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 조회 수 6395
- 댓글 수 3
- 추천 수 0
그 많은 기원과 그 많은 결심들 (샘터 2004. 1월 호 )
나는 지금까지 아주 많은 결심을 했었습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이루어졌습니다. 일 년이 지날 때마다 일년에 대한 생각을 모아 책을 한 권씩 내야겠다는 결심은 이루어진 결심입니다. 그러나 어떤 결심들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되풀이하여 다시 결심하기도 하고, 지쳐 빠져 다시는 같은 결심을 하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길을 가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사람들에게 아주 멋지게 웃어주자는 결심을 한 적이 있는데 결국 못하고 말았습니다. 한가한 거리에서 마주친 모르는 사람에게 약간 고개를 숙이고 웃어주는 것이 그렇게 좋아 보였는데, 난 그걸 못합니다. 지금은 그런 결심을 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아마 자연스럽게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까지 기다리려고 합니다.
나는 아주 많은 기원도 했습니다. 그 많은 기원들 속에는 제발 그녀가 나를 보고 홀딱 반하게 해달라는 것도 있었고,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는 기원도 있었습니다. 즉석 복권을 긁으면서 귀여운 동그라미가 백개 쯤 달린 똑같은 숫자 3개가 탁 맞기를 잠시 기원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주 착한 기원도 있었습니다. 쑥스러워 이곳에서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이긴 하지만요. 바로 그런 기원 덕분에 내가 그런대로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하는 그런 기원 말입니다.
뭐니 뭐니해도 첫 해 첫 달은 기원과 결심의 시간인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내겐 결심보다는 기원이 더 많아졌습니다. 중년이 되면 운명이나 숙명의 힘을 깨닫게 됩니다. 일어난 일에 전혀 속수무책이거나 극히 제한적인 통제력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니까요. 통제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도 엷어집니다. 어떤 책임도 어떤 비난도 짊어지기에는 그저 연약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냉정한 통찰력은 결국 불운과 실수에 대하여 스스로를 용서하게 해 줍니다. 실패와 무능력 혹은 비겁함은 비난받아야 할 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 한계와 비극의 문제로 전환됩니다. 사회에 대한 분노와 강한 자에 대한 비난은 탄식과 슬픔이 됩니다. 겸손과 동정과 베품은 이런 비극적 통찰에서 나온 변환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스스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결심보다는 그렇게 되어 주었으면 하는 기원이 더 간절한 것이 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자기 수용에 따라 중년의 운명론과 융통성이 시작되는 모양입니다.
올해도 기원 하나를 올려 봅니다. 그 동안 곳곳에서 터졌던 전쟁의 상처들이 빨리 좀 아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평화로운 일상이 다시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가족들이 다시 모이고, 함께 밥을 먹고, 연인들이 사랑을 약속하고, 아이를 낳고, 사소한 일로 다투고 다시 화해하는 일상의 작은 일들이 그들에게 다시 하루의 흔한 일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나라에 총을 들고 들어가 평화를 외치는 카우보이가 첼시 과자를 먹다 목에 걸려 한 삼 년 기절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공연히 남의 나라에 군대를 보내라고 성화를 부리지도 않을 것이고, 그가 깨어 날 때쯤이면 바라건대 평화를 절실하게 바라는 다른 지도자가 아주 평화로운 공존의 신뢰를 쌓아 놓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일이 생길까요 ? 많은 사람들이 바란다면, 반드시 그렇게 되겠지요.
또 하나의 기원을 올려 봅니다. 우리 나라의 정치가들이 모두 걸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 같이 하도 더러워 수건으로는 쓸 수 없는 물건들입니다.
그러나 걸레에게도 훌륭한 철학이 있습니다. 그건 자신의 몸을 더럽혀 다른 더러운 것들을 닦아내는 것이지요. 먼저 스스로를 정화하여 깨끗한 걸레가 되고, 스스로 더럽혀 놓은 이 나라 구석구석을 닦아내는 훌륭한 걸레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 우리가 반만이라도 그러길 바란다면, 그런 일들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의 결심을 말해야겠군요. 올해는 꼭 투표를 하겠습니다. 그래서 꼭 깨끗한 걸레 하나를 찾아내겠습니다. 중년은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보는 긍정적 지혜가 위로가 되는 시절이기도 합니다.
IP *.229.146.28
나는 지금까지 아주 많은 결심을 했었습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이루어졌습니다. 일 년이 지날 때마다 일년에 대한 생각을 모아 책을 한 권씩 내야겠다는 결심은 이루어진 결심입니다. 그러나 어떤 결심들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되풀이하여 다시 결심하기도 하고, 지쳐 빠져 다시는 같은 결심을 하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길을 가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사람들에게 아주 멋지게 웃어주자는 결심을 한 적이 있는데 결국 못하고 말았습니다. 한가한 거리에서 마주친 모르는 사람에게 약간 고개를 숙이고 웃어주는 것이 그렇게 좋아 보였는데, 난 그걸 못합니다. 지금은 그런 결심을 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아마 자연스럽게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까지 기다리려고 합니다.
나는 아주 많은 기원도 했습니다. 그 많은 기원들 속에는 제발 그녀가 나를 보고 홀딱 반하게 해달라는 것도 있었고,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는 기원도 있었습니다. 즉석 복권을 긁으면서 귀여운 동그라미가 백개 쯤 달린 똑같은 숫자 3개가 탁 맞기를 잠시 기원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주 착한 기원도 있었습니다. 쑥스러워 이곳에서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이긴 하지만요. 바로 그런 기원 덕분에 내가 그런대로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하는 그런 기원 말입니다.
뭐니 뭐니해도 첫 해 첫 달은 기원과 결심의 시간인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내겐 결심보다는 기원이 더 많아졌습니다. 중년이 되면 운명이나 숙명의 힘을 깨닫게 됩니다. 일어난 일에 전혀 속수무책이거나 극히 제한적인 통제력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니까요. 통제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도 엷어집니다. 어떤 책임도 어떤 비난도 짊어지기에는 그저 연약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냉정한 통찰력은 결국 불운과 실수에 대하여 스스로를 용서하게 해 줍니다. 실패와 무능력 혹은 비겁함은 비난받아야 할 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 한계와 비극의 문제로 전환됩니다. 사회에 대한 분노와 강한 자에 대한 비난은 탄식과 슬픔이 됩니다. 겸손과 동정과 베품은 이런 비극적 통찰에서 나온 변환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스스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결심보다는 그렇게 되어 주었으면 하는 기원이 더 간절한 것이 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자기 수용에 따라 중년의 운명론과 융통성이 시작되는 모양입니다.
올해도 기원 하나를 올려 봅니다. 그 동안 곳곳에서 터졌던 전쟁의 상처들이 빨리 좀 아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평화로운 일상이 다시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가족들이 다시 모이고, 함께 밥을 먹고, 연인들이 사랑을 약속하고, 아이를 낳고, 사소한 일로 다투고 다시 화해하는 일상의 작은 일들이 그들에게 다시 하루의 흔한 일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나라에 총을 들고 들어가 평화를 외치는 카우보이가 첼시 과자를 먹다 목에 걸려 한 삼 년 기절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공연히 남의 나라에 군대를 보내라고 성화를 부리지도 않을 것이고, 그가 깨어 날 때쯤이면 바라건대 평화를 절실하게 바라는 다른 지도자가 아주 평화로운 공존의 신뢰를 쌓아 놓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일이 생길까요 ? 많은 사람들이 바란다면, 반드시 그렇게 되겠지요.
또 하나의 기원을 올려 봅니다. 우리 나라의 정치가들이 모두 걸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 같이 하도 더러워 수건으로는 쓸 수 없는 물건들입니다.
그러나 걸레에게도 훌륭한 철학이 있습니다. 그건 자신의 몸을 더럽혀 다른 더러운 것들을 닦아내는 것이지요. 먼저 스스로를 정화하여 깨끗한 걸레가 되고, 스스로 더럽혀 놓은 이 나라 구석구석을 닦아내는 훌륭한 걸레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 우리가 반만이라도 그러길 바란다면, 그런 일들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의 결심을 말해야겠군요. 올해는 꼭 투표를 하겠습니다. 그래서 꼭 깨끗한 걸레 하나를 찾아내겠습니다. 중년은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보는 긍정적 지혜가 위로가 되는 시절이기도 합니다.
댓글
3 건
댓글 닫기
댓글 보기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603 | 창의력을 해방시켜라 [2] | 구본형 | 2006.02.28 | 6311 |
602 | 나를 캐리어 스폰서라 부르라 [2] | 구본형 | 2005.05.29 | 6342 |
601 | 세상은 나를 보살펴 주었고 또 나를 필요로 한다 [2] | 구본형 | 2002.12.25 | 6348 |
600 | 년초에 세상의 변화를 엿보자 [2] | 구본형 | 2007.02.12 | 6360 |
599 | 대한민국 개발자 희망보고서- 오병곤 지음 [3] | 구본형 | 2007.03.15 | 6366 |
598 | 필부도 세상의 흥망에 책임이 있다(2000.여름) [3] | 구본형 | 2002.12.25 | 6376 |
597 | 우리는 약소국인가 ? [2] | 구본형 | 2004.08.12 | 6385 |
596 | 따라가는 기업은 멸종한다 [2] | 구본형 | 2002.12.25 | 6386 |
595 | 창조적 문제아가 되라 [2] | 구본형 | 2002.12.25 | 6388 |
594 | 버스- 빠른 시대의 느린 세상 [2] | 구본형 | 2003.11.20 | 6388 |
593 | 아이들이 있는 일상 - 3개의 스케치 [3] | 구본형 | 2004.06.06 | 6388 |
592 | 어떤 사람 [3] | 구본형 | 2006.11.08 | 6388 |
591 | 생각 탐험 (3) - 싸우되 존중하라 [2] | 구본형 | 2010.04.19 | 6388 |
590 | 우리는 자신의 내면의 이름을 찾아야한다 - 페이스 플로트킨에서 페이스 팝콘까지 [2] | 구본형 | 2002.12.25 | 6390 |
589 | 치열한 정신 세계에서 건진 '삶의 의미' -한국경제 [2] | 구본형 | 2002.12.25 | 6394 |
588 | 부부가 여름밤을 재밌고 신나게 보내는 방법(1999.8) [2] | 구본형 | 2002.12.25 | 6394 |
587 | 임부가 생명을 품듯 [2] | 구본형 | 2002.12.25 | 6394 |
586 | 휴가, 쉴 겨를의 의미 [2] [1] | 구본형 | 2002.12.25 | 6395 |
585 | 자신을 불태우고 그 위에서 새로워져라 [2] | 구본형 | 2002.12.25 | 6396 |
» | 그 많은 기원과 그 많은 결심들 [3] | 구본형 | 2004.02.06 | 63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