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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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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일 09시 58분 등록
 [사기열전]

 (원제: 史記列傳 / 사마천 司馬遷, 김원중 옮김)


* 저자에 대하여


  사마천은 용문(현 섬서성 한성현) 출신으로 출생과 사망년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대략 한 경제 5년, 즉 기원전 145년에 태어나 대략 한 무제 3년, 즉 기원전 90년경까지 약 58세를 산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한나라가 건국한지 약 60여년이 지나 경제가 완전히 회복하고 국력도 상당히 강성해진 때였다. 이런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무제는 국내 정치에서도 유가 사상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개혁의 주목표는 지방에 할거하던 제후국의 세력을 줄이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것으로 황제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소금, 철기, 동전 주조 등 중요한 산업을 국가가 통제하는 한편 각종 경제정책과 교육정책을 개편했다. 또한 주변 이민족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통해 국토를 넓히고 한나라의 위세를 과시했다.

  한 무제의 시대는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전성기였지만 그 이면에는 계속되는 전쟁과 노역, 그리고 통치계층의 사치와 낭비로 인한 일반 백성의 엄청난 고통이 있었으며 황제권력  강화정책이 독재정치로 이어져 조정대신은 물론 황후와 태자까지 한 무제의 눈에 벗어나면 바로 죽임을 당하는 어두운 시절이기도 했다.


  사마천의 선조들은 주나라 왕실의 역사기록업무를 담당했던 사관을 역임했으나 주 왕실이 몰락하면서 대대로 세습되던 가업도 단절되었고, 그 후 수백 년이 지나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이 한나라의 태사령(천문과 역법, 역사를 기록하는 임무)에 봉직하면서 다시 역사가로서 가문의 전통이 이어진다. 사마담은 약 30여 년간 사관으로 재직하면서 이미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사기>를 집필할 생각이었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아들인 사마천에게 자신의 과업을 이어줄 것을 유언한다. 이때 사마천의 나이가 36세였다.

  어려서부터 한자보다 더 어렵다는 옛문자(고문)을 익히고 아버지로부터 사관이 되기 위한 다양한 교육을 받아오던 사마천은 20세 때 우왕과 순임금의 묘를 비롯하여, 굴원이 투신한 곳, 항우와 유방의 격전지 등 역사의 현장을 직접 다니며 그때의 감회를 기록하는 긴 여행을 했으며, 이때의 여행을 후대에 ‘독만권서 행만리로 讀萬卷書 行萬里路’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여행했다는 뜻)라고 일컫는다.

  사마천은 약 3년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행에서 돌아와 27세에 황제의 비서관 역할을 하는 하급관리인 낭중에 올랐으나, 크게 두각을 보이진 못하고 십여 년 동안 줄곧 낭중에 머물렀다.


  아버지의 죽음 3년 후, 사마천은 아버지가 맡던 태사령을 계승하여 직분을 수행하는 한편, 아버지가 남긴 원고들을 정리하며 글을 쓰는데 매진한다.

  그러던 중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패하고 투항한 이릉을 두둔하여 무제의 노여움을 사고 사형판결을 받았다. 가난한 사마천은 사형을 면제받기 위해 50만전의 돈을 낼 수 없었고 결국 치욕의 궁형을 받게 된다. 이 때 사마천의 나이는 47세, 기원전 99년이다.

  절친한 친구 임안마저 자결을 택하지 않은 사마천을 비난하였으나 사마천은 유명한 <보임안서>에서 치욕을 무릅쓰고 궁형을 택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노예나 비첩 같은 존재들도 오히려 자결할 줄 아는데 하물며 내가 어찌 그렇게 할 수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치욕을 참고 견디며 더러운 흙 속에 뒹구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까닭은 내 마음속의 소원을 다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고, 비루하게 살다가 죽을 경우 나의 글이 후세에 남겨지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네.

  이제 내가 저술한 이 글이 세상에 나와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면, 내가 이전에 당했던 굴욕이 보상되리라고 믿네. 이제 더 참혹한 형벌을 당한다 할지라도 어찌 후회됨이 있겠는가?”


  이러한 사마천의 다짐은 대나무를 깎아 만든 죽간과 나무를 깍아 만든 목간에 총 52만 6천 5백자의 한자로 쓰여진  필생의 역작 <사기>로 드러났고, 사마천은 죽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가볍게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다짐을 지켰다.


  사마천의 <사기>는 황제로부터 한 무제에 이르는 약 3천년을 기록한 통사이다. 제왕을 기록한 12본기, 연대기에 해당하는 10표, 제도를 정리한 8서, 제후를 기록한 30세가, 의롭거나 탁월한 인물을 기록한 70열전, 이렇게 다섯 가지 형식을 유기적으로 엮어 총 130편으로 묶었다. 기존의 역사책은 연도별로 기록하거나 사건 위주로 정리한 데 비해 <사기>는 인물 위주로 기록하여 본기의 ‘기’와 열전의 ‘전’을 뽑아 ‘기전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저술 방식은 그 후 대대로 계승되어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삼국사기>나 <고려사>같은 역사서도 모두 기전체 방식을 따르게 되었다.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시기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 후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대략 기원전 90년경으로 추정할 뿐이다.  


*** 참고> 중국의 고대 왕조


1. 삼황 시대 - 신농씨, 복희씨, 수인씨가 다스렸다는 신화와 전설의 시대

2. 오제 시대 - 전설적인 다섯 임금이 통치한 황하 문명의 성립 시기

3. 하왕조 (B.C. 21C~B.C. 16C) -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중국 최초의 왕조

4. 은왕조 (B.C. 16C~B.C. 11C) - 고대 문명의 유적과 유물을 보여주는 갑골문자의 나라

5. 주왕조 - 천명사상과 왕도 정치 이념으로 건설된 봉건제 국가

   5-1. 서주 시대 (B.C. 11C~B.C. 770년) -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의 주나라

   5-2. 동주 시대 (B.C. 770년~B.C. 256년) -제자백가가 활약했던 춘추 전국시대

6. 진왕조 (B.C. 221년~B.C. 206년)-중앙집권적인 군현제를 실시한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7. 한제국 (B.C. 206년~A.D. 5년) - 유학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번영을 이룩한 제국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역자서문

통사체 역사서.

전설의 황제 시대로부터 한 무제 때까지 2000년을 아우르고 있다.

[사기]중에서도 [열전] 70권은 주나라 붕괴 후 등장한 50개 제후국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칠웅(진, 한, 위, 제, 초, 연, 조)의 흥망성쇠를 주축으로 하며,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 이후 진한 건국 이전까지의 과도기로서 각국의 제후 왕들이 천하의 패권을 쥐려는 야심을 품고 서로 죽고 죽인 혼란기였다. 끊임없이 동쪽 진출을 모색한 서쪽의 절대 강자 진나라와 남방의 지배자 초나라, 그리고 북방의 실력자 연나라, 이렇게 삼국이 큰 흐름을 주도했고, 이들 틈바구니에 낀 조, 한, 위, 제 이 네 나라는 국가 보존을 위한 전략 마련에 고심했다. [5]


나는 기본적으로 번역은 원전의 뜻을 자구 하나하나 따져가며 번역하고 난 다음에 그에 수반되는 전고나 논의의 근거를 찾아 다시 그것을 원전의 문맥에서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9]


해제

[사기]는 [본기] 12편, [표] 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1]


史詩 역사를 담은 시 [사기]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가?

중국 고대 역사서의 세 가지 편찬 체제인 편년체, 기사본말체, 기전체 가운데 기전체의 효시가 [사기]이다. 기전체는 본기와 열전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먼저 시대 순으로 제왕의 언행과 행적을 중심으로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외교 등 중대한 사건을 서술하고, 제왕이나 제후를 보좌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마천은 자신이 기술하고자 하는 시대의 사회 구조와 그 내부의 발전상, 인물과 사건 및 제도 등 그 사회가 가진 제반 현실에 역사적 해석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료 해석에 충실하면서도, 역사의 발전적 흐름과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날카로운 안목을 보여 주었기에, 이 책이 오늘날까지도 지혜로운 삶의 지침서로서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것이다. [13]


사마천이 [사기]를 쓴 목적은 무엇인가?

1. 발분의식의 소산이다. 궁형을 당한 것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한 구차한 행위가 아니라 글을 지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16]


2. 역사적 사실의 포폄과 직서이다.

후대 사람들에게 어떤 도덕적 규범을 제시하여 미언대의(미언대의)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춘추]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사마천의 생각은 부친 사마담의 견해와 일치되는 것이며,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지난 당시에 공자의 사상을 누군가가 계승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비롯되었다. [17]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자기 직분에 충실하면서 순수하게 개인의 자격으로 저술에 임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17]


시간적으로 2000년을 포괄하지만, 이중 과반수가 한 대의 것이다. 한 무제는 후한의 제 5대 황제로서 고제, 혜제, 문제, 경제 등 네 사람의 통치를 거치면서 중앙 집권 체제가 확고해졌을 때의 통치자이다. 이 시기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면서 학술이 번성했다. [18]


상고 문헌은 전적으로 경전에 기댔고, 당대 자료는 대체로 문헌 검증과 현지답사 여행 등을 통한 체험에서 나왔다. [18]


격동의 시대를 약 120여명이라는 비운의 인물을 통해 그려 냈으니 결국 사마천에게는 ‘비극’이야말로 아닌 게 아니라 시대의 표징이었던 셈이다. [18-19]


[사기열전]은 서술에 있어서 인물의 비중을 고려하여 안배한 흔적이 두드러진다. 독자에게 극적인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대립되는 인물을 같은 편에 놓은 경우도 많다. 또한 유림, 혹리, 자객, 유협, 골계 등 유사한 직업군을 한데 묶어 차례로 배치함으로써 인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했다. [20]


사마천은 자신이 입수한 문헌 가운데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도덕적 기여도가 높은 인물들을 먼저 고르고 거기에 평가를 더했다. 독자로 하여금 선을 행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렇지 않은 자는 화를 입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다. [21]


이러한 [사기열전]의 독특한 인물의 선택, 서술 방식은 역사는 결코 지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21]


[사기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열전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사마천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24]


[사기열전]이 폭넓은 독자층을 끌어들이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사기열전]은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세계관과 인생관 위에 개인적인 비극을 역사의식으로 승화시켜, 시대를 살다 간 인물을 조망해 나갔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무관의 제왕 공자와 시대와의 저항을 택한 백이와 숙제를 등장시키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쳐 나간다.

일반 역사서와 달리 [사기열전]에 적잖은 주관적 서술이 보이는데, 사마천 자신의 사료 비판 능력과 어우러져 탄탄한 역사 서술 체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24-25]


개인적으로 기록한 역사 [사기]가 후대에 24사의 필두로 거론되게 된 것은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한 무제까지 이르는 유일한 통사체 역사서이기 때문이라는 점이 일차적인 이유이다. 또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역사 서술의 정확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절대 군주 위주로 재편되는 엄혹한 현실과 인간에 대한 성찰 즉 사마천의 역사를 보는 태도가 다른 역사서와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사기]가 문학서로서의 색채를 유발하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27]


1. 백이열전

공자는 “인이란 사람다움이다”,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단 하루라도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보면 ‘인’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키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60]


왜 유가경전에는 허유와 무광 등의 사적이 없을까?

백이와 숙제는 정말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을까?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 하늘의 도인가?


파리도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 리 길을 갈 수 있다

“부귀가 찾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자리라도 나는 하겠다. 또 만일 찾아서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겠다.” (공자 왈) [66]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 비추어 주고, 같은 종류의 물건은 서로 어울린다.” (가의 왈) [66]

  

2. 관*안 열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한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창고에 물자가 풍부해야 예절을 알며,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임금이 법도를 실천하면 육친(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 아내, 자식)이 굳게 결속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네 가지 강령 증 예의, 정의, 깨끗함, 부끄러움이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는 멸망한다. 수원에서 물이 흘러가듯이 명령을 내리면 그 명령은 민심에 순응하게 된다.”

나라에서 의논한 정책은 탁상공론이 아니므로 실천하기 쉬웠다. 백성이 바라는 것은 그대로 들어주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은 그들의 뜻대로 없애 주었다. [73]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뜻을 드러낸다

왕에게 간언할 때는 왕의 얼굴빛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았으니, 이것은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보충할 것을 생각한다.’라는 마음가짐이었으리라! [77]


3. 노자*한비 열전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인으로 나이가 공자보다 많고 ‘예’에 밝아 공자에게 가르침을 주었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장자의 우언을 당시 유가와 묵가를 공격하는 탁월한 무기로 본다.

이러한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흔히 도가 사상 또는 노장 사상이라고 한다. 도가 사상은 끊임없는 전쟁과 불안정 및 권력과 지위 다툼으로부터 벗어나 은둔과 도피를 일삼는 철학이다. 그래서 도가 사상은 군주 권력의 전제정치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저항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한다. [79]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둔다

(노자 => 공자에게) 그대는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시오. [81]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의 학문을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말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노자는 하지 않는 것(無爲)으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했다. [83]


관리가 되느니 더러운 시궁창에서 놀리라

형명지학의 대가 신불해


용의 비늘을 건드리지 말라

대체로 유세의 어려움은 내 지식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고, 내 말솜씨로 뜻을 분명히 밝히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며, 또 내가 감히 해야 할 말을 자유롭게 모두 하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다.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라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내 주장을 그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는 데 있다. [86-87]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버릴 줄 아는 것이다. [88]


이렇게 하여 오랜 시일이 지나 군주의 총애가 깊어지면 큰 계책을 올려도 의심 받지 않고 군주와 서로 다투며 말하여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89]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렵다는 뜻이다. [90]


용이라는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 자 길이의 비늘이 있어 이것을 건드린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으면 거의 성공적인 유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1]


4. 사마 양저 열전

약속은 생명과도 같다


병사를 감동시킨 용병술

양저는 병사들의 막사, 우물, 아궁이, 먹거리를 비롯하여 문병하고 약을 챙겨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몸소 보살폈다. 또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재물과 양식을 모두 병사들에게 풀고, 자신은 병사들 주에서도 몸이 가장 허약한 병사의 몫과 똑같이 양식을 나누었다. 이로부터 사흘 뒤에 병사들을 다시 순시하자 병든 병사들까지도 모두 앞 다투어 싸움터로 나가기를 바랐다. [102]


5. 손자*오기 열전

군령을 따르지 않는 병사에게는 죽음뿐이다


급소를 치고 빈틈을 노려라

어지럽게 엉킨 실을 풀려고 할 때는 주먹으로 쳐서는 안 되며, 싸우는 사람을 말리려고 할 때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주먹만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급소를 치고 빈틈을 찔러 형세를 불리하게 만들면 저절로 물러날 것입니다. [111]

  

아내를 명성과 바꾸다

나라의 보배는 험난한 지형이 아니라 임금의 덕행이다

남보다 윗자리에 있는 이유


죽은 시체 위에 엎드린 오기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꼭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실천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121]


6. 오자서 열전

소인배의 참언을 믿고 친자식을 내친다

억울한 죽음을 가슴에 안고 떠난다

때를 기다려라

오나라의 힘을 빌려 초나라를 깨뜨린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악의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하라

성공하면 충신이고 실패하면 역적이다


7. 중니 제자 열전

제자백가는 크게 유가, 도가, 묵가, 명가, 법가 등으로 구분된다. 특히 유가는 후세 중국 사상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지존의 지위를 자랑해 왔다.

공자는 정치가로서의 삶에는 실패했지만 무관의 제왕으로 불릴 만큼 교사로서의 역할에서는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공자는 교육의 중요성을 부르짖고, 그의 나이 서른 살을 전후로 하여 제자를 모아 수업을 했는데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가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교육관을 ‘유교무류 有敎無類’에 두었다.


공자의 제자들과 공자가 존경한 사람들

공자 왈 “내 문하에서 학업에 힘써 육예에 통달한 사람은 일흔일곱 명이다.” [147]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로 즐거워하는 안회

“안회는 배울 때 듣고만 있어 어리석은 것 같지만 물러가 행동하는 것을 보면 내가 가르친 것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안회는 절대 어리석지 않구나.”

“벼슬에 나가게 되면 도를 실행하고 물러나면 조용히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너뿐이구나!” [148]


효성스러운 민자건

덕행을 훌륭하나 몹쓸 병에 걸린 염경

얼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곧으면 제물로 쓸 수 있다


사람의 성격에 따라 조언도 달라야 한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실천해야 한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아버지와 형이 살아 계신데 어찌 들은 것을 바로 실천하겠느냐?”

“어째서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십니까?”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하므로 제지한 것이다.” [152]

좋은 말을 듣고 실행하지 못했는데 또 좋은 말을 들을까 두렵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하고 게으르지 않으면 된다”

“군자는 의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군자가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고, 소인이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도적이 된다.”

자로는 좋은 말을 한 가지 듣고 아직 실행하지 않았는데 또다시 좋은 말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153]


군자는 죽더라도 관을 벗지 않는다

자식은 태어난 지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을 벗어난다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다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고, 더러운 흙으로 쌓은 담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다.” [158]


종묘의 제사 그릇 같은 자공

한번 움직여 세상의 판도를 새로 짠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랴


흰 바탕이 있은 뒤에 색을 칠할 수 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먼저 흰 바탕이 있은 뒤에 색을 칠해서 다듬는다는 뜻이다.”

“예가 나중이라는 말씀입니까?”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경>을 말할 만하구나.” [170]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많이 듣고 삼가면 실수가 적다

“많이 듣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한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

“말이 참되고 믿음이 있으며 행동이 착실하고 조심스럽다면 오랑캐 땅에서도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참되지 못하고 믿음이 없으며 행동이 착실하지 못하고 조심스럽지 않다면 비록 자기 고향일지라도 행세할 수 없을 것이다. 서 있을 때에는 그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고 수레에 탔을 때에는 그것이 수레의 가로 막대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한 뒤에야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171-172]


명망과 통달의 차이

“통달한 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잘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통달하게 된다. 그러나 명망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어진 척하지만 실제 행동은 완전히 어긋나면서도 그러한 것에 물들어 조금도 의심 없이 행동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이름을 얻게 된다.” [173]


효성으로 이름을 떨친 증삼

사람은 말과 생김새로만 평가하면 안된다

재능은 빼어난데 몸담고 있는 곳이 작다


배우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다

“나라에 도가 제대로 시행되는데도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다만 녹이나 먹고 있고, 나라에 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데도 벼슬자리에 연연하여 녹이나 먹고 있는 것이 바로 부끄러움이라는 것이다.”

“내가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병들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병들지는 않았습니다.” [176]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자장

흰 옥의 티는 갈 수 있지만 말의 티는 어찌할 수 없다

지조를 지킨 공석애와 낭만주의자 증점

자식을 위하는 마음을 똑같다

<역경>의 전수는 끊이지 않았다

말만 잘하는 자를 미워한다

겸손한 칠조개

모든 일은 천명에 의해 결정된다


어진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어진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인을 실천하기란 어려운데 그것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느냐?”

“군자는 걱정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음속 깊이 살펴보아 부끄러울 것이 없다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182-183]


예와 의를 좋아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인仁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智란 “사람을 아는 것이다.” [184]


얼굴이 닮았다고 공자가 될 수는 없다

“예를 운용하는 데는 조화가 가장 중요하다. 선왕들의 도에서도 조화를 아름답게 여겨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이것을 따랐다. 그러나 조화만으로는 잘 행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조화가 중요하다는 것만을 알고 조화에만 치우쳐 예로써 조절하지 않는다면 시행될 수 없다. ” [184-185]


군자는 가난한 사람만 돕는다

“나는 군자는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고 부자에게는 보태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186]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숨기는 것이 예이다.” [187]


8. 상군 열전

상군은 중국 선진 시기 법가를 대표하는 정치가 상앙을 말한다.

상앙은 사회 개혁법(변법)을 통하여 봉건적인 옛 제도를 철저히 없애고 군주의 절대 권력 확립에 필요한 혁신적인 조치를 강구하였다. 그는 특히 귀족들의 세습적 특권을 박탈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 군주의 존재를 위험시하는 지식인들의 자율적으로 비판적인 사상 논의를 엄금하도록 요청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강압적이고 전제주의적 조처로써 상앙은 진나라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부강하게 만들고 뒷날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 법가 사상 자체가 지식인을 탄압하는 전제주의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상앙의 사상은 지식인과 관료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유교 사회에서는 거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사마천도 그의 인물됨에 대해서는 혹평을 했다. [193]


죽음의 문턱에 있는 자의 말은 믿을 수 없는가?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야 성공적인 유세를 할 수 있다


옛것을 따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의심스러워하면서 행동하면 공명이 따르지 않고, 의심스러워하면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자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남들이 모르는 지혜를 가진 자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오만하다는 비판을 듣게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미 이루어진 일도 모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일이 시작되기 전에 압니다. 백성은 일을 시작할 때에는 더불어 상의 할 수 없으나 일이 성공하면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가장 높은 덕을 강구하는 자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큰 공을 이루는 자는 뭇사람들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으면 구태여 옛것을 본뜨지 않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면 옛날의 예악 제도를 좇지 않았습니다.” [199]


새로 만든 법은 믿음 속에서 꽃필 수 있다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도성 저잣거리의 남쪽 문에 세우고 백성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했다. “이 나무를 북쪽 문으로 옮겨 놓는 자에게는 십 금을 주겠다.” 그러나 백성은 이것을 이상히 여겨 아무도 옮기지 않았다.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옮기는 자에게는 오십 금을 주겠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옮겨 놓자 즉시 그에게 오십 금을 주어 나라에서 백성을 속이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고 나서 새 법령을 널리 알렸다. [202]


법은 위에서부터 지켜야 한다

뱃속에 있는 질병을 없애라


사람의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

“돌이켜 자기 마음속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성찰할 수 있는 것을 명明이라 하며,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强이라 합니다. 순임금도 ‘스스로 자신을 낮추면

더욱더 높아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순 임금의 도를 따라야 합니다.” [207]


‘겉치레 말은 허황되고, 마음속에서 나오는 말을 진실되며, 듣기 괴로운 말은 약이 되고, 달콤한 말은 독이 된다.’ [208]


당신의 파멸은 한 발을 들고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잠깐 사이에 다가올 것입니다. [210]

9. 소진 열전

새도 깃털이 자라지 않으면 높이 날 수 없다

천리 밖의 근심을 버리고 백리 안의 근심부터 해결하라

어찌 어두운 곳에서 큰일을 결정하랴?

닭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가 되지 말라


싹이 돋아날 때 베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

‘처음에 싹을 자르지 않아 무성해지면 어떻게 하나? 터럭같이 작을 때 치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 (주서) [231]


과장된 몸짓 속에 가려진 진실을 보라


우환이 닥친 뒤에는 걱정해도 소용없다

합종이 이루어지면 초나라가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고, 연횡이 이루어지면 진나라가 천하의 제왕이 될 것입니다. [236]


부귀하면 우러러보고 가난하면 업신여긴다

“이 한 몸도 부귀해지자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면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만일 나에게 낙양성 주변에 밭이 두 이랑만 있었던들 어찌 여섯 나라 재상의 인수를 찰 수 있었을까?” [238]


원수를 버리고 든든한 친구를 얻어라


충신만이 죄를 짓는가?

어떤 사람이 관리가 되어 멀리 떠나갔는데, 그 아내가 다른 사람과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돌아올 때가 되어 정부가 걱정을 하자, 아내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미 독약 탄 술을 만들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흘이 지나 남편이 돌아오자 아내는 첩에게 독이 든 술을 가져다가 그에게 권하도록 하였습니다. 첩은 술에 독이 들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러면 주모가 내쫓길까 두렵고 말을 안 하자니 주인을 죽이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넘어져 술을 엎질렀습니다. 주인은 몹시 화를 내며 그녀에게 채찍을 쉰 대나 쳤습니다. 첩을 일부러 넘어져 술을 엎어서 위로는 주인을 살리고 아래로는 주모를 쫓겨나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매 맞는 것만은 피하지 못했습니다. 어찌 충성스럽고 신실하다고 해서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244]


사람을 속여 원수를 갚는다

소진이 남긴 사업을 이은 소대와 소려


자주색 비단이 흰색 비단보다 열 배 비싸다

지혜로운 자는 일을 처리할 때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꿉니다. 제나라 사람들의 자주색 비단은 질이 나쁜 흰색 비단을 물들인 것이지만 그 값은 열 배나 비싸고, 월나라 왕 구천은 일찍이 회계산으로 쫓겨났지만 오히려 강대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제패하였습니다. [252]


정의로운 행동만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10. 장의 열전

합종파의 대표 인물이 소진이라면 장의는 연횡파의 대표 인물이므로, 합종파와 연횡파의 인물들을 합쳐 각각의 열전을 만들면서 두 사람으로 대표성을 갖게 한 것이다. 또한 이 두 파의 인물들이 서로 날카롭게 대립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상대적으로 두었기 때문에 <장의 열전>과 <소진 열전>은 구성이 매우 비슷하다.

전국시대 중기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에 의거하여 국력을 증강시키는데 힘썼고, 제나라도 강국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나머지 여섯 나라가 합종으로 맞서자 진나라의 장의는 각 나라와 개별적으로 동맹을 맺어 합종을 깨뜨리고, 제나라와 초나라를 이간시키는 방법을 써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였다. [264]


작은 이익을 탐내면 큰 뜻을 이루지 못한다

싸울 때는 명분과 실속을 모두 얻어야 한다


깃털도 쌓으면 배를 가라앉힐 수 있다

깃털도 많이 쌓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이 부러지며,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이고, 여러 사람의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고 합니다. [275]


진나라가 초나라를 중시하는 까닭

호랑이와 양은 적수가 못 된다

달콤한 말은 나라를 망친다

한때의 이익에 끌려 백대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는다

오른팔을 잘리면 싸울 수 없다

허우대는 어른, 생각은 어린아이

무왕과 틈이 벌어진 장의


사람 됨됨이는 그 주위 사람이 제대로 안다

예전에 오자서는 그 임금에게 충성하였기 때문에 온 천하가 그를 자기 신하로 삼으려고 서로 다투었고, 증삼은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였기 때문에 온 천하가 그를 자식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노비가 그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팔리면 좋은 노비입니다. 소박맞고 쫓겨 온 여자가 그 마을에서 다시 결혼한다면 좋은 아내입니다. [298-299]


할 일 없이 술만 마신 서수

병들었을 때는 고향이 가장 그립다

자기보다 나은 자를 밟고 일어선다


12. 양후 열전

외척의 정치 참여


천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주서>에 ‘천명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요행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337]


잃는 게 없는 싸움을 하라

결국 내쫓기는 신세


14. 맹자*순경 열전

사마천은 음양가와 도가의 학문이 사실상 근본이며 기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가의 위대한 두 스승 맹자와 순자의 사적에 관해서는 짧게 다루고 음양오행가와 도가에 대해서는 유가보다 상세하게 다루었다.

맹자는 공자 학설의 단순한 계승자라기보다는 유가 사상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유가 사상을 더욱 드러내고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순자는 전국시대 말기 사람으로 맹자를 이러 유가 사상을 더욱 체계화시킨 대표 인물이지만 맹자의 사상과는 다른 각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순자가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예’를 기초로 해서 계층 간의 불화와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묵자는 유학을 배웠지만 유가 학설이 귀족들의 예, 상, 악, 장을 옹호하여 백성을 상하게 한다고 보고 유가의 반대파에 서게 되었다. 묵자가 유가를 집중 공격한 것은 그가 유가의 한 이단적 지파를 대표함을 시사하지만, 그가 논리학에 가지는 관심은 명가를 생겨나게 한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361]


사욕은 혼란의 시작이다

“나는 일찍이 <맹자>라는 책을 읽다가 양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구절에 이르러 책 읽기를 멈추고 ’아! 이익이란 진실로 혼란의 시작이로구나.’라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자가 이익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그 혼란의 근본 원인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한을 사는 일이 많다.‘라고 했던 것이다. 천자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익을 좋아하는 데서 생긴 폐해가 어찌 다르겠는가?” [363]


시대 흐름에 들어맞지 않는 주장은 쓰이지 못한다


추씨 성을 가진 세 학자

이러한 일들이 어찌 사회 기풍에 영합하여 구차스럽게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려는 생각이 있어서였겠는가? 네모난 각목을 둥근 구멍에 아무리 넣으려고 한들 들어갈 리가 있겠는가? [367]


양나라 혜황이 순우곤을 만나 한 마디도 듣지 못한 까닭

전국시대 각 지역의 사상가들


15. 맹상군 열전

제나라 맹상군 전문, 조나라 평원군 조승, 위나라 신릉군 무기, 초나라 춘신군 황헐은 선비를 기르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는데, 각기 식객 3000여 명을 거느려 흔히 ‘전국 사공자’라고 부른다.

사마천은 사공자 각각의 전을 만들어 전국시대에 각국에서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재를 초빙하던 모습과 정치적 싸움이 벌어진 면모를 날카로운 시각에서 평가하고 있다.

맹상군은 명성과 이익만을 쫓았을 뿐이므로 인물 됨됨이는 볼 것이 없다. 맹상군이 풍환을 비롯하여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를 흉내내던 무리를 빈객으로 불러들였을 때, 그들이 맹상군을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맹상군의 인물 평가 능력을 엿볼 수 있다. [375]


사람의 운명은 어디로부터 받는가?

그 동안 제나라 땅은 넓어지지 않았는데 아버님 자신은 천만 금이나 되는 부를 쌓았으며, 그러고도 문하에는 어진 사람 한 명 볼 수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장수의 가문에는 반드시 장수가 있고, 재상의 가문에는 반드시 재상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아버님의 후궁들은 아름다운 비단옷을 질질 끌고 다니지만 선비들은 짧은 바지 하나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하인들과 첩들은 쌀밥과 고기를 실컷 먹고도 남아돌지만 선비들은 쌀겨나 술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버님께서는 쌓아둔 것이 남아돌지만 더욱 많이 쌓아 두려고만 할 뿐 나라의 힘이 날로 쇠약해지는 것은 잊고 계십니다. 저는 이 점이 이상합니다. [380]


하루는 맹상군이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밤참을 대접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불빛을 가린 탓에 방안이 어두웠다. 손님은 자신의 음식이 맹상군의 것과 다른 것을 감추려고 일부러 어둡게 한 줄 알고 기분이 상해서 식사를 하지 않고 돌아가려 했다. 맹상군은 일어서서 몸소 자신의 밥그릇을 들어 손님의 것과 비교해 보이자 손님은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일 때문에 선비들이 맹상군에게 많이 모여들었다. 맹상군이 손님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잘 대우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맹상군과 친하다고 생각하였다. [381]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로 위기를 벗어난다

처음 맹상군이 좀도둑과 닭울음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을 빈객으로 삼았을 때, 다른 빈객들은 모두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맹상군이 진나라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이 두사람이 그를 구하였다. 그뒤 빈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마음속 깊이 맹상군을 따르게 되었다. [383-384] 


모든 일에는 보답이 따른다

맹상군의 결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


군주가 이익에 눈멀면 백성은 떠난다

“그렇게 했습니다. 술과 소를 많이 마련하지 않고는 돈 빌린 사람을 다 모이게 할 수 없고, 돈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알 수 없었습니다. 여유 있는 자에게는 갚을 날짜를 정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차용증서를 십 년 동안 가지고 있어도 이자만 더욱 쌓여갈 뿐이라 성급하게 독촉하면 바로 달아날 테니 영원히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성급하게 재촉하여 돌려받지 못한다면 위로는 군주가 이익에 눈멀어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꼴이 되고, 아래로는 백성이 빚을 갚지 않으려 군주를 떠난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백성을 격려하고 군주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차용증서를 불살라 받을 수 없는 빚을 없애 설 땅의 백성이 군주를 가까이하고 군주의 이름을 칭송하게 하려고 한 일입니다.” [393]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진다

“만물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결과가 있고, 일에는 당연히 바뀌지 않는 도리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만물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당신은 혹시 아침 일찍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까? 새벽에는 어깨를 맞대면서 앞 다투어 문으로 들어가지만 날이 저물어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팔을 휘저으며 시장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침을 좋아하고 날이 저무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날이 저물면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물건이 시장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위를 잃자 빈객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고 해서 선비들을 원망하여 일부러 빈객들이 오는 걸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빈객들을 대우하십시오.” [397-398]

16. 평원군*우경 열전

이 편은 평원군과 우경 두 사람의 열전을 합쳐 놓은 것이다. 평원군 조승은 전국시대의 네 공자 중에서 비교적 평범한 인물이다. 사마천은 평원군이 다른 사람의 간언을 받아들이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이웃나라에 명망을 떨친 점에서 ‘평원군은 혼탁한 세상에서 새가 하늘 높이 날듯이 재능과 지혜가 있는 훌륭한 공자’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401]


애첩을 죽여 신의를 지킨다


세 치 혀가 군사 백만 명보다 강하다

“대체로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 지금 선생은 내 빈객으로 삼 년이나 있었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선생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나도 선생에 대해 들은 적이 없소. 이것은 선생에게 이렇다 할 재능이 없다는 뜻이오. 선생은 같이 갈 수 없으니 남아 있으시오.”

“저는 오늘에야 당신의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저를 좀 더 일찍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더라면 그 끝만 드러나 보이는 게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406]


“나는 다시는 감히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 내가 지금까지 선비를 고른 수는 많다면 천 명이 되겠고 적어도 백여 명은 될 것이다. 나는 스스로 천하의 선비를 잃은 적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번 모 선생의 경우에는 실수하였다. 모 선생은 한 번 초나라에 가서 조나라를 구정이나 대려보다도 무겁게 만들었다. 모 선생의 세 치 혀는 군사 백만 명보다도 강했다. 나는 감히 다시는 인물을 평가하지 않겠다.” [409]


나라가 망하면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강한 자는 공격을 잘하고 약한 자는 지키지 못한다


태사공은 말한다.

“평원군은 새가 하늘 높이 날듯이 혼탁한 세상에서 벗어나 재능과 지혜가 있는 훌륭한 공자였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큰 이치를 알지는 못했다. 속담에 ‘이익에 사로잡히면 지혜가 흐려진다.’라고 하였다. 평원군은 풍정의 그릇된 말에 빠져 조나라 장평의 사십여 만 병사를 산 채로 매장되게 하고 한단을 거의 멸망시킬 뻔했다. 우경이 사태를 헤아리고 상황을 추측하여 조나라를 위해 꾀한 계책들은 얼마나 주도면밀했던가! 그러나 위제의 불행을 차마 볼 수 없어 결국 대량에서 고통을 받았다. 평범한 사람도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아는데 하물며 어진 우경이 몰랐으랴! 그러나 우경에게 고통과 근심이 없었다면 책을 지어 후세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421-422]


18. 추신군 열전

진나라는 끊임없이 인재를 모으면서 능력 있는 자에게는 벼슬을 주고 어질지 못한 자는 내침으로써 서쪽 변방의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병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위염, 범저, 채택 등이 떠나간 것을 보면 겉으로는 진나라 왕이 은혜로운 마음이 적고 지나간 은덕을 생각지 않는 듯하지만, 사실상 진나라가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인재를 계속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443]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다 지치면 개도 못 이긴다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우면 힘이 약한 개가 그 기회를 틈타 이익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편이 더 낫습니다. 신이 그 까닭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신은 “사물을 한쪽 끝까지 가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겨울과 여름은 서로 바뀌게 마련이다. 쌓인 것이 극에 이르면 위태롭다. 바둑돌을 쌓아 올리면 무너지게 마련이다.”라고 들었습니다. [446]


<시경>에 “시작이 없는 것은 없으나 끝이 좋기는 드문 일이다”라고 했고, <역경>에서는 “여우가 물을 건너가려면 꼬리를 적시게 마련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시작은 쉽지만 끝맺음은 어렵다는 것을 뜻합니다. [447]


신하는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

정확한 결단만이 몸을 보존할 수 있다

복과 불행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초나라에 가서 춘신군의 옛 성과 궁실을 보니 정말 웅장하고 화려했다. 처음에 춘신군이 진나라 소왕을 설득하고 몸을 던져 초나라 태왕을 돌아오게 한 것은 얼마나 뛰어난 지혜였던가? 그런데 마지막에 이원에게 당한 일은 늙어서 사리 판단에 어두워진 탓이리라. 세인의 말에 ‘마땅히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추신군이 주영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두고 한 말일까?” [461]


20. 악의 열전

충신이 반역자가 되는 것은 하루아침이다


군주와 신하의 의는 무엇인가

신이 듣기에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는 가깝다는 이유로 봉록을 주지 않고 공로가 많은 자에게 상을 주며, 능력 있는 사람에게 그에 맞는 일을 맡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재능을 살펴 관직을 주는 이는 공적을 이루는 군주이고, 행동을 바르게 하여 사귀는 이는 이름을 남기는 선비입니다. 신이 선왕께서 하신 일을 살펴보니 이 세상 군주들보다 높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513-514]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가 공을 세우면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역사에 이름이 남고, 앞을 내다보는 밝은 눈을 가진 선비가 공명을 이루면 그것을 손상시키지 않기 때문에 후세까지 칭송을 받는다” [515]


“옛 군자는 사람과 교제를 끊더라도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기 결백을 밝히려고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 [516]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떠나라


21. 염파*인상여 열전

인상여가 염파와 서로 경쟁하는 사이이면서도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을 보여 주어 결국은 자신에게 적대감을 품은 염파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아량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특히 이들의 정치적 영욕과 출세와 좌절은 한 나라의 세력의 강약, 성쇠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어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521]


큰 나라끼리 사귀는 데는 법도가 있다

‘당신께서는 연나라 왕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신은 ‘왕을 모시고 국경 부근에서 연나라 왕과 만난 일이 있소. 그때 연나라 왕이 가만히 내 손을 잡으며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였소. 이 일로 연나라 왕을 알게 되었소.’라고 하였습니다. 인상여는 신에게 ‘조나라는 강하고 연나라는 약합니다. 게다가 당신께서는 조나라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연나라 왕께서는 당신과 친구가 되어 사귀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 당신께서 연나라로 달아나면 연나라는 조나라를 두려워하여 반드시 당신을 머무르게 하지 않고 사로잡아 조나라로 돌려보낼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웃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고 부질에 엎드려 처벌을 바라는 편이 낫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행히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했습니다. [524]


피를 뿌려서라도 군주의 위엄을 지킨다

진나라 왕은 술자리가 흥겨워지자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조나라 왕께서 음악에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문고 연주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조나라 왕이 거문고를 뜯었다. 진나라 어사가 나와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달에 진나라 왕이 조나라 왕을 만나 술을 마시고 조나라 왕에게 거문고를 연주하도록 했다.

그러자 인상여가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조나라 왕께서는 진나라 왕께서 진나라 음악을 잘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분부를 진나라 왕께 올려 서로 즐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진나라 왕이 화를 내며 받아들이지 않자, 상여는 앞으로 나아가 분부를 바치며 무릎을 꿇고 진나라 왕에게 청했다. 진나라 왕이 여전히 분부를 치려고 하지 않으므로 상여는 이렇게 말했다.

“신 상여와 왕 사이는 다섯 걸음도 못 됩니다. 신은 목의 피를 왕께 뿌려서라도 요청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진나라 왕 주위에 있던 신하들이 상여를 칼로 찌르려고 하였으나 상여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자 모두 뒤로 물러섰다. 진나라 왕은 하는 수 없이 조나라 왕을 위해 분부를 한 번 두드렸다. 상여는 뒤를 돌아다보고 조나라 기록관을 불러 다음과 같이 적도록 하였다.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진나라 왕이 조나라 왕을 위하여 분부를 두드렸다.

진나라 신하들이 말했다.

“조나라의 성 열다섯 개를 바쳐 진나라 왕의 장수를 축복해 주십시오.”

인상여가 또 말했다.

“진나라 수도 함양을 바쳐서 조나라 왕의 장수를 축복해 주십시오.”

진나라 왕은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조나라를 이길 수 없었다. 조나라도 많은 군사를 배치시키고 진나라에 대비하였으므로 진나라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530-531]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한다

“저희가 친척을 떠나와서 나리를 섬기는 까닭은 오직 나리의 높은 뜻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리께서는 염파와 같은 서열에 있습니다. 그러나 나리는 염파가 나리에 대해 나쁜 말을 퍼뜨리고 다니는데도 그가 두려워 피하시며 지나치게 겁을 내십니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도 부끄러워하는 일인데, 하물며 장군이나 재상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못난 저희는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인상여는 그들을 완강하게 말리며 말했다.

“그대들은 염 장군과 진나라 왕 가운데 누가 더 무섭소?”

사인들이 대답했다.

“염 장군이 진나라 왕에 못 미칩니다.”

상여가 말했다.

“저 진나라 왕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궁정에서 꾸짖고 그 신하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소. 내가 아무리 어리석기로 염 장군을 겁내겠소?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만일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어울려서 싸우면 결국은 둘 다 살지 못할 것이오. 내가 염파를 피하는 까닭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 하기 때문이오.”

염파는 이 말을 듣고 웃옷을 벗고 가시채찍을 등에 짊어지고 빈객으로서 인상여의 문 앞에 이르러 사죄하며 말했다.

“비천한 저는 상경께서 이토록 너그러우신 줄 몰랐습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하고 죽음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벗이 되었다. [532-533]


세금이 공평하면 나라가 부유해진다

“당신은 조나라의 귀공자입니다. 지금 당신 집에서 나라에 바치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을 내팽개쳐 둔다면 국법이 손상될 것입니다. 국법이 손상되면 나라가 쇠약해질 테고 나라가 쇠약해지면 제후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올 것이며, 제후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면 조나라는 멸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께서 어떻게 이와 같은 부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 같은 귀한 분이 국법을 정한 대로 나라에 의무를 다하면 위아래가 공평해질 테고 위아래가 공평해지면 나라가 강해질 것이며, 나라가 강해지면 조나라는 튼튼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국왕의 일족이니 그 누가 공자를 하찮게 보겠습니까?”

평원군은 조사가 현명하다고 여겨 왕에게 추천했다. 왕이 그를 등용하여 나라의 세금을 관리하게 하자, 세금이 매우 공평하게 거둬들여지고 백성은 부유해지며 창고는 가득 차게 되었다. [534]


쥐구멍 안의 싸움에서는 용감한 쥐가 이긴다


아버지와 자식은 마음 씀씀이부터 다르다

그래서 조나라 왕은 염파 대신 조괄을 장군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인상여가 말했다.

“왕께서는 명성만 믿고 조괄을 쓰려고 하는데, 이는 거문고의 괘를 아교로 붙여서 고정시키고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그저 자기 아버지가 남긴 병법 책을 읽었을 뿐 사태 변화에 대처할 줄은 모릅니다.”

그러나 조나라 왕은 듣지 않고 마침내 조괄을 장군으로 삼았다.

조괄은 스스로 어릴 적부터 병법을 배워 군사에 대해 말하자면 이 세상에 자기를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일찍이 그는 아버지 조사와 함께 군사적인 일을 토론한 적이 있는데, 조사는 그를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사는 그가 잘한다고 하지 않았다. 조괄의 어머니가 조사에게 그 까닭을 묻자 조사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란 목숨을 거는 거요. 그런데 괄은 전쟁을 너무 쉽게 말하오. 조나라가 괄을 장군으로 삼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만일 괄을 장군으로 삼는다면 틀림없이 조나라 군대는 파멸당할 것이오.”

조괄이 떠나려고 할 때, 그 어머니는 왕에게 글을 올려 이렇게 말했다.

“제 아들을 장군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왕이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조괄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전에 제가 조괄의 아버지를 모실 때, 그 무렵 제 아들의 아버지는 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먹여 살리는 이가 수십 명이고, 벗이 된 사람은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왕이나 종실에서 상으로 내려준 물품은 모두 군대의 벼슬아치나 사대부에게 주고, 출전 명령을 받으면 그날부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아들은 하루아침에 장군이 되어 동쪽을 향해 앉아서 부하들의 인사를 받게 되었지만 군대의 벼슬아치 가운데 누구 하나 제 아들을 존경하여 우러러보는 이가 없습니다. 왕께서 내려주신 돈과 비단을 가지고 돌아와 자기 집에 감추어 두고 날마다 이익이 될 만한 땅이나 집을 둘러보았다가 그것들을 사들입니다. 왕께서는 어찌 그 아버지와 같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버지와 자식은 마음 씀씀이부터 다릅니다. 부디 왕께서는 제 아들을 보내지 마십시오.”

왕이 말했다.

“어머니는 더 이상 말하지 마오. 나는 이미 결정했소.” [538-539]


권세를 가진 자에게는 사람이 몰린다

“아!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도 판단이 더딥니까? 대체로 천하 사람들은 시장에서 이익을 좇는 것처럼 사귑니다. 당신에게 권세가 있으면 따르고 권세가 없어지면 떠나갑니다. 이것은 진실로 당연한 이치인데 무엇을 원망하십니까?” [541]


죽음을 알면 용기가 솟는다


태사공은 말한다.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돌려받고 기둥을 노려볼 때라든지 진나라 왕 주위에 있던 신하들을 꾸짖을 때 그 형세는 기껏해야 죽음뿐이었다. 선비 중에 어떤 이는 겁을 집어먹고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상여가 한 번 용기를 내자 그 위세가 상대편 나라까지 떨쳤고, 물러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겸손히 양보하니 그 이름은 태산처럼 무거워졌다. 인상여는 지혜와 용기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545]


24. 굴원*가생 열전

전국시대 이래 문학작품에는 당시 인간 운명의 극적인 성공과 실패라는 분위기로 인해 심각한 회의와 절망의 정서가 깊숙이 배어 있다. 거기에는 인간사에 영원 불변하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맏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편은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애국 시인 굴원과 서한 초기에 유명했던 정치가 가생의 충성심과 전제 정권하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모습을 애틋한 필치로 적고 있다....

굴원은 충성스러운 신하였지만 참소를 당하여 호소할 길 없는 마음을 총 373구의 <이소>에 담아 후대에 남겼다. <이소>는 중국 고대의 걸작으로 그 문장 형식뿐만 아니라 작품의 내면 세계도 후인들이 본받아야 할 고전적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소>는 추악한 세태를 원망하는 마음이 주된 내용을 차지하며, 뒷부분은 굴원 자신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꿈속에서 천지를 돌아다닌 내용이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우국시라고 보는 견해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도 있다.

기생도 높은 식견을 갖고 있었으며,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으나 여의치 않아 슬픔만 끌어안고 죽었다. 그도 굴원과 마찬가지로 봉건제도하에서 억압을 당하다 죽었으나 명군을 만났다는 점에서 굴원과 대비된다. [583-584]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본다

‘이소’란 ‘걱정스러운 일을 만나다’라는 뜻이다. 무릇 하늘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본다. 그러므로 힘들고 곤궁할 때 하늘을 찾지 않는 이가 없고, 질병과 고통과 참담한 일이 있으면 부모를 찾지 않는 이가 없다. 굴원은 도리에 맞게 행동하고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군주를 섬겼지만 헐뜯는 사람의 이간질로 곤궁해졌다고 할 수 있다.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고, 충성을 다했으나 비방을 받는다면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굴원이 <이소>를 지은 것은 이처럼 분통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586]


그 글은 간결하고 그 문장은 미묘하며, 그 뜻은 고결하고 그 행동은 청렴하다. 그 문장은 사소한 것을 적었지만 담은 뜻은 매우 크며, 눈앞에 흔히 보이는 사물을 인용했지만 그 뜻은 높고 깊다. 그 뜻이 고결하므로 비유로 든 사물마다 향기를 뿜어내고, 그 행동이 청렴하므로 죽을 때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흙 속에서 뒹굴다 더러워지자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씻어내고, 먼지 쌓인 속세 밖으로 헤쳐 나와서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다. 그는 [연꽃처럼] 깨끗하여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더러워지지 않는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지조는 해와 달과 그 빛을 다툴 만하다. [586-587]


우물물이 맑아도 마시지 않으니 슬프다

사람들의 군주된 자 가운데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 어질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충신을 구하여 자신을 위하도록 하고, 현명한 자를 등용하여 자기를 돕도록 하려고 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고 가정이 깨지는 일이 거듭 생기고, 훌륭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가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충신이라는 이가 충성을 다하지 않고,  현명하다는 이가 지혜롭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590]


사람들이 다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

굴원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서 쫓겨났소.”

어부가 물었다.

“대체로 성인이란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속세의 변화를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혼탁하다면 왜 그 흐름을 따라 그 물결을 타지 않으십니까? 모든 사람이 취해 있다면 왜 그 지게미를 먹거나 그 밑술을 마셔 함께 취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아름다운 옥처럼 고결한 뜻을 가졌으면서 스스로 내쫓기는 일을 하셨습니까?”

굴원이 대답했다.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의 티끌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사람이라면 또 그 누가 자신의 깨끗한 몸에 더러운 때를 묻히려 하겠소?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를 지내는 게 낫지. 또 어찌 희디흰 깨끗한 몸으로 속세의 더러운 티끌을 뒤집어쓰겠소!” [591-592]


모자를 신발 삼아 신어서야 되겠는가


들새가 들어오고 주인이 나간다

만물은 변하며

진실로 쉼이 없다

돌아 흘러서 옮겨 가고

또는 밀어서 돌아간다

형체와 기운이 끊임없이 도니

변하고 진화하는 것 매미와 같네

그 깊은 이치 끝이 없는데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

재앙이란 복이 의지하는 곳이고

복이란 재앙이 숨어있는 곳이라.

근심과 기쁨은 같은 문으로 모이고

길함과 흉함은 한곳에 있네.  [602]


25. 여불위 열전

빈고가 여불위의 <여씨춘추>를 잡가류로 분류한 뒤, 여불위는 잡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여겨져 왔다. 여불위가 여러 사람의 사상을 널리 받아들이고 특히 초기의 도가 사상을 근본으로 각 사상의 장점을 취사선택하여 황로 사상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불위를 신도가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여불위가 황로사상에 심취한 사마천에게 중시된 것은 당연하다. 사마천은 천지, 만물, 고금의 일에 관한 모든 것이 <여씨춘추>에 갖추어져 있다고 볼 정도로 여불위를 높이 평가하였다. [611]


진귀한 재물은 사 둘만하다

“이 진귀한 재물은 사 둘 만하다.”

그리고 자초를 찾아가서 말했다.

“나는 당신의 가문을 크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자 자초는 웃으면서 말했다.

“먼저 당신 가문을 크게 만든 뒤에 내 가문을 크게 만들어 주시오.”

여불위가 말했다.

“당신이 모르는 모양인데, 제 가문은 당신 가문에 기대어 커질 것입니다.”

자초는 그 말뜻을 깨닫고 안으로 불러들여 마주앉아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613-614]


한 글자도 더하거나 뺼 수 없다

여불위는 자기 빈객들에게 각각 보고 들은 것을 쓰게 하여 [팔람],[육론],[십이기]등 이십여 만언으로 모아 이것이야말로 천지, 만물, 고금의 일을 다 갖추고 있다고 여겨 <여씨춘추>라고 불렀다. 이 책을 함양의 시장 문 앞에 펼쳐놓고 거기에 1000금을 걸어 제후국의 유사나 빈객 중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이에게 그 돈을 주겠다고 했다. [618] 


거짓으로 얻은 명성은 물거품 같다


26. 자객 열전

춘추전국시대의 자객은 대부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라는 보은 사상이 투철했다. 이 자객들은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오늘날 전제, 예양, 섭정 등의 행동은 취할 만한 것이 못 되지만 조말이 제나라 환공을 위협하고, 형가가 진나라 왕을 찌른 것은 결코 개인의 원한 때문이 아니라 약자로서 정의를 실천하려는 의협심의 발로이므로 그 무렵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다섯 자객 가운데 연나라 태자 단에게 인정받은 형가가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진시황에게 도전하였고, 폭력에 반대하는 정신도 가장 강하다. 그는 비록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고, 이 점 때문에 사마천은 형가를 독자들의 눈앞에 살아 움직이듯이 생동감 있게 그렸다.

사마천의 붓 끝에 묘사된 자객의 모습은 불의를 좇는 자들과 충성심이 약한 자가 용감하게 떨쳐 일어나게 하기에 충분하며, 이것은 우리에게 자객에 대해 제대로 된 인물 품평을 요구한다. [624]


비수로 잃었던 땅을 되찾는다

혈육을 죽이고 왕이 된다


충신은 지조를 위해 죽는다

“예물을 바치고 남의 신하가 되어 섬기면서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두 마음을 품고 자기 주인을 섬기는 것일세.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매우 어렵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까닭은 천하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주인을 섬기는 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려는 것일세.”  [631]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

그러자 섭영이 대답했다.

“그 말은 들었습니다. 섭정이 오욕을 무릅쓰고 시장 바닥에 몸을 던진 것은 늙은 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제가 시집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천수를 누리다 돌아가시고 저도 이젠 시집을 갔습니다. 일찍이 엄중자는 제 동생의 인물됨을 살펴 알고는 곤궁하고 천한 지위에 있는 그와 사귀었으니 그 은택이 매우 두텁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선비는 본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합니다. 섭정은 제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훼손시켜 이 일에 연루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어찌 제게 닥칠 죽음이 두려워 동생의 장한 이름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637-638]


인물은 범상치 않은 행보를 보인다


굶주린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고기를 던져 놓는다

“대체로 위태로운 일을 하면서 안전함을 찾고 재앙을 만들면서 복을 구하려고 한다면 계책은 얕아지고 원망만 깊어질 뿐입니다. 새로 사귄 친구 한 명과 사귐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나라의 커다란 피해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는 원한을 쌓고 재앙을 만드는 일입니다. [642]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아야 성공한다

자객은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다


27. 이사 열전

이사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진나라에 큰 공을 세웠을지언정 자신은 오형을 받아 죽었고, 집안사람들까지 목숨을 본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의 모습은 동정을 받을 수 없다. 그의 개인적인 비극보다 역사적 비극이 더 참혹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이사가 진나라가 여섯 나라를 통일하고 제도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인정하면서도, 그와 조고의 음모를 비롯하여 2세를 도와 가혹한 정책을 펼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것을 적어 꾸짖음으로써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었다. [659]


사람이 잘나고 못남은 자기 위치에 달려 있다

이사는 젊을 때 군에서 지위가 낮은 관리로 있었는데, 관청 변소의 쥐들이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가면 자주 놀라서 무서워하는 꼴을 보았다. 그러나 이사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있는 쥐들은 쌓아놓은 곡식을 먹으며 큰 집에 살아서 사람이나 개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 달렸을 뿐이구나.” [661] 


비천한 자리에 있으면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는 것은 짐승이 고기를 보고도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본다 하여 억지로 참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부끄러움은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며, 가장 큰 슬픔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것입니다. 오랜 세월 낮은 자리와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 세상의 부귀를 비난하고 영리를 미워하며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의탁하는 것은 선비의 마음이 아닐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쪽 진나라 왕에게 유세하려고 합니다. [662]


등용했으면 내치지 말라


옛것으로 지금을 비평하지 말라

시황제는 그 제안을 옳다고 여겨 <시경>, <서경>, 제자백가의 책을 몰수하고 모든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어 천하에 그 누구도 옛것을 끌어들여 지금 세상을 비판하지 못하게 했다. 법률과 제도를 밝히고 율령을 만드는 일은 모두 시황제 때에 처음 생겼다. [669]


이사는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아! 나는 순자가 ‘사물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한 말을 들었다. 나는 상채에서 태어난 평민이며 시골 마을의 백성일 뿐인데, 주상께서는 내가 아둔하고 재능이 없는 줄도 모르고 뽑아서 오늘날 이 지위까지 오르게 하셨다. 지금 다른 사람의 신하된 자로서 나보다 윗자리에 있는 이가 없고 부귀도 극에 달했다고 할 만하다. 만물은 극에 이르면 쇠하거늘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구나.” [670]


남의 신하가 되는 것과 남을 신하로 삼는 것은 다르다

“형을 물러나게 하고 아우를 오르게 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아버지의 조서를 받들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효성스럽지 못한 일입니다. 자신의 재능이 보잘것없는데 억지로 남의 공로에 의지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는 덕을 거스르는 일이므로 세상 사람들은 복종하지 않을 테고 몸은 위태로우며 사직의 제사를 받들지 못할 겁니다.” [672]


제 몸조차 이롭게 못하면서 어찌 천하를 다스리랴


사슴을 말이라고 한다

이사가 죽고 2세 황제가 조고를 중승상으로 삼자. 크든 작든 모든 일은 조고가 결정했다. 조고는 자신의 권력이 무거운 줄을 알고 2세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했다. 2세 황제가 좌우에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이것은 사슴이지?”

좌우에 있는 이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다.

“말입니다.”

2세 황제는 놀라서 스스로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태복을 불러 점을 치게 했다. [696]


28. 몽염 열전

충신은 대신들과 다투지 않는다

시황제는 몽씨 일족을 매우 존중하고 남다르게 아끼며 신임하고 현명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몽의를 가까이하여 그 지위가 상경에 이르게 하고, 밖으로 나갈 때는 수레를 함께 타고 궁궐로 들어와서는 늘 곁에 두었다. 몽염에게는 궁궐 밖의 일을 맡기고 몽의는 언제나 궁궐에서 정책 수립에 참여하여 둘 다 충신이라는 평을 받으니, 여러 장수와 대신들도 감히 그들과 다투려 하지 않았다. [704]


한 사람의 지혜로는 군주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신이 듣건대 ‘경솔한 생각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고, 한 사람의 지혜로는 군주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충신을 죽이고 지조와 덕행이 없는 사람을 세우면 안으로는 신하들이 서로 믿지 않게 되고 밖으로는 전쟁을 하는 군사들의 마음이 흐트러질 테니 신은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707]


신은 잘못은 바로 잡아야 하고, 간언은 깨달아야 하며, 삼경과 오대부에게 자문은 구하여 살피는 것이 성왕의 도리라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나 신이 드리는 말씀은 허물을 면하고자 함이 아니요, 간언을 드리고 죽고자 할 따름입니다. [710]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북쪽 변방 지역에 갔다가 지름길로 돌아왔다. 길을 가면서 몽염이 진나라를 위해 쌓은 장성의 요새를 보니, 산악을 깎고 계곡을 메워 지름길을 통하게 했으니 진실로 백성의 힘을 가벼이 여긴 것이 분명하다. 진나라가 처음 제후를 멸망시켰을 때 천하의 민심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전쟁의 상처도 채 가라앉지 않았는데, 몽염은 이름 있는 장수로서 이러한 때에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고 늙은이를 모시고 고아를 돌보며 모든 백성을 안정되고 평화롭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강력히 간언하지 않고 도리어 시황제의 야심에 영합하여 공사를 일으켰으니 그들 형제가 죽음을 당한 것은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찌 지맥을 끊은 탓으로 돌리랴.” [711]


각주) 중국의 중요한 역사적 특질은 독재 군주 사회에서 지배층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암투이다. 고대 중국을 다스린 역대 황제는 209명인데, 이 가운데 예순세 명이 자살하거나 암살당했다는 통계가 있다. 궁궐 안에서 있었던 투쟁이나 왕조의 쇠망으로 인해 살해되고 멸망한 황자나 황손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711]


30. 위표*팽월 열전

용 두 마리가 싸울 땐 기다려야 하듯 위표와 팽월은 진나라 말기의 빠른 변화 속에서 여유롭게 처신했다. 위표의 사적은 많지 않고 그 됨됨이도 거론할 바가 못 되지만 그의 흥망은 하동 일대의 정치 형세를 반영한다. 이들은 한나라를 위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역량을 모두 쏟아 항우에게 대항했고 공적을 세웠다. 당시 팽월은 초나라와 한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 인물로서, 양나라 지역에서 여러 차례 항왕에게 반기를 들고 초나라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여 항왕을 불안하게 했다. 이들은 결국 왕이었다가 한 시대의 호걸답게 죽었다는 것이 사마천이 말하는 요지이다. [741]


인생은 흰 망아지가 문틈으로 지나가는 것처럼 짧다

용 두 마리가 싸우면 기다려라


태사공은 말한다.

“위표와 팽월은 본디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지만 1000리 땅을 차지하고 남쪽을 바라보며 고라 했다. 이들은 피를 밟고 승기를 타서 나날이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러나 반역할 마음을 품었다가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고 붙들려서 형벌을 받았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중간 정도 되는 재능을 가진 자도 이러한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거늘, 하물며 왕 노릇을 하던 자야 어떠하랴! 여기에는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략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자들이지만 오직 자기 몸을 보존하지 못하는 것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뱀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때를 만나 자신들의 뜻을 펼쳐 보려고 했기 때문에 갇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751]


31. 경포 열전

형벌을 받은 뒤에 왕이 된다

팔짱만 끼고 앉아 어느 쪽이 이기는지 보면 안 된다

천하를 다스리는 데 어찌 썩은 선비를 쓰랴


왜 낮은 계책을 쓸까

황상이 물었다.

“영포는 어느 계책을 쓸 것 같소?”

영윤이 대답했다.

“낮은 계책을 쓸 것입니다.”

황상이 물었다.

“어째서 최상의 계책과 보통의 계책을 버리고 낮은 계책을 쓸 것이라고 하오?”

영윤이 대답했다.

“영포는 본래 여산의 무리로서 자기 힘으로 만승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지 뒷날을 생각하고 백성 만대의 이익을 위해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낮은 계책을 쓸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768]


32. 회음후 열전

한신은 진나라 말기 농민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젊을 때는 굶기를 일삼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는 진나라 말기에 먼저 항우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중용되지 못하고, 유방에게로 달아났으나 여전히 중용되지 못하다가 소하의 추천을 통해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유방은 초나라와 팽성에서 싸웠다가 져서 달아났지만, 뒤에 한신의 공으로 크게 승리를 거둔다. 그 뒤 한신은 군사들을 이끌고 북방 지역에서 두 번째 전쟁을 하여 위, 조, 연, 제나라를 모두 평정함으로써 항우에 대한 전략적 포위망을 구축하고 결국 해하에서 그를 섬멸한다.

한신의 공이 지나치게 높아 군주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자 유방을 그를 꺼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신은 시대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유방에게 자신을 제나라 왕으로 책봉해 달라고 요구하여 화를 부른다. 항우가 죽은 뒤 한신은 초나라 왕으로 옮겨 갔다가 죄를 지어 회음후으로 강등되고, 결국 반역하려다 멸족의 화를 당하였다.

사마천은 한신이 모반을 꾀하다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점에 대해 동정과 안타까움을 나타내며 비극적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771]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간다

소하가 달아난 한신을 쫓아간 까닭


천하는 마음을 얻은 자의 몫이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그를 섬긴 적이 있으므로 항왕의 사람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항왕이 화를 내며 큰 소리를 지르면 1000명이 모두 엎드리지만 어진 장수를 믿고 일을 맡기지 못하니 그저 보통 남자의 용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항왕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공손하고 자애로우며 말씨가 부드럽습니다. 누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부리는 사람이 공을 세워 벼슬을 주어야 할 경우가 되면 인장이 닳아 깨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며 선뜻 내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아녀자의 인일뿐입니다. [780-781]


싸움에 진 장수는 무용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도 병법에 있는데 여러분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오. 병법에는 죽을 곳에 빠뜨린 뒤라야 비로소 살릴 수 있고, 망할 곳에 둔 뒤라야 비로소 멸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있잖소? 내가 평소부터 사대부를 길들여 따르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시장 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몰아다가 싸우게 한 것과 같으니, 그 형세가 죽을 땅에 두어 저마다 자신을 위하여 싸우게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곳을 준다면 모두 달아날 텐데 어떻게 이들을 쓸 수 있겠소?” [788]


“제가 듣건대 ‘싸움에서 진 장수는 무용을 말할 수 없고, 멸망한 나라의 대부는 나라를 존속시키는 일을 말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지금 저는 싸움에서 지고 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포로에 불과한데 어떻게 그러한 큰일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한신이 말했다.

“내가 들은 바로는 현인 백리해가 우나라에 살 때는 우나라가 망하였으나, 진나라에 있자 진나라가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백리해가 우나라에 있을 때는 어리석은 사람이다가 진나라에 가니까 지혜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군주가] 그를 등용했는지 등용하지 않았는지, 또 그의 말을 받아들였는지 받아들이지 않았는지에 달렸을 뿐입니다. 만일 성안군이 당신의 계책을 들었더라면 나 같은 사람은 이미 포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안군이 당신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모실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광무군이 대답했다.

“제가 듣기로 ‘지혜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 실수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얻는 경우가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미친 사람의 말도 가려서 듣는다’라고 했습니다. 제 계책이 반드시 쓸 만하지는 않을지라도 성의를 다하겠습니다....” [789]


“군사를 잘 쓰는 사람은 이쪽의 단점을 가지고 적의 장점을 치지 않고, 이쪽의 장점을 가지고 적의 단점을 칩니다.” [790]


과욕은 화를 부른다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그러자 한신이 이렇게 말했다.

“하나라 왕은 나를 정성껏 대접해 주었습니다. 자기 수레로 나를 태워 주고, 자기 옷을 나에게 입혀주며, 자기가 먹을 것을 나에게 먹여 주었습니다. 내가 듣건대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남의 우환을 제 몸에 지니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남의 근심을 제 마음에 품으며, 남의 것을 먹으면 그의 일을 위하여 죽는다’라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이익을 바라고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801]


성산왕과 성안군은 천하에서 둘도 없이 친한 사이였는데 결국 서로 잡아먹으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우환이란 욕심이 많은 데서 생기고,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께서는 충성과 신의를 다하여 한나라 왕과 친하게 사귀려고 하지만, 그 사귐은 상산왕과 성안군의 사귐보다 든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801]


‘용기와 지략이 군주를 떨게 만드는 자는 그 자신이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한다’ [802]


“지식은 일을 결단하는 힘이며, 의심은 일하는데 방해만 됩니다. 터럭 같은 작은 계획을 자세히 따지고 있으면 천하의 큰 술수를 잊어버리고, 지혜로 그것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은 모든 일의 화근이 됩니다. 그래서 ‘맹호라도 꾸물거리고 있으면 벌이나 전갈만한 해도 끼치지 못하고, 준마라도 주춤거리면 노둔한 말의 느릿한 걸음만 못하며, 진나라 용사 맹분도 여우처럼 의심만 하고 있으면 보통 사람들이 일을 결행하는 것만 못하고, 순 임금이나 우 임금의 지혜가 있더라도 우물거리고 말하지 않으면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손짓 발짓을 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능히 실행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대체로 공이란 이루기 힘들고 실패하기는 쉬우며, 때란 얻기 어렵고 잃기는 쉽습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원컨대 당신께서는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803-804]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훌륭한 활을 치운다

“정말 사람들의 말에 ‘날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 죽이고,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좋은 활은 치워 버린다. 적을 깨뜨리고 나면 지모 있는 신하는 죽게 된다’라고 하더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내가 삶겨 죽는 것은 당연하구나!” [806]


아녀자에게 속은 것도 운명이다

고조는 일찍이 한신과 함께 여러 장수의 능력을 마음 놓고 말하면서 각각 등급을 매긴 일이 있었다. 고조가 물었다.

“나 같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 군대를 이끌 수 있겠소?”

한신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그저 10만 명을 이끌 수 있을 뿐입니다.”

고조가 물었다.

“그대는 어떻소?”

한신이 대답했다.

“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습니다.”

고조가 웃으며 말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좋다면서 어째서 나에게 사로잡혔소?”

한신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군대를 이끌 수는 없습니다만 장수를 거느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폐하께 사로잡힌 까닭입니다. 또 폐하는 이른바 하늘이 주신 바이니 사람 힘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807-808]


33. 한신*노관 열전

사마천이 보기에 주나라 초기 제후로 봉해진 인물은 대부분 조상의 음덕과 선행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나라 초기 제후들은 민간에서 시대의 흐름을 타고 일어나 자기 역량에 따라 세력을 구축한 차이가 있었다.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뒤 성이 다른 일곱 명을 왕으로 봉하여 봉건 할거 국면을 형성했지만, 나중에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씨가 아닌데 왕이 된 자들을 멸망시키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이 때 제후들은 조정의 꺼림이나 의심을 많이 받았고 잦은 반란도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한신과 노관도 공을 세워 왕으로 봉해졌고 고조와 친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당시 상황은 그들을 한나라를 떠나 반역의 길로 치닫게 만들었다. [815]


한나라 조정에 반기를 든 한신

배반과 투항을 일삼은 노관과 그의 족속들

빈객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변란의 조짐이다


35. 번*역*등*관 열전

이 편은 한나라 초기 개국공신이며 유방의 충성스러운 장수였던 번쾌, 역상, 하후영, 관영의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이들은 한나라와 초나라의 싸움과 한나라 초기 정권을 굳건히 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들로서, 모두 미천한 출신으로 시대 변화에 편승하여 영웅이 되었다.

이 편은 다른 열전의 구성과는 달리 전투와 전공 등의 사실을 반복하여 나열하고 있다. 특히 번쾌에 대해서는 그가 늘 군주를 따라 전쟁터로 뛰어다니며 본능적인 충성심과 용맹성으로 성공하는 면모를 묘사함으로써 전형적인 무사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기법은 짧고 간결한 문체의 반복적인 구사를 통하여 서술의 주체를 보다 뚜렷하게 드러내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845]


용맹스럽고 기개가 넘치는 번쾌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데 어찌 술 한 잔을 사양하리

“신은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데 어찌 술 한잔을 사양하겠습니까? 패공께서는 먼저 관중으로 들어와 함양을 평정한 뒤 패상에서 병사들을 노숙시키며 왕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오늘에 이르러 소인배의 말만 듣고 패공과 틈을 만드셨습니다. 신은 이 일로 천하가 분열되고 사람들이 왕을 의심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850]


반역으로 몰려 위기에 처한 번쾌

앞서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조는 병이 깊어 사람을 만나기조차 싫어 궁궐 깊숙이 드러누워 있으면서 호위병에게 신하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신하 강후와 관영 등은 열흘 넘게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때 번쾌가 궁중의 작은 문을 밀치고 바로 들어가니 대신들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고조는 호자 한 환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번쾌 등은 고조를 보자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전날 폐하께서 저희와 함께 풍현과 패현에서 군사를 일으켜 천하를 평정하실 때만 해도 얼마나 혈기가 왕성하셨습니까! 이제 천하가 평정되었는데 어찌 이토록 지쳐 보이십니까! 폐하의 병이 깊어져 대신들은 몹시 놀라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 등을 불러 나랏일을 의논하지 않고 도리어 일개 환관만 상대하고 세상일을 멀리하십니까? 폐하께서는 조고의 일을 알지 못하십니까?” [853-854]


노략질을 일삼던 역상


위증죄에 연류되어 옥살이한 하후영

하후영은 나라로 돌아와서 삼진을 평정하고, 한나라 왕을 따라가 항우를 쳤는데 팽성에 이르러서 그에게 크게 패했다. 한나라 왕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달아나다가 두 자식 효혜와 노원을 발견하고 수레에 태웠다. 그러나 한나라 왕은 말이 지치고 적이 뒤쫓아 와 사태가 급해지자 두 아이를 발로 차서 수레 밖으로 떨어뜨리려 하였다. 하지만 하후영은 그때마다 그들을 수레 아래에서 끌어올리고 천천히 가면서 두 아이가 자기 목을 끌어안게 했다. 한나라 왕은 몹시 화가 나서 도중에 하후영의 목을 십여 차례나 베려고 하였으나, 마침내 탈출하여 효혜와 노원을 풍으로 데려다 주었다. [860]


비단을 팔던 관영



* 내가 저자라면


** 전체적인 뼈대 & 보완점


  사마천은 자연환경과 문화적 특성의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역사를 움직이는 큰 힘은 바로 사람에게 있다고 보고 인물중심의 <사기>를 집필했다. 특이한 점은 제왕이나 고관대작 등 역사상의 위대하거나 유명한 인물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객과 좀도둑, 상인 등 사회적으로 별로 인정받지 못했던 직업이 등장하고 실패하거나 별 영향력이 없었던 인물도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사마천은 인물을 기록할 때 현실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도덕성과 인, 그리고 의를 중요시여기고 기록함으로써 새로운 이상세계를 염원하는 유가사상에 영향을 받은 자신의 가치관을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서양의 객관적(?)인 역사기술을 기준으로 삼는 학자들에 의해서 <사기>는 사마천 개인의 평가와 감정이 들어갔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이런 기술방식이 <사기>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다양한 국가에서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 이유가 된다. 또한 <사기>는 역사서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저자의 개성과 자유로운 문체, 그리고 해당 인물에 대한 생생하게 살아있는 묘사를 통해 전기(傳記)문학으로서의 가치도 탁월하다.


  각 편의 소제목과 해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붙인 것이다. 각 소제목은 그 자체가 해당 편의 줄거리이자, 사마천의 주장을 압축, 소개하고 있어서 책을 읽는 당시에 이해를 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 읽은 후 다시 찾아보기에도 아주 좋은 길잡이가 된다. 또한 각 편의 해제는 ‘고전읽기’라는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여정에서 주인공들과 시대적 상황, 그리고 저자인 사마천의 평가를 연결해 주는 좋은 도우미가 된다. 또한 해제 자체가 중국 문학 전문가이자 저술가인 역자의 좋은 텍스트로서 의미가 있었다.   


  열전의 구성 자체도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 감동을 배가하기 위해 주제와 등장인물의 특징에 따라 쓰여 있어서 800쪽이 넘는 책이지만 읽기가 아주 쉬웠고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후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태사공은 말한다.’라는 독특한 형태로 첨부하여 객관적인 역사와 자신의 의견을 분리하여 기술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사기열전>이 갖는 최고의 미덕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탐구에 있다. 한 편 한 편을 읽어보면 사마천의 세계관과 인생관 위에 개인적 비극을 냉정한 현실 인식으로 승화시켜, 그 시대를 살다 간 인물을 조망해 나간 흔적이 남아있다. 과연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지 않았다면, <사기열전>이 이토록 진한 감동을 주었을까 하는 의문마저 생긴다.

  세상은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던 그 시대와 천지가 개벽할 만큼 달라졌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인류의 의문은 여전하다. 사마천은 이 책의 많은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이러한 근본적인 의문을 우리에게 던지면서도 단순하고 획일적인 답변을 하고 있지 않다. 또 섣불리 당위론적 사고를 내세우는 것도 비판하고 있다.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한다면 옳은 것인가? 그런 것인가?’ [백이열전, p.65]

  사마천의 이 질문은 <사기열전>전체를 끌고 가는 화두이며, 잘못된 길을 가지 않고도 엄청난 재앙을 받았던 자신의 일생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책을 덮은 후에도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또 다른 숙제이며, 이런 질문을 품게 된 것이 바로 <사기열전>을 읽고 얻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자기 직분에 충실하면서 순수하게 개인의 자격으로 저술에 임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17]

사마천은 본인의 업무와 거의 관계가 없는 역사 기술을 자신의 평생 업으로 삼았고, 이를 위해 치욕을 견디었으며, 이를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남겼다.

  그가 역사저술을 본업으로 하는 직책을 맡았다면 시간적으로나 자료를 활용하는 면에서 좀 더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기]가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인 사마천의 역사의식과 사료비판능력은 마음껏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마천 개인에게는 힘든 시간이었을지라도, 후대의 우리는 오히려 이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결국 천복을 찾는다는 것은 상황과 환경에 따른 수동성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천복의 기쁨인 것이요, 그 결과 주어지는 영광은 부수적인 것일 수밖에 없음이다.


 <사기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24]

  우리가 지금 고민하는 많은 문제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인 어떻게 살 것인가?

사마천은 이 고민이 현대인의 새로운 문제가 아님을 이야기한다.

이 문제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끝없이 이어질 문제이며, 또한 존재하는 사람의 숫자만큼 그 답도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다. 

나는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캠벨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시대 범인들이 느끼지 못할지라도, 그래서 영웅의 길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결국 그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귀환하는 것이 영웅의 길이며, 시대가 필요로 하는 우리 한 명 한 명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 


 (공자왈) “부귀가 찾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자리라도 나는 하겠다. 또 만일 찾아서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겠다.” [66]

  돈을 좇아 살더라도 돈을 잡을 수 없고 권력을 좇아 살더라도 진정한 권력을 잡을 수 없다. 가장 어리석은 일이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 가장 좋은 것은 당연히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많이 버는 것이다. 그런 길을 쉽게 열리지 않는다. 우리가 증명할 것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명제라면 좋아하는 일에 전력을 투자하여 그 일에 탁월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먹고 사는 것뿐만 아니라 명예와 성공도 따라 오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하여 오랜 시일이 지나 군주의 총애가 깊어지면 큰 계책을 올려도 의심 받지 않고 군주와 서로 다투며 말하여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89]

  상담에서 상담자가 주의할 사항이 하나 있다고 한다. 내담자의 행동이나 말을 해석해 줄때 내담자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섣부른 해석은 오히려 내담자의 마음을 닫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모두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이 진실로 나의 입장에서 나를 위하여 한다고 느껴지는 충고나 질책은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감정의 골만 깊어지게 한다. 우선 서로의 마음을 열고 어떤 이야기도 오해 없이 스며들 수 있는 ‘관계’가 우선이 된다. 인간적 신뢰가 쌓여야 진실이 가치를 발할 수 있다는 것!


*** “습관”에 참고할 문구


‘처음에 싹을 자르지 않아 무성해지면 어떻게 하나? 터럭같이 작을 때 치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 (주서) [231]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꼭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실천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121]


깃털도 많이 쌓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이 부러지며,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이고, 여러 사람의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고 합니다.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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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2010.05.03 08:14:11 *.219.109.113
도서실에서 모든 것을 캔슬하고 자료 찾은 냄새가 물씬 풍긴다. 많이 찾았네. 역쉬~
바지런히 돌아다니며 열심히 공부하는 너의 모습을 떠올리니
아침부터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  ___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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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4 21:17:26 *.106.7.10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
근데 가끔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봐야한다는 압박도 느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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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2010.05.04 11:26:54 *.236.3.241
실천이 빠른 선형~~

지난주에 잡은 컨셉이 리뷰에 많이 반영되어 있네 ㅎㅎㅎ
지난 한주 고생 많았고, 안팎으로 일이 많아 마음이
부산할텐데  차분히 풀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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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4 18:26:10 *.30.254.28
정말, 은근 카리스마 라니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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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10.05.05 20:34:54 *.160.33.180

시간과 생각이 들어간 좋은 리뷰다.  이렇게 50권을 읽으면, 너는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너를 위해 참으로 기쁜 일이다.  오직 한걸음 한걸음 충실하게 걸은 자가 가장 많은 것을 얻게 된다.  공부란 그런 것이다   정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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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6 05:41:00 *.106.7.10
앗, 감사합니다. 스승님 칭찬을 받으니 너무 기뻐서 가슴이 뜁니다.
충실하게 한걸음 한걸음 걷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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