 이 말이 나를 찾아온 이유를 떠올려 본다. 자꾸 부딪혀서 자신을 학대하지 마라. 출렁이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라. 감정도 관계도 꿈도 모두 다. 태도가 이런 갈등을 해소시켜주리라 믿지만 아직은 서투르다. 그렇게 나는 매일 온몸으로 성장통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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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32:39 *.124.233.1

009일차 (4월 26일)

요새 새벽에 눈을 뜰 때 가장 먼저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나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가?> 행복한 마음으로 시작하는가? 아니면 두려운 마음으로 시작하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쫓기는 듯한 두려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대체로 그렇다. 사람을 행동에 이르게 하는 데 2가지 원리가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좋아 죽어서 하고 싶어 미치는 일, 하나는 너무 괴로워서 피하고 싶은 일 두 가지다. 다시 말해 즐거움을 좇는 일, 괴로움을 피하는 일. 매 순간 우리의 선택을 이끄는 데 있어서의 근본 원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새벽 기상을 실천하기 전에는 늘 아침에 이런 전쟁을 하곤 했다. 자명종 소리에 눈을 뜬다. 조금만 더 자자. 두 번째 알람이 울린다. 조금만 더. 조금 더 자면 혼잡한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한다. 까짓 꺼 잠만 더 잘 수 있다면야. 이윽고 세 번째 알람이 울린다. 땀을 뻘뻘 흘리며 허둥지둥 사무실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나를 바라보는 상사의 불편한 눈초리.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 불편한 눈초리가 행동의 지렛대가 되어 나를 일어나게 한다. 이것이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행동하는 대표적 사례다.

소풍 날, 여행 가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새벽은 알람이 필요 없다. 설레는 마음에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전 날 설레는 마음으로 늦게 잠들어 몇 시간도 못 잤음에도 어서 빨리 그곳으로 당장 달려가 행복을 만끽하고 싶다.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다. 이것이 행복을 찾아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대표적 사례다. 나는 이 두 가지의 미묘한 차이를 밝히는 일에 내 삶을 걸어보기로 했다. 둘 다 사람을 행동으로 이끈다. 하나는 괴로운 감정을 피하기 위해, 또 하나는 행복한 감정을 더 많이 느끼기 위해.

그런 의미에서 내가 새벽에 일어날 때 느끼는 첫 번째 감정은 행복한 감정을 더 많이 느끼기 위함이라기 보다, 괴로운 감정을 피하기 위함이 크다. 매일 같이 해오던 새벽 4시 기상의 일관된 흐름을 깨버렸다는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첫 차를 타지 못했다는 자책을 피하기 위해 등등. 생각해 보니 내가 정한 어떤 기준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자괴감을 느낄까 두려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것이다. 늦게 까지 잠을 자서 얻는 감정적 이득보다 그로 인해 생기는 고통의 무게가 더 클 것이라는 기대가 나를 행동으로 이끈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얼마나 쏠린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가 느껴진다. 내가 가진 강점이 참으로 양날의 검과 같은 것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일관성에 대한 집착 등 한 측면에서 보면 성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필수요소가 다른 측면에서 보면 피곤한 삶의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관성을 사수하는 대신 나는 무엇을 잃게 되는가? 내게 정말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내가 정말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잊게 한다.

고마운 재경이 누나가 달아준 나의 Me Story에 대한 댓 글을 보고 이 일지를 쓰게 되었다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의 저자인 엔서니 라빈스도 그런 얘기를 했다. <그저 목표를 성취하지 말고, 행복하게 성취하라고> 과정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 것이다. 이왕지사 길을 떠나 길 위를 걷기로 한 거 앞만 보고 걷지 말고, 위 아래 앞 뒤 좌 우를 둘러보며 한 걸음씩 걸어가자. 인생은 짧지만 또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인간은 어리석어 짧은 시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과대 평가하고, 오랜 시간에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일을 과소 평가한다. 고개를 들어 파란하늘과 흰 구름을 보고, 좌우를 둘러보면 예쁜 나무와 꽃들이 나를 보며 속삭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벗이 있다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다. 그래 행복하게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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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33:25 *.124.233.1

010일차 (4월 27일)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밤을 지새웠다. 예전엔 이런 시간이 일상의 다반사였는데, 지난해 단군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저녁에 술 마시는 일, 밤을 지새는 일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새벽 2시간을 얻는 대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과 어울리며 대화를 나누는 일도 줄어들게 되었다. 최근에 느끼는 대인관계에서의 여러 불편한 감정들은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 버린 균형감각 상실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모 아니면 도 식의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일곱 빛깔 무지개식의 스펙트럼 식 사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게다가 내 사고방식은 너무나 경직되어 있다. 사고의 유연함도 필요하다. 대안들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구체적이지 못하다. 이 또한 나의 불편한 감정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곤 한다.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나를 향해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은 고맙다. <홀로 있을 수록 함께 할 수 있다>는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좋아한다. 나는 이 말 속에서 늘 <홀로 있음>의 가치만을 중요시 여겼고, 이 <홀로 있음>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함께 할 수 있음>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 <함께 할 수 있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살이의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는 과정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며칠 전 희석이 형과 만나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차를 마시며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생각나는 이야기 중 하나가 <경인이 너는 다른 사람들이 너를 돕고 싶게 하는 어떤 뭔가가 있어> 라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에게 <나는 사람 복은 참 많아>라고 스스럼 없이 이야기 하곤 한다. 필요한 순간에 누군가가 나타나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주곤 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수 많은 상념에 사로잡혔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잠이 부족해 지는데, 아내에게 미안해 지는데, 아직 과제 도서도 다 읽지 못했는데, 칼럼도 다 못 썼는데, 내일 프로젝트 PT가 있는데..> 등등. 그냥 뒷일 걱정하지 말고 그 순간에 그렇게 있으면 그만이었는데, 이도 저도 아닌 시간만 보냈다. 그리고 내겐 이런 식의 고민으로 증발해 버리는 시간들이 많다.

많은 사람들의 따스한 눈 빛과 손길을 놓칠 뻔 했다. 사부님의 주옥 같은 조언과 이야기를 놓칠 뻔 했다.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 호혜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피곤하다. 지친다. 상현이 형 말이 떠올랐다. 그냥 하루 늦게 일어나고 몸도 챙기고 동료들에게 숨 쉴 틈도 줘요. 콱 와 닿았다. 결국 혼자지만,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그 순간이 내게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나를 감싸고 있던 두꺼운 알 껍질에 미세한 작은 균열이 난 것 같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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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6:07:20 *.124.233.1

011일차 (4월 28일)

새벽 3시가 넘어 들어와서 한 시간 남짓 잔 후 일어나 출근을 했다. 오전엔 피로한지 전혀 몰랐는데, 점심을 먹고 들어오니 갑자기 피로가 쏟아졌다. 23층에 올라가 창가에 앉아 명상음악을 들으며 눈을 붙였다. 그래도 피곤이 가시지 않았다. 어제 휴가를 내어 오전 내내 도서관에서 과제 도서를 읽었는데, 다 읽지 못했다. 오늘 중으로 1회독을 마무리 지어야겠다. 업무시간 중에 틈틈이 저자에게 관한 자료를 조사하려 했으나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자꾸만 보채고 다그쳐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마음 편한 글을 적었다.

매일 샤워를 할 때마다 법정스님의 수필을 김세원 성우가 낭독한 <연꽃 향기를 들으며>를 듣곤 한다. 그 중에서 <당신은 행복한가>와 <시간 밖에서 살다>를 즐겨 듣는다. 적어도 샤워를 하는 그 순간 만큼은 마음이 넉넉하고 편안해진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많은 갈등을 한다. 퇴근해도 되는 시간인데, 그래도 일지를 통해 하루를 정리하고 들어가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 그냥 적어내려 간다. 시간이 몇 시라고 해서 자꾸 거기에 얽매이면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분위기에 휩쓸려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게 된다.

나는 매일의 위대함을 믿는다.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는 유려한 글쓰기가 아니다. 글 솜씨를 향상시키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나의 글쓰기는 나를 발견하기 위함이다. 나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호흡과 같은 자연스러움이다. 잘 알고 있다.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글을 쓰게 되면 피곤하고 고단해진다. 얽매이게 되어 되려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고 전개도 되질 않는다. 좋은 글을 써본 적은 없지만 편안한 글을 쓸 때 나 자신의 깊은 곳과 더 쉽게 마주하게 된다. 나는 그런 글이 나름대로 좋은 글이라 여긴다.

마음이 급하여 쫓기게 되면 될 것도 되지 않는다. 마음의 얕은 곳에서 허둥대기만 할 뿐 마음 속의 깊은 속삭임을 끌어 올릴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내게 있어 명상과 같다. 글을 통해 내 마음과 만난다. 또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책을 쓰기 위함이 아니다. 책을 쓰는 것은 하나의 결과일 뿐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진다. 내가 목적으로 여겨야 하는 것은 내가 1만 시간을 바쳐 천착하고 싶은 그 무엇을 발견하고 거기에 매진하는 것이다.

그것을 흔히 <천복>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게 정말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앞으로 내가 보낼 1년 동안 내가 찾고, 발견해 내고, 천착하여 갈고 닦으며 매일 수련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삶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시간적, 물리적 자유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심리적 자유, 마음의 평화가 중요하다. 걸어서 퇴근하며 또 다시 내 마음과 만날 것이다. 천천히 걸어야겠다. 천천히 걸으며 시간 밖에서 내 마음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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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6:08:11 *.124.233.1

012일차 (4월 29일)

쉽지 않은 한 주다. 쉬울 거라고는 생각해 본적 없다. 다만 쉽지 않은 이유가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무엇 때문에 쉽지 않은가? 부담감과 압박감, 그리고 부끄러운 게으름이다. 레이스 때보다 마음이 풀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존재와 밥 사이의 으르렁거림. 그 동안 압박감과 스트레스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 안아야 하는 것들임을 깨닫는다. 곁에 두고 늘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들임을 깨닫는다. 함께 살아가는 것과 더불어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즐길 수만 있다면 최고다.

칼럼의 주제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가장 큰 부담이 된다. <역사>라는 테마와 반드시 관련성을 가져야 하는가? 이게 자유로운 사고의 확장을 방해한다. 아니면 어떤가? 쓰고 싶은 글을 쓴다. 쓰고 싶은 글을 쓰되 책의 주제와 관련성이 있으면 좋은 것이다. 우선순위는 분명하다. 쓸 것이 없다는 것은 게으른 핑계다. 쓸 것은 무궁무진하지만, 무궁무진한 재료를 수렴할 꼭지를 찾기가 그렇게도 어렵다. 내 마음을 무찌르는 무엇을 찾아와 주길 간절히 바란다. 찾아오지 않으면 찾아가는 수밖에.

오늘도 여러 장의 글을 썼다. 그저 뿜어내는 글이다. 적어도 그 글을 쓰는 순간 만큼은 자유롭다. 해방이다.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 글은 습작도 아니다. 그저 써 내려가는 글이다. 언어화된 생각의 원형들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일필휘지로 내닫는 배설적인 글들도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 듯한 저녁 시간. 따뜻한 웃음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고 싶다.

어제는 퇴근 길에 작은 화병과 프리지아 꽃 2단을 샀다. 메마른 하루가 싫었다. 아내에게 꽃을 사다 준지도 꽤 되었다. 화병은 청담역 다이소에서 샀고, 꽃은 마들역에 있는 꽃집에서 샀다. 향기 좋은 꽃을 달라고 하니 프리지아를 추천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맘때의 프리지아가 가장 향기로울 때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정말로 향기로웠다. 전날 밤을 새워서 집에 들어가자 마자 잠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화병 옆에 고맙단 말이 담긴 아내의 쪽지가 있었다. 이런 게 행복이구나.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많이 피곤하고 고되다. 그리고 과제의 압박을 고스란히 견뎌야 하는 주말이 두렵기도 하다. 즐길 수 있는 일이다. 즐기고자 선택한 일이다. 마음먹기 달렸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쉽지 않은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깨달음과 행복에 이를 수 없다. 지금 내 가슴 속에서는 어떤 향기가 피어 오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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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6:08:53 *.124.233.1

013일차 (4월 30일)

생각보다 칼럼이 잘 쓰여지지 않았다. 컨셉도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래서 집 근처 근린 공원을 걸었다. 찬찬히 거닐었는데 1시간 이상이 뚝딱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돌아와서도 생각보다 잘 쓰여지지 않았다. 직관적인 글쓰기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주 칼럼쓰기가 지지부진 된 것은 주제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좋은 방법은 우선은 주제를 명확하게 하고, 되도록이면 정해진 주제를 바꾸지 않은 편이 나을 것 같다. 물론 출퇴근길이나 산책길에 하늘의 계시처럼 확 내리 꽂히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을 받들어 쓰면 되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는 우선은 주제를 한 가지 정해 두고, 그 주제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이 좋은 방법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산책을 하는 동안은 비가 내리지 않아 비 온 뒤의 맑은 기운과 점점 번져가는 연둣빛 숲을 마음껏 누릴 수가 있었다. 아파트 앞에 드디어 연보라 빛 라일락이 피기 시작했다. 초 여름을 알리는 신호다. 꽃에게는 미안하지만 한 가지 얻어다 집에 있는 화병에 꽂아두고 그 향을 느끼고 싶다. 싱그러운 라일락 향이 빠진 5월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내가 선택한 길이지만 이런 싱그러운 5월에 아내와 함께 여기저기 마음껏 쏘다니며 빈둥거리지 못하는 것은 솔직히 괴롭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미리미리 과제를 해 두면 좋으련만 그 일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너무 무겁고 심각하지 않게 되도록이면 가볍고 경쾌하게 갈 것이다. 부러지기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즐거울 것 같아서다. 내 마음과 마주치는 시간이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쳇바퀴처럼 겉도는 시간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중한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쫓기고 조임 받는 것 보다 한가하고 여유롭고 태평한 시간을 많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콸콸 넘쳐 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 삶에는 왜이리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지.

너무 심각한 얼굴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두꺼운 가면은 벗어 던지고 마음껏 먹고,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춤추며 인생을 살고 싶기도 하다. 지나친 진지함은 나를 틀에 가두게 된다. 늪에 갇히게 한다. 두꺼운 가면과 갑옷은 회사 가서나 쓰고 홀로 지내는 시간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만큼은 가볍게 훨훨 날아 다닐 수 있도록 하자. 누가 괴롭히는가? 과제가 나를 괴롭히는가? 일이 나를 괴롭히는가?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가? 그렇게 괴롭히는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용은 다름 아닌 내 마음의 다른 측면이다. 훨훨 날아다니는 하루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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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6:09:34 *.124.233.1

014일차 (5월 1일)

처음으로 의도적으로 주말 산책을 쉬었다. 대신 꿈에서 자신을 만나기로 마음 먹었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있는 일이다. 그렇게 평소 때보다 2시간 이상을 더 잤다. 더 많이 잘 것 같았는데 더 잠이 오지 않고 눈이 떠졌다.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여유롭게 휘파람 불며 샤워를 했다. 물론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산더미 같은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더 여유를 부렸다. 그렇게 하니 마음이 그저 넉넉하고 태평해졌다. 어제 처가에서 가져온 빵을 두유와 함께 먹고 북 카페로 향했다.

너무 잘 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만큼, 할 수 있는 만큼만 했다. 스승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은 1주일에 온전히 이해될 책들이 아니라고. 물론 그 이야기가 대충대충 책을 읽고 과제를 하는 것에 대한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동안 너무 애써서 스스로를 몰아쳤다. 너무 바싹 긴장해서 몸은 긴장해서 딱딱하게 굳어 어깻죽지에 담이 들었고, 시야는 좁아져서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일단 마음이 편안해 진다.

필사를 하는 내내 '그냥 대충 하자',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이 둘 사이를 오갔다. 연구원 생활이 100m 달리기가 아닌 이상 오래 멀리 가야 한다. 따라서 오버페이스는 금물이다. 잠을 2시간 더 잔 것 뿐인데, 종일 지치지 않는다. 졸음도 오지 않는다. 필사를 마치고 나니 꽤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다. 아내가 잠시 들렀다 갔는데 제대로 이야기도 못했다. 미안하다 얼른 들어가 아내가 해 놓은 맛있는 김치 볶음밥을 먹어야지.

자발적 빈곤을 위해 레몬 6개를 사가지고 들어갔다. 과제를 올리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레몬즙 만들기 의례를 거행했다. 레몬의 상큼한 향은 언제 맡아도 참 좋다. 건강한 향기다. 아직도 피로하지 않다. 스티븐 코비가 이야기 한 <Sharpen the Saw>의 의미를 실감한다. 내 삶으로 많은 것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내 그릇은 아직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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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6:10:13 *.124.233.1

015일차 (5월 2일)

문득 여전히 내가 너무도 많은 불필요한 형식 속에 얽매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비롯하여 나의 정신적 자원을 소모하는 불필요한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요새 하루하루 빠듯한 하루를 보내다 보니 마음만 급해져서 플래너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프랭클린 플래너의 기능을 최소화 한 CEO 버전 수첩인데, 매일 반복되는 일정까지 빼곡하게 적어 놓곤 했다. 예를 들면 매일 일정에 꼬박 들어가는 것이 단군 00일차, 금연 00일차, 수련일지, 독서, 아침/점심/저녁운동 등이다. 매주 이렇게 적어 놓는 것을 한 주의 의식이라고 생각했는데, 형식에 치우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플래너와 별도로 손바닥만한 기자수첩을 쓰고 있는데, 거기에다 가는 매일 <오늘의 주요일정>이라고 하여 그때그때 떠오르는 일정을 자유롭게 적는다. 회사 업무수첩도 마찬가지로 적는다. 가끔 노트북의 One Note에도 일정을 기록 할 때가 있다. 생각해 보니 사무실 책상의 탁상 달력에도 일정을 적어 놓는다. 맞다. 스마트 폰 메모장과 녹음기, 플래너도 쓸 때가 있다. 불필요한 중복이 너무나 많다.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 문득 얼마 전까지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자랑스럽게 지껄이던 말이 떠올랐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2시간 동안 하는 일들이 내 본업이다. 회사에서 하는 일은 부업에 불과하다." 갑자기 아차 싶었다. 그래서 회사생활이 모두 시시하게 느껴졌던 것이로구나. 그 은유는 일종의 명령어와 같아서 한 번 명령을 받으면 즉각 실행에 옮겨진다. 무서운 것은 의식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작용한다는 데 있다. 소중한 나의 하루 중에 더 중요한 시간, 덜 중요한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시간은 모두 순간순간이 모두 소중하다. 회사생활에 복종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좀 더 나은 은유를 찾겠다는 의미다. 내가 새벽의 2시간을 더 사랑하는 게 사실이다. 이곳 저곳 눈치 볼 것 없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새벽 2시간의 행복이 10시간의 회사생활의 불행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왜 늘 그렇게 생각해 왔던 것일까? 더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불행하지 않을 수는 있다. 나아가 행복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감히 내가 처한 상황을 <점진적 출가의 과도기적 국면>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또한 <만족을 향한 불 평형 상태>이기도 하다. 연구원 활동과 회사 업무, 이 둘의 질적 가치 모두를 취한다는 것은 과욕일까? 두 가지를 동시에 하지 못하는 내게는 너무도 난해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고, 뒤지기 싫어하고, 성취로 인한 순환적 동기부여에 익숙한 내게 상대의 냉혹한 시선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다. 두 가지 활동 모두 탁월함을 얻기에 내가 가진 시간과 자원은 한정이 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내린 해답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더 넓고 먼 곳으로 판을 키워 생각함으로써 정신적 여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개념적이고 관념적이다.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지침은 그저 먼저 웃고, 좋게 생각하려고 하는 마음가짐 뿐이다. 여전히 내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연구원 활동을 하는데 보낼지, 회사업무를 수행하는데 보내야 할지를 저울질 하고 있다.

그래.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자. 쉬운 거였다면 선배들이 왜 회사를 그만 두고 나갔을까? 파올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일화가 하나 떠올랐다.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을 떨어뜨리지 않는데 있다" 이 말은 곧 결코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모순과 역설적 가치를 공존시킬 수 있는 바로 그 자리에 행복이 있다는 의미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던지 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분명히 있다. 그렇다. 마음껏 웃을 수 있다. 행복이 찾아오기 전에 먼저 웃을 수 있다. 수두룩하게 나열된 불행한 이유는 돌돌 말아 용의 아가리에 쳐 넣어 버리고, 내가 행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 줄줄 외며 살아가라. 이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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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6:10:53 *.124.233.1

016일차 (5월 3일)

어제 퇴근하면서 많은 갈등을 했다. <자발적 빈곤>의 월요일. 비어 있는 뱃속만큼이나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훈 형님께서 사부님의 <저자 강연회>에 가신다고 했다. 슬며시 형님과 소주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라고 하신다. 미리 말했다면 일찍 퇴근할 수 있었는데, 늦장을 부리다가 7시가 넘어 퇴근했다. 회사에 나와서도 갈팡질팡했다. 이번 주에 읽는 책도 그 두께가 만만치 않다는 걱정이 들었다. 7호선 건대입구 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 강연회가 있는 충무로로 향했다. 뒤늦게 도착하니 강연은 마무리 되었고 Q&A 시간이 진행되고 있었다. 곳곳에 연구원 선배들이 눈에 띠었다. 반가운 얼굴들이다.

강연이 끝나고 훈 형님은 형수님께서 급 호출을 하셔서 바로 집으로 가셨다. 연구원과 꿈 벗 선배들과 함께 사부님을 모시고 조금 허름한 고깃집에 가서 두 시간 가량 담소를 나누었다. 연구원 게시판에서만 만나던 3기 김도윤 선배를 새로 알게 되었다. 아마도 오늘의 충동적인 발걸음은 전국시대 공자님 같은 사부님을 뵙고, 글로만 만나던 사형을 만나기 위함이었나 보다. 내가 읽는 책 속에 무엇이 있는가? 내가 쓰는 글 속에 무엇이 있는가? 결국은 그 속에 닮긴 건 삶이고, 삶 속에 담긴 건 사람이다. '사람'을 쓸 때 실수로 'ㅏ'자를 빼먹으면 '삶'이 된다. 참 신기하다. 결국 내가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배우고자 하는 건, '삶과 사람과 사랑'이었음을 희미하게 깨닫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피곤한 눈을 끔뻑거리며 책을 읽었다.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재미있다. 사진 속에 지난 4월 기이한 밤을 보낸 경주의 진평왕릉이 나왔다. 체험을 통해 역사가 되살아나는 경험을 한다. 아 이렇게 배워야 하는구나. 새벽에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나는 시간여행을 떠난다.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고 싶지 않다. 신화와 역사 속으로 두둥실 떠오른 여행의 꿀맛 속에서 내려오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마구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법을 꿈꾼다. 하기 싫은 일이 꿀맛처럼 좋아지는 비법 말이다. 결국 답은 거기에 있다. 내가 휘갈겨 쓰는 글의 내용은 매일 같다. 어떻게 하면 10시간 이상을 앉아 있는 이 자리를 박차고 가벼운 마음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을까? 로또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다. 나의 스승은 혁명가가 맞다. 혁명가이기도 하고 선동가이기도 하다. 그의 제자가 되었으니 매일 선동 당하는 수 밖에. 그렇게 박차고 나아가는 것이 혁명의 목표다. 그래서 내 세상, 나의 제국, 나의 별 하나를 만드는 것이 혁명이 바라는 바다. 그 조건이 가혹하다. '점진적으로' 예전에 법정스님 수필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오늘 나의 취미는 인내, 끝없는 인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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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6:11:29 *.124.233.1

017일차 (5월 4일)

퇴근하는 길에 북 카페에 들러 두어 시간 책을 읽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초여름 향기가 났다. 향긋한 흙 내음과 파릇하게 돋아난 풀들과 나뭇잎의 향이 솔솔 느껴졌다. 아파트 정문 옆에 서 있는 라일락 나무 소식이 궁금해 빙 둘러 들어왔다. 역시 오길 잘 했구나. 문 앞에 이르기도 전에 진한 향이 먼저 나와 나를 맞이한다. 바람이 시원하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는데 그저 행복하다. 얼마 만에 느끼는 포근한 여유인가? 아무런 이유와 목적이 없어도 그저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거구나.

오늘 새벽엔 오랜만에 지각을 했다. 어제 10시도 되기 전에 잠들었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전날 종일 스트레스를 받아서 몸이 더욱 더 고되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나는 굉장히 심리적인 변수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다. 정서적 역치 수준이 매우 낮아서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각을 했는데도 허둥대지 않았다. 지각도 할 수 있는 거지 뭐. 나도 사람인데.

집에 들어오니 이미 10시가 넘었다. 아내도 동기들과 약속이 있어서 늦는다고 했다. 목욕탕 청소를 안 한지 꽤 되었다. 늦은 김에 목욕탕 청소를 했다. 역시 욕실 청소엔 <매직 블록>과 <뱅>이 최고다. 분무기를 하도 쏘아댔더니 손과 팔뚝에 힘이 풀린다. 30분 이상 걸렸다. 반짝반짝 거리니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청소를 할 때면 내 마음에 쌓인 먼지와 얼룩도 함께 닦여 나가는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다. 꽤 오래 전 청소와 빨래를 예찬하는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연구원 활동을 시작하면서 좋은 취미를 제대로 누리지 못해 아쉽다.

이번에 읽는 <삼국유사>는 저자가 사부님보다 어리고, 처음 몇 페이지 읽었을 때 크게 와 닿는 것이 없어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뒤로 갈수록 가슴에 와 닿는 바가 크다. 사부님이 두 번 이상 읽게 하는 고전으로 선정하셨을 만하다. 불교에 관심이 많은 나에겐 뒤에 있는 내용 들이 마치 거대한 폭포처럼 마음 속으로 콱콱 내려 앉는다. 2번 읽어야겠다. 사기열전도 참 좋았는데, 아쉽긴 하지만 우리네 이야기가 조금 더 좋다. 와인 한 잔 하고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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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6:12:15 *.124.233.1

018일차 (5월 5일)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영화 메트릭스에 나오는 대사 중 나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는 대사 중 하나. "Choice. The problem is choice" 그렇다. 문제는 선택이다. 지금 나의 모습은 과거에 내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결과이다. 매 순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방황하고 고뇌한다.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유한성 때문. 몸은 하나고, 시간과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선택을 한다. 의식적 선택, 암묵적 선택, 선택에 영향을 주는 수 많은 변수들. 과거의 경험치. 감정적 상태 등등. 인간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수 많은 변수들에 대해 다루면 참으로 재미있을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다.

공부에 대해 이야기 하려 했던 것은 아니고, 선택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 하려 했다. 지난 주 훈이 형이 썼던 칼럼의 기가 막힌 탈리히의 말 "용기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그 다음 중요한 것들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용기이다." 결국 선택이란 이런 게 아닐까?

아직 나의 역량이 충분히 확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역할이 내 삶에 비집고 들어왔을 때, 나는 부족한 시간과 자원을 쪼개어 투입해야 한다. 연구원 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예전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생긴다. 아내와 그리고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닌 북 카페나 도서관에 찾아가 종일 책과 씨름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바로 그 선택되지 않은 소중한 것들에 대한 미련이 내 마음을 할퀴곤 한다. 죄책감이 나를 옭아매곤 한다. 연구원을 하기로 한 것 또한 하나의 선택이었다. "선택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그 대가란 다름이 아닌 선택에 의해 선택되지 못한 최고의 대안에 대한 미련이 아닐까.

인생이 경영에 비유가 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없는 시간, 없는 자원을 가지고 최고의 효과성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 기업이 추구하는 무엇과 아주 흡사해 보인다. 그러나 뭔가 많이 결여된 느낌. 너무 초점이 한곳으로 쏠린 느낌. 그래서 시야가 아주 좁아져 마치 웅덩이에 갇혀 우왕좌왕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급급해 하고 허둥지둥 대는 듯한 모습이다. 생각의 폭을 확장하고,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온 코끼리 다리 아주머니 이야기와 <오체 불만족>의 저자가 떠오르면서, 내가 뭔가 굉장히 착각하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에 홀리듯 불행하고, 괴로운 것을 당연한 뭔가로 받아들이며 살아온 것 같다. 속은 느낌이다.

지금의 어리석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시야를 좀더 넓힐 필요가 있다. 너무 의도하지 말고, 주어진 일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몰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게 그런 게 아닐까. 간질간질 뭔가 하나가 톡 하고 터져 나올 것 같다. 마치 봉숭아 씨앗처럼 말이다. 오늘 나는 수 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어떤 재미있는 선택들을 할까. 달리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사람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다. 달리 생각해 보자. 재미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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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6:12:58 *.124.233.1

019일차 (5월 6일)

나를 비롯한 많은 동료들이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일에 힘겨워 하고 있다. 수 많은 역할들 사이의 무게 중심을 잡는 일이란 참으로 험난한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시간과 역량은 한정이 되어 있는데, 여기 저기서 나를 보아 달라며 아우성을 친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손오공의 기술을 배워 여러 개의 분신을 만들어 각기 역할을 수행하게 하고 싶을 정도다. 그렇게 역할을 맡기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여행? 휴식?

쿨한 민방위 훈련 대장이 6시 종료 시간을 당겨 5시에 교육을 끝냈다. 와! 어차피 회사에서는 여기서 퇴근할 채비를 하고 나왔으므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걷고 싶었다. 걸으며 명상하고 싶었다. 양평에 내려가기 위해 차를 주차해 둔 종합운동장까지 대략 3~4km 정도. 비가 오다 잠시 그친 터라 공기는 촉촉했다. 건물에서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가다 보니 양재천 산책로가 나왔다. 큰 길을 따라가지 않고 곧장 그 길로 내려갔다.

아.. 이 여유란 무엇이란 말이냐. 이런 여유가 내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너무나 행복했다. 사뿐 사뿐 걸었다. 주변에는 온통 푸릇푸릇 한 나무며 풀이며, 이제는 봄을 훌쩍 넘은 초여름의 땅 내음과 풀 내음으로 바뀐 향을 감지 할 수 있었다. 비가 온 직후라 졸졸 흐르는 물소리도 더욱 더 경쾌했다. 가슴 벅찬 이 충만함이여. 나 아무런 조건 없이도 행복했다. 살아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고 충만했다. 흙 내음과 풀 내음, 물 흐르는 소리, 촉촉한 이 공기의 촉감. 그렇게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행복은 먼 미래에 있지 않음을. 언제든지 내 삶에 이렇게 소환해 올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바로 그것이다. 행복은 먼 미래 어느 날에 찾아오는 완전한 어떤 것이 아니다. 불완전한 현재의 일상 속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여유로움 속에도 행복은 깃들여 있다. 그렇게 세상은 내게 수 많은 표지를 보여주며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어리석은 나의 눈은 늘 그것을 놓친 채 표류한다.

1시간 정도의 행복을 누린 후 종합 운동장에 도착하니 다시 찾아온 현실 세계. 두산과 롯데의 야구 경기로 운동장 주변은 벌써부터 꽉꽉 막히고, 엄청난 무리의 사람들과 함성, 그리고 여기저기 버리는 쓰레기와 담배 냄새의 악취. 결국 이 두 세계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일까? 어떤 목적 지향적인 의도된 삶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다 벅차고 넘치는 것을 길어 올리는 것을 글로 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지 못할 이유는 또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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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6:14:02 *.124.233.1

020일차 (5월 7일)

쫓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아까워 하거나 쫓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늘 명심하라. 내가 글을 쓰고, 책을 쓰고 연구원 활동을 하는 진정한 이유를.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아름답게 살아가고자 함이다. 주객이 전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단이 목적을 지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 아버지와도 많은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나는 늘 사무치게 가족이 그립다. 최근 들어 계속 드는 생각이다. 어쩌면 그 가족들이 있어 내가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양평에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들러 짐을 내려놓고 쌍문동 처가에 갔다. 할 일이며 과제는 남아 있는데 마음은 이렇게 태평한 것이냐. 이 발칙한 여유는 대체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이렇게 시간을 내어 가족들과 어울리니 가족 모두가 좋아라 한다. 연구원도 좋고, 글도 좋고 책도 좋다. 그러나 그 앞엔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무언가에 쫓기면 내 마음은 또 다시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옹색해 지기도 하겠지만, 지금의 사랑스런 이 마음이 나는 참 좋다.

쌍문동 처가에 가기 전 무슨 배짱이 들어 낮잠을 한 숨 잤다. 잠이 부족하면 오래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계속 들어서 되도록이면 틈나는 대로 잠을 자 두려고 한다. 취침시간도 최대한 10시를 맞추려고 노력한다. 새벽의 2시간을 찾기 위해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2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습관이 더 중요하다. 1년간 몸으로 부딪히며 얻은 교훈이다. 잠이 부족하면 확보되는 시간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집중력이 떨어진다. 푹 자고 짧은 시간 집중해서 수련하는 것보다 비효율적이 된다. 당연한 교훈을 1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알게 된 교훈은 뼛속 깊숙이 각인된다.

칼럼에 대해 생각하면서 낮잠을 자다 보니 푹 잘 수가 없었다. 주 초에 화두는 틀어 잡았는데, 생각이 널리 확장되지도 깊게 파고들지도 못해서 계속 스트레스가 되었다. 꿈 속에서도 화두만 계속해서 맴돌 뿐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계절의 변화가 초저녁에 불어오는 향긋한 바람과 피부에 와 닿는 촉감으로 느껴진다. 녹음이 짙어지기 전의 이 연 푸른 잎들과 저 멀리 보이는 산의 알록달록 영근 푸르름이 나는 너무 좋다. 새로운 계절이 찾아왔구나. 나도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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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6:14:46 *.124.233.1

021일차 (5월 8일)

새벽에 일어나 칼럼을 썼다. 한 주 동안 쥐고 있던 화두를 최대한 끌어내 썼다. 물론 가슴 속 깊숙한 곳을 관통하는 찌릿한 그 무엇은 찾아오지 않은 채로 글을 썼다. 그만큼 내 마음과 마주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레이스를 할 때, 그리고 그 전, 한 겨울 새벽 영하 20에 이르는 추위에도 옷을 두껍게 챙겨 입고, 중랑천을 걸었다.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살을 애는 듯한 차가운 공기 속에서 휴대폰의 녹음기를 켜고 떠오른 아이디어를 놓지 않으려 녹음을 했다. 돌아오면 그 아이디어들을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그렇게 모아 놓은 생각들은 언젠가는 내 글의 한 구절을 이루고는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자꾸만 시간에 쫓기자 그런 시간마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 같다. 무엇보다 잠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과 마주하는 시간은 잠을 보충하거나, 책을 읽거나 필사를 하는 시간으로 대체되었다.

세 가지 활동 모두 지금 현재 나에겐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문득문득 드는 이 불안감. 아마도 마음과의 대화가 줄어들자 마음과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과 멀어질 수록 불안감과 나태한 마음이 짙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최근의 나태함은 역설적인 부분이 많다. 바쁘고 피곤할 수록 더욱 여유를 가지기 위해, 줄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질 것을 알기에 내린 처방이었다. 역설적 처방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한 번 느슨해 지면 돌이키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좋은 의도로 내린 처방이 부작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빠듯한 연구원 생활을 롱런 시키기 위해 지나치게 팽팽한 줄을 약간 느슨하게 한다는 것이 겉잡을 수 없어지면 안 된다. 아마도 내 마음이 보내오는 행동신호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지금의 나야말로 내 삶의 모든 것을 킁킁거리며 찾아 헤매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번에 그리고 순식간에 뭔가 확 찾아오길 꿈꾸지만 그런 요행은 내 삶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내 삶에서 도모할 수 있는 것은 매일의 힘에 기대는 것이다. 스승도 내게 말씀해 주셨다. 매일의 힘이 세월과 만나 나를 키워줄 것이라고. 그렇다. 나의 불편한 감정의 원인은 그 매일이 무게 중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일 것이다. 새벽에 일찍 눈을 떠 흔적을 남기는 것은 그저 하나의 표지일 뿐이지 본질은 아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잠들려고 노력하는 것도 하나의 표지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표지 사이에 있는 삶의 행간을 얼마나 값지고 알차게 보내느냐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살아서 깨어 있는 모든 시간에 삶의 광휘를 맛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최고다. 아마도 내가 기대하고 있는 삶의 궁극의 가치가 그러한 삶이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삶의 광휘를 포용하기에 나의 그릇은 너무나 작고 옹색하다. 아직은 행복해야 하는 이유보다 불행해야 하는 이유가 더 많은 번뇌망상으로 가득한 사바 세계 중생 중 1인일 뿐이다. 몸과 마음은 온통 주눅이 들어 긴장하고 있어 뻣뻣하게 굳어 있고, 강하지도 않으면서 강한 척 하려다 보니 눈에만 잔뜩 힘이 들어 가있고, 심각한 표정으로 가득하다. 한 마디로 꼴 사납고 웃기다. 하루 아침에 깨달을 수 있다. 하루 아침에도 변화할 수 있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는 결국 한 순간이다. 변화는 한 순간이지만 변화를 끌고 가는 것, 그렇게 끌고 간 변화를 가지고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 이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하루 굶는 것은 분명 어제와 다른 변화다. 그러나 건강하게 먹는 습관은 오래 유지 되어야 나에게 건강함을 가져다 준다. 변화의 순간의 일시성과 변화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지속성, 이 일시성과 지속성의 애매한 경계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지속성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단련해야 하는 류의 것들을 순식간에 이루어지길 바란다.

불행한 감정의 씨앗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분명하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서 비롯된다. 잘못된 기대가 잘못된 질문을 만들고, 잘못된 질문은 잘못된 해답을 만든다. 그것이 내 불행한 감정들의 수 많은 원인 중 하나다. 허나 그게 삶의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임은 왜 깨닫지 못하는가? 그렇게 어리석고 모질기 때문에 내가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늘 그렇게 내 안에서 티격태격 싸우는 것들이야 말로 내 삶의 본질이다. 모순과 역설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 균형과 조화를 위해 생길 수 밖에 없는 모순과 역설. 수 많은 역할들 사이에서 비롯된 이러한 갈등들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찾는 것, 매일 수시로 바뀌는 무게 중심을 찾아 가며 균형을 이루는 역동적인 삶. 그 속에서 삶의 광휘를 발견하는 것. 살아 있음의 기쁨을 누리는 것. 이것이 행복의 비결일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얻은 결론은 이렇다.

그러나 내가 존경하는 어른들은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무위>이며 <공>이고 <본래무일물>이라고 이야기 하신다. 진정한 진리는 짧고, 쉽고, 깊다. 천천히 가도 된다. 인생은 길다. 세상이 다그치는 속도에 함몰되지 말고, 내 페이스로 차분하게 가는 거다. 형편 없더라도 글로라도 이렇게 마음의 세계를 겉으로 형상화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논어>에서 내가 정말 사랑하는 구절.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에 두지 않으니 이것이야 말로 군자가 아니겠는가" 그저 성큼성큼 나의 길을 한 걸음씩 내디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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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6:15:28 *.124.233.1

022일차 (5월 9일)

징검다리 연휴. 연차 휴가를 냈다. 이른 새벽부터 집 근처 도서관에서 종일 책을 읽었다. 한번쯤은 나에게 그런 시간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마음껏 책만 들이 팔 수 있는 시간. 나른함으로 중간에 졸기도 했지만 대체로 책에 흠뻑 젖을 수 있었던 하루다. 두꺼운 책과 바쁜 하루에 쫓겨 오랜 시간 길게 쭉 책을 읽을 시간이 늘 부족했었다. 바로 이 맛이구나. 저녁이 되어 도서관에서 나오니 종일 내리던 비가 잠시 멎었다. 내가 집에 가는 것을 어떻게 알고. 그래서 천천히 걸어왔다. 3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걷는 게 참 좋다. 아니 너무너무 좋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들을 수 있는 나의 생각. 초여름의 흙 내음, 우거지기 시작한 녹음과 사랑스런 라일락의 향기.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니 놀이터에 켜 놓은 조명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한가로움이란 말인가? 그래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의 신화를 쓰기 위해 여러모로 생각해 둔 것들이 있지만, 마음에 딱히 확 하고 와 닿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마음 속에 꽂히는 무언가를 주구장창 기다릴 수 만은 없는 일이다. 마감 시한이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의 신화 또한 미래의 풍광처럼 회고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억지로 자아내지 말고, 미래로 가서 나의 신화를 회고한다 생각해 보자. 자연스럽게 마음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바라보자. 그렇게 흘러나오는 것을 신화로 빚는 것이다. 내가 첫 번째로 의식해야 하는 것은 독자와 청중이 아닌 나 자신이다. 내가 끌어 안지 못하고, 내 마음에 공명을 울리지 못하는 이야기는 종국에는 어느 누구의 마음도 울릴 수 없다. 진짜 나의 이야기를 원한다면 우선은 내 마음을 놓아주자. 자꾸 재촉하지 말고, 묵묵하게 내 마음이 하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운동량이 많이 줄어 들었다. 물론 출퇴근 길에 걷고, 매일 계단을 오르내리지만 그걸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걷는 유산소운동도 좋지만 한번쯤은 뻐근하게 달리고 싶다. 아마도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체력을 안배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된 운동은 되도록 피하고 있다. 지난 몇 달간 내가 얻었던 교훈은 몸에 활력을 얻으려면 활력 가득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땀을 흠뻑 흘리는 운동은 일 순간 지치기도 하지만 활력의 촉매제가 된다. 내가 바라는 삶 중의 하나가 활력이 넘치는 사람, 즉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던가? 책 읽고 공부하는 선비정신도 중요하지만, 뻐근하게 운동하고 땀을 흠뻑 흘리는 모습도 아름답다. 다시 헬스를 등록해야 할지 몇 주째 고민만 하고 있다. 책 읽을 시간, 필사할 시간, 칼럼 쓸 시간도 부족한데 과연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나 그건 예전에도 있었던 고민이다. 그전에도 나는 바쁜 사람이었다. 내가 한가한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시간을 내는 거다. 운동과 공부는 스스로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다. 시간이 남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준비한 뒤에 한다는 것. 그런 날은 오지도 않을 뿐더러 불가능하다. 바쁜 때일수록 시간을 내라. 단 30분이라도 좋다. 시간을 내어 달려보자.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한다. 멋진 트라이앵글이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엔 아무 생각 없이 죽을 똥 살 똥으로 덤벼 들었지만, 이제는 유연하게 즐겨보려 한다. 그래 그렇게 저지르면서 재미있게 가는 거다. 한 때 즐겨 했던 말. "인생 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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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6:16:13 *.124.233.1

023일차 (5월 10일)

즐거운 휴가가 끝났다.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내의 무한 배려 덕에 이틀간 책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거장들의 세계를 엿보았다. 마치 투명인간이 되어 그들의 은밀한 순간 그리고 위대한 도약의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다. 이게 책 읽는 맛이구나. 그냥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웠다. 이러한 충만감과 함께 학창 시절에 내게 주어졌던 수많은 시간들. 아무 의미 없이 그저 보낸 그 수 많은 시간들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그 의미 없음이 의미 없음이 아니란 것을 알지만, 또한 그렇게 보낸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이 오늘을 더 간절하게 보내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도 알지만, 이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진하게 사무치는 아쉬움이 남는 걸 어쩌랴.

이틀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원하는 시간을 보냈다. 자! 이제는 발견하고, 견디고, 넘어서고자 하는 세계로 뛰어들자! 견뎌내라. 그저 견뎌내라 라고 스승께서 말씀해주셨다. 그렇다. 나는 그 한 마디가 듣고 싶었던 거다. 어깨를 다독이며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구나. 조금만 더 힘내자!"라고 누군가 이야기해 주길 바란 것이다. 나를 알아주는 그 한 마디가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이다. 마음껏 보낸 시간과 스승의 조언에 힘입어 새로운 마음가짐과 태도로 현실 세계로 돌아간다. 모험을 즐기면서 적지 않은 돈도 벌 수 있다? 회사는 학교다. 회사는 배움터다. 회사는 보물창고다. 회사는 무림이다. 회사는 내가 거장이 될 수 있는 발판이다. 이 보다 훨씬 더 멋진 은유로 묘사할 수 있다. 비록 또 다시 현실세계의 압력에 함몰될지라도 나는 견딜 것이다. 견뎌야 할 때다. 충분히 견딜만한 때다.

나의 신화까지 내리쳐 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그러나 지난 몇 주간 이 화두를 내려 놔 본적이 없다. 꿈에서 그리고 무의식 속에서 계속해서 생각은 확장되고 있었을 것이다. 의식 세계로 도약하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더 걸리려나 보다. 험한 산 하나를 넘었으니 마음껏 낚아보려무나. 연구원 생활을 준비하고 시작하며 읽은 책의 페이지 수가 만만치가 않구나. 양과 질 모두 중요하다. 연구원 생활하면서 제대로 책 읽는 법을 배운다. 아직도 부족하다. <독서백편의자현>의 경지에 오르고 싶구나.

나의 <한 우물> 그 녀석이 빨리 찾아왔으면 좋겠다. 나만 모르고 있을 것이다. 분명 그 녀석은 파랑새다.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내가 아주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너무 당연해서 그래서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태어난 이유. 원래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던 것. 그러나 아직은 접혀져 있어서 내 눈에 보이지 않고 있는 그 녀석. 무지하게 보고 싶구나. 정말 무지하게 보고 싶다. 그 녀석과 함께 저 강들이 모여 드는 곳 그 넓은 바다로 나아가 마음껏 울고 웃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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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2 04:53:51 *.109.81.21

024일차 (5월 11일)

좋아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그들과 만나기 위해 서둘러 나섰다. 그 길로 가는 발걸음이 너무나 유쾌하다. 그들과 마음과 맞닿는 데 걸리는 시간은 거의 없다. 몇 주 만에 봐도 어색하지 않다. 아직도 나는 너무 바쁘다. 여백이 부족하다. 눈과 어깨에 너무 힘이 많이 들어 가 있다. 요새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몇 가지의 일탈은 그러한 경직됨에 대한 유화제 역할을 하는 듯 하다. 부드러운 사람을 보면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다. 자신의 세계에 몰입한다. 나와 같은 기질은 물론 그런 경지에 오르긴 어렵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 눈에서 조금만 자유로워져도 눈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다른 곳에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후딱 지나가는 시간을 보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의 지혜를 몸소 체험한다. 의도하지 않고 일에 몰입한다. '~해야 한다' 라는 생각 없이, 기존에 타성에 젖었다고 생각했던 그 자세로 임했다. 시간만큼은 금방 흘러간다. 마음도 편하다. 일에 대해 일일이 평가하지 않으니 이렇게 좋다. 정반합의 변증법적 성장과정을 절절히 체험하는 것 같다. 더 부드럽고 나은 표현이 있으면 좋으련만 나의 성장 과정은 이렇게 정반합이 분명하다. 극과 극을 극명하게 체험한다. 이것도 아마 나의 기질에 기인한 바가 클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있는 그대로를 스스럼 없이 받아들이니 신경 쓸 일이 줄어든다.

처음에 스승께서 신화를 읽고 쓰라고 하셨던 글이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였다. 결국 내 신화를 쓴다는 것은 어떻게 새로 태어나고 싶은지에 대한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은유와 상징과 함께 말이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미래 풍광과 다름이 없다. 나는 아직 길 위에 있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신화는 저 뒤안길에서 바라보는 미래에서 회고하는 글이 될 것이다. 자꾸 의도하지 말자.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을 기록한다고 생각하자. 터무니 없으면 어떤가? 터무니 없는 이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자꾸만 내 삶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그 시도가 중요한 것이다.

깨달음. 그 깨달음을 찾아가는 것이 내 인생이라고 했다. 깨달음을 찾아간다? 깨달음이 어디에 있는데? 깨달음은 본래부터 거기에 있었다. 본래 깨달았으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나 나의 무지와 미혹함이 그것을 흐리게 했을 뿐이다. 본래 청정한 그것을 깨끗하게 닦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다. 허상을 쫓지는 말자. 아직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에 나는 부족함이 많다. 무지하고 너무 생각이 많으며, 의도하는 바가 지나치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꽃 향기처럼 피어 오르는 행복함. 새벽, 그 정지된 듯한 공간 속에서 피어 오르는 나무와 꽃의 향기. 그냥 걷자. 그냥 헤엄치자. 나의 길은 그렇게 찾아오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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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2 10:26:57 *.98.16.15
경인아 드디어 여기서 이렇게 만났구나.. 만나니 좋다..^^
긴말이 필요없다는 건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그저 너의 말처럼, 그냥 걷고, 그냥 헤엄치고..
자연스레 물흐르듯 삶이 흘러가는 그 경지에 이를때까지는 꾸준히 물길을 만들고 또 만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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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3 04:31:32 *.109.52.187

025일차 (5월 12일)

새벽에 나의 신화를 쏟아냈다. 유치 짬뽕이지만 마음은 그래도 한결 편안해졌다. 몰입하여 가슴 속에서 뭔가를 길어 올릴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가슴 속에 있다는 것은 행복하고 황홀한 일이다. 나와 세상 사이에서 아직도 균형을 찾지 못하고, 내 쪽으로 기울어진 약간의 불균형 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불만족스러운 평형'상태가 아닌 '만족스러운 불평형' 상태인 것이다. 평형상태 그것은 참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와 같다. 살아 있는 바다. 우리가 아는 바다는 단 한 순간도 파도가 멈추지 않는다. 바다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내 마음 속에 늘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도 내가 세상 위에 당당하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렇게 일렁이는 마음의 파도를 멈출 수는 있지만 언덕 위에 올라 바라볼 수는 있다. 인간으로써 가진 능력이다. 그저 묵묵하게 바라볼 수는 있다. 감정이 어떻게 피어 오르고, 어떻게 가라 앉는지. 언덕 위에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이 그저 지켜볼 수가 있다. 때로는 그 강물에 흐름 속에 첨벙 뛰어들어 그 속에서 마음껏 헤엄칠 수도 있다. 물론 그게 마음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이 또한 새벽에 일어나는 것처럼 평생을 두고 수련해야 하는 무엇이라 여겨진다.

퇴근 길에 지하철 하계역에 내려서 중랑천을 타고 집까지 2시간 가까이 걸었다. 걸으며 나름 이름을 붙였는데 '생각 놓아주며 걷기'로 했다. 주로 걸을 때 뭔가를 가지고 골똘히 고민하곤 했었는데, 그런 고민을 내려 놓고 내 마음이, 내 감정이 그저 제 멋대로 날뛰게 내버려 두었다. 의도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저 언덕 위에 올라 내 마음의 흐름을 그저 지켜보고자 했다. 역시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언덕 위에 올랐다가, 그 속에 들어가 첨벙거렸다가 이곳 저곳을 왔다 갔다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이렇듯 내 마음은 엄청나게 역동적이다.

그렇게 의도하지 않은 연습을 의도함으로써 온갖 수 많은 번뇌망상에 함몰되어가는 내게 어떤 정신적 여백을 주고 싶었다. 그렇게 걷는 순간만큼은 내가 가진 모든 역할을 내려 놓고, 페르소나도 벗어 던지고, 오롯이 내 마음과 마주하고 싶었다. 내 마음과 마주하는 길을 참으로 역설적인 길이며, 웃기고 재미있는 길이다. 의도하면 마주할 수 없고, 의도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마주하게 된다. 보살님들의 진신이 늘 이렇게 찾아왔을까? 어리석은 나의 인식의 틀이 언제나 내 눈을 흐려 놓는다. 자아는 늘 자기가 전부,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 어리석은 관념을 버리고 나보다 더 큰 것을 보자. 이것도 의도라면 의도겠지만, 나의 자아가 얼마나 작은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의도하지 않을 수 있는 첫 걸음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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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3 15:33:37 *.243.13.23
가정과 연구원 생활의 위험한 줄타기를 어떻게 슬기롭게 헤쳐가고 있는지..
그대의 지혜가 듣고 싶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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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4 05:04:54 *.109.52.79
정말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형님.. 그쵸? ㅜ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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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4 05:04:30 *.109.52.79

026일차 (5월 13일)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퇴근했다. 퇴근하여 집에 들어와 오프라인 수업에 쓸 몇 개의 소품을 만들었다. 공작숙제를 하는 것 같았다. 간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었다. 왕년에 어린이 집 선생님답게 꼼꼼하게 잘 만든다. 이렇게 길지는 않지만 아내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시간에 늘 감사한다. 당연해 보이는 그런 시간과 사람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시간을 소중하게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어리석음과 미혹함이 그런 마음을 흐릿하게 만든다.

요 며칠 지각을 하게 되었고, 먹는 것에 탐착했다. 결과 자체가 행동신호를 알리는 경보다. 늦게 잠들었고, 55분 알람이 작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핑계다. 체중에 대한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핑계다. 새벽 기상과 과거의 식습관으로의 복귀가 마치 삶의 균형과 유연함을 찾는 것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되겠다. 새벽 기상과 엄격한 식습관은 내 삶을 지탱하는 절대적 가치다. 붉은 글씨로 새로운 목표와 지침을 마련했다. 다시 예외가 생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프라인 수업이다. 얼마나 준비를 하고 어떤 마음을 지녀야 더 크고 넓게 배울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더 커다란 공헌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나눌 수 있을까? 마치 그 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싶은 일로 만드는 마음과 함께 가장 먹기 어려운 마음 중 하나다. 태도 변화를 위해서는 좀더 구체적인 지렛대가 필요하다. 관념적인 표현보다는 구체적으로 실천 가능한 표현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가장 먼저 이렇게 귀중한 공헌을 해주신 존경하는 스승께 감사 드리고,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지속적으로 보필한다. 또한 성실하게 수업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동료들의 발표에 대해 최대한 귀를 기울여 경청한다. 그들의 배움에 공헌할 수 있는 뼈 있지만, 감정 따윈 실려 있지 않은 맑은 질문과 조언을 한 가지씩 한다.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주춧돌을 마련해 주는 것이 내 역할인 것이다. 아무런 공헌 없이 단물만 쏙 빼먹고 튀는 그런 야비한 족속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역시나 내가 가장 자신 있게 잘 할 수 있는 것이 바지런히 움직이는 것이다. 멍하니 앉아서 굼벵이처럼 늘보처럼 움직거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발현되는 적극적인 태도를 고스란히 회사로 가져갈 것이다. 변질되는 마음의 1등 주자는 자만과 방심으로 인한 초심의 상실과 훼손이다. 처음엔 아주 작은 틈에서 시작하지만 그곳이 쐐기를 박는 틈이 되어 쩍 하고 갈라 놓는 지점으로 작용한다.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다. 유연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삶을 지탱하는 기둥마저 유연해지면 지붕이 내려 앉는 것은 순식간이다.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오늘이 있다는 것. 그것으로 오늘 하루의 양식을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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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4 23:03:20 *.109.26.76

027일차 (5월 14일)

첫 번째 오프라인 수업이다. 소풍 가는 마음으로 갔다가 즐겁고 행복에 겨운 피로감을 안고 돌아왔다. 작은 그릇에 담기에 넘치는 배움을 안고 돌아와 벅차다. 벅차다는 말 밖에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조언과 질문들로 충만했다.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부님의 깊은 조언으로 나는 '아..' 라는 말 밖에 하지 못했다. 작은 그릇에 너무 많은 것을 담겨져 넘쳐 흘렀다. 오늘은 그런 하루다. 연구원 되길 참 잘했다. 정말로 잘 한 것 같다. 춘추전국 시대로 돌아가 공자의 가르침을 들은 제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보다 더 오래 전 불타 석가모니의 제자가 더욱 더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특히 훈이 형님에 대한 사부님의 피드백은 내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많았다. 아직은 얕고 좁은 내가 이를 수 없는 어떤 거리를 느꼈다. 그리고 그 거리는 하루 아침에 좁혀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수련은 벼락치기 공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모두 하나 같이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 모진 비바람과 뜨거운 태양을 견디고, 가을에 열매를 맺고 수확을 거둔다. 그리고 추운 겨울의 눈보라를 견뎌낸다. 그런 모진 시련과 고독의 시간을 통해 10번을 거듭나야 이를 수 있는 길이다. 게다가 단순한 시간 반복이 아닌 절체절명의 간절함을 지니고 그 시간을 창조적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경직되어서도 안 된다. 부드럽고 유연해야 한다. 그 좁은 문을 들어가는 길은 이렇게 까다롭기 그지 없다.

동료들의 애정 어린 조언과 사부님의 깊은 조언으로 맑은 샤워를 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새는 우를 범하지 말자. 스승의 말씀처럼 그렇게 배운 <좋은 말씀>을 증발시키고 사장시킬 것이 아니라, 당장 내 삶에 적용하도록 한다. 내 귀에 스며들고, 가슴을 파고든 말들은 나의 무의식 세계에 고스란히 갈무리되어 숙성의 시간을 거쳐 나의 언어로 재탄생 되고,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아로새겨질 것이다. 그렇게 나는 쑥쑥 성장해 나갈 것이다. 그렇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존재다. 사우와 스승의 맑은 가르침이 본래 크고 청정한 나의 존재를 맑게 일깨워줄 것이다.

회복력은 중요하다. 피로에서 신속하게 회복되어 평상심을 되찾는 것 또한 배우고 익히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우선은 내 마음, 내 무의식을 믿고, 오늘 배운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내려 놓도록 하자. 그렇게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한 뒤 깊은 잠을 잔다. 별이 빛나는 나의 내면의 우주로 연결된 꿈의 문을 지나 오늘 배운 것들과 마음껏 뒹굴고 뛰놀다 보면 어느새 배움은 내 핏줄을 타고 흐르게 될 것이다. 위대한 스승과 훌륭한 사우들과 함께 배우고 익힌다는 것,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제 첫 단추를 채웠다. 앞으로 나와 나의 사우들의 앞날에 신의 가호와 광휘가 함께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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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6 03:41:11 *.109.26.76

028일차 (5월 15일)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이런 무력함과 함께 슬럼프가 찾아왔던 것 같다. 수 많은 시도가 무력해 지면서 생기는 지독한 피로감.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환경들. 이게 슬럼프의 원인으로 작용하곤 했었다. 아주 꽤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 같다. 다행히도 작년 이맘때 단군프로젝트를 알게 되어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 나의 희망은 새벽에 있었다. 그 새벽이 내 삶을 피로와 무기력에서 구해주었다. 그렇다면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올해의 아이템은 무엇일까? 무엇이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줄 것인가?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운동이다. 활력을 가져다 주는데 1등 공신을 할 수 있는 것은 운동이다. 최근 다시 체력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찾아오는 이유가 바로 운동량 감소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또 다른 계기가 작년에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연구원 레이스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연구원 활동을 시작하면서 시간에 쫓기기 시작하여 운동을 그만두었다. 매일 출퇴근 하며 걷는 4km의 구간과 오르내리는 계단이 유일한 운동이 되어버렸다. 운동이 체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은 고갈을 위한 소모가 아니라 활력을 위한 최소한의 투자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이렇게 시간 부족에 허덕이고, 수면 부족에 허덕이는데 어떻게 새롭게 운동을 시작할 수 있을까? 의도적으로 시간을 내고, 의식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가능하다. 이 또한 새롭게 변화하는 데 필요한 프로세스를 모두 필요로 한다. 뭔가를 하고자 할 때 가장 힘든 것이 바로, 현실적 문제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시작하지 못할 때이다. 이미 불가능하다는 전제가 끼어들 때 나는 슬퍼진다. 무기력이라는 녀석은 늘 그 틈을 비집고 기어들어 온다. 이것은 또 다른 시련의 종류다. 기존의 시련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서 생겼던 바둥거림이었다면, 새로운 시련은 그런 바둥거림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생기는 좌절감이다.

비범함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10년이 필요한 것인가? 그보다 짧은 시간은 안 되는 것일까? 하루에 노력을 기울이는 시간을 늘리면 된다. 그렇게 늘리면 도약의 시기를 더 당길 수 있을 것이다. 몸의 단식과 함께 마음의 단식도 함께 병행해보도록 해야겠다. 머릿속의 생각, 입 안의 말, 뱃속의 밥이 많을 수록 수명은 단축이 된다 하였다. 역시 나의 길은 이 세 가지를 줄이고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는 데 있는 것 같다. 멀리서 찾지 말 것. 적어도 내 삶 자체가 천복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니. 맑고 향기롭게, 단순하고 간소하게, 그리고 어제보다 아름답게 사는 오늘 하루. 이 삶이 모여 좋은 삶을 이룰 것이다. 의도하고 목적하려는 순간 모든 것은 산란된다.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 비우고 또 비우고 침묵한다. 이게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늪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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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6 09:03:20 *.243.13.23
머릿속의 생각, 입 안의 말, 뱃속의 밥이 많을 수록 수명은 단축된다.

멋지네요. 가슴 속에 새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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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7 04:14:19 *.109.24.33
연구원 과제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보고싶고 고마워요 형님.
언제쯤 뵐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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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7 04:13:37 *.109.24.33

029일차 (5월 16일)

견뎌라. 스승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생각을 줄이고, 입 속에 말을 줄이고, 뱃속에 밥을 줄여라. 자꾸 바깥으로 내뱉으려고 하지 말고 안으로 거듭 숙성시켜라. 너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몇 번을 생각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당장 그만 두고 할 것이 없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 얼마나 비참한 일이냐. 훈이 형님이 보고 싶다.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싶다. 그러나 늘 모든 것이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네가 걱정하는 것보다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그러니 너무 호들갑 떨지 말 것.

심마에 현혹되지 말자. 모두가 내 마음이 만들어 놓은 허상들일 뿐이다. 어떤 풍파가 내게 닥치더라도 오직 나만이 나를 어찌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명상에 잠길 필요가 있다. 아직은 저지를 때는 아니고, 명료하게 명상을 해야 할 때다. 아직은 혼탁하다. 흙탕물 같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 앉은 후 결정을 해도 늦지 않다. 어차피 한번 태어나면 어차피 죽게 되어 있는 법이다.

바닥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자. 그래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다. 뒤죽박죽이라고 단정짓는 그 마음부터 내려 놓도록 한다. 세상이 뒤죽박죽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뒤죽박죽인 것이다. 세상은 강물이 흐르듯 그렇게 흘러간다. 내 마음 또한 그렇게 흐른다. 그 와중에 험난한 흐름을 겪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미 나는 분명하게 명상한 바 있다. 그렇다. 이곳은 분명 내가 있을 곳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밥벌이 때문이다. 스승의 말씀처럼 현업과 미래의 비전이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연결지점을 현업에 구축하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 일을 나는 부서이동을 통해 구현하려고 하고 있다. 물론 부서이동이 궁극적인 해답은 아니다. 좀 더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나를 포지셔닝 해보고 싶은 것이다. 무엇보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내가 선택한 최적의 절충안이다. 지금 하고 있는 번뇌의 본질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고 싶지 않다는 거다.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마법이 필요한 순간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싶어 안달 나게 할 수 있는 마법. 주문을 외운다. 그 주문이 공허한 메아리라 할지라도 주문을 외운다.

삶을 부정하지 말자. 환경을 부정하지 말자. 모든 것들에 대해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고개 숙이고 낙담한 내 모습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잘 될 거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는다. 쫓기지 않는다. 쫓긴다고 해결될 문제는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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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8 04:33:23 *.109.24.253

030일차 (5월 17일)

지금 당장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지금 당장 의식적으로 "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에 대해 너무나 감사해!"라고 외치며 삶을 기뻐하는 삶을 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지금'과 '하루'라는 시간은 모든 가능성,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다. 내 보기에 생각이란 것도 일종의 습관인 것 같다. 예전에 담배를 피울 때처럼, 새벽에 눈뜨자 마자 담배를 찾고,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현관문을 나가 연기를 내뿜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생각에도 단식이 필요하고, 의식적인 전환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생각의 패턴과 일종의 뇌 회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생각은 하나의 패턴을 이루고, 스스로 그 회로를 강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새벽에 눈을 뜰 때 찾아오는 불안함, 두려움, 부정적 생각들도 일종의 습관이다.

그래서 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을 사랑한다. "나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높이고자 하는 인간의 확실한 능력보다 더 고무적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찬사다. 이 말의 참 뜻을 이 새벽에 깨닫는다. '의식적인 노력'은 곧 변화에 대한 나의 의지다. 과거의 부정적 생각패턴을 과감하게 중단시키고, 그 자리에 맑고 향기로운 생각으로 채워 넣는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물론 습관의 무지막지한 관성을 중단시키는 일도 어렵고, 만만치 않은 내면의 저항에 대응하기도 무진장 힘겹다. 게다가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까지 창출해야 한다. 그래서 의식적인 변화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자원이 바로 '간절함'이다. 정말로, 진심으로 원하지 않고서는 그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진 마음으로 결심을 했음에도 순식간의 과거로 회귀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여기서 '맑고 향기로운 생각'이란 말이 너무나 추상적이다. 나의 변화가 힘들고 추진력을 잃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표현 때문이다. 직관적인 사람들이 자주 빠지는 큰 오류중의 하나다. 이럴 때는 감각적 성향이 아주 도움이 된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맑고 향기로운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인데?" 예를 들어 "장영희 교수도 소아마비, 암이라는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삶을 아름답게 살았다. 오체불만족을 생각해라. 세상에 살아서 숨쉬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와 같은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이런 생각들을 보다 강화시키기 위해서, 실제로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를 인용한다거나, 오체불만족을 읽거나,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이겨낸 수 많은 사람들의 사례를 아주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각인 시키는 것이다. 시청각적인 다큐멘터리가 아주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모셔야 할 부모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 한스러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회사에 입사해서 일을 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지만 좌절하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지 않아도 어제 잠시 쉬기 위해 회사 건물 23층에 올라 가보니 그룹의 다른 계열사의 신입사원 면접이 한창이었다. 그들의 긴장된 표정과 그 뒤로 느껴지는 간절한 마음이 매너리즘에 빠져 어떻게 하면 이곳을 빠져나갈까 하는 나의 마음과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내가 하고 있는 수 많은 번뇌와 고민들이 과연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인가? 의식적으로 생각을 전환해 보면 나는 불행해야 할 이유들보다 행복해야 할 이유가 몇 곱절 많은 사람이다. 자! 이제 앞으로 눈을 뜰 때 스스로에게 좋은 질문을 하고, 부정적인 생각과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그 순간 아름다운 영상과 향기로운 음악을 선사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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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9 04:46:02 *.109.24.253

031일차 (5월 18일)

프로젝트 보고 관련하여 계속해서 압박감에 시달려 왔다. 이 프로젝트 자체가 본래 계획되어 있던 것이 아니라, 갑자기 기획된 것이었고 프로젝트에 담을 내용도 본래 내가 담당하던 업무의 내용이 아니라, 평소 겉으로는 괜찮지만 안으로는 불편한 관계에 있는 바로 위 대리(J대리라 하자)가 담당하는 업무다. 그 대리는 대관 업무 즉 외부 업계 사람들을 만나거나 협회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부서 사람들하고 협의 하는 등의 업무는 잘하지만 프로젝트나 기획적 성격이 있는 업무는 매우 어려워 하는 류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일이 내게 떨어진 것이다. 아니 내가 그 일을 자청했다. 이유는 나는 그 동안 나와 우리 파트는 쭉 정 상무님의 프로젝트를 도맡아 왔는데, 올해 갑자기 부사장의 프로젝트를 맡게 된 것이었다. 아무래도 연구원 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나로서는 새로운 사람에게 적응하는 것보다, 5년간 함께 해온 임원과 작업하는 것이 훨씬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

J대리 대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대신에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 받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으나, 표면적으로 도움을 주는 척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상무님 리뷰가 원래 이번 주 금요일에 예정이 되어 있었으나, 내가 목, 금 연수원에 교육이 있는 관계로 당겨서 보고를 드려야 하는 참이었다.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부서이동에 대한 마음을 확고하게 굳히면서, 이미 마음까지 떠나있는 상황. 게다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프로젝트를 억지로 자청하여 진행하던 상황에서 지원 사격도 없고 고립무원에서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압박감에 시달렸다. 날림으로라도 장표의 전체적인 뼈대를 잡고, 이리저리 자료들을 죄다 쓸어 담았다. 일단 제대로 된 알맹이는 아니더라도 빈칸 채우기는 한 셈이다. 우선 보고는 들어갔다. 깊은 내용까지 보지는 않으셨지만, 전체적인 틀과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어서 만족하신 편이었다. 게다가 내가 작업한 장표가 정리가 잘 되었으니 다른 담당자들과 공유하여 이 참고하도록 하라고 하신다.

그 순간 뻥 뚫리고 일렁이는 감정 속에서 의식 세계 아래 가려진 나의 숨은 속성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스스로를 알 수 있는 이 순간을 놓칠 수 없다. 그 동안 반 자발적으로 선택한 회사에 대한 반목, 소극적 자세 그리고 고립의 자처로 억눌려 있던, 성취감과 타인에게 인정받을 때 느끼는 쾌감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 즐거운 감정을 주는 것을 느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쾌감 같은 것이었다. 압박감이라는 극심한 스트레스의 심연의 깊이 만큼 쾌감이 더 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더 의연해졌고, 묵묵이 안으로 거듭 살필 줄 알게 되었다. 그런 칭찬이나 혹은 비난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여러 차례 깨달은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 동안 많이 괴로웠던 본연의 이유를 통찰한 듯 했다. 사실 그런 도구에 함몰되고 싶지 않지만, 믿음이 가고 마음이 가는 걸 어쩌랴. 스트렝스 파인더 프로파일에 나의 강점테마는 <개인화, 최상주의자, 성취자, 초점, 중요성>이다.

개인화 테마는 임원에 입맛에 맞는 자료가 무엇인지 잘 아는데 한 역할을 했고, 최상주의자는 늘 그렇듯 깔끔하고 정리 정돈 잘 된 장표를 만들게 했으며, 성취자 테마는 하기 싫어도 억지스레 마감 시한 안에 뭔가를 꾸역꾸역 채워 넣어 구색 갖추기를 했다. 초점 테마는 중간에 많이 흐려지긴 했지만 이 일이 가장 중요한 사안임을 잘 알고 몰입했다. 마지막으로 중요성은 보고를 드리고 받은 칭찬에 대한 뿌듯함이 바로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에서 동기부여를 받아 새로운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성취자 그리고 중요성 테마다. 그 동안 내가 많이 힘들었던 이유가 이 두 가지 테마가 녹슬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회사 생활에 국한해서 말이다. 뭔가 목표를 성취해 내고 인정을 받는 일을 스스로 거부하고, 고립을 자처하다 보니 그 어떤 즐거움도 없었던 셈이다.

그 동안 나에겐 컨텐츠가 중요사항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난 5년간 부서이동에 대해 '하면 좋겠지'라고 생각만 했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마약 같은 상사들의 칭찬과 인정에 중독되어 정작 내가 채워나가야 하는 나만의 콘텐츠를 채우는 일에 소홀했던 것이다. 전혀 적성에 맞지 않는 부서에 배치되어 지난 5년간 나를 견디게 한 힘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 삶을 돌이켜 보면 나는 아주 오랜 기간 그런 방식의 동기부여에 길들여져 왔다. 칭찬과 보상으로 시작된 동기부여를 통해 목표성취를 한다는 이 사이클을 계속해서 암묵적으로 추구해왔다. 내가 슬럼프에 빠지거나 괴로움에 빠질 때는 늘 이런 사이클에 이가 나가거나 순환이 멈추는 시기였던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나를 움직이는 행동원인에 대해 보다 명료하게 통찰하게 된 셈이다. 뭔가를 이루어 내고 인정을 받는 패턴은 이미 나의 뇌 속에 광케이블처럼 두꺼운 회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 회로를 어찌 하자는 것이 아니라, 강점이라는 그 회로를 잘 활용하여 하루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편으로 삼으라는 이야기다. 물론 회사에서의 내 문제는 상당히 복합적인 것이다. 굽힐 수 없는 자존심(물론 이제는 굽힐래야 굽힐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과 그렇게 고착된 관계, 이미 떠나버린 마음 등이 작용하는 등 여러 가지 상황들이 겹쳐 고된 시기를 겪고 있지만, 나의 분야, 즉 내 물을 만나기 위한 일시적 고뇌의 시기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하루에도 당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힐 때가 많지만, 그 때마다 스승의 천둥 같은 울림에 기댄다. "견뎌라. 낙타의 시기다. 마음껏 견디고 고뇌하라" 그렇다. 즐겁게 견뎌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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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9 20:27:39 *.99.185.249

032일차 (5월 19일)

오늘 내일 교육이 있어 곤지암에 있는 회사 연수원에 왔다. 오랜만에 받는 여유 있는 교육이다. 쉬는 시간에 옆에 있는 강의장 의자에 앉아 졸다가 다시 들어와 수업을 들었다. 지루해서 도중에 넷 북을 펼쳐 놓고 모닝페이지를 써 내려갔다. 생각나는 대로 마구 적어내려 갔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주라 마음이 흩어지고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막연하게 겉도는 생각들을 한 데 모으고자 했다.

지난 해 연구원 준비를 위해 개인사를 정리하면서 나름대로 나의 재능과 강점을 발굴하는 작업을 했다. 그러나 그 작업은 결코 완료라는 것이 없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스와 함께 본격적인 연구원 활동이 시작되자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재능과 강점을 발굴하는 작업이 멈추었다. 그 작업은 내게 매우 중요하다. 나의 재능과 강점 그리고 나의 욕망에서 나의 분야가 도출될 것이고, 바로 거기서 내가 전문성을 키워나갈 수 있는 키워드가 발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키워드에 대한 배움과 익힘, 끊임 없는 단련을 통한 첫 번째 성과가 바로 나의 첫 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고, 책에서 인용문을 뽑아내는 것도 중요하고, 책에서 끌어올린 키워드를 통해 칼럼을 쓰는 일도 중요하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스승과 사우들과의 소통, 그 맑은 거울 같은 맑고 아름다움 존재들과의 소통을 통해 나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 몸담게 된 이유는 잊지 말아야 한다. 내 꿈을 찾고, 나의 욕망의 씨앗을 심어 그것이 움트고 자라나게 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일. 나의 한 우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반 삼아 내 세상 하나 만들어내는 일. 그리하여 세상에 살아있음을 안과 밖으로 증명하는 일. 그렇게 꿈과 욕망이 뼛속과 핏줄을 타고 흘러 살아 있음 자체가 광휘가 되게 하는 일.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마구 써내려 가는 글에 내가 몸담고자 하는 분야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창조성 그리고 차별성이다. 그러나 창조성과 차별성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새로운 조합이다. 다만 그 조합을 이루고 있는 구성이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남보다 잘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것들 중 내가 즐거워 하고, 다른 재능들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재능들을 선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선정된 요소들을 잘 조합하여 나만의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창조성이고 차별성이다.

몇 가지 가능성들을 도출해 내었다. 내가 그 동안 전전긍긍 했던 가장 큰 이유가 과연 내가 이것을 잘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그 뒤에 있는 암묵적인 의미는, 타인과의 비교였다.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나는 그 분야를 깊게 파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 하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게 나한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깊게 파보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제대로 파보지도 않고, 그 시기를 차일피일 미루며 언저리에서 맴돌기만 했다. 김용규 선생님 말씀처럼 수영장에 가서 준비운동만 하고 정작 몸에는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있는 형국이다.

희석형님 말씀대로 나는 어느 누구 이상으로 체계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당장 어디서 뛰쳐나오라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 전문가라고 가정하고 전문성, 창의성, 차별성을 단련하는 일에 풍덩 빠져 들어 매진하라는 뜻이다. 나는 더 이상 연구원 견습생이 아닌 연구원이고, 작가 지망생이 아닌 작가다. 습작을 하는 것이 아닌 마감 시한을 정해 놓고 내 글을 써야 하는 프로다. 그렇게 마음을 먹는 것이다. 그렇다. 풍덩 빠지는 것이다. 처음엔 차갑고 심장이 멎을 것 같아 두려워 으슬으슬 떨리겠지만 곧 적응하여 마치 엄마뱃속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도전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글 쓰기는 좋다. 글 쓰기를 통해 이렇게 나와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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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1 05:05:18 *.220.254.215

033일차 (5월 20일)

연수원에서 새벽을 맞이했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곳이다. 이곳에 오면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나무와 흙의 향기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오늘 새벽은 조금 고단했다. 2번째 읽는 책을 다 읽고 자야겠다는 욕심에 평소보다 늦게 잠들었다. 딱 좋은 날씨다. 샤워를 하고 나니 개운하고, 까슬까슬한 이불을 덮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따라 새벽에 왜 이렇게 일어나기 싫던지.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지에 가서 마음껏 하루를 보내고 싶어하는 여행자의 마음과 같았다. 주섬주섬 넷 북을 챙겨서 교육장으로 갔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휘갈겨 쓰기. 아무도 보여주지 않고, 보지도 않을 것이며, 내 마음 속에 피어 오르는 것을 마구잡이고 적는 것. 소름이 끼치도록 즐거운 활동 중 하나며, 새벽에 나를 깨우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활동이 끝나고 표류했다. 많지는 않지만 필사를 해야 할지, 리뷰를 해야 할지, 칼럼 초고를 써야 할지 고민했다. 세 가지 모두 당기지 않았다. 오늘따라 왜 그런지 의무감에 뭔가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대로만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내 가슴이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만과 답답함, 불안감과 일종의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과감하게 노트북과 책을 덮었다. 몸을 뒤로 젖히고 발을 턱 하고 책상 위에 올려 놓고,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마음이 하자는 데로 내버려 두었다. 오늘은 그렇게 내 멋대로 새벽 시간을 흘려 보냈다.

샤워와 식사를 하고 다시 교육장에 돌아와 장영희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읽었다. 한 꼭지도 제대로 읽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몰려 들어왔다. 이내 책을 듣고, 수업을 들었다. 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수업에 몰입했다. 커뮤니케이션 수업이었는데, 강사가 강의를 잘 해서 휴대폰 녹음기로 녹음을 해두었다. 처음에 시작한 내용이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너무 흡사해서 나를 위한 강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제가 의사소통의 문제뿐만 아니라 의식소통의 부재 때문에 생긴 문제이기도 하구나. 이 강사는 강의 경력 16년의 베테랑 강사였다. 자신의 저서는 없지만 16년이면 이미 1만 시간 법칙에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또랑또랑한 아나운서 같은 목소리에 숙련된 솜씨로 교육생을 사로 잡는다. 어떤 지점에서 교육생 들이 지루함을 느끼고 고개를 숙이고 딴 짓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어떤 수준의 능동적 활동이 교육생의 반발을 사지 않고 적극적 참여를 이끌 수 있는지 알고 있는 듯 했다. 의도적이지 않아 보이게 아주 노련하게 그것을 교육생들에게 적용했다. 내용의 깊이를 떠나 그런 강연 스킬에 대해서는 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강의를 들으며, 나의 미래 모습을 계속해서 투사해 보았다. 내가 저 강의를 진행한다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다. 내용의 깊이는 기본이고, 어려운 내용의 컨텐츠를 교육생의 수준에 맞게 먹음직스럽게 가공하여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강의를 해야 하는 컨텐츠는 전문성을 위함일까, 아니면 들으면 좋은, 나중에 언젠가 써먹을 수 있는 교양 강좌일까? 아니면 사부님처럼 가슴에 불을 지르고 심란하게 만들 수 있는 강연을 할 것인가? 궁극적으로 내가 지향하는 것은 사부님과 같은 강연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

지난 경주 여행 때 희석이 형에게 배운 점 하나. 좋은 강사의 핵심역량은 전달력이라는 것이다. 전달력은 내용의 깊이와 상관없다. 듣는 사람을 사로잡는 전달력은 팬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예인의 퍼포먼스와 같은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말의 요지였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콘텐츠의 질적 측면과 깊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콘텐츠 전문가의 역량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사실 어떠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물론 콘텐츠도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말이다.

속 빈 강정 같은 인기강사. 우후죽순처럼 한 순간 일어섰다. 한 순간 스러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우선을 일가를 이루어야겠다. 강연은 그 다음이다. 나만의 전문분야에 뜻을 세우고, 그 분야에서 1인자가 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할 것이다. 그 분야가 곧 탄생 혹은 조합될 것 같다는 예감이다. 강연은 그 가운데서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수련할 것이다. 역시나 중요한 것은 분야를 정하고 깊이 있게 그것을 파 내려 가는 것이다. 그 분야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자신의 마음과 마주하게 하는 것, 더불어 사람들과 더불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내가 걸어온 길이 담겨져 있는 것 등등 아직은 그저 가능성의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곧 창조적이고 차별적 조합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서울에 도착하니 5시쯤 되었다. 사무실에 들르지 않고, 양평에 내려가기 위해 차를 주차해 놓은 종합운동장으로 곧바로 향했다. 탄천 부근을 산책하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차 안에 머물렀다. 아침에 읽다 만 에세이를 읽었다. 가슴에 사무치는 구절들이 있어 밑줄을 긋고, 아래 여백에 내 생각들을 적었다. 연구원 활동을 하면서 생긴 좋은 습관 들이다. 예전 같았다면 한 권을 먹어 치우기 위해 한 꼭지를 읽고 곧 바로 다음 꼭지로 넘어가는데 급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한 꼭지를 읽고 눈을 감고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지켜보다 살포시 떠오르는 생각들을 옮겨 적었다. 마음이 맑고 투명해지는 것을 느낀다. 늘 이렇게 맑고 가벼운 독서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독서는 참 매력적이다. Secret Garden의 The Promise를 들으니 비 오는 바깥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퇴근했다는 아내의 메시지가 왔다.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하나가 내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지루하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하루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 있는 삶의 여백을 안겨준 소중한 에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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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2 04:15:35 *.109.53.114

034일차 (5월 21일)

좀 더 색다른 조합이 필요하다. 연구원 선배 중에 이미 내가 쓰길 원하는 책을 쓴 선배가 있다. 하나같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써 놓았다. 그래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이상을 쓸 수 있는 더 나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현상에 대해 나열한 단순한 자기 계발서적이 아니라, 원전으로 인용될만한 수준의 전문서이다. 뭔가 좋은 창조적이고 차별적 조합이 나타날 것 같은 느낌이다. 날개가 돋아나기 전의 가려움이라고 해야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한 놈이 끝까지 가는 게 아니라 끝까지 가는 놈이 강한 거다" 아마도 연구원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의 간절함과 응집력이 약간 와해되고, 매 주의 사이클에 대해 적응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삶의 여유를 되찾는 것도 중요하고, 유연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의 간절한 마음, 초심을 잊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렇기 때문에 적응은 좋은 거지만 한편으로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적어도 평범함에서 비범한 수준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안식과 적응은 최대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의 불편한 감정은 아마도 나 자신에게 그러한 행동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현상에 대한 문제점은 이렇게 파악했으니, 초심을 잃지 않고, 느슨해 지려는 마음을 다 잡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어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불필요한 것들은 무엇인가? 과욕이다. 바로 그 과욕이 내 생각 이곳 저곳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과 앞으로 이루려고 하는 꿈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다른 생각들을 압도하고 있다. 특히 남보다 어찌 하겠다는 생각과 남보다 어찌 하다는 우월과 비교에 대한 생각들이야 말로 나의 정신적 리소스를 잠식하는 가장 커다란 요인들이다.

생각이 이리저리 흩어질 때는 단순하고 간소한 훈련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적어도 내가 슬럼프를 극복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쉽고 가벼운 일에서 성취감을 얻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순한 필사 작업에 몰입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자유로운 글을 휘갈겨 쓰는 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산책과 가벼운 운동을 통해 몸에 활력을 불어 넣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일은 굳게 믿고 있는 신념에 균열이 가지 않도록 견고하게 그 마음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예상했던 일이다. 호들갑 떨지 말고 묵묵하게 걷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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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04:24:43 *.109.53.114

035일차 (5월 22일)

두 번 읽기를 하는 주라 너무 마음을 놓았던 탓일까? 과제를 함에 있어서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과제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모닝페이지와 단군일지, 어제에 이어 칼럼의 초고를 완성하고, 다듬는 작업을 했다. 책은 생각보다 꼼꼼하고 깊이 있게 그리고 일찌감치 읽어 놓은 터라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 같다. 잠시 눈을 더 붙이고 가볍게 아침식사를 하고 노원에 있는 북 카페로 향했다. 문을 여는 시간인 10시에 맞춰 갔고, 내가 좋아하는 창가에 있는 바 자리에 앉았다. 비가 올 줄 알았는데 날씨가 싱그럽다.

원래 아내와 일산 호수공원으로 소풍을 가려고 했는데, 비가 올 것 같기도 했고, 생각보다 과제가 지연이 되어서 북 카페로 출근한 것이다. 자꾸만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쌓여간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음 주에는 일찍 과제를 마감하고, 주말 하루를 온전히 아내와 함께 하는데 보내야겠다. 많이 미안하고 애틋하다. 일연의 생에게 관해 몇 가지 스크랩 해둔 것이 있었음에도 과제를 하는데 버퍼가 좀 많아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소요 되었다. 글에 대한 구조적 평가와 내가 저자라면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표현이 많이 들어가 버려 아쉬움이 남는다.

두 번 읽기를 통해 새롭게 밑줄을 긋고 필사를 하게 된 부분이 스무 페이지나 된다. 사실 그렇게 많이 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어떤 오기 같은 것이 작동해 버렸다. 그래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원래 계획은 오후까지 여유 있게 작업을 하고 일찍 집에 들어가 아내와 수락산 산책을 하고, 근처에 있는 허브 샵에 가서 지난 번 연구원 수업 때 경수형이 가지고 왔던 것 같은 아로마 오일을 사려고 했다. 끝 마치고 나니 저녁 6시가 훌쩍 넘어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도중에 집에 전화를 드리니 전화를 안 받으셨다. 불안한 마음에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불안한 마음이 적중했다. 배가 뒤집혔다 한다.

그래도 엄마, 아버지 두 분 아무런 이상이 없으시단다. 배도 이상이 없고. 처음엔 우리 부모님의 가난하고 박복한 삶에 분개하여 하늘과 신에 대한 쌍 욕이 나왔지만 오히려 웃으시는 엄마의 여유로운 말씀에 타오르는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엄마 말씀대로 운이 좋으셔서 살아나신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저녁을 먹고 아내와 가볍게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어둑해 져서 수락산은 못 갔다. 허브 샵도 늦어서 문을 닫았다. 나중에 또 오고, 일찍 오라는 계시다. 같은 일에 대해 내가 가질 수 있는 태도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어떤 태도를 택하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인지 확인 할 수 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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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19:24:46 *.124.233.1

036일차 (5월 23일)

하루 중 체력이 가장 소진되어 있는 시간인 저녁 7시.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났으니 15시간째 깨어 있는 셈이다. 물론 짬짬이 졸기도 했다. 이번 주 과제 도서는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 중에 가장 분량이 적어 부담감이 덜하다. 그리고 지난해 초 한 번 읽었던 터라 읽는데 큰 지장이 없었다. 그래도 자만은 금물 부지런히 읽고 신속하게 필사를 마무리 지어야겠다. 그래야 이번 주말 아내와의 소풍이 가능하다. 나도 하루 정도는 여유 있게 아내와 수다도 떨고 좋은 풍광도 만끽하고 싶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회사는 나에게 감옥의 철창 같은 곳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은 당분간 나를 보호해 줄 울타리처럼 느껴진다.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속성을 이렇게 달리 해석할 수도 있는 죽을 끓듯 변하는 내 마음이 오늘은 익살스럽게 느껴진다. 내 마음은 지속적으로 불균형을 극복하고 안정화된 상태를 요구한다. 마음의 평온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내게 있어서 그 요인은 대체로 사람들과 엮이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뭔가를 달성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 상호작용이라는 역동적 관계 속에서 추구하는 중요성에 대한 갈망. 이러한 것들이 마음의 안정감을 주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진다. 물론 나는 혼자 놀 줄 아는 사람이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관계의 장 속에 들어오면 문제가 달라진다. 기필코 '성취'해야 하고, 영향력이 큰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강박과도 같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것이 오랜 시간 조건화된 무리들 속에서 안정감을 찾는 메커니즘이다.

바꾸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리비도다. 리비도는 선악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에너지다. 이 에너지를 어떻게 승화시켜내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통로, 즉 꿈의 몫이며, 또한 표면으로 드러난 이 거대한 에너지를 멋지게 컨트롤 할 수 있는 의식의 테크닉에 달려 있다.

거시적인 것, 숲을 바라보는 것을 사랑하면서도, 나의 깊은 미시 세계를 사랑하는 나의 이 두 가지 시선. 진리라는 것, 깨달음이라는 것은 아주 기가 막히게도 내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곳. 모순과 역설의 한 가운데에 은밀하게 자리하고 있다.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공존하는 곳, 대극적 가치가 합일이 되는 그 지점. 바로 거기에 궁극의 가르침이 자리하고 있다. 월요일 저녁 '자발적 빈곤의'의 허기짐과 피로감으로 눈이 침침하지만 정신은 더할 나위 없이 청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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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6:54:41 *.124.233.1

037일차 (5월 24일)

비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를 이끄는 북극성 아래의 세계를 구체화 시켜 놓은 것이다. 궁극적으로 내가 가야 할 곳이다. 내가 겪는 수 많은 불일치가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내가 그린 그림과 내가 사는 그림이 너무 달라 거기서 괴리감을 겪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하루 스물 네 시간 모두가 그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부분이라면 좋으련만, 하루의 반 토막 이상의 시간이 조직이 그려 놓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는 데 할애되고 있다. 스승께서는 우리가 현업에서 좌절하는 것은 개인의 비전과 조직의 비전 간의 이질감 때문이라고 하셨다. 절절히 와 닿는다.

적응을 잘 했던 과거에는 어떠했는가? 조직의 비전이 곧 나의 비전이었다. 이 말은 곧 나의 비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희미했던 북극성이 명료해지고, 소중한 가치를 찾고, 미래의 풍광을 그렸다. 그렇게 그리고 채색하는 그림이 명료해질수록 내가 깨닫는 것은 지금 내가 잘못된 옷을 입고, 잘못된 곳에서 광대놀음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이었다. 그것은 참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조직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자 여기저기서 칭찬이 자자했다. 사람들도 나를 부러워했다. 그 영광이 곧 나의 정체성이었다. 충만했고 즐거웠다. 그러나 내가 갈 곳이 정해지자 이내 나를 둘러싼 모든 신기루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최근 나의 사유의 대부분은 이렇게 매일 벌어지는 마음 속 전투를 수습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영혼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과 끈덕지게 이곳을 붙잡아야 한다는 마음은 서로 치고 받는다. 이 전투를 수습하는 또 다른 온갖 감언이설로 각각의 자아를 설득한다. 오랜 기간 전투가 계속되자 이들은 내성이 생기기 시작했고, 전투의 강도는 더욱 더 강해졌다. 또 다른 자아는 깨닫는다. 더 이상 응급처치 식의 단기처방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문제의 근원을 찾아 해결해야 한다. 그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지저분하고 끈적끈적한 두꺼운 껍질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그것은 아집, 위선, 자존심이다.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내 입장만을 고수한다. 나만 옳다. 그대들이 틀리다. 나도 틀릴 수가 있음을, 나도 잘못될 수 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게 나의 정체성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리석은 껍질을 깨부수지 않는 한 나는 늘 제자리에 머물러 같은 전투를 벌일 것이다. 즐길 수 있는 삶의 여백도 줄어들게 되고, 그나마 좋은 관계들도 잠식되어 갈 것이다. 아! 이 놈의 외골수.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변화시키는 차원을 떠나 근본적인 사고의 틀, 패러다임을 전환시켜야 한다. 가지치기만으로는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근원을 찾아 해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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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6 18:22:06 *.124.233.1

038일차 (5월 25일)

읽은 책에서 참으로 와 닿는 부분이 있어 그 부분에서 실마리를 얻어 이번 주의 칼럼을 쓰려고 한다. 지금 내가 직장에서 고전하고 있는 또 다른 핵심 요인을 정확하게 간파한 내용이라 읽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결국 모든 것은 이렇게 마음으로 귀결되고, 태도로 귀결된다. 마음이 즐거움도 빚고, 똑같은 그 마음이 온갖 번뇌망상도 빚는다. 결국 이 마음으로 우리는 일어났다 스러진다. 그 마음과 끊임없이 다투기도 하고, 친해지기도 하면서 오랜 시간 아옹다옹 살아왔다. 서로 볼꼴 못 볼꼴 다 보아 가며 딱 내가 살아온 시간만큼 함께 한 것이 그 마음이다. 다시 말해 그 마음이 곧 내 삶이다.

<굿바이 게으름>이 사람들에게 반응이 좋았던 이유는 마음을 치료해주는 정신과의사가 마음의 병 중 하나인 게으름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같은 게으름을 다루었다고 하더라도 의사라는 타이틀 없이 책이 반응이 좋을 수 있었을까? 아는 형님께서 우스개 소리로 이야기 하셨지만, 일기형식으로 된 스승의 저서 <일상의 황홀>과 똑같은 내용, 아니 그 보다 더 유려한 필치로 글을 쓰고, 같은 제목으로 출간했다면 책이 나갔겠느냐고. 결국 이 두 가지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것은 브랜드다. 브랜드를 갖추어야 내가 세운 업적들에 힘이 실리는 것이다. 브랜드는 바로 세상이 나를 얼마만큼 알아주느냐를 나타내는 척도와 같다.

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유명해지길 원하는가? 이 말은 연구원 레이스의 마지막 칼럼의 주제는 '나는 무엇으로 특별해지길 원하는가?'와 정확히 같은 질문이다. 이 분야를 정하는 일이 올 한해 내가 천착해야 하는 일이고, 내년에 쓰게 될 내 책의 주제, 키워드가 되어줄 것이다. 나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길 원하며, 그 전문성을 기반으로 고객에게 어떻게 어프로치 할 것인가? 고객에게 공헌할 수 있는 차별적인 요소여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고, 이것이 평생직업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욕망과 강점에 입각해야 한다. 그것이 맞는지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직접 그 일을 해보는 일.

간접 체험을 위해 독서를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판단을 하려면 그 일을 직접 해보는 수 밖에는 없다. 그것도 맛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일 속에 깊이 침잠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짧은 시간에 깊이 빠져보고 그 일이 내 가슴의 중심과 맞닿아 있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천복, 천직. 말은 쉽지만 마치 신기루와 같아서 눈앞에 있는 것 같다가도 이내 사라져 버린다. 천복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의문으로 지워버리게 되고, 믿지 않게 된다. 그렇게 천복의 주위를 맴 돈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수영장에 가서 언제까지 준비운동만 할 것인가? 물로 뛰어들 것. 어떻게? Just D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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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6 18:23:31 *.124.233.1

039일차 (5월 26일)

역시 늦게 잠이 드니 새벽 기상이 버겁다. 어제 2기 선배 부친상에 다녀왔다. 사부님도 오셨고, 입학여행 때 뵙지 못했던 분들도 뵐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무엇보다 2주 만에 만난 재경누나, 루미, 미나를 봐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훈이형님, 경수형, 사샤누나, 미선도 함께 보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그립고 자주 모여 이야기 나누고 싶다. 1기 병곤 형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형님께서 좋은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 정말로 멋진 선배님이시다. 노원역에서 함께 걸어오는 길, 형님께서는 당고개 너머에 있는 남양주 청학리에 관한 좋은 정보를 알려주셨다. 주말에 아내랑 꼭 가보고 싶다.

집에 돌아오니 1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4시가 다 되어 힘겹게 눈을 떴다. 새벽활동의 최소한의 기준. 모닝페이지를 간신히 적어 내려갔다. 다 쓰고 나니 30분 정도가 걸렸다. 조금 늦는 한이 있더라도 피곤에 절어 하루를 보내는 것보다 조금 더 자 두는 것이 낫겠다 싶어 30분 정도 더 잤다. 일어나니 훨씬 개운하다. 출근 길, 여전히 이른 시간이라 자리는 텅텅 비어 있었지만 졸지 않고 책을 읽기 위해 늘 서서 간다. 오늘도 예외는 없다. 비록 30분의 시간이지만, 이 시간의 독서가 가장 집중이 잘 된다. 나는 아주 많은 책을 이곳에서 읽어냈다. 그리고 더 많은 책을 이곳에서 읽게 될 것이다.

출근해서 칼럼에 대한 자료와 컨셉을 이리저리 뚝딱 거리다가 집중이 되질 않아 필사를 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졸음이 몰려 올 때는 역시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그 중 필사는 으뜸이며, 하고 난 뒤의 성과물과 성취감이 있다. 평소보다 약간 늦게 출근해서 1시간 반을 꽉 채우지 못했지만, 스승의 주옥 같은 문장을 필사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몰입했고, 몰입한 그 순간 나는 스승이 되었다. 이런 단순한 필사작업은 뜨끈한 고민과 뻐근한 넘어섬은 없지만 자근자근 쌓여가는 무언가가 있다. 단순하고 간소한 작업이어서 마음도 성성해지고 쉽게 몰입할 수 있다.

그래서 때론 슬럼프에 빠져 있거나,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것과 마주했을 때, 그 반목적인 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단순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즐긴다. 새벽에 쓰는 모닝페이지, 출퇴근 길의 걷기, 주말의 가벼운 산책은 내가 일상에서 자주 즐기는 활동 들이다. 삼국지의 유비가 번민에 빠지거나 답답할 때 짚을 꼬아 돗자리를 만드는 단순한 일을 했던 것도 이와 같은 뜻이 아니었을까? 모닝페이지를 알게 된 <아티스트 웨이>에도 운전과 같은 단순한 활동을 통해 성성한 몰입에 빠져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단순하고 간소한 것이 좋다. 법정스님께 배운 큰 가르침 중 하나다. 불필요한 비본질적인 것을 버리고 가볍고 경쾌하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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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8 04:50:02 *.109.52.54

040일차 (5월 27일)

슬럼프라는 것은 언제나 무력함에서 비롯된다. 어제 새벽 출근 길 청담역에서 회사로 걸어가는 길. 무력함에 대해 생각했다.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이 무력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적어도 내게 조금씩 찾아오는 무력감은 지속되는 좌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당장 내 삶이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현실이란 벽은 만만치 않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매일 반복되는 같은 고민 속에 나는 좌절한 것이고, 그 좌절감은 무력감으로 바뀐다. 그 무력감이 또 되풀이되면서 지독한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그런 슬럼프는 주로 날씨가 무더워지기 시작하는 딱 이맘때 시작되곤 했다.

좌절의 근원은 나의 성마름이다. 장기적으로 꾸준히 쌓여야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당장에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조급한 마음이 좌절을 불렀다. 아직 분명한 비전과 나의 천복 그리고 천직도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으면서, 당장 회사를 뛰쳐나가 뭔가를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은 충동. 하루를 내가 하고 싶은 일들로만 가득 채우고 싶다는 욕망. 그런 충동과 욕망은 나를 유리상자 안에 갇힌 파리로 만들었다. 현명하게 출구를 찾는 대신 무작정 이리저리 날뛰어 여기 저기 상처를 남기는 꼴이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이란 말인가?

그래도 희망은 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생긴 무력감과 미친 듯이 하고 싶은 것이 있어 생긴 좌절감은 그 본질이 다르다. 나의 이러한 성마름은 나의 못된 기질 중 하나다. 어릴 때부터 강화되어온 기질이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때를 쓰고, 억지를 부려서라도 반드시 그것을 이루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다. 세상은 그 세상살이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따끔한 가르침을 준다.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래서 스승께서는 깨닫고, 견디고, 그 다음 넘어서라고 하셨다.

인생은 답안지가 찢겨진 문제집이다. 예전처럼 문제가 안 풀린다고 쉽게 해답집을 찾아 넘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뜨끈하고 뻐근하게 온몸으로 부딪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스스로 답을 얻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말해줄 수 없다. 오로지 스스로만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무력한가? 이 무력함 마저 참고 견뎌라. 대신 이왕 참고 견디는 것이라면 까르르 웃고 즐기며 견디는 것이다. 할 수 없음에는 할 수 있음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메시지와 함께 말이다. 눈과 어깨에 힘 풀고. 부드럽고 유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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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9 05:04:18 *.109.53.74

041일차 (5월 28일)

편하고 쉽게 글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어렵다. 어제는 절절하게 그것을 깨우친 시간이었다. 아주 많은 시간을 칼럼을 쓰는데 보냈다. 그렇게 썼음에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오랜 시간 인내를 가지고 썼다. 질적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뻐근함과 따끈함도 견뎌내려 했다. 다만 우려가 되는 것은 그것이 고통이 되었을 때 과연 계속 하고 싶겠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즐거움이 고통이 되면 우리는 피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생긴 스스로에게 물은 좋은 질문 하나. 이 글을 씀으로써 '나의 문제가 정말로 해결되었는가' 이다. 잔뜩 길게만 써놓고 정작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이라면 그것 역시 NG다.

편한 글을 편한 글대로 즐겁고, 어렵지만 갖춰지고 좋은 글을 쓰려는 시도는 그 나름대로의 흐뭇한 보람이 있어 좋다. 요즘 계속해서 나를 뒤흔드는 화두가 있다. 모순과 역설, 조화와 균형, and 패러다임, 대극의 통합과 합일 등이 그것이다. 결코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을 공존시키는 일이다. 나처럼 똑 부러지게 '이것 아니면 저거' 식의 이분법적 사고, 다시 말해 or패러다임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은 경계선이 모호한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하는' and 문화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진리를 비롯한 진짜 보물은 정말로 찾기 힘든 그 경계선 사이 어딘가에 있을 균형점 위에 존재한다. 이것 참 멋진 표현이다. 배움이며 앎이다. 그 동안 몇 차례 표현하려고 시도했었지만 어려웠던 부분이다.

양극단 사이에 균형점 위에 보물이 있다. 그러나 그 균형점을 찾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그것을 찾는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한 단련과 동물적인 감각을 필요로 한다. 마치 자전거를 타는 일과 같다. 처음엔 자꾸 넘어진다. 그러다 다시 일어나서 페달을 밟고 좌우로 왔다 갔다 균형 잡는 연습을 반복하다, 어느새 균형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게 되고, 이윽고 넘어질래야 넘어질 수 없는 단계에 이른다. 자전거를 배우는 일이나 운전 등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절차기억, 일종의 몸에 베는 기억이라 초기에 깊게 단련되면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게 된다. 마치 뜨거운 것이 몸에 닿게 되면 자동 반사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 것처럼 변화와 성장은 우상향의 직선적 성장이 아니라 우상향 계단의 도약형 성장을 이루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매일 꾸준히 연습하지만 늘 그 자리에 머무는 듯 하다. 그러나 참고 견디며 그 훈련을 지속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다음 단계로 도약하게 된다. 물론 점진적으로 실력 향상을 의식하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음 단계로 이르는 데 걸리는 시간인데, 그 시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변수가 바로 수련의 질적 측면이다. 단순한 양적 반복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도약의 한 축을 이루지만 거기에 수련의 질적 가치가 보태지면 도약이 시기가 당겨지고, 도약하는 높이가 높아진다. 여기서 나는 내가 연구해야 할 또 다른 화두를 만난다. 수련의 질적 측면에 중요한 변수 중 하나인 '몰입'이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배움은 즐겁다. '변화와 성장'이라는 키워드와 '심리학'이 만나는 그 지점에 내 천복이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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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0 20:04:31 *.124.233.1

042일차 (5월 29일)

아주 오랜만에 아내와 조조 영화를 보았다. 어제 저녁에 문득 생각이 나 법정스님 다큐멘터리를 보다, 지난 번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 했었던 '법정스님의 의자'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떠올랐다. 8시 40분 영화라 7시 반쯤에 집에서 출발했다. 명륜동에 있는 학교 근처에 차를 주차하고, 대학로 CGV에 도착하니 8시 10분 정도가 되었다. 조조 영화라 기본적으로 할인이 되고, 카드 할인까지 합하여 3,500원에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영화가 시작되었고, 관객은 아내와 나 그리고 나이 드신 어머니 뻘의 아주머니와 스님으로 추정되는 회색 승복을 입고, 벙거지 모자를 쓰신 분 이렇게 넷 뿐이었다.

가끔 그렇게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찾다 보면, 스님이 아직도 강원도 오두막에서 맑고 향기로운 모습으로 정진하고 계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나 마지막에 법정스님의 맏상좌 이신 덕조스님께서 하신 말이 가장 감동적이었다는데 동의했다. "스님께서는 다 버리고 떠나신 게 아니라, 다 주고 가신 거죠" 그렇게 남기고 가신 맑고 향기로운 기운에 나는 오늘도 흠뻑 취해 막 살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소중하게 보내야겠다고 다짐한다. 늦잠 잘 수 있는 일요일에 나를 따라 나서준 아내가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럽다.

영화가 끝난 뒤 아내가 찾은 맛 집에 갔다. 주 메뉴가 노란 양은 도시락이다. 볶음김치, 계란 후라이, 분홍 소시지가 들어있다. 이제 막 영업을 시작하여 무척 늦게 나왔지만, 아내는 마냥 신이나 이것 저것 사진도 많이 찍으며 즐거워했다. 천천히 밥을 먹는 아내, 서두르지 않게 하기 위해 나도 보조를 맞추어 아주 천천히 먹었다. 아내처럼 꼭꼭 씹어 천천히 먹었다. 그렇게 먹으니 게걸스럽게 꿀꺽꿀꺽 집어 삼키는 것보다 좋다. 그렇게 맛있게 밥을 먹고 천천히 걸어서 학교로 갔다. 오랜만에 찾은 교정은 많이 변했지만, 잔디밭에 나는 흙 내음과 땅 내음은 예전 그대로다. 그래서 정겨웠다.

나는 연구원 과제를 했고, 아내는 자격증 공부를 했다. 쉽게 끝마칠 수 있는 것들을 조금 미룬 감이 없지 않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 <깊은 인생>에 있는 스승의 이야기를 가벼운 마음으로 필사하려 했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분량도 스물 네 장이나 되었다. 필사한 내용까지 합하면 총 70 페이지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스승의 글은 통째로 베끼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할 만큼 주옥 같다. 그러나 이것도 과유불급, 필사를 줄이고 다음 주 책을 읽고 싶었는데, 그래도 스승의 삶을 손 끝에 담았으니 이것으로 만족. 돌아오는 길 생각보다 차가 막히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남은 과제를 마무리 지었다. 보람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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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0 20:05:11 *.124.233.1

043일차 (5월 30일)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 들여다 보기 싫었던 어두운 실수를 끄집어 최대한 객관화 시켜 보았다. 이미 현명한 정답은 나왔다. 치우침에서 벗어나 가운데 길로 걷는 것이다. 이 교훈을 어떻게 삶에 접목시킬 것인가? 현실로 돌아온 나는 난감해 한다. 방법은 알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 두려움이 앞으로 가리고, 자존심이 앞을 가린다. 결국 제자리 걸음인 셈이다. 내가 쥔 것을 내려 놓고, 내 것을 주지 않는다면 결코 돌아오는 것은 없다.

그렇다. 나는 아직 길을 걸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니 실제로 길을 걸을 마음이 없는 것이다. 아! 이 지독하고 어리석은 아집이여! 수백 번을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가장 현명한 방법은 내 마음 하나 바꾸는 일이다. 스승의 말씀처럼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끝으로 이르는 그 길이 너무나 멀게 만 느껴진다. 제대로 실패하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배울 것 같다. 핏속을 흐르다 못해 뼛속에 아로새겨질 만큼 확실하게 배운다. 못 버틸 정도는 아니지만 고통의 강도가 참 세다.

영웅의 여정을 몰랐더라면, 사기열전, 열정과 기질, 사람에게서 구하라를 읽지 않았더라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없었더라면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영원한 봄은 없다. 영원한 영광도 없다. 또한 영원한 겨울은 없다. 영원한 불행도 없다. 다 한 때일 뿐이다. 흙탕물처럼 부옇게 탁한 이 순간을 묵묵히 견디고 나면 내 마음은 한층 더 자라날 것이다. 늘 의식하지 못한 채 이루어지던 성장과정을, HD화질로 생생하게 들여다보게 되니 그 아픔도 만만치가 않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 속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승화한 영웅의 이야기를 읽는다. 영웅은 나의 상상 속의 존재하던 그런 영웅이 아니었다.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약한 인간 그 자체였다. 그 삶에서 배우고자 한다. 두렵다. 힘겹게 쥐고 있는 세상을 향한 한 가닥 끈을 놓아버릴 까봐. 그러나 나의 독한 근성은 결코 그 끈을 놓지 않을 것임을 안다. 이런 지독하게도 생생한 시련은 거름이 될 것이다. 훌륭한 거름이 되어 나의 꽃이 보다 선명한 색을 띠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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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1 01:24:53 *.124.233.1

043일차 (5월 31일)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새벽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난중일기를 읽으며, 이렇게 매일 남기는 기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모닝페이지를 포함하여 하루 적어도 두 꼭지의 글을 써온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이런 활동들은 뭔가를 누적적으로 채운다는 성취감 보다는 쌓여 있는 것들을 쏟아낸다는 느낌으로 썼다. 아마 이런 활동들에 어떤 의도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었다면 아마도 오래가지 못했으리라. 그래서 이렇게 써 놓은 글들은 잘 갈무리해 두었지만 다시 꺼내 읽어 보지는 않는다. 시간이 더 흐른 뒤에 읽는다면 참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달 즈음부터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일을 하다가 중간에 꼭 쉬는 시간을 갖는 연습을 한다. 회사에 23층까지 10층 정도를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올라가 창가에 앉아 눈을 감고 쉰다. 졸 때도 있다. 그렇게 쉬고 나면 무척 개운하다. 예전에는 1시간에서 2시간단위로 담배를 피우며 휴식을 취했었다. 담배를 끊으면서 다시 담배의 유혹에 휘둘리기 싫어 아예 바깥에 나가질 않았다. 그래서 계속 자리에 앉아 있다 보니 하루 중 점심을 제외하면 홀가분하게 쉬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체력비축 겸 스스로 여백을 만들어 보았는데 참 좋은 것 같다. 여유를 가지고 한 숨 돌리는 휴식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회사에서 전산이행이 있어 부득이하게 야근을 한다. 퇴근하는 아내와 함께 회사 근처에 있는 국수 집에서 가볍게 요기를 했다. 법정스님 다큐멘터리 영화에 국수 먹는 장면이 나와서 국수 생각이 나서였다. 아침에 가볍게 빵 두 쪽, 점심은 잘 차려서, 저녁엔 국수. 스님은 이렇게 하루 식사를 해결하셨다고 한다. 우리가 각종 병에 걸리는 원인을 두고, 머릿속에 생각이 많고, 입 속에 말이 많고, 뱃속에 밥이 많아서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불교에서는 식사를 하기 전 '오관게'를 암송한다.

오관게(五觀偈)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 부끄럽네
마음에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道業)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음식을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지나치게 맛에 탐착하지 않고 간소하고 검박하게 먹으라는 메시지다. 그러나 어리석은 나는 이 오관게를 알게 된지 한참이 되었어도, 늘 육식에 탐착하고, 맛에 탐착하고 과식을 한다. 출가 수행승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한 신도가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 "머리 깎고 중이 되어 절에 산다고 하더라도 중생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한낱 중생에 불과한 것이고, 저잣거리에 살더라도 수행자의 마음을 가지고 정진한다면 진정한 수행자 아니겠느냐"고. 그래서 나는 '재가 수행자'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물론 쉽지 않고 마음만 앞설 뿐이다. 그러나 닮고 싶은 삶이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삶을 닮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이는 옛 교과서에 나오는 '큰 바위 얼굴'과 같다. 나도 모르게 그런 삶을 닮아가고, 결국 언젠가 닮고자 하는 그 존재가 된다. 나에겐 그게 아름다움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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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2 04:36:45 *.109.80.171

045일차 (6월 1일)

밤샘 작업으로 새벽 4시가 다 되어 집에 들어왔다. 2시간 남짓 눈을 붙이고 다시 일어나 출근했다. 조금이라도 잠을 잘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번 주 과제 도서인 <난중 일기>를 읽고 있다. 임진왜란의 거의 마지막까지 왔다. 솔직 담백한 문체들 사이에 있는 여백들에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에서 보았던 기억들을 메워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경험하려고 한다. 어렵다. 오래 전에 봤던 드라마라 기억이 가물거린다. 잠시 짬을 내어 동영상으로라도 봐야겠다. 동영상이 방아쇠가 되어 묻혀 있던 기억들을 끄집어 내줄지도 모른다.

점심은 인사부서에 있는 손대리와 함께 했다. 회사에서 보기 힘든 나무 같은 사람 중 하나다. 상당한 인텔리 임에도 겸손하고, 말도 통한다. 회사 사람들, 특히 부서 사람들은 대부분 현실적이고, 감각형의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경험론자와 유물론자에 가까운 현실주의자들이 대부분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몇 가지로 획일화 시키는 것은 물론 문제가 있지만,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가 그들과 상당히 대조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다. 우선은 들을 줄 아는 사람이고, 내가 하는 언어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회사에서 만난다는 건 행운이다.

오후에 다음날 있을 혁신과제 발표자료를 막판 벼락치기, 똥줄타기 집중력으로 작업했다. 벼락치기에 의존하는 건 싫지만, 뭔가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순간은 정신이 성성하고 좋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참 보람이 있다. 칼럼의 꼭지를 정했는데, 깊이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깊이 빠져드는 데는 역시 걸으며 생각하기가 최고다. 걷는 시간을 늘리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주말 중랑천 산책이 최고다. 그런데 요새 평일에 많은 시간을 내지 못하다 보니 주말의 긴 산책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한 주씩 당겨보려고 하는데 그 일이 쉽지가 않다. 겉으로는 부지런하고 성실한데, 실제로는 게으르다. 이것은 큰 게으름이다.

저녁에 문요한 선배를 만나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꿈을 이룬다는 것이 별거냐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꿈꾸던 사부님과의 만남, 연구원들의 책을 읽으면서 꼭 만나보고 싶었던 병곤 형님, 요한 형님, 승완 형님, 희석 형님, 승오 형님 이들과 모두 만났다. 특히 요한 형님의 분야와 키워드는 내가 평소 꿈꾸던 분야라 그 만남이 더 값지다. 잘 생기셨고, 무척 잘 들어 주셨다. 결국 오랜 시간 내 이야기만 주저리 늘어놓고 말았다. 그래도 잘 들어주셨다. 7시 조금 넘어 만났는데 10시가 넘어 헤어졌다. 너무 고맙고 감사한다. 내게 해주신 값진 조언도 결코 잊을 수 없다. 요한 형님과의 대화를 통해 어두운 터널처럼만 여겨지던 삶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좋았다. 역시나 이번에도 결론은 사람이다. 사람에게서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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