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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3일 11시 48분 등록
사기열전(1)-김원중 옮김/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 사마천(기원전 145년 ~ 90년)

사마천은 한나라 전성기인 한 무제 때 활동한 역사학자이자 문학자이다. 기원전 145년 지금의 중국 섬서성 한성시 출신이며 황제 측근에서 각종 기록을 담당하던 아버지 사마담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정진했다.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장안長安에 와서 당대 최고의 학자인 공안국과 동중서에게 고문을 배운다. 동중서를 통해서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20세 때 여행을 시작하여 역사 유적지를 찾아 자유롭게 천하를 방랑했는데, 이는 훗날 『사기』 저술의 자양분이 되었다.

그 후 그는 황제의 경호원 격인 낭중이라는 직책에 임명되지만 또다시 무제를 따라 순행하면서 거의 온 나라를 주유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고적을 탐방하고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의 나이 36세 때 아버지 사마담이 반드시 역사서를 집필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의 유언을 계기로 사마천은 새로운 삶의 목표를 갖게 된다. 그것은 아버지가 다하지 못한 대역사서를 완성하는 일이었다. 3년 후 사관직인 태사령에 오른 그는 B.C. 99년 이능의 투항 사건을 맞아 홀로 이능 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고 만다. 이 때 그의 나이 47살이었다.

1년 후 그에게 세 가지 형벌 중 하나를 고를 권리가 주어진다. 첫째 법에 따라 주살되는 것. 둘째 돈 오십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하는 것. 셋째 궁형을 받는 것이었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사마천은 부친의 유언을 따르고 다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궁형을 자청하여 환관이 된다.

부형(腐刑)이라 불리는 궁형은 사람이 당하는 모욕 가운데 가장 심한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완성하여 후세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치욕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일념으로 발분하여 사기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쓴 목적은 『사기열전』의 「태사공 자서」에 나오는데 이를 정리하면,

첫째, 발분의식의 소산이다. 궁현을 당한 것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한 구차한 행위가 아니라 글을 지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둘째, 역사적 사실의 포폄褒貶과 직서直書이다. 이는 그의 「태사공 자서」에서도 드러나지만 공자가 『춘추』를 서술한 방식에 바탕을 두고 후세 사람들에게 어떤 도덕적 규범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해제

『사기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 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적지 않다.[24]

이러한 열전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사마천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24]

개인적으로 기록한 역사 『사기』가 후대에 24사史의 필두로 거론되게 된 것은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한무제까지 이르는 유일한 통사체 역사서이기 때문이라는 점이 일차적인 이유이다. 또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역사 서술의 정확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절대 군주 위주로 재편되는 엄혹한 현실과 인간에 대한 성찰 즉 사마천의 역사를 보는 태도가 다른 역사서와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사기』가 문학서로서의 색채를 유발하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27]

1. 백이열전

저 서산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神農, 우 하나라 때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구나!

이들은 마침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이 노래로 미루어 본다면 원망한 것인가? 원망하지 않은 것인가?[64, 백이열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백이와 숙제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했어도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는 제자 일흔 명 중에서 안연顔淵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연은 늘 가난해서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면 이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65]

“내가 가난하게 살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경영하다가 실패하여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는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운세에 따라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쫓겼지만 포숙은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임금 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졌을 때, [나와 함께 곁에서 규를 도운] 소홀召忽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나는 붙잡혀 굴욕스러운 몸이 되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자그마한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준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72, 관․안열전]

이러한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흔히 도가 사상 또는 노장 사상이라고 한다. 도가 사상은 끊임없는 전쟁과 불안정 및 권력과 지위 다툼으로부터 벗어나 은둔과 도피를 일삼는 철학이다. 그래서 도가 사상은 군주 권력의 전제정치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저항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한다.[79, 노자․한비열전]

노자는 하지 않는 것[無爲]으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했다.[83]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라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내 주장을 그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는 데 있다.....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 버릴 줄 아는 것이다.[87, 한비자]

유세자는 군주가 꾸민 일과 같은 계책을 가진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칭찬하고, 군주와 같은 행위를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칭찬하며, 군주와 같은 실패를 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며 두둔해 주고, 군주와 같은 실수를 한 자가 있으면 그에게 잘못이 없음을 명확히 설명하고 덮어 주어야 한다. 군주가 유세자의 충성스러운 마음에 반감을 가지지 않고 주장을 내치지 않아야 비로소 유세자는 그 지혜와 언변을 마음껏 펼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군주에게 신임을 얻고 의심 받지 않으며 자신이 아는 바를 다 말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여 오랜 시일이 지나 군주의 총애가 깊어지면 큰 계책을 올려도 의심 받지 않고 군주와 서로 다투며 말하여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때 유세자가 국가에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명백히 따져 군주가 공적을 이룰 수 있게 하며, 옳고 그름을 솔직하게 지적해도 영화를 얻게 된다. 이러한 관계가 이어지면 유세는 성공한 것이다.[89, 한비자]

미자하의 행위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처음에는 현명하다고 칭찬을 받고 나중에는 죄를 입게 되었다. 그것은 군주가 그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에게 간언하고 유세하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를 살펴본 다음에 유세해야 한다.[91]

태사공은 말한다. “노자가 귀하게 생각하는 도는 허무虛無이고, 자연을 따르며 무위無爲 속에서도 다양하게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책은 말이 미묘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장자는 노자가 말한 도덕의 의미를 미루어 풀어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쳤는데, 그 요지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신불해는 손쉽게 도덕을 형명과 법술에 적용시켰고, 한비는 먹줄을 친 것처럼 법규를 만들어 세상의 모든 일을 결단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였지만 너무나 가혹하여 덕망이 부족했다. 이들의 학설은 모두 도덕에 그 근원을 두고 있지만 그 가운데 노자의 학설이 가장 깊다.”[92]

오자서는 공자 광이 오나라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는 속셈이 있어, 아직은 나라 밖의 일을 이야기할 때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공자 광에게 전제專諸라는 사람을 추천하고 물러나 태자 건의 아들 승과 함께 초야에 묻혀 농사를 지었다.[131]

태사공은 말한다. “원한 맺힌 사람이 끼치는 해독은 정녕 무섭구나! 임금이라고 신하에게 원한을 사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끼리야 어떠하겠는가? 일찍이 오자서가 아버지 오서를 따라 함께 죽었다면 하찮은 땅강아지나 개미와 무슨 차이가 있었겠는가? 그는 작은 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씻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겼으니 그 뜻이 참으로 비장하구나! 오자서는 장강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위급한 상황에 놓이고, 또 길에서 빌어먹을 때도 어찌 초나라의 수도 영을 잠깐인들 잊었겠는가? 그는 모든 고초를 참고 견뎌 내어 공명을 이룰 수 있었다. 강인한 대장부가 아니면 어느 누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143]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고 바른 예禮로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148]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들 중에서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안희라는 자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거듭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없습니다.”[149]

염구가 공자에게 물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실천해야 한다.”
자로가 물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아버지와 형이 살아 계신데 어찌 들은 것을 바로 실천하겠느냐?”
자화子華가 공자의 대답이 다른 것을 의아해 하며 물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어째서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하므로 제지한 것이다.”[152]

자공이 물었다.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160]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171]

“많이 듣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한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172, 공자]

“대체로 통달한 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잘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통달하게 된다. 그러나 명망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어진 척하지만 실제 행동은 완전히 어긋나면서도 그러한 것에 물들어 조금도 의심 없이 행동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이름을 얻게 된다.”[173, 공자]

“나는 말 잘하는 것으로 사람을 골랐다가 재여에게 실수하였고, 생김새만을 보고 사람을 가리다가 자우에게 실수하였다.”[174, 공자]

번수가 인仁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지智란 어떤 것인가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184]

효공은 위앙을 등용했지만, 위앙이 법을 바꾸려고 하자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비방할까 봐 매우 걱정이 되었다. 위앙이 말했다.
“의심스러워하면서 행동하면 공명이 따르지 않고, 의심스러워하면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자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남들이 모르는 지혜를 가진 자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오만하다는 비판을 듣게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미 이루어진 일도 모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일이 시작되기 전에 압니다. 백성은 일을 시작할 때에는 더불어 상의할 수 없으나 일이 성공하면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가장 높은 덕을 강구하는 자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큰 공을 이루는 자는 뭇사람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으면 구태여 엣것을 본뜨지 않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면 옛날의 예악 제도를 좇지 않았습니다.”
효공이 대답했다. “옳은 말이오.”
그러나 신하 감룡甘龍은 이렇게 말했다.
“옳지 않습니다. 성인은 백성의 풍속을 고지치 않고 교화시키며, 지혜로운 자는 법을 고치지 않고 다스립니다. 백성의 풍속에 따라서 교화시키면 애쓰지 않고도 공을 이룰 수 있고, 이미 시행되고 있는 법에 따라 다스리면 관리도 익숙하고 백성도 편안할 것입니다.”
위앙이 말했다.
“감룡의 의견은 속된 생각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옛 풍속에 안주하고 학자들은 자기가 배운 것에만 몰두합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지키게 할 수는 있지만 법 이외의 문제(변법)를 더불어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아, 은, 주 삼대는 예악 제도가 서로 다르지만 천하에서 왕노릇을 하였고 오백五伯(춘추오패)은 종법 제도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예법의 통제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법을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법에 얽매입니다.”
두지가 말했다.
“백 배의 이로움이 없으면 법을 고쳐서는 안 되며, 열 배의 효과가 없으면 그릇을 바꿔서는 안 됩니다. 옛것을 본받으면 허물이 없고 예법을 따르면 사악함이 없습니다.”
위앙이 말했다.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나라에 편하면 옛날 법을 본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은 옛 법을 따르니 않았지만 제왕의 일을 이루었고,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은 예법을 바꾸지 않았지만 멸망했습니다. 옛날 법을 반대한다고 해서 비난할 것도 아니고 옛날 예법을 따른다고 하여 칭찬할 것도 못 됩니다.”
효공이 말했다.“좋소.”효공은 마침내 옛 법을 바꾸어 새로운 법을 정하도록 하였다.[200]

“돌이켜 자기 마음속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성찰할 수 있는 것은 명明이라고 하며,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强이라고 합니다. 순 임금도 ‘스스로 자신을 낮추면 더욱더 높아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순 임금의 도를 따라야 합니다. 제 의견 따위는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207, 조량]

상군이 말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겉치레 말은 허황되고, 마음속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되며, 듣기 괴로운 말은 약이 되고, 달콤한 말은 독이 된다.’”[208]

『시경』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는 흥하고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 라고 했습니다..... 『시경』에서는 ‘덕을 믿는 자는 일어나고 힘을 믿는 자는 멸망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처지는 아침 이슬처럼 위태로운데도 아직 목숨을 연장하여 오래 살기를 바라십니까?[210]

“여섯 나라가 합종하여 함께 진나라에 맞서면 진나라 군대는 틀림없이 감히 함곡관으로 나와 신동을 위협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226, 소진열전]

『주서』에서는 ‘처음에 싹을 자르지 않아 무성해지면 어떻게하나? 터럭같이 작을 때 치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미리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재앙이 이르게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께서 만일 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여섯 나라가 합종으로 친교를 맺고 힘을 합쳐 뜻을 하나로 한다면 강력한 진나라를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231, 소진열전]

“첩은 술에 독이 들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러면 주모主母가 내쫓길까 두렵고 말을 안 하자니 주인을 죽이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넘어져 술을 엎질렀습니다. 주인은 몹시 화를 내며 그녀에게 채찍을 쉰 대나 쳤습니다. 첩은 일부러 넘어져 술을 엎어서 위로는 주인을 살리고 아래로는 주모를 쫓겨나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매 맞는 것만은 피하지 못했습니다. 어찌 충성스럽고 신실하다고 해서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신의 허물은 불행하게도 이러한 것과 비슷합니다.”[244, 소진열전]

태사공은 말한다. “소진의 형제 세 사람은 모두 제후들에게 유세하여 이름을 드날렸으며, 그들의 술수(종횡책)는 권모와 변화에 뛰어난 것이었다. 소진이 제나라에서 반간反間(첩자를 이용하여 적의 내부를 이간시켜 자기 쪽이 승리하게 하는 것)의 혐의를 받고 죽으니 천하 사람은 모두 그를 비웃고 그 술수를 배우기 꺼려했다. 그러나 세상에 퍼진 소진의 사적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이 많은데, 그것은 시대를 달리하는 사적을 모두 소진에게 끌어다 덧붙였기 때문일 것이다. 소진이 보통 사람의 집에서 일어나 여섯 나라를 연합시켜 합종을 맺게 한 것은 그 지혜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래서 나는 시대 순서에 따라 그의 경력과 사적을 서술하여 유독 그만이 나쁜 평가를 듣지 않도록 하였다.”[260, 소진열전]

장의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아! 당신이 이 글을 읽어 유세하지 않았던들 어찌 이런 수모를 겪었겠습니까?”
그러자 장의는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내 혓바닥이 아직 붙어 있는지 보아주시오.”
장의의 아내는 웃으면서 말했다.
“혀는 붙어 있네요.”
장의가 말했다.
“그럼 됐소.”[265, 장의 열전]

신이 듣건대 깃털도 낳이 쌓이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이 부러지며,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이고, 여러 사람의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고 합니다.[275, 장의열전]

“일찍이 왕께 변장자卞莊子라는 이가 호랑이를 찔러 죽인 일을 들려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까? 변장자가 호랑이를 찌르려고 하자, 묵고 있던 여관의 심부름하는 아이가 말리면서 ‘호랑이 두 마리가 소를 잡아먹으려 합니다. 먹어 봐서 맛이 좋으면 분명히 서로 다툴 것입니다. 다투게 되면 반드시 싸울 테고, 서로 싸우게 되면 큰 놈은 상처를 입고 작은 놈은 죽을 것입니다. 상처 입은 놈을 찔러 죽이면 한꺼번에 호랑이 두 마리를 잡았다는 명성을 얻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한나라와 위나라가 싸움을 벌인 지 한 해가 넘도록 해결이 나지 않았다면 큰 나라는 타격을 입고 작은 나라는 멸망할 것입니다. 타격을 입은 나라를 치면 한꺼번에 둘을 얻는 이득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변장자가 호랑이를 찔러 죽인 것과 같은 일입니다.[303, 장의열전]

태사공은 말한다. “삼진三晉에는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에 능한 유세가가 많았다. 합종론과 연횡론을 주장하여 진秦나라를 강하게 만든 자들은 대체로 모두 삼진 사람이다. 장의가 일을 꾸민 것은 소진보다 더 심한 데가 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소진을 더욱 미워하는 까닭은 그가 먼저 죽었기 때문에 장의가 그의 단점을 부풀려 들추어내고 자신의 주장을 유리하게 하여 연횡론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두 사람은 참으로 나라를 기울게 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고 하겠다!”[305, 장의열전]

태사공은 말한다. “저리자는 진나라 혜왕의 골육지친이니 중용된 것은 세상의 이치이다. 그러나 진나라 사람들이 그의 지혜를 칭찬하였으므로 [나는] 그 사적을 많이 실었다. 감무는 하채의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몸을 일으켜 그 이름을 제후들 사이에 떨치고 강한 제나라와 초나라에서 중용되었다. 감라는 나이가 어리지만 한 가지 기묘한 계책을 생각해 내어 후세에 이름이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행실이 성실한 군자는 아니지만 전국시대의 책사策士였다. 바야흐로 진나라가 강성해졌을 때 천하는 더욱 권모와 술수로 치달으려 했던 것이다.”[328, 저리자․감무열전]

신이 듣건대 “옛 군자는 사람과 교제를 끊더라도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기 결백을 밝히려고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라고 합니다.[516, 악의열전]

“저 진나라 왕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궁정에서 꾸짖고 그 신하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소. 내가 아무리 어리석기로 염 장군을 겁내겠소?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도. 만일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어울려서 싸우면 결국은 둘 다 살지 못할 것이오. 내가 염파를 피하는 까닭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하기 때문이오.”[532, 염파․인상여열전]

태사공은 말한다.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돌려받고 기둥을 노려볼 때라든지 진나라 왕 주위에 있던 신하들을 꾸짖을 때 그 형세는 기껏해야 죽음뿐이었다. 선비 중에 어떤 이는 겁을 집어먹고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상여가 한 번 용기를 내자 그 위세가 상대편 나라까지 떨쳤고, 물러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겸손히 양보하니 그 이름은 태산처럼 무거워졌다. 인사여는 지혜와 용기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545, 염파․인상여열전]

“충성스러운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조 있는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소..... 살아서 의로운 일을 못할 바에는 차라리 가마솥에서 삶겨 죽는 편이 낫소.”[555, 전단열전]

여러 사람 입은 무쇠라도 녹일 수 있고, 헐뜯는 말이 쌓이고 쌓이면 뼈라도 녹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576, 노중련․추양열전]

『역경』에 “우물물이 흐렸다가 맑아져도 마시지 않으니 내 마음이 슬프구나. 이 물을 길어 갈 수는 있다. 왕이 현명하면 모든 사람이 그 복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왕이 현명하지 않은데 어찌 목이 있겠는가![590, 굴원․가생열전]

환공이 화를 내며 그 약속을 어기려고 하니 관중이 이렇게 말했다.
“약속을 어기면 안 됩니다. 작은 이익을 탐하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신다면 제후들의 신뢰를 잃고 천하 각국의 지지를 잃게 됩니다. 그러니 약속대로 땅을 돌려주시는 편이 낫습니다.”[626, 자객열전]

“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얼굴을 단장한다고 했다. 이제 지백이 나를 알아주었으니 내 기필코 원수를 갚은 뒤에 죽겠다.”[630, 자객열전]

“신이 듣건대 ‘현명한 군주는 다른 사람의 아름다운 이름을 가리지 않고, 충성스러운 신하는 이름과 지조를 위하여 죽을 의무가 있다.’라고 합니다. 전날 군왕께서 신을 너그럽게 용서한 일로 천하 사람들 가운데 당신의 어짊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오늘 일로 신은 죽어 마땅하나 모쪼록 당신의 옷을 얻어 그것을 칼로 베어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도록 해 주신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이것은 신이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지만 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은 것뿐입니다!"[633]

옛날에는 천하가 흩어지고 어지러워도 아무도 이를 통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후들이 나란히 일어났고, 말하는 것마다 옛것을 끌어내어 지금의 것을 해롭게 하고, 헛된 말을 꾸며서 실제를 어지럽혔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배운 것을 옳다고 여기고 조정에서 세운 제도를 비난하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를 통일하고 흑백을 가려 천하에 오직 황제 한 분만이 있도록 정했습니다. 그런데 사사로이 학문하는 자들은 서로 모여 이미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허망한 것이라고 합니다. 조칙이 내려졌다는 말을 들으면 각자 자기가 배운 학설에 근거하여 그것을 비판하고, 집으로 들어가서는 마음속으로 헐뜯고 밖으로 나와서는 길거리에서 논의합니다. 그들은 군주를 비방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고,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겨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어 비방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금지하지 않으면 위로는 군주의 권위가 떨어지고 아래로는 당파가 이루어질 테니 금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청컨대 모든 문학과 『시경』, 『서경』, 제자백가의 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이것을 없애도록 하고 이 금지령을 내린 지 삼십 일이 지나도 없애지 않는 자는 이마에 먹물을 들이는 형벌을 가하여 성단城旦(사 년 동안 새벽부터 일어나 성 쌓는 일을 하는 죄수)으로 삼으십시오. 의약, 점복占卜, 농사, 원예에 관한 책은 없애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배우고 싶은 자는 관리를 스승으로 삼으면 됩니다.
시황제는 그 제안을 옳다고 여겨 『시경』, 『서경』, 제자백가의 책을 몰수하고 모든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어 천하에 그 누구도 옛것을 끌어들여 지금 세상을 비판하지 못하게 했다.[669, 이사열전]

한비자는 “자애로운 어머니에게는 집안을 망치는 자식이 있지만 엄격한 가정에는 거스르는 종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잘못을 하면 반드시 벌을 주기 때문입니다.[684, 이사열전]

태사공은 말한다. “이사는 육경의 근본 뜻을 잘 알면서도 공명정대하게 정치를 하여 군주의 결점을 메워 주려 힘쓰지 않고, 높은 작위와 봉록을 누리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군주에게 아첨하고 좇으며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기만 했다. 조칙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였으며, 조고의 간사한 의견을 따라 적자를 폐하고 첩의 자식을 제위에 오르게 했다. 제후들이 이미 뒤돌아선 뒤에야 비로소 군주에게 충고하려고 했으니 때가 너무 늦었구나! 세상 사람은 모두 이사가 충성을 다했는데도 오형을 받고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근본을 살펴보면 세속의 말과는 다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사의 공은 주공이나 소공과 어깨를 겨룰 만하였을 것이다.”[698, 이사열전]

‘경솔한 생각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고, 한 사람의 지혜로는 군주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707, 몽염열전]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북쪽 변방 지역에 갔다가 지름길로 돌아왔다. 길을 가면서 몽염이 진나라를 위해 쌓은 장성의 요새를 보니, 산악을 깍고 계곡을 메워 지름길을 통하게 했으니 진실로 백성의 힘을 가벼이 여긴 것이 분명하다. 진나라가 처음 제후를 멸망시켰을 때 천하의 민심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전쟁의 상처도 채 가라앉지 않았는데, 몽염은 이름 있는 장수로서 이러한 때에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고 늙은이를 모시고 고아를 돌보며 모든 백성을 안정되고 평화롭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강력히 간언하지 않고 도리어 시황제의 야심에 영합하여 공사를 일으켰으니 그들 형제가 죽음을 당한 것은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찌 지맥을 끊은 탓으로 돌리랴.”[711, 몽염열전]

태사공은 말한다. “장이와 진여는 어진 사람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그들의 빈객과 종들까지도 천하의 준걸이 아닌 이가 없어서 제각기 살고 있는 나라에서 경상卿相의 자리를 얻었다. 장이와 진여가 처음에 빈궁할 때에는 서로 죽음을 무릅쓰고 신의를 지켰으니, 어찌 서로 돌아보고 의심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나라를 움켜쥐고 권력을 다투게 되자 마침내 서로를 멸망시켰다. 예전에는 서로 앙모하고 신뢰함에 성의를 다하더니 나중에는 서로 배반하고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였으니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 그들의 권세와 이익만 좇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비록 명예가 높고 빈객이 많았다 해도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태백太伯이나 연릉延陵의 계자季子와는 상황이 서로 다르다고 하겠다.”[739, 장이․진여열전]

“인생은 흰 망아지가 [작은 문] 틈새로 달려 지나가는 것처럼 매우 짧소. 지금 한나라 왕은 오만하여 다른 사람들 업신여기고, 제후와 신하들을 노예처럼 꾸짖고 욕하며 위아래의 예절이 조금도 없소. 나는 그러한 꼴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소.”[745, 위표․팽월열전]

태사공은 말한다. “영포의 조상은 『춘추』에 ‘초나라가 영英과 육六을 멸망시켰다.’라고 되어 있는 영씨로서, 고요皐瑤(순 임금 때 형옥刑獄을 맡은 관리)의 후예가 아닐까? 몸에 형벌을 받고서도 어떻게 빨리 일어났을까? 항우가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 사람은 1000만명이나 되지만, 영포는 늘 가장 포악한 일을 하는 자의 우두머리였고 공적은 제후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그래서 왕이 될 수는 있었지만 자신도 세상의 큰 치욕을 피하지는 못했다. 재앙은 사랑하던 여자에게서 싹텄고, 질투가 우환을 낳아 마침내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었구나!”[770, 경포열전]

“병법에는 죽을 곳에 빠뜨린 뒤라야 비로소 살릴 수 있고, 망할 곳에 둔 뒤라야 비로소 멸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있잖소? 내가 평소부터 사대부를 길들여 따르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시장 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몰아다가 싸우게 한 것과 같으니, 그 형세가 죽을 땅에 두어 저마다 자신을 위하여 싸우게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곳을 준다면 모두 달아날 텐데 어떻게 이들을 쓸 수 있겠소?”[788, 회음후열전]

“군사를 잘 쓰는 사람은 이쪽의 단점을 가지고 적의 장점을 치지 않고, 이쪽의 장점을 가지고 적의 단점을 칩니다.”[790, 회음후열전]

‘용기와 지략이 군주를 떨게 만드는 자는 그 자신이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한다.’[802]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회음에 갔을 때 회음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말이 한신은 평민일 때에도 그 뜻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고 한다. 그 어머니가 죽었을 때 가난해서 장례도 치를 수 없었지만 [결국] 높고 넓은 땅에 무덤을 만들어 그 주위에 집이 1만 호나 들어설 수 있게 했다고 한다. 내가 그 어머니의 무덤을 보니 정말로 그러했다.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워 겸양한 태도로 자기 공로를 뽐내지 않고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다면 한나라에 대한 공훈은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망太公望 등에 비할 수 있고 후세에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가 이미 안정된 뒤에 반역을 꾀하였으니 온 집안이 멸망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811]



3. 내가 저자라면

『사기』는 사마천이 기전체로 쓴 최초의 역사서다. 『사기』가 씌여지기 전까지는 편년체로 역사서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편년체란 우리가 일기를 쓰듯이 연대순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공자가 편찬한 『춘추春秋』가 대표적인 예이다. 기존의 역사 서술방식을 답습하지 않고 독특한 방식을 채용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마천의 천재적인 창의성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사기』는 「본기本紀」 12편, 「표表」10편, 「서書」8편, 「세가世家」30편, 「열전」 70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다섯 부분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유사한 내용이 서로 겹치는 경우도 있다.

「열전」에서는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선정하고 이들 개인의 전기를 통해서 역사를 들여다보는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사마천은 그 인물의 전기에 대한 나열식 정보를 제공하기 보다는 그 인물을 나타내는 특징적인 사건들을 제시하고, 그 사건을 통해 그 개인과 역사를 조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사기열전』은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한 다양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사마천 자신이 궁형의 치욕을 당하고, 스스로 인생에 대한 깊은 회한과 의문을 던지며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사마천이 이런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가 이해되는 바이다.

이 책의 원전에 대해서 책의 구성이나 장단점을 기술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사마천이 2000여년 전에 개인적으로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단, 이 책의 옮긴이(역자)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배울 점과 아쉬운 점이 나타난다.

우선 배울 점으로, 역자는 열전 70편의 서두에 각각 1페이지 정도의 해제를 수록했다. 이 해제에서는 각 편의 역사적 배경, 등장인물에 대한 정보, 해당 편의 내용 요약과 다른 편들과의 관계 등을 설명함으로써 본문 내용을 읽기 전에 사전 지식을 제공해주고, 이를 통해 독자들이 쉽게 원전 내용에 접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각 편의 원전 내용에서 몇 개의 중심되는 문장(Key Sentence)을 발췌하고, 그 중심 문장으로 단락을 구분하여 원전을 해석한 것도 매우 돋보이는 접근방식이다. 이 방식은 독자들이 방대한 원전 내용을 요약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사전식으로 편집되어 독자가 관심 갖는 부분을 찾아서 읽을 수 있도록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각주를 각 편의 말미에 수록하는 방식은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참고 할만한 아이디어라 생각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사서인데 연대표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 많은 나라와 관련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흥망성쇠가 나타나는데, 이를 연대표를 통해 정리해 주면 독자들의 책 읽기가 한층 수월해 질것 같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의 지도를 통해 각국의 위치와 변화 과정을 설명해 주면 독자들이 시각적, 입체적으로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나를 낳아 준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72, 관․안열전]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라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내 주장을 그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는 데 있다.....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 버릴 줄 아는 것이다.[87, 한비자]

“많이 듣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한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172, 공자]

상군이 말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겉치레 말은 허황되고, 마음속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되며, 듣기 괴로운 말은 약이 되고, 달콤한 말은 독이 된다.’”[208]

신이 듣건대 “옛 군자는 사람과 교제를 끊더라도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기 결백을 밝히려고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라고 합니다.[516, 악의열전]

여러 사람 입은 무쇠라도 녹일 수 있고, 헐뜯는 말이 쌓이고 쌓이면 뼈라도 녹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576, 노중련․추양열전]

한비자는 “자애로운 어머니에게는 집안을 망치는 자식이 있지만 엄격한 가정에는 거스르는 종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잘못을 하면 반드시 벌을 주기 때문입니다.[684, 이사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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