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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1일 21시 35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세 번째 읽으며 [사기]의 집필 과정, 평가와 위상, 구성과 체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사기]의 집필 과정

 

[사기] 집필을 가능케 한 사마천의 자료 취재 범위는 어떠하며 그는 그러한 방대한 자료들을 어떻게 얻은 것인가? 사마천이 사료를 수집하여 그의 책에 반영한 방식은 그 이전과 그 이후 대부분의 역사가들의 작업과는 달랐다. 그가 사료를 채집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사마천은 황가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나 문서를 열람했다. 예를 들어 [오제본기]태사공왈(太史公曰)’에서는 [춘추(春秋)], [국어(國語)] 등 자신이 본 도서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기] 전체에서 언급된 참고 도서를 통계 내 보면 사마천이 열람한 책은 모두 103종이며, 그 중에서 육경(六經)을 비롯한 서적이 24, 제자백가서가 52, 역사ㆍ지리 및 한나라 왕실의 문서가 20, 문학서가 7종이다. 따라서 사마천이 문헌과 전적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다.

 

② 금석문(金石文)과 문물(文物), 회화(繪畫), 건축 등에서 자료를 찾았다. [진시황 본기]를 보면, ‘태산석각(泰山石刻)’, ‘낭야석각(琅邪石刻)’, ‘지부석각(之罘石刻)’ 등의 글을 모두 그대로 수록했다.

 

③ 돌아다니며 방문하거나 실지 조사를 했다. [태사공자서]에도 사마천이 스무 살 남짓부터 남쪽으로 유람하는 길에 올랐다고 적혀 있다. 그는 동서남북으로 전국을 유람하면서 상고 역사에 관한 전설을 수집했고, 서주 건국 경영의 상황을 탐구했으며 학자들이 그에게 전해 준 오류도 바로잡았다. 그는 전국 시대의 이야기, 한나라 초기의 이야기, 옛 전쟁터의 형세, 역사 인물의 삽화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는 일반 백성의 말이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중시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사기]의 모든 편에 걸쳐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오제 본기] [주 본기]를 보면 본인이 실지 답사를 통해 얻은 구체적 정보가 생동감 있게 살아 있다.

 

그러나 [사기]에 사료적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많은데, 서술이나 인물 설정에 있어 소설적 색채를 가미했다는 것이다. 대표적 예로 [조 세가(趙世家)]를 들 수 있다. 이 편은 네 명의 군주가 꾼 꿈을 통해 조나라 발전사를 서술하는데, 사마천이 주로 의지했던 [좌전(左傳)]이나 [전국책(戰國策)]에는 없는 내용들도 수록되어 있다. 특히 널리 알려진조씨고아(趙氏孤兒)’에 관한 대목은 역사적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지만, 이 편의 백미라고 할 만큼 상당한 비중으로 서술되어 있다. [육국 연표(六國年表)] 서문에서 진나라가 분서를 단행하면서 모든 사료들이 소실되었다고 언급한 데서 보이듯, 역사가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소설적 구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태사공왈(太史公曰)’이라는 부분을 보면 사마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나 생각이 상당 부분 개입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론(史論) 체계가 사마천의 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좌전], [국어], [전국책] 등에도군자왈이라는 말이 있으며, ‘군자위(君子謂)’라든지군자이위(君子以爲)’라는 식의 논평이 84가지나 있다. 이러한 형식의 평론은 사론(史論)의 원형임에 틀림없고 사마천이태사공왈이라고 한 것도 [좌전]군자왈을 모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태사공왈에서 사마천은 고대 역사에서 증거를 찾아 제시하거나 사적을 유람하면서 얻어들은 것을 서술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인물을 포폄(褒貶- 옳고 그름이나 선악을 판단하여 결정함)하기도 하고 또는 역사적 사실을 풍자하기도 했다. 이렇듯 역사가의 존재가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태사공왈 [사기]를 읽는 진정한 묘미를 주며, 역사가의 일관된 평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책 전체를 혼연일체가 되게 만드는 매개의 구실을 한다.

 

주목할 점은 사마천의 생애와 집필 시기가 한 무제의 통치 시기와 겹쳐 있다는 사실이다. [사기]는 당시로는 현대사라고 말할 수 있는 무제 시대의 사건과 인물을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 무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황제이고 사마천 자신은 그의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 기록은 무제와 그의 치세를 비판적으로 그려내는 일과 연관되었으며, 여기에는 사마천 개인이 무제에 대한 사적인 감정도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사기]에 대한 평가와 위상

사마천은 [태사공 자서] 말미에서 “정본(正本)은 명산(名山)에 깊이 간직하고 부본(副本)은 수도에 두어 후세 성인군자들의 열람을 기다린다.”라고 했다. 정본을 숨겨 두려 한 사마천의 우려대로 통치자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은 [사기]에는 후세의 누군가에 의해 내용이 삭제되거나 변경된 흔적이 남아 있다. 더구나 한 무제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아버지 경제(景帝)와 무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보고 매우 노여워하며 [효경 본기] [효무 본기]를 폐기하도록 했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사기]는 그것이 완성된 전한 시대 때부터 오랫동안 왕실과 역사가들에게 소외된 채 몇 세기를 보내야 했다.

이는 90여 년 늦게 나온 반고(
班固) [한서(漢書)]와 달리, [사기]에는 유가 못지않게 제자백가를 두루 다루려는 학문적 균형 감각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마천은 유가보다는 황로 사상에 무게를 두고, 개방적인 사고로 자객, 광대, 점술가, 의사와 상인 등 당시로서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던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도 과감하게 열전()에서 다루었는데, 이는 당시 유가적 사회질서를 세우려 했던 통치권자들에겐 못마땅했을 것이다. 예컨대 사마천은 [자객 열전], [골계 열전], [일자 열전], [귀책 열전]에서 9() 3() 등 당시 사회의 세세한 부분까지 담아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반고는 [한서]에서 [동방삭전(東方朔傳)]을 제외하고는 비정통파나 하류 문화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반고 역시 [한서] [사마천전(司馬櫏傳)]에서 “그(사마천)가 시비를 가리느라 성인의 모습을 왜곡했으며, 대도(大道)를 논할 때에도 황로(黃老) 사상을 앞에 두고 육경(六經)을 뒤에 놓았으며, 유협(遊俠)을 서술할 때에는 처사(處士)들을 제치고 간웅(奸雄)들을 부각시켰다. 또 화식(貨殖)을 서술할 때에는 세력과 이익을 높이고 천하고 가난한 것을 수치로 생각했는데, 이 모든 것이 그가 만든 폐단이다.”라며 사마천을 호되게 비판했다.

 

당나라 역사가 유지기(劉知幾) 역시 비판적인 시각으로 [사통(史通)]에서 반고를 기리고 사마천을 깎아내렸다. 특히 그는 [이체(二体)]편에서, [사기] [좌전]을 기전체와 편년체의 비조(鼻祖- 시조)로 삼지만 진정으로 두 문체를 대표하는 책은 반고의 [한서]와 순열(荀悅) [한기(漢紀)]라고 했다. 그가 볼 때 사마천이 항우를 본기에 포함시킨 것이라든지 한나라를 배반한 제후왕인 오왕 비(), 회남왕 유장(劉長)과 유안(劉安), 형산왕 유사(劉賜) 등을 열전에 편입시킨 것, 심지어 한나라 초기 공신에 불과한 소하(蕭何), 조삼(曹參), 장량(張良), 진평(陳平), 주발(周勃) 등을 세가에 둔 것이나, 공자, 진섭(陳涉), 외척(外戚)을 세가에 둔 것은 인정하기 힘든 방식이었다.

 

그러나 [사기]는 당대(唐代)부터는 관리 임용 시험 과목에 들어가면서 중시되어 송대(宋代)까지 역사가와 문인들의 주된 관심 대상이 되었다. 당송팔대가인 한유(韓愈)는 사마천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유종원(柳宗元) [사기]를 ‘웅심아건(雄深雅健- 문장에 힘이 있고 함축성이 있어 품위가 빼어남)’이라고 평하면서 문장 학습의 기본 틀로 삼았고, 구양수(歐陽脩) [사기] 애호가로서 그것을 즐겨 읽으면서 작문에 활용하고자 했다. [사기]에 대한 평가는 원대(元代)에는 잠시 주춤했으나, 청대(淸代)에 기윤(紀昀)과 조익(趙翼) 등이 재평가했고 양계초(梁啓超)는 사마천을 ‘역사계의 조물주’라고 떠받들었다. 장병린(章炳麟) [사기] [한서]를 같은 대열에 두고 역사의 전범으로 여겼다. 특히 근대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루쉰(魯迅) [사기]를 일컬어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요, 운율 없는 [이소].(史家之絶唱, 無韻之離騷)([한문학사강요(漢文學史綱要)])라고 극찬했다.

 

[사기]는 이렇듯 오랫동안 회자되면서 일부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국 24()의 모범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관찬 역사서도 아닌 사마천 개인의 기록인 [사기]가 후대에 24()의 필두로 거론된 것은 우선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전국 시대를 거쳐 한 무제까지 이르는 시기의 유일한 통사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마천이 역사가로서 끈질기게 고집한 사실성과 현실성이 [사기]를 오랜 세월 동안 살아 숨 쉬게 한 원동력일 것이다.

 

[사기]의 구성과 체계


[
사기]는 ‘본기(本紀) 12, ‘표() 10, ‘서() 8, ‘세가(世家) 30, ‘열전(列傳) 70편 등 모두 130, 52 6500자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간행한 표점본(고문에 구두점을 찍은 판본) [사기] 55 5660자로 여기에는 저소손(褚少孫) 등이 보필한 3만여 자가 더 수록되어 원서에 비해 훨씬 많다. 본기(本紀)는 오제(五帝)부터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권력을 행사하던 왕조나 군주들의 사적을 연대순으로 엮어 기록한 것이고, ()는 각 시대의 역사를 연표 및 월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나타냈다. ()는 정치, 사회, 문화, 과학, 천문학 등과 같은 전장 제도(典章制度)를 기록하고 있어서 문화사나 제도사의 성격을 갖는다. 세가(世家)는 제후들의 역사라고 할 수 있으니 제왕보다는 낮은 위치인 봉건 제후들의 나라별 역사 기록이다. 열전(列傳)은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주로 수록했는데, 때로는 계급을 초월하여 기상천외의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기도 하다. 이 다섯 부분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얽히고설킨 인물 관계로 인해 비슷한 내용이 여러 편에 실려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1) 사기 [본기(本紀)]- 제왕들의 역사를 기록하다

 

제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본기는 오제(五帝)로부터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권력을 행하던 왕조나 제왕들의 사적을 연대순으로 엮어 기록한 것이다. ‘본기(本紀)’의 ‘기()’는 기록한다는 의미의 ‘기()’와 같으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한다,” 즉 “사실의 기록”이란 뜻이다. 본기 12편은 역법으로 볼 때 12간지와도 관련되어 있는데, 시간적 순서와 인물의 비중도에 따라 각 편을 안배했다.

 

본기는 대체로 왕조를 기준으로 하여 시대순으로 12편을 배열했다. 그리하여 [오제 본기(五帝本紀)], [하 본기(夏本紀)], [은 본기(殷本紀)], [주 본기(周本紀)]는 상고사(上古史)에 속하고, [진 본기(秦本紀)], [진시황 본기(秦始皇本紀)] [항우 본기(項羽本紀)]는 근고사(近古史)에 속하며, [고조 본기(高祖本紀)], [여 태후 본기(呂太后本紀)], [효문 본기(孝文本紀)], [효경 본기(孝景本紀)], [효무 본기(孝武本紀)]는 금세사(今世史)에 속한다.

 

그 중 한 고조 유방에 앞서 패권을 장악했으나 결국 왕이 되지 못하고 몰락한 항우의 삶을 그린 [항우 본기] [사기]에서 가장 뛰어난 편 중 하나로 손꼽힌다. 특히 항우가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구축한 거록(巨鹿)의 전투, 삶과 죽음의 길목을 사이에 둔 ‘홍문연(鴻門宴)’의 상황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갖가지 생각을 품고서 임기응변하며 일으키는 갈등이 극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구나 천하 통일의 성패가 걸려 있어 무대는 더욱 긴박하다.

 

2) 사기 [()]- 고대사를 도식화하다

 

황제(黃帝) 시대로부터 한 무제 때까지 2500여 년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표는 모두 열 편으로, ‘세표(世表), ‘연표(年表), ‘월표(月表)’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연표이다. ()·상()·주() 삼대와 오제를 다룬 [삼대 세표(三代世表)]는 제왕들의 세계(世系)를 다루었기에 ‘세표’라 한 것이고, 진한 교체기를 다룬 [진초지제 월표(秦楚之際月表)]는 짧은 기간인 데 비해 기록할 사건이 많아 월별로 기록하였기에 ‘월표’라 한 것이다. 2편을 제외한 나머지 8편은 모두 연표이다.

 

[사기]는 인물을 중심으로 역사를 구성해 나가는 기전체라는 역사 서술 체제를 탄생시켰지만 표만은 시간 순으로 정리되어 성격을 달리한다. 이를 두고 당나라 역사학자 유지기(劉知機) [사통(史通)]에서 사마천이 기전체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표를 지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듯 보는 시각에 따라 표가 다른 편의 보충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표는 본기와 세가 및 열전의 기록 범위를 더욱 확장하고 나머지 편들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한다.

 

3) 사기 [()]- 전장 제도의 이론과 역사

 

서는 [사기] 중에서도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는 부분으로 제도, 과학, 민생, 치수 등과 같은 전장 제도(典章制度- 제도와 문물)를 기록하고 있어 제도사의 성격을 갖는다. 서는 모두 여덟 편인데 각기 두 편씩 짝을 이루고 있다. 첫 부분인 [예서(禮書)] [악서(樂書)]는 사마천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정치 제도를 다룬 것이고, [율서(律書)] [역서(曆書)]는 한 무제의 전쟁관을 풍자하고 역법 개혁에 대해 비판한 것으로 전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 현실을 거론한 것이다. [천관서(天官書)] [봉선서(封禪書)]는 사마천이 추구하는 변화와 개혁의 문제를 하늘의 형상을 빌려 짚어 낸 것이고, [하거서(河渠書)] [평준서(平準書)]는 치수와 경제와 같은 민생 문제가 제국의 진정한 기반이 된다는 점을 거론한 것이다. 이런 구분의 근저에는 위로는 사계절과 여덟 방위라는 천하의 기강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옛날과 오늘의 시대적 변용에 맞추고자 한 의도가 담겨 있다.

 

이 중 [천관서]는 완벽한 성관(星官) 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되며 고대 천문학을 연구함에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민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치수 사업을 다룬 [하거서]와 사마천의 경제 사관이 집약되어 있는 [평준서]는 시대와 역사를 꿰뚫는 사마천의 문제의식이 제대로 돋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4) 사기 [세가(世家)- 제후왕의 역사를 기록하다

 

세가는 30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기와 마찬가지로 시대 순서 및 저자의 의도에 따라 배열했다. 각 편을 시대별로 구분해 보면 춘추전국시대 18, 한대(漢代) 12편으로 주로 춘추전국시대에 치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후왕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 세가 30편은 중국 역사에서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권력을 지닌 제후들은 위로는 천자를 모시고, 옆으로는 여러 제후국들과 경쟁하며, 아래로는 신하를 거두며 한 시대를 이끌어 나가는 막중한 위치에 있는 자들로서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국가의 운명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가 속 중심 인물들은 중원에 발호(跋扈- 권세를 부리며 날뜀)했던 수많은 제후들의 표상을 그려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제후는 천자를 무너뜨리고 패주(覇主)가 되길 꿈꾸기도 하고, 또 어떤 제후는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기도 했다. 사마천은 이를 통해 나라를 운영하는 이들이 지녀야 할 역사관, 세계관, 인생관을일가의 말(一家之言)’로 보여줬다. 즉 개인을 통해 역사를 해석하고자 했던 것이다.

 

5) 사기 [열전(列傳)]- 권력과 인간의 관계를 파헤친 진정한 인간학의 보고(寶庫)

 

[사기]의 백미로 손꼽히는 열전은 왕과 제후가 아닌 다른 인물들, 즉 재상, 유림, 혹리(酷吏- 혹독하고 무자비한 관리), 자객, 유협(遊俠- 협객) 등에 관한 기록으로 모두 7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양 각층의 인물들의 삶이나 그들과 관련된 사건들을 서술하고 평가하여 사마천의 역사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열전에서 ‘열()’은 배열이나 서술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전()’은 본래 경전의 주석을 가리키는 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구두로 전해진 것을 의미하며 보통 전기(傳記, biography), 즉 개인의 역사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사마천의 열전은 인물의 전 생애를 나열식으로 보여 주기보다는 그 인물이 단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일화나 특징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심지어 [중니 제자 열전]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인물들은 후반부에 이름만 나열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사마천은 각 인물들의 개별적 유형에 입각하여 당대를 움직인 인물들을 재구성하면서 경서(經書)와 제자서(諸子書)뿐 아니라 민간에서 구전되는 이야기들에서도 자료를 취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또한 열전에 등장할 인물들을 선정할 때는 자신이 입수한 문헌 가운데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도덕적 기여도가 높은 인물들을 먼저 고르고 거기에 평가를 더했다. 선을 행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렇지 않은 자는 화를 입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말기에 전횡했던 환관 조고는 그 권세와 역할이 상당했음에도 따로 편을 구성하지 않고, [이사 열전(李斯列傳)] 등 다른 인물들의 열전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러한 열전을 구성함에 있어 사마천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어떤 선택적 갈등에 직면하게 하고, 그러한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사기 열전]을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산 역사로 인식하게 만든 것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 본위의 역사를 읽게 만든 작가의 각고의 노력 덕분이다.

 

 [참고자료]

네이버 캐스트 - 사기의 탄생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7051

네이버 캐스트 - 사기의 역사관과 평가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7055

네이버 캐스트 - 사기의 구성과 체계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7056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문구

 

이 책을 세 번째 읽으며 새롭게 눈에 띄는 구절들은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문구나 구절 보다는 에피소드 위주로 읽어야 하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을 어떤 사례로 활용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았다. 또한 나의 스승인 구본형은 사람에게서 구하라라는 책에서 관련된 에피소드를 어떤 이야기들과 연결했는지도 눈 여겨 살펴보았다.

 

P86 대체로 유세의 어려움은 내 지식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고, 내 말솜씨로 뜻을 분명히 밝히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며, 또 내가 감히 해야 할 말을 자유롭게 모두 하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다.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라는 상대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내 주장을 그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는 데 있다. 상대방이 높은 명성을 얻고자 하는데 큰 이익을 얻도록 설득한다면 식견이 낮은 속된 사람이라고 가볍게 여기며 멀리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상대방이 큰 이익을 얻고자 하는데 높은 이름을 얻도록 설득한다면 상식이 없고 세상 이체에 어둡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속으로는 큰 이익을 바라면서 겉으로는 높은 이름을 원할 때 높은 이름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멀리할 것이며, 만약 큰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속으로는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꺼릴 것이다. 유세자는 이러한 점을 잘 새겨 두어야 한다.

 

대체로 일이란 은밀히 함으로써 이루어지고 말이 새어 나가면 실패한다. 그러나 유세자가 상대방의 비밀을 들출 뜻이 없었지만 우연히 상대방의 비밀을 말한다면 유세자는 몸이 위태로워진다. 또 군주에게 허물이 있을 때 유세자가 주저 없이 분명하게 바른말을 하고 교묘한 주장을 내세워 그 잘못을 들추어내면 그 몸은 위태로워진다. 유세자가 아직 군주에게 두터운 신임과 은혜도 입지 않았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 버리면 설령 그 주장을 실행하여 공을 세우더라도 군주는 그 덕을 잊을 것이며, 그 주장을 실행하지 않아 실패하게 되면 군주에게 의심을 받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유세자의 몸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또 군주가 좋은 계책을 얻어 자기 공로를 세우고자 하는데 유세자가 그 내막을 알게 되면 그 몸이 위태로워진다. 군주가 겉으로는 어떤 일을 하는 것처럼 꾸미고 실제로는 다른 일을 꾸미고 있을 때 유세자가 이것을 알게 되면 역시 몸이 위태로워진다. 또 군주가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도 하게 하거나 그만두고 싶지 않은 일을 멈추게 하면 또한 몸이 위태로워진다. 그러므로 현명하고 어진 군주에 관해서 말하면 자기를 헐뜯는다는 오해를 받게 되고, 지위가 낮은 인물에 관해서 말하면 군주의 권세를 팔아서 자신을 돋보이려 한다는 오해를 받게 되며, 군주가 총애하는 자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그들을 이용하려는 줄 알려, 군주가 미워하는 자에 관해서 논하면 자기를 떠보려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말을 꾸미지 않고 간결하게 하면 아는 게 없다고 하찮게 여길 것이고,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말이 많다고 할 것이며, 사실에 근거하여 이체에 맞는 의견을 말하면 소심한 겁쟁이라고 말을 다 못한다고 할 것이고, 생각한 바를 거침없이 말하면 버릇없고 오만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유세의 어려운 점이니 마음 속에 새겨 두어야 한다.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 버릴 줄 아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계책을 지혜로운 것으로 여긴다면 지나간 잘못을 꼬집어 궁지로 몰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결정을 용감한 것이라고 여기면 구태여 반대 의견을 내세워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더라도 그 일의 어려움을 들어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유세자는 군주가 꾸민 일과 같은 계책을 가진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칭찬하고, 군주와 같은 행위를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칭찬하며, 군주와 같은 실패를 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며 두둔해 주고, 군주와 같은 실수를 한 자가 있으면 그에게 잘못이 없음을 명확히 설명하고 덮어 주어야 한다. 군주가 유세자의 충성스러운 마음에 반감을 가지지 않고 주장을 내치지 않아야 비로소 유세자는 그 지혜와 언변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군주에게 신임을 얻고 의심 받지 않으며 자신이 아는 바를 다 말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여 오랜 시일이 지나 군주의 총애가 깊어지면 큰 계책을 올려도 의심받지 않고 군주와 서로 다투며 말하여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때 유세자가 국가에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명백히 따져 군주가 공적을 이룰 수 있게 하며, 옳고 그름을 솔직하게 지적해도 영화를 얻게 된다. 이러한 관계가 이어지면 유세는 성공한 것이다.

 

재상 이윤이 요리사가 되고, 백리해가 포로가 된 것은 모두 군주에게 등용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성인이면서도 이처럼 자기 몸을 수고롭게 하고 천박한 일을 겪은 뒤에 세상에 나왔다. 그러므로 재능 있는 인재라도 이러한 일을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송나라에 어떤 부자가 있는데 집의 토담이 비에 무너져 내렸다. 그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담을 다시 쌓지 않으면 도둑이 들 것입니다.”

그 이웃집 주인도 아들과 똑같이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정말 많은 재물을 잃었다. 부자는 자기 아들은 매우 똑똑하다고 칭찬하면서도 이웃 집 주인을 의심했다.

 

예전에 정나라 무공은 호나라를 칠 계획으로 자기 딸을 호나라 군주에게 시집보내고 대신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데 어느 나라를 치면 좋겠소?”

관기사가 대답했다.

호나라를 쳐야 합니다.”

그러자 무공은 이렇게 말했다.

호나라는 형제 같은 나라인데 그대는 어찌 호나라를 치라고 하시오?”

그러고 나서 관기사를 죽였다. 호나라 군주는 이 소식을 듣고 정나라를 친한 친구 나라로 여기고 공격에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나라 군사들이 호나라를 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웃집 사람과 관기사가 한 말을 모두 옳으나 심한 경우는 목숨을 잃고 가벼운 경우는 의심을 받았다. 이는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렵다는 뜻이다.

 

예전에 미자하라는 사람이 위나라 군주에게 총애를 받았다. 위나라 법에 군주의 수레를 타는 자는 월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 뒤에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이 나자, 어떤 사람이 밤에 미자하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미자하는 군주의 명령이라고 속여 군주의 수레를 타고 대궐 문을 빠져나갔다. 군주는 이 일을 듣고 미자하를 어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효자로구나! 어머니를 위해서 다리가 잘리는 형벌까지 감수하다니!”

또 미자하가 군주와 과수원에 갔다가 복숭아를 먹어 보니 맛이 달았다. 미자하가 먹던 봉숭아를 군주에게 바치자 군주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를 끔찍이 위하는구나. 제 입맛을 참고 이토록 나를 생각하다니.”

그 뒤 미자하는 고운 얼굴빛이 사라져 군주의 총애를 잃고 군주에게 죄를 짓게 되었다. 그러자 군주는 이렇게 말했다.

이자는 예전에 나를 속이고 내 수레를 탔고, 또 먹다 남은 복숭아를 내게 먹였다.”

 

미자하의 행위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처음에는 현명하다고 칭찬을 받고 나중에는 죄를 입게 되었다. 그것은 군주가 그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주에게 총애를 받을 때에는 지혜가 군주의 마음에 든다고 하여 더욱 친밀해지고, 군주에게 미움을 받을 때에는 죄를 짓는다고 하여 더욱더 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군주에게 간언하고 유세하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를 살펴본 다음에 유세해야 한다.

 

용이라는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 자 길이의 비늘이 있어 이것을 건드린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구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으면 거의 성공적인 유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è  한비의 <세난>편에 실린 유세의 어려움에 대한 글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유세와 군주는 현대의 직장생활과 상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직장인이라는 한비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상사의 비늘이 무엇이며 자신이 사랑받는가 미워하는가를 살핀 후 조언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서글픈 마음이 든다. 진정으로 마음 속 깊이 존경할 만한 군주는 없단 말인가? 또한 이 글을 읽으며 사람간의 감정 계좌의 중요성이 떠올랐다.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시간을 투자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인상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조언하고 일을 도모해야 성공할 수 있다.

스승 구본형은 그의 책에서 위 세가지 사례(송나라 부자, 이윤, 미자하)를 예로 들면서 먼저 사람들이 내 편이 되어야 그들을 움직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이끌어 내었다.

 

P112 그로부터 십삼 년 뒤에 위나라와 조나라가 함께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는 제나라에 위급함을 호소했다. 제나라에서는 전기를 장군으로 삼아 내보냈다. 전기는 곧장 대량으로 쳐들어갔다. 위나라 장군 방연은 이 소식을 듣고는 한나라 공격을 그만두고 돌아갔으나 제나라 군사는 (방연보다 한 발 앞서) 위나라 국경을 넘어 서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손빈은 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 삼진의 위나라 병사들은 원래 사납고 용감하며 제나라를 무시하고 제나라 군사들을 겁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그 형세를 잘 이용하여 유리하게 이끌어 나갑니다. 병법에 승리를 좇아 백 리 밖까지 급히 달려가는 군대는 상장군을 잃게 되고, 승리를 좇아 오십 리 밖까지 급히 달려가는 군대는 겨우 절반만 목적지에 이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제나라 군대가 위나라 땅에 들어서면 첫날에는 아궁이를 10만 개를 만들게 하고, 다음 날에는 아궁이 5만 개를 만들게 하며, 또 그 다음 날에는 아궁이 3만 개를 만들게 하십시오.”

 

방연은 제나라 군대를 뒤쫓은 지 사흘째가 되자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일찍이 제나라 군사가 겁쟁이인줄 알고 있었지만 우리 땅에 들어온 지 사흘 만에 달아난 병사가 절반을 넘는구나.”

 

그러고는 그의 보병들은 따로 남겨 둔 채 날쌘 정예 부대만을 이끌고 이틀 길을 하루 만에 달려 급히 뒤쫓았다. 손자가 방연의 추격 속도를 헤아려 보니 저력 무렵이면 위나라의 마릉에 이를 것 같았다. 마릉은 길이 좁은 데다가 길 양쪽으로 험한 산이 많아 병사들을 매복시키기에 좋았다. 손빈은 길 옆에 있던 큰 나무의 껍질을 벗겨내고 흰 부분에 이렇게 써 놓았다.

 

방연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고는 제 나라 군사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골라 쇠뇌 1만 개를 준비시켜 길 양쪽에 매복시키고 이렇게 말했다.

밤에 불빛이 보이면 일제히 쏘도록 하라.”

 

방연은 정말 밤이 되어서 껍질을 벗겨 놓은 나무 밑에 이르렀다. 그는 흰 부분에 쓰여 있는 글씨를 발견하고는 불을 밝혀 비추어 보았다. 방연이 그 글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제나라 군사들은 한꺼번에 수많은 쇠뇌를 쏘아댔다. 위나라 군사들은 우왕좌왕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방연은 자신의 지혜가 다하고 싸움에 진 것을 알고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어린애 같은 놈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만들었구나.”

그러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제나라 군대는 승리의 기대를 몰아 위나라 군대를 전멸시키고 위나라 태자 신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손빈은 이 일로 해서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병법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è  손빈의 책략이 놀랍지 않은가? 스승은 이 이야기와 삼국지에서의 제갈공명과 사마의 중달의 전쟁 사례를 연결해 놓았다. 촉의 제갈공명이 사마의와의 전쟁에서 귀환할 때 물러나면서 아궁이 수를 늘리는 방법을 썼다는 것이다. 사마의가 복병이 있을까 의심할 것이라 예견하고 그런 수를 썼고 결국 사마의는 아궁이 수가 늘어난 것을 보고 공명의 복병을 두려워하여 뒤쫓지 못했다 한다. 결국 두 개의 사례에서 끌어내고자 하는 메시지는 역사는 상황에 따라 새롭게 창조되고 활용될 수 있음이었다.

 

P116 한번은 종기가 난 병사가 있는데 오기가 그 병사를 위해 고름을 빨아 주었다. 병사의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는 소리 내어 울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다.

당신 아들은 졸병에 지나지 않는데 장군께서 직접 고름을 빨아 주셨소. 그런데 어찌하여 그토록 슬피 소리 내어 우시오?”

그의 어머니는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에 오공께서 우리 애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 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싸우다 적진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오공이 지금 또 제 자식의 종기를 빨아 주었으니 이 아이도 어느 때 어디서 죽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리 내어 우는 것입니다.”

è  위나라 명장 오기의 사례다. 이 이야기는 서번트 리더십을 보여주는 예로 많이 사용된다.

 

P266 이 무렵 소진은 조나라 임금을 설득하여 합종을 약속받았지만 진나라가 제후들을 공격하여 합종 약속이 깨어져서 서로 등을 돌리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소진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진나라에 힘을 쓸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장의에게 사람을 보내 은밀히 권유하도록 했다.

 

선생께서는 처음에 소진과 사이가 좋았습니다. 지금 소진은 이미 정치를 맡고 있습니다. 선생은 어째서 그를 찾아가 바라는 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부탁하지 않으십니까?”

 

장의는 곧바로 조나라로 가서 이름을 말하고 소진에게 만나 주기를 청하였다. 소진은 문지기에게 그를 들여보내지도 말고 돌아가지도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소진은 장의를 마루 아래에 앉게 하고 하인이나 첩이 먹는 형편없는 음식을 내주었다. 그러고는 그의 잘못을 하나하나 들추며 꾸짖었다.

어찌 자네같이 재능을 가진 자가 이처럼 어렵고 부끄러운 처지가 되었는가? 내 어찌 자네를 왕에게 추천하여 부귀하게 만들 수 없겠나? 그러나 자네는 거두어서 쓸 만한 인물이 아니네.”

 

소진은 장의의 부탁을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장의는 이곳에 올 때에는 옛 친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줄로 생각하였는데 도리어 모욕을 당하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장의는 제후들 가운데 섬길 만한 자는 없지만 진나나라면 조나라를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침내 진나라로 들어갔다.

 

한편 소진은 조금 있다가 자기 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의는 천하에서 현명한 인물이니 나는 그를 뛰어넘을 수 없네. 지금은 운이 좋아 내가 먼저 등용되었을 뿐이지. 진나라의 실권을 잡아 휘두를 사람은 장의뿐일세. 그러나 그는 가난하에 다른 사람에게 등용되지 못했네. 나는 그가 작은 이익을 탐내어 큰 뜻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스러워서 일부러 그를 불러다 모욕을 주어 그의 뜻을 북돋운 것일세. 자네는 나 대신 은밀히 그를 도와주게.”

 

그는 조나라 왕에게 금과 폐백과 수레와 말을 청하였다. 그러고는 사인을 시켜 장의를 몰래 뒤따라가 그와 함께 먹고 자면서 차츰 친해지면 그에게 필요한 수레와 말과 금을 주어서 돕게 하고, 장의가 쓰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 제공해 주되 소진이 시킨 일임은 말하지 않도록 했다. 장의는 마침내 진니라 혜왕을 만날 수 있었다. 혜왕은 그를 객경으로 삼고 함께 제후들을 칠 일을 의논했다.

 

소진의 사인이 장의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가려 하자 장의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의 도움을 받아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소. 이제 그 은혜를 갚으려 하는데 무엇 때문에 떠나려 하오?”

사인이 대답했다.

저는 선생을 모릅니다. 선생을 알아주는 분은 바로 소군이십니다. 소군께서는 진나라가 조나라를 쳐서 합종의 맹약이 깨어질까봐 걱정하고, 선생이라면 진나라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생을 몹시 화나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저를 시켜서 몰래 선생께 필요한 비용을 대 주도록 한 것입니다. 이 모두가 소군의 계책입니다. 이제 선생께서 등용되셨으니 저는 명령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장의는 말했다.

! 이것은 내가 배운 유세술에 있던 것인데 알지 못했구려! 내가 소진만 못한 것이 분명하오. 이렇게 하여 내가 등용되었는데 어찌 조나라를 칠 계책을 꾸미겠소? 나 대신 소 선생에게 소군이 살아 있는 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며, 소군이 있는 한 내가 감히 무엇을 할 수 있겠소.’라고 전해주시오.”

è  합종책을 펼쳤던 소진과 연횡책을 펼쳤던 장의의 이야기다. 이들은 한 스승 아래에서 배웠으나 후에 다른 편에 서게 되었다. 소진의 앞을 내다보는 전략에 감탄을 아낄 수 없다. 진정한 고수는 아마도 소진처럼 하는 자일 것이다. 상대방이 어찌 움직일 것을 미리 예상하고 그 앞에 가서 수를 기다리는 소진의 지략을 보라. 더구나 그는 상대를 감동시켜 꼼짝 못하게 하지 않는가?

 

P378 전영에게는 아들이 사십여 명 있었다. 그중 천한 첩이 낳은 문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5 5일에 태어났다. 처음에 전영은 첩에게 아이를 키우지 말라고 했지만 첩은 몰래 거두어 길렀다. 문이 장성하자 그 어머니는 문의 형제들을 통해 문과 전영을 만나게 했다. 그러자 전영이 문의 어머니에게 고함을 쳤다.

내 너에게 이 아이를 버리라고 했는데 감히 키운 것은 무엇 때문이냐?”

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어머니 대신 말했다.

아버님께서 5월에 태어난 아들을 키우지 못하게 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전영이 말했다.

“5월에 태어난 아들은 키가 지게문 높이만큼 자라면 부모에게 해롭다고 하기 때문이다.

문이 또 물었다.

사람이 태어날 때 그 운명을 하늘로부터 받습니까? 아니면 지게문으로부터 받습니까?”

전영이 대답하지 않자 문이 다시 말했다.

사람의 운명을 하늘에서 받는다면 아버님께서는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그렇지 않고 운명을 지게문에서 받는다면 지게문을 계속 높이면 그만입니다. 어느 누가 그 지게문 높이를 따라 계속 클 수 있겠습니까?”

전영이 말했다.

그만 하거라.”

 

그 뒤 얼마 지나서 문은 한가한 틈을 타 아버지 전영에게 물었다.

아들의 아들을 뭐라고 합니까?”

전영이 대답했다.

손자라고 한다.”

문이 물었다.

손자의 손자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전영이 대답했다.

현손이라고 한다.”

또 문이 물었다.

현손의 현손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전영이 대답했다.

모르겠다.”

문이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정권을 잡고 제나라 재상이 되어 지금까지 위왕, 선왕, 민왕을 섬겼습니다. 그 동안 제나라 땅은 넓어지지 않았는데 아버님 자신은 천만 금이나 되는 부를 쌓았으며, 그러고도 문하에는 어진 사람 한 명 볼 수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장수의 가문에는 반드시 장수가 있고, 재상의 가문에는 반드시 재상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아버님의 후궁들은 아름다운 비단옷을 질질 끌고 다니지만 선비들은 짧은 바지 하나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하인들과 첩들은 쌀밥과 고기를 실컷 먹고도 남아돌지만 선비들은 쌀겨나 술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버님께서는 쌓아둔 것이 남아돌지만 더욱 많이 쌓아 두려고만 할 뿐 나라의 힘이 날로 쇠약해지는 것은 잊고 계십니다. 저는 이 점이 이상합니다.”

 

이 말을 듣고 전영은 문을 높이 사 집안일을 돌보게 하고 빈객 접대하는 일을 맡겼다. 그러자 빈객이 날로 불어나고 문의 이름이 제후들에게 알려졌다. 제후들이 모두 사자를 시켜 설공 전영에게 문을 후계자로 삼도록 청하자 전영이 이를 허락했다. 전영이 죽자 시호를 정곽군이라 했다. 문이 아버지를 이어 설 땅의 영주가 되니, 이 사람이 바로 맹상군이다.

è  전국 사공자 중 한 명인 제나라 맹상군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운명을 타고 났지만 때를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잡아 아버지의 인정뿐 아니라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운명이란 개척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보다.

 

P396 지난날 제나라 왕이 다른 나라의 비방으로 맹상군을 벼슬에서 쫓아내자 모든 빈객이 맹상군을 떠났다. 제나라 왕이 맹상군을 불러 다시 재상 자리에 앉히자 풍환이 빈객들을 맞아들이려고 했다. 빈객들이 이르기 전에 맹상군은 크게 한숨을 토하며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언제나 빈객을 좋아하여 그들을 대접하는 데 실수가 없도록 힘썼소. 빈객이 3000여 명이나 있었음을 선생도 아는 바요. 그러나 빈객들은 내가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보자 하루아침에 나를 버리고 떠나가 나를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소. 이제 선생의 힘으로 다시 재상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다른 빈객들은 또 무슨 낯으로 나를 볼 수 있겠소. 만약 다시 나를 만나려고 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 얼굴에 침을 뱉어 크게 욕을 보이겠소.”

 

풍환은 이 말을 듣자 말고삐를 매어 놓고 수레에서 내려와 절을 했다. 맹상군도 수레에서 내려와 마주 절하고 말했다.

선생께서는 빈객들 대신 사과하는 것이오?”

풍환이 대답했다.

빈객들 대신 사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결과가 있고, 일에는 당연히 바뀌지 않는 도리가 있습니다. 선생은 이런 원리를 아십니까?”

맹상군이 대답했다.

어리석어 선생이 말하는 바를 잘 모르겠소.”

풍환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이 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만물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당신은 혹시 아침 일찍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까? 새벽에는 어깨를 맞대면서 앞다투어 문으로 들어가지만 날이 저물어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팔을 휘저으면서 시장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침을 좋아하고 날이 저무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날이 저물면 마음 속으로 생각했던 물건이 시장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위를 잃자 빈객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고 해서 선비들을 원망하여 일부러 빈객들이 오는 걸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빈객들을 대우하십시오.”

 

맹상군은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삼가 말씀대로 하겠소. 선생의 말씀을 들은 이상 그 가르침을 받들어 따르겠소.”

è  살다보면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되는 일이 많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었어도 내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는 외면을 당하기도 한다. 억울하게 오해를 사기도 하고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끼는 때도 있다. 그런 때에는 풍환의 말을 떠올리면 어떨까 싶다. 사람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가 그러함을 이해한다면 상처 또한 깊지 않을 것이다.

 

P531 회견을 마치고 돌아온 조나라 왕이 상여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고 상경으로 삼아 상여의 지위가 염파보다 높아졌다. 염파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나라 장군이 되어 성의 요새나 들에서 적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인상여는 겨우 혀와 입만을 놀렸을 뿐인데 지위가 나보다 높다. 또 상여는 본래 미천한 출신이니, 나는 부끄러워서 차마 그의 밑에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했다.

내가 상여를 만나면 반드시 모욕을 주리라.”

 

상여는 이 말을 듣고 염파와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상여는 조회가 있을 때마다 늘 병을 핑계삼아 염파와 서열을 다투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출할 때도 멀리 염파가 보이면 수레를 끌어 숨어 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사인이 모두 이렇게 간하였다.

저희가 친척을 떠나와서 나리를 섬기는 까닭은 오직 나리의 높은 뜻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리께서는 염파와 같은 서열에 있습니다. 그러나 나리는 염파가 나리에 대해 나쁜 말을 퍼뜨리고 다니는데도 그가 두려워 피하시며 지나치게 겁을 내십니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도 부끄러워하는 일인데, 하물며 장군이나 재상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못난 저희는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인상여는 그들을 완강하게 말리며 말했다.

그대들은 염 장군과 진나라 왕 가운데 누가 더 무섭소?”

사인들이 대답했다.

염 장군이 진나라 왕에 못 미칩니다.”

상여가 말했다.

저 진니라 왕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궁정에서 꾸짖고 그 신하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소. 내가 아무리 어리석기로 염 장군을 겁내겠소?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만일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어울려서 싸우면 결국은 둘 다 살지 못할 것이오. 내가 염파를 피하는 까닭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하기 때문이오.”

 

염파는 이 말을 듣고 웃옷을 벗고 가시 채찍을 등에 짊어지고 빈객으로서 인상여의 문 앞에 이으러 사죄하며 말했다.

비천한 저는 상경께서 이토록 너그러우신 줄 몰랐습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하고 죽음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벗이 되었다.

è  내가 인상여였다면 어찌했을까? 당장 쫓아가 염파를 물고를 냈을 것이다. 큰 그릇은 그 크기로 작은 그릇을 품을 수 있다. 큰 그릇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할 것이다. 지는 것이 진정으로 이기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공자는 책을 묶은 죽간이 세 번 떨어질 정도로 <주역>을 여러 번 읽었다고 한다. 연구원 1년 차 과정을 밟으면서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을 떠올려보니 <사기열전>이 생각났다. 이 책은 마음에 들어오는 문구보다는 각 에피소드들이 의미하는 바를 마음에 새기면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세 번째 읽는 이번에는 그렇게 읽으려 노력했다. 아울러 스승의 책인 사람에게서 구하라에서는 고전의 각 에피소드를 어떤 메시지와 연결했는지 살펴보았다.

 

이미 서점가에는 고전에서 배우는 경영’ ‘고전 영웅들의 리더십등 고전을 주제로 한 책이 많이 나와있다. 나의 책 주제인 휴식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보려 했으나 춘추전국시대 세상을 호령하려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보니 쉽지 않았다. 다만 노중련과 추양은 권력과 부를 경시하고 명예를 높이 여겼으나 이야기의 비중이 매우 적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권세와 이익을 쫓다 수명을 다한 인간군상을 보면서 부와 명예의 덧없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책은 휴식에 대해서 연구한 후 다시 한 번 읽어 봐야겠다. 그러면 주제와 연결된 것들이 보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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