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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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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일 23시 44분 등록

1. 저자 사마천에 대하여

 

저자 사마천은 역사를 이야기 하였지만 <사기열전>을 읽는 내내 나의 마음은 역사 보다는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시대와 한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한 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했을까, 군왕 앞에서 나아감과 물러남 사이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 했을까, 원한과 사무침, 회환과 자긍심 사이에서 그의 마음의 궤적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는 <임안에게 보낸 편지(報任安書)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저는 천하의 산실된 구문을 수집하여 행해진 일을 대략 상고하고 그 처음과 끝을 정리하여 성패흥망의 원리를 살펴 모두 130편을 저술했습니다. …그러나 초고를 다 쓰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했는데, 나의 작업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안타까이 여긴 까닭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진실로 이 책을 저술하여 명산(名山)에 보관하였다가 내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하여 촌락과 도시에 유통되게 한다면 이전에 받은 치욕에 대한 질책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만 번 주륙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지혜로운 이에겐 말할 수 있지만 속인에겐 말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마천의 공식 출생 연도는 기원전 145년이다.

사마천의 고향은 하양(오늘날의 섬서성 한성시)이다. 당나라 시절 국제도시로 큰 번영을 누렸던 장안(현재의 서안)에서 동북쪽으로 2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전체 인구는 40, 시내 인구 15만으로 13억 인구가 사는 땅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궁벽한 시골이라고 볼 수 있다.

사마천이 태어난 곳은 한성시에서도 고문원촌으로 용문(龍門)이라고 불렸다. 과거에 급제하거나 출세했을 경우 '등용문'에 오르다는 표현을 하는데 이 말의 유래가 바로 용문이다.

사마천은 19세까지 용문에서 살았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주경야독했는데 사마천의 고향에 가면 '경독제(耕讀第)'를 볼 수 있다. '농사를 지으며 공부 하는 집'이란 뜻이다. 지금도 대문 위에 문패를 걸듯이 가로로 '경독제'라고 써 붙여놓은 집이 꽤 있다.

사마천은 태사령(정부의 문서를 보관하거나 제사를 관장하는 관직)이었던 아버지 사마담(~기원전 110)을 따라 19세가 되던 해 장안으로 이주했다. 사마천은 이주한 덕에 새로운 문물을 접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본인 스스로도 역사책을 쓰고 싶어 했던 사마담은 아들에게 역사가로서의 자질을 길러주기 위해 사마천이 20세 되던 해에 여행을 권유했다. 중국 전역을 돌아보는 대장정이었다.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한 탓에 그의 여행은 무척이나 고생스러웠을 것이다. 이 때의 경험은 <사기>의 마지막 권인 <태사공자서>를 비롯해 군데군데 언급되어 있다. 결국 '젊어서 사서 한 고생' <사기> 저술의 밑거름이 되었을 뿐 아니라 사마천의 정신세계를 형성하는 데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사마천은 기원전 118 28세가 되어서야 녹봉 300석을 받는 낭중이 되어 처음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당시 낭중은 재주가 있는 인재를 우선 선발했다가 자리가 나면 임명하는 예비 관료였다. 공무원 임용 대기자였던 셈이다. 그리고 30대 중반까지 별다른 기록이 없던 사마천이 그 사이 공백이 주로 학업을 연마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당시에 유명한 유학자이자 사상가인 동중서나 공안국(공자의 후손)에게 학문을 배우고 닦았다. 그리고 35세 때 한무제의 명을 받아 서남이 지방의 민정을 시찰하면서 문물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사마천은 서남이에서 임무를 마치고 산동성 태산에서 열리는 봉선제 참가하기 위해 길을 재촉하던 중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는다. 36세 무렵이었다. 사마천은 낙양으로 급히 달려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 대대로 사관을 지낸 가문의 후손이었던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도 자신의 뒤를 이어 반드시 태사령이 되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가업을 잇고 천고에 길이 남을 역사책을 쓰라는 뜻이었다.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를 창졸간에 잃은 사마천의 충격은 실로 컸다. 아지만 삼년상을 마친 뒤 사마천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기원전 108 38세의 나이로 태사령에 올랐다. 이로써 필생의 역작인 <사기>를 편찬 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 마련되었다.

 

한편 한나라는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야심차게 굴기하던 한무제는 그전까지 열세였던 흉노와의 대인 관계를 역전시키기 위해 대흉노 정책을 공세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대대적인 흉노 정벌이 단행되었다. 무인 집안 출신의 이릉 장군도 흉노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장수들 사이의 알력과 충돌 탓에 이릉 장군의 5,000결사대가 그만 적진 깊숙한 곳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당시 흉노의 군사는 3만명이었다. (중과부적이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에서 나왔다.). 이릉 장군의 군대는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 이릉 장군도 항복하고 말았다. 사마천의 나이가 47세에서 48세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한나라 조정은 매국노 이릉을 성토하는 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이릉은 중과부적으로 어쩔 수 없이 거짓 항복한 것이며 훌륭한 장수라고 변호했다. 이 발언이 한무제를 분노케 했다. 당시 사마천은 여느 관리와 달리 잔머리를 쓰지 않는 벼슬아치였다. 결국 괘씸죄에 걸린 사마천은 한무제의 의해 황제를 무고한 죄로 옥에 갇히고 만다. 사마천의 나이 48세 때 일이었다.

이후의 상황도 사마천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갔다. 이릉이 흉노에게 병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헛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한무제는 먼저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키고 사마천에게도 사형을 명했다. 당시 한나라 법에 따르면 사형을 면하는 방법은 두 까지 뿐이었다. 먼저 목숨 값으로 50만 전을 내는 속전이 있었다. 하지만 말단 관리인 사마천에게 그런 큰 복이 있을 리 만무했다.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기 싫은 지인들도 못 본 체했다. 다른 방법은 궁형이었다. 한마디로 남성을 잃고 내시가 되는 것이었다. 궁형은 중국의 10대 혹형 가운데 하나였다. 궁형 외에 다른 여타의 혹형은 육체적인 형벌에 그쳤지만 궁형은 심리적, 정신적 고통까지 수반하는 치욕의 형벌이었다.

옛날에는 전 세계 어느 나라든 궁형이 존재했는데, 중국의 경우에는 생식기를 고환까지 단칼에 잘라냈다. 그러면 요도만 남는데 소변이 나오는 구멍밖에 남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런 다음 요도에 큰 거위 털을 박아 잠실(궁형을 받은 사람들을 수용하는 난방)로 내쳤다. 궁형을 당하고 나면 몸이 몹시 차가워지기 때문에 체온을 유지시켜주기 위해서였다.(그래서 궁형을 받은 죄수들을 '잠실로 내쳐졌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위 털을 박아 넣은 데서 오줌이 나와야만 살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요독증에 걸려 죽고 말았다. 끔찍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그런 궁형을 자청했다. 왜 그랬을까. 왜 그토록 치욕스러운 궁형을 감수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하려고 했을까. 다름 아닌 아직 완성하지 못한 <사기> 때문이었다.

 

사마천은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였으며 BC 95년 황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중서령은 황제의 곁에서 문서를 다루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그는 환관(宦官)신분으로 일부 사대부들의 멸시를 받았으며 운신의 폭도 자유롭지 못했다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사마천은 마침내 《사기》를 완성하였다사기 완성의 정확한 연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기원 전 91년 사마천이 친구인 임안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보낸 서한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서한에서 사마천은 자신이 옥에 갇히고 궁형에 처한 경위와 그에 더욱 분발하여 사기를 저술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은 심경을 고백하였다. 이 편지《보임안서(報任安書)》의 내용으로 보아 사기는 이 시기(기원전 91)에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사기》의 규모는 본기(本紀) 12, 연표(年表) 10, () 8, 세가(世家) 30, 열전(列傳) 70권 모두 130 52 6 5백자에 이른다. 사마천은 《사기》가 완성된 2년 후에 사망하였다. 사마천은 자신이 저서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지만 후한시대에 들어와 《사기》라고 불리게 되었다

 

[내용의 출처]

1. 도서 '난세에 답하다' (김영수 )

2. 네이버 백과사전 - 사마천

3. 위키피디아 / 사마천

3. 네이버캐스트 / 인물 > 사마천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역자서문

세계인의 고전 『사기』는 사마천이 사관인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에 따르고자 궁형의 치욕을 딛고 저술한 통사체 역사서로서, 전설의 황제시대부터 한 무제 때까지 2000년을 아우르고 있다.  (5)

 

<사기>중에서도 <열전> 70권은 주나라 붕괴 후 등장한 50개 제후국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칠웅 戰國七雄 , , , , , , 의 흥망성쇠를 주축으로 하며,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5)

 

 

공자나 맹자가 지나친 이상주의를 설파하여 제후들의 외면을 받고 끝내 세상을 벼슬 한자리를 얻는데 실패했다면, 이들과 달리 세 치 혀 하나만으로 출세하여 천하를 제 손안에 굴리고 쥐락펴락한 세객도 있다. 설득의 귀재였던 책략가 소진은 6국이 동맹하여 진의 동방진출을 막자는 합종책을 제안하여 십오 년간 6국의 재상을 역임했다. 또한 진나라 장의는 6국의 동맹을 허물고 개별적으로 진나라와 횡적인 동맹을 구축하는 연횡책으로 대응하여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6)

 

<사기열전>은 이와 같은 격동과 파란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온갖 인물 군상의 결정체이다. (7)

 

해제

<사기> 130편은 상고시대부터 사마천이 살던 한 무제 때까지의 중국 역사를 다룬다. 여기에는 중국인들이 사이四夷라고 불렀던 주변 이민족의 역사가 포함된다. 이 책은 중국 역사의 전법典範으로 일컬어지며,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역사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기』는 「본기」12, 「표」10, 「서」8, 「세가」30, 「열전」70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1)

 

<세가>는 제왕보다 낮은 위치인 봉건 제후들의 나라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후들 외에 황제의 친척과 공훈을 세운 신하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무관의 제왕인 공자와 왕을 칭한 지 6개월 만에 망한 진섭이 포함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열전>은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주로 수록하고 있는데, 신분을 초월한 인물들이 포진되어 있다. (12)

 

중국 고대 역사서의 세 가지 편찬 체제인 편년체, 기사본말체, 기전체 가운데 기전체의 효 시가 <사기>이다. 기전체는 본기와 열전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먼저 시대순으로 제왕의 언행과 행적을 중심으로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외교 등 중대한 사건을 서술하고, 제왕이나 제후를 보좌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13)

 

사마천은 자신이 기술하고자 하는 시대의 사회 구조와 그 내부의 발전상, 인물과 사건 및 제도 등 그 사회가 가진 제반 현실에 역사적 해석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통사를 쓰면서도 자신의 시대인 한 대를 다루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료 해석에 충실하면서도, 역사의 발전적 흐름과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날카로운 안목을 보여 주었기에, 이 책이 오늘날까지도 지혜로운 삶의 지침서로서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것이다. (13)

 

사마천이 <사기>를 쓴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발분_發憤 의식의 소산이다. / 궁형을 당한 것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한 구차한 행위가 아니라 글을 지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둘째, 역사적 사실의 포폄褒貶과 직서直書이다. 이는 그의 <태사공자서>에서도 드러나지만 공자가 <춘추>를 서술한 방식에 바탕을 두고 후세 사람들에게 어떤 도덕적 규범을 제시하여 미언대의_微言大義_작은 말 속의 큰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17)

 

 

격동의 시대를 약 120여명이라는 비운의 인물을 통해 그려 냈으니 결국 사마천에게는 ‘비극’이야말로 아닌 게 아니라 시대의 표징이었던 셈이다. (19)

 

<사기 열전>은 서술에 있어 인물의 비중을 고려하여 안배한 흔적이 두드러진다. 독자에게 극적인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대립되는 인물을 같은 편에 놓은 경우도 많다. 또한 유림, 혹리, 자객, 유협, 골계 등 유사한 직업군을 한데 묶어 차례로 배치함으로써 인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했다. (20)

 

열전이란 말을 풀이할 때 '열列'이 배열이나 서술의 의미를 갖고 잇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는 듯하다. ‘전傳은 본래 경전의 주석을 가리키는 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구두로 전해진 것을 의미하며, 전통적으로 전기biography로 받아들여져 왔다. 사마천은 전기를 개인의 역사로 확대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전기라고 하면 아무래도 주인공의 삶을 모두 기재해야 하는데 『사기 열전』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사실도 더러 있다. (20)

 

또한 사마천은 자신이 입수한 문헌 가운데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도덕적 기여도가 높은 인물들을 먼저 고르고 거기에 평가를 더했다. 독자로 하여금 선을 행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렇지 않은 자는 화를 입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다. (21)

 

사마천은 인물들의 개별적인 유형에 입각해서 자신을 포함하여 당대를 움직인 인물들을 재구성하고, 그런 근거를 그 이전의 경사(經書)와 제자서(諸子書)들 뿐 아니라 민간의 구전에서도 취하는 유연성을 보여 주었다. (21)

 

이러한 <사기열전>의 독특한 인물의 선택, 서술 방식은 역사는 결코 지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작에서 출발한다. (22)

 

<사기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역시 적지 않다. 이러한 열전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사마천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사기열전>을 생명력 넘치는 산 역사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본위의 역사를 읽게 만든 작가의 각고의 노력 덕분이다. 사마천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 인물들을 현재에 살아 있는 거처럼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4)

 

일반 역사서와 달리 <사기열전>에 적잖은 주관적 서술이 보이는데, 사마천 자신의 사료 비판 능력과 어우러져 탄탄한 역사 서술 체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사마천의 혼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사기열전>의 서술 방식에는 냉정한 이성과 처절한 열정을 갖고 살아간 시대적 거장들의 숨결이 행간마다 녹아있다. (25

 

게다가 <사기>가 구십 년 늦게 나온 반고의 <한서>와 달리 도가와 병가, 잡가 등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여 한나라의 국가 이념인 유학에 배치된다는 점도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배척되는 요인이 되었다. (25)

 

물론 사마천의 기술 방식이나 자료 선정 방법 등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00년 전이라는 시간적 의미로 볼 때, 정말 이 정도로 완벽한 체제를 갖춘 역사서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오게 된다.

요컨대, 개인적으로 기록한 역사 <사기>가 후대에 24()의 필두로 거론되게 된 것은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한 무제까지 이르는 유일한 통사체 역사서이기 때문이라는 점이 일차적인 이유다. 또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역사 서술의 정확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절대 군주 위주로 재편되는 엄혹한 현실과 인간에 대한 성찰 즉 사마천의 역사를 보는 태도가 다른 역사서와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사기』가 문학서로서 색채를 유발하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27)

 

본문(사기열전)

 

천도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면서 인간사의 불공정한 여러 형태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천도의 기본은 권선징악이지만 사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적지 않아 착한 사람이 재앙을 입고 나쁜 사람이 복을 누리는게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마천은 공자가 백이와 숙제 두 사람에 대해인 을 구하여 그것을 얻었다라고 한 칭찬을 의문시한다. 백이와 숙제가 남긴 <채미가>의 내용이나, 이 두 사람이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죽은 것으로 볼 때 원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59)

 

사마천이 단순히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의 행적을 적었다기보다는 도도히 흐르는 역사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총괄적인 입장을 자신을 빗대어 쓴 것이다. (60)

 

은 공자에 의해 최고 원리로 제기된 이래 유가 사상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개념은 물론 공자 전에도 쓰였고, [논어]에서도 똑같은 뜻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공자는인이란 사람다움이다.” ,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 이이다.”단 하루라도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보면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키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의 실천방법으로’, ‘’ ,‘’, ‘’, ‘’, ‘을 제시했다. (60)

 

시험 삼아 벼슬을 주고 수십 년 동안 정치를 맡겨 공적이 이루어진 다음에 정치를 맡겼다. [이러한 절차를 밟는 까닭은] 천하의 소중한 그릇이고 왕은 가장 높은 통치자이므로 천하를 전해 주는 일이 이처럼 어려움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61)

벼슬과 정치는 다른 것으로 표현 되어 있다. 더불어 정치의 이런 구조가 우리 사회에도 녹아 있었으면 하는 것을 느낀다. 특히 판사를 임용하는 부분이 더욱 생각난다.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당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한다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65)

 

공자 또한 이렇게 말했다. "부귀를 찾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자리라도 나는 하겠다. 또 만일 찾아서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좇겠다." (66)

 

백이와 숙제는 비록 어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공자의 칭찬이 있고 나서부터 그 명성이 더욱더 드러나게 되었다. 안연은 학문을 배우기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공자라는)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행동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바위나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선비들은 일정한 대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명성이 묻혀 세상에 일컬어지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시골에 묻혀 사는 사람이 덕행을 닦아 명성을 세우고자 하더라도 덕행과 지위가 높은 선비에 기대지 못한다면 어떻게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 (67)

 

()임금 : 하우씨 부락의 우두머리이며 하나라 창시자이다. 그는 곤이 치수에 실패한 것을 교훈으로 삼아 십 년 만에 홍수를 다스려 민심을 얻었으며,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농사 시기에 최상의 이익을 얻으려고 했다. 그 당시 이미 군대, 형벌, 관리, 감옥 등이 있어 중국 초기 국가의 탄생으로 보인다. (67)

 

안영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영공, 장공, 경공, 등 세 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오십 년 동안 집정하면서 제나라를 중흥시켜 제후들 사이에 이름을 떨쳤다. 그는 2인자 행동 미학의 귀감을 보여 결단력과 슬기와 해학이 넘쳤고, 제갈공명이 극찬할 만큼 내치에도 뛰어났다. 그는 평생 돈안 단 한 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고 하며 삼십 년 동안 옷 한 벌로 생활할 만큼 검소했다. 그러면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은 명재상이다. (70)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난하게 살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경영하다가 실패하여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는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운세에 따라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쫓겼지만 포숙은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임금 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졌을 때 [나와 함께 곁에서 규를 도운]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나는 붙잡혀 굴욕스러운 몸이 되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자그마한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72)

 

창고에 물자가 풍부해야 예절을 알며,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임금이 법도를 실천하면 육친이 굳게 결속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네 가지 강령〔四維〕즉 예의〔, 정의〔, 깨끗함〔, 부끄러움 〔〕이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는 멸망한다. 수원水源에서 물이 흘러가듯이 명령을 내리면 그 명령은 민심에 순응하게 된다. (73)

 

백성이 바라는 것은 그대로 들어주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은 그들의 뜻대로 없애 주었다. (73)

 

주는 것이 곧 얻는 것임을 아는 게 정치의 비책이다. (74)

 

조정에 나아가서는 임금이 물으면 바르고 신중하게 대답하고, 묻지 않을 때에는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였다. 임금이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면 그 명령을 따르지만 올바르지 않을 경우에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75)

 

제가 듣건대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자에게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지 않는 자에게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자에게는 자신의 뜻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제가 죄인의 몸일 때 옥리들은 저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깨달은 바가 있어서 보석금을 내어 저를 구해 주었으니 이는 저를 알아준 것입니다. 저를 알아주면서도 예의가 없다면 진실로 죄인의 몸으로 있는 편이 낫습니다.” (75)

 

안자라는 분은 키가 여섯 자도 채 못 되는데 몸은 제나라 재상이 되어 제후들에게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그분이 외출하는 모습을 살펴보니 품은 뜻이 깊고 늘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키는 여덟 자나 되건만 겨우 남의 마부 노릇을 하면서도 아주 의기양양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첩이 헤어지자고 하는 까닭입니다.” (76)

 

그러나 왕에게 간언할 때는 왕의 얼굴빛에 조금도 구애 받지 않았으니, 이것은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보충할 것을 생각한다.’라는 마음가짐이었으리라! 오늘날 안자가 살아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채찍을 드는 마부가 되어도 좋을 만큼 흠모한다.“ (77)

 

폐도(覇道)란 仁과 義를 가볍게 보고 권모술수와 무력을 숭상하는 것으로서 王道와 상반되는 뜻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제후국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은 것도 제후들이 대부분 패도를 숭상하였기 때문이다. (78)

 

노자에 관한 사마천의 관점은 이러하다.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인으로 나이가 공자보다 많고 에 밝아 공자에게 가르침을 주었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장자의 우언을 당시 유가와 무가를 공격하는 탁월한 무기로 본다. 이러한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흔히 도가 사상 또는 노장 사상이라고 한다. 도가 사상은 끊임없는 전쟁과 불안정 및 권력과 지위 다툼으로부터 벗어나 은둔과 도피를 일삼는 철학이다. 그래서 도가 사상은 군주 권력의 전제정치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저항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한다. (78)

 

"새는 잘 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나는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 같은 존재였다." (82)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 노자는 하지 않는 것〔無爲〕으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했다. (83)

무위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맑고 고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장자는 몽 지방 사람으로 이름은 주이다. 그는 일찍이 몽 지방의 칠원이라는 곳에서 벼슬아치 노릇을 했고 양혜왕, 제선왕과 같은 시대 사람이다. 그는 학문이 넓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그 학문의 요체는 노자의 말에서 시작하여 노자의 학설로 돌아간다. 83

 

천금은 막대한 이익이고 재상이라는 벼슬은 높은 지위지요. 그대는 교제郊祭 고대 제왕이 해마다 동짓날에 도성의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올린 제사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소?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결국 종묘로 끌려 들어가게 되오. 이때 그 소가 몸집이 작은 돼지가 되겠다고 한들 그렇게 될 수 있겠소? 그대는 더 이상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84)

 

한비는 유학자는 글로 나라의 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협객은 힘으로 나라의 금령을 어긴다고 생각하였다. 군주는 나라가 편안할 때에는 이름 있는 유학자를 아끼고 위급할 때에는 갑옷 입고 투구 쓴 무사를 등용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나라에서 녹을 주어 기르는 자는 위급할 때에는 쓸 수 없는 자이고, 위급할 때에 쓰이는 사람은 평소 녹을 주어 기른 자가 아니다. (86)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라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내 주장을 그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는 데 있다. (87)

 

대체로 모든 일은 은밀히 진행시키면 이루어지고 말이 새어 나가면 실패한다. 그러나 유세자가 상대방의 비밀을 들출 뜻이 없었지만 우연히 상대방의 비밀을 말한다면 유세자는 몸이 위태로워진다. 또 군주에게 허물이 있을 때 유세자가 주저 없이 분명하게 바른말을 하고 교묘한 주장을 내세워 그 잘못을 들추어내면 그 몸은 위태로워진다. 유세자가 아직 군주에게 두터운 신임과 은혜도 입지 않았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 버리면 설령 그 주장을 실행하여 공을 세우더라도 군주는 그 덕을 잊을 것이며, 그 주장을 실행하지 않아 실패하게 되면 군주에게 의심을 받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유세자의 몸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또 군주가 좋은 계책을 얻어 자기 공로를 세우고자 하는데 유세자가 그 내막을 알게 되면 그 몸이 위태로워진다. 군주가 겉으로는 어떤 일을 하는 것처럼 꾸미고 실제로는 다른 일을 꾸미고 있을 때 유세자가 이것을 알게 되면 역시 몸이 위태로워진다. 또 군주가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게 하거나 그만두고 싶지 않은 일을 멈추게 하면 또한 몸이 위태로워진다. 그러므로 현명하고 어진 군주에 관해서 말하면 자기를 헐뜯는다는 오해를 받게 되고, 지위가 낮은 인물에 관해서 말하면 군주의 권세를 팔아서 자신을 돋보이려 한다는 오해를 받게 되며, 군주가 총애하는 자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그들을 이용하려는 줄 알며, 군주가 미워하는 자에 관해서 논하면 자기를 떠보려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말을 꾸미지 않고 간결하게 하면 아는 게 없다고 하찮게 여길 것이고,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말이 많다고 할 것이며, 사실에 근거하여 이치에 맞는 의견을 말하면 소심한 겁쟁이라 말을 다 못한다고 할 것이고, 생각한 바를 거침없이 말하면 버릇없고 오만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유세의 어려운 점이니 마음속에 새겨 두어야 한다.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버릴 줄 아는 것이다.  (88)

 

군주에게 총애를 받을 때에는 지혜가 군주의 마음에 든다고 하여 더욱 친밀해지고, 군주에게 미움을 받을 때에는 죄를 짓는다고 하여 더욱더 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군주에게 간언하고 유세하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를 살펴본 다음에 유세해야 한다.

용이라는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 자 길의 비늘이 있어 이것을 건드린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으면 거의 성공적인 유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1)

 

이란 회화나 문서에 나타난 군주의 명령으로서 일종의 성문법이라고 할 수 있고, 은 군주의 가슴속에 있는 것으로서 나라를 잘 다스릴 목적을 위해 아랫사람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시킨다든지 잘못한 일이 있으며 꾸짖고 벌주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법과 술을 더해 '법술'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특히 중앙집권적 통치하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한비자가 진시황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95)

 

양저는 병사들의 막사, 우물, 아궁이, 먹거리를 비롯하여 문병하고 약을 챙겨 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몸소 보살폈다. 또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재물과 양식을 모두 병사들에게 풀고, 자신은 병사들 중에서도 몸이 가장 허약한 병사의 몫과 똑같이 양식을 나누었다. 이로부터 사흘 뒤에 병사들을 다시 순시하자 병든 병사들까지도 모두 앞다투어 싸움터로 나가기를 바랐다. (102)

 

"어지럽게 엉킨 실을 풀려고 할 때는 주먹으로 쳐서는 안 되며, 싸오는 사람을 말리려고 할 때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주먹만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급소를 치고 빈틈을 찔러 형세를 불리하게 만들면 저절로 물러날 것입니다." (111)

 

(나라를 다스리는 데 중요한 것은) 임금의 덕행이지 험난한 지형이 아닙니다. 만일 임금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적이 될 것입니다. (117)

 

옛말에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꼭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실천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121)

 

오자서는 본래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고자 초나라를 등지고 오나라로 들어온 인물이다 어찌 보면 사마천도 궁형을 받고 인고의 세월을 살았으니 오자서의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 사마천은 비분강개한 필치로 오자서를 위한 열전을 만들어 오자서야말로 작은 의를 버리고 큰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칭찬했다. (123)

 

<서경> <반경>편의 고()에 ‘옳고 그른 것을 거스르고 공손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볍게는 코를 베고 무겁게는 목을 베어 이 땅에 악의 씨가 자리지 못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138)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왕의 관을 짤 목재로 쓰도록 하라. 아울러 내 눈을 빼내 오나라 동문에 매달아 월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하라." (140)

죽음에서도 버리지 않는 자기 확신. 자기 완성.

 

원한이 사람에게 끼치는 해독은 정녕 심하구나! 임금이라도 신하에게 원한을 사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야 어떠하겠는가? 옛날에 오자서가 아버지 오사를 따라 함께 죽었다면 하찮은 땅강아지와 무엇이 달랐겠는가! 그는 작은 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씻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겼으니 그 뜻이 참으로 슬프구나! (자신의 심경을 울부짖고 있는 듯 하다.) 오자서는 장각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위급한 상황에 놓이고, 또 길에서 빌어먹을 때도 마음속에 어찌 초나라의 수도 영을 잠깐인들 잊었겠는가? 그는 모든 고초를 견뎌 내어 공명을 이룰 수 있었다. 강인한 대장부가 아니면 어느 누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백공도 만일 스스로 왕이 되려고만 하지 않았던들 그 공적 또한 이루 말하지 못했으리라!" (143)

 

공자는 교육의 중요성을 부르짖고, 그의 나이 서른 살을 전후로 하여 제자를 모아 수업을 했는데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가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교육관을유교무류에 두었다. (145)

 

안회는 배울 때 듣고만 있어 어리석은 것 같지만 물러가 행동하는 것을 보면 내가 가르친 것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안회는 절대로 어리석지 않구나!

"벼슬에 나가게 되면 도를 실행하고 물러나면 조용히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너뿐이구나!" (148)

 

정치하는 법을 묻자 공자는 "문밖을 나서서는 귀중한 손님을 대접하듯이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듯이 신중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제후의 나라에서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대신들의 집에서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150)

 

자화가 공자의 대답이 다른 것을 의아해 하며 물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어째서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하므로 제지한 것이다.”. (152)

 

"군자는 의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군자가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고,, 소인이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도적이 된다." (153)

 

"자식은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삼 년상은 세상의 합일된 예의이다 (157)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고, 더러운 흙으로 쌓은 담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다." (158)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160)

가난하면 생을 즐길 수 없고, 부유해지면 시건방져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의 모습인가 보다.

 

제가 듣기에 나라 안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강한 적을 공격하고, 나라 밖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약한 적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161)

 

남에게 보복할 뜻이 없으면서도 그런 의심을 받는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고, 남에게 보복할 뜻이 있는데 이것을 알아차리게 한다면 이는 위태로운 일입니다. 또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새어 나간다면 이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 세가지는 일을 꾀하는 데 큰 걱정거리입니다. (165)

 

이처럼 자공은 한 번 나서서 노나라를 보존시키고 제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강국이 되게 하였으며, 월나라를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였다. 즉 자공이 한 번 뛰어다니더니 각국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십 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각기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68)

 

"전에 저는 선생님께 군자가 도를 배우면 남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사람을 부리기 쉽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169)

 

자하는 이렇게 물었다. '아름다운 눈의 맑게 갠 움직임이여, 아름다운 눈이 가진 흑백의 선명함이여, 흰 바탕으로써 아름다움을 이루었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먼저 흰 바탕이 있은 뒤에 색을 칠해서 다듬는다는 뜻이다." 이 대답에 자하는 또 물었다. "() 나중이라는 말씀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비로서 너와 더불어 <시경>을 말할 만하구나." (170)

 

많이 듣고 그 중에서 의심 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한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그 중에서 의심 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을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172)

 

말이 참되고 믿음이 있으며 행동이 착실하고 조심스럽다면 오랑캐 땅에서도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참되지 못하고 믿음에 없으며 행동이 착실하지 못하고 조심스럽지 않다면 비록 자기 고향일지라도 행세할 수 없을 것이다. 서 있을 때에는 그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고 수레에 탔을 때에는 그것이 수레의 가로 막대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한 뒤에야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172)

 

"그것은 명망이지 통달이 아니다. 대체로 통달한 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잘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통달하게 된다. 그러나 명망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어진 척하지만 실제 행동은 완전히 어긋나면서도 그러한 것에 물들어 조금도 의심 없이 행동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이름을 얻게 된다.“ (173)

나는 대부분 명망에 집착하고 있는 듯 하다.

 

공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말 잘하는 것으로 사람을 골랐다가 재여에게 실수하였고, 생김새만을 보고 사람을 가리다가 자우에게 실수하였다. (174)

 

원헌이 말했다. 내가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병들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병들지는 않았습니다. 자공이 몹시 부끄러워하며 언짢게 떠났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의 말이 지나쳤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176)

 

자로가 되물었다.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는데, 어찌 꼭 글 읽는 것만을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꾸짖었다. "그래서 나는 말만 잘하는 자를 미워한다." (181)

 

어진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러자 자우가 다시 물었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 말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을 실천하기란 어려운데 그것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느냐?” (182)

 

"마음 속 깊이 살펴보아 부끄러울 것이 없다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183)

 

 

번지는 소인이구나!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며, 윗사람이 신의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성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만 한다면 사방의 백성이 자식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찾아올 텐데 농사짓는 법을 배워 어디에 쓰겠는가?”(184)

 

번지가 인()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지()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184)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숨기는 것이 예이다. (187)

공자의 말뜻에 사마천은 동의하였는가? 특별한 태사공의 의견의 없어서 그런가 하고 지나치려 하지만 사마천은 나아가서 직언함으로써 궁형을 당하였음을 상기할 때 의견이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효공은 위앙을 등용했지만, 위앙이 법을 바꾸려고 하자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비방할까 봐 매우 걱정이 되었다. 위앙이 말했다.

의심스러워하면서 행동하면 공명이 따르지 않고, 의심스러워하면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자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남들이 모르는 지혜를 가진 자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오만하다는 비판을 듣게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미 이루어진 일도 모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일이 시작되기 전에 압니다. 백성은 일을 시작할 때에는 더불어 상의할 수 없으나 일이 성공하면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가장 높은 덕을 강구하는 자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큰 공을 이루는 자는 뭇사람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으면 구태여 옛 것을 본뜨지 않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면 옛날의 예악 제도를 좇지 않았습니다.”

효공이 대답했다.

옳은 말이오.”

그러나 신하 감룡은 이렇게 말했다.

옳지 않습니다. 성인은 백성의 풍속을 고치지 않고 교화시키며, 지혜로운 자는 법을 고치지 않고 다스립니다. 백성의 풍속에 따라서 교화시키면 애쓰지 않고도 공을 이룰 수 있고, 이미 시행되고 있는 법에 따라 다스리면 관리도 익숙하고 백성도 편안할 것입니다,” (199~200)

'옛 것을 따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의 전체 내용은 주장과 반박을 보이며 '법 개정'에 대한 서로 다름 입장을 명확히 보여준다. 나는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못한다.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것은 위에서부터 이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203)

 

돌이켜 자기 마음속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총()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성찰할 수 있는 것을 명()이라 하며,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이라 합니다. 순 임금도 ‘스스로 자신을 낮추면 더욱더 높아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 (207)

 

천 마리의 양 가죽은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합니다. 천 사람의 아부는 한 사람의 올바른 직언만 못합니다. 주 나라 무왕은 신하들의 올바른 직언으로 일어났고, 은나라 주왕은 신하들이 입을 다물어 망하였습니다. 당신이 만일 무왕을 잘못됐다고 나무라지 않는다면 제가 온종일 솔직하게 말씀 드려도 죽이지 않으시겠지요? 그렇게 하겠습니까? (208)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겉치레 말은 허황되고, 마음속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되며, 듣기 괴로운 말은 약이 되고, 달콤한 말은 독이 된다.’ 선생께서 진정으로 하루 종일 바른말을 해 줄 수만 있다면 나에게 약이 될 것입니다. 나는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려 하는데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사양하려 하십니까? (208)

 

<시경>에서는 ‘쥐한테도 예의가 있는데 사람으로서의 예의가 없구나.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으면 어찌 발리 죽지 않을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로 보더라도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 준 목숨을 다 누릴 수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시경>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는 흥하고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라고 했습니다. (209~201)

 

상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법을 만든 폐해가 결국 이 지경까지 이르렀구나." (211)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무엇이든지 힘을 쓸 수 있는 자리에서 힘을 받는 자리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슬러 생각하는 것으로 어려운 일인듯하다.

 

 

"대체로 선비가 머리를 숙여 가며 배우고도 높은 벼슬과 영화를 얻을 수 없다면 책을 많이 읽은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217)

뜻을 편다는 내용으로 이해하면 되리라 생각함

 

신이 생각하기에 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에 별다른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일을 만들어 백성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백성을 편안히 하는 근본적인 계책은 친하게 사귈 만한 나라를 고르는 데 있습니다. 사귈 만한 친구 나라를 알맞게 고르면 백성은 안정될 수 있고, 사귈 만한 친구 나라를 잘못 고르면 백성은 안정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221)

 

<주서_周書>에서는 ‘처음에 싹을 자르지 않아 무성해지면 어떻게 하나? 터럭같이 작을 때 치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미리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재앙이 이르게 되는 데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31)

 

신이 듣건대 (모든 일은) 혼란스러워지기 전에 다스리고 (해로운 일은)일어나기 전에 대책을 세워 막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환이 닥친 뒤에 걱정하면 이미 늦습니다. (235)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 항상 잃어버리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 인지상정.

 

이 한 몸도 부귀해지자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면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238)

 

신이 듣건대 굶주린 사람이 굶주리면서도 오훼(烏喙)라는 독초를 먹지 않는 까닭은 그것으로 배를 채울 수는 있지만 굶어 죽는 것과 똑같은 해독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40)

 

신이 듣건대 옛날에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들은 화를 복으로 바꾸고 실패를 기회로 삼아 성공했다고 합니다. (241)

 

연나라는 이유 없이 성 열 개를 돌려받게 되면 틀림없이 기뻐할 테고, 진나라 왕도 자기 때문에 연나라의 성 열 개가 되돌려졌음을 알면 또한 틀림없이 좋아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원수를 없애고 돌처럼 단단한 친구를 얻는 길입니다. 연나라와 진나라가 모두 제나라를 한편으로 여긴다면 이 세상에서 감히 왕의 호령을 따르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빈말로 진나라를 따르게 하고 성 열 개로 천하를 얻는 것이니 패왕의 사업이라 하겠습니다.“ (241)

 

신이 듣건대 충성스럽고 신실한 사람은 모두 자기를 위해서 행동하고, 나아가 이루는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행동한다고 합니다. (242)

 

첩은 술에 독이 들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러면 주모가 내쫓길까 두렵고 말을 안 하자니 주인을 죽이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넘어져 술을 엎질렀습니다. 주인은 몹시 화를 내며 그녀에게 채찍을 쉰 대나 쳤습니다. 첩은 일부러 넘어져 술을 엎어서 위로는 주인을 살리고 아래로는 주모를 쫓겨나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매 맞는 것만은 피하지 못했습니다. 어찌 충성스럽고 신실하다고 해서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충성스럽고 신실하지만 죄가 있는 행동의 예화

 

현명한 왕은 자기 허물을 듣는 데 힘쓰고 자신의 뛰어난 점에 관한 칭찬을 듣기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247)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알고 있어도 되지 않는 일임을 안다.

 

교만한 군주는 반드시 이()를 좋아하고 멸망하는 나라의 신하는 반드시 재물을 탐한다고 합니다. (249)

 

지혜로운 자는 일을 처리할 때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꿉니다. 제나라 사람들의 자주색 비단은 질이 나쁜 흰색 비단을 물들인 것이지만 그 값은 열 배나 비싸고, 월나라 왕 구천은 일찍이 회계산으로 쫓겨났지만 오히려 강대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제패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 일입니다. (252)

 

나는 그가 작은 이익을 탐내어 큰 뜻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스러워서 일부러 그를 불러다 모욕을 주어 그의 뜻을 북돋운 것일세. 자네는 나 대신 은밀히 그를 도와주게. (267)

 

신은 나라를 잘살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당을 넓히는 일에 힘쓰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일에 힘쓰며, 왕업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덕정(德政) 널리 펼치는 일에 힘쓴다고 들었습니다. 이 세가지 조건만 갖추어지면 왕업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270)

 

신이 듣건대 깃털도 많이 쌓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이 부러지는,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이고, 여러 사람의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고 합니다. (275)

 

천하의 제후 가운데 남보다 늦게 복종하는 자는 먼저 망할 것입니다. 또 합종에 참가하는 나라들은 양떼를 몰아 사나운 호랑이를 공격하는 꼴과 다르지 않습니다. 호랑이와 양은 서로 적수가 될 수 없음이 명백한데도 왕께서는 사나운 호랑이와 손잡지 않고 양떼 편에 섰습니다. 신은 왕의 계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82)

'신은 왕께서 하시는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말인가? 그런 직언을 할 수 있는 시대적 문화적 배경과 그것의 힘에 대해서 생각함.

 

나라 왕이 말했다. 과인은 미개한 벽지에 살고 있는 탓에 허우대는 다 큰 어른이지만 생각은 어린아이나 다름없소, 게다가 올바른 계책을 얻기에는 주위 여론이 부족하였소. (294)

 

예전에 오자서는 그 임금에게 충성하였기 때문에 온 천하가 그를 자기 신하로 삼으려고 서로 다투었고, 증삼은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였기 때문에 온 천하가 그를 자식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노비가 그 말을 벗어나기 전에 팔리면 좋은 노비입니다. 소박 맞고 쫓겨 온 여자가 그 마을에서 다시 결혼한다면 좋은 아내입니다. 지금 신이 자기 임금에게 충성스럽지 않다면 초나라도 어떻게 신을 충성스럽다고 여기겠습니까? 충성을 다해도 버림받으랴 하는데 신이 초나라로 가지 않으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288~289)

 

존귀하게 되는 까닭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는 그 존귀함을 영원히 잃지 않는다.(302)

세상에는 이치가 있다. 존귀함을 쫓지 말고 존귀함의 이유를 깨달아서 그것을 생활 속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진시황 :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로 기원전 230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여섯 나라를 병합하고 북쪽으로는 흉노를 내쫓으며, 남쪽으로는 민과 월을 겸병하여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 국가를 세웠다. 그는 군현제를 실시하여 온 나라를 서른 개의 군으로 나누고, 각 군 아래에는 현을 두었다. 그리고 법률, 도량형, 화폐, 문자 등을 하나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공이 삼황을 덮고 덕은 오제보다 높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시황제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그는 분서갱유를 단행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시행하며, 부역을 너무 무겁게 하여 백성을 고달프게 했다. 그가 죽은 뒤 진2세 호해가 제위를 이었으나 오래지 않아 농민 봉기가 일어나 나라는 멸망하고 그도 죽었다. (329)

 

 

<주서周書>에 ‘천명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요행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이것도 하늘이 내려 준 행운이 늘 자기 곁에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337)

 

양후는 부유하고 존귀함이 최고에 이르렀을 대, 범저 한 사람의 탄핵으로 신분이 꺽이고 권세를 빼앗겨 근심과 번민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왕족의 한 사람이 이렇거늘] 하물며 [진나라에서 벼슬아치가 된] 객경이야 어떠하겠는가?

부귀영화의 허망함을 읽었지만 동시에 이런 것이 가능했던 시대의 배경이 궁금하다. 왕권이 그렇게 절대적일 만큼 강했나, 소왕이 강했나. 궁금하다.

 

백기와 왕전은 보통 사림을 뛰어넘는 재능을 갖추어 천하를 무찔렀지만 진나라를 위해 천하를 지킬 수 없었고, 심지어 자기 몸조차 온전하게 지키지 못했다는 말이다. (243)

 

"전에 진나라가 상당을 점령한 일이 있는데 상당 백성은 진나라로 귀속되기를 싫어하여 조나라로 돌아갔다. 조나라 병사들은 마음을 잘 바꾸기 때문에 모두 죽여 버리지 않으면 뒤에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349)

마음을 이리저리 잘 바꾸는 자의 마지막과 그것을 담아내지 못하고 그저 본인의 이익을 쫓아 모두 내쳐버리는 야박함을 동시에 본다.

결국 무안군 백기는 죽을 때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하고 한탄하면서 위의 일을 떠올린다.

 

"세상에 자에도 짧은 데가 있고, 치에도 긴 데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백기는 적의 전력을 헤아려 날쌔게 대응하고 끊임없이 기이한 계책을 생각해 천하에 명성을 떨쳤지만, 응후와의 사이에서 생긴 근심은 없애지 못했다. 왕전은 진나라 장군이 되어 여섯 나라를 평정했다. 당시 왕전은 노련한 장수가 되어 시황제조차도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진나라를 보필해서 덕을 세워 천하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시황제에게 아첨하여 편하게 있을 곳을 구하다가 늙어서 죽음에 이르렀다. 손자왕이 때에 이르러 항우에게 사로잡힌 것도 마땅하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각기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단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단점이 크기가 너무 크거나, 그것을 다스리지 못하며 본인에게 결국은 화가 되는 것이구나. 나 또한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보지 못하고, 미래를 생각하여 오늘 행동하지 못하면 어리석음 속에서 그럭저럭 살다가 가게 될지도 모른다.

 

사마천은 음양가와 도가의 학문이 사실상 근본이며 기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가의 위대한 두 스승 맹자와 순자의 사적에 관해서는 짧게 다루고 음양오행가와 도가에 대해서는 유가보다 상세하게 다루었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서 한 무제가 尊儒의 기치를 내건 지 백여 년이 지났으나 조정에서도 맹자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점을 사마천이 염두에 둔 듯하다. 그런 면에서 황로사상의 면모가 엿보인다. (361)

 

이윤은 솥을 짊어지고 요리사가 되어 은나라 탕왕에게 다가가서 힘을 다해 제왕의 일을 이루게 하였고, 백리해도 수레 밑에서 소를 치다가 목공에게 등용되어 목공을 천하의 우두머리로 만들었다. 이 두 사람은 처음에는 상대방의 비위를 맞춘 뒤에 바른길로 가게 했다. 추연의 말은 일반적인 법칙을 벗어났지만, 그도 소를 친 백리해나 솥을 짊어진 이윤과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큰 뜻을 품고 이것을 감추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

 

제나라 땅은 넓어지지 않았는데 아버지 자신은 천만 금이나 되는 부를 쌓았으며, 그러고도 문하에는 어진 사람 한 명 볼 수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장수의 가문에는 반드시 장수가 있고, 재상의 가문에는 반드시 재상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아버님께서는 쌓아 둔 것이 남아돌지만 더욱 많이 쌓아 두려고만 할 뿐 나라의 힘이 날로 쇠약해지는 것은 잊고 계십니다. (380)

삶의 목적을 생각나게 한다. 인생의 가치관을 생각나게 한다. 무엇을 위해 사느냐. 돈을 위해, 부귀영화를 위해 사느냐, 돈은 목적인가. 다다익선인가. 무엇을 위해 돈을 모으느냐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술과 소를 많이 마련하지 않고는 돈을 빌린 사람을 다 모이게 할 수 없고,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알 수 없었습니다. 여유 있는 자에게는 갚을 날짜를 정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차용증서를 십 년 동안 가지고 있어도 이자만 더욱 쌓여갈 뿐이라 성급하게 독촉하면 바로 달아날 테니 영원히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성급하게 재촉하여 돌려 받지 못한다면 위로는 군주가 이익에 눈멀어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꼴이 되고, 아래로는 백성이 빚을 갚지 않으려 군주를 떠난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백성을 격려하고 군주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다. 쓸모 없는 차용증서를 불살라 받을 수 없는 빚을 없애 설 땅의 백성이 군주를 가까이 하고 군주의 이름을 칭송하게 하려고 한 일입니다. 당신은 의심 나는 부분이 있습니까? (393)

풍환의 예는 현명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다. 그 뒤의 이야기를 찾아보니 이러하다.

그 뒤 1년 후 맹상군이 제나라의 새로 즉위한 민왕(泯王)에게 미움을 사서 재상직에서 물러나자, 3천 명의 식객들은 모두 뿔뿔이 떠나버렸다. 풍환은 그에게 잠시 설에 가서 살라고 권유했다. 맹상군이 실의에 찬 몸을 이끌고 설에 나타나자 주민들이 환호하며 맞이했다. 맹상군이 풍환에게 말했다. “선생이 전에 은혜와 의리를 샀다고 한 말뜻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소.”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만물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당신은 혹시 아침 일찍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까? 새벽에는 어깨를 맞대면서 앞다투어 문으로 들어가지만 날이 저물어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팔을 휘저으면서 시장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침을 좋아하고 날이 저무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날이 저물면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물건이 시장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위를 잃자 빈객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고 해서 선비들을 원망하여 일부러 빈객들이 오는 걸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빈객들을 대우하십시오.” (397~398)

 

사마천은 구차한 삶을 감추고 발분하여 글을 지었기 때문에 우경을 기록한 부분에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 편(평원군, 우경열전)은 지나치리만큼 찬미하는 내용을 일관하고 있다.(401)

그러지 않겠는가.

 

나는 다시는 감히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 내가 지금까지 선비를 고른 수는 많다면 천 명이 되겠고 적어도 백여 명은 될 것이다. 나는 스스로 천하의 선비를 잃은 적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번모 선생의 경우에는 실수하였다. 모 선생은 한 번 초나라에 가서 조나라를 구정이나 대려보다도 무겁게 만들었다. 모 선생의 세 치 혀는 군사 백만 명보다도 강했다. 나는 감히 다시는 인물을 평가하지 않겠다. ” (409)

 

옛말에 '강한 자는 공격을 잘하고 약한 자는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417)

 

작은 나라와 큰 나라가 함께 일을 하면 이로운 것이 있을 때에는 큰 나라가 그 복을 받고, 일이 잘못되면 작은 나라가 그 화를 입게 된다. (421)

힘의 이치를 담고 있다. 국가, 집단 그리고 각 개인들에게서도 나타나는 보편적인 힘의 원리이다.

 

그 뒤로 왕은 공자가 어질고 능력있음을 꺼려 그에게 나랏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428)

왕의 그릇이 컸다면 공자 무기는 나라를 위해서 더 큰일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다. 재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내는 자기를 알아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서 목숨도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평원군은 사람을 사귀는 데 그저 호걸인 척하는 몸짓만 있을 뿐 참다운 선비를 구하는게 아닙니다. (438)

 

진나라는 끊임없이 인재를 모으면서 능력 있는 자에게는 벼슬을 주고 어질지 못한 자는 내침으로써 서쪽 변방의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병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443)

 

<시경> "시작이 없는 것은 없으나 끝이 좋기란 드문 일이다."라고 했고, <역경>에서는 "여유가 물을 건너가려면 꼬리를 적시게 마련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시작은 쉽지만 끝맺음은 어렵다는 것을 뜻합니다. (447)

 

처음에 춘신군이 진나라 소왕을 설득하고 몸을 던져 초나라 태자를 돌아오게 한 것은 얼마나 뛰어난 지혜였던가? 그런데 마지막에 이원에게 당한 일은 늙어서 사리 판단에 어두워진 탓이리라. 세인의 말에 '마땅히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 라고 하였다. 이는 춘신군이 주영의 말을 받아 들이지 않은 것을 두고 한 말일까? (461)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삶에 대한 지혜와 사리판단이 어두워지는 차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살아가면서 삶의 이치를 생각하면서 적당한 긴장을 지속시키지 않으면 그것은 배우다가만 무엇처럼 차츰 우리에게 멀어지는 것인가 보다.

 

평범한 군주는 사랑하는 자에게 상을 내리고 미워하는 자에게 벌을 주지만, 현명한 군주는 그렇지 않아 상은 반드시 공 있는 자에게 주고 형벌은 반드시 죄 있는 자에게 내린다 라고 했습니다.(470)

평범한 삶의 이치이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을 잘 듣고, 내 귀에 쉬운 이야기만을 해주는 사람을 더 가까이 하는 것을 보면 이치를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게 엄청난 간극이 있다. 어쩌면 안다는 것은 아무짝에 쓸모 없는 것인지도 마른다. 행하기 전까지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안으로는 그 권위를 굳히고 박으로는 그 권력을 무겁게 한다. / 나무 열매가 너무 많으면 가지가 부러지고, 가지고 부러지면 나무 기둥을 해친다. 라고 했습니다. 수도가 지나치게 크면 나라가 위태롭고, 신하가 지나치게 존중되면 군주가 낮아집니다. (480)

 

정권을 맡은 신하가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를 시기하여 아랫사람을 누르고 윗사람을 가리며 사사로운 욕심만 채워 군주를 위한 계책을 꾀하지 않건만 군주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나라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481)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벗을 사귀는 것은 천한 몸이 되었을 때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 때문이고, 부유할 때 벗을 사귀는 것은 가난해졌을 때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위제는 제 벗입니다. 제 집에 있다 하더라도 내놓을 수 없습니다만 지금은 제 집에 없습니다." (488)

멋진 대인관계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나는 벗을 사귐에 무엇을 중시하고 무엇을 지켜가는가.

 

신이 듣건대 '군주가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보고, 군주가 욕을 보면 신하는 죽는다.'라고 합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조정에 나와 근심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신에게 잘못이 있기 때문이니 신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490)

 

군자는 의를 위해서는 어려운 일을 하다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죽는 것을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쉽게 여기고, 살아서 치욕을 겪는 것보다 죽어서 영예로운 편이 낫다고 생각했소. 선비란 본래 자기 몸을 죽여서 이름을 남기나니 정의를 위해서라면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소. (495)

 

해가 중천에 오르면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기운다 라고 했습니다. 만물이 왕성해지면 곧바로 쇠약해져 떨어지는 것은 천지의 변하지 않는 이치입니다.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 굽히고 펴는 것이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은 성인의 영원한 도리입니다. (498)

 

왕께서 적당한 인물이 없다면 신이 화씨벽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고 싶습니다. 성이 조나라에 들어오지 않으면 화씨벽을 온전하게 가지고 조나라로 돌아오겠습니다.” (525)

 

그래서 진나라에게 화씨벽을 주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신은일반 백성의 사귐에도 오히려 서로 속이지 않거늘, 하물며 큰 나라끼리 사귀는 데 그럴 수 있겠는가? 게다가 화씨벽 하나 때문에 강한 진나라의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526)

 

"신 상여와 왕 사이는 다섯 걸음도 못 됩니다. 신은 목의 피를 왕께 뿌려서라도 요청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진나라 왕 주위에 있던 신하들이 상여를 칼로 찌르려고 하였으나 상여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자 모두 뒤로 물러섰다. (530)

 

조괄은 스스로 어릴 적부터 병법을 배워 군사에 대해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자기를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일찍이 그는 아버지 조사와 함께 군사적인 일을 토론한 적이 있는데, 조사는 그를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사는 그가 잘한다고 하지 않았다. 조광의 어머니가 조사에게 그 까닭을 묻자 조사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란 목숨을 거는 거요. 그런데 괄은 전쟁을 너무 쉽게 말하오. 조나라가 괄을 장군으로 삼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만일 괄을 장군으로 삼는다면 틀림없이 조나라 군대는 파멸 당할 것이오." (538)

 

!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도 판단이 더딥니까? 대체로 천하 사람들은 시장에서 이익을 좇는 것처럼 사귑니다. 당신에게 권세가 있으면 따르고 권세가 없어지면 떠나갑니다. 이것은 진실로 당연한 이치인데 무엇을 원망하십니까? (541)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돌려받고 기둥을 노려볼 때라든지 진나라 왕 주위에 있던 신하들을 꾸짖을 때 그 형세는 기껏해야 죽음뿐이었다. 선비 중에 어떤 이는 겁을 집어먹고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상여가 한 번 용기를 내자 그 위세가 상대편 나라까지 떨쳤고, 물러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겸손이 양보하니 그 이름은 태산처럼 무거워졌다. 인상여는 지혜와 용기 두 가지를 모두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545)

 

전국시대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는데, 소진이나 장의같이 권세를 끼고 이익을 좇은 자와 노중련이나 추양처럼 권력과 부를 경시하고 명예를 높이 여긴 자이다. 노중련은 선비로서 본분을 지킨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서 청빈한 삶을 살아가려고 했다. (557)

 

천하에서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덜어주고 재앙을 없애주며 다툼을 풀어 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이것은 장사꾼의 행위입니다. 저는 이런 짓을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566)

 

속담에 "젊을 때부터 흰머리가 되도록 사귀었으면서도 새로 사귄 듯한 이가 있는가 하면, 길에서 우연히 만나 잠깐 이야기하고도 옛날부터 사귄 것 같은 사람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바로 상대방의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입니다. (573)

 

그 문장은 사소한 것을 적었지만 담은 뜻은 매우 크며, 눈 앞에 흔히 보이는 사물을 인용했지만 그 뜻은 높고 깊다. 그 뜻이 고결하므로 비유로든 사물마다 향기를 뿜어내고, 그 행동이 청렴하므로 죽을 때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흙 속에서 뒹굴다 더러워지자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씻어 내고, 먼지 쌓은 속세 밖으로 헤쳐 나와서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다. 그는 연꽃처럼 깨끗하여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더러워지지 않은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지조는 해와 달과 그 빛을 다툴 만하다. (587)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서 쫓겨났소. 대체로 성인이란 물질에 구애 받지 않고 속세의 변화를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의 티끌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사람이라면 또 그 누가 자신의 깨끗한 몸에 더러운 때를 묻히려 하겠소? (591)

 

마을의 개들 떼지어 짖는 것은 / 이상하게 보이기 때문이지.

준걸 비방하고 호걸 의심하는 것은 / 본래 못난 사람들의 태도지.

재능과 덕성 가슴속에 흐르건만  / 내 남다른 재능 아무도 몰라주네.

재능과 덕망 쌓였어도 / 내 가진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네.

인의를 더 닦고 / 삼가고 돈후하여 넉넉해졌건만

순 임금 같은 분 만날 수 없으니 / 누가 내 참모습 알아주랴!

예로부터 [어진 신하와 현명한 군주는 때를] 같이하지 못하니

어찌 그 까닭을 알리? (594)

때를 타고 나는 것, 그리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참 어려운 인연인 듯 하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지위나 체면을 떠나서 서로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인연을 얻었다면 살아가면서 큰 복으로 여길 만한 것이다.

 

여불위는 전기(傳奇) 색채가 풍부한 역사 인물이다.

그는 진나라의 상국이 되어 진나라 통일 사업에 큰 공을 세웠으며, 불후의 명작 <여씨춘추>를 짓기도 했다. 여불위가 세상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이유는 그가 진시황의 친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대목이 이 편에 나오기 때문이다. (611)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공자 광은 발이 아픈 척하며 지하실로 들어가서 전제에게 뱃속에 비수를 감춘 구운 생선을 올리도록 하였다. 전제는 왕 앞에 이르자 생선의 배를 찢고 비수를 잡아 요왕을 찔러 그 자리에서 죽였다. 이렇게 하여 왕을 모시고 온 신하들이 크게 소란을 피우자, 공자 광은 숨겨 두었던 병사들을 내보내 요왕의 무리를 쳐서 모두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합려이다. (629)

 

조양자는 지백에 대한 원망이 너무 큰 나머지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큰 술잔으로 썼다. (630)

 

어머니께서 이제 오래 살다가 세상을 떠나셨으니, 나는 앞으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일하리라.“ / “전날 당신께 제 몸을 바치지 않은 까닭은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불행히도 어머니께서 타고난 수명을 누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중자께서 원수를 갚으려는 이가 누구입니까? 제가 그 일을 맡겨 주십시오.” (635)

 

섭정이 곧장 들어가 계단을 뛰어 올라 협루를 찔러 죽이니 주위에 있던 부하들은 크게 혼란스러웠다. 섭정이 고함을 지르며 쳐죽인 사람만 수십 명이나 되었다. 그런 뒤에 그는 스스로 자신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죽었다. (636)

 

일찍이 엄중자는 제 동생의 인물 됨을 살펴 알고는 곤궁하고 천한 지위에 있는 그와 사귀었으니 그 은택이 매우 두텁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선비는 본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합니다. 섭정은 제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훼손시켜 이 일에 연루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어찌 제게 닥칠 죽음이 두려워 동생의 장한 이름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637)

 

내가 듣건대 나이 들고 덕 있는 사람은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품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태자께서는 내게 우리가 말한 것은 나라의 큰 일이니 선생께서는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태자가 나를 의심한 것입니다. 대체로 일을 행할 때 남에게 의심을 사는 것은 절개 있고 의협심 있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전광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형경을 격려하려는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다.

부디 빨리 태자가 찾아가 전광은 이미 죽었다고 말하여 일이 새나갈 염려가 없음을 분명히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전광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645)

 

다시 우성(羽聲)으로 노래하니 그 소리가 강개하여 듣는 사람들이 모두 눈을 부릅뜨고, 머리카락이 관을 찌를 듯 치솟았다. 이렇게 형가는 수레를 타고 떠났는데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651)

 

이사는 한비자와 함께 순자의 문하생으로 훗날 진시황을 도와 그 유명한 분서갱유를 하는 데 앞장선 사람이다. / 사마천은 호해의 어리석고 무능함과 조고의 음험한 속셈을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이사의 이중성을 드러내는가 하면 진나라 통치 계층의 추악한 정권 쟁탈전을 부각시켰다. (659)

 

비천한 자리에 있으면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는 것은 짐승이 고기를 보고도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본다 하여 억지로 참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부끄러움은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며, 가장 큰 슬픔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것입니다. (662)

 

태산은 흙 한 줌도 양보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높아질 수 있었고, 하해는 작은 물줄기 하나도 물리치지 않아야 자신의 덕을 천하에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는 사방의 구분이 없고 백성에게는 다른 나라의 차별이 없으며, 사계절이 조화되어 아름답고, 귀신은 복을 내립니다. (666)

 

진나라는 땅을 한자도 남에게 봉해 주는 일이 없고 황제의 자제를 세워 왕으로 삼는 일도 없으며 공신을 제후로 삼지 않았다. 이는 뒷날 내란의 근심거리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667)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를 통일하고 흑백을 가려 천하에 오직 황제 한 분만이 있도록 정했습니다. 그런데 사사로이 학문하는 자들은 서로 모여 이미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허망한 것이라고 합니다. 조칙이 내려졌다는 말을 들으면 각자 자기가 배운 학설에 근거하여 그것을 비판하고, 집으로 들어가서는 마음속으로 헐뜯고 밖으로 나와서는 길거리에서 논합니다. 그들은 군주를 비방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고,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겨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어 비방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금지하지 않으면 위로는 군주의 권위가 떨어지고 아래로는 당파가 이루어질 테니 금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청컨대 모든 문학과 『시경』,『서경』, 제자백가의 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이것을 없애도록 하고 이 금지령을 내린 지 삼십 일이 지나도 없애지 않는 자는 이마에 먹물을 들이는 형벌을 가하여 성단 사 년 동안 새벽부터 일어나 성 쌓은 일을 하는 죄수으로 삼으십시오. 의약, 점복, 농사, 원예 관한 책은 없애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배우고 싶은 자는 관리를 스승으로 삼으면 됩니다. (669)

 

제가 듣건대 탕왕과 무왕은 각각 자기의 군주를 죽였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의롭다고 할 뿐 충성스럽지 못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위나라의 군주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지만 백성은 그의 덕을 받들었고 공자도 이 일을 『춘추』에 적으면서 효성스럽지 못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672)

 

위와 아래가 마음을 합치면 같이 누릴 수 있으며, 안과 밖이 하나가 되면 일의 겉과 속이 없어집니다.” (676)

 

세 사람은 공모하여 시황제의조서를 받은 것처럼 꾸미고, 승상은 시황의 아들 호해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677)

 

어진 사람이 천하를 소유하게 되면 오로지 천하를 자기에게 맞도록 할 뿐이다. 이것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중하게 여기는 까닭이다. 이른바 어진 사람은 반드시 천하를 평안하게 하여 모든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 지금 제 몸조차 이롭게 하지 못하면서 어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682)

 

"나는 북쪽 변방 지역에 갔다가 지름길로 돌아왔다. 길을 가면서 몽염이 진나라를 위해 쌓은 장성의 요새를 보니, 산악을 깎고 계곡을 메워 지름길을 통하게 했으니 진실로 백성의 힘을 가벼이 여긴 것이 분명하다. 진나라가 처음 제후를 멸망시켰을 때 천하의 민심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전쟁의 상처도 채 가라앉지 않았는데, 몽염은 이름 있는 장수로서 이러한 때에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고 늙은이를 모시고 고아를 돌보며 모든 백성을 안정되고 평화롭게 하는일에 힘써야 한다고 강력히 간언하지 않고 도리어 시황제의 야심에 영합하여 공사를 일으켰으니 그들 형제가 죽음을 당한 것은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찌 지맥을 끊은 탓으로 돌리랴.“ (711)

 

중국의 중요한 역사적 특질은 독재 군주 사회에서 지배층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암투이다. 고대 중국을 다스린 역대 황제는209명인데, 이 가운데 예순세 명은 자살하거나 암살당했다는 통계가 있다. (711)

 

반드시 어진 남편을 구하고 싶거든 장이를 따라가거라.” 여자는 이 말을 따라 마침내 그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장이에게로 시집갔다. 장이는 이때 혐의가 풀려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여자의 집에서 장이를 후하게 받들었으므로 천 리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불러 사귈 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어질다는 이름이 더욱 높아 졌다. (715)

 

장이와 진여가 처음에 빈궁할 때에는 서로 죽음을 무릅쓰고 신의를 지켰으니, 어찌 서로 돌아보고 의심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나라를 움켜쥐고 권력을 다투게 되자 마침내 서로를 멸망시켰다. 예전에는 서로 앙모하고 신뢰함에 성의를 다하더니 나중에는 서로 배반하고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였으니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 (738)

 

팔짱만 끼고 앉아 어느 쪽이 이기는지 보면 안 된다. (758)

 

왕께서 나를 만나지 않는 것은 틀림없이 초나라는 강하고 한나라를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자로 왔으니 왕을 뵙도록 해 주십시오. 만일 제 말이 옳다면 그것은 왕께서 듣고 싶어하실 것이고, 제 말이 옳지 않다면 저와 스무 명을 회남의 시장에서 부질의 형벌에 처하여 왕께서 한나라를 등지고 초나라와 한편임을 밝히시면 됩니다.” (759)

 

항우가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 사람은 1,000만 명이나 되지만, 영포는 늘 가장 포악한 일을 하는 자의 우두머리였고 공적은 제후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그래서 왕이 될 수는 있었지만 자신도 세상의 큰 치욕을 피하지는 못했다. 재앙은 사랑하던 여자에게 싹텄고, 질투가 우환을 낳아 마침내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었구나!” (770)

 

같이 처형되는 열세 명의 목이 잘리고 한시의 차례가 되었다. 한신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다가 우연히 등공 하후영과 눈이 마주쳤다. 한신이 말했다.

주상께서는 천하를 차지하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어찌 장사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등공은 그의 말이 기특하고 모습이 장하다고 여겨 풀어 주고 베지 않았다. 그리고 한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는 크게 기뻐하여 한나라 왕에게 그에 대해 말했다. 한나라 왕은 그를 치속도위(식량과 말먹이를 관리하는 군관)로 삼기는 했지만 비범한 인물로 여기지는 않았다. (777)

 

장수들 가운데 도망친 자가 수십 명이나 되는데도 그대는 쫓아 간 적이 없소. 한신은 뒤쫓았다는 것은 거짓말이오.”

소하가 말했다.

다른 장수들은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한신에 견줄 만한 인물은 없습니다. 왕께서 계속 한중의 왕으로 만족하신다면 한신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만, 반드시 천하를 놓고 다투려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는 함께 일을 꾀할 사람이 없습니다. 왕의 생각이 어느 쪽에 있는가에 달린 문제입니다.” (778)

 

왕께서는 본래 오만하여 예를 차리지 않으십니다. 지금 대장을 임명하는데 어린아이를 부르는 것처럼 하시니, 이것이 바로 한신을 떠나게 한 까닭입니다. 왕께서 그를 대장으로 삼으시려면 좋은 날을 택하여 재계하고 단장을 설치하여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779)

 

항왕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공손하고 자애로우며 말씨가 부드럽습니다. 누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부리는 사람이 공을 세워 벼슬을 주어야 할 경우가 되면 인장이 닳아 깨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며 선뜻 내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아녀자의 인을 뿐입니다. (781)

 

지식은 일을 결단하는 힘이며, 의심은 일하는데 방해만 됩니다. 터럭 같은 작은 계획을 자세히 따지고 있으면 천의 큰 술수를 잊어버리고, 지혜로 그것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은 모든 일의 화근이 됩니다. 그래서맹호라도 꾸물거리고 있으면 벌이나 전갈만한 해도 끼치지 못하고, 준마라도 주춤거리면 노둔한 말의 느릿한 걸음만 못하며 진나라 용사 맹분도 여우처럼 의심만하고 있으면 보통사람들이 일을 결행하는 것만 못하고, 순 임금이나 우 임금의 지혜가 있더라도 우물거리고 말하지 않으면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손짓 발짓을 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803)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워 겸양한 태도로 자기 공로를 뽐내지 않고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다면 한나라에 대한 공훈은 주공, 소공, 태공망 등에 비할 수 있고 후세에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가 이미 안정된 뒤에 반역을 꾀했으니 온 집안이 멸망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811)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뒤 성이 다른 일곱 명을 왕으로 봉하여 봉건 할거 국면을 형성했지만, 나중에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씨가 아닌데 왕이 된 자들을 멸망시키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이때 제후들은 조정의 꺼림이나 의심을 많이 받았고 잦은 반란도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한신과 노관도 공을 세워 봉해졌고 고조와 친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당시 상황은 그들이 한나라를 떠나 반역의 기로 치닫게 만들었다. (815)

 

특히 사마천은 여기서 번쾌의 손자 타과의 전언을 근거로 하여 서술함으로써 역사를 기록뿐 아니라 현장 체험을 통한 검증과정의 일환으로 파악하였다. (845)

 

번쾌는 여후의 동생 여수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항을 낳았기 때문에 다른 장수들에 비하여 고조와 가장 가까웠다. (853)

 

 

3. 내가 저자라면

 

먼저 책을 통하여 내가 느낀 것들을 정리해본다.

 

옛 것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형식의 역사 기술 방식을 고안하여 적용함으로써 후대의 본이 되다. 이는 글이라는 것을 통해서 배우고 배운 것을 글로써 나누고 싶은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 지금은 그저 누군가의 글을 흉내 내고 생각을 따라 하고 있는 학습의 단계이지만 시일이 지나 많은 것들이 내 안에서 내 것으로 진주를 만들면 그때는 이런 세상에 없는 새로운 것을 내 보일 수 있었으면 하는 스스로에 대한 바램을 가져 본다.

 

사마천은 열전의 각 끝부분에 "태사공이 말한다"라며 자신의 사상을 담아내고 있다. 이 부분을 보면 반갑다.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음이 반갑고, 고맙다. 일전에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으면서 들었던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런 부분은 읽는 이의 독자적인 해석을 방해할 수도 있지만 나 같은 범인에게는 무심코 흘려버릴 수 있는 부분에서 큰 뜻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고, 부족한 식견을 넓혀 줄 수 있어서 매우 좋았다. 더불어 '태사공은 말한다' 라는 짧은 단문에서 역사를 서술한 저자 자신에 대한 깊은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없다면 어디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서푼 자신의 생각을 담을 수 있겠는가?

 

<사기열전>철저하게 현실적이다. 명성을 얻은 이들도 있지만 깡패도 있고, 자객도 있고, 온갖 부류의 인간 군상들이 나온다. 그들은 통해서 인간의 본질, 세상인심을 비롯한 인간 세상 전반을 아우르는 통찰력이라는 보물을 보여 주고 있다. 다만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어야 하는 역사적 사명감으로 인해 이야기는 대단히 함축적이다. 중요한 팩트를 과감하게 기록하고 전개한다.

이것이 역사적인 배경이 부족한 나에게 이야기의 의미나 인간군상의 본질을 파헤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가 된다. 재미 있는 이야기가 어려운 이야기로 변하는 부분이었다.

 

더불어 등장하는 인물도 많지만 배경이 된 시대와 나라 또한 방대하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을 접할 때는 이해관계가 얽힌 나라를 구분하기 힘들었고, 그러다 보니 그 얽힌 이야기를 풀어가는 책 속의 인물들의 혜안과 통찰을 따라가지 못했다. 변역자(옮긴이)가 열전마다 자신의 생각을 들어가기 전에 배치하여 이해를 도왔듯이 지도나 시대적인 배경에 대한 것들을 삽화로서 부연하여 책을 구성하였더라면 나의 이해가 훨씬 쉽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사마천의 고심 그 마음 한줄한줄을 책에서 놓친 부분이 너무 많다. 그저 흘러가는 옛날 이야기로 읽은 것 들이 대부분이다. 시간을 두고 다시 한번 사마천의 삶과 그리고 <사기>에 대해서 마음을 두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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