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12년 9월 3일 11시 20분 등록

사기열전

사마천 지음 / 김원중 옮김 (민음사)

 

 

I. 저자에 대하여 / 사마천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

 

사마천.jpg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 자는 자장(子長)이며 용문(龍門: 현재 韓城縣) 출생이다. 가계가 대대로 왕실의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 집안이었다. 36세 때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유언으로 <사기> 집필을 결심하고 38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되었다. 오랜 기간 사료수집을 거친 끝에 42세부터 <사기> 집필에 들어갔으나 47세 되던 기원전 99년 이릉(李陵)의 흉노족 투항사건 때 이릉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다 사형 판결을 받았다. 사형을 면한 대신 궁형(宮刑)을 받아 목숨을 구한 후, 50세 되던 해 사면을 받아 출옥,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55세 되던 기원전 91년 마침내 130편에 이르는 세계 최초의 기전(紀傳) 역사서인 <사기>를 완성하였다. 기원전 86, 60세로 생을 마감했다.

 

[사기] - 동양 역사서의 근간이자 인간학의 보고(寶庫)

 

동양뿐 아니라 세계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사기(史記)]는 사성(史聖) 사마천(司馬遷)이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유언에 따라 완성한 역사서로, 전설 상의 황제(黃帝) 시대부터 자신이 살았던 한 무제(漢武帝) 때까지 2000여 년을 다루었다. 특히 주나라가 붕괴되면서 등장한 제후국 50개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진()을 비롯한 한()ㆍ위()ㆍ제()ㆍ초()ㆍ연()ㆍ조() 등의 흥망성쇠 과정을 주축으로 한 인물 중심의 통사다. 역사 속에 명멸해 간 제왕과 제후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과 각국의 생존사가 [사기]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춘추전국시대를 정점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온 상고(上古) 시대는 역사상 가장 치열한 생존싸움이 서려 있었고, 그 아래에서 펼쳐진 개개인들의 힘겨운 삶은 [사기] 곳곳에 각인되어 있다. 역사상 많은 지식인들이 이 책을 인간의 본질을 가장 날카롭게 파헤친 인간학의 보고(寶庫)라고 보는 이유이다.

[사기]는 중국 고대사를 사관에 입각해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는 사마천 개인이 보여 준 불세출의 통찰력과 날카로운 안목에 힘입은 바가 크다. [사기]는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정확한 기술과 투철한 역사관으로 동양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는 책일 뿐 아니라, 행간 행간에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학서이자 학문의 전 분야를 아우른 백과전서이다. 이러한 [사기]는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려사]도 기전체로 쓰였다.

[사기]의 쉼 없는 생명력의 원천은 처절한 인간적 고뇌를 통해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데 있다. 사마천이 [사기]의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은, 그것이 깊은 절망의 늪에 빠진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세에서 받은 치욕과 오명을 사후의 언제라도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그였기에 모든 것을 [사기]의 완성에 내걸었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

 

사마천의 출생 시점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한데 대체적으로 한 경제(漢景帝) 중원(中元) 5년인 기원전 145년에 태어났다고 본다. 자는 자장(子長)이며 용문(龍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한성시(韓城市))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한 무제 때 사관인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된 역사가였다. 사마천은 아버지가 받들었던 황로(黃老) 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면서 천문과 지리, [주역] 및 음양의 원리 등을 어깨너머로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오면서 새로운 세계에 더욱 눈을 뜨게 된다.

사마천은 스무 살 때인 한 무제 원삭 3(기원전 126)부터 3년 가까이 전국을 유람하여 오늘날의 호남성, 강서성, 절강성, 강소성, 산동성, 하남성 등을 두루 돌아다녔다. 이때의 유람은 훗날 [사기]의 현장성을 높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돌아오고 나서 20대 후반까지는 경학대사인 공안국(孔安國)에게 고문을 배워 유학에 대한 식견도 쌓았다. 청나라 학자 왕국유(王國維)의 고증에 의하면 바로 무제 원수(元狩) 5(기원전 118), 나이 스물여덟에 사마천은 낭중(郎中)이 되었다. 낭중은 한나라 관료 체계에서 낮은 등급에 속했는데도 한 무제는 순행(巡幸- 임금이 나라 안을 살피기 위해 돌아다님)과 봉선(封禪- 중국의 천자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던 일) 의식에 사마천을 데리고 다녔으니 사마천이 무제의 총애를 상당히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원봉(元封) 원년(기원전 110) 사마천의 나이 서른여섯이 되던 해, 한 무제는 동쪽 태산에 봉선 의식을 거행하러 순행했는데, 그를 수행하던 태사령 사마담이 낙수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그때 사마천은 무제의 사신으로 파촉 이남 지역에 새로운 군() 설치 문제를 처리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위독해진 아버지 사마담은 사마천에게 유언을 남겼으니 그 핵심은 역사를 집필하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사마천은 원봉 3(기원전108)에 아버지의 대를 이어 태사령이 되니 이때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사마천이 태사령이 된 지 5년 후 한 무제는 태초력(太初曆)이라는 새로운 역법을 발표하고 연호를 바꾸고는 봉선 의식에 참여하게 되는데, 대개 이 무렵 그가 [사기] 집필을 시작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가 [사기]를 온전히 혼자 힘으로 저술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아버지 사마담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미 [사기]의 체계를 어느 정도 세워 두었고, 서른일곱 편 정도는 이미 거의 완성 단계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은 본래 [사기]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으니, 이는 태사공이 지은 책이란 의미로서 아버지에 대한 존칭을 드러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었음을 보였다.

 

그런데 사마천은 한 무제의 눈 밖에 나면서 크나큰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천한(天漢) 2(기원전 99) 한나라의 장수 이릉(李陵)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우다가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이씨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한나라 조정의 체면도 깎아내린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마천만은 그의 투항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이릉을 변호하여 결국 무제의 노여움을 사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첫째, 법에 따라 주살될 것, 둘째, 돈 오십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할 것, 셋째, 궁형을 감수할 것. 사마천은 두 번째 방법을 취하고 싶었으나 중인(中人)에 불과했던 그가 그런 거액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결국 마지막 것을 선택했다. 목숨만이라도 부지하여, 역사서를 쓰라는 부친의 유지를 받들기를 택한 것이다.

 

궁형의 처절한 고통을 체험한 사마천은 한 무제에 대한 원망을 [사기] 전편에 스며들게 했고,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을 통해 역사란 결코 왕후장상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후에 무제에 의해 중서령(中書令)을 제수 받아 다시 무제의 곁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때 [사기] 저술 작업은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다. 사마천이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를 쓴 기원전 91년경에는 [사기]가 거의 마무리되었으니,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지 20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이었다.

 

사마천의 가족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많지는 않다. 같은 마을 출신의 아내 양씨(楊氏)가 있다고 전해지며 사마천이 겪어온 길을 함께 동고동락한 현명한 조력자였다고 한다. 아내 이외에 첩도 한 명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마림(司馬臨)과 사마관(司馬觀)이라는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사마천이 죽은 시기도 분불명한데, [사기]를 집필하고 나서 바로 그 해 혹은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라는 명칭의 유래

 

‘사기(史記)’라는 글자는 [사기] [주 본기(周本紀)], [십이 제후 연표(十二諸侯年表)], [천관서(天官書)], [진섭 세가(陳涉世家)], [공자 세가(孔子世家)], [유림 열전(儒林列傳)] 등에 등장한다. 여기서 ‘사기’는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사관의 기록’이라는 의미와 한대의 문장학(文章學)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일컫는 [사기]라는 명칭은 사마천이 붙인 것이 아니다

 

[사기]의 후기 격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사마천이 “무릇 130편에 52 6500자이니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한다.”라고 밝혔듯, 본래 [사기]는 ‘태사공서’ 또는 ‘태사공기(太史公記)’라고 일컬어졌다. 이 ‘태사공기(太史公記)’의 약칭이 바로 ‘사기(史記)’다. ()나라 건안(建安) 연간에 순열(荀悅)이 지은 [한기(漢紀)]라는 책의 권30에 ‘태사공사마천사기(太史公司馬遷史記)’라는 구절이 등장함으로써 정식으로 ‘사기’라는 말이 ‘태사공서’라는 명칭을 대체하게 되었으니, 사마천이 세상을 떠난 지 대략 3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사기]의 집필 과정

 

사기 집필을 가능케 한 사마천의 자료 취재 범위는 어떠하며 그는 그러한 방대한 자료들을 어떻게 얻은 것인가? 사마천이 사료를 수집하여 그의 책에 반영한 방식은 그 이전과 그 이후 대부분의 역사가들의 작업과는 달랐다. 그가 사료를 채집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사마천은 황가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나 문서를 열람했다. 예를 들어 [오제본기]의 ‘태사공왈(太史公曰)’에서는 [춘추(春秋)], [국어(國語)] 등 자신이 본 도서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기] 전체에서 언급된 참고 도서를 통계 내 보면 사마천이 열람한 책은 모두 103종이며, 그 중에서 육경(六經)을 비롯한 서적이 24, 제자백가서가 52, 역사ㆍ지리 및 한나라 왕실의 문서가 20, 문학서가 7종이다. 따라서 사마천이 문헌과 전적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다.

 

② 금석문(金石文)과 문물(文物), 회화(繪畫), 건축 등에서 자료를 찾았다. [진시황 본기]를 보면, ‘태산석각(泰山石刻), ‘낭야석각(琅邪石刻), ‘지부석각(之罘石刻)’ 등의 글을 모두 그대로 수록했다.

 

③ 돌아다니며 방문하거나 실지 조사를 했다. [태사공자서]에도 사마천이 스무 살 남짓부터 남쪽으로 유람하는 길에 올랐다고 적혀 있다. 그는 동서남북으로 전국을 유람하면서 상고 역사에 관한 전설을 수집했고, 서주 건국 경영의 상황을 탐구했으며 학자들이 그에게 전해 준 오류도 바로잡았다. 그는 전국 시대의 이야기, 한나라 초기의 이야기, 옛 전쟁터의 형세, 역사 인물의 삽화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는 일반 백성의 말이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중시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사기]의 모든 편에 걸쳐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오제 본기] [주 본기]를 보면 본인이 실지 답사를 통해 얻은 구체적 정보가 생동감 있게 살아 있다.

 

1.jpg

 

그러나 [사기]에 사료적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많은데, 서술이나 인물 설정에 있어 소설적 색채를 가미했다는 것이다. 대표적 예로 [조 세가(趙世家)]를 들 수 있다. 이 편은 네 명의 군주가 꾼 꿈을 통해 조나라 발전사를 서술하는데, 사마천이 주로 의지했던 [좌전(左傳)]이나 [전국책(戰國策)]에는 없는 내용들도 수록되어 있다. 특히 널리 알려진 ‘조씨고아(趙氏孤兒)’에 관한 대목은 역사적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지만, 이 편의 백미라고 할 만큼 상당한 비중으로 서술되어 있다. [육국 연표(六國年表)] 서문에서 진나라가 분서를 단행하면서 모든 사료들이 소실되었다고 언급한 데서 보이듯, 역사가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소설적 구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태사공왈(太史公曰)’이라는 부분을 보면 사마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나 생각이 상당 부분 개입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론(史論) 체계가 사마천의 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좌전], [국어], [전국책] 등에도 ‘군자왈’이라는 말이 있으며, ‘군자위(君子謂)’라든지 ‘군자이위(君子以爲)’라는 식의 논평이 84가지나 있다. 이러한 형식의 평론은 사론(史論)의 원형임에 틀림없고 사마천이 ‘태사공왈’이라고 한 것도 [좌전]의 ‘군자왈’을 모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태사공왈’에서 사마천은 고대 역사에서 증거를 찾아 제시하거나 사적을 유람하면서 얻어들은 것을 서술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인물을 포폄(褒貶- 옳고 그름이나 선악을 판단하여 결정함)하기도 하고 또는 역사적 사실을 풍자하기도 했다. 이렇듯 역사가의 존재가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태사공왈’은 [사기]를 읽는 진정한 묘미를 주며, 역사가의 일관된 평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책 전체를 혼연일체가 되게 만드는 매개의 구실을 한다.

 

주목할 점은 사마천의 생애와 집필 시기가 한 무제의 통치 시기와 겹쳐 있다는 사실이다. [사기]는 당시로는 현대사라고 말할 수 있는 무제 시대의 사건과 인물을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 무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황제이고 사마천 자신은 그의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 기록은 무제와 그의 치세를 비판적으로 그려내는 일과 연관되었으며, 여기에는 사마천 개인이 무제에 대한 사적인 감정도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시대적 전환의 한 가운데에 처한 역사가 사마천

 

오랜 분열의 춘추전국 시대를 마감시킨 () 제국은 강권통치에 바탕을 둔 급격한 통일책이 실패로 돌아가며 무너졌다. 최후의 승자 한() 고조 유방은 진 제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파란을 피하고 안정에 치중했다. 무위(無爲)를 중시하는 황노(黃老)사상이 전한(前漢) 초기를 특징짓는 이념이었다. 7대 황제 무제(武帝) 유철(劉徹, 재위 기원전 141~87)은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했다. 무제는 흉노를 비롯한 주변 민족들을 공격, 압박하고 서방 교통로를 확보했으며 국내 제후의 권력을 사실상 소멸시키고 민간의 유력자들을 억압하며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이 국가 재정 위기를 초래하자 소금과 철에 대한 전매 제도를 시행하고 증세를 단행함으로써 백성의 부담이 무거워졌다. 무제는 절대적인 황제권을 확립시키면서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꾀하고, 유교를 국가공식이념으로 중시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법가사상에 바탕을 두어 통치했다.

 

무제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등용된 인물들은 지방에서 추천된 인재들 가운데 황제 자신이 선발한 새로운 관료 집단이었다. 그들은 상황에 따른 개인적 판단을 중시하며 법률의 유연한 적용을 지향하던 예전의 통치방식 대신 법률을 엄정하게 적용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러한 정치, 사회, 사상적 변화를 무제 시대의 관료로서 직접 겪은 사마천은 새로운 전환의 시기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면서 먼 과거로부터 무제 시대에 이르는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여러 지역까지 포괄하는 역사, [태사공서(太史公書)]를 서술했다. (후한 시대부터 [사기(史記)]로 불림)

 

사기의 체제, 중국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세계질서관

 

4.jpg

당나라 사마정의 ‘사기색은(索隱), 장수절의 ‘사기정의(正義), 송나라 배인의 ‘사기집해(集解)’가 적혀 있다. 이 세 가지 중요하고 기본적인 주석을 일러 삼가주(三家註)라 한다. <출처:Wikipedia>

 

이른바 기전체(紀傳體)의 통사(通史) [사기] 130, 52 6,500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체제는 지배자 또는 지배 왕조의 일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본기(本紀) 12, 연표와 월표를 구사하며 다양한 사항의 변화를 포착하여 보여주는 표() 10, 정치사가 미처 포괄하지 못한 문화, 제도, 경제, 교통, 제사 등에 걸친 사항을 다룬 서() 8, 제후 왕들과 그에 준한다고 판단한 인물들의(예컨대 ‘공자세가’) 역사와 전기를 다룬 세가(世家) 30, 다양한 분야에 걸친 주목할 만한 개인들의 일대기와 주변 민족들의 역사를(예컨대 ‘조선전’) 다룬 열전(列傳) 70권 등이다. 또한 각 편이 끝날 때마다 ‘태사공왈’로 시작하는 사마천 자신의 짧은 평론이 실려 있다.

[사기]의 체제에서 본기, 세가, 열전은 그 순서대로 하나의 위계적 동심원을 이룬다. 어떤 의미에서 [사기]의 체제는 중국의 황제, 제후 왕, 그리고 개인과 주변 민족으로 구성된,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위계적 세계질서관 그 자체인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 중화(中華) 중심주의적 세계관 또는 화이(華夷) 이분법적 틀을 확립시켰다는 평가도 받는다. 예컨대 그는 흉노에 대해 ‘음습하고 불길한 땅에 사는 호전적인 야만인’으로 지목하며 오랑캐로 규정했다. 이에 관하여 건국 이래 지속적으로 흉노의 압박에 밀리다가 드디어 황제국가의 이념, 즉 하늘 아래 만방이 모두 황제 일인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는 이념을 현실에서 추구할 수 있게 된 무제 시대에 사마천이 살았다는 점도 감안해볼 수 있겠다.

 

치욕 속에서도 굳게 지킨 역사가로서의 사명감

2.jpg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에게 궁형을 내린 한 무제 유철
<
출처: Wikipedia>

 

사마천은 제6대 황제 경제(景帝) 중원(中元) 5(기원전 145. 다른 주장도 있음)에 오늘날의 섬서(陝西) 성 한성(韓城)현에서 태어났다. 10살 무렵 고문(古文)을 깨우치고 10대 초부터 강남, 강북의 여러 지방을 두루 편력한 뒤 산동과 하남을 거쳐 수도 장안에 들어가 낭중에 임명됐다. 이후 황제의 명으로 사천 지방에서 운남의 곤명까지 여행을 하는 등 중국 각지를 돌며 특히 역사의 무대가 되었던 많은 곳을 방문했다. 이러한 경험이 [사기] 편찬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결코 문헌자료만 파고드는 책상물림의 역사가가 아니었다.

 

기원전 110년 무제가 천지(天地)에 제를 거행하는 봉선(封禪) 의식을 위해 태산을 방문했을 때, 천문역법을 관장하고 황실 전적을 관리하는 태사령(太史令) 벼슬에 있던 아버지 사마담은 낙양 땅에 머물다가 봉선 의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를 깊이 한스럽게 여긴 사마담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운남에서 급히 돌아온 사마천은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역사서 편찬의 꿈을 잇고자 결심했다. 3년 상을 치르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황실의 장서를 이용하여 역사서 편찬에 착수했다. 기원전 99년 장군 이릉(李陵)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마천은 이릉의 입장을 변호하다가 투옥되어 이듬해 궁형, 즉 생식기를 잘라내는 형벌을 받았다.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가장 치욕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 사마천은 그러나 역사가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굳건히 하며 편찬 작업에 전념했다.

 

사마천의 역사관, 왕조의 성쇠(盛衰)와 문명의 순환

 

사마천이 역사를 쓸 때 늘 모범으로 의식했던 것은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는 [춘추(春秋)]였다. [춘추]는 공자의 고국 노나라의 연대기에 바탕을 둔 텍스트로, 역사상 사건과 인물에 대한 가치 판단을 미묘하면서도 간결한 필치로 보여준다. 사마천 당시에는 공양학파의 [춘추] 해석이 가장 유력했는데, 공양학파의 대표적 인물 동중서(董仲舒)에게 배운 사마천은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사상을 담으려 했다. 이에 따라 [사기]는 단순히 역사 사실을 나열하는 책이 아니라, 현실 사회에 대한 사마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이다. 엄정한 현실 비판을 통해 사마천은 자신의 이상(理想)을 드러내려 했다.

사마천은 각 왕조의 역사를 최전성기에서 쇠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파악했다. 중도에 일시적인 중흥기가 있기는 하지만 성()에서 쇠()로 하강선을 그린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탁월하고 영웅적인 인물이 나라를 세우고, 우둔하고 무능력한 황제에 의해 쇠락의 길을 걷다가 폭군에 의해 멸망하는 패턴이 하(), (), (), 이른바 삼대(三代) 왕조를 통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왕조 성쇠의 요인이 황제 한 사람의 도덕적 기질과 능력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사마천은 하, , 주의 정치와 문화의 특질을 각각 충(), (), ()으로 파악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퇴락하면서 그 각각이 야(. 조야함), (. 미신), (. 경박함, 허식) 등으로 변했다고 판단했다.

요컨대 하는 충에서 야로, 은은 경에서 귀로, 주는 문에서 시로 변화한 역사라는 점에서 그 내용은 달라도 패턴은 같다고 본 것이다. 결국 전() 왕조의 퇴락하고 부패하는 정치와 문화 상황을 다른 이념으로 대체시킴으로써 극도의 쇠락에서 극도의 번성으로 극적 전환을 이루는 것이 왕조 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관에 따른다면 왕조의 교체는 단순한 왕가(王家)의 교체로만 볼 수는 없으며 정치와 문명의 양식과 본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역사적 요청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이 된다. 사마천은 삼대(三代) 순환설과 함께 문질(文質) 교대설도 언급했다. (문화적 꾸밈, 세련됨)과 질(조야함, 질박함)이라는 상반되는 특질이 교대로 출현한다는 것으로, 문명의 전체적 특성 전환을 말한다는 점에서 삼대 순환설과 궤를 같이한다. 역사를 문명적 순환으로 파악하는 이러한 역사관은 이후 중국의 역사관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하늘의 도(天道)는 과연 옳은가 그른가?, 유교적 세계관과 질서에 대한 의문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정벌하려는 것을 만류하는 간언을 하다가 용납되지 않자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어먹다가 굶어죽었다는 백이와 숙제의 을 기록한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의 심경과 생각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도(天道)는 사사롭지 않고 늘 착한 이와 함께 한다고 하는데,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인가? 그들은 행실이 그토록 고결해도 굶어죽었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진정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안연이라 했지만, 안연은 자주 궁핍하여 굶주리다가 끝내 요절했다. … 극악무도한 도척은 날마다 무고한 이를 죽이고 사람의 간을 꺼내 먹었으며 무리 수천 명을 모아 포악방자하게 천하를 횡행했지만 끝내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 이른바 하늘의 도라고 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是邪非邪)?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적군에 투항한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이라는 치욕을 당한 사마천 자신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이것을 철학적, 윤리학적으로 말하면 이른바 도덕과 행복의 관계 문제에 해당한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행복하고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불행하다면 도덕과 행복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할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늘의 도, 하늘의 이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침묵한다. 인과응보의 내세관을 지닌 불교나, 공과를 심판하는 하늘의 주재자가 있는 도교라면, 도덕적으로 살면서 불행을 당한 이는 내세에서 복락을 누린다고 답할 수 있겠지만,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념에 따른 천도(天道)는 도덕과 행복의 일치 문제에 대한 답이 궁하다. 천도에 대한 사마천의 의문은 유교적 예교 질서 자체에 대한 의문을 함축하고 있다.

 

 

II.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 사기열전

 

해체

 

P15 사마천이 낙양에서 아버지와 만났을 때, 아버지가 그의 손을 잡고서 반드시 역사서를 집필하고 당부한 뒤 세상을 떠났다.

P16 이때는 『사기』의 집필이 대체적으로 시점이었다..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지 20년만이었다. 집필을 완성하고 몇 년 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P17 역사적 사실의 포럼과 직서이다.

P17 사마천이 태사령 이라는 자기 직분에 충실하면서 순수하게 개인의 자격으로 제술에 임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태사령이란 본래 궁중의 예의 제도를 관장하고, 천문 역법에 따라 해가 끝나면 새 역법을 바치며, 나라에 큰 행사가 있으면 길일과 기일忌日을 가려 올리는 직책이다.

P21 『관악열전』에는 사나이의 진정한 우정을 다룬 관포지교管鮑之交 고사가 담겨 있고,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안다는 관중의 정치관 배어 있다. 명재상 안영 안영과 마부 이야기는 안영의 뛰어난 안목을 보여 준다.

 

1. 백이 열전

 

P59 천도天道 대한 의문을 표시하면서 인간사의 불공정한 여러 형태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천도의 기본은 권선징악이지만 사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적지 않아 착한 사람이 재앙을 입고 나쁜 사람이 복을 누리는 게 세상의 이치理致라는 것이다.

 

2. 안 열전

 

P69 공자에게 소인으로 폄하된 관중은 관경중 이라고도 부른다. 출신이 보잘것없던 그 재능을 펼치고 제나라의 뛰어난 재상이 된 것은 전적으로 포숙의 추천 덕분이다. 따라서 사마천은 사람을 알아보는 포숙의 능엵을 부각시카고 있다.

 

3. 노자 한비 열전

 

P83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 라는 말은 정말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노자는 하지 않는 것[無爲]으로써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했다.

P87 유세자가 아직 군주에게 두터운 심임과 은혜도 입지 않았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 발해 버리면 설령 그 주장을 실행하여 공을 세우더라도 군주는 그 덕을 잊을 것이며, 그 주장을 실행하지 않아 실패하게 되면 군주에게 의심을 받을 것이다.

P90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렵다는 뜻이다.

P95 한비자가 진시황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4. 사마 양저 열전

 

5. 손자 오기 열전

 

P108 “약속이 분명하지 않고 명령에 숙달되지 않는 것은 장수의 죄이지만 군령이 이미 정확해졌는데도. 국번에 따르지 않는 것은 사졸들의 죄이다.”

P109 “저는 이미 왕명을 받아 장수가 되었습니다. 장수가 국에 있을 때에는 왕명이라도 받들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P111 “어지럽게 엉킨 실을 풀려고 할 때는 주먹으로 쳐서는 안 도며, 싸우는 사람을 말리려고 할 때도 그사이에 끼어들어 주먹만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급소를 치고 빈틈을 찔러 형세를 불리하게 만들면 저절로 물러날 것입니다.

P117 남보다 윗자리에 있는 이유

P118 “왕의 나이가 어려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신하들을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백성은 그분을 믿지 못하고 있소. 이런 때에 재상 자리를 당신에게 맡기겠소, 아니면 내게 맡기겠소?”

P119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보다 윗자리에 있는 까닭이오.”

P119 “오기는 사람됨 지조가 있고 청렴하며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깁니다. 먼저 나라께서 무후께 오기는 현명한 사람 입니다. 그런데 군주의 나라는 작은 데다 강한 진나라와 국경을 맞다고 있습니다.

P120 그가 내세우는 정치의 핵심은 병력을 강화시켜 합종이나 연횡을 주장하는 유세객들을 물리치는 데에 있었다.

P121 옛말에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꼭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실천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P121 오기는 무후에게 험난한 지형보다 임금의 덕행이 더 낫다고 말했지만, 초나라에서 그의 행실이 각박하고 인정이 없었으므로 목숨을 잃었으니 슬픈 일이구나!”

 

6. 오자서 열전

 

P143 그는 작은 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씻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겼으니 그 뜻이 참으로 슬프구나! 오자서는 장강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위급한 상황에 놓이고, 또 길에 빌어먹을 때오 마음속에 어찌 초나라의 수도 영을 잠깐인들 잊었겠는가? 그는 모든 고초를 견뎌 내어 공명을 이룰 수 있었다. 강인한 대방부가 아니면 어느 누가 어린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백공도 만일 스스로 왕이 되려고만 하지 않았던들 그 공적 또한 이루 말하지 못했으리라 !”

 

7. 중니 제자 열전

 

P147 안회는 끼니를 자주 거를 만큼 가난하였으며, 단돈사는 가르침을 따르고 않고 재문만을 모았지만 세상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했다.

P148 “안회는 배울 때 듣고만 있어 어리석은 것 같지만 물러가 행동하는 것을 보면 내가 가르친 것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안회는 절대로 어리석지 않구나!”

벼슬에 나가게 되면 도를 실행하고 물러나면 조용히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너뿐이구나!”

안회는 스물아홉에 머리가 하얗게 세더니 젊은 나이에 죽었다. 공자는 제사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고 소리 내어 울면서 탄식했다.

P149 “안회라는 자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면 잘못을 거듭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없습니다.

P151 사람의 성격에 따라 조언도 달라야 한다.

P152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하므로 제지한 것이다.”

P160 자공이 물었다.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8. 상군 열전

 

P199 “의심스러워하면서 행도하면 공명이 따르지 않고, 의심스러워하면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자는 원래 세상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말들이 모르는 지혜를 가진 자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오만하다는 비판을 듣게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미 이루어진 일도 모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일이 시작되기 전에 압니다. 백성은 일을 시작할 때에는 더불어 상의할 수 없으나 일이 성공하면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가장 높을 덕을 강구하는 자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큰 공을 이루는 자는 뭇사람과 상의 하지 않습니다.

P200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예법의 통제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법을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법에 얽매입니다.

백 배의 이로움이 없으면 법을 고쳐서는 안 되면, 열 배의 효과가 없으면 그릇을 바꿔서는 안됩니다. 옛것을 본받으면 허물이 없고 예법을 따르면 사악함이 없습니다.”

P201 본업에 힘써 밭을 갈고 길쌈을 하여 곡식이나 비단을 많이 바치는 사람에게는 부역과 부세를 면제한다. 상공업에 종사여 이익만을 주구하는 자와 게을러서 가난한 자는 모두 체포하여 관청의 노비로 삼는다.

P206 사람의 마을을 잃는 자는 망한다.

P207 “돌이켜 자기 마음속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총이라고 하고, 마음속으로 성찰할 수 있는 것을 명이라고 하며, 자신을 낮추면 더욱더 놓아진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산은 순 임금의 도를 따라야 합니다.

P208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겉치레 말은 허황되고, 마음속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되며, 듣기 괴로운 말은 약이 되고, 달콤한 말은 독이 된다.’

P210 『시경』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는 흥하고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 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일은 인심을 얻을 만한 행위가 못됩니다.

P210덕을 믿는 자는 일어나고 힘을 믿는 자는 멸망한다.’

 

9. 소진 열전

 

P218 “새도 깃털이 자라지 않으면 높이 날 수 없고, 우리 나라는 다스리는 이치가 밝혀지지 않았느니 천하를 통일할 수 없소.

P218 천 리 밖의 근심을 버리고 밸 리 안의 근심부터 해결하라

P224 현명한 국주는 밖으로는 적의 강함과 약함을 헤아리고 안으로는 병사의 자질이 뛰어난지 모자란지를 헤아려, 두 군대가 서로 싸울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이기고 자는 것과 죽고 사는 관건이 이미 가슴속에 있게 됩니다. 어찌 평범한 사람들의 말에 가려 어두컴컴한 곡에서 큰일을 결정하겠습니까!

P227 닭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가 되지 말라

P228 싸워 보지도 못하고 땅은 남의 것이 되어 버리게 되지요. 항간의 속담에 차라리 닭 부리가 될 지언정 쇠꼬리가 되지 말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P229 싹이 돋아날 때 베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

P231 ‘처음에 싹을 자르지 않아 무성해지면 어떻게 하나? 터럭같이 작을 때 치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미리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재앙이 이르게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P232 과장된 몸짓 속에 가려진 진실을 보라

P233 왕의 현명함과 제나라의 강대함은 천하에서 그 누구도 당해 낼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왕께서 서쪽으로 향하시어 진나라를 섬기려 합니다. 신은 가만히 왕을 위하여 그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P238 부귀하면 우러러보고 가난하면 업신여긴다.

P238 “계자 소진의 지위가 귀하고 재물이 매우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한 몸도 부귀해지자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면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만인 나에게 낙양성 주변에 밭이 두 이랑만 있었던들 어찌 여섯 나라 재상의 인수를 찰 수 있었을까?”

P239 원수를 버리고 든든한 친구를 얻어라

P242 중신만이 죄를 지는가?

P244 주인은 몹시 화를 내며 그녀에게 채찍을 쉰 대나 쳤습니다. 첨은 일부러 넘어져 술을 엎어서 위로는 주인을 살리고 아래로는 주모를 쫓겨나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매 찾는 것만 것 피하지 못했습니다. 어째 충성스럽고 신실하다고 해서 죄가 없다고 할 수겠습니까? 대체로 신의 허물은 불행하게도 이러한 것과 비슷합니다.”

P252 지혜로운 자는 일을 처리할 때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꿉니다. 제나라 사람들의 자주색 비단은 질이 나쁜 흰색 비단을 물들인 것이지만 그 값은 열 배나 비싸고, 월나라 왕 구천은 일찍이 화계산으로 쫓겨났지만 오리려 강대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제패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 일입니다.

P255 정의로운 행동만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10. 장의 열전

 

P265 작은 이익을 탐내면 큰 뜻을 이루지 못한다.

P267 “장의는 천하에서 현명한 인물이니 나는 그를 뛰어넘을 수 없네. 지금은 운이 좋아 내가 먼저 등용되었을 뿐이지. 진나라의 실권을 잡아 휘두를 사람은 장의뿐일세. 그러나 그는 가난하여 다른 사람에게 등용되지 못했네. 나는 그가 작은 이익을 탐내어 큰 뜻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스러워서 일부러 그를 불러다 모욕을 주어 그의 뜻을 북돋운 것일세. 자네는 나 대신 은밀히 그를 되와주게.”

P268싸울 때는 명분과 실속을 모두 얻어야 한다

P270 신은 나라를 잘살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땅을 넓히는 일에 힘쓰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일에 힘쓰며, 왕업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덕정을 널리 펼치는 일에 힘쓴다고 들었습니다. 이 세 가지 조건만 갖추어지면 왕업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P272 깃털도 쌓으면 배를 가라앉힐 수 있다.

P275 신이 듣건대 깃털이 많이 쌓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이 부지며, 어려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이고, 여러 사람의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고 합니다. 일입니다.

P285 “전날 왕께서는 장의에게 속으셨습니다. 신은 장의가 오면 왕께서 그를 삻아 죽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차마 그를 죽일 수는 없다 하더라도 또다시 그이 간사한 말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이에 희왕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장의를 용서하고 검중을 얻는 것은 큰 이득이오. 한번 약속한 이상 그것을 어겨서는 안되어.”

그리하여 마침내 장의를 용서하고 진나라와 친교를 맺었다.

P294 연나라 왕이 장의의 말에 따르기로 하여 장의는 이 일을 알리기 위해 진나라로 갔다. 그가 미처 함양에 이르기 전에 진나라에서 혜왕이 죽고 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P295 진나라 무왕 원년, 신하들이 밤낮으로 장의를 헐뜯는 데다 제나라에서도 사신을 보내 장의의 신의 없는 행위를 꾸짖었다.

P297 장의는 위나라 재상이 된 지 일 년 만에 위나라에서 죽었다.

 

11. 저리자 · 감무 열전

 

P309 진나라 혜왕이 죽고 태자 무왕이 즉위했다. 무왕은 장의 위장을 내쫓고 저리자와 감무를 좌승상과 우승상으로 삼았다. 진나라는 강무를 시켜 한나라를 쳐서 의양을 빼앗고, 저리자를 시켜 저차 백 대를 이끌고 주나라로 들어가게 했다.

P310 진나라 무왕이 죽고 소와이 왕위에 오르자, 저리자는 더욱 존경받는 인문이 되었다. 소왕 원년에 저리자는 장군이 되어 위나라의 포읍을 치려고 했다 포읍 태수는 겁에 질려 호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호연은 포읍을 지켜 주려고 저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이 포읍을 치는 것은 진나라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위나라를 위해서입니까? 위나라를 위해서라면 좋습니다만 진나라를 위해서라면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저 위나라로 존립할 수 있는 것은 포읍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포읍을 친다면 포읍은 재양을 피하기 위해 위나라에 귀속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위나라는 틀림없이 사기를 잃고 위나라 따를 것입니다. 지나날 위나라가 서하의 바깥쪽 땅을 진나라에게 빼앗기고 예태껏 되찾지 못한 것은 군사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P312 “내가 죽으면 백 년 뒤에 이곳에 천자의 궁궐의 들어서서 내 무덤을 둘러쌀 것이다.”

P323 “그건 안 됩니다. 감무의 스승인 사거는 하채의 문지기로 크게는 임금을 섬기지 못하고 작게는 가정도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럭저럭 되는대로 사는 미천한 신분이면서 청렴하지 않은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습니다. 감무는 그런 인물을 묵묵히 따르고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혜왕, 명철한 무왕, 변론에 뛰어난 장의까지도 잘 섬기고 여러 관직을 맡으면서도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감무는 참으로 현명한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감무를 진나라 재상으로 추천해서는 안 됩니다. 진나라에 현명한 재상이 있으면 초나라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P328 감무는 하채의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몸을 일으켜 그 이름을 제후들 사이에 떨치고 강한 제나라와 초나라에서 중용되었다. 감라는 나이가 어리지만 한 가지 기묘한 계책을 생각해내어 후세에 이름이 일컬어지게 되었다.

 

12. 양후 열전

 

P333 양후 위염은 진나라 소왕의 어머니 선태후의 동생이다. 그 조상은 초나라 사람으로 성은미씨다.

p338 초나라와 조나라는 위나라가 자기들 보다 먼저 진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이로써 합종 약속은 깨질 것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을 골라 하십시오. 당신이 땅을 얻기 위해 반드시 병력을 충동시킬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옛 진나라 땅을 손에 넣고 싶으면 진나라 군사가 공격하지 않아도 위나라는 반드시 강과 안읍을 내 주고, 도로 통하는 남북의 두 길을 열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전의 송나라 땅을 거의 차지하면 위나라는 반드시 선보를 내줄 것입니다. 진나라는 군사를 하나도 잃지 않고 천하를 제어할 수 있으니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며, 무슨 일을 한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13 백기 · 왕전 열전

 

P345 마음을 잘 바꾸는 자는 난을 일으킨다.

P39 하늘에 죄를 지으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14. 맹자 · 순경 열전

 

태사공은 말한다.

P363 “나는 일찍이 맹자 라는 책을 읽다가 양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구절에 이르러 책 읽기를 멈추고, ! 이익이란 진실로 혼란의 시작이로구나.’라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자가 이익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그 혼란의 근본 원인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한을 사는 일이 많다.’ 라고 했던 것이다. 천자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익을 좋아하는 데서 생긴 폐해가 어찌 다르겠는가?”

 

15. 맹상군 열전

 

P381~382 “나무인형이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너는 허물어질 거야.’라고 말하자 흙 인형이 ‘나는 원래 흙에서 태어났으니 허물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지만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너는 어디까지 떠내려가야 할지 몰라.’라고 대답했습니다.

P397~398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은 만물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당신은 혹시 아침 일찍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 적이 없습니까? 새벽에는 어깨를 맞대면서 앞다투어 문으로 들어가지만, 날이 저물어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팔을 휘저으면서 시장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침을 좋아하고 날이 저무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날이 저물면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물건이 시장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위를 잃자 빈객들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고 해서 선비들을 원망하여 일부러 빈객들이 오는 것을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빈객들을 대우하십시오.”

 

16. 평원군 · 우경 열전

 

p421 “신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작은 나라와 큰 나라가 함께 일을 하면 이로운 것이 있을 때에는 큰 나라가 그 복을 받고, 일이 잘못 되면 작은 나라가 그 화를 입게 된다.’ 지금 위나라는 작은 나라인데 스스로 화를 부르고 있고, 왕은 큰 나라인데 복을 사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은 왕께서도 잘못하고 위나라도 잘못하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합종하는 것이 낫습니다.”

p421 “평원군은 새가 하늘 높이 날듯이 혼탁한 세상에서 벗어나 재능과 지혜가 있는 훌륭한 공자였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큰 이치를 알지는 못했다. 속담에 이익에 사로잡히면 지혜가 흐려진다.’라고 하였다.

 

17. 위공자 열전

 

P436 잊으면 안 되는 일과 잊어야 할 일

P436 세상일에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고, 또 잊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또 위나라 왕의 명령이라 속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한 것은 조나라 입장에서 공을 세운 것이지만 위나라 입장에서 보면 틀림없이 충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스스로 교만해져 공로가 있다고 하시니, 이는 공자로서 취할 태도가 압니다.

 

18. 춘신군 열전

 

P445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다 지치면 개도 못 이긴다.

P446 “사물은 한쪽 끝까지 가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겨울과 여름은 서로 바뀌게 마련이다. 쌓인 것이 극에 이르면 위태롭다. 바둑돌을 쌓아 올리면 무너지게 마련이다.” 라고 들었습니다.

P461 ‘마땅히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것은 춘신군이 주영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두고 한 말일까?“

 

19. 범저 · 채택 열전

 

P465 군주가 의심하면 잠시 떠나 때를 기다려야 한다

P448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벗을 사귀는 것은 천한 몸이 되었을 때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 때문이고, 부유할 때 벗을 사귀는 것은 가난해졌을 때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P498 옛말에해가 중천에 오르면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습니다. 만물이 왕성해지면 곧 바로 쇠약해져 떨어지는 것은 천지의 변하지 않는 이치입니다.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 굽히고 펴는 것이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은 성인의 영원한 도리입니다. 그래서 나라에 도가 시행되면 나아가서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시행되지 않으면 물러나 숨어야 합니다. 성인이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면 덕이 있는 자를 만나기에 이롭다.’ 라고 말했고, ‘정당하게 얻지 않은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신은 원한을 이미 다 갚았습니다. 마음속으로 하고 싶던 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위해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P502 제가 듣건대, ‘물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 길흉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옛글에성공했으면 그 자리에 오래 있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저 네 사람이 화를 입었는데, 당신은 어찌 그것을 이어받으려고 하십니까?

P503 욕심이 그칠 줄 모르면 하고자 하는 바를 잃고, 가지고 있으면서 만족할 줄 모르면 가지고 있던 것마저 잃는다.’

 

20. 악의 열전

 

P515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가 공을 세우면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역사에 이름이 남고, 앞을 내다보는 밝은 눈을 가진 선비가 공명을 이루면 그것을 손상시키지 않기 때문에 후세까지 칭송을 받는다.

P516 “옛 군자는 사람과 교제를 끊더라도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기 결백을 밝히려고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

P517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떠나라

 

21. 염파인상여 열전

 

p526 ‘일반 백성의 사귐에도 오히려 서로 속이지 않거늘, 하물며 큰 나라끼리 사귀는 데 그럴 수 있겠는가? 게다가 화씨벽 하나 때문에 강한 진나라의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p545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돌려받고 기둥을 노려볼 때라든지 진나라 왕 주위에 있던 신하들을 꾸짖을 때 그 형세는 기껏해야 죽음뿐이었다. 선비 중에 어떤 이는 겁을 집어먹고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상여가 한 번 용기를 내자 그 위세가 상대편 나라까지 떨쳤고, 물러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겸손히 양보하니 그 이름은 태산처럼 무거워졌다. 인상여는 지혜와 용기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22. 전단 열전

 

P554 “용병用兵의 도는 정공법으로 싸우고, 기이한 계책으로 [허를 찔러] 이기는 것이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기이한 계책을 무궁무진하게 낸다. 기이한 계책과 정공법이 어우러져 쓰이는 것은 마치 끝이 없는 둥근 고리 같다. 대체로 기이한 병법은 처음에는 처녀처럼 약하게 보여 적군이 [얕잡아보고] 문을 열어두게 하지만, 나중에는 그물을 벗어난 토끼처럼 날래져서 적이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다. 이는 전단의 용병법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23. 노중련 · 추양 열전

 

P556 “천하에서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덜어주고 재앙을 없애주며 다툼을 풀어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이것은 장사꾼의 행위입니다.

P567~568 지혜로운 사람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용감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장군은 지금 사느냐 죽느냐, 영예냐 오욕이냐, 부귀냐 천함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부디 깊이 생각하여 속된 사람들처럼 처신하지 마십시오.

P569 작은 예절에 얽매인 사람은 영화로운 이름을 이룰 수 없고, 작은 치욕을 마다하는 사람은 큰 공을 세울 수 없다고 합니다.

 

24. 굴원 · 가생 열전

 

P586 ‘이소걱정스러운 일을 만나다.’ 라는 뜻이다 뭇릇 하늘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 본다. 그러므로 힘들고 곤궁할 때 하늘을 찾지 않는 이가 없다.

P590 『역경』에 우물물이 흐렸다가 맑아져도 마시지 않으니 내 마음이 슬프구나. 이 물을 길어 갈 수는 있다. 왕이 현명하면 모든 사람이 그 복을 받는다.” 라고 하였다. 왕이 현명하지 않는데 어찌 복이 있겠는가!

P605 흐름을 타면 흘러가고

모랫벌에 닿으면 멈춘다네.

몸을 자유롭게 천명에 맡기고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네.

흐름을 타면 흘러가고

모랫벌에 닿으면 멈춘다네.

몸을 자유롭게 천명에 맡기고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네.

 

25. 여불위 열전

 

P615 “제가 듣건대 아름다운 얼굴로써 남을 섬기는 자는 아름다운 얼굴이 스러지면 사랑도 시든다고 합니다.”

 

26. 자객열전

 

p631 “예물을 바치고 남의 신화가 되어 섬기면서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두 마음을 품고 자기 주인을 섬기는 것일세.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매우 어렵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까닭은 천하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려는 것일세.

p634 “제가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여 시장바닥에서 백정 노릇을 하는 까닭은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입니다. 어머니께서 세상에 살아 계신 동안에는 제 몸을 다른 사람에게 바칠 수 없습니다.

p642 “대체로 위태로운 일을 하면서 안전함을 찾고 재앙을 만들면서 복을 구하려고 한다면, 계책은 얕아지고 원망만 깊어질 뿐입니다.

 

27. 이사열전

 

p660 이사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진나라에 큰 공을 세웠을지언정 자신은 오형五刑을 받아 죽었고, 집안사람들까지 목숨을 보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의 모습은 동정을 받을 수 없다. 그의 개인적인 비극보다 역사적 비극이 더 참혹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이사가 진나라가 여섯 나라를 통일하고 제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인정하면서도, 그와 조고의 음모를 비롯하여 2세를 도와 가혹한 정책을 펼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것을 적어 꾸짖음으로써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었다.

P661 사람이 잘나고 못남은 자기 위치에 달려있다.

P663 등용했으면 내치지 말라

 

28. 몽염 열전

 

P710 “내 죄는 죽어 마땅하다. 임조에서 요동까지 장성을 만여 리나 쌓았으니, 이 공사 도중에 어찌 지맥을 끊어 놓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 죄로구나.”

 

29. 장이 · 진여 열전

 

30. 위표 · 팽월 열전

 

31. 경포 열전

 

P763 천하를 다스리는 데 어찌 썩은 선비를 쓰랴

 

32. 회음후 열전

 

p773 한신은 진나라가 말기 농민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젊을 때는 굶기를 일삼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는 진나라 말기에 먼저 항우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중용되지 못하고, 우방에게로 달아났으나 여전희 중용되지 못하다가 소화의 추천을 통해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유방은 초나라와 팽성에서 싸웠다가 져서 달아났지만, 뒤에 한신의 공으로 크게 승리를 거둔다. 그 뒤 한신은 군사들을 이끌고 북방 지역에서 두 번째 전쟁을 하여 위, , , 제나라를 모두 평정함으로써 향우에 대한 전략적 포위망을 구축하고 결국 해하에서 그를 섬별한다.

한신의 공이 지나치게 높아 군주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자 유방은 그를 꺼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신은 시대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유방에게 자신을 제나라 왕으로 책봉해 달라고 요구하여 화를 부른다. 항우가 죽은 뒤 한신은 초나라 왕으로 옮겨 갔다가 죄를 지어 회음후로 강등되고, 결국 반역하려다 멸족의 화를 당하였다.

p779 “왕께서는 본래 오만하여 예를 차리지 않으십니다. 지금 대장을 임명하는데 어린아이를 부르는 것처럼 하시니, 이것이 바로 한신을 떠나게 한 까닭입니다. 왕께서 그를 대장으로 삼으시려면 좋은 날을 택하여 재계하고 단장을 설치하여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p780 천하는 마음을 얻는 자의 몫이다

p788 “병법에 산과 언덕을 오른쪽으로 하여 등지고 물과 못을 앞으로 하여 왼쪽에 두라.’ 라고 했는데, 오늘 장꾼께서 저희에게 도리어 물을 등지고 진을 치게 하면서 조나라를 무찌른 뒤 다 같이 모여 실컷 먹자.’ 라고 하시기에 저희는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마침내 이겼습니다. 이것은 무슨 전술입니까?”

병법에는 죽을 곳에 빠뜨린 뒤라야 비로소 살게 할 수 있고, 망할 곳에 둔 뒤라야 비로소 멸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않소? 또 내가 평소부터 사대부를 길들여 따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시장 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몰아다가 싸우게 한 것과 같으니, 그 형세가 죽을 땅에 두어 저마다 자신을 위하여 싸우게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곳을 준다면 모두 달아날 텐데 어떻게 이들을 쑬 수 있겠소?”

P789 "제가 듣건대, ‘싸움에서 진 장수는 무용에 대해서 말할 수 없고, 멸망한 나라의 대부는 나라를 존속시키는 일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저는 싸움에서 지고 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포로에 불과한데, 어떻게 그러한 큰 일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

P789 “제가 듣기로지혜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실수가 있으며,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얻는 것이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성인은 미친 사람의 말도 가려서 듣는다라고 했습니다. 제 계책이 반드시 쓸 만하지는 않을지라도 성의를 다하겠습니다.

p790 군사를 잘 쓰는 사람은 이쪽의 단점을 가지고 적의 장점을 치지 않고, 이쪽의 장점을 가지고 적의 단점을 칩니다.

P801 자기 수레로 나를 태워주고, 자기 옷을 나에게 입혀 주며, 자기가 먹을 것을 나에게 먹여 주었습니다. 내가 듣건대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남의 우환을 제 몸에 지고, 남의 옷을 입은 자는 남의 근심을 제 마음에 품으며, 남의 것을 먹으면 그의 일을 위하여 죽는.’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이익을 바라고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P801 우환이라는 것은 욕심이 많은 데서 생기고,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p806 정말 사람들의 말에 ‘날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 죽이고,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좋은 활은 치워 버린다. 적을 깨뜨리고 나면 지모 있는 신화는 죽게 된다.’ 라고 하더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내가 삶겨 죽는 것은 당연하구나!

 

33. 한신 · 노관 열전

 

p831한신과 노관은 본래 대대로 덕을 쌓고 착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순간의 권모술수로 벼슬을 얻고 간사함으로 공을 이루었다.

p831 진희는 그 재앙이 자신에게 미칠까 봐 두려워 간사한 자의 말을 듣고 마침내 무도한 짓에 빠져들었다. , 슬프다! 대체로 계책의 설익음과 무르익음과 성패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깊구나!”

 

34. 전담 열전

 

P837 “독사에게 손을 물리면 손을 자리고 발을 물리면 발을 자랍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자르지 않으면 몸뚱이마저 해치기 때문입니다.

 

35. · · · 관열전

 

 

III. 내가 저자라면

 

사마천의 자서전인 태사공자서에 의하면, 그의 족보는 오제(五帝) 가운데 한 사람인 전욱(황제의 손자) 시대가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마천의 조상은 전욱 시대에서부터 하상(夏商:하나라와 상나라)

시대까지의 중여씨인데, 선조들의 주요 직책은 천문과 지리를 주관하는 것이었다.

주나라 시대에 이르러 정백국(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북쪽)에 봉해졌던 중여씨의 후손인 휴보가

군사와 군수를 관장하는 사마라는 관직을 맡았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 사마씨를 성()으로

삼았다. 주나라 선왕때 사마씨는 역사 기록 업무를 관장하였고, 집안 대대로 사관의 직책을 계승

했다. 주나라 혜왕과 양왕 사이에 왕실의 내란이 일어난 후 사마씨는 여러 제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사마천의 9대조인 사마조때에 문을 버리고 무를 따르면서부터 사마씨 집안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때에 방향을 틀어 무를 버리고 문을 따르기 시작했고, 선조의

옛 직업에 다시 종사하며 학문을 숭상했던 가문의 전통을 점차 높여갔다.

사마담은 한나라 무제때 태사령에 임명되어 한나라 왕조의 중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사가로서의 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사마천은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며, 10세에 이르러 좌전  , ’국어등의 고전을 암송하기 시작 했다. 그 후 사마담은 사마천을 위해 명망 높은 유학자인 공안국과 동중서를 아들의 스승으로 청했다.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학풍의 영향, 그리고 두 스승의 마음을 다한 가르침, 더더구나 사마천 개인의 학문을 좋아하는 천성으로 인해 사마천은 20세에 이르러 재능이 철철 넘치는 젊은 학자가 되었다. 20살의 사마천은 장안으로 떠나 유학길로 오른다. 이때는 사마천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학술 답사 여행의 시기이기도 했다.

 

한나라 무제 원봉 원년, 무제는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장안을 출발 했지만, 사마담은 이 일에 초대 받지 못한 것인 화근이 되어 건강을 잃게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임종시

사마천에게 태사령으로서의 사명을 다했던 선조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고, 천추의 길이 빛날 통사를 집필하도록 당부 했다. 이 일로부터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 통사 집필에 진력하게 된다. 사마천은 사기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한지 4년만에 어려움에 처하고 말았다. ‘이릉의 화에 연루되 남자에게는 최대의 치욕인 궁형이라는 형벌을 선택한다.

 

기원전 96, 사마천은 50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이보다 앞선 같은 해 봄, 무제는 공손오의 거짓보고로 사마천을 궁형에 처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공손오를 처형했다. 또한 사마천을 중서령에 임명해 자신의 공평함을 드러내보였다. 결국 사마천은 개인적인 비통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기저술에 온몸을 바치기로 결심했고, 마침내 사가의

절창(絶唱)’을 토했다. 이는 궁형의 치욕을 씻어낸 자기 승화의 발로였고,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을 따른 효의 극치였다.

 

사기의 사상과 역사관을 들여다 보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했다. 하늘과 인간의 관계는 사마천이 살던 서한 초기의 당대에는 가장 근본적인 철학의 문제였다. 그는 천명은 단지 표면적인 문장에만 드러냈고, 인간이야말로 역사의 주체라는 것을 강조하면 사기에 반영했다. 그가 표현한 천인감응은 군주를 경계하면서 과거를 일신하고,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여 덕을 쌓고, 정치를 혁신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또한 그는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통찰했다. 사마천이 살던 시대는 중국 사회의 봉건주의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고 공고화된 시기였다. 중앙집권 제도는 당시의 가장 선진적인 제도 였는데, 그 이론적 기초가 대일통(大一統) 역사관이다. 전국 시대의 사상가인 추연(음양오행가의 시조)과 동중서는 모두 이 문제에 대하여 명백하고 논리적으로 규명했다. 사마천은 그들의 대일통 이론을 계승하는 동시에 계통적으로 발전시켜 독특한 대일통역사관을 형성하여 후세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사마천은 인간사와 역사적 사고를 통해 순환론의 구조를 뛰어넘어, 역사 발전의 본질은 변함()’

에 있고 계속해서 진화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사마천은 역사 변혁과 발전은 영웅들뿐만 아니라 매우 평범한 인물들도 그것을 추동하며, 국가의 흥망은 민심의 향배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치국(治國)에 대해서 사마천은 덕치를 숭상하고 폭정을 반대하며, 민심을 자연스럽게 따르는 무위의 정치를 찬양했다. 또한 전쟁과 병법 이론을 계통적으로 고찰했다.

전쟁을 치국평천하에 근거한 고도의 정치 행위로 보았고, 역사상의 전쟁 경험과 병법 이론을 계통적으로 고찰했다. 사마천은 도덕을 중시 하면서도 또한 그것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지 않았다.

공적과 과실에 대한 시비를 중시하면서도 그것의 성패와 명성, 지위로 영웅을 논하지 않았다.

인재에 관해서 사마천은 인재야 말로 절차탁마(切磋琢魔)속에서 태어나고, 객관적인 조건을 중시하면서도 스스로 분발해 입신하려는 주관적인 노력을 더욱 중시 했다.

 

이밖에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사마천의 경제관과 민족사상이다. 그는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는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보며, 생산 영역에서는 사회적인 분업을 고찰하고 치생의 술()’을 포괄적으로 다루었다. 사람들이 부를 쌓는 것을 격려하고, 모든 사람들이 부를 쌓을 수

있다고 단언했다. 사마천은 각 민족의 역사 발전은 종국적으로 대일통을 향한다고 논증했다.

 

종합정리하면, 사마천의 핵심 사상은 사기저술을 통해 하늘과 인간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지언을 이룬다는 소망을 실현했다. ‘사기는 일가의 언어로서 천년만년 후대에 빛나고 있다.

IP *.41.190.19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