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단군의

/

2단계,

두

  • 조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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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6일 06시 06분 등록
기록하고 남기고 싶다는 욕망. 글쓰기의 기쁨.  이제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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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일의 여정을 시작하며 
단군1기 100일. 나와 같이 고민하고 또 실천하려는 사람을 만났다. 기뻤다. 평범한 일상속의 시간속에서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한 노력과 땀 그리고 100일의 시간.   나의 길을 누군가 대신해줄수는 없지만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 또 만드려는 사람에게 "기운내" 하며 함박웃음을 지어주고 또 기다려주며 여정을 떠났고 또 돌아왔다.

여전히 길잃은 어린양과 같은 막막함과 게으름, 유혹에 훌쩍넘어가 떼를 쓰기도 하겠지만 역시 100일의 경험은 이러한 흐름을 타고 다시 앞으로 정진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힘들때는 내 주위의 동료을 보고 감동하고 또 격려하며 가다듬고 나의 길을 걸어갈수 있을 것이다. 

나의 욕망에 귀기울이기
A. 책을 좋아한다. 단지 좋아하는 것 만이 아닌 한번 읽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 꾹꾹 글로 눌러담아 기록하고 싶다. 단순히 시간날때 몇글자씩 끄적이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일정한 시간양을 토대로 규칙적으로 리뷰를 쓰고 싶다. 
B. 블로그를 쓰면서 나의 일상을 기록하고 싶다는 욕구가 항상 있었다. 특히 하영이를 키우면서 딸아이의 모습을 사진이나 동영상과 함께 꾹꾹 글로 눌러담아 남기고 싶다. 
C.누구보다도 온라인 가계부를 잘쓸 자신이 있고 그렇게 해오고 있다.  3년 이상 가계부 데이터가 쌓였으며  이 경험을 토대로 복식부기방식의 자동화된 가계부 솔류션을 이용한 개인 재무관리에 대한 주제가 나의 첫번째 집필하게 된 책의 주제가 될것이다. 이를 위한 준비를 할 것이다.  
D.수영자세의 마스터등급. 아마 300일부터는 교습이 아닌 자유수영으로 발전하기 위한 전단계를 착실하게 밟아 갈 것이다. 

새벽시간과 활동
A. 새벽 시간 : 05:30 ~ 07:00
B. 새벽 활동
  책읽기(30M)
  수영(60M)
C.기타
  오후 시간 : 책읽기,육아일기(60M)  17:30 ~ 18:30
  
전체적인 목표
수영
책읽기(리뷰포함)
육아일기
가계부리뷰

중간목표
한달에 두권이상  리뷰쓰기
단군일지,육아일기 매일쓰기
가계부데이터 정리(3년치 데이타)
가계부관련서적리뷰

목표달성 과정에서 직면할 난관과 극복 방안
1. 불규칙한 퇴근
야근은 솔직히 출석체크에는 큰 영향이 없다. 하지만 건강상태에 따라서 컨디션의 급저하는 새벽기상을 어렵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200일을 100%채우겠다는 목표보다는 어느정도의 허용치를 두고 몸컨디션을 잘 조절하는것이 관건이다.
2. 시간의 분산
상당히 아쉬운 부분인데 새벽기상시간을 4:30으로 앞당겨서 수영한시간 책읽기 한시간을 할당하고 싶으나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운 난이도이다. 결국 어느정도 여유가 있는 퇴근무렵의 한시간을 고정적으로 확보하는것으로 시간을 분산하였다. 이러한 시간자원의 분산은 결국 흩어짐으로 사라질 위험이 큰데 그래서 단군일지가 매우 중요하다. 3. 주말의 시간배분
주중의 부족한 부분은 집중적으로 주말에 할애하여 진행하는게 이상적이나 육아의 현실상 역시나 주중과 주말을 동일하게 시간 사이클를 배분한다. 아이는 주중/주말 구분이 없이 항상 일찍 일어나기 때문이다.
4. 실천 난이도
난이도의 면을 고려할때 200일의 여정은 아주 어려운 부분이 아니며 300일로 가는 징검다리 역활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쓰기 위해서 해야하는 수련과정이 나의 200일 여정의 첫번째 단추가 될 것이다. 

목표를 달성했을 때 내 삶에서 일어날 긍정적인 변화
1. 핀수영까지 마스터. 이제 물속에서 물개로 거듭 태어날 것이다.
2. 300일차 본견적으로 내가 품고 있었던 첫번째 책을 쓸 기반을 가지게 될 것이다.
3. 옛날 부터 하고 싶었던 책을 읽고 리뷰하는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4. 아이의 모습을 하루 하루 생생하게 글로 표현하고 사진과 함께 조그만 책자로 만들것이다. 

목표를 달성했을 때 나에게 줄 보상
1. 100일차
PG건프라를 선물한다.
2. 200일차
내년도 캠핑을 위한 필수장비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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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1 09:27:34 *.123.145.12

10월 30일 토요일
51번째

신화의 힘5번째 리뷰

2. 내면으로의 여행
83p 우리는 3만 년 전에 살았던 크로마뇽인의 몸과 그 기관이 똑같고 에너지도 똑같은 몸을 지니고 있어요. 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동굴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우리는 똑같은 삶의 단계를 거칩니다. 신화는 시대를 달리하고 나타날 적에는 옷만 바꾸어 입는다는 것입니다. 신화의 이미지는 아득한 옛날부터 앞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전수됩니다.

85p 세상을 보되 사람들에게 메세지를 전하는 것으로 세상을 보는 견해가 중세에 있었습니다. 신화가 바로 이 메세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줍니다. 우리 인류에게 전형적인 어떤 것을 보여주니까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브 등)

86p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 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죠.

89p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만약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의 꿈이 그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는 하나 영웅은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91p  개인의 꿈이 신화의 테마를 드러내면서 순수한 신화 세계의 이미지, 예를 들면 우리 내면의 그리스도 같은 이미지를 전해올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원형적인 인격, 우리의 본질인 원형적인 '자기'를 드러낸다는 것.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생명이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이 창조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곳곳의 창조 신화는 아주 비슷한 것이지요.

97p 기독교는 삶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요. 우리가 이어받은 성서 문화를 보면, 할례나 세례를 받지 않은 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썩은 것, 아주 자연스러운 충동은 죄악입니다.  뱀은 이 세상에 죄악을 비롯되게 한 아주 못된 것, 여자는 사과를 남자에게 건네준 장보인이지요. 여자를 죄인으로 보는 관점은다른 신화 체계에서는 없어요.

98p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꿈같은 낙원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삶도 없어요.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시간과 영원히 만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 입니다.  에덴 동산 이야기는 남신중심의 히브리인들이 모신의 가나안 백성의 신관을 거부하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101p 아담과 이브는 단지 이원성을 인식했다는 죄로, 초시간적인 융합의 낙원에서 쫗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나와 살자면 대극이라는 문맥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에덴동산에서는 삶이 하나로 융합 되어 있다는 의미.

102p '너'와 '나', 이것과 저것, 진실과 허위.. 이 세상 만물은 대극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적 관념이 바로 영원입니다.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하느님이라는 존재는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105p 우리 시공의 장에 있는 만물은 '이원적'입니다. 초월성이라는 것은 초월하는것, 이원성을 넘어서는 것을 뜻합니다. 신의 화신은 남성으로 나타나기도 혹은 여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우리 자신의 바로 신의 화신입니다.

에덴 동상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나위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입니다. 이 원초적인 중심에서 인간의 의식은 서로 다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106p '나'만으로 외로움을 느끼면 '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이 '자기'는 둘로 나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상이 비롯됨이요, 한 쌍의 대극이 비롯됨입니다.

107p 인류가 놀랍게도 공통의 신화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있다는 점은 신화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한가지 설명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 같다는 점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므로 인간의 공통되는 바탕위에서 융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또다른 설명은 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로 정착하면서 신화가 확산되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109p 내 생각으로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화를 다루는 것은 신의 실재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지침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110p 사람들이 창조신이 온 세상에 실재하고 있음을 아는 것은 그 해답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이 곧 창조 자체이고, 개인이 그 피조물이라는 것은 안다면, 하느님이 남자든 여자든 바로 그 개인 안에 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태초에 하나였는데, 이 하나가 분리되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생기고, 여자와 남자가 생겼다는 아주 기본적인 신화 모티프는 도처에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이렇든  하나였던 시대로부터 쫗겨나온 것은 근원에서 멋어진 것은 우리 마음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그 끊어진 밧줄을 다시 잇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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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1 09:28:01 *.123.145.12

10월 31일 일요일
52번째

토요일 산행의 여파로 매우매우 피곤하다. 소화도 잘안되고 해서 토요일 내내 힘들었는데 그래도 일찍 잠들어서 그런지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괜찮았다. 하영이가 깨는 7시까지는 좀 여유있게 어제 찍은 사진과 하영이와 함께한 북한산 여행기를 작성중이다. 신화의 힘은 이제 5장 영웅의 모험편을 읽고 있다. 리뷰작성을 위한 필사는 2장 내면으로의 여행을 마무리 한다. 이제 다음주 주말 세미나 준비를 위한 "자신의 미래신화"이야기를 준비해야 겠다.

평생의 친우가 있는 대전으로 가는 날. 아내와 딸도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어제 산행의 휴유증으로 아내가 힘들어 해서 나만 다녀올 생각이다. 친우의 쌍둥이 딸이 태어난날 친구를 보고 딱 1년 만이다. 설레이는 일요일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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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1 09:28:20 *.123.145.12

53번째

단군일지를 들여다 보았다. 다른 부족원 처럼 꼼꼼하게 하루하루의 수련 내용을 적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새벽시간의 나의 모습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인터넷 노트에 두서없이 적어내려가던 단군일지와 리뷰글을 정리하고 단군일지에 옮기기 위해 편집을 했다. 거의 2주동안 변경연의 단군일지를 팽개쳐 두었는데 다시금 거미줄을 청소하고 싱싱하게 채워넣어야 겠다.

오늘은 휴가를 내어 장모님과 하영이를 데리고 한의원 선생님께 방문드릴 예정이다. 지난번 장모님 여름철을 무사히 보낸 일등공신이었다. 적절한 가격과 신뢰있는 이야기. 좋은 인연에 감사드린다. 이제 아내 출근시켜야 겠다. 붕붕붕. 한규에서 남편과 아빠의 시간으로 변신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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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2 05:24:11 *.123.145.12
여전히 10분이상을 딸아이를 안고 있기가 힘들정도지만.. 차분히 치료하고 있습니다. 하루이틀사이에 나을수 있는게 아니니깐요. 심연끄트러미에서 우왕좌왕 하다가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사실 심연 깊숙히 들어가 허우적 될만큼 깊이있는 절박함이 없기도 하구요. ^^) 반환점을 돌아 다시 기운을 내고 있습니다. 붕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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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1 19:33:03 *.207.0.12
어깨는 좀 어떠신지 걱정되는데요.. 그 와중에도 하영이의 아빠 역할을 즐거이 행하시는 모습 참 대단하십니다.
당연히 하영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가능한 일이겠지만서두요..^^

신화의 힘은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언제, 어느 내적 상황에서 읽느냐에 따라 그냥 단순히 읽기 뻑뻑하고 지리한 책일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폐부 깊숙이 무찔러 드는 그 무언가..

한규님. 바쁜 와중에도 힘내시는 모습 정말 크게 응원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반환점을 돈 2백일차 계속해서 화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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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2 05:30:05 *.123.145.12
54번째

어제 하루 휴가를 마치고 저녁에 장모님과 좀 마찰이 있었다. 괜히 마누라한테 투정부리고.. -.-.. 기질적으로 만만디 성향의 나와 즉시즉결 타입의 장모님의 성향은 가끔씩 이렇게 투닥거림을 만든다. 연차휴가의 하루종일 양어깨에 드리운 아빠와 사위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단군일지를 쓰고 있는 와중에 발생한 일이었다. 나도 갑자지 버럭 화가 나서 애꿎은 전화기만 희생양이 될뻔했다. 
아아 이 치졸한 쪼잔함이여. ㅎㅎ.  급격한 감정선의 굴곡은 지나고 나서 보면 웃음과 부끄러움을 남긴다.  자 우선 밥부터 전기밥솥에 앉히고  붕붕붕 단군수련을 해볼까나. (그러고 보니 출석부도 하루 지각이네. 헐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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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3 19:11:53 *.76.121.104

신화의 힘 6번째 리뷰

111p 성서에서 나오는 이야기 같은 큰 신화는 신전의 신화, 대규모의 신성한 의례를 통하여 자기네끼리, 혹은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데, 큰 신화는 바로 이 의례를 설명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은유로 알고 해석하는것이 중요하니다. 누군가가 글자 그대로 이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관념... 이것이 바로 '인위주의'라는 겁니다.

반면에 신의 나타남이 아니라 방사 혹은 응결의현상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여기서 우주는 이 원초적인 소리, 이 떨림에 싸여 있어요. 바로 이 소리가 만몰의 파편으로 이루어 시간의 장으로 보내는 것이지요.

114p 모든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116p 모든 종교에는 일장일단이 있어요. 이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일 수도 있고 저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은유적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은유라는 것을 오해하여 사실로 해석하면 뭐가 뭔지 모르기 됩니다.

예수가 승천했다 는 말은 은유적 코노테이션(내포된 의미)의 문맥에서 읽는 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겁니다.

상징을 읽으면서 기독신앙의 교리를 손상시킨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독법은 산문의 독법이지 운문의 독법은 아닙니다. 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암시적의미를 잘못해석한다면 더욱 위험하지 않을까? 미리 자신이 의도한 바대로 해석한 후에 이를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에 빠뜨릴수도 있지 않을까? 성서지상주의는 이러한 위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을수도 있겠다. 좀더 명확하게 사람들을 유일신의 교리로 데려오기 위한 좀더 명확한 신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의 세계와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겁니다.

중요한 문구이다. 지금까지 영혼은 곧 나의 자아라는 생각이 당연하듯이 받아 들였지만 나의 자아는 단순한

118p 우리는 모두 부처의 의식, 혹은 그리스도의 의식의 현현입니다. '부처'라는 말은 '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깨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혹은 부처의 의식에 다가서야 합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기독교 사고방식에서 보면 독신입니다. 그러나가 한편, 그노시스파 기독교나 토마의 복음에 따르면 기독교의 정수이기도 합니다.

재림역시 메타포입니다. 재림과 대응하는 기독교의 메타포는 '정죄'입니다. 어떤싸람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벗지 못하고 죽어 지복직관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약점을 말끔히 씻기는것) -> 환생의 모나드(물적,심적요소)는 동양신화의 주인공. 모나드는 환생할때마다 옷을 갈아 입습니다.

119p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 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깊이 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 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삶을 하나의 시련으로 보는 관념, 이 시련을 겪어야 세속적 의미의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수 있는 관념은 고등종교의 관념체계입니다.  이는 원시신화에는 없는 관념인데 영적인 힘과 깊이가 있어서, 세속적인 삶은 영적인 측면, 혹은 존재의 차원을 두루 경험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군요.

프로이트와 융은 둘 다, 신화가 무의식에서 솟는다는 걸 알고 있어요. 창조적인 글을 써본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표현을 쓰자면 '하느님'의 메세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122p 문명은 신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중세의 문명은 인간의 타락(에덴동상), 십자가 위해서의 구속, 구속의 영광을 통하여 사람을 성사에 이르게 하는 신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성당은 성사의 중심이고 성은 성당을 보호하는 세력의 중심입니다. 이 양자에서 지배권이 형성되는데,정신에 대한 지배와 육체적인 삶에 대한 지배권입니다. 이 양자는 하나의 바탕 즉 십자가의 영광이라는 바탕과 조화를 이룹니다.

123p 상징의 마당은 백성 무리의 경험을 그 바탕으로 합니다. 특정한 사회, 특정한 시공을 함께 하는 무리는 같은 상징의 마당을 공유하지요. 신화는 문화와 시간, 장소와 정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만일 상징과 은유가 예술을 통해 되살아나지 못한다면 삶은 신화에서 떨어져나가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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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3 06:23:43 *.123.145.12
55번째
어깨통증이 많이 나아졌다. 어제 3번째 치료를 받고 검진을 받는데 확실히 통증이 감소했다. 다음주 치료후에 물리치료를 받을 것이다.  다시 첫출발에 선기분. 많이 홀가분해졌다. 규치적인 생활과 몸과 마음이 나자신의 사이클에 잘 맞아들어가는 느낌.
어제 부족원들과 먼길을 달려오신 청룡부족의 여명님과 이헌님도 오셔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웃음과 숙연함과 진지함의 흐름속을 다양하게 접하였다. 머랄까 부족원들의 가진 개개인의 시간의 편린들을 듣는 것이 무척 행복했다.  운영진의 모습을 좀더 가까이 바라볼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군프로젝트의 위대함과 여기서 시간을 빼곡히 채워가는 부족원들과 나의 위대함을 느끼는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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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3 19:47:54 *.76.121.104
신화의 힘 7번째 리뷰

126p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의 시공에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사물이 아닙니다)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뿐입니다. 무엇이든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범주를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있느냐, 없느냐는 시비의 대상이 될수 없다는 겁니다.

132p 우리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살고있는세상인 금생을 사는 인드라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숲으로 들어가  명성에 빠질지, 속세에 남아  있을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 일,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면서 사는 일은 모두 다 금생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133p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이것은 석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의도입니다.

사회참여가 거세된 신화적인 측면의 삶의 모습을 한마디로 정의한 문장이다. 기본적으로 종교에 대해서도 캠벨은 사회참여나 윤리적문제에 대해 일장연설하는 것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표명한다.

134p 선생님께서는 법률도 제정하지 않으시고 전쟁이 일어나도 싸우지 않을실 겁니까?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데서 논리적으로 결론을 도출하자면 그렇지 않나요?

그건 도출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나는 이 삶에 참여하겠다. 군대에도 가겠다. 전쟁터에도 가겠다. 이것뿐입니다. 다치지만 않는다면... 이런 태도가 되겠지요. 단언은 어려워요. 그래서 의례가 있는 겁니다. 의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행위에 무리를 지어 참가하지요.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행위이지요. 우리는 이런짓을 무리지어 합니다. 그게 삶인 것이죠.

135p 우리에게는 사랑의 영역(에로스)과 전쟁의 영역(타나토스-죽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때의 이 인간은 시간의 장, 결정의 장에 놓입니다. 삶의 여러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138p 고전적인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이 물질의 세상은 무시되고 뒤에 생명만 천국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이승에서 보냈던 삶에 걸맞는 상을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생님의 말을 들어보면, 뉘우쳐 깨달을 경우 이 순간의 세상이 곧 영원이라는 확신에 이르는 것 같군요.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사실 영원은 시간과 전혀 상관이 없지요.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에서 보자면 그 천국에서 지복(더없는 행복)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지복직관에서 끊임없이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없이 지금 이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는건 어떨까요?

 

3.태초의 이야기꾼들

141p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하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142p 신화는 젊은이를 이 세상의 삶과 만나게 할 때도 신화가 끼여들고 (여기에서 종족 특유의 관념이 기능합니다) 이 삶에서 해방될 때도 신화가 개입합니다. 종족적 관념은 인류의 근본적인 관념의 껍질을 벗기는데, 이 근본적인 관념이 바로 우리를 내적인 삶으로 안내해준답니다. 이 신호는 다른 사람들이 그 내적인 삶의 길을 어떻게 갔고 나늘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를 가르쳡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 길에서 어떤 것이 선한지도 가르쳐줍니다.

145p 매장 의례는 가시적인 삶 너머에 있는 다를 삶의 존재에 대한 관념, 가시적인 차원 너머에 있는 다른 존재의 차원(우리가 사는 가시적인 삶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이라는 관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선가, 가시적인 우리 삶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 불가시적인 삶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테마를 이루는 관념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군요.

150p 세계 어디에 가든지, 수렵민은 주식이 되는 동물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식탁에 앉으면 우리는 먹을 것을 준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하지요. 이들 수렵민도 그 동물에게 감사한답니다. 의례를 통한 사냥감이 된 동물과 화해하는 행위는 뇌물이라기 보다는 상호 관계를 맺어준 친구에게 고마움을 나타내는 것에 가깝지요. 고마운 뜻을 나타내지 않으면 짐승들이 화를 내리라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155p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둘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수 밖에 없어요. 인디언과 짐승의 관계와, 우리와 짐승의 관계는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수렵민들에게 짐승은 많은 의미에서 인간을 앞섭니다.

159p 사원은 우리 영혼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성당으로 들어감으로써 사실은 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로 들어갑니다. 성당은 우리 영적인 삶의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교회인 것이지요. 주위의 모든 형상은 모두 영적인 삶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 성당의 이미지는 신인동형동성의 형태를 취합니다. 그런데 동굴에 그려진 이미지는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같은 겁니다. 형상은 부차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형상이 전하는 메세지이지요.

암벽화의 메세지는 영원한 권능의 시간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동굴은 아마도 소년을 사냥꾼으로 입문시키는 의례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냥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 동굴은 의례를 통해 소년에게 더 이상은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라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음을 깨우쳤던 그 시대 사람들의 성소였던 것입니다.

161p 원시 입문 의례에서 아이는 소년 시절에서 격리됩니다. 바로 이렇게 격리된 상태에서 아이는 할례를 당하거나 몸의 한 부분에 상처를 입는데, 이러한 시련은 곧 아이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이 치러지면 입문자의 몸은 어른의 몸이 됩니다.

162p 우리 사회에서 이지 입문의례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비록 방법상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영화 화면이 보여주는 상상력의 세계는 입문의례에 상당하는 어떤 메세지를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하지만 의례를 집전하는 사제자의 책임 의식 같은 게 그 같은 영화에는 없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의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이 불량배의 동아리가 되는 등의 형태는 결국 입문 의례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신화는 사회적 의례, 종족적 의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신화가 없어지면서 이런 의례가 없어지게 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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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7 18:38:44 *.207.0.12
한규님, 어제 세미나에서 뵐 수 있어 좋았습니다..^^

어제 한규님의 십년 후 신화를 들으며 느낀 점들 잠시 여쭙고 싶어 방문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규님의 미래 모습 중에서 하영이와 대화를 나누는 아빠의 모습에 대한 부분이 제게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마도 하영이에 대한 한규님의 사랑이 각별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요..

그런데 되돌아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런 느낌이 듭니다.
여지껏 한국 사회의 가족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들은 크면서 서로를 서로가 자연스레 이해하는 관계들이다..라는 명제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아마도 사회가 남녀역할에 전통성을 지니면서 그리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만해도 아빠가 절 예뻐해주셨던 기억은 있지만, 대화를 마니 나누거나했던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녀들의 교육 문제만해도 거의 전적으로 엄마들의 책임이 더 크게 작용하니까요.

그런데 하영이가 십대 소녀가 되고, 이십대 숙녀가 되면 그 때도 그러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은 엄마들도 맞벌이를 하는 집안이 많다보니, 한국 문화에서 전통적으로 여겨지던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들의 관계도 서서히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요..

특히, 한규님처럼 온라인쪽 일을 하시는 분들은 지금의 아이들이 자라면서 어쩌면 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친구들의 경우, 자녀들을 이해하기 위해 혹은 자녀들의 온라인 스킬을 따라잡기 위해 부모가 역으로 온라인 기술들을 익힌다는 이야기도 자주 듣는 이야기들 중의 하나입니다.

정리하자면, 한규님이 어느 날 자신의 미래를 위해 변경영이란 곳의 문을 두드리고 내면탐구를 통해 천복찾기와 천직찾기를 실험합니다. 그러면서 어제 세미나에서 한규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 과정에서 느낀 점들을 하영이가 커갈수록 주고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천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그것을 천직으로 연결하여 언젠가 1인기업가 시대에도 당당히 홀로서기를 하려는 아빠가 딸에게 주는 혹은 딸과의 관계는 여늬 아빠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 것인지.. 이것이 과연 지금까지 전통적인 한국 사회의 아버지와 딸과의 관계와 어떻게 다를 것인지.. 충분히 한규님 다음 세대의 젊은 부모들은 관심이 갈 수 있는 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규님께서는 차근차근 쌓아가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회사와 가정 그리고 스스로의 자기계발의 트라이앵글 속에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면서 차곡차곡 쌓고 있는 그 무언가가 어쩌면 후배 부모님들에게 그리고 하영이와 그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이 하나씩 둘씩 쌓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역시나 그저 저의 느낌이요 생각이니 그냥 참조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
너무나 열심히 노력하시는 한규님 모습을 뵈며 자연스레 흘러나온 생각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어쩌면 연구원 시절 서로의 발표를 듣고 코멘트를 주고받는 것이 몸에 베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함께가는 동지로서 제 글에 가끔씩 남겨주시는 댓글을 읽으며 저 역시도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 길 지금처럼 늘 웃는 모습으로 걸어가시기 응원하겠습니다.
어제는 잠이 조금 부족한 모습으로 등장하셔서 속으로 맘이 참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날들 속에서이 노력인만큼 결코 헛되지는 않을거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럼 남은 2백일차도 변함없이 홧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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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05:39:10 *.123.145.12

11월 4일 목요일

56번째

같이 신화의 힘을 읽고 있는 경인님과의 대화를 통해  부족장님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경인님은 머랄까 이미 준비된 그러할 것이다는 마치 사명을 받은 사람처럼 변경연에 들어왔다. 그리고 꼭 맞춤 옷과 같이 변경연의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참여하고 있다. 이제 마지막 관문인 연구원 지원만이 남은 상태.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많은 것을 얻는다. 감사한 인연이다.

메신져로 이야기 하다가 스타워즈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서로간의 아이디어를 통해 부족원들에게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정말 정말 신나고 가슴뛰는 느낌이었다. 내가 가진것을 남들에게 공헌할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즐겁고 설레였던 것이다. 무선인프라와 컨텐츠창고의 구축이 완료되면 부족원들에게 공지하고 나누어 줄 것이다.  그와의 대화는 항상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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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05:40:07 *.123.145.12
11월 6일 금요일

 57번째

"신화의 힘" 읽기는 거의 마무리 되었으나 아직 필사작업은 속도가 많이 나지 않는다. 이미 밑줄을 그어 두었으나 오히려 긋는 작업보다 필사작업이 훨씬 더디다(당연한거지??) 필사를 할때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질문과 "아.." 하며 무릎을 치며 고개의 끄덕임. 마구마구 외부에서 혹는 내부에서 밀고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가끔 필사를 하다가 그냥 공상에 빠지는 경우도.. (그래서 더욱 진도가 느려지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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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05:41:13 *.123.145.12

162p 우리 사회에서 이지 입문의례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비록 방법상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영화 화면이 보여주는 상상력의 세계는 입문의례에 상당하는 어떤 메세지를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하지만 의례를 집전하는 사제자의 책임 의식 같은 게 그 같은 영화에는 없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의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이 불량배의 동아리가 되는 등의 형태는 결국 입문 의례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신화는 사회적 의례, 종족적 의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신화가 없어지면서 이런 의례가 없어지게 된것입니다.

164p 생명이 여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여자는 이 생명을 낳고 먹여서 기릅니다. 여자의 힘은 대지의 여신이 지닌 힘과 동일시됩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이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소년에게는 이런 일이 저졀로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외부의 힘이 소년을 성인으로 입문시키고 개인보다 위대한 무엇인가를 섬기게 하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서 신화적 상상력의 기능이 시작됩니다.

사원굴에 그려져 있는 이미지는 온통 남성에 관한 이미지 뿐. 왜 여성은 없을까? 이 원시시대 여자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지만 남성에 비해 여성은 스스로 깨닫는것으로 저절로 일어난다고 생각된다. 소년과 다른점이라고 한다.

164p 암벽화 시절 가장 중요한 테마는 죽음의 신비. 이것으로 인해 삶의 신비에 균형이 생깁니다. 두번째는 죽음/삶의 신비와 동물세계와의  관계, 그리고 먹을 것을 손에 넣는 일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바로 아이를 어른으로 변모시키는 일일테지요.

165p 고대의 의례가 지닌 중요한 역활은 개인을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 한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한 모듬살이의 구성원으로 통합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서구 문명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켜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 먼저 개인 먼저가 되어버렸지요. (모)

서구문명의 특징은 개인화 뿐만 아니라 의례를 통해 유입되던 최근까지 다른 문화권에서 영적인 지식들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카톨릭교회에서 조차 전례(일정한의식)언어로 번역되는 미사까지도 상당히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합니다. 미사를 뜻하는 라틴어는 원래 우리를 일상성의 마당에서 '몰아낸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사제와 더불어 우리는 비로소 외계를 향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성소를 돌려놓아버렸어요. 이들은 의례의 기능이 우리를 늘 있었던 자리로 감싸들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밖으로 내던지는 데 있다는 것을 잊은 것지요.

의례가 죽었음을 일갈하고 있는 대목이다. 의례를 소중히 재현시켜 그 가르침이 살아 있어야 한다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의례는 대부분 죽었다는 것.

 167p 인간은 환경에 반응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환경에 반응하지 않는 문화 전통이 생겼어요. 이 문화전통은 우리의 현대문화와, 새 우주관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동화시키지 않아 왔어요.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환경에 반응하지 않는 문화전통은 기원전 1000년에 다른데서 왔다.. 이게 무엇 뜻하는 걸까? (구약을 말하는건가?)

168p 전통문화의 관념과 시는 민중에게서 온다? 그렇지 않아요. 전통 문화는 엘리트의 경험,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들의 귀는 우주의 도래에 열려 있어요. 이들이 민중에게 이야기하면 민중의 반응을 통해 작용과 반용이 상호 작용을 합니다.

173p 블랙앨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내가 본 환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성스럽게 바라본 세계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런 산은 도처에 있다"

이것은 진짜 신화의 깨닫음입니다. 그는 국지적 숭배상인 하아네이 산과 세계의 산이라는 암시적 의미를 갈라놓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산은 '악시스문디' 즉 모든 사물의 회전 중심인 극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175p 수많은 철학자에 의해 되풀이된 신에 관한 정의가 있습니다.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구체라고 하는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도처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화적 자각일 수 있습니다. 메타포, 현실의 이미지.

우리가 이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이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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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05:42:25 *.123.145.12

11월 7일 토요일

58번째

내일 발표할 개인신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데. 잘 안된다. 마무리가 안되야. -.-.. 그러다가 팟하고 떠오른 이미지. 3-4일을 계속 끙끙 앓던 것이었는데.. 술술 흘러나왔다. 왜그랬을까? ㅎㅎ. (꼭 마감직전의 아슬함과 긴장감이 주는 선물같다는 느낌.) 재밌는 경험이었다. 내일 세미나에서 다른 사람들의 개인신화를 들으면서 다시 업데이트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의 힘"도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정말 나에게는 대단한 책.

나의 개인신화
20년전 그는 처음으로 길을 선택한다. 남이 만들어준 길이 끝났기 때문이다. 대학졸업장이외에 무엇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었지만 그는 그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재능의 한계를 체험(프로그래머의 능력)하기도 했지만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을 포기할수는 없었다.  결국 시스템어드민으로써 프로그래머를 지원하는 IT의 생태계를 만드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10년의 시간이 흘러 10년전 그는 두번째 길을 만들었다. 변경연과 단군프로젝트의 만남. 20년전 가슴을 뛰게했던 설레임을 넘어 내재되어 있던 그자신과의 대화. 그는 알수 있었다. 탐구심과 학습자의 재능은 그가 알고 배우고 싶어하는 이들의 지식과 능력에 삐지기도 하고 부러워했지만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에너지와 기운이 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1년간의 새벽수련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만의 성소를 만들고 가꾸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한다. 그는 다짐한다. 앞으로의 10년은 다시 한번 진정으로 좋아하는 가슴을 뛰게하는 것을 다시한번 찾고 다듬는 시간이다.

회사와 가정을 오가는 10년 시간동안 하루에 새벽 두시간 그의 성소에서 자신과의 대화를 그리고 그를 이끌고 있는 책과 저자와의 대화를 쌓아갔다. 가정과 회사의 의무와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책을 읽고 그의 생각과 리뷰를 빼곡히 채워 갔다.

10년이상 쌓아온 가계부를 작성한 경험을 토대로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일기쓰기 책을 내었고 IT에 진입하는 신입들을 위한 기술가이드 책을 내었다. 종교생활을 시작하는 하영이와 아빠와의 대화를 엮은 책을 내었으며 10년간 그의 수련, 변경연과의 만남을 통한 자신의 혁명에 대한 책을 세상에 내어놓는다.

10년간 그의 재능을 세상에 나누어주고 기쁨을 누리는 것이 가슴을 뛰게하는 첫번째 임을 깨닫는다. 여전히 가슴뛰는 설레임과 혈기왕성한 호기심을 가슴에 품고 20년전 처음으로 선택한 길을 이어 이제 그는 두번째 길을 선택하였으며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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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05:44:09 *.123.145.12
11월 7일 일요일

59번째

토요일 세미나는 잘 다녀왔다. 식구들 특히 아내의 이해에 황금같은 토요일 하루를 온전히 사용할수 있었다. 하루의 동일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토요일은 정말 기억에 남을 나의 시간이었다. 일요일은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 쓸고닦고 손님맞이하고 또 하영이와의 눈맞춤. 일요일은 그렇게 째깍째깍 나의 곁을 지나갔다. 하영이의 웃음과 관계속에서 내가 고쳐야 할점 아내와의 대화. 즐거운 일요일 오후 한때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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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05:45:08 *.123.145.12
토요일 3차  세미나 후기

아내와 하영이에게 먼저 고마움을 전해야 한다. 아빠의 토요일을 흔쾌히 허락해준 식구들 덕분에 마음놓고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솔직히 개인신화의 작성은 3-4일 동안 지지부진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좀 힘들었는데 어제 갑자기 섬광처럼 흘러나오더라. 그래서 완성을 짓고 세미나 장소로 출발했다. 신화의 힘 책 리뷰를 3차 세미나 이전까지 완료하는 것도 목표였는데 나름 심연의 주간을 거치면서 지체된것이 좀 아쉬웠다.

도착하니 운영진두분과 세명의 참석자 그리고 후에 다시 두명이 도착하여 7명이 진행하였다. 좀더 많은 분이 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지만 치열한 주말의 개개인의 시간속에서 불가항력으로 오지 못하여 아쉬워하는 부족원들의 다양한 사연을 보면서 7명의 세미나 속에 들어간다.

단촐한 참석자로 인해 여유있는 시간속에서 승완님의 프리젠테이션은 진행되었다. 레전드 부족장님의 환상적인 PPT를 참석자들은 엄정하게 평가하였다.(??) 프로젝트의 해상도가 낮아서 선명한 PPT 본문이 명확하게 투사되지 못하였다. 버럭..~~ 특히나 검은색 바탕의 붉은 색 글씨는 모니터와는 달리 프로젝터를 통한 이미지에서는 최악의 가독성을 보여주고 말았다.  그래도 이미지로 명확하게 한장면씩 찍어주는 PPT는 좀더 온전히 강사의 말과 함께 어우러져 컨텐츠가 전달될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런 PPT는 처음 접해서 그런지.. 정말 새로웠다. 맨날 PPT를 매뉴얼 작성용으로만 사용했으니 나로선 새로운 경험이었다.

변경연의 책들은 다독이 불가능해요. 라고 투덜거렸더니 수희향님은 웃으면서 그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또 이런 말에 왕 감동에 힘을 얻는다. 신화의 힘 필사하면서 정말 많고 많고 많은 양에 일주일이면 가뿐하게 한권씩 리뷰하리라 마음먹었던 목표가 좌절하는것을 똑똑히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연에서 부족장님과 출석부기지와의 티타임을 통해서 글이 안써진다면 필사의 방법을 적용해보라는  사부님의 말씀이 그렇게 나에게는 폭포수 처럼 떨어졌으며 이를 실행에 옮기면서 지금은 심연을 빠져나오고 있다는 경험을 나누었다.

200일차를 지나오면서 새벽수련은 과연 개개인마다 어떤 모습일까? 세미나의 시작은 이러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제 200일차가 되었으니 자신의 천복을 찾았으며 그 주제를 깊이 깊이 계속 연마하여 천직으로 삼는 300일차로 가야하지 않을까?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좀더 내용을 좁혀서 지금 새벽수련을 하고 있는 주제는 명확하고 단일하게 변하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순히 출석체크가 여전히 주가 되는 새벽활동인가?

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갈등이 심연의 주요한 테마가 될수 있다. (내가 그랬거든.)

승완님의 체험담이 나올 차례이다. 자신은 오히려 100일차 수련이 더욱 집중도가 높았다. 200일차는 좀더 깊은 주제로의 탐구와 실천을 기대했으나 결국 새벽수련의 주제를 변하고 또 다시 세우는 작업을 반복했다. 원대한(??) 목표를 삼고 실천하고자 했지만 필살기에서도 강조하듯이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주제를 새벽에 억지로 하려고 든다면 새벽수련은 단순한 출석체크용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는 경고. 나또한 너무도 잘 맞고 좋았던 수영을 부상(??)으로 중지하게되면서 꽤 많은 갈등과 "이젠 또다시 어떤걸 해야하지?"라는 갈등을 오랜동안 했었는데.(이게 심연의 직접적인 계기이기도했다) 다시 찾고 시도하고 체화시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새벽수련의 시간을 채워가야 한다는 맥락을 이해한다.

또한 수희향님의 메세지는 천직으로 가기위한 천복을 찾지 못한 것은 물론 개인마다의 차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200일차에서도 여전히 단순한 새벽시간의 출석체크 혹은 분산된 주제로 에너지를 흩어트리는 것, 그냥 새벽을 보내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 주제의 변화와 적용을 계속 모색하면서 작은 단위의 성취와 성공을 경험하는 것이 200일차의 주요한 테마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승완님의 프리젠테이션은 어떻게 심연을 빠져나올 것인가에 대한 것이 주요한 테마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조금 어려운 개념이지만 동시성의 법칙까지 다루었다.

심연은 거부하거나 부정하거나 도망친다고 떨쳐버릴 수가 있는것 아니다. 이런경우 결국은 다시 더욱 거대한 물결이 되어 훗날 나를 집어삼킨다. 꿈의 추구는 항상 헌신성을 요구한다. 즉  실패를 견디는 태도이다. 이 실패와 시련을 통해서 그렇지 않았더라면, 심연을 겪지 않았더라면 배우지 못했을 것들을 선사하기 위함이다.

이게 이번 세미나의 가장 큰 핵심 KEYWORD가 아니었다 싶다. (세미나참석 안하신 분들은 요것만 딱 외워두셔도 많은 도움이 될꺼에요. ^^)

 

승완님의 이 심연에 대한 명쾌한 정의와 헌신이라는 개념은 좀더 확장해 보면 내가 실제로 생활속에서 겪고 체험하는 것과 놀라우리 만큼 일치한다. 단군수련에서 그러하며 집안 내에서의 장모님과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이를 체득하고 있다. 사람, 상대방 자체에 대한 갈등이 아닌 관계에서 갈등 또한 반드시 겪어야 하며 겪을수 밖에 없으며 이 갈등을 지나가면 다시 한뼘 자란 나를 보고 느끼기 때문이다. 단군수련을 하면서 심연을 빠져나오면서 느끼는 에너지와 힘 또한 실패를 견디는 헌신의 태도 끝에 얻을 수 있는 나자신에게 주어지는 선물과 같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심연, 다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맞딱트릴수 있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동시성은 아래 레퍼런스에 나와 있는 조셉자보르스키의 " Synchronicity-리더란 무엇인가?" 의 책을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접근이 가능할 것 같다. (근데 이 뜬금없는 원서제목과 우리나라책의 제목이란.. )

신화의 힘과도 일맥상통하는 책인데. 개인의 소명 즉 나의 질짜 삶을 찾아보겠다는 내면의 부름을 깨닫는 순간 영웅의 여정을 진행한다. 절박감. 그리고 전심전력을 다하는 꿈의 추구. 그리고 여기서 느낄수 있는  바로 우리가 자각하는 의지의 힘을넘어서는 강력한 힘이 우리를 돕는 다는 것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이다. 단순히 인과관계가 전혀없는 의미가 있는 우연의 일치라는 동시성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을 규정하는 법칙??정도로 이해한다. 내가 세미나를 통해 이해하기로는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은 구체화되어 어디에 있다라는 존재라기 보다는 어떤 장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신화의 힘에서도 언급되지만 중요한건 존재의 실체가 아닌 관계의 장의 개념이다. 인과관계가 없지만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끌어당김으로 이러한 관계의 장을 통해 에너지를 주고 받는다. 혹은 자연스럽게 열린다. 라는 개념으로 처음 접한 개념을 정리했다. 승완님도 말씀하셨듯이 어려운 개념이고 나 또한 스스로 체화하기에는 좀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내생각에는 에너지의 장이라는 개념이 어렵다면 명확하게 구체화되어 우리에게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에반게리온"을 추천한다. (승완님의 동시성, 그리고 신화의힘에서 나오는 관계의 장을 읽을때 이 애니메이션이 퍼뜩 또올랐다. 물론 여기서의 AT필드는 부정적 에너지의 장으로 표현되지만..  레전드 부족장님이라면 잘 이해하실듯.. 건담과 레고의 30대 아빠라면 에반게리온은 아마도 필수코수였을테니까 말입니다. ㅎㅎ)

 

질문. 신화의 힘에서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청소년기의 사춘기은 그때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의식에서 튀어오르는 것들에 당혹해하는 시기라고 이야기 한다. 사춘기 뿐만아니라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단계별 성장통의 시기, 방황의 시기에 신화는 적절한 사례와 해결책까지 알려준다고 한다. 우리가 실제 신화의 힘에서 언급하는 이러한 신화의 힘을 제공할수 있는 레퍼런스에는 어떤것들이 있을까요?

승완님의 답변 - 적어도 신화를 가지고 구라를 펼치어 이야기를 할수 있는 내공은 캠벨이나 역자인 이윤기씨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가능합니다. 신화라는 너무 큰 테두리 보다는 우화나 민담, 소설을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 스토리 속에서 신화가 공통으로 다루고 있는 영웅의 여정을 간파하고 의미를 끄집어 내는 것이지요.

신화의 힘을 읽으면서 확하고 펼쳐졌던 점은 나 자신의 독서도 마찬가지지만 훗날 하영이의 독서와 종교와 책에 대한 관점을 (하나의 길을) 내가 보여 줄수 있다는 점이다. 아빠가 말하는 게 정답이고 이렇게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입시용으로 읽고 그냥 버리는 책이 아니라  실제로 내면의 갈등과 인지하지 못했던 무의식의 에너지가 분출할 때 어려움이 닥쳤을 때  손을 뻗으면 너에게 길을 알려주고 도움을 줄수 있는 보이지 않은 손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승완님과의 문답시간에 떠오른 생각.

 

나는 지난번 죽음의 편지도 그랬지만 이번 개인 신화의 발표도 처음 시도하는 사람들이라면 의례이 거치는 수준의 글이었다. 세미나 참석의 좋은 점은 이미 경험을 하고 체험한 이들은 어떻게 썼을 까 하는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부분이 매우 크다. 특히나 이런 결과물은 또한 단지 글을 읽었을 때와는 정말 다르다. 이 글을 스토리를 만들어낸 당사자의 목소의 울림은 그 이야기와 함께 어우러져 스토리속을 여행하는 느낌. 수희향님이 연구원 과정에서 발표했던 개인 신화는 먼벌 샤먼의 기원을 알 수 있었으며 자신의 스토리를 어떻게 신화속에 녹여내어 만들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호금님의 버킷리스트는 2차 세미나의 연장선에서 strength finder와 함께 나도 꼭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화님의 꿈 또한 예술가들이 이룰수 있는 또하나의 풍경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꼭 이루어지길...

자신만의 북극성을 가지는 것. 이것이 개인 신화를 자신의 스토리를 지어내야 하는 가장 큰 가치임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분들도 이유불문하고 한번 지어보세요. 나도 어설프게나마 적어 보았지만 적을 때의 그 느낌.-왠지 다 이룬듯한 느낌??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때의 느낌.. 꼭 경험해보시길 부탁드립니다. )

 

뒷풀이..

간단히 보쌈집에서 식사.

술이 매우 고팠으나 적당히 자제했다. 아마 부족장이나 경인님을 비롯한 몇명이 더 있었다면 아마 나한테 잡혀서 꼼작없이 밤새 신나게 달렸을 것이로다. 하지만 승완님의 MBTI의 교육 후기는 정말 개그콘서트의 소재가 될 정도로 배꼽을 잡고 웃어야 했으며 승완님의 그 문제의 캐리어쳐 원본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레전드 부족장님의 캐리어처에 버금가는 또하나의 캐릭이 탄생할 것같은 예감이 든다. 벌써 마지막 세미나가 마쳤으며 이제 12월의 기념파티만이 남아 있다. 그 시간은 정말 유쾌하고 편안한 시간을 만들것 같다. (그것이 운영진의 방침이기도 하고.)

 

이번 단군프로젝트에 대해 수희향님과의 대화가 있었다.

100일차-200일차-300일차.. 완주의 의미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과연 300일만에 이 과정을 이루는 사상과 설계된 프로그램대로 나의 삶이 부르는 소명을 깨닫고 천복을 찾고 천직으로 나아갈수 있을까? 물론 부족원중에는 그런 분들이 계시지만 나처럼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이 있다. 이사람들에게 300일차의 수련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냥 단순한 참여? 새벽수련 또는 새벽기상을 300일 동안 완수했다는 자부심?? 그것보다는 좀더 큰, 좀더 깊은 깨달음(심신의 체화??)이 함께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바로 300일차를 넘어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자기 스스로 만들고 구성할 수 있는 체험과 기술과 사상을 이해하고 체득했다라는 부분이 될것이다.

 

레퍼런스

책 : 조셉자보르스키 - Synchronicity, 데미안, 헤르만헤세

영화 : 글랑블루(영화사상 전무후무한 500이상의 의식수준을 보유한 작품). 청설(hear me), My name is Khan, good & bye, 스타워즈 에피소드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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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05:52:31 *.123.145.12
60번째
오늘 새벽은 4시 30분에 눈이 번쩍 뜨였다. (워낙많이 잤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아마 9시쯤 부터 자기 시작했을껄? ㅎㅎ)
단군일지 정리하고 육아일기 쓰고 이제 곧 출근준비를 해야 할 때이다.
가만이 뒤돌아 보면 단군수련의 핵심인 "하루두시간"의 명제를 잘 지키지 못한 것 같다. 역설적으로 정말 매일 두시간씩을 온전히 나에게 줄수 있다면 이것이 일년이고 이년이고 차곡히 쌓아간다면 정말 굉장한 경험이 될것이라는 느낌이다. 마치 복리식 저축처럼 눈덩이 처럼 불어나는 자신과의 대화 그리고 결과물들.  이 수련을 하면서 점점더 욕심이 생기는 것은 아마도 200일도 채 않되었지만 벌써 느끼는 그러한 감정들 때문일 것이다.
시간의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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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9 06:21:31 *.123.145.35
육아일기-하영이와의 북한산 등반.
하영아 지난번 북한산 정상(대동문 ㅎㅎ) 을 눈앞에 두고 하산해야 했던 거 기억나지? (한돌이 안지났던  2009년 10월- http://hkmade.egloos.com/4259374) 이번에 다시 한번 올라가보자 꾸나. 이번에 목표는 바로 저기 북한산 원효봉. 아 근데 그전에 있는 요상하게 생긴 바위가 좀 수상하구나. 자아. 이제 한번 올라가보자아아~.
(사실은 저길 올라가려고 했던 건 아니고 그냥 둘레길만 돌아보자고 하다가 엄마/아빠의 빗나간?? 승부욕으로 인해.. "여까지 왔는데 봉우리 하나는 올라봐야지 하며 올라갔던 곳이 바로 저기였다. OTL)

흠 북한산 둘레길 정도야 하영이에게는 거의 산책수준. (그런데 정말 산책수준이다. 연일들 끼리 혹은 하영이와 같은 아이들과 부모들끼리 찬찬히 걸으면서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 좋은 코스)

요즘 하영이는 v자 연습을 다시 하고 있다. 엄마의 특훈. "하영아 v자를 할때는 얼굴앞에서 하지말고 이렇게 손을 번쩍 들어서 v자를 하는 거야."

이번 산행의 나만의 베스트컷. 나뭇잎의 빛이 이쁘게 들었다. 가족snap사진은 카메라의 기술적인 능력보다는 찍는 사람의 감성. 그리고 추억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얼마전 DSLR을 지르신 팀장님께도 말씀드린 내용인데.. 일단 셔터를 누르시라.. 이게 가족사진의 정답..)

이제 본격적인 원효봉 등반길. 중반이후 졸려서 엄마에게 업히기 전까지는 (이때 업을 때도 엄청난 설득이 필요했다) 절대로 업거나 안기를 거부했으며 자신이 직접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 했다. 꽤 험한(??) 코스였음에도 씩씩하게 걸어간다.

잠시의 휴식. 옆에 하영이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는 평범한 나뭇가지가 아닌. 물고기를 잡는 낚시대이다. 상당히 소중한 악세사리.

여기가 아마 원효봉 등반길의 약 3/1지점에서 주차장을 찍은 광경. 역시 산행의 맛은 저런 원경화면을 감상하는게 첫번째 일것이다. 오른 사람만이 느낄수 있는 현장감.

꼭꼭 숨어라. 하영이를 찾아보세요.  첫번째 사진에서 본 바위정상에서 찍은 사진. 결국 하영이와 아내는 이 바위꼭대기에 오르지는 못했다. 아이를 업고 오르기에는 너무 위험한 코스라. 시도하다가 결국 아내가 포기. 결론은 원효봉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원효봉에 오르기위해서는 이 바위꼭대기를 지나 다시 올라야 한다.)  이 지점이 하영이의 최고 북한산 등반 기록이 되겠다.

바로 뒷배경으로 보이는 곳이 바위꼭대기 지점. (등반은 확실한 사진 이미지 증거가 필요하다. 그래서 꼭 남겨 둔다. 유명한 산악인들도 이것때문에 곤욕을 치르기 않았던가..)

2009년 가을 대동문을 앞에두고 하산 했던 그때 사진과 비교해보니. 정말 하영이가 많이 컸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같이 노는 모습을 보면 체격이 많이 작은 편이다. 훌쩍.) 원효봉 근처의 멋진 원경을 구경하지 못한것이 아쉽긴 하지만 분명 하영이의 무의식속에는 이러한 풍경들이 잘 갈무리 되어 있을 것이다.

나의 유일한 독사진. ㅎㅎ. 딱 한장 있었다. 카메라만 아빠의 숙명이 아니겠는가. 여기 풍광 정말 좋았다. 훗훗.. 아내와 나 모두 얼마전에 다녀왔던 설악산에 비해서도 뒤쳐지지 않는다라는 감상평.

등산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아니 애아빠가 업어야지 왜 엄마가 아이를 업고 다녀??"  " 딸아이가 거부해서요. 엄마만 찾네요.. "
하영이는 아빠와 엄마를 찾는 경우가 확실한데 이번 산행에서는 아빠가 안고가거나 업고가는건 극렬 반대시위. 엄마만 찾는다. 결국 하영이를업고 원효봉 언저리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건 아내의 몫이 될수 밖에 없었다. -.-
솔직히 길이 이렇게 험할지 몰랐고.(길이는 길지 않았지만 난이도는 거의 지리산 백무동 계속 수준. ..) 은근히 아내와 나의 승부욕 발동.. (에이 3.xx km 정도인데 한시간 정도면후딱 다녀올수 있겠지..??) 결국 아내는 2,3일간 꽤 근육통으로 고생했었다.

아 그래도 집에서 차로 30분이면 이런 멋진 국립공원이 있는데.. 서울의 강북 서쪽 크트머리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머 일종의 선물??  하영이에게도 멋진 추억이 될 것이다. (사진과 부모님의 이야기로서만 전해지는 기억일테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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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9 06:20:21 *.123.145.35
61번째
새벽 기상후 제일 먼저하는 건.. 밥짓기.. ㅎㅎ.
보통 장모님이 다섯시 반정도 나오시는데 왠만하면 내가 먼저 밥을 앉힌다. 이정도는 내가 충분히 도와드릴수 있는 것이니까. 아내가 점심으로 가져가는 고구마도 밥솥에 얹히고. . 어제 아내와 얘기했다. 직설적인 장모님의 성향상 거침없이 지적을 하는 것이 아내도 정말 가끔은 화가 날때도 있는데 장모님의 육아와 가정살림의 스타일이 확고한지라.. 아무래도 여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아내나 나도 없지 않다.  그래도 우리가 좀더 노력하고 맞춰야 하지 않을까 하며 이야기 했다. 70년 이상의 스타일을 고치는 것보다는 30여년된 우리들이 적응하고 노력하면 더 좋지 않겠냐고.. ^^
처가살이의 고통은 시집살이에 비할까만은.. 가끔은 나의 주변머리 없음과 느슨한 까먹기 잘하고 정리정돈 잘못하는 유유자적 성향이 장모님과의 정면충돌이 날때는 당혹스러울때가 종종있다. 하지만 조금씩 노력하고 이야기하고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오늘아침 밥솥에 밥을 앉히면서 들었던 생각.
머라이어캐리가 올해 발표한 크리스마스캐롤을 들으면서. 신화의 힘 필사.. (이거 먼가.. 의외로 잘어울리는 조합이 아닌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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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1 18:33:45 *.124.233.1
언제나 따뜻하고 온화한 한규 형님! ^^
늘 들러주셔서 기운 불어 넣어 주셨는 데~
저는 이제야 들러 안부 전하게 되네요..
저도 아이가 생기면 형님처럼 다정한 아빠가 될 수 있겠죠?
하영이는 참 행복한 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형님과 언제 한 번 독대하여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말이죠.
참 형님 아이폰 도착 축하드리구요 ^-^
호랑이 모임 때 뵐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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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5 10:40:03 *.76.121.104

11월 10일

수요일

62번째

지난주 금요일 이후에 신화의 힘 필사하기가 뜸해졌다. 이번달 안에는 꼭 마무리 짓자. 화이팅.

4.희생과 천복

177p 환경이 이야기 짓기에 굉장한 영향을 미친다는 선생님의 글을 읽었을 때 제가 인상 깊었던 까닭은, 바로 이들이 그 풍경에 참가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 사는 곳은 성화시키는 것,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주거 환경이 빚어내는 풍경자체가 아이콘 노릇을 하는 겁니다.

지금의 아파트라는 콘크리트라는 주거환경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어떤 신화가 만들어 질수 있을까?  캠벨은 단지 인간의 손으로 만들고 다듬은 돌과 바위밖에 도시에서는 만날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자연이라는 숲에서 자라난다는 것은 아예 다른세상이라는 것.

179p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같은 시간, 여백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 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뜰떠 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183p 우리는 성지관광을 하곤 합니다. 우리 종교가 비롯된 것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땅이 다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땅에서 삶의 에너지의 상징을 찾아볼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의 전통은 그랬어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 땅을 성별했던 것입니다.

186p 보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당은 보이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거기에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이지 '쇼'가 아닙니다. 매일 성당에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화에 속하는 일입니다.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잡아줍니다. 현재와는 다르게 옛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항상 영적인 원리를 의식하고 사는 삶이었죠.

189p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신을 섬기는 종교에서는 세상이 곧 여신의 몸이자 여신 자체이지요. 이 여신의 신성이라는 것은 타락한 자연 위에 군림하는 그런 신성이 아니었습니다.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자연의 본성인 신성을 해석하는 사람은 오늘날은 바로 예술가들이지요. 이들이야 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입니다. 신화와 인강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시인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사람이라면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제대로 된 책을 읽는 겁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느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단순히 읽고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열리는 새로운 관점. 즉 삶의 깨달음을 이러한 읽기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보통사람에게 전하는 캠벨의 메세지

190p 샤먼과 사제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샤먼의 권위는 그 자신의 심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사회가 부여한 성직의 권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샤먼은 자기가 본 환상을 자기 부족을 위한 의례행위로 해석해낼 수 있습니다. 즉 내적인 경험을 외적인 경험으로 확대재생산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추측이지만 이게 종교의 시작일수 있지요.

193p 신관념은 항상 문화적 조건을 따릅니다. 선교사가 자기가 생각하는 하느님, 자기의 신을 어느땅에 들여온다고 한들 그신을 그 땅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신으로 변모합니다.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순전히 히브리적인 관념입니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네 지역 사회 신을 중시한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이런 사회의 구성원은 자기네를 보호해주는 사회에만 헌신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언제나 부계적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항상 모계적입니다.

194p 동물이 신화를 촉발하는 사냥꾼과는 달리 농경 문화에서는 식물의 세계 자체가 스승의 역활을 합니다. 식물의 세계는 생멸의 반복이라는 의미에서 사람의 삶과 동일시됩니다. 그래서 내계 지향직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숲과 농경 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새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여기에서 개체란 동물과 달리 완전한 개체가 아닌 식물의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농경문화는 먹이가 될 식물을 끊임없이 추켜세웁니다.

200p 성서문화에서는 승자가 되는 쪽, 선한 쪽은 늘 둘째아들이에요, 둘째아들은 나중에 온 자입니다. 즉 히브리인을 상징하지요. 둘째아들이 그땅으로 왔을 때, 이미 그 땅에는 맏아들, 즉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러니까 카인은 농경에 기초를 두고 있는 당신의 도시문화를 상징하지요.

201p 생명이 늘어나려면 죽음이 늘어나야 한다. 이 지구의 적도대 문화의 특징은 희생제물을 바치기에 광분해 있다는데 있다. 이는 곧 삶의 모습 자체는 반드시 삶의 행위를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수렵 문화권에서 공희제가 치러질 경우, 제물 자체는 거기에 임재한 신에게 바치는 선물, 혹은 뇌물에 해당합니다. 농경문화권에서는 그 제물은 곧 신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땅에 묻히고 거름이 됨으로써, 거름이 되어 곡물을 기름지게 가꿈으로써 곧 우리의 양식으로 돌아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목 박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게 그의 육신에서 영적인 양식이 나옵니다. 즉  그리스도 이야기는 농경 문화권에 속하던 이미지가 승화된 느낌을 줍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이원성의 과실을 먹고는 쫓겨납니다. 이렇게 쫓겨난 인간을 다시 에덴 동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나무는 영생의 나무입니다. 이 영생의 나무아래 이르러야 우리는 '나'와 '아버지'가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것, 이것은 많은 종교가 겨냥하는 것입니다.

204p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부처. 이것은 같은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문 앞에는 '그룹'이 있는데, 이게 먼가요? 절에 가보면 두 문지기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이것은 두 대극, 즉 공포와 욕망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쫒겨난 겁니다.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포와 욕망이라는 한쌍 의 대극을 초월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깨달음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우리 의식과 동일시합니다. 이런 삶에서 육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아요. 수레가 아닌 수레에 실려있는 것과 의식을 동일시해야 합니다. 의식, 수레에 실려있는 것이 곧 신입니다. 농경문화권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표면적인 이원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동일성 관념입니다. 잘 짜여전 예술 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아, 하고 감탄하고는 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까닭은 이 작품이 우리  삶의 질서를 드러내고, 종교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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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5 10:40:30 *.76.121.104

11월 11일

목요일

63번째

변경연에서 집필하고 있는 호랑이프로젝트의 실험키트를 작성하였다. 꽤 생소한 개념이고 작성또한 만만치않은 글쓰기가 요구되는지라 2일전부터 고민만 거듭하다가 결국 오늘 마지막 dday가 들이닥쳤다. 역시 마감날 당일이 되어서야 대략 가닥을 잡을수 있었고 작성후에 수희향님께 보내드렸다.

 

Step 1: 인생관- 스틱스 강을 건널 때 가져가고 싶은 세 가지

여러분은 저승 세계로 건너갈 스틱스 강 앞에서 배를 타려 하고 있습니다. 사후 세계까지도 가져가고 싶은 가치관 세 가지는 무엇인지요? (가능하면 가치관의 우선 순위를 정해보십시오).

남들을도와주고싶은이타심, 무엇이든궁금한 탐구심, 더높은더많은것을알고있는이들에대한부러움

Step 2: 위 세 가지 가치관 중 두 가지를 반영하여 묘비명을 작성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가치관: 욕망 혹은 집착에서 벗어남/ 자유

아아 여전히 알고 싶은것이 너무 많은 세상을 떠나야하는 구나

Step 3: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 중, 여러분이 선호하는 직업 50가지를 나열해 보십시오. 그런 후, 10, 5개로 추려보시기 바랍니다.

첫번째로 26개 나열
서점주인,도서관사서,PC방사장,PC정비사,

PM,웹프로그래머, IT 학원강사, SW영업, 시스템컨설턴트, 정보보안전문가, 베타테스터, MS오피스강사, IT시스템분석가, 정보시스템기술사,정보검색원, 시스템운영관리자, 시스템엔지니어, DBA,네트웍컨설턴트, 정보시스템감리사,IT교육컨설턴트

재무설계사, 독서지도사, 사진가, 생활체육지도자, 증권분석가,

두번째로 9개 나열
서점주인,PC정비사,IT학원강사,시스템컨설턴트,정보시스템기술사,정보시스템감리사,시스템운영관리자,독서지도사,재무설계사,

세번째로 5개 나열
서점주인, IT학원강사, 정보시스템기술사, IT교육컨설턴트, PC정비사,

Step 4: 끝으로 3개를 선택하십시오

서점주인, IT학원강사, 정보시스템기술사

Step 5: 3개 직업과 1번에서 대답하신 3가지 인생관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직업에는 여러분의 가치관이 잘 반영되어 있는지요?

네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Step 6: 동그라미를 겹치게 그린 후, 각각의 원 안에 자신의 선택한 3가지 직업을 적으시기 바랍니다.

네에

Step 7: 동그라미 세 개가 겹쳐지는 부분에, 여러분만의 새로운 직업을 창조 (네이밍)해 보시기 바랍니다.

IT숲속의 지도를 만드는 Path Finder

 

Step 8: 창조한 직업의 네이밍/슬로건/직책을 만들어 꿈 명함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네이밍 : IT숲속의 지도를 만드는 Path Finder

슬로건 :

l  IT직업을 선택하는 전문대 또는 단기학원수료생들에게 IT전반의 숲의 풍광을 그려주는 상담

l  IT리소스를 자녀에게 어떻게 교육하고 선택할것인가에 대한 상담

l  IT전문분야의 양서를 소개하고 분야별 도서를 개개인에게 맞춤 상담

l  SNS서비스의 명암을 명확히 이해시키고 참여하도록 안내

l  IT환경의 접근(인터넷)에 소외된 계층에 대한 연결점을 이어주는 역할

직책 :
IT path finder

 

Step 9: 새로 창조한 직업과 관련하여 3~5개의 꿈 풍광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l  IT의 현장에서의 20년 경력을 뒤로 하고 그는 조그만 사무실을 만들었다. IT의 숲을 안내아는 패스파인더가 그의 직책이다. 오늘 그는 IT의 숲속으로 처음 발을 딛는 직장초년생들을 이끌고 일주일짜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좋은 학력과 큰 대기업이 아닌 OP, 벤쳐기업, 조그만 회사에서 경력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그는 단순한 IT학원에서 가르키는 교과서적인 IT운영지식이 아닌 실제 업무에서 필요한 필수스킬과 마인드를 전수하는 것이다. 각 업무파트별로 필요한 IT서적과 프리젠테이션 그리고 10년간 갈고 닦아야 하는 표준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10년후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겪어야 할 경쟁과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기위한 그릇을 만드는 작업이다.

l  이제 유치원부터 일상화된 IT기기와 SNS서비스에 대한 부모들의 혼란은 대단하다. SNS와 스마트폰의 1세대를 경험한 부모들이지만 IT 생태계에 급격한 흡수력으로 발을 내딛는 아이들에게 어떤 IT 숲길을 안내해야하지는 부모들은 시간도 정신적 여유도 없는 것이다. 아이들의 성격과 성향 부모의 가치관에 따라 위험하고 악마 같은 IT숲의 길을 피해 가족모두를 안전하게 안내할수 있는 강건한 길을 만들고 안내하는 것이다. 특히나 부모와 아이들의 일상속에서 축척되는 데이터를 (이미지,동영상,)을 어떻게 아카이브하여 집안고유의 백과사전을 만들수 있는 방법론과 도구를 제공한다. 집안마다 단순한 족보가 아닌 그들만의 백과사전을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l  IT의 숲길에 나올수 없는 혹은 잘못 길을 들어 방황하는 소외계층이 존재한다. 장애인,노인, 경제수준의 차이에서 오는 PC방을 전전하는 아이들을 위한 IT의 길을 안내하는 패스파인더. 이들에게 IT는 신세계를 열어줄수도 아니면 영원히 헤어나올수 없는 마약과도 같은 어둠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할 수도 있다. 이들에게 IT를 통해 인생의 활력을 또는 인생을 만들어가는 본을 만들수 있는 계기를 주는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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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5 10:40:51 *.76.121.104

11월 12일

64번째

금요일

목요일 저녁 세미나의 여파는 꽤 심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미나보다는 세미나 뒷풀이의 휴유증. 집에 도착하니 금요일 새벽 한시반. 그리고 취침 다섯시 기상. 출석체크하고 당연히 침대속으로 다시. OTL..  이런 체력을 가지고 어제 세미나할때 밤새도록 세미나를 할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더랬다. -.-.. 어제 성우님의 생일케잌과 뒷풀이 맥주한잔. 그리고 "덕이 없는 수석입사자 경인님의 전설"이 만들어진 뒷풀이 까지. 이제 얼마남지 않은 200일차 여정에서 또 기억에 남을 하루를 보낸다.

 

1인 기업가로 성공한 이들의 공통점. 아니 세상에 알려진 1인 기업가들은 어떻게 자신을 알렸을까? 마케팅이라는 분석을 통해 이들의 성공사례를 연구해보니.. 공통적인 요소들을 뽑아 낼수 있었다. 그 성공한 사람들이 인지하든 혹은 인지하지 못했든.. 그렇다면 이러한 사례를 좀더 체계화하여 1인 기업를 준비하는 천복을 찾아 천직으로 옮겨가야하는 예비 1인 기업가들에게 어떤 전략과 지침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에 나를 어떻게 외칠것인가? 하는 주제로 집필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첫번째 성과에 대한 필드 테스트인 셈이다.  특히나 지금 직장생활을 하는 이들이 당장 회사에서 나왔을 때 자신의 위치가 곧 1인기업가로서의 현재의 위치가 된다. 이시점에서 나의 위치는 거의 대부분 하이에나의 위치(가격경쟁력이외에는 내세울것이 없는..)에 포지셔닝을 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표범이나 호랑이가 되는 것이다. 협의의 자기분야의 프로페셔널한 세계를 구축하는 표범. 표범에서 나아가 세상에 공헌하는 세상을 좀더 긍정적으로 바꾸는 호랑이는 우리의 최정적인 목표 지향점이 될것이다. 어제 세미나의 핵심은 바로 표범과 하이에나로 가기위한 이미 필살기를 갖추었으나 세상에 나를 알리는 방법론을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이미 필자진에서 연구하고 도출한 마케팅 방법전략을 이번 설문조사를 통해 단군부족들이 생각하는 방법론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설문지의 배경이 되는 전제조건에 대한 난이도와 이해가 필진의 의도와 약간 다르게 해석되어 논란이 있었지만 3-4시간동안 각자의 현재위치와 미래의 풍광을 통해 만들어질 표범이나 사자의 모습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세상에 알리고 공헌할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토의하는 시간이었다.

사실 어떤 결론은 내는 자리라기 보다. 필진과 이번 설문조사에 응한 단군부족원들끼리의 피드백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거의 대부분의 설문조사에 응한 단군 부족원들이 왔으며 세미나 역시 마칠때까지 열띤 분위기 였다.

1차 세미나를 통해 필진들에게는 좀더 무거운?? 혹은 더 일꺼리가 많아진 느낌도 들었지만 조그만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마 이러한 내용이 300일차 수련에서는 중요한 테마가 될 것임을 예상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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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5 10:41:03 *.76.121.104

11월 13일

65번째 단군일지는 패쓰.

토요일

4시 30분에 일어났다. 그런데 5시가 되도록도무지 잠이 깨질 않았다. 책상에서 엎드려 자다가 결국 이건 아니다 싶어. 다시 잠들었다. 역시나 목요일 저녁의 여파때문일까. 오늘은 정말 너무너무너무 졸렸다. 결국 오늘 단군 수련은 패쓰. OTL

 

아내의 친구가 놀러왔다. 아내도 나도 평생친우는 대학교때 만났는데. 둘다 어릴적 친구가 없는 편이기 때문에 한명한명이 소중하다. (각각 소중한 친구는 한명이라고 해도 이상할께없는.. 둘다 별로 인덕을 쌓지 못했나?) 아내와 함께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결혼을 아주 일찍한 친구인데.. 이젠 낙향(??)하여 진주에서 살게되었다. (나의 시골집이 진주이니. 이것도 참 인연은 인연이다.)

둘만의 오봇한 시간을 위해 안방을 비워주고 난 서재에서 잠을 청한다. 아내도 나도 친우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얼굴을 보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서일까?  가끔 얼굴을 보고 만나는 시간이 그렇게 소중할 수밖에 없다. 길지 않는 시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또 다음을 기약할것이다. 친구분도 좀더 힘을 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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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5 10:41:16 *.76.121.104

11월 14일

65번째

일요일

 

205p 죽음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죽음이므로, 이 양자를 조화시켜야 합니다. 죽음과 삶의 균형을 잡아주어야 하는 것지요. 이 양자는 한 사항 즉 '존재'의 두 측면이니까요.

206p 희생에 대한 옛 관념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확연하게 달라요. 삶에서 승리한 자만이 제물이 될 수 있다.. 이게 바로 희생과 관련된 옛날의 관념입니다.

209p  신화에 관해 이해하는 가운데, 우리도 이렇게 신의 모습으로 죽을 수 있다면 영생을 얻을수 있지요. 그런데 슬퍼할 게 뭐가 있겠어요? 우리는 죽음을 원래 그런 대로 굉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어요. 죽음은 축복해야할 일이 아닌가요?

211p 쇼펜하우어는 죽음에 이를만한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줍니다. 이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닫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닫음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이러한 진실에 던져넣으라는 뜻입니다.

신곡의 끄트머리에서 단테는 하느님의 사랑은 지옥의 바닥에 이르도록 온 우주에 사무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살또한 자비의 원리를 상장하는 바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치유의 원리입니다. 보살은 깨닫음을 얻음으로써 불사를 획득한 존재이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의 슬픔에 참가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212p 그의 근본이 하느님의 본체이시니 하느님과 동등하게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음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이 말의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삶이라는 분열된 현장에 대한 자발적인 참여이지요"

212p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속량전, 혹은 벌금을 무는 행위가 아니라 화해, 즉 하나됨의 행위라고 12세기 철학자 아벨라르가 주장합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에다 삶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이 세상의 물질에 멀어버린 인간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가 된다는 겁니다.

시간이 존재하면 고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거 없이 미래를 맞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현재를 사랑해봐야 현재는 곧 과거가 됩니다. 상실, 죽음, 탄생.. 상실,죽음,탄생...삶은 이렇게 돕니다. 십자가를 명상한다는 것은 곧 삶의 신비의 상징을 명상하는 겁니다.

215p 사람들은 살아있음의 경험을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매일 직장을 오가면서는 그런 경험을 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발 물러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아 있다.. 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217p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인자(복음서에서예수그리스도가 자신을 가르킨 명칭)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연민쪽으로 열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인간의 추잡한 관심을, 고통을 나누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인간만이 지닌 가치의 세계 쪽으로 쏠리게 하기 위함이다.. 아벨라르의 십자가에 대한 설명.

율리시스(제임스 조이스) http://www.yes24.com/24/goods/2492782?scode=032&srank=2

아무리 봐도 캠벨과 제임스 조이스는 닮았다라는 생각. 박학다식의 끝판왕을 보는 느낌??  피네간의 경아를 아무렇지 않게 설명하는걸 보면..(우리나라의 피네간의 경아에 대한 리뷰글을 보면. 무슨 사약먹듯이 도전하는 독자들의 피눈물나는 후기들로 꽉채워져 있다. 난 진작에 포기..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한계일까?)

220p 사도바울의 <로마서>를 다시 읽다가 <<피네간의 경야>>를 쓰면서 했을 법한 생각을 요약해놓을은 듯한 이상한 구절을 발견합니다. "하느님이 순종치 아니 하는 모든 사람을 거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passion(열정), compassion(연민)=긍휼 . 바로 이 대목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아야 하느님의 자비가 소용에 닿게 됩니다. 순종하면 하느님에게 찬스가 생기지 않는 거에요. 루터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거든 "용감하게 죄를 지어보라"고 했어요. 큰 죄인은 연민하는 하느님을 크게 깨닫은 자인 셈입니다. 이것은 도덕의 역설과 삶의 가치와 밀접한 관련은 지니는 아주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221p 과학자들이 우리의 현실감각을 장악하는 문화권의 하느님 이미지에 갇힌 사람들이, 샤면이나 이야기할법한 이 궁극적인 바탕을 체험하는 경험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민주주의 입니다.  영적인문제에 있어서는 민주주의 가치인 다수는 항상 그릅니다. 이때의 다수는 항상 먹을 것, 살 데, 자식들, 재물 이상의 경험을 한 사람에게 귀를기울이고 마음을 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을이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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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5 10:41:45 *.76.121.104

66번째

222p 평생 하고싶은 일은 하나도 못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색간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223p 천복이 있는 영생의 샘을 찾는 이에게 충고를 해주신다면?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천복거리를 찾는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자기가 전적으로 관심을 쏟지 않던 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방향 전환의 계기를 기다니는 능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226p 산스크리스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 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가지 있어요. 사트(존재), 취트(의식), 아난다(천복/황홀)  사람에게는 나름의 깊이와 경험과 '사트,취트,아난다'와 관련된 존재의 확신과, 의식과 천복을 통한 나름의 존재 방식이 있어요. 종교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보기까지는 끝내 천복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주장하지요. 그러나 나는 살아있을 동안에도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게 곧 천복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경험은 바로 이곳에서 하는 것이지 천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것이다."

영원한 생명수는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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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7 06:19:58 *.123.145.35
67번째

아아아 삽질 대마왕.
어제 아이튠즈 동영상 넣으려다 1시간동안 헤메다.
퇴근길 지하철역에서 신용카드 사용 역사상 처음으로 카드분실.
아침 새벽수련 필사하기 왠지 낯익고 너무너무 글이 잘써진다.. (어제 했던 내용 다시 반복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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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7 09:49:25 *.218.163.100
낯설어서 그래요.
익숙만 해지면, 아이튠즈만큼 편한 어플리케이션도 없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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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2 17:02:50 *.76.121.104

11월 18일

68번째

이세상의 영웅. 대표적인 사례로 바로 여성 그중에서도 어머니. 모든 신화가 다루는 공통적인 것은 의식의 변모. 대표적으로 어머니이 즉 여성은 아이를 낳고 의식적 변모를 체험한다. 우리나라에서 남자는 군대를 통한 것이 비슷한 계기가 될수 있을까?
영웅의 행적이 과연 반다편의 사람에게는 어떻게 비쳐질까? 도덕적/비도덕적. 신화에서는 이것에 집칙하지 않는다. 도덕성보다는 좀더 큰 가치를 강조한다.
영적으로 준비된 세계와 기계적인 현대의 사회. 현대는 자신이 직접 영웅여정을 탐험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 만들어 놓은 것을 관람하며 환호하는 수준으로 격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관람.  그옛날 전쟁과 전염병과같은 아수라장과 같았던 그 시절을 지나온 과거 선조들의 힘은 바로 이러한 영웅의 여정에 있지 않았을까?

 

5.영웅의 모험

230p 오토랑크는 "영웅의 탄생신화'라는 작은 책에서 양수에서 수생동물 상태를 지나고 공기를 호흡하는 포유동물  상태를 지나 홀로 서기까지는 엄청난 심리적, 육체적 변모 과정을 거치기에,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 부터 영웅이라고 주장하지요. 그러나 이모든 과정을 가져온 어머니 역시 영웅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233p 여행에서 아기를 안고 귀환하여 이세상으로 내보내는 것도 세상을 위해 우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가 될수 있겠네요. - 그정도가 아닙니다. 삶을 미리사는 행위라고 볼수 있지요. 오토랑크는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를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존경을 받고 보호를 받아서 마땅한 영웅적인 행위로 본다고 지적합니다.

이땅의 3대 종교가, 영웅 여행의 시련은 생명의 일부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극기와 대가의 지불이 없이는 상도 없다고 가르치는데도, 우리는 이걸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 같다는 겁니다.

유태전승에 나오는 영웅은 무서운 시험을 겪어야 보상을 받지요. 여기에서 핵심은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아 낼 수 있지요.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235p 영웅주위에는 도덕적인 목표가 있습니까? 도덕적인 목표는 자기가 속한 민족을 구하는것, 특정 개인을 구하는 것, 어떤 관념을 받드는 것이 될 수 있지요. 영웅을 무엇인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것이 바로도덕적인 것이지요. 영웅의 반대편에서 보는 견해는 영웅이 이룬 업적이 지닌 고유의 영웅적 속성을 훼손시킬수는 없습니다.

236p 모든 문화권에서 설명하는 불의 기원은 설명이라고 보다는 불의 가치를 강조하는 쪽으로 치우칩니다. 불을 가져다준 영웅이라는 신화를 가진 문화권에서는 이 이야기를 도덕성과 관련시키지는 않습니다.

세계의 서로다른 모든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습니다.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서 영웅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의식하지 못하던 것, 혹은 의식에서 빠져 있던 것과 만납니다. 여기서 영웅은 그것을 만난 상태로 그것오 머물 것인지, 세계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그 홍익이 될 만안 것을 가지고 원래 있던 세계로 귀한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238p 영웅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여행을 스스로 선택하는 영웅과 그렇지 않은 영웅입니다. 전자의 영웅은 모듬살이의 필요에 반응하여, 자진해서 그 일을 하러 떠납니다. 후자역시 생소한 여행을 경험하지만, 사실 영웅에게는 그런 여행을 할 준비가 사전에 되어 있습니다. 여행은 즉 그를 등장시키기 위한 상장적인 장치인 것이지요. 환경과 조건도 영웅에 맞게 예비되어 있는 겁니다.

239p 우리자신이 모르고 있을 뿐 영웅의 기질이나 자격 같은 것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말게 하옵시고"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240p 옛날의 세계는 영웅이 대적하러 달려가나던 세계는 기계적인 세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세계, 영웅의 영적인 준비에 반응하는 세계였어요. 그런데 이 세계가 지금은 물리학,마르크시트트사회학,행동심리학 등을 통해 해석되는 순전히 기계적인 세계가 되고 말았어요. 이러한 19세기의 해석이 현대생활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를 쥐어 짜내고 만 겁니다.

241p 12세기 14세기의 전염병 구덩이에서도 사람들은 살아왔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 양식은 우리의 것보다 훨씬 더 활동적이었어요. 그러데 지금 우리는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합니다. 좌식생활 권 사람들에게는 지적인 흥분이 다소 있거나 있을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몸은 그렇지 못해요.

영웅이야기는 일종의 진통제 노릇을 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행동하게 하는 대신 구경만 하게 되는 말하자면 은근히 수동성을 부추기지 않나 싶은 것이지요. 신화의 이면에 있는 세계는 영적 가치라고는 모두 고갈되어버린 우리 세계인 것 같고요. 저에게는 불감증, 권태, 보편적인 질서로부터의 소외감....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에게 내려진 저주 같아 보입니다. 우리 심층의 갈망을 일깨워줄 영웅이 하나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242p 엘리엇의 <<황무지>>가 그리고 있는 게 바로 무기력한 삶과 강요된 삶으로 빚어지는 사회학적인 침체 상황입니다. 이런 삶은 우리의 영적인 삶, 우리의 잠재력, 우리의 육체적인 힘을 촉발할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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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2 17:23:13 *.76.121.104

11월 19일
69번째

우리가 떠나는 모험은 늘 위험을 각오. 특히나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면서 마음을 다스리기.
과학과 신화의 관계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 결국 벼랑끝으로 과학은 접근하고 있다는 캠벨의 시선. 초월적인 에너지의 원천을 과학이 실증하게 되리라는 뉘양스를 풍긴다.
사회적으로 반드시 영웅의 존재가 필요하며 국가라는 힘의 단일성의 기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 분열증상을 보이는 경향을 한곳으로 모으는 것. 모든 구성원이 인정하고 따를수 있는 그런 영웅의 정책은 어떤것이 있을까? (우리나라에서의 영웅이라면 직장 일거리 팍팍 늘려주고 집값 안떨어지게 하는 영웅??) 영웅의 여정에서 목숨을 잃기도 하지만 영웅의 목숨이 아니라 이로 인해 얻어지는 새 새명, 새로운 존재의 길이다. 석가와 그리스도는 아주 흡사한 길을 따른다.(출발,성취,귀환.) 특히 영웅의 여정 이야기중에는 아이가 어른이 될때, 어른이 맞딱트릴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다. 특히 인간 내면의 탐험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옆 바로 세계 3대종교로 대표되는 메세지는 다르지만 성인들이 걸었던 여행의 일대는 놀랄만큼 유사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243p 과학기술상으로 약진을 이루는 일이든, 이웃의 도움없이 혼자서 꾸려나가야 하는 삶의 문제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런 모험을 할때는 늘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면 추락합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244p 과학과 신화는 전혀 갈등하지 않아요. 과학은 바야흐로 신비주의 차원으로 넘어 들어고고 있어요. 과학은 머지않아 신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세계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우리가 알수 있는 것과 인간에게서 탐구가능한 범위를 초월한 것을 가르는 벼랑으로 접근하고 있지요. 우리가 신을 이야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초월적인 에너지의 원천은 분명히 있습니다. 물리학자가 관찰하는 아원자와 처럼 우리역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모든 생명이 그렇지요. 이 에너지가 만물의 에너지의 존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신화에 대한 관심을 여기에다 말을 거는 겁니다.

245p 사회에는 영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분열 증세를 보이는 이 모든 경향을 한곳으로 모아 바람직한 목표를 향하게 할 수 있는 별자리 같은 이미지가 필요한 거지요. 어떤 길을 따르는 겁니다. 국가라는 것은, 단일한 힘으로 기능하려면 어자피 어떤 목표가 있어야 할 테니까요.

247p 가치 있는 것은 드러내 삶에 유용하게 한다는 그리스인들의 정신은 결국 오디세우스를 돌아오게 합니다. 광명이라는 존재 앞에서 "아 쇠고기 샌드위치나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고방식, 이게 얼마나 참람한 겁니까? 그 광명을 내적으로 체험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그것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거나, 읽을 능력이 없었던 겁니다. 이이야기는 지상의 영웅이 최상의 광명을 획득하기 직전에 좌절한  채 지상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의 전형과 같은 겁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희비가 엇갈리는 오디세우스 이야기에 대해 "이작품의 비극성은 삶의 아름다움과 미덕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데서 마련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끝또한 잿덩어리이다."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헛되도다.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런 끔직한 말이 있지요. 하지만 이 말에서도 모든 것이 헛된 것만은 아니랍니다. 이런 말이 나오는 순간은 헛된순간이 아니라 승리의 순간, 열락의 순간인 것이지요.

248p 많은 영웅이 목숨을 내어놓지요. 그러나 신화는 내어놓는 목숨에서 새 생명이 비롯된다는 메시지도 전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영웅의 목숨이 아니라 새 생명, 새로운 존재, 혹은 육화의 길입니다.

전세계적으로 공통되는 전형적인 모티브 중에 괴물을 죽이는 모티프가 있어요. 이러한 신화는 광야에서 위험한 삶을 살아가면서 나름의 세계를 꾸미던 선사 시대의 경험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249p 석가는 그리스도와 아주 흡사한 길을 따릅니다.(출발,성취,귀환..) 차이가 있다면 석가가 그리스도보다 5백년 쯤 전에 살았다는 것밖에 없어요. 이 두 구세주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비교해보세요. 직제자, 혹은 사도의 역활이나 성격까지 비슷합니다.

251p 하나의 원형적인 영웅상이 많고 많은 사람에 의해 모든 지역에서 베껴졌습니다. 전설적인 영웅은 큰 일을 한 사람, 무엇을 세운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땅에서 새로운 것을 싹 틔울 잠재력이 있는 씨앗을 찾아 떠납니다.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 도시들은 살던 곳에서 탐색의 여행을 떠나 무서운 시련이나 모험을 이겨낸 영웅들에 의해 세워집니다. 우리 삶(낢의 삶을 시늉하는 것이 아닌 우리만의 삶) 역시 탐색의 여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영웅의 이야기가 모두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야기가 원형적인 모험(아이가 어른이 되는 이야기, 혹은 성인으로서 살게 될 새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다룬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면 그것은 중요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도중에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 본보기가 되어줄 테니까요.

동화는 재미를 위한 읽을거리예요. 동화는 아이들의 신화에요. 각 나이에는 그나이에 어울리는 신화가 있어요. 나이를 먹게 되면 튼튼한 신화가 필요해집니다.

254p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마야'의 신화가 가슴에 와닿죠.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는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토마스베리 (위대한과업 : http://www.yes24.com/24/goods/3253400?scode=032&srank=2)

작가 토마스베리는 이것이 바로 이야기가 밝혀내려는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라는 것은 만물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 우리가 삶과 우주에, 우리의 기본적인 가정과 근본적인 믿음에 부여하는 줄거리라는 것입니다.

이러안 이야기가 바로 영적인 탐색을 다룬 이야기에요. 우리의 본 모습은 우리 내면에 있는데 이 내면에 대한 탐색이 바로 내가 40여년 전에 쓴<<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 담으려고 했던 주제랍니다. 신화가 지니는 우주론 및 사회학과의 관계는 아직 끝난게 아닙니다.

255p 기원신화를 접어두고서라도 인간의 내면 탐색에 관한 신화로 가서 깨달음의 단계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어떤 시련을 경험하게 되는지, 어른 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읽어보세요. 이야기는 우리 곁에 없는게 아니라 이렇게 있어요. 종교에 있어요.

258p 내게는 일이 있기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거에요.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욕망이 없다는 죽은 거야 언제 죽어도 좋아요. 그리스도와 석가는 죽음 너머에 있는 구원을 찾아서는 광야에서 돌아야 제자들을 뽑고 가르칩니다. 이들의 메세지는 제자들을 통하여 세상에 전해집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모세,석가,그리스도,모하메드)의 메세지는 다 다릅니다. 그러나 이들이 경험한 환상 여행은 동일합니다.

259p 민족 영웅, 혹은 지역 영웅은 자기가 속한 민족이나 지역을 섬기지만, 모하메드, 예수, 석가 같은 우주적인 영웅은 이 세상 넘어에서 인류에게 유용한 메세지를 가져옵니다. 제가 알기로 이러한 종교의 영웅들은 신의 신비를 가져오는 것이지 신의 청사지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신화라는 것은 굉장히 유동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신학이 들어와서는, 이것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화는 시에요. 시적 언어는 대단히 유동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종교는 시를 산문으로 바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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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2 17:42:48 *.76.121.104

11월 20일

70번째

신화와 종교의 차이.. 시의 언어, 풍부한 메타포, 은유. 하지만 종교는 이를 지시를 내리는 산문으로 바꾸어버린다. 산문속에서 우리는 은유와 메타포의 신화의 이야기를 잊어버리고 산문속의 텍스트에 몰입한다. 종교의 비극의 시작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아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종교의 갈등과 문제점의 많은 부분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춘기에 대한 캠벨의 비유와 설명또한 매우 큰 충격이었다. 왜 그럴까? 나의 가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들에 대한 생경함과 당혹스러움이 바로 이런 이유가 있었구나. 전혀 새로운 요구 체제... 그리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 신화의 메타포와 대응물이 필요하다.
오늘 단락에서는 종교인에 대한 통렬한 저자의 가르침이 와 닿았다. 종교에서 제시하는 진리의 측면을 이해하고 세속적인 부분을 떼어낸다라는 부분.

 

 

261p 아이에게는 그 조그만 몸에서 나오지 않는 의도라고는 없어요. 말하자면 아기의 몸은 제 모든 의도를 뿜어내죠. 그래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기의 삶은 생명의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런데 아기가 자라감에 따라 마음이 모양을 갖추어나갑니다. 우리는 자아가,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쇼를 연출하는 줄 알지만 아니에요. 무엇이 쇼를 연출하는가 하는 것은, 가로 선 아래에서, 즉 무의식에서 무엇이 솟아오느냐에 달려 있어요. 쇼를 연출하는 게 나 자신이 아니구나 . 이런 걸 깨닫는 시기가 바로 사춘기에요. 전혀 새로운 요구 체제가 우리의 의식 아래에서 자기 존재를 알리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죠.

262p 생물학적 기반의 본능에서 조금더 지나면 외부로부터 강제를 당할 때마다 무엇인지 거북살스럽고, 이질적이고, 두렵고, 죄의식이 느껴지는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시기가 우리의 가장 까다로운 심리적인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시기인 거죠.

어떤 젊은이가 모종의 장벽에 부딪혔을 경우에는, 거기에는 해당하는 특정 신화 대응물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젊은이의 경우 문턱 넘기 의례와 관련된 신화 대응물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263p 자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자기'와 우리가 잘 모르는 또 하나의 '자기' 즉 진짜 '자기'가 있을수 있겠는데요. 어떻게 진짜 '자기'를 만날수 있습니까?

신화가 암시하는 첫번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또하나는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265p 다스 베이더는 자기 인간성을 완전히 발달시키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조직의 뜻에 따라사는 관료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 삶에 대한 위협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스타워즈는 단순한 도덕적 드라마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행동을 통해 성취되거나 부서지거나 억압되는 생명의 힘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웅이 모험의 소명을 받고, 여행을 떠나 시련을 겪고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승리를 얻을 뒤 사회의 홍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돌아온다. 루카스는 표준 신화 이미지를 사용했던 거지요.

269p 고래 뱃속에 들어가는 요나 이야기는 세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신화 테마의 본 같은 겁니다. 물고기가 삼키는  바람에 영웅이 물고기의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들어갈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 다시 말해서 변한 모습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세계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어요.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면 고래는 우리의 무의식에 갇혀 있는 생명의 힘을 상징합니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물은 무의식이고, 수생동물은 생명, 혹은 무의식의 에너지입니다.

270p 삶을 위한 프로그램에 맞게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육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1p 모든 종교는 그것의 시대에는 진리였어요. 만일에 종교가 지닌 진리의 측면을 인식하고 세속에 적용되고 있는 것을 분리시킬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세속에 적용되고 있는 종교에서 알맹이만 따로 떼어내어 볼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 삶을 예전의 그 통합의 상태로 되돌리게 하는 지혜의 항구가 있다는 인식에 이르는 일이 가능할겁니다. 영적으로 우리를 지탱하는 것을 위하여 육체적 욕망과 공포를 희생시키는 일이지요.

저 위에 있는 늙은이는 바람에 날려가고 없어요.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동양의 영적인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자신 있게 '네 안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라'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요.

271p 스승이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야 소수겠지만 내가 말한 것에 반응하는 건 누구든지 할 수 있어요. 아이가 위험에 처했을때의 잠재력과 같이 이런 능력은 우리 안에 있어요. 나날의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는, 진짜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이런 능력이 있어요.

272p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우리안 에 있는 괴물을 죽일 수 있습니까? 우리 개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선생님의 이른바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란 무엇입니까?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프로메테우스나 예수 같은 이들과 달리 우리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게 되지 않나요?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어떤 세상이든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용은 다른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276p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 있는 신화란 바로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맞는 본을 제시합니다.

277p 서구인들은 '나'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위대한 서구적 진실이라고 믿어요. 우리가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줄수 있을 때도, 주어지는 것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 개개의 경험과 잠재력의 발현이 되는겁니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적인 사회는 개인은 기계로 찍어낸 과자 같아요. 이런 사회 구성원의 의무는 정확한 용어로 정확하게 정의되어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어요.

278p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것이지요.

283p 석가는 사회적인 의무의 신에게서 사성 계급에 어울리는 의무를 수행하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그러나 석가는 이를 거절하는데 그날 밤에 깨달음을 얻고 윤회를 벗어납니다. 하지만 서양인의 오디세우스는 세속의 진실에 머물기 위해 태양신의 섬을 떠나 아내 페넬로페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는 이승의 삶의 가치에서 해탈하는 것이 아니라 이승의 삶의 가치에 충실하는 방법을 받아들입니다.

283p 속세의 삶의 가치에 충실한 방법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사용한 방법이 있습니다.

영혼의 세가지 변모 - 낙타의 변모는 어리아이와 소년의 변모입니다. 책임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과 수업을 받아야 하는 복종의 시절입니다. 이윽고 낙타는 광야로 나가는데 여기서 사자로 변신합니다. 이 사자가 해야 할 일은 용을 죽이는 일인데 용의 이름의 '그대의 미래'입니다. 사자, 즉 청년은 그대의 미래를 벗어던지기 때문에 ㄲ개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용이 완전히 제압되면 즉 그대의 미래가 극복되면 사자는 그 사나운 본성을 버리고 아이로 변모합니다. 들꽃처럼 그저 충동에 따라 살기만 하면되늘 것이지요.

낙타에게 용은 그대의 미래는 난타를 순치하는 수많은 강제입니다. 하지만 청년기에는 자기 발견의 시대, 사자로 변모하는 시기입니다.  이시기의 법률과 강제는 강압적인 '그대의 미래'에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갖게 하는 방향으로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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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2 17:52:08 *.76.121.104

11월 21일
71번째

낙타와 사자의 이야기의 원전을 알게 되었다. 통과의례. 이책을 읽으면서 내가 예전부터  막연하게 아쉬워하던 갈망하던 단어이지 않았나 싶다.
미래의 나의 딸아이에게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여기에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켐벨 역시 명쾌하게 낙타가 사자가 되는 시기와 조언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책의 일관적인 흐름이지만 자신이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천복을 찾는 실마리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기억할것. 삶의 고통이 클수록 돌아오는 상도 크다는 것. 역시나 사회적인 시스템보다는 개인의 각성과 깨달음에 더욱 무게를 두는 켐벨의 인식을 느낄 수 있다. 종교와 예술과 책의 가치. 인간 하나하나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보통사람은 없다는 개념은 개개인이 얼마나 높고 휘양찬란한 존재인가 하는 저자의 인식을 볼 수 있다.

 

285p 오늘날은 아이들에게 낙타가 사자가되는 너은 이제 어른이 되었다 고 하는 순간이 없습니다. 오늘날에 그런 통과의례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도 답을 마련하고 있지 않아요. 아이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겠지요. 맡겨서 홀로 서기에 충분한 힘이 있게 되었다는걸 스스로 깨닫게 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마치 어린 새가 날때가 되었다는 걸을 알고 실제로 나는 것 처럼 말이죠.

스승소리를 듣는 사람은 마땅히, 제자에게 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먼저 알고 때가 되면 날게 해주어야 합니다.  부모들이 안고있는 문제가 바로 그겁니다. 가야 할때를 알려주는 것. 우리(켐벨) 부모님은 집안일을 꾸리다가 어느 시점에선가 당신네 의견을 포기하시더군요. 밖으로 나가 홀로 날기를 해야 할 즈음에는 시험을 당해보는 시기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워낙 엄청나지만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286p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약간의 자기분석기술이 필요한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되는'겁니다.

신화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행복을 좇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행복을 좇는 데 장매물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러줄 뿐이죠.

292p 여행이나 모험을 하지 않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좋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그러면, 자기 나름의 모험에서 공급되는 삶의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생명은 곧 말라버려요.

293p 달라이라마에게서는 원망이나 미움과 관계가 있는 말은 한마디도 들을 수 없습니다. 무서운 격동기, 무서운 폭력의 희생자들인데도, 증오의 감정이 없어요. 나는 그들에게서 종교가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오늘날에 살아 있는 참 종교가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바로 우리 운명을 빚는 도구이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지요.

296p 살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열반)인데, 천국과 같은 어떤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297p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지요. 아모르파티 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우리가 삼켜버리는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 또한 그만큼 큽니다.

298p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것이 당신의 내부 어디쯤인지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아내면 당신은 이것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당신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다.

299p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가령 우리 부모가 서로 눈이 맞는 것부터가 우연이지요. 우연, 혹은 인연이라고 합시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걸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일이나 사건이 일어남)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300p 니르바나는 인생이라는 소용돌이 바로 그 안에 있는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니르바나 상태는 욕망이나 공포나 사회적인 인연에 쫓기면서 살지 않게 될 때, 자기 안에서 내적인 평화와 중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달성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중심에서 나온 자발적인 행위, 이것이 바로 보살의 길, 말하자면 이 세상의 슬픔에 기꺼이 참여하는 삶인 것이지요.

301p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승에서는 선한것일수도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있는데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읽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301p 나는 보통사람이라는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통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북해지곤 하는데, 그 까닭은 내가 보통 사람, 보통 여자, 보통 아이 같은 걸 도무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302p 깨달음에 이르는 추천하고 싶은 두 방법이 종교와 예술을 통해 이르는 것입니다. 삼엄한 철학으로는 이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하지만 타인에게 자비의 문을 열고  온 가슴으로 사는 삶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요.

결국 깨달음의 경험은 성자나 예술가에게만 가능한 게 아니고 우리모두에게 가능한 것이군요.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연히 우리에게 찾아 올 잠재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걸 열수 있습니까?

가까운 친구, 혹은 훌륭한 스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요. 이런 깨달음을 촉발하는 자극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도 있고, 교통사고 같은 것으로 당하는 충격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역시 깨달음의 문제를 다룬 책에서 나온다고 해야겠지요. 내 경우 대부분은 책에서 나옵니다.

303p 단언하거니와 신화는 우리 삶의 훌륭한 의지가지 같은 것이었저요. 내 삶으로 쏟아져 들어온 이런 종류의 지혜가 우리 삶에 일으켜놓은 기적은 정말 대단한 거랍니다.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화의 진리는 말씀너머, 이미지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모험은 영웅의 모험. 즉 살아 있음의 모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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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2 18:35:14 *.76.121.104

72번째

조셈켐벨의 책을 읽으면서 종종 사이트를 검색하게 되는데 의외로 "신화의 힘"의 인용구절이 많이 눈에 띈다. 인용이 아니고 베껴쓰기인게 문제지만 글씨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올린 글들을 보면서 원전의 표기라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긴 원전자체를 가져다가 자신의 글인것처럼 쓴 글이니 이런걸 기대하는 것이 무리이긴 하다.

주로 성서의 비판글에 켐벨의 인용이 많이 눈에 보인다. 부분인용의 문제점은 사실 언급할 필요가 없는게 나처럼 원전을 아는 사람이 보면 문제점을 알수 있지만 그런 글을 읽은 일반사람들에게는 켐벨이라는 저자 자체를 모를 것이니.. .. . 

물론 신화의 힘에서 켐벨은 성서의 문제점을 언급하긴 하지만 그것이 주가 아니기 때문에 솔직히 이러한 부분의 무단 전제는 좀 기분이 나쁘긴 하다. 

6. 조화여신의 은혜
305p 모든 종교이미지와 신화 이미지는 우리 의식의 차원, 인간 정신에 잠재해 있는 경험의 장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미지가 존재의 바탕자리의 신비에 대한 명상 상태와 비슷한 자세와 경험을 촉발합니다.

306p 예수는 십자가에 다가감으로써 어머니를 이 땅에다 남겨두고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대지를 상징하는 십자가는 어머니 상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어머니에게서 얻은 자기 육신을 남기고 궁극적이로 초월적인 신비의 근원인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어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론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 말이 있어요.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것지요.

308p 고대사회는 여신상, 위대한 여신, 어머니 대지 같은 여신 이미지를 섬기었지만 아버지 탐색이라는 모티브가 왜 중요하게 되었습니까?

여신숭배는 주로 농경 문화, 농경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요. 만물을 낳고 그리는 에너지의 화신은 당연히 여성의 모습을 지니지요. 어신이 가장 중요한 신화 이미지가 되는 곳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권, 이집트의 나일간 문화권 같은 고대의 농경 문화권입니다.

309p 여성은 칸트 철학의 입장에서 우리가 '감각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표상합니다. 여성은 시공 그 자체인데, 이 여성 너머에 있는 신비는 곧 한 쌍의 대극을 초월하는 신비인 것입니다. 이 신비의 형상에 따르면 그것은 남성도 아니요, 여성도 아닙니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만물'은 이 안에 있지요. 그래서 여성은 그 여성이 낳은 자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312p 거대한 강가에서 태동한 고대문명은 침략을 당합니다. 농경 문화권에 대한 외침의 세력은 북에서, 남에서 밀려와 거대한 도시들을 하룻밤 사이에 쓸어버립니다. 셈족이 모신 신앙 체계를 지닌 농경 문화권을 침략함으로써 남성 위주의 신화가 두드러지게 됩니다.

315p 신명기에는 "사랑과 자비는 무리 내적으로, 무력과 비방은 무리 외적으로 투사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비는 우리의 무리를 위하여 남겨두라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종교에서는 무리 외적인 이방인이라는게 더 이상 있지 않아요. 오늘날의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전 인류 사회를 향하여 그런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은 여신에 대해 굉장히 강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인구계 신화 체계에서는 볼수 없는 일입니다. 성서에서는 볼수 없는 예로서 우리 서구인들의 여성 경시 풍조는 다분히 성서적 사고의 산물일 겁니다.

318p 나는 히브리 전통에는 처녀 수태 관념도 없는 것으로 확신해요. 그러니까 처녀 수태 관념은 그리스 전통에서 그독교로 흘러들어 왔습니다. 사복음서를 읽어보세요. 처녀 수태가 언급된 복음서는 누가복음 뿐입니다. 누가는 그리스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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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3 19:08:34 *.76.121.104

73번째

처녀수태의 의미. 특히나 이집트의 신화는 매우 방대하고 복잡하지만 그중의 일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소설인 황금당나귀라는 책의 정보도 유용했음. 


320p 처녀수태.. 여기서 탄생하는 것은 신이지 않나요?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에요.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 보았던가요? 우리가 언제 동물의 근성을 죽이고 자비로운 인간으로 화신해본 적이 있던가요?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를 한 거에요. 말씀이 빛줄기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차크라(원, 영역).

영웅이나 반신은 자비로움이 육화된 존재로 태어나지, 성적인 욕망의 소산, 혹은 종의 보존을 위한 소산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건 어떤의미에서 두번째 탄생이에요. 두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가슴 아래쪽의 세 차크라는 우리가 초극해야 할 대상입니다.

326p 성모의 모델이 된 신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은 여신.

누트여신의 몸에서 태어난 쌍둥이 남매-이시스 여신과 오시리스 신 . 쌍둥이 남매 밑에는 세트신과 뉍튀스 여신.  오시리스가 이시스로 잘못 알고 넵튀스 여신과 춘사- 여기에서 아누비스 신이 태어남

아누비스 신은 오시리스 신의 맏아들. 기분나쁜 세트신이 오시리스를 죽이려고 함. 관에 묶어 오시리스를 나일강에 버림.(나일강의 범람과 상징적인 연관성)

지아비 오시리스를 잃은 이시스 여신은 시신을 찾으러 떠남. 결국 찾아내고 다시 만남. 죽은 지아비 몸위에 자기 몸을 싣고는 이로서 수태.나일강으로 돌아온 이시스 신은 파피루스 숲에서 아기 곧  호루스를 낳는다. 세트는 그동안 오시리스의 보좌를 차지. 이 보좌의 자격을 위해서는 이시스와 혼인이 필요. 부친 오시리스의 복수를 완료한 호루스는 현세의 통치자가 된다. 따라서 파라오는 호루스의 화신으로 여겨짐

샤르트르 대성당의 성모의 이미지로 빚어진 보좌위의 아기 예수는 바로 이 보좌에 앉아 세상의 왕으로써 세상을 축복. 이 이미지는 고대 이집트로부터 우리에게로 계승된 것이 거의 틀림없음

328p 신의 죽음과 재생 이미지는 어느 문화권의 신화에서도 볼 수 있는 아주 흔하디 흔한 이미지입니다. 예수의 태어난 날짜를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12월 25일은 동지 전후 그러니까 자꾸만 길어지던 밤이 짦아지면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지요. 말하자면 빛이 부활하는 날입니다. 이날은 바로 페르샤의 빛의 신 미트라의 생일이기도합니다. 미트라는 곧 태양의 신이지요.

328p 우리 삶과 우리 생각의 죽음과 부화.ㄹ을 의미합니다. 즉 과거의 죽음과 미래를 향한 부활, 곧 수성(동물의 성격)의 죽음과 영혼으로서의 부활을 의미하지요.

 아풀레이우스의 황금당나귀(http://www.yes24.com/24/goods/2789802?scode=032&srank=1 ) 제일오래된 소설중의 하나 그리스/로마 신화의 원형이 되는 작품. 이시스의 발언이 등장함.

329p 재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여신. 재생은 영적인 어머니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런 어머니가 바로  성모 교회인 파리 대성당, 샤르트르 대성당의 노트르남(성모)인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교회로 들어감으로써, 그리고 교회를 나섬으로써 거듭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사후인 서기 431년에 소집된 에베소(에페소스) 공의회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인 것으로 공포합니다. 바로 이시점에 카톨릭 전통 속으로 히브리의 구세주 관념과 그리스의 구세주 관념이 흘러들어 옵니다. 영적인 권능과 세속적인 권능의 통합을 상징하는, 가부장제적으로 유일신적인 히브리의 구세주 관념과, 처녀신의 몸에서 태어나 한번 죽었다가 부활하는 위대한 여신의 아들이 라는 그리스의 고전적인 관념이 만납니다.

333p 신약성서에는 "예수님 안에서는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다" 는 참으로 멋진 말이 있습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다는 뜻이겠지요.

당연하지요. 만일에 예수가 우리 존재의 근원이라면 우리 모두가  곧 예수의 생각이자 마음인 것이지요. 실제로 그는 육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 참여하지 않으면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없어요. 하느님을 '절대타자"로 보는 관념이 엉터리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절대 타자'와 나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있을 수 없지요.

334p 여성원리는 자식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아닌 포괄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질서나 사회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따라서 근본으로 돌아서는 경향이 보인다는 것은 곧 어머니 원리로 돌아가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장차 어떤 경향이 나타날지는 예견할 수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 근본, 혹은 자연은 언제 돌아와도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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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15:46:15 *.76.121.104
11월 24일
수요일
74번째
나는 지금껏 의례라는 것은 그냥 껍데기일뿐. 그자체의 의미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적이 없다. 하지만 신화의 연출이라는 켐벨의 말은 왜 종교마다 하다못해 설이나 추석에 행하는 제사까지도 이것은 바로 우리가 직접 신화에 참여하고 체험하는 수단임을 알수 있다. 영적으로 사는것이 이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  
신화가 주는 단서와 약도는 특정 종족신만을 섬기라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신의 계시는 만물을 자비로 대해야 하다는 것을 요구. 곧 자연의 신화가 곧 여신의 신화임을 알수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닌 하나라는 인식이 바로 출발점. 이 광막한 우주에서 먼지하나보다도 작은 우리가 정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335p 모든 시대의 현자들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살면 바람직한 삶을 살수 있다고 가르킵니다. 사도바울은 '육의 욕망은 영에 반하고 영의 욕망은 육에 반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사는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까?

옛날의 스승들에게는 제자들에게 영적인 삶을 단서를 줄 의무가 있었지요. 그래서 사제들이 있었고 의례라는 게 있었던 겁니다. 의례의 집전은 곧 신화의 '연출'입니다.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신화은 우리에게 단서와 약도까지 그려줍니다. 약도중에는 자기네 무리 안의 일만 관심을 두라고 자기네 종족신만을 섬기기를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우주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계시가 담긴 약도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약도는, 이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주기를 요구합니다.

여신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337p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인식과 체험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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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16:01:30 *.76.121.104
11월 25일 
목요일
75번째
신화에 왠 뜬금없는 사랑이야기? 하지만 이 사랑이야기는 바로 유럽의 개인주의가 발호한 중요한 시발점임을 캠벨은 말하고 있다. 개인과 개인의 사적인 눈과 눈이 만나는  그당시 중세시대에는 사회의 전복을 가져올만큼의 위험한 사상이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서구의 개인주위에 대한 기원을 이해할수 있는 부분.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340p  음유시인은 사랑의 심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지금의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개인 대 개인의 관계라고 생각하잖아요? 음유시인들은 아마 유럽최초로 사랑을 이런식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일 거에요. 그전에는, 사랑이란 우리에게 성적욕망을 야기하는 꼬마 신 에로스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어요.

343p 아모르적 사랑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랑입니다.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듯 눈과 눈이 만나는 데서 싹트지요. 말하자면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경험인 겁니다.

345p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인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결혼은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크레도에 대한 리비도의 승리'라고 하셨는데 어떤 뜻인가요?

크레도는 믿습니다 로 시작되어 믿습니다 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 교리가 무거운 짐이 되어 개인을 짓누릅니다. 개인의 내적인 면에도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사람은 죄악을 생각하다 보면 정말 죄인 비슷하게 됩니다. 삶의 의지를 이렇듯 짓밟아 놓는 것, 이게 바로 "크레도"입니다. 이에반해  리비도는 삶의 충동입니다. 가슴에서 나온 것이지요. 타인에게 향하여 열려야 할 우리의 기관이지요. 가슴을 열고 남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는게 바로 짐승들과는 다른 인간의 특질입니다.

그러니까 중세의 낭만적인 사랑은 욕망이나 열정, 혹은 일반적인 종교 감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중세시대 음유시인들의 개인 대 개인의 사랑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일 수 있었지요. 간음, 정신적인 간음인 것이지요.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격상 아모르적이기는커녕 정치적,사회적인 결혼도 교회적인 사고방식으로 합리화했어요. 그래서 개인적인 선택을 중요시하는, 내 식으로 말하면, 자기 천복을 좇는 움직임이 생겼던 겁니다.

347p Tristan and Isolde (트리스탄과 이졸데)  트리스탄은 자긴의사랑은 죽음보다 고통보다 이 세상의 어떤 것 보다 귀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삶의 고통을 대단히 대승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지요.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사랑을 선택하는 데도 그래야 합니다.

349p 바그너는 자기 오페라<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 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이거야말로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달게 견딜 수 있다" 이런 거지요.

350p "그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사랑의 깨달음이야 말로 우리 사회에서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자기 손으로 자기만의 삶을 살고자 하는 서구식 개인주의는 이런 낭만적인 관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동양은 이런 종류의 개인주의가 사회적시스템이 되지 못했어요.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무르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을 꽃피게 하는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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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16:23:10 *.76.121.104
11월 26일
금요일
76번째
중세시대 음유시인의 사랑은 곧 천복찾기와도 연관되어 있다. 지금의 우리의 천복을 찾고 실행하는 것은 그시절 음유시인들처럼 어쩌면 기존의 사회와 질서를 뛰어넘는 위험이 따르는 좁은 길일수도 있다는 것.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길임은 자명하다. 내가 궁금했던 점 그시절 그 야만이 판치던 시대에도 문명을 지향하는 힘이 있었다는 사실. 개인과 개인의 사랑이라는 그시대의 혁명적인 일임에도 규율과 공동체의 규칙속에서 발현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중심에 여성이 있었다. 굉장한 포인트이다. 유럽의 중세가 이런 세상이었다니 .. 유럽을 이해하기위한 텍스트로는 성배전설, 아더왕의 전설을 꼭 읽어봐야 할것 같다. 아내와 이야기 한 부분인데 우리나라는 동양사상의 근원을 이해할만한 텍스트가 안떠오른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한자와 한글의 단절. 동양고전에 대한 단절이 아닐까 싶다. 
천복을 찾는 것은 어쩌면 집단의 질서와 모듬살이에 반하는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캠벨은 즉답을 회피한다. 그런데 이런 걱정은 안해도 될듯 하다. 이길은 누구나 시도하고 갈수 있는 길이지만 누구나 얻을수 있는 도착할 수 있는 길은 아니기 때문이다.  


351p 선생님께서는 정말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말고, 우리의 천복, 우리의사랑을 좇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당연히 그길은 면도날같이 좁은 길이며 위험하다는것을 머리로 알수 있습니다. 머리와 가슴은 상호부조해야합니다. 머리는 참가하고 가슴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겁니다. 중세기사의 5가지 미덕은 절제,용기,사랑,충성,예의바름입니다. 사랑은 홀로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미덕과 동행해야 합니다. 중세시절 교회 조직의 권위에 몹시 염증을 느끼고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자기네가 참가하고 있는 사회를 대단히 존중했습니다. 기사문화의 예의바름과 규칙에 따라서 결정되었던 것은 우리가 유념해야 할 미덕입니다.

중세시절의 어떤 종류의 사랑 놀음이든,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는 규칙의 체계를 따랐던 겁니다. 그시대가 수월찮게 야만적이었던 걸 감안하면 참 별 일도 다 있었다 싶지요? 그 시대에는 중앙 통제 기능이 있는 법이 없었어요. 개개인에게는 개개인 나름의 삶의 규칙이 있었지요. 물른 이 규칙이 타인의 손에 짓밟히는 일 또한 다반사이기는 했지마, 그러나 그런 야만적인 시대에 문명을 지향하는 힘이 있었어요. 중요한 것은 이 힘이 여성의 손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354p 음유시인들의 가슴속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권력에의 의지에요. 그들의 가슴에 있었던 의지는 개인적인 경험에의 의지와 이 경험을 통한 자기 존재의 승화에의 의지에요. 그들을 관류하는 사상이 있었다면 그것은 삶을 경험의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것이었어요.

눈과 눈이 만나는 순간의 짜릿함, 그 후에 찾아오는 고통의 순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지요. 그러나 음유시인들은 사랑의 고통, 의사가 낫게 할 수 없는 고뇌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받은 상처를 찬양했지요. 상처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356p 수도원적인 성배전설은 성배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해석합니다. 성배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 있던 술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그 술잔을 말합니다. 일반적인 해석은 바로 중립을 지킨 천사들이 가져온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럴 때의 성배는 한쌍의 대극사이 곧 욕망과 공포의 사이, 선과 악의 사이로 난 영적인 길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성배이야기의 테마는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이나 나라를 그 무대로 합니다. 곧 황무지. 황무지의 거죽은 실제성을 표상하지 못합니다.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디ㄱ 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실았다'. 이런 말말 흡니다.

성배는 머랄까 참 삶을 산 사람들이 획득한 것, 혹은 깨달은 것을 표상합니다. 성배는 결국 인간 의식의 가장 고귀한 영적 잠재성의 성취를 상징합니다. 성배왕의 전설에서 이교도기사의 창에 찔린 청년왕은 "기독교에 의한 이분법, 즉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 생의 역동성과 생의 정신성의 이분법,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초자연적인 아름다붐의 이분법이 인간의 본성에 상처를 내고 말았음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이자 성취이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 토마스만 -"인간이 이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이 만나기 때문이다" = 성배의 상징과 일맥상통.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가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참 삶인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인 겁니다.

260p 융박사는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중세의 낭만적인 전설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361p 중세의 낭만적인 전설은 우리가 두세계에 걸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자신의 세계, 밖에서 우리를 강요하는 또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기도 하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 두세계를 조화 있게 상호 관계시킬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나는 모듬살이로 태어났으니까, 모듬살이라고 하는 울타이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모듬살이의 울타리에 살지 않겠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요. 하지만 결국 우리는 모듬살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 모듬살이가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티어주는 것이 모듬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자기의 개인적인 천복을 좆는다면 만일에 세상의 눈이라는 눈이 모두 개인적인 천복을 좇는다면 사회는 와해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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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17:44:23 *.76.121.104
11월 27일
77번째
토요일
플로라의 요하힘주교의 이야기는 현재 종교가 나아가야 할 길 더 확장하자면 캠벨이 이야기하는 신화와 종교의 길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시코의 이름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단지 카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다. 그리스도와 동등한 자리를 차지하는 육신에  세계에 현현한 성령의 존재.
성배전설의 근원은 바로 "내입으로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것이요. 나 또한 그가 될 것이다"  누구나 예수나 갈라하드가 될수 있다는 것.  누구나 천복을 깨닫고 이룰수 있다는 캠벨의 중심사상은 이러한 풍부한 예제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결혼은 상대방이 아닌 상대방과의 관계에 대한 헌신. 성실. 사랑이란 결혼위의 상위존재이자 개념.  사랑의 고통은 다른 고통이 아니라 곧 삶의 고통. 고통이 있는 곳에 삶이 있는 것이다.  사랑자체가 진정한 살아있음의 고통이라는 말.. 정말 좋은 글귀이다. 

362p 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공존할 수 없을까요? 다른 종교가 뭘 그렇게 잘못하고 있길래요? 권력! 권력이에요. 유럽 역사의 근본적인 충동은 권력 충동이에요. 그런데 그게 우리의 종교 전통으로 흘러들어 왔어요. 성배 전설은 기독교가 유럽으로 들어오고 약 5백년 뒤에 성립되었습니다. 12세기말 플로라의 요아힘 주교는 영혼의 3시대에 관한 재밌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성부가 구약성경의 질서에 따라 권능과 위엄으로 다스리는 세상입니다. 노예제도가 사회를 유지시켰던 율법의 시대입니다. 두번째단계는 성자를 통해서 계시된 시대인데,  신약성경과 가톨릭교회가 세상을 관장하던 시대입니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성령의 시대. 이시대에는 말씀으로 된 메세지를 육화하거나, 그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다 동등한 존재가 된다. 입니다.

http://www.nah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311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이 나름의 체험을 획득하기 위해 은둔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이를 대표하는 성인이 바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이분은 그리스도와 동등한 자리를 차지하는 분이자 육신의 세계에 현현한 성령입니다.

성배찾기의 갈라하드 또한 그리스도에 해당합니다. 성령이 불의 형상으로 사도들에게 강림한 날인 오순절에 불꽃같이 붉은 갑옷을 입고 아더왕의 궁전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갈라하드가 될 수 있어요.

토마에 의한 그노시스 복음서에는 "내입으로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요, 나 또한 그가 될 것이라"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배 전설은 바로 이러한 관념에서 출발합니다.

364p 강요에 의해 부부가 된 사람들의 일상적일 삶에서도 사랑이 자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영혼의 나머지 한쪽을 발견했을 때, 여기에 생기는 사랑과는 견줄 수 없지요. 음유시인이 찬양한 사랑, 오늘날 우리의 이상이 되어 있는 사랑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사랑놀음이 아니에요.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요.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유시인의 전통에서는 바로 '성실'이었어요.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이런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다 복속시킵니다. 진짜 결혼 생활, 진짜 연애는 바로 이러한 관계 안에 있어요. 우리도 바로 이런 관계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365p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인생은 관계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속에서 두사람의 동의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결혼은 우리의 동일성, 즉 한 사물에 두가지 측면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이성의 측면과의 만남이랍니다.

369p 어떤 사람이 훌륭한 연애관계, 내가 말하는 건 진짜 근사한 연애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 걸 가지면서도 동시에 결혼 관계에 성실할 수 있느냐 하면, 나는 그런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봐요. 성실한 태도가 분산되니까요. 그러나 결혼 관계에 성실하게 임하다고 해서 이 성실 자체가 다른 데 대한 애정, 이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금지시키는 않지요.

370p 사랑은 도덕성에 도전합니다. 사랑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사랑이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삶의 잉태를 지햐ㅎㅇㅏ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랑이 은밀한 게 다 이 때문이랍니다. 사랑은 사회의 규범에 대들어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이지요.

음유시인의 생각은 사랑은 곧  신의 임재입니다. 즉 사랑이 결혼보다 상위개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고통이란 다른 고통이 아니다 곧 삶의 고통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삶이 있는 것죠.

371p 사탄에 대한 페르시아의 신화-악마를 신의 애인으로 간주하는 회교적 관념.  천사동아리인 사탄만은 인간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 이기심의 발로가 아닌 신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 이세상에도 지옥이 있습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옥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채 살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 참 일리 있는 말입니다. 사탄이 신의 애인이었다는 페르시아 신화를 좋아합니다.

사랑에는 기쁨만 있는게 아니라 슬픔도 깃들여 있습니다.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사랑 자체가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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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18:31:59 *.76.121.104
11월 28일
일요일
아내의 늦잠이 아침을 연다. 장모님은 토요일 주말의 일정을 위해 떠나셨고 정말 오랜만에 토요일, 일요일은 세식구만의 시간.
하영이의 아침을 위해 계란말이를 준비했다. 옆구리도 터지고 조금 타기도 했지만 너무 맛있게 먹는다.
이제 젓가락질도 능숙하게 잘한다. 아이의 성장을 옆에서 바라보면 항상 경외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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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18:47:09 *.76.121.104
78번째
이제 마지막 단락이다. 특히 동양과 서양의 하느님, 신에 대한 캠벨의 시작을 여는 말은 아주 독특하다.  동양에서는 신은 곧 에너지의 화신. 그리고 그 에너지의 종국적인 비밀은 신비인 채로 남는다...
오늘 새벽 수련은 지난 일주의 정리작업으로 리뷰글은 짤막하게 진행. 

8. 영원의 가면

375p 신비를 체험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오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우주의 어떤 차원이 있다는 걸 압니다.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을 우주의 에너지와 경이의 종국적인 근원, 혹은 본원으로 봅니다. 동양의 사고방식은 이에비해 신들은 결국 비인격적인 에너지의, 그 자체로서의 드러남(현현)이자 에너지의 공급자로 파악하지요. 따라서 이들에게 신들은 에너지의 본원이 아닌 겁니다. 신은 그러니까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인 것이지요. 에너지의 성격에 따라 신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동양의 종교에서 에너지의 종극적인 본원은 신비인채로 남습니다.

어린시절 나의 왼쪽귀와 오른쪽귀에 있던 천사와 마귀란 나를 이끌고 인도하는 충동을 의인화한 것임을 알게되면서 천사와 마귀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죠. 이런 에너지는 우리의 삶에서 우리 몸이 지니는 에너지에서 나오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은 우리 몸안에서 서로 맹렬하게 갈등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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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05:59:10 *.123.145.35

11월 30일
79번째

명상의 의미란.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생각에 집중하는 것. 나자신의 내면의 대화에 집중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비의 체험이 가능하다라는 뜻.

강렬한 신비의 체험을 궁극적인 체험으로 간주 할수 있어야 한다. 언어로 표현된 하느님의 이미지를 벗어나야 한다는 말은.. 잘못 받아들인다면 사이비 종교의 근거가 될수 있는 좀 위험한 부분이기도 하다. 기존 종교에서 가장 극렬하게 반대할만한 사안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우리의 언어와 프레임으로 상상한 만늘어낸 예수의 이미지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 종교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즉 신을 경배하고 신의 말씀에 따라 살자면 '나'자신과 그 신이 표상하는 영적인 원리를 동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삶 은 우리는 자나아 욕망에 의지하면서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 안의 인류라고 할수 있는 것을 자각하는 문맥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과연 기존 종교인들에게 이러한 캠밸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냥 이단이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인가? 나의 중/고등학교 결국 이와 같은 고민으로 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지금 캠밸의 말은 더욱 사무치는 느낌이다. 그시절 교회에서 웃고 떠들면서 희희낙락하던 주위 친우들에게 일갈해주고 싶은 말.

 

동양에서 말하는 종극적인 본원인 에너지가 비인격적인 자연이면 안될까요? 서구인들은 신을 인격화시키고 신에게 인간성을 보려 하는 경향이 있어요. 동양의 신들은 더욱 본질적이고 덜 인간적이죠. 서양의 신들보다 훨씬 자연력에 가깝지요.

378p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수준의 생각이든 명상에서는 가능합니다. 기도는 신비에게 말을 걸고 명상하는 행위이지요. 자파(산스크리트어), 카톨릭의 묵주를 굴리면서 같은 기도문을 되풀이외는 명상법 모두 이러한 기도는 잡념을 몰아내고 한 가지에만 정신을 집중할 수 있게 합니다. 상상력에 따라 갖가지 차원의 신비의 체험이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379p 언어밖에 있는 깨달음에 이르려면 하느님의 이미지부터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강렬한 신비의 체험을 궁극적인 종교적 체험으로 간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미지입니다.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소아병적 생각에 집착해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큰 체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보다 큰 체험이 접근해오는 순간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에 매달림으로써 도망쳐버리려고 합니다. 이걸 사람들은 신앙으로 오해하고는 하지요. 우리의 영혼은 서로 다른 원형적인 경험의 단계를 지나 상승합니다. 처음에는 기아와 탐욕 같은 기본적인 동물적 경험단계에서 성욕을 지나 물질적인 것을 초월하는 단계로 이행합니다. 이 단계가 바로 경험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부여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를 거치고,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380p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입니다. 이 처녀 수태는 건강,자손,권력,향락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간적.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비,화합,타자와의 동일성, 혹은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자리잡게 된 바람직한 자아 초월적인 원리와의 동일성 체험은 종교적인 삶과 체험의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형상을 통하여 신을 경험한 경우 거기에는 우리의 형상을 짓는 마음이 개입합니다. 따라서 형상을 짓는 우리의 마음이 신에 방영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가 믿는 신과 하나 되기여야 합니다. 신과 하나가 된다면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라집니다.

381p 그리스도는 자기와 자기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가 사실은 하나임을 깨달은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임을 아는 삶을 살았어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삶'은 우리는 자아나 욕망에 의지하면서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 안의 인류(그리스도)라고 할수 있는 것을 자각하는 문맥에서 살아햐 한다는 뜻입니다.

신을 경배하고 신의 말씀에 따라 살자면 '나' 자신과 그 신이 표상하는 영적인 원리를 동일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안 에 있는 신,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우리 안에서 나오는깨달음. 혹시 여기에 자기 환상의 위험, 자기강박의 위험이 있지는 않을까요?

일어날수 있습니다. 흐름에서 생기는 단락이라고 할수 있어요.(?? 좀 어렵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준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에 "여기 있는 나, 물리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나, 세속적인 성격을 지닌 나는 바로 하느님이다" 이것은 경험에 단락이 생긴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기는 하느님이되, 자아에 집착한 상태로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비이원적 초월자와 하나가 되는 깊디깊은 존재의 차원에서만 하느님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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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06:01:48 *.123.145.35

12월 1일

80번째

모든 종교의 핵심은 자비.

예전 성프란체스코 수도회 "작은형제들" 의 다큐를 MBC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시절 나도 예수가 현세에 있다면 아마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 아주 감명깊게 본 기억이 난다. 캠벨선생님 역시 예수의 지금 모습은 고도의 명상을 한 은수사나 수녀의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모든 종교의 핵심은 "자비"라는 말은 큰 울림과 깨달을음 주는  글귀이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세상 도처에 널려 있으나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니라"

지금 이순간이 중요하다는 것. 내가 숨쉬고 살고 있는, 관계에서 영원과 천국을 느낄고 체험할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신이란 신의 표상은 즉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것이 신이다.
 

383p 예수가 지금 이 세상에 있다면 기독교인일 것 같습니까?

우리가 아는 종류의 기독교인은 아닐 겁니다. 명상을 통해서 고도로 영적인 신비와 만나는 은수나사 수녀의 모습, 아마 그런 기독교인이 될겁니다. (나도 TV에서 본 기억이 난다)

384p 나는 자비를 근본적인 종교 체험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자비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지요.

내가보기에 신약성서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믿사오니, 저의 믿음없음을 깨우치소서" 바로 이겁니다. 저는 이궁극적인 실재를 믿습니다. 체험할 수 도 있고 실제로 체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있는가?" 이게 제가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는 의문입니다.

부처의 의식은 만물, 만상에 미치는 내재적, 이지적 의식입니다. 우리는 의식의 파편, 에너지의 파편으로만 살고 있지요, 그러나 종교적인 삶이라는 것은 이 특정시간에 존재하는 이 특정 육신의 의도에 따르는 삶이 아니라 대국적인 인식의 통찰 안에서 사는 겁니다. 토마의 복음서에는 예수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됩니다. "아버지와 왕국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으나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니라"

나는 모이어스 씨를 통해서 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광휘를 본답니다. 예수는 "내 입으로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고 나 또한 그ㄱ와 같이 될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든 그 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살면 그리스도 같을 수 있다는 겁니다. 누구든 말씀의 메세지를 삶 속으로 동화시킬수 있으면 곧 그리스도와 동등해질 수 있다. 이게 바로 이 구절의 의미인 겁니다.

자기 삶을 가슴으로 사는 삶의 단계에 올려놓는 사람에게는 곧 정신의 광휘인 것입니다. 곧 그 깨달음의 수레인 것이지요.

정신을 단계별로 배열하는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까?

은유적인 언어에요. 프로이트의 철학(성적인 기관의 수준. 그사람삶의 목적). 애들러의 철학(권력에의 의지). 이와는 다른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자기 삶을 타인에게 주어버리는 인생이 있어요. 가슴의 열림으로 상징되고 있는 삶이 바로 이런 삶인 겁니다.  이런 삶의 본원은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 하나의 삶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자꾸만 어떤 현상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 하느님이 만드신 거야" 이러고 말겠죠. 이런 사람에는 하느님이 삶의 본원인 겁니다.

종교라는 말은 religion -> religio 렐리기오. 즉 뒤로 연결됨 을 뜻합니다. 둘이서 나누어 사는 하나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삶이 있다면 내가 사는 조각난 삶은 한 삶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렐리기오"되어 있는 겁니다. 상호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드러내는 것, 이것이 곧 종교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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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06:02:25 *.123.145.35

12월 2일

81번째

내가 너희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한문장이 뜻하는바를 캠벨은 가장 조악한 인간의 본성중의 하나인 물고기와 같은 수성(짐승의 성질)에서 인간을 건져올리려는 종교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만달라의 의미. 원은 원인데 하나의 우주 질서를 상징한다. 산스크리스트어로 원이라는 뜻. 예전 부족원에서 만달라는 그리고 연구하는 것은 주제로 삼고 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좀더 만달라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신화의 중요한 역활 즉 우리자신과 상징적인 힘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한다.

 

388p 융 박사는 종교의 상직 중에서 가장 강력한 상징은 원이라고 했습니다. 원은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이미지이기 때문에 원의 상징을 정밀하게 검토하는 일이 곧 우리의 '자아'를 분석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온세상이 원입니다. 세계에 있는 원꼴의 둥근 이미지는 모두 인간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원형의 건축 구조와 우리 정신 기능의 구조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 겁니다.

389p 우리는 수메르로부터 기본 사방과 360도의 방위각이 있는 원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의 상징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감각을 잃어버렸어요. 우리에게는 디지털 시간이 있을 뿐입니다. 100분의 1초가 지나가는 것을 보아야 우리는 비로소 시간이 우리 속을 둟고 지나가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게 됩니다.

원은  전체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원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원으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원이라는 프레임속에 들어 있는 것이지요. 이런 공간적인 측면이외에 시간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원은 항상 떠났던 자리로 돌아옵니다.  신은 알파요 오메가요, 본원이자 종국입니다. 따라서 원은 바로  시간의 장과 공간의 장에서 완결된 완정성을 상징하는 겁니다.

결혼반지를 보고 있으면 원이라는 게 두 반원이 엮이어 하나가 되었다는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둘로 이루어진 더 큰 하나, 여기에서 나의 개인적인 삶이 생겨납니다. 결혼 반지는 우리는 원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어부의 반지는 제자를 부르는 예수를 상징합니다. 여기서 제자는 어부 출신의 제자들을 가르킵니다. 예수는 "내가 너희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하지요. 물고기와 같은 본성은 인간의 본성중에서 가장 조악한 수성(짐승의성질)에 속하지요. 종교라는 낚시줄은 바로 그런 수성에서 인간을 건져올리는 겁니다.

영국의 대관반지는 또하나의 상징적 측면이 있군요. 이 반지는 굴레를 상징합니다. 왕이 되었으니 원칙이라는 굴레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지요.

392p 만달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가 곧 '원'입니다. 단순한 원은 아니며 다른 원과 상호 관계하거나 상장적인 문양을 이룸으로써 하나의 우주 질서를 상징힙니다. 만달라를 그리는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 작용하게 합니다. 만달라를 그려보는 것 우리 자신의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 관계를 맺게 하는 작업입니다. 중심을 찾아 자기 마음을 거기에다 두자는 것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의 중심을 우주의 중심과 일치시키려는 노력입니다. 신화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말이지요. 이미지는 우리를 도와 우리 자신과 상징적인 힘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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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06:02:59 *.123.145.35

12월 3일

82번째

이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신화속에 내재된 인류의 공통되는 어떤 힘. 영적잠재력. 따라서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의 어떤 힘을 촉발할수 있다는 캠벨의 이야기는 신화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어머니에게서 잉태된 시점. 시작은 두려움도 욕망도없이 시작한다.  그 한점이 시작점이 삶의 요체.  마치 식물의 생장점과 같이 우리에게는 이 출발점이 우리의 근원이 된다.

비교신화학은 기존의 종교를 무너뜨리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기존에 보지 못했던 각 종교의 메타포와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고 깊이 이해할수 있다는 캠벨의 말은 너무 일방적인 관점의 종교에 함몰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종교인들에게 시사점을 주고 있는 것이다. 광대나 그로테스크한 신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나를 통해서 보라.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너머의 모습을 보아라 는 의미.

 

393p 우리 삶은 어디에선가 쉴새없이 솟아오르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으로 끊임없이 생명을 내어보내는 곳, 이곳이 바로 무궁무진한 에너지의 근원인 겁니다.

신화를 읽다보면 문화권,  시간, 공간도 다른데 늘 똑같은 이미저리가 떠오릅니다. 이는 곧 우리의 정신안에는 인류의 공통되는 어떤 힘이 있다는 뜻이지요. 서로 다른 수많은 문화권이 같은 창조 이야기, 같은 처녀 수태 이야기, 죽었다가 부활하는 구세주 이야기를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야기가 우리의 내부에 들어 있는 것, 우리가 이해하려 하는 것은 반영하는 것입니다. 곧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신은 인류의 종국적이고 본질적인 관념일 겁니다. 우리는 신의 이미지에 따라 만들어졌어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적인 원형이에요. 우리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을 생각해보세요.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점으로 돌아가보세요. 이 한점이 바로 요체랍니다.

우리자신에 대한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한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근원은 어떤일이 생기든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존재할 것들을 생성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근원이 베푸는,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존재입니다. 이 근원이 우리 안에 있는, 삶이 샘솟는 한 점인데, 모든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비교신화학시간이 되면 우리는 한 문화권의 이미지와 다른 문화권 이미지를 비교하곤 하는데, 이렇게 하다보면 이미지의 의미가 확연해지고는 합니다. 왜냐하면 한 문화권의 이미지가 한 측면을 명백하게 표현하면, 다른 문화권의 이미지는 다른 측면을 명백하게 표현하기때문입니다. 결국 이 두이미지는 서로를 보완하면서 설명하는 겁니다.

396p 종교체계의 상징을 해석하는 비교신화학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라는점, 비교종교학은 신앙체계에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게 분명합니다. 신화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지, 사실이라고 부르지는 않거든요.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세지가 됩니다. 이 메세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

비교신화학은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앎에의 갈망을 체험하고, 인류의 언어를 초월해 있는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 비슷한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것을 아는 일은 신앙을 돈독하게 할망정 신앙에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게르만 신화와 켈트  신화에는 광대 이미지가 굉장히 많아요. 일종의 그로테스크한 신들인 거지요. 광대이미지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봐라, 나는 궁극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나는 투명해서 속이 들여다보인다, 나를 통해서 보라,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형상을 통해서 보라!"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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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06:03:32 *.123.145.35

12월 4일

83번째

절정경험과 에피파니의 대한 이해. (어렵다. 어렵다.)

장난꾸러기 신이라고 표현했지만 어떤 사고체계가 완성되고 만족스러운 상태가 절대로 영속적으로 지속될수는 없다. (그게 우리사는 현재의 모습이 아닐까?) 결국 에덴동산의 뱀처럼 끼어들면 난장판이 되고 우리 자체가 바뀌게 된다. 신화학자로서 캠벨의 기존 종교의 무시무시함.(특히 서양의 기독교에 대한)을 아쉬워 한다. 살풍경하고 심각하다는 것.

절정경험은 우리가 쉽게 접하고 경험하는 순간이다. 시간과 공간을 잊어버린듯한 초월한 듯한 몰입과 집중. 이때 내가 느끼는 경험. (최근의 기억은 아마도 하영이와의 첫만남??)

에피파니는 미학적 체험을 예로 들면서 단순하고 평범한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 직관적으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예술가의 작품에서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원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순간. 미학적 체험은 단지 아름답고 유명한 예술작품만이 아니다. 미학적 체험은 그자체가 윤리나 도학을 초월한다는 이야기.

괴물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장엄함의 관점에서 충분히 미학적 체험이 가능하다. 좀더 확장하여 파괴자 역활을 맡은 신의 모습에서는 윤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에피파니의 체험하는 미학적 체험에는 이렇듯 윤리가 사라질수 있는 장엄함에서도 느낄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시각이다.

 

397p 어떤 사고 체계를 가진 사람에게든 사고 체계 자체가 무한한 삶의 의미일 수는 없어요. 어떤  사고 체계에 만족하고, 이만하면 정리가 된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장난꾸러기 산이 끼여들면 모든 것은 난장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자체가 바뀌면서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신화와 우리 유태-기독교의 차이는, 전자의 이미저리는 약간 유머러스하다면 우자의 이미저리는 지나치게 삼엄한 데가 있다는 것이지요. 신화의 이미지는 상징적인 겁니다. 우리는 이런 이미지와 상당한 거리를 유지해도 좋아요. 그러나 우리 종교를 보세요. 모든 것이 살풍경하고 심각해요.

심리학자 마슬로프의 '절정경험',  제임스 조이스의 '에피파니(단순평이한 사건이나 경험을 통한 직관적인 진실의 드러남)

절정경험은 우리 삶에 실재하는 어느 한 순간에 해당하는 경험입니다. 존재의 조화와 나 자신의 관계를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내가 절정경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은 어떤 절정 경험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에피파니" . 미학적 체험에 대한 조이스의 정의는 그 대상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이는 작품이 그린 대상을 소유하고 싶다는 느낌을 일게 할 경우 예술작품이 아닌 "포르노그라피'라고 부르지요. 진정한 미학적 체험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을 비평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예술작품을 그는 도학적인 작품,  혹은 예술 자체가 지닌 사회 비평 기능이라고 부르지요. 미학적 체험은 그저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예술가가 복선으로 깔아놓은 우연한 리듬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경험합니다. 이때 우리는 미학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파니입니다. 이순간을 종교 술어로 설명하자면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원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 되지요.성인이든 누구든 문제 될 것 없어요. 우리가 괴물로 치부하는 사람도 상관없어요. 미학적 체험은 윤리나 도학을 초월해 있는 것이니까요.

401p 우리가 괴물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에피파니를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술작품에는 다른 측면의 정서가 있어요. 즉 아름다움의 측면이 아닌 장엄함의 측면입니다. 우리가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장엄함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장엄은 정상적인 생명의 형상이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힘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대무변한 우주는 장엄합니다. 여기서말하는 괴물이란 조화와 질서와 윤리적인 행동에 대한 우리의 기준을 송두리째 무너뜨려버리는 무서운 존재, 혹은 무서운 도깨비를 말합니다. 파괴자 역활을 맡은 신의 모습에서는 윤리적.미학적 판단을 초월합니다. 윤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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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06:03:52 *.123.145.35

12월 5일

84번째

이번주는 2일 지각이다. 이틀연속. 벌써 마지막주이구나. 300일차도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아직 갈길이 멀지만 새벽시간의 소중함과 습관화는 이제 200일차를 채우면서 체득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이제 개인적으로 새벽시간을 좀더 늘리는 것이 우선의 과제가 될 것이다. 기상시간또한 30분 정도 땡겨야 할 것이고 아침시간은 고작 40-50분 정도할애를 하지 못하고 있다. 최소필요한 것이 두시간인데. ^^ 확실히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했던가? 얼마안되는 시간이지만 쌓이고 쌓여 책한권을 읽고 필사를 하는 (단지)하나의 결과물을 얻었다. 나로써는 첫번째 맞이하는 자신감이라고 할까? 아직 다른이들보다는 느리지만 꾸준함이라는 키워드를 내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신화의 힘은 아마 30대 나의 삶에서 가장큰 이정표를 세워준 책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곳의 모임과의 만남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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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06:04:19 *.123.145.35

12월 6일

85번째

 

천국이라는 개념은 어린시절부터 궁금하던 부분이었다. 정말 죽고 나면 아무런 걱정과 근심없이 천사들이 살고 있는 나라? 캠벨은 천국은 영원이 아닌 영속하는 곳이라고 이야기 한다. 시간을 초월한 그 너머의 영원과 단지 끝나지 않는 시간인 영속. 영원은 시간의 잣대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끝나지 않은 시간과 영원은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 영원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 이곳에 있다. "이 현세적인 고통과 말썽이 오고가는 하는 곳은 영원이라고 하는 심오한 경험 저 너머에 있다" 이건 이해하기 힘들다. 무슨뜻일까?

신화에서 차지하는 윤리. 종교는 자연스럽게 윤리적인 경험을 할필요가 없이 가르치는대로 따르라는 삶의 양식을 제공한다. 이것은 곧 우리와 타인을 동일시해야한다는 메세지.

캠벨은 지속적으로 천국이라는 곳은 시간이 없어져버린. 영속하는 시간임을 설명한다. 우리가 지금 여기 현세적 시공간에서 천국이 아니라 이곳에서 영원을 체험할수 있다라고 이야기 한다. 사람이 아닌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관계를 함께 했던 시간자체가 영원의 체험만큼 소중했다라는 회고. 이미 먼저 이세상을 떠난 사람들이지만 이러한 영원의 체험을 통해 아직도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

영생불사라는 말은 단지 육신으로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사는 삶의 영원성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

시의 존재이유. 메타포, 은유를 통해 언어로 표현할수 없는 궁극의 신비, 인간의 체험으로 표현할수 없는 광휘 에피파니를 표현한다.

인생은 목적이 아니라 살아가는 여정 자체라는 것. 많은 책과 글에서 나오는 이야기 이지만. 삶은 누군가 마치 만들어놓은 설계도를 따라 걸어가듯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어떤 원형질에 의해 인생이 풀어헤쳐진다. 그 원형질의 잠재력 에너지를 사는 것  바로 천복을 따르는 것이다.

캠벨이 말하는 세상의 종말이란.. 물리적인 세상의 마지막이 아니라 바로 에덴이 우리 도처에 있다는 인식의 변화.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임을 말하고 있다. 세계를 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순간이다. .

절정의 순간은 어떤 언어와 표현으로 나타낼수 없다. "아.." 라는 감탄사이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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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06:04:52 *.123.145.35

12월 7일

86번째

제일 마지막 장의 마지막 구절이다.

개인적으로는 많이 아쉬운 부분도 있다. 너무 책이 현학적이고 어렵다는 이유이다. 우리나라 말인데도 전체의 50%는 이해했으려나.. -.-.. 한글 자체도 어려운 단어와 처음보든 단어들의 향연에 사진을 끼고 봐야 했다.

마지막문장은 이책의 대미를 멋지게 장식한다. "아...."라는 감탄사에 함축된 의미. 이책의 처음부터 이지점까지 읽었다면 느낄수 있는 오묘한 단어??

이제 근 한달여만에 이책을 마치고 또 다시 새로운 책읽기의 여정을 시작한다. (새벽시간을 좀더 확장하여 조금은 더 속도를 내보자.)

 

403p 예수는 자기는 이 세상에 칼을 가지고 왔노라고 합니다만 저는 그가 우리를 치기 위해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자아를 절개하는 칼로 이해하는데요. 예수는 "너 자신에게 묶여 있는 자아를 잘라 자유롭게 하려고 칼을 가지고 왔다" 이런뜻이 아닐까요?

산스크리스트어로 이것을 "비베카"라고 합니다. "분별"이라는 뜻이지요.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것과 덧없이 지나가는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영원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다른곳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지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영속하는 곳일 뿐입니다. 끝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영원과는 다른데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이 현세적인 고통과 말썽이 오고가고 하는 곳은 영원이라고 하는 심오한 경험 저 너머에 있어요. 불교에서 이 세상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이 있어요. 시간이 있는 데에 슬픔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삶의 참 모습입니다.

신화에서는 윤리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어떤 역활을 합니까?

윤리는 우리와 타인이 하나인듯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요. 종교에서는 이런 경험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종교는 자기에게 유익한 방향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가르침으로써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라는 식의 삶의 양식을 제공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와 타인을 동일시하는 겁니다.

409p 천국이라는 것은 광휘에 휩싸인 하느님을 바라보는 어떤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시간이 없어져버립니다. 시간이 사라져버린 상태이지요. 영원은 영속하는 시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지상적 관계의 체험 속에서도 영원을 체험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은 사라진 부모, 친구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영생불사라는 말이 육신으로 영생하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지요.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의 영원성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굉장한 것이지요.

삶의 모든 문제는 존재하기 와 되기 를 맴돌고 있습니다.  되기는 단편적입니다만, 존재하기는 전체적인 겁니다. 아이시절, 사춘기, 성인, 모두 인간의 한 단편일수 밖에 없어요. 우파니샤드에서는 이세상을 빚은 창조의 대폭팔로 인해서 생긴 에너지는 만물에 시간의 단편을 나누어줍니다. 시간을 단편을 통하여 원초적인 존재의 광대무변한 힘을 체험하는 것 이게 바로 예술의 기능입니다. 순간 순간의 삶이 '살아 있음'의 환희를 드러내는 체험의 연속이어야 합니다.

410p 이 순간'이 바로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주제인 존재를, 우리 나름의 표현법을 통해서 그려내려고 하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술이 비추어 내는 것은 신에 대한 예술가의 생각, 신에 대한 사람들의 체험... 그러나 궁극적인 신비, 무량의 신비는 역시 인간의 체험 너머에 있어요. 우리의 체험을 언어로 드러내기는 해야겠지만 우리 언어는 그 체험에 훨씬 못미칩니다. 그래서 시가 있는 거지요. 시에서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 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는 정수를 통해야 드러납니다.
쇼펜하우어의 명문 <<개인의 운명에서의 명백한 의지에 대하여>>  에서 재밌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자기인생이 누군가의 명령과 계획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어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인생을 살면서 당한 중요한 사건은 외견상으로는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일관된 구성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듯 보입니다. 즉 우리의 인생도 우리 안에 있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는 우리 인생은 한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서 나오는 일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질상 우주의 의지라라고 할 수 있는 한 개인 의지의 동기 부여에 따라, 만사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412p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수 있겠지요. 잠재력은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행 그자체입니다.

413p 에덴은 있었던 게 아니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왕국은 도처에 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고통과 슬픔, 죽음과 폭력이 있는 이 세상이 바로 그렇게 보일 뿐이지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니라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415p 우리 이 하잘것 없는 인간은 이 하찮은 언어에 머무는군요. 아름답기는 하나 모자라서, 그리려고 해도..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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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06:05:15 *.123.145.35

87번째

그동안 개인노트에 적었던 단군일지를 정리하고 업로드 하였다.

매일매일 업데이트를 해야 하는데 출근시간과 항상 맞물려 헉헉거리는 시점에서 copy-paste는 왠지 잘 안가게 된다. 머 나름의 방식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새벽시간 수련시간이 워낙 짧다 보니 나타나는 부작용이기도 하다. 또한 하루시간중에서 중간중간 다시 업데이트하고 고치게 되는데 단군일지보다는 개인노트에 지우고 업데이트하는게 익숙하다보니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300일차에서는 어떤 방침이 내려질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단군일지에 초본을 기록하고 다시 업데이트하는 방향으로 고쳐야 할 것 같다.

이제 신화의 힘은 끝내고 다음 책은.. 300일차부터 이제 남은 기간동안은 새벽시간 동안 퍼즐이다. 부르릉.... 1년반이상 방치해둔 2000피쓰자리 직소퍼즐..

자 이제 200일차 단군파티를 기다려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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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16:29:49 *.118.58.120
한규님 저에요. 수희향이요^^

사실 "신화의 힘" 한권을 읽으면, 죠셉 캠벨의 전 생애를 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책이거든요. 그래서 처음 읽을 때는 사실 좀 뻑뻑하게 느껴질만큼 묵직한 그 무엇이 있기도 하고요. 그런만큼 이번 200일차,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서도 필사까지 하면서 캠벨의 책을 읽어내려가는 모습 참 보기 좋았습니다. 한규님이라면 끝까지 읽어내려가시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지난 호랑이 실험 모임이 제겐 또 다른 한규님을 뵐 수 있는 좋은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꿈벗이나 연구원 프로그램을 거치지 않고, 그 정도로 자신의 미래를 다듬어오신 모습 뵈면서, 한규님께서 바쁜 2백일차에도 정말 많은 생각을 하셨구나...라고 저 혼자 생각했었거든요.

애많이 쓰셨습니다. 그 분야가 워낙 다른 일 돌아볼 틈없이 바쁜 곳인데, 거기서도 화목한 가정을 꾸리시고, 게다가 자기계발의 끈을 놓치 않고 있는 그 모습에 제가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분의 출석부 공헌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저희 단군이를 만나 한규님의 2010년이 조금이라도 의미가 달랐기를 소망하며, 함께 해주심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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