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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3일 06시 54분 등록

8th Review-사기열전 두번 읽기


저자 사마천에 대하여 


사마천은 역사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생몰연대에 대해 정확히 알려지고 있지 않으나 사후 여러 문헌에 의하여 추측할 뿐이다. 

사마천은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태사공자서'와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 
(報任安書) , 그리고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의 '사마천전'이 주요 자료라고 할 수 있는데 한서는 위 두 글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으니 결국 주요한 자료는 <태사공자서>와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뿐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 사기의 각 편 끝에 '태사공왈(太史公曰)'로 시작되는 논평부분에 자신의 행적이 조금 실려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료의 빈약함으로 인해 사마천의 출생 및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출생시기는 기원전 153년,145년,135년등 여러 설이 있으나
 기원전 145년이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부터 2천140 여년 전이고 前漢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이다.

사마천의 생애를 살펴볼 때, 사실 사마천의 일생 전체가 사기의 저작을 위해 바쳐진 생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기는 곧 사마천의 땀과 눈물과 한이 얼룩져 있는 생애의 농축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의 생애를 사기 저작이란 관점에서 다음의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1) 탄생 후 저작 착수 이전까지의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을 닦기 위한 예비기
(2) 38세에 태사령이 되어 사기저술의 준비작업을 하고 이어 실제로 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에 이릉(李陵) 사건에 연루되어 남근거세형인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 50세 경 출옥한 후 환관의 수장격인 중서령(中書令)이 되어 사기를 완성 시키게 되는 56세까지의 시기 

태어난 곳은 하양(夏陽), 지금의 섬서성 한성현의 교외로, 보통 사마판 (司馬坂)이라 불리는 부근이다.(이 근처에 황하의 나루터로 유명한 용문(龍門)이 있어 등용문의 고사가 생겨난 곳이기도 하다) 이 나루터 가까이에 용문산이 있고 그 아래 구릉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부친을 따라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살았다. 

그의 선조는 대대로 태사(太史:사관)였고 그의 부친 사마담도 학문에 조예가 깊었기에 사마천도 부친에게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가 열 살때 이미 고대문자로 된 경서를 암송할 수 있었고 좌전,국어,세본(世本)과 같은 역사문헌을 읽을 수 있었다. 

선조가 태사였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부친은 마침내 한무제 때 태사령에 임명되었다. 수도 장안에 이주한 사마천은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을 스승으로 하여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배웠고, 당시 금문의 대가인 동중서(董仲舒)로부터 공양춘추(公羊春秋)를 배울 기회를 가졌으며 여러 학자들한테도 배웠다. 

스무 살 되던 해 사마천은 2년간 천하여행에 나섰다. 이 여행은 부친의 강력한 후원하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역사유적을 탐방하여 잊혀진 사람들을 찾고, 사람들을 만나 인정이나 풍속을 이해하는데 여정을 보냈는데 이는 뒷날 사기저술을 위한 치밀한 사전계획의 실행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 자신의 여행기를 간략히 기록해 두었다.

스무 살이 되어 남쪽으로 강(江), 회(淮)를 두루 다녔고, 회계산(淮稽山)에 올라보고 우혈(禹穴)을 탐방하였으며......공자의 유풍(遺風)을 보았다..... 양(梁)과 초(楚)를 지나 돌아왔다.

이 장대한 역정은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회음(淮陰)을 답사하여 [회음후열전]을 지었고, 설현(薛縣)에서 자료를 채집하여 [맹산군열전]을 썼으며,주요인물들의 옛집을 방문하여 많은 일화를 들을 수가 있어 [번역등관열전]을 기록할 수 있었다. 

장안으로 돌아온 지 얼마 뒤 사마천은 낭중(郎仲)에 임명되어 벼슬살이가 시작되었다. 
이 무렵 같은 직위의 동료인 이릉(李陵)을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뒷날 사마천의 운명에 커다란 운명을 미친 인물이다. 

나이 서른 무렵에 사마천은 황제를 수행하여 산천에 제사하고 전국 각지를 유람할 수 있은 기회가 또 한번 주어졌다. 이 여행으로 사마천은 무제가 실시한 대외정책의 실상의 일단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지방에 대한 견문은 뒷날 [화식열전]을 쓸 때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사마천은 부친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의 거의 전 지역을 견문할 수 있었다. 한무제가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거행하던 중 부친이 병을 얻었다. 낙양으로 돌아 온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들었다.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거라. 태사가 되면 내가 저술하고자 했던 것을 잊지 말아라...

사마담은 자신이 태사령으로서 완수하고자 했던 사기의 저술을 자기를 대신해 끝마치도록 아들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무제 원봉 3년인 기원전 108년, 사마천은 아버지의 직을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37세가 되던 해였다. 
사마천은 그 후 역법개정을 맡게 되었고 이 역법개정을 계기로 본격적인 사기저술에 착수하고 작업은 기원전 99년 [이릉의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계속되었다. 사기의 저술은 기원전 104년, 사마천이 그의 나이 42세에 시작되었다.

뜻하지 않은 이릉사건으로 이릉을 변호한 것이 무제의 미움을 사 황제를 무고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마흔 일곱살 이었다. 
당시 사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돈 오십만냥으로 감형받는 것과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되는 것이었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사마천은 부친의 유언을 따르고 다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궁형을 자청하여 환관이 되었다. 부형(腐刑)이라 불리는 궁형은 사람이 당하는 모욕가운데 가장 심한 형벌이었다.

궁형을 받은 후 삼년 째 되던 해에 연호가 바뀌어(太始元年) 대사면령으로 옥중에서 석방된 사마천은 중서령에 임명되었고 사기의 집필을 계속할 수 있었다.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완성하여 후세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치욕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발분하여 사기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가 거의 완성될 무렵인 기원전 91년, 그의 나이 55세에 친구인 임안(任安)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착찹한 심정으로 서한(報任少卿書)을 보내 지난날 자신이 옥에 갇히고 사기를 저술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은 심경을 고백하였는데, 편지 내용중 有怨言, 下獄死라는 대목이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 처형당했는지,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치 않다. 사기 완성후 몇 년더 살다가 딸을 출가시키고 나서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사마천은 字가 子長이다.


(註) 사마천 生年

사마천의 生年에 대해서는 몇 개의 설이 있다. 장수절(張守節)이 지적하고 왕국유(王國維), 정학성, 전목(錢穆)이 따른 기원전 145년 설이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B.C 145년이니 B.C135년이니 하는 설이 왜 나왔을까.

사마천은 자신의 생년에 대해 기록해 놓지 않았다. 그래서 후세 학자들이 기록해 놓은 것을 보고 예측할 수 있다.
사기의 주석본을 쓴 사기색은(史記索隱)의 저자 사마정(司馬貞)은 사마천의 자서「태사공(부친)이 세상을 떠난 지 사후 3년 만에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어...」라는 구절에 주석을 달아 놓았다.

"사마천은 28세"

그런데 사마정은 현재의 텍스트에는 이 말이 보이진 않지만 박물지(博物志)라는 사서를 그대로 인용했다.
「박물지에 무릉(茂陵) 현무리(顯武里) 대부 태사령 사마천은 28살인데 원봉3년 6월 을묘날에 봉급 6백석에 임명되었다.」

같은 당나라 시대 학자인 장수절(張守節)은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태사령에 오른 뒤 5년 뒤가 太初 원년이다.」구절 아래에 적었다. 

"사마천의 나이 42세"

사마천이 태사령에 오른 해가 28살인데 그 오년 후면 32살이 되어야 하는데 장수절이 42살이라 했던 것이다.
10년의 차이가 난 것이다. 누구의 말이 맞는가.

여기 그럴듯한 설이 있다.

당시 숫자를 아라비아가 아닌 한자로 썼기 때문에 사마정이 박물지의 三八(38)을 二八로 잘못 보고 옮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착오 기록한 28세가 기원전 135년이니 제대로 된 38세라면 10년을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145년이 맞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출생지]

사마천의 출생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가인 사마천도 자신의 출생년도를 기록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죽은 지 불과 백 년이 지난 후한시대에 그의 전기를 쓴 반고(班固)도 그의 출생시기를 정확히 모르고 있으니 2천 년이 지금에 와서 그의 생몰연대를 알기는 더욱 어렵다.

현재 사마천이 태어난 시기를 알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문헌은 고증학의 성과로 왕국유(王國維)가 쓴 태사공행년고(太史公行年考)를 근거한다면, 前漢 경제(境帝)의 중원(中元)5년 (B.C.145년)이 된다.

태어난 곳은 하양(夏陽)이다. 自序에 遷生龍門, 耕牧河山之陽이라 쓰여져 있다. 
용문은 연안에서 동남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궁벽한 시골이다.남쪽으로 흐르는 황하의 지류를 경계로 하여 왼쪽은 섬서성, 오른쪽으로는 산서성으로 나뉘는 경계선인 깊은 계곡에 자리잡은 동네이다.

행정구역상 용문은 
섬서성 동주(東州) 한성현(韓城縣) 사마판(司馬坂)이다.섬서성은 중국 중서부에 있는 성으로 성도는 시안(西安)이다. 용문(龍門) 상류에 이르면 물살이 드세어 역류하는데 성공한 물고기는 용으로 변하여 승천한다는 이야기가 삼진기(三秦記)에 전해진다. 등용문(登龍門)이란 고사가 여기서 생겨났다. 
하양은 전에 소량(少梁)이라 불리었다가 이름이 바뀐 곳이다.

이 나루터 근처에 용문산이라 불리우는 산이 있고 황하로 흐르는 북쪽 산 기슭에 넓지 않는 땅이 있는데 사마천의 조상이 이 곳에서 농사지으며 거주했다.
용문산 근처에 삼문협(三門峽)이라는 유명한 계곡이 있는데 우왕의 치수(治水)를 말해주는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사마천의 무덤도 한성현의 교외 지천진(芝川鎭)에 자리잡고 있다. 
사당은 晋代의 永嘉4年(310년)에 건축되었으나 묘지는 둥근 융기의 형태로 元代에 만들어졌다.
사당과 무덤은 4개의 거대한 구릉에서부터 급경사를 이루어 기세가 웅대하고 장관을 이루고 있다.
궁전에 사마천의 소상(塑像)을 모셔두고 제사 지내지고 있다. 건물 외에 역대의 비석 61기도 전시되고 있다. 
사마천 사당과 무덤은 황하에 가까이 자리잡고 있어 높은 곳에서 거대한 황하를 바라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 곳을 다녀온 기행가들에 의하면 무덤도 초라하고 허름하고 낡은 사당에 사마천의 위패와 영정을 모셔놓고 관리인 한 명이 지키고 있다 한다.
소설가 유현종이 항우와 유방의 싸움을 그린 
패왕별희(전5권)는 사마천 후손의 한국인이 사마천의 무덤을 찾아 가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사마천의 조상]

사마천은 自序에 자신의 가계를 열거하고 아버지와 자신의 생애를 간단히 서술했다.
自序는「옛날 전욱은 남정(南正)인 중(重)에게는 하늘에 관한 것을 주관하게 하고, 북정(北正)인 여(黎)에게는 땅에 관한 일을 관장하도록 명하였다...」로 시작하고 있다.

이 기록을 따라 사마천의 가계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중(重, 南正)
  려(黎, 北正) - 정백휴부(程伯休甫, 周) - 사마씨(司馬氏, 晉) →

  - (衛) 사마희(司馬喜, 中山相)

  - (趙) 사마개(司馬凱) → 
괴외 1)(艸+朋+刀 耳+貴) → 앙(仰, 殷王) → 균(鈞, 征西將軍) 
     →양(量, 豫章太宇) →준(俊, 顚州太宇) → 방(防) → 의(懿, 晉 宣帝)

  - (秦) 사마착(司馬錯, 蜀郡 군수) → 근(革+斤,白起의부장) → 창(昌, 진시황때 鐵官) 
     →희(喜,五大夫) → 담(談, 太史令) → 천(遷, 中書令)



사마천은 자신의 가계를 위에서 처럼 자세히 언급한 것은 아니다.

삼황때의 전욱이 북쪽 담당인 여(黎)에게 땅에 관한 관장을 맡기고 이 후손인 휴보(休甫)가 주나라 때 정읍(程邑)에 백작으로 봉해졌다가 선왕(宣王) 때에 관직을 잃고 사마씨(司馬氏)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마천이 바로 그 후예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씨는 대대로 주나라의 역사를 기록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 후 사마씨가 주 혜왕(惠王) 양왕(襄王) 때 (기원전 676~618) 주나라를 떠나 晉나라로 가 여기저기 흩어져 衛나라에, 혹은 趙나라에, 혹은 秦나라에 살기 시작했으며 그 일족 중에 착(錯)이라는 사람이 있어 장의(張儀)와 논쟁을 벌였고, 그 후손인 근(革+斤)은 무안군 백기(白起)장군을 섬겨 저 유명한 
장평전(長平戰)에서 조나라 군사를 구덩이에 넣어 죽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후손 무택과 희(喜) 부자가 한나라 때 시장과 오대부의 지위에 이르렀고 그 아들이 사마천의 아버지 담(談)이라 적고 있다.

그리고 조나라에 가 살았던 또 다른 일족인 앙(仰:좌변 없음)은 항우가 殷의 왕으로 삼았고 그 후손 의(懿)는 晉나라 宣帝가 되었다. 사마천 선조가 모두 뼈대있는 명문가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까지가 사마천이 自序에서 언급한 것이고 그 외에는 班固가 60년에서 80년 사이에 기록한 것 뿐 그 후의 역사가들은 반고의 자료를 고찰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반고도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말한 것이어서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마천도 삼황시대의 전설을 언급하고 있는데 문헌상으로 증명할 길이 없다.

근년에 들어 현존하는 증거들을 조사하여 그로부터 가능한 모든 사실과 추측을 끄어내려는 시도가 학자들에 의해 많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 가장 신뢰할 수 잇는 것은 왕국유(王國維)의 태사공신년사(太史公行年考)와 이에 기초하고 좀 더 길고 상세한 정학성(鄭鶴聲)의 저작 사마천연보(司馬遷年譜)다.
이 두 사람의 연구는 사마천의 연표를 만들고 그 생애와 관련해 약간의 잘못된 견해를 제거한 점에서는 가치가 있지만 애초의 원자료에 새로운 사실을 추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Burton Watson)

아무튼 사마천의 조상은 자서에 따른다면 역사 기록을 담당하던 사관(史官), 군대를 거느리던 무장(武將), 철관과 정치를 관리하던 고위관리 등 직업의 범위와 수준을 엿 볼수 있다.


1) 괴는 초두부(艸)변에 벗붕(朋)과 칼도(刀)를 합쳐 놓아 기름사초(풀이름) 괴라 발음하고(kuai 3성), 외는 귀이(耳)+귀이할 귀(貴)로 외(kui 4성)라 발음하며 귀머거리란 뜻이다.
① 외모(耳+貴 目毛): 귀가 먹고 눈이 잘 보이지 않음
② 외외(耳+貴 耳+貴): 무식하고 어리석은 모양)

이 괴기(怪奇)하고 더럽게 어려운 한자의 이름을 가진 괴외라는 자는 누구인가.
(shane이 이 한자땜시 고생했음)

사마천은 自序에서 조나라에 가서 검술로 이름을 날린 조상이 괴외이며 殷王에 봉해진 사마앙 (司馬仰: 사람인변 없음)이 괴외의 현손이라 적고 있다.

괴외는 위세가(衛世家)에도 나오는데 위선공의 아들 삭(朔:혜공)이 태어난 후로 나라는 기울기 시작하여 남자(南子:위영공의 부인)가 태자 괴외를 미워하여 아들 첩( )과 아버지의 운명이 뒤바뀌게 되었다고 사마천은 서술하고 있다.
「회남자」에도 검술가였던 사마괴외에 관한 언급이 있다. 그 주석가인 후한의 고유(高誘)는 그를 정백 휴보(程伯 休甫)의 자손과 동일시 하고 있다.

위대(魏代)의「한서」주석가 여순(如淳)은 괴외를 자객열전에 나오는 괴이라 보고 있다. 이는 괴이가 개섭(蓋攝: 재방변 없음)과 동일인물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개섭은 조나라의 유명한 검술가였고 형가와 검술을 논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텍스트에는 보이지 않지만 여순(如淳)이 보았던 옛날의 텍스트에는 이름이 동일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마천의 천하유력]


사마천은 생전에 다섯 번에 걸쳐 천하를 답사했는데 사기를 쓰기 위해 처음으로 천하를 유력한 것이 스무 살이었다.

「二十而南游江, 淮, 上會稽, 探禹穴, ?九疑, 浮於沅, 湘;北涉汶, 泗, 講業齊, 魯之都, 觀孔子之遺風, 鄕射鄒, ?;困?, 薛, 彭城, 過梁, 楚以歸.」

自序에 오십 자로 된 이 짦막한 기록의 여행은 사마천이 뒷날 사기를 불후의 명저로 만드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답사지역은 후세 학자들에게 연구거리를 남겨 놓았다.

우선 유럽의 네 배나 된다는 광할한 중국대륙을 교통수단도 불편했던 당시에 어떻게 돌아 다녔으며, 또한 위 기록 순서대로 다녔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그 시대는 교통수단이래야 마차와 말을 이용하고 강을 건널 때는 배를 빌려야 하는데 그 수단도 대중화되지 않아 상상할 수 없는 불편함과 곤란함이 있었을 것이며, 더우기 그냥 놀러가는 게 아니라 아버지 사마담의 계획에 따라 사기를 집필하기 위한 역사 유적지 탐방으로로 상당한 준비와 치밀한 견문계획을 수립했을 터이므로 그 고생은 더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마천이 유력할 때 부친의 직책은 태사령으로 많지 않은 녹봉으로 장기간 여정의 자금을 만들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준비와 여행과정은 역사기록을 남기겠다는 부친 사마담의 뜨거운 직업의식이 강력하게 작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위 기록의 순서대로 따르면「남쪽으로 강(江)·회(淮)를 두루 돌아다녔고, 회계산에 오르고 우혈을 탐방하였으며, 구의산을 살피고 원(沅)·상(湘)에 배를 띄워 유람하였다. 북쪽으로는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나라와 노나라의 수도에서 학업을 닦았으며, 공자의 유풍을 살피고, 추(鄒)와 역(鄒)에서 향사(활쏘기)를 하였다. 파(?) 설(薛) 팽성(彭城)에서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양나라와 초나라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고 사마천이 순력한 여정의 순서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지만 실제 지도와 당시의 교통로를 볼 때 위 순서대로 여행한다면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몇 번이나 건넜다 되돌아왔다 하면서 유적지를 방문해야 하는데 사전에 치밀한 계획하에 목적지가 분명한 사마천이 소중한 2년간의 여정을 그렇게 허술하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마천이 남쪽과 북쪽의 對句적인 표현으로서 남쪽은 양자강과 회수 유역에 노닐었고, 북쪽은 문수와 사수를 건너 이러저러한 유적지를 탐방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 양나라와 초나라를 들렀다는 것을 크게 나누어 서술한 것이다.

우선 장안에서 나와 양자강으로 유역으로 나오려면 지금의 섬서성 상현 동쪽에 있는 무관(武關)의 관소(關所)를 거쳐 완(宛), 즉 현재의 하남성 남양현으로 나와 양자강으로 가는 게 일반적인 노선이었다.
호북성 강릉현인 남군(南郡)부근에서 양자강을 건너 동정호(洞庭湖) 순방을 마치고 나서 다시 상수를 거슬러 올라 장사(長沙)와 가까운 나현(羅縣)에서 멱라를 방문하여 초나라 애국 시인 굴원의 자취를 탐문하였다.
사마천은「굴원가생열전」에서 궐원의 이소,천문,애영 등을 읽으니 그 내용이 슬펐고 장사에 가서 굴원이 빠져 죽은 연못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그를 기렸다고 술회하고 있다.

멱라를 떠나 다시 상수(湘水)로 거슬러 간 사마천은 지금의 호남성 영원현의 경계로 순 임금이 묻힌 구의산을 답사하였다. 상강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원수(沅水)에 배를 띄우고 다시 양자강으로 나와 대강(大江)을 거쳐 여산에 올라가 우 임금이 수로를 연 곳의 경치를 즐기고 하산하여 양자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절강성 소흥 동남쪽에 있는 회계산을 등정하기게 이르렀다.
史記索隱에 의하면 회계라는 지명은 원래 맹주들이 회합하여 맹약을 할 때 공적을 계상하였다하여 회계(會計)라 칭하였다가 훗날 회계(稽計)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禹會諸侯計功, 改曰會稽)
거기서 사마천은 우 임금의 전설을 듣고 오월쟁투로 유명한 회계의 고사를 되새기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오현의 고소산에 올라 오호(五湖)를 내려다보고 전국시대 사공자인 초나라 춘신군의 옛 성을 답사하였다.
장강과 회수 등 강남을 두루 살핀 사마천은 양자강을 북으로 건너 지금의 강소성 회음현 동암인 회음에 들어가 한신의 고향을 답사하고 회음후열전에 기록한대로 한신 모친의 묘지도 참관하였다. 사마천은 이 빠짐없이 보고 들은 모든 내용을 사기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사마천은 북쪽으로 회수를 건너 사수(泗水)를 따라 북상하여 산동성 곡부현에 있는 노나라 도성에 도착하여 공자묘 등 공자와 관련된 유적을 답사한 후 이어 산동성 치박시 임치구에 있는 제나라 도성을 답사하게 된다.
다시 남향하여 추현에 머무르면서 진시황이 올랐다는 봉산에 오른 후 계속 남향하여 맹산군의 봉지인 설성(薛城)을 답사하고 초패왕 항우의 도성이던 팽성에서 천하를 놓고 쟁패를 벌였던 초한의 투쟁현장을 답사하였다.
사마천은 파(?)·설(薛)·팽성(彭城)에서 곤란을 겪었다고 말했는데 파현과 설현은 둘 다 현재의 산동성 등현에 해당하는 곳이고 팽성은 지금의 강소성 서주(徐州)일대를 말한다.
설현은 맹상군이 수많은 식객을 거느리고 세력을 키웠던 지역이고 식객 중 많은 협객이나 무뢰배 등의 후손들이 뿌리를 내린 곳이라 거칠고 투박해 사마천이 아마 그 곳을 지나치다 어떤 봉변이나 어려움을 겪지 않았나 하는 그 곳 풍토와 관련지어 말하는 학자도 있다. 실제 林田愼之助 교수가 그 곳을 방문했을 때 추 땅이나 노나라 지역 과는 달리 마을에 난폭하고 무뢰한 자제들이 많았다 한다.

팽성에서 서북으로 향하면 유방과 같은 고향이고 같은 날 태어난 노관의 고향 풍현(豊縣)과 패현(沛縣)이 있다. 한나라 재상 소하와 조삼이 모두 이 부근 하급 관리출신이다. 장수 번쾌도 이 곳 패현 사람으로 저자에서 개고기를 팔았다.
공신 관영도 이 곳에서 비단파는 행상이었다. 유방과 같은 패현 출신으로 비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한나라 창업을 도와 입신출세한 수 많은 사람 중 주요인물들의 옛집을 사마천은 방문하였던 것이다. 이 곳에서 채록한 일화들을 사마천은「번역등관열전」에 생생히 옮겨 놓았다.

豊·沛를 떠난 사마천은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인 저양(雎陽)을 거쳐 위나라 도성이던 대량, 즉 현재의 개봉(開封)을 마지막 여정으로 북상하여 황하를 따라 낙양을 지나 장안에 돌아와 이년 여간의 긴 여행을 마쳤다.
사마천의 천하 유력은 지금의 섬서 하남 절강 산동 호북 호남 등 당시 한나라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의 대부분을 방문하였다.여기서 얻은 체험과 교훈으로 생생하고 훌륭한 사기를 훗날 완성할 수 있었다.

두번 째 답사는 35세인 기원전 111년, 무제의 명을 받아 파촉(巴蜀)이남, 즉 서남 지잠의 문물을 과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 경험은 화식열전의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는데 그 시찰 경로를 보면, 장안 →한중(漢中, 섬서성 남쪽) →파군(巴郡, 사천성 중경시) →건위군(사천성 선빈현) →장가군(귀주성 황평현) →촉군(蜀郡, 사천성 성도시) →영관도(零關道, 사천성 노산현) →손수(孫水, 安寧河) →월수군(사천성 서창현) →심려군(사천성 한원현) →귀경

세번 째 답사는 36세인 원봉 원년, 봉선 대제를 위해 한무제를 수행하여 제노지방으로 가던 중 아버지 사마담 위독하다는 전갈을 듣고 무단으로 낙양으로 돌아와 상을 치루고 다시 산동으로 가 봉선에 참관하였다. 낙양 →산동 →봉래산 →태산(봉선 대제) →갈석산(하북성 경계) →요서군(하북성 노룡현) →구원군(九原郡, 내몽고) →감천



사마천에 대한 외국소개

(1) HarperCollins 대학의 Mark A. Kishlansky 교수는 Sources of World History에서 사마천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Ssuma Ch'ien (ca. 145-85 BCE) was an official at the Han court during its greatest era. His father had served in the office of Grand Historian and Ssu-ma Ch'ien succeeded to it after his father's death in 110 BCE. The Grand Historian was responsible both for establishing and maintaining the royal calendar (the method of numbering the years of the dynasty) and for composing a record of the principal events of the reign. Thus Ssuma Ch'ien had trained as an astronomer as well as a historian and he was responsible for an important reorganization of the Chinese calendar. 

His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went far beyond the conventional listing of court appointments and events in the life of the imperial family. Ssuma Ch'ien believed that with the accession of the Emperor Wu Ti, the Han dynasty had reached its apex and he decided to write a history of of the dynasty as a whole. He divided his work into a chronology, a description of Han government, and a long biographical section in which the lives and deeds of great men were recorded. Ssu-ma Ch'ien believed that history was a didactic suhject, that it should teach lessons and reveal the values of the society being remembered. This method is clearly seen in his biographical sketches, like those of Pu Shih and Chi An, which follow. 

(2) 미국 콜롬비아대학의 백과사전

145?-90? b.c., Chinese historian; sometimes called the Father of Chinese History. 
He succeeded his father, Ssu-ma T'an, as grand historian (an office then dealing with astronomy and the calendar) at the court of the Early Han emperor Wu. There he took up a project on history planned by his father and extended it into a history of China and of all regions and peoples known at that time. 
Incurring the emperor's displeasure, he suffered the punishment of castration. Rejecting the alternative of suicide, he chose to complete this work, the Shih chi [records of the historian]. In 130 chapters, including basic annals of dynasties or rulers, chronological tables, treatises, hereditary houses, and accounts of famous men and foreign lands and peoples, it has served as a model for subsequent Chinese dynastic histories. 
Its wide range, many-faceted characterizations, and vivid dialogue have won it the admiration of Asian readers for over 2,000 years. 
See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of China, tr. by Burton Watson (2 vol., 1961, repr. 1969); study by Burton Watson (1958).

버튼 윗슨은 이 대학에서 사마천의 사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번역한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두 권으로 첫 권(Early Years of the Han Dynasty 209-141)은 한무제 이전인 BC 209~141년까지, 두째 권은 한무제시대인 BC 140~100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버튼 윗슨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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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기연구가 윗슨은 컬럼비아대학에서 사기 유협열전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Ssu-ma Ch'ien:Grand Historian of China」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박사학위 논문은 일본과 한국에서도 번역출간되어 있다.
일본어판의 역자인 이마다카(今鷹眞)가 역자후기에서 이 책을 '현재까지 동 서를 통해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샤반이 문헌사학에 치중해 있음에 반하여, 윗슨은 사기가 역사의 대작일 뿐 아니라 문학의 대가이기도 하다는 관점(박혜숙)을 취하고 있다.
일본어판(서명:사마천,筑摩書房)은 현재 절판된 상태이며 한국어판(서명: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박혜숙 역)은 현재 출간되고 있다.

일본어판 목차

제1장 司馬遷의 世界
제2장 司馬遷의 傳記
제3장 中國歷史 著述의 開始
제4장 史記의 體裁
제5장 司馬遷의 思想
附論: 司馬遷의 任少卿에게 답하는 편지의 制作年代

한국어판 목차

제1장 사마천의 세계
제2장 사마천의 전기
제3장 중국역사 서술의 시작
제4장 사기의 형식
제5장 사마천의 사상
보론: 사마천의 「임소경에게 답하는 편지」의 작성연대

[윗슨 프로필]

Born in 1925 in New York, Burton Watson was educated at Columbia University, and received his doctorate in 1956. He also studied at Kyoto University as a Ford Foundation Overseas Fellow, and taught Chinese and Japanese language and literature at Kyoto, Columbia and Stanford. In 1979 he received the Gold Medal Award of the Translation Center at Columbia University. In 1981 he received the PEN Translation Prize. He now lives in Japan.

Burton Watson is a founding member of the Renditions Advisory Board, and served as Renditions Fellow in 1989-90. He has published over twenty volumes of translations from and studies of Chinese and Japanese literature. His translations of Hou Han Shu; Shi ji and the poems of Li Bai, Bai Juyi and Lu You are published in Renditions No.1, Nos. 21 & 22, Nos. 33 & 34, and No. 49. His translations of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are published in the Renditions Book series. 

Burton Watson is among the best loved of American translators working from Asian languages. The natural ease and quiet elegance of Watson’s use of language is particularly suited to the work of such poets as Wang Wei, Bai Juyi and Lu You. The exhibits here are taken from Watson’s translations of Bai Juyi, one of his faviourite poets. 

1925년에 뉴욕에서 출생하여 콜롬비아 대학에서 공부했으며,1956년도에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드재단의 기금 지원으로 일본 교토대학에서 연구하였고 교토,콜롬비아 및 스탠포드대학에서 중국문학과 일본문학을 가르쳤다. 1979년도에 콜롬비아 번역센터 금장상을 수상하였으며 1981년도에 PEN 번역상을 받았다. 현재 그는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

윗슨은 번역고문단 창설자의 하나로 1989-90년까지 번역연구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중국과 일본문학에 관한 20여권의 번역서를 출간했고, 번역총서 제1집, 21집, 22집, 33집, 34집 및 49집에 후한서(後漢書), 시경(詩經),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및 육유(陸遊)의 시를 번역했다. 그의 번역서는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윗슨은 미국내의 아시아어 번역가중 가장 사랑받는 인물의 하나가 되었다. 그의 문장은 평이하고 우아했으며 특히 왕유(王維), 백거이, 육유의 시를 가장 잘 번역하였다. 1990년 3월 국립대만대학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백거이의 번역稿本전람회가 열렸다.

주요 작품 (Major Publications): 

Po Chu-i: Selected Poem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0. 
Masaoka Shiki: Selected Poem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7. 
The Vimalakirti Sutr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7. 
Letters of Nichir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6. 
Selected Poems of Su Tung-Po. Port Townsend, Wash.: Copper Canyon Press, 1994. 
The Lotus Sutr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 
The Tso Chuan: Selections from China’s Oldest Narrative Histor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9. 
Ssu-ma Ch’ien: the Historian & His Work. Ann Arbor, Mich.: University Microfilms International, 1985. 
The Columbia Book of Chinese Poetry: from the Early Times to the 13th Centur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4. 
From the Country of Eight Islands: an Anthology of Japanese Poetry. Garden City, New York: Anchor Books, 1981. 
Japanese Literature in Chines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5-1976. Courtier & Commoner in Ancient Chin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4. 
The Old Man Who Does As He Pleases: Selected Poetry and Prose of Lu Yu.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3. 
Chinese Lyricism: Shih Poems from the 2nd to the 12th Centur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1. 
Chinese Rhyme Prose: fu of Han & the Six Dynasties Period.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1. 
The Complete Works of Chuang Tzu.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8. 
An Introduction to Sung Poetry.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67. 
Basic Writings of Mo Tzu Hsun Tzu and Han Fei Tz.,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7. 
Su Tung-p’o: Selection from a Sung Dynasty Poet.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5. 
Cold Mountain 100 Poems. New York: Grove, 1962; Cape: London, 1970. 
Early Chinese Literatur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2.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of Chin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1.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Han Dynasty I & II; Qin dynasty. Hong Kong; New York: Renditions-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 


(註) Burton Watson의 한글표기

Burton Watson을 국내에 소개한 「Ssu-ma Ch'ien: Grand Historian of China」의 번역자 박혜숙 교수는 '버튼 윗슨'으로 표기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華玆生(화쯔셩)으로 표기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http://ko.wikipedia.org/wiki/사마천


사마천에 대한 다양한 세계관 연구글

http://giant.x-y.net/cgi-bin/tt/board/ttboard.cgi?db=new_article


한겨레 컬럼 - 오귀환의 디지털 열전

http://www.hani.co.kr/section-021105000/home01.html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컬럼이 상당히 흥미롭다)


중국어로된 사마천 소개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j-BlQFySRVc&feature=related



마음을 무찔러든 글귀


1. 백이 열전

60.공자는 '인이란 사람다움이다''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단 하루라도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보면 '인인'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키는 내념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인'의 실천 방법으로 '효','제','충','서','예','악'을 제시했다. 

-->늘 사람답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궁리했었다.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사람다움에 대해서 계속해서 나의 삶을 통해 실천을 통해 보이고 싶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인'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고등학교때에 그냥 외웠던 '인'이 아닌 진정으로 내 안에서 체화되고 스스로 드러나는 사람다움에 대한 나를 넘어서고 극복된 그 무엇을 따라가고자 한다. 얼마나 그것이 힘들었으면 단 하루라도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 할 것인다. 너무나 개인 주의에 물들어 있는 지금의 세상 모습 속에서 어진이를 찾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이유겠지. 개인주의 가족주의 이기주의를 넘어선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아직 이 세상이 무너지지 않고 사람냄새나는 세계로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63.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누군가 증오는 용서만이 잠재울 수 있다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폭력은 계속해서 폭력을 부를 뿐 결코 해결이 나지 않는다. 멈춤이 그래서 중요하다. 그것이 왜 내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지만 용서만큼 강한 복수는 없는 것 같다. 일단 멈추어보자 폭력이 폭력을 부르면 결국 파멸 뿐이다. 시대가 이렇게 몇 천년을 거슬러 흘렀건만 인간 세태가 그다지 다름은 사람의 본성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들이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런지 형태의 변화는 있되 그 근본은 그대로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수행이 계속해서 필요한 것이다. 

64.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65.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한다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사마천도 나와 매우 비슷한 생각을 했었나보다. 나는 불교에 심취해서 이러한 인과응보가 전생과 또한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시원하지 않은 구석이 있어서 늘 하늘에 묻곤 했다.. 왜 선량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이 생에서 그러한 행복을 누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분명 그 뜻이 있겠지. 

66. 추운 계절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세상이 다 흐려졌을 때 비로소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 드러난다. 

66. 탐욕스러운 자는 재물 때문에 목숨을 잃고, 열사는 이름을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치며,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권세 때문에 죽고, 서민은 그날그날의 삶에 매달린다.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 비추어주고, 같은 종류의 물건은 서로 어울린다. 구름은 용을 따라 생기고 바람은 범을 따라 일어난다. 이처럼 성인이 나타나야 세상 만물도 다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66. 백이와 숙제는 비록 어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공자의 칭찬이 있고 나서부터 그 명성이 더욱더 드러나게 되었다. 안연은 학문을 매우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공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행동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난 이러한 것을 멘토의 중요성이라고 본다. 그래서 뛰어난 사람들은 스승을 찾아서 다니나 보다. 나 역시도 그 끝에 사부님을 만나게 되었지만 진심으로 혼자서 가능한 일도 있지만 그 이끌어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역사도 증명을 해보이고 있다. 늘 겸손해질 일이다. 


2. 관.안 열전

69. 사마천은 사람을 알아보는 포숙의 능력을 부각시키고 있다. 

-->스스로 재능이 뛰어난 것을 찾아내 그것을 발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는 눈도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이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에도 아주 중요해지고 있다. 기획자의 마인드에서 그런 부분은 너무나 중요하고 재능이 싹트게 도와주는 역할로봤을때에도 큰 재능임을 알 수 있다. 

70. 안영은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고 하며 삼십 년 동안 옷 한벌로 생활할 만큼 검소했다. 그러면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은 명재상이다. 

71.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72.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 이런 사람을 곁에 둔 이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러한 사람이 된다면 또한 얼마나 행복할까 그 인연과 혜안에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만남을 꿈꾼다. 

72.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송하기보다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포숙을 더 찬미하였다. 

-->진정한 리더는 모든일을 자신이 하지 않고 적재 적소에 그에 맞는 사람들을 앉힌다고 한다. 각 사람들의 능력을 알아보고 일이 되도록 이끄는 역할이 바로 리더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인재를 알아보고 적절하게 그 사람을 보필하는 것이 리더의 또 하나의 덕목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73.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73. 창고에 물자가 풍부해야 예절을 알며,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임금이 법도를 실천하면 육친이 굳게 결속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네 가지 강령 즉 예의, 정의, 깨끗함, 부끄러움이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는 멸망한다. 수원에서 물이 흘러가듯이 명령을 내리면 그 명령은 민심에 순응하게 된다. 

73. 관중은 정치를 하면서 재앙이 될 수 있는 일도 복이 되게 하고, 실패할 일도 돌이켜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해를 분명하게 따지고 득실을 재는 데 신중히 하였다. 

74. 주는 것이 곧 얻는 것임을 아는 게 정치의 비책이다. 

74.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뜻을 드러낸다 

75. 안영은 조정에 나아가서는 임금이 물으면 바르고 신중하게 대답하고, 묻지 않을 때에는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였다. 임금이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면 그 명령을 따르지만 올바르지 않을 경우에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분별심이다. 제대로 된 분별심은 이렇게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등불이 되어준다. 

75. 제가 듣건대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자에게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자에게는 자신의 뜻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제가 죄인의 몸일 때 옥리들은 저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깨달은 바가 있어서 보석금을 내어 저를 구해 주었으니 이는 저를 알아준 것입니다. 저를 알아주면서도 예의가 없다면 진실로 죄인의 몸으로 있는 편이 낫습니다. 

76. 품은 뜻이 깊고 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태도가 있었습니다. 

-->하심의 태도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77. 잘한 점은 좇아 더 잘하게 하고 그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 주어야만 군주와 신하가 서로 친해질 수 있다. 

77.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보충할 것을 생각한다. 오늘날 안자가 살아 있다며 ㄴ나는 그를 위해 채찍을 드는 마부가 되어도 좋을 만큼 흠모한다


3. 노자.한비 열전

81.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둔다 

81. 공자가 주나라에 가 머무를 때 노자에게 '예'를 묻자 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말하려는 그 성현들은 이미 뼈가 다 썩어 없어지고 오직 그 말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또 군자는 때를 만나면 관리가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다북쑥처럼 떠돌이 신세가 되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나는 들었소. 그대는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시오. 이러한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소.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다만 이것뿐이오. 

81. 새는 잘 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나는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를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 같은 존재였다. 

81. 노자는 도와 덕을 닦고 스스로 학문을 숨겨 헛된 이름을 없애는데 힘썼다. 

83.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의 학문을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말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노자는 하지 않는 것으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했다. 

84.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86. 대체로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라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내 주장을 그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는 데 있다. 

87. 대체로 일이란 은밀히 함으로써 이루어지고 말이 새어 나가면 실패한다. 

88.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버릴 줄 아는 것이다. 

89. 유세자가 국가에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명백히 따져 군주가 공적을 이룰 수 있게 하며, 옳고 그름을 솔직하게 지적해도 영화를 얻게 된다. 이러한 관계가 이어지면 유세는 성공한 것이다. 

-->요즘처럼 일단 사람의 신임을 얻고나서 그 말이 받아들여진다는 점이 참 재미있다. 

91. 용이라는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 자 길이의 비늘이 있어 이것을 건드린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으면 거의 성공적인 유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2. 나는 다만 한비가 '세난'편을 짓고도 스스로는 재앙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슬플 뿐이다.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는 이토록 어두운 것인가. 나 또한 이러한 한비의 결말이 조금 안타깝다. 그래서 아는 것과 실제는 많이 다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보다. 실제로 아는 것을 체화하고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것이야 말로 사람이 어쩔 수 없는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겠다. 

92. 노자가 귀하게 생각하는 도는 허무이고, 무위 속에서 변화에 호응하는 것이다. 장자는 노자가 말한 도덕의 의미를 미루어 풀어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쳤는데, 그 요지 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신불해는 스스로 힘써 명분과 실질에 적용시켰고, 한비는 먹줄을 친 것처럼 법규를 만들어 세상의 모든 일을 결단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였지만 너무나 가혹하여 은혜로움이 부족했다. 이들의 학설은 모두 도덕에 그 근원을 두고 있지만 그 가운데 노자의 학설이 가장 깊다. 

94. '예'는 '인'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으로, 공자에게 이상적인 지배 질서이며 한 나라의 근본 원리였다. 


4. 사마양저열전

99. 약속은 생명과도 같다 

100. 어째서 약속 시간보다 늦었습니까? 장고는 사과하며 말했다. 대부들과 친지들이 송별연을 열어 주어 지체되었소 양저는 말했다. 장수란 명령을 받은 그날부터 집을 잊고, 군영에 이르러 군령이 확정되면 친척들을 잊으며, 북을 치며 급히 나악가 공격할 때에는 자신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지금 적국이 깊숙이 쳐들어와 나라가 들끓고 병사들은 국경에서 뜨거운 햇살과 비바람을 맞고 있습니다. 왕께서는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음식을 드셔도 단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백성의 목숨이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거늘 송별회라는 말이 뭡니까


5. 손자.오기 열전

107. 군령을 따르지 않는 병사에게는 죽음뿐이다. 

109. 저는 이미 왕명을 받아 장수가 되었습니다. 장수가 군에 있을 때에는 왕명이라도 받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110. 급소를 치고 빈틈을 노려라

111. 어지럽게 엉킨 실을 풀려고 할 때는 주먹으로 쳐서는 안 되며, 싸우는 사람을 말리려고 할 때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주먹만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급소를 치고 빈틈을 찔러 형세를 불리하게 만들면 저절로 물러날 것입니다. 

112.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그 형세를 잘 이용하여 유리하게 이끌어 나갑니다. 병법에 '승리를 쫓아 백리 밖까지 급히 달려가는 군대는 상장군을 잃게 되고, 승리를 좇아 오십 리 밖까지 급히 달려가는 군대는 경우 절반만 목적지에 이른다라고 하였습니다. 

115. 오기는 탐욕스럽고 여색을 밝히지만 병사를 다루는 일만은 사마양저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래서 덕이 없고 실력이 있는 경우가 가장 무서운 경우라 생각이 된다. 사람이 되지 않은 자에게 그 무기를 맡겼을때에 일어날 비참한 일들을 그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115. 나라의 보배는 험난한 지형이 아니라 임금의 덕행이다 

117. 만일 임금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적이 될 것입니다. 

120. 오기가 내세우는 정치의 핵심은 병력을 강화시켜 합종이나 연횡을 주장하는 유세객들을 물리치는 데에 있었다. 

121. 옛말에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꼭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실천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6. 오자서 열전

125. 소인배의 참언을 믿고 친자식을 내친다

127. 오상은 사람됨이 어질어 내가 부르면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오운은 사람됨이 고집스럽고 굴욕을 견딜 수 있어 큰일을 해낼 것입니다. 그는 이곳으로 오면 아버지와 자식이 함께 사로잡힐 줄 알고 틀림없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133. 초나라 평왕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그 아들을 죽인다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사고의 제한점. 

135. 당신의 복수는 너무 지나친 것 같소. 나는 '사람이 많으면 한때 하늘도 이길 수 있지만, 일단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사람을 깨뜨릴 수도 있다'라고 들었소. 일찍이 평왕의 신하가 되어 평왕을 섬겼던 그대가 지금 그 시신을 욕보이니, 어찌 이보다 더 천리에 어긋난 일이 있겠소?

137. 월나라 왕은 아무리 힘든 고통도 잘 견뎌 내는 사람입니다. 지금 그를 없애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때로는 살아 남는 자가 강한자라는 것을 느낄 때도 있다. 

138. 옳고 그른 것을 거스르고 공손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볍게는 코를 베고 무겁게는 목을 베어 이 땅에 악의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 것이 상나라가 흥성하게 된 까닭입니다. 

141. 성공하면 충신이고 실패하면 역적이다

141. 승은 용맹스러운 것을 즐겨 하는데, 죽음을 각호한 사람들을 은밀히 찾고 있으니 아마 음모를 꾸미고 있는 듯합니다. 

143. 일이 성공하였다면 경이 되었겠지만 실패하였으니 삶아 죽어야 할지니 떳떳하게 누려야 할 직분이지만 

143. 원한이 사람에게 끼치는 해독은 정녕 심하구나! 임금이라도 신하에게 원한을 사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야 어떠하겠는가 옛날에 오자서가 아버지오사를 따라 함께 죽었다면 하찮은 땅강아지와 무엇이 달랐겠는가! 그는 작은 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씻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겼으니 그 뜻이 참으로 슬프구나! 오자서는 장강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위급한 상황에 놓이고, 또 길에서 빌어먹을 때도 마음 속에 어찌 초나라의 수도 영을 잠깐인들 잊었겠는가 그는 모든 고초를 견뎌 내어 공명을 이룰 수 있었다. 강인한 대장부가 아니면 어느 누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백공도 만일 스스로 왕이 되려고만 하지 않았던들 그 공적 또한 이루 말하지 못했으리라


7. 중니제자열전

148. 안연이 인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고 바른 예로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148. 어질구나 회여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로 누추한 뒷골목에 살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견뎌 내지 못할 텐데, 안회는 자기가 즐겨 하는 바를 바꾸지 않는구나  안회는 배울 때 듣고만 있어 어리석은 것 같지만 물러가 행동하는 것을 보면 내가 가르친 것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안회는 절대로 어리석지 않구나 벼슬에 나가게 되면 도를 실행하고 물러나면 조용히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너뿐이구나 

149. 안회라는 자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거듭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없습니다. 

150. 하늘의 운명이구나 이사람이 이런 몹쓸 병에 걸리다니, 운명이구나 

150. 문밖을 나서서는 귀중한 손님을 대접하듯이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듯이 신중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제후의 나라에서도 원항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대신들의 집에서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을것이다. 

151. 얼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곧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제물로 쓰지 않으려고 하여도 어찌 산천의 신들이 그냥 내버려 두겠는가 

151. 사람의 성격에 따라 조언도 달라야 한다 

152.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욤감하므로 제지한 것이다. 

152. 좋은 말을 듣고 실행하지 못했는데 또 좋은 말을 들을까 두렵다 

153.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하고 게으르지 않으면 된다. 

153. 군자는 의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군자가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고, 소인이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도적이 된다. 자로는 좋은 말을 한 가지 듣고 아직 실행하지 않았는데 또다시 좋은 말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153. 자로는 나보다도 용맹을 더 좋아하지만 그것을 적절히 쓰지 못한다. 이 때문에 자로는 제명에 살다가 죽기 어려울 것이다. 

153. 자로의 학문은 지고한 경지에 올랐지만 아직 오묘한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154. 포 지방은 힘센 자가 많아 다스리기 어려우 ㄴ곳이다. 그래서 내 너에게 당부의 말을 하니 명심하거라. 몸가짐을 겸손하게 하면 그 지방의 힘센 자들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고, 너그럽고 올바르면 그곳 백성을 따르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공손하고 바르게 정치를 하여 그곳을 안정시키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156. 군자는 죽더라도 관을 벗지 않는다. 

156. 내가 자로를 제자로 삼은 뒤로 남의 험담을 듣지 않았거늘

160.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169.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 

169. 전에 저는 선생님께 군자가 도를 배우면 남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사람을 부리기 쉽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170. 그림 그리는 일은 먼저 흰 바탕이 있은 뒤에 색을 칠해서 다듬는다는 뜻이다. 

171.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171. 많이 듣고 그 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한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 

172. 말이 참되고 믿음이 있으며 행동이 착실하고 조심스럽다면 오랑캐 땅에서도 해세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참되지 못하고 믿음이 없으며 행동이 착실하지 못하고 조심스럽지 않다면 비록 자기 고향일지라도 행세할 수 없을 것이다. 서 있을 때에는 그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고 수레에 탓을 때에는 그것이 수레의 가로 막대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한 뒤에야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173. 나라에서도 이름이 알려지고 집에서도 반드시 이름이 알려지는 것은 명망이지 통달이 아니다. 대체로 통달한 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잘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통달하게 된다. 그러나 명망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어진 척하지만 실제 행동은 완전히 어긋나면서도 그러한 것에 물들어 조금도 의심 없이 행동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이름을 얻게 된다. 

174. 나는 말 잘하는 것으로 사람을 골랐다가 재여에게 실수하였고, 생김새만을 보고 사람을 가리다가 자우에게 실수하였다. 

175. 안타깝다. 부제가 다스리는 곳이너무 작구나 다스리는 곳이 컸더라면 이상적인 정치를 펼칠 수 있었을 텐데 

--> 노는 물이 중요한 것 같다. 자신의 재능만큼의 기회를 만날 수 있는 것 또한 세상의 행운이고 그 사람의 기회이다. 

175. 배우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다

176. 나라에 도가 제대로 시행되는데도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다만 녹이나 먹고 있고 나라에 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데도 벼슬자리에 연연하여 녹이나 먹고 있는 것이 바로 부끄러움이라는 것이다. 

176.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하고 자기가 이룬 공을 자랑하며 남을 원망하면서 탐욕스러운 짓을 하지 않는다며 어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러여운 일이겠지만 그것이 어진 일인지는 모르겠다. 

178. 흰 옥의 티는 갈 수 있지만, 말의 티는 어찌할 수 없다. 

181. 나는 말만 잘하는 자를 미워한다. 

182. 도가 행해지는 것도 천명이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도 천명이다. 자주 같은 인물이 그 천명을 어찌할 수 있겠느냐? 내버려 두어라. 

182. 어진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183. 군자는 걱정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183. 마음속 깊이 살펴보아 부끄러울 것이 없다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183. 예와 의를 좋아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185. 약속이 도리에 가깝다면 그 말을 실행할 수 있고, 공손함이 예에 가깝다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 의지할 때에도 친할 만한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또한 그를 존경할 수 있다. 

187.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187.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숨기는 것이 예이다. 

-->진실로 자신의 허물을 말해줄 이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8. 상군 열전

198. 어진 군주는 자기가 자리에 있을 때 세상에 이름을 나타내오. 

199. 옛것을 따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199. 의심스러워하면서 행동하면 공명이 따르지 않고, 의심스러워하면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자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남들이 모르는 지혜를 가진 자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오만하다는 비판을 듣게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미 이루어진 일도 모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일이 시작되기 전에 압니다. 백성은 일을 시작할 때에는 더불어 상의할 수 없으나 일이 성공하면 함게 즐길 수 있습니다. 가장 높은 덕을 강구하는 자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큰 공을 이루는 자는 뭇사람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으면 구태여 옛것을 본뜨지 않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면 옛날의 예악 제도를 좇지 않았습니다. 

200. 평범한 사람들은 옛 풍속에 안주하고 학자들은 자기가 배운 것에만 몰두합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지키게 할 수는 있지만 법 이외의 문제를 더불어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하,은,주 삼대는 예악 제도가 서로 다르지만 천하에서 왕노릇하였고 오백은 종법 제도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예법의 통제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법을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법에 얽매입니다. 

200. 백 배의 이로움이 없으면 법을 고쳐서는 안 되며 열 배의 효과가 없으면 그릇을 바꿔서는 안 됩니다. 옛것을 본받으면 허물이 없고 예법을 따르면 사악함이 없습니다. 

200.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나라에 편하면 예날 법을 본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203.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것은 위에서부터 이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206. 사람의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 

206. 공자는 어진이를 추천하여 받드는 자는 번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불러 모아 왕 노릇을 하는 자는 몰락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206. 자격이 없는 자가 그 지위에 있는 것을 지위를 탐한다고 하고, 자기가 누릴 명성이 아닌데 그 명성을 누리는 것을 이름을 탐한다고 한다

207. 스스로 자신을 낮추면 더욱더 높아진다

208. 겉치레 말은 허황되고, 마음속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되며, 듣기 괴로운 말은 약이 되고, 달콤한 말은 독이 된다. 

209. 공로와 명예는 역사책을 모아 놓은 창고 안에 보존되고 덕행은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210. 시경에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는 흥하고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라고 했습니다. 

210. 시경에 서는 '덕을 믿는 자는 일어나고 힘을 믿는 자는 멸망한다라고 하였습니다. 

212. 상군은 타고난 성품이 잔인하고 덕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효공에게 벼슬을 얻고자 제왕의 도로 유세한 것을 보면 내용이 없고 화려한 말을 늘어놓은 것이지 마음속으로 하려던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군주의 총애를 받고 있던 태감을 이용하고, 자리에 오른 뒤에는 공자 건을 처형하고 위나라 장군 앙을 속이고 조량의 충언을 따르지 않은 것도 그가 덕이 부족한 인물임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9. 소진열전

217. 새도 깃털이 자라지 않으면 높이 날 수 없다

217. 당신은 본업을 버리고 입과 혀끝만을 놀리고 있으니 가난하고 궁핍한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 잠시 회사를 대책없이 관두려고 한 내 마음에 무찔러든 글귀 .. 대책을 세우고 나와야지 안되겠다 

218. 새도 깃털이 자라지 않으면 높이 날 수 없소. 우리 나라는 다스리는 이치가 밝혀지지 않았으니 천하를 통일할 수 없소

218. 천 리 밖의 근심을 버리고 백 리 안의 근심부터 해결하라. 

220. 어찌 어두운 곳에서 큰 일을 결정하랴

221. 신이 생각하기에 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에 별다른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일을 만들어 백성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됩니다. 백성을 편안히 하는 근본적인 계책은 친하게 사귈 만한 나라를 고르는 데 있습니다. 사귈 만한 친구 나라를 알맞게 고르면 백성은 안정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우선 나라 밖의 걱정거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224. 현명한 군주는 밖으로는 적의 강함과 약함을 헤아리고 안으로는 병사의 자질이 뛰어난지 모자란지를 헤아려, 두 군대가 서로 싸울 때를 기다리지 않도 이기고 지는 것과 죽고 사는 관건이 이미 가슴속에 있게 됩니다. 어찌 평범한 사람들의 말에 가려 어두컴컴한 곳에서 큰일을 결정하겠습니까

227. 닭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가 되지 말라 

229. 싹이 돋아날 때 베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 

231. 미리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재앙이 이르게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32. 과장된 몸짓 속에 가려진 진실을 보라 

235. 신이 듣건대 모든 일은 혼란스러워지기 전에 다스리고 해로운 일은 일어나기 전에 대책을 세워 막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환이 닥친 뒤에 걱정하면 이미 늦습니다. 

240. 굶주린 사람이 굶주리면서도 오훼라는 독초를 먹지 않는 까닭은 그것응로 배를 채울 수는 있지만 굶어 죽는 것과 똑같은 해독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41. 옛날에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들은 화를 복으로 바꾸고 실패를기회로 삼아 성공했다고 합니다. 

247. 현명한 왕은 자기 허물을 듣는 데 힘쓰고 자신의 뛰어난 점에 관한 칭찬을 듣기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254. 대체로 높고 편안한 것을 버리고 위험하고 낮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총명한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255. 정의로운 행동만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10. 장의 열전

265. 작은 이익을 탐내면 큰 뜻을 이루지 못한다 

270. 신은 나라를 잘살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땅을 넓히는 일에 힘쓰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일에 힘쓰며, 왕업을 이루고자 하는사람은 덕정을 널리 펼치는 일에 힘쓴다고 들었습니다. 이 세가지 조건만 갖추어지면 왕업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272. 깃털도 쌓으면 배를 가라앉힐 수 있다. 

282. 나라가 가난한데도 자주 전쟁을 일으킨다면 위험에 빠지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287. 나라의 오랜 이익을 돌아보지 않고 한 순간의 달콤한 말을 듣는다면 이보다 더 남의 임금을 망치는 일은 없을 거십니다. 

288. 한때의 이익에 끌려 백대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는다 

298. 사람 됨됨이는 그 주위 사람이 제대로 안다 

298. 예전에 오자서는 그 임금에게 충성하였기 때문에 온 천하가 그를 자기 신하로 삼으려고 서로 다투었고, 증삼은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였기 때문에 온 천하가 그를 자식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노비가 그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팔리면 좋은 노비입니다. 소박맞고 쫖겨 온 여자가 그 마을에서 다시 결혼한다면 좋은 아내입니다. 지금 신이 자기 임금에게 충성스럽지 않다면 초나라도 어떻게 신을 충성스럽다고 여기겠습니까? 충성을 다해도 버림 받으려 하는데 신이 초나라로 가지 않으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303. 자기보다 나은 자를 밟고 일어선다 


11. 저리자. 감무 열전

317. 짐승도 궁지로 몰리면 수레를 뒤엎는다고 합니다. 

318. 세상 사람들은 '존귀하게 되는 까닭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는 그 존귀함을 영원히 잃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328. 저리자는 진나라 혜왕의 골육지친이니 중용된 것은 세상의 이치이다. 그러나 진나라 사람들이 그의 지혜를 칭찬하였으므로 나느 그 사적을 많이 실었다. 


12. 양후열전

337. 주서에 '천명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요행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337. 하늘이 내려 준 행운이 늘 자기 곁에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13. 백기 왕전 열전

345. 마음을 잘 바꾸는 자는 난을 일으킨다 

356. 내가 자손을 위한 재산을 만들려고 많은 논밭과 정원과 연못을 요청함으로써 다른 뜻이 없음을 보여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지 않는다면 진나라 왕은 가만히 앉아서 나를 의심할 것이오. 

357. 무릇 세 대에 걸쳐 장군이 된 자는 반드시 싸움에서 지게 되오. 반드시 싸움에서 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소? 그 할아버지나 아머지가 사람을 죽이고 쳐분순 것이 많아서 그 후손이 상서롭지 모샇ㄴ 기운을 받았기 때문이오. 이제 왕이는 이미 세 대째 장군이 되었소. 

358. 세상에 자에도 짤은 데가 있고 치에도 긴 데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그들에게는 각기 단점이 있었다. 

-->누구나 각기 장단점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점을 스스로 깨달아서 현명하게 대처해 나가는 거시 바로 인생의 길 아니겠는가 


14. 맹자. 순경 열전

363. 사욕은 혼란의 시작이다 (이익이란 진실로 혼란의 시작이로구나)

363. 공자는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한을 사는 일이 많다'라고 했던 것이다. 

363. 시대 흐름에 들어맞지 않는 주장은 쓰이지 못한다 

368. 내가 전에 왕을 만났을 때 왕은 말을 쫓아가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고 그 다음에 만났을 때는 왕이 음악에 정신이 쏠려 있었소 그래서 나는 말없이 있었소. 


15. 맹상군 열전

381. 오늘 아침 저는 밖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에 나무 인형과 흙 인형이 서로 주고 받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무 인형이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너는 허물어질 거야. 라고 말하자 흙 인형이 '나는 원래 흙에서 태어났으니 허물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지만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너는 어디까지 떠내려가야 할지 몰라. 라고 대답했습니다. 

394.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진다 

397. 빈객들대신 사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결과가 있고 일에는 당연히 바뀌지 않는 도리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만물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16. 평원군. 우경 열전

405. 세 치 혀가 군사 백만 명보다 강하다 

406. 대체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 지금 선생은 내 빈객으로 삼 년이나 있었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선생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나도 선생에 대해 들은 적이 없소 이것은 선생에게 이렇다 할 재능이 없다는 뜻이오 선생은 같이 갈 수 없으니 남아 있으시오 

417. 작은 나라와 큰 나라가 함께 일을 하면 이로운 것이 있을 때에는 큰 나라가 그복을 받고 일이 잘못되면 작은 나라가 그 화를 입게 된다. 

417. 옛말에 '강한 자는 공격을 잘하고 약한 자는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421. 평원군은 새가 하늘 높이 날듯이 혼탁한 세상에서 벗어나 재능과 지혜가 있는 훌륭한 공자였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큰 이치를 알지는 못했다. 속담에 이익에 사로잡히면 지혜가 흐려진다라고 하였다. 

422. 우경에게 고통과 근심이 없었다면 책을 지어 후세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17. 위공자 열전

427. 어진 사람을 얻으려면 정성을 다하라 

427. 공자는 사람됨이 어질고 선비들에게 예의로 대우했다. 선비가 어질든 그렇지 않든 구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예를 갖추어 사귀고 자기가 부귀하다고 해서 교만하게 구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선비들은 사방 수천 리에서 앞을 다투어 몰려와 공자에게 몸을 의지하여 빈객이 3000명이나 되었다. 

436. 세상일에는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고, 또 잊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439. 비방 한 마디가 인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441. 신릉군만이 깊은 산과 계곡에 숨어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은 것은 일리가 있다. 


18. 춘신군 열전

445.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다 지치면 개도 못 이긴다 

446.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우면 힘이 약한 개가 그 기회를 틈타 이익을 차지할 것입니다. 

446. 사물은 한쪽 끝까지 가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겨울과 여름은 서로 바뀌게 마련이다. 

448. 시경에 병사를 잘 다스리는 이는 멀리까지 가서 정벌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448. 다른 사람이 무언가 마음에 두고 있으면 내 마음으로 그걸 헤아릴 수 있다 

448. 적은 용서하면 안되고 때는 놓치면 안 된다. 

461. 마땅히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어려움을 겨께 된다 


19. 범저. 채택 열전

465. 군주가 의심하면 잠시 떠나 때를 기다려야 한다 

469. 현명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면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상을 받고 능력이 있는 자는 반드시 관직을 받을 수 있다. 공로가 큰 자는 그 봉록이 크고 공이 많은 자는 그 관직이 높으며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그 관직이 높다 그러므로 능력이 없는 자는 감히 관직을 맡지 못하고 능력이 있는 자는 스스로 재능을 감출 수 없다

470. 평범한 군주는 사랑하는 자에게 상을 내리고 미워하는 장에게 벌을 주지만 현명한 군주는 그렇지 않아 상은 반드시 공 있는 자에게 주고 형벌은 반드시 죄 있는 자에게 내린다 

470. 대부의 집을 번창시킬 인재는 나라 안에서 찾고 제후의 나라를 번창시킬 인재는 천하에서 찾는다. 

470. 훌륭한 의사는 환자가 죽고 사는 것을 알고 훌륭한 군주는 일의 성공과 실패에 밝습니다. 이로우면 행하고 해로우면 버리고 의심스러우면 좀더 시험해 봅니다. 

474. 신이 죽어 진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면 신의 죽음은 사는 것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479. 열매가 너무 많으면 가지가 부러진다 

480.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안으로는 그 권위를 굳히고 밖으로는 그 권력을 무겁게 한다. 

480. 나무 열매가 너무 많으면 가지가 부러지고 가지가 부러지면 나무 기둥을 해친다

485. 오늘 네가 죽음을 당하지 않는 이유는 두터운 명주 솜옷을 주면서 옛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를 용서한다

488. 높은자리에 있을 때 벗을 사귀는 것은 천한 몸이 되었을 때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 때문이고 부유할 때 벗을 사귀는 것은 가난해졌을 때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490. 군주가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보고 군주가 욕을 보면 신하는 죽는다 

491. 대체로 모든 일은 평소에 준비하지 않으면 급박한 경우에 대처할 수 없소. 

493. 인을 바탕으로 하여 의를 지키며 도를 시행하여 덕을 베푼다면 천하에 자기 뜻을 이루는 것이고 천하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존경하고 흠모하여 군주로 받들고자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변설이 뛰어나고 지혜로운 선비가 기대하는 바 아니겠습니까?

494. 부귀와 명예를 같이 누리며, 세상의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 각기 제자리를 찾게 하고 일찍 죽지 않고 오래 살아 하늘이 준 수명을 다누리고 천하 사람들이 그 전통을 물려 받아 그의 사업을 지켜 영원토록 전해지게 하고 이름과 실제 모습이 참되어 그 은덕이 천 리 먼곳까지 미치며 대대로 이를 칭송해서 끊이지 않게 하여 천지와 함께 시작과 끝을 같이 한다면 이야말로 도덕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성인이 말하듯 상서롭고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495. 선비란 본래 자기 몸을 죽여서 이름을 남기나니 정의를 위해서라면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소. 

495. 군주가 성스럽고 신하가 어진 것은 천하의 가장 큰 복입니다. 군주가 명철하고 신하가 정직한 것은 나라의 행복입니다. 아버지가 자애롭고 자식이 ㅎ성스러우며 남편이 성실하고 아내가 정숙한 것은 가정의 행ㅂ고입니다. 

496. 몸과 이름이 모두 온전한 것이 가장 훌륭하며, 이름은 남의 모범이 될 만하지만 몸을 보존하지 못한 것이 그 다음이고 이름은 욕되어도 몸만은 온전한 것이 가장 아래입니다. 

498. 해가 중천에 오르면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기운다. 만물이 왕성해지면 곧바로 쇠약해져 떨어지는 것은 천지의 변하지 않는 이치입니다.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 굽히고 펴는 것이 때에 따라 바귀는 것은 성인의 영원한 도리입니다. 

499. 잡혀 죽는 까닭은 먹이를 탐하는 욕심에 이끌이기 때문입니다. 

499. 생각은 지나치지 않고 행동은 교만하지 않으며 언제나 도를 지켜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499. 모두 최고에 이르렀을 때 본연의 도리로 돌아오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지 않으며 절제할 줄 모른데서 생긴 재앙입니다. 

501. 펼 줄만 알고 굽힐 줄 모르며 앞으로 갈 줄만 알고 돌아올 줄 모르는 사람 

502. 물을 거울로 삼는 자가 자기 얼굴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의 길흉을 알 수 있다. 

502. 성공했으면 그 자리에 오래 있지 말라 

503. 역경에 '높이 올라간 용에게는 뉘우칠 날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르기만 하고 내려갈 줄 모르며 펴기만 하고 굽힐 줄 모르고 가기만 하고 돌아올 줄 모르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503. 욕심이 그칠 줄 모르면 하고자 하는 바를 잃고 가지고 있으면서 만족할 줄 모르면 가지고 있던 것마저 잃는다

504. 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아야 장사를 잘 할 수 있다. 

504. 선비에게는 우연히 때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 두 사람 못지않은 재능을 가지고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두 사람도 어려운 때가 없었다면 어찌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20. 악의 열전

509. 충신이 반역자가 되는 것은 하루아침이다

514. 사람의 재능을 살펴 관직을 주는 이는 공적을 이루는 군주이고 행동을 바르게 하여 사귀는 이는 이름을 나기는 선비입니다. 

515.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가 공을 세우면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역사에 이름이 남고 앞을 내다보는 밝은 눈을 가진 선비가 공명을 이루면 그것을 손상시키지 않기 때문에 후세가지 칭송을 받는다 

515. 일을 잘 꾸민다해서 반드시 일을 잘 이루는 것은 아니며, 시작을 잘한다고해서 반드시 마무리도 잘하는 것은 아니다 

516. 옛 군자는 사람과 교제를 끊더라도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기 결백을 밝히려고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 

517.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떠나라 


21. 염파. 인상여 열전

537. 아버지와 자식은 마음 씀씀이 부터 다르다 

538. 전쟁이란 목숨을 거는 거요. 

540. 권세를 가진 자에게는 사람이 몰린다 

542. 죽음을 알면 용기가 솟는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22. 전단 열전

550. 기묘한 계책으로 적의 허를 찔러라 

554. 용병의 도는 정공볍으로 싸우고 기이한 계책으로 허를 찔러 이기는 것이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기이한 계책을 무궁무진하게 낸다. 기이한 계책과 정공법이 서로 어루러져 쓰이는 것은 마치 끝이 없는 둥근 고리 같다 대체로 기이한 병법은 처음에는 처녀처럼 약하게 보여 적군이 얕잡아 보고 문을 열어 두게 하지만 나중에는 그물을 벗어난 토끼처럼 날래져서 적이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다. 이는 전단의 용병법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554.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21. 노중련. 추양 열전

566. 천하에서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덜어주고 재앙을 없애주며 다툼을 풀어 주고도 보사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이것은 장사꾼의 행위입니다. 저는 이런 짓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567. 지혜로운 자는 때를 거슬러 유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용감한 자는 죽음을 겁내어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으며 충성스러운 신하는 자기 한 몸을 앞세워 군주를 뒤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567. 지혜로운 사람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용감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569. 작은 예절에 얽매이는 사람은 영화로운 이름을 이룰 수 없고 작은 치욕을 마다하는 사람은 큰 공을 세울 수 없다고 합니다. 

571. 잠시 개인적인 울분과 원한을 버리고 영원히 빛날 수있는 이름을 세웠으며 원망에 사로잡힌 작은 절개를 버리고 대대로 전해질 수 있는 공을 세운 것입니다. 

571. 다른 사람의 칼에 죽느니 차라리 내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 

571. 나는 부귀로우면서 남에게 얽매여 사느니 차라리 가난할망정세상을 가볍게 내 맘대로 살리라 

572. 여러사람 입은 무쇠도 녹인다 

572. 충성된 사람은 군주에게 대가를 받지 않는 일이 없고 진실한 사람은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573. 젊을 때부터 흰머리가 되도록 사귀었으면서도 새로 사귄 듯한 이가 있는가 하면 길에서 우연히 만나 잠깐 이야기하고도 옛날부터 사귄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상대방의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입니다. 

575. 모두 자신들의 계획이 반드시 실현될 수 있음을 믿고 사사로이 부당을 만들어 의지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홀로 몸을 세웠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질투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79. 의관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들어온 사람은 이익을 위해 의로움을 더럽히지 않으며 명예를 갈고 닦는 사람은 욕심 때문에 행실을 그르치지 않는다 


24. 굴원. 가생 열전

585.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본다 

587. 진흙 속에서 뒹굴다 더러워지자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씻어 내고 먼지 쌓인 소게 밖으로 헤쳐 나와서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다. 그는 연꽃처럼 깨끗하여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더러워지지 않은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지조는 해와 달과 그 빛을 다툴 만하다. 

588. 땅은 얻고 싶지 않소. 원하는 바는 장의 얻어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이오. 

590. 역경에 '우물물이 흐렸다가 맑아져도 마시지 않으니 내 마음이 슬프구나. 이 물을 길어 갈 수는 있다. 왕이 현명하면 모든 사람이 그 복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591.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이써서 쫓겨났소 

591. 대체로 성인이란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속세의 변화를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혼탁하다면 왜 그 흐름을 따라 그 물결을 타지 않으십니까? 모든 사람이 취해 있다면 왜 그 지게미를 먹거나 그 밑술을 마셔 함께 취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아름다운 옥처럼 고결한 뜻을 가졌으면서 스스로 내쫓기는 일을 하셨습니까?

595. 사람이 태어날 때 받은 천명은 제각기 돌아갈 곳이 있구나 

595. 세상이 어지러워 나를 알지 못하니 내 마음 말하지 않으리 

602. 근심과 기쁨은 같은 문으로 모이고 길함과 흉함은 한곳에 있네 

603. 만물은 돌고 돌아 서로 부딪치고 진동하며 변하네 

603. 조화의 신이 만물 만드는 일은 넓고 커서 끝이 없다네 하늘의 이치 예측할 수 없고 도는 미리 꾸밀 수 없도다 

605. 성인은 사물에 굽히지 않고 수많은 변화를 만나도 한결같다네 

605.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은 만물을 버리고 홀로 도와 함게하누나 


25. 여불위 열전

615. 아름다운 얼굴로 남을 섬기는 자는 아름다운 얼굴이 스러지면 사랑도 시든다고 합니다. 

618. 거짓으로 얻은 명성은 물거품 같다 


26. 자객 열전

626. 약속을 어기면 안 됩니다. 작은 이익을 탐하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신다면 제후들의 신뢰를 잃고 천하 각국의 지지를 잃게 됩니다. 

628.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구하지 않으면 무엇을 얻겠습니까? 

630. 그는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조심하여 피하면 그만이다. 

632. 현명한 군주는 다른 사람의 아름다운 이름을 가리지 않고 충성스러운 신하는 이름과 지조를 위하여 죽을 의무가 있다. 

633.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 

638. 인물은 범상치 않은 행보를 보인다 

642. 대체로 위태로운 일을 하면서 안전함을 찾고 재앙을 만들면서 복을 구하려고 한다면 계책은 얕아지고 원망만 깊어질 뿐입니다. 

643.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아야 성공한다 


27. 이사열전

661. 사람이 잘나고 못남은 자기 위치에 달려 있다 

661. 저는 때를 얻으면 꾸물대지 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662. 오랜 세월 낮은 자리와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 세상의 부귀를 비난하고 영리를 미워하며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의탁하는 것은 선비의 마음이 아닐 듯합니다. 

662.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기회를 놓치지만 큰 공을 이루는 사람은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 밀고 나갑니다. 

668. 말하는 것마다 옛것을 끌어내어 지금의 것을 해롭게 하고 헛된 말을 꾸며서 실제를 어지럽혔습니다. 

670. 만물은 극에 이르면 쇠하거늘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구나 

670. 남의 신하가 되는 것과 남을 신하로 삼는 것은 다르다 

682. 어진 사람이 천하를 소유하게되면 오로지 천하를 자기에게 맞도록 할 뿐이다. 이른바 어진 사람은 반드시 천하를 평안하게 하여 모든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 지금 제 몸조차 이롭게 하지 못하면서 어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683. 책임을 꾸짖으면 신하들은 능력을 다하여 자기 군주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683. 천하를 차지하고도 자기 뜻대로 행동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천하를 질곡으로 삼는 것이다. 

684. 남을 따르면 내가 비천해지고 남이 존귀해집니다. 그러므로 남을 따르는 자는 비천하고 남을 따르게 하는 자는 존중받는 것입니다. 

684. 한비자는 '자애로운 어머니에게는 집안을 망치는 자식이 있지만 엄격한 가정에는 거스르는 종이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28. 몽염 열전

703. 충신은 대신들과 다투지 않는다 

704. 한 사람의 지혜로는 군주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711. 진나라가 처음 제후를 멸망시켰을 때 천하의 민심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해고 전쟁의 상처도 채 가라안지 않았는데 몸염은 이름 있는 장수로서 이러한 때에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고 늙은이를 모시고 고아를 돌보며 모든 백성을 안정되고 평화롭게 한느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강력히 간언하지 않고 도리어 시황제의 야심에 영합하여 공사를 일으켰으니 그들 형제가 죽음을 당한 것은 마땅하지 않겠는가 


29. 장이. 진여 열전

715. 목이 달아나도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721. 치지 않고도 성을 빼앗을 수 있으며 싸우지 않고도 땅을 얻을 수 있고 격문만 전하고도 1000리를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728. 이익 앞에서는 친구도 원수가 된다 

730.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 


30. 위표. 팽월 열전

743. 천하가 어지러우면 충성스러운 신하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745. 인생은 흰 망아지가 작은 문 틈새로 달려 지나가는 것처럼 매우 짧소. 지금 한나라 왕은 오만하여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제후와 신하들을 노예처럼 꾸짖고 욕하며 위아래의 예절이 조금도 없소 

751. 중간 정도 되는 재능을 가진 자도 이러한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거늘 하물며 왕 노릇을 하던 자야 어떠하랴 지략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자들이지만 오직 자기 몸을 보존하지 못하는 것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뱀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때를 만나 자신들의 뜻을 펼쳐 보려고 했기 땜누에 갇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31. 경포 열전

763. 천하를 다스리는 데 어찌 썩은 선비를 쓰랴 

770. 왕이 될 수는 있었지만 자신도 세상의 큰 치욕을 피하지는 못했다. 재앙은 사랑하던 여자에게서 싹텄고, 질투가 우환을 낳아 마침내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었구나 


32. 회음후 열전

780. 천하는 마음을 얻은 자의 몫이다 

788. 병법에는 죽을 곳에 빠뜨린 뒤라야 비로소 살릴 수 있고 망할 곳에 둔 뒤라야 비로소 멸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있잖소

790. 군사를 잘 쓰는 사람은 이쪽의 단점을 가지고 적의 장점을 치지 않고 이쪽의 장점을 가지고 적의 단점을 칩니다. 

792. 과욕은 화를 부른다 

796.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798. 귀하게 되느냐 천하게 되느냐는 골상에 달려 있고 근심이 생기느냐 기쁨이 생기느냐는 얼굴 모양과 빛깔에 달려 있으며 성공과 시패는 결단력에 달려 있습니다. 

801. 우환이란 욕심이 많은 데서 생기고,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802. 용기와 지략이 군주를 떨게 만드는 자는 그 자신이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한다

802. 공로는 천하에 둘도 없고 지략은 아무 시대나 나타나는 게 아니다

803. 터럭 같은 작은 계획을 자세히 따지고 있으면 천하의 큰 술수를 잊어버리고 지혜로 그것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해동하지 않는 것은 모든 일의 화근이 됩니다. 

804. 대체로 공이란 이루기 힘들고 실패하기는 쉬우며 때란 얻기 어렵고 잃기는 쉽습니다. 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806. 날랜 토끼가 죽으면 훌류안 사냥개를 삶아 죽이고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좋은 활은 치워 버린다 적을 깨뜨리고 나면 지모 있는 신하는 죽게 된다. 


33. 한신. 노관 열전

827. 빈객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변란의 조짐이다 

831. 대체로 계책의 설익음과 무르익음과 성패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깊구나 


34. 전담열전

836. 독사에게 물린 손은 잘라야 한다 

838. 원망하는 마음은 반란하는 불씨가 된다 


35. 번.역.등.관 열전

849.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데 어찌 술 한잔을 사양하리 

861. 고조는 포위망을 벗어나 급히 달아나려고 하였지만, 하후영은 일부러 천천히 걸으면서 쇠뇌를 당겨 밖으로 향하게 하여 마침내 찰툴 할 수 있었다. 





내가 저자라면


아래는 이 책에 대한 구조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지난 번에도 생각했던 건데 지금도 다시 읽어보니 그 주제별로 묶어 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일단 인물들의 열전이라는 점이 그 시대에는 신선했겠지만 지금의 이 시대에서는 그 이상의 것이 요구되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나라면 다양한 인물들을 나열할 때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테마별로 묶어보면 어떨까 고민을 해보았다. 

또한 사기에서 직접 발췌한 원문도 함께 실었으면 보다 더 생동감 있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http://osj1952.com.ne.kr/interpretation/sjeljan/kframe1.htm

1. BC 90년경에 완성된 중국의 역사서 《사기》의 일부분이다.
2. 《사기》는 〈본기〉12권, 〈표〉10권, 〈서〉8권,〈세가〉30권,
〈열전)〉70권 등 전130권으로 구성되어있다
3.〈열전〉은 그 시대를 상징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활동을 통해
인간 삶의 문제를 집요하게 추구한 개인 전기이다.
4. 고대중국의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일화가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어
당시의 정치, 역사, 문화, 의식 등 사회전반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5. 역사가의 사명감으로 인생의 궁극적 의문을 탐구하는 자세로
기전체의 역사서를 집필했으며, 모순으로 가득찬 현실에서 자신의 길을 간
수많은 인물을 그려냄으로써 스스로 그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6. 기록의 역사적 가치와 인물의 성격과 처신까지 묘사함으로써 인간의 내면적 고뇌까지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중국 산문체의 모범이다
7.사마 천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엿볼 수 있으며 격동기를 산 다양한 인간상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날카롭게 추구한 작품으로, 시대를 초월한 윤리적·사회적·정치적 가치체계의 모범이 된다

열전(列傳)의 사전적 의미는 敍列人臣事跡傳於後世(인신의 사적을 서술하고 열거하여 후세에 전한다)이다. <사기>하면 열전을 떠올릴 정도로 사기의 대명사로 자리매김되어 있고 분량도 제일 많다. 사마천의 명성을 빛내게 한 불후의 역작이 바로 열전이다.

열전은 시간적으로 첫편에 나오는 백이와 숙제로부터 한무제까지 각양 각층의 인물군이 망라되어 있다. 귀족, 관료, 장군, 유세가, 자객, 토호, 은자(隱者)와 군왕의 총애를 받았던 여인에 관한 열전도 있다. 뿐만 아니라 흉노, 조선등 중국을 둘러싼 이민족의 풍속과 교화도 포함되어 있어 중국전체의 광범위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사마천은 열전의 전(傳)이 의미하는 전기(傳記)가 생애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통상적인 의미와는 달리, 해당인물에 대한 특징적인 면모를 골라 기록했다. 이는 자신이 처한 특수한 입장에서 해당인물을 선정하고 자신의 역사관과 가치관에 따라 평가하고 해석한 독특한 인식에 기인 된 것이기도 하다.

그 가치판단과 인식의 기준은 도덕성과 선(善) 그리고 의(義)다. 그는 백이열전을 열전 서두에 올려놓고 자신의 논설과 심경을 대변하고 있다. 무릇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하늘의 도리이고 이치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 「하늘의 뜻은 편애하는 일 없이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에 선다」(天道無親, 常與善人) 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하늘이 악한 사람편에 서는 일이 많아, 과연 하늘의 도리라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天道是耶,非耶)을 묻고 있다.

이는 옳은 일 하려다 궁형까지 받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하늘에게 묻고 이를 어찌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그는 백이와 숙제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공자에 의해서이고 안연이 공자의 칭찬을 받아 두드러진 것 처럼 자신도 구차한 목숨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은 세상에 사기를 내놓기 위함이고 사기로 말미암아 기구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놓아 평가받고 싶은 심정을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열전은 70편으로 되어 있다.

 史記는 중국 漢나라 무제 때 역사가 사마천이 편찬한 책이다.
太史令인 사마천이 적은 사서는 처음에「太史公書」(혹은 太史公記)로 불리었으나 위진(魏晋)시대에 와서「사기」라고 불리게 되었다.(삼국지위지의 왕숙(王肅)전기에서 사기라는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

史記는 중국 최초 문명시대인 黃帝시대에서 前漢 武帝시기까지 2,500 여년의 역사를 서술한 130권의 방대한 역사서이다. 사기가 씌어지고 난 후 2천년 동안 중국의 모든 역사서 중에서 가장 널리 읽혔던 책중의 하나였다. 그 체제는 후사에 正史의 모범이 되어 왔다.

사기는 전체적으로 기전체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이후 중국 역대 왕조사의 편찬에 채용된 것으로도 유명하다.기전체란 제왕의 즉위 연대에 따라 기록하는 단순한 역사편찬 방식이 아니라, 통치자를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속한 신하들의 전기 ·통치제도 ·문물등을 분류, 서술하여 왕조 전체의 체제를 이해하기에 편한 역사서술로서 역사적 사실 뿐 아니라 역사적 시각의 다양성까지 표현할 수 있어 생동감있는 역사를 재현할 수 있다. 즉 중국인의 時空에서 전개된 인간의 여러 활동 및 그 결과를 망라한 것이다.

따라서 '史記'는 한편의 운대한 通史이자 世界史이며, 동시에 종합사인 것이다. 이 때문에 史記는 시대의 繼起的인 변화와 여러 지역간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진행된 인간의 삶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의 인과적인 이해뿐 아니라 사건과 현상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보편적인 원리의 문에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史記'는 사마천 자신이 당시 士人으로서는 가장 치욕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宮刑을 받고 좌절과 울분속에서 史記라는 大史書를 완성한 비극적인 생의 경험이 점철된 역사서이기도 하다. 그의 문장을 보면 많은 사람들의 삶의 역정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추적하여 비판하면서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개인의 비극을 극복하여 절실하고 냉철한 역사적 진실의 추구로 승화시켜 객관적으로 역사를 평가하고 있다는데 사기의 매력이 있다.

사기는「本記」「表」「書」「世家」「列傳」의 전 130권으로 되어 있다.
사기는 모두 52만 6천여자로 이루어진 방대한 역사서다.

본기30권역대 왕조의 변천을 서술한 연대기
10권각 시대에 대한 역사
8권국가의 제제도의 연혁과 변천을 기록
세가30권봉건 제후의 연대기
열전70권개인의 전기

일반적으로 우리가 史記라 함은 사기열전을 떠올릴 만큼 사기의 다섯부문 중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또 분량이 가장 많다.

총 130권 중 70권이 개인의 구체적인 성공과 실패를 추척한 개인전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만큼 사마천은 역사를 개인의 능동적인 활동의 집적으로 보았고, 개인의 禍福과 역사의 흥망성쇠를 개인의 도덕과 능력, 이것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능동적인 노력여하의 결과로 설명한다.
사기가 만들어진 지 2천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고 흥미를 주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기가 역사적이면서도 생생한 인간을 탐구하는 인간학의 백과사전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근세 경영학의 교과서인 것이다.
사기는 격동기에 산 인간과 온갖 인간관계를 설명한 책으로서, 그 속에 인간에 관한 모든 자료가 들어 있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고 거울삼아 사는 방법과 지혜를 그시대 인물들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기는 또한 문학적으로도 빼어난 작품이며 같은 문장이라도 읽는 사람의 소양과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해석되는 고전이다. 뿐만 아니라 사기는 아무리 읽어도 싫증나지 아니하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하는 삶과 지혜의 보고(寶庫)이고 철학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기는 생명력을 잃지 않고 날로 복잡해져가는 오늘의 환경속에서 더욱 더 정채를 발하고 많이 읽히는 것이다..


[사기 편찬의 동기]


사마천이 중국 최초의 체계적인 사서를 편찬한 목적은 「天과 인간의 관계를 규명하고 古今의 변화를 관통하는 (원리를 밝혀) 스스로 독자적인 立論의 체계를 이루려는 것 (成一家之言)」이었다고 한다.
사마천이 부자 양대에 걸쳐 태사령이란 사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부친의 遺業으로 사서를 써야 하는 단순한 직업적 의식 외에 새로운 사서 편찬의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자각적 사명의식의 계승이라는 외면적 요인도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릉의 사건 이후 사마천의 개인적인 비극이 사기 유작 동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성규 교수는 사기의 저술동기와 목적을 다음 세가지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

1. 春秋의 繼承

사마천 부자가 자신의 저술활동에 춘추의 계승이라는 의미를 명확히 부여하였던 것은 사마담 임종시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보면 분명하다. 즉,

...춘추의 마지막 사건, BC 481 이래 4백여 년이 흘렀는데, (그간) 제후들은 서로 겸병에 (몰두하여) 사관의 기록이 방기,폐절되었다... 나는 사가로서 현명한 군주들,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행적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천하의 史文이 페기될 것 같아 심히 두렵다.. 너는 이것을 명심하거라...」 이것은 일견 「춘추」이후 사관에 의한 기록의 缺落을 한탄하고, 그 接續에 대한 사관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강조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며, 특히 사마담이 漢興 이래의 賢臣,忠臣의 행적기록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던 것도 주목된다.

그러나 사마천 부자는 史記가 단순히 춘추의 年代記 정도의 계승이 아닌,「孟子」가「춘추」가 亂臣,賊子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이었음을 주장한 이래「春秋」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史績의 포폄을 통하여 정치적,도덕적 규범의 확립,후세의 王者를 위한 난세극복의 원리를 제시하기 위한 저술이라는「春秋觀」에 입각하여 그 계승을 의식한 史書를 염두에 두었을 것 이라는 것이다.
즉 史實에 假託한 王道의 현창,또는 후세 王者를 위한 法度의 제시라는 성격을 띌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사마천이 史記의 저술로「一家의 言」을 이루려고 하였다는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漢初에 유행한 公羊學이 발달하여 孔子의「微言大義」를 발견하려는 春秋해석학이 발달하였는데 사마천이 太史公自書에서 당시 공양학의 대가인 董仲舒의 말을 인용하면서 「春秋」의 성격을 지적한 것을 보면 사마천이 공양학의 「春秋觀」을 지지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마천의 시대도 공자의 시대에 비견되는 난세였고 새로운 王者의 출현이 절실히 요구된 시대였는가?

壺遂는
...지금 그대는 위로는 명군을 만났고, 아래로는 백관이 각기 직분을 지키고 있어...그대는 저술로서 도대체 무엇을 밝히려고 하는가?」 (太子公自書)
라고 날카롭게 추궁한 데 대하여 사마천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기 위해 父 사마담의 말을 인용하면서「史記」저술의 정당성을 변호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 아버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春秋가 善을 드러내고 惡을 비난하였으나 三代의 덕을 추앙하고 周室을 칭송한 것은 그것이 비단 풍자나 비난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군주가 영명하고 성스러운데도 그 덕이 널리 선전되지 않으면 그것은 신하의 불찰이다
.」 
(太子公自書)

위 인용문만 보면 사마담에 있어 春秋의 계승은 當代의 稱揚, 즉 漢王朝가 성취한 위대한 성공을 보고하는 것처럼 보이며, 실제 그가 임종시 사마천에게 부탁한 내용이나,사마천이 사마담의「春秋」觀을 소개한 후, 군주의 덕을 선전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며 武帝의 聖明과 盛德의 기록을 저술의 목적으로 강조한 것을 보면 그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 같다.
그렇다면 사마천은 壺遂의 추궁을 계기로 공양학의「春秋」觀을 청산하고 사마담의「春秋」觀에 입각한 칭양으로 돌아선 것인가?

물론 史記의 내용 중 漢代에 관한 부분이 과반수 이상을 점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사마담의 當代 稱揚의 강조와 무관하다고만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사마천이 武帝시대의 정치에 극히 비판적이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지적된 사실이거니와, 실제 平準書,封禪書 등만 보아도 이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마천은 처음에「作」으로서의 史記를 염두에 두었으나, 壺遂의 추궁을 계기로 사마담의「春秋」觀을 일단 수용하여 當代의 稱揚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다가「李陵의 禍」를 계기로 다시 當代의 비판으로 선회한 것인가?
물론「이릉의 화」 이후 사마천의 선회는 어느 정도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사마담의 발언을 보자

공자가 죽은 지 이제 500년이 되었으니 누군가 그 뒤를 이어 세상을 밝히기 위하여「易傳」을 바로잡고「春秋」의 정신을 계승하여「詩經,書經,禮,樂」의 정신을 찾는 사람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太子公自書)
이 발언은 공자의 「春秋」저작을 공자의 다른 사업, 즉 「詩」「書」의 冊定, 禮樂의 복구와 존중의 일환으로 파악, 문명의 보호.전승자로서의 공자를 강조하는 한편, 「春秋」의 계승을 바로 그 문명의 보호.전승이란 점에서 의식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가 강조한 當代의 稱揚은 단순한 현실예찬이 아니라 문명전승의 일환으로서 當代의 문명적 盛事를 보고하는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史記」天官書의 내용을 보면, 500년을 주기로 天運이 大變한다고 사마천은 믿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 堯에서 孔子까지로 이어진 王者 또는 聖人의 계보가 각기 500년의 시차로 나타난 것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바로 이 天運 大變에 대한 인간의 대응결과로 이해하였을 것이며, 공자 사후 500년에 해당하는 자신의 시대가 역시 天運 大變의 시기라면 다시 이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사마천 부자에게 있어서 「春秋」의 계승은 天運 大變에 따른 역사적 과제의 자각과 그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 구체적인 표현이 「史記」로 結晶된 것이다.


[사기의 우수성]
사기가 많이 읽히고 명저라고 불리우는 것은 사기가 갖는 역사서로서의 방대한 사료취사와 사마천 자신의 깊은 학식과 객관적인 역사가로서의 자세라고 할 수 있으나 문학적인 면에서 사기의 우수성이 더 논의되는 것 같다. 

대만 학자 이장지(李長之)는 그의 저서 사마천의 인격과 풍격「司馬遷之人格與風格」에서 사마천은 역사가뿐 아니라 뛰어난 문학가이며 실제 그의 작품에서 역사가로서보다 문학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보인 부분이 더 많다고 주장하고, 다만 문학창작은 허구와 상상력을 위주로 하는데 그렇다면 사기는 어느 것이 허구이고 사실인가를 묻고 역사와 문학과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중국문학자 김원중 교수는 열전의 문학성을 「관안열전」을 예로 들고 있다.
안영과 그의 마부의 얘기가 나오는데 그 일화에 나오는 마부가 정말로 대부로 발탁됐는지, 마부의 아내가 그처럼 정연한 논리를 전개시켰다는 것에 대해 그 사실 여부를 가늠하기가 어렵고 또 안영이 대부가 된 것이 그 때문이었다고 믿기도 어렵지만 그런 식의 소재 선택이야말로 열전의 문학성을 높여주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사열전」이나 「골계열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식, 「자객열전」에서 보여지는 구도의 설정능력, 「여불위 열전」에서 볼 수 있는 플롯의 안배 능력이나 희극적 효과의 운용능력등은 전통 중국인의 「문사일체(文史一體)」관념을 보여주는 것들로서 문학의 역사,역사의 문학을 나타내는 실례들이라는 것이다.
사기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인물들의 심리를 그처럼 생동감있게 묘사하는 것은 문학적 감수성과 소질이 없이는 실로 불가능한 것이다.    
商務印書館·百衲本 [사기 圖版☞]

사마천의 문학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인물들을 묘사할 때 직접 묘사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그 대신 그들의 진정한 개성과 욕구를 가장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글을 인용하고 있다. 
「굴원 가생열전」에서 사마천이 그들에 대해 많은 사실과 일화를 접하고 있있을 것인데도 직접 묘사하지 않고 가생이 지은 시를 인용함으로서 더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잘 나타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는 사기 전편에 걸쳐 노래,속담,격언,편지,비문등을 끼어넣어 역사서를 재미있고 실감있게 그려내고 있으며 이는 당대 하나의 독립된 문학선집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이다.

사마천의 책이 그토록 많이 잃히고 재미있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다른 역사가와 비견될 수 없을 정도의 문학적 감각을 지녔던 것에 그 일단의 이유가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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