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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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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일 00시 36분 등록

1. 사마천에 대하여

司馬遷, B.C. 145? ~ B.C.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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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 - 춘추전국시대 이후 한무제 시대

오랜 분열의 춘추전국 시대를 마감시킨 진(秦) 제국은 강권통치에 바탕을 둔 급격한 통일책이 실패로 돌아가며 무너졌다. 최후의 승자 한(漢) 고조 유방은 진 제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파란을 피하고 안정에 치중했다. 무위(無爲)를 중시하는 황노(黃老)사상이 전한(前漢) 초기를 특징짓는 이념이었다. 제7대 황제 무제(武帝) 유철(劉徹, 재위 기원전 141~87)은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했다. 무제는 흉노를 비롯한 주변 민족들을 공격, 압박하고 서방 교통로를 확보했으며 국내 제후의 권력을 사실상 소멸시키고 민간의 유력자들을 억압하며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이 국가 재정 위기를 초래하자 소금과 철에 대한 전매 제도를 시행하고 증세를 단행함으로써 백성의 부담이 무거워졌다. 무제는 절대적인 황제권을 확립시키면서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꾀하고, 유교를 국가공식이념으로 중시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법가사상에 바탕을 두어 통치했다.

무제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등용된 인물들은 지방에서 추천된 인재들 가운데 황제 자신이 선발한 새로운 관료 집단이었다. 그들은 상황에 따른 개인적 판단을 중시하며 법률의 유연한 적용을 지향하던 예전의 통치방식 대신 법률을 엄정하게 적용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러한 정치, 사회, 사상적 변화를 무제 시대의 관료로서 직접 겪은 사마천은 새로운 전환의 시기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면서 먼 과거로부터 무제 시대에 이르는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여러 지역까지 포괄하는 역사, 곧 [태사공서(太史公書)]를 서술했다.

사마천의 일생과 개인적 비극

사마천은 제6대 황제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기원전 145. 다른 주장도 있음)에 오늘날의 섬서(陝西) 성 한성(韓城)현에서 태어났다. 10살 무렵 고문(古文)을 깨우치고 10대 초부터 강남, 강북의 여러 지방을 두루 편력한 뒤 산동과 하남을 거쳐 수도 장안에 들어가 낭중에 임명됐다. 이후 황제의 명으로 사천 지방에서 운남의 곤명까지 여행을 하는 등 중국 각지를 돌며 특히 역사의 무대가 되었던 많은 곳을 방문했다. 이러한 경험이 [사기] 편찬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결코 문헌자료만 파고드는 책상물림의 역사가가 아니었다.

기원전 110년 무제가 천지(天地)에 제를 거행하는 봉선(封禪) 의식을 위해 태산을 방문했을 때, 천문역법을 관장하고 황실 전적을 관리하는 태사령(太史令) 벼슬에 있던 아버지 사마담은 낙양 땅에 머물다가 봉선 의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를 깊이 한스럽게 여긴 사마담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운남에서 급히 돌아온 사마천은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역사서 편찬의 꿈을 잇고자 결심했다. 3년 상을 치르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황실의 장서를 이용하여 역사서 편찬에 착수했다. 기원전 99년 장군 이릉(李陵)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마천은 이릉의 입장을 홀로 변호하다가 투옥되어 허리를 잘리는 사형이 내려졌으나. 이를 면하기 위해 이듬해 궁형, 즉 생식기를 잘라내는 형벌을 받았다.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가장 치욕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 사마천은 자신을 벼랑으로 몰고간 갈등과 절망, 울분과 좌절감을 생의 진실을 추구하는 차원으로 승화시켰고, 이거을 다시 역사적 진실로 보편화시켰다. 만약 이릉의 사건이 없었다면 <사기>는 역사의 기록과 평가 , 시비의 논단 등을 통해 천운의 법칙을 매개로 한 당위적인 정치 질서를 제시하고, 문명적 가치의 보호와 전승을 목표로 한 책은 되었을지언정 인간의 삶 그 자체의 진실을 긍정하고 추구하는 인간의 역사는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즉, <사기>는 신화적인 세계관에서 독립한 '인간의 역사'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유교적 세계관에 대한 의문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적군에 투항한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이라는 치욕을 당한 사마천은 <열전> 중 첫번재 편인 '백이열전'에서 “하늘의 도(天道)는 사사롭지 않고 늘 착한 이와 함께 한다고 하는데,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인가? 그들은 행실이 그토록 고결해도 굶어죽었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진정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안연이라 했지만, 안연은 자주 궁핍하여 굶주리다가 끝내 요절했다. … 극악무도한 도척은 날마다 무고한 이를 죽이고 사람의 간을 꺼내 먹었으며 무리 수천 명을 모아 포악방자하게 천하를 횡행했지만 끝내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 이른바 하늘의 도라고 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是邪非邪)?” 라고 말했다.

이것을 철학적, 윤리학적으로 말하면 이른바 도덕과 행복의 관계 문제에 해당한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행복하고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불행하다면 도덕과 행복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할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늘의 도, 하늘의 이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침묵한다. 인과응보의 내세관을 지닌 불교나, 공과를 심판하는 하늘의 주재자가 있는 도교라면, 도덕적으로 살면서 불행을 당한 이는 내세에서 복락을 누린다고 답할 수 있겠지만,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념에 따른 천도(天道)는 도덕과 행복의 일치 문제에 대한 답이 궁하다. 천도에 대한 사마천의 의문은 유교적 예교 질서 자체에 대한 의문을 함축하고 있다.


<사기>의 완성과 사마천의 죽음

사기 완성의 정확한 연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기원 전 91년 사마천이 친구인 임안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보낸 서한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서한에서 사마천은 자신이 옥에 갇히고 궁형에 처한 경위와 그에 더욱 분발하여 사기를 저술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은 심경을 고백하였다. 이 편지《보임안서(報任安書)》의 내용으로 보아 사기는 이 시기(기원전 91년)에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사기》의 규모는 본기(本紀) 12권, 연표(年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모두 130권 52만 6천 5백자에 이른다. 사마천은 《사기》가 완성된 2년 후에 사망하였다. 사마천은 자신이 저서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지만 후한시대에 들어와 《사기》라고 불리게 되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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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임안서(報任安書)

1. <보임안서>에 대하여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이 자신의 친구인 임안(字:少卿)에게 보낸 유명한 서신을 말하며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라고도 한다.

본래 두사람은 절친한 사이가 아니고 조정의 일을 보면서 친구의 소개로 알게되어 서로 인품을 존중하는 정도의 면식이 있는 사이였으며, 사마천이 이릉(李陵)장군이 흉노족(匈奴族)에게 항복한 사건이 발생하여 이릉을 변호하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옥고(獄苦)를 치르고 있을 때는 모른척한 자이다.후에 한무제(漢武帝)가 태자의 반역사건을 조사하다 임안이 사태 수습에 소극적이었다는 고변(告變)을 신하들로부터 듣고 임안을 투옥하고 허리를 자르는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때서야 무슨 뜻을 가지고 쓴지는 알 수 없으나(구명을 직접적으로 요청하지 못하고 간접적로 요청한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미 궁형(宮刑)을 받고 환관(宦官)이 되어 중서령(中書令)의 벼슬을 하면서 막바지 사기를 저술하고 있던 사마천에게 편지를 보냈고, 사마천도 조금은 인간적으로 자기를 위해 한마디도 변호 해주지 않은 섭섭함이 남아 있어 서 였는지 이런저런 핑계로 답장을 늦게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사기의 내용에 대해서는 작년 연초에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아무튼 이런 배경을 알고 이 글을 읽어보면 이해가 좀더 쉬울 것이다.

이 편지 한 통은 오래 전의 역사적 사실과 그 정황을 충분히 추리해 볼 수 있는 가치 있는 글이며, 사마천의 울분에 찬 마음이 그대로 녹아나 있는 유명한 글로서 일상에서 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말들이 많이 들어 있다. 조금 긴 편지지만 한번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음미해 보시면 세상살이라는 것이 2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느끼게 된다.

이 서신은 한서(漢書)의 사마천전 및 문선(文選) 권41에 수록되어 있다.


2. <보임안서> 중 내 마음을 무찌른 글 귀 (발췌)

저는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기는 하나 군자들의 가르침만은 거듭 귀에 담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저 자신은 비천한 처지에 빠진 불구자입니다. 행동을 하기만 하면 남의 비난을 받으며, 더 나아지고자 하나 도리어 더 나빠질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홀로 우울하고 절망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습니다.

속담에 말하길 '누구를 위해 하는가, 누구더러 들으라고 하는가‘ 했습니다. 종자기(種子期)가 죽고 난 후 백아(伯牙)는 두 번 다시 금(琴)을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행동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하여 화장하는 것입니다. (士爲知己用, 女爲說己容)

그러나 저와 같은 사람은 신체가 이미 망가졌으니 아무리 수후(隨候)나 화씨 (和氏)의 구슬과 같은 재능이 있고 행동은 허유(許由).백이(伯夷)와 같이 개결(介潔)하다 할지라도 끝내 영예를 얻지 못할 것이며, 도리어 남의 비웃음이나 당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기에나 족할 따름입니다.

제가 듣건대, 자신의 몸을 수양하는 것은 지(智)의 표시이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仁)의 실마리이며, 주고 받는 것은 의(義)가 드러나는 바이며, 치욕을 당하면 용(勇)을 결단하게 되며, 뜻을 세우는 것은 행동의 목적이라고 합니다. (修身者智之府也, 愛施者仁之端也, 取予者義之符也, 恥辱者勇之決也, 立名者行之極也)

선비는 이 다섯을 갖춘 후에야 세상에 몸을 의탁하고 군자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利)를 탐내는 것보다 더 참혹한 화(禍)는 없으며 마음을 상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런 슬픔은 없고, 선영(先塋)을 욕되이 하는 것보다 더 추한 행동은 없으며 궁형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갖고 아뢰고자 했으나 아뢸 길이 없었는데 마침 주상께서 하문(下問)하셔서 곧 이러한 뜻으로 이릉의 공적을 말하여 주상의 생각을 넓혀 드리고 다른 신하들의 비방의 말을 막아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을 다 밝힐 수 없었으며 주상께서는 제 뜻을 이해하지 않으시고 제가 이사장군(貳師將軍)을 비방하고 이릉을 위해 유세한다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하옥되었고 정성스런 저의 충성을 끝내 밝힐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황제를 속였다는 죄로 마침내 하급관리의 재판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저의 집은 가난하여 형벌을 면할 수 있을 만큼의 재물이 없었고 사귀던 벗들은 아무도 나를 구하려 하지 않았으며 황제 좌우의 측근인물들은 나를 위해 한마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몸은 목석이 아닌데 오직 법리(法吏)와 마주하여 깊이 감옥 속에 갇혀 있으니 누구에게 내 사정을 하소연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소경께서도 직접 겪으신 것입니다. 저의 처지가 어찌 이렇지 않겠습니까. 이릉은 살아서 항복함으로써 그 가문의 명성을 무너뜨렸고 저는 또 거세 되어 잠실(蠶室)에 던져져서 거듭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아아, 이런 일이란 속인들에게 상세히 말하기 용이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는 말에 이르길 "형벌은 상대부에게 까지는 미치지 않는다" (刑不上大夫)고 했으니 이 말은 선비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힘쓰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나운 호랑이가 깊은 산중에 있을 때는 온갖 짐승들이 두려워하지만, 함정에 빠지게 되면 그 호랑이도 꼬리를 흔들며 음식을 구걸하는 것이니 (猛虎處深山, 百獸震恐, 及其在穽檻之中, 搖尾而求食) 이것은 점차 위세에 눌려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다 선을 긋고 감옥이라 하여도 형세는 들어갈 수 없게 되고, 나무를 깎아 형리(刑吏)로 삼아도 이러쿵저러쿵 거기에 대꾸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벌을 받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손발을 얽어 판목(板木)이나 새끼줄에 묶이고 살갗을 드러내어 매질을 당하며 감옥속에 갇혔을 때에 옥리(獄吏)를 보면 머리는 땅에 닿이고, 감옥을 지키는 노예를 보면 마음은 두려워 숨이 막힐 지경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형세가 위세에 눌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고도 치욕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뻔뻔스러운 것이며 사람들이 어찌 그를 귀하게 대접하겠습니까.

서백(西佰)은 백작이었지만 유리에 갇히는 몸이 되었고 이사(李斯)는 재상이었지만 다섯가지 형벌을 다 당하였습니다. 회음(淮陰)은 왕이었지만 진(陳)에서 묶이는 신세가 되었고, 팽월(彭越).장오(張敖)는 남면(南面)하여 왕 노릇을 하였으나 감옥에 갇혀 죄를 받았습니다. 강후(絳侯)는 여씨(呂氏)들을 타도하여 권력이 오패(五覇;五伯)를 능가하였으나 청죄(請罪)하는 방에 갇혔고, 위기후(魏其侯)는 대장(大將)의 몸으로 붉은 죄수복을 입고 목과 수족에는 고랑이 채워졌습니다. 계포(季布)는 주가(朱家)에 의탁해 목에 칼을 쓴 노예가 되었고, 관부(灌夫)는 거실(居室)에서 치욕을 당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왕후장상의 지위에 이르렀고 명성은 이웃나라에까지 알려졌지만 죄를 입어 판결이 내려졌을 때에 자결함으로써 스스로 결단하지는 못했습니다. 오욕(汚辱)에 처할 수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러한 상황에서 어찌 치욕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살기를 애쓰고 죽기를 싫어하며 부모를 생각하고 처자를 돌보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의리에 격발되기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으니 그것은 부득이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불행히도 일찍이 부모님을 잃었고 가까운 형제도 없으며 홀로 외로이 살아왔습니다. 소경께서 보시기에 제가 처자에 대해서는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또 용기있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절개를 위하여 죽는 것도 아니며 비겁한 사내라도 의(義)를 사모하면 어떤 행동이라도 힘쓸 수 있습니다. 제가 비록 비겁하고 나약하며 구차히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나 거취(去就)의 분별 또한 잘 압니다. 어떻게 몸이 속박되는 치욕 속에 자신을 밀어 넣기에 이르겠습니까?

또한 저 천한 노복이나 하녀조차도 능히 자결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저와 같은 사람이 어째서 자결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고통을 감내하고 구차하게 더러운 치욕 속에 있으면서도 마다하지 않는 까닭은 제 마음속에 다 드러내지 못한 바가 있어, 비루(鄙陋)하게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경우에 후세에 문채(文彩)가 드러나지 않을 것을 한스러이 여겨서입니다. 옛날부터 부귀하였지만 이름이 마멸된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탁월하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비상한 인물만이 일컬어질 따름입니다.

문왕(文王)은 갇힌 몸이 되어 주역(周易)을 연역하였고 공자(孔子)는 곤란한 처지를 당하여 춘추(春秋)를 지었습니다. 굴원(屈原)은 쫓겨가서 이소(離騷)를 썻고, 좌구(左丘)는 실명한 뒤에 국어(國語)를 지었습니다. 손빈(孫臏)은 발이 잘리고 병법(兵法)을 편찬하였고 여불위(呂不韋)는 촉(蜀)에 유배되어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지었으며 한비(韓非)는 진나라에 잡히고서야 세상에 『세난, 고분』을 저술하였으며 시경(詩經)의 300편 시는 대개 성현이 발분(發憤)하여 지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가슴속에 맺힌 바가 있어 그 하고자하는 바를 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후세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줄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좌구와 같이 눈이 없고 손빈과 같이 발이 잘린 사람은 끝끝내 세상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물러나 서책(書冊)을 써서 자신의 분한 생각을 펴고 이론적인 문장을 세상에 남겨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저도 감히 겸손치 못하게도 무능한 문장에 스스로를 맡기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천하의 산실(散失)된 구문(舊聞)을 수집하여 행해진 일을 대략 상고하고 그 처음과 끝을 정리하여 성패흥망(成敗興亡)의 원리를 살펴 모두 130편을 저술하였습니다. 저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고(草稿)를 다 쓰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했는데, 나의 작업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안타까이 여긴 까닭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저는 진실로 이 책을 저술하여 명산(名山)에 보관하였다가 내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하여 촌락.도시에 유통되게 한다면 이전에 받은 치욕에 대한 질책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만 번이나 주륙(誅戮)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에겐 말할 수 있지만 속인에겐 말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빈천한 무리 속에 사는 것은 쉽지 않고 소인배들은 비방의 말이 많습니다. 제가 말을 잘못하여 이런 화를 만나 거듭 향리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되이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의 산소 앞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비록 백세(百世)의 세월이 흘러도 저의 수치는 너무나 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애가 끊어지는 듯하고 집안에 있으면 망연자실하여 무엇을 잃은 듯하고 집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를 못합니다.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을 적시지 않는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후궁(後宮)에 있는 신하에 불과하니 어찌 스스로를 깊은 바윗골 속에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월을 쫓아 부침(浮沈)하고 때에 따라 처신하며 미혹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1. 네이버 캐스트 글/표정훈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610
  2. 보임안서 : http://blog.daum.net/cheongpa580601/312
  3. 동서양고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편, 2002
  4. 위키피아 /사마천 : http://ko.wikipedia.org/wiki/%EC%82%AC%EB%A7%88%EC%B2%9C
  5. 네이버 백과사전 :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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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마음을 무찔러든 글 귀

역자 서문

5. <사기> 중에서도 <열전>70권은 주나라 붕괴 후 등장한 50개 제후국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칠웅(진,한,위,제,초,연,조)의 흥망성쇠를 주축으로 하며,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5. 끊임없이 동쪽 진출을 모색한 서쪽의 절대강자 진나라와 남방의 지배자 초나라, 그리고 북방의 실력자 연나라, 이렇게 삼국이 큰 흐름을 주도했고, 이들 틈바구니에 낀 조, 한, 위, 제 이 네 나라는 국가 보존을 위한 전략 마련에  고심했다.

6. 예나 지금이나 전쟁만큼 큰 죄악은 없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에는 전쟁이 필요악이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는 그 누구도 먼저 평화를 주창할 수 없었다. 모두들 강한 군대를 양성해 부국강병을 꾀하는 데 골몰했다.

9. 나는 기본적으로 번역은 원전의 뜻을 자구 하나하나 따져 가며 번역하고 난 다음 그에 수반되는 전고나 논의의 근거를 찾아 다시 그것을 원전의 문맥에서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제

11~12. <사기>는 <본기> 12편, <표> 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기>는 오제부터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권력을 행사하던 왕조나 군주들의 사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고, <표>는 각 시대의 연표로서 역사 발전의 다섯 단계를 나타낸다. 다섯 칸으로 나누어 각 칸의 맨 앞에는 연원을 기록하고, 그 아래 칸에 내용을 다룬다. 각 편마다 서문이 있어 그 <표>에 다루어진 역사에 대한 논평을 간략하게 싣고 있다. <서>는 정치, 사회, 문화, 과학, 천문학 등과 같은 전장제도를 기록하고 있어서 한 편의 문화사나 제도사의 성격을 갖는다. <세가>는 제왕보다 낮은 위치인 봉건 제후들의 나라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후들 외에 황제의 친천과 공훈을 세운 신하 등이 포함 되어 있다. 무관의 제왕인 광자와 왕을 칭한 지 6개월 만에 망한 진섭이 포함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열전>은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주로 수록하고 있는데, 신분을 초월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13. 중국 고대 역사서의 세 가지 편찬 체제인 편년체, 기사본말체, 기전체 가운데 기전체의 효시가 <사기>이다. 기전체는 본기와 열전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먼저 시대순으로 제왕의 언행과 행적을 서술하고, 제왕이나 제후를 보좌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  편년체: 연월(年月)에 따라 기술하는 역사편찬의 한 체재(體裁). <춘추>, <좌씨전>

 ☞  기사본말체 : 사건별로 제목을 앞세우고 관계된 기사를 한데 모아 서술한다. 그 전부터 이용된 기전체(紀傳體)와 편년체(編年體)가 인물별 ·분야별이나 연대순으로 서술하여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 흩어지거나 섞이고 중복되는 것에 비해 어떤 일의 원인과 발단, 전개과정, 후에 미친 영향까지 일관되게 서술하기 때문에 대상사건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고려사>, <동사> 등도 기전체로 서술되었다.

 ☞  기전체 : 역사 사실을 서술할 때 본기(本紀)·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구성하는 역사 서술 체재로서 사마천의 《사기》에서 비롯되어 중국·한국의 역대 왕조에서 정사(正史) 서술의 기본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13. 사마천은 자신이 기술하고자 하는 시대의 사회 구조와 그 내부의 발전상, 인물과 사건 및 제도 등 그 사회가 가진 제반 현실에 역사적 해석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통사를 쓰면서도 자신의 시대인 한대를 다루었던 것이다.

14. 사마천은 어려서 집에서 공부하다가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장안에 와서 당시 경학 대사인 동중서와 공안국에게 고문을 배웠다. 20세 때 여행을 시작하여 중국전역을 두루 돌아다녔으며 돌아온 후에는 낭중에 올랐다. 또다시 무제를 따라 순행하면서 거의 온 나라를 주유했다. 어디를 가든지 고적을 탐방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사마천이 낙양에서 아버지와 만났을 때, 아버지가 그의 손을 잡고서 반드시 역사서를 집필하라고 당부한 뒤 세상을 떠났다.

16. 사마천이 <사기>를 쓴 목적? <태사공 자서>에 써있음. 첫째, 궁형을 당한 것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한 구차한 행위가 아니라 글을 지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둘째, 역사적 사실의 포폄과 직서이다. (도덕적 규범 마련, 춘추정신의 계승) + 태사령이라는 자기 직분에 충실하면서 순수하게 개인의 자격으로 저술에 임했다.

18~19. 격동의 시대를 약 120여명이라는 비운의 인물을 통해 그려 냈으니 결국 사마천에게는 '비극' 이야말로 아닌 게 아니라 시대의 표징이었던 셈이다.

20. 사마천은 <열전>에서 인물에 대해 나열식으로 정보를 제공하기보다 그 인물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는 특징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21. <사기열전>의 독특한 인물의 선택, 서술 방식은 역사는 결코 지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24. <사기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27.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절대 군주 위주로 재편되는 엄혹한 현실과 인간에 대한 성찰 즉 사마천의 역사를 보는 태도가 다른 역사서와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백이 열전

63. 이 노래로 미루어 본다면 원망한 것인가? 원망하지 않은 것인가?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 우, 하나라 때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구나!

65.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

66. "부귀가 찾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자리라도 나는 하겠다. 또 만일 찾아서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겠다."

66. 어찌하여 세속 사람들은 그토록 부귀한 사람을 중시하고, 깨끗하고 맑은 사람을 하찮게 여길까?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죽은 뒤에 자기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가장 가슴 아파한다."

66. 가의는 이렇게 말했다. "구름은 용을 따라 생기고 바람은 범을 따라 일어난다. 이처럼 성인이 나타나야 세상 만물도 다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66. 안연은 학문을 매우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행동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67. 시골에 묻혀 사는 사람이 덕행을 닦아 명성을 세우고자 하더라도 덕행과 지위가 높은 선비에 기대지 못한다면 어떻게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

 

관.안 열전

71. 관중은 곤궁하여 언제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끝가지 그를 잘 대해 주고 속인 일을 따지지 않았다.

72.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자그마한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ㅇ르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73. 관중 : "...나라를 다스리는 네 가지 강령 즉 예의, 정의, 깨끗함, 부끄러움이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는 멸망한다. 수원에서 물이 흘러가듯이 명령을 내리면 그 명령은 민심에 순응하게 된다."

73. 백성이 바라는 것은 그대로 들어주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은 그글의 뜻대로 없애 주었다.

75. 안영은... 임금이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면 그 명령을 따르지만 올바르지 않을 경우에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77.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보충할 것을 생각한다.'

 

노자.한비 열전

81.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씨, 이름은 이, 자는 백양, 시호는 담이다. 그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이었다.

81. "그대는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시오." -노자가 공자에게

83. 노자는 하지 않는 것으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했다.

84.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86~91. 한비 <세난> : "대체로 유세의 어려움은 내 지식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고, 내 말솜씨로 뜻을 분명히 밝히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며, 또 내가 감히 해야 할 말을 자유롭게 모두 하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다.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라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내 주장을 그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는 데 있다...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 버릴 줄 아는 것이다... 오랜 시일이 지나 군주의 총애가 깊어지면 큰 계책을 올려도 의심 받지 않고 군주와 서로 다투며 말하여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는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렵다는 뜻이다... 군주에게 간언하고 유세하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를 살펴본 다음에 유세해야 한다."

 ☞  한비자의 <세난>편을 잘 읽고, 사기열전에 나오는 수많은 유세자들의 말솜씨를 들어보면 딱 맞아 떨어지는 것들이 있다. 사마천이 이 편을 앞에 둔것도 뒤에 오는 유세가들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었을꺼라 짐작된다.

92. 태사공 왈. "노자가 귀하게 생각하는 도는 허무이고, 무위 속에서 변화에 호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책은 말이 미묘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장자는 노자가 말한 도덕의 의미를 미루어 풀어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쳤는데, 그 요지 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신불해는 스스로 힘써 명분과 실질에 적용시켰고, 한비는 먹줄을 친 것처럼 법규를 만들어 세상의 모든 일을 결단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였지만 너무나 가혹하여 은혜로움이 부족했다. 이들의 학설은 모두 도덕에 그 근원을 두고 있지만 그 가운데 노자의 학설이 가장 깊다."

 

사마. 양저 열전

100. 양저 : "장수란 명령을 받은 그 날부터 집을 잊고, 군영에 이르러 군령이 확정되면 친척들을 잊으며, 북을 치며 급히 나아가 공격할 때에는 자신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102. 양저는 병사들의 막사, 우물, 아궁이, 먹거리를 비롯하여 문병하고 약을 챙겨 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몸소 보살폈다. 또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재물과 양식을 모두 병사들에게 풀고, 자신은 병사들 중에서도 몸이 가장 허약한 병사의 몫과 똑같이 양식을 나누었다. 이로부터 사흘 뒤에 병사들을 다시 순시하자 병든 병사들까지도 모두 앞다투어 싸움터로 나가기를 바랐다.

 

손자.오기 열전

108. 손무 : "약속이 분명하지 않고 명령에 숙달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죄이지만, 군령이 이미 정확해졌는데도 군법에 따르지 않는 것은 사졸들의 죄이다."

111. 손빈 : "어지럽게 엉킨 실을 풀려고 할 때는 주먹으로 쳐서는 안 되며, 싸우는 사람을 말리려고 할 때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주먹만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급소를 치고 빈틈을 찔러 형세를 불리하게 만들면 저절로 물러날 것입니다."

115. 문후는 이극에게 물었다. "오기는 어떤 사람이오?"

 ☞ 다른 사람들도 서로 이야기 할때 이렇게 묻겠지? "양경수는 어떤 사람이오?" 어떤 대답이 나올까. 어리버리한데 마음은 좀 착해보이는 숙맥? 난 어떤 사람으로 불리워지고 싶은가?

121. 태사공 왈 : "... 옛말에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꼭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실천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오자서 열전

134. 처음에 오자서는 신포서와 친하게 지냈는데, 오자서가 달아나면서 신포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엎고 말 것이오." 그러자 신포서는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지킬 것이오."

138. 오자서 : "나는 왕께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왕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곧 오나라가 망하는 날을 보게 될 것이다. 네가 오나라와 함께 죽는 것은 덧없는 일이다."

140. "그대는 이 칼로 자결하시오." 오자서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아! 참소를 일삼는 신하 백비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왕은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나는 그의 아버지를 제후의 우두머리로 만들었고, 그가 임금이 되기 전 공자들끼리 태자 자리를 놓고 다툴 때 죽음을 무릅쓰고 선왕에게 간해 그를 후계자로 정하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태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내게 오나라를 나누어 주려고 하였을 때도 나는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간사한 신하의 말만 듣고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왕의 관을 짤 목재로 쓰도록 하라. 아울러 내 눈을 빼내 오나라 동문에 매달아 월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하라." 그러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143. 태사공 왈 : "원한이 사람에게 끼치는 해독은 정녕 심하구나!... 그는 작은 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씻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겼으니 그 뜻이 참으로 슬프구나! ... 그는 모든 고초를 견뎌 내어 공명을 이룰 수 있었다.

 

중니 제자 열전 (공자의 제자 일흔일곱 명에 관한 내용)

147. 공자는 " 덕행으로는 안연과 민자건과 염백우와 중궁이 있고, 정치로는 염유와 계로가 있으며, 언변으로는 재아와 자공이 있고, 문학으로는 자유와 자하가 특히 뛰어났다."

148. "안회는 배울 때 듣고만 있어 어리석은 것 같지만 물러나 행동하는 것을 보면 내가 가르친 것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안회는 절대로 어리석지 않구나!"

151. "얼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곧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제물로 쓰지 않으려고 하여도 어찌 산천의 신들이 그냥 내버려 두겠는가?"

151~152. 염구가 공자에게 물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실천해야 한다."

자로가 물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아버지와 형이 살아 계신데 어찌 들은 것을 바로 실천하겠느냐?"

자화가 공자의 대답이 다른 것을 의아해 하며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하므로 제지한 것이다.

 ☞ 성격에 따라 제안이나 충고가 달라져야 한다. 물처럼 유연하여라. 기적의 토피카

153. 자로가 정치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백성이 해야 할 도리를 앞장서서 하고, 백성의 일을 위해 몸소 애쓰는 것이다." 자로가 그 밖에 더 해야 될 것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하고 게으르지 않으면 된다."

157. "재여는 참으로 어질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삼 년상은 세상의 합의된 예의이다."

160. 자공이 물었다.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다며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161. 자공 : "제가 듣기에 나라 안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강한 적을 공격하고, 나라 밖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약한 적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164. 자공 : "용맹스러운 사람은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곤경에 바진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지 않으며,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놓치지 않고, 왕은 다른 나라의 후대를 끊지 않음으로써 의를 세웁니다."

168. 자공은 한 번 나서서 노나라를 보존시키고 제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강국이 되게 하였으며, 월나라를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였다. 즉 자공이 한 번 뛰어다니더니 각국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십 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각기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70. 공자 "그림 그리는 일은 먼저 흰 바탕이 있은 뒤에 색을 칠해서 다듬는 다는 뜻이다." 자하는 물었다. "예가 나중이라는 말씀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비로서 너와 더불어 <시경>을 말할 만하구나."

171. 공자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공자는 자하에게 말했다. "너는 도에 힘쓰는 군자의 선비가 되어야지, 명성을 좇는 소인의 선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

171. 자장이 녹을 구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많이 듣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한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 자장은 이 말을 잊지 않기 위하여 자기 허리띠에 적어 두었다.

172. 공자가 되물었다. "네가 말하는 통달이란 무슨 뜻이냐?"

자장이 대답했다. "나라에서도 이름이 알려지고 집에서도 반드시 이름이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명망이지 통달이 아니다. 대체로 통달한 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잘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통달하게 된다. 그러나 명망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어진 척하지만 실제 행동은 완전히 어긋나면서도 그러한 것에 물들어 조금도 의심 없이 행동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이름을 얻게 된다."

174. 자우는 매우 못생겨서 공자는 그가 가르침을 받으러 왔을 때 재능이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후에 공자는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말 잘하는 것으로 사람을 골랐다가 재여에게 실수하였고, 생김새만을 보고 사람을 가리다가 자우에게 실수하였다."

178. 증점은 이렇게 말했다. "봄옷이 새로 만들어지면 젊은이 대여섯 명과 어린아이 예닐곱명을 데리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밑에서 바람을 쐰 다음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고 싶습니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서 감탄했다. "나도 너와 같이하고 싶구나!"

181. 공자가 칠조개에게 벼슬하라고 권하자, 칠조개가 이런 대답을 했다. "저는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벼슬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 말에 공자는 그가 도에 뜻을 두고 있음을 알고 기뻐하였다.

 ☞ 나 또한 벼슬보다는 도에 뜻이 있는데, 지금 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답하구나.

182. "도가 행해지는 것도 천명이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도 천명이다. 자주 같은 인물이 그 천명을 어찌할 수 있겠느냐? 내버려 두어라."

184. "번지는 소인이구나!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며, 윗사람이 신의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성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만 한다면 사방의 백성이 자식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찾아올 텐데 농사짓는 법을 배워 어디에 쓰겠는가?"

 ☞ 농사를 무시하는 발언인가? 그렇게 보기 보다는 공자는 '인'을 가르치는 스승인데 자신에게 농사를 물은 번지가 번지수를 잘못 찾았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읽힌다. 자신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더 높은 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184. 번지가 인이란 어떤 것인가 묻자.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지란 어떤 것인가 묻자 "사람을 아는 것이다."

 ☞ 사람에게서 구하라.

184. 유약 "예를 운용하는 데는 조화가 가장 중요하다."

188. 공손룡은 자가 자석이고 공자보다 쉰세 살 아래이다.

 ☞ 쉰세 살 아래 사람을 가르치는 공자의 모습이 아름답구나.

 

상군 열전 (법가를 대표하는 정치가)

199. 위앙이 말했다. "의심스러워하면서 행동하면 공명이 따르지 않고, 의심스러워하면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자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남들이 모르는 지혜를 가진 자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오만하다는 비판을 듣게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미 이루어진 일ㅇ도 모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일이 시작되기 전에 압니다. 백성은 일을 시작할 때에는 더불어 상의할 수 없으나 일이 성공하며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가장 높은 덕을 강구하는 자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큰 공을 이루는 자는 뭇사람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으면 구태여 옛것을 본뜨지 않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면 옛날의 예악 제도를 좇지 않습니다."

200.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예법의 통제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법을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법에 얽매입니다."

200.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나라에 편하면 옛날 법을 본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201. 상공업에 종사하여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와 게을러서 가난한 자는 모두 체포하여 관청의 노비로 삼는다.

 ☞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 사람들은 군역의 의무를 부과하기 어려워 전쟁이 잦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런 법률을 만든것이다.

202. "이 나무를 북쪽 문으로 옮겨 놓는 자에게는 십 금을 주겠다." 그러나 백성은 이것을 이상히 여겨 아무도 옮기지 않았다.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옮기는 자에게는 오십 금을 주겠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옮겨 놓자 즉시 그에게 오십 금을 주어 나라에서 백성을 속이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고 나서 새 법령을 널리 알렸다.

205. 위앙은 미리 숨겨 두었던 병사들에게 위나라 공자 앙을 덮치게 하여 사로잡고 위나라 군대를 쳐서 모조리 깨뜨리고 진나라로 돌아왔다.

207. 조량이 대답했다. "천 마리의 양가죽은 여우 한 마라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합니다. 천 사람의 아부는 한 사람의 올바른 직언만 못합니다. 주나라 무왕은 신하들의 올바른 직언으로 일어났고, 은나라 주왕은 신하들이 입을 다물어서 망하였습니다."

210. <시경>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는 흥하고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라고 했습니다.

212. 태사공 왈, 상군은... 군주의 총애를 받고 있던 태감을 이용하고, 자리에 오른 뒤에는 공자 건을 처형하고, 위나라 장군 앙을 속이고, 조량의 충언을 따르지 않은 것도 그가 덕이 부족한 인물임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소진 열전 (합종파)

217. 소진은 <주서> 음부를 찾아내어 머리를 파묻고 읽었다. 일 년쯤 되어서야 [유세할] 상대방의 심리를 알아내어 설득하는 방법을 터득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 소진도 책을 읽고 물리를 터득했구나.

218. 새도 깃털이 자라지 않으면 높이 날 수 없소.

224. 요 임금은 300이랑의 땅도 없고, 순 임금은 손바닥만한 땅조차 없지만 천하를 소유하였으며, 우 임금은 백 명이 모여 사는 마을도 없지만 제후들의 왕이 되었고, 탕왕과 무왕의 선비는 3000명에 지나지 않고 수레는 300대를 넘지 않으며 병사는 겨우 3만 명이지만 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228. 차라리 닭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가 되지 말라.

227~237. 소진의 설득방법 : 먼저 상대방 나라의 장점을 칭찬한다. 그런데 진나라를 섬기려는 모습을 비판한다. 그 이유를 말하고, 진나라를 섬기지 않고 나라를 지키는 방법을 제안한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음을 알린다. 어떻게 하시겠소 ?

235. 소진 : "신이 듣건대 혼란스러워지기 전에 다스리고 [해로운 일은] 일어나기 전에 대책을 세워 막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환이 닥친 뒤에 걱정하면 이미 늦습니다.

238. 이렇게 하여 여섯 나라는 합종하여 힘을 합치게 되었다.

242. 신이 늙은 어머니를 동주에 버려두고 이 나라에 온 것은 본래 자기를 위해 행동하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나아가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244. 예화로 설득하는 방법 "첩이 일부러 넘어져 주인과 아래 주모를 살리고 자신은 매질을 당한 일"

254. 대체로 높고 편안한 것을 버리고 위험하고 낮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총명한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260. 소진이 보통 사람의 집에서 일어나 여섯 나라를 연합시켜 합종을 맺게 한 것은 그 지혜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는 사실을 뜻한다.

 

장의 열전 (연횡파의 대표 인물)

265. 장의는 위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소진과 함께 귀곡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세술을 배웠는데, 소진은 스스로 장의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267. 나는 그가 작은 이익을 탐내어 큰 뜻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스러워서 일부러 그를 불러다 모욕을 주어 그의 뜻을 북돋은 것일세. 자네는 나 대신 은밀히 그를 도와주게.

275. 장의 "합종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과장되게 큰소리만 쳐 믿을 만한 내용이 적습니다. 제후 한 사람만 설득하면 후에 봉해지지 때문에 천하의 유세하는 사람은 모두 밤낮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면서 합종의 이로움을 말합니다. 군주들은 그들의 교묘한 말을 현명하다고 여겨 속아 넘어갑니다. 어찌 현혹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82. 장의의 설득방법 : 상대방의 장점을 치켜세움-->위기상황을 가정-->합종론의 약점을 공격-->더 큰위기를 가정-->예화-->합종론자 비판-->대안은? 연횡!

또는 약한나라의 경우 처음부터 약점을 공격하고 두려움을 불러 일으켜 대안을 보여준다.

289. 신은 제나라와 노나라의 세 차례 싸움에서 노나라가 모두 이겼지만 나라가 위태로워져 곧 멸망하고 말았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전쟁에서 이겼다는 명성은 얻었지만 실제로는 나라가 망했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제나라는 크고 노나라는 작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나라와 제나라와 노나라의 관계와 같습니다.

 ☞ 예를 들어 한방에 설득한다.

298. 진진은 대답했다. "그것은 장의만이 아니라 길 가는 사람도 다 압니다. 예전에 오자서는 그 임금에게 충성하였기 때문에 온 천하가 그를 자기 신하로 삼으려고 서로 다투었고, 증삼은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였기 때문에 온 천하가 그를 자식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노비가 그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팔리면 좋은 노비입니다. 소박 맞고 쫓겨 온 여자가 그 마을에서 다시 결혼한다면 좋은 아내입니다. 지금 신이 자기 임금에게 충성스럽지 않다면 초나라도 어떻게 신을 충성스럽다고 여기겠습니까? 충성을 다해도 버림받으려 하는데 신이 초나라로 가지 않으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혜왕은 그 말을 옳다고 여기고 그 뒤부터 그를 잘 대우하였다.

305. 태사공 왈, "삼진에는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에 능한 유세가가 많았다. 합종론과 연횡론을 주장하여 진나라를 강하게 만든 자들은 대체로 모두 삼진 사람이다. 장의가 일을 꾸민 것은 소진보다 더 심한 데가 있다. 그런데도 세상사람들이 소진을 더욱 미워하는 까닭은 그가 먼저 죽었기 때문에 장의가 그이 단점을 부풀려 들추어내고 자신의 주장을 유리하게 하여 연횡론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두사람은 참으로 나라를 기울게 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 사마천은 자신의 사상을 들어낸다. 유세가들 보다는 더 큰 도를 추구했다.

 

저리자. 감무 열전

309. 저리자의 이름은 질이고 진나라 혜왕의 배다른 동생으로, 어머니는 한나라 사람이다. 그는 우스갯소리나 행동을 잘하고 지혜도 풍부하여 진나라 사람들이 지혜주머니라고 불렀다.

314. 예화 : 옛날 효자로 유명한 증삼이 비읍에 있을 때 일입니다. 노나라 사람 가운데 증삼과 이름과 성이 똑같은 자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했지만 그 어머니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태연하게 베를 짰습니다. 조금 뒤 또 한 사람이 와서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했지만 역시 태연하게 베를 짰습니다. 그러나 조금 뒤 또다시 한 사라밍 와서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하자 그 어머니는 베 짜던 북을 내던지고 베틀에서 내려와 담을 넘어 달아났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어진 증삼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만 세 사람이나 그를 의심하자 정말인가 싶어 겁을 먹었습니다.

317. 짐승도 궁지로 몰리면 수레를 뒤엎는다고 합니다.

321. 부디 당신의 남는 빛으로 그들을 구제해 주십시오.

328. 태사공 왈, "저리자는 진나라 혜왕의 골육지친이니 중용된 것은 세상의 이치이다. 그러나 진나라 사람들이 그의 지혜를 칭찬하였으므로 그 사적을 많이 실었다. 감무는 하채의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몸을 일으켜 그 이름을 제후들 사이에 떨치고 강한 제나라와 초나라에서 중용되었다. 감라는 나이가 어리지만 한 가지 기묘한 계책을 생각해 내어 후세에 이름이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행실이 성실한 군자는 아니지만 전국시대의 책사였다. 바야흐로 진나라가 강성해졌을 때 천하는 더욱 권모와 술수로 치달으려 했던 것이다.

 

양후 열전

338. 당신이 땅을 얻기 위해 반드시 병력을 출동시킬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341. 천하의 위장에 해당하는 상당을 얻는 것과 군대를 출동시켜 놓고 돌아오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유리합니까?

 ☞ 설득의 방법, 한가지 대답으로 유도하는 것.

342. 태사공 왈, 양후는 부유하고 존귀함이 최고에 이르렀을 때, 범저 한 사람의 탄핵으로 신분이 꺽이고 권세를 빼앗겨 근심과 번민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왕족의 한사람이 이렇거늘 하물며 객경이야 어떠하겠는가?

 

백기. 왕전 열전

347. 조나라 왕은 평원근의 말을 받아들여 풍정을 화양군에 봉했다.

 ☞ 생각하나가 받아들여져 권세가 주어지는 구나... 그러나 풍전등화... 위태롭다

349. 백기는 사람들을 속여 모조리 산 채로 땅속에 묻어 죽이고, 남은 어린아이 240며만을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머리가 베이거나 포로로 사로잡힌 자가 이때을 전후로 하여 45만명이나 되었다. 조나라 사람들은 두려워 벌벌 떨었다.

352.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명을 속여서 모두 산 채로 땅속에 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354. 왕전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게 삼아 빈양에 숨어 살았다.

356. 왕전은 가는 도중에 훌륭한 논밭과 택지와 정원과 연못을 내려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내가 자손을 위한 재산을 만들려고 많은 논밭과 정원과 연못을 요청함으로써 다른 뜻이 없음을 보여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지 않는다며 진나라 왕은 가만히 앉아서 나를 의심할 것이오."

 ☞ 지혜롭구나.

358. 태사공 왈, "세상에 '자에도 짦은 데가 있고, 치에도 긴 데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왕전은 시황제조차도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으나 그럭저럭 시황제에게 아첨하여 편하게 있을 곳을 구하다가 늙어서 죽음에 이르렀다..."

 ☞ 몇 대를 이어 이름이 남을 삶은 어떤 삶일까? 대인, 군자의 삶은 무엇일까? 지금 이 시대에도 군자의 삶이 통할까? 어느 누가 그런 삶을 추구할까?

 

맹자. 순경 열전 (잡가들의 열전)

363. 태사공 왈, "나는 일찍이 <맹자>를 읽다가 양(위)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구절에 이르러 책 읽기를 멈추고 '아! 이익이란 진실로 혼란의 시작이로구나."라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364. 천하는 바야흐로 합종과 연횡에 힘을 기울이고 남을 침략하고 정벌하는 것만을 현명하다고 여기는 때였다.

367. 네모난 각목을 둥근 구멍에 아무리 넣으려고 한들 들어갈 리가 있겠는가?

367. 이윤과 백리해는 처음에는 상대방의 비위를 맞춘 뒤에 바른길로 가게 했다. 추연의 말은 일반적인 법칙을 벗어났지만, 그도 소를 친 백리해나 솥을 짊어진 이윤과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369. 순우곤이 혜왕을 만나 한 번 입을 열자 사흘 밤낮을 이어서 말했는데도 혜왕은 피곤한 줄을 몰랐다. 혜왕은 그에게 공경이나 재상 자리를 주어 예우하려고 했지만, 순우곤은 사양하고 물러갔다. 그래서 혜왕은 편안한 의자가 있는 사두마차와 비단 다섯 필, 벽옥, 황금 2000냥을 주었따. 그는 평생 동안 벼슬하지 않았다.

 ☞ 이런 삶은 어떄?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선택을 보여주는 사기.

370. 추연의 학설은 광대하며 변론에 뛰어났고, 추석의 학설은 매우 완벽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웠으며, 순우곤과는 오랫동안 같이 지내면 때때로 좋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제나라 사람들은 이 세사람을 칭송해서 "하늘을 말하는 추연, 용을 아로새긴 듯 문장을 꾸미는 추석, 곡과를 지지는 순우곤!"이라고 노래했다.

371. 순경은 유가, 묵가, 도가의 학설이 펼쳐진 결과 이룬 것과 실패한 것을 살펴 차례로 정리해서 수만 자의 책을 남기고 죽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난릉에 묻혔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맹상군 열전

380. 지금 아버님께서는 쌓아 둔 것이 남아돌지만 더욱 많이 쌓아 두려고만 할 뿐 나라의 힘이 날로 쇠약해지는 것은 잊고 계십니다. 저는 이 점이 이상합니다. - 이 말을 듣고 전영은 문을 높이 사 집안일을 돌보게 하고 빈객 접대하는 일을 맡겼다. 그러자 빈객이 날로 불어나고 문의 이름이 제후들에게 알려졌다. 이 사람이 바로 맹상군이다.

 ☞ 부모님을 설득하여 바른길로 인도하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다. 부모님의 어깨를 딪고 일어서다.

381. 맹상군이 손님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잘 대우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맹상군과 친하다고 생각하였다.

383. 처음 맹상군이 좀도둑과 닭울음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을 빈객으로 삼았을 때, 다른 빈객들은 모두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맹상군이 진나라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이 두 사람이 그를 구하였다. 그 뒤 빈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마음속 깊이 맹상군을 따르게 되었다.

393. 맹상군의 빈객 풍환의 이야기. "술과 소를 많이 마련하지 않고는 돈 빌린 사람을 다 모이게 할 수 없고,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알 수 없었습니다. 여유 있는 자에게는 갚을 날짜를 정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차용증서를 십 년 동안 가지고 있어도 이자만 더욱 쌓여갈 뿐이라 성급하게 독촉하면 바로 달아날 테니 영원히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쓸모없는 차용증서를 불살라 받을 수 없는 빚을 없애 설 땅의 백성이 군주를 가까이하고 군주의 이름을 칭송하게 하려고 한 일입니다. 당신은 의심나는 부분이 있습니까?" 맹상군은 손뼉을 치면서 칭찬하고 고마워했다.

397. 풍환 왈,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만물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당신은 혹시 아침 일찍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까? 새벽에는 어깨를 맞대면서 앞다투어 문으로 들어가지만 날이 저물어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팔을 휘저으면서 시장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침을 좋아하고 날이 저무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날이 저물면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물건이 시장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위를 잃자 빈객들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고 해서 선비들을 원망하여 일부러 빈객들이 오는 걸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평원군. 우경 열전

404. "나는 여러분을 예우하는 데 크게 실수한 적이 없거늘 어째서 떠나가는 자가 이처럼 많소?" 한사람이 대답했다. "당신이 절름발이를 비웃은 자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비들은 당신이 여색을 좋아하고 선비를 하찮게 여기는 인물로 생각하여 떠나는 것입니다." 평원군은 절름발이를 비웃은 애첩의 목으 베고, 직접 문 앞까지 가서 절름발이에게 그 목을 내 주면서 사과했다. 그 뒤 문하에 다시 선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409. 모 선생의 세치 혀는 군사 백만 명보다도 강했다.

417. 옛말에 '강한 자는 공격을 잘하고 약한 자는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왕의 땅은 끝이 있지만 진나라의 요구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한정된 땅을 가지고 끝없는 요구에 응하면 그 결과는 조나라의 멸망뿐입니다.

421. 태사공 왈, " 속담에 '이익에 사로잡히면 지혜가 흐려진다'라고 하였다... 우경에게 고통과 근심이 없었다면 책을 지어 후세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위공자 열전

430. 후영 "오늘 저도 공자를 위하여 일을 할 만큼 했습니다... 시장 사람은 모두 저를 소인이라 하고, 공자를 덕행이 있으며 선비에게 몸을 낮추는 분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434. 후영 "장수가 싸움터로 나갔을 때는 군주의 명령도 듣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지요.

434. 주해 "일일이 답례하지 않은 까닭은 하찮은 예의 같은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공자께서 위급한 처지에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제가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436.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440. 위나라 왕은 날마다 공자를 헐뜯는 말을 듣다 보니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공자는 밤낮으로 술자리를 벌여...사년이나 계속하더니 결국 술 중독으로 죽고 말았다.

441. 태사공 왈, "... 신릉군만이 깊은 산과 계곡에 숨어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은 것은 일리가 있다.."

 ☞ 사람을 찾아 가서 사귀어라. 노력해라. 시간과 물질을 사용해라. 공경해라.

 

춘신군 열전

446. "사물은 한쪽 끝까지 가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겨울과 여름은 서로 바뀌게 마련이다. 쌓인 것이 극에 이르면 위태롭다. 바둑돌을 쌓아 올리면 무너지게 마련이다."

447. <역경>에서는 "여우가 물을 건너가려면 꼬리를 적시게 마련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시작은 쉽지만 끝맺음은 어렵다는 것을 뜻합니다.

453. 춘신군이 재상이 되어 초나라에 있을 때 제나랄에는 맹상군이 있고, 조나라에는 평원군이 있으며, 위나라에는 신릉군이 있었다... 이들은 선비들의 힘을 빌려 나라의 정치를 돕는 한편 자신들의 권력을 굳히려고 했다.

 ☞ 말의 시대였구나.

461. 태사공 왈, ".. 처음에 춘신군이 진나라 소왕을 설득하고 몸을 던져 초나라 태자를 돌아오게 한 것은 얼마나 뛰어난 지혜였던가? 그런데 마지막에 이원에게 당한 일은 늙어서 사리 판단에 어두워진 탓이리라. 세인의 말에 '마땅히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라고 하였다... "

 

범저. 채택 열전

469. 범저 : 신이 듣건대 "현명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면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상을 받고, 능력이 있는 자는 반드시 관직을 받을 수 있다. 공로가 큰 자는 그 봉록이 크고, 공이 많은 자는 그 관직이 높으며,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그 관직이 높다. 그러므로 능력이 없는 자는 감히 관직을 맡지 못하고, 능력이 있는 자는 스스로 재능을 감출 수 없다."라고 합니다.

473. 어리석은 신은 충성을 다하고 싶지만 아직 왕의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왕께서 세 차례나 물으셔도 신이 선뜻 대답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485. "오늘 네가 죽음을 당하지 않는 이유는 두터운 명주 솜옷을 주면서 옛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를 용서한다."

 ☞ 그래 뭐라도 좀 주면서 마음을 나누어야지.

487. 그때 단 한끼 식사라도 대접해 준 자에게는 반드시 이를 갚고, 눈을 한 번 흘길 정도의 사소한 원한에도 반드시 보복했다.

488. 평원군 왈,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벗을 사귀는 것은 천한 몸이 되었을 때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 때문이고, 부유할 때 벗을 사귀는 것은 가난해졌을 때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위제는 제 벗입니다. 제 집에 있다 하더라도 내놓을 수 없습니다만 지금은 제 집에 없습니다.

496. 채택 : ".,, 몸과 이름이 모두 온전한 것이 가장 훌륭하며, 이름은 남의 모범이 될 만하지만 몸을 보존하지 못한 것이 그 다음이고, 이름은 욕되어도 몸만은 온전한 것이 가장 아래입니다."

498. 옛말에 '해가 중천에 오르면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습니다. 만물이 왕성해지면 곧바로 쇠약해져 떨어지는 것은 천지의 변하지 않는 이치입니다.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 굽히고 펴는 것이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은 성인의 영원한 도리입니다.

499. 이는 모두 최고에 이르렀을 때 본연의 도리로 돌아오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지 않으며 절제할 줄 모른 데서 생긴 재앙입니다.

502. 이렇게 하여 진나라가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고 당신의 공로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진나라는 조금씩 공을 나누고자 할 때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상군, 백기, 대부 종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의 길흉을 알 수 있다'라고 합니다.

 ☞ 연구원 사람들 속에 들어가 그들을 나의 거울로 삼으리라. 사람이야기 참 재미있다.

504. 태사공 : 한비자가 '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아야 장사를 잘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진실로 옳은 말이다. 범저와 채택가 진나라를 만난것을 빗대어 말한것.

그러나 이 두사람도 어려운 때가 없었다면 어찌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악의 열전

512. 악의는 연나라 혜왕이 자기를 탐탁지 않게 여겨 다른 사람으로 교체시킨 줄을 알고 죽게 될까 봐 두려워서 서쪽으로 달아나 조나라에 투항했다. 조나라에서는 악의를 관진에 봉하고 망제군이라 불렀다. 조나라가 악의를 높이 떠받들자 연나라와 제나라는 놀랐다.

513. 악의의 보연왕서 : "신이 듣기에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는 가깝다는 이유로 봉록을 주지 않고 공로가 많은 자에게 상을 주며, 능력 있는 사람에게 그에 맞는 일을 맡긴다."라고 합니다.

 ☞ 내 능력에 맡는 일은 무엇인가? 실력을 키워라.

515. "일을 잘 꾸민다 해서 반드시 일을 잘 이루는 것은 아니며, 시작을 잘 한다고 해서 반드시 마무리도 잘하는 것은 아니다"

515. "옛 군자는 사람과 교제를 끊더라도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기 결백을 밝히려고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

 

염파. 인상여 열전 (조나라 장수)

525. 상여 왈, "진나라가 성을 내주는 조건으로 화씨벽을 달라고 했는데, 조나라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잘못은 조나라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조나라에서 화씨벽을 보내 주었는데도 진나라가 조나라에게 성을 주지 않으면 잘못은 진나라에 있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대책을 비교해 볼 때 차라리 요구를 받아들여 잘못의 책임을 진나라에게 덮어 씌우는 편이 낫습니다."

527. " 왕께서 만일 신을 협박하려고 하신다면 신의 머리는 지금 이 화씨벽과 함께 기둥에 부딪쳐 깨질 것입니다."

 ☞  가슴졸이게 하는 명장면이다. 이 다음 530p의 진나라 왕 앞에서의 행동 또한 대단하다.

532.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만일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어울려서 싸우면 결국은 둘 다 살지 못할 것이오. 내가 염파를 피하는 까닭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 하기 때문이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하여 죽음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벗이 되었다.

539. 아버지와 자식은 마음 씀씀이부터 다릅니다.

543. 이목은 조나라 북쪽 변방을 지키는 뛰어난 장수. 흉노가 쳐들어올 때마다 봉화를 올리지 않고 재빨리 가축들을 거두어 성안으로 들어오고는 싸우지 않았다. 이러게 하여 몇해가 지나도 상처를 입거나 잃는 것이 없었다.

545. 태사공 왈, "죽음을 알며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선비 중에 어떤 이는 겁을 집어먹고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상여가 한 번 용기를 내자 그 위세가 상대편 나라까지 떨쳤고, 물러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겸손히 양보하니 그 이름은 태산처럼 무거워졌다. 인상여는 지혜와 용기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단 열전 (제나라)

553. 전단은 성안에서 소 1000여 마리를 모아 붉은 비단에 오색으로 용무늬를 그려 넣은 옷을 만들어 입히고, 쇠뿔에는 칼날을 붙들어 매고 쇠꼬리에는 갈대를 매달아 기름을 붓고 그 끝에 불을 붙였다. -기묘한 계책-

554. 태사공 왈, "용병의 도는 정공법으로 싸우고, 기이한 계책으로 허를 찔러 이기는 것이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기이한 계책을 무궁무진하게 낸다. 기이한 계책과 정공법이 서로 어우러져 쓰이는 것은 마치 끝이 없는 둥근 고리 같다."

 

노중련. 추양 열전 (권력과 부를 경시하고 명예를 높이 여긴 자)

566. 노중련 "천하에서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덜어주고 재앙을 없애 주며 다툼을 풀어 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상을 받는 다면 이것은 장사꾼의 행위입니다."

569. 노중련의 편지 "...또한 제가 듣건대 작은 예절에 얽매이는 사람은 영화로운 이름을 이룰 수 없고, 작은 치욕을 마다하는 사람은 큰 공을 세울 수 없다고 합니다. 옛날 관이오가 제나라 환공을 활로 쏘아 그 허리때의 쇠고리를 맞힌것은 임금 자리를 빼앗으려는 반역 행위였고,..."

571. "나는 부귀로우면서 남에게 얽매여 사느니 차라리 가난할망정 세상을 가볍게 내 맘대로 살리라!"

573. "젊을 때부터 흰머리가 되도록 사귀었으면서도 새로 사귄 듯한 이가 있는가 하면, 길에서 우연히 만나 잠깐 이야기하도도 옛날부터 사귄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바로 상대방의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입니다.

575. 사마희와 범저 이 두사람은 모두 자신들의 계획이 반드시 실현될 수 있음을 믿고 사사로이 붕당을 만들어 의지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홀로 몸을 세웠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질투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76. 여러 사람 입은 무쇠라도 녹일 수 있고, 헐뜯는 말이 쌓이고 쌓이면 뼈라도 녹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579. 오늘날 임금들은 천하의 뛰어난 선비들을 무거운 권력에 눌려 엎드리게 하고, 세력 있는 지위만을 제일로 여기므로 얼굴을 돌려 행실을 더럽히면서까지 아첨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섬기게 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친하고 가깝게 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된다면 뜻있는 선비들은 바위굴 속에서 엎드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충성과 신의를 다하여 대궐 밑으로 들어가는 자가 있겠습니까?

 

굴원. 가생 열전

587. 진흙 속에서 뒹굴다 더러워지자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씻어 내고, 먼지 쌓인 속세 밖으로 헤쳐 나와서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다.

590. <역경>에 "우물물이 흐렸다가 맑아져도 마시지 않으니 내 마음이 슬프구나. 이 물을 길어 갈 수는 있다. 왕이 현명하면 모든 사람이 그 복을 받는다."

591. 어부가 물었다. "대체로 성인이란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속세의 변화를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혼탁하다면 왜 그 흐름을 따라 그 물결을 타지 않으십니까? 모든 사람이 취해 있다면 왜 그 지게미를 먹거나 그 밑술을 마셔 함께 취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아름다운 옥처럼 고결한 뜻을 가졌으면서 스스로 내쫓기는 일을 하셨습니까? "

595. 사람이 태어날 때 받은 천명은 제각기 돌아갈 곳이 있구나.

603. 천명이란 말할 수 없는 것 누가 그 끝을 알랴! 물은 부딪히면 빨라지고  화살은 힘을 받으면 멀리 가는구나. 만물은 돌고 돌아 서로 부딪히고 진동하며 변하네.

603. 하늘의 이치 예측할 수 없고 도는 미리 꾸밀 수 없도다.

605. 성인은 사물에 굽히지 않고 수많은 변화를 만나도 한결같다네.

607. 태사공 왈, <복조부>를 읽으니 그는 삶과 죽음을 한가지로 보고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가볍게 여겼으니, 나는 마음에 깨달은 바 있어 상쾌해지며 스스로 잘못 살았아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불위 열전

자객 열전

629. 전제는 왕 앞에 이르자 생선의 배를 찢고 비수를 잡아 요왕을 찔러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러자 왕의 양쪽 옆에 있던 사람들이 전제를 죽였다.

631. 예양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매우 어렵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까닭은 천하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려는 것일세."

632. 예양 "범씨와 중항씨는 모두 저를 보고 보통 사람으로 대접하였으므로 저도 보통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보답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백은 저를 한 나라의 걸출한 선비로 대우하였으므로 저도 한 나라의 걸출한 선비로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635. 섭정 "그처럼 어진 사람이 격분하여 원수를 쏘아보면서 나 같은 시골뜨기를 가까이 하고 믿어주었으니, 내 어찌 가만히 있을쏘냐! 또 전날 그가 나를 필요로 하였으나 나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았따. 어머니께서 이제 오래 살다가 세상을 떠나셨으니, 나는 앞으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일하리라."

638. 어찌 제게 닥칠 죽음이 두려워 동생의 장한 이름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642. 국무 왈, "대체로 위태로운 일을 하면서 안전함을 찾고 재앙을 만들면서 복을 구하려고 한다면 계책은 얕아지고 원망만 깊어질 뿐입니다."

655. 고점리는 오랫동안 숨어 두려움과 가난속에서 살아 보아야 끝이 없겠따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리에서 물러나 보따리에서 축과 좋은 옷을 꺼내 차림새를 고치고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고점리는 진시황을 죽이려 했다. 결국 실패 하고 죽었다.

656. 태사공 왈, "조말부터 형가에 이르기까지 다섯 사람은 이처럼 의기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이루어지지 않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이 매우 분명하고 자신들의 뜻을 바꾸지도 않았으니, 그들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어찌 망령된 일이겠는가!" 

 

이사 열전

661. 이사는 초나라 상채 사람이다. 그러고는 순경에게로 가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의 기술을 배웠다.

662. 가장 큰 부끄러움은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며, 가장 큰 슬픔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것입니다. 오랜 세월 낮은 자리와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 세상의 부귀를 비난하고 영리를 미워하며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의탁하는 것은 선비의 마음이 아닐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쪽 진나라 왕에게 유세하려고 합니다.

663. 제후국의 명망 있는 사람들 중 뇌물로 움직일 수 있는 자에게는 많은 선물을 보내 결탁하고,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예리한 칼로 찔러 죽였다. 또 군주와 신하 사이를 이간시키는 계략을 쓰면서 진나라 왕은 훌륭한 장수를 보내 그 뒤를 수행하게 하였다.

666. 태산은 흙 한 줌도 양보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높아질 수 있었고, 하해는 작은 물줄기 하나도 가리지 않으므로 그렇게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왕은 어떠한 백성이라도 물리치지 않아야 자신의 덕을 천하에 밝힐 수 것입니다.

667. 진나라는 땅을 한 자도 남에게 봉해 주는 일이 없고 황제의 자제를 세워 왕으로 삼는 일도 없으며 공신을 제후로 삼지 않았다. 이는 뒷날 내란의 근심거리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668.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배운 것을 옳다고 여기고 조정에서 세운 제도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사로이 학문하는 자들은 서로 모여 이미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허망한 것이라고 합니다.

670. 만물은 극에 이르면 쇠하거늘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구나.

672. 조고, "남을 신하로 삼는 것과 남의 신하가 되는 것, 또는 남을 지배하는 것과 남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어찌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672. 조고, "작은 일을 돌아보다가 큰일을 잊어버리면 뒤에 반드시 재앙이 닥치고, 의심하며 주저하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결단을 내려 과감하게 행동하면 귀신도 피하고 뒷날 성공하게 됩니다. "

675. 조고, "편안한 것을 위험으로 돌릴 수도 있고 위험한 것을 편안한 것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편안하고 위험한 것을 결정하지 못한다면 어찌 승상을 성인의 지혜를 가진 분으로 존중하겠습니까?"

676. 조고, "지금 이것을 버리고 따르지 않으면 재앙이 자손에게까지 미치고 두려운 결과를 불러올 것입니다. 처세를 잘하는 자는 화를 돌려 복으로 만드는데, 승상께서는 어떻게 처신하시렵니까?"

678. 몽염이 부소를 말리며 말했다. "... 지금 사자 한 명이 왔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시면 어찌 이 편지가 거짓이 아님을 알겠습니까? 청컨대 다시 한 번 용서를 빌어 보십시오. 다시 용서를 구한 뒤에 목숨을 끊어도 늦지 않습니다."

679. 조고, "법을 준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며, 죄 있는 자는 연좌제를 실시하여 죄를 지으면 그 일족을 모조리 죽이고, 선제 때의 대신들을 물러나게 하고 폐하의 형제들을 멀리하며, 가난한 자를 부유하게 하고 천한 자를 높여 주십시오. 선제의 옛 신하를 모두 제거하고 폐하께서 믿을 수 있는 자를 새로 두어 가까이 하십시오."

684. 이사, "남을 따르는 자는 비천하고 남을 따르게 하는 자는 존중받는 것입니다... 요 임금과 우 임금은 몸소 천하의 백성을 따랐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들을 존귀하다고 한다면 현명한 사람들을 존중하는 명분이 없어질 것입니다... 한비자는 "자애로운 어머니에게는 집안을 망치는 자식이 있지만 엄격한 가정에는 거스르는 종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686. 대체로 현명한 군주는 반드시 세속을 거스르고 풍속을 고쳐서 싫어하는 것을 없애고 하고자 하는 바를 세웁니다.

696. 조고는 자신의 권력이 무거운 줄 알고 2세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했다. 2세 황제가 좌우에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이것은 사슴이지?" 좌우에 있던 이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다. "말입니다." 2세 황제는 놀라서 스스로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태복을 불러 점을 치게 했다.

698. 태사공 왈, "이사는 ... 높은 작위와 봉록을 누리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군주에게 아첨하고 좇으며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기만 했다. 조칙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였으며, 조고의 간사한 의견을 따라 적자를 폐하고 첩의 자식을 제위에 오르게 했다. 제후들이 이미 뒤돌아선 뒤에야 비로소 군주에게 충고하려 했으니 때가 너무 늦엇구나!"

 

몽염 열전 (흉노와 맞선 진나라의 장군)

707. 경솔한 생각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고, 한 사람의 지혜로는 군주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710. 몽염, "내 죄는 죽어 마땅하다. 임조에서 요동까지 장성을 만여 리나 쌓았으니, 이 공사 중에 어찌 지맥을 끊어 놓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 죄로구나." 그러고는 약을 먹고 죽었다.

711. 태사공 왈, "몽염이 진나라를 위해 쌓은 장성의 요새를 보니, 산악을 깍고 계곡을 메워 지름길을 통하게 했으니 진실로 백성의 힘을 가벼이 여긴 것이 분명하다... 시황제의 야심에 영합하여 공사를 일으켰으니 그들 형제가 죽음을 당한 것은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찌 지맥을 끊은 탓으로 돌리랴."

 ☞ 우리나라의 4대강 공사가 떠오른다. 토건 경제를 살리겠다고 지역 민심을 흔들어 놓고, 땅값을 올리고, 강의 흐름을 바꾸어 놓아 강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공사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 공사 완공 후에 사람들은 이 정권을 칭찬할까? 그 구조물을 보고 기뻐할까?

 

장이. 진여 열전

726. 능력 있는 사람이 먼저 왕이 되는 때입니다. 또 조나라 왕은 본래 장군 밑에 있던 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누이조차 장군을 보고도 수레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청컨대 뒤쫓아 가 그녀를 죽이도록 해 주십시오.

737. 관고, "내가 몸에 성한 곳 하나 없으면서까지 죽지 않은 것은 장왕께서 반기를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왕께서 풀려났으니 내 임무는 다했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또 남의 신하로서 그 군주를 죽이려 하였다는 이름을 가지고 무슨 얼굴로 다시 군주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설령 군주께서 나를 죽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목의 혈관을 끊어 결국 죽었다. 이 일로 하여 그 이름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738. 태사공 왈, "... 예전에는 서로 앙모하고 신뢰함에 성의를 다하더니 나중에는 서로 배반하고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였으니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 그들이 권세와 이익만 좇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위표. 팽월 열전

745. 위표, "인생은 흰 망아지가 틈새로 달려 지나가는 것처럼 매우 짧소."

746. 팽월, "지금은 용 두마리가 한참 싸우고 있으니 잠시 기다려 봅시다."

751. 태사공 왈, "...지략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자들이지만 오직 자기 몸을 보존하지 못하는 것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뱀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때를 만나 자신들의 뜻을 펼쳐 보려고 했기 때문에 갇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포 열전

760. 초나라 군대가 강하기는 하지만 온 천하가 초나라에게 의롭지 못하다는 이름을 덮어씌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초나라 왕이 맹약을 저버리고 의제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768. 영윤, "영포는 본래 여산의 무리로서 자기 힘으로 만승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한 일이지 뒷날을 생각하고 백성 만대의 이익을 위해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낮은 계책을 쓸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770. 영포는 늘 가장 포악한 일을 하는 자의 우두머리였고 공적은 제후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그래서 왕이 될 수는 있었지만 자신도 세상의 큰 치욕을 피하지는 못했다.

 ☞ 사마천은 폭력을 싫어했다. 권세를 따르는 것도 싫어했다. 그의 가치관이 역사를 해석하는데도 잘 나타나있다.

 

회음후 열전(한신)

776. 아낙에게 밥을 빌어먹고, 모욕하는 자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 지나가는 굴욕을 당했다.

780. 한신, "항왕이 화를 내며 큰 소리를 지르면 1000명이 모두 엎드리지만 어진 장수를 믿고 일을 맡기지 못하니 그저 보통 남자의 용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 부리는 사람이 공을 세워 벼슬을 주어야 할 경우가 되면 인장이 닳아 깨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며 선뜻 내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아녀자의 인일 뿐입니다.

788. 한신이 대답했다. "이것도 병법에 있는데 여러분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오. 병법에는 죽을 곳에 빠뜨린 뒤라야 비로소 살리 수 있고, 망할 곳에 둔뒤라야 비로소 멸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있잖소? ... 그 형세가 죽을 땅을 두어 저마다 자신을 위하여 싸우게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곳을 준다면 모두 달아날 텐데 어떻게 이들을 쓸 수 있겠소?"

789. 광무군, "제가 듣기로 '지혜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 실수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얻는 경우가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미친 사람의 말도 가려서 듣는다.'라고 했습니다. 제 계책이 반드시 쓸 만하지는 않을지라도 성의를 다하겠습니다. "

798. 무릇 남이 나를 깊이 믿는데 내가 그를 배반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입니다.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하여 항왕에게 거절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798. 괴통, "귀하게 되느냐 천하게 되는냐는 골상에 달려있고, 근심이 생기느냐 기쁨이 생기는냐는 얼굴 모양과 빛깔에 달려 있으며, 성공과 실패는 결단력에 달려 있습니다. "

802.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는 삶아 먹히게 마련입니다.

 ☞ 토사구팽

802. 용기와 지략이 군주를 떨게 만드는 자는 그 자신이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한다.

803. 괴통, "대체로  나무를 하고 말을 먹이는 이는 만승의 천자가 될 만한 권위도 잃어버리고, 조그마한 봉록을 지키는 데 급급한 이는 경상 자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일을 결단하는 힘이며, 의심은 일하는 데 방해만 됩니다.... '맹호라도 꾸물거리고 있으면 벌이나 전갈만한 해도 끼치지 못하고, 준마라도 주춤거리면 노둔한 말의 느릿한 걸음만 못하며, 진나라 용사 맹분도 여우처럼 의심만 하고 있으면 보통 사람들이 일을 결행하는 것만 못하고,.. 이는 능히 실행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811. 괴통, " 도척이 기르는 개가 요 임금을  보고 짖은 것은 요 임금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개는 본래 자기 주인이 아닌 사람을 보면 짖게 마련입니다. 당시 신은 한신만 알았을 뿐 폐하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 말로 괴통은 고제로부터 풀려났다.

 

한신. 노관 열전

831. 태사공 왈, "한신과 노관은 본래 대대로 덕을 쌓고 착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순간의 권모술수로 벼슬을 얻고 간사함으로  공을 이루었다... 아, 슬프다! 대체로 계책의 설익음과 무르익음과 성패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깊구나!"

 

전담 열전

843. 고제, " 아, 역시 까닭이 있었구나! 한낱 평민에서 몸을 일으켜 세 형제가 번갈아 왕이 되었으니 어찌 어질지 않겠는가!" 전횡의 장사가 끝나자 두 빈객은 스스로 전횡을 따라 죽었다. 섬에 살던 그의 빈객들도 전횡의 죽음을 듣고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844. 태사공 왈, "심하구나! 괴통의 계책이 제나라의 전횡을 혼란스럽게 하고 회음후를 교만에 빠지게 하여 이 두 사람을 망쳤구나! 괴통은 책사로서 종횡술에 뛰어나 전국시대의 권모술수를 논한 글 여든한 편을 지었다.

 

번. 역. 등 관 열전 (한나라 초기에 공을 세운 미천한 출신의 영웅)

847. 번쾌는 패현사람이다. 그는 개 잡는 일을 생업으로 하면서 유방과 함께 숨어 살기도 했다.

850. 번쾌, "신은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데 어찌 술 한잔을 사양하겠습니까?"

858. 하후영은 마구간 사어를 지냈다.

862. 영음후 관영은 수양현에서 비단을 팔던 사람이다.

869. 태사공 왈, "내가 소하, 조참, 번쾌, 등공의 옛집과 그들의 평소 사람됨을 물어보았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과는 달랐다. 그들이 칼을 휘두르고 개를 잡고 비단을 팔 때, 어찌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가듯이 한나라 고조를 만나 한나라 조정에 이름을 날리고 자손들에게까지 은덕을 내리게 될줄 알았겠는가?


 

 3. 내가 저자라면

<사기> 전체적인 구성

<본기> 12편 : 오제부터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권력을 행사하던 왕조나 군주들의 사적을 연대순으로 기록

<표> 10편 : 각 시대의 연표로서 역사 발전의 다섯 단계를 나타낸다. 다섯 칸으로 나누어 각 칸의 맨 앞에는 연원을 기록하고, 그 아래 칸에 내용을 다룬다. 각 편마다 서문이 있어 그 <표>에 다루어진 역사에 대한 논평을 간략하게 싣고 있다.

<서> 8편 : 정치, 사회, 문화, 과학, 천문학 등과 같은 전장제도를 기록하고 있어서 한 편의 문화사나 제도사의 성격을 갖는다.

<세가> 30편 : 세가>는 제왕보다 낮은 위치인 봉건 제후들의 나라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후들 외에 황제의 친천과 공훈을 세운 신하 등이 포함 되어 있다. 무관의 제왕인 광자와 왕을 칭한 지 6개월 만에 망한 진섭이 포함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열전> 70편 :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주로 수록하고 있는데, 신분을 초월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인물에 대해 나열식으로 정보를 제공하기보다 그 인물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는 특징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 이런 전체적인 구성을 <기전체>라 하며, 본기와 열전 중심의 구성으로 본다. <본기>를 중심에 두고 <세가>, <열전>으로 넓혀가는 방식(위계적 동심원으로 표현)으로 인해 평론가들은 이를 중화중심주의적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황제를 중심으로 제후 왕, 그리고 개인과 주변 민족으로 구성된 위계적 세계질서관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열전>에 대하여

사마천의 독특한 인물의 선택, 서술 방식은 역사는 결코 지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구성방식이나 희극적 효과의 운용은 '문학의 역사, 역사의 문학'이라는 중국인의 관념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사기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내용 면에서 사마천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24쪽) "

 ☞ 하지만 그러한 갈등 속에서도 정신과 도덕, 충정과 의리의 우월함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한 세대에서는 이익과 물질, 탐욕이 개인을 살리기도 하지만 결국 역사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보다 큰 뜻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백이열전>을 맨 앞에 놓는 구성상의 모습과 매 편 마지막에 싣는 '태사공 왈'로 시작하는 짧은 평론에 그 정신이 실려있다. 이럼으로써 <사기> 전체적으로는 역사서가 갇는 객관성을 갖추면서도 <열전>을 통해 주관적인 생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보여주고, 가치를 내세워 읽는 이의 참여를 유도한다. 각 인물들의 모습은 살아있어 읽는 재미를 더하고 인간 군상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들조차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된다.

 

부모가 나에게 역사서를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면?

먼저 사마천처럼 일생일대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궁형의 치욕을 감내할 만한 것으로 그 뜻을 받들었을지 의문이 든다. 한 시대를 사는 살아있는 개인으로서 나에게도 행동의 순간이 올 것이고 그 순간 피하느냐, 맞서는냐, 거스르느냐, 비껴가는냐의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결국 난 그 유언을 따를 것이다. 난 의리를 중요시 하기 때문이다.

내가 역사를 기록한다면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제시해준 지구적 신화를 염두에 두고 집필에 임할 것이다. 자세히 말하면 사마천이 그당시에는 새로운 세계관이었던 중화중심주의적 위계를 보여주는 세계질서관으로 역사를 기술했던 것처럼, 지금의 새로운 세계관인 '지구중심적 화해의 세계관'으로 역사를 기술하고 싶다는 말이다. 크게는 인류의 기원으로 시작해서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의 문명의 발달과 특징에 대해 서술하고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말했던 세계의 종교와 철학이 탄생했던 인류사의 경이로운 시기를 바라본 후 유럽의 산업혁명 후 자본주의의 발달과 사회주의의 등장, 1,2차 세계대전의 혼란의 모습을 살펴본 후 전세계적 근대화의 모습, 그리고 현대의 신자유주의와 지구화, 세계화의 모습을 돌아보며 인류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주관적인 제시를 하는 책을 쓰고 싶다. 크게는 신화적 세계, 역사적 세계, 문화적 세계, 개인의 삶으로 구성할 것이다.  또한 사마천의 생각을 빌려 <열전>형식의 인물 전기를 구성하되, 내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인류의 나아갈 모습에 대한 큰 이야기를 하고 싶다. 구본형 선생님의 <깊은 인생>의 구성도 참조할 것이다. 일반 사람들을 비슷한 내용으로 인터뷰하고 삶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유형학적 사진 표현을 보여주고 싶다.  모든 이야기들은 평생의 과업으로서 발로 뛰어 현장을 찾아가서 확인하고 직접 보며 써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발로 쓴 역사서'가 내가 추구하는 역사서다.

 

목차

 

프롤로그

 

신화적 세계

우주의 시작

인류의 기원

 

역사적 세계

문명의 발달

각 문명의 특징

종교와 철학의 탄생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등장

혼란의 시대 - 제국주의와 세계대전

자본주의의 승리와 획일적인 근대화

해체의 시대 - 큰 이야기에서 작은 이야기로

지구화와 생태주의

 

문화적 세계

신화적 모습

예술의 발달

현대의 예술 - 경계의 무너짐

삶의 예술가

 

개인의 삶

<열전>형식의 구성

<깊은 인생>의 형식 참조

사진과 짧은 인터뷰를 담은 세계 곳곳의 사람들

 

에필로그

인류의 미래에 대한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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