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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9일 19시 41분 등록

사람에게서 구하라

(구본형, 을유문화사)

 

 

I. 저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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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1954. 1. 15~)

변화경영 사상가,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소장

 

Biography

- 1954   충남공주 출생

- 1980   서강대학교 역사학과 졸업

- 1980~2000 한국 IBM 근무 (영업관리 4, 경영혁신 16)

- 1991~1996 IBM 본사의 말콤 볼드리지 (Malcolm Baldrige) 국제 심사관

- 2000~ 구본형 변화경영 연구소

- 2005~ 연구원 제도 운영

 

저서

- 익숙한 것과의 결별 (1998)

- 낯선 곳에서의 아침 (1999)

- 월드 클래스를 향하여 (2000) 읽지 못함

- 떠남과 만남 (2000)

-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2001)

-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2001)

- 사자 같이 젊은 놈들 (2002) 읽지 못함

- 내가 직업이다 (2003)

- 마흔 살에 다시 시작하다 (2004)

- 일상의 황홀 (2004)

- 코리아니티 (2005)

- 공익을 경영하라 (2006) 읽지 못함

- 사람에게서 구하라 (2007)

- 아름다운 혁명, 공익 비즈니스 (2007) 읽지 못함

- 세월이 젊음에게 (2008)

- 보스 : 쿨한 동행 (2009)

- 구본형의 필살기 (2010)

- 깊은 인생 (2011)

 

저자를 위대함에 이르게 한 7가지의 길

지난 스승의 저서 <마흔 살에 다시 시작하다> 읽고, 스승께서 '위대함에 이른 7가지의 ' 나의 언어로 이미 정리 있다. 최근의 나온 스승의 저서 <깊은 인생> 출간되기 전이 일이었다. <깊은 인생> 나오는 '평범함에서 비범함에 이르는 7가지 단계' 나의 리뷰 '저자에 대하여'라는 부분을 담는 그릇의 모티프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이번 리뷰는 스승께서 <깊은 인생> 통해 스스로 바라본 '7가지의 ' 별도의 가공작업 없이 그대로 옮겨 적었다. 직접 타이핑을 치며 옮겨 적는 동안 나는 마치 스승이 된듯한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 닮고 싶은 그가 되어 삶의 중요한 지점에서 깨우치고, 견디고, 넘어서 보는 경험은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길에 대한 아주 훌륭한 예행연습이 되어주었다. 닮고 싶은 삶이 있다는 . 이르고 싶은 경지에 이미 오른 사람 곁에 머물 있다는 일은 얼마나 보람되고 흐뭇한 일인가?

 

 

깨우침 하나. 우연은 운명을 이끌고

그늘 체험, 단명한 직장인이 평생의 소명을 찾다

내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지금의 내가 되게 인생의 미리츠버그 , 그곳은 어디였을까? 간디의 이야기를 이야기처럼 읽어가면서 내면을 관통하여 흐르는 느낌을 그대로 인생에 대입해가며 마는 지점이 어디였는지를 찾아보았다. 정신의 지평이 넓어진 바로 지점이 어디였는지를 찾아보았다. 정신의 지평이 넓어진 바로 지점, 지금까지의 '삶의 지평은 너무 좁아 더는 나의 영혼의 크기에 적합하지 않게' 그곳 바야흐로 하나의 삶의 문턱을 넘어야 , 존재가 운명처럼 저항한 바로 지점, 우연이 운명이 도약점 말이다.

 

1991 나는 한국 IBM에서 경영혁신 팀장을 맡고 있었다. 기업의 메인스트림은 아니었지만 적성에 맞는 일이었으므로 보람을 느끼며 일하기에 적합한 자리였다. 그러나 나는 반복되는 일과에 지루해 하고 있었고, 새로운 도전이라고 만한 일이 없었다. 직장 생활 11 차의 매너리즘이 나를 휘감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은 그저 매일의 일과고 월급이며 주어진 일에 불과했다. 맡은 일이 적성에 맞고 무난했기에 잘나가는 다른 부서를 일부러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일이 주어진다 해도 묵묵히 새로 맡은 일을 하게 되었을 여느 직장인처럼, 나도 밥을 벌기 위해 주어진 일을 하는 월급쟁이에 불과했다. 소명의식도 천직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시 IBM 변신과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격동의 장이었다. 그런 회사에서는 자체적으로 혁신 전문가들을 다수 양성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나는 IBM 본사에서 아시아 태평양 조직의 경영진단과 평가를 수행하는 심사관으로 일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새로운 제안을 받은 며칠 지나지 않아 급히 IBM 싱가포르의 경영성과를 진단하는 심사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아무런 사전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심사의 과정을 현장학습하기 위한 옵서버의 자격으로 심사 기간 내내 현장에 앉아 있어야 했다.

 

며칠 동안 정신적 지평이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까지 10 넘게 IBM 다녔지만 세계와 만나는 진정한 글로벌 체험을 하지는 못했다. 이때 처음으로 나는 세계 속에 내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나는 팀에서 평가 모델을 제대로 훈련 받지 못한 참석한 유일한 옵서버였으며, 가장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누구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나는 가장 어두운 그늘 속에 앉아 며칠을 보냈다. 마리츠버그에서 추위에 떨던 간디처럼 내게도 어두운 며칠이 새로운 전의를 불태우게 했다. 한국 IBM 경영혁신 팀장이라는 좁은 경력의 세계를 넘어 넓은 경영혁신 분야의 차별적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그때 자연스럽게 '' 대한 새로운 지평이 펼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동안 나는 너무나 좁은 명함 속의 직책과 직위에 갇혀 있었다. 이때를 계기로 나는 일에 대한 확장된 정의를 갖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이상 월급쟁이가 아니었다. 월급쟁이의 생각과 태도를 버렸다. 한국 IBM 경영혁신 팀장은 이제 직업의 정체가 아니었다. 대신 나는 한국 최고의 변화경영전문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존재를 재정의하게 되었다. 분야에서 나는 유명해지고 싶었다. 나는 단순한 직장인에서 진정한 직업인으로 도약했다.

 

며칠 동안 경험한 '그늘 체험' 통해 가슴에 '변화경영전문가'라는 비전이 자리 잡게 되었고, 단명한 직장을 넘어 평생의 직업을 바라보게 되었다. 비로소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경력의 그림을 섬광처럼 그리게 되었다. 꿈을 가지게 것이다. 한국 최고의 변화경영전문가라는 목표가 생기게 되자, IBM 경영혁신 팀장이라는 좁은 정의에 갇혔던 과거는 사라졌다. 나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정으로 일에 달려 들었다.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실험을 하고, 많은 사례를 연구했다. 중에서 인상적인 것들은 변형하여 회사에 적용해 보기도 했다. 머리는 실험정신으로 가득했고, 가슴은 의욕으로 불타올랐다. 진지하게 몰아붙이기도 했고, 많은 자료를 제시하기도 했으며, 재미있는 변화를 현업으로 끌어들였다. 팀원들과 책을 번역하기도 하고, 경영혁신 팀의 새로운 비전을 창조하기도 했다. 새로운 '' 정의에 따라 목표가 분명해지자 현업에 대한 자율성의 강도도 그만큼 강해졌고, 애정도 깊어졌다. 당시 나는 자신의 일에 가장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직원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초라한 '그늘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 때문이었다.

 

인생 전체에 걸친 경력의 그림이 그려지자 현업이 전체 중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그것은 전체 경력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지 조망해볼 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현업은 시대를 앞서 꿈꾸는 내가 되기 위해서 지금의 나를 모두 바쳐야 하는 수련 과정으로 여겨졌다. 현장에서 관련업무를 매일 연마할 잠재적 능력이 계발되는 것을 실감했다. 운동선수나 연주자가 엄격한 수련 계획에 따라 연습하고 콘테스트를 통해 동안 이룬 성과를 겨루어보듯이, 나도 스스로의 자율적인 수련계획에 따라 현장에서 매일 나를 실험해보았다. 이것이야말로 '훈련을 실전처럼, 실전을 훈련처럼' 치러내는 힘을 키워냈다.

 

나는 동안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습니다.' 라는 비전을 가지고 일해왔다. 평범하기 이를 없는 사람들 속에서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것이 커나가 사람만의 꽃으로 피어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우주적 소명임을 깨달았다.

 

나는 간디나 게바라처럼 크고 빛나는 별은 아니다. 나는 작은 별에 불과하다. 그러나 ' 자리에서 빛나야 운명을 가진 '이다. 사람은 모두 별이다. 자신의 내면에 커다란 빛을 품고 있으면서도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 장막으로 빛이 가려진 별들, 평범한 별들을 찾아 자신의 이야기를 창조해냄으로써 빛날 있도록 도와주는 도움별, 별이 바로 나임에 틀림없다.

 

 

깨우침 . 재능이 나를 부를

번째 인생, 다시 일어나 글을 쓰다

단테의 <신곡> 이렇게 시작한다.

 

인생의 중반에서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속을 헤매었네

 

나는 이것의 이탈리아어를 찾아본다.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che la diritta via era smarrita

 

소리로 읽어본다. 낯선 언어가 어눌하게 안에서 맴돌다 띄엄띄엄 쏟아진다. 나는 여러 읽어 본다. 점점 익숙해진다. 그리고 없는 이국적 풍취 속에서 단테가 살아난다. 나는 이탈리아어를 모른다. 그러나 억양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언어는 인간의 감정이다. 그리하여 단테의 <신곡> 행은 인생 최초의 이탈리아어가 되었다.

 

단테의 표현 그대로 나는 '인생의 중간에서 길을 잃었다.' 시는 그대로 마음으로 안겨왔다. 1997 여름, 나는 동안 단식을 했다. 회사에는 휴가를 내었다. 다행스럽게 상사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이해해주었다. 그가 찬동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렇게 휴가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온 인생의 도처에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나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밥이라는 절체절명 앞에서 나는 현실을 선택했던 같다. 달의 단식, 그것은 밥에 매이지 않고 세상을 한번 마음먹은 대로 살아보고 싶어 시작한 나의 성전이었다. 포도만 먹는 단식이 일주일째로 접어들었다. 그날 새벽 4시에 나는 눈을 떴다. 그때 눈이 떠졌을까? 아마 배가 고파서였을 것이다.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여름 새벽을 아무 생각 없이 뒤척였다. 여름 태양이 떠오르고 내가 누운 안으로 햇살이 기어들었다. 점점 방안으로 들어와 내가 누운 곳을 비추고 이윽고 나를 넘어 지나갔다. 그때 없는 눈물이 흘렀다. 빛나는 내게는 오늘을 마음대로 자유가 주어졌으나 나는 오늘을 보낼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나의 하루가 속절없이 흘러가겠구나. 그렇게 인생도 가뭇없이 사라지련만 나는 인생의 절반 지점에서 아무것도 없구나. 이렇게 환한 낮이 밝아오는데 시체처럼 안에 누워만 있구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때 마음 속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글을 써라. 너는 글을 써보고 싶지 않았느냐?' 속에서 무언가가 소리쳤다. 소리가 너무 커서 일어나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가 마흔 살이었다. 그전까지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언젠가 변화에 대한 책을 쓰고 싶다는 바람이 여러 동안 있었으나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다. 6개월이 지나서 나는 권의 책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덕에 나는 1990년대 가장 사랑 받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렇게 번째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날 아침이 인생의 분기점이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날이 바로 내게는 마사그레이엄이 루스 세인트 데니스의 포스터를 날이고, 그녀의 춤을 격정 속에서 관람한 날이기도 하다. 그때 마음속에 깊이 감추어져 번도 훈련 받지 못한 야생의 재능이 힘을 다해 외치고 있었고, 다행이 나의 의식이 외침을 들을 있었던 것이다. 바로 나의 그날이 단테에게는 그가 <신곡> 문장을 시작한 날이었을 것이다. 본인에게는 너무도 확실하고 너무도 분명한 인생의 분기점에서, 나는 재능이 내게 보낸 메시지를 정확히 수신했다. 여름의 햇빛, 눈물, 기쁨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느끼고 들을 있다. 내게는 너무도 선명한 기억이므로. 감춰져 있고, 번도 제대로 쓰인 적이 없는 평범한 재능이 세상에 외친 그날 새벽,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쓴다. 그렇지만 내가 작가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10년이 걸렸다. 10 동안 권이 넘는 책을 써왔지만 내가 작가라고 불릴 있는지에 대해 마음 깊은 곳에서 의구심이 올라왔다. 스스로 작가라고 부르는 것이 불편했다. 이유는 없었다. 처음에는 '작가는 문인'이라는 공식이 생각보다 뿌리 깊은 편견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인가 보다 했다. 글을 쓰긴 하지만 문학을 하는 것은 아니니 작가, 그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의식의 밑바닥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10년이 지나면서 생각은 바뀌었다. 내가 작가가 아니면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매일 글을 쓰고, 매년 책을 내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내가 작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글을 쓰기 시작하고 10년이 지나서 나는 나를 작가로 받아들였다.

 

나는 새벽에 글을 쓴다.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 새벽은 혼자 있기 좋은 시간이다. 새벽은 명징하지만 나는 새벽에 불가능한 것을 꿈꾸고 그것을 믿는 훈련을 한다. 글은 그런 사고의 표현들이다. 글과 사이는 종이와 같은 관계다. 종이는 펜이 흘러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글도 내가 흘러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내게 글은 강과 같다. 나는 새벽에 작은 보트 하나로 강을 따라 내려간다. 아무도 없다. 혼자이기에 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있다. 나는 두려워진다. 동시에 세속에서 배웠던 모든 것을 버리고 나는 새로워지는 경험을 한다. 아무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다. 이때 나는 혼자이기에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게 말을 걸고 그들의 소리를 들으려 한다. 의식이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동안 온갖 것을 창조해낸다. 새로운 것들이 강물 속에서나 강가의 나무와 풀숲에서 눈을 반짝이고, 물고기가 마리 위로 튀어 오르기도 한다. 이때 나는 무의식과 만난다.

 

세상은 원소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종종 나는 세상이 이야기들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정말로 믿기도 한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 자신이 주인공인 신화 하나를 만들어 갖기를 바란다. 매일 이침 나는 스스로 훈련한다. 아침에 일어나 불가능한 하나를 꿈꾸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제 꾸었던 꿈의 연장일 때도 있고, 불현듯 떠오른 다른 꿈이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현실이 아닌 비현실 하나를 믿는 훈련을 해본다. 마음대로 해볼 있는 세상 하나를 창조해보는 연습을 한다. 그러면 나는 훨씬 괜찮은 글을 있게 된다. 이상하지만 이런 정신적 근육의 훈련이 나를 젊게 만든다. 젊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아도 열린 마음을 가진 젊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된다.

 

나는 결국 작가가 되었다. 13 동안 17권의 책을 썼다. 스스로에게 '지금 마음을 흔드는 최고의 관심사' 대해 책을 쓰라고 주문해왔다. 나는 책의 주제에 마음을 빼앗긴 최초의 독자이기도 했다. 책의 최초의 독자가 나라는 사실을 나는 고맙게 생각하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권이 나오면, 확실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불확실한 곳에 있곤 한다. 그런데도 책은 내게 미지의 길에 대한 하나의 이정표 같은 것이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때때로 길도 없는 곳에 한참을 서서 망설이다 마음 속에서 스스로 팻말 하나를 꽝꽝 박아두고 떠나야 하는 삶의 나그네. 그것이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비즈니스의 영역을 규정했다. 나는 '이야기를 파는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불가능한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믿게 만들수록 비즈니스는 번창하게 된다. 이것이 정체성이다. 그러나 나는 순수한 이야기꾼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늘어놓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이미 내가 직접 경험해본 일들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 재배한 텃밭에서 따온 소채로 만든 음식인 셈이니 재료가 제법 양질이다. 나는 상상한다. 실천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실천할 있도록 범용적인 성장 모델을 만들어낸다. '이야기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 이것이 나의 직업이다. 나는 일을 있다. 일이 나를 구해줄 것이다.

 

 

견딤 하나. 끈질기게 삶에 달라붙다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나는 죽을 때까지 책을 쓰고 강연을 것이다. 내게 퇴직은 없다. 죽음이 퇴직이다. 또한 위대한 사람들이 그랬듯이 삶에서 일을 놓지 않을 것이다. 일은 이미 인생이 되었고, 놀이가 되었으며, 의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일과 더불어 즐길 있는 이유는 1 기업가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스스로 고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20년간 직장인이었다. 마흔 여섯 살에 회사를 나와 1 기업가가 되었다. 이것이 겉으로 보이는 나의 이력이다. 그러나 정작 1 기업가의 그림은 직장 11 차가 되던 1991 IBM 본사의 경영심사관이 되면서부터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정말 직장인에 불과했다. 그저 '한국 IBM 경영혁신 팀장' 직업적 정체성의 전부였다. 그러나 경영 컨설턴트의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정신과 마음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변화와 혁신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면서 회사의 혁신 팀장을 넘어서 한국 최고의 '변화경영전문가'라는 비전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꿈이 생기나 자는 훨씬 열심히 일했다. 소명의식을 가지게 되자 일이 훨씬 재미있어졌고, 나는 열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현업이 비전을 이루는 수련 과제가 되었다. 보스로 누가 오든 변화에 대해서만은 의견을 존중했고, 누구든 내게 물으러 왔다. 그렇게 6년을 보내고 1997 여름, 나는 '변화경영의 작가'라는 하나의 강력한 연결고리를 찾아낼 있었다. 변화라는 주제를 다루는 전문가인 동시에 새로운 차원을 제안하는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998 <익숙한 것과의 결별> 출간 되었다. 책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운이 좋았다. 나는 권으로 회사를 넘어 사회에 입문하게 것이다. 사람들은 '변화경영전문가'라는 새로운 직업인으로 나를 인식했다. 매년 평균 권씩의 책을 써내게 되었다. 책이 나온 3년째 되던 해인 2000, 나는 마흔여섯의 나이로 회사에서 독립하여 '변화경영전문가'라는 1 기업을 시작했다.

 

1 기업이란 'I, the Company', '내가 회사'라는 개념이다. 나는 '나라는 회사'이며,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지 않고 스스로를 고용한다. 하는 일도 하는 방법도 모두 내가 선택한다. 온전히 나의 경험과 잠재력에 의존하여 일을 한다. 수익 모델도 간단하다. 매출에서 세금을 제하고 나면 수익이 된다. 사무실도 집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있는 , 그곳이 강연장이든 카페든 내가 잠시 머무는 그곳이 바로 사무실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부가가치가 창조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디어에 반했다. 직장을 나와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하는 내게 맞는 모델이었다. 비로소 나는 경제적 도구로서의 일과 살고 싶은 삶이 분리되지 않는 일을 갖게 되었다. 하고 싶은 일을 나의 방식으로 펼쳐 가면서 일이 취미이며 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일은 인생의 구세주가 되었다. 일에 몰입하게 되었고 보람을 찾게 되었다. 결국 일은 삶의 다른 부분에도 빛과 기쁨을 선사하는 에너지가 되었다. 소명을 발견했고, 죽을 때까지 기쁘게 일에 헌신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10 1 기업은 그저 개념에 지나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하나의 실험이 되었고,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훌륭한 고용의 대안이 것이다. 마음에 1 기업가라는 개념이 꽂혔을 , 나는 이것이 2 인생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직업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의 극적인 전환은 마흔셋에 이루어졌다. 인생의 중반에 길을 잃고 방황한 때도 그때였고, 새로운 모험으로 책을 쓰게 것도 그때였다. 서서히 직장생활을 끝내야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도 언젠가 자신이 회사를 그만 때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퇴직 이후를 미리부터 열심히 탐구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마치 언젠가 누구든 죽게 되지만 사는 동안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통찰과 지혜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은 대략 개의 조각으로 이어진다. 인생의 번째 4분의 1 학생의 시절이다. 인간은 가장 교육 기간을 가지고 있다. 다음 번째 4분의 1 직장의 시절이다.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며 돈을 번다. 다음 번째 4분의 1 불만의 시절이다. 육체는 아직 젊고 경험은 아직 만하지만, 자연이 우리를 버리기 전에 먼저 사회에서 버려진다. 스스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하지만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황하고 분노하고 좌절한다. 그리고 다음 4분의 1 수용의 시절이다. 늙고 병들어 마음의 평화를 좇는다.

 

나는 번째와 번째 4분의 1 인생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었다. 시대적 변화가 가속화되면서 기업은 젊은 조직을 원한다. 30 직장 생활이 20 직장 생활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직장에서의 체류 가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역설적으로 나는 단명한 직장 생활에서 평생 직업에 대한 비전을 보게 것이다. 나는 번째 4분의 1 인생을 인생의 황금 도약기로 설정했다. 동안 배우고 수련한 것들의 토대 위에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을 축조해볼 있는 시기로 인식한 것이다. 나는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그날을 상상했다.

 

『이날부터 진정한 인생이 시작되리라. 이때 나는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이나 하는 것을 그만두리라. 일을 하리라. 일에 대한 소명감으로 나의 마음은 가득 차리라. 매일 새벽에 일어나 나만의 일에 몰입하리라. 몰입은 창의성으로 연결되고,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 불가능한 일을 믿는 법을 수련하리다. 매일 꾸는 꿈은 결국 이루어지리라. 내게 많은 시간을 쓰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많은 웃음을 나누게 되리라. 나는 스스로 창의적인 전문가가 되고, 차별성으로 유일해지리라. 그리하여 일을 통해 인류에 공헌하리라. 나는 기업이 나를 고용하지 않아도 스스로 고용할 것이니, 나는 이제 의존하지 않으리라. 나는 끝내 자유가 되리라.

 

나는 번째 4분의 1 인생을 '불만의 시절'에서 '영웅의 시절' 전환하는 변환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수혜자가 되었다. 직장인이었던 나는 마흔세 살에 작가가 되었다. 마흔여섯에 회사를 나와 변화라는 주제로 활동을 하고, 강연을 하고, 글을 썼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운동가로서 변화를 위한 범용적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행했다. 나는 프로그램의 최초의 창립자였다. 나는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내게 적용해보았고, 내게 적용하여 성공한 프로그램만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했다. 나는 생각의 실험장이었고, 내가 만든 백신의 최초 접종자였다.

 

나는 본격적으로 1 기업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0 하나의 대안이 실험적 과정에 많은 직장인들이 체계적으로 준비해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번째 연구 성과가 바로 <구본형의 필살기>라는 책으로 정리되었다. 이것은 현업의 기초 위에 미래를 축조하는 모델에 대한 심층 연구였다. 현업과 미래의 천직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심연을 건널 있는 다리 하나를 가설해두는 작업이었다.

 

처음에 나는 직장인들이 직장 내에서 소진될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에 좌절했다. 인생 중에서 겨우 4분의 1 정도밖에 직장에 체류할 없는 고용의 불안정과 너무도 빨리 '버려진다' 사실에 분노했다. 나는 '불만족스러운 평형 상태' 찾아내어 걷어차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분노만으로 해결될 있는 문제는 없다. 나는 없애야 것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새롭게 만들어야 것에 대한 열정이 필요했다. 나는 80퍼센트쯤 미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믿음은 잃어갔지만 새로운 믿음으로 채워졌다. 과정에서 나는 현재와 미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통찰 하나를 얻게 되었다.

 

그것은 어떻게 미래를 설계하느냐에 따라 현업에 대한 열정이 좌우된다는 점이다. 직장인들이 현업에 몰입하지 못하는 가장 이유는 현업에서 비전을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업에서 미래의 비정으로 닿을 있는 다리를 하나 놓게 된다면 사람들은 훨씬 현업에 몰입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일에 열정을 쏟아 넣으면 미래의 비전에 자연스럽게 도달할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미래의 비전은 현업의 길을 비추는 등대가 된다. 미래를 설계하면서 현업이 무의미해지고 당장 떠나야 것으로 느껴지는 경우는 현업과 미래의 비전 사이에 깊은 심연이 있어 서로 닿을 있는 길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직장에서 11 차가 되기까지 나는 현업에 만족하고 있었는데도 반복되는 일과의 지루함과 매너리즘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고, 일상의 무기력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경영 컨설턴트가 되어 동안 보지 못했던 다양한 정보를 접하게 되고, 회사와 경영의 구석구석을 알게 되면서 인식의 지평이 넓어졌다. 이윽고 정신적 확장이 이루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차별적 전문성에 대한 투지와 흥분이 내면에서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열심히 책을 읽고 연구했다. 아이디어를 실험했고, 아이디어가 스스로 싸워 살아 나가는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많이 알게 되고 깊이 알게 되면서, 일이 재미있고 기쁨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 일로 공헌할 있게 되었다는 것이 일에 대한 자부심이 되었다. 전문가의 확신을 가지게 되자 다른 사람들은 불안해하는 곳에서도 입장을 견지해낼 있었다. 나는 단단해졌다.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두려움 없이 2 인생을 향해 기쁨으로 출항할 있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10 동안 스스로 불러왔던 '변화경영전문가'라는 타이틀을 거두고, 2010 이후 나는 스스로 '변화경영사상가'라고 불렀다. 명함에도 그렇게 써두었다. 전문가에서 사상가로 전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기술적인 컨설턴트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이제 그것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공부하여 알게 것과 체득한 깨달음을 마음대로 실험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생각을 다루고, 의식을 다루고, 태도를 다루고, 가치를 다루는 것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문가에서 사상가로 전환했다. 그렇게 한동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변화경영의 시인'으로 죽을 것이다. '시처럼 산다' 이것이 인생 후반기 진화의 여정이다. 바라건대 삶에서 결코 물러선 적이 없기를 자신에게 당부한다.

 

 

견딤 . 침묵의 10년을 걷다

고독한 고요, 인류의 유산에 흠뻑 젖다

내게 묻는다. 내게도 침묵의 10년이 있었을까? 물음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너무도 명확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1991 IBM 아시아 태평양 경영심사관으로 활동하게 , 발하자면 인생에 대해 높은 차원의 세계를 감지한 2000 1 기업가의 가능성을 가지고 회사를 나오기 전까지 10년간 나는 나를 훈련할 시간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회사에서 맡은 업무들 중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면서도 적성에 들어맞는 전략적 업무'들에 집중했다. 업무에 관한 나는 누구보다 잘하기 위해 애썼다. 전략적 업무에 대한 나의 목표는 단순히 업무를 끝내는 것이 아니었다. 일들에 대한 목표는 '탁월함'이었다. 최고의 수준을 지향했던 것이다.

 

특히 마지막 3년간은 회사에서 수련한 내용을 글로 정리하고 써내는 작업을 추가했다. 1997 여름 이후,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매일 아침 두세 시간씩 글을 썼다. 모두 변화경영에 관한 글이었다. 특히 번째 <월드클래스를 향하여> IBM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경영심사관으로 일했던 경험과 노하우를 정리하여 경영평가 모델을 변용해낸 책이었다. 2000 IBM 떠나면서 나는 책을 자신에게 선물했다.

 

돌이켜보면 경우는 정말 '10 동안 1 시간'이라는 법칙이 거의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1991년부터 2000년까지의 기간도 그렇고, 투여된 시간의 합도 거의 맞아떨어졌다. 9 동안 나는 변화경영과 관련된 전략적 업무를 탁월함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업무 시간 절반인 시간 정도를 매일 집중 투자했다. 시간씩 1주일에 닷새면 매주 스무 시간을 것이다. 1년은 대략 50주가 되니 1년에 대략 1,000시간을 쓰게 것이다. 9 동안 9,000시간을 수련 기간으로 썼다. 거기에 마지막 3 동안은 매일 시간씩 독학의 시간으로 새벽 시간이 추가되었다. 2,000시간이 더해졌으니, 9 동안 1 1,000시간 정도가 투여된 것이다. 2000 이후 나는 변화경영전문가라는 1 기업가가 되었다. 지금까지 새벽 4시에 일어난 13년이 되었다. 매일 새벽에 두세 시간씩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하루 두세 시간 정도는 책과 더불어 보낸다. 그러니 매일 다섯 시간 내외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작업을 하고 있다. 덕에 13 동안 17권의 책을 내게 되었다. 앞으로도 매년 권의 책을 출간하는 것이 목표다. 그렇게 것이다. 낙관의 근거는 분명하다. '매일의 습관' 나를 이끌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다. 당시 꿈은 역사학 교수가 되어 모교에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삶의 물결은 나를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았다. 역사학 교수가 되는 대신 20년을 직장인으로 멀리 돌아오는 동안, 나는 변화경영사상가가 되었고, 작가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본다. 스스로 계획하여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한 역사학 교수와 길을 돌아 어찌 어찌하여 이르게 지금의 어느 것이 나다운지를 멀어본다. 나는 지금이 좋다. 천복을 찾은 것이다. 그러므로 운명이 나를 이끌었다고 있다.

 

글을 쓰는 작가가 되어 생활하고 있는 내가 조지프 캠벨의 일생 중에서 가장 놀라워하고 부러워하는 부분은 젊었을 우드스턱에서 보낸 5년의 시간이다. 나도 젊은 시절에 그렇게 멋지게 인류의 유산으로 흠뻑 젖는 고독한 고요와 격렬함을 만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진심으로 부러워한다. 종종 고전의 숲을 거닐다 보면 고풍 어린 가옥과 어렴풋한 과거의 저잣거리를 걷게 되는데, 이런 퇴색하고 먼지 쌓인 풍광들이 어떻게 미래에 기여하게 되는지 궁금하다. 과거는 어떻게 미래의 가장 첨예한 부분이 닿을 있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도약을 위한 거부할 없는 실천 강령 하나를 얻을 있다 .

 

『과거와 싸우지 마라. 먼저 과거의 유산을 상속받으라. 부끄러움 없이 훔쳐 모방하고 반복하여 먼저 과거의 정점에 서도록 해라. 미래의 풍경은 너머에 있다. 그러니 매일 걸어라. 매일의 힘만이 꿈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믿음직한 주술이다. 명심할. 평범한 자가 비범한 자를 능가할 있는 유일한 길은 분야를 정하고 들이 파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도 분야에 대해서는 너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다. 침묵의 10년을 보내라. 고독한 10, 궁핍한 10년을 보내라. 누구든 우드스턱의 시대를 거쳐야 한다.

 

 

견딤 . 여명처럼 고독을 지키다

새벽의 축조물, 홀로 살아야 하는 불안을 견딘 나의

나는 변화경영사상가다. 글을 쓰니 작가고, 강연을 하니 강연가지만, 이것에 굳이 직업적 의미를 두면 혁명가에 가깝다 있다. 왜냐하면 잠재력의 운무 속에 잔뜩 가려진 위대한 자신을 발견하라고 선동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장 죄는 인생을 낭비한 죄라고 압박하기 때문이다. 혁명가는 본질적으로 선동가일 밖에 없다.

 

혁명가는 가슴에 불가능한 것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역시 매일 꿈꾸는 법을 훈련한다. 불가능한 꿈을 꿀수록, 매일 불가능을 믿는 훈련을 통해 정신적 근육은 단련된다. 불가능한 일을 믿을 없다고?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대한 어느 하나도 한때 불가능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누군가 꿈을 꾸고 목표를 정하는 순간 그것은 현실의 세계로 이끌려왔다.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품자. 매일 꿈꾸는 연습을 하자. 아침밥을 먹기 불가능한 하나씩을 믿어보자.' 이것이 내가 매일 새벽에 하는 일이다. 이것은 곧바로 내가 글을 쓰는 행위로 이어진다.

 

나는 새벽에 꿈들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아마 70퍼센트 정도는 미쳐 있는 상태에서 하루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의 태양이 떠오르는 동안 잠재력이라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새벽 강을 따라 흐르며 꿈꾸었던 것들은 정체를 드러낸다. 현실의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는 환영들을 본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거대한 성채 하나가 여전히 있다. 나는 안도한다. '저것이 나의 제국이다.' 매일 같은 꿈을 꾸고 새로운 꿈을 더해갔기에 반복된 축조의 노력에 의해 햇빛 속에도 상상의 산물은 여전히 굳건하다. 매일 조금씩 명료한 실루엣을 가지기 시작한다.

 

새벽이 축조물인 나의 책들은 현실로 탄생하지만, 속의 내용들은 꿈들이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꿈들. 나는 그것이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는 알게 되었다. 믿음의 체계가 현실인 것이다. 가슴속 깊은 곳의 믿음을 바꾸는 순간 나의 인생도 바뀌었다. 인생은 믿음이 자신을 구현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완성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자체가 목표다. 그러므로 멈추어 서는 순간 더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음, 이것이 삶을 시처럼 사는 것이다. 시는 황홀로 쓰는 것이니, 이때 마음속에서 신을 만나게 된다.

 

나는 나를 변화시킬 있다고 믿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나는 나를 혁명한다' 라는 선동이 오랫동안 안에서 조금씩 자라 나의 나무가 되었다. 나무는 점점 자라 울창해졌고, 안에 아름다운 것들을 품게 되었다. 풍성한 잎사귀들 틈으로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품어내고, 붉은 열매를 맺고, 황홀한 단풍으로 물들기도 한다. 안에 키운 나무, 나는 이것을 사랑한다.

 

'나를 혁명한다' 것이 무엇인지 아름답게 묘사한 글이 있다. 헬가 쾨니히스도르프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동화 속에 <어린 왕자와 나무 빛깔 눈을 가진 소녀>라는 이야기가 있다. 속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는데, 나는 아름다운 장면을 심상의 하나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반복하여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다. 눈을 감고 영상을 느껴보라.

 

『어린 왕자는 기쁘지 않으면 장미까지도 불행하게 만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풀밭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대 그는 거미줄에 둘러싸인 나뭇잎 속에 매달려 있는 번데기를 보았다. 무언가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번데기에 금이 가고 조그만 다리 하나가 나왔다. 그리고 검은 머리가 보였다. 비틀거리며 나비 마리가 바깥으로 몸을 내밀었다. 아직은 형편없이 구겨진 모습이었다.

"안녕" 어린 왕자가 말했다.

"잠깐만" 자신의 흉한 모습이 드러나자 고통스러워하며 나비가 대답했다.

나비는 태양을 향해 버둥대며 앞발로 날개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날개를 천천해 펼쳤다. 날개는 붉은 하나와 하얀 반점들이 군데군데 찍혀 있는 검은 벨벳 같았다. 나비는 여유롭게 몸을 닦고 윤을 냈다. 그리고 날개를 수평으로 내리기도 하고 태양을 향해 세우기도 했다.

"안녕" 마침내 정신을 차린 나비가 말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구나" 어린 왕자가 소리쳤다. " 우중충한 껍질 속에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이 들어 있다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누구나 자신을 계발해야 " 나비는 이렇게 속삭이며 기울고 있는 석양 속으로 나풀거리며 날아들어 갔다.

 

이것이 내가 이루려는 혁명이다. 나는 장면을 마음 속에 품어두었다. 나의 내면에도 방기되고 마비된 많은 것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흉하고 초라한 속에 구겨져 있는 나비, 때가 되어 껍데기를 벗으리라. 나의 혁명에 성공하리라. 그리고 파란 하늘을 날게 되리라. 이것은 얼마나 멋진 푸른 혁명이냐!

 

사람은 자신이 꿈꿔내지 못한 것을 이루어 없다. 나비 혁명이 가능 하려면 안에 이미 가지고 있는 내면의 힘을 응시해야 했다. 어던 사람들은 자신을 탐사하지 않는다. 대신 세상이 요구하는 함성에 기울인다. 세상이 하면 돈을 따르고, 모두 명품을 찾으면 명품이 자신을 대신하는 정체성이 되고 만다. 결국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함께 원하여 가지게 되더라도 그것이 '나의 나비' 되는 법은 결코 없다.

 

나는 작가라는 번도 시도하지 않은 불가능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믿는 '만으로는 혁명을 이를 없다. 혁명을 이루게 하는 것은 실천이기 때문이다. 실천은 시간이 누적적으로 쌓인 것이다. 나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쓴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매년 권의 책을 있는 힘은 여기에 있다. 매일이 모여 1 만에 권이 되며, 매년이 모여 인생이 되고, 나는 수십 권의 책을 작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루의 경영에 실패하면, 화가가 손을 그리다 그림처럼 꿈은 초라해진다. 줄기 무상의 바람이 불고 이내 꿈은 추억이 된다. 꿈은 흔적만 남아 미련이 되고 몸은 하루의 밥벌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 우리는 불행하다. 그리고 불행은 페스트처럼 직장을 휩쓴다.

 

나를 혁명하자. 어떤 나이든 나이는 혁명하기 없이 좋은 나이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외롭다. 자신의 꿈을 세상에 외치기 때문이다. 나는 경영인도 아니고 경영학자도 아니다. 나는 그들의 무리에 끼지 않는다. 나는 문인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다. 그렇다고 철학자도 아니다. 나는 어디에도 분류되어 끼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나의 골목길을 발견했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 길이 아무리 좁아도 길이라는 , 고독이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는 것을 알게 것이다. 나는 경쟁하지 않는다. 싸움이 장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쟁은 없지만 수요는 많은 곳을 나의 촉수는 감지한다. 나는 푸른 바다를 찾아 나섰고, 그래서 나의 항해는 혼자였다.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그래도 내가 약간 지나치게 진지해 보이거나 비장해 보이는 이유이기도 것이다.

 

작가도 1 기업가도 태생적으로 외로운 존재방식이다. 1 기업가이며 작가가 되어 살기 시작할 나는 고독을 견딜 있도록 가지 행동철학을 세워두었다. 10년째 나는 철학에 의지해 길을 걸어왔다. 첫째는 이제 더는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며 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오직 나의 명령에 따라 산다. 나는 작더라도 마음대로 있는 나의 제국을 원한다. 번째는 마음대로 있는 시간의 양을 늘리는 것이다. 마음대로 있는 시간을 늘림으로써 자유의 양을 늘리는 것이다. 자유의 양이 많아질 때만 진정한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번째는 본업을 통해 세상의 밝음에 기여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응원하는 일을 한다. 이것이 나의 기쁨이 되었다.

 

결국 나의 철학은 자유를 옹호한다. 인생이니 마음대로 있는 영역을 넓혀야겠다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비위를 맞추고 사느니 차라리 마음대로 사는 고독을 택해도 좋다고 생각한지 오래다. 스스로 가족이 먹을 것을 벌고, 스스로 선택한 천직으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드는 일에 기쁘게 참여하는 ,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넘어섬 하나. 천둥 같은 스승을 얻다

스승, 어두운 위에 뿌려진 달빛 같은 영감

내게도 스승이 한 분 계시다. 이제는 작고하셨다. 선생님이 생각이 날 때 마다 나는 학생이 된다. 그러나 나는 좋은 제자가 못되어 드렸다. 그 동안 많이 찾아 뵙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나처럼 그 분을 좋아 하는 제자는 아마 없을 지도 모른다. 내 삶의 한 모퉁이를 돌 때 마다 그 분은 거기 서계셨고, 내 인생의 갈림길 마다 나는 그 분에게 내가 갈 길을 물어보곤 했다. 물론 직접 찾아가 물어 본 것은 아니다. 갈림길과 모퉁이를 돌아 설 때 마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그 분 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삶의 중요한 순간 마다 나는 이 질문을 꼭 했고, 그래서 이 나마 내 길을 즐기며 걷고 있는 것임을 안다. 지금도 이 질문은 계속된다.

 

그 분을 처음 만난 때는 1972년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을 때거나 1973년이 시작하는 때였다. 나는 재수의 피곤함에서 벗어나 얼른 대학에 들어가 빛나는 젊음을 발산하고 싶은 풋내기였다. 우리는 대학의 면접장에서 처음 만났다.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뭘 하고 싶나?”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싶습니다.

“교수가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잠시 망설였다.

“선생이며 학자입니다. 그러나 선생이기 이전에 학자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이 대답에 대하여 별로 만족해 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면접을 당하는 사람의 민감함으로도 내 대답이 호감을 끌었는지 어땠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대답이 그럴 듯한 대답이라고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나처럼 기억을 잘 못하는 사람이 30년 도 더 된 대화의 한 끝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나는 선생님과의 대화의 어떤 부분은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만큼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 마다 선생님은 내 곁에 현존하는 훌륭한 역할 모델이었다. 나는 그 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분은 내 우상이었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대학 시절 몇 개의 장면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곤 한다.

 

그때 1970년대의 젊은이들은 주로 술을 퍼 마시며 젊음을 보내곤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은 자유의 공기로 가득했다. 입시에 치여 지냈던 새내기들에게 대학은 유토피아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빈둥거릴 수 있는 자유가 숨통을 트여주곤 했다. 라일락 꽃 가득할 때 몰래 술을 사가지고 가 학교에서 그 향기를 맡으며 마시기도 했다. 역사학과는 짝도 잘 맞았다. 여학생 열 다섯에 남학생 열 다섯이었다. 3일에 소연, 5일에 대연을 베풀며 술을 마셔댔다. 어느 날인가 그 날도 술을 마시다 문득 선생님 이야기가 나오고 우리는 선생님 댁으로 쳐들어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 때 선생님 댁은 성북 초등학교 앞의 운치 있는 한옥이었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작은 뜰이 정겨운 집이었다. 술이 좀 오른 풋내기들을 앞에 앉혀놓고, 선생님은 술과 안주를 내 놓으셨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자네들 담배 피우나? ”

대부분 이미 골초가 되어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재떨이를 가져다 주시며 담배를 피우라 하셨다. 아무도 피지 못했다. 선생님 앞에서 담배질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술과 달리 담배는 대단히 건방지고 껄렁한 것이어서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그 당시 결코 용납되지 않는 무례였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지 못하면 그 생각이 많이 나고, 결국 방을 나갔다 들어왔다 하게 되니,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이 더 낳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얼마 후 우리는 술이 들어 갈 수록 더 많은 담배를 피웠다. 방안은 담배연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다음 날 선생님 앞에서 담배질을 한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떠벌리곤 했다. 선생님은 그렇게 젊은이들의 유치한, 그러나 일상 속의 무용담 속에 존재하셨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다. 지금은 작고 하셨지만 예일 대학에서 그리스 로마사를 전공하신 미국인 신부인 진모덕(Murdock) 선생님 조교를 꽤 오래 동안 한 적이 있었다. 서양 고대사 책으로 가득 채워진 진모덕 신부님 방은 늘 내 방으로 착각되기도 해서 신부님이 안 계실 때면 친구들이 찾아와 놀다 가곤 했다. 그날 아침은 여름 방학 기간이었고 아침부터 찌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친구들이 찾아와 이 방에서 바둑을 두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토요일 날에 이렇게 이른 시간에는 연구실에 잘 나오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창문과 방문 모두를 열어 놓고 바둑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길현모 선생님이 런닝셔츠 바람으로 이 방에 들어 온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그 때, “자네들 뭐하나. 뭐가 이렇게 시끄러운가?” 하는 소리에 우리는 경악했다. 이런, 선생님이 나와 계셨단 말인가? 선생님 연구실은 방 두 개 건너에 있었다. 놀라 벌떡 일어나 도열하듯 서 있는 우리들을 돌아 보고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그래, 누가 제일 잘 두나? 나하고 한 번 두세.”

 

바둑판이 벌어졌다. 중간에 선생님은 우리에게 담배를 한 대 달라고 하셨다. 그러나 불을 붙여 피시지는 않았다. 바둑이 점입가경으로 흐르는 동안 불 붙지 않은 맨 담배를 정말 피우듯 ‘후’ 품어 내시기도 했다. 선생님은 그때 2 급 쯤 두셨던 것 같은 데, 오랫동안 바둑을 두지 않으셨던 것 같았다. 우리 중에 바둑을 잘 두는 친구가 있어 선생님이 이기시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바둑 한 판으로 우리를 잠재웠고, 잔소리 한 마디 없이 연구실을 연구하기 참으로 좋은 여름 토요일 오전 침묵으로 가득한 깊은 공간으로 만드셨다. 우린 늘 이런 선생님의 능력에 놀라곤 했다.

 

선생님의 강의는 내게 늘 놀라움이었다. 대학에 들어와 '서양사 개설''역사학 입문'을 들으며 나는 수업의 진미를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강의 도중 지긋이 눈을 감고 좋은 단어를 찾아내시기 위해 애쓰셨다. 이윽고 폭포처럼 가장 적합한 표현이 쏟아지고, 역사 속의 한 인물, 한 장면은 갑자기 두꺼운 먼지 속에서 벌떡 일어나 앉곤 했다. 그 사람들, 그 장면들이 시간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는 장면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콜링우드의 '역사학 개론'을 가르치시며,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뜻은 대략 이랬다. ‘이론이 그 자체로 모두 옳은 것 같아 진위를 구별하기 어려우면, 직접 겪어 체험해 보아야한다“ 이것은 플라톤의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두 개의 대화편, <파이드로스><크리톤>에서 가르친 것을 연상시켰다. "논리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웅변이 되지 못하는 잡담이며, 경험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논리는 논리가 아니라 부조리다."라는 가르침과 섞여 천둥 같이 내 가슴을 울렸다. 나는 그때 비코, 랑케, 크로체의 역사이론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들의 역사이론은 모두 빛나는 매력이었다. 서로 부딪치면서도 서로가 말하지 못한 영역을 보완해 주는 듯 했다. 새내기 젊은이의 풋지식은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조금씩 뿌리를 내려 깊어지고, 달달 외워야 했던 연대기 속의 역사적 사실과 가설들은 처음으로 지적 즐거움의 대상이 되었다.

 

대학에 입학할 때 선생님께 나는 앞으로 역사학자가 될 것이고, 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를 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7년 후, 대학원에 입학할 때, 역시 같은 대답을 했었다. 두 번 다 선생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길도 있다는 여운을 남겨 두신 것 같았다. 그때는 좀 이상하다 생각했었다. 혹시 선생님께서 좋은 학자가 되기에는 내 자질이 부족하다 여겨 그러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마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 뜻은 분명히 말 그대로 바로 그 뜻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스스로 모색하거라. 헌신하고 모든 것을 걸어라. 그러나 그 길이 아니라 하더라도 실망하지 마라. 앞에 다른 길이 나오면 슬퍼하지 말고 새 길로 가거라. 어느 길로 가든 훌륭함으로 가는 길은 있는 것이다.“ 아마 그런 말씀이셨을 것이다.

 

선생님은 분주한 분이 아니셨다. 어울려 여기저기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상하게 우리의 놀이 속에 흔쾌히 자리해주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두려워 했다. 무서움은 깊은 존경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언젠가 늦게 장가가는 친구가 아내 사람과 함께 선생님에게 인사 드리러 나도 따라간 적이 있다. 선생님을 뵙고 나오면서 여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 그렇게 쩔쩔 매세요? 선생님이 어려우세요?"

 

그렇다. 그래도 우리는 선생님을 좋아하고, 좋아하는데도 편히 앉지 못하는 존경심으로 가득했다. 마음으로 존경할 있는 분을 만났던 젊은 시절이란 얼마나 행운이었던가! 살면서 마음으로 깊이 머리 숙일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다음에야 좋은 선생님을 가진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들인지 깨닫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한국 최고의 역사학자들에게서 수학했다. 서양사에 길현모 선생님이 계셨고, 한국사에는 이기백 선생님이 계셨고, 동양사에는 전해종 선생님이 계셨다. 그리고 차하순, 이광린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한 팀을 이루고 있었다. 다른 학교의 역사학도들이 늘 부러워하여 멀리 와서 청강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봄 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 난만한 5월의 교정을 걸어 그 분들이 함께 식당으로 점심을 드시러 가시는 것을 보며 우리는 늘 감탄하곤 했다. 당대를 풍미하는 학자들이 저렇게 서로 어울려 함께 공부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삶을 사시는구나 하는 부러움을 가졌다. 우리가 마주쳐 인사하면 “그래, 밥들 먹었나?” 하며 웃으셨다. 우리들은 모교에 대한 자부심 보다는 역사학과에 더 많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선생님들이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데서 오는 힘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대학생활은 늘 중간고사가 끝나면 학교는 폐쇄되었다. 독재에 대항하는 데모와 강제적 일시 폐쇄가 반복되었고, 학기의 후반부가 없는 대학 생활은 내내 계속 되었다.

 

나는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가 되고 모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그것은 선생님 탓이기도 했다. 나에게 역사에 대한 떨림을 갖게 해 준 분도 선생님이셨지만, 내가 대학원을 떠나게 된 것도 선생님 때문이었다. 방황하듯 대학 생활의 3 년을 보낸 후, 군대에 갔다 복학했고, 1년 후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1980년이었다. 그해 첫 학기에 대학원에서 선생님과 우리들은 칼 만하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읽고 토론을 했다.

 

해 희망으로 가득 찼던 봄은 가혹하고 잔인하게 지고 말았다. 그 해 봄 학생들은 서울역으로 시청으로 매일 운집했다. 젊은이들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으로 빛나는 조국을 가지고 싶어했고, 지식인들은 ‘지식인 성명’을 내기 시작했다. 한국은 긴 독재의 상처와 그늘에서 금방이라도 벗어날 듯 보였다. 그러나 학교는 다시 폐쇄 되었고, 전두환 군부는 광주에서의 민주화 운동을 내란으로 규정했고 잔인하게 진압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써야 할 병력이 제 국민을 죽이기 위해 투입되었다. 지식인 성명의 대표자였던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우리는 선생을 잃었다. 나의 길은 불투명해졌고, 나는 다른 분 밑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선생님께 배우는 것이었다. 대학원을 나와 그 해 12월 나는 직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역사학자가 되는 길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다. 그 길은 결국 내 길이 되지 못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선생님 소식을 가끔 전해 들었다. 춘천의 한림대학으로 옮겨 그곳에 계셨을 때, 친구와 함께 찾아 뵈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반겨 주셨다. 먼 곳을 찾아 왔다 하셨다. 일주일에 며칠은 춘천에 계셨고, 나머지는 서울에서 계셨다. 그리고 나는 회사 일에 치여 사는 회사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아이를 낳고 아이들 키우고 작은 집을 장만하고 집을 넓혀가는 다른 사람과 똑 같은 일상을 살고 있었다. 선생님을 오래 뵙지 못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도봉산 밑 아파트에 사모님과 함께 사실 때 나는 두어 번 찾아 뵈었다. 언젠가 추석 즈음에 선생님을 뵈러 갔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나오는 데, 마침 선생님께서 시내에 사시는 동생 분에게(아우인 길현익 선생님은 결혼을 하시지 않고 혼자 사셨는데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동양사를 가르치셨다)가려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선생님을 모셔다 드리고 작별했다. 사모님께서 챙겨주신 음식 보따리를 들고 선생님은 추석 즈음의 그 빛나는 가을 속에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셨다.

 

이 글을 쓰다 내 노트북 한 구석에 선생님께 써 두었다가 보내지 못한 편지 한 장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마 10년 도 더 된 편지인 것 같다. 오래 전에 써 두었지만 주인을 찾아 배달되지 않은 편지를 읽으면 왠지 추연해 진다. 삶의 지나간 한 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시간 여행처럼 이미 사라 진 나와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인 모양이다.

 

『선생님께

 

지 2년이 지났습니다. 늘 뵙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 깨어나 보니 문득 선생님이 몹시 그리웠습니다. 짧은 편지를 드립니다.

 

어려울 때도 있었고 지루할 때도 있었고 그저 그러려니 건들거리며 산 때도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도 많았고 쓸데없는 걱정에 싸인 때도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처럼 때로는 넓은 강폭을 이루어 햇빛에 빛나기도 하고 때로는 좁고 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거칠게 흐르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게 달 같은 분이셨습니다. 세상을 살며 아주 어두운 때에도 그렇게 깜깜하지만은 않아서 가끔 하늘을 볼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별빛이 그렇게 쏟아져 내리나 하고 말입니다. 어두운 밤 나뭇가지에 달이 걸려있는데, 때로는 비수처럼 날카로웠고 때로는 둥글어 참으로 넉넉하고 풍요롭게 보였습니다.

 

1973년에 서강에 입학하여 선생님을 뵐 때, 마침 햇볕이 환한 언덕을 다른 선생님들 몇 분과 어울려 점심식사를 하러 가시는 것을 뵐 때, 저는 선생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공부하고 가르치고 그리고 학생들의 빛이 되는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세상은 그 욕망으로 가득했었습니다.

 

1980년 5월에 선생님께서는 학교를 떠나시게 되셨고, 저 또한 대학원 1학기를 채 마치지 못하고 그만두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서강에 계시지 않으니 서강에서 더 공부할 수 없었습니다. 한 2년 일해서 1년 학비가 생기면 유학을 떠나려고 취직을 하였었지요. 그러다 결국 눌러 앉게 되고 저는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길이 달라져서, 사느라고, 혹은 부끄러움 때문에, 가지가지 이유 때문에 자주 찾아 뵙지 못했지만 선생님께서는 늘 제 마음 속의 달빛으로, 어두운 길의 달빛으로 늘 그렇게 계셨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 질문은 어둡고 어려울 때 저와 함께 살아온 오래된 물음이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서강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선생님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치기 어리고, 쓸데없는 명예를 좇고, 속이 허한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제자입니다. 헤매며 제 길이라 여긴 길을 가다 보면 조금은 나아지려니 하고 위로합니다.

 

아침에 이렇게 짧은 편지라도 쓰고 나니 그리움이 조금 덜어진 듯도 하고 더 깊어지는 것도 같습니다.』

 

세상을 살며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정리하여 그것을 모아두면 한 사람의 자서전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직접적으로 발가벗은 자신에 대하여 말해야 하는 ‘나의 이야기’ 로서의 자서전이 아니라 내게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야 말로 너무도 결정적인 내 삶의 증거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피터 드러커는 자신의 자서전을 쓰면서 자신에 대한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심대한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영향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것이 관찰자의 운명을 타고난 자신의 이야기라 불렀다. 선생님은 내 삶을 이룬 중요한 상징적 테마였고 질문이었고 가능한 대답의 하나였다.

 

"보통의 선생은 그저 말을 하고, 좋은 선생은 설명을 해주고, 훌륭한 선생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스승은 영감을 준다." 말이 있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학자의 모범을 보았고, 어두운 길 위에 뿌려진 달빛 같은 영감을 받았다. 내가 선생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나도 선생님처럼 누군가의 좋은 스승이 되고 싶다. 한없이 모자라는 사람이지만 선생님은 내게 이 열망을 품게 해 주셨다. 나이가 들어 연구원들을 모으고 그들과 함께 책을 읽고 책을 쓰는 일을 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나는 너무도 분명히 훌륭한 선생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고 만질 수 있는 행운을 가졌던 것이다.

 

 

넘어섬 , 나를 넘어 세계에 접속하다

재능을 기부하고 사람을 얻다

나는 살이 되던 아침을 기억한다. 잊지 못할 것이다. 40대의 10년은 내게 집중된 시간이었다. 직장에서 나와 새로운 인생을 어떻게 시작할까에 맞춰진 실험의 기간이었다. 마흔여섯 살에 직장을 나와 나는 4 동안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는 진력했다. 나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나를 쓰지 않았다. 그저 아이를 키우고 궁핍이 나를 비굴하게 하지 않을 정도를 원했다. 내가 원한 것은 자유였다. 인생을 마음대로 살고 싶은 자유, 나의 세계를 하나 갖는 , 그것이 직업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나는 1 기업가가 되었다. 스스로를 고용하는 성공했다. 먹고 사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었고, 나는 매일 내게 주어진 자유의 축복을 즐길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살이 되면서 나는 인생의 의미를 묻게 되었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되었으니 살은 질문에서 물러설 없는 분수령이었다.

", 이제 독립에 성공했으니, 너는 무슨 일로 삶이 의미 있음을 증명할 것이냐?"

질문 앞에 서서야 비로소 의미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눔과 공헌이 없이는 의미의 문제를 채울 없다는 것을 깨닫게 것이 바로 이때였다. 혼자 먹고 살면 재미없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세상에 빚지지 않은 것이 없다. 좋은 것은 물론 나쁜 것까지도 나는 세상에서 배웠고, 사람들에게서 배웠다.

 

이러한 자각 속에서 살이 되던 , '그것 때문에 50 10년이 훌륭했다'라고 말할 있는 10개의 아름다운 장면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을 삶의 '아름다운 10 풍광'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미래로 먼저 가서 지난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 도치의 방식을 써보았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미래의 회고'라고 불렀다. 2004, 나이는 살이었다. 나는 10 뒤인 2014 아침을 가정했다. 그리고 시점에서 인생을 돌아보았을 가장 아름다웠던 광경을 회고해보는 방식을 썼다. 스스로 미래 여행을 했던 것이다. 방식은 단순히 미래를 계획하는 것보다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미래로 먼저 가서 과거를 회상하기 때문에 모두 과거 시제를 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미 이루어진 과거로 인식한다는 것은 커다란 정신적 전환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 역시 이미 이루어진 '으로 인식함으로써 나의 내면적 동기는 고양되었다.

 

나는 방법을 스피노자에게서 배웠다. 스피노자는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으니 미래 역시 과거와 마찬가지로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나는 생각에 자극 받았다. 생각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마크툽'(미래는 이미 쓰여 있다!)이라는 재미있는 단어를 기억하는가? 역시 미래를 이미 일어난 과거로 써보면서 일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며, 결국 인생에서 일어난 멋진 일이 것이라는 강한 주술을 걸어보게 되었던 것이다.

 

'미래의 회고' 주는 번째 장점은 10 앞으로 먼저 가보았기 때문에 웬만한 삶의 도약은 전부 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만일 현재 시점에서 미래를 축조해간다면 너무도 황당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어 보이는 풍광 역시 보존할 있다는 것이다. 10년이란 거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이다. "10 뒤로 나를 날려 보내라. 그러면 거의 모든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품을 있다" 이것이 나의 주술이다.

 

게바라의 말을 기억하는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 모두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자"

그리하여 나는 10 풍광을 그리기 시작했고, 50 10년의 거의 3분의 2 지나가는 지금 나는 꿈들이 놀라운 에너지로 커가고 있음을 매일 확인할 있다. 특히 '내가 가장 있는 것으로 세상에 기여한다.' 원칙에 따라 그려본 다음 개의 풍광은 다른 이들에게 인생을 나누어 주는 기쁨으로 가득 채워졌다.

 

번째 풍광

우리의 불행은 꿈을 이루지 못해서가 아니라 꿈조차 없기 때문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희미한 것이었고, 사라져가는 것이었고, 이루지 못하는 것이었고, 맞출 없는 퍼즐의 조각에 불과했다. 조각을 가지고는 전체를 그려보기조차 어려운 작은 편린에 불과했다. 예로 거의 모든 사람이 가장 하고 싶은 하나로 여행을 꼽지만, 그것이 어찌 인생을 전부 프로젝트가 있겠는가? 삶을 송두리째 바치게 하는 일생일대의 꿈을 찾아 그들이 이동할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 꿈의 페이지'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꿈을 찾아갈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은 모두 그것을 찾아 떠났다. 여행에 참석하게 되면 우리는 단식한다. 살며 수시로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선택의 순간에 밥과 현실을 택하지 않으면 되었던가! 순간 우리의 꿈은 얼마나 무력해졌던가! 그리하여 여행에서는 밥을 먹어보지 않으리라. 밥이 존재를 손아귀에 넣고 흔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막지 않음으로써 먹는 것의 절박함을 이해하고 그것이 탐욕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직업이란 결국 밥과 존재를 다룬다. 밥을 벌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포기하면 존재가 울고, 자신의 존재를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밥이 되지 않는 대립의 딜레마를 화해시킬 있는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 프로그램의 목적이다. 사람마다 여행에서 얻은 성과는 다르다. 며칠의 여행으로 모두 그들의 꿈을 그려내지는 못했다. 어떤 이는 회귀했고, 어떤 이는 더욱 방황이 깊어졌고, 어떤 이는 축복처럼 자신의 길로 들어섰다. 분명한 것은 어떻든 그것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점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처음 참석할 때는 제법 많은 돈을 내야 한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특징은 이후에는 평생 무료 애프터서비스를 한다는 것이다. 언제고 절실해져서 다시 들어오고 싶으면 다시 자신의 꿈을 디자인해볼 있다. 번이고 반복해서 이수할 있다. 그때는 모두 무료로 참석할 있다. 6년이 지나는 동안 프로그램에 참석한 사람도 있다. 프로그램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로를 '꿈벗'이라고 부른다. 과정에 참석한 젊은이가 그렇게 부른 후에 호칭이 공식화 되었다. 그들은 서로의 꿈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는 증인이 되었고, 훌륭한 응원자가 되었다. 생각해보라. 꿈을 나눌 있는 사람들, 조롱하는 대신 서로의 꿈으로 피륙을 짜는 사람들을 나이 들어 얻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이냐!

 

번째 풍광

나는 개인 대학원을 하나 만들었다. 건물도 없고 교실도 없지만, 나는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니크한 대학원 과정 하나를 만들어내느 것이 기여의 방식이었다. 나는 매년 10 내외의 연구원을 선정했다. 연구원 과정은 2년에 걸쳐 이루어진다. 연구원으로 선정되면 일주일에 온라인으로 주어진 과제를 해내야 한다. 일주일에 미리 선정된 도서를 읽고 정교하게 리뷰해서 숙제를 올려야 하고, 매주 편의 칼럼을 써내야 한다. 대략 일주일에 평균적으로 30~40시간 정도는 투여되어야 제대로 따라 있는 분량이다. 그리고 달에 정도 서로 만나 수업을 하게 된다. 이때는 미리 부과된 과제를 해가지고 와서 발표해야 한다. 사람이 발표하게 되면 연구원 전원은 각자 발표에 대한 코멘트와 조언을 해야 한다. 이것이 서로에게 주는 최고의 기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친구가 되고 스승이 되는 관계' 라고 부른다.

 

2 차에는 홀로 조용히 자신의 책을 써내야 한다. 일반 대학원이 졸업 논문을 학위를 얻어내는 것이라면, 대학원에서 연구원은 자신의 관심 분야에 대해 책을 써냄으로써 세상에 자신의 연구를 증명해 내야 한다. 학위는 없지만 권의 책의 저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 책을 써내지 못하면 졸업하지 못한다. 그저 수료자로 남을 뿐이다.

 

연구원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과정에 대한 수업료는 무료다. 엄밀하게 말하면 무료가 아니다. 나는 '지식의 물물교환'이라는 방식을 시도해보았다. 돈을 거래의 단위로 쓰지 않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거래의 단위로 사용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그들을 지도했고, 그들은 그들의 배움과 숙제를 홈페이지에 올려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학업을 참고할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의 책으로 세상에 기여하게 했다. 따라서 연구원 수강을 하고도 좋은 책을 써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지식의 교환에서 실패한 것이다. 받기만 하고 주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념을 좋아한다. 돈이 모든 것인 사회에서 옛날 방식의 따뜻한 대안을 찾고자 했다. 훈장이 가르치고, 아이들은 형편에 맞게 , , 말을 수업료로 내는 것이 농경사회에서의 보상방식이었다면, 지식 사회에서의 거래방식은 재능과 지식의 물물교환일 있다고 생각했다. 가치의 차이는 내가 훨씬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훨씬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 속에서 훌륭한 변화경영전문가나 작가들이 나타난다면 나는 훌륭한 제자들로부터 충분히 보상받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결국 사람으로 빛나게 마련이다. 아버지는 자식으로 빛나게 마련이고, 스승은 제자로 빛나게 마련이고, 국가는 키워낸 인재로 빛나게 마련이며, 인류는 위대한 인물들로 빛나게 마련인 것이다. 이것이 의도였다.

 

연구원들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나는 일반적인 자격 조건을 따지지 않았다. 학벌도 전공도 나이도 성별도 따지지 않았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20페이지의 '자기 이야기' 보내고, 선정된 책을 읽어낼 있고, 자신의 의견을 글로 피력할 있고, 과정에서 스스로의 관심사와 강점을 발견해 책을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있다.

 

처음에는 상상에 불과했으나 결국 현실이 되었다. 실제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통해 매년 30 정도의 꿈벗을 배출해낼 있게 되었다. 10년이 지나면 300 정도의 서로 지켜보고 도울 있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연구원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매년 10 내외씩 모두 60여명의 연구원을 배출해냈다. 10년이 지나면 어떤 연구원들은 이미 여러 권의 저서를 가지게 것이고, 관련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일을 직업으로 스스로 자립할 있고 공헌하게 것이다. 이것이 의도이고, 나눔의 본질이다. 책을 보고 관심분야를 연구하고 책을 쓰다 보면 기량이 높아질 것이고, 이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이들과 깊이 있는 연구를 함께 시작할 있을 것이다. 나는 꿈꾼다. 한때 직장인으로 시키는 일이나 하며 살던 지극히 평범했던 사람들이 스스로 역량을 닦은 전문가들이 되고 스스로의 길을 가게 것이다. 나는 이들을 동지로 얻게 것이다. 이것이 나의 기여의 방식이며 내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는 것이다.

 

 

 

II.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내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_사람에게서 구하라.doc

 

 

 

III. 내가 저자라면

전체적 구성에 대하여

저자는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이었던 춘추전국시대를 다룬 사마천의 <사기열전>  읽으며 시대의 자유로운 가치관과 다이내믹한 모색의 정신을 현대 서구적 경영의 기술과 성취와 연결할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고, 사이의 공통적 속성을 한국인들의 정서에 맞는 리더십 모형으로 만들 있다는 가능성에 열광했다.

 

처음 책은 가지 방향에서 접근되었을 것이다. 먼저 귀납적인 방향의 접근방식으로 사기열전, 열자, 논어 춘추전국 시대를 풍미한 각각의 인물들의 역동적인 다양한 이야기 스승의 가슴을 무찌르는 여러 개의 이야기가 선별되었을 것이고, 이야기들에게 다양한 인덱스가 붙여졌을 것이다. 이야기들로부터 가지의 공통된 의미 있는 키워드가 도출 되었을 것이다. 하나의 방향은 연역적인 접근방식인데, 귀납적으로 도출된 키워드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하고 배치하여 전체성을 갖춘 뼈대가 구상되었을 것이다.

 

먼저 책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키워드는 '오늘 우리에게 적합한 리더십과 인재경영 모델'이다. 지붕을 떠받치기 위해 저자는 자기경영, 섬김 경영, 인재경영, 변화경영, 윤리경영이라는 5개의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별도의 독립적인 기둥이 아닌 현대의 경영자들이 '혁신의 능력' 갖춘 리더로 발돋움 하기 위하여 밟아 나가야 하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단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자기를 다스리고(자기경영), 나아가 위를 섬기고 아래를 끌어 안을 있는 바탕(섬김 경영) 갖춘 후에 창조적 변화와 혁신을 꾀하고(변화경영), 나아가 단순히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단을 넘어 사회적 신뢰를 증진시키는 구성원으로 자리매김 하는(윤리경영) 것이다.

 

그러한 5개의 굵은 기둥은 25개의 꼭지 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저자는 꼭지의 제목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거부감을 덜어줄 있는 우회적이고도 은유적인 제목을 사용했다. 그리고 제목은 곧바로 이어지는 예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꼭지 글의 구성은 '예화 평설 현대 경영 사례 평설 결론' 방식을 취한다. 꼭지 글에 담긴 예화와 현대 경영의 사례는 꼭지 글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거의 완전하게 담아낸 촌철살인의 예화이다. 무엇보다 역사적 사례와 현대 경영의 사례를 정교하게 연결하는 저자의 접착 능력과 연결로부터 해당 주제 맞는 시사점을 도출해 내는 것이 책이 가지고 있는 차별적 가치다.

 

고전으로 상징되는 인문학과 현대사례로 상징되는 경영학의 조합. 이는 저자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는 변화경영의 핵심 아이템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오늘날의 '혁신적 경영자'에게 ' 것을 익히고 나아가 새것을 아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지혜' 전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저자라면

책은 '창조성과 차별성'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창조적인 것은 새로운 것이고, 새로운 것은 자체로 차별성을 갖는다. 우리는 흔히 창조성을 기존에 없던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적 성과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며, 우리가 아는 새로운 것들의 대부분은 기존에 있었던 것들 사이의 새로운 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책에 나오는 고사는 이미 2 년을 훌쩍 뛰어 넘은 오래된 이야기다. 여기 저기서 너무 많이 회자되어 닳고 닳은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또한 책에 나오는 현대 경영자의 이야기들도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면 쉽게 있는 흔한 사례들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거나, 쉽게 있는 흔한 사례들을 조합하여 저자는 멋진 리더십 이론을 하나 이끌어 내었다. 이것이 그가 가진 차별적 가치다.

 

나라면 기존에 있던 것들 어떤 것들을 한데 모아 창조적으로 조합할 것인가? 아주 당연한 귀결이지만 내가 아주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저자라면 NLP(신경언어프로그래밍) 10가지 전제를 굵은 꼭지로 하여, 이와 관련된 이야기와 가까운 시대를 살거나 살았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조합해 보는 시도를 해볼 같다. NLP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분야다. 따라서 저자가 시도했던 방식처럼 직설적인 표현은 삼가고 은유적인 주제를 채택하여 친근감을 유도한다.

 

영국의 NLP 전문가인 리처드 파크 코독의 <밀리언 달러 티켓>에서 NLP 대한 직접적인 언급 없이, 개인적 사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 비행기 안에서 우연한 기회에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하게 되고 그곳에서 대부호를 만나 가르침을 얻는다는 소설적 구성을 가지고 NLP 핵심 가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이와 비슷한 형식으로는 한상복의 <배려> 있다.

 

내가 저자라면 고전, 현대경영 사례, 직장인의 살아있는 이야기, 그리고 NLP 창조적으로 조합하여 기존의 NLP 서적과는 차별성을 비전문가, 특히 나와 같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변화와 성장,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향상시킬 있는 책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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