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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일 22시 31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사마천.jpg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과 그의 어린시절

 사마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바로 아버지 사마담이다. 사마천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사기>는 아버지가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는 당대 최고 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쓴 ‘육가의 요지를 논한다’ 라는 논문이 <사기><태사공자서>에 실려 있다. 이 논문은 유가·묵가·명가·법가·도가·음양가 등 제자백가 중 여섯 학파를 비교하여 각각의 장단점을 뽑아 비평한 것으로 간결하면서도 예리하다. 육가 중 사마담이 가장 공감한 사상은 도가였다. 당시 한나라는 진나라의 폭정과 초한전쟁으로 인한 파괴를 수습하고 민심을 회복시켜야 했다. 그래서 도가 사상을 받아들여 백성을 쉬게 하며 차츰 국력을 모아나갔다. 이것 외에도,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이 대상의 진실을 파악하는 도가가 사마담의 기질에도 맞았던 것이다. 이런 아버지를 둔 소년 사마천은 어떻게 자랐으며 무엇을 배웠을까?

 천은 용문에서 태어나 황하의 북쪽 용문산 남쪽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축을 기르고 있었다. 10세에 이미 고문(古文)을 암송하고······.《사기》<태자공사서>

 저는 어려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정신을 자부하였지만 자라서는 항리에서 어떤 칭송도 받은 바가 없습니다. <보임안서>

여기서 그의 집안은 남을 부리며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지만 부모의 사랑 속에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했을 것이다. 아버지 사마담은 도가의 방식으로 아들 사마천을 키웠을 테니 온갖 명소들은 모두 데리고 다녔을 것이다. 사마천의 “얽매이지 않는 정신”은 물론 타고난 것일 테지만, 이런 청소년기의 환경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소년 사마천은 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열심히 책을 읽어 나갔다. <논어>·<춘추좌전>·<국어>·<시경>·<서경>과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초한춘추>와<우본기>, 그리고 병가와 종횡가 같은 제자백가들의 책이었다. 이런 독서를 통해 자연스럽게 관중과 포숙의 우정, 강태공의 위업, 오자서의 복수, 항우의 패업 등에 매료된 사마천은 이들을 마음속의 영웅으로 삼고 다양한 독서를 위해 고문(古文)을 익혀 나갔다. 당시의 고문이란 춘추전국시대의 문자로 한나라 시대의 금문(今文)을 완벽하게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 사마천은 금문과 고문은 물론 서주(西周)시개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金文)까지 모두 익혔다.
금문(金文)은 역사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최초의 글이니 사마담이 어떤 목적의식을 각고 아들을 가르쳤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사마천은 어떤 판본이든 모두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절의 독서는 그를 미래의 사성(史聖)으로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된다.

《사기》의 시작

 아버지 사마담은 자기 당대에 역사서를 완성하고 싶었지만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직무상 황실서고에 있는 많은 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지만 자료의 정리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역사서가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장소를 가봐야만 알 수 있는 현장감이 빠져 있는 김빠진 역사서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관직에 매인 몸인데다 젊은 나이도 아니었기에 그 사명을 아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사마천에게는 말 마(馬), 옮길 천(遷). 성과 이름에 이런 글자가 들어 있어서인지 그에게는 역마살이 있었다. 사마천은 <사기>130권의 시작인 <오제본기>의 뒷부분에 다음과 같은 자전적 기록을 남겼다.

 나는 일찍이 서쪽의 공동(空桐)을 거쳐 북쪽으로 탁록을 지나 동쪽으로 바닷가에 다다르고, 남쪽으로 회수를 건너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보았다.

 짧은 기록이지만 당시 서역과 광동, 광서를 제외한 제국 전체를 다녀왔다는 뜻인데, 이 대여행은 그의 여행 중 가장 길고 유명하며 <사기>의 집필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여행에서 청년 사마천은 무엇을 얻었을까?

 가는 곳마다 펼쳐지는 생활과 풍속의 실태는 무엇보다 그의 견식을 심화시켰으리라. 알뜰한 생활인의 행복을 문득 엿보는 일도 있었으리라. 사마천은 인간이 연출하는 비극과 희극의 무대가 그저 역사적인 시간 속의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또렷이 알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리고 여행 도중에 맞닥뜨린 곤란은 청년 사마천에게 인간의 마음을 읽는 기술을 가르쳤다. 그런 만큼 따스하고 친철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에 접해서는 기뻐하는 눈물을 흘렸으리라. 이렇게 여려 장소에서 사마천은 역사를 움직이거나 혹은 역사 속에 묻히더라도 굳건히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존재를 절로 발견하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인간의 발견은 그 자체가 곧 새로운 자기의 발견이다. 이 청춘 마지마의 방랑에서 그는 책상머리의 학문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수많은 교훈들을 얻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사마천에게 끊임없는 자기 발견의 훌륭한 무대가 되었던 동시에, 무엇보다 탁월한 인생의 교사였던 것이다.
<인간 사마천>중

여행은 사마천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계기가 되어 주었다. 사마천이 10대 때 책에서 읽은 영웅들이 활동했던 장소를 직접 보고 들은 현장 독서의 체험은 <사기>의 저술에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의 역사학자 이장지 교수는 사마천의 여행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 여행에서 사마천은 위대한 사극(史劇)을 관람한 ‘위대한 관객’이었지만, 후에는 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이야기들을 사극의 무대에 배치한 ‘위대한 연출가’가 되었다. <사마천의 인격과 품격>중

궁형을 감내하고

 사마천은 무제 앞에서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에게 세 가지 형벌 중 하나를 고를 권리가 주어지지만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궁형을 받게 된다. 사대부면 이런 굴욕을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지만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아름다운 문장들, 자신들이 한 일을 후세에 남겨주기를 바라는 선대와 당대의 수많은 영웅들과 지사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죽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죽음보다 더한 치욕인 궁형을 받아들였다. 그의 목숨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극형을 당했으면서도, 부끄러워 할 줄 몰랐던 것은 저의 저술을 완성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서술을 완성하여 명산(名山)에 보관하고, 각지의 지식인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제가 받은 치욕을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몸이 산산조각이 나도록 주륙(誅戮)당한다고 해도 어찌 후회를 하겠습니까? <보임소경서>중

 막다른 골목에서 사마천은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삶이냐, 죽음이냐? 그는 못다 한 일을 마치기 위해 삶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구차한 선택에 대한 세간의 비웃음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은 결국 죽고 난 다음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지금 목숨을 끊거나 자포자기하는 것은 궁형(宮刑)을 선택한 자신에 대한 모독일 뿐 아니라 참으로 값어치 없는 짓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제가 법에 굴복하여 죽임을 당한다 해도 ‘아홉 마리 소에서 털 오라기 하나(구우일모九牛一毛)’ 없어지는 것과 같고,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도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세상은 절개를 위해 죽은 사람처럼 취급하기는커녕 죄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평소에 제가 해놓은 것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임안서>중

그는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을 선택했다.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을 위해 당장은 구차해보이지만 이를 참고 발분하여 못다 한 일을 끝내기로 한 것이다. 누구나 한 번은 죽지만 죽음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마천의 생사관은 이렇게 지독한 고독과 처절한 고통 속에서 정립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육신의 죽음을 초월하는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구차한 선택은 결코 구차한 것이 아니었다. 수만 번 죽어도 후회 없을 진정한 가치를 지닌 위대한 선택이었다.

궁형 그 후

몸이 망가진 다음 자연인으로서의 사마천은 사라졌다. 그러나 이 비극으로 인해 사회문제를 보는 눈, 인물과 사회문제를 보는 눈, 인물과 사건에 대한 통찰력과 사고는 더욱 넓어지고 깊어졌다. 높게 나는 새가 더 멀리 본다지만 반대로 사마천은 밑바닥에 떨어져 더 멀리 보게 된 셈이다. 그의 글이 그토록 냉철하면서도 감성적이고 전투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이유는 그의 천재성도 있겠지만 이 비극이 없었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니체는 “오직 피로 쓴 글만을 좋아한다.”라고 했는데 <사기>만큼 이 말이 너무나 처절하게 와 닿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사마천의 죽음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사인이 무엇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역사혼, 사마천>에서는 병사로, <소설 사마천>에서는 자살로 묘사하고 있다. 그 외에도 옥사설, 처형설, 심지어 은둔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설까지 다양한데 어쨌든 <사기>를 완성한 후 모든 정력을 소모하고 세상을 뜬 것만은 분명하다. 자기의 책이 얼마나 세상에 알려질 것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뜻을 알아줄까? 이것이 그의 마지막 걱정이었지만 <사기>는 그의 기대를 뛰어넘는 영원한 고전이 되었고, 그 역시 도저히 지울 수 없는 불멸의 사성(史聖)이 되었다.

사마천 연표

기원전 145년 관중의 용문에서 태어남
기원전 139년경 고문을 배우기 시작함, 아버지 사마담, 태사승이 됨
기원전 126년 약관의 대여행에 나섬
기원전 118년 낭중에 제수되어 조정에 출사함
기원전 112년 감숙 방면으로 첫 번째 출장여행
기원전 111년 서남이 방면으로 두 번째 출장여행
기원전 110년 아버지 사마담 별세. 장례 후 황제를 수행하여 봉선하러 태산으로 세 번째 출장 여행
기원전 109년 네 번째 출장여행, 황하의 호자에서 터진 둑을 막는 공사에 직접 참여함.
기원전 107년 다섯 번째 출장여행. 산서지방의 사적을 수집함.
기원전 106년 여섯 번째 출장여행, 구의산과 천주산을 둘러봄.
기원전 105년 본격적으로 <사기>저술에 착수함.
기원전 98년 이릉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됨.
기원전 97년 궁형을 당함.
기원전 96년 사면을 받고, 중서령에 임명됨. 집필에 전력 다함.
기원전 91넌 <보임안서>를 씀, 이 무렵 <사기>가 완성됨.
기원전 90년경 사마천, 세상을 떠남.

<사기>의 체제는 다섯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다섯 체제의 첫째가 ‘본기(本紀)’다. 근본이 되는 기록이라는 뜻이다. 전설상의 제왕 황제께서 제왕 황제에서 한 무제까지의 열둘의 왕조와 제왕을 연대기 식으로 정리했다. 편년체로 되어있는 <춘추>의 형식을 인물 위주로 개편했다.
둘째는 ‘표(表)’로 모두 10권이다. 왕조의 순서에 따라 역사를 단계별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세대(세표)·연(연표)·월(월표)로 나누어 기록했다. <사기>전체에 대한 사건 서술의 연겨로과 보충이기도 한다.
셋째는 ‘서(書)’로 모두 8권이다. 이후의 역사서에서는 ‘지(志)라고도 한다. 국가나 사회의 중요한 제도를 테마별로 정리한 것이다. 경제는 <평준서>, 치수(治水)는 <하거서>에 기록하는 식이다. 예의에 관한 <예서>, 음악에 관한<악서>, 군사에 관한<율서>, 역법에 관한<역서>, 천문에 관한 <천관서>, 종교에 관한 <봉신서>등이다.
넷째는 ‘세가(世家)’로 모두 30권이다. 세가는 대대로 이어가는 제후국들의 역사를 연대기 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 16개, 한고조 유방을 도운 공신 집안 5개, 한 왕실의 제후 왕의 전기 6개, 외척 전기 1개 등이다.
마지막이 바로 ‘열전(列傳)’으로 모두 70편이다. 열전은 <사마상여열전>처럼 한 사람만의 전기인 ‘전전(傳傳)’, <관악열전>같이 비슷한 인물들을 대등하게 묶은 ‘합전(合戰)’, <자객열전>같이 비슷한 유형의 인물들을 모은 ‘유전(遺傳)’등 여러 형식으로 나뉜다. 열전에는 인물의 전기만이 아니라 주위의 외국 군장이 통치한 역사도 기록했다. 고조선을 다룬 <조선열전>도 그중 하나이다.

[참고]
세상을 만든 여행자들 -한종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의 백과사전 사기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김영수-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j-BlQFySRVc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해제

사마천은 자신이 기술하고자 하는 시대의 사회 구조와 그 내부의 발전상, 인물과 사건 및 제도 등 그 사회가 가진 제반 현실에 역사적 해석을 부여하고자 했다. [13]

발분發憤의식의 소산이다. 궁형을 당한 것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한 구차한 행위가 아니라 글을 지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16]

격동의 시대를 약120여명이라는 비운의 인물을 통해 그려 냈으니 결국 사마천에게는 ‘비극’이야말로 아닌 게 아니라 시대의 표징이었던 셈이다. [19]

사마천은 자신이 입수한 문헌 가운데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도덕적 기여도가 높은 인물들을 고르고 거기에 평가를 더했다. 독자로 하여금 선을 행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렇지 않은 자는 화를 입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다. [21]
→ 그 평범한 진리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현실이 꼭 그렇지 않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혹리열전」에서 혹리 12명의 행적을 통해 한 무제의 정책의 무모함을 비판하면서 사마천은 법령이 늘수록 도둑이 느는 데 이유가 있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혹독한 법령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23]

『사기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역시 적지 않다.

이러한 열전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사마천은 인가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24]

1. 백이열전(伯夷列傳)

공자는 “인이란 사람다움이다.”,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단 하루라도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라고 했다. 이로부터 보면 ‘인’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키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인’의 실천방법으로 ‘효孝’, ‘제悌’, ‘충忠’, ‘서書’, ‘예禮’, ‘악樂’ 을 제시했다. [60]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면 이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 [65]
→ 이런 고뇌는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지 않을까?

“부귀가 찾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자리라도 나는 하겠다. 또 만일 찾아서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 좇아 행하겠다.” [66]
→ 결국 부귀란 찾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은 부귀를 찾기 위해서는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행하여만 된다는 말이겠지.

“추운 계절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세상이 다 흐려졌을 때 비로소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 드러난다. 어찌하여 [세속 사람들은] 그토록 부귀한 사람을 중시하고, 깨끗하고 맑은 사람을 하찮게 여길까? [66]

“탐욕스러운 자는 재물 때문에 목숨을 잃고, 열사는 이름을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치며,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권세 때문에 죽고, 서민은 그날그날의 삶에 매달린다.” [66]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 비추어 주고, 같은 종류의 물건은 서로 어울린다.” [66]

2. 관·안열전 (管晏列傳)

“안자라는 분은 키가 여섯 자도 채 못 되는데 제나라 재상이 되어 제후들 사이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그분이 외출하는 모습을 살펴보니 품은 뜻이 깊고 늘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키는 여덟 자나 되건만 겨우 남의 마부 노릇을 하면서도 아주 의기양양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첩이 헤어지자고 하는 까닭입니다.” [76]

3. 노자·한비열전(奴子韓非列傳)

“천금千金은 막대한 이익이고 재상이라는 벼슬은 높은 지위지요. 그대는 교제고대 제왕이 해마다 동짓날에 도성의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올린 제사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소?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결국 종묘로 끌려 들어가게 되오. 이때 그 소가 몸집이 작은 돼지가 되겠다고 한들 그렇게 될 수 있겠소? 그대는 더 이상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84]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버릴 줄 아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계책을 지혜로운 것으로 여긴다면 지나간 잘못을 꼬집어 궁지로 몰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결정을 용감한 것이라고 여기면 구태여 반대 의견을 내세워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더라도 그 일의 어려움을 들어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유세자는 군주가 꾸민 일과 같은 계책을 가진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칭찬하고, 군주와 같은 행위를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칭찬하며, 군주와 같은 실패를 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며 두둔해 주고, 군주와 같은 실수를 한 자가 있으면 그에게 잘못이 없음을 명확히 설명하고 덮어 주어야 한다. 군주가 유세자의 충성스러운 마음에 반감을 가지지 않고 주장을 내치지 않아야 비로소 유세자는 그 지혜와 언변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군주에게 신임을 얻고 의심 받지 않으며 자신이 아는 바를 다 말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여 오랜 시일이 지나 군주의 총애가 깊어지면 큰 계책을 올려도 의심 받지 않고 군주와 서로 다투며 말하여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때 유세자가 국가에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명백히 따져 군주가 공적을 이룰 수 있게 하며, 옳고 그름을 솔직하게 지적해도 영화를 얻게 된다. 이러한 관계가 이어지면 유세는 성공한 것이다. [89]

용이라는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 자길이의 비늘이 있어 이것을 건드린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으면 거의 성공적인 유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1]

“노자가 귀하게 생각하는 도는 허무(虛無)이고, 자연을 따르며 무위(無爲)속에서도 다양하게 변하는 것이다. 장자는 노자가 말한 도덕의 의미를 미루어 풀어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쳤는데, 그 요지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92]

4. 사마양저열전(司馬穰苴列傳)

5. 손자·오기열전

“어지럽게 엉킨 실을 풀려고 할 때는 주먹으로 쳐서는 안 되고, 싸우는 사람을 말리려고 할 때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주먹만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급소를 치고 빈틈을 찔러 형세를 불리하게 만들면 저절로 물러날 것입니다. [111]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꼭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며,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실천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손빈이 방연을 해치운 계략은 실로 절묘했으나, 그에 앞서 다리가 잘리는 형벌을 당하는 재앙은 막지는 못하였다. 오기는 무후에게 험난한 지형보다 임금의 덕행이 더 낫다고 말했지만, 초나라에서 그의 행실이 각박하고 인정이 없었으므로 목숨을 잃었으니 슬픈 일이구나! [121]

6. 오자서열전

나는 ‘사람이 많으면 한때 하늘도 이길 수 있지만, 일단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사람을 깨뜨릴 수도 있다.’라고 들었소. [135]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천리를 좇을 수 없었소.’ [135]

7. 중니제자열전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고 바른 예(禮)로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148]

중궁의 아버지는 미천한 사람이었으나 공자는 이런 말을 했다.

“얼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곧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재물로 쓰지 않으려고 하여도 어찌 산천의 신들이 그냥 내버려 두겠는가?” [151]
→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찌됐건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말일까?

염구가 공자에게 물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실천해야 한다.” 자로가 물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아버지와 형이 살아 계신데 어찌 들은 것을 바로 실천하겠느냐?” 자화가 공자의 대답이 다른 것을 의아해 하며 물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어째서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함으로 제지한 것이다.” [152]

하루는 재여가 낮잠을 잤다. 공자는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한탄했다.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고, 더러운 흙으로 쌓은 담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다.” 재여가 고대 전설 속의 다섯 제왕인 오제의 덕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는 그것을 물을 자격이 없다.” [158]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160]

“제가 듣기엔 나라 안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강한 적을 공격하고, 나라 밖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약한 적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골칫거리는 나라 안에 있습니다. 저는 제나라 왕께서 당신을 세 번이나 봉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이뤄지지 않은 것은 대신들 가운데 반대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노나라를 쳐서 제나라 땅을 넓히게 된다면 제나라 왕은 싸움에 이겼기 때문에 더욱 교만해질 것이고, 대신들의 위세는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왕과 사이가 날로 소원해질 겁니다. 이렇게 위로는 왕을 교만하게 만들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방자하게 만들면 당신이 뜻하는 바를 이루기 어려워집니다. 일반적으로 왕이 교만해지면 제멋대로 하고 신하들이 방자해지면 권력을 다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제나라에서 당신이 설 땅은 더욱 좁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오나라를 치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나라를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면 백성은 나라 밖에서 죽고, 대신들은 나라 안에서 그 지위를 잃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신은 위로는 대적할 만한 강한 신하가 없어지고 아래로는 백성의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니, 왕을 고립시켜 제나라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게 됩니다.” [162]

용맹스러운 사람은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곤경에 빠진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지 않으며,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놓치지 않고, 왕은 다른 나라의 후대를 끊지 않음으로써 의를 세웁니다. [164]

군자가 도를 배우면 남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사람을 부리기 쉽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169]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너는 도에 힘쓰는 군자의 선비가 되어야지, 명성을 좇는 소인의 선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 [171]

“많이 듣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한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적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 [172]
→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함을 알지만 얼마나 많은 순간을 조급함으로 인해 놓치고 있는지.

“말이 참되고 믿음이 있으며 행동이 착실하고 조심스럽다면 오랑캐 땅에서도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참되지 못하고 믿음이 없으며 행동이 착실하지 못하고 조심스럽지 않다면 비록 자기 고향일지라도 행세할 수 없을 것이다. 서 있을 때에는 그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고 수레에 탔을 때에는 그것이 수레의 가로 막대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한 뒤에야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172]

대체로 통달한 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잘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통달하게 된다. 그러나 명망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어진 척하지만 실제 행동은 완전히 어긋나면서도 그러한 것에 물들어 조금도 의심 없이 행동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이름을 얻게 된다. [173]

“내가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병들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병들지는 않았습니다.” [176]

한번은 공자에게 인(仁)이란 어떤 것인가를 물었는데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진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러자 자우가 다시 물었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며 그것만으로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 말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을 실천하기란 어려운데 그것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느냐?” 자우가 한번은 군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물었다.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군자는 걱정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우가 다시 물었다.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군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마음속 깊이 살펴보아 부끄러울 것이 없다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183]
→ 부끄러운 것에 대한 기준도 결국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을 깨우친 사람이야말로 자기 안에 올바로 정립된 기준이 있는 사람이겠지.

번수가 인(仁)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지(智)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184]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숨기는 것이 예이다.” [187]

8. 상군열전

“의심스러워하면서 행동하면 공명이 따르지 않고, 의심스러워하면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자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남들이 모르는 지혜를 가진 자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오만하다는 비판을 듣게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미 이루어진 일도 모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일이 시작되기 전에 압니다. 백성은 일을 시작할 때에는 더불어 상의할 수 없으나 일이 성공하면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가장 높은 덕을 강구하는 자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큰 공을 이루는 자는 뭇사람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으며 구태여 옛것을 본뜨지 않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면 옛날의 예악 제도를 좇지 않았습니다.” [199]

지혜로는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예법의 통제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법을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200]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나라에 편하면 옛날 법을 본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은 옛 법을 따르지 않았지만 제왕의 일로 이루었고,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은 예법을 바꾸지 않았지만 멸망했습니다. 옛날 법을 따른다고 하여 칭찬할 것도 못 됩니다.” [200]
→ 예전의 것이 그 당시에 좋은 것을 가져다주었더라도 현재에 그것이 꼭 좋은 것을 가져다주리란 보장은 없다. 어쩌면 성공한 사람을 모델링 하는 것도 좋지만 그 사람이 간 길을 그대로 간다고 해서 꼭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기에게 맞게 수정하고 보완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게다. 과거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없을까 찾아 헤매이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설사 그 사람을 찾았던들 과연 난 모방함으로써 도약할 수 있었을까?

천 사람의 아부는 한 사람의 올바른 직언만 못합니다. [207]

‘덕을 믿는 자는 일어나고 힘을 믿는 자는 멸망한다.’ [210]

9. 소진열전

현명한 군주는 밖으로는 적의 강함과 약함을 헤아리고 안으로는 병사의 자질이 뛰어난지 모자란지를 헤아려, 두 군대가 서로 싸울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이기고 지는 것과 죽고 사는 관건은 이미 가슴속에 있게 됩니다. 어찌 평범한 사람들의 말에 가려 어두컴컴한 곳에서 큰일을 결정하겠습니까! [224]

[주서周書]에서는 ‘처음에 싹을 자르지 않아 무성해지면 어떻게 하나? 터럭같이 작을 때 치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231]

〔모든 일은〕 혼란스러워지기 전에 다스리고〔해로운 일은〕일어나기 전에 대책을 세워 막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환이 닥친 뒤에 걱정하면 이미 늦습니다. [235]

이 한 몸도 부귀해지자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면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238]

어떤 사람이 관리가 되어 멀리 떠나갔는데, 그 아내가 다른 사람과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돌아올 때가 되어 정부(情夫)가 걱정을 하자, 아내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미 독약 탄 술을 만들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흘이 지나 남편이 돌아오자 아내는 첩에게 독이 든 술을 가져다가 그에게 권하도록 하였습니다. 첩은 술에 독이 들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러면 주모(主母)가 내쫓길까 두렵고 말을 안 하자니 주인을 죽이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넘어져 술을 엎질렀습니다. 주인은 몹시 화를 내어 그녀에게 채찍을 쉰 대나 쳤습니다. 첩은 일부러 넘어져 술을 엎어서 위로는 주인을 살리고 아래로는 주모를 쫓겨나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매 맞는 것만은 피하지 못했습니다. 어찌 충성스럽고 신실하다고 해서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244]

신이 듣건대 현명한 왕은 자기 허물을 듣는 데 힘쓰고 자신의 뛰어난 점에 관한 칭찬을 듣기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247]

지혜로운 자는 일을 처리할 때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꿉니다. 제나라 사람들의 자주색 비단은 질이 나쁜 흰색 비단을 물들인 것이지만 그 값은 열 배나 비싸고, 월나라 왕 구천은 일찍이 회계산으로 쫓겨났지만 오히려 강대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제패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 일입니다. [252]

대체로 높고 편안한 것을 버리고 위험하고 낮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총명한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254]

10. 장의열전

신이 듣건대 명분을 다투는 자는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을 다투는 자는 저잣거리에서 다툰다고 합니다. 지금 삼천과 주나라 왕실은 천하의 조정이며 저잣거리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왕께서 이것을 상대로 다투지 않고 도리어 오랑캐 땅을 다툰다면 이는 왕업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70]

신이 듣건대 깃털로 많이 쌓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이 부러지며,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이고, 여러 사람의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고 합니다. [275]
→ 하나만 보았을 땐 가벼이 보아 넘길 수 있는 일들도 그것이 쌓이게 되면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모든 사소한 것들을 가벼이 보지 않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그런 것들로 인해 미래의 어느 날 내 발목을 잡히는 일이 없을 테지.

신하는 제각기 자기 임금을 위하여 힘을 다합니다. [281]

천하의 제후 가운데 남보다 늦게 복종하는 자는 먼저 망할 것입니다. 또 합종에 참가하는 나라들은 양떼를 몰아 사나운 호랑이를 공격하는 꼴과 다르지 않습니다. 호랑이와 양은 서로 적수가 될 수 없음이 명백한데도 왕께서는 사나운 호랑이와 손잡지 않고 양떼 편에 섰습니다. 신은 왕의 계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82]

오자서는 그 임금에게 충성하였기 때문에 온 천하가 그를 자기 신하로 삼으려고 서로 앞을 다투었고, 증삼은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였기 때문에 온 천하가 그를 자식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노비가 그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팔리면 좋은 노비입니다. 소박맞고 쫓겨 온 여자가 그 마을에서 다시 결혼한다면 좋은 아내입니다. [299]
→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결국 다른 이들에게는 인정을 받게 되는구나.

11. 저리자·가무열전

‘존귀하게 되는 까닭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는 그 존귀함을 영원히 잃지 않는다.’ [318]

12. 양후열전

주서(周書)에 ‘천명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라고 했으니, 이것은 요행이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이것도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 늘 자기 곁에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337]

13. 백기·왕전열전

“세상에 ‘자[尺]에도 짧은 데가 있고, 치[寸]에도 긴 데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백기는 적의 전력을 헤아려 날쌔게 대응하고 끊임없이 기이한 계책을 생각해 천하에 명성을 떨쳤지만, 응후와의 사이에서 생긴 근심은 없애지 못했다. 왕전은 진나라 장군이 되어 여섯 나라를 평정했다. 당시 왕전은 노련한 장수가 되어 시황제조차도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진나라를 보필해서 덕을 세워 천하의 근본인의를 베푸는 것을 튼튼하게 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시황제에게 아첨하여 편하게 있을 곳을 구하다가 늙어서 죽음에 이르렀다. 손자왕이 때에 이르러 항우에게 사로잡힌 것도 마땅하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각기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358]

14. 맹자·순경열전

공자가 이익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그 혼란의 근본 원인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한을 사는 일이 많다.’라고 했던 것이다. [363]

“이윤伊尹은 솥을 짊어지고 요리사가 되어 은나라 탕왕湯王에게 다가가서 힘을 다해 제왕의 일을 이루게 하였고, 백리해百里奚도 수레 밑에서 소를 치다가 목공에게 등용되어 목공을 천하의 우두머리도 만들었다. 이 두 사람은 처음에는 상대방의 비위를 맞춘 뒤에 바른길로 가게 했다. 추연의 말은 일반적인 법칙을 벗어났지만, 그도 소를 친 백리해나 솥을 짊어진 이융과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367]
→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요행에 의해 ‘짠’하고 나타나는 사람들은 그 만큼 빨리 사라지게 되겠지. 운 또한 능력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또한 준비된 사름들의 몫이 아닐까?

15. 맹산군 열전

“사람의 운명을 하늘에서 받는다면 아버님께서는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그렇지 않고 운명을 지게문에서 받는다면 지게문을 계속 높이면 그만입니다. 어느 누가 그 지게문 높이를 따라 계속 클 수 있겠습니까? [379]
→ 생각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는 것인데 운명을 정해진 것처럼 여겼던 때가 있었다. 사주풀이에 내 모든 것을 꿰어 맞추듯이 말이다.

처음 맹상군이 좀도둑과 닭울음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을 빈객으로 삼았을 때, 다른 빈객들은 모두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맹상군이 진나라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이 두 사람이 그를 구하였다. 그 뒤 빈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마음속 깊이 맹상군을 따르게 되었다. [384]
→ 자신의 능력이 어느 때 어떻게 쓰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내 능력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평소에 닦아 놓는 것이 미래의 어느 순간을 위해 필요할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당신은 혹시 아침 일찍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새벽에는 어깨를 맞대면서 앞다투어 문으로 들어가지만 날이 저물어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팔을 휘저으면서 시장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침을 좋아하고 날이 저무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날이 저물면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물건이 시장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위를 잃자 빈객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고 해서 선비들을 원망하여 일부러 빈객들이 오는 걸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빈객들을 대우하십시오.” [398]

16. 평원군·우경열전

옛말에 ‘강한 자는 공격을 잘하고 약한 자는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앉아서 진나라의 요구를 들어주면 진나라 군사는 애쓰지 않고 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는 진나라를 강하게 하고 조나라를 약하게 만듭니다. 더욱더 강해지는 진나라가 더욱더 약해지는 조나라 땅을 떼어 받는 일이니 진나라의 요구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한정된 땅을 가지고 끝없는 요구에 응하면 그 결과는 조나라의 멸망뿐입니다. [417]

속담에 ‘이익에 사로잡히면 지혜가 흐려진다.’라고 하였다. 평원군은 풍정의 그릇된 말에 빠져 조나라 장평의 사십여 만 병사를 산 채로 매장되게 하고 한단을 거의 멸망시킬 뻔했다. 우경이 사태를 헤아리고 상황을 추측하여 조나라를 위해 꾀한 계책들은 얼마나 주도면밀했던가! 그러나 위제의 불행을 차마 볼 수 없어 결국 대량에서 고통을 받았다. 평범한 사람도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아는데 하물며 어진 우경이 몰랐으랴! 그러나 우경에게 고통과 근심이 없었다면 책을 지어 후세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422]

17. 위공자 열전

“오늘 저도 공자를 위하여 일을 할 만큼 했습니다. 저는 한낱 동문의 문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공자께서는 몸소 수레를 끌고 오셔서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로 맞아 주셨습니다. 다른 곳에 들를 수 없었을 텐데도 공자께서는 제 청을 받아들여 주해에게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자의 이름을 높여 드리기 위하여 일부러 오랫동안 공자의 수레를 시장 가운데 세워 두고 친구에게 들러 공자의 태도를 살펴보았더니 공자께서는 더욱더 공손했습니다. 시장 사람은 모두 저를 소인이라 하고, 공자를 덕행이 있으며 선비에게 몸을 낮추는 분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430]

“공자께서는 선비를 아껴 명성이 천하에 알려졌습니다.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하여 이렇다 할 계책도 없이 진나라 군대를 향해 뛰어들려고 하니, 이는 비유하자면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 주는 것과 같으니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찌 평소에 빈객을 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공자께서는 저를 두텁게 대해 주셨지만 공자께서 죽을 길을 떠났는데도 아무런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자께서 원망하여 되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433]

“세상일에는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고, 또 잊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또 위나라 왕의 명령이라 속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한 것은 조나라 입장에서는 공을 세운 것이지만 위나라 입장에서 보면 틀림없이 충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스스로 교만해져 공로가 있다고 하시니, 이는 공자로서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436]
→ 보통 내가 남에게 준 것만을 기억하게 마련인데 그것을 잊으라는 건 나를 남들 앞에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돌보기 위해서가 아닌가 한다. 내가 한 것에만 너무 집중하다 보면 그들이 나에게 베푼 행동들이 가려지게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베푼 것을 돌려받지 못함을 다른 이들을 원망함으로 대신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18. 춘신군 열전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우면 힘이 약한 개가 그 기회를 틈타 이익을 차지할 것입니다. [446]

『시경』에 “시작이 없는 것은 없으나 끝이 좋기란 드믄 일이다.”라고 했고 『역경』에서는 “여우가 물을 건너가려면 꼬리를 적시게 마련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시작은 쉽지만 끝맺음은 어렵다는 것을 뜻합니다. [447]

“이리저리 날뛰는 토끼도 사냥개를 만나면 잡힌다. 다른 사람이 무언가 마음에 두고 있으면 내 마음으로 그걸 헤아릴 수 있다.” [448]

“적은 용서하면 안 되고 때는 놓치면 안 된다.” [448]

“세상에는 생각지도 않던 복이 찾아올 수도 있고, 또 생각지도 않은 불행이 올 수도 있습니다. [459]

‘마땅히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 [461]

19. 범저·채택열전

“대부의 집을 번창시킬 인재는 나라 안에서 찾고, 제후의 나라를 번창시킬 인재는 천하에서 찾는다.”라고 들었습니다. 천하에 현명한 군주가 있으면 다른 제후들이 마음대로 인재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현명한 군주는 그러한 인재를 제후들로부터 빼앗아 오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의사는 환자가 죽고 사는 것을 알고, 훌륭한 군주는 일의 성공과 실패에 밝습니다. 이로우면 행하고 해로우면 버리고 의심스러우면 좀 더 시험해 봅니다. [471]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안으로는 그 권위를 굳히고 밖으로는 그 권력을 무겁게 한다.’ [480]

‘나무 열매가 너무 많으면 가지가 부러지고, 가지가 부러지면 나무 기둥을 해친다.’ 라고 했습니다. 수도가 지나치게 크면 나라가 위태롭고, 신하가 지나치게 존중되면 군주가 낮아집니다. [480]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벗을 사귀는 것은 천한 몸이 되었을 때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 때문이고, 부유할 때 벗을 사귀는 것은 가난해졌을 때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488]

대체로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은 차례로 할 일을 다하면 물러갑니다. [493]
→ 때마다 일이 끝나는 시점을 알고 잘 마무리 짓고 다시 새로운 일을 착수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닐까한다.

옛말에 ‘해가 중천에 오르면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기운다.’라고 했습니다. 만물이 왕성해지면 곧바로 쇠약해져 떨어지는 것은 천지의 변하지 않는 이치입니다.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 굽히고 펴는 것이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은 성인의 영원한 도리입니다. 그래서 나라에 도가 시행되면 나아가서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시행되지 않으면 물러나 숨어야 합니다. 성인이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면 덕이 있는 자를 만나기에 이롭다.’라고 말했고, ‘정당하게 얻지 않은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498]
→ 자연을 따라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삶이 우리를 가장 이롭게 하는 삶일 것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알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척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물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의 길흉을 알 수 있다.’라고 합니다. 또 옛글에 ‘성공했으면 그 자리에 오래 있지 말라.’라고 했습니다.(...)당신은 어째서 이 기회에 재상의 인수를 되돌려 어진 사람에게 물려주도록 하고 물러나 바위 밑에서 냇가의 경치를 구경하며 살지 않습니까? [502]

“한비자가 ‘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아야 장사를 잘 할 수 있다.’라고 했는데 진실로 옳은 말이다. 범저와 채택은 세상에서 말하는 뛰어난 변사로서 어떤 경우에도 자유자재로 변론할 수 있는 유세가였다. 그러나 각국의 제후에게 유세하여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한 것은 그들의 계책이 졸렬해서가 아니라 유세한 나라들의 힘이 약하고 작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이 두루 돌아다닌 끝에 진나라로 들어가자 잇달아 경상(卿相)이 되고 공을 천하에 떨친 것은 참으로 진나라와 다른 여러 나라의 강하고 약한 차이 때문이다. 선비에게는 역시 우연히 때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 두 사람 못지않은 재능을 가지고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을 어찌 다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두사람도 어려운 때가 없었다면 어찌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505]
→ 무엇이든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는 것이다. 설사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도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어려운 때를 거치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기를 얼마나 잘 견디느냐 일 것이다.

20. 악의 열전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는 가깝다는 이유로 봉록을 주지 않고 공로가 많은 자에게 상을 주며, 능력 있는 사람에게 그에 맞는 일을 맡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재능을 살펴 관직을 주는 이는 공적을 이루는 군주이고, 행동을 바르게 하여 사귀는 이는 이름을 남기는 선비입니다. [513]

“일을 잘 꾸민다 해서 반드시 일을 잘 이루는 것은 아니며, 시작을 잘 한다고 해서 반드시 마무리도 잘하는 것은 아니다.” [516]

“옛 군자는 사람과 교제를 끊더라도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을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기 결백을 밝히려고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 [516]

21. 염파·인상여열전

“저 진나라 왕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궁정에서 꾸짖고 그 신하들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내가 아무리 어리석기로 염장군을 겁내겠소?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만일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어울려서 싸우면 결국은 둘 다 살지 못할 것이오. 내가 염파를 피하는 까닭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하기 때문이오.” [533]

“당신은 조나라의 귀공자왕족입니다. 지금 당신 집에서 나라에 바치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을 내팽개쳐 둔다면 국법이 손상될 것입니다. 국법이 손상되면 나라가 쇠약해질 테고 나라가 쇠약해지면 제후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올 것이며, 제후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면 조나라는 멸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께서 어떻게 이와 같은 부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 같은 귀한 분이 국법이 정한 대로 나라에 의무를 다하면 위아래가 공평해질 테고 위아래가 공평해지면 나라가 강해질 것이며, 나라가 강해지면 조나라는 튼튼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국왕의 일족이니 그 누가 공자를 하찮게 보겠습니까?” [534]

그래서 조나라 왕은 염파 대신 조괄을 장군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인상여가 말했다. “왕께서는 명성만 믿고 조괄을 쓰려고 하는데, 이는 거문고의 괘를 아교로 붙여서 고정시키고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그저 자기 아버지가 남긴 병법 책을 읽었을 뿐 사태 변화에 대처할 줄은 모릅니다.” 그러나 조나라 왕은 듣지 않고 마침내 조괄을 장군으로 삼았다. 조괄은 스스로 어릴 적부터 병볍을 배워 군사에 대해 말하자면 이 세상에 자기를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일찍이 그는 아버지 조사와 함께 군사적인 일로 토론한 적이 있는데, 조사는 그를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사는 그가 잘한다고 하지 않았다. 조괄의 어머니가 조사에게 그 까닭을 묻자 조사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란 목숨을 거는 거요. 그런데 괄은 전쟁을 너무 쉽게 말하오, 조나라가 괄을 장군으로 삼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만일 괄을 장군으로 삼는다면 틀림없이 조나라 군대는 파멸당할 것이오.” 조괄이 떠나려고 할 때, 그 어머니는 왕에게 글을 올려 이렇게 말했다. “제 아들을 장군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왕이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조괄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전에 제가 조괄의 아버지를 모실 때, 그 무렵 제 아들의 아버지는 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먹여 살리는 이가 수십 명이고, 벗이 된 사람은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왕이나 종실에서 상으로 내려준 물품은 모두 군대의 벼슬아치나 사대부에게 주고, 출전 명령을 받으면 그날부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아들은 하루아침에 장군이 되어 동쪽을 향해 앉아서 부하들의 인사를 받게 되었지만 군대의 벼슬아치 가운데 누구하나 제 아들을 존경하여 우러러보는 이가 없습니다. 왕께서 내려주신 돈과 비단을 가지고 돌아와 자기 집에 감추어 두고 날마다 이익이 될 만한 땅이나 집을 둘러보았다가 그것들을 사들입니다. 왕께서는 어찌 그 아버지와 같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버지와 자식은 마음 씀씀이부터 다릅니다. 부디 왕께서는 제 아들을 보내지 마십시오.” 왕이 말했다. “어머니는 더 이상 말하지 마오. 나는 이미 결정했소.” [539]
→ 자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기는 참 어려운 일일 것인데 참으로 현명한 어머니이다. 비록 왕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아 큰 화를 피하지는 못하였지만 말이다.

“아!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도 판단이 더딥니까? 대체로 천하 사람들은 시장에서 이익을 좇는 것처럼 사귑니다. 당신에게 권세가 있으면 따르고 권세가 없어지면 떠나갑니다. 이것은 진실로 당연한 이치인데 무엇을 원망하십니까?” [541]
→ 때론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이롭게 할 때가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보단 마음이 편할 테니 말이다.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돌려받고 기둥을 노려볼 때라든지 진나라 왕 주위에 있던 신하들을 꾸짖을 때 그 형세는 기껏해야 죽음뿐이었다. 선비 중에 어떤 이는 겁을 집어먹고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상여가 한 번 용기를 내자 그 위세가 상대편 나라까지 떨쳤고, 물러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겸손을 양보하니 그 이름은 태산처럼 무거워졌다. 인상여는 지혜와 용기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545]
→ 신화와 인생에서 나왔던 인디언들이 전쟁 중에 ‘죽기에 좋은 날이다.’고 하며 뛰어나갔던 구절이 생각났다. 인상여가 그랬든 인디언들 또한 이러 마음이지 않았을까? 무엇이든 내가 생각을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로 인해 나라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생각했기에 이러한 용기를 낼 수 있었으리라.

22. 전단열전

“용병(用兵)의 도(道)는 정공법으로 싸우고, 기이한 계책으로 [허를찔러] 이기는 것이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기이한 계책을 무궁무진하게 낸다. 기이한 계책과 정공법이 서로 어우러져 쓰이는 것은 마치 끝이 둥근 고리 같다. 대체로 기이한 방법은 처음에는 처녀처럼 약하게 보여 적군이 [얕잡아 보고] 문을 열어 두게 하지만, 나중에는 그물을 벗어난 토끼처럼 날래져서 적이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다. 이는 전단의 용병법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554]

23. 노중련·추앙열전

“선생께서는 저 하인들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하인 열 명이 한 사람을 따르는 것은 어찌 힘이 그만 못하고 지혜가 모자라서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주인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563]

“천하에서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덜어 주고 재앙을 없애 주며 다툼을 풀어 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장사꾼의 행위입니다.” [566]

제가 듣건대 지혜로운 자는 때를 거슬러 유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용감한 자는 죽음을 겁내어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으며, 충성스러운 신하는 자기 한 몸을 앞세워 군주를 뒤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567]

지혜로운 사람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용감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567]

제가 듣건대 작은 예절에 얽매이는 사람은 영화로운 이름을 이룰 수 없고, 작은 치욕을 마다하는 사람은 큰 공을 세울 수 없다고 합니다. [569]

자신이 죽고 후손을 끊어 공과 이름을 세우지 못하는 것을 지혜로운 행동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개인적인 울분과 원한을 버리고 영원히 빛날 수 있는 이름을 세웠으며, 원망에 사로잡힌 작은 절개를 버리고 대대로 전해질 수 있는 공을 세운 것입니다. [571]

“나는 부귀로우면서 남에게 얽매여 사느니 차라리 가난할망정 세상을 가볍게 내 망대로 살리라!” [572]

구불구불 뒤틀린 나무뿌리일지라도 만승의 그릇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주위 사람들이 먼저 그 모양을 꾸미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 누군가가 미리 이야기를 해 둔다면 마른나무와 썩은 등걸일지라도 공을 세워 잊혀지지 않게 됩니다. [578]
→ 씨앗을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 각자 내면에 있는 씨앗 그것을 키워주는 사람들이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조력자들일 것이다.

24. 굴원·가생열전

사람들의 군주된 자 가운데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 어질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충신을 구하여 자신을 위하도록 하고, 현명한 자를 등용하여 자기를 돕도록 하려고 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고 가정이 깨지는 일이 거듭 생기고, 훌륭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가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충신이라는 이가 충성을 다하지 않고, 현명하다는 이가 지혜롭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물물이 흐렸다가 맑아져도 마시지 않으니 내 마음이 슬프구나. 이 물을 길어 갈 수는 있다. 왕이 현명하면 모든 사람이 그 복을 받는다.” [590]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만 생각하고 남을 낮추고 자기를 귀하다 하네. 통달한 사람은 넓게 보고 무슨 물건인건 한결같이 보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을 위하여 죽고 열사는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법. 권세를 뽐내는 자는 권세 때문에 죽고 평범한 사람은 삶에만 매달리지. 이익에 유혹되고 가난에 쫓기는 무리는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니네. 성인은 사물에 굽히지 않고 수많은 변화를 만나도 한결같다네. 세속 일에 구애받는 사람은 우리 속에 갇힌 죄수 같도다.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은 만물을 버리고 홀로 도와 함께 하누나. 많은 사람 미혹에 빠져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 가슴속에 쌓지만 진실한 사람은 담박하고 적막해서 홀로 도와 더불어 사는도다. 지혜와 형체를 버리고 초연히 죽은 듯이 하는구나. 조용하고 넓은 황홀한 세계에서 큰 도와 더불어 나는도다. 흐름을 타면 흘러가고 모랫벌에 닿으면 멈춘다네. 몸을 자유롭게 천명에 맡기고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네. 살아 있으면 떠 있는 것 같고 죽으면 쉬는 것과 같네. 심연의 고요함처럼 담담하고 매이지 않은 배처럼 떠 있네. 살아도 스스로 귀중히 여기지 않고 공허한 마음을 길러서 유유자적한다네. 덕 있는 사람은 얽매임이 없고 천명을 알아 근심이 없으니 하찮은 일이야 어찌 걱정하겠는가! [604-606]

25. 여불위 열전

제가 듣건대 아름다운 얼굴로 남을 섬기는 자는 아름다운 얼굴이 스러지면 사랑도 시든다고 합니다. [615]

영화를 누릴 때 터전을 닦아 놓아야지 아름다운 얼굴이 스러지고 사랑이 식은 뒤에는 비록 한마디 말을 하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615]

“소문[開]이란 겉으로는 인덕을 좋아하는 듯하지만 실제 행동은 오히려 그렇지 못하고, 스스로 어진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면서도 그에 대한 의혹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관리가 될 때도 거짓으로 명성을 취하고, 집에 있을 때도 거짓으로 명성을 취한다.” 이 말은 마융(馬融)이 말한 바와 같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을 뜻한다. [622]

26. 자객열전

“예물을 바치고 남의 신하가 되어 섬기면서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두 마음을 품고 자기 주인을 섬기는 것일세.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매우 어렵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까닭은 천하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려는 것일세.” [631]

“대체로 위태로운 일을 하면서 안전함을 찾고 재앙을 만들면서 복을 구하려고 한다면 계책은 얕아지고 원망만 깊어질 뿐입니다. 새로 사귄 친구 한 명과 사귐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나라의 커다란 피해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는 원한을 쌓고 재앙을 만드는 일입니다. [642]

27. 이사열전

그는 젊을 때 군에서 지위가 낮은 관리로 있었는데, 관청 변소의 쥐들이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가면 자주 놀라서 무서워하는 꼴을 보았다. 그러나 이사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있는 쥐들은 쌓아 놓은 곡식을 먹으며 큰 집에 살아서 사람이나 개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이 달렸을 뿐이구나.” [661]

저는 때를 얻으면 꾸물대지 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661]

“남을 신하로 삼는것과 남의 신화가 되는 것, 또는 남을 지배하는 것과 남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어찌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672]

편안한 것을 위험으로 돌릴 수도 있고 위험한 것을 편안한 것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675]

사람이 태어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비유하자면 준마 여섯 필이 이끄는 수레가 달려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짧은 시간이오. [679]
→ 이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통과 행복들을 겪으며 살아가게 될까? 인생이 짧다는 것만 제대로 인식해도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나도 아직 그러고 있지 못하지만 말이다.

신화와 군주는 직분이 정해지고 위와 아래의 의리가 분명해지면, 천하의 어진 사람도 어질지 않은 사람도 있는 힘을 다해 맡은 일을 하여 군주를 따르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주는 홀로 천하를 통제하고 남에게 제어되는 일이 없습니다. [683]
→ 누구나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면 세상이 혼란스러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군주가 신하들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위치에 맞게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한비자는 “자애로운 어머니에게는 집안을 망치는 자식이 있지만 엄격한 가정에서 거스르는 종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잘못을 하면 반드시 벌을 주기 때문입니다. [684]

현명한 군주, 성스러운 왕이 오래도록 존귀한 지위에 있으면서 길이 큰 권세를 잡고 천하의 이익을 독점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결단을 내리고 죄상을 세밀히 살펴 반드시 엄한 벌을 내림으로써 천하 사람들이 감히 죄를 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685]

“왕도(王道)는 간략하여 행하기 쉽지만 현명한 군주만이 이것을 시행할 수 있다.” [686]

28. 몽염열전

신이 듣건대 ‘경솔한 생각으로는 나라를 다르실 수 없고, 한 사람의 지혜로는 군주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라고 합니다. 충신을 죽이고 지조와 덕행이 없는 사람을 세우면 안으로는 신하들이 서로 믿지 않게 되고 밖으로는 전쟁을 하는 군사들의 마음을 흐트러질 테니 신은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707]

‘도리로 다스리는 자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무고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지 않는다.’ [708]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고 늙은이를 모시고 고아를 돌보며 모든 백성을 안정되고 평화롭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강력히 간언하지 않고 도리어 시황제의 야심에 영합하여 공사를 일으켰으니 그들 형제가 죽음을 당한 것은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찌 지맥을 끊은 탓으로 돌리랴.” [711]

29. 장이·진여열전

‘처음에 나와 그대가 약속한 것이 무엇이오? 지금 하찮은 치욕 때문에 일개 마을 관리의 손에 죽으려고 하시오?’ 진여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진나라는 조서를 내려 돈을 걸고 이 두 사람을 찾았는데 두 사람은 오히려 문지기 신분으로 마을 안에 조서를 전하였다. [716]
→ 나를 치욕스럽게 하는 일일지라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면 큰 치욕을 피할 수 있게 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늘 마음에 내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저 무신과 장이와 진여는 말채찍을 흔드는 것만으로 조나라 성을 수십 개나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왕 노릇을 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어찌 경상(卿相)이 되어 몸을 마치는 데 만족하겠습니까? 또 신하의 지위와 왕의 지위를 어찌 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처음 조나라의 세력이 안정될 무렵에는 감히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저마다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은 무신을 먼저 왕으로 세워 조나라 백성의 마음을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725]

장이와 진여가 처음에 빈궁할 때에는 서로 죽음을 무릅쓰고 신의를 지켰으니, 어찌 서로 돌아보고 의심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나라를 움켜쥐고 권력을 다투게 되자 마침내 서로를 멸망시켰다. 예전에는 서로 앙모하고 신뢰함에 성의를 다하더니 나중에는 서로 배반하고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그들이 권세와 이익만 좇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739]

30. 위표·팽월열전

“천하가 어지러우면 충성스러운 신하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743]

“인생은 흰 망아지가 [작은 문] 틈새로 달려 지나가는 것처럼 매우 짧소.”[745]

지략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자들이지만 오직 자기 몸을 보존하지 못하는 것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뱀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때를 만나 자신들의 뜻을 펼쳐 보려고 했기 때문에 갇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751]

31. 경포열전

황상이 물었다. “영포는 어느 계책을 쓸 것 같소?” 영윤이 대답했다. “낮은 계책을 쓸 것입니다.” 황상이 물었다. “어째서 최상의 계책과 보통의 계책을 버리고 낮은 계책을 쓸 것이라고 하오?” 영윤이 대답했다. “영포는 본래 여산의 무리로서 자기 힘으로 만승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지 뒷날을 생각하고 백성 만대의 이익을 위해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낮은 계책을 쓸 것이라고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768]

32. 회음후열전

그러나 신이 일찍이 그를 섬긴 적이 있으므로 항왕의 사람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항왕이 화를 내며 큰 소리를 지르면 1000명이 모두 엎드리지만 어진 장수를 믿고 일을 맡기지 못하지 그저 보통 남자의 용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항왕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공손하고 자애로우며 말씨가 부드럽습니다. 누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부리는 사람이 공을 세워 벼슬을 주어야 할 경우가 되면 인장(印章)이 닳아 깨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며 선뜻 내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아녀자의 인(仁)일뿐입니다. [781]

“제가 듣기로 ‘지혜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 실수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얻는 경우가 있다.’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미친 사람의 말도 가려서 듣는다.’라고 했습니다. [789]
→ 누구에게서나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 또한 나의 몫일 것이다.

“장군은 조서를 받고 제나라를 치려 하는데, 한나라 왕이 단독으로 밀사를 보내서 제나라를 항복시켰습니다. 그러나 장군에게 치기를 멈추라는 조서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역이기는 한낱 변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레의 가로나무에 의지하여 세 치 혀를 놀려 제나라의 칠십여 성을 항복시켰습니다. 그러나 장군은 대군 수만 명을 이끌고 한 해가 넘도록 조나라의 성 오십여 개밖에 항복시키지 못했습니다. 장군이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보잘것없는 유생의 공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793]

무릇 남이 나를 깊이 믿는데 내가 그를 배반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입니다.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798]

내가 듣건대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남의 우환을 제 몸에 지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남의 근심을 제 마음에 품으며, 남의 것을 먹으면 그의 일을 위해 죽는다.’라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이익을 바라고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801]

“진나라의 기강이 느슨해지자 산동 땅이 크게 어지러워지고, 진나라와 성(姓)이 다른 사람들이 아울러 일어나 영웅호걸들이 까마귀 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진나라가 그 사슴황제의 권한을 잃자, 천하는 다 같이 이것사슴을 좇았습니다. 이리하여 키가 크고 발이 빠른 자고조가 먼저 이것을 얻었습니다. 도척이 기르는 개가 요 임금을 보고 짖은 것은 요 임금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개는 본래 자기 주인이 아닌 사람을 보면 짖게 마련입니다. 당시 신은 한신만 알았을 뿐 폐하는 알지 못했습니다. 또 천하에는 칼날을 날카롭게 갈아서 폐하가 하신 일과 똑같이 하려는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능력이 모자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그들을 모두 삶아 죽이겠습니까?” [811]

33. 한신·노관열전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뒤 성이 다른 일곱 명을 왕으로 봉하여 봉건 할거 국면을 형성했지만, 나중에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씨가 아닌데 왕이 된 자들을 멸망시키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이때 제후들은 조정의 꺼림이나 의심을 많이 받았고 잦은 반란도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한신과 노관도 공을 세워 왕으로 봉해졌고, 고조와 친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당시 상황은 그들이 한나라를 떠나 반역의 길로 치닫게 만들었다.[815]

34. 전담열전

“독사에게 손을 물리면 손을 자르고 발을 물리면 발을 자릅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자르지 않으면 몸뚱이마저 해치기 때문입니다.” [837]
→ 당장은 실행하지 못할 역경처럼 느껴지지만 반드시 실행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면 그것이 얼마나 커져서 나를 덮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35. 번·역·등·관열전

“신은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데 어찌 술 한 잔을 사양하겠습니까? 패공께서는 먼저 관중으로 들어와 함양을 평정한 뒤 패상에서 병사들을 노숙시키며 왕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오늘에 이르러 소인배의 말만 듣고 패공과 틈을 만드셨습니다. 신은 이 일로 천하가 분열되고 사람들이 왕을 의심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850]

한나라 왕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달아나다가 두 자식 효혜와 노원을 발견하고 수레에 태웠다. 그러나 한나라 왕은 말이 지치고 적이 뒤쫓아 와 사태가 급해지자 두 아이를 발로 차서 수레 밖으로 떨어뜨리려 하였다. 하지만 하우영은 그때마다 그들이 수레 아래에서 끌어올리고 천천히 가면서 두 아이가 자기 목을 끌어안게 했다. 한나라 왕은 몹시 화가 나서 도중에 하후영의 목을 십여 차례나 베려고 하였으나, 마침내 탈출하여 효혜와 노원을 풍으로 데려다 주었다. [860]

3. ‘내가 저자라면’

 태사령 사마천은 당시에 알려진 거의 모든 사료를 볼 수 있었고 이를 저술의 기본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에 얽매이지 않고 독창적인 사고로 저술에 임했다. <사기> 이전의 역사책은 모두 편년체(編年體), 즉 연대기적 서술이었다. 편년체는 역사를 서술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하지만 보다 입체적으로 접근하고 싶었던 사마천은 기전체라는 새로운 방식을 창조해냈다. 이후 2000년간 모든 중국의 정사(正史)가 기전체로 쓰였으며, 한국과 일본, 베트남에까지 전파되어 <삼국사기>와 <고려사>, <대일본사>, <대월사기>도 이 체제를 따랐으니 기전체가 동양의 역사에 미친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이다.

 ‘태사공’이란 고유명사는 사마담과 사마천을 모두 의미한다. 열전마다 마지막에 ‘태사공은 말한다.’ 로 시작하는 문장을 통해 사마천 자신의 의견을 남기는데 그 내용이 사마천의 역사관을 함축시키고 있어 다시금 그 편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옮긴이가 사마천이 열전의 인물들을 서술한 내용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한 부분이 각 열전 앞머리에 있고 하나의 열전은 여러 편의 작은 이야기들로 묶여져 있는데 소제목을 달아놓아 각각의 이야기들의 주제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기열전>은 그동안 기록되었던 왕과 제후와 같은 지배층 위주가 아니라 재상, 관리, 장군, 반역자, 자객 등 영웅들 사이에 ‘이름 없는’자들을 넣어 다양한 인물 군상의 치열한 삶을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도 사마천은 열전 사이사이에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한 병사의 뛰어남을,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어머니의 한탄을, 길거리에 내걸린 동생의 시체를 보고 자랑스러워하는 누나를 기록한다. 이로 인해 세상에 잊혀진 많은 존재들이 우리 앞에 드러날 수 있게 되었고, 사마천은 그런 다양한 인물을 통하여 현재 우리 삶을 투영해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상고시대부터 사마천이 살던 한 무제까지의 중국 역사를 다루는 사기,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수록하고 있는 열전, 사기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 라는 물음에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열전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사마천은 시대를 풍미한 다양한 인물들이 겪는 일련의 사건과 그들의 언행을 통해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기열전의 첫 번째 편인 <백이열전>에서 사마천은 백이, 숙제가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왜?’라는 의문을 던졌다. ‘과연 그들이 죽어가면서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하늘의 도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사기>를 완성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마천은 하늘의 도에 대해서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를 통틀어 반복되는 불변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에는 흥망성쇠가 있다.’가 아닐까? 사기열전에는 언변에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나오지만 각각의 인물들에게 내려지는 역사적인 평가는 같지 않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도 결국은 죽는다. 그들이 부귀영화의 삶을 살았던 비참한 삶을 살았던 간에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의 빈부가 아닌 그들의 삶이 의로운 삶이었는지에 대한 그들의 역사적인 평가로 그들의 삶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일 것이다. 악인은 부귀영화의 한 세대를 살았지만 역사 속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고 의인은 한 세대를 곤궁하게 살았더라도 역사 속에서는 빛을 발하게 마련이다. 하늘이 내려준 운명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기>가 긴 세월을 거쳐 지금도 읽히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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