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의심하는 것이며, 종교는 믿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은 그 사이에서 해답을 찾아 가는 것이다. 인간은 별을 쳐다보며 철학을 시작했다. 이제는 그 별에 가고 싶어 한다. 인류는 이 만큼 발전해 왔다. 이 발전의 원동력은 인간의 상상력이었다.

"하늘을 나는 기분을 한 번이라도 맛본 사람은 땅위를 걸으면서도 두 눈은 영원히 하늘을 본다. 맛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 번 맛본 사람은 다시 맛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르네상스의 만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고백이다. 그는 늘 '왜' 라고 물었다. 이탈리아어로 왜는 '페르케' (perche)다. 페르케의 인간, 이것이 다 빈치의 본질인 것이다. 만능인이라는 것은 단지 손재주가 좋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어떤 때는 그림이 적합하고, 또 어떤 때는 인체의 해부가 적합하고, 또 어떤 때는 도안이나 설계가 적합하기 때문에 다방면에 손을 대다 보니 만능인이 된 것이다. 다 빈치야 말로 여러 곳에 모두 마음을 나누어 주고도 다 잘할 수 있었던 천재다. 우리는 천재가 아니니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역시 언제나 '왜'라고 묻는 페르케의 인간은 될 수 있다. '왜'라고 묻는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한 사건이 이끌어 들이는 우주의 수수께끼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나를 넘어서 다른 공간 다른 세상으로 우리를 확장해 갈 수 있다는 뜻이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내가 확장된다는 뜻이다. 이때 좁은 과거에 갇혀있던 내가 미래를 향해 공간적 빅뱅을 일으키게 된다. 이 각성과 깨달음이 나를 더 큰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과거의 나는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나는 이렇게 탄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에 매여 산다. 과거의 방식, 과거의 공간적 지평, 과거의 정신으로 미래가 거대한 쯔나미처럼 덮쳐오는 것을 지켜본다. 마음을 열지 않고 커질 수 없다. 마음의 빗장은 언제나 안에서 걸어둔 것이다. 내가 스스로 그 빗장을 열 때만 열려진다.

이제 마음에 걸어 둔 빗장 푸는 연습을 해보자. 이 방법은 원래 불가의 선승이 도를 구하는 방식이지만 나는 속인을 위한 버전으로 바꾸어 나에게 써보고 있다. 육체의 근육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근육도 수련을 필요로 한다. 삶이란 사람과 사건을 만나면서 기뻐하고 또한 긁히는 것이다. 그러니 직장과 가정 그리고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들은 결국 우리에게 마음 수련의 과제를 던져주는 현장이다. 다음과 같은 염원을 가지고 일상 속에서 마음의 확장과 창조적 상상력을 훈련해 보자.

먼저 '사람은 모두 다르나 기필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라는 제 1의 염원을 가지고 사람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인간은 선의(善意)를 가진 선인(善人)이다. 이것이 밑에 깔린 확신이 되어야 한다. 살다보니 각박해지고, 경쟁에서 이겨야 하니 독한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여 이 믿음이 휴지처럼 구겨지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어느 때 사람들이 조개처럼 꼭 닫힌 마음을 열고 낯선 나를 받아들이는지 주목해 보라. 내가 선의를 가지고 상대를 도와주려고할 때, 그 사람 역시 나라는 소우주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 조직 내에서 동료에게 다가가는 진정한 힘은 경쟁력이 아니라 공헌력임을 잊으면 안된다.

  줄 수 있는 힘, 이것이 진정한 리더의 영향력이다. '기필코 다른 이들을 이기리라'라는 마음으로는 상생할 수 없다. 팀웍도 없고, 시너지도 없다. 내가 먼저 돕겠다는 마음으로 다가설 때 비로소 작동하는 것이 상생이라는 선순환 고리다. 서로의 강점을 교환하고 약점을 보완할 때, 하나가 되어 에너지가 확장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해 낼 수 있게 된다. 이 순간 우리는 자아가 확장되어 다른 사람과 교류되고 함께 춤추는 기쁨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함께 해냈구나' 이 놀라운 외침이 일상의 곳곳에서 터지게 하자.

다음은 '세계가 넓으나 기필코 다 배우고 말리라'라는 염원을 두 번째 원칙으로 자아를 확장하는 것이다. 배우려는 자는 가리지 않는다. 호기심이 이끄는 손목을 잡고 따라나서면 된다. 호기심을 일상 속에 풀어 놓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음 세 가지를 잊지 않고 써보는 것이다.

  첫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왜 지금처럼 해야하는지 물어 보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 프로세스와는 다른 창의적 조합을 찾아 낼 수 있다. 둘째는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하는지 눈여겨보는 것이다. 이것을 벤치마킹이라고 한다. 그러면 개선의 단초를 찾아 낼 수 있다. 셋째는 하나를 배우면 다른 곳에 응용할 수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다. 지식이 진보하려면 지식이 지식에게 적용될 때, 새로운 용도가 발견된다. 이때 새로운 지식이 탄생한다.

제 3의 원칙은 '미래가 멀리 있으나 기필코 다 가보리라'라는 염원이다. 진정한 힘은 상상력이다. 우리는 상상한다. 상상력이야말로 비정상적인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가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 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인 것이다. 우리에게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모든 것이 어제와 똑 같이 보일 것이니 결국 우리는 어제에 묶여 한 발도 전진할 수 없다.

  일상 속에서 상상력을 자극할 때는 세 가지를 잘 활용하는 것이 좋다. 첫째는 음악이다. 음악은 자유롭다. 비이성적이며 비논리적이다. 좌뇌가 아니라 우뇌의 기능을 자극하는 훌륭한 체험이다. 따라서 음악의 선율을 타고 모든 현실의 족쇄에서부터 벗어나 우주를 넘나드는 정신과 영혼의 힘을 만끽하는 것이다. 둘째는 시를 읽어라. 인간의 언어 중에서 가장 도약이 크고 함축적인 것이 시다. 시는 시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시 자체의 목소리이며 우주의 소리에 가장 가깝다. 시가 죽은 사회가 가장 삭막한 사회다.    셋째는 한 잔의 포도주다. 생뚱맞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빵 한 덩어리와 시집 한 권과 포도주 한 병 뿐이라도 그대가 나를 위해 노래해 준다면 이 세상을 살만한 것임'을 노래한 시인의 말을 들어라. 이것이 상상력의 힘이다. 그러니 상상력의 목줄을 풀어 푸른 들판을 질주하게 하라. 그러면 그 상상력은 미래를 향해 달려 갈 것이다. 이때 우리는 미래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된다.

  미래학자 제임스 데이터 James Dator는 이렇게 말한다. "확고한 미래는 없다. 그러므로 확고한 미래를 예측하려 하지 마라. 그 대신 미래를 향해 마음을 열고 가능한 미래들을 예보하라" 라고 말이다. 많은 미래 예보 중에서 가장 자신에게 잘 맞는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그 미래를 구상하라. 그러면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 잊지말자. 마음은 언제나 먼저 보고 앞으로 달려갈 수 있다. 먼저 달려간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인 것이다.

나는 작가다. 나는 변화경영사상가다. 나에게 닫힌 마음은 무덤이고, 열린 마음은 창공이다. 날기 위해 반드시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즉, 사람에게 나를 열고, 세상에게 나를 열고, 미래에게 나를 열어야한다. 사람을 알지 못하면 사람답게 살지 못할 것이고, 세상을 알지 못하면 왜 생명을 받아 이곳에 왔는지 모르고 가는 것이며, 미래를 모르고 가면 운명을 모르고 인생을 낭비한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열어 우리가 되고, 세상으로 나가 나를 가득 채우고, 이윽고 넘쳐흘러 나를 넘어 우주와 연결됨으로 별이 된다. 나를 여는 순간 갇혀있던 나는 사라지고 통쾌한 성장이 시작된다. 이것이 별로 가는 탐험을 시작하는 법이다.

(남부 발전을 위한 원고 초고, 2011년 7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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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8(목)  辛卯 乙未 甲申

취침 03:00, 기상 08:00
새벽 02:30분까지 치료실에 남아 평가서류 서식 준비를 하다가 숙소로 올라가 잠깐 TV를 보다가 잤다.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나 새벽 예배에 가려던 것이 어쩌다 전화기를 깔고 자는 바람(? - 분명히 베개 옆에 잘 두었는데 왜 그렇게 됐지? ㅋ)에 그만 깊이 잠이 들어버렸다. 07시에도 화들짝 놀라며 잠시 눈을 떴으나 이미 너무 늦은 김에 또 잠들어 08시가 되어서 전화벨 소리를 듣고서야 깼다.

영양사의 전화다. 동두천에 비가 많이 와서 주방 조리원이 출근을 못했다고 한다.  매일 지각만을 해대는 그녀가 역시나 원장과 함께 식사를 하며 친절하게 챙기는 양 부른 것이 그녀의 태도이지만 속셈이 느껴져 무관심했다. 나도 내 업무가 바쁘고 힘들어 내 일에만 몰두했더니 영양사가 삐졌는지 오늘은 아무 일도 아닌 일을 가지고 계속 물고 늘어지며 시비를 걸어댄다. 이제는 좋은 마음으로라도 함부로 남의 일을 거들지 않으려고 한다.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인데 부탁을 해오기에 좋은 마음으로 돕고는 했더니만 알고보니 대신 시키고는 자신은 퇴근을 해버리곤 하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보았다. 빽 없는 신참이 빽 있고 득의 양양한 고참에게 영문도 모른 채로 여러 번 당했다. 3일에 걸쳐 김장 일까지 다 시키며 부탁을 해놓고는 정작 자신은 출근을 안 하거나 오후에 볼 일 있다며 나가버리곤 하는 것을 누차 당했고 식단만 짤 뿐 도통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대신에 내가 했으면 됐지 않느냐고 한단다. 내 업무하랴 타 부서 도우랴 일이 고되었는데 그런 식이라면 도울 수 없다. 본인은 정작 무지하게 한가하고 귀하신 몸으로 이러쿵 저러쿵 말만을 해댄다면 말이다.

오후 5시 경 저녁 밥을 먹다가 말을 걸어오기에 말을 나누는 와중에 다른 사람 이야기를 뜬금없이 하면서 날더러 대신 한마디 해주라고 자꾸만 충돌질을 하기에 본인이 하지 왜 있지도 않은 사람 말을 하며 날더러 대신 하라느냐고 했더니만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 말도 않하고서 돌아서는 양 하더니 후에 앙가품이다. 사실 어제에 이어 두번'째 취하는 그녀의 태도인데다가 상사까지 들먹이며 별로 할 일도 없는데 일한다고 핑계대는 사람으로 몰아부치며 말을 하기에 달갑잖았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끼어들 일이 무언가 말이다. 잠시 후 문자를 보내왔는데 나를 한 방 먹일 생각으로 아주 얕보며 저속한 언어로 보냈길레 분명한 태도를 취하였더니만 성이 풀리지 않는지 퇴근 후에도 계속 날아온다. 어이 없는 일이다. 이런 식의 구설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가만히 있어도 시비가 생기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의 사회성 미숙??  유머도 없는 정의감이 문제???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