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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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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3일 05시 29분 등록

사기열전 상(史記列傳 上)
사마천(司馬遷) 글/정범진외 옮김/까치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사마천은 역사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생몰연대에 대해 정확히 알려지고 있지 않으나 사후 여러 문헌에 의하여 추측할 뿐이다.

사마천은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태사공자서'와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報任安書), 그리고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의 '사마천전'이 주요 자료라고 할 수 있는데 한서는 위 두 글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으니 결국 주요한 자료는 <태사공자서>와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뿐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 사기의 각 편 끝에 '태사공왈(太史公曰)'로 시작되는 논평부분에 자신의 행적이 조금 실려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료의 빈약함으로 인해 사마천의 출생 및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출생시기는 기원전 153년,145년,135년등 여러 설이 있으나 기원전 145년이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부터 2천140 여년 전이고 前漢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이다.

사마천의 생애를 살펴볼 때, 사실 사마천의 일생 전체가 사기의 저작을 위해 바쳐진 생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기는 곧 사마천의 땀과 눈물과 한이 얼룩져 있는 생애의 농축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의 생애를 사기 저작이란 관점에서 다음의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1) 탄생 후 저작 착수 이전까지의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을 닦기 위한 예비기
(2) 38세에 태사령이 되어 사기저술의 준비작업을 하고 이어 실제로 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에 이릉(李陵) 사건에 연루되어 남근거세형인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 50세 경 출옥한 후 환관의 수장격인 중서령(中書令)이 되어 사기를 완성 시키게 되는 56세까지의 시기

태어난 곳은 하양(夏陽), 지금의 섬서성 한성현의 교외로, 보통 사마판 (司馬坂)이라 불리는 부근이다.(이 근처에 황하의 나루터로 유명한 용문(龍門)이 있어 등용문의 고사가 생겨난 곳이기도 하다) 이 나루터 가까이에 용문산이 있고 그 아래 구릉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부친을 따라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살았다.

그의 선조는 대대로 태사(太史:사관)였고 그의 부친 사마담도 학문에 조예가 깊었기에 사마천도 부친에게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가 열 살때 이미 고대문자로 된 경서를 암송할 수 있었고 좌전,국어,세본(世本)과 같은 역사문헌을 읽을 수 있었다.

선조가 태사였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부친은 마침내 한무제 때 태사령에 임명되었다. 수도 장안에 이주한 사마천은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을 스승으로 하여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배웠고, 당시 금문의 대가인 동중서(董仲舒)로부터 공양춘추(公羊春秋)를 배울 기회를 가졌으며 여러 학자들한테도 배웠다.

스무 살 되던 해 사마천은 2년간 천하여행에 나섰다. 이 여행은 부친의 강력한 후원하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역사유적을 탐방하여 잊혀진 사람들을 찾고, 사람들을 만나 인정이나 풍속을 이해하는데 여정을 보냈는데 이는 뒷날 사기저술을 위한 치밀한 사전계획의 실행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 자신의 여행기를 간략히 기록해 두었다.
스무 살이 되어 남쪽으로 강(江), 회(淮)를 두루 다녔고, 회계산(淮稽山)에 올라보고 우혈(禹穴)을 탐방하였으며......공자의 유풍(遺風)을 보았다..... 양(梁)과 초(楚)를 지나 돌아왔다.
이 장대한 역정은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회음(淮陰)을 답사하여 [회음후열전]을 지었고, 설현(薛縣)에서 자료를 채집하여 [맹산군열전]을 썼으며,주요인물들의 옛집을 방문하여 많은 일화를 들을 수가 있어 [번역등관열전]을 기록할 수 있었다.

장안으로 돌아온 지 얼마 뒤 사마천은 낭중(郎仲)에 임명되어 벼슬살이가 시작되었다.
이 무렵 같은 직위의 동료인 이릉(李陵)을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뒷날 사마천의 운명에 커다란 운명을 미친 인물이다.

나이 서른 무렵에 사마천은 황제를 수행하여 산천에 제사하고 전국 각지를 유람할 수 있은 기회가 또 한번 주어졌다. 이 여행으로 사마천은 무제가 실시한 대외정책의 실상의 일단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지방에 대한 견문은 뒷날 [화식열전]을 쓸 때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사마천은 부친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의 거의 전 지역을 견문할 수 있었다. 한무제가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거행하던 중 부친이 병을 얻었다. 낙양으로 돌아 온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들었다.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거라. 태사가 되면 내가 저술하고자 했던 것을 잊지 말아라...’

사마담은 자신이 태사령으로서 완수하고자 했던 사기의 저술을 자기를 대신해 끝마치도록 아들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무제 원봉 3년인 기원전 108년, 사마천은 아버지의 직을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37세가 되던 해였다.
사마천은 그 후 역법개정을 맡게 되었고 이 역법개정을 계기로 본격적인 사기저술에 착수하고 작업은 기원전 99년 [이릉의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계속되었다. 사기의 저술은 기원전 104년, 사마천이 그의 나이 42세에 시작되었다.

뜻하지 않은 이릉사건으로 이릉을 변호한 것이 무제의 미움을 사 황제를 무고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마흔 일곱살 이었다.
당시 사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돈 오십만냥으로 감형받는 것과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되는 것이었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사마천은 부친의 유언을 따르고 다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궁형을 자청하여 환관이 되었다. 부형(腐刑)이라 불리는 궁형은 사람이 당하는 모욕가운데 가장 심한 형벌이었다.

궁형을 받은 후 삼년 째 되던 해에 연호가 바뀌어(太始元年) 대사면령으로 옥중에서 석방된 사마천은 중서령에 임명되었고 사기의 집필을 계속할 수 있었다.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완성하여 후세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치욕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발분하여 사기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가 거의 완성될 무렵인 기원전 91년, 그의 나이 55세에 친구인 임안(任安)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착찹한 심정으로 서한(報任少卿書)을 보내 지난날 자신이 옥에 갇히고 사기를 저술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은 심경을 고백하였는데, 편지 내용중 有怨言, 下獄死라는 대목이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 처형당했는지,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치 않다. 사기 완성후 몇 년더 살다가 딸을 출가시키고 나서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사마천은 字가 子長이다.

[giant.x-y.net 인용]


사마천 연보

156년 한무제 유철 태어나다.

1세(145년) 사마천 하양현(현 섬서성 한성시 남쪽)의 농촌에서 태어나다. 이 때 한 무제의 나이는 12세

2세(144년) 사마천 부친 사마담은 농사를 지으며 사마서원에서 공부를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4세(142년) 사마천, 아버지를 따라 서원에서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다.

5세(141년) 경제가 세상을 떠나다. 무제가 16세에 즉위하다.

7세(139년) 무제, 자신의 능원을 장안성 80리 밖 무향(현 섬서성 홍평현) 에 조성하기 시작하고 이곳을 무릉(茂陵)이라 부르다. 사마담, 태사승이 되어 무릉축조에 참여하다. 사마천, 이 무렵부터 고문을 배우다.

8세(138년) 사마담, 태사령이 되자 장안으로 이주하여 천문,역법을 주관하다.

10세(136년) 사마천,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다

11세(135년) 황로학을 신봉하던 두(竇)태후가 세상릉 떠나다. 무제(22세),유가사상에 입각한 정치를 마음껏 펼치기 시작하다.

12세(134년) 유가를 대표하는 동중서와 공손홍이 전격 발탁되다.

13세(133년) 사마담이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사마천을 데리고 황하· 위수 일대를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다.(사마천의 현장답사가 시작됨)

14세(132년) 무제, 황하의 물줄기를 바꾸는 치수사업을 벌이고, 10만명을 동원하여 황하를 막다.

17~18세(129~128년) 사마천, 동중서에게 「공양춘추」를 배우고, 공안국에게「고문상서」를 배우다. (이때의 교육은 훗날 사기저술에 든든한 기초가 된다)

19세(127년) 무제, 봉건체제 강화를 위해 부보언의 건의에 따라 지방호족과 부호들을 무릉으로 강제 이주시키다. 이 무렵 이름난 유협 곽해가 유가파들의 박해를 받아 전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천은 이에 깊은 인상을 받아 「유협열전」을 쓰다. 사마천 장안으로 오다.

20세(126년) 사마천 학업을 일시 중단하고 아버지 권유로 천하를 답사하기 시작하다. 실지 답사는 약 2년으로 훗날 「사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다.

21세(125년) 흉노 칩입하다. 사마담, 무제를 수행해서 감천(甘泉)에 가다.

22세(124년) 사마천, 낭중이 되어 처음 벼슬살이에 나서다.

24세(122년) 사마천, 아버지와 함께 무제를 수행하여 옹(雍)에 가서 제사를 지내다.

30세(116년) 무제, 연호를 원정(元鼎)으로 바꾸다.

33세(113년) 무제, 지방 순시에 나서다. 사마천은 아버지와 함께 순시에 동행하여 각지의 민정과 풍속을 살피는 계기를 가지다.

35세(111년) 무제의 명을 받아 서남지방 문물을 관찰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지다. 이 경험은 「화식열전」의 저술에 큰 도움이 되었다.

36세(110년) 무제, 안정기반을 구축한 후 봉선(封禪)대제를 결심하다. 사마천, 봉선대제를 위해 지방으로 가던 중 아버지의 위독전갈을 받고 낙양으로 되돌아 오다. 아버지 담은 태사령이 되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뜨다. 천은 다시 봉선에 참관하다.

37세(109년) 무제, 치수사업을 벌이고, 천은 역대 치수사업을 개괄한 「하거서」를 쓰다.

38세(108년) 아버지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다. 이로써 필생의 저작 사기를 편찬하는 기점이 마련되다.

42세(104년) 사마천 주도하에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太初歷)을 완성하다. 사마천은 역법개정을 게기로 본격적인 사기저술에 착수하고, 작업은 「이릉의 화」가 일어날 때까지 6년간 계속되다.

47세(99년) 흉노외의 전투에서 패한 이릉을 보호하다가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 사형선고를 받다.

48세(98년) 사마천, 태사령직에서 파면되고 「황제를 무고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이 확정되다.

49세(97년) 사마천, 치욕을 감수하고 궁형을 자청하여 죽음을 면하다.

50세(96년) 무제, 연호를 태시(太始)로 바꾸다. 사마천은 사면되어 중서령의 직을 받다. 사기완성을 위해 온힘을 쏟다.

51~54세(95~92년) 사마천, 무제를 수행하여 지방 여러곳을 순시하고 돌아오다.

55세(91년) 사마천, 친구인 임안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서한문 「보임소경서」를 보내, 옥에 갇히고 궁형에 처한 경위와 그에 더욱 분발하여 사기를 저술하는데 혼심의 힘을 쏟은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다. (이 편지로 보아 이 무렵 사기가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임) 편지 중'有怨言, 下獄死'라는 대목이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처형당한 것으로 보인다.

[ 「지혜로 읽는 사기(푸른숲)」(김영수 글) 인용 ]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추운 겨울이 된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는 시들지 않는다(푸르게 남아있다)는 것을 안다”-공자-(13P)

공자는 말하기를 “군자는 죽은 뒤에 자기의 명성이 칭양되지 않을까 걱정한다.”라고 하였고, 가의는 말하기를 “탐부는 재물 때문에 목숨을 잃고, 열사는 명분 때문에 목숨을 바치며, 권세를 과시하는 사람은 그 권세 때문에 죽고, 서민들은 자기 생명에만 매달린다”라고 하였다.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가 비추어주고, 같은 종류의 물건은 서로가 감응한다. ”구름은 용을 따라 생기고, 바람은 범을 따라 일어난다. 그것처럼 성인이 나타나면 이에 따라서 세상 만물의 모습이 모두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13-14P)

'임금의 장점을 길러주고 그 결점을 바로 잡아주어야만 상하가 서로 친목하게 되는 것이다.‘(19P)

유세의 어려움이란 상대방(즉 군주)의 마음을 잘 알라, 나의 말을 거기에 들어맞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한비-「세난」편(25P)

무릇 일은 비밀을 유지함으로써 성사되고 말은 누설됨으로써 실패하게 된다.-한비-「세난」편(26P)

무릇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추앙하는 바를 미화하고 상대방이 추악하게 여기는 것을 덮어버릴 줄 아는 것이다.-한비-「세난」편(27P)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어려운 일이다.-한비-「세난」편(28P)

용이란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목줄기 아래에 한 자 길이의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데 사람이 이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여버린다. 군주에게도 (용처럼)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으면 거의 성공적인 유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한비-「세난」편(29P)

노자(老子)가 귀히 여긴 도(道)라는 것은 허무(虛無)한 것이며 자연에 순응하여 무위(無爲) 속에서도 각종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다.(30P)

옛말에 ‘실행에 능한 사람이라고 해서 꼭 말에 능한 것은 아니며, 말에 능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실행에 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손빈(孫臏)이 방연(龐涓)을 해치운 계략은 뛰어난 것이었으나, 그 전에 (자기 다리가 잘리는) 형벌을 당하는 재난에서 자신을 구해내지는 못하였다. 오기(吳起)는 무후(武候)에게 지형의 험고함이 임금의 덕행만 못하다고 설득하였으나 그가 초나라에서 행한 일은 각박하고 몰인정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니, 슬픈 일이로다!(44P)

“안회라는 자가 배움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요절하였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배움을 좋아하는 자가 없습니다”-공자-(61P)

자로가 정치를 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백성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솔선수범하고 백성들의 일, 즉 농사와 같은 것에는 몸소 애쓰는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더 보탤 것을 묻자, “시종여일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자로가 “군자는 용맹을 숭상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 답하여 “군자는 의(義)를 최상의 것으로 삼는다. 군자가 용맹을 좋아하고 의를 숭상하지 않는다면 난을 일으키고, 소인이 용맹을 좋아하고 의를 숭상하지 않는다면 도둑질을 한다”라고 말하였다.(63P)

자장이 녹(祿)을 구하는 것을 묻자, 공자가 답하여 “많이 듣고 그 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빼버린 다음, 그 나머지를 신중히 말한다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서 그 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빼버린 다음, 그 나머지를 신중히 행한다면 후회가 적을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다면, 녹이 바로 그 안에 있다”라고 하였다.(76P)

공자가 “무엇이냐, 네가 통달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되물었다. 자장이 “국(國)에서도 반드시 이름이 알려지고 가(家)에서도 반드시 이름이 알려지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가 “이것은 명망이지 통달이 아니다. 대저 통달한 사람은 질직(質直)하여 의(義)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살피고 안색을 잘 관찰하며,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나니, 이렇게 하는 사람은 반드시 통달하게 된다. 명망이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인(仁)을 취하면서도 행동은 이것에서 어긋나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옳다고 여겨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나니, 이렇게 하는 사람은 반드시 명망을 사취(詐取)하게 된다”라고 하였다.(76P)

자사가 수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하는 일 없이 녹이나 먹고 있고,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벼슬자리에 연연하여 녹이나 먹고 있는 것이 수치이니라”라고 하였다.(78P)

위앙은 말하기를 “확신 없는 행동에는 공명이 따르지 않고 확신 없는 사업에는 성공이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자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탁견을 가진 자는 반드시 백성들에게서 오만하다는 소리를 듣기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미 이루어진 일에도 어둡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일을 앞서서 알 수 있습니다. 백성이란 시작할 때 함께 의논할 수는 없으나 성과를 함께 즐길 수는 있습니다. 지고한 덕을 논하는 자는 세속과 타협하지 않으며 큰 성과를 이루는 자는 범인과는 상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으려면 구습(舊習)을 모범으로 삼지 않으며, 백성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구례(舊禮)를 쫓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92P)

조량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반성하면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 속에 있는 눈으로 보는 것을 명(明)이라 하며,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이기는 것을 강(强)이라고 합니다. 순(舜)임금의 말에도 ‘스스로 낮추면 더욱 더 높아진다’라고 하였습니다.(96P)

『시경(詩經)』에서, ‘쥐에게 예의가 있는데,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구나,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으면, 어째서 일찍 죽지 않는가’라고 하였습니다.(98P)

'차라리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가 되지 말라‘(111P)

이에 사마조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들으니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땅을 넓히기에 힘쓰고, 군대를 강성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기에 힘쓰며, 왕업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덕정(德政)을 널리 펴기에 힘쓴다고 합니다.”(139P)

사람들이 말하기를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을 귀하게 여기는 자는 귀하게 된다’라고 합니다.(172P)

'외부로부터 인재를 등용할 때에는 원수도 마다하지 않는다‘(173P)

무인군이 검으로 자결할 즈음 “내가 하늘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탄식하고, 이윽고 “나는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장평의 전투에서 조나라 사졸 수십만이 항복하였거늘 내가 속여서 구덩이에 묻어버렸으니, 내가 죽지 않는다면 누가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하고서 드디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96P)

“속어에 이르기를 ‘자[尺]가 비록 긴 것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더 긴 것과 비교하였을 때에는 짧고, 치[寸]가 비록 짥은 것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더 짧은 것과 비교하였을 때에는 길다’라고 하였다.(201P)

‘이로운 것에 따라 행동하면 원망(怨望)이 많다’(203P)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사물의 필연적 결과이며, 부유하고 귀하면 선비가 많고 가난하고 천하면 친구가 적은 것은 일의 당연한 면모입니다. 선생께서는 아침에 시장에 모이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날이 밝으면 어깨를 비비고 다투며 문으로 들어가는데, 날이 저문 뒤에는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침을 좋아하고 저녁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는 물건이 그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선생께서 지위를 잃으니 빈객들이 다 떠나갔는데, 이것을 가지고 선비들을 원망하면서 일부러 빈객들의 길을 끊을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께서는 예전과 같이 빈객들을 대우하시기를 바랍니다.-풍환이 맹상군에게 하는 말-(226-227P)

옛말에 ‘강한 자는 공격을 잘하고 약한 자는 수비를 잘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238P)

후생이 말하기를 “저도 마땅히 따라가야 하지만 늙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 대신 저는 일정을 계산하여 공자께서 진비의 군대에 도착하시는 날에 북쪽을 향하여 목을 잘라 자결함으로써 공자께 보답하겠습니다.”(248P)

‘사물의 이치가 극(極)에 달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데, 겨울과 여름이 서로 변화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치이다. 일이 발전하여 극에 달하면 위험해지는데, 장기 말을 쌓으면 무너지는 것이 이러한 이치이다’(256P)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처음이 없는 사람은 없으나, 끝을 잘 맺는 사람은 드물다”라고 하였고, 『역경(易經)』에는 “여우가 물을 건너다 끝내는 꼬리를 적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시작은 쉽지만 결과가 어렵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257P)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병사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근거지를 벗어나 멀리 원정을 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 “이러저리 날뛰는 교활한 토끼도 개를 만나면 잡히게 된다. 그러므로 다른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나는 추측해서 알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258P)

속담에 ‘마땅히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결단을 못 내리면, 도리어 화를 입게 된다’라고 하였는데, 춘신군이 주영(朱英)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267P)

속담에 “어리석은 군주는 그가 총애하는 사람에게만 상을 주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 그러나 영명한 군주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상은 반드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내리고 형벌은 반드시 죄를 지은 자에게 내린다”라고 하였습니다.(272P)

뛰어난 의사는 병자의 생과 사를 알아낼 수 있고, 훌륭한 군주는 일의 성패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시면 즉시 그것을 실행하고, 해가 된다고 생각하시면 즉시 버리고, 의심이 가시면 조금씩만 그것을 실행해 보는 것입니다.(273P)

속담에 ‘태양이 높이 솟았다가는 곧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곧 기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물이 발전하여 정점에 이르면 곧 쇠락합니다. 이것은 천지만물의 보편적 법칙입니다. 나아감과 물러감이 때와 더불어 변화하여 마땅함을 얻는 것은 성인의 떳떳한 도리입니다. 그러므로 ‘곧 국가의 정치가 올바르면 나아가 벼슬을 하고, 국가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물러나 숨는 것이 당연항 이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성인이 이르기를 ‘현명한 군주가 재위할 때, 이익은 벼슬하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원칙에서 벗어난 부귀는 나에게 뜬 구름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293-294P)

‘물을 거울로 하는 사람은 자신의 얼굴 생김새를 알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길흉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297P)

『역경(易經)』에 ‘끝까지 올라간 용은 뉘우칠 날이 있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르기만 하고 내릴 줄을 모르고, 뻗을 줄만 알고 굽힐 줄을 모르며, 나아가는 것만 알고 돌아설 줄을 모르는 사람을 비유해서 말한 것입니다.-채택이 범수에게-(298P)

신은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는 가까운 측근이라고 해서 벼슬을 주지 않고, 공이 많은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는 그에 맞는 일을 맡긴다”라고 들었사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재능을 살펴 관직을 주어야만 공을 이루는 군주가 되며, 덕행을 잘 헤아려 친구를 사귀어야 명성을 세울 수 있는 선비가 되는 것이옵니다.-악의가 왕 혜연에게-(305P)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이는 죽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처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326P)

“싸움이라는 것은, 정면에서 적과 맞서는 한편 예측하지 못한 계책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전투를 잘하는 사람은 남들이 예측하지 못할 병법이 무궁무진하다. 따라서 그들이 사용하는 정면적인 책략과 예측하지 못한 계책은 돌고돌아 계속 순환하여, 마치 고리에 처음과 끝의 구별이 없는 것과 같다. 병법을 쓰는 것은 무릇 처음에는 처녀처럼 얌전하고 약해 보여서 적들이 문을 열어둔 채 방비하지 않게 하며, 나중에는 도망가는 토끼처럼 날래서 적이 방비하려고 해도 그럴 여지가 없게 하는 것이다.”(330-331P)

지혜로운 자는 시기를 거역해 유리한 기회를 저버리지 않으며, 용맹한 자는 죽음을 겁내어 명예를 훼손하지 않으며, 충신은 자기 한 몸을 우선하고 군주를 뒤로 하지 않는다고 들었소.-노중련-(339P)

속담에 “백발이 되도록 친구로 오래 사귀었으면서도 새로 사귄 것처럼 마음을 모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예부터 사귄 것 같은 사람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이는 서로 상대의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 때문입니다.(345P)

여러 사람의 일은 무쇠라도 녹일 수 있고, 계속해서 쌓이고 쌓이는 참소의 말은 뼈라도 녹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348P)

『역경(易經)』에서 말하기를, “우물물이 맑아도 와서 마시지 않는구나.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함은, 이 물은 가히 마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왕이 명철하다면, 또한 그 복을 받는 법이다”라고 하였다.(358P)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얼굴을 아름답게 단장한다’(385P)



3. ‘내가 저자라면’

사기(史記)란 어떤 책인가?

史記는 중국 漢나라 무제 때 역사가 사마천이 편찬한 책이다. 太史令인 사마천이 적은 사서는 처음에「太史公書」(혹은 太史公記)로 불리었으나 위진(魏晋)시대에 와서「사기」라고 불리게 되었다.(삼국지위지의 왕숙(王肅)전기에서 사기라는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

史記는 중국 최초 문명시대인 黃帝시대에서 前漢 武帝시기까지 2,500 여년의 역사를 서술한 130권의 방대한 역사서이다. 사기가 씌어지고 난 후 2천년 동안 중국의 모든 역사서 중에서 가장 널리 읽혔던 책중의 하나였다. 그 체제는 후사에 正史의 모범이 되어 왔다.

사기는 전체적으로 기전체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이후 중국 역대 왕조사의 편찬에 채용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전체란 제왕의 즉위 연대에 따라 기록하는 단순한 역사편찬 방식이 아니라, 통치자를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속한 신하들의 전기 ·통치제도 ·문물등을 분류, 서술하여 왕조 전체의 체제를 이해하기에 편한 역사서술로서 역사적 사실 뿐 아니라 역사적 시각의 다양성까지 표현할 수 있어 생동감있는 역사를 재현할 수 있다. 즉 중국인의 時空에서 전개된 인간의 여러 활동 및 그 결과를 망라한 것이다.

따라서 '史記'는 한편의 운대한 通史이자 世界史이며, 동시에 종합사인 것이다. 이 때문에 史記는 시대의 繼起的인 변화와 여러 지역간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진행된 인간의 삶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의 인과적인 이해뿐 아니라 사건과 현상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보편적인 원리의 문에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史記'는 사마천 자신이 당시 士人으로서는 가장 치욕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宮刑을 받고 좌절과 울분속에서 史記라는 大史書를 완성한 비극적인 생의 경험이 점철된 역사서이기도 하다. 그의 문장을 보면 많은 사람들의 삶의 역정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추적하여 비판하면서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개인의 비극을 극복하여 절실하고 냉철한 역사적 진실의 추구로 승화시켜 객관적으로 역사를 평가하고 있다는데 사기의 매력이 있다. [giant.x-y.net 인용]


사기(史記)의 매력은?

●치우침 없는 역사의 기록
사기(史記)가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는 것은, 역사를 서술하는 사마천의 자세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사기(史記)의 열전 부분에서 우리는 의리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자객들의 기록인 '자객열전'(刺客列傳), 일종의 코미디언 일대기라고도 볼 수 있는 '골계열전'(滑稽列傳), 유명한 점쟁이들의 일대기인 '구책열전'(龜策列傳) 등도 볼 수 있다. 하찮은 부류의 사람들로 취급받던 그런 사람들의 일대기까지 빠짐없이 기록한 사마천의 자세는, 치우침 없이 사회와 역사의 모든 측면을 자세히 기록하여 남기겠다는 역사가로서의 사명감을 보여준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인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천승(千乘)의 왕이나 만가(萬家)의 제후 그리고 백실(百室)의 군(君) 조차도 가난한 것을 걱정하는 판에 하물며 일반 서민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부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사마천은 한 술 더 떠서 이렇게까지 말한다. '집이 가난하고 부모님은 연로하시고 처자식들은 밥벌이를 못할 지경에 처했다. 게다가 명절이 되면 조상에게 제사 지내거나 술자리를 마련할 돈도 없고 기본적인 의식주도 마련하지 못하는 주제에 스스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면 그런 분들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냉철한 현실주의적 시각
무척 냉정해 보이는 이러한 태도는, 그가 사회의 실상이나 인간의 본성을 무척 현실주의적으로 바라보았음을 보여 준다. 사마천은 역사를 도덕적, 윤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다. {사기}는 그 이후에 나온 중국의 어느 역사서보다도 자유분방하고 개성이 넘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이 읽고 느끼고 생각한 역사의 모습을 솔직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자신의 삶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하늘의 도는 착한 사람 편인가?
사기(史記)열전의 첫 부분은 '백이전'이다. 은주 혁명에 반대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백이(伯夷)의 고사에 대한 사마천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도는 반드시 착한 사람 편이라는 말이 있지만, 백이 같은 인물은 왜 그처럼 불행해야 했을까?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났던 안회는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하게 살다가 일찍 죽었다. 이와 반대로 도척 같은 이는 무수한 살인과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천수를 누렸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하늘의 도의 섭리는 올바른 것일까? 혹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악한 이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하늘의 도라지만, 사마천은 실제의 역사 속에서는 그런 도를 찾아보기 힘들지 않느냐는 이의를 제기한 셈이다.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한 자신의 처지 역시 그런 이의의 근거가 됨은 물론이다. 공자는 백이와 숙제가 자신들의 운명을 원망했는지 묻는 질문에 대해, 그들은 인(仁)을 완성했으므로 원망할 것이 없었다고 답했다. 공자는 인간의 행복과 도덕을 일치시키지만 역사가인 사마천은 행복과 도덕의 모순을 절감했다.

사마천이 제기한 의문은 유교적 모럴이 인간의 현실적인 삶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음을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도덕, 당위의 세계와 현실, 사실의 세계 사이에는 넘기 힘든 간격이 있다는 것. 사마천은 그런 간격을 메워 줄 초월적인 존재가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이 희박했던 시대를 살았다. 실로 여러 세기가 흐른 뒤 불교의 전래 이후에야 중국의 지식인들은 그런 의문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해답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KungRee.com 인용]


사기(史記)의 구성

사기(史記)는「本記」「表」「書」「世家」「列傳」의 전 130권으로 되어 있다. 사기는 모두 52만 6천여자로 이루어진 방대한 역사서다.

제 목 권 수 주 요 내 용
본기 30권 역대 왕조의 변천을 서술한 연대기
표 10권 각 시대에 대한 역사
서 8권 국가의 제제도의 연혁과 변천을 기록
세가 30권 봉건 제후의 연대기
열전 70권 개인의 전기


일반적으로 우리가 史記라 함은 사기열전을 떠올릴 만큼 사기의 다섯부문 중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또 분량이 가장 많다.

총 130권 중 70권이 개인의 구체적인 성공과 실패를 추척한 개인전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만큼 사마천은 역사를 개인의 능동적인 활동의 집적으로 보았고, 개인의 禍福과 역사의 흥망성쇠를 개인의 도덕과 능력, 이것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능동적인 노력여하의 결과로 설명한다.


사기열전(史記列傳)을 읽으며

●선(先)학습이 필요해...

무엇보다도 먼저 단편 단편의 이야기로만 읽다가 본격적인 역사서를 읽다보니 고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너무나 모자름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사실 한국역사도 제대로 꾀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 중국의 고대역사를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인가. 초반에는 그냥 읽으려 했지만 마치 전화번호부 책마냥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왕과 위인들의 이름, 그리고 각 나라의 명칭과 위치를 모르고서는 읽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나름대로 연도와 나라별 위치(국경이 붙어있는 나라끼리는 아무래도 전쟁이 일어나기 쉽다)를 노트에 정리한 후 읽으니 그나마 읽기가 편해졌다. 출판서에서 총 7권의 사기전집을 내면서 별도로 또는 사기열전이 아닌 다른 책에 간단한 역사정리를 해 놓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강제(?)로라도 선학습을 시킨다면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보다 편히 사기열전에 빠져들을 수 있을 듯 싶었다.

●역사적 의미 VS 개인 이야기

책을 읽는 내내 고민했던 부분이 이것이다. 시대적 상황, 역사적 관점 등 종합적 관점에서 입체적인 역사속 인물로써 열전의 개인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 시대를 살다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위대한 개인적 역사로써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쉽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자꾸 역사적 관점 특히 연도와 관련된 왕, 나라명, 수도까지 눈길이 가는 이유는 역시 학교교육, 특히 시험의 문제였다. 아직도 이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그래서 과감히 역사적 관점은 뒤로 미루고 개인적 역사로써 이야기 하나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이야기 속 상황의 위인들의 심리상태, 왜 그들이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왜 그렇게만 행동을 해야만 했는지 집중하자 보다 더 이야기가 재밌어졌고 보다 더 가슴속으로 다가왔다.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첫째, 감무의 손자인 감라는 12세의 나이에 진나라 재상이던 문신후 여불위를 섬겼다고 한다. 12세의 어린아이에 불과한 감라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의견을 믿고 맡기는 여불위, 진시황제는 진정한 영웅들인가? 아니면 과장된 역사의 기록인가?

둘째, 초나라의 춘신군, 제나라의 맹상군, 조나라의 평원군 그리고 위나라의 신릉군은 앞 다투어 사인들을 공손히 대접하고 빈객들을 조치하는데 서로 경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문객수는 공히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모두 3,000명이 기준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문객수의 기준은 3,000명인걸까? 아니면 큰 수의 표본이 3,000명인걸까? 사마천이 생각하는 문객수의 가장 큰 수가 3,000명이었던걸까? 궁금증이 일었다.

셋째, 백기왕전열전에서 진나라와 싸우던중 식량 보급로가 끊겨 무작정 굶으면서 구원군을 기다리던 조나라 군사들은 밥을 먹어본 지가 46일째에 접어들어, 안으로 은밀히 서로를 죽여 잡아먹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허풍도 이정도면 너무 심한거 아닌가? 생물학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믿어, 말어?

●주인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

옛말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얼굴을 아름답게 단장한다’(385P)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고대라 하더라도 사람의 목숨이 오늘과 같이 중요하지 않았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관의 차이 즉, 도(道), 의(義)를 위해서 그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은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소중한 것이라 하겠다. 현대적 사고방식으로는 이해는 할 수 있겠지만 감히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일이다.


마무리

고대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한마디로 ‘유세의 시대’였다. 수많은 인물들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도 했으며 유세에 성공하여 나라의 재상까지 올라가기도 했으나 한 순간에 목숨을 잃기도 했으며, 명예를 잃고 산속으로 들어가 아쉬운 생애를 마감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유세를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가 개인의 성공을 가늠할 수 있는 능력의 기준이였다.

대단하지 않은가? 자신의 나라출신도 아닌데 능력만 있다면 그 의견을 받아들이고 재상이란 높은 벼슬까지 부여한다는 사실이. 그렇다. 춘추전국시대는 그런 열린 의식이 있었기에 그러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활용되었던 것이다. 만약 그런 분위기가 있지 않았다면 인재들은 산속에 자신의 처소에 묻혀 아깝게 사라져 갔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경영방식이 바로 인재경영이라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인재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풍조가 되어 있을까? 인재를 언제든 받아들인다 말만 해놓고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혈연, 지연, 학연을 동원하는 것 아닐까?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고 바보는 바보를 알아보는 법이다. 고로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정책적으로 좋은 인재들을 계속 등용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 시대의 흐름을 보노라면 많은 아쉬움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 옛날이라 말할 수 밖에 없을 정도의 오래된 기원전 700년전부터 인재경영을 실시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그렇지 못하다는건 개인의 실속만 차리려는 얄팍한 관리자들의 일부분적인 문제인가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정책들에 의한 잘못된 시대적 흐름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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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2008.05.15 10:41:00 *.235.31.78
인간은 물만 먹고 40일을 살 수 있습니다.
매우 당황스럽지만,
가능하더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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