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단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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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세

  •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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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7일 12시 39분 등록

세상과 아름다운 춤을 추고 싶었다.

햇살 가득 받으며, 따스한 햇살 아래 몸을 내맡기고 하늘하늘 가벼운 옷차림에 가벼운 신발을 신고
쉬임없이 그냥 그렇게 햇살을 받으며 행복하게 춤을 추고 싶었다..

그러나.. 내 세상은 어두었다..
캄캄하여 앞이 보이지 않았고, 그 곳은 마니 춥고 마니 외로웠다..
살기 위해, 살아야 하니까 두터운 옷으로 무장하고 어두운 곳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나를 맞추고저 사력을 다했다. 살아야 했으니까..
그렇게라도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아무리 떠돌아도 미로 속 어둠은 걷히지가 않았다.
영혼의 블랙홀과도 같은 그 곳, 그 시간들.. 지옥은 사후세계만이 아니었다..
두려움에 나의 몸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나의 세계는 늘 슬픔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기도..
그랬던 것 같다.
삶의 생명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
영혼 깊이 살아 숨쉬는 내 마지막 생명의 불꽃이 기도를 했던 것 같다..

빛이다..
오랜 세월 어둠에 익숙해져 잘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 어딘가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인다..
그 빛을 타고 다가온 공기의 느낌..
지금까지의 축축함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의 그 무언가가 느껴진다..

저 빛을 따라가야만 하는데..
천 년이란 긴 세월을 갇혀있어서 일까. 몸이 너무 무겁다..
겨우 일으켜 한 걸음을 내디디려 하면, 가느다란 그 빛을 누르고 들려오는 세상 소리들이 너무 커진다.
무섭다. 다시 그 자리, 내가 늘 있던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야만 할 것 같다..

한 걸음 내딛고 세 걸음 미끄러지며 겨우 블랙홀에서 빠져 나왔는데..
내 앞에 펼쳐진 건 사막이다.. 이럴수가..
이건 너무 가혹한거 아닐까..
사막을 통과하라 하시다니.. 내겐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은 걸..

저게 뭐지..
저기 멀리.. 저만치 멀리서 별이 빛난다. 북극성이다..
아.. 블랙홀을 비춰주던 그 한줄기 빛이 사실은 북극성이었구나..

예쁘다..
어쩐지 따스할 것도 같고..
그래 이 느낌인데.. 이 따스함.. 생명받기 이전부터 내가 꿈꾸던 바로 그거..

뒤돌아보니 발밑에서 방금 빠져나온 블랙홀이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본다.
눈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이 펼쳐져 있다.

그 때였다.
잠깐, 아주 잠깐이지만 저기 멀리 보이던 북극성이 커다란 태양처럼 나를 덮친다.

그 강렬함. 데일 것만 같은 열기.
찰나에 불과했지만 여직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 무언가가 나를 이끈다..

발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라 하지 않았거늘, 한 걸음 내딛는다. 북극성을 향하여..

걷고 있다.
뒤 돌아보지 않고 사막 모래 위를 걷고 있다..

사막 모래 폭풍이 나를 휘감아 올린다.
물기 하나없는 건조한 모래밭이 내 안의 수분조차 앗아간다..

물이어라..
인간이자 암컷이었다. 암컷 인간은 물처럼 살라한다..
사막 모래 깊은 곳으로 살며시 스며들어 적셔주는 물처럼..
내 눈물, 내 슬픔은 따스한 물빛이 되어야 한다고..

심장에서 한 방울 따스한 눈물이 사막 모래 위에 떨어졌다.
신기하다.. 몰랐는데 내가 걷고 있는 황량한 사막이 황금빛 모래바다로 출렁인다..

아름답다..
낮이면 금빛 모래바다가 출렁이고, 밤이면 별빛바다가 쏟아져 내린다..

들린다. 별들의 소리가..
그들의 아름다운 선율이 내 마음을 적셔,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아직 걷고 있다..
그러나 이제 난 이 사막여행을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
그 위대한 아름다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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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은 제게 연구원 3년차이자, 단군의 후예 3백일을 동시에 시작하는 또 하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입니다.

"변화라는 뿌리를 딛고, 관계라는 줄기를 타고, 문화라는 제 꽃을 피우겠습니다.."라고 되뇌였습니다..

"천직이란 내면과 외면의 조화를 이룬 진정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라는 말씀만을 지니고
천복에서 천직으로의 길 걷겠습니다.

부지런히 자아성찰을 이어가 스러지는 낙엽이 아닌 별을 마음에 품고 살겠습니다.
부지런히 천복을 연마하여 천직이 일상의 업으로 퇴색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세상과 아름다운 접점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그 접점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제게 다가올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슬픔보단 기쁨으로, 두려움보단 설레임으로 기다리겠습니다..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슴에 별을 품고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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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4 08:17:41 *.12.196.109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15>

# 기획서 작성 중..

계속 읽고 쓰다보면 어느 날 각이 세워질 때가 있다.
몇 번째인지  알 수 없고, 앞으로 또 몇 번을 더 만들고 수정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 작업을 멈출 수는 없다.

"살아있다는 것에 만족하지 말아요.
당신은 더 요구해야해요. 더 나은 삶을 말이죠.
그저 꿈꾸는 것이 아닌..

난 그러지 못했어요.."

어젯밤에 본 이탈리아 영화에서 어느 노신사가 여주인공에게 하는 말이다.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후대에게 남기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소설을 통해, 영화를 통해, 다른 작품들을 통해..

이 다음에 난 어떨까.
꿈을 쫓아 살았기에 후회없었다 말할까.
아님 "난 그러지 못했어요.."라고 말할까..

그래서 난 이 새벽에도 기획서 작업을 한다.
1st draft 구성의 윤곽이 보이지만, 아무것도 끝난 건 없고 그저 또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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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영화 "창문을 마주보며" 영화리뷰: 앨리사의 북살롱 (http://blog.daum.net/alysa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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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4 10:47:10 *.12.196.109
# 영화 <비커밍 제인 + 창문을 마주보며 = 선택?>

최근 연달아 본 두 편의 영화 "비커밍 제인"과 "창문을 마주보며"는 우연치고는 흥미롭다.

비커밍 제인의 제인 오스틴에게는 세 가지 선택의 놓인다.
첫째. 집안의 가난까지 해결해줄 위슬리와 결혼하여 부잣집 마나님으로 사는 것.
둘째. 가난한 톰과 결혼하여 스코트랜드로 도망가 가난한 삶을 이어가는 거.
셋째. 독신으로 살며 작가의 꿈을 이어가는 것.

결국 제인은 세번째 선택을 하여 21세기까지 이름을 이어오는 유명 작가가 된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만약에.."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만약 제인이 위슬리와 결혼하였다면..? 부잣집 마나님으로 살면 글을 쓰지 못했을까..?
만약 제인이 톰과 결혼하였다면..? 가난했기에 더욱 글에 매달리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누가 감히 역사에 대고 만약을 대비할 수 있을까.

다음은 내가 생각밀어부치기를 멈추어서 그런지 똑같은 구성의 영화가 이틀 연속 다가온 이탈리아 영화.
다만 한가지 다르다면, 여주인공 지오반느는 이미 29살 나이에 책임감 없는 남편을 둔 두 아이의 엄마이다.
그런 그녀 앞에 부자에다 싱글인 로렌조가 아름다운 섬으로 도망쳐 살자고 한다.
그녀 앞에 역시 선택의 길이 놓인다.

첫째. 부유한 남자 로렌조와 도망간다.
둘째. 그냥 현재 남편과 눌러산다.
셋째. 자신의 꿈을 쫓는다.

마치 비커밍 제인에서 제인이 결혼 한 10년 뒤의 삶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다고나 할까.
사랑하는 이와 결혼했으나 감정이 식은 지 오래다. 남은 건 일상의 지겨움과 가난..
당연히 로렌조가 내미는 손을 잡고 싶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지오반느의 선택은 속한 그 자리에서 자신의 꿈을 쫓는다이다.

내 머릿속에 멤도는 생각은 멀까? 난 멀 정리하고 싶어 글을 쓰고 있는걸까?

우선 제인이 위슬리의, 지오반느가 로렌조의 손을 잡고 새로운 길을 떠나지 않음은 무척이나 다행스럽다는 생각이다.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든 상황이 바로 그러한 삶이었을 것 같기에. 물질은 충족되지만 정신은 죽어있는 삶. 가장 견디기 어려운 삶이다.

그럼 사랑을 쫓는 건 어떨까..? 제인이 톰과 결혼한다.. 나름 끌린다.
이 세상에 사랑하는 이와 사는 삶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있을까. 더군다나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상대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랑을 포기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땐 그 나름 밝은 무지개 빛 미래를 그려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말이다. 마치 이어지는 후속편처럼 지오반느의 10년 결혼 생활이 따라 붙는다.
여기서 왜 사회에서 그다지도 사랑이 결혼에 전부가 아님을 반복적으로 전수?하는 바로 그거.
"결혼은 현실이다"라는 명제가 극명히 드러나는 삶 말이다..

내가 어릴 때 말이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어쩌고 하는 삶이 아니라 말이다.
어떻게 하면 내 꿈을 현실로 불러들이고, 그러기 위해서 내가 갖춰야 할 핵심가치와 철학이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 선상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면 말이다..

스승님께서 늘 말씀해주시는 부분이 "하나의 존재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라"이셨다.
내 삶의 행, 불행을 타인에게 내주지 말라..
결혼은 두 사람의 성숙한 존재가 만나 한 방향을 보고 함께 성장하는 여행이니..

물론 이상적인 말씀이다. 이런걸 터득하고 결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기에 더욱.
하지만 결혼 후에도 충분히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일 것 같다.
요즘처럼 한국에서도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한국의 르네상스"라고 조심스레 불릴 수 있는 시기에 들어서고 있다면 더욱 더 말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든다.
제인 오스틴이라면 말이다. 위슬리와 결혼했어도 톰과 살았어도 어쩐지 작가의 꿈을 놓치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 누구와 사느냐에 따라 작품 세계가 달라질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녀의 경험이 다르고 고뇌하는 부분이 달라질테니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건, 어떤 길을 가더라도 그녀 안의 본질, 그녀를 그녀이게 만드는 생명력인 꿈 혹은 천복은 놓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건, 어쩌면 그 시대 여성으로서는 너무도 선택하기 어려운 독신의 길을 (그것도 작가로서의 그 어떤 개런티도 없는 상황에서) 선택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정도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영혼이라면, 이미 그녀는 자신의 본질, 하나의 존재로서의 정체성은 완성의 그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녀 앞에 놓인 세 가지 갈림길 그 어떤 길을 선택했어도 그녀에게 주어진 행복과 어려움은 그녀 몫만큼 주어졌을 것이다. 톰이라고 해서 끝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했을거고, 위슬리와는 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인간의 관계란 사랑하기에 함께여서 행복하지 못하다면 서로를 위해 헤어지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도 그녀라면, 자신의 존재 이유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을 것 같다.
"Becoming Jane"이 된다는 건, 그런 의미인 것 같다..
평범한 한 사람 속의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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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5 08:48:41 *.12.196.105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16>

# 기획서 완료..

물론 그래봐야 1st draft이다.

한가지 신기한 건, 문화기획을 해도 책 속에서 흐름을 잡아낼 수 있다는 거.
아니 책을 읽다보면 어느 날 공기를 떠돌던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하나되어 흘러들어온다는 거.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즈니스 혹은 삶의 근원은 아무래도 보다 인문학적인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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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6 08:14:45 *.12.196.105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17>

# Book review 82-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3부 11~13장 읽기 완료

제레미 리프킨에 대한 단상:

정리할 게 많을 것 같아 읽기는 이쯤에서 멈춘다.
제레미 리프킨. 어쨋든 참 대단한 사람이다..

리프킨의 책을 읽다 문득 그의 첫 저서가 몇 년도에 나왔는지 궁금해서 들춰봤다.
"노동의 종말"이 1995년에, "소유의 종말"이 2000년에 쓰여졌다.
역시.. 제레미 리크킨의 이 책 "공감의 시대"에서 그간의 모든 저술들을 아울러 지식의 폭발과 응집을 보여주고 있다. 오랜 세월 자신만의 분야를 개척해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에너지장의 형성이다.

누군가 단순히 타인의 지식을 짜집기해서 완성본을 만든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목소리를 들을수가 없다.
그런 책은 읽고나도 방대한 정보에 머리는 아프지만, 읽은 뒤 단단한 무언가가 전해져오지 않는다.

하지만 리프킨의 두꺼운 책들은 다르다.
리프킨을 리프킨이게 만드는 것은 그가 소개하는 방대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그 어떤 저자보다 확고한 자신의 철학적 주장을 펼치는데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리프킨이 "공감의 시대"라고 할 때, 그리고 엄청나게 두꺼운 책을 내놓아도
여전히 그 책을 사서 열심히 읽는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시공을 초월해
그리고 자신의 저서들을 총망라하여 (이 책을 읽다보면, 리프킨 스스로가 자신의 앞선 저서들을 끊임없이 요약하고 점검하고 그리고 그 선상에서 공감의 시대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소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출중한 미래학자임을 가장 잘 증명하는 부분이 될 수 있겠다)
현재와 미래를 꿰뚫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이는 제레미 리프킨.

참으로 두꺼운 책을 따라 긴 여정을 걷고 있지만
그 어떤 불평없이 묵묵히 그가 펼치는 길을 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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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6 13:47:18 *.118.58.245
# 공감의 시대 3부 11장, '세계적 공감의 정상을 향한 등정' 정리

드디어 3부 공감의 시대로 들어갔다. 아주 먼 길을 돌아서 말이다.
3부의 첫 장인 11장, '세계적 공감의 정상을 향한 등정'에서 리프킨이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경제적 형편이 좋아지고 안정감을 얻게 되면 사람들은 같은 인간을 보다 신뢰하고 자연에 대한 관심도 커진다. 불행한 사실이지만 공감 의식이 갑자기 확대되는 현상은 지구 곳곳을 황무지로 만들고 많은 인류를 더욱 가난에 빠뜨린 엔트로피 흐름의 증가를 등에 업고 나타난 결과이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소득이 높은 나라에 사는 사람의 83퍼센트는 탈물질주의 문화로 옮겨갔지만,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의 74퍼센트는 생존 가치가 우선적인 문화에 주저앉았다 (565)."

아주 고상하게 표현된 이 말을 다소 통속적으로 해석해보면 등 따숩고 배가 불러야 문화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문화란 시간적 여유가 가능한 이들로부터 나온다, 라는 말씀과도 통할 것 같고.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국가적으로도 부국강병이 선발생해야 다음으로 문화적 융성기가 뒤따르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

다만 리프킨의 관점에서 잘 살펴봐야 하는 한가지는, 전 지구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질수록 엔트로비 에너지 수준은 올라가서 결국 지구의 위기 상황 벼랑 끝에서야 겨우 우린 주변 사람들, 동식물 그리고 자연과 "공감"을 이루고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정신적 성숙을 이루기 위해 우선 물질적 풍요라는 단계를 거치며 너무 많은 것들을 파괴하고 헤치며 여기까지 왔다고 해야 할까..

더불어 현재 전 세계적으로 공감이 확산되는 예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러한 예들중 나의 관심을 가장 끄는 이슈는 "탈종교화와 개인적 영성수련에의 증가"였다.

"기술적으로 진보된 사회일수록 전통적인 종교단체는 감소하고, 반면에 개인의 영성 훈련은 증가한다. 영성 훈련은 만물에 담긴 넓은 우주적 계획의 의미를 찾으려는 지극히 개인적인 탐구를 의미한다 (576),"

참으로 탁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영성 혹은 진리에 관심을 갖고 파고들어가다보면 자연히 종교라는 제도적 장치에 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그 때부터 맹목적으로 종교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 그 거대한 장벽 너머 세계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유럽의 지성 아탈리가 각 개인개인의 "철학적 소명"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

그렇다면 왜 개인적 영성탐구가 필요한걸까?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선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고 사람들은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며 공감을 넓혀간다. 자의식이 분명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고, 사람들을 신뢰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훨씬 너그러워질 수 있다. 자신의 존재에 안정감을 느끼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 것이고 외부의 존재를 두렵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563)."

이 긴 문장을 리프킨은 "개인의 안정성이 공감을 증가시킨다"라는 한 문장으로 완결했다.

여기서 한가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을 것 같다.
호킨스가 말하는 긍정의 의식수준으로 넘어가는 맨 마지막 단계의 두 번째 수준: 자존감.
우린 흔히 자의식과 자존심을 혼돈하는 경우가 많다.
자존심은 욕망에 근거를 둔 에고에 기초하는 것이고, 자의식은 참자아 혹은 본성에 귀기울이는 존재감이라고 한다.
 
나 역시 깊은 의식수준을 지닌 인간이 아니기에 쉽게 정리하기 매우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만
스스로의 공부를 위해서라도 이 장을 다시 한번 요약, 정리해보면
첫째. 인간은 누구라도 물질적 안정감을 추구하는 것이 먼저이다.
둘째. 물질적 안정이 갖춰지면 정신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정신적 변화가 전부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제 12장에서 그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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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6 14:14:48 *.118.58.245
# 공감의 시대 3부 12장, '지구촌 엔트로피의 심연'

이 장에서 리프킨은 인류가 어떻게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며 발전해왔는지에 대해 설명하며,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유일하고도 진정한 해결책은 다가오는 세기 동안 인간의 의식을 대폭 재조정하여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지구에서 다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길뿐이다 (615)" 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먼저 좋은 소식. 적어도 대다수의 인류는 보다 다양한 인간과 동물의 영역으로 공감의 범위를 넓히면서 코스모폴리탄적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나쁜 소식. 새로운 국제적 감수성은 보다 복잡하고 밀집되고 독립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만들어진다 (615)." 고 한다.

재미있는건, 호킨스 역시 인류 의식이 금세기 들어 그 어떤 시대보다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드디어 리프킨이 말하는 공감의 문명도 불가능한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장대한 길을 막아서는 것이 있다고 한다:

"기본적인 안락함을 누리는 데 필요한 최소 수준의 경제적 요건 이상으로 부의 추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부의 소유는 결국 사람의 마음까지 소유해버려, 부를 추구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621)."

정신적 성숙을 이루기 위한 필수단계처럼 여겼던 물질적 안락함이, 어느 선까지 이루고도 통제가 되지 않아 역으로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결코 낯설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닌 것이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현 주소인 것 같다.

그러다보니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에 빠지기도 한다:

"행복 신드롬은 사람들을 절망의 경주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 게임에서는 이길 수도,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도 없다. 물론 해결책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부를 계속 늘리면 자율성과 자유 의식을 높이고, 쾌락과 행복을 준다는 계몽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방책이다 (624)."

리프킨의 쇼핑중독에 빠진 현대사회가 정말 무섭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6세~12세가 된 아이들을 겨냥한 무차별 마케팅 공격은 아이의 일생을 쇼핑중독으로 만들어 브랜드에 갇혀버리는 현상을 불러오기도 한다고 한다. 무서운 일이다.

"어떻게 하면 '가진 자'는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갖지 못한 자'는 환경과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여 함께 안락의 문지방에 도달할 수 있는가? 우리가 공감 의식을 최대화하고 지속 가능한 글로벌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그 문턱에 섰을 때이다 (636)."

유러피안 드림에서 주장하듯이 해결책 중의 하나는 가진자는 부를 향한 욕망레벨을 조금 낮추고, 아직 가난 속에 놓여 있는 자들에게 조금 더 기회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하면서 엔트로피 레벨을 낮추고 대신 공감의식은 높여가 인류 멸망을 막자는 주장이다.

대단히 이상향적이고, 어쩌면 우리 인류 전체가 반드시 귀기울여야 할지도 모를 중요한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13장에선 개인도 나름 무언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실천적인 부분이 조금씩 더 소개된다.
읽는 나도 이리도 숨찬데, 리프킨은 어찌 이 방대한 책을 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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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6 14:23:26 *.118.58.245
# 공감의 시대 3부 13장, '분산 자본주의 시대의 여명'

드디어 공감의 시대가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정말 길고도 길다^^:::

그 첫 번째 이야기가 바로 "분산 에너지의 출현"

"앞으로 기업과 시 자치제와 일반 가정은 자신의 에너지에 대한 소비자일 뿐 아니라 생산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분산발전'이다 (649).

분산에너지란 태양에너지, 바람, 물, 지열, 파도, 바이오매스 등의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이런 에너지를 바탕으로 3차 산업혁명이 일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3차 산업혁명은 한정된 자원을 놓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서로 협력하며 생산하고 소비하는 그런 시대라고 한다. 2차 산업혁명시대보다 좋다.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분산에너지에서 출발하여 분산자본주의로의 이양이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리크킨에 의하면 그건 바로 인간 본성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협력하는 마음인 "분산 커뮤니케이션"에 있다고 한다.

즉, "경제활동은 더 이상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전의를 다지고 벌이는 적대적 경쟁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이 통하는 선수들끼리 힘을 합쳐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모험이다. 나의 이익은 상대방의 손해를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고전적 경제 개념은 물러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나 자신의 행복을 증폭시킨다는 개념이 새로 등장하고 있다 (661)."

애덤 스미스의 전통적인 시장 매커니즘 자체가 구식이라는 리프킨의 주장.
참으로 지각변동을 일으킬 만한 새로운 패러다임인 것 같다.
그러나 경영학적으로도 그의 말이 결코 허황되지 않음은 이미 수 년전에 이와 같은 협업 형태의 경영구조를 주장한 게리 하멜의 "경영의 미래"를 접해본 독자라면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겠다.

그리하여 이 두껍고도 두꺼운 책이 나라는 한 개인에게는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 자원 봉사자로 참여한 학생들은 대부분 낯선 환경에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야 하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 공감적 감수성이 성숙하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런 경험은 인생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주고, 심지어 그들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683)."

나 한 사람이 전 지구적 엔트로피 레벨을 낮추거나 인류멸망을 막아내지는 못할것이다.
하지만 나의 자의식 수준은 끌어올릴 수 있고, 그로부터 주변 한, 두사람과는 이제껏보다 훨씬 더 깊은 공감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사람을 깊이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와 그 사람의 인생을 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 안다는 것이다. 즉 그 사람만의 스토리를 안다는 것이다 (557)."

리프킨이 말하는 공감의 정의다.
전 지구를 살릴 수는 없어도 나 한사람고 주변은 따스히 감싸안을 수 없을까..

이제 이 엄청난 이야기도 2장 남았다.
끝까지 읽고 내 개인의 삶에 어떻게 비추어볼지 조금 더 고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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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7 08:46:45 *.118.58.6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18>

# 또 한번의 비상권? 발동: 장국영의 <패왕별희> 영화보기

포스터

매란방에 이어 두 번째 보는 중국 전통예술인 경극영화.

"고통없는 성공은 없다.
누구에게나 재능은 있다.
깨끗한 마음으로 재능을 연마한다"

주인공들이 어렸을 때 강가에서 수련하며 자기암시? 처럼 되풀이하는 이야기 중의 일부이다.

데이(도즈)는 어릴 적 유곽의 여인인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경극학교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육손이라 안된다는 말에 어머니는 자식의 여섯번째 손가락을 잘라버린다.
어느 추운 겨울, 경극 학교 밖에서 펼쳐지는 이 장면.
가슴이 섬뜩하면서 불현듯 그 느낌을 받았다.

세상과의 단절..
진정한 예술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 치르는 의식과도 같았다고나 할까..



그렇게 강제로 시작된 경극학교에서의 수련 생활.
곱상한 외모 덕에 패왕의 애첩 우희 역할을 해야 하는 데이는 죽도록 맞아가며 자신의 성 정체성을 부인하도록 강제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샬로 (시토)를 진짜 사랑하게 되어가는 데이..

패왕별희.
이는 초나라의 명장 패왕이 유방의 간계에 넘어가 사면초가가 되어 최후의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 때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킨 것은 자신의 애마와 애첩, 우희.
우희는 적군의 손에 능욕당하여 장군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다하여 패왕의 칼로 자결한다.
사랑치고는 참으로 처연한 핏빛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우희 속에 데이는 어릴 때부터 살게 된다.
처음엔 강제적으로 시작된 성 정체성이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차츰차츰 삶 전체가 우희에게 동화되어 간다고나 할까..

이후 데이의 삶은 일본군이 북경을 점령했을 때도, 장개석 군이 다시 수복하였을 때도 그리고 공산당에 의해 문화혁명이 발생했을 때도 늘 한결같았다.

한결같다..라는 표현이 부침 많은 역사를 살아내는 이들에겐 얼마나 어려운 단어인지..

데이는 언제나 우희였다. 극 안에서나 삶 속에서나.
그에게 경극은 사랑이자 살 그 자체였기에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우희로서의 길을 걸어간다.
때로는 패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며..

그러나 패왕인 샬로에겐 경극은 경극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에게 경극은 자신의 현실적 야망을 이루기 위한 길이었을 뿐, 그것이 현실 위에 놓인 적은 없었다.
그런 그이기에 당연히 한 여자, 쥬산을 사랑했고, 무대 밖에서는 데이의 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때론 경극을 부인하기도 하고. 결국 공산혁명 아래선 쥬산을 향한 사랑까지 부인하여 그녀를 자살로 몰기도 하고..

패왕과 우희. 그리고 현실의 여자 쥬산.
이들 세 사람의 관계 또한 동성간의 사랑이어 더욱 비현실처럼 느껴지는 패왕을 향항 우희, 데이의 이상적 사랑과 창녀를 사랑하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 사랑을 부인하는 패왕, 샬로의 현실적 사랑이 교차하며 묘한 여운을 남긴다. 과연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결국 이상과 현실이 얼키고 설키듯, 공산혁명의 회호리 바람 앞에 세 사람의 운명은 쥬산을 희생제물로 바치고야 바람이 잦아든다. 그리고 11년 뒤..

이제 다시 경극이 인정받는 시기가 오고 두 사람은 두 사람만의 공연을 한다.
데이는 이 날을 기다렸던 걸까. 데이가 아닌 우희로서 생명 다할 그 날을 말이다.
어쩌면 데이는 자신이 간접적으로 죽음으로 몬 쥬산이 원망없이 죽었을 때 이미 함께 죽은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우희로서 죽을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렸을지도..



한 인간의 혹은 한 예술가의 삶을 이다지도 심하게 흔들 수 있을까...싶은 시대이고 영화였다.
자신의 정체성마저 뿌리부터 온전히 우희에 맞춰서 길러진 데이.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모질게 휘어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그 운명 끝에 자신만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처연하고 아름다운 자신만의 꽃을..

사랑도, 일도 그래서 삶 자체가 우희가 된 데이.
영혼까지 우희로 물들은 그의 삶 앞에서,
새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잔잔한 슬픔 속에 전해져오는 처절한 숙연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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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7 11:54:32 *.118.58.6
# 다시 출발선에 서서..

변화란 뿌리를 딛고
관계란 줄기를 타고
문화라는 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나의 무의식이 한 말이다..

내게 변화란 무엇일까? 우주와 공명하는 참 자아를 찾는 일이다.
내게 관계란 어떤 것일까? 진정성으로 인연들을 대하는 것이다.

그럼 문화는..?
내 영혼이 잉태하여 세상에 내놓았지만, 내가 아닌 그 무언가이다..

제인 오스틴을 비커밍 제인으로 만든 그 무언가.
데이를 우희로 만든 그 무언가.
내 삶의 의미가 되어줄 그 무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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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7 11:53:35 *.118.58.6
# 영화는 내게 무엇일까..?

시각적 상상 놀이터이다.
다양한 나라에서 만든, 다양한 시대를 그린 작품들을 보면서
난 시공을 초월한 상상 놀이터에 마음껏 빠져든다.

책은 내 영혼이다.
내 혼을 깊이, 정수리 깊이 불러 일으켜 일깨운다.

그렇게 깨어난 영혼이 영화를 통해 다양한 세계를 체험한다.
그리고 다양한 시공의 영화 속에서 난 캠벨이 말한 모든 곳을 흐르고 있는 "인간 원형"을 발견한다.
참으로 매력적인 놀이터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어릴적 꿈들 중에 하나로 시나리오 작가가 자신의 빛을 반짝일테지 아마..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그러나 언제든 끝은 늘 글이다.

읽어도 써야 하고
보아도 써야 한다.
그렇게 타인의 작품을 내 안에 끌어들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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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7 11:43:01 *.118.58.6
# 나는 무엇일까..?

최근에 내 안을 멤도는 물음.. 나는 무엇일까..

내가 이 행성에서 사라지는 날. 내 육신은 흔적없이 바람결에 연기처럼 사라질텐데
그 때 내 삶은 무엇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일생 나는 누구일까를 찾아 헤매다
내 흔적을 발견하고는 버리고자 했다.
그랬더니 거기 그 곳에 그럼 난 무엇이냐는 물음이 대신 들어선다.

나를 온전히 내어바칠 수 있는 그것.
나의 사랑, 나의 슬픔, 나의 모든 걸 고이 쌓아올려 만들 수 있는 단 하나의 삶.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이젠 정말 오로지 글쓰기가 나이고, 내가 글이 되는 삶을 쌓아올릴 수 있는걸까.
책에서 글로.
이것이 천복에서 천직으로의 길일까.

천복은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는 삶이다.
천직은 내가 무엇인가를 다듬어가는 삶이다.

천복이 우주와 공명을 일으키는 내 안 깊숙이 잠들어있던 생명의 불꽃을 되살리는 일이라면
천직은 또 다시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진 세상 속에 나를 꽃피우는 일이겠다.

그래서 말이다.
천복은 정하고 맑아야 겠다.
오로지 한점, 단 한순간 영혼이 가장 깨끗한 불꽃을 만들 수 있는 단 하나의 정점이 천복일테니 말이다.

그 생명의 불꽃이 정하고 맑지 못하다면
세상 탁류 속에 자신만의 꽃을 피워낼 수 없으리라..

천직은
세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피워내는 무언가의 삶이다.

천복이 생명의 씨앗이라면
천직은 꽃이다.

모든 씨앗이 저절로 꽃이 되는 것이 아니니
나의 삶은 과연 무엇일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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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7 14:54:26 *.118.58.6
# Who+ How= What, 천하 제일의 바보, 먼별이..

그래. 나를 찾았고, 나의 천복을 찾았다고 하자.
그 끝에 어렴풋이 보이는 천직이 가물가물하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아스라히 떠오르는 "나는 무엇일까..."에 대한 그 느낌..
안개 속에 뒤덮인 그 느낌이 안타까워 생각을 밀어부쳤지만 나 참 바보다.

지금은 그저 "심층수련", 그러니까 "어떻게"를 아주 소중히 연마할 때인데 말이다.

출사표에 있지 않나. "세상과 아름다운 춤을.."이라고..
무엇은 어디까지나 세상과 아름답게 조우할 수 있는 그 접점 어딘가이다.

준비하자.
채 익지도 않고선 무엇이라니 당치않은 생각이다.

현재까지 83권의 책들을 읽고 있다.
물론 평생 읽은 책이 아니라 연구원 시작 이후이다.
두꺼운 책들을 인용문까지 정리하며 읽다보니 그리 많이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중요한건 보석과도 같은 사상적 깊이를 담은 책들을 하나하나 내 안에 쌓아가는 일일테니.
올 연말이 되면 지금보다 얼마나 스스로를 채울 수 있을지 설레인다.

현재까지 34편의 영화를 보았다.
물론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보았겠지만, 최근에 리뷰를 남긴 영화들이다.
계속해서 시공을 초월하는 상상의 놀이터 속에서 즐겁게 놀자.

현재까지 111개의 포스팅을 올렸다.
작년 12월 중순 블로그를 오픈하고 한 달 동안 매일 글을 올렸다.

읽고 본다.
생각한다.
그리고 쓴다.

지금은 무엇에 대해 물을 때가 아니라
천복에서 천직으로 가는 터전을 닦을 때이다.

수직의 곧은 길이 아닌 나선형의 이 길이,
사부님의 표현을 빌자면 나의 천복이 "죽여주는 필살기"가 되어 그 끝에서 천직이 터져 나오도록
수련에 수련을 거듭할 때이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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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8 08:05:14 *.12.196.159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19>

# Book review 82-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읽기 완료!

드디어 다 읽었다!
3부 14장과 15장 장별 요약하고, 책 전체 풀버전 북리뷰할일이 쪼가 까마득하지만 일단 다 읽었다.

사실 난 탐구심이 부족해서인지 이렇게 방대한 지식을 머리 위에서 텅~! 하고 던지는 듯한 책은 쪼가 내 스탈 아니다 ^^:::: 아무리 두껍고 길더라도 문학작품이나 스토리가 있거나 소설이거나 등등..

그야말로 리프킨의 책이니 겨우 읽었다. 리프킨도 아탈리처럼 좀 간단히 써주심 안될까나 ㅋㅋ

무튼 대장정의 끝을 내고, 풀버전 북리뷰까지 완성했다.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풀버전 북리뷰: http://blog.daum.net/alysa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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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3부 14장: 즉흥적 사회에서의 연극적 자아

리프킨의 이 장에서 글로벌한 사회에서 한 개인은 점점 더 많은 연극적 자아를 지니게 된다고 한다.
그럼 그가 표현하는 "연극적 자아"라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연극적 관점은 한 세대가 가상공간이든 현실 공간이든 사회적, 상업적 네트워크에서 움직일 대, 역할, 각본, 정체성, 무대 배경을 끊임없이 바꾸어 가며 그 세대에 부수되는 마음의 상태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다 (696)."

즉, 한 개인의 자신의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하는 자아를 지닐 수 있다라는 말이다.

충분히 공감되는 말이긴 하지만, 리프킨 역시 지적하듯이 이런 상황이라면 "진정한 자아"가 무엇인지 개인으로서는 자칫 혼란을 겪을 수도 있겠다. 점점 더 복잡해지고, 점점 더 많은 접속 관계에 노출되면서 우리 개인은 자칫 중요한 핵심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건 아닐까?

이에 대해 리프킨 역시:

"거겐은 갈수록 사람들이 별의별 종류에 관계에 개입해야 하는 복합적이고 글로벌한 사회를 걱정스레 바라본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과 관심을 끌려고 하는 관계성에 대한 요구가 개인의 의식과 집단의 의식을 압도하고 정체성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709~710)."

"오늘날 자아는 무척이나 많은 역할을 한꺼번에 맡아 수시로 역할을 빠르게 바꿔 가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기운을 탕진할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연극적 자아가 융통성 있고 극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면서, 진정성이란 개념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진정성'은 변치 않는 핵심적 자아, 즉 "자율적 영혼"을 전제로 한다 (710)."

더 빨리, 더 많이 접속한다. 글로벌 인터넷 시대이다. 그런데 왜?
너무 많은 광고에 노출되어 그 어떤 광고도 더 이상 의미있게 다가오지 않듯이, 너무 많은 관계 속에 너무 많은 일들을 품고 있으면 자칫 알맹이를 놓칠 수도 있겠다.

그에 대해 리프킨은 "자아는 한 개인이 평생 겪는 경험의 총합으로 이루어지며, 그가 속한 관계와 그가 겪는 경험이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 그런 차별성을 놓치지 않아야 공감의식은 꾸준히 성숙하여 글로벌 의식을 위한 정신적, 사회적 접착제로 기능할 수 있다 (711)" 라고 한다.

더 많은 정보에 더 빨리 접할 수 있고, 더 많은 관계에 접속할 수 있는 글로벌 인터넷 세상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어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수단이 목적을 대신할 수는 없다라는 의미이다.

특히, 인류 전체의 생존권과도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감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상황, 상황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자아가 아닌, 스스로 "고유한 자율적 영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장에서의 리프킨의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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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3부 15장: 절정에 이른 경제의 생물권 의식

리프킨의 그의 책 마지막 장에서 중요한 물음을 하나 던지고 있다.

"새로운 분산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분산된 재생 가능 에너지가 인간과 인간을 이어 주고 있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왜 우리가 서로 이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별다를 이유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734)."

왜일까..? 왜 우린 서로 접속해야 하고, 공감하고 협력해야 하는걸까?

"환경학자 버나드 패튼은 "생태학은 네트워크이다. ... 생태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네트워크를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740)."

가이아 이론의 대두이다.
즉, 우리 인류는 지구라는 커다란 유기체 안에서 그 안의 모든 다른 종들과 함께 지구를 보호하고 함께 성장할 때만이 우리의 앞날이 보장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경우 학습방향까지도 변화되고 있는데, 우리도 눈여겨 볼 대목인 것 같아 기록해둔다.

"학습은 훈련을 통해 학생의 두뇌에 전문적인 지식을 주입하는 과정이 아니라, 협력하고 비판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찾아내는 과정이다. 협력적 학습의 효과를 높이려면,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존중해주고 상대방의 관점과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기탄없이 비판하고,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고, 전체 집단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마음 놓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749)."

서로에게 공감하려면 사실 서로를 깊이 알아야 하는데, 단순한 주입식 교육만으로는 참으로 한계가 있는 부분이겠다. 우선 자신을 드러내어 사고체계를 갖추고 스스로를 하나의 존재로 만들어나가며, 같은 선상에서 타인도 바라봐주는 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리프킨은 매슬로의 "수용적 전략"을 빌려온다.

"수용적 전략이란, 수용적 개방성, 사물이 스스로이고자 하는 간섭 없는 의지,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내기 위한 지각표상의 내부 구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 아는 능력, 질서보다는 질서를 찾는 행위를 말한다 (753)."

본성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의 드러냄을 기다리는 미학이라고나 할까..

끝으로 리프킨은 양적 팽창의 관계 속에서 질적 친밀감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친밀감과 보편성을 동시에 추구하다보면 인간의 정신은 계속 두 갈래로 갈라질 수 밖에 없다. 이 두 영역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간은 영원히 '보편적 근친성 universal intimace'을 찾아다니는 존재이다. 즉 총체적 소속감을 추구하는 것이다 ... 우리로 하여금 보다 확대된 영역에서 보다 큰 근친성의 역설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공감 본능이다. 보편적 근친성의 탐구는 초월이라는 의미의 본질이다 (757)."

결국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공감 본능을 끌어내어 전 지구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지혜로 삼자고 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길고도 긴 책은 다음과 같은 메세지로 그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결정적인 시기가 닥치면, 우리는 하나의 행성을 공유하고 있으며, 모두가 하나뿐인 행성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우리 이웃의 고통이 곧 우리의 고통이라는 자각이 기정사실화될 것이다. ... 모두가 협력하여 생물권 전체와 집단적으로 우호적 관계를 맺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물권 의식이 우선되어야 한다 (760).'

휴우.. 길고긴 여정 끝의 그의 주장은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인류 최대 위기를 목전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공감 본능을 끄집어내어 연마하여, 같은 인류는 물론이고 지구라는 거대한 유기체와 그 안의 모든 다른 종들에게까지도 공감의식을 확장하여 함께 공생하고 함께 성장해가야 한다, 는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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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8 12:00:36 *.12.196.159
# 200일차와 300일차의 차이점..

다르다..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2백일차에서 어느 날 난 문득 깨달았다. "매일의 위대함"말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며 어느 날 새벽, "와.. 이거 대단하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매일 일어나 수련을 한다면.. 정말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내 안에 퍼져 나갔다.
스스로 체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3백일차..
오늘 새벽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수련의 강도가 점점 세지고 있다는 느낌.
 무언가 표현하기 쉽지 않지만, 먼가 내 안의 에너지장이 단단해지고 있다는 느낌..
지금의 새벽 2시간은 100일차 새벽 2시간과는 비교가 안된다.

100일차에는 그냥 일어나기 급급했다. 일어나도 정신이 몽롱해서 솔직히 수련은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도 100일 꼬박 일어나지도 못했었고.

200일차에는 일단 일어는 났다. 그런데 새벽수련은 100% 하지는 못했다.
그 때 그래도 "매일의 위대함"을 체득하는 걸로 만족했다. 그것만으로도 큰 변화였으니까.
그조차도 쉽게 체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300일차. 새벽 기상에 따른 몸의 저항은 거의 없다. 이제 거의 반사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중요한건 정신이 맑다는 게다. 집중할 수 있고 몰입의 강도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
밤이 되면 아무래도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에너지 레벨이 최정점일 수 없는데
이젠 고요한 새벽, 에너지가 모어지는게 느껴진다.. 신기하다..

100일차와 300일차 새벽 두 시간.
같은 두 시간이지만 농도차이가 확연하다.

이게 느껴지니까, 이제야 비로소 "즐거움"이란 단어가 아주 조금 비집고 들어온다..

의무가 아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걸.
고요한 새벽. 강도높게 집중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좋다.
그 시간, 깊이 빠져드는 새벽활동이 좋다.

내 안의 중심은 천복에의 즐거움이 맞는게다.
천직은 선물이다. 세상과 아름답게 조우하는 우주의 선물.

계속 느끼고 싶다. 놓치고 싶지 않은 느낌이다.
2백일하고도 몇십일이 지나 겨우 체득한 이 느낌. 잃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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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9 08:01:28 *.12.196.54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20>

# Book review 83-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소크라테스편 인용문 필사 후 생각정리

처음엔 그냥 가볍게 읽으려고 집어든 책이었지만 다 읽고보니 인용문 필사의 필요성이 느껴진 책.
읽기는 며칠 전에 다 읽었지만, 새벽시간을 활용하여 필사하고 일지에는 생각정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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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자신의 철학을 지키기 위해 도망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철학자.
그게 내가 알고 있던 전부가 아니었나 싶다.
아, 물론 "네 자신을 알라"는 말과 함께, 아내가 악처였다는 사실 정도.

 


철학의 원조 혹은 뿌리와도 같은 소크라테스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비논리적인 반대에 부딪혀서도 자신의 입장에 대한 확신을 굽히지 않는 극단적인 예로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61)."

 

다비드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최후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지킬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라는 대답이 튀어 나온다. 그냥 아니다 정도도 아니고 "당연히"라는 수식어까지 붙어서.

목숨을 내거니 나와 그의 괴리가 너무 심하다. 그럼 이야기를 일상으로 끌어오면 어떨까?

"타인과 대화할 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일이다. 타인을 즐겁게 해주려는 욕망은 나로 하여금 마치 학예회날 학교를 찾은 학부모처럼 그다지 우습지 않은 농담에도 크게 웃도록 한다. 낯선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는 돈많은 손님을 맞는 호텔 수위처럼 노예같은 태도를 취하는데, 이는 호의를 얻으려는 무분별한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16)."

살면서 이런 경우 많았다. 뒤돌아서서 그 공허한 웃음에 가슴이 시릴지라도 다음 날 또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던 수많은 날들..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경우 소크라테스처럼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각자의 성격이나 성취에 대해 불쾌한 평가를 들었다고 해서 금방 눈물이 핑돌기라도 한다면, 그 이유는 아마 우리 스스로 옳다고 믿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찬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48)."

역시 나의 약한 자의식이었나..

"우리는 비평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살필 시간적 여유를 가져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간파했듯이, 그런 사고는 제 아무리 그럴듯하게 위장을 한다해도 그 뿌리가 심하게 뒤틀려 있을지도 모른다 (50).

그치만 내가 옳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고집을 피우는거면 어쩌지..?

"우리가 만약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잘못되었다고 비난받을 때 무조건 자신이 옳다는 식으로 어린아이처럼 고집을 부린다면 소크라테스이 이야기에서 거부의 정당한 명분보다는 단순히 거부하는 자세를 미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진실과 동의어로 보는 것은, 인기 없음을 잘못과 동의어로 믿는 것만큼이나 고지식한 짓일 것이다. 하나의 관념이나 행동이 유효하냐 아니냐는 그것이 폭넓게 믿어지느냐 아니면 매도당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논리의 법칙을 지키느냐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다 (70)."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철학의 세계가 눈 앞에서 펼쳐지는 느낌이 든다.
그치만 어쩐지 한 걸음 다음 철학자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게 만드는 소크라테스 편이었다.

그가 목숨까지 내놓으며 지키고자 했던 삶의 원천인 철학. 이후 수천년이 지나 그가 태어난 곳에서 아주아주 먼 극동의 한 평범한 인간인 내게까지 전해진 철학. 참으로 위대한 사상의 힘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조금 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고 싶다.
다음은 역시나 "쾌락주의"라고만 오해했던 "에피쿠로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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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9 10:50:44 *.12.196.54
# 추가활동: 다큐멘터리 영화 <지구>와 오스카 와일드의 "윈드미어 부인의 부채"를 영화화한 <굿 우먼>
영화리뷰: http://blog.daum.net/alysa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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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0 08:28:12 *.207.0.97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21>

# Book review 84-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 147쪽까지 읽기 완료

헤세를 헤세로 만든 것은 아마 "데미안"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 이전에 "수레바퀴 밑에서"라는 걸출한 작품이 있지만, 헤세를 보다 완숙한 자아성찰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기 시작하는 시점은 역시 데미안과 그 이후의 작품들인 것 같다.

그래서 데미안부터 연대순으로 그의 작품들을 읽어 나가고 있다.
헤세는 스승님의 말씀을 빌자면 "그 분"으로 만나 "그 놈"이 될때까지 샅샅이 읽고 싶은 작가이다.
한 마디로 현재 내가 가장 좋아하고 흠모하는 작가, 헤르만 헤세.

이유는 그런 것 같다. 그의 치열한 자아성찰. 거기에 매료되어 있는 것 같다.
작가라면 혹은 예술가라면 어느 정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거치겠지만
헤세는 그 자신 칼융을 직접 만나기도 하고 니체와 동양불교에 심취하는 등
그 누구보다 내면탐구를 통한 자아성찰에 몰두했던 작가였던 것 같다.

작년에 데미안을 세번째 읽었는데, 내가 이 책을 읽었던 책인가 할 정도로 새로웠고 그래서 놀랐다.
역시 책이란 어떤 책을 읽는지도 중요하지만 "언제 읽는지"도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그러므로 내 상황에 맞는 책을 잘 살펴서 잘 선별하는 것도 나름 의미있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데미안 다음으로 읽었던 책이 싯다르타.
독일의 대작가가 싯다르타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는 것 만으로도 호기심이 잃고 궁금했다.
과연 싯다르타라는 제목아래 헤세가 펼치는 세계는 어떠할까.. 싶어서.
결과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동양사상에 대해 이다지도 깊은 통찰력을 지닐 수 있을까 싶어 처음엔 놀랬는데,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동양사상이 어디 동양인들만의 깨달음일까. 그건 결국 하나의 진리를 놓고 해석하는 혹은 걸어가는 방법이 다를 뿐인 것을. 그러므로 캠벨의 말처럼 진리를 향한 길은 전 세계 지역과 민족에 따라 수없이 다양하지만, 결국 그 안에는 "공통된 인간원형"이 존재하고 있음인 것을.
다만 그 방식에 있어 서구적이 아닌 동양적이 그 길을, 동양인보다 더 깊게 헤쳐나간 헤세의 작품 앞에 놀랬다는 표현이 옳은 표현이 될 것 같다.

다음으로 이 책 "황야의 이리"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 역시 치열한 자아성찰의 책으로서, 한 개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나" 를 다루고 있다. 아직 중반정도까지밖에 읽지 않아서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긴 어렵지만, 뭐랄까 데미안에서보다 한 걸음 더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 든다.

데미안은 하나의 나를 상징하기 위해 여러 캐릭터들을 등장시켰다면, 황야의 이리에서는 하나의 나 안에 내재한 다양한 캐릭터들을 다룬다고나 할까.. 무튼 조금 더 복잡한 내면을 다루다는 느낌이 든다. 정보를 나열하는 책이 아닌 소설의 경우 북리뷰는 아무래도 끝까지 다 읽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황야의 이리 밑에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기다리고 있다.
헤세의 마지막 작품 "유리알 유희"까지 읽는다고해서 헤세가 그놈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기에 헤세는 너무 우수에 젖어있다.
즉 깨달은 자들만의 슬픔이 너무 깊게 베어있어, 도저히 나정도의 사람이 가늠하기 어렵다.
아마 끝까지 "그 분들"중의 한 사람으로, 끝까지 흠모하는 작가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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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0 08:57:43 *.207.0.97
# 인간사회는 과연 적자생존의 정글일까?

어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흔히 바깥 세상을 정글에 비유하고는 한다. 먹고 먹히는.
그래서 어떻게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그런데 다큐멘터리 영화 "지구"를 보면서 문득 스치는 게 있었다.
동물은 제 아무리 맹수의 왕이라 할지라도 "필요한만큼만 취한다"
사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배가 고프지 않을 땐 곁에 걸어다니는 짐승들을 헤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지구라는 행성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 중에서 유일하게 필요함을 넘어선 욕망활동을 하는 종이 아닐까 싶다. 간단히는 의식주를 향한 욕망에서부터 성적인 욕망에 있어서까지 "필요 Need"를 넘어 "원하기 때문에 Want"로까지 자신들의 욕망을 확대, 충족하는 존재들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지구 위의 종들을 인간과 비인간으로 양분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경계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을 축적하고 원함을 손에 넣고 행할 수 있는 것을 "상대적 우월감"으로 취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지구와 다른 생명들을 훼손하고 멸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정착이란걸 모르고, 축적이란걸 모르는 구석기 시대까지만해도 인간도 그저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며, 먹이를 위해 사냥을 할 때조차 먹잇감이 되어주는 타자, 즉 다른 동물에게 경외심을 표했다고 하는데 말이다.

인간은 과연 다른 종들에 비해 우월할까?
영적 스승들에 의하면 우월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진화 중"에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을 다른 종들과 구분짓게 만드는, 혹은 진화 중에 있는 존재라고 하는 필요함을 넘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경계 너머의 능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진정한 진화 혹은 삶의 질이 달라지는게 아닐까?

욕망이 인류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지만, 한편으론 사회적 욕망만을 채우다 정작 본연의 자신을 잃고마는 경우가 너무 많다. 스스로를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놓고 자신이 필요한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경계를 지으면, 그 다음부터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길이 훨씬 가벼워질텐데 말이다.

<최소한의 필요+ 알파>
그리고 이 알파를 어찌 다루느냐에 따라 개개인의 삶이 달리 펼쳐지는 것 같다.
다른 종들과 달리 인간에게만 고유하게 주여진 능력을 어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생명다한 그날 죽음에조차 순종하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회한의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나의 충만한 행복감은 과연 어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걸까..?
나의 최소한의 필요의 경계가 어디인지 잘 점검하고
그 경계선을 넘어서부턴 어느 방향으로 삶을 전개해나갈지 스스로에게 묻고 물으며 한걸음씩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이란 그런 계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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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0 21:26:10 *.207.0.97
# 갈라지는 얼음..

칼융이 어느 날 자신의 거실 테이블이 갈라지는 느낌을 받으며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한다.
감히 비교할순 없겠지만 내겐 그 나름 굉장히 중요한 두 가지 깨침이 든 날이다.

하나. 제인 오스틴은 어느 길을 갔어도 제인 오스틴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두울. 포르투칼을 가려면 포르투칼 지도를 먼저 사자.

여기 두 줄에 내 과거가 다시 한번 재해석되고 미래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건, 현재인 오늘 이 순간을 "즐겁게, 극대화로 산다"라는 것의 세계가 처음으로 문을 열어 그 모습을 내게 보여준다고나 할까.

이상적 현실주의. 사부님의 철학.
꿈을 실현하기 위해선 현실을 더 열심히, 더 즐겁게 살자.
어쩌면 내게도 그러한 삶이 현실로 들어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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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1 06:23:58 *.207.0.97
# "황야의 이리" 중, 하리의 처형 앞에서..

헤세의 진지함에, 헤세의 자기 분열 앞에 지금 난 숨이 막힌다.
문득 카잔차키스가 그립다. 그의 호탈함이, 그의 자유로움이, 그의 경계 넘은 무한 유쾌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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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1 12:08:48 *.207.0.97
# "황야의 이리"의 진정한 주제는 천개의 영혼 속에 빛나는 별..

세상에..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다..
간단하게나마 인용문을 정리하며 다시 책장을 들춰보지 않았다면 난 이 작품을 난해하고 복잡한 자기해체의 책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이 책은 <데미안-싯다르타>에서 이어지는 작품으로 그 맥락을 이루고 있었다.. 자기해체에서 멈추는 천개의 영혼이 아니라, 치유와 구원의 별을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황야의 이리" 풀버전 북리뷰: http://blog.daum.net/alysapark

그리고 이 작품 속에 헤세는 이미 그의 마지막 작품 "유리알 유희"를 품고 있다. 놀라울 뿐이다..

북리뷰를 끝내는 지금 난 정처없이 동남아 어디 조용한 곳으로 흘러가고 싶다.
거기 그 곳에서 나의 "미니멈"을 관찰하고 내 주머니 속 구슬을 새로이 꺼내어 인생이란 장기판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러면 아마도 순간을 영원처럼, 보석처럼 아끼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때가 되면 가능하겠지..
그 때가 될 때까진 창 밖의 눈과 함께 조용히 매일을 쌓아가며 살면 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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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1 08:17:05 *.207.0.97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22>

# Book review 84-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 읽기 완료

세상에.. 전편 "싯다르타"에서 그리 가뿐하게 통찰의 세계를 그린 작가가
그 다음 작품 "황야의 이리"에서 이다지도 복잡하게 내면을 파고 들다니..

그의 말처럼 그는 이 작품에서 한 인간 속에 내재한 "천 개의 영혼"에 대해 논하고 있다.

물 좀 마시고 천천히 몇 개 인용문을 정리하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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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학렬
2011.01.31 19:18:08 *.87.60.233
수희향님..
개인 단군 프로젝트 하시랴 다른 분들 챙겨주시랴 바쁘시겠네요. 앞으로도 항상 기 팍팍 밀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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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1 21:05:32 *.207.0.97
학렬님 오셨어요. 방가방가요^^
넵! 제 응원이 힘이 되신다면 저도 학렬님의 응원에 더욱 힘내어 계속 열씸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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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1 07:04:02 *.207.0.97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23>

# Book review 83-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에피쿠로스 편, 인용문 필사 및 칼럼 한꼭지

쾌락이란 단어 하나때문에 일반인들로부터 철학적 근본에 대한 오해를 받고 있는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이다.

그가 주장한 "쾌락"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그건 고통이 없는 진실로 완벽하게 평온한 마음 상태,즉 "아타락시아"를 꿈꾸었고 공동체를 통해 실현하려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는 사랑이나 육체적 쾌락보다는 오히려 친구들간의 우정을 더 높이 샀던 철학자였다.

"에피쿠로스의 시각에서 보면, 철학의 임무는 우리 각자가 원인 모를 우울증과 욕망의 충동을 해석하도록 돕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그릇된 계획을 세우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었다 (90)."

"에피쿠로스가 펼쳤던 주장은, 만약 우리에게 돈은 있지만 친구와 자유, 사색하는 삶이 없다면 결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고, 비록 부는 얻지 못한다 해도 친구와 자유, 사색을 누린다면 결코 불행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98)."

확실히 지금까지의 삶에서 생각해보아도 물질= 행복이 아닌 건 분명하다.

오히려 "삶의 질"이란 "최소한의 물질적 필요+ 알파"에서 알파를 어떤 것으로 채워가느냐에 따른 그 무언가가 아닐런지..

그럼 내게 아타락시아란 어떤 상태일까.. 내가 행복하다 느끼는 순간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난 평온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이 새벽은 분명 내게 평온함과 충만함을 가져다 준다. 또한 프리랜서로 전향하면서 비록 밥벌이를 위해 낮에는 다른 일을 해야하긴 하지만, 그 또한 회사 생활에 비하면 훨씬 좋아하는 일에 근접하다는 거. 이는 내 삶을 이전보다 평온하게 이끌어 가는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게 관계가 아닐까 싶다. 요즘 난 형식적인 관계는 거의 자리하지 않는다. 마음이 가고 대화를 할 수 있는 관계만 유지하려 애쓸 뿐, 그 외의 관계들은 그냥 내버려 둔다. 진정성이 빠진 인맥관리의 허망함을 오래 전에 경험해보았다. 어쩌면 물질에 이어 인간의 삶을 굉장히 공허하게 만드는 가장 커다란 요인 중의 하나가 허망한 인간관계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겐 그러하다.

정신적 성숙, 자아실현, 진정성..
머 이런 구슬들을 꺼내어 내 삶의 장기판을 짜고 싶다.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에피쿠로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쓸데없는 의견들"로 인해 더욱 악화된다. 그런 의견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의 우선 순위를 반영하지 못하고 호화스러움과 부만을 내세울 뿐, 우정이나 자유, 사색은 좀처럼 강조하지 않는다 (108)."

2월의 첫째 날이다.
시간의 개념이 마니 무디어져가는 요즈음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나를 만드는 작업에 더 몰두하는 2월이고 싶다.
봄이 오기 전 늦겨울에 깊이 빠져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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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윤정
2011.02.01 09:02:37 *.154.223.196
수희향님 안녕하세요?
2월 1일이라니 좀 특별해져요. 새 달 새 마음^^
수희향님 일지와 살롱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 읽고 '음' 하고 가곤 합니다. 저런 어려운 책을 매일 읽으세요!
설 명절 잘 보내시구요. 떡국도 마이 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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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2 08:34:30 *.12.196.149
윤정님 오셨어요, 방가요~ ^^
그러쵸? 아무래도 늘 매달, 매년의 첫 째날은 조금 남다른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제 살롱에도 놀러오시는군요. 감사한 일인데요^^
윤정님도 명절 잘 보내시고요, 새해에는 더욱 건강히 발고 힘찬 날들 펼쳐가시기 기원합니다.
늘 행복하시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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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2 08:32:34 *.12.196.149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24>

# Book review 86-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142쪽까지 읽기 완료

헤세의 "황야의 이리" 다음 작품.

헤세가 전작 "황야의 이리"에서 천개의 영혼으로 자기해체를 하고 그 가운데 본질적인 정신의 구원을 찾으려 애썼다면, 다음 작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스스로 "영혼의 자서전"이라 할만큼 조각조각 해체된 천개의 영혼 중에 자신의 형상을 추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전작 "황야의 이리"는 목이 졸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숨이 막히도록 자기분열과 혼란 속에서 빛나는 본질의 정수를 구하고 있다면, 다음 작품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상대적으로 차분히 자기 안을 드려다보며 자신의 본성을 따라가는 느낌이다. 물론 이제 겨우 142쪽을 읽었으니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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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3 07:23:59 *.12.196.15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25>

# Book review 86-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270쪽까지 읽기 완료

새해 첫날 예불드리러 가야해서 조금 일찍 마친다.
올 한해도 모든 이들, 모든 존재들, 그리고 지구와 우주 전부 평안하고 복된 한해되기를.
다 함께 더 마니 사랑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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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4 08:17:51 *.12.196.76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26>

#Book review 86-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읽기 완료

드디어 헤세 스스로 예술가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 어째서 이 작품이 "영혼의 자서전"이라고 했는지 알 듯도 하다.

데미안에서 자기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헤세는
싯다르타를 통해 진리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그려본다.
그리고 황야의 이리에서 다시 자기 내면으로 더욱 깊이 침잠해 들어가 격심한 자기해체를 겪으며 스스로를 천개의 영혼으로 분리한다.

다음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여기서 해체는 드디어 폭풍같은 황야의 이리를 지나 조용해진다.
여전히 골드문트는 세상을 방황하고 있지만 그조차 순례의 여정일 뿐이다.

여기 이 작품에서 드디어 헤세는 황야의 이리에서 논했던 드높은 정신세계가 본인에게 있어서는 "예술가의 길"임을 깨닫고 형상화해가는 작업을 시작한다.. 정말 대단한 작가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한 사람의 작품을 시대순으로 읽는 것이 묘미에 푹 빠져있다.
다음이 동방순례인데 절판이라니..
그 작품을 건너띄고나면 가장 마지막 작품에 해당함과 동시에 헤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유리알 유희"가 남는다. 기대되고 또 기대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지적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고 아직 내 안에 느낌이 고스란히 남아있을동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북리뷰를 해보아야 겠다. 우선 커피부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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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4 15:40:33 *.12.196.76

# 천재들의 에너지장: 차원이 다르다..

내일 수행을 들어가기 전 몇가지 정리를 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살바도르 달리의 영화와 나름의 글들 정리
(그의 천재성이 발현되기 시작한 시기를 조명한 영화, "리틀 애쉬" 영화리뷰: http://blog.daum.net/alysapark)

그리고 천재들의 삶을 살펴보며 문득 느낀 점..

그들은 자신들의 본질을 세상에 표현하기 위해 세상을 뛰어넘은지 오래다.
절대 세상 눈치를 보지 않는 자들이라고나 할까.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본성을 어떻게 형상화하여 그 높은 정신세계를 표현할지.
오직 그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천재들의 주변에는 그에 준하는 사람들이 모여 비슷한 에너지장을 형성하고 있다.
누군가는 천재성을 건드려주기도 하고, 누군가는 천재성이 발현될 수 있는 길목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그렇지. 스승이란 이름이 될 수도 있고, 후원자 혹은 파트너.. 그 어떤 형태로든 천재의 주변에는 그를 이해하며 비슷한 에너지장을 형성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결국 오늘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디에 집중하는지가 곧 내 삶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우주의 법칙은 한 치의 오차없음을 천재들의 삶을 들여다보다보면 알게 된다.
오늘의 나를 들여다보지 않고, 내일의 나를 꿈꾸지 말자. 그런 내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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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5 08:21:06 *.12.196.235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27>

# Book review 86-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인용문 필사 완료

어제 책을 다 읽었을 때는 그냥 북리뷰를 할까 했었는데, 역시 헤세다.
지난 "황야의 이리"때도 다시 인용문 정리하면서 책을 더 깊이 이해했었기에
인용문 필사했다. 지난 황야의 이리때마큼 엄청 다른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구성 자체가 황야의 이리보다는 덜 복잡하다), 읽는 내내 명쾌히 정리되지 않던 "어머니"라는 존재가 비로서 확연히 이해된다. 역시 인용문 필사의 힘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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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인용문을 다시 읽으며 파란줄, 빨간줄을 그으며 비로소 이 책의 전체 흐름이 이해된다.

나르치스.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골드문트가 감성의 인간임을 일찍이 터득하고 그를 잠자는 감각을 일깨워주는 역활을 한다.

골드문트. 이 작품의 실제적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인물.
그는 나르치스에 의해 잠자던 감성이 깨어나자 세상을 방랑하며 자신의 모든 감각 세계를 되살린다. 그리고 그 끝에서 예술이 탄생한다.

그러나 골드문트, 즉 헤세의 삶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쾌락을 통한 감각의 세계에서 예술을 피어올렸다면
죽음이란 고통을 통해 "어머니"라 불리우는 통찰의 세계로까지 한 걸음 넘어가며 작품이 끝난다.

이 작품 다음이 헤세의 노년 시대로 넘어간다.
젊은날 자아성찰에 모든 걸 바치다시피한 헤세가 말년에는 어떤 작품성향을 띄울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다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즉, 예술가로서의 자아실현과 함께 진리에 귀의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므로 다음으로 싯다르타의 객관적 통찰이 아닌 스스로의 체득에 바탕을 둔 동방순례와 유리알 유희같은 작품들이 이어지는 거같다. 참으로 위대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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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북리뷰 끝났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풀버전 북리뷰: http://blog.daum.net/alysapark)
역시 미욱한 내가 이해하기에는 참으로 깊은 작품이다.
정리한 인용문을 다시 보면서 또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으니..

무언가를 깨쳐서 북리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용문을 정리하고, 북리뷰를 하며 곱씹고 곱씹어 생각하며 서서히 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어째서 사부님께서 좋은 책은 여러번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북리뷰를 하면서 깨우친 점.

있는 그대로 살자.
삶 앞에 억지하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말고
뒤돌아보지도 말고, 앞서가지도 말고
그저 운명이 나를 관통하여 있는 그대도를 마음껏 펼쳐낼 수 있도록
나를 오롯이 내어드리자..

그것이야말로 자아를 실현하여
신께, 우주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길이기에 말이다..

헤세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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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5 13:02:21 *.12.196.235
# 영화 "로리타" 리뷰: http://blog.daum.net/alysapark

중년 남성의 어린 소녀에 대한 광적인 사랑이야기, "로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원작자체가 처음엔 발간되지 못할 정도였다가, 훗날 발간되며 "로리타 신드롬 혹은 증후군"이라는 심리학 용어를 파생하게 되는 작품.

결국 파멸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지옥 속의 천국적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는 험버트의 삶이 골드문트와는 다른 대극에서 같은 것을 알려주려 한다는 느낌이라면 내가 헤세에 너무 빠져있는걸까..?

무튼 예전같으면 끝까지 보지 않을 영화였지만, 이젠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나 또한 걸어온 시간보다 지금부터 걸어가야 할 시간이 문득 의미가 되어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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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5 13:16:27 *.12.196.235
# 10번째 수행..

이제 조금있으면 10번째 수행을 떠난다..

왜 난 아무 의미없는 숫자를 매번 산사에 들어갈 때마다 헤아리고 있는걸까.
아마도 각각의 수행이 조금씩 그 색채를 달리하기 때문인 것 같다..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끝으로 떠나게 되어 기쁘다.
뭐가 기쁜지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어쩐지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에게 했던 말,
"성스러운 말씀을 사람의 말처럼 말하고 들어서는 안 되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심정으로 말씀을 따라하고 가슴에 새겨두어야 하네.."라는 나르치스의 말을 마음에 품고 들어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록 며칠간이지만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영혼의 단순함을 느껴보고 싶다.
모든 것이 하나로 모아지는 그 불꽃.. 거기에 나의 영혼을 실어올릴수만 있다면..

나올 때는 조금 더 맑아져있기를.
그래서 걸림없이 세상을 품고 세상 속에서 그것을 표현할 수 있기를.
그렇게 온전히 나를 내어놓음 속에 자유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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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08:35:41 *.12.196.131
네, 연휴도 잘보내고, 수행도 잘 다녀왔습니다..^^

제가 하는 수행은 성철 큰스님 종단에서 내려오는 아비라수행입니다.
일년에 4번, 정해진 기간동안, 정해진 방식에 따라 행하는 수행입니다.
방식이야 어떤 것이 되었든 명상 혹은 수행을 삶의 일부분으로 끌어들이는 건 현실을 더 사랑하기에 좋은 일인것 같습니다. 꼭 시간을 내어 어디를 가서 행하지 않더라도, 하루 중 잠깐의 명상도 좋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희님은 새벽 시간을 잘 보내고 계신 것 같아, 곁에서 응원하는 저도 기쁩니다.
계속 정진의 길 화이팅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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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희
2011.02.07 11:02:50 *.143.199.187
어떤 수행을 떠나셨는지 궁금합니다.
연휴는 잘 보내셨는지요...
연휴에 수희향님 글을 보고는 색 바랜 헷세 시집을 오랫만에 보았어요. ^^
수희향님 일지에 쓰여진 책을 모조리 읽고 싶어지는걸 꾹꾹 참고있습니다.
읽다가 그 무게에 깔려 죽을거 같아서요. ㅎㅎ
수행 잘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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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06:30:20 *.12.196.131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28>

# 수행을 다녀와서..

어제 이 시간에는 새벽 예불을 마치고 두 번째 정진회차에 들어있을 시간이다.
오늘은 따듯한 내 방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쓴다.
단 하루라는 시간의 경계 속에 펼쳐지는 두 세계가 너무 다르다..

불을 켜지 않는다. 오직 컴퓨터 스크린의 불빛에 의존해 한 자, 한 자 키보드를 눌러 내려간다.
아직 난 세상으로 돌아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기도 잠에서 아직은 깨어나고 싶지 않다.
조금만 더 이대로, 이 느낌 그대로 있고 싶다..

온 몸 구석구석이 뻐근하다. 수행몸살이다.
이젠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느낌.
다른 세상에서 육신을 거두어 이 세상으로 돌아왔지만, 그 몸이 저쪽 세상을 기억하고 있다고나 할까..
몸에 남겨진 이 흔적이 가실 때쯤이면 다시금 현실이 익숙해질 것 같다.

예전에 시드니와 한국을 오가며 생활할때 그랬었다.
시드니를 가면 한국에서의 삶이 까마득히 옛일처럼 느껴진다.
반대로 한국에 오면, 시드니에서의 시간들이 현실 너머의 시간처럼 다가와 당혹스럽기까지 했던 기억이 있다.

수행은 그보다 더 큰 경계를 만들어낸다..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만해도 세상을 마음에 그대로 품고 산사에 들어갔었는데..
세상 일이 너무 궁금해, 남겨두고 들어온 사람들이 너무 궁금해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며칠이 지루하고 또 지루했는데..

시간과 함께 쌓아올린 수행이 나를 점차 변화시킨다..

지난 며칠은 세상 일을 떠올리려해도 현실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거기, 바로 그 곳만이 나의 현실일뿐..

그러니 더 이상 무언가를 바라는 기도가 있을수가 없다.
오직 기도로써 기도할 뿐..

그랬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염원이 없어 좀 이상했다..
점차 옅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일, 한 두 사람 정도는 떠오르고는 했는데..

그렇구나.. 이 세상이 더 이상 현실이 아니게 되니, 바램 또한 그렇게 사라지는거구나..

"먼별아, 나는 현실적 이상주의자다."
스승님의 목소리가 나를 깨우신다..

나 또한 그런 삶을 살고 싶고, 그리 살도록 더 치열히 노력할 것이다.
오늘 새벽에는 아직 수행에 너무 취해 쉬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서서히 돌아올게다.. 그리고 예전보다 더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게다.
나의 본성을 더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 본성이 깨어나는 삶은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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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07:16:49 *.12.196.131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29>

# 본성이 뭐꼬..?

"자기를 바로 봅시다. 그리고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성철 큰 스님께서 남겨주신 말씀이다.
이 짧은 두 문장 안에 진리를 향한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자기를 바로보게 되면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왜..? 어떻게..?

자기를 바로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불교에서 가장 잘 알려진 보살 중의 하나인 관세음보살의 "관"은 다름아닌 "볼 관"자이다.
수행의 첫 걸음은 다름아닌 "나를 관찰하기".

나를 관찰하기 시작하면, 다음으로 나에 대한 객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되면서
본성과 에고의 경계를 희미하게나마 구분하기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본성이 과연 뭘까?

에고란,
"외부 환경에 나를 맞춰 끈임없이 욕망을 부추키는 나"이다.
성공에의 욕망, 물질에의 욕망, 사랑에의 욕망 등, 우린 매일 매 시간 끝없는 욕망에 이끌려 살고있고
그런 나를 이끄는 것이 바로 내 안의 에고. 사람들이 흔히 나= 에고,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모습이다.

본성은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나"이다.

수행에 정진하려 할 때 번뇌, 망상이 떠오르면 마음 한 구석에서 "집중해야지"라는 생각이 인다.
그 생각을 일으키는 본심, 그것이 나의 본성이다.

앞,뒤 생각없이 소비의 욕망이 일 때, 그런 나를 제어하며 한번쯤 생각하게 나
그것이 나의 본성이다.

끝없는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려고 정신없이 질주하는 내게 살며시 "너 지금 어디를 향해 이다지도 바삐 뛰고 있는거지?"라고 물어오는 나, 그것이 바로 나의 본성이다.

우린 살면서 수없이 본성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다. 왜..?

피곤하니까.
본성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삶은 자칫 힘들어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자아를 마주보고
그 속에 내재한 에고와 본성을 구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물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성의 생명력을 키워나가는 일이야..

대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데
나는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거지..?

진정 어제까지의 삶이 공허롭지 않았다면 그리 살아도 괜찮다.
삶 자체가 문제인적은 없다. 문제는 삶을 대하는 우리들일뿐..

다만 고맙게도? (혹은 힘들게도) 본성이란 녀석은 그리 쉽게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세상에서의 욕망이 채워짐과 비례해서 이 녀석의 목소리도 점점 커진다.
지도 살아야 하기에 그러는거겠지..

그리하여 우리는 성공의 정상에 선 사람들의 유리알처럼 부서지기 쉬운 삶을 문득문득 대하고는 한다.
그러나 쉬이 외면하려 든다. 나 또한 그 길을 달리고 있는데, 그 끝이 그래서야 말이 안되니까.

본성이 뭐꼬..?

그건, 나를 세상이 말하는 지식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태초의 우주때부터 있어왔던 지혜의 길로 이끄는 내 안의 "참 자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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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07:47:33 *.12.196.131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30>

# 남을 위해 기도할때 비로서 성장하는 본성의 힘..

우리 안에는 누구나 본성을 씨앗으로 지니고 있다고 한다.
우주와 합일하고자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거는 참 자아말이다.

그러나 씨앗을 품고 있다고 곧바로 열매를 맺을 수는 없기에
그때부터 잘 가꿔야 하는데..

어떤 환경을 조성해주고, 얼마나 신선한 공기와 깨끗한 물을 공급해주고
무엇보다 사랑으로 지켜봐주느냐에 따라 피워내는 꽃이나 열매는 사람수만큼이나 천차만별이 될 수 밖에 없겠다.

그러므로 에고가 아닌 참자아가 내 삶을 이끌게 하기 위해선
본성의 생명력을 조금씩 키워줘야 한다고 하신다.
그 힘이 너무 미약하면 늘 에고에, 욕망에 휘둘리는 삶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에 해당하는 답이 바로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가 된다고 한다.

홀로 잘 살 수 있을까..?
우린 너무도 경쟁이란 단어에 익숙하게 길러져와서 내것을 내어준다는 것에 쉽게 적응하기 어렵다.
힘겹게 부여잡고 있는 몇 안되는 내것마저 내놓는 순간, 세상은 한순간에 그마저도 탈취해버릴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나 삶의 진정한 비밀은 "함께 나누는 삶"을 깨달아 아는데 있다고 하신다.

본성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부지런히 갈고 닦으면
세상 부순물들이 점차 가라앉는다. 에고가 잠잠해진다고나 할까..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온한 느낌.. 영혼이 고요해지는 느낌이다..

그러면 세상이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나에 대한 집착이 가라앉으며, 그 자리를 "너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채워들어오기 시작한다.
물론 아주 서서히..

나와 너 사이에 대한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질때
자연스레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된다.

나에 대한 바램이 줄어들 때, 우리에 대해 기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우리의 범위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확장된다.
물론 지루하리만치 서서히..
때론 몇걸음 후퇴하면서..

그러면서 나의 근본 인연자리들이 또한 아주,아주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성공하고 소유해서 내 삶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이 바뀌어, 내 근본인연이 바뀌어 내가 소유할 수 있고,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것들이 바뀌는 것이다. 흑과 백처럼 분연히 다른 극의 방향에서 어디를 향해 달려갈지는 철저히 우리들의 몫이다.

나 혼자 아무리 100미터 단거리 경주하듯 산다고해서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 아니다.
나 하나의 삶은 나 혼자 살아내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인연들이 오고가며 채워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연자리들을 어찌 감당할지는 철저히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린 문제이고..

나눔의 삶을 추구하면, 타인도 그들의 삶을 내게 나눠주려는 인연들이 오는 것이고
경쟁의 삶을 추구하면, 타인도 늘 나와 경쟁하는 삶이 내게 오는 것이고.
오늘의 나의 현재는 정확히 내가 추구한 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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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08:01:14 *.12.196.131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31>

# 그래서 나는..

여기까지다. 현재의 나 말이다..
지난 3년간 수행을 하며 배우고 깨치고 터득하고..

때론 욕망에 물들인 나를 마주하며 견디기 힘들었다.
때론 한없이 게으른 나를 보며 실망하기도 하고.
그래도 중요한건 놓지 않았다는 것 같다.

만족스럽게 수행을 이어오고 있지는 않지만
이어 오고는 있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아둔하고 욕망이 넘치는 나이지만
무언가 내면 깊은 곳에서 달라지는 것이 조금은 있다.

이제 다시 내 방 불을 켤 시간이다.
수행에서 깨어나 비현실처럼 느껴지던 나의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그리고 어제보다 더 열심히, 더 뜨겁게 살아갈 시간이기도 하다.

수행을 하는 건, 결코 현실과 멀어지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다.

나의 본성을 잘 헤아려, 그것의 생명 불꽃을 피워주고 싶어서이다.
그 아름다운 불꽃으로 선한 인연들로 내 삶이 채워지고, 나 또한 타인에게 그런 의미가 되고 싶다.

그렇게 나와 세상을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꾸준히 하다보면
언젠가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서기도 조금은 홀가분하지 않을까.
그 땐, 죽음 너머의 세상이 나의 현실이 되고, 이 세상은 어느덧 비현실이란 시간 속으로 흘러가면서 말이다.

아주 짧은 한순간, 죽음 앞에서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내가 채우려고 아둥거렸던 삶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들과 함께 아름답게 채워진 삶을 바라보고 싶다.

수행에 들어가면 세상 일을 까마득히 잊듯이
죽음의 경계도 그렇게 홀연히 넘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루미의 말처럼 죽음 그 자체는 우리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 다음 세상을 모르는 우리들이 경계넘기를 두려워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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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08:02:56 *.12.196.131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32>

# 10번째 수행을 한줄로 정리하자면..

본질의 인연자리를 바꾸기 위해 오직 일념으로 기도할 뿐.
거기 그 곳에는 어제도 그리고 내일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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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09:18:16 *.12.196.131
# 겨울날씨와 떡복이^^:::

산사에 있을 동안에 날씨가 좀 풀려서 덜 힘들었다. 감사할 수밖에 없는 날씨였다.
사실 가기 전에 이번 겨울내내 영하권으로 추워서 속으로 은근슬쩍 걱정했기에 말이다.
안그래도 힘든데, 날씨까지 영하라면.. 에공, 상상하기 힘들다^^:::

내 방 불을 다시 켠 지금, 공기 환기하려 열었던 문을 얼른 닫았다.
다시 날씨가 추워진다더니 정말 춥다. 그런데 문을 닫는데 문득 "떡복이"가 묵고 잡당.

매콤, 달콤한 떡뽀기를 묵고 따끈한 라테를 마시면~ 캬아~
현실로 돌아오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가 떡뽀기라니, 역시 먼별이는 초짜 어리버리 샤먼맞당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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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08:25:18 *.12.196.131
# 헤세를 이룬 3가지 근본 요소:

칼융, 니체 그리고 석가모니 붓다의 사상이라 할 수 있겠다.

칼융의 분석심리학을 빌어와 철저히 자아탐구를 한다. 일생 멈추지 않았던 작업이라고나 할까.
작품 세계 자체가 내면탐구의 여정을 담고 있다.

그렇게 찾아가는 자아가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 니체가 그 길을 열어주었다.
19세기는 낭만주의 시대. 즉, 인간의 감성이 이성의 두터운 벽을 뚫고 나오는 시대였다.
20세기는 심리학이 지배하는 시대.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드디어 자기분석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중 몇몇, 의식 너머의 시대를 엿보는 이들을 우린 천재라 부른다.
결국 천재란 시대를 앞서간 이들의 다름 아니다.

21세기는 20세기 천재들이 걸었던 "초현실주의 시대"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무의식 시대"를 어찌 살아낼지 말이다.

왜 니체인가? 왜 수많은 근,현대 예술가들은 꼭 니체에 걸려 넘어지는걸까?
니체는 당당히 종교와 맞서 인간에게 드리워진 세상 모든 굴레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무의식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바로 그 경계를 어찌 넘어야할지 길을 열어주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21세기는 니체만으로도 부족하다. 초현실주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붓다
필립 코틀러의 마켓 3.0을 읽어보면 흥미로운 관점이 제시된다.
미래의 마케팅 키워드 세가지 중 하나를 "영성"으로 꼽으니 말이다.
그 책이 코틀러 자신이 쓰지 않은 책이라고까지 혹평을 받는거에 비해 한가지, 미래를 보는 눈만큼은 그게 누구였든 과히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 어느 영역에서든 리더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안목이라고 할까.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나, 아탈리의 살아남기 위하여 또한 각자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과히 다르지 않다.

내가 헤세를 흠모하고 그의 작품에 깊이 빠져있는 건,
21세기의 요소까지를 전부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호킨스의 말처럼 인류 의식이 점차 진화되어서인지 현재 우리는 스스로를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마 평범한 우리가 하는 행위가 수세기 전에는 가히 소수 천재들이나 할 법한 일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헤세라는 한 작가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분석심리학과 철학 그리고 무의식의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의 경지까지가 시대순으로 펼쳐지고 있다.
그의 작품들이 시대를 달리하여 여전히 빛나는 이유겠다.

헤세의 책 두권과 이부영 교수님의 분석심리학을 주문했다.

앞으로도 수행을 멈추지는 않는다. 그건 내 삶의 중심이고 내 영혼의 빛이기에 말이다.
그리고 헤세의 삶을 따라 이제 심리학과 철학 세계를 조금 엿보고 싶다.
사이사이, 중간중간 고전과 현대 문학작품 세계를 탐하고도 싶다.
그렇게 나만의 세계를 빚어나가고 싶다. 거기, 그 곳에 숨쉬고 있는 나의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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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1 08:31:54 *.12.196.95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33>

# Book review 85-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 철학사" 91쪽, "헤라클레이토스" 편까지 읽기 완료

헤세와 분석심리학 책을 주문했는데 도착하지 않아 대신 읽었다.
역시 나로서는 집중해서 천천히 읽어야 할 책..

아무래도 지금은 헤세와 칼 융에 마니 빠져있기에 책들이 도착하면 일단 이 책 읽기는 보류해야 할 것 같다.
헤세와 융 관련 책들을 끝낸 뒤 니체를 중심으로 서양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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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2 07:26:51 *.12.196.60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34>

# Book review 87- 이 부영의 "분석 심리학" 1장 읽고, 인용문 필사 완료

헤세를 읽다보니 자연히 칼 융에 끌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칼 융은 직접 만나기에 그리 만만한 학자가 아니다.

말년에는 "볼링겐의 은자"로까지 알려진 무의식 세계를 심리학의 장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장을 연 현자에 가까웠던 분석심리학자, 칼 융. 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이 부영 교수의 "분석심리학"을 시작하였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학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 - 칼 융"

이처럼 의식 세계를 무의식이라는 대양 위에 떠 있는 한점 섬으로 보고
일생을 무의식 세계를 탐구하고 연구했던 칼 융.
그 엄청난 세계에 첫 발을 디디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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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심리학 , "1장 역사적 배경" 요약정리: 앨리사의 북살롱 (http://blog.daum.net/alysa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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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3 08:18:16 *.118.58.44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35>

# Book review 87- 이 부영의 "분석심리학" 3장 125쪽까지 읽기만 완료

칼 융을 읽다보니 죠셉 캠벨이 얼마나 위대한 학자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칼 융이 심리학이란 학문을 통해서 무의식 세계를 탐구하며 인간 원형에 도달했다면
캠벨의 경우는 처음부터 신화의 세계 속에 풍덩 빠져서 전 인류에게 동일한 원형이 있음을 밝혀낸 학자이다.
둘 다 인간 무의식 세계 존재하는 원형을 밝혀낸 학자들로서, 하고 있는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겹치고 있다.

결국 현자에 가까운 두 위대한 학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내 안에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참자아 혹은 본성이 존재하니, 그것의 소리에 귀기울여 그것을 세상과 조우하게 함으로써 자기실현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역시 분야를 막론하고 위대한 이들은 결국 통찰력을 지니게 되어 한 가지 궁극적인 곳에 이르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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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4 08:48:08 *.12.196.158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36>

# Book review 87- 이 부영의 "분석심리학" 5장 203쪽까지 읽기 완료

꿈이란 우리에게 무언가를 일깨워주거나 가르쳐주려는 자기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막연히 그렇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던 부분이었는데 꿈에 대해 처음으로 과학적?이랄까? , 머 그런 접근을 한 이론을 접하고보니 참으로 신기하다.

예감 혹은 직감 또한 단순한 느낌 정도가 아니라 당당히 이성과 함께 인정받는 하나이고 보면..

역시 인간의 무의식 세계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결코 외면할 수 있는 세계는 아닌 것 같다.
아니 그러기에는 너무 자주, 너무 강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나 할까..

무튼 헤세를 통해 입문하게 된 칼 융의 세계가 재미있으면서도.. 뭐랄까.. 단순히 재미라는 단어만으로는 표현하기 부족한 그 어떤 끌림이 느껴지는 분야이다.. 지금까지 수행을 하면서 희미하게 느끼던 세계를 분석심리학의 안내를 받아 그 세계가 조금씩 더 명확해지는 느낌이랄까..

책 또한 나의 내적 에너지에 따라 맞는 책을 끌어당기거나 만나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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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4 11:48:12 *.12.196.158
# "순정만화" 영화리뷰: http://blog.daum.net/alysapark

강풀 만화가 원작인 영화, "순정만화"
제목이 주는 순수함에,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그 느낌에 동화될 수 있었던 영화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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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4 13:38:28 *.12.196.158
# 더 이상 일만시간의 법칙을 믿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일만시간의 법칙을 믿지 않는다.
그냥 일만시간은 아무 소용없다.
"밀도있는" 일만시간이어야 한다.

매일은 너무 당연하다.
그러나 유형, 무형의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매일은 의미없다.
단순히 일만시간을 채우는건 아무 의미없다.

그 일만시간에 "치열한 나"가 들어가야한다.
그 일만시간을 통해 내가 이루고자 함이 무엇인지,
내가 세상을 향해 표현하고자 함이 무엇인지, 내가 세상과 만나려는 접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자기 생각이 없이는 일만시간이 채워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글을 쓰려면
미친듯이 읽고, 미친듯이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급으로 중요한 것이 다름아닌 "미치도록 생각하기"임을 깨달았다.
머리로가 아니라 정수리에서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깨달음이다.

누구나처럼 나 역시 한동안은 닥치는대로 읽고, 닥치는대로 썼다.
하지만 어느날부터 내 안의 그것이 말을 걸어온다.
형상을 따라가라고.
내가 꿈꾸는 나의 세계를 그려보고, 그 길을 따라 읽고 쓰고 무엇보다 생각하라고.

자크 아탈리가 맞다.
그냥 보내는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다.
"밀도있는 시간" 그것이 핵심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들러붙어있는 두려움.
과연 이렇게까지 빠져들어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는 있는건지..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두려움을 상대하기조차 귀찮다. 
두려운 그 녀석은 지 혼자 계속 두려워하게 내버려둔다.  
에고보다는 본성이 조금 더 강하게 작동한다. 그리하여 오늘 난 몰입할 뿐이다.

이렇게 내면의 에너지장을 아주 조금씩 깊고 넓게 키워가본다.
그렇게 만나는 내일이 어떤 내일일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난 이 길뿐이다.
오직 하나의 길을 걷고 또 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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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5 08:22:02 *.12.196.175
<먼별 샤먼의 단군일지 237>

# Book review 87- 이 부영의 "분석심리학" 6장 정신병리 읽기 완료

아무래도 다른 장들에 비해 조금 어렵고, 조금 덜 흥미롭다. 해서, 한 장만 읽고 헤세의 책을 읽었다.

# Book review 88- 헤르만 헤세의 "예술", 예슬은 사랑과 위안이다 89쪽까지 읽기 완료

이 책은 헤세 자신이 엮은 것은 아니고, 헤세의 수많은 편지, 기고글 혹은 저서 중에서 그를 탐구한 폴커 미헬스가 엮은 책이다. 헤세의 "유리알 유희"가 내 곁에 있지만, 어쩐지 그 책이 헤세의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니 조금 아끼고? 싶은 그런 느낌이 들어 우회하여 헤세를 조금 더 알고자 헤세의 예술, 사랑 그리고 인생이라는 3권의 책을 더 마련하였다.

예술에 대한 헤세의 생각을 대하다보니, 한줄한줄 음미하며 읽고 싶고, 더 나아가 좋은 글귀들은 전부 필사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분석심리학은 분석심리학대로 중요한 대목이 많아서, 헤세의 예술은 좋은 글귀들이 많아서 필사하고 싶은데, 역시나 필사는 너무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인지라 늘 고민스럽다. 일단 읽어나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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